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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장

 

               운명을 읽는 눈

 

 

(황금성에 갇혀있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수한 곤경과 상심을 겪겠지만 오늘 밤의 이 따뜻하고 유쾌한 기억이 그때마다 큰 위안과 힘이 될 것이다.)

섬전초를 품에 안은 진상파의 가슴 깊은 곳에서 따스한 감정이 번져 올랐다.

(강유, 저 사내가 아니었다면 결코 할 수 없었던 특별한 경험...)

고개를 들며 강유를 훔쳐보려던 진상파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언제부터인지 강유는 고개를 돌려서 오른쪽 절벽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상파를 긴장시킨 것은 강유가 단순히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강유는 한쪽 무릎을 꿇어서 언제든지 위로 뛰어오를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왼손으로는 바닥에 놓여있던 검을 끌어당겨 움켜잡고 있다.

(강소협의 온몸에서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진상파는 숨을 멈추며 강유의 모습을 주시했다.

섬전초도 무언가 느낀 듯 우는 소리를 내지 않고 강유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뭘까?)

긴장한 진상파는 강유가 보고 있는 오른 쪽 절벽 위를 함께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진상파의 이목에는 감지되는 것이 없었다.

내공이 그리 심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강유가 지닌 특별한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으...

진상파와 달리 강유의 이목에는 무언가 절벽 위에서 사라지는 기척이 감지되었다.

(산짐승이었을까?)

강유는 절벽 위를 노려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산짐승은 아니다. 방금 전까지 날 지켜보던 시선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다.)

강유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이 되었다.

고불선사가 묵장진언을 연구하여 만든 달마독명안을 수련한 덕분에 강유는 남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보다 몇 배 더 민감해진 강유의 감각은 방금 전까지 오른쪽 절벽 위에 누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등봉현부터 날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일 텐데... 대체 어떤 자이기에 나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는 것인가? 고불선사님을 이용하고 시해한 귀면지존과 관련 있는 자일까?)

덜컥!

강유는 움켜쥐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팽팽하던 긴장도 풀었다.

(상황이 끝났네.)

그제야 진상파도 소리없이 안도의 한숨 내쉬며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저곳에 무언가 있었군요.”

진상파는 절벽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마 지나가던 산짐승이었을 것입니다.”

강유는 웃으며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깊은 산중이니 오가는 짐승도 많겠지요.”

진상파는 강유가 자신이 걱정할까봐 둘러대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이래저래 쉽게 잠들기는 틀린 것같습니다.”

“저도 잠이 다 달아나버렸네요.”

진상파는 품에 안겨 골골 거리는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었다.

“잠도 오지 않고 하니 한 가지 재미있는 재주를 배워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 그녀에게 강유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르쳐주신다면 저야 고맙지요. 그래 제게 가르쳐주실 재미있는 재주라는 게 무언가요?”

 

<달마독명안이라는 비술입니다.>

 

진상파의 물음에 강유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답했다.

전음술(傳音術)이라고도 불리는 전음입밀은 내공을 이용하여 특정 대상에게만 말을 건넬 수 있는 기술이다.

(갑자기 전음술로 말하다니... 달마독명안이라는 게 남이 알면 안되는 재주인 모양이네.)

 

<맞습니다.>

 

진상파가 생각할 때 강유가 다시 전음술로 말했다.

(내 생각을 읽었다?)

진상파의 눈이 놀라 동그랗게 치떠졌다.

 

<저는 아직 그 경지에 이르지 못했지만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할 수 있게 되면 상대방의 운명(運命)까지 읽을(讀) 수 있습니다.>

 

(세상에나...)

강유의 설명을 들으며 진상파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율을 느꼈다.

 

* * *

 

스윽!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이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 위로 소리 없이 나타나는 인물이 있었다.

얼굴에 섬뜩한 형상의 귀신 가면을 쓴 인물!

바로 마교의 당대 교주로 알려진 귀면지존이었다.

등봉현부터 끈질기게 강유를 따라다닌 시선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귀면지존이었던 것이다.

“...!”

산봉우리에 내려선 귀면지존은 무언가 생각하며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작은 불빛이 어둠 속에 보인다. 강유와 진상파가 있는 계곡에 피워진 모닥불의 불빛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같은 상황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된다.)

귀면지존의 미간이 가면 속에서 찡그려졌다.

(방금 전에도 저놈은 내 존재를 확실하게 알아차렸었다.)

귀면지존은 강유가 갑자기 자신이 서있던 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장면을 떠올리며 가슴이 섬뜩해졌다.

강유는 정말 생각지도 않은 순간에 그의 존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금 무림에서 마음먹고 은신한 날 탐지해낼 수 있는 인간은 철면제왕 섭장천을 포함하여 다섯 명 안팍에 불과하다. 헌데 저놈은 번번이 내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다.)

귀면지존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인물이다. 천하를 통틀어도 자신의 윗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철면제왕 섭장천뿐이라 확신해왔다.

당연히 강유 정도의 애송이는 안중에도 없었다.

하지만 강유는 수시로 귀면지존이 숨어있는 곳을 돌아보곤 했다.

한 두 번 반복 된 일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강유는 귀면지존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불암을 떠난 걸 확인한 후 다시 등봉현에서 발견될 때까지 저놈의 종적을 잠깐 놓쳤었다. 그리 길지 않은 그 공백 동안 저놈에게 무언가 기연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계곡을 노려보는 귀면지존의 눈으로 냉혹한 살기가 번개 치듯 지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유를 잡아족쳐 마음속의 의혹을 해소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귀면지존에게는 강유를 이용하여 추진중인 원대한 계획이 있다.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려고 오랜 세월 공 들여온 노력을 무산시킬 수는 없는 일이다.

(저놈의 주변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필요가 있겠다. 들키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있겠지만...)

휘익!

귀신 가면 속에서 스산한 눈빛을 흘리며 귀면지존은 산봉우리를 날아 내려갔다.

 

* * *

 

밤은 깊을 대로 깊어 새벽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지만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안치 되어 있는 제왕성의 분타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제왕성 분타의 그 누구도 밤 새 잠들지 못했다.

 

“소요신군의 아들놈은 진소저와 함께 금릉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소이다.”

사우의 수하들이 자신들의 대주가 안치 된 관에 뚜껑을 고정시키는 것을 보며 궁무독이 말했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시오?”

동위사대 대주 독두태보가 고리같은 눈을 희번덕이며 물었다.

반면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은 뭔가 알아차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사우를 살해한 이후 금릉으로 향하는 길 어디에서도 둘의 종적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도 있소이다만...”

궁무독은 생각에 잠긴 백월사신을 힐끔 보며 말을 이었다.

“진소저 입장에서는 굳이 황금성 본점이 있는 금릉으로 가지 않아도 안전을 확보할 방도가 있기 때문이오.”

“개봉!”

쾅!

비로소 깨달은 독두태보가 주먹으로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사우의 관에 뚜껑을 닫고 있던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진소저는 금릉이 아니라 여기서 멀지 않은 개봉의 황금성 분점으로 향할 수도 있겠소!“

독두태보가 초조한 표정이 되어 이를 부득 갈았다.

“황금성 개봉 분점의 경호능력은 금릉의 본점에 못지 않소. 일단 진소저가 개봉 분점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로서도 손을 쓸 방도가 없다고 봐야만 하오.”

궁무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소저도 진소저지만 강유라는 놈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오! 십팔 년 전 비극의 열쇠를 쥐고 있는 놈이니...”

독두태보의 대머리로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중년 이상의 나이인 제왕성 무사들 중 십팔 년 전의 비극을 떠올리고 피가 끓어오르지 않는 자는 없다.

자신들의 주모인 무후 영청공주는 천마구절기중 마검칠식에 시해 당했었다.

그리고 냉혈철심 사우 역시 그 마검칠식에 죽임을 당했다.

진상파를 제왕성으로 데려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마검칠식을 구사한 강유를 놓칠 수는 없다.

“강유란 놈의 추적은 노부들이 맡을 테니 사대주의 운구는 총관께서 맡아주시오.”

침묵하고 있던 백월사신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두 분 대주께서 수고해주시오.”

궁무독은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에게 포권을 했다.

“맡겨주시오!”

“수시로 연락드리겠소!”

휙! 휙!

백월사신과 독두태보도 궁무독에게 포권을 한 후 대청에서 달려 나갔다.

(십팔 년... 십팔 년만에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었다.)

직속 수하들과 함께 분타를 빠져나가는 백월사신과 독두태보의 뒷모습을 보며 궁무독의 눈이 숨길 수 없는 흥분으로 물들었다.

(마검칠식을 사용한 자가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이라는 게 의외이긴 하지만 드디어 혈가람 패거리들에게 반격할 기회가 온 것이다.)

궁무독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섭무궁(葉無窮)! 우리 제왕성의 진정한 후계자인 섭무궁공자만 찾아내면 혈가람과 마교의 세력을 제왕성에서 일거에 뽑아버릴 수 있다!)

 

궁무독은 대대로 섭씨일족을 섬겨온 가신(家臣) 집안 출신이다.

반면 혈가람등 제왕성의 실권을 쥐고 있는 자들은 대부분 근래에 영입된 자들이다.

혈가람이 대표격인 신흥세력은 모용준이 섭장천의 후계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 때문에 전대부터 섭씨일족을 섬겨온 충신들은 제왕성 내에서 급격히 입지를 상실하고 있다.

궁무독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원래 제왕성에는 총관이 궁무독 한명이었다.

헌데 부성주인 혈가람등은 총관 자리를 둘로 늘렸으며 새로 신설된 내(內)총관 자리에 모용준의 유모 출신인 구미호리 구숙정을 앉혔다.

자연히 궁무독의 역활은 제왕성의 대외적인 업무만 담담하는 외(外)총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그 결과 제왕성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궁무독도 자세히 모르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신흥세력들 중에는 마교와 연줄이 닿는 것으로 의심되는 자들이 다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자들은 어느덧 제왕성의 요직을 차지해가고 있다.

자칫하다가는 제왕성이 마교에 의해 장악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된 것이다.

궁무독이 느끼고 있는 이 절박한 위기를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다.

귀면지존에 의해 납치당한 소성주 섭무궁을 찾아내는 게 바로 그것이다.

섭무궁이 제왕성으로 돌아온다면 모용준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 모용준을 등에 업고 위세를 부려온 혈가람 일파도 간단히 일소해버릴 수 있다.

제왕성에 침투한 마교의 무리들에게도 철퇴를 내릴 수 있을 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섭무궁 소성주의 행방을 알아내야만 한다.)

궁무독은 결의를 다지며 대청 안을 둘러보았다.

사우가 안치 된 관의 뚜껑을 고정시킨 철위사들이 관을 둘러싼 채 비통해하고 있다.

“네놈들...!”

궁무독은 사우의 수하들에게 준엄한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철위사들이 깜짝 놀라며 궁무독을 돌아본다.

“어이없이 죽은 너희 대주를 위해 복수할 결의가 되어 있느냐?”

“하명만 하십시오 총관님!”

“기꺼이 섭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궁무독의 말에 철위사들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결의라니 좋다. 네놈들에게 마음껏 분풀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마.”

독검마유 궁무독의 얼굴에 음산한 웃음이 번졌다.

 

* * *

 

변경(汴京)이라고도 불리는 개봉(開封)은 송(宋)나라를 비롯한 여러 왕조가 도읍으로 삼았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다.

때는 해가 지기 직전인 저녁 무렵이다.

개봉의 동문(東門)으로 이어진 넓은 관도는 오가는 사람들과 우마차들로 북적이고 있다.

“오늘 따라 길이 왜 이리 막히누?”

전(全)씨 성의 늙은 마부는 쓰고 있는 죽립 끝을 쳐들며 앞쪽을 살펴보았다.

개봉으로 들어가는 길은 엄청난 정체를 빚고 있었다.

개봉에서 나오는 사람들이나 우마차의 행렬은 순조로운데 들어가는 길만 막히고 있는 것이다.

“해 지기 전에는 성문에 닿아야하는데...”

마음이 급해진 전노인은 연신 엉덩이를 들썩 거리며 앞쪽의 상황을 살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해가 지면 성문을 닫는다.

그리고 일단 닫힌 성문은 다음날 해가 떠야만 열린다.

도적이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인데 일몰 이후에는 특권층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절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오늘 안으로 개봉에 들어가려면 해가 지기 전에 성문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유다.

(까딱 잘못했다가는 손님들과 함께 노숙을 하게 생겼구먼.)

전노인은 혀를 차며 자신이 몰고 있는 마차를 돌아보았다.

전노인의 집은 개봉에서 동북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마두집(碼頭集)이란 마을에 있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두 마리의 말과 마차 한 대로 열 명이 넘는 식구의 생계를 책임져온 늙은 마부가 전노인이다.

오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한 쌍의 남녀가 전노인의 집을 찾아와 마차를 대절(貸切)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개봉으로 데려다달라면서 무려 백 냥의 거금을 내놓은 것이다.

백 냥은 전노인이 몇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거금이다.

오늘 안으로 개봉까지 데려다달라는 주문이 조금 벅차긴 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잘 아는 길이기도 해서 힘껏 달린 덕분에 해가 지기 전에 개봉 근처에 이를 수가 있었다.

헌데 정작 개봉에 거의 다 와서 길이 막히고 있는 것이다.

(다른 날도 저녁 무렵에는 막히긴 하지만 이렇게 심하게 막힌 적은 없는데...)

전노인은 고개를 학처럼 빼며 개봉의 성문쪽을 살폈다.

그런 전노인의 시야로 전에는 보지 못한 특이한 상황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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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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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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