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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지백천년 -至白千年

 

<광고>

 

생사탄(生死灘)-!

절대자(絶對者)의 꿈을 빌어 탄생한 불생불사(不生不死)의 환계(幻界)!

생사탄에 초대된 인간은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능력을 얻는다.

인간을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어주는 구장심조공(九贓心照功)은 아홉가지 신물(九大神物)에 나뉘어 생사탄 밖 세상으로 던져지고...

어이없는 인연으로 구대신물중 가장 중요한 묵심환(墨心環)을 얻은 어린 소년은 생사탄으로 불려가 불사의 힘을 얻는다.

그러나 다시 세상으로 나와 숱한 우여(迂餘)와 곡절(曲折)을 겪은 후에야 그는 알게 된다.

자신이 세상에서 꿈을 꾼 것이 아니고 꿈속에서 세상을 겪었음을...!

 

 

 

 

서문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신선(神仙)이다.

무릇 신선이란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꿈이요 희망이며 도피처이기도 하고 최후의 권력이기도 하다.

 

--- 신선은 영원히 죽지 않고 구름을 타고 다니며 온갖 술법을 다 사용할 수 있다.

때로는 월궁의 항아를 불러 술시중을 들게 하기도 하고, 때로는 젓가락을 던져 만리 밖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으며, 옥황상제의 천도 복숭아를 마음대로 따먹기도 하고 용궁에 가서 용왕과 바둑을 두기도 한다.

 

대체로 사람들이 신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신선이 만약 이런 것이라면 속세를 벗어나 청담(淸談)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속을 쾌락(快樂)을 영원히 맛볼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신선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인지 역대의 황제들도 신선이 되려고 천만금을 썼는가 하면 평생을 산중에서 말똥으로 단약(丹藥)을 구워 신선이 되려한 방사(方士)와 술사(術士)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글을 읽는 자들 중에서 한 두 번쯤 기문방서(奇門方書)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자 없고, 검을 휘두르는 자 가운데 불로불사를 소원하지 않은 자가 또한 없었다.

이따금 책에 전하기로는 모처의 모모가 약을 먹고 신선이 되었는데 개와 닭도 함께 신선이 되어 승천했다는 것도 있고,

또 어떤 책에는 무덤 속에 떨어져 웅크리고 있던 계집아이가 호흡의 비기를 터득하여 마침내 신선이 되어 대낮에 승천했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누구누구가 살았을 때 행동거지가 범상치 않았는데 죽고 난 후에 무덤을 파보니 시체는 없고 지팡이만 남아있어 시해선(尸解仙)이 된 줄 알았다는 말 하며,

심지어는 어떤 필부가 배를 탔다가 조난하여 이름 모를 섬에 도착했는데 그곳이 바로 신선들이 사는 섬이었으며 공자가 일흔 두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유유자적하더라는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살아있는 인간이기에 언젠가 죽는 것은 당연하지만, 살아있기 때문에 죽음이란 더욱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살아온 세월이 길면 긴 만큼, 세상에 자기의 흔적이 많으면 많은 만큼 미련도 많아지니 당연히 두려움도 많아진다.

신선은 죽음의 저편에 있다.

신선이 되어 누리는 쾌락이 좋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신선이 되고 싶어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되었다는 소문은 있어도 정작 신선은 드물고, 바라는 이는 많으나 그만큼 헛되이 정열과 젊음을 바치고 죽는이가 많다.

그것이 바로 신선이다.

 

그러나, 불로불사의 신선이 되는 것이 과연 그처럼 어려운 일일까?

신선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무림 중에서도 실수로 불로불사가 되어버린 자들이 있다.

그들에게 불로불사는 능력(能力)이 아니라 주어진 하나의 상태(狀態)에 불과하다. 사람들에게 언젠가는 죽을 것이면서 살고 있다는 상태가 계속 되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불로불사가 인간을 뛰어넘은 신비한 경지가 아니라 인간이 비정상적인 상태에 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며 시작된다.

별 것 아니다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황당하게 펼쳐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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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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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석을 찾아서

 

 

 

[내가 이번에도 죽지 않았구나!]

이윽고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벌떡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때는 이미 자기가 토해낸 선혈과 호로가 있을 뿐 이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생각을 굴리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를 깨닫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위! 개돼지 같은 놈! 네가 욕심에 눈이 어두워 나를 때려 피를 토하게 했으렸다? 후일 네놈에게서 이 빚을 이자까지 합쳐 받아내고 말겠다.]

막비강은 금색 호로를 집어 허리춤에 매었다.

(이위 그 흉악한 놈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르니 빨리 여기를 떠나자!)

그는 서둘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바닥에 쓰러진 네 구의 시체와 서로 팔이 얽혀 마주 선 채 죽은 두 노인이 생각났다.

(은혜를 입었으니 그냥 갈 수는 없지!)

그는 다시 동굴이 있는 절벽 앞으로 돌아갔다.

현장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니 두 노인은 서로의 팔을 부여잡은 채 서 있을 뿐 몸에는 아무런 상처나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분들은 대체 누구일까?)

막비강은 호기심이 동하여 두 노인의 몸을 뒤져보았다.

먼저 염라철장의 허리춤에 가죽끈으로 매달린 큼직한 쇳조각 하나가 눈에 띠었다.

그것은 사람의 손바닥 모양으로 정교하게 주조된 강장(鋼掌)이었는데 상당히 컸다. 보통 어른 손바닥의 두 배정도 넓이에 길이도 세 배 가까이 된다. 또한 다섯 손가락 끝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손톱이 달려있다.

막비강은 이 강장을 이리 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무슨 상징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강장의 손등 쪽에 다섯 개의 구멍이 파여 있어 손가락을 끼워보니 딱 맡는다. 이 강장은 손가락을 끼워 무기처럼 휘두를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다.

만일 이 강장을 손에 끼고 장법을 펼치면 그 위력이 몇 배로 무서워질 것이다.

강장을 살펴보던 막비강의 마음은 이내 크게 격동되었다. 왜냐하면 강장의 형태가 금색 호로와 함께 품안에 들어 있었던 종이의 표식과 매우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보니 이분 선배님께서 금색 호로를 내 품속에 넣어 주셨구나!)

막비강은 이위의 말투에서 호로 속에 담겨 있던 즙액이 바로 천고의 영약 금강옥액이었음을 확인했었다. 자연히 그것을 자신의 품에 넣어 준 염라철장에게 호감이 일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선배님의 은혜로 금강옥액을 먹어 병약한 체질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 은덕을 어떻게 보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절을 올린 그는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기로 결심하고 염라철장의 몸에 손을 대었다.

문득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 막비강의 손에 닿았다.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염라철장의 주머니 속에서는 한 권의 책자와 상당량의 은자가 나왔다.

 

<염라장경(閻羅掌經)>

 

책자의 표지에는 그 같은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혹시!)

막비강이 흥분하여 서둘러 책자를 펼쳐 보니 한 면에 장법(掌法)의 도식(圖式)이 하나씩 그려져 있고 그 밑에 이 장법의 변화가 상세히 설명되어 있었다.

막비강은 꿈에도 그리던 무공비급을 얻자 뛸 듯이 기뻤다. 그는 한시바삐 이 현묘한 장법이 수록된 책자를 읽고 싶었다.

하지만 더욱 시급히 알고 싶은 것은 이 노인의 신분과 내력이었다. 해서 책자의 맨 끝장까지 뒤적여 보니 그곳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내 능력이 모자라 당한 일초(一招)의 원한은 참을 수 있지만 아내와 자식을 빼앗긴 울분은 잊을 수 없다! 막가 짐승을 다시 만나면 기필코 복수하겠다.>

 

이것은 비록 간단한 몇 글자였지만 막비강에게는 마치 예리한 비수가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막가 짐승이라면 아버지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그럼 이분 노인이 진짜 나의 부친이란 말인가?)

그는 생각을 굴리며 염라철장을 다시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용모는 비록 인자하게 생겼지만 아무리 보아도 생소한 얼굴이었다.

막비강은 아무래도 그와 자신의 관계를 추측할 수 없는지라 우선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저에겐 비록 생모는 한 분뿐이지만 의붓어머니는 다섯 분이나 더 계십니다. 만약 선배님께서 정말 저의 부친이시라면 꿈속에서라도 나타나셔서 제게 알려주십시오.)

그는 기도를 끝낸 후 책자를 품속에 넣고 강장은 자기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바닥에서 황씨 형제의 강추를 하나 집어 구덩이를 판 다음 염라철장의 시체를 매장해 주었다.

막비강은 무덤 앞에 무림선배염라철장지묘(武林先輩閻羅鐵掌之墓)라는 묘비를 세워 주고 큰절을 올렸다.

다음으로 그는 무협제원의 몸을 수색했다. 막비강은 곧 무협제원의 품에서 예리한 단검 한 자루와 그의 독문 무공이 수록된 비급 신녀원공보(神女猿公譜), 그리고 몇 알의 진주와 은자 꾸러미를 얻었다.

신녀비(神女匕)라는 검명이 새겨진 예리한 비수는 금석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였다. 무협제원은 이 신녀비를 무협의 어느 석실에서 얻었었다.

무협제원이 발견한 그 석실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죽은 거대한 원숭이의 골격과 그 원숭이의 골격을 끌어안고 죽은 가냘픈 여자의 시신이 함께 있었다.

아마도 그들이 전설 속의 절세고수들인 월녀(越女)와 원공(猿公)이 아닌가 싶었지만 배움이 짧은 무협제원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다행인 것은 신녀비와 함께 발견된 신녀원공보의 전반부가 썩어 문드러 져있었다는 점이다. 만일 신녀원공보가 온전한 상태에서 발견되었고 월녀와 원공의 독문내공심법까지 얻었다면 무협제원은 거의 천하무적이 되어 강호에 크나큰 해악을 끼쳤을 것이다.

막비강은 신녀원공보 뒷면에서 무협제원의 이름도 알아내고 그를 매장한 후 무림선배무협제원지묘(武林先輩巫峽啼猿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막비강이 두 노인의 시체를 매장하고 나니 점심때가 가까워졌다. 자연히 몸이 피곤할 뿐 아니라 배도 매우 고팠다.

그는 나머지 네 구의 시체는 대충 매장한 다음 수림 속에 들어가 산과일로 배를 채웠다.

 

* * *

 

한 달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났다. 가을은 더욱 깊어져 웅이산은 온통 붉고 노란 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만추의 어느 저녁,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짙게 번져 만산홍엽으로 변한 웅이산을 더욱 붉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이얍! 차핫!]

문득 저녁의 적막을 깨고 맑은 소년의 함성이 웅이산 골짜기를 뒤흔들었다.

웅이산의 깊은 곳에 자리한 후미진 계곡 안쪽에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소년이 오른손에는 커다란 강장을 끼고 왼손엔 예리한 단검을 든 채 마치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뛰며 양손을 휘두르고 있었다. 비록 체격은 다 자란 어느 어른처럼 건장하지만 얼굴에는 아직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이다.

이 소년은 물론 기연으로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강호칠절과 중원육요 중에 드는 두 무림 고수의 비급을 얻은 막비강이었다.

그가 무공을 연마한 지는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약한 대신 남달리 뛰어난 지혜를 지니고 있었다. 덕분에 무공을 연마한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지났음에도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의 무공을 거의 다 파악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하고 생사현관이 타통되어 보통 사람이 일갑자 동안 수련한 것에 해당되는 심후한 내공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내공이나 무공초식은 어느덧 무림 일류고수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가 되어 있었다.

단지 지금의 그에게 모자라는 것은 실전 경험뿐이었다.

휙휙! 파파팟!

막비강이 날고 뛸 때마다 칼날 같은 경기가 사방으로 무지개처럼 뻗쳐 나가곤 했다.

[하하하! 이젠 염라장경과 신녀원공보의 무공이 모두 내것이 되었다!]

막비강은 돌연 병기를 철회하며 득의에 찬 웃음을 흘렸다. 그는 드디어 염라철장의 십팔초 염라장법(閻羅掌法)과 무협제원의 절기인 신원탈백소, 칠십이로 신녀검법(神女法)을 모두 수련해낸 것이다.

염라철장의 염라장법도 나름대로 뛰어난 점이 있는 무공이지만 그 현묘함에 있어서는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에 미치지 못한다.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은 무협제원이 얻은 반쪽의 신녀원공보에 남아있던 두 가지 무공이다. 둘 다 음공과 검법으로는 더 이상이 없을 정도로 빼어난 무공들이지만 문제는 그것들을 운용할 수 있는 내공부분이 소실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무협제원도 두 가지 무공을 본래 위력의 삼할 가량 밖에 발휘하지 못했었다.

만일 무협제원이 월녀와 원공의 내공심법마저 얻었다면 무림은 원숭이와 인간의 잡종을 천하제일인으로 모셨어야 했을 것이다.

이 점은 막비강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적합한 내공심법을 얻지 못한 관계로 신원탈백소와 신녀검법의 정수를 터득하지는 못했다. 다만 이론과 초식상으로만 완전히 이해했을 뿐이었다.

무공 수련을 마친 막비강은 곧 자신이 만든 염라철장 곡강의 무덤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아버님! 소자를 보우하여 하루빨리 절예를 연성하게 해주십시오. 소자는 절예만 연성하면 막고천 그 악적을 찾아가 아버님의 원수를 갚고 어머니를 고난 속에서 구출해 내겠습니다.]

그는 어느덧 염라철장 곡강을 자신의 생부로 여기게 된 것이다.

늘 자신을 냉대하고 구박하기만 하던 금사혈검 막고천과 무림 최고의 보물인 금강옥액도 서슴지 않고 자신에게 먹여준 염라철장, 둘 중 누가 더 자신의 부친에 가까운지는 자명한 일이었다.

그는 막고천이 자신의 생모를 생부 염라철장으로부터 강제로 빼앗아 첩으로 삼은 악적으로 믿기에 이른 것이다.

막고천이 자신의 어머니를 생부인 염라철장에서 빼앗을 것이라면 전후의 사정이 들어맞는다.

막고천은 막비강이 다른 남자의 자식이기에 무공을 가르쳐줄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그의 생모인 한경파를 강간하는 짓도 서슴치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절대 용서 못해! 반드시 내 손으로 그 악적을 죽이고 어머니를 구해내고 말겠어!)

막비강은 막고천에게 농락당하던 어머니의 무참한 모습을 떠올리며 새삼 결의를 다졌다

당장이라도 혈검산장에 달려가 어머니를 구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막비강 자신이 잘 안다.

분하고 조급하더라도 참아야만 한다.

(아버님과 무협제원의 무공은 이제 대충 연마했다. 이제 그만 여길 떠나야 한다!)

막비강은 떠날 결심을 하였다.

하지만 그동안 정이 든 이곳을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해서 하룻밤만 더 염라철장의 무덤을 지키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 * *

 

다음날 아침.

짹짹짹짹...!

자신의 처소로 삼은 커다란 고목의 가지 위에 누워 자던 막비강은 새들의 시끄러운 지저귐에 눈을 떴다.

[뭐야? 아직 해도 안 떴잖아?]

새 떼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그는 아직 해도 뜨지 않고 동녘 하늘만 약간 뿌옇게 밝아 오는 것을 보고는 투덜거렸다.

[빌어먹을 것들이 잠도 제대로 못 자게 떠드는구나!]

그가 중얼거리며 다시 잠을 청하려 할 때였다.

[거기 있는 게 누구냐?]

갑자기 멀리서 날카로운 외침 소리가 전해 왔다.

(이 목소리는...!)

귀에 익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막비강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놀라움, 분노, 미움 등이 일순 그의 전신 혈맥을 파열시킬 것만 같았다.

(... 막가 악적이다!)

막비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방금 들려 온 음성은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 이러지 말아요! 제발! 비강이가 보고 있어요!]

막고천의 시커먼 몸 아래 깔려 바둥대며 애원하던 어머니가 떠올라 막비강의 몸 속의 피를 거꾸로 치솟게 만든다.

생각 같아선 당장 숲 밖으로 뛰쳐나가 막고천을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울분을 참고 나뭇가지 사이로 조심스럽게 바깥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이위 등 혈검산장의 무사 십여 명이 막비강이 만든 무덤 앞에 까마귀 떼처럼 몰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제법 중후한 용모에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입술이 얄팍한 초로의 사내였다. 

 

 금사혈검 막고천!

 

허리춤에 마치 뱀 모양을 한 한 자루의 사형괴검(蛇形怪劍)을 걸고 있는 금포장한! 그자가 바로 당금 무림을 장악하고 있는 사패천 중 서패천 혈검산장의 장주인 금사혈검 막고천이었다.

[장주께선 무슨 소리를 들으셨습니까?]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외당 당주인 학가맹(學家盟)이란 자가 눈을 치켜 뜨며 물었다.

막고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분명 이 숲 속에서 그 어린 잡종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럴 리 없습니다. 속하는 그날 그놈이 없어졌음을 발견하고 이 일대를 여러 번 수색했습니다만 아무 흔적도 없었습니다.]

학가맹의 말에 이위도 얼른 덧붙였다.

[놈은 저의 흉맹한 일장을 맞았는데 죽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입니다. 혹시 다른 무림 고수가 이 근처에 은거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막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이 있든 없든 우리는 이 부근을 샅샅이 수색해 보자.]

막비강은 막고천 일행의 대화를 듣고 더욱 노화가 치밀었다. 그들의 대화에서 막고천이 이미 자신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역시 그날 돌아가신 염라철장께서 내 생부셨구나!)

막비강은 당장이라도 막고천을 사로잡아 진상을 추궁하고 싶었다.

그는 혈검산장에서의 버러지같은 생활을 떠올리면서 진저리를 쳤다. 만약 생부인 염라철장이 그를 구출하지 않았다면 그는 멋도 모르고 도적을 부친으로 모실 뻔했다.

막비강은 염라철장과 막고천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막고천이 그의 집안을 파괴하지 않았다면 그의 생부에게서 모친을 빼앗아 갔을 리 만무하다.

(목숨을 걸고 복수를 할까, 아니면 도주를 해야 하나?)

짧은 시간, 상반된 생각이 그의 뇌리에서 수백 번의 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자신이 아직 막고천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분하지만 복수는 잠시 유보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를 부드득 갈며 소리 없이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수림에서 빠져 나와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 * *

 

막비강은 단숨에 백여 리를 달려 조그만 마을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그는 염라철장이 남긴 은자로 베옷 몇 벌과 곡괭이를 사고 밥도 배불리 먹었다.

그런 다음 인적이 드문 곳에 가서 입고 있던 작고 낡은 옷을 벗어 불에 태우고 염라철장의 유서와 호로 뚜껑에서 나온 쪽지를 땀에 젖지 않게 초를 녹여 쌌다.

허름한 베옷을 입고 머리까지 산발하니 허리춤에 찬 금색 호로만 아니면 막비강은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누가 봐도 지금의 그는 산골에서 막 자란 무지렁이 소년이다.

막비강은 계곡 물에 자기의 변한 모습을 비춰 보고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그러면서 그는 눈을 빛내며 생각했다.

(염라철장께서 나를 낳아주신 생부인 게 확실하니 이제 성을 막()씨에서 곡()씨로 고쳐야만 한다. 기왕이면 이름도 곡능천(曲凌天)으로 고쳐서 막고천, 그 악적을 놀려주어야겠다!)

능천이란 즉 하늘을 능멸(凌蔑)한다는 뜻이다. 막비강이 곡능천이라고 개명한 것은 높은 하늘(高天)이란 광오한 이름을 지닌 막고천을 놀려주기 위해서였다.

산골 소년의 모습으로 변장한 막비강은 그날부터 산속에서 마른나무를 주워 근처 도회지로 지고 내려와 팔아 밥을 사먹었다. 물론 그가 나무를 주워다 파는 것은 호구지책 때문이 아니었다.

 

 청구단서는 거대한 비석 밑에 숨겨져 있다!

 

바로 호로에서 얻은 쪽지에 적힌 대로 큰 비석이 어디 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의심받지 않고 탐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이르면 몇 시진이고 검법과 장법을 연마했다.

 

* * *

 

그렇게 생활하는 동안 반년이란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렀다. 어느덧 겨울도 지나고 따뜻한 봄이 왔다.

막비강의 나이도 이제 열 일곱살이 되었다. 건장해진 몸 뿐만 아니라 나이로서도 어엿한 청년이 된 것이다.

그동안 막비강은 하남성 일대의 무수한 마을과 고을을 돌아다니며 큰 비석을 찾았다. 하지만 의심을 받을 것이 염려되어 사람들에게 큰 비석이 있는 곳을 직접 묻지는 못하고 혼자서 비석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어느 날 낙양(洛陽)에서 멀지 않은 응봉현(應峯懸)을 지날 때였다.

(히야! 정말 큰 비석이다!)

막비강의 눈이 확 떠지는 일이 벌어졌다. 한 채 웅장한 절의 담벽을 따라 걷던 그의 눈에 담장 너머로 우뚝 솟아 있는 비석의 상층부가 들어온 것이다.

일 장 높이의 담장 밖에서 비석의 윗부분이 보이는 정도라면 그 비석은 적어도 이 장 높이는 넉넉히 될 것이다. 그 정도라면 막비강이 지난 몇 달 동안 본 여러 비석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이었다.

 

<청련사(靑蓮寺)>

 

담장으로 둘러친 그곳은 절이었다.

하지만 알아본 결과 청련사는 비구니들만 기거하는 비구니 도량이었다. 그 때문에 사내는 얼씬할 수 없는 곳인지라 도저히 접근할 수단이 없었다.

(별수 없지! 밤에 월담을 기도하는 수밖에!)

막비강은 한시라도 빨리 비석을 파보고 싶었으나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

 

그날 밤, 몸에 꼭 끼는 야행복으로 갈아입은 막비강은 청련사의 긴 담장들 중 가장 한적한 곳을 골라 월담을 했다.

자칫 들키기라도 한다면 비구니들에게 음심을 품고 침입한 음적으로 몰릴 지경이라 충분히 주위를 살핀 뒤 담을 넘었다.

이미 삼경이 넘은 늦은 시간인 탓에 절 안에는 불빛 하나 없었다.

막비강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비석이 있는 절의 후원으로 숨어들었다. 어둠 속에 비석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우뚝 서 있었다.

(제발 이번에는 허탕치지 말아야 할 텐데...!)

막비강은 내심 기원하며 준비한 곡괭이로 비석 밑을 파려 했다.

헌데 그가 막 첫번째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파라라락!

돌연 머리 위로 무언가 휙 하니 타넘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크!)

막비강은 기겁하며 급히 몸을 웅크렸다.

쏴아!

그러면서도 흘깃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밤하늘로 한 줄기 날렵한 인영이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이상하군! 나말고도 비구니들만 사는 이 절에 용무가 있는 사람이 있었나?)

막비강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나간 야행인은 너무 빨라 여자인지 남자인지 미처 분간할 틈이 없었다. 다만 그자가 허리춤에 무언가를 끼고 있음을 언뜻 발견했을 뿐이었다.

(야심한 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에 침입한 이유가 뭐란 말인가?)

막비강의 마음에 의구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하지만 막비강은 다시 비석 쪽으로 시선을 돌려 하던 일을 계속하려 했다.

헌데 막비강이 다시 곡괭이질을 하려 할 때였다.

스악!

또 하나의 인영이 청련사의 담장을 날아 넘어 그의 머리 위로 지나가지 않는가?

(이건 또 뭐야?)

막비강은 급히 몸을 숙이면서도 재빨리 그 야행인의 모습을 살폈다.

언뜻 긴 치맛자락이 날리고 일진의 그윽한 향기가 느껴졌다. 이로 미루어 두 번째 야행인은 여인임이 분명했다.

(야행인이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

막비강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미 비석을 파보는 일은 뒷전으로 밀린 상태였다.

(따라가 보자!)

마침내 막비강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야행인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막 몸을 날리는 순간 청련사의 가장 깊은 객사 쪽에서 언뜻 사람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막비강은 즉시 그곳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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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이른 아침. 황금전장 입구. 정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지는 않고 있고.

입구를 지키는 황금전장 무사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녀. 진삼낭과 이진진이다. 말은 주로 이진진이 하고 있다.

무사1; [글쎄 우린 네 오빠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느냐?] 신경질 내는 무사들의 우두머리. 다른 무사들은 지켜보고

이진진; [그럴 리가 없어요.] [제 오빠는 분명 어제부터 황금전장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했어요.] [제발 제 오빠를 만나게 해주세요.] 울먹이며 애원하고. 이진진은 허리춤에 작은 호리병을 달고 있다. 물론 운신장이 준 몽운연형호다.

무사1; [황금전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오천 명이 넘는다.] 한숨

무사1; [그 많은 사람들 중 네 오빠가 누군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냐? 그것도 어제부터 일하기 시작했다는 신참을...]

이진진; [물론 황금전장은 식구가 많겠지요.] [하지만 오빠는 주방에서 일한다고 했어요.] 필사적으로

이진진; [주방 인원은 그리 많지 않을 거 아니에요?] [들어가지 못하게 하실 거면 주방으로 사람을 보내서 확인해주세요.]

무사1; [좋은 말로 할 때 물러가라.] 눈 부라리고

무사1; [네 오라비란 놈이 정말 본장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으면 제 발로 집에 돌아갈 게 아니냐?]

이진진; [오빠가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적은 없어요.]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니 제발 만나게 해주세요. ?] 무사1의 소매를 잡고 애원하고

무사1; [어허 이년이 정말...] 손을 들어 이진진을 때리려 하고. 그때

귀견수; [무슨 일이냐?] 안쪽에서 나오며 말하고. 모든 사람들 돌아보고

[부단장님!] [부단장님을 뵙습니다.] 급히 인사하는 무사들

귀견수;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냐? 곧 손님들이 몰려올 텐데...]

무사1; [그것이...] 난감한 표정.

 

정문 안쪽. 건물들 사이에 서서 입구쪽을 보고 있는 여자무사1

여자무사1의 시점. 정문쪽에서 무사1이 귀견수에게 무언가 설명하고. 이진진은 애원하는 표정으로 듣고 있고

<이청풍...> <누이동생...> <제발 오빠를 만나게 해주세요.> 등의 말이 여자무사1의 귀에 들리고

여자무사1; [...] 무언가 생각하며 돌아서고

 

귀견수; [네 오빠는 분명 어제부터 본장에서 일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면 속에서 눈을 번뜩이며

이진진; [... 그렇지요?] [제 오빠 여기에 있지요?] 안도하지만

귀견수; [하지만 네 오빠는 지금 본장에 없다.] 고개 젓고

이진진; [오빠... 오빠가 어딜 간 건가요?] 놀라고. 진삼낭도 흠칫하고

귀견수; [저녁 무렵, 도축장으로 고기를 더 가지러 간다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도 걱정을 하던 중이다.]

이진진; [오빠... 오빠가 황금전장으로도 돌아오지 않았다구요?] 놀라고.

진삼낭은 무언가 생각하고

귀견수; [우리도 곧 도축장으로 사람을 보내 알아볼 생각이었다.] [궁금하면 먼저 도축장으로 가서 확인해봐라.]

이진진; [하지만 도축장에서 잤으면 새벽같이 돌아왔거나 연락이 있었을 텐데...] + 진삼낭; [돌아가자 진진아.] 이진진의 팔을 잡고

이진진; [엄마...] 돌아보고

진삼낭; [자식 문제로 폐를 끼쳤어요. 용서해주세요.] 고개 숙이고

귀견수; [신경 쓰지 마시오.] 같이 고개 숙이는데

진삼낭은 곧 이진진고 함께 황금전장 입구를 떠난다.

이진진; [엄마! 빨리 도축장으로 가봐요.] 진삼낭의 소매를 끌지만

진삼낭; [도축장에는 내가 가보마. 진진이 넌 집으로 돌아가서 기다려라.] 이진진의 손을 자신의 소매에서 떼어내고

이진진; [나도 같이 갈래요.] 따라가려 하지만

진삼낭; [진진아.] 멈춰서며 돌아보고. 엄한 표정

이진징; [...] 움찔 하며 마주 보고

진삼낭; [엄마 말 들어라.] 진지한 표정

이진진; (... 무서워.) + [...] 주눅 들고

진삼낭; [즉시 집으로 돌아가서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라.] [무슨 일 생기면 동네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서둘러 가면서 말하고

이진진; [... 다녀오세요.]

대답하지 않고 멀어지는 진삼낭

이진진; (제발 오빠가 도축장에 있어야할 텐데...)

진삼낭; (황금수라들의 부단장이란 그자...) 귀견수를 떠올리고

진삼낭; (거짓말이 서툰 자였다. 가면 속에서 눈빛이 흔들린 걸 보면...)

진삼낭; (분명 청풍이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 이를 악물고

 

#74>

황금전장 내의 벽소소 거처. 여자무사들이 지키고 있고

벽소소; [이가놈의 가족?] 화려한 탁자에 진수성천을 차려놓고 먹다가 앞쪽의 여마주사1을 보고. 잠옷 차림이다.

여자무사1; [! 누이와 어미가 새벽부터 찾아와서 이청풍을 만나게 해달라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벽소소; [물론 그냥 돌려보냈겠지?]

여자무사1; [귀견수가 설득해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벽소소; [이가놈의 어미와 딸이란 말이지?] 사악하게 웃고

오싹! 소름이 돋는 여자무사1

벽소소; [식욕이 마구 생기네. 곧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걸 생각하니...] 사악하게 웃으며 음식을 먹는다

여자무사1; (이 독한 계집이 설마...) 무언가 떠올리며 소름이 돋는 표정이 되고

 

#75>

도축장. 여전히 아침. 이제 해는 떴다. 작업 준비를 하는 백정과 백정 마을의 여자들

도축장의 건물들 중 제법 그럴 듯한 건물. 도축장 주인 추노대가 주대육에게 고기를 보여주던 그 건물이다.

추노대; [청풍이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의자에 앉아서 놀라고. 그 앞에 탁자를 사이에 두고 진삼낭이 앉아있다.

진삼낭; [황금전장에서는 청풍이가 저녁 무렵에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하더군요.] 진삼낭이 단정하게 앉아서 말하고

추노대; [그럴 리가 없네.] 고개 젓고

추노대; [노부가 황금전장을 떠나올 때 이미 날이 어두워졌었어.] [청풍이가 다시 여길 찾아왔다면 한 밤중이어야 하는데... 그때는 이미 금릉 성문이 닫혔을 시간이야.]

진삼낭; [여길 오고 싶어도 올 수가 없었겠군요.] 눈 반짝

추노대; [청풍이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겠군.] 심각

진삼낭; [혹시 짐작 가는 일이 있으신지요?]

추노대; [사실은...] 주변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추노대; [어제 아침에 청풍이가 심하게 다친 채로 여길 왔었네.] 몸을 좀 앞으로 숙이면서 속삭이듯 말하고

진삼낭; [!] 놀라 눈 치뜨는 진삼낭

 

건물을 등지고 도축장을 떠나는 진삼낭

진삼낭의 뇌리에 떠오르는 추노대의 말

<혹시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청풍이와 노부가 황금전장에 도착한 직후 무림맹의 총관도 도착했었네.> 추노대의 말

진삼낭; (소면무상 장세명...) (무림맹의 제갈량이라는 그자가 청풍이와 같은 시간에 황금전장에 있었다면...)

진삼낭; (청풍이의 정체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른다. 청풍이가 실종된 것은 그 때문일 수도 있고...)

진삼낭; (어쩌면 청풍이는 장세명에게 사로잡혀있을 수도 있다.)

진삼낭; (어떻게든 황금전장 내의 상황을 알아내야만 한다.) 강렬한 표정

 

#76>

. 황금전장의 대청 앞마당. 장세명이 떠날 준비를 한다. 냉혈전호 벽초천과 작별 인사를 하고 있다. 타고 온 마차가 근처에 서있고. 마차를 호위하고 온 무림맹 무사들은 말고삐를 잡고 서있다.

장세명; [양가에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장주께서 택일하신 날자에 혼례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벽초천에게 포권하고. 벽초천 뒤에는 벽세황과 이세창과 귀견수들이 서있다. 주변에 몇 명의 황금수라들이 더 있고

벽초천; [그리 알고 딸년의 혼례식을 준비해두겠소이다.] 마주 포권하고

장세명; [그럼 무림맹에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포권하고

벽초천; [먼 길, 조심해서 살펴가시오.] 마주 포권하고

마차로 가는 장세명. 무사 한명이 마차의 문을 연 채 기다리고 있고

장세명; (이청풍이란 놈...) 마차로 다가가며 곁눈질로 주변을 조고

장세명; (결국 날 찾아오지 않았다. 무공을 배우고자 하는 의지는 있었던 것같은데...) 마차로 올라가고. 마차 내부는 작지만 화려한 거실같다.

장세명; (스승을 소개해달라고 날 찾아왔으면 가슴에 나비 모양의 반점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을...) (아쉽게 되었다.) 안으로 들어가 마치 진행 방향으로 놓인 의자에 앉고. 밖에서 문을 닫아주는 무사

두두두! 다각 다각! 장세명이 탄 마차가 기마대의 호위를 받으며 황금전장을 떠난다. 주변의 황금전장 무사들 마차를 향해 예를 취하고

장세명; [진배(陳配)!] 마차 안에 앉아서 누군가를 부르고

[예 총관님!] 마부석에 앉아있던 두 명의 무사 중 한 명이 고개를 조금 돌려 마차를 돌아보며 대답한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장세명; [본맹의 금릉지부에 전해라. 황금전장의 숙수 이청풍에 대해 수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아서 보고하라고.]

진배; [존명!] 고개 좀 숙이며 대답하고

장세명; (이청풍... 이청풍...) (처음 본 이래 한시도 머릿속에서 그놈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장세명; (아연아가씨의 아들이든 아니든 그놈이 향후 무림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멀어지는 장세명의 마차 일행. 대청 앞에 서서 그걸 보는 벽초천과 벽세황 부자와 이세창 귀견수등

벽세황; (일단 장총관에게서 의심스러운 언행은 감지되지 않았다.) (소소가 난잡하게 논 사실을 모른다는 건데...)

벽세황; (이청풍, 그놈 주장대로 장총관과는 요리에 관한 대화만 나눈 것일까?) 찡그리고. 그때

벽초천; [한 고비는 넘겼다.] 말하고. 흠칫! 하며 벽초천을 보는 벽세황

벽초천; [하지만 소소의 혼례가 끝날 때까지 추호의 방심도 있어선 안된다.] 건물 쪽으로 돌아서고

벽초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도록!] 말하며 걸어가고. 귀견수와 황금수라들이 따라갈 준비를 하고

이세창;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멀어지는 벽초천 귀견수와 황금수라들이 경호를 한다

벽세황; [나도 무림맹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겠소. 뒷일은 총관에게 맡기겠소.]

이세창; [걱정 끼쳐드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고개 좀 숙이고

곧 멀어지는 벽세황. 벽처천이 간 곳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

이세창; (중요한 일은 다 내게 떠넘기는군.) 쓴웃음

이세창; (그만큼 신임을 받고 있다는 뜻이지만... 덕분에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어.) 다른 곳으로 가려고 걸음 옮기고. 그러다가

[!] 흠칫! 한쪽을 보는 이세창.

건물 그늘에 유령같이 서서 이세창을 보고 있는 여자무사1

이세창; (냉상아...) + [내게 용무가 있느냐?] 다가가고

여자무사1; [예 총관님!] 고개 좀 숙이고

여자무사1; [큰 아가씨께서 총관님을 긴히 뵙자고 하시옵니다.]

이세창; [큰 아가씨가?] 흠칫! 하고

 

#77>

벽소소의 거처. 지키는 여자무사들도 없다.

여자무사1의 안내를 받아 그곳으로 오는 이세창. 높은 담장에 나있는 월동문을 통해 들어온다.

이세창; (큰 아가씨의 거처를 지키는 황금나찰들이 안보이는군.) 주변 둘러보며 여자무사1을 따라가고. 그때

여자무사1; [아가씨! 총관님을 모셔왔습니다.] 건물 앞에 서서 건물에 대고 말하고

<안으로 모셔라.> 건물에서 들리는 음성

여자무사1; [...] 대답하고. 이어

여자무사1; [들어가시지요.] 이세창에게 안으로 들어가길 권하고

이세창; [수고했다.] 건물 입구로 가고

이세창; [실례하겠습니다 큰 아가씨.] 덜컹! 문을 열고 들어가고

[...] 돌아보며 월동문쪽으로 가는 여자무사1

 

#78>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이세창. 이세창이 들어선 곳은 거실이다. 화려의 극을 달하고. 하지만 아무도 없다.

이세창; (거실에는 없군.) ! 문을 닫으며 둘러보고. 그때

<나 여기 있어요. 이리로 들어와요.> 거실 한쪽에 달린 문이 반쯤 열려있고 그곳에서 들리는 음성

이세창; (저긴 침실인데...) 의아해하면서도 다가가고.

이세창; [무슨 일로 저를 직접 보자고 하셨...] + [!] 문을 열고 들어가던 이세창의 경악. 눈 부릅

벽소소; [어서 와요 총관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화려한 침실에 놓인 크고 화려한 침대. 그 침대 위에 속살이 거의 드러나는 야한 잠옷 차림으로 누워서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벽소소.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다. 가운형의 잠옷인데 앞자락이 거의 다 벌어져 있다. 잠옷 속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고

벽소소의 자태를 부분 크로즈 업. 목덜미, 젖가슴, 아랫도리

이세창; (이런...) + [... 실례했습니다!] 급히 고개 돌리며 다시 나가려 하는데

벽소소; [총관이 그 문지방을 넘어가면...] 배시시 웃고

[!] 움찔! 하며 멈춰서는 이세창

벽소소; [비명을 지를 거예요.]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이 가시지요?] 마녀처럼 사악하게 웃고

이세창; (내가 자길 범하려 했다고 누명을 씌우겠다는...) + [... 왜 이러십니까 큰 아가씨?] 비지땀. 곁눈질로 보며

이세창; [제가 부지불식중에 큰 아가씨에게 죄를 지은 게 있는지요?] 식은땀 흘리며 울상을 짓고

벽소소; [총관님이 제게 잘못 한 건 없어요.] [다만 총관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을 뿐이에요.] 요염하게 웃고

이세창;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분부만 하시면 따랐을 텐데...] 비지땀.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벽소소를 곁눈질

벽소소; [그럴 수가 없는 사정이 있답니다.]

벽소소; [난 떳떳하지 못한... 지저분한 일을 총관에게 맡길 생각이거든요.] 요염하게 웃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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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금강옥액의 기연

 

 

(확실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 많았어!)

옛날 일을 떠올린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이를 악물었다.

돌이켜보니 막고천이 보인 행태들 중에는 도저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어머니 한경파를 겁탈하곤 했다.

아니 일부러 막비강이 있는 곳에서만 한경파를 농락하는 것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인 이래 한경파는 막비강을 데리고 자지 않았다.

언제 또 막고천이 들이닥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고천의 만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모자지간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 들이닥친 막고천이 완력을 써서 겁탈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 빨리 나가!]

막고천이 자신을 강간하기 시작하면 한경파는 아들에게 그렇게 악을 써서 쫓아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막비강도 막고천이 어머니를 올라타면 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어머니를 농락하는 막고천의 음험한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숨죽인 오열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막고천을 밀쳐내고 싶지만 그럴 힘이 유달리 허약한 막비강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글에 적힌 대로 혈검산장에는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막비강은 염라철장이 남긴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가 비록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는 어둡긴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는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염라철장의 글은 막비강의 마음 깊이 사무쳤다.

본래 금사혈검 막고천에게는 한 명의 본처 외에도 다섯 명의 첩이 있었다.

막비강을 낳아준 생모 한경파는 그 일처오첩(一妻五妾)중 셋째였다.

막고천의 본처는 당숙경(唐淑瓊)이라는 거만하고 기승스러운 여자로 막고천과의 사이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본처 당숙경 외에 다섯 명의 첩은 각기 한 명씩의 자식만을 두었을 뿐인데 특이하게도 한경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딸이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자식들 중 나이순으로 따지면 넷째지만 아들로서는 둘째다.

첩에게서 난 자식들이라도 딸이면 그래도 예쁜지 막고천도 다른 첩의 자식들은 제법 귀여워한다. 안고 다니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쪽쪽 입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아들인 막비강만은 늘 흰눈으로 보며 못 살게 굴었다.

아비가 그러니 집안의 다른 인간들이 막비강을 좋게 대해줄 리 없다.

막비강은 어릴 때부터 막고천의 본처가 낳은 자식들에게 온갖 경멸과 수모를 받으며 자랐다. 또한 혈검산장의 식솔들에게서도 첩의 자식이라고 업수히 여김을 받았으며, 심지어 낳아준 모친 한경파까지도 그에게 매우 냉담했다.

한경파는 원래 차가운 성격이기도 했으나 어느날 밤 자신이 막고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막비강에게 보인 이후로는 찬바람마저 쌩쌩 돌았다.

원망과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막비강을 노려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막비강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생모마저 냉대하는데 누가 막비강을 귀히 여겨주겠는가?

이런 냉랭하고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막비강은 항상 외롭게 지냈으며 심지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을 원망까지도 했다.

어릴 때부터 혈검산장에서 냉대를 받고 자란 것이 원인이 되어 막비강은 어둡고 말이 없는 소년으로 자란 것이다.

 

막비강은 서로 팔이 엉킨 채 마주 서있는 두 노인이 깨어나면 전후 사정을 물어 보기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두 노인은 깨어날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갑다.

해서 막비강은 햇볕을 쬐기 위해 양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츠츠츠!

그는 금강옥액이 들었던 호로의 표면에서 무지갯빛 같은 보광이 발산하는 것을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슨 그림 같은데...!]

그는 호로의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호로에서 뻗치는 황금빛 서광은 흡사 아름다운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햇살에 비추자 산수화 같은 경물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는 호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다시 닫아 두었던 호로의 뚜껑을 뽑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우직!

헌데 그 순간 쇠로 만들어진 호로의 뚜껑이 그대로 우그러드는 것이 아닌가?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막비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손 힘이 전보다 수십 배 강해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훌륭한 세공품을 망쳤네!]

막비강은 아쉬워하며 뚜껑을 바로 펴려 했다.

본래 그 뚜껑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막비강은 그것을 편다는 것이 이번에도 너무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빠직!

뚜껑은 펴지기는커녕 그대로 두 조각으로 뽀개지고 말았다.

[... 이런!]

당황하던 막비강은 다음 순간 흠칫 놀랐다.

펄럭!

뽀개진 뚜껑 속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종이는 또 뭐지?)

그는 의아해하며 그 종이를 주워 펼쳐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너무 작아 보통 사람이라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옥액으로 시력이 수십 배로 증폭된 막비강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는 무학지보(武學之寶)로써 거대한 비석(碑石) 밑에 숨겨져 있다. 오직 인연이 닿는 자만이 얻으리라!>

 

[... 청구단서! 이것은 청구단서의 장보도(藏寶圖)로구나!]

글을 읽은 막비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어쨌든 그도 무가인 혈검산장에서 자란 탓에 청구단서와 금강옥액의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마신 이 호로 속의 즙액이 바로 금강옥액이 아닐까?)

막비강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어 새삼 호로를 들여다보았다.

(청구단서를 얻어 그 안의 신공절학을 익히면 내 일신에 얽힌 비밀을 푸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막비강은 매우 기뻐하며 염라철장의 유서인 종이쪽지와 호로에서 나온 종이를 같이 접어 품속에 간직하였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그가 철이 들 때부터 열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헌데 이제 무림 최고의 비전인 청구단서를 찾을 단서를 쥐게 되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아직까지 미동인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 두 분 어른은 선 채로 죽은 것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두 노인을 살펴보았다.

막비강이 다가가 노인들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두 노인의 얼굴빛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얼굴빛과 똑같았다. 그리고 콧김을 살펴보아도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겼구나!]

막비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는 아직 열 여섯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

(... 달아나자!)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쳐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거기 섰거라!]

갑자기 등뒤에서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히익!]

고함소리를 들은 막비강은 죽은 사람이 강시로 변해 쫓아오는 줄 알고 더욱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화라락!

하지만 소리를 지른 그 사람의 신법은 쾌첩하기 짝이 없어 단숨에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막아 섰다.

[소장주! 진정하시오! 속하외다!]

막비강을 가로막아선 자가 급히 막비강을 안심시켰다. 그자는 얼굴의 절반이 시커먼 구레나룻에 덮인 건장한 장한이었다.

[! 이 아저씨였군요!]

상대방을 알아본 막비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자는 바로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한 명인 규염장(糾髥掌) 이위(李衛)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위도 처음에는 막비강을 못 알아봤었다. 가냘프던 그의 체격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건장한 청년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장해진 몸과 달리 막비강의 아직 순진하고 치기가 어린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추격하는 동안에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소장주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막비강의 몸이 건장해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께선 소장주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찾고 계십니다. 무사하시니 다행...!]

그렇게 말하던 이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두 눈에서 기이한 광망을 발산했다. 그는 비로소 막비강이 들고 있는 이상한 호로를 발견한 것이다.

[소장주는 그것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이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금강옥액은 황금빛 서기가 서린 호로에 담겨 있다!

 

그런 강호의 전설을 떠올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위의 내심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것이 왜 내 수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위의 태도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변했다.

[흐흐! 어린 잡종아, 어서 그것을 내놓아라! 오늘이 바로 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다. 만약 그 금강옥액을 내게 준다면 통쾌하게 죽여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막비강은 이위가 흉흉한 기세로 다가서며 말하자 겁이 와락 났다.

[... 그만둬요!]

그는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하하! 어딜 가느냐?]

하지만 막비강이 미처 다섯 걸음도 도망치지 못했을 때 이위의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산악 같은 경기가 등뒤로 엄습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막비강이 그것을 피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퍼펑!

[아악!]

막비강은 등판에 강력한 장력을 얻어맞고 선혈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위는 일장으로 막비강을 기절시킨 후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보물을 지닌 것이 죄니 나를 탓하지 마라! 금강옥액은 마땅히 나 같은 영웅이 마셔서 공력을 증강시켜야지 옳다.]

그는 서둘러 막비강의 손에서 금색 호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호로 안에 금강옥액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호로를 들어 보며 이위는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우라질! 그냥 빈 호로가 아닌가? 이제 산장으로 돌아가서 장주에게 뭐라고 말하지?)

화가 난 그자는 막비강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염병할 놈! 빈 호로는 네놈에게 돌려줄 테니 함께 땅속에 묻혀라!]

이위는 자신이 소장주를 살해한 것이 발각될까 염려되었고, 또 호로 속이 텅 비어 자기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지라 호로를 막비강 곁에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질풍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헌데 이위가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막비강의 몸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사실 막비강은 죽은 게 아니었다. 비록 금강불괴지신은 못되었으나 금강옥액은 그의 온몸을 무쇠처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상태가 아닌가?

이위의 장력이 바위를 부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막비강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단지 일시간의 충격으로 기혈이 막혔던 것인데 이위가 떠나면서 허리를 걷어차 준 덕분에 막혔던 기혈이 확 뚫려 버리기까지 했다.

외부의 타격에 반응하여 임독이맥 주위에 몰려 있던 금강옥액의 약력은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통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일컬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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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황금전장. 깊은 밤. 정문이 닫혀있다.

황금전장 내의 건물들도 대부분 불이 꺼져 있고.

건물들 사이를 뛰듯이 걸어가는 주대육. 굳은 표정. 요리사1이 겁먹은 표정으로 따라간다. 큰 개를 끈 무사들과 황금수라들이 주변에 있지만 막지는 못한다.

곧 육중한 건물이 주대육 앞에 나타난다. 돌과 쇠로 이루어진 창문도 없는 육중한 건물. 감옥이다. 철문으로 이루어진 감옥 입구에 황금수라들과 귀견수가 있다.

주대육; [부단장!] 외치며 다가가고

귀견수; (왔군.) + [어서 오십시오 총주방장님.] 고개 좀 숙이고

주대육; [대체 무슨 이유로 이청풍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있는 겐가?] 멈춰서며 분노

주대육; [그 아이는 내 주방에 꼭 필요한 아이일세. 당장 풀어주게나.]

귀견수; [저도 이청풍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다는 건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혐의와 물증이 너무도 확실해서 비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대육; [혐의와 물증이라니?] [이청풍이 대체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건가?]

귀견수; [무림맹에서 보낸 예물 중 하나를 도난당했는데...] [예물이 보관되어 있던 장소에 이청풍이 혼자 머물렀었습니다.]

주대육; [그리고 그 예물이 이청풍의 몸에서 발견되었고?] 눈 부릅

귀견수; [그렇습니다.]

주대육; (멍청한 놈! 그렇게 간단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 [자네와는 백날 얘기해봤자 소용없고...] 홱 돌아서고

주대육; [장주를 직접 만나보겠네.] 걸어가고. 하지만

귀견수; [포기하십시오 총주방장님!] 한숨 쉬고

주대육; [말리지 말게! 내가 영입한 놈이 죄를 뒤집어썼는데 어떻게 묵과할 수가 있는가?] 걸어가며 돌아보지만

귀견수; [그래봤자 소용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의미심장하게 말하고

[!] 눈 부릅뜨는 주대육

주대육; (설마 이청풍을 옭아 넣은 게...) 돌아보자

말없이 고개 끄덕이는 귀견수

주대육; (끝장이다.) 비틀하고

요리사1; [총주방장님!] 급히 주대육을 부축하고

주대육; (장주가 직접 지시한 일이라면 이청풍이 살아서 뇌옥을 빠져나올 가능성은 없다.) 요리사1에게 부축된 채 절망하고

 

#70>

감옥 내부. 음침하고 살벌하다.

황금수라들이 지키고 있는 철문. [끄아아악!] 철문 안에서 비명이 들리고

청풍; [끄으윽!] 고문당하고 있는 청풍. 두 손이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있다. 상체를 벌거벗었는데 사우와 싸울 때 입은 상처들이 벌어져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고. 치치치! 그 상처를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가 쑤셔지고 있다. 고문을 하는 놈은 얼굴에 복면을 쓴 간수. 복면 속에서 눈이 번들거리고 있고.

이세창은 서서, 벽세황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보고 있다. 두 놈 뒤에는 역시 복면을 쓴 간수 두 놈이 서있다.

간수1; [다른 놈이 미리 난도질을 해놔서 일하기가 한결 쉽구만.] 청풍의 상처에 인두를 지지며 복면 속에서 변태처럼 웃고

치치치! 살이 타들어가고

간수1; [어차피 네놈은 입을 열게 되어 있어.] [하지만 기왕이면 늦게 입을 열어다오.] 변태처럼 웃고

간수1; [그래야 내가 즐기는 시간도 길어질 테니 말이다.]

청풍; [끄윽...] 이를 악물고 신음을 흘리고

벽세황; [잠시 쉬자.] 손을 들고

간수1; [예 소장주님!] 아쉬운 표정으로 청풍의 상처에서 인두를 뽑으며 물러서고

청풍; [으으으...] 헉헉 벌벌 떨고

벽세황; [어떠냐? 이제 진실을 말할 준비가 된 것같은데?]

청풍; [... 말했잖습니까?] [장총관과는 요리에 관련된 것과 무림맹으로의 영입 건에 대해서만 대화를 했다고...] 노려보며 이를 갈고

간수1; [이 새끼가 아직 덜 지져졌구만.] 눈을 부라리며 다가가는데

벽세황; [겨우 그 정도 내용의 대화를 나누자고 장총관이 단음강기를 펼쳤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청풍; [어떤 대답을 듣고 싶으신 거요?] 노려보고

간수1; [이 새끼가 정말...] 눈 부라리며 인두로 청풍을 때리려 하고

이세창; [기다려라.] 손을 들어 말리고

간수1; [...]

청풍; [내가 새벽녘에 목격한 일을 장총관에게 까발렸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요?] [그래서 무림맹과의 혼담이 깨질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겁니까?] 이를 갈고

벽세황; [정말 소소에 관련된 일은 장총관에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냐?] 눈 번득

청풍; [내가 거짓말을 하는지 안하는지는 장총관의 반응을 두고 보면 알 거 아니오?]

벽세황; [일리가 있군.] ! 일어나고

벽세황; [일단은 살려두겠다.] 돌아서고

벽세황; [하지만 만에 하나 내 누이의 혼담이 깨지면 그 날이 네놈의 제삿날이 될 것이다.] 문으로 가고. 간수들이 급히 문을 열어주고. 이세창도 힐끔 청풍을 돌아보며 벽세황을 따라가고.

밖으로 나가는 벽세황과 이세창

청풍; (날 의심해서 함정에 빠트렸다 이거지?) 벽세황과 이세창의 뒷모습 노려보며 이를 갈고. 간수들이 문을 다시 닫으려 하고

<빚은 반드시 갚아주겠다 벽세황!> 닫히는 감옥의 문을 등지고 걸어오며 오만상 쓰는 벽세황을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71>

여전히 깊은 밤. 황금전장의 다른 곳

여자 무사들이 지키고 있는 화려한 건물. #33>에 나온 벽소소의 거처

여자무사1; [이청풍은 뇌옥에 갇혀 고문을 당하는 중입니다.] 화장대에 앉아 화장하는 잠옷 차림의 벽소소에게 보고하는 여자무사1.

여자무사1; [무림맹에서 보낸 패물을 훔친 혐의로 뇌옥에 갇혔으니 이청풍을 아는 자들도 부당한 처사라 생각하진 못할 것입니다.] 벽소소의 뒤에 서서 말하고

벽소소; [간수들에게 말해. 그 새끼 절대 살아서 뇌옥을 나오지 못하게 하라고!] 이를 바득 갈며 화장하고

여자무사1;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차갑게 웃고

여자무사1; [우리 황금전장에 죄를 짓고 뇌옥으로 끌려들어간 인간치고 다시 햇빛을 본 자는 없으니까요.]

벽소소; (부족해!) 이를 갈며 마녀처럼 눈을 희번득이고

벽소소; (난 하마터면 그 새끼 때문에 아버지 손에 죽을 뻔 했었다.) (그냥 그 새끼를 죽이는 보복으로 부족해!)

벽소소; (죽기 전에 진짜 지옥을 경험하게 해줘야만 직성이 풀릴 것이다.) 독기를 띤 벽소소의 얼굴 크로즈 업

 

#72>

금릉. 새벽.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아침.

환락가. 날이 밝아오는 새벽이라 한산하다. 쓰레기만 뒹굴고 인적은 없다. 기루와 술집은 문을 닫았다. 간간이 보이는 도박장에만 불이 켜져 있고

환락가의 뒷골목. 음침한 인상의 건달들이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어느 장원. 무사들은 대부분 손가락이 한 두 개씩 없다. 단지회의 건달들이다.

문이 닫혀있는 정문에는 <斷指會>라는 글이 적힌 현판이 걸려있다. 금릉의 뒷골목을 장악하고 있는 유력한 흑사회 조직 단지회의 본부다.

장원 내의 어느 건물. 역시 건달 몇이 경비를 서고 있고

 

불이 켜지지 않아 어둑한 실내. 침실인데 넓은 침대에 사우가 거의 다 벗은 두 명의 여자를 끼고 잠이 들어있다. 여자들은 기녀들이고. 문득

! ! 사우의 뺨을 건드리는 뾰족한 쇠꼬챙이. 찌르는 건 아니고 회초리처럼 건드린다.

사우; [하지마!] 잠에서 깨며 오만상 쓰고. 눈을 뜨진 않았고. 하지만

! ! 계속 사우의 뺨을 건드리는 쇠꼬챙이다

사우; [어떤 지랄 맞을 놈이냐?] [하지 말라는 말 안들려?] ! 버럭 고함을 지르며 일어나고. 그러자. [!] [!] 사우의 좌우에서 자고 있던 두 년이 비명 지르며 깨어나고

기절초괴; [이런 놈이시다!] 침대 옆에 화려한 의자를 비스듬히 놓고 앉아서 다리를 꼰 채 웃고 있는 기절초괴. 다른 작품의 기절초괴와 같은 캐릭터. 이 작품에서 기절초괴는 마교를 이루는 마교사가중 암흑마가의 가주다. 기절초괴 뒤에는 온몸을 검은 천으로 휘감은 여자가 한명 서있다. 얼굴이 유달리 하얀 그 여자는 다른 작품의 소수마녀다. 이 작품에서도 이름은 소수마녀

 

[!] [!] 건물 밖에서 경비 서던 건달들 흠칫! 놀라며 건물을 돌아보고

 

사우; [으헉!] 펄쩍! 기겁하며 뛰어오르고

[꺄악!] [엄마야!] 사우 좌우에 누워있던 헐벗은 두 여자도 비명을 지르며 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리려 하고. 기절초괴의 반대쪽으로. 하지만

기절초괴; [시끄럽다 이년들아!] 후욱! 입으로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시늉하고. 그러자

[꺄아악!] [아악!] 슈욱! 화악! 비명 지르는 여자들의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와 기절초괴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이고. 사우는 튀어 올랐던 침대에 다시 내려서다가 그걸 보면서 기겁하고

슈우! 츠츠츠! 무언가 빠져나간 여자들의 몸뚱이가 미이라가 되고

사우; [히익!] 벽쪽으로 붙으며 공포에 질리고

슈우! 슈욱! 여자들의 몸에서 빠져나온 기운이 모두 기절초괴의 입으로 들어가고. 그러자

털썩! 퍼억! 미이라가 되어 침대에 쓰러지는 두 여자

사우; (저 년들, 몸속의 정기(精氣)를 단번에 흡수당했다!) 벽에 등을 붙인 채 덜덜 떨고

기절초괴; [별로야!] ! 입을 소매로 닦으며 오만상 쓰고

기절초괴; [역시 닳고 닳은 년들의 정기는 맛이 찝찝해. 먹지 않은 것만 못했어.] 투덜거릴 때

[회주님!] [무슨 일입니까?] ! 덜컹!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건들 두 놈이 칼을 뽑아들고 뛰어 들어오지만

! ! 그놈들의 가슴에 하나씩 박히는 하얀 손자국

소수마녀가 돌아보며 손을 내밀고 있는데 검은 옷소매에서 빠져나온 소수마녀의 손이 분칠을 한 듯 하얗다. 너무 하얘서 빛이 나는 것 같고

콰당탕! 퍼억! 따당! 도로 튕겨나가 마당에 등부터 나뒹구는 두 놈. 칼이 바닥에 떨어지고. [!] [!] 뒤따라 뛰어 들어오려던 놈들이 기겁하는데

[끄윽!] [꺼억!] 츠츠츠! 쓰러졌다가 힘겹게 일어나는 두 놈의 몸이 석고처럼 하얗게 변하고 있다. 소수마녀의 장풍을 맞은 가슴 부분의 옷은 부서져 흩어지면서 가슴에 하얀 손바닥 자국이 새겨진 게 보이고

[저럴 수가...] [저 놈들 몸이 돌처럼 변하고 있다!] 다른 건달 놈들 기겁하며 물러서고

[으으으...] [... 안돼!] 자신들의 두 손을 보며 벌벌 떠는 두 놈. 헌데 그 직후

! 쩌적! 그놈들의 몸에 균열이 가더니

퍼퍽! 털썩! 몸이 그대로 부서져 무너지는 두 놈

[히익!] [... 몸뚱이가 석고처럼 부서졌다.] [저게 무슨...] [... 마공에 당했다!] 다른 건달들 공포에 질려 물러나고

사우; (우리 암흑마가(暗黑魔家)의 오대마공(五大魔功)중 하나인 소수인(素手印)...!) + [... 물러가라!] 침대에서 급히 내려서며 밖의 건달들에게 외치고. 소수마녀는 들었던 손을 내렸고

건달들 놀라다가 사우를 돌아보고

사우; [... 날 찾아온 귀빈들이시다.] [소란피우지 말고 물러가라.] 문으로 가서 문을 닫으려 하며

[예 회주님!] [존명!] 안도하고 포권하는 건달들

! 안에서 문을 닫는 사우. 이어

사우; [속하 사우! 위대한 암흑마가의 가주(家主)이신 기절초괴(奇絶招怪)님을 알현합니다!] 문간에서 기절초괴에게 절하며 벌벌 떨고

기절초괴; [이리 와! 겁먹지 말고...] 쇠꼬챙이를 까닥여서 자기 앞으로 오라는 시늉하고. 스륵! 앉아있는 의자가 저절로 빙글 돌아서 문쪽을 보고, 소수마녀는 옆으로 물러서고

사우; [... 존명!] 덜덜 떨면서 기어서 기절초괴에게 다가오고

기절초괴; [어디 보자...] ! 꼬챙이 끝을 사우의 이마에 대고. 공포에 질리면서도 피할 생각은 하지 못하는 사우

! 지지지! 사우의 이마를 살짝 찌른 기절초괴의 쇠꼬챙이가 진동하며 빛을 발하고

기절초괴;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다 했더니 계집과 너무 많이 놀아나서가 아니라 극심한 빈혈 때문이로군.] 끄덕이고

기절초괴; [몸속에 철분이 심각할 정도로 모자라.] [철기산혼무를 무리하게 구사한 때문이겠지?] ! 사우의 이마에서 꼬챙이를 떼고. 꼬챙이가 떼어진 사우의 이마에는 상처가 생겨서 피가 주르르 흘러내린다.

사우; [... 섭장천의 제자이기도 한 황금공자 벽세황과 싸우느라 무리를 해서...] 눈치 보며 식은땀 흘리고

기절초괴; [실은 그 일 때문에 본좌가 직접 네놈을 찾아온 것이다.] 표정이 갑자기 살벌해지고

사우; [... 용서를...] 이마 바닥에 붙이고 납작 엎드리며 달달 떨고

기절초괴; [분면랑군 사우!] [금릉 흑사회의 유력한 조직인 단지회의 회주 무면악교(無面鰐鮫)!]

기절초괴; [진짜 정체는 암흑마가의 호법들인 암흑팔령(暗黑八靈)의 서열오위 철기마령(鐵氣魔靈)!] [본좌가 네놈을 단지회 회주 자리에 앉히면서 맡긴 사명이 무엇이었는지 읊어봐라.] 쿠오오! 온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고

사우; [... 황금전장 장주 냉혈전호의 큰 딸... 벽소소를 유혹하여 우리 암흑마가의 화수분(花水盆)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이마를 바닥에 붙인 채 식은땀을 흘리고

기절초괴; [그랬는데 지금의 상황은 어떠하냐?] 음산한 표정으로 웃고

사우; [... 속하가 벽소소를 유혹한 사실이 들통 나서... 어제 새벽 벽세황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비지땀 흘리며 대답하고

기절초괴; [그 말인즉슨 벽소소를 이용해서 황금전장의 재물을 빼돌리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는 뜻이겠지?] 냉소

사우; [... 죽여주십시오.]

기절초괴; [원래는 그러려고 네놈을 찾아왔었다.]

사우; [으으으...] 달달 떨고

기절초괴; [그랬는데... 암흑팔령의 막내인 소수마녀(素手魔女)의 탄원이 있어서 생각을 바꿨다.] 자기 뒤의 소수마녀를 힐끔 보고. 소수마녀는 표정이 없고

사우; [... 막내! 고맙다!] 눈만 조금 돌려 소수마녀를 보며 억지로 웃고

여전히 표정이 없는 소수마녀

기절초괴; [소수마녀 왈, 계집은 첫 남자를 잊지 못한다!] [비록 정체를 알았다 해도 벽소소는 너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하더라.]

사우; (살았다.) + [... 맞습니다.]

사우; [속하가 목적을 갖고 자신에게 접근한 사실을 알았어도 벽소소는 절대 속하를 미워하지 못할 것입니다.]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좀 들어서 기절초괴의 눈치를 살피고

기절초괴; [그 새끼...] 피식 웃으며 살벌하던 얼굴 풀고

기절초괴; [네 기막힌 방중술에 벽가년이 뿅 갔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사우; [속하는 사실 무공보다는 그쪽 방면이 더 특기인지라...] 비열하게 웃으며 식은땀 흘리고.

찡그리는 소수마녀

기절초괴; [뭐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피식 웃고

기절초괴; [하여간 그래서 네놈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기로 했다.]

사우; [... 감사합니다 가주님!] 안도

기절초괴; [벽소소가 위진천과 결혼을 하든 말든 상관없다.] [그년을 살살 녹여서 일 년에 최소한 백만 냥 이상을 네게 바치도록 만들어라.] [그럼 지금까지의 과오를 없던 것으로 해주겠다.] 음산하게 웃고

사우; (... 백만 냥...) 침 꿀꺽 삼키며 긴장하는 얼굴

 

#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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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난감한 관계

 

 

정신을 차린 직후 고현경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리한 통증이 느껴지는 하체를 뜨겁고 단단한 이물질이 범하고 있다.

그와 함께 왼쪽 젖가슴에서도 통증과 함께 찌릿찌릿한 쾌감이 번지고 있다.

(흐윽!)

눈을 뜬 고현경은 진저리를 쳤다.

어떤 사내가 자신의 몸에 올라탄 채 발작적인 몸부림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려 보이는 그 사내는 입으로 자신의 왼쪽 젖꼭지를 문 채 몸을 흔들어대고 있다.

(죽일...)

자신의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고현경은 충격과 분노에 휩싸였다.

고현경은 당장 그자의 목을 부러트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젖꼭지를 물고 있던 사내가 비명같은 신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을 부릅뜬 것으로 보아 절정이 임박한 것 같았다.

부르르!

헌데 그 자의 목을 부러트리려던 고현경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황홀경에 빠져 헐떡이는 소년의 얼굴이 너무도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 사형?)

고현경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눈이 풀린 채 필사적인 몸짓을 하는 소년의 얼굴은 바로 자신의 사형이고 사촌오빠인 고창룡의 어린 시절 모습을 빼닮았기 때문이다.

(...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어린 시절의 사형이 날 범하고 있다니...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고현경은 소년 시절의 고창룡이 자신을 범하고 있는 것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 사이에도 소년의 빈약한 아랫도리는 고현경의 가랑이 사이에서 발작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을 범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고창룡의 어린 시절을 빼닮았다는 것을 느낀 순간 고현경의 몸도 열기에 휩싸였다.

서로의 몸이 결합된 부분이 불에 덴 듯 화끈거린다.

또한 소년이 어설프지만 필사적인 몸짓에 따라 찌릿 찌릿한 전율이 온몸으로 치달린다.

죄송... 죄송해요 사고!”

그때 소년이 비명같이 흐느끼며 발작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고현경은 소년의 몸짓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지 알아차렸다.

원래대로라면 하지 못하게 저지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허리가 시큰거리고 하체가 저절로 물결을 일으켜 소년의 행위에 동조한다.

그리하여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하체를 밀어붙이는 순간 고현경도 절정에 이르렀다.

머릿속에서 오색 불꽃이 터지고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뜨거운 분출이 몸 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을 고현경은 생생하게 느꼈다.

(임신... 임신할지도 몰라!)

고현경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하지만 싫지가 않았다.

싫기는커녕 짝사랑했던 사형을 닮은 소년과 한 몸이 된 채 형언할 수 없는 충만감과 환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작은 엉덩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리고 소년과 함께 절정을 느끼기를 반복했다.

죽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쾌감이 존재할 줄을 그녀는 상상도 못했었다.

이윽고 소년이 헐떡이며 그녀의 몸 위에 널부러졌다.

끝이 없을 것같던 환희가 마침내 끝이 난 것이다.

소년은 얼굴을 고현경의 가슴에 부비며 가빠진 숨을 골랐다.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소년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

숨을 고르던 고검추는 기겁했다.

고현경의 손이 자신의 등과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것을 느낀 것이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고검추의 눈에 고현경이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내 양정이 주입된 덕분에 정신을 차리셨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의 얼굴에서 열기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고검추의 양기가 두 번 거푸 주입되자 고현경을 욕화에 휩싸이게 만들었던 탕음마고가 만족하고 잠이 든 것이다.

"너는... 누구냐?"

고현경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분노보다는 체념이 실린 음성이다.

이미 쌀은 익어 밥이 되었는데 이 어린 소년에게 죄를 물어봐야 돌이킬 수 없다.

하물며 자신은 소년과 함께 황홀하기 이를 데 없는 절정을 맛보기까지 했다.

"... 죄송합니다!"

고검추는 사색이 되어 고현경의 몸에서 일어났다.

고검추가 떨어지는 순간 고현경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결합되어있던 부분에서 아찔한 통증이 느껴진 때문이다.

(나는 더 이상 처녀가 아니게 되었구나.)

고현경은 치마를 내려 맨살을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사고!”

고현경의 몸에서 떨어진 고검추는 그녀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 사고?"

몸을 일으키던 고현경의 입에서 비명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비로소 고검추가 절정의 순간 자신을 사고라 불렀던 것을 떠올린 것이다.

(... 사형을 빼닮은 아이가 나를 사고라고 불렀다는 것은...!)

고현경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의 몸을 차지한 이 소년이 누군지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름... 이름이 뭐냐?”

부들부들 떨며 일어나 앉은 고현경은 자신의 발치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소년에게 물었다.

"... 소질의 이름은 고검추라 합니다. 어머니가 사고를 찾아뵈라고 하셔셔 찾아왔다가 그만..."

무릎을 꿇고 있던 고검추가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 네가 사형의 아들이란 말이냐?"

고검추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고현경은 고검추의 정체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

"...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가르침을 받으러 사고를 찾아왔습니다."

고검추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현경을 올려다보았다.

"...!"

신음을 토하는 고현경의 옥용이 복잡한 감정으로 물들었다.

짝 사랑하던 사형의 아들이 십칠 년 만에 자신을 찾아왔다.

사형에게 아들이 있음은 어쨌든 경하할 일이다.

헌데 운명의 장난으로 자신은 사형의 아들과 관계하는 패륜을 저지르고 말았다.

하물며 사형은 고현경 자신의 사촌 오빠다.

, 고현경은 다른 사람도 아닌 조카에게 처녀를 바치고 만 것이다.

그 사실이 그저 기막힐 뿐이다.

하지만 어쩌랴? 쌀은 익어 밥이 되었고 나무는 깎여서 배가 되어버린 형국이니...

"정말... 정말 다행이로구나. 사형께 유복자가 있었다니..."

그녀는 복잡한 심정을 억지로 숨기며 웃음을 지었다.

고검추는 고현경의 말에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가 결혼한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형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직후 당사저가 말없이 호천무맹을 떠났었다. 그렇다면 사형의 아내가 당사저였단 말인가?)

고현경은 옛일을 회상하며 심사가 복잡해졌다.

그녀는 동문수학했던 당혜선도 대사형 고창룡을 짝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고현경보다 세 살 위였던 당혜선은 십자검존 종극이 거둔 네 명의 제자들 중 셋째였다.

 

-철사자 고창룡!

-옥기린(玉麒麟) 종무(種武)!

-날수비연 당혜선!

-철봉황 고현경!

 

이들이 십자검존의 제자들로 하나같이 빼어난 자질을 지녀서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라 불리기도 했다.

무맹사신재의 둘째인 옥기린 종무는 십자검존 종극의 조카이기도 했다.

하지만 종극은 인중용봉(人中龍鳳)으로 불리는 빼어난 사형과 사매들에게 묻혀 존재감이 별로 없다.

그자는 오래 전에 호천무맹을 떠나 본가인 십자검막(十字劒幕)으로 돌아간 상태다.

(이 아이의 나이로 미루어보면 당사저는 호천무맹을 떠날 무렵 이미 임신하고 있었겠구나.)

고현경은 아직 어린아이의 모습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고검추를 살펴보며 생각했다.

그녀가 보기에 고검추는 당혜선의 아들일 가능성이 충분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분부라면... 당혜선이란 분이 네 어머니겠구나."

고현경은 확실하게 확인하기 위해 말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소질의 생모는 아니고 길러 주신 양모이십니다."

"!"

고검추의 대답에 고현경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고검추는 고현경에게 전후사정을 얘기해 주었다.

양모 당혜선이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한 후 투신한 일, 죽어가는 천면음마를 만났던 일 등등을...

"사신각주! 그놈이 감히 당사저를 시해했단 말이지?"

고검추의 이야기를 들은 고현경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그런 그녀의 머릿결은 절로 일렁이고 두 눈에서는 시퍼런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

고검추는 입술을 깨문 채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사신각주에게 유린당하던 양모 당혜선의 무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고검추의 그 모습을 본 고현경은 가슴이 아려왔다.

"진정해라 추아야. 당사저의 원수는 반드시 내 손으로 갚아줄 테니..."

그녀는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흐윽!"

고검추는 고현경의 품에 안기는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한 달 사이에 겪은 일들은 아직 어린 소년인 고검추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도 어찌 어찌 견뎌왔는데 진심으로 위로해주는 친인을 만나자 자신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버렸다.

(가엾은 것...)

고현경은 오열하는 고검추를 품에 안고 다독이며 한숨을 쉬었다.

고검추가 그동안 겪었을 두려움과 분노, 막막함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그녀였다.

어느덧 그녀는 고검추가 자신을 범한 일 따위는 별일 아닌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오히려 고검추를 위로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해줄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고검추는 사랑했던 사형의 아들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신의 핏줄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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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둠 속의 눈동자 (2)

 

 

삼십 장 정도 더 들어갔을 때 동굴이 갑자기 높아지고 넓어졌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마치 광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등을 펴고 심주은을 추켜올려 업으면서 임청우는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맥이 미미하게 뛰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어.”

심주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중...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임청우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주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청우의 분노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들어선 지하광장은 높이 오장에 너비는 십 장 정도 되는 곳인데 임청우 등이 나온 것과 비슷한 동굴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중과 노파가 따라 들어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굴이 많아서 자신들이 어느 동굴로 숨었을지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광장을 가로 질러 맞은편에 있는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일단은 곧 추격해올 추적자들로부터 숨는 것이 급선무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길 봐!”

임청우의 등에 업혀있는 심주은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더듬거렸다.

츠으으!

임청우가 들어가려던 동굴에서 오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동굴 안쪽에서 파란 불덩어리 두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잡으며 말했다.

아까 동굴 초입에서 만났던 그 괴물이다.”

바로 그 순간 파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껌벅껌벅하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발길을 그 동굴을 향해 돌렸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 그쪽으로 가지마.”

겁에 질린 심주은이 임청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는 의연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죽음 가운데서 생을 찾을 수 있는 법이야.”

물론 심주은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했지만 심주은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서도 어떻게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임청우는 심주은이 아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으!

임청우가 동굴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파란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임청우는 걸음을 빨리하여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과는 달리 제법 커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 !

동굴 안쪽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이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임청우는 하마터면 발을 헛딛을 뻔했다. 동굴 바닥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그 연못 주변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한 겨울의 고드름처럼 가득 늘어져 있다.

파란 눈동자 네 개가 종유석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괴물이 두 마리인가?)

임청우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실소했다.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연못물에 비친 그림자였던 것이다.

임청우는 동굴 벽 쪽에 붙어서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들의 언저리를 잡고 연못을 지나갔다.

하지만 연못을 건넜을 때 그곳에 있던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어디선가 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임청우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예상을 깨고 눈동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유소기가 그 할망구를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동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설사 그렇다 해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자네 편이 되어줄 수 없으니까.”

묵궁 진패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하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지금 죽을 수는 없네.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네.”

, 그 이유 때문에 유소기가 우리를 기만하고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는 것을 묵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네.”

 

임청우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보니 바위에 두 사람이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소기...! 검주 유소기가 여기까지 들어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에 업힌 심주은도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유소기와 나는 지독한 악연으로 맺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동굴 속에서 그를 만난다면 정말 살아나기는 글렀겠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말을 주고받는 인물들은 칠절 중 지존수(至尊手) 사마명과 묵궁(墨弓) 진패선이었다.

물론 그들을 본 적이 없는 임청우로서는 두 사람이 그 이름도 쟁쟁한 무림칠절중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때 묵궁 진패선이 일어서며 말했다.

만용으로 귀중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부모의 복수보다는 지나치게 유소기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네.”

지존수 사마명은 아픈 곳을 찔린 사람모양 입을 열지 못했다.

진패선은 묵궁을 앞세우고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마명은 무명지가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패선, 자네는 모를 걸세. 난 유소기가 처음부터 싫었네. 기회만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걸세.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고...”

독백을 마친 사마명도 곧 일어나 진패선이 사라진 쪽으로 가버렸다.

임청우가 있는 곳은 아마도 그들이 먼저 지나온 길인 듯 했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저 사람도 아마 유소기와 같은 칠절 중의 한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동료인 유소기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칠절이란 존재가 무림에서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구나.)

안의 도적은 막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유소기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감이 들었다.

그때 심주은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차라리 그들을 만나는 게 나아. 유소기를 만나면 살아날 방법이 없어.”

심주은이 말하는 그들이란 물론 중과 노파다.

그녀로서는 임청우가 그 파란 눈을 좇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임청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피하려다 만나는 경우도 있어. 특히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는...”

심주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떻게 된 게 임청우의 말에는 반박할 말도 없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임청우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난 그 파란 눈이 무섭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츠으으!

다시 그들 앞에 파란 눈이 나타났다.

임청우는 검을 굳게 잡고 다가가며 속으로 말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병()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윤즉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만 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알고 나면 두려움이란 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임청우는 파란 눈을 따라서 걸어갔고, 심주은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

 

임청우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파란 눈을 따라 가느라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란 눈은 갈래진 동굴을 여러 개 지나서 그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놓았다.

그곳은 유황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동굴 속에 안개처럼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부글부글!

작은 온천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있다.

온천이다!”

임청우는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어떤 의서에서 온천이 사람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심주은의 내상을 치료하는 데에 이 온천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츠으!

그때 파란 눈동자가 온천위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내 사르르 빛을 잃고 온천으로 가라앉았다.

임청우는 사라지는 눈동자 뒤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눈동자는 실로 눈동자만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갑자기 온천에서 깡마른 손이 하나 솟아나와 임청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

임청우는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발목을 잡고 있는 깡마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임청우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었던 청강사자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다.

!

청강사자검이 그 손목을 베어버렸다.

순간 임청우의 발목을 잡고 있던 깡마른 손과 베어진 손목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수증기 속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임청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현실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괴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추춧!

온천의 물이 약간 솟구치면서 갑자기 물을 밟고 귀신같은 몰골의 노파가 나타났다.

말라붙은 젖가슴과 듬성듬성한 체모... 깡마른 몸은 해골에다 껍질을 씌워 놓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노파는 파랗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임청우를 바라보았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한걸음 물러섰다.

...”

등에 업힌 심주은은 그만 혼절해버린 뒤였다.

당신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임청우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임청우는 노파가 귀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노파가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화악!

내민 노파의 손에서 강한 흡입력이 쏟아져 나와 임청우를 끌어당겼다.

임청우는 공력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의 공력은 삼괴 중 철선동시의 공력을 온전히 흡수한 후에도 더욱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의 임청우의 공력은 살아있을 때의 철선동시보다도 삼할 이상 고강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내공에 있어서 임청우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데...

슈욱!

임청우는 마치 마차에 끌려가는 강아지나 다름없이 벌거벗은 괴노파의 손으로 딸려갔다.

(... 정말 귀신이란 말인가?)

임청우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노파의 모습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도 없으니 두려움이 왈칵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끌려갔을 때 임청우는 전력을 다해서 청강사자검을 던졌다.

파웃!

푸른빛이 뿌연 수증기 속을 가르며 번갯불처럼 노파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성공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노파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화악!

노파는 임청우의 좌측으로 돌아서 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 요물!”

추악한 얼굴에 몸서리치며 임청우는 주먹으로 노파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나 주먹에 와닿는 느낌은 마치 솜뭉치를 두드린 듯한 것이었다.

(안돼!)

임청우가 대경실색하여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노파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임청우는 이내 천지가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득해지는 그의 귓전으로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심주은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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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세의 비밀

 

 

 

[낄낄낄! 지난 십 년 동안 발바닥이 닳도록 찾아다녀도 못 찾겠더니만... 정작 만나려니까 이렇게 쉽게 만나는구나 곡가야!]

무협제원은 음산한 괴소를 터뜨렸다.

[클클!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네가 지니고 있는 보물까지 취득할 수 있게 되었구나.]

그자의 말에 염라철장은 내심 흠칫했으나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넌 오늘도 십년 전 일장의 빚을 갚지 못할 것이다, 원숭이놈! 하물며 내게는 네게 줄 보물 따위도 없다.]

[크크!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애로 아느냐?]

무협제원은 야수같이 눈을 희번덕이며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용문(龍門) 천불동(千佛洞)의 어느 석실에서 청구이보 중 하나인 금강옥액을 얻었음을 알고 있다! 순순히 금강옥액을 내놓지 않으면 오늘 네놈을 염라대왕 앞으로 보내 버리겠다.]

무협제원의 말에 염라철장은 이를 부득 갈았다.

[금강옥액이 내 몸에 있지도 않지만 설사 있다 해도 네놈에게 주어 무림에 해를 끼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크카카카카...!]

그러자 무협제원은 갑자기 징그러운 괴소를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 징그러워 듣는 사람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사실 그것은 보통의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신원탈백소(神猿奪魄笑)!

 

바로 웃음소리로 사람의 혼을 빼앗는다는 무협제원의 독문마공인 것이다.

[으핫하하...!]

염라철장도 황급히 내공을 극한까지 돋우어 앙천광소를 터뜨려 상대방의 징그러운 괴소에 맞섰다.

[킬킬킬!]

하지만 무협제원의 징그러운 괴소는 염라철장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눌리지 않고 점점 더 높아만 갔다.

(... 이놈의 내공이 십년 전보다 훨씬 강해졌구나!)

염라철장은 무협제원의 괴소에 내장이 온통 진탕되는 것을 느끼고 안색이 이지러졌다.

음공으로는 무협제원을 상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염라철장은 웃음을 멈추고 급히 고함을 질렀다.

[무협제원! 음공으로는 쉽게 승부가 나지 않으니 그만 중지하자.]

무협제원이 차가운 코웃음을 날렸다.

[주둥아리 닥쳐라! 이번에 놓치면 두 번 다시 네 놈을 붙잡을 수 없게 될 터! 오늘 기필코 승부를 내고 말겠다.]

염라철장도 침중하게 외쳤다.

[열흘 후 황산 시신봉에서 보자! 반드시 약속을 지킬 테니 오늘은 그만 헤어지자.]

[헛소리말고 내 초식이나 받아봐라!]

꽈르르릉!

무협제원은 염라철장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긴 팔을 맹렬히 휘둘러 왔다. 보통 사람보다 두 배는 긴 그자의 팔이 휘둘러지자 광풍이 휘몰아치며 두 줄기 강맹무비한 잠경이 염라철장을 휩쓸어왔다.

[오냐! 끝장을 내자!]

좋게 끝나기는 틀렸음을 깨달은 염라철장도 즉시 진기를 극한까지 돋우어 양 손바닥을 밖으로 뒤집었다.

퍼퍼펑! 꽈르르릉!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모래 기둥이 공중으로 십여 장이나 치솟았다.

우두둑! 콰득!

직후 두 사람의 네 팔이 그대로 얽혀 버렸다.

원래 무협제원의 진력은 내향성(內向性)이고 염라철장의 진력은 외향성(外向性)이다. 그 때문에 일단 피차의 팔이 한데 얽히자 어느 쪽도 감히 먼저 공격을 철회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상대방의 내공이 봇물 터지듯 흘러들어와 내장을 박살내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다.

별 수없이 두 사람은 서로 맞붙어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내공을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두 숙적은 마치 사이좋은 친구처럼 마주 팔짱을 낀 채 꼼짝 않고 서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시진 남짓이 지났을 때였다.

[으음! 여기가 어디지?]

동굴 안에 누워 있던 소년 막비강이 신음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내가 왜 이런 곳에...!]

정신을 차린 막비강은 자신이 석동 안의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음을 발견하고 만면에 곤혹의 빛을 머금었다.

그는 석동 입구에서 밝은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헌데 그때 그는 자신의 품속이 묵직함을 느꼈다.

(품속에 무엇이 들었지?)

막비강은 의아해하며 품속에 손을 넣었다. 곧 그의 손에는 하나의 술 호로와 종이쪽지가 쥐어졌다.

(이게 다 뭘까?)

막비강은 호로와 종이 조각을 번갈아 보며 갸웃했다.

그러다가 그것을 든 채 석동 밖으로 걸어나갔다.

[... 시체!]

헌데 석동 밖으로 나서던 막비강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 질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석동 입구 주위에는 선혈로 물들어 얼굴을 분간하기 어려운 네 구의 시체와 두 명의 마치 죽은 사람 같은 노인이 서로 팔이 엉킨 채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으!]

막비강은 너무 놀라 자신도 모르게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 모두 죽었구나!]

 

잠시 시간이 지나자 막비강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들은 다 누구지? 왜 이런 곳에서 죽어 있는 건가?)

막비강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여섯 사람 중 염라철장이 자신을 납치해 온 장본인이라는 것 정도만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었다.

(이 호로는 또 누가 내 품속에 넣어 준 걸까?)

그는 고개를 숙여 호로를 내려다보았다.

츠으으!

그의 수중에 들린 호로는 마침 떠오른 햇살을 받아서 눈부신 금광을 발산하여 매우 아름다웠다.

(크기가 주먹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호로가 왜 이렇게 무겁지?)

막비강은 곤혹을 금치 못했다. 그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마치 쇳덩이처럼 무거웠던 것이다.

(열어 보자!)

막비강은 호기심에 꼭 닫혀 있는 호로의 뚜껑을 뽑아 보았다.

순간 호로 안에서 한 줄기 기이한 향기가 흘러 나와 코를 찔렀다.

[! 향기 좋다!]

막비강은 코를 킁킁대며 안을 들여다보았다. 호로 속에는 수정같이 맑은 즙액(汁液)이 절반 가량 담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니 아주 향기롭고 달콤하였다.

꼬르륵!

그러자 그의 뱃속에서 식충들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그러고 보면 어제 저녁 이후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막비강이다.

[뭔지 모르지만 독은 아니겠지!]

배고픔과 갈증을 참지 못한 그는 호로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내용물을 그대로 들이켰다.

꿀꺽! 꿀꺽!

호로 속에 든 반병의 즙액은 삽시에 그의 목구멍을 타넘어 들어갔다.

 

금강옥액!

 

뼈를 무쇠보다도 강인하게 만들어 주고 백독이 불침하게 해준다는 희대의 영약 금강옥액이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끄억!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나!]

막비강은 아무것도 모르고 배를 두드렸다. 겨우 반병의 즙액을 마신 것에 불과했지만 왠지 배가 든든했다. 마치 한 상 잘 차린 성찬을 포식한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었다. 즙액이 뱃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순간부터 왠지 온몸이 스멀스멀 더워지는 것이 아닌가?

[! 왜 갑자기 이렇게 더워지지?]

막비강은 헉헉대며 상체를 벗어부쳤다.

옷을 벗어버리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우르르!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는 것 같더니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열기가 폭발하듯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아이쿠! 이게 독이었구나!]

막비강은 불속에 던져진 것 같은 열기에 휩싸여 떼굴떼굴 구르며 비명을 질렀다.

한번 치솟은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그의 내부를 휩쓸고 다녔다.

[아아악!]

막비강은 내장이 온통 숯덩이가 되는 듯한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까마득히 정신을 잃었다.

츠츠츠! 푸시시!

정신을 잃은 막비강의 온몸에서는 매캐한 연기가 치솟았다.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검푸른 연기가 그의 전신 팔만 사천 모공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 검푸른 연기에 노출된 주위의 초목들이 삽시에 시들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바로 막비강의 몸속에 쌓여 있던 노폐물이 타들어가며 내는 독장(毒瘴)이었던 것이다.

금강옥액!

바로 이 희세 영약의 조화인 것이다.

 

본래 금강옥액을 복용하면 온몸의 노폐물이 연소되어 처음 세상에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 즉 원영지체(元瓔之體)가 된다.

그리 되면 온몸의 경락이 막힘없이 뚫려 아무리 오랫동안 내공을 써도 지치지 않으며, 피부와 골격이 더할 수 없이 강인해져서 어떤 외부의 타격에도 상처를 받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막비강은 금강옥액의 효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강옥액의 효능을 극대화시키려면 복용 즉시 운공을 하거나 내가고수가 추궁과혈로 도와 줘야만 하기 때문이다.

막비강은 그 같은 두 가지 조건 중 어느 하나도 채우지 못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막비강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한 가지 사악한 술법(術法)에 노출되어 원영지기(元瓔之氣)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남달리 허약해진 것이며, 나이 이십을 채우지 못하고 요절할 운명이었다.

그런 이유로 막비강은 희세 영약 금강옥액으로도 금강불괴지신(金剛不壞之身)은 되지 못했다.

대신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손상되었던 원영지기가 금강옥액으로 대체되어 타고난 고질(痼疾)은 완쾌되기에 이르렀다.

금강옥액의 효능은 비단 고질을 치료해준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두둑! 우둑!

기절한 막비강의 전신 골격이 엇갈리는 소리가 나며 그의 몸이 쑥쑥 자라는 것이 아닌가?

여리고 병약하던 막비강의 몸은 순식간에 튼튼하고 강건하게 변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본래 나이보다 두 세 살 어리게 보이던 그의 체격이 삽시에 같은 나이 또래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건장해진 것이다.

투둑! 투둑!

막비강이 걸친 의복이 여기저기 뜯어져 나갔다. 가냘프던 소년의 몸이 갑자기 어른처럼 자라나 꽉 끼어 버린 때문이었다.

 

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휴우! 내가 죽지 않다니...!]

막비강은 길게 한숨을 쉬며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막비강은 왠지 온몸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을 느꼈다.

(이상하네! 내가 마신 것은 분명 독이었을 텐데 어째서 몸이 이리 가뿐한 것일까?)

막비강은 갸웃하며 몸을 일으켰다.

찌직!

순간 그가 몸을 일으키는 대로 바짓가랑이가 북 찢겨 버리는 것이 아닌가?

[! 내 몸이...!]

비로소 자신의 몸이 삽시간에 커 버린 것을 알아챈 막비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인한 근육으로 뭉쳐진 팔다리, 한 뼘 넘게 껑충 커 버린 키, 게다가 한번 발을 구르면 머리끝이 구름에까지라도 닿을 듯한 기분이 든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온몸을 살피며 어리둥절해하던 막비강의 얼굴이 문득 붉어졌다. 찢어진 바짓가랑이 사이로 전과는 사뭇 다른 무엇이 털렁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흡사 담장에 매달려 있던 다 자란 수세미 같은 크기의 검붉은 살덩이였다.

(... 내 찌찌가 언제 이렇게 커졌지?)

막비강은 멍하니 자신의 남성의 상징을 내려다보았다. 이완되었음에도 무려 다섯 치가 넘는 그것은 아무리 봐도 어린아이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살덩이 위쪽의 불두덩에도 짙은 음영(陰影)이 드리워져 있었다. 금강옥액은 병약한 소년에 불과하던 막비강을 삽시에 충분히 사내 구실을 할 수 있는 성인으로 탈바꿈시켜 버린 것이다.

[쑥스럽네! 뭔가 가릴 게 있어야겠어!]

막비강은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 그의 시야로 한 장의 종이 조각이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염라철장이 금강옥액의 호로와 함께 그의 품에 넣어 준 쪽지였다.

(뭐라고 글이 씌어져 있는 것 같은데...!)

시력이 몇 배로 좋아진 막비강은 쪽지 위에 급히 갈겨쓴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 쪽지 위에는 과연 다음과 같은 글이 급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들아! 네가 생부(生父)로 알고 있는 자는 진짜 네 아비가 아니다. 하지만 너의 모친은 너를 낳아 준 생모가 틀림없다.

피를 이어받은 자식이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지금껏 만나지도 못했으니 나의 운명이 기구하기도 하구나.

부모의 원수를 갚고 싶으면 전포(田袍)를 찾아가 자세한 내막을 물어 보아라. 그러나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선 절대 안 된다.>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리고 쪽지의 맨 끝에는 손바닥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 무슨 소린가? 설마 이 글이 내게 남겨진 것이란 말인가?)

쪽지에 적힌 글은 막비강의 잔잔한 마음에 세찬 파문을 일으키게 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진짜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그는 한동안 망연자실하여 서 있었다. 그런 그의 뇌리로 숱한 상념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드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철이 들었을 무렵 부친인 금사혈검 막고천에게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가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일이다.

아비라면 당연히 아들이 자라 무공을 익히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헌데 막고천은 무공을 가르쳐주는 것은 고사하고 격하게 화를 내며 두 번 다시 무공을 가르쳐달라는 소리를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막비강도 겁에 질려 그 이후로는 아버지 막고천에게 일체 무공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싶은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호원무사들이 무예를 연마하는 것을 몰래 훔쳐보며 나름대로 독학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막고천에게 들키는 불상사가 벌어졌고 그날 죽도록 얻어맞아 몇날 며칠을 자리보전 해야만 했다.

막고천은 어째서 아들인 자신에게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공을 배우려 하자 무섭게 치도곤을 한 것일까?

그 이유가 궁금하여 그는 모친인 한경파(韓瓊芭)에게 이유를 물어 보았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 역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칠뿐이었다.

비단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한경파는 평소에도 막비강을 차갑게 대했다. 친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한경파에게서는 보통의 어머니들이 지닌 자상한 구석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는 막비강을 볼 때마다 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화를 내거나 무시하곤 했다.

(설마 내가 불미스러운 관계로 태어난 사생아(私生兒)란 말인가? 아니면 어머니는 날 태중에 지닌 채 지금의 부친에게 개가(改嫁)를 했든지 강제로 납치당해 첩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저런 생각으로 막비강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그와함께 염라철장이 남긴 글이 사실일 것같은 생각이 정점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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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다시 건물 안. 청풍이 의자에 앉아있다. 무료한 표정

청풍; (피곤해서인지 통증이 심해진다.) 가슴을 누르고

청풍; (지금은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뿐이다.)

청풍; (어머니와 진진이가 내 몸 상태를 보고 기함할 게 걱정되긴 하지만...) 생각할 때

이세창; [기다리게 했군!] 덜컹! 문이 열리며 이세창이 들어선다. 황금수라들이 밖에서 보고 있고

청풍; [아닙니다.] 일어나고

이세창; [앉게나. 얘기가 길어질 수도 있으니..] 상좌로 가고

청풍; [...] 자리에 다시 앉고

이세창; [장주님이 무림맹에 보낼 납채(納采;혼인을 받아들임) 건으로 부르셔서 다녀온 길이네.]

청풍; [대례(大禮;혼인 예식)를 주관하셔야하니 바쁘시겠습니다.]

이세창; [바쁘지만 보람이 있는 일이지.] [, 그건 무림맹에서 보내온 폐백(幣帛;신랑이 신부집으로 보내는 예물)일세.] 탁자에 놓인 패물함을 보며 말하고

청풍; (역시 그랬군.)

이세창; [아직 혼서를 사당에 올리지 않은 상태라 안채로 들이지 못하고 여기에 보관하고 있지.]

청풍; (명문가의 혼례는 절차가 복잡하고 엄격하구나.)

이세창; [자넬 부른 이유는...]

청풍; (올게 왔군.) 내심 긴장

이세창; [장총관이 굳이 단음강기까지 치고 무슨 이야기를 한 것인지 듣고 싶어서이네.] 몸을 앞으로 내밀며 지긋이 청풍을 노려보고

청풍; (역시!) + [말씀드리기 송구하지만...] 즉시 대답

청풍; [장총관께서는 저를 무림맹의 주방으로 데려가셨으면 하셨습니다.]

이세창; [무림맹의 요리사로 영입하고 싶다?] 찡그리고

청풍; [!]

이세창; [정말 그게 다인가?] 노려보고

청풍; [그렇습니다.] 즉시 대답

이체상; [...] 말없이 청풍을 노려보고

청풍; (표정만 봐도 내 말을 믿지 않고 있다.) 긴장하지만 시선 피하지 않고

이세창; [알겠네.] ! 몸을 다시 의자에 기대고

이세창; [자네에게 확인할 건 확인했으니 그만 가보게.]

청풍; [물러가겠습니다.] 일어나며 고개 숙이고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는 청풍

! 닫히는 문

이세창; [이걸로 사전 공작은 끝났고...] 음산하게 웃고

이세창; [냉상아가 깔끔하게 마무리만 지어주면 되겠지.] 웃는 사악한 얼굴

 

#65>

여전히 황금전장. 황금전장 밖의 분위기가 나면 안됨

황금전장의 건물들 사이에 난 골목길을 걸어가는 청풍. 외진 곳이라 오가는 사람들 거의 없고. 그나마 간간이 던 하인과 하녀들이 낯이 선지 힐끔거리는데

청풍; (집요하게 추궁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개의치 않고 걸어가며 생각하고

청풍; (내 몸 상태를 빌미로 물고 늘어졌으면 어쩔 수 없이 벽소소가 야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털어놨어야했을 것이다.)

청풍; (당분간 총관 눈에 띠지 않도록 노력해야겠구나.) 생각할 때

[저기요!] 뒤에서 부르는 소리. 돌아보는 청풍.

여자; [주방에 새로 오신 이청풍 숙수님이시지요?] 보자기에 싼 삼단짜리 찬합을 들고 달리듯 다가오는 여자. 쭉쭉 빵빵에 키도 상당히 크다. 하지만 얼굴은 평범하고 주근깨로 덮였다. 옷도 하녀 복장이고. 이 여자는 여자무사1이 변장한 모습. 하지만 이 모습일 때는 그냥 여자로 표기. 주변에 오가는 사람은 없다.

청풍; [내가 이청풍입니다만...]

여자; [만나서 다행이에요.] 숨이 차서 헐떡이며 멈춰서고.

여자; [주방으로 찾아갔다가 총관님을 뵈러 갔다는 말을 듣고 달려왔답니다.]

여자; [혹시 이미 본장 밖으로 나가신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 뭐예요.] [자 받으세요.] 들고 온 찬합을 청풍에게 안겨준다. 삼단짜리 찬합은 보자기로 싼 상태다.

청풍; (음식 담는 찬합이다.) + [이게 뭐요?] 엉겁결에 찬합을 받으며 놀라고

여자; [뭔지 알려드리기 전에 제 소개부터 할게요.] [전 작은 아가씨의 몸종으로 춘앵(春鶯)이라고 해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하고

청풍; [작은 아가씨를 모시는 분이셨군요.] 벽옥령을 떠올리고

여자; [작은 아가씨는 설아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끔찍이 사랑하고 아끼세요.]

여자; [그 설아가 어제 번견에게 물려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을 때 이숙수님께서 구해주셨다는 소문이 이미 본장 내에 쫙 퍼졌답니다.] 과장 되게 양 손을 좌우로 벌려 보이며 말하고

청풍; (춘앵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말이 참 많은 아가씨로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자의 말을 끊지 않고

여자; [아가씨는 오늘 하루 종일 이숙수님에게 진 신세를 어떻게 갚을까 고민하며 보내셨어요.]

여자; [그 고민의 결정체가 바로 그 찬합에 들어있답니다.] 청풍이 두 손으로 들고 있는 찬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청풍; (뭔가 단단한 것이 들어있군.) 달칵 달각 청풍이 조금 흔드는 찬합에서 소리가 나고

여자; [그게 멀 거 같아요?] 미소

청풍; [찬합에 들어있으니 당연히 음식일이면서 소리가 나는 걸 보면 단단한 것일 테고...] 달가 달각 찬합을 조금 더 들어올려 소리를 듣고

청풍; [사탕입니까?] 흠칫! 하고

여자; [맞았어요! 역시 이숙수님은 눈치도 빠르세요.] 짝짝 박수치며 감탄하고

여자; [이숙수님께 어여쁜 누이가 있다는 사실도 알려졌어요.] [그래서 둘째 아가씨가 온갖 종류의 사탕으로 찬합을 채우신 거예요. 비슷한 또래인 누이동생께서 사탕을 좋아하실 거라면서...]

청풍; [제 누이가 정말 좋아할 선물입니다.] + (벽옥령은 부잣집 딸답지 않게 재치가 있군.) 내심 감탄

여자; [사탕을 누이동생께 전해주세요. 찬합은 돌려주실 필요 없구요.] 굽심거리며 몸을 돌리고. 이어

여자; [그럼 살펴가세요.] 손 흔들며 왔던 길을 달려간다.

청풍; [둘째 아가씨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시오.]

여자; [그럴 게요.] 모퉁이를 돌아가며 손을 흔들고

청풍; [사탕이라...] 찬합을 들어보고

청풍; [진진이가 정말 좋아하겠구나. 황금전장의 딸이 먹는 사탕이라면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사탕일 테니...] 걸어가고. 헌데

 

#66>

건물 뒤에 숨어서 청풍이 멀어지는 걸 보는 여자

여자; (시간은 충분히 끈 것같은데...) 생각하며 얼굴 윗부분을 손톱으로 잡고. 이어

찌익! 얼굴에서 얇은 가면을 벗긴다. 그러자

! 드러나는 얼굴은 물론 여자무사1이다. 냉상아라는 이름의. 이하 여자무사1로 다시 표기하고

여자무사1; (지금쯤 총관님도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계시겠지.) 사악하게 웃고

여자무사1;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올무를 준비한 채...)

 

#67>

황금전장의 입구 쪽. 불이 환하게 켜져 있다. 여러 개의 등이 걸려있어서 대낮같이 환한 상태고

[!] 그곳으로 걸어오다가 흠칫! 하는 청풍. 찬합은 찬합을 싼 보자기 윗부분을 잡아서 들고 있다.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황금전장 입구에 황금수라 수십 명이 포진한 채 나가는 사람들의 몸과 물건을 철저히 수색하고 있다. 마차들도 멈춰 세운 채 뒤지고 있고. 문 안쪽에 긴 탁자들이 죽 놓여있어 그곳에 물건들을 펼쳐놓고 뒤진다. 검문 때문에 문이 막혀 사람들이 못 나가고 있다. 검문의 지휘자는 이세창으로 귀견수도 보이고

청풍; (왜 저러지?) 의아해하면서 다가가고

청풍; (황금전장에서 나가는 사람들의 몸과 물건을 철저히 수색하고 있다.) (딱 봐도 일상적인 검문검색은 아니다.)

이세창의 모습. 얼굴이 굳어져 있고

청풍; (총관까지 나와 있군. 나를 만난 게 바로 전이었는데...) 생각하며 다가가는데

귀견수가 청풍을 발견하고

귀견수; [귀가하는 건가 이숙수?] 다가오고. 이세창도 흘깃 돌아보고

청풍; [그렇습니다.] [헌데 무슨 일인지요?]

귀견수; [무림맹에서 보낸 폐백중 중요한 예물 한 가지가 사라졌네.]

청풍; [누가 폐백에 손을 대었단 말입니까?] 놀라고

귀견수; [우리 황금전장 입장에서야 그리 대단한 물건이 아니지만...] [무림맹에서 보낸 예물이라는 점이 문제라네.]

청풍; (자신들이 보낸 예물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무림맹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겠지.)

귀견수; [번거롭겠지만 기다렸다가 검문을 받고 나가도록 하게.]

청풍; [당연히 그래야지요.] 대답하는데

이세창; [이숙수! 자네 그거 뭔가?] 황금수라 두 명을 거느리고 다가오며 청풍이 들고 있는 찬합을 보며 묻고. 귀견수도 돌아서다가 돌아보고

청풍; [둘째 아가씨가 제 누이에게 주라고 준비해주신 사탕입니다.] 찬합을 들어보이고

이세창; [성문이 닫히기 전에 금릉성을 나가야하니 먼저 검문을 받게 해주지.] [내용물을 확인해봐라.] 따라온 황금수라들에게 말하고.

[예 총관님.] 다가오는 황금수라들

청풍; [살펴보십시오.] 두 사람에게 찬합을 내밀고. 찬합을 한 명이 받고

옆의 탁자로 찬합을 가져가서

보자기를 푸는 황금수라들

달칵! 첫 번째 찬합 뚜껑을 여는 황금수라들.

뚜껑이 열리며 드러나는 첫 번째 칸에 온갖 종류의 사탕이 포장되어 들어있다.

[찬합에 담겨있는 게 사탕이 틀림없습니다.] [두 번 째 칸을 확인하겠습니다.] 한명이 말하면서 첫 번째 칸을 들어올리려 하고.

[두번째 칸 확인합니다.] 달칵! 첫 번째 칸을 분리해서 집어들며 말하는 황금수라. 헌데 그 직후

! 두 번째 칸에도 사탕이 들어있긴 하지만 그 사탕들 위에 화려한 목걸이가 하나 들어있다. 여러 개의 보석을 연결하여 만들어진 고급스러운 목걸이다.

[!] [!] [!] 현장에서 찬합을 보고 있던 모든 사람들 경악. 청풍과 귀견수와 두 명의 황금수라. 이세창도 놀라는 척하고

<찾았습니다!> <사라졌던 목걸이가 찬합에 들어있습니다!> 황금수라들 전음으로 말하며 이세창과 청풍을 돌아보고. 귀견수는 가면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고

청풍; (저 목걸이가 왜 찬합에...) 경악

이세창; [이런 이런...] 촤락! 찬합에서 두손으로 목걸이를 집어들고

이세창; [견물생심이라더니...] [네놈, 잠깐 동안 혼자 있는 동안에 폐백함을 뒤졌구나.] 살벌한 표정으로 청풍을 노려보고

이세창; [감히 무림맹에서 보낸 예물에 손을 대었을 때는 각오도 되어있었겠지?] 살벌하게 웃으며 목걸이를 들어 보이고. 청풍은 굳어진 표정을 지으며 목걸이를 보고

이어 청풍의 뇌리에 떠오르는 장면. 바로 위 #65>의 장면

 

여자; [혹시 이미 본장 밖으로 나가신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지 뭐예요.] [자 받으세요.] 들고 온 찬합을 청풍에게 안겨준다. 삼단짜리 찬합은 보자기로 싼 상태다.

회상 끝

 

청풍; (함정!) 굳어진 얼굴

<간단하고 조잡하지만 일단 빠지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악독한 함정에 빠졌다.> 목걸이를 들어 보이며 사악하게 웃는 이세창. 가면 속에서 눈을 부릅뜨며 보고 있는 귀견수. 차고 있는 검에 손을 대며 청풍을 노려보는 두 명의 황금수라들을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68>

금릉 성 밖의 빈민가. 밤이 깊어 불이 모두 꺼져 있고. 헌데

동구 밖에 불빛이 어른거린다.

등을 들고 서서 멀리 보이는 금릉성 성문을 보고 있는 진삼낭. 담요로 몸을 감싸고 있다. 걱정스러운 표정

진삼낭; (불길한 예감...)

진삼낭; (청풍이가 연락도 없이 외박을 한 적은 없었는데...)

진삼낭; (일하는 곳이 황금전장이니 귀가하지 못하면 사람이라도 보내 알렸을 것이다.) 찡그리고

진삼낭; (설마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때

[엄마!] 뒤에서 들리는 음성. 돌아보는 진삼낭

이진진; [그만 들어가. 이미 성문이 닫혀서 오늘은 집에 오고 싶어도 못 올 거야.] 역시 담요로 어깨를 감싼 이진진이 다가온다.

진삼낭; [그래야겠지?] 한숨 쉬며 돌아서고

진삼낭; [그나저나 뭘 나오고 그러니. 어미가 어련히 알아서 돌아갈까봐...] 눈을 좀 흘기며 이진진에게 다가오고

이진진; [내가 오지 않았으면 밤 새셨을 거잖아요.] 함께 돌아서고

진삼낭; [집이든 밖이든 잠을 이루지 못할 건 분명하지.] 한숨 쉬며 집쪽으로 걸어간다.

이진진; (오빠...) 금릉 성문쪽을 보며 진삼낭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두근 두근 심장이 뛰는 이진진

이진진; (불안한 감정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어.)

<아무쪼록 오빠의 신변에 변고가 생기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빈민가 안으로 들어가는 두 모녀의 모습 배경으로 이진진의 생각 나레이션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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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어둠 속의 눈동자 (1)

 

 

동굴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너구리같은 작은 짐승의 굴인 것 같았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을 뽑아 앞쪽으로 세운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야생 짐승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짐승의 똥이 많이 있으면 어쩌지? )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푹신한 곳에 부딪혔다. 앞서 들어가던 임청우가 멈추는 바람에 그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만 것이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임청우의 엉덩이에 박았던 얼굴을 급히 떼며 심주은은 눈을 부라렸다.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킨 임청우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에 짐승이 있다. 맹수인지도 모르겠어.”

동굴 안쪽에서 파란 빛을 내뿜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임청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 동굴 안에는 무언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런 때에...)

임청우의 어깨 너머로 눈동자들을 본 심주은은 초조와 긴장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던 귀를 찢을 듯하던 휘파람 소리도 어느덧 뚝 그쳤다. 노파와 중이 동굴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그런데도 앞쪽에 무언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뒷덜미에 칼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급해진 심주은은 전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찔러버려! 찔려서 죽여 버려!”

심주은의 재촉을 받은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으로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난다고 한다.

임청우는 노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안쪽에 있는 것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혹 호랑이라 하더라도 무섭지는 않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는 공력이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가공한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기걸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안쪽에 있는 짐승을 죽이더라도 소리는 내지 말아야 한다.)

들키지 않으려면 눈앞에 있는 시퍼런 눈동자를 지닌 괴물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야한다.

결심을 한 임청우는 온 정신을 청강사자검에 모아서 앞으로 내질렀다.

번쩍!

푸른빛이 뇌전처럼 두 개의 눈동자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한데 검봉(劍鋒;검의 끝)이 찌르는 순간 눈동자들은 깜빡하더니 사라져버렸다.

좁은 동굴 안이라 무언가 움직였다면 공기의 요동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청강사자검을 아래위로 내저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귀신?)

섬뜩한 전율이 임청우의 머리끝에서 일어나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그놈을 찾았는가?”

늙은 노파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눈에 띄는 게 없소.”

사내의 음성이 이어졌다. 기걸승중 중의 목소리다.

그 놈의 새끼가 둘째의 몸뚱이를 완전히 부셔 놨어. 잡아서 모가지를 끊어버려야 속이 풀리겠어.”

으으으..."

노파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아마도 노파가 상처 입은 거지를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임청우는 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신처럼 사라진 눈동자 따위는 밖에 있는 잔혹한 노파와 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심주은도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중이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저께서 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구려.”

만리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 멀리 있으면 쉽게 맡을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 있으면 잘 파악하기 어려운 게지.”

노파의 음성이 이어졌다.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봐, 아가씨를 잡아간 그놈의 무공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니 조심하고...”

대답대신 꽝! 하는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중이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장력으로 쓰러뜨렸던 것이다.

중은 만리향의 향기가 남아있는 일대의 나무들과 바위들을 모조리 부셔버릴 심산인 것같았다.

! 콰드드!

중의 양손을 갈쿠리같이 오그리고 한 번씩 내저을 때마다 시뻘건 강기가 회오리치면서 뻗어나가 나무와 바위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 사람이 손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꽝 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은 등쪽에서 찬바람이 확 이는 것을 느꼈다.

빨리 들어가!”

심주은은 임청우를 떠밀면서 급히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다!”

노파가 소리치며 동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땅에 닿을 듯 낮게 날아서 그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다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움직이지마! 숨도 쉬지마.”

그러나 임청우는 검을 들고 앞으로 한 바퀴 구른 다음에 입구쪽으로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는 심주은의 두 발 사이에 들어갔다.

날아 들어오는 노파를 베기 위해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스스!

갑자기 심주은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무스름한 바위벽으로 변해버렸다.

임청우는 심주은이 기이한 술법을 쓰는 것을 몇 번 목격하기는 했지만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의 몸이 석벽으로 변해버리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임청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데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노파는 수평으로 날아 들어오다가 심주은의 등에 머리를 부딪히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리향의 향기가 동굴 안에 가득하건만 석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 심주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직선으로 뚫린 굴이라 어디 숨을 만한 데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기어야 할 정도로 낮은 곳이니 천장에 붙을 수도 없다.

심주은이 동굴 속에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어진 노파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셋째, 네가 들어와 봐라! 이 안에 숨어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요.”

중은 몸을 기괴하게 구부리더니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꾸물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가 옆으로 비켜서자 중이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막다른 석벽에 다다랐다.

바로 이곳이군요.”

중은 심주은의 등에 손바닥을 붙이면서 말했다.

안이 비어있습니다.”

부우웅!

말하는 중의 손바닥이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공력으로 석벽을 부셔버릴 심산이었다.

헌데 중의 손바닥이 막 심주은의 등을 때리려고 할 때였다.

안돼!”

!

임청우가 대갈일성을 발하며 청강사자검으로 중의 배를 찔렀다.

!”

중은 황급히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고 물러섰다. 그의 승포자락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수 있는 것은 유가술(愉加術)을 익힌 덕분이다. 이 유가술을 펼치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비단결보다도 더 질기고 부드러워 어떤 예리한 병기로도 상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그의 몸이 석벽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검이기에...)

중이 경악할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에 서있던 석벽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중이 귀신에 홀린 듯이 어리둥절 하자 그자의 뒤에서 노파가 떠밀면서 소리쳤다.

환술이다! 놈을 잡아!”

 

***

 

임청우는 심주은을 등에 업고 무작정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임청우가 중의 배에 청강사자검을 찔러 넣은 직후 심주은은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었다.

이에 임청우는 급히 심주은을 안고 동굴 안쪽으로 피한 것이다.

(언젠가는 저 중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살수를 휘두르다니...)

임청우는 분노하고 있었다. 심주은이 중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청우의 오해였다.

심주은은 노파가 날아 들어오면서 등을 머리로 받았을 때 이미 심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임청우와 자기의 목숨이 자신이 펼치고 있는 환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었었다.

그러다가 중이 등에 손바닥을 댄 직후 피를 토하며 쓰러졌었다.

임청우가 중에 의해 심주은이 내상을 입은 것으로 오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굴은 상당히 좁다.

뒤쪽에서 검이나 도, 아니면 장력이라도 날아온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앞으로 무작정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쉬익!

중과 노파는 땅에 닿을 듯 말듯 낮게 날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견딜 수 있겠어?”

...”

심주은의 대답은 견딜 수 있겠다는 건지 못 견디겠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도망 가보았자 막다른 곳만 나올 뿐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그녀를 내려놓고 눕게 한 다음에 자기도 반듯하게 누웠다.

청강사자검의 검광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옷자락 아래로 검을 감추었다.

중과 노파가 자기의 위로 날아가려 할 때 아래에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중과 노파도 쉽사리 자신들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휘릭!

한데 앞서서 날아오던 중이 갑자기 임청우에게서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냐?”

하마터면 중에게 부딪힐 뻔한 노파가 소리쳐 물었다.

피 냄새요. 아마 놈이 앞에 있는 모양이오.”

중은 신중하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을 찔렀던 검에서 피를 닦아내지 않았을 뿐인데 중은 그 피 냄새를 맡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노파가 소리쳤다.

통채로 날려버려!”

그랬다가는 동굴이 무너질 것이오. 너무 깊이 들어왔소.”

중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황금으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자도 임청우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워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주인께서 우리가 떠나올 때 주신 혈승(血蠅)이 있소.”

중은 금합(金盒)을 열면서 말했다. 금합 속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시뻘건 파리 수십 마리가 들어있었다.

혈승은 만리향을 싫어하니 소저껜 아무 해가 없을 것이오.”

혈승이란 피를 빠는 파리를 말한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독충으로 떼를 지어 날면서 스치는 것은 무엇이거나 뼈를 남기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심주은은 중의 말에 크게 놀라 자신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급히 전음으로 임청우에게 말했다.

나를 끌어 당겨서 몸 위에 올려! 어서!”

그러나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혈승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옷자락 소리는 중과 노파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청우는 자기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이 혈승이란 말을 하자 자기는 왜 품속에 있는 독중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혈린사 척포를 생각하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이 그로 하여금 그같은 생각을 일깨워 준 셈이었다.

임청우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여 품에서 몽선도를 꺼냈다.

중은 금합 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승들을 주문을 외워 깨웠다.

혈승들이 한 마리 두 마리 깨어나며 왱왱소리가 조용한 동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몽선도에서 척포가 머리를 내민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척포의 머리에 달려있는 황금빛 뿔이 금합과 같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가랏!”

중은 척포의 뿔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혈승들을 날려 보냈다.

! !

혈승들은 구름떼처럼 날아올랐으나 척포를 향해 가지는 않았다. 비록 미물이기는 하지만 천적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척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쏴아아!

척포의 입에서 하얀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혈승들은 소리없이 녹아내렸다.

심지어 중이 들고 있던 금합까지도 척포의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중은 괴성을 지르며 금합을 던져버리고 뒤로 몸을 날렸다.

으앗!”

노파도 뒤로 튕겨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임청우는 재빨리 일어서서 심주은을 업고 동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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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납치극

 

 

 

종남산(終南山)!

 

중원의 오대도가성지(五大道家聖地) 중 하나인 종남산은 가을빛에 물들어 있다.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는 두둥실 구름이 몇 점 떠가고 있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은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종남산의 넉넉한 산록(山麓) 아래 펼쳐진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아름답게 율동하고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선인봉(仙人峯)을 병풍처럼 등지고 한 채의 웅장한 장원이 서 있다.

 

<혈검산장(血劍山張)>

 

성문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정문에는 금박이 화려한 편액이 걸려 있다. 붉게 칠해진 둥근 고리[]를 배경으로 쓰여진 글은 웅혼하고도 패도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이 장 높이의 위압적인 돌담 너머로는 수백 채의 전각 지붕이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추녀를 잇대고 있다.

이곳이 바로 강호에서 서패천(西覇天)으로 불리는 혈검산장이다.

본래 당금 무림에는 사패천(四覇天)이라 불리는 네 개의 강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혈검산장은 바로 그중 서패천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莫高天)!

 

그가 서패천 혈검산장의 당대 주인이다. 막고천이 한 자루 사형혈검(蛇形血劍)으로 펼치는 사형검법(蛇形劍法)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에는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막고천이 이끄는 혈검산장의 위세는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 중원의 서방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막고천의 탁월한 용인술(用人術)과 교묘한 심모원려(深謨遠慮)의 결과였다.

 

막고천은 석 자[三尺]의 검보다 세 치[三寸]의 혀가 더 무섭다!

 

그 같은 비아냥이 공공연히 무림에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놓고 막고천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 그의 막하에는 구름 같은 고수, 달인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일단 막고천의 눈 밖에 난 자는 늘 비참한 최후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때는 저녁 무렵이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혈검산장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하하하!]

[까르르!]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 펼쳐진 공터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었다.

질 좋은 비단옷을 입은 아이, 허름한 베옷을 입은 아이, 일견해도 신분이 다른 아이들이 함께 뒤섞여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야 신분의 고하는 큰 문제도 아닐 것이다.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선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는 우락부락한 장한 네 명이 무료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혈검산장의 무사들말고도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또 한 쌍 있었다.

[...!]

혈검산장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는 언제부터인가 초라한 몰골을 지닌 초로의 노인이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노인은 뛰어 노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길을 가다 지친 늙은 여행객으로 보인다. 혈검산장이 무사들도 노인의 그 같은 행색에 그를 별로 유의하지 않고 보아 넘겼다.

(틀림없다! 바로 저 아이다!)

하지만 고개를 움츠린 노인의 눈빛은 뜻밖에도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의 그 눈빛은 한 소년에게서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이 보고 있는 소년은 열 서너 살 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것이 한눈에도 귀한 신분의 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소년은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키도 작은 데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빈약한 것이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대로 쓰러질 듯이 보였다.

그 때문에 소년은 원래 나이보다도 한 참 어려 보인다. 사실 소년의 나이 올해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체질 때문에 두 세살 가량 어려 보이는 것이다.

[...!]

병약한 소년은 아이들이 뛰노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돌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신이 나서 겅중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는 소년의 눈에는 부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허약한 몸을 지녀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찬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상영(祥英)을 막고천, 그 짐승에게 빼앗긴 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 상영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바로 저 나이일 것이다!)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점점 형형해졌다. 사실은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때문에 잘 해야 열 네 살가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멀리서 소년의 병약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노인의 나무껍질 같이 메마른 안면에는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막고천! 그놈은 만삭인 상영을 납치해다가 짐승 같은 야욕을 채웠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병약한 것도 제 에미 뱃속에 들었을 때 에미가 난행을 당한 결과일 것이다!)

노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려졌다.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놈의 주위에는 지켜 주는 개들이 너무 많아 번번이 실패했었지! 이제 나도 복수는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피맺힌 한은 우리의 아들이 대신 갚아줄 것이다!)

노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옆구리에 찬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

 

호로(壺瀘)!

 

그것은 은은히 황금빛 서기가 나는 한 개의 호로병이었다. 사기로 구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호로병인데 가운데가 잘룩하여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찰 수가 있다.

그 호로병을 움켜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 핏줄이 불끈 돋았다.

(놈을 이길 만한 무공을 찾아 헤매던 노부는 천우신조로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마셔 무적 공력을 얻은 뒤 막고천 그 악적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이것은 저 아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이 뜨거운 부성애로 물들었다.

헌데 금강옥액이라니! 정녕 노인이 차고 있는 호로에 청구이보(靑丘二寶) 중 하나인 금강옥액이 들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인은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내 아들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금강신체(金剛神體)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네놈 막고천을 쳐죽이게 하리라!)

노인은 격동을 감추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노인의 깡마른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쐐액!

허공으로 튀어오른 노인은 질풍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혈검산장의 앞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저 늙은이가...!]

[... 무림인이었다!]

무료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질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파팟!

[! 왜 이래요!]

단번에 마당을 가로지른 노인은 바위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병아리처럼 낚아챘다.

쐐액!

소년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와 노인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비강(比强) 도련님!]

[둘째 도련님을 내려놔라!]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왔다.

 

막비강(莫比强)!

 

이것이 그 병색 짙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둘째 아들이었다.

[막고천이란 짐승에게 전해라! 나 곡강(曲姜)이 아들을 찾아간다고!]

화라락!

노인은 한 마리 천마처럼 단숨에 혈검산장 우측의 송림을 뛰어넘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경신술은 너무나 신쾌하여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마당 중간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 쫓아가자!]

[총관께도 알려라! 삼공자가 납치되었다고!]

한 명의 무사는 도로 장원 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나머지 셋은 이를 악물고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오래지 않아 혈검산장 안에서는 수많은 무사들이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아올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마당에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쐐애액!

병약한 소년 막비강을 겨드랑이에 낀 노인은 질풍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몇 개의 산과 개울이 순식간에 노인의 발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그새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너무 놀란 데다가 병약한 몸이 자신을 안고 날아가는 노인의 엄청난 속도를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가엾은 녀석!)

노인은 달리면서도 소년을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이 모두가 아비가 못나 네 에미를 막고천, 그 악적에게 빼앗긴 결과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강옥액을 먹고 아비가 추궁과혈로 경락을 뚫어 주면 넌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노인은 염두를 굴리면서도 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이미 백여 리를 달렸으나 노인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혈검산장의 세력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종남산이 자리한 섬서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노인의 발길은 늦춰질 줄 몰랐다. 노인은 밤이슬을 맞으며 다시 수십 개의 산과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다시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은 혈검산장이 자리하고 있는 섬서성을 벗어나 하남(河南)성 경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군!]

그제야 비로소 노인은 땀을 닦으며 걸음을 늦췄다. 그가 멈춰선 곳은 하남성의 서쪽 끝에 자리한 험준한 산맥 웅이산(熊耳山) 근처였다.

(몇 번이나 방향을 틀었으니 혈검산장의 무리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지나온 곳을 흘깃 돌아보며 숲을 나섰다. 웅이산은 너무 험하여 지금까지처럼 길 아닌 길로 달릴 수만도 없다. 무림인인 자신이야 괜잖지만 병약한 막비강에게 험한 산길은 무리인 것이다.

다행히 숲에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동서로 뻗쳐 있는 관도(官道)가 거대한 뱀처럼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이제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 아이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주면 된다!)

노인은 소년 막비강을 소중히 안고 관도로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돌연 뒤쪽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귀찮은 일을 피할 요량으로 길가로 물러서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

이내 네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자가 없는 것 같군!)

노인은 내심 안도하며 땅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 직후였다.

히히히힝!

[워워!]

돌연 그를 지나쳤던 네 필의 말이 급격히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은...!)

슬쩍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던 노인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두두두!

그를 스쳐 지났던 말들이 천천히 그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말들 위에는 일견하기에도 무림인들로 보이는 네 명이 올라탄 채 형형한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필의 말들 중 맨 앞쪽의 갈색 말 위에는 우람한 체격의 백의노인이 앉아 있다. 이 노인은 온몸이 백색 일색이었다. 머리도 희고 수염도 백설같이 희며 입고 있는 의복과 얼굴색도 분을 바른 듯이 하얬다.

츠으!

백면노인의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선 연신 남색(藍色) 광망(光茫)이 번뜩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백면노인 뒤쪽의 말에는 그와 정반대로 얼굴이 숯처럼 검은 흑면노인이 타고 있다. 그자는 뼈를 발라 놓은 듯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인데 입고 있는 의복도 먹물을 칠한 듯이 새까만 흑포였다. 만약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흰빛 마저 없었다면 그저 한 덩이의 숯을 말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으핫핫! 이게 누구요? 이제 보니 고명하신 염라철장(閻羅鐵掌) 곡 노사(曲老師)시로군!]

흑백의 두 노인 중 우람한 체격의 백면노인이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막비강을 납치한 노인, 염라철장 곡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 이런 때에 흑백쌍살을 만나게 되다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구나!)

 

흑백쌍살(黑白雙煞)!

 

흑백의 두 노인은 하락(河洛) 일대에서 악명이 높은 마두들로서 얼굴 색깔에 따라 각기 백면살(白面煞), 흑면살(黑面煞)이라 불린다.

사실 흑백쌍살이 제법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들이긴 해도 염라철장 곡강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부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염라철장 곡강 자신이 무림에서도 이름이 쟁쟁한 강호칠절(江湖七絶)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정파백도의 가장 뛰어난 일곱 기인을 일컬어 강호칠절이라 하는 바, 곡강은 불의와 사마외도를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써서 염라철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게 된 인물이다.

평소의 염라철장 곡강이었다면 흑백쌍살을 만났어도 코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틀렸다. 실로 십오 년 만에 되찾은 아들과 함께인 것이다. 도저히 남과 어울려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흐흐!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정말 기쁘기 그지없소.]

백면살이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염라철장도 도리 없이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흑백쌍살 형제분들이셨군. 보아하니 두 분은 지난날의 일장을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금 고하(高下)를 가늠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오늘은 노부가 급한 일이 있으니 열흘 후 황산(黃山) 시신봉(始信峯)에서 만나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염라철장은 평소의 불같은 성질을 누르며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며 보였다.

[그럴 필요 없소, 곡 노사!]

그러나 얼굴이 검은 노인, 흑면살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나 흑면살은 따로 날짜를 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오늘은 날씨도 시원하여 손속을 교환하기에 더없이 좋은데 열흘 후에 고생해 가며 험준한 황산을 올라갈 필요가 뭐 있겠소? 혹시 곡 대협은 황산에 명당 자리라도 잡아 두기라도 한 거요?]

흑면살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굴뚝에 빠진 쥐새끼 같은 놈이...!)

염라철장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당년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이 살성은 평소 흑백쌍살 같은 자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전의 형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은가? 그는 할 수 없이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소. 이해하시오!]

그의 말에 백면살은 염라철장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막비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곡 대협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인물인데 어찌하여 어린아이의 요혈을 찍어 데려가는 것이오? 설마 유괴한 아이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흑면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형님은 참 눈치도 없소. 저 어린놈은 아마도 곡 대협과 지금은 막고천의 첩이 되어있는 냉상영(冷祥英)이란 계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게요!]

[닥쳐라!]

순간 염라철장이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주둥아리를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염라철장의 일갈에 흑면살이 흉흉한 표정으로 대꾸하려 할 때였다.

[흐하하!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흑백쌍살 뒤에 있던 한 명의 중년 장한이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휘릭!

그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동시 어깨에서 길이가 세 자 가량 되는 강추(鋼錐)를 뽑아 휘저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곡 대협은 우리 형제를 안목에 두지도 않소?]

염라철장은 그자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얼굴은 생소한데 나 곡강이 언제 어디서 귀하에게 죄를 범했소?]

[시침떼지 마시오. 우리는 태호쌍걸(太湖雙傑) 황웅(黃雄), 황렬(黃烈) 형제요. 당신이 우리 형제의 사형인 무영서생(無影書生)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소?]

[! 당신들이 바로...!]

염라철장도 비로소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강퍅한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무영서생이란 작자는 한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간 담을 넘어 들어가 못된 짓을 하던 중에 내 손에 걸려 죽었지! 설마 그 패륜음적(悖倫淫賊)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겠지?]

그가 비웃음을 흘릴 때였다.

[바로 그렇다!]

투학!

사나운 함성과 함께 두 줄기 한광이 염라철장을 향해 엄습해 왔다. 황웅이 자신의 무기인 한 쌍의 강추를 느닷없이 무찔러낸 것이다.

염라철장도 황급히 오른손을 뻗어냈다. 창졸간에 취한 임기응변이었다.

카카캉!

맑은 음향이 일어나며 황웅의 강추 두 개가 서로 맞부딪쳐 버렸다. 염라철장이 내뿜은 암경에 휘말려 버린 결과였다.

[!]

황웅은 염라철장이 말하는 사이에 기습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손목이 울리는 격통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밀려나갔다. 염라철장의 공력이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무서운 늙은이!)

(과연 강호칠절의 일인답다!)

흑백쌍살과 황렬은 이 상황을 보고 내심 놀랐다.

[모두 함께 공격하자!]

콰릉!

백면살이 일갈하며 먼저 장력을 뽑아내 염라철장을 후려쳤다.

[우우우!]

화라락!

하지만 염라철장은 사나운 장소성을 터뜨리며 맹렬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 저 늙은이가!]

[달아나다니...!]

염라철장의 뜻밖의 행동에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라철장은 어느 누구와 싸우든 절대 등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사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 염라철장은 이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진 후였다.

[싸움을 피하는 것을 보니 부상이라도 당한 모양이다!]

[쫓아가자! 이 기회에 원한을 갚자!]

화라락! 쐐애애액!

백면살의 호통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다섯 사람은 쫓고 쫓기며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렸다.

(빌어먹을...!)

웅이산의 험한 산중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던 염라철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추격하는 네 사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네 사람과의 거리는 점차 단축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염라철장이 밤새 달린 탓이었다.

철인이 아닌 이상 밤새 천여 리를 달리고도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염라철장은 지금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떨쳐 버릴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결판을 낼 수밖에...!)

내심 결심한 그는 급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의 절벽 아래에 큼직한 동굴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화라라락!

염라철장은 눈을 번뜩이며 즉시 그 산동(山洞)으로 뛰어들었다.

[으하하! 스스로 독 안에 뛰어드는구나!]

뒤쪽에서 네 흉사(凶邪)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시간이 별로 없다! 혹시 모르니...!)

염라철장은 흘깃 밖을 돌아보며 급히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는 작은 종이에 총총히 몇 자 글을 적어 내려갔다.

글을 다 쓴 그는 그 종이를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색 호로와 함께 막비강의 품속에 쑤셔 넣어 주었다.

(부디 네가 그 글을 읽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저 네 놈의 생쥐가 내 적수는 못되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염라철장은 뜨거운 부성애가 담긴 눈으로 소년 막비강을 내려다보았다.

화라라락! 스스스스!

그때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추적자가 동굴 밖에 날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염라철장의 기습이 두려워 아무도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곡가야! 자라 새끼처럼 석동 안에 숨어서 기어 나오지 않겠다면 독연기를 불어넣어 어린놈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

백면살이 동굴 안을 향해 흉갈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헛소리 마라!]

푸학! 꽈르릉!

하나의 인영이 전광석화같이 석동 밖으로 튀어나오며 사나운 장력을 쏟아냈다. 물론 그는 염라철장이었다. 그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세찬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

[크악!]

퍼퍽! 콰드득!

이 흉맹무비한 장풍에 황씨 형제의 상체가 피모래로 흩어져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흑백쌍살은 그래도 고수답게 반응이 빨라 횡액을 면했으나 황씨 형제는 여지없이 참살을 모면하지 못한 것이다.

[죽어랏! 비겁한 놈들!]

염라철장은 여세를 몰아 급히 물러서는 흑백쌍살을 덮쳐 갔다.

꽈르릉!

염라철장의 쌍장이 검게 물들며 무시무시한 경풍의 소용돌이가 뻗쳐 나왔다. 그는 장기전으로 나가면 지친 자신이 불리함을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최강의 살수를 구사한 것이다.

[! 날뛰지 마라!]

[받아랏!]

흑백쌍살도 악을 쓰며 마주 장력을 내치며 염라철장의 장풍에 맞섰다. 하지만 염라철장이란 이름은 헛것이 아니었다.

파카카캉!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염라철장의 장풍은 마치 무쇠의 창날처럼 흑백쌍살의 장풍을 여지없이 꿰뚫고 들어갔다.

[... 안 돼!]

[케에엑!]

[으하하!]

퍼퍼펑! 콰쾅!

비명 소리와 살기 가득한 웃음소리, 그리고 무언가 으깨지는 듯한 둔중한 소성이 한꺼번에 일었다. 염라철장의 창날 같은 장력은 흑백쌍살의 가슴과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콰당탕! 퍼퍽!

머리가 박살난 백면살의 거구가 뇌수를 흩뿌리며 나뒹굴고, 뒤이어 가슴이 뭉개진 흑면살이 주르르 십여 걸음 밀려났다가 고꾸라졌다.

[으으음!]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한 염라철장도 안색이 창백해져서 비틀거렸다.

[흐흐흐! 네놈들 스스로 자초한 횡액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염라철장은 사방에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를 돌아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하여간 내 아들이 애비의 유서를 읽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로군!]

염라철장은 득의해하며 지친 몸을 석동 쪽으로 돌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카하하하항!]

돌연 멀지 않은 숲속에서 누군가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살기에 찬 원숭이가 우짖는 듯 귀에 거슬리고 섬뜩한 것이었다.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광소성! 혹시 그자란 말인가?)

막 동굴로 들어가려던 염라철장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는 그의 숙적인 한 명 흉한의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염라철장이 숨을 죽이며 긴장할 때였다.

[카카카! 어떤 망종이 새벽부터 지랄을 해서 본좌의 단잠을 깨우느냐?]

화라라락!

불쾌한 악취가 풍기며 허공에서 한 줄기 인영이 공 튕겨지듯 뚝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자는 온몸에 털이 숭숭 돋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이었다. 검붉은 털이 온몸을 뒤덮은 데다 두 팔이 무릎 아래까지 뻗쳐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

[! 네놈은!]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동시에 한걸음씩 물러섰다.

[염라철장 곡강!]

[무협제원(巫峽啼猿)!]

염라철장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나타난 자는 바로 그가 떠올렸던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무협제원!

 

이것이 그자의 이름이었다. 염라철장이 당금 정파백도의 절정고수들인 칠절(七絶)에 속한다면 무협제원은 흑도무림의 최고수들인 육요(六妖)에 드는 절정고수였다.

사실 그자는 인간의 어머니와 성성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이었다. 무협 근처의 산골 마을에 홀로 살던 여자를 수백 년 묵은 원숭이가 무산(巫山)에서 내려와 겁탈한 결과 무협제원이 태어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여자와 원숭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비정상적으로 팔이 긴 무협제원의 몰골을 보면 그가 원숭이의 자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숭이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사나운 성성이의 피를 이어받은 때문인지 무협제원은 맨손으로 황소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신력과 포악한 성격을 타고 났다. 거기에 더해 기연으로 어떤 상고기인의 비급을 얻어 일신에 고절한 무공까지 지니게 되었다.

무협제원은 이같은 자신의 힘과 무공을 믿고 무협 일대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었다. 그러다가 십년 전 염라철장과 시비가 붙어 그의 일장을 맞고 무협의 격랑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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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주방. 여전히 바쁜데. 주대육이 무사 한명과 대화 하고 있다

[!] 놀라는 주대육

무사; [그래서 장총관께서 직접 총주방장님을 뵈러 오시는 중입니다.]

주대육; [아니 날 만나고 싶으며 만찬장으로 부르면 되지 왜 직접 주방으로 온다는 건가?]

무사; [그러게 말입니다.] 눈치 보는데

주대육; [그 양반이 대단한 미식가라는 소문은 전부터 들었지만 이렇게 적극적일 줄은 몰랐군.] 고개 설레 젓고.

[무슨 일이래?] [주빈인 무림맹 총관께서 직접 주방을 방문하겠다고 한 모양이야.] 청풍의 주변 요리사들 웅성. 청풍은 여전히 고기 써는데 집중하고 있고. 그때

[오십니다.] 요리사 한명이 한쪽을 가리키며 말하고. 모두 돌아보는 사람들

이세창의 안내를 받아 오는 장세명. 장세명 뒤로는 황금수라들이 경호하며 따라오고

청풍; (,저 인물 혹시...) 장세명을 보고. 주대육이 서둘러 마중하러 가는 모습이 보인다.

청풍; (저녁 무렵, 날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었다.)

청풍; (주방을 직접 찾아온 게 혹시 나와 관련이 있는 건가?) 생각하며 고기 썰기에 집중하는 척하는데

요리사1; [이쪽으로 오신다.] 웍을 써서 요리하다가 긴장하며 말하고. 돌아보는 청풍.

장세명이 주대육의 안내로 다가오고 있다. 이세창과 황금수라들이 뒤에 따라오고

요리사들이 요리하던 걸 멈추며 장세명에게 인사하고. 하지만

요리사들의 인사는 건성으로 들으면서 지긋이 청풍을 보는 장세명

청풍; (어째 예감이 들어맞는 것같군.) 칼질을 멈추며 기다리고. 그때

주대육; [이 아이가 최근 제가 발견한 보물입지요.] 청풍을 장세명에게 소개하는 주대육

고개 숙여 인사하는 청풍

주대육; [나이는 아직 어리지만 고기 다루는 솜씨는 포정의 재래라 할만합니다.]

장세명; [주숙수의 자랑이 과장이 아니라는 건 내 혀로 확인했소.] 웃으며 청풍을 보고

장세명; [요리에 쓰인 모든 육류의 처리가 이제껏 본 적이 없을 만큼 완벽했었으니 말이오.]

주대육; [이름난 미식가인 장대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었으니 영광으로 생각해라.]

청풍; [감사합니다.] 장세명에게 고개 숙이고

장세명; [자네의 칼솜씨를 한번 보여주겠나?]

청풍; [부족하지만 분부 따르겠습니다.] 칼을 잡고

고기를 써는 청풍

장세명; [허어! 신기로구만. 과연 주숙수가 포정의 재래라고 할만해.] 감탄하며 보고. 그러다가

장세명; [잠시 둘만 있게 해주지 않겠소?] [이 젊은 달인과 요리와 관련하여 긴히 할 얘기가 있소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흠칫! 칼질을 멈추는 청풍

[!] 이세창의 눈이 번뜩

주대육; [물론입니다.] 요리사들에게 손을 저으며 말하고.

서둘러 주변에서 멀어지는 사람들. 주대육도 다른 요리사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가고. 이세창도 힐끔거리며 황금수라들과 함께 멀어지고

청풍; [제게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칼을 내려놓고. 공손하게

장세명;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주어야겠네.] 청풍을 지긋이 보며

청풍; (일개 요리사인 내게 무얼 물어보려고 정색을...) + [그리하겠습니다.]

장세명; [자네는 용무린이란 인물을 아는가?] 강렬한 표정으로 묻고

 

#54>

주방 건물의 뒤쪽. 벽에 붙어서 주방 쪽을 보고 있는 벽세황.

벽세황의 시점. 청풍과 장세명이 뭔가 얘기 나누고 있다. 심각한 표정들이고.

벽세황;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손을 귀에 대고 기울이며 찡그리고

<장총관이 주변에 단음강기(斷音罡氣)를 펼쳐놓은 때문이다.> 청풍과 장세명 주위에 물방울같은 투명한 벽이 서려 있는 것 배경으로

벽세황; (남이 들으면 안되는 내용의 대화가 오고 가고 있다는 건데...) 노려보고

청풍이 장세명에게 뭐라 말하는 모습 크로즈 업

벽세황; (이청풍! 네놈 설마 소소가 사우란 놈과 놀아난 걸 장총관에게 고자질하고 있는 것이냐?) 이를 갈며 노려보고

 

#55>

청풍; [용무린...] [금시초문인 이름입니다.] 고개 젓고

장세명; [그럼 섭아연은?] 청풍을 지긋이 보며 묻고

청풍; [역시 처음 들어보는 이름입니다.]

장세명; (여기까지는 진실...) + [진삼낭이란 여자는 혹시 아는가?] 기습적으로 묻고

청풍;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은 지금 날 심문중이다.) + [모릅니다.] 고개 젓고

장세명; (미묘하군.) 약간 갸웃하고

장세명; (아주 순간적이었지만 망설임이 느껴졌다.) + [그렇군.] 끄덕이고

장세명; (이놈이 용무린과 아연아가씨 사이의 아들인가는 가슴에 나비 형상의 반점이 있는지를 확인하면 되겠지만...) 청풍을 보며 생각

장세명; (보는 눈이 많으니 이 자리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주변을 곁눈질. 요리사들과 이세창, 주대육 등이 사방에서 보고 있다.

청풍; (뭔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다.) 그런 장세명을 보며 생각하고

청풍; (게다가 무림맹의 총관쯤 되는 인물이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심상치가 않다.) 무표정하게

청풍; (호의를 품고 있는지 악의로 심문하는 것인지 모르니 내색하면 안된다.)

장세명; [무공은 배우지 않았군.] 청풍의 몸을 훑어보고

청풍; [배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습니다.]

장세명; [그런데 어쩌다가 무공을 배운 자와 싸운 건가?] 청풍의 가슴을 보고. 옷을 여민 사이로 붕대가 보이는데 피가 좀 배어나왔다.

청풍; (내 몸 상태를 알고 있다.) + [금전 문제로 흑사회 인간들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장세명; [의지력이 대단하군. 이런 몸 상태로도 내색을 하지 않고...] 청풍의 어깨를 만지며 감탄하고

 

#56>

[!] 숨어서 그걸 본 벽세황의 눈 번뜩

벽세황의 시점으로 장세명이 청풍의 어깨를 만지며 뭐라 말하는 장면.

벽세황; (정황상 이청풍에게 다친 경위를 묻고 있는 게 틀림없다.) 이를 부득 갈고

벽세황;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진 것 같다.) (다친 경위를 설명하려면 자연스럽게 소소와 사우의 야합을 거론해야할 테니...) 청풍과 장세명을 노려보고

 

#57>

장세명; (경이로운 자질을 지녔다. 맹주님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 [무공을 배워볼 생각 있는가?] 청풍의 어깨를 만지며 좀 놀라는 표정으로

청풍; [기회만 되면 배우고 싶습니다.] + (오늘 새벽에 겪었던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무공을 배워야겠지.)

장세명; [그렇다니 잘 됐군.] ! 끄덕이며 청풍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장세명; [나는 내일 오후에 무림맹으로 돌아갈 예정이네.] [결심이 서면 그 전에 날 찾아오게나. 좋은 스승을 소개시켜줄 테니...]

청풍; [생각해보겠습니다.]

장세명; [보는 눈이 많네.] 주변을 둘러보며 웃고.

이세창과 주대육과 요리사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보고 있다. 이세창의 표정이 심각하고

장세명; [나와의 대화는 주로 요리에 관한 것이었던 걸로 해두세.] [내가 자네를 무림맹으로 데려가고 싶어 한다고 말해도 되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고

청풍;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 대화를 못 들었구나.) + [알겠습니다.] 끄덕

장세명; [자네의 기막힌 정육 솜씨 덕분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네.] !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과장되게 말하며 돌아서는 장세명. 그와 함께 주변에서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사라지고

청풍; (우리 둘을 감싸고 있던 막 같은 것이 사라졌다.) + [별 말씀을...] 고개 숙이고

장세명; [내 제안을 잘 생각해보고 내가 떠나기 전에 답을 주게나.] 손 흔들며 주대육쪽으로 가고

청풍; (주변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겠구나.) + [그리하겠습니다.] 주대육의 등에 대고 고개를 조금 숙이고

곧 주대육과 이세창과 웃으며 뭔가 얘기를 하는 장세명. 청풍의 주위로는 요리사들이 몰려오고

요리사1; [저분과 무슨 이야기를 한 건가?] + 요리사2; [거리가 좀 있긴 했지만 이상하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다가와 살피는 표정으로 묻고. 다른 요리사들도 청풍의 주위로 몰려들고

청풍; [어떤 제안을 하셨는데... 지금은 말하기가 곤란한 내용입니다.] 칼과 도마 위의 고기를 정리하며 대충 대답하고

[오오! 이것 보게!] [이 친구 벌써 더 좋은 조건으로 영입 제의를 받은 모양이로구만.] [무림맹의 주방의 명성도 우리 황금전장 주방 못지않지.] 요리사들 흥분과 시샘, 축하의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

청풍; [그런 거 아닙니다.] 쓴웃음 지으며 정리하고

 

#58>

[...] 그런 청풍을 보는 벽세황. 여전히 숨어있고

호들갑 떠는 요리사들에게 둘러싸인 청풍의 모습

벽세황; (말하기 곤란한 제안을 받았다?) 이를 부득

벽세황;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장세명 쪽을 보고. 장세명은 이세창, 주대육과 이야기하며 주방 앞을 떠나고 있다. 황금수라들이 따라가고

벽세황; (장총관이 뭔가 낌새를 채고 이청풍을 회유한 게 분명하다.) (장총관도 나름대로 정보망을 지니고 있어서 소소의 행실에 대한 의혹을 품고 있었을 테고...) 멀어지는 장세명을 보고

벽세황; (늦기 전에 결단을 내려야한다.) 다시 청풍을 보고

벽세황; (저 놈이 어디까지 얘기했는지는 모르지만 장총관의 표정을 보면 결정적인 내용은 듣지 못한 것같다.)

벽세황; (하지만 다시 장세명을 만나면 이청풍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

벽세황;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막아야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기서린 표정

 

#59>

어느덧 깊어진 밤. 이제 만찬은 끝났고. 그래도 아직 황금전장은 불야성. 만찬장을 하인과 하녀들이 정리한다.

벽초천의 집무실.

집무실 내부. 벽초천, 이세창, 벽세황이 모여서 회의중이다.

벽세황; [더 늦기 전에 손을 써야합니다.] 상좌에 앉은 벽초천에게 말한다. 이세창과 마주 앉아서

벽세황; [이청풍이 다시 장세명을 만나면 무슨 소릴 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이세창; [장주님께서 결단만 내려주시면 즉시 이청풍의 입을 막아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벽초천; [이청풍은 주대육이 공을 들여 영입한 인재다.]

벽초천; [이청풍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죽을 경우 뒷말이 있을 수 있다.]

이세창;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히죽

이세창; [이청풍을 제거해도 주대육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게 만들 방책을 이미 세워두었습니다.] 음산하게 웃는 이세창의 얼굴 크로즈 업

 

#60>

주방. 요리사들과 하녀들이 뒷정리를 하고 있다.

청풍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서서 주대육과 면담을 하고 있다. 다른 요리사들은 설거지를 하거나 요리 도구를 정리하고 있고

주대육; [집에 가겠다고?] 탁자를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서 청풍을 올려다본다. 모자와 앞치마를 벗어서 탁자 한쪽에 올려놨다.

청풍; [죄송합니다. 식구들이 걱정할 것 같아서...]

주대육; [사람을 보내 오늘 밤은 여기서 자고 갈 거라 전해줄 수 있는데...]

대답하지 않는 청풍.

주대육; (고집하고는...) + [알았다.] 한숨

주대육; [집에 가서 쉬는 게 편하면 그리해라.] [대신 이거 한 가지는 명심해라.]

주대육;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내게 말해야한다.] 의미심장하게

청풍; [명심하겠습니다.] 고개 숙이고. 그때

주방으로 들어오는 여자무사 한 년. 차갑고 도도한 인상. #33>에 나온 벽소소의 심복

<저 년은 안채를 경호하는 황금나찰(黃金羅刹)들의 부()단장 냉상아(冷祥娥)잖아.> <무공이 높은 만큼 성격도 도도해서 사내들을 발톱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다지?> <저 까칠한 년이 무슨 일로 주방에 발길을 한 건가?> 요리사들 곁눈질로 여자무사1을 보고. 주눅이 들어 정면으로 여자무사1을 보는 놈은 없다.

여자무사1을 발견하고 돌아보는 주대육과 청풍

여자무사1; [총주방장님!] 포권하고

주대육; [냉상아...] [이 시간에 자네가 웬일인가?]

여자무사1; [총관께서 이숙수를 보자고 하십니다.] 청풍을 보며 말하고

청풍; (총관이 날 보자고 한다?) 찡그리고

주대육; (청풍이가 장총관과 무슨 얘기를 했는지 심문할 생각이겠군.) + [안내해줘라.] 끄덕이고

여자무사1; [가시지요 이숙수!] 가자고 하고

주대육; [총관을 만난 후 다시 돌아올 거 없이 바로 귀가해라.]

청풍; [!] 고개 숙이고

도도한 자태로 문쪽으로 가는 여자무사1을 따라가는 청풍. 요리사들이 뿅 간 표정으로 여자무사1을 훔쳐보고 있고

[...] 여자무사1을 따라가는 청풍의 뒷모습 보며 뭔가 생각하는 주대육.

주대육; (총관이 황금수라가 아닌 황금나찰에 속한 계집을 통해서 청풍이를 불렀다?) 찡그리고

주대육;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는군.) 불길한 예감을 느끼는 얼굴

 

#61>

벽초천의 집무실. 불이 켜져 있고 입구를 황금수라들 네 명이 지키고 있고.

그곳으로 오는 여자무사1과 청풍.

여자무사1; [이숙수를 데려왔어요.] 황금수라들에게

황금수라들; [수고했소 소저.] [헌데 어쩐다?] [총관님께서는 장주님의 부름을 받고 급히 나가셨소.]

여자무사1; [그랬군요.]

청풍; [돌아오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황금수라들; [그럴 거 없네.] [총관님께서는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자네가 오면 안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네.]

여자무사1; [제 임무는 마쳤으니 가겠어요.] 돌아서고

[살펴가시오 냉소저.] [자주 들러주시오.] 눈 희번득이며 여자무사1이 돌아가는 모습 보는 황금수라들. 그러면서

황금수라들; [안으로 들어가게.] [총관님이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 올 걸세.] 청풍에게 건성으로 말하며 건물쪽을 손짓한다. 시선은 여자무사1을 향한 채

청풍; [그러지요.] 건물 입구로 가고.

청풍; (총관이 날 보자고 한 이유는 짐작이 간다.) 문고리를 잡고

청풍; (내가 혹시 큰 아가씨의 추문을 무림맹 장총관에게 흘렸는가 확인하려는 것일 텐데...) 끼익! 문을 열면서 주방에서 장세명과 대화하는 자신을 벽세황과 함께 노려보던 이세창의 모습 떠올리고

청풍; (자칫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으니 말을 조심해야한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고

 

#62>

청풍이 열거 들어간 문 안쪽은 벽초천이 벽세황등에게서 보고 받든 거실 그대로인데 다만 아무도 없으며 탁자에 큼직한 상자가 하나 놓여있는 게 다르다. 상자는 딱 봐도 패물함인데 상당히 크다.

청풍; (우리 집보다도 몇 배 더 넓은 거실이로군.]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서며 둘러보고. 그러다가

탁자에 놓여있는 패물함을 보고

청풍; (웬 상자인가?) 패물함 보며 의자에 앉고

청풍; (딱 봐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다. 뭔가 귀중한 물건이 들어있겠구나.) 패물함을 보며 생각하고. 하지만 건드릴 생각은 하지 않는다.

 

#63>

건물을 밖에서 본 모습. 헌데

건물 근처 어둠 속에 서있는 여자무사1. 떠나지 않았다.

여자무사1의 시점. 건물이 보이고

여자무사1; (우릴 원망하지 마라 이청풍.) 차갑게 웃고

여자무사1; (아가씨의 눈 밖에 난 순간 네 운명은 정해져 있었으니...) 사악하게 웃고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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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끈질긴 추적자(追跡者)(3)

 

 

어느 방면의 고인이시오?”

거지는 두려움과 함께 의혹을 느끼며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면서 소리쳐 물었다.

하지만 대꾸할 엄두도 나지 않은 임청우는 관도를 벗어나 근처의 산으로 치달아 올라갔다.

가늘어지긴 했어도 비는 하염없이 쏟아지는데 임청우는 점점 더 험하고 외진 산속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임청우가 상대해 주지도 않자 거지는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나를 유인하려는 술책이 아닐까?)

거지는 수많은 전장(戰場)을 누비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을 벴던 사람이었다.

죽을 위기도 수없이 넘겼으며 적의 간계에 빠진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기를 구해준 대장군(大將軍)을 보필하여 무수한 전장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적을 신중히 대하고 몸을 사리는 침착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주인의 적이 자기를 유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거지는 임청우와의 거리를 좀 더 벌리며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사태에 대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그러던 어느 순간 거지는 문득 빗속을 흐르는 만리향의 향기를 맡았다.

만리향 향기는 계속 흐르고 있었지만 거지는 임청우에게 온 정신을 다 쓰느라고 미처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소저!”

거지는 자기도 모르게 놀라서 크게 소리를 질렀다.

혼이 달아날 정도로 놀란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임청우를 쫓아가며 고함쳤다.

이놈! 우리 아가씨를 내려놔라! 그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감히 손대려하느냐?”

임청우는 내심 아차! 했다.

(저 거지가 결국 알아버렸구나. 내가 주은을 유괴해서 달아나는 것으로 생각한 모양이구나. 빨리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숨어야 할 텐데...)

뒤를 돌아보니 거지가 무시무시한 빠르기로 쫓아오고 있었다. 느긋하게 따라오던 방금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임청우는 가성(假聲)을 쓰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다.

더 이상 나를 쫓아온다면 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고 말겠다.”

거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송곳이 바닥에 꽂히듯 우뚝 멈추어 섰다.

절대로 그래선 안된다. 그분 소저를 죽인다면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 복수하겠다.”

멈춰선 거지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런 말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를 쫓아오지만 않는다면 맹세코 이 여자를 죽이진 않겠다.”

임청우가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를 올라가며 싸늘한 음성으로 내뱉었다.

멈춰 섰던 거지가 가슴을 풀어헤치고 다시 달려오며 소리쳤다.

차라리 나를 죽이는 것이 어떤가? 나는 소저의 종이나 마찬가지이니 소저께서 욕을 당하더라도 내가 죽은 이후에야 당해야 할 게 아닌가?”

임청우는 거지의 충성심이 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거짓으로 속이는 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겹겹이 쌓여 이루어진 봉우리의 위쪽을 향해 달려 올라갔다.

거지는 독한 마음을 먹고 임청우의 뒤를 쫓고 있었다.

(소저께서 욕을 당하신다면 아마도 주인께선 내가 뭐라고 해도 반드시 이 늙은 거지를 죽이고 말 것이다. 주인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기필코 소저를 구해내야 한다. 구해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소저를 편안히 돌아가시게 라도 해야 한다.)

거지는 심주은을 죽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쐐액!

자기의 목숨 따위는 도외시한 거지는 맹렬히 도약해서 임청우를 덮쳐갔다.

카앗!”

단번에 거리를 오장까지 좁힌 거지가 입을 벌리는 순간 수 십 줄기의 주전이 빗속을 뚫고 날아갔다.

그 소리만도 무시무시하여 임청우는 도저히 자기가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이에 그는 심주은을 안은 채 곤두박질치듯이 앞쪽으로 납작 엎드렸다.

퍼퍼퍽! 퍼석!

거지가 뿜어낸 주전들은 임청우의 머리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앞쪽의 바위들을 뚫고 들어가거나 깨트렸다.

죽어라!”

그 사이에 다시 삼장쯤으로 거리를 좁힌 거지가 임청우에게 덮쳐들며 살수를 펼치려 했다.

콰르르르릉!

바로 그 순간 거지가 뿜어낸 주전에 격중된 바위 하나가 흔들리더니 임청우쪽으로 굴러 내려오기 시작했다.

(산사태다!)

임청우는 경악하며 자기를 향해 굴러오는 큰 바위에 왼손을 갖다 대고 있는 힘을 다해 밀었다.

바로 머리 위에서 덮쳐들고 있는 거지는 있다는 것조차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삼천 근이 넘는 큰 바위가 임청우의 손에 떠밀려 붕 떠오르며 그의 몸을 넘어갔다.

!”

그 바람에 거지는 다급히 손을 거둬들이며 바위를 밟고 다시 날아올라야만 했다.

쿠르르릉!

바위가 굴러가면서 다른 바위를 건드리고, 그 바위는 다시 다른 바위를 밀치면서 산 전체가 지진을 만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빨리 위로 올라가!”

이불에 쌓여 있던 심주은이 갑자기 임청우에게 소리쳤다. 정신을 차린 것이다.

이얍!”

임청우는 크게 기합을 지르며 껑충 날아올라 봉우리를 향해 날아갔다.

크아!”

뒤쪽에서 거지가 벼락같이 고함을 치면서 두 대의 주전을 쏘아 보냈다.

왼손을 뒤로 휘둘러서 한대의 주전을 흩어버리는 순간 허벅지가 화끈해졌다. 나머지 하나가 그의 허벅지를 관통해버린 것이었다.

원래부터 두 대의 화살 중 거지가 정말 공력을 들인 것은 허벅지를 관통한 그것이었다.

허벅지에 상처를 입은 임청우는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나뒹굴 뻔했다.

으헤헤헤!”

공격이 성공하자 득의한 거지가 신룡처럼 솟구쳐 올라 임청우를 따라붙었다.

!

그리고는 임청우의 몸 옆으로 삐죽이 나와있는 이불자락을 낚아챘다.

실로 찰나지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임청우는 꼼짝도 못하고 심주은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지는 크게 기뻐하며 이불을 헤쳤다.

소저!”

임청우가 놀라 소리칠 때였다.

!”

거지가 비명을 지르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가슴을 누르고 있는 그의 손가락 사이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심주은은 이불자락을 잡고 날아올라 펼쳐지는 이불로 앞을 가린 채 임청우의 곁으로 떨어져 내렸다.

바위를 굴려!”

그녀는 근처에 있는 큰 바위들을 향해서 장력을 날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가 굳이 바위를 굴릴 것도 없었다.

쿠르르르릉!

이미 아래에서 시작되고 있던 산사태의 영향으로 흔들린 바위들은 산이 무너지듯한 기세로 쏟아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

거지는 대경실색하며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튀어오른 커다란 바위를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산사태 속에 휩쓸리고 말았다.

두두두두두!

마치 천군만마가 질주하는 듯, 땅이 진노하는 듯, 산사태는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며 근처의 지형을 바꾸어버렸다.

공포에 질린 심주은은 알몸을 가리고 있던 이불마저 놓아버린 채 임청우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자연의 힘은 어떤 인간에게라도 두려움과 놀라움을 줄 뿐이었다.

임청우도 심신이 지진을 만나 흔들리는 것같이 놀랐다.

이름 없는 야산의 한 비탈을 바꾸는 것에 불과한 산사태가 이럴진데 하물며...

영원한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인간의 일백년 인생은 전광석화에 불과할 따름이고 무궁한 천지의 작용에 비한다면 인간의 역사(役事)란 그저 물결이 다른 물결에 밀리면서 잠시 만들어놓는 파문과도 같은 것이리라.

 

***

 

쏴아아아!

완전히 지형이 변해버린 산비탈로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린다.

임청우는 젖은 이불을 끌어올려 심주은의 알몸을 감싸주었다.

심주은은 거지를 삼켜버린 산비탈을 바라보며 가늘게 떨고 있었다. 가까웠을 뿐만 아니라 어릴 적부터 자기에게 잘 대해줬던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그를 죽여버렸어. 그를...”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그러자 임청우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죽이려고 했으면 완전히 죽였어야 했을 것 같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말에 고개를 들면서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알기로는 임청우는 심성이 중후하고 착해서 결코 모진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었다.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산비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손길을 따라서 눈을 돌리던 심주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피유우우웅!

퍼부어지는 빗줄기를 거스르며 땅에서부터 유성(流星) 하나가 하늘을 향해 꿈틀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신호용의 불꽃인 기화(旗火).

거지는 무시무시한 산사태에 휩쓸리고도 뛰어난 무공 덕분에 죽지 않았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제 기화가 올라갔으니 그것을 발견한 노파와 중이 달려올 것이다.

심주은 이리 저리 흩어져 있는 젖은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그 옷들은 임청우가 그녀와 함께 이불속에 넣어 왔던 것이다.

옷을 걸친 심주은은 허둥대며 임청우의 손을 잡고 바위산의 정상으로 올라갔다.

삐이이! 삐익!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빗속을 뚫고 세찬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기와 승이 벌써 가까이 왔다.)

심주은의 다급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임청우는 비에 젖어 착 달라붙은 옷을 입고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겉옷을 벗어서 걸쳐주었다.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서 피해야겠다. 다시 열이 나면 그땐 어쩔 도리가 없어.”

임청우의 부드러운 말에 심주은은 감격하여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녀는 그의 손을 꼭 잡고 산의 반대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

 

산의 반대쪽은 우거진 숲이었다.

비와 바람 속에서 나무들은 호곡을 지르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검은 숲 속을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달려갔다.

빗방울이 나뭇잎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바람은 가지들을 이리저리 흔들어서 을씨년스럽게 만든다.

삐이익! 삐익!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모든 소음을 뚫고 두 사람의 귀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기걸승이 벌써 산을 넘어 숲으로 들어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심주은이 절망적인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 몸에서 나는 만리향 때문에 저들은 우리가 어디에 숨어도 찾아내고 말거야.”

동굴을 찾아야 할텐데...”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임청우가 미소를 지으며 심주은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닥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들이 오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일이야. 내가 동굴을 찾는 것은 지금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주은은 총명한 소녀이지만 임청우처럼 도학(道學)에 관심을 두지 않아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자기가 뭐라고 해도 임청우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체념하며 말했다.

그래, 어차피 그들의 손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체념한 심주은은 처연한 어조로 말할 때였다.

넌 그렇게 말을 해서는 안돼.”

임청우가 그녀의 손을 끌고 나아가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룬 것도 하늘이 정한 것이라면 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야. 그럼 너는 이런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나를 믿고 따라야하지 않겠어?”

! 난 그렇게는 못해. 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인데 무조건 남편이 하는 대로 따른다는 것은 말도 안돼.”

심주은은 자기가 처한 상황도 잊고 혀를 차면서 말했다.

무심코 남편이란 말을 내뱉고 나니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 심주은의 얼굴이 달아오른 게 임청우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삐이익!

그 사이에 휘파람 소리는 불과 백여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다.

쩌억!

그 뒤를 이어 번갯불이 하늘을 동서로 길게 찢고 지나가며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 순간 임청우는 앞쪽에 있는 큰 나무의 뒤에 가리워져 있는 동굴을 하나 찾아냈다.

실로 천행이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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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에 출간한 전 8권 작품 환골탈태를 연재합니다.

다만 원본 환골탈태는 19금 요소가 상당해서 전체연령이 접근할 수 있는 블로그 연재에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습니다.

부득이 19금 요소는 삭제하고 연재를 하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9금 요소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무협소설로서의 재미에 집중해주셨으면 합니다.

연재 주기는 매일 1회 예정입니다만 사정에 따라 건너뛰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덧 17년 전의 작품이지만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와룡강 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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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무협소설

 

               환골탈태 換骨奪胎

 

 

 

 

 

 

제 1장

 

              단서(丹書), 옥액(玉液)의 전설

 

 

 

단서(丹書)!

옥액(玉液)!

 

그 두 가지의 이름은 지난 백여 년의 세월 동안 강호무림에 숱한 풍파를 불러일으켰다.

한 권의 비급과 한 병의 신비한 영약!

붉은 표지의 비급(丹書)에는 천하무적의 신공절학이 수록되어 있으며,

옥같이 보배로운 물약(玉液)은 만독불침(萬毒不浸)과 금강불괴(金剛不壞)를 만들어 준다!

칼끝에 생명을 건 무림인들이 그 이름을 들을 때 입 안의 침이 마르고 혈관의 피가 들끓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

<금강옥액(金剛玉液)!>

 

숱한 인명을 앗아가고 수많은 가문, 문파를 파멸로 몰아넣은 무림의 이대기보! 이것들은 백년무림,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도 가장 강했던 것으로 믿어지는 한 명 기인이 남긴 것이다.

 

무성(武聖) 청구상인(靑丘上人)!

 

저 달마(達磨)와 장삼풍(張三豊)에 비견되어 무성이란 지고의 칭호로 불리는 일대기인! 그의 숱한 기행과 업적은 한 수레의 글로도 다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이거니와, 특이한 것은 그가 중원무림 출신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청구(靑丘)! 달리 근역(槿域), 동이(東夷)라고도 불리는 고려국(高麗國)이 그의 출신인 것이다.

비록 지금은 쇠락하여 자그마한 반도(半島)에 도사린 옹색한 민족이 되었으되, 아득한 상고시대 이래로 그들 동이족이 화북(華北)과 막북(漠北) 일대를 누천년간 지배했음은 잘 알려진 바다.

동이족은 무예를 숭상하고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살았던 위대한 정복민족이다. 중원의 숱한 병법과 병서, 무예가 바로 그들 동이족에게서 유래했다.

태공망(太公望), 노자(老子), 공자(孔子), 황석공(黃石公)이 모두 동이족의 가계(家系)를 잇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저술인 금해병서(金海兵書)를 얻기 위해 당태종 이세민(李世珉)이 온갖 책략과 술수를 다했음은 당서(唐書)에도 전하는 바다.

누천년을 내려온 동이족 전래 무맥의 최후 전승자! 그가 바로 청구상인인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여 년 전, 청구상인은 동이족이 잃어버린 세 가지의 보물, 창세삼보(創世三寶)를 찾아 중원으로 들어왔었다. 그리고 사해오호를 주유하며 숱한 기인명숙들과 조우하였는바, 누구도 청구상인의 수하에서 삼 초를 버티지 못하였다.

그렇게 일 갑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청구상인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역만리 중원 땅에 노구를 누이게 된다.

청구상인이 우화등선(羽化登仙)한 곳이 어딘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청구상인이 자신의 고향인 청구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당연히 그의 신공절학이 담긴 단서와 옥액도 중원의 어딘가에 남아 있음이 분명하다.

 

청구단서(靑丘丹書)를 찾아라! 천하를 얻게 되리라!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어라! 죽음조차 이길 수 있으리라!

 

강호무림이 발칵 뒤집힌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사, 흑백을 불문하고 모든 강호인들이 명산대천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단서와 옥액, 아니 그중 하나만 얻어도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개인은 개인대로, 문파는 문파대로 사력을 다해 청구상인의 유택(幽宅)을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그 와중에 숱한 피보라가 일고 비극이 명멸했다. 누가 청구이보(靑丘二寶)에 대한 단서를 얻었다는 소문이 돌기만 하면 전무림인들이 그를 습격했다.

어떤 천하고수라도 전무림인을 상대로 싸워서야 살아날 수 없는 법! 수만 명의 생명이 억울하게 죽어 갔고 수백의 문파와 가문이 무림도상에서 지워졌다.

어떤 자는 이런 세태를 빌미로 평소의 원한을 갚기도 했다. 자신의 적이 청구이보를 얻었다는 소문만 흘리면 거의 틀림없이 그 적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마는 것이다.

음모와 살육의 광란(狂亂)!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며 중원무림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제서야 청구이보가 일으킨 미증유의 혈겁은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숱한 희생과 유혈 끝에 강호인들도 이제는 청구이보에 대한 미련에서 점차 벗어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언 백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지금도 무림인들은 단서, 옥액이란 단어를 들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욕심과 집착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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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황금전장> 역시 저녁 무렵. 헌데 황금전장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없다. 무사들의 삼엄한 경비. 정문은 열려있지만 드나드는 사람과 우마차는 없다. 입구에 이세창이 서있다. 초조한 기색이고. 이세창 주변에는 귀견수와 몇 명의 황금수라들이 서있다.

이세창; (완전히 허를 찔렸다.) 입술 깨물고

이세창; (원래 내일 도착예정이던 무림맹 총관 일행이 갑작스레 오늘 방문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다니...)

이세창; (무림맹 총관 소면무상(笑面無常) 장세명(張世明)은 속을 알 수 없는 능구렁이다.) 이를 악물고

이세창; (그리고 소장주의 분석대로면 위진천과 큰 아가씨의 혼담에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인물이다.) (무림맹 내에서 본장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일 텐데...)

이세창; (그래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이번 혼담을 무산시키려들 가능성이 높다.) 심각해지고

이세창; (방문일정을 앞당긴 것도 우릴 흔들어서 빈틈을 보이게 만들 목적...) + [!] 생각하다가 흠칫! 하고

길 저편에서 황근전장으로 오는 마차 한 대. 짐마차인데 짐칸에는 천으로 감싼 물건들이 있고. 마부석에는 청풍과 추노대가 타고 있다. 고삐는 추노대가 잡고 있고

이세창; (이청풍!) 눈 번뜩

귀견수; [때 맞춰 이청풍이 도착했습니다.] 뒤에서 말하고

귀견수; [총주방장이 무림맹의 장총관을 대접하기 위해 질 좋은 소고기를 주문했다고 합니다.] 이세창의 눈치 보며

이세창; [장총관에게 만찬을 제대로 대접할 수 있게 되었군.] 다가오는 마차를 노려보며 끄덕이고. 그 사이에 마차는 황근전장 입구에 이르고

청풍; [다녀왔습니다 총관님!] 마차 마부석에 앉아 인사하고. 추노대는 말고삐를 잡아당겨 마차를 멈추게 하고

이세창; (겉보기에는 멀쩡하군.) + [수고했다.]

이세창; [마침 내일 오실 예정이었던 귀빈이 곧 도착한다고 한다.] [서둘러 주방으로 고기를 가져가도록 해라.]

청풍; [!] 고개 숙이는데

[옵니다!] 귀견수가 급히 말하며 길쪽을 가리키고

이세창 뿐 아니라 청풍과 추노대도 돌아보고

두두두! 길 저편에서 일단의 기마대와 마차가 달려온다. 앞쪽에는 같은 복장과 모자를 쓴 기사들 네 명이 말을 몰고 달려오고 그 뒤를 두 필의 말이 끄는 사람이 타는 화려한 마차가 따라온다. 문과 창문이 달려있는 그 마차 뒤에는 다시 네 명의 기사가 말을 타고 따라온다. 화려한 마차에는 깃발이 하나 달려있다. 깃발에는 <武林盟>이라는 글이 적혀있다.

이세창; [무림맹 총관일행이 도착했다. 영접 준비를 해라.] 급히 주변 무사들에게 외치고. 그러자

서둘러 대오를 정열하는 황금전장 무사들.

이세창; [그 마차도 옆으로 치워라. 방해된다!] 추노대가 몰고 온 마차에게도 손짓하고.

추노대; [예 예 어르신!] ! 급히 고삐를 쳐서 말을 움직이게 하고

두두두! 짐마차는 황금전장 안쪽으로 들어가 길 가로 비켜서고. 그 사이에

두두두! 마차와 기마대 일행이 황금전장 입구에 도착한다.

기마대는 좌우로 갈라서고 마차가 먼저 문으로 들어온다.

마부; [워워!]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무사가 말고삐를 잡아당기고.

두두두! 마차가 멈춰서고. 그러자

서둘러 마차 문으로 가는 이세창. 청풍과 추노대가 타고 있는 마차가 있는 쪽이다.

이세창; [원로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소인은 황금전장에서 총관직을 맡고 있는 이세창이라고 합니다.] 마차 문을 향해서 포권하고. 그러자

장세명; [이총관 얘기는 벽공자를 통해서 자주 들었소.] 드륵! 창문이 열리며 장세명의 모습이 드러난다. 상체만 보이는 모습이고. 후덕하고 늘 웃는 얼굴. <신마유희> 등 다른 작품의 총관 장세명 캐릭터

장세명; [벽공자는 이총관의 일 처리가 철두철미하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하더이다.] 사람 좋게 웃고

이세창;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굽신

청풍; (저 인물이 무림맹의 총관...) 정문 안쪽 구석으로 비켜 서있는 마차의 마부석에서 장세명을 보고

청풍; (무림맹주인 철문무제가 연로한 탓에 사실상 무림맹의 모든 일은 장세명이라는 이름의 저 인물이 처리하고 있다던가?)

<제 아무리 황금전장의 총관이라도 천하 무림의 주인인 무림맹 총관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공손하구나.> 연신 굽신거리며 장세명에게 뭐라 하는 이세창의 모습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장세명; [근래 내가 다리가 좀 불편해졌소.] [그래서 마차를 탄 채로 장주를 뵈러가고 싶은 데 괜잖겠소?]

이세창; [물론입니다.]

이세창; [저희 장주께서도 장총관님의 편의를 최우선시 하라는 분부가 계셨습니다.] 굽신 거리고

장세명; [그런 고마울 데가...] + [!] 대충 대꾸하다가 흠칫! 하고

구석에 정차해있는 청풍과 추노대가 탄 마차가 장세명의 눈에 들어오고

장세명쪽을 보고 있는 청풍의 얼굴 크로즈 업

장세명; (!) 경악하고

<... 용무린?> 청풍의 얼굴 배경으로 용무린의 얼굴이 떠오르고. 하지만

장세명; (그뿐만이 아니다.) 식은땀 흘리며 몸을 조금 밖으로 내밀며 청풍을 보고

[!] 흠칫! 하며 청풍을 돌아보는 이세창

장세명; (얼굴에서 아연소저의 분위기도 느껴진다.) 섭아연을 떠올리고

장세명; (설마 저놈...) + [저 젊은이는 누구요?]

이세창; (이 능구렁이가 왜 이청풍에게 관심을 보이는 건가?) + [폐장의 숙수중 한명입니다.]

장세명; [이름은?] 청풍을 보며

이세창; (어째 느낌이 안좋군.) + [이청풍이라고 합니다.]

장세명; [이청풍... 이씨란 말이지?] 무언가 생각하며 청풍을 보고

청풍; (시선이 화살처럼 느껴진다.) 장세명의 시선을 피하고

청풍; (무림맹 총관쯤 되는 거물이 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건가?) 고개를 숙여 시선을 장세명의 피하고. 그때

드드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장세명을 태운 마차.

마차를 타고 가며 청풍을 보는 장세명.

찡그리며 마차를 도보로 따라가는 이세창과 귀견수 일행

이세창; [만찬이 곧 진행될 테니 서두러 주방으로 고기를 옮겨라.] 청풍과 추노대가 탄 마차를 지나가며 차갑게 말하고

청풍; [...] 고개 숙이고.

귀견수; (태연한 척 하지만 몸에서 피 냄새가 난다.) 이세창을 청풍을 지나가며 곁눈질로 청풍을 보고

귀견수; (역시 새벽에 큰 아가씨의 밀회장면을 목격했던 건 청풍 네 녀석이었구나.) 소리없이 한숨 쉬고

귀견수; (네놈의 목숨은 백척간두 신세다.) (제발 의심 살 행동은 하지 말길 바란다.) 청풍을 지나가며 생각하고

청풍; (귀견수의 반응도 그렇고...) 다시 움직이는 마차의 마부석에서 귀견수의 뒷모습 보며 생각하고. 귀견수와 이세창과 황금수라들 앞쪽에서는 장세명이 탄 큰 마차가 가고 있다.

<내가 큰 아가씨의 야합현장을 목격한 사실은 발각된 게 틀림없구나.> 장세명이 탄 마차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짐마차를 배경으로 청풍의 생각 나레이션

 

#50>

. 황금전장에 불이 켜지기 시작하고.

주방. 치열하게 음식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커다란 탁자을 앞에 두고 선 주대육의 지휘로 수많은 요리사들이 굽고 찌고 튀긴다. 음식 그릇을 쟁반에 얹은 하녀들이 연신 드나들고 있고

만들어진 음식들은 주대육 앞의 탁자에 올려져 검수를 받고.

그 후 연신 하녀들이 옮겨가고 있고. 소리없는 전쟁터다.

내갈 음식 검수를 마치고 한쪽을 돌아보는 주대육

청풍이 커다란 탁자를 앞에 두고 고기를 썰고 있다.

옷을 껴입었고 옷 안쪽은 붕대로 칭칭 감은 모습이다. 그래도 옷 밖으로 피가 일부 배어나오고 있고

주대육; (청풍 저놈...) 곁눈질로 보고

<도저히 일을 할 수 없는 몸 상태인데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무표정하게 고기를 써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주대육의 생각

주대육; (대체 밤 새 무슨 일을 당한 것인가?) (상당히 심각한 상처를 입은 것같은데...) 찡그리고

주대육; (황금전장 소속인 걸 알았으니 흑사회 놈들이 건드렸을 리는 없고...)

주대육; (일이 끝나면 집에 가지 못하게 붙잡아 놓고 추궁해봐야겠다.) 생각하며 다시 탁자에 올려지는 음식들을 조금씩 맛본다.

 

#51>

황금전장의 다른 곳. 벽초천의 후처 온유향의 거처. 다른 곳과 달리 조용한데

창가 의자에 앉아서 턱을 괴고 밖을 보는 벽옥령. 여전히 공주 옷을 입고 있고. 창틀에는 고양이가 앉아 졸고 있다. 방 안에는 잠옷 차림인 온유향이 침대에 쿠션을 등에 대고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

창 밖을 보며 한숨을 연신 내쉬는 벽옥령

그런 벽옥령을 보는 온유향

연신 한숨 쉬며 밖을 보는 벽옥령

온유향; (옥령이가 다 큰 언니들 흉내를 내고 있네.) 웃고

온유향; (과연 우리 옥령이로 하여금 가슴앓이를 하게 만든 행운아는 누구일까?) 벽옥령을 훔쳐보며 웃고

벽옥령; (청풍오빠는 저쯤에 있겠지?) 담장 너머를 보고

벽옥령; (생각 같아서는 몰래 주방으로 찾아가서 훔쳐보고 싶지만...)

벽옥령; (무릇 여자는 사내대장부의 일을 방해하면 안되는 거야.)

벽옥령; (보고 싶어도 부도(婦道)를 지키려면 꾹 참아야만 해!) (부도를 잘 지켜야만 사랑받는 신부가 될 수 있다고 유모가 말했으니까!) 야무진 표정

 

#52>

황금전장의 대청.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하녀들이 연신 음식을 나른다. 입구는 귀견수와 황금수라들이 지키고 있다.

대청 안에서 벌어지는 만찬. 상좌에 놓인 두 탁자에는 장세명과 벽초천이 차지하고 앉아있다. 그 앞쪽으로 죽 놓인 탁자들에는 지역 유지로 보이는 노인들이 앉아있다. 벽세황과 벽소소 남매도 말석 쪽에 앉아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탁자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고 탁자마다 산해진미가 놓여있다. 하녀들이 연신 음식을 교체해주고 있고.

한쪽에서는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이세창이 상좌 뒤쪽에 서서 만찬 전반 상황을 보고 있고

장세명; [혼서는 내일 길한 시간을 정해서 전해드리겠소이다.] 두 손으로 술잔을 들어서 벽초천에게 권하며

벽초천; [장총관께서 주역(周易)에도 능통하다고 들었소이다.] [저희 사당(祠堂)에 혼서를 바칠 시간을 잘 뽑아주시기 바라외다.] 마주 술잔을 두 손으로 들고

함께 원샷으로 술을 마시고

벽세황;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젓가락을 건성으로 움직여 음식을 뒤적이면서 곁눈질로 상좌의 장세명을 보고. 그 옆 문쪽에 가까운 자리의 벽소소는 고개 떨군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다.

벽세황; (아버지와도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고...) 벽초천과 장세명이 서로 얼굴을 보며 웃는 모습을 보고

벽세황; (저 망할 것이 분면랑군 사우와 놀아난 사실만 들통 나지 않으면 우리 황금전장은 무림맹과 사돈지간이 되는 것이다.) 곁눈질로 벽소소를 보고.

어두운 얼굴의 벽소소

벽세황; [얼굴 펴라.] 발로 벽소소 쪽 탁자 다리를 툭 치며 말하고. 시선은 상좌쪽을 향한 채로

[!] 고개 드는 벽소소

벽세황; [지금까지 저지른 과오를 만회하는 길은 요조숙녀인 척 해서 무림맹의 안주인이 되는 것이다.]

벽세황; [그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 길이기도 하고...]

입술 깨무는 벽소소

벽세황; [너는 그저 조신한 규수 연기만 잘 해내면 된다.] [나머지는 아버지와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냉소. 그러다가

[!] 흠칫! 하며 상좌를 보는 벽세황

벽초천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장세명이 무언가 말하고 있다.

장세명 뒤쪽 구석에 서있던 이세창도 당황하는 표정이고

벽세황; (장총관이 무슨 말을 해서 아버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인가?) 귀에 손을 대고 엿듣고. 그러자

<주방 구경을 하고 싶다는 말씀이십니까?> 벽세황의 귀에 들리는 벽초천의 말

벽세황; (주방!) 경악. 긴장

벽세황; (아버지가 그래서 당황하셨구나. 주방에서는 잠재적인 화근덩어리인 이청풍이 일하고 있을 테니...) 굳어지는 얼굴

장세명; [이렇게 몸이 분 것도 지나친 식탐 때문 아니겠소이까?] 자기의 푸짐한 몸을 만지며 웃고

장세명; [그리고 먹는 걸 좋아하다보니 기막힌 요리를 만드는 숙수들을 직접 만나 비결을 듣는 게 낙이기도 하지요.]

장세명; [황금전장의 주숙수의 명성이야 오래전부터 들어왔는데...] [언제 다시 황금전잔을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만나보고 싶소이다.]

벽초천; [그리 말씀하시니 주방 구경을 시켜드리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총관!] 이세창을 부르고

이세창; [예 장주님!] 앞으로 나서고

벽초천; [장총관님을 주방에 안내해드리게.]

이세창; [분부 받들겠습니다.] [이리 오시지요.] 장세명을 따라오라 권하고

장세명; [신세를 지겠소 이총관.] 일어나고

곧 이세창의 안내를 받아 옆문을 통해서 만찬장을 떠나는 장세명

벽세황; (젠장!) 벌떡! 일어나고. 벽소소가 놀라 돌아보고

벽세황; (어째 느낌이 싸하다. 주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같은 예감에...) 급히 입구로 가고

벽소소; [어딜 가려구요?] 일어나려 하지만

벽세황; [넌 자기를 지켜라.] 서둘러 나가고

[...] 상좌에 앉아서 그걸 보며 뭔가 생각하는 벽초천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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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불의의 사고

 

 

복우산의 서북쪽은 칼날을 세운 듯 험한 봉우리들이 병풍같이 에워싸고 있다.

그 봉우리들 남쪽에 정파백도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호천무맹이 자리하고 있다.

때는 늦여름의 오후다.

음습한 비구름이 복우산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휘익!

험하기 이를 데 없는 복우산의 바위 봉우리들 사이를 나는 듯이 달리는 소년이 있었다.

헝클어진 봉두난발에 다 헤어진 남루한 의복을 입었으나 눈빛만은 영기로 총총하게 빛나고 있는 소년...

바로 고검추였다.

고검추는 신개령에서 천면음마 등천하의 임종을 지켜본 뒤 닷새 만에 복우산에 이르렀다.

열흘이 걸릴 것으로 예정했던 복우산까지 닷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화마의 경신술 덕분이었다.

탐화비록에 수록되어있는 축지성촌(縮地成寸)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실술이다.

완전히 연마하면 이름 그대로 축지법(縮地法)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게 축지성촌이다..

고검추는 복우산까지 오는 동안 꾸준히 축지성촌을 연마해왔다.

아직은 입문한 수준이지만 걷는 속도가 전과 비교했을 때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휘익! 파앗!

고검추는 복우산의 험준한 산봉우리들 사이를 마치 한 마리 표범처럼 날렵하게 치달렸다.

(거의 다 왔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호천무맹이다.)

바람처럼 달리던 고검추는 앞쪽에 거대한 병풍처럼 서있는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오는 도중 심마니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호천무맹은 그 봉우리를 등진 채 자리하고 있다.

고검추가 호천무맹의 앞쪽이 아니라 뒷쪽에 자리한 험한 봉우리로 접근하고 있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생부 철사자 고창룡은 호천무맹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죄인이다.

물론 십칠 년 전 벌어진 그 치욕적인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개입된 듯한 심증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검추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아직은 자신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임을 떳떳이 밝힐 상황이 못 된다.

그래서 고검추는 은밀하게 호천무맹에 잠입하여 고현경을 만나려는 것이다.

헌데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춰 섰던 고검추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흐윽... ... 틀렸는가?"

어디선가 여인의 괴로운 신음소리가 들려와 고검추를 흠칫하게 만들었다.

(이 산중에 웬 여인의 신음소리란 말인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잠시 후 고검추는 높은 단애로 둘러싸인 은밀한 계곡에 이르렀다.

(!)

헌데 무심코 단애 아래를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눈을 치떴다.

그와 함께 그의 얼굴은 단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삼면이 깎아지른 절벽에 둘러싸인 계곡 끝에는 그리 크지 않은 폭포가 쏟아지고 있었다.

높이가 오장쯤인 폭포 아래에는 원형의 연못이 형성되어 있다.

"... 으으! 도저히... 못 견디겠다."

지금 그 연못에는 한 여인이 허리까지 잠긴 채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 사고(師姑)!)

몸에 연신 물을 끼얹고 있는 그 여인을 본 고검추는 숨이 턱 막혔다.

검은 옷을 걸치고 있는 여인은 바로 아버지의 사매이며 사촌누이이기도 한 철봉황 고현경이었기 때문이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화에 시달리던 고현경은 복우산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자리한 연못으로 와서 몸을 담그고 있는 것이다.

촤아! !

고현경은 온몸 구석구석에 물을 끼얹으며 꿇어 오르는 욕화를 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필사적인 노력도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오르는 몸을 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흐윽... ... 이걸로는 안돼!"

마침내 고현경은 참지 못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이성이 한계에 이르러 본능에 대항할 힘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몸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열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가해진 자극으로 인해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부작용만 생길 뿐이다.

이제...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결국 고현경은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이 되었다.

뜨거워진 몸을 식혀줄 가능성이 있는 마지막 방법을 떠올린 것이다.

눈이 풀린 고현경은 비틀거리며 연못 밖으로 나왔다.

(... 들키면 안된다!)

충격에 휩싸인 채 연못을 내려다보던 고검추는 급히 근처 바위 뒤로 숨었다.

연못에서 나온 고현경은 연못가에 놓여있는 널찍한 바위 위에 무너지듯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민밍한 치태를 시작했다.

(... 보면 안된다!)

고검추는 내심 부르짖었다.

그는 복우산으로 오는 동안 귀동냥을 통해서 자신의 생부 고창룡과 고현경이 단순한 동문이 아니라 사촌지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고현경은 사고이기 전에 당고모(堂姑母;아버지의 사촌누이)인 집안 어른이다.

조카가 되어 당고모의 치태를 보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걸 알면서도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사고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데 익숙하구나.)

그와 함께 고검추는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비록 도도하고 냉철해서 고현경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지만 어쨌든 그녀도 젊은 여자다.

몸이 뜨거워져 견딜 수 없을 때가 있고 그럼 그때마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고현경의 손길이 능란하고 거리낌이 없는 데에는 그런 슬픈 사정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몸을 달구고 있는 욕정은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지독한 것이었다.

(... 좋지 않다!)

철봉황 고현경의 치태를 훔쳐보는 고검추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검추도 고현경의 상태를 짐작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완전히 잃을 줄은 몰랐다.

제발... 사형... 사형! 저 좀 어떻게...!”

눈을 하얗게 까뒤집은 고현경의 입에서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짐승이 토해내는 것같은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사고는 사촌오빠이기도 한 아버지를 짝사랑했구나.)

고검추는 고현경이 토해내는 신음을 통해서 그녀가 자신의 생부 고창룡을 연모했음을 깨달았다.

그 사이에도 고현경의 상태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 저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

그걸 확인하고 다급해진 고검추는 숨어있던 바위틈에서 벌떡 일어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고현경의 상태가 도저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고검추는 서둘러 절벽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이윽고 연못 근처에 이른 고검추는 숨이 콱 막혔다.

가까이에서 본 고현경의 치태가 너무도 민망하다.

고현경의 치태를 지근거리에서 보게 되자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침착... 침착해야한다.)

고검추는 필사적으로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상의 속을 더듬었다.

다시 꺼낸 고검추의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작은 상자가 들려있었다.

그 은제상자 안에는 수십 개의 은침(銀針)이 들어 있었다.

고검추가 복우산으로 오는 도중에 약방에 들려 구한 침이었다.

탕음마고를 제거하려면 그 은침을 정해진 순서대로 고현경의 혈도에 찔러야만 했다.

(... 우선 마혈을 찔러 진정을 시켜야만 제독술(除毒術)을 시전 할 수 있다.)

!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고현경의 가슴 근처에 자리한 마혈을 침으로 찔렀다.

!

하지만 고현경의 살갗에 닿는 순간 강력한 반진력이 고검추의 손가락 끝을 강타했다.

"!"

고검추는 손가락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에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 정말 강하신 분이다."

고검추는 그제서야 고현경이 은발마희 옥여상 못지않은 강자임을 깨달은 것이다.

고검추는 놀라면서도 자신에게 이토록 막강한 무공을 지닌 사고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흐윽... 사형!"

돌연 고현경이 와락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

고검추는 손목이 끊어지는 듯한 격심한 통증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고현경은 고검추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뜨겁게 할딱거렸다.

"... 사형! 현경이를 제발... 빨리 어떻게 좀 해주세요 하악!"

그녀는 충혈된 눈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아차...)

고검추는 당황했다.

고현경이 자신을 부친인 고창룡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부자지간이므로 고검추는 당연히 고창룡을 닮았다.

게다가 고현경은 끔찍한 욕화로 인해 제 정신이 아닌 상태다.

그녀가 고검추를 고창룡으로 오인한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 사고. 저는 선부가 아닙니다."

고검추는 당황하며 고현경의 손에서 손목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쥐고 있는 고현경의 손은 강철 족쇄같이 요지부동이었다.

"흐윽... ... 너무 하세요 사형!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현경이를 마다하시다니요."

그녀는 오열하며 고검추를 와락 끌어안았다.

(허억!)

얼떨결에 철봉황 고현경의 몸에 올라타게 된 고검추는 전율했다.

몸 아래 느껴지는 고현경의 알몸이 너무도 뜨거웠기 때문이다.

" 어서... 제발 현경이를... 사형의 여자로 만들어주세요!"

고현경은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사지로 고검추를 휘감으며 몸부림쳤다.

그 바람에 고검추의 몸도 의지와 상관없이 달아올랐다.

"... 이러시면 안됩니다 사고!"

당황한 고검추는 고현경에게서 떨어지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강철같은 고현경의 팔 다리에 휘감겨 있어서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검추의 하의는 고현경의 손과 발에 의해 단번에 벗겨졌다.

순간 물기에 젖은 서늘한, 그러면서도 너무도 매끈하고 부드러운 고현경의 피부가 느껴졌다.

(... 안돼. 이분은 아버지의 동문 사매시다! 핏줄로는 당고모고...)

고검추는 이를 악물며 본능의 충동과 맞서려 했다.

하지만 애초에 불가능한 저항이었다.

고현경은 결국 고검추를 상대로 뜻을 이루었다.

쿠쿠쿵!

강제로 한 몸이 되는 순간 고검추의 귓전으로 천둥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 끝났다!)

고검추는 자신의 일부가 더 할 수 없이 뜨거운 늪으로 빨려 들어가며 절망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고검추는 동정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첫 경험인 고현경도 고검추를 받아들이며 작살에 꿰뚤린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그러면서도 고현경은 고검추를 부여안은 채 격렬한 요분질을 일으켰다.

그녀가 일으키는 파도에 휩쓸려 고검추는 아득히 정신을 잃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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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끈질긴 추적자(追跡者)(2)

 

 

임주은은 근 한 달 동안 잠도 거의 자지 않고 탁본을 옮겨 적었었다.

탁본의 글자들은 아주 작아서 알아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고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구결들을 옮겨 적자니 신경의 소모가 다른 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내공을 익힌 몸인지라 그런대로 버틸 수 있었다.

헌데 오늘 밤 임청우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더해 자신의 마음까지 울적해지면서 의기소침해졌다.

그러자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덜컥 병이 되고 만 것이다.

의원을 데리고 오겠어.”

임청우가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다.

가지마. 나를 혼자 내버려 두지마.”

임청우는 애원하는 심주은의 눈동자를 보자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원하는 대로 곁에 누웠다.

맞닿은 몸이 불같이 뜨거웠다.

심주은은 갑갑한 듯이 옷을 풀어헤쳤다. 이미 정신은 거의 잃어버린 듯했다.

헉헉!”

심주은은 고열에 신음하며 임청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거추장스러운 듯 마구 몸부림을 쳐서 몸에 걸친 옷을 모두 벗어버렸다.

풋풋한 소녀의 살 냄새가 임청우의 코를 자극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열을 식혀주기 위해 꼭 끌어안은 채 입으로 바람을 불어주었다.

이마를 불어서 식히고, 벌겋게 상기된 가슴을 후후 불어서 식혔다.

껴안고 있는 그녀의 몸이 마치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고열에 신음하던 심주은이 헛것이 보이는 듯 손을 휘저으며 소리치기 시작했다.

사부! 약속을 꼭 지키겠어요. 꼭이요. 절대로 실망시켜드리진 않겠어요.”

사부를 소리쳐 부르더니 이내 비명을 질렀다.

아버지! 제발 날 잡아가지 마세요. ... 난 아버지를 위해 희생당하고 싶진 않아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둬요. 난 나대로 살아가겠어요!”

고개를 연신 도리질하면서 심주은은 뱀처럼 임청우의 몸을 휘감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도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그의 몸도 어느덧 기이한 열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 사이에 심주은의 몸은 점점 더 뜨거워졌다.

훅훅 불어서 몸을 식혀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그때였다.

이봐 친구! 몹시 급한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

갑자기 천장에서 굵고 힘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임청우는 흠칫하며 심주은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자기 몸으로 심주은의 알몸을 가려준 임청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말했다.

약을 가진 게 있소? 천궁과 당귀, 구기근 등이 들어있는...”

호오! 열을 내리는 약을 말하는군. 어디 보자... ()장로가 억지로 주다시피한 약이 어디 있기는 있을 텐데...”

말소리가 다시 천장에서 들려왔다.

한데, 자네 부인인가?”

임청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렇소만... 당신은 누구요.”

!

대답대신 천장을 뚫고 무엇인가 임청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임청우는 왼손을 휘둘러 재빨리 그것을 나꿔챘다.

한 알의 단약이었다.

나 말인가? 하하하! 말하지 않겠네. 자네 부인을 훔쳐봤으니 복수하려고 할 게 뻔한데 내가 왜 말하겠나?”

목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심하게. 내가 본 건 자네 부인의 얼굴 밖에는 없으니까. 하하하!”

그 인물은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공력이 충만한 웃음소리가 귓전에 남아있을 뿐이었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믿어도 될 것같았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흔들면서 입을 열라고 말했다.

그러나 심주은은 이를 악다물고 숨을 쌕쌕 거리고 있었다.

임청우가 아무리 입을 열려고 해도 열 수가 없었다.

별 수 없이 임청우는 단약을 자신의 입안에 넣어 녹인 다음 심주은의 입술 속으로 침과 함께 흘려 넣어 주었다.

 

***

 

새벽이 되자 빗발이 가늘어졌다.

임청우는 곤히 잠든 심주은의 알몸에 이불을 덮어주고 일어났다.

간밤의 일이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열은 내렸지만 여전히 발그레한 심주은의 뺨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창가에 서서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어도 머릿속에는 알몸으로 안겨들던 심주은의 모습이 가득했다.

품속에서 몽선도를 꺼내 탁자위에 올려놓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척포... 넌 오래 살았으니 아는 게 많겠지? 남녀 간의 관계에 대해서도 아마 알고 있겠지?”

척포가 고개를 내밀다가 무슨 엉뚱한 소리하느냐는 듯이 다시 들어가 버렸다.

(지금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건달에 불과하다. 막연히 큰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임청우는 생각에 잠겼다.

(역경(易經)에 이르기를 잠룡물용(潛龍勿用), 물에 잠겨 있는 용은 쓰지 않는다 했으니 지금의 나는 승천할 때를 기다리며 힘을 길러야 하는 잠룡과 같다 할 것이다. 나 자신을 갈고 닦는데 힘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내가 해야 할 일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는 또 생각했다.

(젊었을 때는 여색(女色)을 가장 경계해야 하고 중년에는 의욕(意慾)이 과한 것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에는 욕심(慾心)이 많은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주은을 피치 못해 잠시 안았는데도 마음이 이다지도 흔들렸으니 그 말은 과연 옳다. 여색을 경계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가 없겠구나. 영웅호색이라고 하지만 자고로 영웅의 무덤은 미녀의 가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임청우가 한창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무슨 일인가 해서 귀를 쫑긋했다.

아이쿠! 스님! 지금 방마다 살펴본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이러시면 저희 집은 장사를 어떻게 하란 말씀입니까?”

주인의 음성이었다. 벌써 일어나서 장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셋째, 그놈이 말이 많군 그래. 알아듣게 이야기 했으면 알아들어야지.”

임청우의 귀에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이 든 노파의 것인데 여전히 낭랑한 느낌이 깃들어있는 목소리였다.

(그들이다!)

임청우는 벌떡 일어섰다.

귓구멍이 좁아서 그런 모양이오. 이렇게 하면 잘 알아들을 것 같소.”

음산한 사내의 음성과 함께 악! 하는 비명소리가 객점을 울렸다. 주인이 아마도 귀를 잘리거나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객점이 웅성거리며 사람들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야한다.)

임청우는 몽선도를 품에 집어넣고 심주은 곁으로 달려갔다.

심주은은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다.

임청우는 옷가지와 함께 이불로 심주은을 둘둘 말아서 안아들었다.

이어 객점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임청우는 문득 그녀의 탁본에 생각이 미쳤다.

베개 밑을 들춘 임청우는 기름종이에 싸인 탁본과 책을 꺼내 품속에 넣고 창문을 열었다.

아래층에서 다시 노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둘째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뛰쳐나오는 놈은 무조건 죽여 버려라!”

누님의 말씀대로 하겠소.”

늙은 거지의 대답이다.

 

새벽같이 객잔에 들이닥친 자들은 바로 심주은을 찾아다니고 있는 세 사람이었다.

세 사람의 우두머리는 심주은으로부터 기()라고 불린 노파였다. 이 노파는 심주은처럼 한 가닥의 천잠사를 무기로 쓰는데 수법이 잔혹, 악랄하여 적의 목을 끊어버리는 데 명수였다.

두번째는 걸()이라는 거지로 술에 내공을 불어넣어 쏘아 보내는 주전신공(酒箭神功)을 달통한 자였다. 그의 주전신공은 특이하여 술은 완전한 화살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세번째는 승()으로 세 사람 중에서 무공이 가장 고강한 자였다. 수십 종의 괴이한 무공을 익힌 덕분에 그의 모든 신체 부위는 하나하나가 신병이기와도 같았다.

종남산의 첫 만남에서 기, , 승은 우협의 명성에 눌려 임청우를 포기하고 도망쳤었다.

그렇긴 하지만 세 사람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제 무공에 있어서는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에 비해 그다지 뒤진다고 할 수 없는 고수들이었다.

 

휘익!

임청우는 이불로 감싼 심주은을 안고 객실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밖에는 가늘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창문을 통해 객실을 뛰쳐나간 임청우는 단번에 맞은 편 건물 지붕으로 도약했다.

그리고는 다른 건물들의 지붕을 밟으며 빗속을 내달렸다.

배운 적이 없어서 임청우는 경신술을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력이 이미 상승의 경지에 달한지라 임청우의 달음박질은 웬만한 고수가 펼치는 경신술보다도 오히려 빨랐다.

 

기걸승의 삼인은 심주은의 종적을 쫓아서 남양의 객점까지 왔었다.

사실 심주은의 몸에서는 만리향의 향기가 끊이지 않고 풍겨나고 있었다.

덕분에 오랫동안 만리향의 향기를 맡아왔던 세 사람이 심주은을 찾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원래 심주은의 몸에서 풍겨나는 만리향은 그녀의 아버지가 하나 밖에 없는 딸이 혹시 적에 의해 유괴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까 싶어서 심어놓은 것이었다.

만약 적이 심주은을 유괴해간다고 하더라도 만리향의 향기 때문에 금방 탄로가 나고 말 것이다.

한데, 그 만리향이 이제는 가출한 심주은에게로 그녀 아버지의 수하들을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기걸승 세 사람은 만리향의 향기를 쫓아 객점에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그녀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주인을 윽박질러 찾아보려 하다가 주인이 반대하는 통에 그의 한쪽 고막을 터뜨리고 객점을 수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노파는 몸을 훌쩍 날려 이층의 계단으로 올랐다.

이미 중은 객실의 방문들을 열어젖히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밖에서부터 거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놈이 도망쳤소. 쫓아갈 테니 여기 일은 누님이 알아서 해주시오.”

 

***

 

새벽이지만 성문은 벌써 열려있었다. 지난 며칠 동안 비 때문에 발이 묶여있던 상인들을 관부에서 배려한 것이다.

거지는 일찍 열린 성문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임청우를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임청우의 발걸음이 비록 빠르기는 했지만 일류고수인 거지가 볼 때에는 가소로운 수준이었다.

거지는 삽시에 임청우의 오장 뒤에까지 따라 붙으며 말했다.

흐흐흐... 성문을 나가는 순간이 네놈이 염라대왕을 만나는 순간이 될 것이다.”

임청우는 거지의 말을 무시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거지는 자신의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는 자가 임청우일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임청우가 심주은을 안고 도망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았다면 결코 이처럼 느긋하게 행동을 취하진 않았을 것이다.

!”

그렇긴 해도 거지는 임청우가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입을 쫙 벌렸다.

슈앙!

그러자 거지의 입에서 우유빛의 술 화살, 주전(酒箭)이 가공할 기세로 쏘아져 나와 임청우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임청우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듣는 즉시 왼손에 공력을 모아서 뒤로 휘둘렀다. 비록 공력을 발출할 수는 없지만 모으는 일은 마음을 먹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그다.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실린 임청우의 손이 휘둘러지면서 거지가 쏘아 보낸 주전은 퍽! 소리를 내며 흩어졌다.

술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

거지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까지 그의 주전을 맨손으로 막아낸 인물은 없었다.

거지의 주전은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보다 오히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다.

(어떤 놈이기에 저다지도 공력이 강하단 말인가?)

세치 두께의 철판도 거뜬히 뚫을 수 있는 주전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휘둘러 흩어버리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거지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헌데 어딘지 모르게 좀 이상했다.

(저토록 대단한 공력을 지닌 놈이 도망은 왜 간단 말인가?)

주전을 간단히 받아내는 가공할 공력을 가진 자가 경공술은 전혀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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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황금전장> 아침

벽초천의 집무실. 황금수라들의 삼엄한 경비

이세창; [본장의 정보망을 총동원한 결과 놈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었습니다.] 서류를 들고 보고. 상좌에 벽초천이 앉아있고 그 앞에 벽소소가 무릎을 꿇고 있다. 벽소소 주변에는 이세창, 벽세황, 귀견수가 서있다.

이세창; [분면랑군(粉面郞君) 사우(査宇)!] [오년 전쯤 강남 일대에 나타나 엽색행각을 시작한 악명 높은 색마(色魔)입니다.] 서류를 읽으며 보고

벽세황; (소소 저것이 화류병에 걸린 이유가 있었다.) 벽소소를 흘겨보고

참담한 표정을 짓는 벽소소

이세창; [사우는 뛰어난 언변과 외모, 특히 마음을 홀리는 섭심술(攝心術)이 탁월하여 농락당한 여자의 숫자가 천여 명에 이를 정도입니다.]

부들부들 치를 떠는 벽소소

벽세황; [섭심술...] 그걸 보며 한숨 쉬는 벽세황

벽세황; [어쩐지 소소가 그 정도의 상판을 한 놈에게 농락당했다 했더니 섭심술에 당했던 것입니다..] 벽초천의 눈치를 보며 말하고

귀견수; (그래도 남매라고 역성을 들어주는군.)

찡그리며 말이 없는 벽초천

이세창; [오년여에 걸쳐 벌인 사우의 엽색행각이 저지되지 않은 것은 놈의 기괴한 무공 때문이었는데...]

이세창; [오늘 새벽 마침내 놈의 무공내력이 밝혀졌습니다.]

이세창; [사우는 마교 사대마가중 암흑마가 출신이며...] [철기산혼무를 구사한 것으로 보아 암흑마가 내에서도 상당한 고위급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서류를 내리고

벽세황; [아버지!]

벽세황; [소소가 물론 큰 잘못을 저질렀지만 상대가 상대였던 만큼...] 말하다가 입을 다물고

벽초천이 손을 들어 말을 막는다. 시선은 벽소소에게 향한 채

벽세황; (이건 좋지 않은 흐름인데...) 심각

<아버지는 지금 소소를 손절(損絶)해야 하나 말아야하나 계산하는 중이다.> 벽초천의 표정이 없지만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는 모습 배경으로

벽세황; (소소 때문에 자칫 우리 황금전장이 마교의 잔당들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입을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벽세황; (당장 무림맹과의 관계가 단절될 테고...) (그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다른 전장들이 무림맹을 등에 업고 우리 황금전장의 영역을 공략해올 것이다.) 식은땀을 흘리고

벽세황; (그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경과를 무림맹에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인데...)

벽세황; (그럴 경우 소소의 신세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손에 땀을 쥐고

벽세황; (최악의 경우 소소는 아버지 손에 죽을 수도 있다. 무림맹에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눈치 보고

벽소소도 깨닫고 바들바들 떨고.

그런 벽소소를 지긋이 보는 벽초천

이세창; (큰 아가씨의 목숨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

이세창; (보고 있는 내가 다 피가 마르는군.) 침 꿀꺽.

잠시 침묵. 그러다가

! 벽초천이 경직되었던 몸을 의자에 좀 묻는다

벽세황; (결정을 내리셨군.) 긴장할 때

벽초천; [사우라는 놈 외에 이번 일을 아는 자는 모두 몇 명이냐?]

벽세황; [저희들과...] 이세창을 흘깃 보고

벽세황; [어제 총주방장이 특별 채용한 이청풍이란 놈이 전부입니다.]

벽초천; [이청풍이라...]

이세창; [운 나쁘게도 그놈은 새벽같이 도축장으로 가던 중에 큰 아가씨가 사우와 만나는 장면을 목격했었습니다.]

이세창; [그리고 현장에서 사라졌었는데...] [보고에 의하면 현재 도축장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벽초천; [...]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이세창; [분부만 내리시면 후환이 없도록 처리하겠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듣고 있던 귀견수가 깜짝 놀라고

귀견수; (이청풍을 제거하겠다는...) + [기다려주십시오.] 급히 나서고

모두 귀견수를 보고

귀견수; [속하가 그리 오래 겪어보진 않았으나 이청풍은 입이 가벼운 놈이 아닙니다.] 포권하고

귀견수; [우연히 이번 일을 목격하긴 했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진 않을 것입니다.] 간절하게 변호

귀견수; [그러니 일단 지켜보면서...] + 이세창; [만에 하나라는 경우도 있는 법이네.] 말을 막고

이세창;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데 위험요소를 품고 갈 이유가 있는가?]

귀견수; [그렇게 처리하기에 이청풍은 너무도 아까운 인재입니다.] [총주방장이 파격적인 대우로 영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필사적으로 청풍을 변호하고

이세창; [부단장이 그놈에게서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말하는데

! 벽초천이 손바닥으로 의자 팔걸이를 치고

입을 다물며 돌아보는 이세창과 귀견수

벽초천; [옥령이가 그놈에게 제 머리 장식을 주었다고?]

이세창; [! 그걸 흘린 덕분에 그놈이 현장에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 못해 대답

벽초천; [옥령이가 마음에 들어 한 놈이라면 간단히 치워버릴 수는 없지.] 고개 끄덕이고

귀견수; [하오면...] 안도

벽초천; [그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라.] ! 일어나고

벽초천; [저년과 위진천의 혼담이 성사될 때까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면 살려준다!] 말하며 옆으로 걸어가고. 벽소소를 흘겨보면서

이세창; [분부 받들겠습니다.]

귀견수; [존명!] 포권하고

안도하고 비참한 표정이 되는 벽소소

옆쪽의 문으로 나가는 벽초천. 황금수라 한 명이 문을 밖에서 열어주고

귀견수; (병주고 약 준다더니...) 안도하며 손을 내리고

귀견수; (옥령아가씨가 준 머리 장식 때문에 죽을 위기에 처했던 청풍이놈이 옥령아가씨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구나.)

귀견수; (이청풍, 그놈은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했다는 걸 꿈에도 모르겠지.) 안도하고. 그 반면

벽소소; (이청풍! 이청풍!) 고개 숙인 채 이를 갈고

벽소소; (그 작자를 만난 후 모든 게 잘못되기 시작했다.)

벽소소; (오늘 새벽에도 그 작자를 상대하느라 신경이 분산되지만 않았어도 오라버니 일행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릴 수 있었다.)

벽소소; (그랬다면 내가 지금같은 수모를 당하고 있지도 않았을 테고...)

벽소소; (반드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이청풍!) (날 시궁창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든 대가를...) 이를 갈고

 

#45>

. 도축장. 평소와 같고

가건물. 청풍이 다른 백정들과 함께 소고기를 정형하고 있다. 천장에 매단 소의 시체에서 살을 발라내고 있고. 옷을 껴입었다. 상처를 숨기기 위해

(독한 놈!)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도축을 하고 있어.) 다른 백정들 곁눈질로 청풍이 일하는 걸 보고

(왜 저렇게 죽기 살기로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출혈이 상당해서 나 같았으면 며칠을 싸고 누웠을 텐데...) 혀를 차며 일하는 다른 백정들

일하면서 곁눈질로 입구를 보는 청풍

상인차림의 사내가 건물 밖에서 힐끔거리고 있다.

청풍; (아무래도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것 같다.)

청풍; (내가 벽소소의 야합 장면을 목격한 걸 황금전장에서 알아차린 것일까?)

청풍; (벽옥령이 준 머리 장식을 잃어버린 것도 마음에 걸리고...) 벽옥령이 머리핀을 주던 장면 떠올리고

청풍; (일단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멀쩡한 척해야한다.)

청풍; (정 안되면 뭘 봤는지 이실직고 해야겠지.)

[...] 일하는 청풍을 보며 뭔가 생각하는 사인 차림의 사내

 

#46>

해가 지려는 저녁 무렵. 금릉 성 밖의 빈민가

휘익! 빈민가 근처의 큰 나무. 그 위로 구름 같은 것이 서리더니

구름이 흩어지며 모습 드러내는 운신장

운신장; (오늘도 성과가 없었다.)

운신장; (하긴 백만 명 가까이 사는 이 거대한 도시에서 사람 한명 찾아내는 일이 쉬울 수가 없지.)

운신장; (내일 총관이 도착하기 전까지 어떻게든 아연아가씨의 아들로 보이는 놈을 찾아내고 싶었는데...) + [!] 생각하다가 흠칫! 하고

빈민가 입구.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는데. 길가의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앉아있는 소녀가 보인다.

크로즈 업. 이진진이다. 멀리 보이는 금릉성문쪽을 보고 있다

운신장; (저 아이...) 눈 번뜩

운신장; (도무지 빈민가에 살 것같지 않은 자태와 분위기를 지녔다.) 눈을 좀 가늘게 하고 보고

슈우! 이진진의 몸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흐르고

운신장; (신약정강(身弱精强)...) 눈 다시 크게 뜨며 놀라고

운신장; (몸이 약한 것에 비례하여 정기가 강해지는 보기 드문 체질을 지닌 아이다.) 흥분하고

운신장; (아연아가씨의 아들을 찾는 일이 급하긴 하지만 만나보지 않을 수가 없구나.) 휘익! 몸을 날리고

 

#47>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하염없이 멀리 금릉성문 쪽을 보고 있는 이진진

이진진; (해가 곧 질 텐데... 오늘도 오빠는 늦을 모양이네.) 한숨

이진진; (황금전장은 대우는 좋을지 모르지만 일은 혹독하게 시킨다고 소문나있어.)

이진진; (오빠가 과연 황금전장에서 잘 적응할지 모르겠다.) 한숨

운신장; [누구를 기다리는 걸까?] ! 옆으로 다가서며 묻고. 놀라 돌아보는 이진진

운신장; [부모님?] [아니면 남자친구?] 웃으며 내려다보고

이진진; (엄청난 미인!) + 이진진; [... 아니에요.] 얼굴 붉히며

이진진; (몸에서 전에는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로운 냄새도 느껴져.) + [금릉 성내로 일을 하러 간 오빠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훔쳐보며.

오가던 빈민가 사람들도 뿅 가서 운신장을 보고 있고

운신장; [동구 밖까지 나와서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동생이라니...] [사이가 좋은 남매로구나.] 이진진의 앞쪽으로 가고

이진진; [... 동기라고는 단 둘뿐이거든요.] 수줍

운신장; [착한 누이동생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미소

이진진; [이진진이라고 해요.]

운신장; [진진... 예쁘면서도 심오한 이름이로구나.] ! 말하며 바닥에 손바닥을 향하고. 그러자

슈욱! 바닥이 올라와 원형의 의자처럼 변한다.

이진진; (... 바닥이 솟구쳐서 의자가 되고 있어!) 놀라고

지나던 사람들도 기겁하며 놀라고

운신장; [진진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오라버니의 이름은 뭐지?] 바닥에서 돋아난 의자에 앉으며

이진진; (... 기인, 아니 선녀로구나.) + [이청풍이라고 해요.] 억지로 흥분을 누르며 대답하고

운신장; [아버지의 함자는?]

이진진; [산자 하자를 쓰셔요.]

운신장; (이산하...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다.) + [손을 잠시 줘보겠니?] 손을 앞으로 내밀고

이진진; [...] 손을 내밀고

운신장; [이 언니는 진맥을 하는 재주가 있단다.] [이렇게 만난 김에 네 몸 상태가 어떤지 살펴봐주마.] 자기 손에 이진진의 작은 손을 얹으며 웃고

이진진; [부탁드려요.] 수줍어하고. 그러다가

! 운신장의 손바닥에 약간 빛나고

이진진; (이분의 손바닥에서 따뜻한 기운이 일어나 온몸으로 번지고 있어.) 놀라고

이진진; (따스한 봄볕을 쬐는 것처럼 나른해져.) 졸린 표정이 되고. 그때

운신장; (역시...) 눈 번뜩

운신장; (아까 본 대로 신약정강의 체질이 확실하다.) (마음이 순수해서인지 탁기도 전혀 느껴지지 않고...)

운신장; (이 아이라면 우리 신녀문(神女門)의 오랜 숙원을 이루어줄지 모르겠구나.) + [수고했다.] 이진진의 손을 놔주고

퍼뜩 정신 차리고

이진진; [제 몸이 남보다 약한 건 알고 있어요.] 눈치 살피며

운신장; [몸은 약하지만 그 대신 정기는 누구보다 맑고 풍부하구나.] [좋은 인연을 만나면 믿기지 않는 성취를 이루게 될 것이다.]

이진진; [제가... 선도(仙道)나 현문(玄門)과 인연이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놀라고

운신장; [나의 수련은 아직 다른 사람의 인연에 대해 단정할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단다.] 말하며 왼쪽 소매 속에 오른손을 넣고

운신장; [하지만 나 자신과 관련된 인연에 대해서는 조금 짐작할 수 있는데...] 다시 꺼내는 운신장의 오른손에는 채 한 뼘이 안되는 작은 병이 하나 들어있다. 호로병처럼 생겼고 잘룩한 곳에 끈도 달려있다.

운신장; [진진이 너는 나와 가볍지 않은 인연이 있구나.] 호리병을 이진진의 손에 쥐어주고

이진진; [이게 무엇인지요?] 두 손으로 호리병을 받으며

운신장; [몽운연형호(夢雲鍊形壺)라는 것이다.] [이름 그대로 구름같은 꿈을 이루어주는 힘을 지닌 호리병이지.]

이진진; [무척 귀한 것같은데... 왜 제게 주시는 것인지요?]

운신장; [나보다는 네게 더 유용할 것같아서 주는 것이란다.] [또 나와의 인연을 잇게 하기 위해서고...] 일어나고

이진진; [이 호리병에 어떤 쓰임이 있는지요?] 따라서 일어나고

운신장; [필요한 것이 있으면 뚜껑을 열고 간절히 원해 보거라. 그럼 몽운연형호가 소원을 들어줄 것이다.] 슈우! 말하는 운신장의 몸이 구름에 덮이고

이진진; [!] 놀랄 때.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도 놀라고

<우리는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것같구나. 그동안 씩씩하게 잘 지내렴.> 슈우! 구름이 짙어지는 안쪽에서 운신장의 음성이 들리고.

이진진; (음성이 멀어지고 있어.) 놀랄 때

휘이! 구름이 사라지고. 운신장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운신장이 만들었던 의자도 사라지고 없다.

이진진; (사라지셨어. 땅에서 솟아올랐던 의자도 없어졌고...)

이진진; (이 호리병만 없었다면 꿈을 꾸었다고 착각했을 거야.) 작은 호리병을 두 손으로 들고 보고

이진진; (과연 그분은 누구였을까? 정말 내가 선녀님을 만났던 것일까?)

 

#48>

높은 나무 위에 서서 이진진을 내려다보는 운신장

운신장; (생각같아서는 저 아이를 당장 무산의 신녀문으로 데려가고 싶다.)

운신장; (하지만 지금은 진력해야할 일이 있어서 그럴 수가 없다.)

운신장; (문제는 머잖아 저 아이 신변에 풍파가 몰아닥칠 것 같다는 점인데...) 이마를 모으고

운신장; (아무쪼록 몽운연형로가 그 풍파에서 저 아이를 지켜주길 바랄 뿐이다.) 휘이! 운신장의 몸이 구름에 휘감기기 시작하고

<우리 신녀문을 천마가 채워놓은 족쇄에서 풀려나게 해줄 가능성이 있는 아이이니...> 화악! 구름에 덮여 사라지는 운신장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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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1)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

타는 듯한 여름이 거의 끝이 날 무렵에서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이는 바람에도 부풀부풀 일어나던 땅거죽의 먼지는 쏟아지는 비에 흙탕물이 되어 씻겨 내려갔다.

갈라졌던 연못의 바닥은 물을 머금으며 조갯살처럼 불어올라 틈을 매웠다.

강렬한 햇빛에 시들다 못해 검게 타들어가던 나무들도 춤추듯이 가지를 너울대며 일어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상은 폭우 속에서 조용한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접경에 자리한 남양(南陽)을 거센 빗줄기가 난타하기 시작한 후로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성안의 백성들의 환호도 이제는 잠잠해졌으며, 관민이 모두 지붕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주루와 기루, 객점들이 열 지어 서있는 남양의 번화가에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손님은 그들의 집안에 충분하리만큼 있었기 때문이다.

()과 성() 사이를 넘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행인들이 모두 객점에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가뭄 끝에 홍수 진다더니... 이러다가 수재(水災)를 겪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남양의 번화가에 자리한 객점 이층 객실 창가에 서성이던 임청우가 걱정스런 듯이 입을 열었다.

거리를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새까맣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심심하면 내 일이나 도와줘.”

탁자에 앉아서 하얀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적어가던 심주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임청우는 탁자로 다가가서 탁본을 뜬 화선지를 펼쳐 들었다.

심주은이 탁본을 편히 볼 수 있게 해준 임청우는 눈을 다시 창문쪽으로 돌렸다.

비가 쏟아져도 너무 많이 쏟아진다.

이정도가 되면 이제 우()가 아니라 염려스러울 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일, 언제쯤 끝나지?”

임청우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심주은은 말 시키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제 이틀만 더 하면 끝날 거야.”

임청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종남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짜기를 나온 후 임청우와 심주은은 이곳 남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임청우가 대안탑에서 횡재(?)한 금과 은으로 객점의 가장 좋은 방에 투숙했다.

그후 한 달 동안 심주은은 음식까지 방으로 시켜 먹으면서 탁본해온 신녀문의 무공을 책으로 엮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탁본의 글씨들은 깨알보다는 크다고 할지라도 개미보다는 작았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일 뿐 아니라 물이라도 묻는 날에는 글씨가 흐려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땀에도 글씨가 손상될 수 있었다.

심주은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무공들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그러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단단한 책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를 덩달아서 두문불출하게 된 임청우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꾹 참고 오늘까지 견디어 왔다.

물론 그동안 임청우에게도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주은이 모르는 사이에 그는 용조층층공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불심연화지의 수련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무공은 아직까지는 무공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연화지는 이마 위에 있는 신정혈(神廷穴)에 공력을 쌓는 것인 만큼 다른 무공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비록 임청우의 공력이 상당히 늘었다고 하지만 불심연화지를 밖으로 발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성(三成) 이상의 성취를 필요로 한다.

또 용조층층공의 운용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순수한 내공일 뿐이다.

권법이나 장법 등의 무공과 연계되지 못한다면 용조층층공은 알 속에 있는 닭이나 마찬가지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저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청우의 공력이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임청우의 지금 공력은 철선동시의 죽기 전 공력보다 오히려 삼할 정도 더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임청우가 내공을 발출할 수 있는 무공을 단 한 가지도 익히지 못한 때문이었다.

진기가 실오라기만큼도 흩어지거나 빠져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몸속을 돌아다니기만 한 결과 임청우는 공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은 것이다.

 

생각하기와 탁본을 들여다보기, 그리고 옮겨 쓰기를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는 심주은을 바라보던 임청우는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동안 보고들은 견문으로만도 무공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된 그다.

임청우는 자기가 익힌 두 가지의 무공 모두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은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해서 알 수도 있을 것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

임청우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그가 지닌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는 순수한 내공일 뿐이고 다른 하나는 특이한 공력으로 특이하게 운용하는 수법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임청우는 다시 심주은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탁본을 뜨던 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간 그는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임청우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떠오르던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잡힐 듯 말 듯한 영감...

하지만 그것은 좀체 잡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이 확실하게 떠올라주기를 기다렸다.

심주은은 임청우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얼굴빛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들었나? )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계속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는 것이 주화입마에 든 증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내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심주은은 생각을 바꾸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식 가져 왔습니다.”

문 밖에서 점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식사를 가져다주는 점원이었다.

문 열렸어.”

심주은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면서 임청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덜컹 열리는 순간 임청우는 잡힐듯하던 빛이 일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안에 넣었던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향긋한 음식냄새와 함께 점원이 재주 좋게 몇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들고 들어와 탁자에 놓았다.

그제서야 심주은은 임청우의 표정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당황했다. 일생에 있어서 그같은 순간은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인데 그것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 그만두자 그만둬.”

임청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탁자로 걸어갔다.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누구에게 한 말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에 씻기듯이 영감은 사라져 버렸고 식탁위의 음식들도 임청우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심주은은 그런 임청우의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같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임청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

 

밤이 깊어갔다.

탁본을 옮겨 적던 심주은은 탁본과 책을 함께 싸서 둥글게 만 후에 침상의 베개 밑에 넣었다.

임청우는 마치 불가의 고승처럼 좌관(坐觀)을 하고 창가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지 않을 거야?”

심주은이 침상가에서 물었다.

임청우는 대답대신 일어나서 불을 껐다.

그의 잠 자리는 침상아래의 바닥이었다.

비록 억지 혼례를 올린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한 이불을 덮어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임청우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침상위의 베개를 하나 끌어내리며 바닥에 누웠다.

그때 부드러워서 비단결같은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여기서 자.”

심주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한 후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임청우는 그녀의 저의를 알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심주은은 등을 보인 채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지만...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못해. 심지어 황제(皇帝)조차도...”

황제조차 그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심주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심주은의 손이 그의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한데... 아버진 나를 황제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어. 황제는 이미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는데...”

심주은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진 기(), (), (), 그 세 사람 외에도 부하들을 많이 풀었을 거야. 하지만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

만약... 그들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죽여버리겠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심주은의 말이었지만 섬뜩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사연이 복잡하구나.)

임청우는 자신이 몰랐던 심주은의 면모를 엿본 기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한 사람을 찾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고, 천하를 제패할 마음도 있다고 하더니... 이젠 아버지가 황제에게 자기를 시집보내려 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심주은의 본심을 엿본 임청우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와 혼인을 한 것은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주은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 정신을 모아야할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틀림없이 마가 침입하게 될 텐데...)

걱정이 된 임청우는 심주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풍겨나는 위엄과 고귀한 자태로 보아 그녀의 신분이 아주 높다는 것은 익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심주은의 신분 따위는 임청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만물제동이라는 이치에 따라서 그는 만물의 같은 점을 중시하는 터이기 때문이다.

임주은은 임청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고 떨리는 거지? 몹시 추워.”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손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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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줄에 걸린 봉황

 

 

-복우산(伏牛山)!

 

그 모습이 마치 엎드려 있는 소와 같다고 하여 복우산이란 이름이 붙여진 하남성의 명산이다.

복우산 동북방 오백여 리에는 저 유명한 중원 무림의 태두 소림사(少林寺)가 자리하고 있다.

본래 중원 무림의 심장부는 소림사가 있는 숭산(嵩山)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전부터 무림의 중심은 숭산에서 복우산으로 옮겨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복우산에 중원 무림 최대의 세력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호천무맹!

 

바로 그들이다.

비록 십칠 년 전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봉문하다시피 했으나 여전히 호천무맹이 중원 무림의 정점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구파일방등 전통의 명문들, 각기 독특한 절기를 발전시켜온 삼문육가(三門六家), 정파백도를 자처하는 천여 개의 문파들이 호천무맹에 속해있다.

구성인원 수로 따지자면 거의 백만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호천무맹의 영향력 안에 들어 있다.

그 방대한 조직의 심장부가 바로 이곳 복우산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호천무맹은 변황 무림에 대항할 목적으로 세워졌었다.

삼십여 년 전 변황 무림은 서역 출신의 한 인물에 의해 일통되었었다.

 

-신월지존(新月至尊)!

 

회회교(回回敎;이슬람)가 배출한 최강의 무인이다.

신월지존이라는 별호는 회회교가 초승달, 즉 신월(新月)을 상징으로 삼는 데에서 생겼다.

사실 신월지존이 회회교 출신중 최강자이긴 했어도 서역 무림의 최강자는 아니었다. 사패천 중 한 세력이 서역을 기반으로 번성해왔기 때문이다.

사방무신 중 서호(西虎)의 후손들이 세운 태양성전(太陽聖殿)이 바로 그들이다.

무공만으로 평가하면 신월지존은 태양성전의 십대고수들에도 못 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월지존이 서역 무림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인물을 아버지로 둔 덕분이었다.

 

-티무르(鐵木兒)!

 

제이(第二)의 징기즈칸을 자처했던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정복군주 티무르가 신월지존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티무르의 넷째 아들인 신월지존의 이름은 샤르흐이며 훗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티무르제국의 제이대 황제가 된다.

샤르흐는 티무르의 넷째 아들이라 제국을 물려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서역 무림을 지배하는 데 주력했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태양성전조차도 티무르제국과 충돌하는 데 부담을 느껴 샤르흐에게 복속했을 정도였다.

샤르흐는 서역 무림을 일통하여 하나의 세력으로 만들었다.

 

-신월동맹(新月同盟)!

 

회회교를 바탕으로 결성된 사상 최강의 세력이다.

회회교에 속한 거의 모든 무림 세력이 신월동맹에 가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신월동맹의 궁극적인 목표는 물론 중원 무림의 정복이었다.

샤르흐의 아버지 티무르는 서역과 천축은 물론 멀리 대식국까지 정복했었다.

그 티무르의 마지막 목표는 징기스칸의 후손들을 중원에서 몰아낸 명나라에 복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티무르는 넷째 아들 샤르흐를 전위로 세웠다.

본격적인 명나라 정벌에 앞서 신월동맹으로 하여금 먼저 중원 무림을 공격하게 한 것이다.

중원 무림으로서는 명운이 걸린 일대위기였다.

이에 구파일방을 주축으로 신월동맹에 대항하기 위한 통합이 추진되었다.

하지만 흑도, 백도, 녹림, 하오문 등의 이질적인 성격 때문에 파벌을 초월한 중원 무림의 결맹은 실패로 돌아갔다.

대신 같은 길을 걷던 정파백도의 문파들만으로 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것이 호천무맹이었다.

호천무맹의 맹주는 십자검존 종극이란 인물이었다.

십자검존은 전설적인 검법의 명가 십자검막(十字劒幕)의 후예로 호천무맹의 결성을 주도했다.

당시 십자검존 종극의 나이는 삼십대 초반이었다.

비록 초절한 검법을 지녔다지만 정파 무림인들을 영도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본래 호천무맹의 맹주로는 당시 천하제일인으로 공인되던 소림사의 장로 철목신승(鐵木神僧)이 거론되었었다.

하지만 철목신승은 자신이 출가인임을 이유로 들어 맹주의 자리를 사양했다.

그리하여 십자검존 종극이 호천무맹의 맹주가 된 것이다.

십자검존의 영도 하에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의 공세를 막아내어 중원 무림의 위기를 해소했다.

덕분에 호천무맹은 중원 무림의 보루로 인정받았으며 맹주인 십자검존 종극도 중원제일인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것이 삼십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십칠 년 전 예의 그 치욕적인 사건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호천무맹은 신월동맹을 좌절시키고 얻은 명성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다.

그 후 호천무맹은 거의 봉문하다시피 했다.

그 틈을 탄 사마외도의 세력들이 창궐하여 무림의 판도를 뒤흔들어놓고 있었다.

그렇게 십칠 년의 세월이 흘렀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난 온갖 세력들로 인해 무림은 대혼란의 도가니가 되었다.

마천루가 마도 무림의 맹주로 부상했고 사신각이라는 암살조직이 횡행하며 살육을 일삼았다.

심지어 화류계의 기녀와 매춘부들까지 야화맹(夜花盟)이라는 조직을 이루어 자신들의 권익을 부르짖을 정도였다.

무림의 말세가 올 것일까?

뜻있는 강호인들은 도의와 명분이 상실된 무림의 실태에 우려를 금치 못했다.

그런 가운데 십칠 년의 기나긴 잠에 빠져 있던 호천무맹 내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철봉황이라는 여걸이 나타나 호천무맹의 실추된 명예를 회복하려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검존이 거둔 네 명의 제자 중 막내인 철봉황 고현경은 사실상 은퇴한 스승을 대신하여 호천무맹을 영도하고 있다.

먼저 철봉황 고현경은 정파백도의 젊은 인재들을 모아 철혈호천위(鐵血護天衛)란 조직을 만들고 스스로 총사(總士)가 되었다.

호천무무맹에 속한 문파와 가문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는 철혈호천위의 전력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증강되고 있는 중이다.

천여 명의 일류고수들로 이루어졌다는 철혈호천위가 강호로 나오면 어떤 세력도 맞서지 못할 것이다.

비록 일개 여인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호천무맹의 이같은 용틀임은 무림인들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일 호천무맹이 삼십여 년 전의 패기와 단결력을 회복한다면 그동안 무림을 농단하던 여타 세력들은 아침안개처럼 스러져야만 하는 운명인 것이다.

그리하여 무림의 각 세력들은 숨을 죽인 채 호천무맹의 동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호천무맹의 부활을 달가워하지 않는 기존세력들이 사신각에 청탁하여 철봉황 고현경의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나돌았다.

호천무맹이라는 거인의 부활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하고 있었다.

 

***

 

"흐윽! ... 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다."

고통스러운 여인의 신음소리가 그리 넓지 않은 석실을 울리고 있었다.

석실 내부는 몇 자루의 장검이 벽에 걸려 있을 뿐 아무런 장식도 없어 투박해 보인다.

그 석실 가운데에 놓인 좌대 위에는 흑의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돌로 만들어진 좌대 위에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는 그 여인은 철봉황 고현경이었다.

철봉황 고현경은 지금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얼굴은 구워진 가재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으며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땀에 흠씬 젖은 검은 옷에 휘감긴 탄력 넘치는 육체는 학질에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 떨린다.

"흐으윽! ... 그때 천면음마란 놈이 무엇인가 수작을 부렸음이 분명하다."

고현경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그녀는 천면음마가 투사한 탕음마고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천면음마의 저주가 그대로 실현된 것이다.

고현경은 삼십여 년의 세월동안 오로지 무공 연마에만 몰두해 왔었다.

그녀의 지난 삶 자체가 수련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녀는 이성과 교제한 경험이 없다.

물론 고현경에게도 가슴이 설레였던 기억은 있었다.

자신보다 십여 살 연상인 동문의 사형을 남몰래 연모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형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사매 정도로만 여길 뿐 전혀 이성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 때문에 고현경은 가볍지 않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그 사형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자결하고 말았다.

철사자 고창룡-!

그가 바로 고현경의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던 연모의 대상이었다.

사실 고창룡과 고현경은 사촌 남매 사이였다.

두 사람의 집안은 산서(山西)성의 명문가인 고가장(高家莊)이었는데 신월동맹의 중원 침공 때 멸문지화를 당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고검추는 당시 열다섯 살 소년이었고 고현경은 겨우 다섯 살에 불과한 어린 계집아이였었다.

십자검존은 졸지에 천애고아가 된 두 남매를 가엾이 여겨 함께 제자로 삼았었다.

물론 십자검존이 단순히 연민의 감정으로 두 남매를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고창룡과 고현경이 남자와 여자들 중에서 최고의 자질을 지닌 기재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두 남매의 자질에 감탄한 십자검존은 철사자와 철봉황이라는 별호를 직접 지어주었었다.

비록 사촌지간이었으나 고현경은 고창룡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유일한 피붙이이기도 해서 의지하다보니 고창룡은 어느덧 고현경에게 하늘 아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를 겁탈하고 자살을 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고현경이 받은 충격과 상실감은 형언할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그날 이후로 고현경은 이성에 대한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 버린 채 무공수련에만 전념해왔다.

그 결과 그녀는 삼십대 중반이라는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우내팔강에 드는 고수가 되었다.

여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각고 연마한 성취였다.

헌데 그런 그녀가 잃어 버렸던 본능의 유혹에 시달리며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탕음마고 때문이었다.

천면음마의 말대로 탕음마고는 고현경의 원영지기를 갉아먹고 있었다.

이에 고현경의 육체는 부족해진 원영지기를 이성과의 교접으로 채우기를 간구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이...

"으음... 방심하는 게 아니었다. 그 간악한 말종에게 수작을 부릴 기회를 주지 말고 척살했어야만 했다."

고현경은 도도하고 차갑게만 보이던 얼굴을 이지러뜨리며 뜨거운 신음을 토해냈다.

탕음마고가 촉발한 욕정은 굶주림이나 갈증과 다를 바가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성과의 교접을 갈구하는 욕정은 걷잡을 수 없이 강해지고 있다.

너무도 강렬한 욕정으로 인해 고현경의 이성이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렀다.

불구덩에 빠지기라도 한 듯 뜨거워진 몸 때문에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당장이라도 아무 사내에게나 몸을 던져 범해지고 싶은 충동이 고현경은 사로잡고 있었다.

(... 위험하다. 이러다가 사내라면 아무에게나 가랑이를 벌리는 탕녀가 될지도 모른다.)

고현경은 흩어지려는 이성을 필사적으로 부여잡았다.

(끝내 욕정을 제어하지 못한다면... 자결해야한다. 나 자신과 사모님의 명예를 위해서...)

그녀는 이를 악물며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아랫도리 깊은 곳에서 치미는 욕화는 시간이 갈수록 강렬해질 뿐이었다.

"으음... 찬물이라도 뒤집어써야겠다."

고현경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좌대에서 내려섰다.

그리고는 독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서 힘겹게 석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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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 [!] 손이 쳐올려지며 기겁하고

청풍; (귀견수!) ! 놀라며 물러서고

벽소소; [!] 역시 귀견수 알아보고 기겁하고.

스악! ! 검을 질풍같이 휘둘러 사우를 공격하는 귀견수. 귀견수의 검에서 긴 섬광이 일어나 사우를 베어가고

사우; [황금수라냐?] 카캉! ! 양손을 휘둘러 막으며 물러서는 사우

벽소소; (황금수라들의 부단장인 귀견수가 뜬금없이 나타났다는 건...) ! 몸을 돌려 달려가며 이를 악물고

벽소소; (황금전장에서부터 내 뒤를 밟았다는 뜻이야!) ! 달려가지만

[!] ! 직후 눈 치뜨며 급히 멈춰서는 벽소소

휘익! ! 그년 앞쪽으로 날아 내리는 벽세황과 이세창과 두 명의 황금수라

청풍; (소장주와 총관까지 나타나다니...) 비틀거리며 놀라고. 거리가 30미터 이상이다. 근처에 관목이 무성한 절벽이 있고. 그때

벽소소; [... 오빠!] 기겁하며 물러서고

청풍; (오빠!) 경악하고.

청풍; (이제 보니 사공자라는 자와 밀회한 저 계집, 냉혈전호의 큰딸이었구나.) 다가오는 벽세황 앞에서 뒤로 주춤 주춤 물러서는 벽소소를 보며. 이세창과 황금수라들은 귀견수와 사우가 싸우는 쪽으로 간다.

청풍; (주방 식구들에게 듣기로 장주의 큰 딸은 무림맹 소맹주와 혼담이 있다던데...)

청풍; (다른 사내와 이미 그렇고 그런 사이였구나.) ! 관목 사이로 몸을 숨기며 생각하고

벽세황; [어리석은 년!] 노려보며 벽소소에게 다가오고. 이세창과 두 명의 황금수라들은 귀견수와 사우가 싸우는 쪽으로 가고 있다. 귀견수와 사우의 싸움은 귀견수가 일방적으로 몰아붙이고는 있지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하는 모습이다

벽소소; [... 오빠! 아니야!]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사색이 되어 물러서고. 하지만

벽세황; [듣기 싫다!] 버럭 고함

깜짝 놀라는 벽소소

벽세황; [네년이 그동안 어떻게 놀아났고 무슨 병에 걸렸었는지 이미 다 알고 있다.] 살벌한 표정

벽소소; [흐윽!] 전율하고

벽세황; [네년의 처리는 저 죽일 놈을 처리한 후에...] + [!] 놀라는 벽세황

벽세황; (이곳에 우리보다 먼저 나타나 저 죽일 놈과 싸웠던 자가 사라졌다.) 주변 급히 둘러보고. 청풍의 모습이 사라졌다.

벽세황; (그놈의 입을 막아야한다.) + [총관!] 외치고

귀견수를 도우려던 이세창과 두 명의 황금수라가 돌아보고

벽세황; [이곳에 있던 또 한 놈이 사라졌소!]

이세창; (그러고 보니!) + [저 놈은 부단장에게 맡기고 주변을 수색하라!] ! 외치며 날아가고.

[예 총관님!] [존명!]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몸을 날리며 외치는 황금수라들

쐐액! 쏴아! 새처럼 날며 세 방향에서 수색하는 이세창과 황금수라들. 하지만

어디에도 청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정자 앞에서 귀견수가 사우를 몰아붙이고 있는 것만 보이고

이세창;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휘익! 정자 옆의 절벽 위로 날아 내리고

이세창; (오면서 얼핏 본 바에 의하면 무공을 익힌 자는 아니었는데...) 생각하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고.

수십 미터 아래쪽에는 강물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청풍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이세창; (무공도 익히지 않은 놈이 그 짧은 시간에 모습을 감춘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생각할 때

[보고 드립니다 총관님!] [주변 일마장 내에서는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 ! 이세창의 뒤로 날아내리며 외치고

이세창; [수색 범위를 좀 더 넓혀라. 반드시 놈을 찾아내어 입을 막아야한다.] 절벽을 등지고 돌아서며 말하고

[존명!] [분부 거행하겠습니다.] ! 휘익! 날아오르는 두 놈

다시 정자를 기준으로 좌우로 날아가는 황금수라들

이세창; (설령 저놈을 제거한다고 해도 후환이 남겠구나.) 귀견수와 사우가 싸우는 쪽으로 걸어가며 생각하고. 그때

귀견수; [그만 끝내자.] 부챗살 같은 검 그림자를 만들어내며 사우를 공격하고

사우; [누구 맘대로?] ! ! 양손의 열 손가락이 더 밝아지며 맞받아치고

! 빠캉! 벼락과 굉음이 일어나고.

슈악! ! 깨진 섬광 같은 것이 폭발적으로 귀견수를 휩쓴다.

귀견수; [!] 비틀하며 물러서는 귀견수. 팔로 눈 부위를 가리고. 그의 몸을 휩쓰는 섬광들. 하지만

! 카캉! 옷은 갈가리 찢기지만 옷 아래 피부는 다치지 않는 귀견수

사우; [소문이 사실이었구만!] [황금전장 황금수라들의 몸뚱이가 영약 덕분에 금강불괴처럼 단단해졌다는 소문이...] 물러서며 놀라는데

[조심해요!] 벽소소의 비명이 들려 눈 치뜨는 사우

화악! 유령같이 뒤에 나타나며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손으로 사우의 목을 잡으려는 벽세황의 오른손

사우; [섭장천의 절기 금룡신나(擒龍神拿)!] ! 사력을 다해 몸을 돌려 피하지만

슈욱! 용처럼 꿈틀거리며 따라붙는 벽세황의 손아귀

사우; (피하긴 틀렸군.) + [크아!] 퍼퍼펑! 양손으로 빗발치듯 장풍을 날리며 뒤로 날아가지만

퍼펑! ! 사우의 장풍은 벽세황의 몸에 맞자 물방울 터지듯 흩어지고

사우; (귀견수 이상으로 몸뚱이가 단단하구나.) 화악!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젖히고. 하지만 직후

! 그대로 사우의 목을 움켜잡는 벽세황의 손아귀

사우; [끄아아악!] 목이 잡히며 비명

이세창; [그렇지!] 환호

벽소소; [죽이면 안돼요!] 비명 지르며 달려오고

귀견수; (역시 천하제일인을 사부로 둔 분답다. 내가 고전했던 저 놈을 단번에 사로잡다니...) 놀라고 감탄하며 다가오고

벽세황; [네놈이 누군지 관심 없다.] 콰드득! 사우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벽세황; [오늘 부로 네놈의 존재는 세상에서 완전하게 사라질 테니...] ! 사우의 목을 쥔 벽세황의 손아귀가 빛을 발하는데

사우; [... 솜씨는 잘 봤다 벽세황! 과연 철면무제 섭장천의 제자다운 실력이었다.] 웃고. 얼굴은 고통으로 이지러져있으면서

벽세황; [웃어?] 어이없는데

사우; [복수전은 다음으로 미루자.] 화악! 갑자기 사우의 몸에서 검은 안개같은 기운이 터져 나온다. 놀라 눈 치뜨는 벽세황

이세창; (저 무공은...) + [피하십시오 소장주!] ! 외치며 검은 안개를 뿜어내는 사우에게 장풍을 날리고. 귀견수도 놀라며 검을 길게 그어내고. 하지만

! 엄청난 검은 연기가 터지면서 주변을 뒤덮어버리고. 그곳으로 날아 들어간 이세창의 장풍과 귀견수의 검기도 묻혀버리고. 오히려

! ! 검은 안개에 접하자 현기증을 느끼는 이세창과 귀견수

[!] [이런...]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이세창과 귀견수

[!] 안도하며 멈춰서는 벽소소.

이세창; [소장주!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십시오.] ! ! 장풍을 날려 검은 안개를 흩어버리려 하고.

이세창; [그건 암흑마가(暗黑魔家)의 마공 철기산혼무(鐵氣散魂霧)입니다.] 펑펑! 연신 장풍을 날리고. 귀견수도 왼손으로 장풍을 날려 검은 안개를 흩어버리려 하고. 그때

<걱정 마시오. 이 정도 잔재주에 어찌 되진 않으니...> ! 말과 함께 검은 안개 속에서 밝은 빛이 나타나더니

이세창과 귀견수가 놀랄 때

화악! 푸시시! 밝은 빛이 검은 안개를 모두 태워버리면서 벽세황의 모습이 드러난다

! ! 우뚝 선 벽세황의 몸에서 강한 빛으로 이루어진 고리가 여러 개 생겨나 맴돌면서 며 주변의 검은 기운을 태워버리고 있고. 하지만 사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벽소소; [!] 여러 모로 안도하고

이세창; (황금전장의 최고무공인 금륜법신(金輪法身)이로구나.) 안도하고

이세창; (불문의 금강신공(金剛神功)에서 유래한 금륜법신은 몸 안팍의 모든 불순물을 태워버리는 힘을 지녔지.) + [그자는 달아났군요.] 생각하며 다가가고. ,귀견수는 정자 주변을 수색한다.

벽세황; [철기산혼무라는 게 대체 뭐요?] 지잉! 금빛 고리가 사라지고

벽세황; [그놈이 온몸으로 뿜어낸 검은 기운이 몸속으로 파고들자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느껴졌었는데...] 츠츠츠! 몸에서 뿜어지던 밝은 빛이 완전히 사그라들면서

이세창; [마교가 사대마가(四大魔家)로 이루어진 것은 아실 것입니다.]

벽세황; [천마의 핏줄인 천마세가(天魔世家)와 천마의 제자였던 자들을 시조로 삼는 암흑(暗黑), 혈전(血戰), 번뇌(煩惱)의 삼마가를 합쳐서 사대마가로 알고 있소.]

이세창; [철기산혼무는 그중 암흑마가의 마공입니다.]

이세창; [몸속의 철분을 아주 미세하게 만들어 뿜어내는 무공인데...] [상대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 혈관을 막거나 파괴하는 힘을 지녔습니다.]

벽세황; [기상천외로군.] 놀라고

이세창; [철기산혼무로 뿜어지는 철분은 워낙 미세해서 호신강기로도 막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벽세황; [그래서 순간적으로 혈관이 막혀 현기증이 느껴졌었군.]

이세창; [비록 철기산혼무가 막기 힘들고 위력적인 마공이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벽세황; [뭔지 알겠소.] [제 몸 속의 철분을 뿜어내야하니 부작용이 심하겠지.]

이세창; [방금 전의 그놈은 아마 소장주의 손을 벗어나기 위해 몸의 철분 대부분을 소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분간 운신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벽세황; [아쉽군. 오늘 확실히 잡아 죽였어야 했는데...] 말하며 벽소소를 돌아보고

겁을 먹고 물러서는 벽소소

벽세황; [소소! 네년은 놀아난 상대가 누군지 알았느냐?] 노려보고

벽소소; [... 몰랐어요. 사공자... 그자는 내 앞에서 무공을 구사한 적이 없어서...] 눈치 보며 겁을 먹고

벽세황; [놈은 삼십여 년 전 철면무제님께 멸망한 마교의 잔당이었다.] [마교의 잔당이 왜 네년에게 접근했겠느냐?]

벽소소; (우리 황금전장의 재물을 노리고...) 입술 깨물고

벽세황; [네가 마교의 잔당과 놀아난 사실이 알려지면 어찌 될 것같으냐?]

벽소소; [... 그건...]

벽세황; [단순히 소맹주와의 혼담이 무산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황금전장이 마교의 잔당들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쓸 수도 있으니...]

벽소소; [흐윽!]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그때

 

[!] 무언가를 발견하는 귀견수

바닥의 풀밭에 떨어져 있는 머리핀. 바로 벽옥령이 청풍에게 선물로 주었던 그 머리핀이다. 꽃 모양의 중앙에 보석이 박힌

귀견수; (... 이건...!) 경악하며 머리핀을 집어들고

귀견수; (틀림없다! 옥령 아가씨가 고양이를 구해준 보답으로 이청풍에게 준 머리 장식이었다.) (그렇다는 건...)

귀견수; (큰 아가씨의 밀회를 목격한 놈은 이청풍이었구나!) 가면 속에서 눈 부릅뜨고

 

벽세황; [아버지에게 오늘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그대로 보고할 것이다.]

벽소소; [... 오빠!] 사색이 되고

벽세황; [네년의 처분은 아버지께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돌아보고.

귀견수가 다가와 이세창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벽옥령의 머리핀이다.

벽세황; [뭐요?] 다가가고

이세창; [소장주!]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핀을 내밀고

이세창; [우리보다 먼저 이곳에 왔던 자의 정체를 알아낸 것 같습니다.] 머리핀을 내밀며 말하고

벽소소; (... 저건 옥령이의 머리 장식!) 놀라고

 

#43>

새벽. 강물에 피어오르는 물안개.

도축장 근처의 강. 이제 백정들이 일어나 일 준비를 한다. 강물에서 세수를 하는 놈들도 몇놈 있고. 그러다가

세수하던 한 놈이 흠칫! 하며 안개 피어오르는 강물을 보고

강물에 무언가 떠내려 오고 있다. 사람의 모습이다

백정; [뭐야 저거!] 찡그리며 일어나고. 주변의 다른 백정들도 흠칫! 하며 보고

백정; [젠장! 재수 옴붙었구만. 새벽부터 시체를 보게 되다니...] ! 강물에 침을 뱉고.

[정말 사람 시체로구만!] [어쩐지 강물에 피 냄새가 배어있다고 했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물에 빠져 죽은 건가?] 시체를 보며 궁시렁대는 백정들. 헌데

움찔! 떠내려 오던 시체가 움직이더니

첨벙! !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곳은 물이 얕아서 허리정도까지 찬다.

[! 뭐야?] [시체가 아니었구만!] [... 살아있었어.] 백정들 놀라 주춤거릴 때

첨벙! 첨벙! 비틀거리며 물가로 오는 그 인물. 짙은 물 안개 때문에 처음에는 얼굴이 잘 안보이지만

! 가까워오자 드러나는 모습. 바로 청풍이다. 몸의 도처에 갈라진 상처가 있다. 물론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은 사라졌다.

[! ... 너는...] [청풍! 청풍이 아니냐?] 백정들 기겁

[이놈아! 무슨 일이야?] [어쩌다 이런 몰골이 되었어?] 첨벙! 첨벙! 급히 물로 뛰어들어 청풍을 부축하는 백정들

청풍;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정들에게 부축되며 말하고

청풍; [제가 강물에 떠내려 왔다는 사실은 비밀로 부쳐주십시오.]

[... 알았어.] [걱정 말고 우선 집으로 가서 치료 받자.] [딱 봐도 출혈이 심하구만.] [누구하고 싸웠기에 이 지경이 되었누?] 청풍을 부축해서 건물로 가는 백정들

청풍; (구사일생...) 백정들에게 끌려가며 생각하고. 고개 떨군 채

청풍; (나는 보지 말아야할 것을 보았다. 아마 소장주 일행은 살인멸구(殺人滅口)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절벽에서 뛰어내렸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내가 소장주 일행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므로...> 절벽에서 발부터 뛰어내리던 장면 떠올리고. 그때까지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리고 있었다.

청풍; (다행히 도축장 근처를 흐르는 강이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어쩐지 후환이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도축장의 건물로 부축되어 가는 청풍의 모습 배경으로 나레이션. 오가던 백정들과 여자들이 놀라서 보고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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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3)

 

 

바깥의 계곡도 어두웠지만 동굴 안쪽은 더욱 깜깜하다.

심주은이 앞장서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심주은을 따라가며 생각했다.

(정말 칠흑같이 어둡다는 말이 실감나는구나. 대안탑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이렇게 어둡지는 않았는데...)

용조층층공을 몸속에 쌓게 된 이후로 어둠에 그다지 구애를 받지 않게 된 임청우였다.

하지만 이 동굴의 짙은 어둠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앞에 내민 손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로 십삼보, ()으로 육보, () 구보, () 삼보...”

앞서가는 심주은은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임청우는 혹시 어둠 속에서 심주은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그래서 당겨지지 않을 정도로 살며시 심주은의 치맛자락을 잡고 따라갔다.

임청우가 그러거나 말거나 심주은은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한동안 걷던 심주은이 문득 멈추어 섰다.

걸음을 멈춘 그녀는 임청우의 손목을 잡아서 자기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긴 위험한 곳이야. 내게서 떨어지면 안돼.”

임청우는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주문을 외듯이 중얼거리며 혼자 앞서 갈 때는 언제고 이제 다 온 듯하자 조심하라는 말을 한다.

...!”

하지만 그 직후 임청우는 발밑이 텅 비는 것을 느끼며 원래 들이키던 숨을 가쁘게 빨아들였다.

끼에에엑!”

그 바람에 자기가 듣기에도 흉한 소리가 목구멍으로 터져 나왔다.

쐐액!

임청우의 몸이 돌덩이처럼 세차게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임청우는 이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심주은의 맥박이 안정되어 있는 것을 알고는 안심했다.

이번에는 떨어진다 하더라도 절벽에서 떨어진 것처럼 고생을 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마음이 든 것이다.

다 온 모양이야.”

심주은이 속삭였다.

휘청!

순간 두 사람은 몸은 공중에서 우뚝 멈춰버렸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발밑을 떠받치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주위가 천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빛은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헌데 어둠이 그 빛에 밀려 물러가며 여러 개의 그림자들이 자신들 주변에 빙 둘러 서있는 것이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임청우는 긴장하며 그 그림자들을 살펴보았다.

그 사이에 수십 겹으로 휘감고 있던 휘장이 걷혀지듯 어둠이 물러가며 희미하게 보이던 그림자들이 점차 뚜렷한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람이다!)

이윽고 임청우는 자신과 심주은을 둥글게 둘러싸고 있는 아홉 명의 사람 형상을 볼 수 있었다.

아직 모습은 완연하게 드러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궁장차림을 한 여인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심주은이 갑자기 무릎을 꿇고 절하며 낭낭한 음성으로 외쳤다.

소녀 심주은,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로서 사부님의 명을 받들어 조사이신 구천신녀(九天神女)님을 뵙습니다.”

임청우는 그녀가 절을 하자 덩달아 절을 했다.

그런데 심주은은 임청우가 절을 할 때 벌써 일어서고 있었다.

절을 받은 사람이 답례하는 말도 꺼내기 전에 먼저 일어서다니...

특별히 예의를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지만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주위가 완연히 밝아지며 아홉 여인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아하! 진짜 사람이 아니라 아홉 개의 인형이었구나.)

임청우와 심주은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들이었다.

아홉 개의 인형은 모두 똑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하나같이 배꽃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인형들의 모습이 그 정도이니 그 인형의 원형이었던 여인은 얼마나 아름답고 요염했을지 익히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임청우와 심주은이 도착한 석실에는 그 아홉 개의 인형들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둥글고 높은 천장의 중앙에는 임청우와 심주은이 내려온 구멍이 뚫려 있었다.

인형들의 뒤쪽 석벽에는 인형과 똑 같은 얼굴에 똑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허공을 유영하는 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는 수 만 가지의 화려한 꽃들의 그림이 나무 모양을 한 세 개의 봉우리를 배경으로 그려져 있었다.

임청우가 물었다.

설마 저 그림이 이 밖에 있는 계곡을 그린 것은 아니겠지?”

임청우가 물은 것은 믿기지 않아서였다.

세 개의 봉우리로 보아 벽에 그려진 풍경은 바로 이 동부 밖의 계곡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동부 밖의 계곡은 키가 작은 나무들이 늪지대 주변에 깔려 있을 뿐 꽃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벽화에는 무수하게 많은 꽃들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원래 이곳은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해.”

심주은이 인형들의 새끼손가락들을 천잠사로 이어 묶으며 말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황하의 물이 조금씩 이 계곡으로 스며들어서 급기야는 모든 것이 물속에 잠겨버렸다는 거야. 그래서 원래 이곳에 있던 신녀문도 물에 잠겨 버렸고 하는 수 없이 남쪽의 무산으로 옮겨가야 했었다고 해.”

임청우가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물에 잠기기 전에 이 계곡에 신녀문이란 문파가 있었다면 이곳은 혹시...?”

신녀문의 조사동(祖師洞)이야. 폐쇄되고 난 후 여기 들어온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야.”

천잠사로 아홉 인형들의 손가락을 각기 하나씩 묶은 심주은이 조심스럽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사르르르!

인형들은 손가락이 각기 조금씩 젖혀지면서 팔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걸 확인한 심주은이 빠르게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신녀들의 등을 봐. 보고서 외울 수 있는 한 많이 외우도록 해! 나중엔 아무리 사정해도 가르쳐 주지 않을 테니까.”

“...?”

임청우가 무슨 소린가 하는데 팔을 내린 인형들이 빙글 돌면서 등을 보였다.

스르르!

그리고 인형들이 걸치고 있던 궁장들이 어떤 힘에 의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궁장이 흘러내리고 백옥을 깎아 만든 인형들의 눈부신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백옥으로 만들어진 인형들의 등에는 깨알 같이 작은 글자들이 음각되어있었다.

심주은은 서둘러 품속에서 기름종이로 싼 화선지와 먹물이 들어있는 대나무 연적을 꺼냈다.

그리고는 인형들의 등에 먹물을 바르고 탁본(濯本)을 뜨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아홉 장의 탁본이 만들어졌고 그녀는 먹물이 마르기를 기다리며 바닥에 펼쳐 놓았다.

임청우는 가까이에 있는 인형의 등에 새겨진 글을 읽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글들이 심오한 무공구결과 신비한 이술(異術)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많이 안다는 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알고 있었다.

하나를 알아도 바로 아는 것이 훨씬 중요한 것이다.

이미 임청우의 머릿속에는 두 가지의 빼어난 무공구결이 숨 쉬고 있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의 구결은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으며 무쌍층층공(無雙層層功)의 공력도 구결을 운용하기만 하면 따라서 몸속을 돈다.

임청우는 배움이 일천하여 무학의 지고한 이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지 뭔가를 배우고 이룬다는 것은 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가 완전히 자리를 잡고 굳어지기 전에 그 위에 또 다른 것을 쌓아 올린다는 것은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당장은 버티고 유지할 수 있을지 몰라도 종래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설혹 무너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르게 올린 탑보다 오래 견딜 리는 만무하다.

천년을 가도 무너지지 않을 집을 세우고 역사에 남을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임청우다.

섣불리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임청우가 자신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리며 백옥 인형들의 흘러내렸던 옷들이 다시 천천히 올라가고 있었다.

종아리를 지나고 육감적인 허벅지와 둔부를 거슬러서 옷은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입혀지고 있었다.

심주은은 탁본한 화선지들을 재빨리 말아서 기름종이로 몇 겹으로 감아 품속에 넣으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의 볼일은 다 끝났어. 나를 꽉 잡아! 신녀들은 뒷모습이지만 알몸을 본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스르르르!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옷이 입혀진 신녀들이 돌아서고 있었다.

그녀들의 옆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암흑천지로 변하며 임청우와 심주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

 

파앗!

두 사람은 강렬한 빛에 눈을 가렸다.

동굴 밖의 태양빛인가 했지만 그렇진 않았다.

두 사람은 바둑판처럼 네모난 대리석들이 깔려있는 넓은 광장 한 가운데 서있었다.

어리둥절하는 임청우에게 심주은이 속삭였다.

아까 우리가 들어왔던 곳이야. 한걸음이라도 잘못 떼면 대라신선이라 해도 살아서 나가지 못해.”

들어올 때 칠흑처럼 어두웠던 곳은 복잡한 동굴이 아니라 바둑판처럼 넓은 광장이었던 것이다.

입구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문이 열리면 빛이 사라지고, 빛이 있는 동안에는 입구가 사라지도록 만들어진 기관인 듯 했다.

심주은은 다시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리며 네모난 대리석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임청우는 심주은의 옆에서 보조를 맞춰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똑 같이 걸었다.

심주은이 걸음을 떼면 따라서 발을 들었고, 그녀가 발을 딛으면 따라서 한걸음 옮겼다.

꾸불꾸불 걸어가며 삼십 여 번의 방향을 바꾼 후에야 두 사람은 벽과 붙어있는 마지막 대리석을 밟을 수 있었다.

그그긍!

그 대리석을 밟는 순간에 기관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이번에는 사방이 캄캄해졌다.

덜컥!

두 사람의 앞쪽에 있던 벽이 밖으로 넘어가며 출구가 생겨났다.

그들이 처음에 들어왔던 곳이었다.

심주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 간이 조마조마했네.”

?”

임청우가 앞장서서 출구 밖으로 나서며 물었다.

사실 난 조사님들을 속였거든.”

심주은이 얄밉게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 조사동은 한번 열리면 백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열 수 있어. 그런데 조사동에 들어온 제자는 백옥 인형들의 등에 적혀있는 무공과 술법들을 일각(一刻) 동안만 볼 수 있어. 얼마를 기억했든지 일각이 지난 후에는 우리처럼 쫓겨 올라오고 말아.”

심주은의 말하는 사이에 두 사람은 동굴 입구에 이르렀다.

드드드!

동굴을 나선 두 사람이 땅에 발을 내딛자 넘어졌던 암벽이 다시 올라가면서 원래의 환상신녀의 그림이 나타났다.

임청우가 돌아보니 문을 여는 고리가 숨겨져 있던 바위도 어느 새 원상대로 회복되어 고리를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일각 동안에 신녀문의 최고의 무공과 술법들을 얼마나 익힐 수 있겠어? 고작해야 한, 두 가지가 끽이지!”

심주은은 암벽에 새겨진 환상신녀의 그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난 사부님이 그 사실을 일러주었을 때 이미 작심하고 있었어. 아예 탁본을 떠서 나오기로 말이야. 이제 신녀문의 모든 무공과 술법들은 내 손 안에 있는 거야!”

자랑스럽게 말하는 심주은을 보며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기까지 왜 그렇게 가슴을 졸였는지 알만 했다.

그렇게 무공을 익혀서 어디에 쓸려고?”

임청우가 묻자 심주은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무림제패(武林制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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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묵장은 현재 문피아, 리디북스, 미스터블루, 원스토어에 유료 연재중입니다.

연재를 하더라도 대개 1권 분량(1-25장)은 무료로 공개하고 있습니다.

와룡강의 블로그에서는 오늘 현재(2020년 4월 2일) 33장까지 연재가 되었습니다.

일단 35장까지는 연재를 할 생각입니다만...

유로로 구독하시는 분들과의 형평성을 고려하여 26장 이후로는 다음 주에 삭제할 예정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전설신검도 추후 25장까지만 연재할 계획임을 알려드립니다.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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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혈황(血皇) 등장!

 

 

(... 무슨 망상이냐? 아들 뻘밖에 안되는 어린 아이에게...!)

이검한을 대상으로 이런 저런 상상을 하던 나유라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자책했다.

(너무 오래 굶었구나! 나무 오래 굶었어!)

나유라는 부끄러운 망상을 억지로 떨쳐버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주의를 애써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보다 저 아이가 한 말을 믿어야만 하나? 내 몸이 흑혈맹호단의 아이들에게 더렵혀지기 전에 구했다는 말을...?)

얼마 전 벌어졌던 일을 떠올리는 나유라의 얼굴이 고통으로 이지러졌다.

자신이 수족처럼 여기던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유린당한 부분으로 마치 불로 지지는 듯한 전율이 스쳐갔기 때문이다.

나유라는 흑혈맹호단의 청년들에게 몸을 더럽히기 직전에 기절한 탓에 그 후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남편 아닌 외간 사내들의 손길이 몸에 닿았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는 나유라였다.

나유라는 아무래도 마음 속의 미심쩍은 부분을 그냥 넘겨 버릴 수가 없었다.

과연 자신의 몸은 더럽혀지기 전에 구원받은 것일까?

(다시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입술을 깨문 나유라는 섬섬옥수로 나신을 가리며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검한이라고 했느냐?”

이검한은 등 뒤에서 들려온 서늘한 음성에 움찔했다.

비록 눈은 앞쪽을 보고 있지만 그의 모든 신경을 등 뒤로 쏠려 있던 터였다. 그래서 그는 나유라가 목욕을 마치고 호수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나유라의 음성을 듣는 순간 왠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교가 계십니까 마마?”

마음을 진정시키며 몸을 돌린 이검한은 공손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렇다. 네게 한 가지 확인해볼 일이 있다!”

나유라는 오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알몸 위에 이검한의 적룡풍을 걸치고 있었다. 적룡풍 하나로 풍만한 나신을 감싼 그녀의 자태는 더할 수 없이 뇌쇄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일신에는 범접키 어려운 기품과 수백만 명의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여왕으로서의 위엄이 배어 있었다.

정말 내게 아무 일도 없었느냐?”

나유라는 형형한 눈으로 이검한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검한은 그녀의 그 싸늘하고도 찌르는 듯 강렬한 눈길에 움찔했다. 그렇기는 해도 나유라의 그같은 질문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물론입니다. 소생이 왜 거짓으로 아뢰겠습니까?”

이검한은 단호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이검한의 그같은 반응에 나유라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다시 한 번 이검한을 추궁했다.

너를 낳아준 어머니의 정조를 걸고 맹세할 수 있느냐?”

그녀의 말에 이검한의 안색이 일변했다.

어머니...!

이검한은 지금껏 자신의 부모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얼굴도 모르는 처지긴 해도 생모의 정조에 걸고 거짓 맹세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다.

(난감한데...)

이검한은 당황하는 기색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느라 즉답을 못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설마 내게 숨기는 것이 있는 게냐?”

이검한의 그같은 미심쩍은 태도에 나유라는 두 눈을 의혹으로 물들인 채 재차 추궁했다.

... 그게...”

이검한은 억지로 웃으며 대답을 꾸며내려고 했다.

헌데 그 직후였다.

(살았다!)

이검한의 두 눈이 갑자기 번뜩 빛났다.

스스스!

돌연 모래가 흐르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귓전에 들려온 때문이다.

나유라도 움찔했다. 그녀 역시 누군가 녹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일단 숨자!”

스윽!

누군가 녹원으로 접근하는 것을 알아차린 나유라는 이검한에게 전음을 보내며 급히 한쪽에 서있는 고목 위로 날아올랐다. 그 고목은 키가 크고 가지와 잎사귀가 울창하여 아래쪽에서는 나무 위쪽이 잘 보이지 않았다.

휘릭!

이검한도 즉시 나유라의 뒤를 따라 그 고목 위로 날아올라갔다.

먼저 고목 위로 올라간 나유라는 굵은 나뭇가지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아서 녹원 밖을 주시하고 있다.

그런 나유라 옆으로 내려서던 이검한은 얼굴이 와락 붉어졌다. 순간적으로 훅 느껴지는 그윽한 살 냄새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때문이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검한은 이미 여체의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여자의 살내음을 맡는 것만으로도 아랫도리의 일부가 뜨거워진다.

살 냄새뿐만이 아니었다.

고목의 굵은 가지 위에 왼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쪼그려 앉는 바람에 나유라의 오른쪽 다리는 거의 대부분 적룡풍 밖으로 드러나 있다.

종아리는 탄력이 넘치면서도 미끈하고 뽀얀 허벅지는 한 아름은 됨직하게 풍만하다.

두근!

나유라 옆쪽의 가지 위에 쪼그려 앉으며 곁눈질을 하던 이검한의 가슴이 세차게 뛴다.

적룡풍이 갈라진 사이로 오른쪽 다리가 거의 다 드러난 탓에 나유라의 사타구니 깊은 곳도 일부 엿보였기 때문이다.

흐드러진 한 쌍의 허벅지가 아래위로 엇갈리는 중심부의 둔덕은 황금빛 방초로 덮여있다.

하지만 나유라의 신경은 온통 녹원 밖을 향해 있는 상태인지라 자신의 은밀한 부위가 노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검한아! 이 가엾은 여자에게 딴 마음을 품기나 하고...!)

나유라의 도발적인 자태에 자기도 모르게 매혹되었던 이검한은 이내 자책하며 시선을 돌렸다.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시야로 기이한 광경이 들어온 때문이다.

쿠쿠쿠쿠!

녹원 밖의 사막에 갑자기 불룩한 두둑이 생기더니 일직선으로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두더지가 땅속으로 길을 내며 다가오는 것처럼....

이검한보다 먼저 그 현상을 발견한 나유라가 전음입밀(傳音入密)을 써서 설명해주었다.

저것은 유사마부(流砂魔府)라는 신비문파의 독문무공인 토룡사행둔(土龍砂行遁)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유사마부!)

나유라의 설명을 들은 이검한은 해연히 놀랐다. 그와 함께 자신도 모르게 품 속에 있는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을 어루만졌다.

(혹시 유사마부는 유사신령의 후손들이 세운 문파가 아닐까?)

이검한은 녹원을 향해 달려오는 긴 두둑을 보며 염두를 굴렸다.

그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천 년도 전에 죽은 서역사천왕의 명맥이 아직까지 끊이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검한이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쿠오오오!

돌연 모래가 허공으로 확 번지며 인간의 상반신이 모래 밖으로 불쑥 드러났다.

상반신을 모래 밖으로 드러낸 인물은 노인이었다. 음침하고 괴팍한 인상의 노인인데 늘 땅 속에서만 살아서인지 피부가 아주 창백했다.

노인은 양 손에 두더지 발 모양의 기형도구를 차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으로 모래를 파고 전진하는 듯했다.

오기는 제대로 찾아왔군!”

상반신을 밖으로 드러낸 노인은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는 시력이 약한 듯 눈을 찡그리며 햇빛을 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노부가 그 빌어먹을 놈보다 먼저 온 것일까?”

노인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촤아!

이어 그는 하반신마저 완전히 모래 밖으로 나왔다.

바로 그때였다.

흐흐... 그렇지 않다. 본좌는 늙은이 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다.”

갑자기 호수 쪽에서 음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 “...!”

반사적으로 돌아보던 이검한과 나유라는 동시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부터였을까?

호수가에 한 명의 괴인이 굵은 고목을 등진 채 우뚝 서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온통 시뻘건 피빛 천으로 휘감은...!

비단 옷의 색깔만 붉은 게 아니었다.

츠츠츠!

괴인의 몸 주위로는 핏빛의 안개같은 것이 칙칙하게 휘돌고 있었다.

나유라는 물론 이검한도 절정의 내가고수다. 그들보다 내공이 심후한 사람은 서역 전체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혈포인이 언제 나타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서운 고수다!)

이검한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괴인을 주시했다.

츠츠츠...

혈포인의 몸에서는 핏빛의 안개 뿐 아니라 섬뜩한 마기(魔氣)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 마기가 얼마나 강렬한지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워지는 이검한과 나유라였다.

아연긴장한 두 사람은 숨을 멈추고 심장 박동도 극한까지 느리게 만들었다. 자칫 혈포인의 이목에 감지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낀 때문이다.

혈포인보다 먼저 모래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노인도 보기 드문 고수다. 단순히 내공만 따져도 노인은 이검한이나 나유라를 압도하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 역시 혈포인이 흘려내는 음산한 기세에 주눅이 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놈이 자칭 혈황(血皇)이란 말종이냐?”

노인은 위축된 내심을 감추려는 듯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혈황!)

순간 이검한과 나유라는 경악으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그만큼 혈황이라는 이름은 놀랍고도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신마풍운록 서열 이위(二位)!

 

혈황은 바로 저 신마풍운록에 고독마야 연남천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독천존, 유령마제, 태양신협등 사방무제(四方武帝)들보다도 앞 선 서열로 기록된 혈황은. 그러나 그의 신상에 관해 알려진 바가 전무하다.

이름과 출신내력은 물론이고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비밀에 쌓여있다.

누구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혈황이 신마풍운록의 서열이위로 기록되어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런 저런 의견이 분분했다.

혹자는 혈황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인물이라 했고 또 혹자는 그가 알려지지 않은 비밀 세력의 주인일 것으로 추측했다.

분명 존재하지만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상 최강의 세력 마교(魔敎)의 당대 교주가 혈황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혈황이 신마풍운록을 작성한 장본인일 거라는 말도 떠돌았다.

별 볼일 없는 어떤 인물이 자기만족을 위해 신마풍운록을 만들면서 자신에게 혈황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서열이위로 올려놓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쨌거나 혈황은 신마풍운록에 이인자로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그다지 없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혈황을 경계하거나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혈황의 이름이 의외의 장소에서 거론된 것이다

 

(저자가 정말 고독할아버지에 이어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는 혈황일까?)

이검한은 필사적으로 흥분을 억누르며 혈포인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대단한 고수이긴 하다. 이모보다도 강해보이는 걸 보면...)

온몸이 칙칙한 피빛 노을에 뒤덮여 있는 혈포인을 살펴보며 이검한은 새삼 긴장했다.

고독마야와 누란왕후 흑요설, 현음마모를 제외한다면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을 능가하는 고수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흐흐흐! 허세를 부릴 거 없다 지둔노조(地遁老祖)! 기왕 일찍 도착했으니 서로의 용무나 빨리 해결하면 되지 않겠느냐?”

혈황이라 불린 혈포인이 음산한 음성으로 노인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역시 저 노인의 지둔노조 유마조율(維魔朝律)이었구나!”

고목 위에 숨어서 보고 있던 나유라가 다시 전음입밀로 이검한에게 말했다.

지둔노조? 마마께서 아시는 사람입니까?”

이검한도 전음입밀을 써서 되물었다.

그렇다. 저 노괴는 당금의 서역무림에서 최강자들로 꼽히는 하토삼기(蝦土三奇)중 지둔노조다!”

나유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둔노조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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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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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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