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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보도를 얻다

 

 

(제 정신으로 날 보는 게 민망해서 몰래 떠나셨구나.)

고검추는 아쉽고 착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옥여상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옥여상은 냉혹하고 도도하다고 알려진 마도무림의 여걸이다.

헌데 지난밤에는 어린 소년과 차마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짓을 했다.

옥여상이 어째서 먼저 떠났는지 짐작하며 고검추는 그녀가 남긴 글을 읽어 내려갔다.

 

<북해에 가서 만년화리를 잡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중략-

담세황은 교활하면서도 악독한 심보를 지닌 놈이다. 네가 고모와 각별한 사이라는 사실을 그놈에게 들키면 절대 안된다. 마천루의 무공을 가르쳐주고 싶지만 포기한 것도 담세황이 눈치 챌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내가 독자적으로 만든 삼초(三招)의 무공은 남긴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만 있으면 담세황과 싸워도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만 줄이거니와 고모의 모든 것은 영원히 네 것임을 잊지 말거라.>

 

옥여상의 글은 일단 그렇게 끝났다.

그 글 아래쪽으로는 세 가지 초식이 적혀있었다.

혈전삼식(血戰三式)-!

섬뜩한 이름을 지닌 그 초식들은 옥여상이 스승인 구천마야에게서 전수받은 무공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구천마야는 마도 무림의 전설적인 마인들은 구마(九魔)중 혈마(血魔)라는 인물의 후손이다.

혈마는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적이 죽거나 항복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멈추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때문에 혈마보다 객관적으로 강했던 인물들도 혈마와 싸우는 것을 꺼려했다.

혈마라는 이름은 싸우면 늘 피투성이가 되기 때문에 붙여졌으며 전귀(戰鬼)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혈전삼식은 바로 그 싸움광인 혈마가 남긴 무공의 정수다.

비록 삼초에 불과하지만 혈전삼식으로 죽이지 못할 적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사실 혈전삼식은 초식이라기보다는 내공의 운용비결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내공을 가장 효과적으로 운용하여 적을 쓰러트리는 수법이 혈전삼식인 것이다.

그 때문에 혈전삼식은 검법, 장법, 수법등 모든 무공으로 변형이 가능하다.

 

-분뢰개벽(分雷開闢)

-천수낙백(千手落魄)

-무량철영(無量鐵影)

 

이것이 혈전삼식이다.

분뢰개벽은 공격 속도를 극대화시켜주는 운공비결이다.

분뢰개벽으로 시전되는 초식의 빠르기는 <번개를 나눈다(分雷)>는 표현이 과장이 아닐 정도다.

천수낙백은 펼치는 초식에 무수한 변화를 가능케 해주는 운공비결이다.

무량철영은 중압(重壓)의 비결이다.

무량철영으로 구사되는 초식은 산을 밀어버리고 집채만한 쇳덩이를 박살내는 파괴력을 지닌다. (... 대단하다.)

혈전삼식을 읽어본 고검추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 고검추가 보기에도 혈전삼식은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혈전삼식을 만드신 것만 봐도 고모님은 일대종사로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고검추는 새삼 옥여상에게 감탄하는 마음이 생겼다.

옥여상이 무림인들에게 마녀로 불리며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도 이해가 갔다.

(고모님...)

고검추는 옥여상이 글을 남긴 속옷자락에 얼굴을 묻었다.

속옷자락에 옥여상의 그윽한 살내음이 배어있는 게 느껴진다.

(제발 돌아가시지 마십시오. 그래야 검추가 고모님께 입은 하해 같은 은혜를 갚을 기회가 있을 테니...)

고검추의 두 눈에 물기가 서렸다.

자신에게 모든 것을 준 옥여상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잠시 후 옥여상의 속옷 자락를 얼굴에서 뗀 고검추는 옥여상이 남긴 마지막 물건을 살펴보았다.

두 번 접혀있는 손수건이 그것이었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듯 제법 빛이 바랜 손수건에는 어지러운 도형(圖形)이 그러져 있었다.

장보도-!

그 손수건이야말로 사신검의 하나인 복마신검이 감추어진 장소를 표시해 놓은 장보도였다.

그 장보도를 그린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아버지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복마신검은 반드시 내 손으로 찾아낸다. 그래야만 아버지의 신상에 얽힌 추문을 해결할 수 있을테니...)

고검추는 장보도를 살펴보며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어머니가 주신 것도 있었지.)

장보도를 살펴보던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이 준 나무상자를 떠올렸다.

납작한 나무 상자는 고검추가 누워있던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나무 상자 옆에는 천으로 감싼 초혼전도 놓여있다.

달칵!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나무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나무상자 안에는 륜()이 하나 들어 있었다. 직경 반 자 정도 크기에 중앙에는 한 마리 붕조(鵬鳥)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륜이다.

붕조의 조각은 아주 정교하여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한데 눈 부위에 타는 듯 붉은 구슬이 박혀있어서 더욱 더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

(나를 낳아주신 분의 출신이 붕조를 상징으로 삼는 가문일까?)

륜에 새겨진 붕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고검추는 염두를 굴렸다.

그 륜이야말로 자신의 외가가 어딘지 밝혀줄 유일한 단서인 것이다.

(아름다운 보석이다. 병기라기보다는 의식에 사용한 제기가 아닐까.)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붕조의 눈에 박힌 붉은 구슬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철컹!

그러자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저 둥그스름하기만 하던 륜의 외곽으로 톱니바퀴 형태의 칼날들이 여섯 개 튀어나왔다.

그 칼날들은 종이처럼 얇았으며 얼굴이 비칠 정도로 새파란 윤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

고검추는 칼날들에서 번지는 으스스한 한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그는 한눈에 그 톱니바퀴 모양의 칼날들이 무쇠도 흙 베듯 하는 날카로움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훌륭한 물건이다. 이걸 사용하는 방법만 알면 유용한 호신수단이 되겠다.)

고검추는 눈을 빛내며 륜에 박혀있는 붉은 구슬을 다시 한 번 눌렀다.

기이잉! 철컥!

그러자 튀어나와있던 칼날들이 다시 륜 안쪽으로 사라졌다.

(칼날을 수납하는 방법을 알았으니 시간 날 때마다 사용하는 방법을 연습해야겠다.)

고검추는 륜을 다시 나무 상자에 넣었다.

(이젠 떠날 때다.)

고검추는 륜을 넣은 나무상자에 이어 옥여상이 남긴 장보도와 편지, 헌월태을경을 챙겨 품속에 갈무리 했다.

떠날 준비를 마친 고검추는 일어나 석실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바닥에 깔린 마른 풀 여기저기에 묻어있는 핏자국이 들어왔다.

(고모님과 보낸 지난밤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자신을 어른으로 만들어준 은발마희 옥여상을 떠올린 고검추는 새삼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어 그는 양모 당혜선을 떠올렸다.

사신각주에게 무참히 고문당한 후 청룡탄으로 투신한 당혜선을 생각하자 고검추의 눈 꼬리가 저절로 경련을 일으켰다.

(편히 잠 드십시오 어머니! 사신각주는 소자의 손으로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습니다.)

고검추는 눈을 감고 합장하며 맹세했다.

양모에 대한 추모까지 마친 고검추는 동굴 입구로 갔다.

등나무 넝쿨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젖혀 동굴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지만 주변에 누가 있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전한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동굴을 나섰다.

어느덧 해가 동쪽 산 능선 위로 한 뼘 넘게 떠올라 있었다.

탁탁!

주변을 살피며 고검추는 계곡 입구를 향해 달려갔다.

곧 고검추의 모습은 계곡에서 사라졌다.

고검추를 어린 소년에서 어엿한 사내로 만들어준 동굴에는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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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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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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