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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

 

 

말 그대로 세외선경인 창평곡이지만 그 존재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유는 창평곡 주위에 펼쳐져 있는 세 가지 절진 때문이다.

창평곡의 원래 주인이었던 상고시대의 기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설치한 진법을 이백이 보완하여 난공불락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백은 제갈공명이 남겼다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얻어 기문둔갑으로도 일절(一絶)이었었다.

이백에 의해 창평곡 주위에 구축된 미혼(迷魂), 산백(散魄), 박령(縛靈)의 절진을 뚫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둘 정도에 불과하다.

삼대절진(三大絶陣)은 비단 외부에서 들어오는 것을 막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는 것 역시 저지한다.

창평곡 밖으로 나가려면 삼대절진의 바탕이 된 팔진도해가 있어야한다.

헌데 동부 어디에서도 팔진도해는 발견되지 않아서 백남빈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당장은 사자검결의 수련에 전념해야하는 터라 창평곡을 빠져나가는 일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게 열흘이 지났다.

 

***

 

히히힝! 푸르르!

천리마인 흑왕은 보름 넘게 마음껏 달리지 못해서 갑갑한지 풀밭의 이쪽에서 풀쩍 저쪽에서 풀쩍 하면서 뛰고 있다.

백남빈은 녹지 앞의 작은 바위에 앉아 그 모양새를 보고 있었다.

 

지난 열흘 간 백남빈은 사자검결의 모호한 구절들을 수없이 되씹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사자검결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백남빈은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며 만든 검초의 연습에 매진했다.

그렇게 열흘간 연습한 결과 사자검을 찌를 때마다 고리같은 검기가 자연스럽게 쏘아져 나가게 되었다.

어느덧 백남빈의 이 검초는 천의무봉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비록 단 한 수뿐이지만 수비와 공격 모두를 겸하여 전혀 빈틈이 없는 검초다.

고리같은 검기는 뻗어나가는 방향마다 각기 다른 변화를 보이니 실은 수만 초로 이루어진 검법이나 다름없다.

강미루도 좌측 석실에 구비되어 있는 철검(鐵劍)들 중 하나를 꺼내 연습하고 있지만 백남빈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검기를 뽑아내지 못한다.

백남빈은 강미루에게 사자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강미루는 사자검은 너무 무거워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사양했다.

사실 무겁다는 것은 핑계일 뿐이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사자검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주인이므로 자신이 함부로 손을 대면 안된다 생각하고 있었다.

강미루의 그런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백남빈은 그녀가 그저 고맙고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무공의 성취와 달리 백남빈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갔다.

사자검결을 접한 후로 그의 마음속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왜 그토록 사람들을 각박하게 대했을까? 과연 무엇을 위해 그리했을까?)

백남빈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게 되었다.

(이백 조사(祖師)께서는 황제도 미워하고 전쟁도 미워하셨다. 각기 다른 출신과 배경을 지니셨던 열 두분의 전인들께서도 하나같이 황제처럼 힘 있는 자들에 의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졌음을 한탄하는 글을 남기셨다.)

원래 진지하고 생각이 많은 성격의 백남빈이었다.

그 때문에 이백과 사자검전 전인들의 사연과 생각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누구를 위하여 살아왔을까? 무황성을 위해서?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해서? 그것도 아니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해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이 끝없는 일었다.

그에 따라 자연히 말수가 적어지고 강미루가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을 여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 백남빈을 지켜보던 강미루는 전처럼 신나고 활발하게 만들려고 적지 않은 노력을 하고 있었다.

변방의 쾌활한 연가(戀歌)를 불러 주기도 하고 재미나는 여러 가지 물건도 만들어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갈아앉은 백남빈의 기분은 쉽사리 되살아나지 않았다.

(저 사람의 기분을 되살리려면 헐렁한 옷과 풀치마를 입고 있을 때처럼 도발을 해서 가슴에 불이라도 질러 줘야하는 것일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 강미루였다.

 

슥!

녹지 가에 앉아 생각에 몰두하고 있는 백남빈에게 강미루가 철검을 확 찔러왔다.

철검의 끝이 나사처럼 돌면서 날아든다.

바로 백남빈이 창안한 그 검초였다.

“억!”

백남빈은 갑작스런 강미루의 공격에 깜짝 놀라 몸을 옆으로 굴려 가까스로 피해냈다.

비록 백남빈처럼 검기를 쏘아내지는 못했지만 강미루의 이 검초는 빠르고 강했다. 녹지의 물을 꾸준히 마셔서 내공이 심후해진 결과다.

(아니 왜 이래?)

라는 소리가 백남빈의 입에서 터져 나오려는데 강미루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쫑알거렸다.

"대체 이 검법의 이름은 뭐죠? 그냥 무명검법(無名劍法)이라고 할까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심기일전하도록 일부러 도발을 해온 것이다.

“그럼 미루일검(美樓一劍)이라고 이름을 붙일까?”

백남빈이 어이가 없어서 실소하며 대꾸했다.

"아니면 소녀절세검(少女絶世劍)? 그것도 아니면 미녀참마검(美女斬魔劍)이라고 할까?"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장난기를 회복하는 백남빈이었다.

"장난처럼 말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당신의 이 검법은 정말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한 절학이란 말이에요."

백남빈이 오랜만에 농을 하자 강미루는 내심 기뻤지만 눈을 흘기는 척 했다.

"당신이 그릇 깎는 것을 보고 훔쳐 배운 것에 불과한데 무슨 절학이라고까지 하겠소. 그냥 미녀각기검(美女刻器劍)이라고 하지. 그래 그게 가장 적합하겠어."

대충 대답하던 백남빈의 눈이 반짝였다. 별 생각없이 지어낸 미녀각기검이란 이름이 마음에 든 것이다.

"쳇, 검법이라면 이름도 위풍 있고 당당해야지 그게 무슨 검법이름 같기나 해요?"

강미루도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싫지는 않은 듯 했다.

그리하여 백남빈이 강미루가 나무 그릇을 깎는 것을 보고 만들어낸 기이한 검초는 미녀각기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강미루의 도발이 성공해서 백남빈의 무거웠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미루, 당신을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오."

백남빈은 녹지 가에 강미루와 함께 앉아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사과했다.

“사자검전을 이어야한다고 생각하니 이백 조사와 여러 전인들의 삶이 절절하게 와 닿아서 마음을 무겁게 했소.”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강미루도 백남빈의 허리를 뒤로 감싸 안으며 말했다.

“저도 열 세분 전인의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저며지는 기분이 되곤 한답니다.”

강미루는 한숨을 쉬며 백남빈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였다.

시대 탓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사자검의 전인 열세명의 삶은 누구 하나 평탄하지 못했다.

모두가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결국 실의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와 쓸쓸히 삶을 마치곤 했다.

살아있는 신선이라 불리던 이백을 비롯하여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백남빈과 강미루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사자검의 마지막 전인인 진룡(陳龍)이란 인물의 삶이었다.

 

***

 

사자검의 전인들은 절세의 무공을 지녔으면서도 무림에서 활동하지는 않았다. 시조인 이백을 필두로 좁은 강호가 아닌 더 큰 세상에 뜻을 두고 대의(大義)를 펼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무림의 패권다툼에 개입한 바가 없다 보니 사대비문으로 꼽힘에도 불구하고 사자검전에 대해 자세히 아는 무림인은 거의 없다.

하지만 사자검의 전인들은 세상에 뜻을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영합하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결국 세상에서 배척을 당해 말년에는 쓸쓸히 창평곡에 돌아와 생을 마치곤 했다.

명재상(名宰相)이었던 제이대 우승유는 물론이고 제칠대 조개지(趙介志)는 왕공(王公)이었음에도 끝내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그들 중에서도 제십삼대 진룡은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버리고 창평곡에 들어왔으며 다음 대 전인조차 지정하지 않고 외롭게 살다가 죽은 사람이다.

 

진룡은 백남빈. 강미루와 팔십년 정도의 시차를 두고 살았었다.

진룡의 유해 앞에 남겨진 사연은 구구절절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는데 그가 남긴 검결에는 실용적인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다른 전인들의 검결은 대부분 추상적이고 뜬구름 잡는 듯한 내용이었다.

그에 반해 진룡의 검결은 비록 염세적인 분위기에다가 고독과 허무가 느껴지긴 하지만 이해가 쉬운 편이었다.

그래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의 사자검결 다음으로 진룡의 검결을 많이 본 터였다.

이 진룡이란 인물의 신세는 실로 파란만장하여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이 동정하고 있었다.

 

***

 

진룡은 원(元)말 반란군의 우두머리 중 한명이던 한왕(漢王) 진우량(陳友諒)의 넷째아들로 자는 거비(去非), 호는 낙이(樂而)였다.

진우량이 홍건적(紅巾賊)에 몸을 담고 있을 무렵에 얻은 넷째아들 진룡은 날 때부터 눈이 부리부리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대장군의 태(態)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또한 불과 사, 오세때부터 시(詩)를 짓는 총명을 드러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진룡은 자라면서 시문에 더욱 능해져서 무인으로 키우려는 부친과 뜻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열일곱 살 때 아버지 진우량과 포로들의 처우 문제를 두고 큰 의견 충돌을 빚었다.

분노한 진우량은 칼을 뽑아 진룡을 죽이려 하였으나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내치는데 그쳤다.

부친으로부터 내침을 당하자 진룡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어 문인이 되기로 뜻을 정하였다.

그날로 어머니를 찾아뵙고 작별인사를 드린 진룡은 집을 나와 천하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진룡이 여산(廬山)을 구경하고 내려와 파양호반(鄱陽湖畔)을 거닐 때였다.

한 노파가 땅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 보였다.

진룡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다가가 물어보았다.

"할머니 무슨 일인데 그리 슬프게 우십니까?"

"아이고 애고..."

노파는 더욱 설움이 복받치는지 더 크게 울었다.

잠시 노파가 진정되기를 기다려서 한 차례 더 물었다.

"할머니 영감님이 돌아가셔서 우십니까?"

노파는 훌쩍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젊은이... 영감이 죽었으면 험한 꼴 보지 않고 잘 죽은 거라오."

"...!"

"큰 아들 놈은 일월교(日月敎)에 미쳐 돌아다니더니... 한산동(韓山童;일월교, 또는 명교라 불리는 백련교의 교주) 밑에서 죽고, 둘째 놈은 친구 따라 주원장(朱元障) 밑에 들어가더니 진우량 그 난폭한 놈에게 잡혀서 죽었소."

“...!”

“막내놈만은 끼고 살며 밤낮으로 밖에 내놓지 않았는데 이번엔 장사성(張思誠)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다오. 가면 죽는 것이 전장(戰場)인데 오늘 달려갔으니 다시는 못 볼 것같아서 내 이런다오.”

장사성은 주원장과 마지막까지 패권을 다퉜던 강남의 유력한 군벌이다.

"전쟁에서 나간 군사들이 다 죽는 것은 아니랍니다."

진룡이 위로를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전쟁을 하려면 제 놈들이나 할 일이지... 이것 뺏고 저것 뺏고 하더니 이제는 내 아들까지 빼앗아가? 천하에 벼락 맞아 죽을 것들! 왕은 무슨 왕이고 황제는 무슨 놈의 황제야? 몽땅 도적이고 강도일 뿐이지."

진룡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노파가 실성한 듯이 하는 말이 그른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노파는 진룡이 묵묵히 듣기만 하자 용기가 났는지 벌떡 일어섰다.

"내 이 장사성 놈을 호미로 찍어 죽이고 말테다."

노파는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진룡은 노파가 떠난 자리에 넋을 잃은 듯이 그냥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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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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