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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장

 

            사자검의 비밀

 

 

"과연 어부 소년이 찾아와서 시선의 뒤를 이었을 것 같소?"

백남빈이 궁금해 하며 강미루에게 물었다.

"바로 아래에 계신 저분이 그분 아닐까요?"

강미루는 이백이 좌화한 바위섬의 정상 바로 아래쪽의 석감에 앉아 있는 인물을 내려다보며 대꾸했다.

풍채가 좋은 이백과 달리 호리호리하게 마른 체격이지만 역시 청수한 인상을 지닌 노인이다.

그 노인이 이백이 동정호에서 만났던 어부 소년의 나이 든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시선께서 전한다는 검법이 이것이란 말인가?"

다시 글을 읽어 내려가던 백남빈은 의아해하며 누구에게 묻는지 의식하지 못하고 말했다.

이백이 좌정한 앞쪽 바닥에는 천여 자의 글만 더 적혀 있을 뿐 검법의 이치를 담은 검보(劍譜)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리(眞理)는 몸에 담고 빛은 정신(精神)에 비추었으며,

움직이지 아니하여 극(極)에 이르렀도다.

하늘의 무거움은 몸으로 느끼며

땅의 너그러움을 품안에 가두었다.

지혜(智慧)에 머물러 흐려짐이 없었고

어짐(仁)을 함께 하여 치우침이 없었도다.

낯빛은 항상 부드러웠고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사자(獅子)는 담백한 뜻과 맑은 정신이 흔들리는 법 또 한 없었도다.

 

뜻이 흩어지면 피아(彼我)를 구분하지 않고 사람을 해(害)하고

정신이 흐려지면 근본을 잃고 마는 것인지라,

담백한 뜻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용(龍)을 누르고 범(虎)을 방비하듯 해야만 한다.

한순간 가벼우면 용은 승천하고 말 것이요.

범은 뜻을 상하게 하고 말 것이로다.

 

뜻을 저해하는 모든 것이 범이니,

범은 그 모습이 따로 있지 아니하고,

용은 스스로 비롯하는 것이니 범보다 더욱 지키기 어렵도다.

독기를 뿜어 사람으로 하여금 나약하게 하는 것이 능수(能手)이나

위험에 처하더라도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때로 용호(龍虎)가 안팎으로 발호하여 뜻을 흩으려는 바 있으나,

그 기세가 비록 장엄한 바 있어도 모두가 허상이니,

스스로 동(動)하지 않으면 털 한 올 도 거스르지 못하는 것이다.

비록 가벼울 지라도 스스로 지키어 움직이지 아니하면 절로 소멸하고 만다.

 

대저 먼저 그치고 나중에 움직임이 대도(大道)인즉,

가슴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욕망을 능히 견뎌야 한다.

정신은 참고 견딤으로 맑아지고 자라게 되며,

정신이 길러져야 대사(大事)를 이룩할 수 있으니,

참으면 참는 만큼, 견디면 견딘 만큼 정(正)은 자라는 것이다.

정(正)을 기름으로 근본은 두터워 지고 사악함과 요괴함이 절로 물러나게 된다.

 

사자(獅子)는 어떠한 경우에 처하여도 놀라지 아니하였으며,

무엇으로 말미암아서도 두려워한 바 없고,

사물을 대하여 마음으로 의심치 아니 하였을 뿐 아니라

옳지 않은 것에 현혹됨이 없었다.

의혹을 몰아내면 자연히 원정기(元精氣)가 자라고,

원정기가 자라지 않으면 어느 새 사마(邪魔)가 자리 잡는다.

 

놀라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두려워 않으면 그치지 않을 것이며

의심치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이요

현혹되지 않으면 응(應)하지 않을 것이다.

정성(精誠)을 다하였으니 사자(獅子)에게는 빠르고 느림이 존재하지 않았다.>

 

천여자의 비결(秘訣)이 이어진 후 이백의 글은 더 이상 없었다.

무엇인가 잡힐 듯 말듯 아른거림에 백남빈과 강미루는 깊은 생각에 빠져 들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검법을 전한다 했는데 어디에도 검을 쓰는 비결은 보이지 않고 모호한 글만 적혀있다.

하지만 백남빈과 강미루는 그 경구들이 바로 검법의 놀라운 비결이라 여겼다.

"뒷부분으로 올수록 내용이 와 닿는 듯도 하지만... 깊은 뜻은 한마디도 짐작할 수 없구나."

사자검결(獅子劍訣), 흑은 천자검결(千字劍訣)이라 이름 붙일만한 글들을 몇 번 읽어본 백남빈은 난감해졌다.

강미루는 고민하는 대신 통 채로 외우려는 듯 자꾸만 사자검결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언젠가는 알 날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남빈도 사자검결을 외워버리기로 작정했다.

 

***

 

그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에 없다.

백남빈은 사자검결을 앞에서 뒤로 외고 그것이 가능해지자 뒤에서 앞으로 외는데 전념했다.

그렇게 수없이 반복하자 저절로 술술 입에서 나와 더 이상 외우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백남빈에 비해 강미루는 암기하는 게 백남빈하지 않은 듯 했다.

중얼중얼 외면서 한두 구절 씩 막혀서 다시 외우곤 했다.

백남빈이 비결의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도와주었다.

"먼저 이만큼만 외우도록 해요. 그리고 나서 다시 이만큼만 외우고... 나중에 이것들끼리만 백남빈하게 이어버리면 되지 않겠소?"

방법을 알고 나자 금방 앞에서 뒤로 줄줄 외우는 강미루였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이백의 유해(遺骸)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밤은 휑하니 지나가 버리고 창평곡에는 해가 한 뼘 넘게 떠 있었다.

동부의 입구는 보름달이 서쪽으로 지면서 다시 닫혀버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신묘한 기술에 의해 동부의 입구는 한달에 한 번, 보름달이 중천에 뜰 때 저절로 열렸다가 닫히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서 열고 닫는 장치가 있어서 입구를 어렵지 않게 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와 과일을 따먹고 녹지의 물에 피를 풀어 마셨다.

배를 채운 후 오두막으로 들어가 지친 몸을 나란히 뉘었을 때 강미루가 말했다.

"머릿속에서 사자검결들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는 것 같아요."

사실이 그러했다.

신경의 소모가 그만큼 많았던 것이다.

 

***

 

백남빈이 조사전(祖師殿)이라 이름붙인 마지막 석동의 인물들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이백과 그의 전인(傳人)들이었다.

원래 바위섬은 모양이 특이하긴 했지만 딱히 의미가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백이 바위섬의 정상을 평평하게 다듬고 진전을 남긴 후 그의 전인 우승유(宇承悠)가 본받아 아래쪽에 자신의 좌화단(座化壇)과 심득(心得)을 남길 곳을 만들었다.

이것이 전통이 되어 우승유의 전인 초장객(楚璋客) 이하 모든 전인들이 그렇게 함으로써 바위섬은 기묘한 탑으로 변해 버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이백이 남긴 사자검결 외에도 사자검의 전인 십삼인의 심득(心得)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연들과 뜻이 모호한 비결들만 있을 뿐 실제로 검을 쓰는데 유용한 검보는 구경할 수 없었다.

 

***

 

그날 이후 두 사람은 거처를 오두막에서 동부로 옮겼다.

동부에 들어와 살면서 곧 그 안의 기물(器物)들에 백남빈해졌다.

특히 맨 좌측 석실에 있는 수백 권의 책들 중 <창평곡기(蒼平谷記)>라는 책을 통해 창평곡의 모든 사정들을 알게 되었다.

창평곡기는 이백과 역대 전인들이 창평곡에서 있었던 일들을 적어놓은 것인데 팔십여 년 전부터는 기록이 끊겨 있었다.

창평곡기에 의하면 창평곡은 이백 이전에도 사람이 살았던 곳이다.

이백은 당나라 현종이 선물로 준 연단술(鍊丹術)과 관련된 고서(古書)에서 창평곡의 존재를 알았다.

그 고서를 통해 이백이 찾아낸 창평곡에는 두 가지 보물이 있었다.

 

첫 번째 보물은 물론 사자검이다.

이백도 사자검의 재질이 무엇이고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이백이 옛사람이라 칭한 상고시대의 어떤 기인이 남긴 사자검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하기 힘든 조화(造化)를 만들어낸다.

사자검은 사용하는 자의 의지(意志)를 실체(實體)로 구현(具顯)해주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때문의 사자검의 위력은 주인의 그릇과 상상력의 크기로 결정된다.

필부(匹夫)가 얻으면 그저 무겁고 단단한 쇳덩이일 뿐이지만 초인(超人)이 쓰면 신선이나 귀신도 벨 수 있을 정도다.

삼재검법 외에는 아는 무공이 없던 백남빈이 검도의 최상승경지인 검기를 단번에 뽑아낼 수 있게 된 것도 사자검의 조화였다.

사자검의 이같은 신비한 힘은 <사자검을 전한다(獅子劒傳)>라는 문파의 이름이 지어진 연유이기도 하다.

사자검전에서 중요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라 사자검 자체인 것이다.

이백은 사자검과 함께 뜻이 모호한 비결을 백여 자 얻었었다. 사자검의 원래 주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그 비결은 오랜 세월에 풍화되어 많은 부분이 소멸된 상태였었다.

이백은 육십여 년 간 사자검을 쓰면서 불완전한 그 비결을 갈고 닦아서 천여자로 이루어진 사자검결을 만들었다.

다만 사자검결은 실제로 검을 쓰는 검결이 아니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서 마음이 자라게 하는 양심(養心)의 비결이다.

이 사자검결로 얻을 수 있는 성취의 크기는 개인의 도량으로 결정된다.

그 때문에 이백 이후의 전인들이 사자검결을 통해 이룬 것은 제각각이었다.

 

이백이 창평곡에서 찾아낸 두 번째 보물은 바로 녹지의 물이었다.

녹지의 물은 창평곡 지하에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어떤 광물질이 녹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 물은 그냥 마실 경우 침과 섞이면서 치명적인 독이 된다.

하지만 피와 섞이면 공력을 비약적으로 증진시켜줄 뿐 아니라 강인한 몸과 엄청난 치유력을 갖게 해주는 영약이 된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났던 깊은 상처가 단번에 치유된 것도 녹지의 물 덕분이었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영약이 되어 몸속으로 다시 흡수되었던 것이다.

강미루도 백남빈과 함께 하체를 녹지에 담그고 있었던 터라 환골탈태에 가까운 효험을 봤었다. 백남빈의 상처가 만든 영약이 피부를 통해 흡수된 덕분이다.

피가 섞인 녹지의 물은 기사회생의 효능을 지녔다는 자부현청(紫府玄淸)이나 공청석유(空靑石乳)에 비견될만한 영약이다.

그것을 매일 식수 대신 마셨기에 백남빈과 강미루의 공력은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증진되어 있었다.

녹지의 바닥에는 백남빈이 발견한 장방형의 매끈한 석괴가 있다.

어떤 이치인지는 이백도 몰랐지만 그 석괴는 보름달의 달빛을 온전히 받으면 아래로 내려가면서 벽쪽에 숨기고 있던 배수구를 드러낸다.

그 배수구를 통해 녹지의 물이 창평곡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동부의 입구가 열리는 것이다.

녹지 아래의 석괴가 한 달에 한 번씩 동부의 입구를 열었다 닫기도 하지만 내부에서도 입구의 개폐와 고정이 가능하다.

그 장치는 입구의 바로 안쪽에 있었다.

 

사자검과 녹지의 물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창평곡에는 보물이라 할만한 것들이 여럿 더 있었다.

숲에서 열리는 자령과(紫靈果)라는 붉은 색 과일은 장복하면 대부분의 독에 내성이 생긴다.

또 풀밭에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별모양의 열매는 근골을 튼튼하게 해주고 밤눈을 밝게 해주는 약효를 지녔다.

그 외의 각가지 열매나 과일도 세상에 나가면 영약 소리를 들을만한 보물들이었다.

창평곡에서 자라는 과일과 열매들의 약성이 그토록 뛰어난 것은 녹지의 물을 흡수하며 자라는 덕분일 것이다.

짐승들도 새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설청묘(雪靑猫)라는 흰 털의 야생묘(野生猫)가 있으나 영특하여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설청묘들이 숨어 사는 곳도 물론 창평곡기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창평곡에는 별별 신기한 것들이 다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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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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