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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는 금제 속의 마녀

 

 

 

철문 안쪽은 화려하게 치장된 침실로 중앙에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침대가 하나 놓여 있다.

츠으! 츠으!

헌데 그 백옥 침대 주위를 한 겹의 시뻘건 빛의 막이 뒤덮여 있었다.

마치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형상인 그 광구(光球) 안에는 한 명의 여인이 누워있다.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여인은 겉으로 들어난 용모로는 도저히 나이를 종잡을 수 없었다.

어찌 보면 앳된 십대의 풋풋한 소녀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인생의 풍파를 모두 겪은 난숙한 중년여인같기도 하다.

이검한은 이제껏 여자라고는 냉약빙 밖에 보지 못했다.

당연히 그는 냉약빙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검한의 그같은 믿음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냉약빙도 물론 천하절색이다. 거령삼왕을 잘못 먹어 어마어마한 거구가 되긴 했지만 그녀가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임은 아무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냉약빙의 빼어난 미모도 백옥침상 위에 누워있는 여인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었다.

침상 위의 여인은 그만큼 아름다웠다.

단순히 아름다운 게 아니라 너무도 아름다워서 보는 이의 혼을 송두리 채 빼놓을 정도였다.

 

-십전완미(十全完美)!

 

여인의 미모는 말 그대로 완벽해서 어느 곳 하나 모자라거나 넘침이 없었다.

그 황홀한 미모에 더해 농익은 관능미를 지닌 육체는 금상첨화 격이라 세상 사내들의 넋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이 정도의 미모라면 다른 여인들은 질투할 엄두조차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이 여인은 중원인이 아니라 색목인(色目人)이었다. 색목여인 특유의 시원시원한 이목구비와 도도하고 기품어린 용모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존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실감하게 만든다.

(... 민망하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을 살펴보던 이검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여인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가벗고 있는 탓에 신비하고도 황홀한 여체가 그대로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 세차게 두근거렸다. 난생 처음 보는 여체의 신비에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냉약빙이 구해다 준 의서를 통해 여자와 남자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 정도는 알고 있던 이검한이다.

하지만 그림으로 본 것과 실제의 여자의 알몸 사이에는 천양지차가 있다.

이검한은 남녀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정의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은 여인의 나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여인의 나신은 아름다웠으며 거부할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커다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한 쌍의 젖무덤은 물풍선같은 탄력을 지니고 있으며 복부는 양지유로 빛은 듯 매끄럽고 기름지다.

미끈한 허벅지와 사이에 자리한 은밀하고도 계곡은 정신을 아찔하게 만든다.

(저 여자가 바로 누란왕후겠구나!)

이검한은 홀린 듯한 눈빛으로 침상 위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렇다! 백옥 침상 위의 여인이 서역제일미인이라 불리는 비운의 여인 누란왕후 흑요설이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건만 놀랍게도 그녀는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누란왕후가 대머리인 줄 몰랐는 걸?)

한동안 흑요설의 알몸을 바라보던 이검한은 고소를 지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한 올의 머리카락도 나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끄럽고 반들거리는 머리는 마치 비구니같이 보였다.

비단 머릿결뿐만이 아니었다.

흑요설의 몸에는 단 한 올의 터럭도 나있지 않았다.

눈썹과 겨드랑이, 미끈한 허벅지 사이의 둔덕에도 한 올의 체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자세히 보면 흑요설의 머리 주위로 희뿌연 재가 쌓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타고 남은 재였다.

어떤 강력한 열기가 흑요설의 몸에서 모든 터럭을 태워버린 것이다.

(저 붉은 화광(火光) 때문인 모양이다!)

이검한은 석실 안으로 들어서며 눈을 반짝였다. 흑요설을 뒤덮고 있는 붉은 화광이 그녀의 몸에서 모든 체모를 태워버린 원인임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

헌데 열어젖힌 철문을 지나 석실 안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흠칫했다. 철문 안쪽에 한명의 인물이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문에 기대앉은 자세로 죽어있는 인물은 타는 듯 붉은 피풍의(避風衣)로 몸을 가리고 있는 승려였다.

삭발을 한 것인지 원래 대머리였는지 모르지만 머리가 매끈한 이 승려는 이목구비가 깊고 선명하다.

천축(天竺) 출신인 듯이 보이는 승려의 몸에 걸쳐진 것이라고는 붉은 빛이 도는 피풍의뿐이다. 헌데 그 피풍의는 만들어진 후 천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깔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이분이 서역사천왕 중 최강자였다는 마화존자시겠구나!”

이검한은 조심스럽게 마화존자의 시신 앞으로 다가섰다.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는 두 가지 물건이 놓여 있었다. 두 자 정도 길이의 자()와 붉은 빛을 토하는 작은 구리거울이 그것이었다.

츠으! 츠으!

구리거울과 자에서는 타는 듯 붉은 주황색의 노을이 번져 나오고 있었다.

특히 두 자 길이의 자는 마치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시뻘건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마화신척(魔火神尺)!

 

시뻘건 자에는 그같은 글이 범문(梵文)으로 새겨져 있었다.

이 두 가지가 마화존자의 유물이로구나.”

이검한은 마화존자의 무릎 위에 얹혀져 있는 자와 구리거울을 집어 들려고 몸을 숙였다.

퍼억! 푸스스스!

헌데 이검한의 손이 두 가지 물건에 닿는 순간 마화존자의 시신이 와르르 무너져 내려 한 줌의 재로 화해버렸다.

이크!”

이검한은 질겁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마화존자의 시신은 완전히 재가 되어 변해버린 후였다.

다만 알몸에 두르고 있던 붉은 색의 피풍의만은 전혀 손상이 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려졌다.

푸스스!

이검한이 보고 있는 가운데 마화존자의 시체는 단순히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리 된 것은 마화존자의 유골이 천 년 넘는 세월 동안 마화신척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열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래전에 재가 되었던 마화존자의 유해는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가 이검한이 건드리는 바람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또 한 번 고인의 유체를 손상시키고 말았구나.”

얼마 전 부주의로 파천도성의 시신을 훼손했던 사실을 떠올린 이검한은 죄책감에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잿더미 아래쪽 바닥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들어왔다.

(이분도 유언을 남겼구나.)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재를 치웠다.

그리고는 잿더미 속에서 드러나는 글을 읽어 내려갔다.

 

<노납 마화존자가 노파심으로 글을 남긴다.>

 

재를 치우자 드러난 글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그 글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이었다.

 

<-(중략)- 요녀의 금강불괴(金剛不壞)를 깨뜨릴 힘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이에 노납은 생명의 근원인 원정지기까지 끌어내어 요녀에게 한 가지 금제를 시전할 작정이다. 마화적멸강막(魔火赤滅罡幕)이라는 마화사원(魔火寺院) 최후의 금법이 그것이다.>

 

마화사원!”

마화존자의 유언을 읽어 내려가던 이검한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마화사원에 대해서는 냉약빙이 구해다준 고서에서 읽은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옛날 천축의 어딘가에 아수라(阿修羅)를 숭배하는 무리가 세운 성전이 있었다.

피와 살육의 화신인 아수라의 권능은 바로 불()이었다.

아수라의 추종자들은 그 아수라를 위해 세운 성전의 이름을 마화성전(魔火聖殿)이라 불렀다.

그러나 천축인들은 마화성전을 마화사원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마화사원에서는 공공연히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人身供養)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화사원은 또 다른 마의 추종자들인 소뢰음사(小雷音寺)와의 쟁패에서 패퇴하여 사멸하고 말았다.

그것이 이천여 년 전의 일이었다.

헌데 그 마화사원의 이름이 뜻밖에도 이곳 서역의 오지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화적멸강막!

 

마화사원의 절기들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지닌 이것은 인간의 생명력을 모조리 불의 기운으로 전환하여 한 겹 강기(罡氣)의 막을 형성하는 비법이다.

일단 그 강기의 막에 휩싸이면 무쇠라도 재가 되어 버린다.

마화존자 역시 다른 세 사람처럼 태반의 내공을 흑요설에게 탈취당한 상태였다. 비록 천붕랑왕의 도움을 받아 흑요설을 기절시키기는 했으나 죽일 힘은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들 서역사천왕의 막강한 내공을 대부분 갈취한 결과 흑요설은 이미 금강지체의 몸이 되어 있었다.

자신의 남은 능력으로는 도저히 흑요설의 숨을 끊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마화존자는 최후의 수단을 이용하여 흑요설을 죽이려 했다.

,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녹여 마화적멸강막을 만들어 흑요설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물론 마화적멸강막으로도 당장 흑요설을 죽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금강지체를 이룬 흑요설이라 해도 오랜 세월 마화적멸강막에 덮여 있다 보면 한줌 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다.

 

<누란왕후 흑요설이 비록 천년의 내공을 지녔다 해도 마화적멸강막 아래서는 채 몇 년을 견디지 못하고 재로 화하고 말 것이다.

이제 이 글을 본 인연자에게 간절히 원하거니와 노납과 누란왕후가 잠든 이 석실을 영원히 봉쇄하여 주길 바란다.

비록 그녀가 희대의 요부이기는 했어도 노납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였다. 하여 함께 영면하여 저승에서나마 원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빌 뿐이다.

수고의 대가로 마화삼보(魔火三寶)를 남기니 충분한 보답이 되리라 믿는다!>

 

마화존자의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마화삼보는 마화존자의 시체와 함께 흩어지지 않고 남은 세 가지의 물건이었다.

 

-마화신척!

-마화경(魔火鏡)!

-적룡풍(赤龍風)!

 

마화신척은 마화사원의 호법지보다. 두 자 남짓한 길이의 그 자() 안에는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극양지력(極陽之力)이 깃들어 있다.

마화경은 아수라의 상징으로 마화사원의 비전 마공들이 숨겨져 있다.

적룡풍은 화룡잠(火龍蠶)이라는 영물이 토한 비단실로 짠 피풍의로 도검불침은 물론 모든 화기를 다스리는 효능을 지녔다.

그 옛날 마화존자는 우연히 마화사원의 폐허에서 마화삼보를 얻어 서역사천왕의 첫째가 될 수 있었다.

 

(이상한데...?)

마화존자가 남긴 유언을 읽은 이검한은 의아한 표정이 되어 백옥침상을 돌아보았다.

마화존자의 유언대로라면 흑요설의 육체는 이미 오래 전에 재가 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비록 온몸의 체모가 소멸되어 버리기는 했어도 흑요설의 몸은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 설마 죽지 않았단 말인가?)

소름이 오싹 끼친 이검한은 침상에 누워있는 흑요설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 저럴 수가!”

그 직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떴다.

스으으!

자세히 보니 흑요설의 몸을 감싼 붉은 노을이 가는 실처럼 변해 그녀의 전신 모공(毛孔)으로 빨려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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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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