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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2장

 

                 마두들이 준 기연(奇緣) (1)

 

 

(이러다간 정말 죽고 말겠다.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살아났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이 된 임청우는 필사적으로 약사여래불을 향해 기어갔다. 조금이라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로부터 떨어지기 위해서였다.

임청우가 힘겹게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등에 박혀있는 철선동시의 팔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물위에 떠있는 조각배의 돛대처럼...

(불심연화지라는 무공이 이번에도 나를 살려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부여잡고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떠올렸다.

불심연화지를 수련한 덕분에 끔찍한 고열을 극복했었다.

어쩌면 불심연화지가 이 지독한 냉기에서도 자신을 살려줄지 모르는 일이다.

“네놈이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우린 금포염왕을 이기고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을 텐데... 이 모든 게 얼어 죽은 네놈의 욕심때문이다.”

뒤쪽에서 마면혈도가 분통이 터져 내뱉는 말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도 내심 후회막급이었다.

(기습으로 저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내 무공을 너무 과신했다. 저놈이 그런 괴상한 수법을 숨기고 있을 줄이야...)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지 않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했다.

처음부터 신중하게 손을 썼더라면 마면혈도가 비장의 수법을 숨기고 있었어도 능히 이길 수 있었을 철선동시였다.

마면혈도는 어쩌면 철선동시 자신보다 무공이 약한 척하여 방심을 유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땅을 치고 후회하고 싶지만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버렸으니 이제는 일어나 땅조차 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제기랄... 제기랄...)

철선동시는 생각할수록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자신의 품속에는 천신만고 끝에 얻은 반부의 몽선도가 있으며 멀지 않은 곳에 널브러져 있는 마면혈도의 품에 나머지 반부의 몽선도가 있다.

그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고금제일인이 될 수 있다는 전설이 오래 전부터 무림에 전해지고 있었다.

평생 억눌려 지내왔던 금포염왕이란 절망적인 존재!

같은 삼괴에 속하면서도 자신들을 종 부리듯 하던 무비옹의 횡포!

그들의 그림자를 떨쳐 버릴 수 있는 최후, 최고의 기회가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이제 몽선도의 비밀을 풀어서 무공을 연마하기만 하면 되었는데...

작은 실수 하나로 말미암아 고금제일의 고수가 되기는커녕 곧 죽어야만 한다.

그 사실에 철선동시는 미칠 것만 같다.

그러던 어느 순간 철선동시의 머릿속으로 번갯불 같은 영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기막힌 생각이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이다.

(저 말대가리의 색혈지독(索血之毒)은 천년설삼(千年雪蔘)같은 영약이 없으면 해독할 수 없다. 그렇지만 꼭 해독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철선동시는 흥분을 금치 못했다.

(내게는 정종 무공인 용조수 공력이 있고, 이 공력을 이용한다면 다른 놈 몸에 내 몸 속의 독을 옮겨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비록 아직 화경(化境)에 달하지 못해 직접 몸 밖으로 배출해 버릴 수는 없겠지만...)

머리가 나쁘거나 자질이 둔한 자가 절정의 무공을 깨우쳐 익히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절정의 무공을 소유한 자는 그 외모가 어떻든 간에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뛰어난 근골과 머리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철선동시는 물론이고 비록 머리회전이 조금 늦기는 하지만 마면혈도 역시 그런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다.

죽음 가운데에서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 철선동시는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한 쪽으로 기어가고 있는 빙골산에 중독된 쥐새끼를 돌아보았다.

등에 자신의 팔이 박혀있는 임청우가 마치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휘릭! 털썩!

“흐흐흐... 네놈은 이 나으리의 빙골산에 중독되었으니 곧 얼음덩어리가 되어 죽을 것이다.”

철선동시는 몸을 나무토막처럼 굴려서 임청우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었다.

 

임청우는 몸속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는 냉기를 몰아내보려고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반복해서 외우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겨우 입문한 불심연화지의 구결로 빙골산이란 극독을 몰아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갈수록 의식이 희미해져 오는 중이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주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 와중에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갈까마귀가 우짖는 것같은 목소리를 들었다.

(가만 둬도 죽을 지경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으려는 건가?)

불끈 오기가 치밀면서 화가 났다.

휘릭! 털썩!

철선동시는 다시 몇 바퀴 굴러서 거리를 좁히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놈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임청우의 귀가 번쩍 띄었다.

어쨌든 죽는 것보다는 사는 것이 났다.

그는 덜덜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떤 방법이오?”

하지만 말을 내뱉자마자 바보같은 짓을 했다고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저 마두가 죽을 때가 되자 참회를 한 것도 아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분명히 다른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다.

사는 방법이 있다는 소리에 넙죽 대답하고만 자신이 멍청이같다.

스스스!

자신에게 화가 나 입을 벌리는데 턱이 달달 떨리고 입에서 차가운 흰 김이 나온다. 이미 빙골산의 독기가 뼛속 깊이 스며든 증거다.

철선동시는 임청우의 중독이 심한 것을 보고 조바심이 났다.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색혈지독을 모두 옮겨버리기 전에 임청우가 죽어버린다면 고심해서 생각해낸 방법이 말짱 도로묵이 되고 만다.

그래서 철선동시는 듣기 싫은 음성이지만 최대한 목청을 가다듬고 고통스런 신음소리까지 섞어서 임청우의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고 시도했다.

“이 나으리는 지금 너무도 고통스럽다. 으으... 저 말대가리가 칼에다 지독한 극독을 묻혀놓았기 때문에 나도 곧 죽게 될 것이다.”

“당신도... 똑같은 짓을 하지 않았소?”

임청우가 벌벌 떨면서도 퉁명스럽게 말했다.

“큭큭큭...”

철선동시의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마면혈도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시시!

웃는 마면혈도의 입에서 피가 쿨럭쿨럭 쏟아지다가 이내 동결되어 버린다.

그자의 얼굴은 마치 철선동시의 다치기 전의 모습처럼 하얗게 변해있다. 서리가 얼굴을 뒤덮은 때문이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

임청우가 쉽게 속지 않자 철선동시는 속에서 불이 나는 것같았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애처로운 표정과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나는 후회하고 있다. 그래서 네 녀석의 중독을 풀어주고 싶다.”

말하는 철선동시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얼굴 뿐 아니라 몸도 급격히 굳어지고 있다.

색혈지독이 철선동시가 내공으로 형성한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의... 의심하지... 마라. 전... 적으로... 너를 도와주려는 거뿐이다.”

안면의 근육이 굳어지며 혀도 잘 돌아가지 않아서 말소리가 웅얼거린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임청우는 철선동시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의 말이 어눌해졌을 뿐 아니라 임청우 자신도 지독한 한기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유달리 강인한 몸을 타고 난 덕분에 아직까지는 정신을 완전히 잃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은 이미 마비되어 버렸고 평소의 습관과 버릇에 따라 반사적인 행동과 말을 내뱉을 수 있을 뿐이다.

마면혈도나 철선동시와 달리 임청우는 독에 저항할 수 있는 공력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이다.

몸은 점차 굳어지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임청우의 그런 사정은 생각지도 못하고 철선동시는 그의 곁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임청우의 손이나 발목, 하다못해 손가락이라도 잡기만 하면 만사형통인 것이다.

“해독약은... 내 옷... 속에 있다. 나는... 너무 고통... 스럽다. 내 옷에서... 해독약을... 꺼내는 즉시 내... 겨드랑이의... 소요혈(笑腰穴)을 눌러... 주기 바란다. 죽는... 것만이 이 지독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니...”

임청우가 속아 넘어가서 겨드랑이를 누르려고 하면 철선동시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내공으로 빙골산의 독기를 억제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철선동시의 말을 듣는 순간 무슨 짓을 하려는지 단숨에 깨달았다.

“교활한 놈!”

팟!

마면혈도는 버럭 소리치며 몸을 뒤집어 자벌레처럼 몸을 굽혔다가 확 튕겨 올렸다.

“네놈 뜻대로는 안된다!”

털썩! 콱!

몸을 굽혔다가 펴는 반동으로 튀어 올랐던 마면혈도는 임청우 곁으로 떨어지며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철선동시에 의해 이용당하기 전에 먼저 임청우를 죽여 버리려는 것이다.

콱!

그러나 철선동시도 마면혈도와 거의 같은 순간에 임청우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빠지직! 우두둑!

두 마두는 임청우의 발목과 손목을 잡자마자 전력을 기울여 공력을 쏟아 넣기 시작했다.

그렇잖아도 지독한 한기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던 임청우였다.

그런 그의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체는 끓는 기름에 담가진 것 같고 상체는 얼음구덩이에 던져진 것같다.

산 채로 몸이 둘로 찢어지는 것같기도 하다.

“끄으윽...”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해봤던 그 끔찍한 고통에 임청우는 그대로 까무라쳐 버렸다.

고통이 너무도 엄청난 탓에 불심연화지의 비결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이고 북두칠성의 힘을 불러내는 것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사용하지 않은 후로 수백 년이 지난 대안탑 칠층의 먼지 쌓인 바닥에 조각 편(片)자 비슷한 형태로 누운 세 사람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마면혈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살아날 가망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다.

빙골산은 원래 해약(解藥)이 없는 지독한 독이다.

철선동시가 마치 강시같은 몰골을 하고 있는 것도 이 빙골산을 오랫동안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선동시가 빙골산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중독되지 않은 것은 어떤 특별한 묘방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단지 몸속에 빙골산의 독기가 서서히 쌓이면서 내성(耐性)이 생긴 것뿐이다.

철선동시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은 마면혈도로서는 내공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결국 마면혈도는 늘 내뱉던 말처럼 얼어 죽은 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혼자 죽을 수는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억울한 노릇이다.

나쁜 짓으로 말하자면 자기 못지않게 철선동시도 했다.

더구나 나쁜 짓으로나 무공으로나 전혀 미칠 수 없는 대형(大兄) 무비옹도 있다.

무비옹은 몰라도 최소한 철선동시와는 함께 죽어야 한다.

헌데 철선동시는 색혈지독을 임청우의 몸을 빌어서 배출하려고 한다.

철선동시와 함께 죽자면 임청우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

임청우만 죽이면 철선동시도 따라 죽게 된다.

결심이 서자 마면혈도는 빙골산에 저항하던 내공마저 풀어버렸다.

우르르!

대신 임청우를 죽이기 위해 임청우의 발목에 자리한 태계혈(太溪)에 모든 공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심맥을 모두 끊어 주겠다 쥐새끼야!)

어차피 죽을 목숨, 마면혈도는 물귀신처럼 한명이라도 더 물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이렇게 되자 철선동시도 다급해졌다.

무공에 있어서 그는 마면혈도보다 약간 위였다.

하지만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임청우가 마면혈도의 손에 죽지 않도록 보호해한다.

(저놈의 말 대가리가...)

철선동시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임청우의 몸속으로 자신의 용조수 공력을 주입했다.

우르르!

손목에 있는 혈도인 맥문(脈門)을 통해서 철선동시의 대해와도 같은 공력이 주입되며 임청우의 내장과 심맥을 두텁게 감쌌다.

마면혈도가 주입한 내공과 철선동시의 내공이 임청우의 몸속에서 호각으로 대치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인 마면혈도는 필사적으로 내공을 임청우의 몸에 쏟아 넣었다.

덕분에 철선동시의 우세한 내공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철선동시는 공력을 임청우의 몸속에 쏟아 넣으면서 색혈지독도 함께 조금씩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츠츠츠!

그러자 임청우의 하얗게 서리로 뒤덮힌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갔다.

철선동시는 흠칫하며 독기를 줄이고 공력을 더 많이 주입하여 임청우의 심맥과 오장을 보호했다.

임청우는 빙골산에 중독된 후라 색혈지독에 전혀 저항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죽이려고 독을 밀어 넣으면서 죽지 않게 공력으로 보호해주어야 하다니...)

철선동시는 기가 막힌 상황에 이를 갈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임청우가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리면 철선동시 자신의 기발한 계획도 말짱 헛것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한데 갑자기 그의 몸이 벼락을 맞은 듯이 머리가 쭈뼜해졌다.

그와 함께 속에서 울컥 피가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철선동시가 보인 찰나적인 틈을 놓치지 않고 마면혈도가 직접 공력을 움직여 공격해온 것이다.

우르르!

마면혈도의 공력이 맹렬히 밀고 올라왔다.

철선동시는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하고서야 겨우 마면혈도의 공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서 철선동시와 마면혈도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타고서 말이 달리듯이 급박하게 쫓고 쫓기고, 밀고 밀리면서 치닫는 데도 깨어날 줄 몰랐다.

자신의 몸이 두 사람의 전쟁터가 되리라곤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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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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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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