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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어? 당신 손에 있던 단검은 어쨌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에 단검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녹지에 던져 버렸어요."

강미루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대답했다.

"아니 왜?"

"당신을 찔렀던 물건을 계속 갖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혹시 당신을 찌르는 경우가 또 생기면 어떡하라구요?"

말하는 강미루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린다.

백남빈은 그런 강미루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녀가 자신을 깊이 생각해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애정이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강미루의 깊은 애정에 다 보답하지 못하는 듯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몰랐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틀림없는 구혼(求婚)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미루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백남빈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던 여걸의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백남빈도 강미루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녹지의 푸른 물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녹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평곡의 야경(夜景)이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평곡은 사방이 수백 길 절벽으로 에워싸인 항아리같은 구조다. 그 때문에 햇빛에 의하든 달빛에 의하든 한쪽에는 늘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해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잠깐 동안이지만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중천에 이르자 창평곡 어느 곳에도 절벽의 그늘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노란 보름달은 새파란 녹지 중앙에도 떠올랐다.

녹지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콕 찍어 누르는 송곳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는 보름달이 녹지 중앙에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치떴다.

녹지의 수면이 천천히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줄어들고 있다!>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백남빈과 강미루는 서로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마치 보름달의 달빛에 실린 무게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녹지의 수면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백남빈과 강미루가 알아차렸을 때 녹지의 수면은 이미 한길 이상이나 갈아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럭! 크르럭!

어디선가 쇠사슬 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았다.

크럭! 크드드!

연달아 쇳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맞은편, 즉 서쪽 절벽인데 그 절벽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蒼平谷>이라 적혀있는 부분이 절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폭과 두께는 각 일장쯤이고 길이는 오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석괴가 위쪽부터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다.

크릭! 끼끼익!

석괴의 안쪽 윗부분에는 두 가닥의 굵은 쇠사슬이 달려있어 석괴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마치 해자(垓字) 위에 놓여지는 다리처럼 내려오는 석괴 뒤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글... 글씨가 적혀 있던 부분이 감춰진 문이었어요!"

“가봅시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잡고 함께 신법(身法)을 펼쳐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크럭 크럭 끼릭 끼릭!

거대한 석괴를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가 타는 냄새를 공기 중에 뿌린다.

크드드!

이윽고 석괴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석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 안쪽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眼力)이 생긴 터였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밀장치를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의 내부는 천연의 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통로였다.

천장에는 종유석(鐘乳石)들을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의 종유석들은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열주랑(列柱廊)처럼 안쪽까지 도열해 있다.

종유석들의 열주랑을 지나 왼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일반적인 암동(巖洞)으로 종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암동 끝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지 달빛이 흘러들어와 밝았다.

 

십여 장 길이의 암동을 지나자 백 평 정도의 제법 넓직한 뜰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사방의 석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조그맣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 개의 절벽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천연의 동부(洞府)였다.

달빛이 흘러드는 위쪽 입구는 까마득하게 높은데, 그 입구마저 바깥쪽 절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동부의 존재를 결코 눈치 챌 수 없다.

뜰에는 키가 작으면서도 옆으로 떡 벌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고 그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납작한 돌판으로 덮인 오솔길을 따라가자 세 개의 석문(石門)이 나란히 붙어있는 벽이 나왔고 벽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바가지가 놓여있는 작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깥도 아름다운데 여기는 오밀조밀해서 더 아름답군요. 정말 신선이 살았던 곳이 아닐까요?"

신비한 정경에 도취되어 묻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의 말에 강미루가"칫!"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길 보세요. 이 바가지는 사람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반치는 쌓였는데 누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당신이 그토록 총명하니 장차 남편을 마음대로 흔들겠군."

백남빈이 웃으면서 농(弄)을 했다.

"어쩜, 지금 같은 때에도 장난이 나와요? 저를 놀려서 당신은 무엇이 좋은가요? 아까 밖에서 저한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강미루가 눈을 흘기며 힐난하자 뜨끔해진 백남빈은 얼른 굽신거리며 둘러대었다.

"천만에, 천만에! 내말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진정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강미루는 보면 볼수록 교묘한 동부인지라 백남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엉뚱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우리 이 문들이나 열어 봐요."

백남빈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에 걸린 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검을 돌려 달라고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로군."

"차라리 검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잖아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이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세 개의 문 중 좌측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긍!

백남빈이 슬쩍 밀자 석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눈에 가장 먼저 뛴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몇 권의 책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든지 보다가 던져져서 엎어진 책장(冊張)들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백남빈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먼지를 툭툭 털고 제목을 읽었다.

 

<이백시선(李白詩選)>

 

바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를 모은 시집이었다.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시를 좋아한 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매우 아취(雅趣)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요"

함께 보고 있던 강미루가 말하자 백남빈이 대뜸 받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책도 어질러 놓으려고?"

"남의 거처에 와서까지 주인을 욕하는 거예요?"

백남빈은 강미루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심이 센 그녀를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백남빈이었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손에서 책을 받아 옆에 있는 서가의 빈곳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정에 박힌 야광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은은히 비치는 이 석실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서가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책 뿐 아니라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도 석실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가요. 밀폐되어 있어서인지 공기가 탁해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석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백남빈이"어__?" 하며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강미루는 재빨리 안에서 석문을 닫아버렸다.

"미루, 미루, 왜 그러는 거요?"

강미루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백남빈은 겁이 털컥 나서 석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석문 안쪽에서 강미루의 대답이 들린다.

 

사실 강미루는 창평곡에 들어온 이후로 옷 같은 옷을 입어 보지 못했다.

비록 기후가 따뜻해서 지내는데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상체는 백남빈이 벗어 준 남색 상의를 입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풀로 엮어 만든 치마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버석거리고 까칠한 감촉은 둘째 치고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속살이 드러나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모퉁이에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한 강미루는 대단히 기뻤었다. 어떤 종류의 옷이든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전부 남자들의 옷뿐이네."

그래도 옷가지들을 들쳐본 강미루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석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옷은 모두 남자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 옷이라도 풀치마보다는 났다.

강미루는 헐렁한 남색 상의를 벗어버리고 옷가지들 중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옷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턴 후 입어 보니 옷 전체가 몸에 착 붙고 가느다란 소매는 팔목을 살짝 조였다. 상당히 작은 체형의 사내가 입었던 옷 같았다.

한 벌인 듯한 꼭 끼는 바지를 마저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하지만 속옷도 없이 맨살에 겉옷만 두른 상태라 뭔가 허전하다.

"뭘 하는 거요?"

밖에서 초조해진 백남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어요."

강미루는 마주 소리치며 재빨리 헐렁한 장삼을 하나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장삼의 허리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서 대충 크기를 맞추었다.

몸을 슬쩍 돌려 살펴보니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강미루는 몇 벌의 옷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

확 달라진 강미루의 모습에 백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아이같이 변한 강미루의 모습은 어여쁠 뿐 아니라 깜찍하기까지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안고 나온 옷가지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혀 주었다.

품이 넉넉한 장삼을 걸치고 사자검을 허리에 찬 백남빈의 모습이 옛날이야기 속의 검선(劍仙)을 떠올리게 해서 강미루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은 엿새만에 사람의 형용(形容)을 되찾게 되었다.

석실 안팍에 벗어놓은 남색상의와 풀잎 옷 한 벌은 장차 높이 날아오를 그들의 껍질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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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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