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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장

 

                    마지막 고비

 

 

문은 물론 창문까지 굳게 닫혀있어서 마차 안은 어둑했다.

강유와 진상파는 마차 안에 설치 된 의자에 마주 앉아 있었다.

양산을 떠난 두 사람은 제왕성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산길로만 이동하여 마두집에 이르렀었다.

하지만 마두집에서 개봉까지는 평지라 마땅히 몸을 숨기며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부득불 두 사람은 마두집에서 마차를 대절하여 개봉까지 온 것이다.

“시간상 곧 개봉에 도착할 거예요.”

마차의 앞쪽을 보는 위치에 앉아있는 진상파가 말했다.

그녀의 품에는 섬전초가 몸통 길이만한 꼬리를 동그랗게 만 채 잠들어 있다.

강유에게 사로잡힌 후 이틀 밖에 안 지났건만 섬전초는 마치 오래전부터 길들여진 것처럼 진상파를 따르고 있다.

수백 년을 산 영물이라 진상파의 남 다른 점을 알아차린 듯 했다.

“개봉은 오대십국(五代十國) 이래 여러 왕조의 도읍이었을 뿐 아니라 수운(水運)의 중심지이기도 해요. 그 때문에 개봉의 분점은 저희 황금성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답니다.”

“개봉분점에만 무사히 진입하면 제왕성의 추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최소한 모용준의 심복들이 허튼 짓을 시도하진 못하겠지요.”

“그렇겠습니다.”

진상파의 말에 강유도 동감을 표했다.

“그나저나 저 때문에 안탕산으로 직행하지 못하고 제법 멀리 돌아가시게 되었군요.”

진상파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가친이 맡긴 일은 완수하고 돌아가던 길이었으니...”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지만 사실 강유의 마음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우와의 대결 과정에서 강유 자신의 정체가 제왕성에 노출되었었다.

제왕성의 보복이 있을지 모르니 한시라도 빨리 안탕산으로 돌아가 아버지에게 경고를 해야만 한다.

“달마독명안의 비결은 완전히 외우셨습니까?”

초조한 속내를 감추기 위해 강유는 화제를 돌렸다.

“외우기는 했는데... 소림사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제가 달마독명안을 수련해도 되는 것인지요?”

진상파는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무림에서 다른 문파의 절기를 허락 없이 익히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그리고 강유가 그녀에게 가르쳐준 달마독명안을 만든 인물은 소림사의 고승 고불선사다.

소림사가 자신들의 절기가 유출되는 것을 병적으로 꺼려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물며 달마독명안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까지 하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고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은 무림인인 저보다 황금성을 이끌어가야 하는 소저에게 더 필요한 능력일 것입니다.”

강유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시늉을 했다.

사실 그는 충동적으로 진상파에게 달마독명안을 가르쳐주었었다.

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달마독명안이 진상파를 위해 만들어진 절기인 듯이 느껴진 때문이다.

“물론 수많은 인간을 상대해야하는 제게 정말 유용한 재주이긴 하지만...”

진상파는 석연찮은 기색을 얼굴에서 지우지 못했다.

달마독명안이 소림사 출신에 의해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곱씹어볼수록 너무도 대단한 비술인 게 느껴져서 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다.

“고불선사께서도 당신이 고심하여 만든 절기가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났다 여기고 흡족해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에요.”

강유가 안심을 시키자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숙이며 말했다.

“고불선사님께 큰 은혜를 입은 셈이니 그분의 딸을 찾는 데 저희 황금성의 능력을 총동원하도록 하겠어요.”

“그래 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강유가 대답할 때였다.

덜컹!

느리지만 천천히 가고 있던 마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

끼이...

그 바람에 강유와 진상파가 움찔했을 뿐 아니라 잠 들어있던 섬전초도 깨어났다.

“무슨 일입니까?”

강유의 자기 뒤쪽의 벽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 벽 뒤가 마부석이다.

 

<밖... 밖에 좀 나와 보셔야겠습니다요 손님.>

 

마부석 쪽에서 전노인의 겁에 질린 음성이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구나.)

직감적으로 변고를 알아차린 강유는 마차 문을 조금 열고 밖을 살펴보았다.

백여 장 쯤 앞쪽에 개봉성의 동문이 보이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려던 우마차들과 사람들이 멈춰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성문 앞에 일단의 무사들이 진을 친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그자들은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마차는 내부를 일일이 확인한 후에야 통과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심각한 정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관병(官兵)들은 아닌데... 어떤 자들이 관도를 막고 검문 중입니다요.”

전노인이 겁에 질려서 앞쪽을 살펴보며 말했다.

(제왕성의 인간들이다!)

강유는 단번에 상황을 알아차렸다.

검문을 하고 있는 자들은 제왕성의 위사들인데 철(鐵)위사 뿐 아니라 그 윗 서열인 동(銅)위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이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직접 검문을 하고 있으며 길가의 조금 높은 곳에는 세 명의 동위사들이 서서 길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세 명의 동위사들중 한명은 바로 동위사대의 대주인 독두태보였다.

외총관 궁무독의 판단에 따라 은(銀)위사대 대주 백월사신은 금릉 방향을 수색 중이고 개봉쪽은 독두태보가 담당한 것이다.

이곳 동문 뿐 아니라 개봉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제왕성의 고수들이 통제하고 있는 중이다.

(전체 인원이 오백 명 정도인 동위사들은 개개인이 철위사대 대주였던 냉혈철심 사우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라던가?)

강유는 조금 연 문을 통해 성문쪽을 살피며 심각해졌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했던 사우에 못지않은 고수가 최소한 세 명이나 더 길을 막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저자는 아마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 뇌종횡(雷縱橫)일 것이다.)

강유는 두 명의 동위사를 거느린 채 눈을 부라리면서 사람들과 마차들을 노려보는 독두태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독두태보는 그 독특한 외양 때문에 멀리서도 알아볼 수가 있다.

(상대가 동위사대 대주라면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필살일초를 쓴다 해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는데...)

강유가 난감해 할 때였다.

“제왕성의 인간들인가요?”

뒤에서 진상파의 음성이 들렸다.

“제왕성 측에서도 소저를 개봉에 들여보내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철위사들 뿐 아니라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가 직접 나서서 검문을 하고 있군요.”

마차의 문을 닫은 강유는 다시 진상파와 마주 앉았다.

“아슬아슬하네요.”

진상파는 아미를 조금 모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개봉이 바로 목전인데...”

“개봉까지의 거리도 있지만... 사실 저를 도와줄 분이 조만간 이곳에 도착할 거예요.”

“그렇습니까?”

진상파의 말에 강유는 흠칫 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저의 몸에서는 백리향(百里香)이 배어있답니다.”

진상파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옅은 홍조를 띤 그녀의 두 볼이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강유였다.

“백리향이라면 백 리밖에 까지 향기가 퍼진다는 꽃 아닌지요?.”

“백리까지는 아니고... 훈련받은 사람이라면 십 리 밖에서도 백리향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어요.”

“그럼 소저의 몸에서 나던 은은한 향수같은 게...”

“저는 유괴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갓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음식에 백리향을 섞어서 먹어야만 했어요. 덕분에 저의 몸에는 백리향이 깊이 배어있어서 어디를 가든 흔적이 남는답니다.”

진상파는 애잔한 표정이 되었다.

귀하고 부유하게 태어난 인생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니다.

철이 든 이래 진상파는 늘 독살과 유괴의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소저를 호위하는 분들이 백리향을 맡으며 접근하고 있겠습니다.”

“아마 거의 접근해왔을 텐데... 자칫 제왕성의 인간들에게 먼저 발견될 수도 있겠어요.”

“그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봐야겠지요.”

덜컥!

강유는 웃으며 다시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무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음이 간다.)

진상파는 강유가 마차에서 나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며 섬전초를 쓰다듬었다.

문이 닫히고 이제 마차 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제껏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해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하나뿐인 핏줄인 나를 강하게 훈육하신 덕분인데... 어제 이후로는 강유, 저 사람에게 저절로 의지하게 되었다.)

닫힌 문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도화 빛으로 물들었다.

강유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평안해지고 몸은 더워진다.

사흘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던 변화다.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인 모양이구나 초아야.”

진상파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르릉!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섬전초도 꼬리를 흔들며 고양이처럼 골골 거렸다.

 

“올라가겠습니다.”

마차에서 나온 강유는 고개를 숙인 채 마부석으로 올라갔다.

“공자! 안에 계시지 않고...”

마부 전노인은 옆으로 물러앉아 강유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죽립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요.”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전노인이 건네준 죽립을 머리에 썼다. 제왕성의 무리들로부터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냉혈철심 사우를 죽인 강유의 용모파기는 이미 널리 배포되었을 것이다.

“답답해서 나오셨는지요?”

“그렇기도 하지만... 이걸 받아주십시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린 강유는 제법 묵직한 돈주머니를 전노인 손에 쥐어주었다.

“삯이라면 이미 과하게 주셨는데...”

전노인은 돈주머니를 두 손으로 받으며 입이 귀에 걸렸다.

“삯을 더 드리는 건 제가 하자는 대로 해주셨으면 해서입니다.”

돈주머니를 챙기던 전노인은 강유의 낮지만 심각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켜야했다.

 

* * *

 

독두태보는 언덕 위에 서서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법 높은 이 언덕은 개봉 성문과 오십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다.

독두태보 뒤에는 동위사 두 명이 서서 관도의 좌측과 우측을 따로 감시하고 있었다.

(총관 말대로 진상파는 개봉으로 행로를 바꿨을 가능성이 크다.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까지는 너무 멀어서 우리 제왕성의 이목에 걸리지 않고 갈 자신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두태보는 언덕 아래를 지나 개봉의 동문으로 향하는 사람들과 우마차들을 살펴보며 생각에 잠겼다.

철위사들이 사람들은 물론이고 모든 우마차의 문을 열어서 꼼꼼하게 검문을 하는 게 그의 눈에 들어온다.

(진상파가 황금성 개봉분점으로 피신할 생각이라면 오늘쯤 모습을 드러낼 게 분명하다. 진상파와 동행하고 있는 소요신군의 아들 놈 역시...)

독두태보가 기필코 진상파와 강유를 포획하고 말겠다는 결의를 다질 때였다.

진상파와 강유를 태운 마차가 마침내 철위사들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 * *

 

두 명의 철위사가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로 다가왔다.

앞쪽에는 검문을 통과한 마차들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가고 있으며 좌우에는 몇 대의 마차가 멈춰 서서 검문을 받고 있었다.

“이 마차에는 몇 명이 타고 있소?”

철위사 중 한명이 마부석에 나란히 앉은 강유와 마부를 예리한 눈으로 살펴보며 물었다.

그자의 동료는 마차의 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 그게...”

전노인은 긴장해서 더듬거릴 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죽립을 깊이 눌러쓴 강유도 팔짱을 낀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실례하겠소.”

마차로 다가간 철위사가 마차의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팅!

팔짱을 낀 자세인 강유가 손 안에 숨기고 있던 동전 하나를 나란히 서있는 다른 마차의 말에게 은밀히 튕겼다.

퍽!

동전은 말의 엉덩이에 깊이 꽂혔다.

히히힝!

순간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번쩍 쳐들고 날뛰었다.

“헉!”

“이놈의 말이 왜 갑자기...”

그 마차를 검문하던 철위사들은 기겁하며 물러섰고 마부는 당황하여 급히 말고삐를 당겼다.

두두두!

하지만 동전이 엉덩이에 깊이 박힌 탓에 고통과 공포에 휩싸인 말은 마차를 끌고 미친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앞서가던 사람들과 우마차들이 기겁하며 길가로 피했다.

“잡아라!”

“저 마차가 수상하다.”

휘익! 휙!

철위사들 몇 명이 미쳐 날뛰는 말이 끄는 마차를 따라 몸을 날렸다.

언덕 위의 독두태보와 두 명의 동위사도 눈을 번뜩이며 그 마차를 주시했다.

팅! 티팅!

그 사이에 강유는 동전들을 연달아 좌우에 서있는 말들에게 튕겨 보냈다.

퍽! 퍼퍽!

강유가 날린 동전들은 여지없이 말들의 엉덩이에 깊이 박혔으며,.

히히힝! 히히힝!

두두두! 콰드드!

동전에 맞은 말들은 미친 듯이 날뛰거나 앞으로 돌진했다.

“헉! 이게 무슨...”

“말들이 미쳐 날뛴다.”

“조심해라!”

검문을 하던 철위사들이 당황하여 이리저리 피한다.

“지금입니다.”

주변의 다른 마차들이 치달리는 것을 확인한 강유가 전노인에게 짧게 말했다.

촤락! 철썩!

그 즉시 전노인은 고삐를 세차게 흔들어 말들의 엉덩이를 때렸다.

히히힝! 히힝!

두두두!

주인이 흔든 고삐에 세차게 얻어맞은 두필의 말이 맹렬히 앞으로 돌진했다.

“흑!”

그 바람에 마차 안의 진상파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 했다.

끼이!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섬전초가 깜짝 놀라며 품으로 파고 들었다.

두두두! 두두!

어느덧 진상파와 강유가 탄 마차를 포함한 십여 대의 마차들이 경주하듯이 개봉의 동문을 향해 폭주하기 시작했다

“전부 잡아라!”

“마차를 멈추게 하라.”

“저 마차들 중 하나에 진상파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휘익! 쐐액!

철위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 마차들을 따라왔다.

팅! 팅!

달리는 마차의 마부석에 앉은 강유는 쥐고 있던 동전들을 모두 좌우로 날려 보냈다.

퍼퍽! 퍽!

그 동전들은 포물선을 그리며 뒤로 날아가 주변의 말과 소들의 몸뚱이로 파고들었다.

상처를 입은 말과 소들은 예외없이 미쳐 날뛰었다.

“조... 조심해라!”

“위험하다. 피해라!”

마차들을 쫓던 철위사들이 기겁했다. 다친 말과 소들이 부리는 난동에 휘말려 버린 때문이다.

두두두! 두두!

추격하려던 철위사들이 허둥대는 사이에 십여 대로 불어난 마차들은 개봉을 향해 돌진해갔다. 마치 마차 경주라도 하듯이...

앞서 가던 우마차와 사람들은 길가로 피했고 맨 처음에 달려간 마차를 추격하던 철위사들도 다급히 몸을 날려 관도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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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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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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