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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선도(夢仙圖)를 얻다. (1)

 

 

여름의 짧은 밤이건만, 길고 길게만 느껴지는 밤이 지나가고 동녘 하늘이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뎅뎅뎅!

자은사의 범종이 울리면서 승려들이 일어나 바쁘게 움직이고 예불소리가 멀리멀리 퍼져갔다.

대안탑은 자은사를 굽어보면서 아무 일이 없었던 듯 우뚝 서있다.

헌데 대안탑 입구 근처의 대리석 바닥에는 심하게 우그러진 호리병이 뒹굴고 있다. 간밤에 칠층에서 떨어진 임청우의 호리병이었다.

휘이익!

문득 대안탑 앞으로 마치 신선이 하강하는 듯이 허공을 밟고 천천히 내려오는 인물이 있었다.

육척에 달하는 거구에 소매 자락이 넓은 도포를 입고 있는 노인이었다.

노인의 일신에서 풍기는 웅장하고도 장엄한 기도는 마치 천신을 보는 듯했다.

각진 얼굴의 중심부에 자리한 각진 눈은 태양이 이글거리는 듯하고 천천히 내려서는 전신에서 풍기는 가공할 기도는 보는 이의 숨을 막히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바로 일왕일협삼괴칠절 중에서 일왕과 나란히 일컬어지는 천하의 기인 우협 장백승이었다.

우협 장백승은 어제 낮에 대안탑에 왔었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갔었다.

그러나 서안의 여러 곳을 다니며 찾아본 후 그가 내린 결론은 대안탑이었다.

서안에서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숨을 곳이라고는 대안탑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날이 밝기도 전에 대안탑을 찾아온 것이다.

휘릭!

우협 장백승은 소매를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그의 몸은 대안탑 안으로 귀신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휘이잉!

잠시 후 대안탑 칠층으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며 장백승이 올라왔다.

번쩍!

동시에 한줄기 홍광이 빛살같은 기세로 장백승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한낱 미물이...”

장백승의 눈이 횃불같은 광채를 내쏘았다.

순간 그를 향해 날아오던 홍광이 기겁하며 뚝 떨어져 내리더니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장백승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는 실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불상들이 처참히 훼손되고 키 큰 향로가 두 쪽이 나서 뒹굴고 있다.

그 난장판 가운데 두 구의 시체와 한명의 소년이 한 덩이가 되어 누워 있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도 한 참상이건만 장백승의 얼굴에는 전혀 놀란 빛이 없다. 마치 원래부터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다.

예상대로 여기에 있었군!”

장백승은 중얼거리며 한쪽 손을 슬쩍 뻗었다.

!

고색창연한 청강(靑鋼) 보검이 한쪽 구석으로부터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뚜벅뚜벅!

장백승은 무거운 걸음으로 걸어가 임청우를 안아 올렸다.

쉬익!

그때 다시 홍광이 그를 향해 날아왔다. 임청우가 누워있던 바로 밑에서였다.

번쩍!

하지만 그 홍광은 이번에도 장백승의 눈빛을 받고는 찔끔하며 도망쳐버렸다.

쉬쉬쉬...

그래도 홍광은 장백승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홍광은 물론 간밤에 대안탑 밖으로 떨어졌던 척포였다.

천하 독물들의 제왕이며 뱀들의 제왕이라 불리우는 금관혈린사 척포였지만 우협 장백승의 눈빛에 질려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장백승은 척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임청우를 석가여래의 무릎 앞 단상에 내려놓았다.

인연이 끊어지지는 않았구나. 하지만 억지로 맺을 수는 더욱 없는 일... 네 몸 속의 독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다음의 인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장백승은 사방이 웅웅 울리는 그 특유의 음색으로 중얼거리며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의 큰 손바닥에 임청우의 왼쪽가슴이 완전히 덮여버렸다.

그 사이에도 척포는 계속 장백승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미 두껍게 얼음이 얼어있는 마면혈도의 시체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은 채 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철선동시 사이에서 장백승의 빈틈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백승은 무방비하게 등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척포는 장백승의 등을 노려보기만 할 뿐 감히 덤벼들지는 못했다.

장백승의 몸에서 뿜어지는 장엄한 기도는 척포를 자꾸 주눅 들게 만든다.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것일까?

독이 오를 데로 오른 척포는 쉬익! 하고 푸른 독기를 뿜었다.

화악!

푸르스름한 독무(毒霧가 피어오르며 장백승의 등 뒤로 몰려갔다.

푸스스!

그러나 장백승의 몸 두자 밖에 이른 독무는 태양에 녹는 안개처럼 사르르 사그라져버렸다.

척포가 독무를 내뿜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척포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사사삭!

그놈은 빠르게 꽁무니를 흔들며 목이 잘려진 아미타여래가 있는 단상 밑으로 숨어버렸다.

척포가 생각할 때 우협 장백승은 인간같지도 않은 인간이었다.

팔백 년 넘게 산 척포는 용이 되기 위해 천하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도(修道)해왔었다.

각 명산에 사는 갖가지 이물(異物) 괴물(怪物)을 만나보았지만 그중 어느 하나 척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물론 척포에게도 두려운 대상은 있었다.

농산에서 수도할 때 만난 어떤 인간은 반 쯤 용이 된 척포에게도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 인간 외에 다른 인간을 두려워해본 적은 없었던 척포다.

헌데 오늘 또 한명 척포를 주눅 들게 만드는 인간을 만난 것이다.

 

간밤에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하지만 그 때문에 다시 색혈지독에 중독되고 말았다.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터득한 덕분에 그의 몸속에 있던 색혈지독과 빙골산의 독기는 일제히 마면혈도의 몸으로 옮겨가 버렸었다.

임청우는 그후 무쌍층층공을 이용하여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도 흡수했었다.

이에 철선동시는 최후의 발악으로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에 주입했었다.

무쌍층층공과 용조수 공력은 융화되면서 용조층층공(龍爪層層功)이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공력이 되었다.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공력을 모두 흡수한 덕분에 그 용조층층공이 단번에 육층통(六層通)에 이르렀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색혈지독에 의해 피가 굳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임청우의 몸은 충만한 공력에도 불구하고 싸늘히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의 상태를 살펴본 우협 장백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하니 저 두 놈이 죽어가면서 이 아이에게 공력을 주입해 주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돌아 본 후에 다시 임청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런 공력은 저 두 놈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헤어진 지 불과 보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기이한 공력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하더라도 그간의 사정을 모르는 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장백승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자 머리 쓰는 것을 포기했다.

대신 임청우의 신발을 벗겨 낸 후 발가락을 툭 쳤다.

그러자 발가락 끝이 갈라지면서 검붉은 피가 붕어 알처럼 송골송골 올라왔다. 도저히 피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진득한 농도다.

색혈지독이 임청우의 몸속 피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번쩍!

다음 순간 장백승의 몸에서 갑자기 강렬한 백광이 일어났다.

화악!

그 빛은 이내 임청우의 몸으로도 퍼져나갔다.

그러자 임청우의 몸이 부르르 떨리며 얼음이 녹듯이 축 쳐졌다.

츠츠츠!

이어 임청우의 칠공으로부터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장백승의 몸에서 일어난 강렬한 기운은 임청우의 몸에서 독연기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장백승은 극렬한 양강기공으로 색혈지독을 완전히 태워버린 것이다.

마침내 임청우의 피부가 원래의 색을 회복했다.

장백승은 임청우의 가슴에서 손을 떼면서 임청우의 얼굴을 슬쩍 쓰다듬었다.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장백승은 임청우의 진면목은 보지 못했었다. 임청우의 얼굴에 옅긴 해도 검댕이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츠츠츠! !

장백승의 손이 스쳐지나가면서 검댕이 마치 허물이 벗겨지듯이 일어나 머리 뒤로 떨어졌다.

짙은 검댕이 제거되자 관옥같이 희고도 붉으스레한 동안이 드러났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지만 오관은 반듯하고 온화하면서도 곧은 심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한, 좀처럼 보기 드문 미소년의 얼굴이다.

한데 하늘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던 장백승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뚫어지게 임청우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장백승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체 어느 쪽인가? 조천영(趙千英)인가 아니면 유소기(劉蘇起)인가? 그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이 아이는 그 두 사람을 닮았으니... 게다가 이 아이의 근골은 노부가 세 번 째로 보는 놀라운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건데 그 두 사람 중의 누군가의 자식이 틀림없을 듯한데...”

조천영은 일왕(一王)인 금포염왕의 이름이다.

장백승은 일찌기 금포염왕을 만났을 때 그에게 진심으로 감탄했었다.

그리고 칠절의 우두머리인 검주 유소기를 보았을 때 훗날 언젠가는 금포염왕에 필적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 놀라워했었다.

한데 이번에는 그 두 사람을 모두 닮았으면서도 그 두 사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근골을 가진 임청우를 만난 것이다.

임청우의 근골의 뛰어남은 그가 농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알아본 바이지만 임청우의 얼굴마저 금포염왕과 검주 유소기를 닮았을 줄은 미처 생각도 못했다.

장백승은 여기에는 무슨 알지 못할 어떤 연유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임청우의 아버지가 될 만한 자로 조천영과 유소기 외에는 더 꼽을 자가 없다.

이해할 수 없는 일...”

장백승은 나직히 중얼거리며 청강검을 임청우의 가슴에 놓아주었다.

네가 깨어나면 자세한 것을 물어보고 싶지만... 너를 구해준 것이 내 제자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것 같아서 이만 떠난다.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아마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장백승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밖은 이미 훤하게 밝았고 아침 햇살이 문틈으로 새어들어 오고 있다.

문득 엇갈린 지붕으로 빠져나가려던 장백승이 손을 흔들었다.

휘익!

장백승의 소매에서 두 줄기의 뜨거운 바람이 일어나더니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체를 향해 뻗어갔다.

장백승의 몸은 지붕 밖의 하늘로 사라져 버렸고 그가 떨친 뜨거운 경풍은 두 구의 시체에 이르렀다.

사르르르---

그러자 놀랍게도 두 마귀의 시체는 한 무더기의 불꽃이 되어 피어올랐다.

푸스스스!

시체들은 연기도 내지 않고 타오르더니 마침내 재조차 남기지 않고 흩어져 버렸다.

우협 장백승!

백전백패(百戰百敗), 만전만패(萬戰萬敗)의 대영웅 우협 장백승,

결코 어느 누구에게도 이길 수 없지만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는 그의 측량할 수 없는 가공할 무공의 한 측면이었다.

헌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시신이 재가 되어 흩어진 자리에는 여전히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무쇠 토막이 하나씩 있었다.

!

두르고 있던 띠가 터지면서 두 개의 무쇠 토막은 두루마리가 펼쳐지듯 펼쳐졌다.

환하게 펼쳐진 그것은 달아오른 얇은 철판 같은 것이었다.

한데 그 철판 위에는 백색으로 빛나는 글자들이 있었다.

그 글자들은 철판이 식어감에 따라서 점차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식어버린 철판은 다시 도르르 말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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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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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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