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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1)

 

 

(사부...)

척포에게 당하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있던 임청우는 우협 장백승이란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임청우는 이미 장백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스럽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철선동시의 입에서 우협 장백승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온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우협... 그가 왜 나를...”

마면혈도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중얼거렸다.

철선동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냉소를 했다.

“자네는 물론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

마면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가 또 말했다.

“하지만 우협이 검주 유소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겠지?”

마면혈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철선동시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한 발을 턱 걸치며 말했다.

“자네는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만, 우협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 더우기 우협은 지금 자네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는 중이지.”

“우... 우협이 날 죽이려 뒤쫓고 있었다니...”

극도의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린 마면혈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했고 마면혈도도 자신이 사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마면혈도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검주 유소기라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인데... 사부는 그 유소기라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라고도 하고...)

임청우가 의혹에 휩싸여있을 때 마면혈도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철선동시, 자넨 어떻게 우협이 나를 뒤쫓는 것을 알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우협을 만났었네.”

철선동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세 번이나?”

마면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래 세 번! 마지막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네.”

철선동시는 발을 올려놓았던 아미타여래의 머리를 의자삼아 앉으면서 말했다.

“언제... 우협이 언제부터 날 쫓고 있었는가?”

마면혈도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식은땀이 난 모양이었다.

“그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우협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수(漢水)에서였네. 그는 어부에게 자네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고,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굽신거리며 모른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우협은 곧 가버렸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몰래 다가가 그 어부를 죽여 버렸네.”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마면혈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그 어부의 계집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지.”

철선동시의 말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면혈도는 말같이 생긴 추악한 용모 때문에 여자의 환심을 사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만 보면 여염집 규수와 과부, 여승과 처녀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겁탈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면혈도에게 겁탈당하고 죽거나 미쳐버린 여자는 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우협을 만난 건 우리가 함양(咸陽)의 기루에 숨었을 때일세.”

진시황의 궁전이 있었던 함양은 서안의 북서쪽 육십여리 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도 자네는 계집을 끌어안고 뒤엉켜있었는데, 기루 안으로 들어서는 우협을 창가에 앉아있었던 내가 운 좋게 먼저 보았지. 기세로 보아 우협은 우리가 그 기루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네.”

“그날 기루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자네였군.”

마면혈도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두 마두는 검주 유소기를 피하기 위해 농산에서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민산산맥(岷山山脈)을 넘어 한수까지 갔었다.

헌데 한수에 이르렀을 때 철선동시는 유소기뿐 아니라 우협 장백승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급히 방향을 바꾸어 민산산맥을 다시 넘어서 함양으로 갔었으며 그후에 황하 줄기를 따라 내려와 서안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로 우협을 본 건 어디서였는가?”

마면혈도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로 이곳 자은사!”

철선동시의 짧은 대답에 마면혈도는 침묵했다.

 

서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은사를 찾아왔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소기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헌데 철선동시가 또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은사를 도로 나와 근처 객점에서 한잠 늘어지게 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자은사를 찾아온 것인데 철선동시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자은사에 들렀을 때 우협 장백승도 자은사에 있었던 것이다.

철선동시는 장백승이 한번 돌아보고 간 곳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은사의 대안탑을 은신처로 선택했었다.

철선동시의 그같은 생각도 몰랐다니...

마면혈도는 내심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사부가 자은사에 왔었구나!)

임청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협 장백승이야말로 임청우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황을 건드렸었는데...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우협까지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모양이다. 아마 계집들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고 다닌 게 우협을 화나게 했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마면혈도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힐끔 철선동시를 쳐다보았다.

철선동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속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얼어 죽은 놈은 근 한 달 째 내게 선심을 쓰고 있다. 물론 선심을 쓰는 목적은 내 손에 있는 몽선도의 반쪽을 넘겨받는 것이겠지.)

마면혈도는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되지 안돼. 죽었다 깨어나도 몽선도는 넘겨줄 수 없다.)

마면혈도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지만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과, 진 빚은 꼭 갚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다.

헌데 벌써 수차에 걸쳐 철선동시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면혈도를 괴롭혔다.

철선동시는 아닌 척하면서 마면혈도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이내 실망했다.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마는 성격의 마면혈도이건만 자신에게 몽선도를 바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선도는 쉽게 내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철선동시는 흉악한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협만 아니라면 검주 유소기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마면혈도가 우협을 자극했기 때문에 쫓겨 다닌다는 듯한 말투다.

마면혈도는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냈다.

“내가 적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선동시! 설마 너 혼자서 검주 유소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철선동시가 백납처럼 하얀 얼굴에 강시처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유소기는 우리 삼괴 다음 서열인 칠절에 속한다. 비록 그놈이 칠절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하하핫!”

순간 마면혈도가 큰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입과 턱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얼어 죽은 놈! 유소기가 근처에 없다고 그런 허풍을 치다니...”

마면혈도는 웃음을 뚝 그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왜 도망만 쳤느냐? 나 마면혈도도 유소기의 삼검(三劒)을 당하지 못하고 겨우 도망쳤는데... 설마하니 네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단 말이냐?”

“키키키... 자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빙혼철선(氷魂鐵扇)은 유소기의 검보단 반 푼 정도 무섭고 자네의 혈도보단 두 배 정도 강하지.”

철선동시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웃는 그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팟!

“이제 보니 네놈은...”

마면혈도는 무엇을 느꼈는지 바람처럼 신속하게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카캇! 말대가리가 제법이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카카캇! 네놈이 직접 바치지 않으니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화악!

철선동시가 그림자처럼 마면혈도를 쫓아가며 손톱으로 할퀴는데 그 수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스악! 서걱!

철선동시는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풍만으로도 마면혈도의 가슴부위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그럴진대 손톱에 직접 할퀴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헛! 용조수(龍爪手)!”

마면혈도가 놀라 소리치며 피했다.

용조수는 응조수(鷹爪手)와 함께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중 하나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무공은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사에서도 절전되어 익힌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뜻밖에도 얼어 죽은 귀신같은 몰골인 철선동시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마면혈도조차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쩍!

마면혈도는 혈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붉은 고리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도의 혈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용조수의 위력은 과연 놀랄 만했다.

파카캉!

혈도의 측면을 후려친 철선동시의 손톱은 다음 순간 마면혈도의 얼굴을 할퀴려 들고 있었다.

“크카카캇! 용조수를 알아보았으면 순순히 반부의 몽선도를 내놓으시지.”

철선동시의 살벌한 공격을 그러나 마면혈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수평혈도참(水平血刀斬)!”

번-쩍!

아침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듯,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노도같이 철선동시에게 밀려갔다.

쩌어억!

칠층 중앙에 서있던 불심연화로의 상반부가 혈도의 도기에 베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퍼억!

석가여래의 허리도 무참히 베어져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팟!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왼쪽 발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혈도참은 마면혈도의 삼십이초(三十二招) 혈왕도법(血王刀法) 중 최후의 이(二) 초식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다.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만났을 때도 마면혈도는 수평혈도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철선동시는 수평혈도참의 존재를 몰랐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말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할 철선동시가 아니었다.

화악!

잘려진 발목 때문에 허공에서 불안한 몸짓을 보이면서도 철선동시는 용조수 중의 절초를 펼쳐냈다.

쫘악!

마면혈도의 어깨에서 옷과 함께 피 묻은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왔다.

휙! 휘릭!

피차 피를 본 두 사람은 훌쩍 물러나 이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도 무시못할 중상을 입었지만 작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할 뿐이었다.

촤라락!

철선동시가 접은 채 들고 있던 빙혼철선을 펼쳤다.

스윽!

마면혈도는 혈도를 비스듬히 내려서 철선동시의 하체를 겨누었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순간적인 방심이 만들어낸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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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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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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