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0

 

             동굴 속의 시체들

 

 

다시 얼마나 더 걸어 들어갔을까?

와아!”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걸음을 멈췄다.

멈춰선 이검한 앞쪽에는 널찍한 지하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이 지하 광장은 동굴의 깊은 안쪽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낮처럼 환했다. 광장의 벽과 천장 곳곳에 야명주가 박히거나 매달려 있는 덕분이었다.

수백 평은 족히 됨직한 드넓은 지하 광장은 궁궐처럼 호화롭게 꾸며져 있다.

바닥은 융단과 대리석으로 덮여있으며 가재도구들은 하나같이 금은보화로 장식되어 있다.

흡사 황제의 거처에 들어온 것같은 지하 광장의 화려함은 보는 이의 입을 저절로 벌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지하의 궁궐은 난장판이 되어있었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가재도구들과 값 비싼 장식품들의 대부분은 강력한 힘에 의해 부서지고 으깨어져 있었다.

마치 한바탕의 거센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시체가 있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지하 광장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났다. 두 구의 시체를 발견한 때문이다.

첫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연못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죽어 있었다.

직경 일 장쯤인 원형의 연못에는 우윳빛의 반투명한 액체가 가득 고여 있다.

그 뽀얀 액체에 잠겨있는 시체의 상체는 전혀 썩지 않아서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반면 연못 밖으로 드러나 있는 시체의 하체 부분은 마도 파천의 주인처럼 바짝 말라 목내이가 되어 있다.

아마도 연못에 고여 있는 액체가 시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아온 듯 했다.

이검한은 연못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펴보았다.

반투명한 액체 속에 상체가 잠겨있는 인물은 백발의 노인인데 얼굴도 백짓장처럼 창백하다. 마치 단 한 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기라도 한 듯이...

안색이 창백한 그 노인의 시체 옆에는 벽옥패(碧玉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유사지존령(流砂至尊令)!

 

벽옥패의 전면에는 그와 같은 글이 전자체로 새겨져 있으며 글 옆에는 두 마리 용이 모랫속을 누비고 다니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그 벽옥패의 뒷면에는 한 가지 무공비결이 깨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글자로 새겨져 있었다.

 

-유사잠행술(流砂潛行術)!

 

믿어지지 않지만 이 무공을 익히면 흐르는 모래, 즉 유사(流砂) 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닐 수 있다고 적혀있다.

일단 빠지면 두 번 다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이 유사다.

헌데 그 공포스러운 유사 속을 물처럼 헤집고 다닐 수 있는 비법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이검한이다.

유사잠행술을 익히면 가공할 무게로 눌러대는 유사의 압력을 오히려 몸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전환시킬 수가 있다.

누르는 힘이 강해지면 반발력도 비례해서 강해지는 용수철의 원리를 이용한 무공인 것이다.

몸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 강한 반발력으로 상쇄할 수만 있으면 유사든 땅 속이든 자유자재로 헤집고 다닐 수가 있다.

(유사잠행술의 이같은 이치는 다른 무공에도 적용시킬 수 있겠다.)

유사잠행술의 비결을 읽어본 이검한은 가슴이 뛰었다.

압력이 가해지는 즉시 더 강력한 반발력으로 돌려보낼 수만 있다면 어떤 공격에서도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파천삼식도 대단한 무공이지만 유사잠행술은 더 쓸모가 많겠구나.)

이검한은 유사지존령을 갈무리하며 이 광장에서 발견한 두 번째 시체로 다가갔다.

 

두 번째 시체는 지하 광장의 끝에 있었다.

지하 광장이 끝나는 그곳에는 어디론가 통하는 철문이 있는데 오래 전에 만들어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파란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 철문이 만년한철(萬年寒鐵)로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시체는 바로 그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 앞에 우뚝 선 채 죽어 있었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 그 인물은 늑대가죽으로 만든 피의(皮衣)를 걸치고 있는데 복부에는 한 자루 기형검(奇形劒)이 관통해 있었다.

피의인의 명치 부분을 궤뚫은 기형검은 칼날 양쪽에 삐죽삐죽 가시가 돋아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런 종류의 검을 낭아검(狼牙劒)이라고 부른다.

낭아검은 거한의 명치 부분을 관통한 후 뒤쪽의 철문에 깊이 꽂혀 있었다.

만년한철로 주조된 철문을 간단히 뚫고 들어간 것으로 보아 그 낭아검도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피의인은 스스로의 몸을 낭아검으로 찔러 철문에 고정시킨 듯했다. 마치 죽어서라도 철문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 인물의 오른손에 한 자루의 짧은 뿔피리가 움켜쥐어져 있는 게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 사람이 철익신응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검한은 눈을 반짝이며 뿔피리를 살펴보았다. 그 뿔피리가 뭇 조류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신기(神器)임을 알아본 것이다.

(철익신응 정도 되는 영물을 부렸다면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을 텐데... 대체 이 인물이 죽어서도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

이검한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눈을 빛내며 철문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시체 옆의 철문에는 빽빽하게 글이 적혀 있었다.

 

<걸음을 돌려라 인연자여! 그대의 호기심이 자칫 세상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으니...!>

 

철문의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그 글은 물론 늑대 가죽을 걸친 거한이 죽기 전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걸음을 돌리라는 경고를 두 번이나 보게 되네.)

이검한 눈을 빛내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죽기 전에야 그 요녀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현음마모(玄陰魔母)의 유물로 우리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유인한 요부는 놀랍게도 몇 년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누란왕후(樓蘭王后) 흑요설(黑妖雪)이었던 것이다!>

 

누란왕후 흑요설!”

거기까지 읽은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터뜨렸다.

누란왕후 흑요설!

그녀가 누군가?

저 전설의 왕국 놉-노르, 즉 누란의 마지막 왕후였던 절세미녀가 아닌가?

서역 일대에서는 아직도 그녀를 고금제일미인(古今第一美人)으로 추앙하고 있다.

최소한 서역 사람들 사이에서는 누란왕후 흑요설이 양귀비(楊貴妃)나 왕소군(王昭君)을 능가하는 미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미인박명이라 했던가?

누란왕후 흑요설은 그 아름다운 미모 때문에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누란은 천산남로(天山南路)의 남쪽 공작하(孔雀河)의 끝, -노르(羅布泊)호 북쪽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당시 서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나라였다고 한다.

누란이 부유하게 된 것은 전한(前漢) 시대에 열린 비단길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 이점 덕분이었다. 머나먼 서방으로 장사를 떠나는 대상(隊商)들은 반드시 누란을 경유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흑요설은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누란왕의 눈에 들어 서역 제일의 부국 누란의 왕후라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다.

하지만 흑요설이 십구 세 되던 해 누란왕은 흑요설의 미모에 욕심을 낸 자에 의해 피살당하고 말았다.

살인자는 다름 아닌 누란왕의 동생이었다.

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그자는 왕위 뿐 아니라 형수인 흑요설까지 차지해버렸다.

흑요설은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남편을 죽인 원수와 부부로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녀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흑요설이 이십이 세 되던 해에 두 번째 남편이었던 시동생마저 타인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흑요설의 두 번째 남편을 살해한 인물은 전 남편의 아들이었다.

흑요설에게는 전처소생의 아들이 한명 있었는데 바로 그자가 숙부를 살해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왕위를 되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자 역시 짐승과 다름없는 사내였다. 그자는 숙부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에 그치지 않고 양모인 흑요설까지 유린한 것이었다.

양모를 범해서 아내로 삼다니...

이같은 패륜무도한 일은 유교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중원에서야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유목사회에서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유목사회에서는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 자체가 큰일이다.

특히 연약한 여자들은 반드시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형사취수(兄死取嫂)라는 유목민의 전통도 그 때문에 생겼다. 형이 죽어 홀로 된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삼아 보살펴주는 것은 권리라기보다는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징기스칸의 어머니이며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불리는 호엘룬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시동생인 다리타이의 아내로 살아야만 했었다. 징기스칸의 강력한 권위로도 숙부가 자신의 어머니를 차지라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유목사회에서 여자에게는 아무런 인권도 없다. 그저 말이나 양같은 재산의 일부로 여겨질 뿐이다.

형수든 누구든 일단 자신들의 가족 속에 들어오면 그 여자는 가족의 공동 재산이 된다.

그리고 가족의 공동 재산인 여자를 다른 가문의 사내에게 무상으로 양도할 수는 없다.

노동력을 지닌 여자를 가족의 공동 재산으로 여기거나 홀몸이 된 여자를 가족 중의 누군가가 아내로 삼아 부양하는 전통은 비단 형제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父子) 사이에도 동일한 규칙이 적용된다.

전한시대의 절세미인 왕소군은 흉노의 추장인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하나를 낳았었다.

그후 연로한 호한야선우가 죽자 그의 장남인 복주루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아들을 더 낳았다는 고사가 한서 흉노전(匈奴傳)에 기록되어있을 정도다.

이처럼 유목 사회에서 아버지의 사후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처첩들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여자들도 아버지가 남긴 재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아버지의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아버지의 권위를 물려받는 것으로도 인식이 된다.

서방의 유다민족 역시 유목민족이었던 탓에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한 후 아버지의 여자들을 모두 범한 기사가 구약에 나온다.

심지어 압살롬은 지붕 위에 천막을 쳐놓고 그곳에서 아비의 후궁들을 차례로 범하는 장면을 백성들에게 보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선비전(鮮卑傳)에도 선비족은 형사취수의 제도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생모를 제외한 아버지의 여자들은 차지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선비족은 몽고와 같은 계통의 유목민족이다.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삼대 황제 고종(高宗)도 자기 아버지의 후궁이었던 무씨(武氏)를 차지하여 황후로 삼았었다. 성군으로 이름 높은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이었건만 아들이 자신의 후궁을 차지하는 봉변을 당한 것이다.

당고종보다 두 살 연상이었던 그 후궁이 후일의 측천무후(測天武后).

하긴 당태종 이세민으로서는 자신이 품었던 미녀를 아들이 차지한 것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나라를 세운 이씨 일족이 원래 선비 계통의 유목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중원을 정복하긴 했으나 유목민의 피가 짙게 남아있던 당 황실에서는 아비와 자식간에 여자를 주고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당고종의 경우도 부황인 이세민이 살아있을 때부터 배분상으로는 어머니인 무씨와 사통했다고 하며 이세민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아들을 크게 나무라진 않았다는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