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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각성(覺醒)

 

 

개봉성 동문에서 삼십여 장쯤 떨어진 관도 중앙에는 두 명의 고수가 대치하고 있었다.

물론 강유와 독두태보다.

두 사람을 중심으로 생긴 공터 주변에는 오가던 사람들과 철위사들이 빙 둘러서서 관전을 하고 있었다.

독두태보는 오른손이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하지만 그의 온몸에서는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져 나오고 있다.

강유의 상태는 손 하나만 다친 독두태보와 비교할 수 없다.

입과 코로는 피를 줄줄 흘리고 있으며 가슴 부분은 늑골이 드러날 정도로 살갗이 터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다.

그러나 처참한 몰골임에도 불구하고 강유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유유히 걷고 있었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휘적휘적 걷고 있는 강유의 오른손에는 짧은 비수가 거꾸로 쥐어져 있다.

누가 봐도 강유는 싸움에 임하는 자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두태보는 노려보기만 할 뿐 선뜻 공격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들 저래?”

낸들 아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죽일 듯 싸우더니 이제는 눈싸움만 하고 있구만.”

싸울 생각이 있기나 하는 걸까?”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에 자기키보다도 큰 강철 지팡이를 든 노파가 한 명 서있다.

곱게 늙은 백발의 그 노파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인 고독모모였다.

철관음과 백팔금차들보다 먼저 현장에 도착한 그녀는 강유와 독두태보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법이구먼. 성격이 불같기로 소문난 독두태보로 하여금 선뜻 공격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독두태보가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몸을 돌리기만 할 뿐 공격으로 나서지는 못하는 것을 보며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겉보기에는 한가하게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유는 어떤 상황에도 즉각적인 반응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강유는 마검칠식을 익히고 있다.

독두태보의 몸은 금강불괴에 필적할 정도로 단단하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합으로 증명되었듯이 독두태보의 몸이 제 아무리 단단해도 마검칠식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급소를 찔린다면 냉혈철심 사우처럼 비명횡사할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에 독두태보는 섣불리 강유를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중이다.

 

<이일대로(以逸代勞)... 한가로움으로 수고로움을 대신한다. 이것이 소요보법의 요체다.>

 

독두태보를 가운데 두고 걸음을 옮기면서 강유는 아버지 소요신군의 말을 떠올렸다.

(이일대로... 소요보법의 요체가 이제야 제대로 이해가 된다.)

시선을 독두태보에게서 떼지 않으며 걷고 있지만 강유의 가슴은 벅찬 흥분으로 뛰놀고 있었다.

목숨이 오가는 실전을 겪으면서 지금까지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무공 비결들이 비로소 체화(體化)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빠르다고 남보다 멀리 갈 수 있는 게 아니며 서두른다고 늘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길을 잘못 든 채 빠르게만 가면 돌아올 때 힘들고 서두르면 반드시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강유는 각성(覺醒)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까지 강유는 소요보법을 그냥 배운 대로 구사했었다.

헌데 불현 듯 소요보법에 숨겨져 있는 현묘한 이치가 봇물 터지듯 강유의 뇌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도 지난 며칠 간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깨우치려 노력해온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소요보법의 요체를 깨우쳤을 뿐 아니라 저 늙은 대머리가 어떻게 공격을 할 것이고 그럴 경우 어떤 허점을 드러낼지도 눈에 들어온다.)

강유는 흥분을 갈아 앉히려 애쓰며 독두태보를 자세히 보았다.

독두태보는 부상당한 오른손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면서 왼손에 공력을 집중시킨 채 강유의 움직임을 따라 제 자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오른손을 다친 탓에 독두태보의 몸의 균형은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으로 쏠려 있다. 오른쪽을 치는 척해서 균형을 더 흐트려 놓은 후 왼쪽을 공격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강유는 몸을 조금 숙이고 좌우로 흔들면서 독두태보에게 접근했다.

직접 다가가는 것은 아니고 독두태보를 가운데 둔 채 원형을 그리던 행로의 폭을 점점 좁히는 방식이었다.

(선제공격... 아니 유인인가?)

그걸 알아본 고독모모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파앗!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강유는 돌연 폭발적으로 쇄도하며 독두태보의 오른쪽 가슴을 비수로 찔러갔다.

이 새끼가 보자보자 하니까.”

분노한 독두태보가 몸을 오른쪽으로 틀면서 왼손으로 장력을 날렸다.

!

독두태보의 왼손에 응축될 대로 응축되어 있던 내공이 일거에 해방되면서 강맹한 역도가 강유에게 밀려갔다.

!

순간 강유는 급정거했다가 돌진 방향을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틀어버렸다.

부악!

직진하던 강유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독두태보의 왼손에서 터져 나온 장력은 강유의 왼쪽 귓전을 스쳐지나갔다.

그와 함께 독두태보의 왼쪽 허리가 그대로 강유에게 노출되었다. 오른쪽 가슴을 노리는 강유에게 반격하기 위해 무리하게 몸을 오른쪽으로 튼 결과다.

옳거니!”

고독모모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졌다.

(이겼다!)

!

강유는 자세가 무너져 휘청거리는 독두태보의 왼쪽으로 파고들며 그자의 허리를 비수로 강하게 그었다.

대주님!”

젊은 친구가 이겼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과 사람들이 놀라고 환호했다.

(그렇게 간단히 승부가 날 리가 있나?)

오직 한 사람 고독모모만은 하얀 눈썹을 조금 찡그렸을 뿐이다.

그리고 강유도 비수로 독두태보의 허리를 벤 직후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

강유의 비수가 베는 순간 독두태보의 허리에서 쇳소리가 난 것이다.

(아차!)

독두태보의 몸이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것을 그제서야 알아차린 강유는 다급히 거리를 벌리려 했다.

하지만 늦었다.

!

오른쪽으로 몸의 균형이 무너졌던 독두태보가 기왕에 돌아간 몸을 더 빨리 돌리며 다친 오른손으로 강유의 가슴을 때린 것이다.

!”

수도(手刀)로 날린 독도태보의 오른손에 가슴을 맞은 강유는 피를 토하며 튕겨져 나갔다.

이미 다쳤던 가슴에 다시 충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숨이 콱 막힌다.

저런...”

그렇지!”

강유를 응원하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는 반면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퍼억!

이장쯤 날아간 강유의 몸이 등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쿨럭!”

나뒹군 강유는 고개를 들며 대량의 피를 왈칵 토해냈다.

늑골이 몇 개 부러지고 심장이 일시적으로 정지하여 몸을 움직이기 힘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독두태보의 오른손에 제대로 공력이 주입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강유의 검이 깨진 파편이 여럿 박혔었기 때문이다.

만일 독두태보의 내공이 모두 주입된 수도에 맞았다면 강유의 몸은 동강 났을 것이다.

(... 자만했다!)

강유는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애쓰며 자책했다.

독두태보의 반응과 약점은 정확히 간파했다.

문제는 독두태보의 몸에 도검이 불침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약점을 파악했어도 공격이 먹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상대를 얕보는 경적(輕敵)과 자기중심적인 예단(豫斷)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강유는 또 몸으로 터득하게 된 것이다.

(죽는 줄 알았군!)

독두태보도 식은땀을 흘리며 강유쪽으로 몸을 돌렸다.

만일 강유의 비수가 마검칠식으로 휘둘러졌다면 독두태보는 허리가 끊어져 죽었을 것이다.

독두태보로서는 천만다행인 게 강유의 몸은 마검칠식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노는 것은 여기까지다!”

화악!

독두태보는 더 이상의 변수를 방지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여 강유의 목을 움켜쥐어왔다.

(이런...)

엉거주춤 일어서던 강유는 독두태보의 왼손이 벼락같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일시적으로 멎은 탓에 빠른 반응을 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여지없이 독두태보의 손아귀에 목이 틀어잡힐 위기에 처했다.

덜컥!

하지만 그 직후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독두태보의 몸이 갑자기 굳어졌다.

끄윽...”

강유의 목을 움켜쥐려던 자세 그대로 벌벌 떠는 독두태보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지?)

강유는 놀라면서도 급히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강유는 비로소 독두태보가 공격을 멈춘 이유를 알게 되었다.

언제였는지 백발의 곱게 늙은 노파가 나타나 강철 지팡이 끝을 독두태보의 등에 대고 있었다.

백발노파는 물론 고독모모다.

지지지!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 끝에서 일어난 벼락이 독두태보의 몸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절세고수다! 흑백신귀에 못지않은...)

강유는 한눈에 고독모모가 상상을 초월하는 실력을 지닌 고수임을 알아보았다.

이번에 제왕성은 우리 황금성에 너무 큰 무례를 범했다. 살려줄 테니 돌아가서 혈가람에게 전해라.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하라고...”

지지지!

준엄하게 말하는 고독모모의 강철 지팡이에서 일어나는 벼락이 강해졌다.

끄윽!”

퍼억!

독두태보는 눈을 까뒤집고 나뒹굴었다.

기절한 것이다.

성주가 신세를 졌구먼. 노신은 황금성에서 태상호법 노릇을 하고 있는 고독모모라고 하네.”

독두태보의 몸에서 강철 지팡이를 뗀 고독모모가 강유를 돌아보았다.

(황금성의 태상호법!)

소협 덕분에 본성의 명예를 지킬 수가 있었어. 은혜 있지 않음세.”

놀라는 강유에게 고독모모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 말씀을...”

당황하며 마주 포권하던 강유는 옆을 돌아보았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가 다가오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며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다행히 원만하게 수습이 되었다.)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다가오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비로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잠시 멈췄던 심장도 진상파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는 순간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 * *

 

(다행히 내가 직접 나서서 강유를 구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귀면지존은 안도 아닌 안도를 했다.

그는 지금 개봉성 내에 자리한 어느 절의 칠층탑 꼭대기에 서있었다.

그 탑으로부터 수백 장 떨어진 개봉성 밖의 강유와 진상파 일행이 개미처럼 작게 보인다.

강유는 여자면서도 키가 그와 비슷한 백팔금차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개봉성 동문쪽으로 오고 있었다.

(고독모모 덕분에 강유 놈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도 되었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이 찜찜한 기분은 어째서인가?)

강유를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미간이 귀신 가면 속에서 찌푸려졌다.

(강유 놈의 실력으로는 제왕성의 철위사를 겨우 상대할 수 있어야 정상이다. 헌데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동위사대 대주인 독두태보의 몸에 치명적일 수도 있는 칼질까지 했었다.)

강유가 독두태보를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귀면지존이었다.

(무공이라는 건 점수(漸修;점진적 수행)로 발전하는 것이지 저놈의 경우처럼 돈오(頓悟;별안간 깨달음)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귀면지존의 가슴 속에서는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강유 놈의 무공은 상궤를 벗어나 갑자기 몇 단계의 경지를 뛰어넘고 있다. 그 원인이 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한다.)

가면 속에서 귀면지존의 눈이 음침하게 빛났다.

(강유 놈이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물건의 안전을 위해 뒤를 밟다가 생각지도 않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발견이 과연 화로 진행될지 복으로 변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구나.)

스스스!

귀면지존의 모습은 곧 탑 위에서 사라졌다

 

***

 

밤이 깊어가고 있다.

삼경(三更)에 가까운 늦은 시간이지만 개봉의 번화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늦도록 인파가 끊이지 않는 번화가에 자리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이장(二丈)이 넘는 높은 담장에 둘러싸여 있다.

웅장하면서도 고색창연한 황금성 개봉분점은 송나라 시절 어떤 왕족이 막대한 재물을 투입해서 만든 장원이다.

수만 평 넓이인 장원 안에는 별세계가 꾸며져 있다.

여러 개의 정원뿐 아니라 상당히 큰 인공 호수까지 품고 있어 왕궁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 황금성 개봉지점 깊은 곳에는 돌과 강철로 지어진 육중한 건물이 한 채 서있다.

몇 명의 백팔금차가 지키고 있는 이 건물은 보물창고 겸 연공관이다.

 

* * *

 

연공관으로 사용되는 밀실은 어둑하다.

천장에 몇 개의 야명주(夜明珠)가 박혀있을 뿐 불은 켜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눈이 밝은 사람이라면 책은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밝기다.

밀실 사면의 벽에는 책과 죽간들로 채워진 책꽂이가 빼곡하게 세워져 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과 죽간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나가면 피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무공비급들이다.

무공비급으로 가득 찬 책꽂이 외에도 밀실에는 책상과 함께 의자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밀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중앙에 놓인 넓직한 돌 탁자다.

우윳빛의 새하얀 돌 탁자는 사실 만년한옥(萬年寒玉)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만년한옥은 천고의 보물로써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병이 치유되고 내공이 증진된다.

그 때문에 만년한옥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싸게 거래된다.

헌데 이 밀실에는 폭 네 자에 길이 일곱 자, 두께는 한자나 되는 거대한 만년한옥으로 만든 탁자가 있다.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해도 과언이 아닌 보물이다.

“...”

만년한옥의 탁자 위에는 강유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슈우우! 슈우!

하의만 걸치고 상체는 벌거벗은 강유의 온몸에서는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땀으로 범벅이 된 강유의 몸에는 놀랍게도 상처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냉혈철심 사우, 독두태보와 거푸 싸우면서 입었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이제 약간의 흉터로만 남아있다.

불과 몇 시진 만에 강유는 모든 내, 외상에서 완치된 것이다.

단순히 상처가 치유된 정도가 아니다.

강유는 내공도 비약적으로 증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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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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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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