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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3)

 

 

<이놈아, 잘 듣고 내가 말하는 대로 해라.>

 

마면혈도가 처량한 음성으로 전음입밀을 보낸다.

 

<성공한다면 살 가능성도 있을 것이고 실패한다면 우리 둘은 저 시체 놈의 밥이 될 것이다. 저 얼어 죽은 시체 놈은 사람의 간과 심장을 파먹는 걸 아주 좋아하니 죽어도 우린 도살 될 것이다.>

 

순간 임청우는 소름이 쫘악 끼쳤다.

잡아먹힌다는 것은 죽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전율이다.

 

<무쌍층층공은 정신을 온화하게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눈 꼬리가 미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재빨리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외기 시작했다.

 

<밀실에서 문을 잠그고 편안하게 자리를 편 다음, 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베개 높이는 두치 오푼으로 하여 반듯이 누워 눈을 막고 기를 가슴속에 넣어 닫아 버리고, 자그마한 털을 코위에 올려놓아도 떨어져 내리지 않을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삼백 호흡을 거듭하여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며 마음속에 생각하는 것이 없게 한다.>

 

임청우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당신이 나를 성가시게 하지 않으면 지금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이 순간도 나는 정신이 온화하다. 하지만 뒤의 소리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득이 있겠는가? 당신이나 나나 죽게 될 것은 정한 이치 같은데...)

임청우가 무슨 생각을 하든 간에 마면혈도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계속 들려준다.

 

<아침 저녁은 음양이 바뀌는 시간이니, 아침의 오경초(五更初)에 난기(暖氣)가 이르게 되고, 눈이 떠지는 것은 상생(相生)의 기가 오르는 것이며, 이름하여 양기가 동하고 음기가 소멸한다고 한다. 저녁의 일몰 후에는 냉기가 심하고 추위가 몸에 스며, 침실로 들어가 앉아, 잠을 자는 것을 하생의 기가 이른다고 하여 양기가 소멸하고 음기가 동한다고 한다. 오경초에는 난기가 이르고 해가 진 뒤로는 냉기가 이른다. 음양의 기는...>

 

마면혈도의 이마에 땀이 베인다.

그러나 그 땀은 금방 얼어붙어 얼음이 되어 버린다.

마면혈도의 음성은 가늘어지고 점점 떨려 발음이 온전하지 않다.

임청우는 차츰 마면혈도의 말에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마면혈도가 안간힘을 다 쓰고 있다는 것이 그 음성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게다가 마면혈도의 무쌍층층공은 어떤 면에서는 불심연화지의 구결과도 비슷한 곳이 있기도 했다.

철선동시는 막바지 공격에 힘을 쏟고 있다. 밀랍같이 창백하던 그자의 얼굴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돋아나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 되었다.

죽이려는 자는 죽이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죽어가는 자는 최후의 반전을 기대하며 모든 힘을 그쪽으로 쏟고 있다.

마면혈도는 오직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운용하여 철선동시의 공력을 흡수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된다면 철선동시의 공력은 마면혈도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따라서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와 함께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상, 마면혈도도 임청우의 생명 따위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도 단지 임청우를 이용할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진기를 운용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만 되면 마면혈도는 임청우의 무쌍층층공을 최소한 사성(四成)까지 성취시켜 줄 수 있을 것이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는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을 임청우의 공력으로 흡수함으로써...

원래 무쌍층층공은 무림의 절정신공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마면혈도는 태산(泰山)의 한 석실에서 우연히 그 비급을 얻어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자질이 무공을 따라가지 못해 칠성(七成)에 달한 후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았다.

만약에 팔성(八成)이 되기만 해도 그의 무공은 칠성일 때의 두 배가 되고, 구성(九成)이 되면 칠성의 네 배가 되는 것이니 무쌍층층공의 위력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무림사에 있어서 무쌍층층공을 팔성이상으로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무쌍층층공의 존재가 무림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얻은 사람이 무쌍층층공의 매력에 푹 빠진 때문이다.

무리하게 일성이라도 더 익히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져 죽거나 십이성 다 익히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다가 늙어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마면혈도가 무쌍층층공을 무림으로 들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하고 오래 참지 못하는 성격 덕분이었다.

만약 임청우가 무쌍층층공을 익히기만 한다면 이미 그의 몸속으로 들어와 있는 철선동시의 공력은 꼼짝없이 임청우의 것으로 융화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제발... 이 멍텅구리 같은 놈아, 한 마디라도 알아듣고 진기를 움직여 봐라.)

마면혈도는 구결을 외우면서 속으로는 애원하고 있었다.

 

<...음양의 기는 이와 같이 번갈아 가며 출입을 걷듭하여 천지, 일월, 산천, 해하, 인축, 초목 등 일체 만물은 그 체내에서 대사를 거듭하여 한시도 쉬지 않고, 그 일진일퇴함이 꼭 밤낮의 교대나 해수의 간만과 흡사하다. 이것이 천지순환의 도다.>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들으며 임청우의 생각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이 괴물이 지금 하고 있는 말은 성인(聖人)들의 말씀과 진배가 없구나.)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끔찍한 상황도 잊어버리고 마면혈도가 읊는 구결에 심취되어 갔다.

무쌍층층공의 구결들은 그가 읽은 다른 책들, 그리고 불심연화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같으면서도 생소한 느낌을 주어 호기심을 강하게 끌어당겼다.

깊이 심취한 만큼 마면혈도가 외는 구결은 한자도 빠짐없이 임청우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재워지고 있었다.

임청우가 모르고 있던 또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한데 마면혈도의 음성은 급격히 가늘어지면서 알아듣기가 힘들어졌다.

마면혈도는 임청우가 구결에 따라 조금이라도 정신을 모아주기 만을 바라며 스스로 생각해도 그다지 가망 없는 일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이미 그자의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하지 못할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

공력으로 구사하는 전음입밀에 이어 배를 움직여 소리를 내는 복화술(腹話術)을 쓰고 있었지만 이제는 펼치기가 어려워졌다.

반면 임청우의 몸에 쌓였던 서리는 거의 사라지고 단지 얼굴과 피부만이 거무스름할 뿐인데...

 

<아침마다 오방(午方:남방(南方)을 말함)을 향하고, 두손을 무릎위에 놓고, 천천히 무릎 관절을 누르며, 입으로부터 탁기(濁氣)를 내뱉고... 현목(玄牧)의 문(), 천지(天地)의 근()은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이므로...>

 

문득 여기까지 들었을 때 임청우는 자신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이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몸속을 흘러 다니던 기이한 힘이 전혀 종잡을 수 없는 것으로 느껴졌었다.

헌데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듣고 있는 동안 그 힘들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마치 손을 갖다 대면 만져질 것같은 실체로 느껴졌다.

기분뿐이겠지만 자신의 속이 훤하게 보이는 것같기도 하다.

임청우는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느끼며 경이에 눈을 떴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웠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철선동시의 거친 공력은 자신의 몸을 거쳐서 마면혈도를 공격하고 있지만 이제는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몸속의 찌꺼기가 씻겨 나가는 듯이 시원한 느낌마저 들었다.

철선동시의 공력은 임청우의 몸을 아무 저항없이 통과하여 마면혈도의 몸에 그대로 이르렀다.

동시에 임청우의 몸속에 남아있던 빙골산의 독기와 색혈지독도 그 힘을 따라서 마면혈도의 몸으로 깡그리 옮겨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 임청우의 몸이 빈 대롱이 되어 들어온 물을 모두 다른 쪽 끝을 통해 흘려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임청우의 내관(內觀:속을 봄)이 시작되면서 막혀있던 빈 대롱이 뻥 뚫리며 거침없이 물이 흘러가는 것과 똑 같았다.

 

<...이리하여 태화(太和)의 기가 기해(氣海)에 이르고 자연히 용천에 이르면 온몸이 흔들리고 두 다리도 오그라져 굽게 되고 자리에 앉으면 마디마디가 우두둑하고 소리가 나게 된다. 이것을 일층통(一層通)이라고 한다. 일층통에서 이층통으로 계속 연성하여 삼층통에서 오층통에 이르게 되면...,십이층통에 이르게 되면 마음 속에 허무함을 유지하고 유연(悠然)한 기도 갖추어져서 덕으로는 대자연과 합하고 도로는 천지와 융화되리니...>

 

마면혈도의 음성은 점점 사그라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생명도 끊어져 버린 것이다.

(질긴 말대가리... 이제야 겨우 죽었구나!)

마면혈도가 죽은 것을 확인한 철선동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공력을 거두어 들여 자신의 몸 속의 독기를 임청우의 몸으로 옮기려고 했다.

한데 그 순간 임청우는 마면혈도가 전했던 구결을 다시 한번 천천히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몸 속에 있던 철선동시의 용조수의 공력이 철선동시의 통제를 벗어나 임청우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팔기경(八氣經)을 따라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수만 마리의 벌들이 여왕벌의 뒤를 쫓는 것처럼 걷잡을 수 없는 기세였다.

(!)

철선동시는 대경실색했다.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경략을 돌면서 그의 공력으로 융화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십이정경(十二正經)이란 수태음 폐경, 수양명 대장경, 족양명 위경, 족태음 비경, 수소음 심경, 수태양 소장경, 족태양 방광경, 족소음 신경, 수궐음 심포경, 수소양 삼초경, 족소양 담경, 족궐음 간경의 열 두가지 경략을 말하고,

팔기경(八奇經), 또는 기경팔맥(奇經八脈)이란 양교맥, 음교맥, 양유맥, 음유맥, 대맥, 충맥, 독맥, 임맥의 여덟 경략을 말한다.

순식간에 화선지에 엎질러진 먹물이 번져가는 기세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이 임청우의 모든 경맥 속으로 스며들어가버리자 철선동시는 비명을 질렀다.

크아!”

하지만 그것은 그의 목구멍에서 새어나오지 못했다.

모든 공력으로 마면혈도를 공격했던 철선동시다.

헌데 그 공력들이 회수되지 못하고 그만 임청우에게 빼앗겨 버린 것이다.

!

마침내 모든 공력이 소진되어 버리자 철선동시는 허옇게 눈을 까뒤집으며 죽고 말았다.

임청우는 자신의 경맥을 따라서 도는 철선동시의 용조수 공력에 놀라지 않았다. 그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익히면서 내공이란 어떤 것인 가를 어렴풋이 알았던 것이다.

더우기 그의 몸속을 분탕질 치면서 돌아다니던 용조수의 공력이니 더욱 낯설지 않았다.

무쌍층층공의 구결을 이용해 용조수 공력을 거침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버렸다.

소림사의 칠십이절기 중 하나인 용조수의 공력은 과연 대단한 것으로 임청우는 단숨에 무쌍층층공을 육층통(六層通)까지 익혀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공력은 무쌍층층공으로 운용되되, 그 속성은 용조수의 공력인지라 세상에 전혀 없는 엉뚱하고도 기이한 것이 되어버렸다.

뚜두둑! 뚜둑!

임청우의 몸에서 끊임없이 뼈마디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이 오그라들었다가 펴지는가 하면 몸이 풀쩍 뛰어올랐다가 떨어지곤 했다.

그 하나하나가 무쌍층층공의 일성 일성 터득해가면서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마면혈도가 몸을 자벌레처럼 구부릴 수 있었던 것도 무쌍층층공을 익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어느 틈엔가 임청우의 등에 박혀있던 철선동시의 왼쪽 팔은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 급격한 움직임을 보이던 임청우의 몸은 사시나무처럼 바르르 떨리다가 잠잠해졌다.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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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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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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