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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의 마음을 모른 죄()

 

 

진룡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인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욕됨을 참고 억지웃음까지 웃어야한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지는 것같았다.

그때 짐은 안풍에 가지 말아야 했다.”

꿈에도 잊어본 적이 없는 예이연의 목소리에 이어 걸직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한림아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장사성이 안풍을 얻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갔던 것인데... 만약 그 틈을 노려서 진우량이 안풍으로 공격해 왔었다면 짐은 꼼짝없이 그에게 천자의 관을 들어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사내는 바로 주원장이었다.

예이연이 주원장의 말을 받았다.

"진우량이 어리석었던 게지요. 그의 막료들중 인물이라 할만한 자는 없었으나 넷째 아들 진룡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었답니다."

"그래? 그런 얘기는 처음 듣는군."

주원장이 몰랐다는 듯이 물었다.

"진룡은 어리석은 아비가 내치는 바람에 강호의 떠돌이가 되었었사옵니다. 하지만 그후 돌아와 파양호대전에는 참가했는데... 만약 신첩의 오라버니가 황상을 그리워하지 않고 진룡의 계책대로 싸웠다면 아마 힘든 싸움이 되었을 것이옵니다."

"...!"

예이연의 말이 쉽사리 믿기지 않는 듯 주원장은 헛기침을 했다.

그러자 예이연이 조리있게 설명을 했다.

"진룡은 황상께서 작은 개미선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거선들의 진속에 같은 작은 개미선들을 포진시키라고 했사옵니다. 거선으로 폐하의 개미선들을 한쪽으로 몰아 붙친 후 작은 배들로 틈을 메꾸어 몰살시켜려고 하였지요."

"진우량의 자식들 중에 그런 인물이 있었다니... 진우량이 그 아들의 반만 되었어도 파양호대전은 쉽지 않았겠군."

주원장이 비로소 감탄하며 말했다.

"결국 오라버니가 폐하를 따르기로 작정함으로 해서 모든 것이 무너지게 되었지요."

그렇게 말하며 예이연이 교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주원장은 그녀를 힘주어 껴안아 주었다.

"그대 오라비의 공이 과연 적지 않군. 짐이 그의 벼슬을 더욱 높여 주도록 하지."

예이연은 주원장을 살짝 밀치고 그의 품을 빠져 나오며 말했다.

"성은이 망극하여이다."

헌데 황제에게 허리 숙여 절을 할 때 그녀는 맞은편 창에 난 구멍으로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나 예이연은 내색하지 않고 주원장에게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폐하! 청이 있사옵니다. 오늘 첩의 심신이 여의치 안사오니 침전을 옮겨 주셨으면 하옵니다."

"귀비가 그러하다면 하는 수 없지만... 아쉬움이 남는군."

주원장의 허락을 들으며 예이연은 힐끗 창을 곁눈질했다.

 

진룡은 처마에 매달려 숨도 쉬지 않고 있었다.

그는 예이연이 자신을 져버렸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고 모든 탓을 예지운에게 돌리고 있었다.

진룡은 주원장이 아쉬워하며 방을 나가자마자 봉창을 밀치고 날아들어가 예이언 앞에 섰다.

()왕자님!”

몸매만으로도 진룡임을 알아본 예이연이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왜 이제야 왔어요? 당신은 내가 주원장 그 늙은 도적에게 수모를 겪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진룡은 매달리며 오열하는 예이연을 힘주어 안으며 목이 메었다.

"아무것도... 난 아무것도 보지 못했소."

진룡의 말은 그녀가 어떻게 지냈던 개의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예이연이 진룡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쓸어주며 말했다.

"오라버니는 당신 말을 새겨듣지 않는 바람에 주원장에게 잡혀 버렸어요. 그래서 제가 인질이 되어 주원장에게 억류되어 있기로 하고 오라버니가 칼을 바꾸어 쥐었던 것이에요. 오라버니는 저 때문에 배신한 거예요. 흑흑흑...!"

예이연이 아무리 좋게 말한다 해도 진룡은 예지운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속내를 숨기며 예이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소 그보다 내 누이들과 조카들은 어디로 잡혀갔소?"

"그분들은 모두 잘 있어요. 제가 주원장에게 빌어서 모두 안전한 곳에서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예이연의 그 말에 진룡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복수도 중요하지만 누이와 조카들의 안위와는 비교할 수 없다.

"우리 함께 도망칩시다. 누이들과 조카들을 데리고 멀리 가서 오손도손 살아가도록 합시다."

진룡의 제안에 예이연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전에 할 일이 있어요. 제가 그냥 도망치면 오라버니가 주원장 손에 죽고 말 거예요. 미리 귀뜸이라도 해주어야하지 않겠어요?"

 

***

 

진룡은 예이연에게 사흘 후 도망칠 준비를 갖춘 후 다시 오겠다 약속하고 그녀의 침실을 빠져 나왔다.

마치 모든 것이 다 해결되기라도 한 듯 마음이 후련해졌다.

 

그런데 궁궐을 빠져 나오기 위해 나무 그림자에 몸을 숨겼을 때였다.

또 한 명의 백남빈한 소녀의 뒷모습을 보고 진룡은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걸어가는 그 소녀는 아무리 보아도 막내누이 진산화(陣珊花)였다.

휘익!

먹이를 노리는 솔개처럼 소녀를 낚아챈 진룡은 궁궐 담장을 날아 넘은 후 미친 듯이 달렸다.

품안에 안겨있는 소녀는 두려움에 질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금릉 외곽 야산에 자리한 어느 무덤 앞에서 진룡은 소녀를 내려놓았다.

"! !"

넷째 오라버니인 줄 알아본 산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다만 훌쩍거리기만 했다.

진룡은 속이 타서 미칠 것만 같았다.

(예이연은 누이와 조카들이 안전한 곳에서 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째서 산화만은 궁궐에 있었단 말인가?)

 

한참을 울던 산화는 날이 밝을 무렵에야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자결했으며 세명의 올캐들은 무창이 떨어질 때함께 자결해버렸다.

큰언니 둘은 주원장의 군사들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다가 수치심을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고 죽었다.

그녀와 바로 위의 언니 산산(珊珊)도 병사들에게 붙잡혔으나 위험한 순간 예지운이 달려와서 구해 주었다.

그리하여 산산과 산화는 예지운과 함께 금릉으로 왔다.

조카들은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금릉으로 온 후 예지운은 본색을 드러내 산산을 겁탈했다.

산화도 겁탈하려 했으나 완강히 저항하자 화를 내며 부하들에게 던져주어 버렸다.

지금 산산은 예지운의 첩이 되어 살고 있고 예지운의 부하들에게 윤간당한 산화는 예이연이 궁궐로 데리고 들어가 하녀로 쓰고 있었다.

공주(公主)의 처참한 신분하락이었다.

막내로 자란 산화는 어리고 겁이 많아 죽을 용기조차 없었다.

이날도 위사들의 밤참을 갖다 주기 위해서 가던 중 진룡이 발견하고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산화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났을 땐 해가 높이 돋아 있었는데, 열다섯에 불과한 산화는 그간의 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이미 어린 티가 하나도 없었다.

눈가의 주름살이 진룡의 마음을 미어지게 했다.

 

내막을 알게 된 진룡은 망연자실했다.

(그녀는... 그녀는 나를 속였구나. 나를 속였구나.)

정에는 약하지만 총명하기 이를 데 없는 진룡이다.

사흘 후 궁궐에서 만나자는 예이연의 약속이 사실은 자신을 잡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애정도 믿음도 모두 분노로 바뀌었다.

 

***

 

진룡은 침묵으로 분노를 삭이면서 산화를 데리고 객점으로 갔다.

술과 만두를 시켜 먹은 후 사자검을 꺼내어 푸른 검신을 닦고 또 닦았다.

온 몸에서 살기가 돋아나 검으로 흘러 들어갔다.

산화는 지친 몸을 침상에 누이고 잠들었다.

고개를 들어 누이를 돌아보는 진룡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다시 밤이 되었다.

진룡은 잠들어 있는 산산에게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서 토닥거려 주고는 사자검을 들고 궁궐로 숨어들어갔다.

예이연의 침소까지 달려가는데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침실의 열린 창문을 통해 단숨에 날아들어가 휘장 뒤에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깔깔거리는 여인들의 소리가 들리더니 예이연과 시녀들이 들어왔다.

"너희들은 나가 있도록 해라."

시녀들을 내 보낸 예이연은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무언가 계산을 하는 듯 했다.

"...! 다섯은 천정 안에 숨고, 둘은 침상 밑에 숨고 밖의 매화 숲에는 궁수(弓手)들을 숨겨 놓는 다면 제 놈이 아무리 날고 기는 고수라할지라도 꼼짝 못할 거야."

예이연은 중얼거리며 침상에 털썩 걸터앉았다.

"진우량은 이길 가망이 없었어. 그리고 진룡은 재주는 있었지만 황제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니 나를 행복하게 해주진 못했을 거야. 나는 황후가 되는 것을 바랐는데...

하여간 파양호대전에서 전향하길 잘 했어. 이겼어도 황제는 그의 형이 되고 그는 나 보고 무슨 곡에 가서 살자고 할 게 뻔했으니까."

휘장 뒤에 숨어 있던 진룡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예이연이 허영과 사치심으로 가득 한 여자였다는 사실을 자신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다시 숨어들었을 때는 예이연을 보자마자 처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남은 잔정이 그로 하여금 살수를 쓰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었다.

그랬는데 예이연의 속내를 엿보게 되자 남은 정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휘장을 헤치고 불쑥 그녀 앞에 나섰다.

"!"

예이연이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마마님! 무슨 일인가요?"

밖에서 시녀들이 황급히 묻는 소리에 예이연은"... 쥐가...!" 하고 얼버무렸다.

그리고는 애써 당황을 감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진룡에게 물었다.

"당신 언제 왔어요."

"!"

진룡은 짧게 대답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예이연이 덧옷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지금 떠나요. 당신이 와주어서 기뻐요."

진룡은 가만히 서있고 예이연은 한쪽 손으로 그의 옆구리를 감싸며 밖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녀의 소매 속에 들어 있는 오른손에는 언젠지 모르게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당신, 왜 이러는 거예요. 빨리 여기서 나가요."

예이연은 묵묵히 서있는 진룡을 재촉하는 척하며 오른손의 단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어 올렸다.

번쩍! 싸악!

밑에서 기습적으로 베어 올라오는 검은 피하기가 가장 어렵다.

진룡은 빠르게 물러섰으나 단검의 끝이 스치면서 가슴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죽엇!”

기습이 실패로 끝나자 예이연은 이를 악물며 다시 단검으로 진룡의 목을 노리고 찔렀다.

과연 미녀장군이란 이름에 손색이 없는 신랄한 솜씨였다.

하지만 그 정도 손속은 대비하고 있는 진룡에게 통하지 않는다.

자객이다!”

두 번째 공격도 진룡이 간단히 피해버리자 예이연은 크게 소리치며 창문으로 뛰쳐나갔다.

삐익! !

그녀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위사들이 몰려들었다.

스르릉!

진룡은 그제야 사자검을 뽑아들었다.

슈육!

검을 치켜들면서 내딛은 한걸음에 예이연을 따라잡았다.

번쩍!

그리고 예이연이 바닥에 발을 대기도 전에 비스듬히 목 왼쪽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베어버렸다.

위사들도 뛰어오면서 보았으나 실로 전광석화같은 솜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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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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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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