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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란왕후라는 여인

 

 

측천무후의 경우 외에도 당나라를 기울게 만들어 경국지색의 고사를 만든 양귀비도 원래는 현종(玄宗)의 다섯째 아들인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였다.

, 현종은 며느리를 자신의 여자로 만든 것이다.

이처럼 유목사회에서는 형사취수같은 수계혼(收繼婚)의 풍습이 형제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부자지간에도 적용되었었다.

 

누란왕국은 흉노를 포함한 유목사회의 한 가운데 존재했었다. 그 때문에 형사취수처럼 유목사회에서 보편적이던 제도와 풍습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누란왕후 흑요설의 신세는 비참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일부종사(一夫從事)는 고사하고 불과 몇 년 사이에 거푸 세 남자를 남편으로 삼아야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녀의 비극적인 인생행로는 남편이 세 번 바뀌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누란왕국이 연거푸 일어난 왕위찬탈로 쇠락하자 호시탐탐 누란왕국의 부()에 눈독을 들여온 주위의 나라들이 일제히 쳐들어온 것이다.

총 십삼 개의 소국이 연합하여 누란왕국에 쳐들어왔고 연이은 반란으로 국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누란왕국으로서는 십삼 국 연합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결국 흑요설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신임 누란왕은 아름다운 양모의 육체와 부귀영화를 얼마 누려보지 못하고 오체분시(五體分屍)당해 죽고 말았다.

그와 함께 화려했던 누란왕국도 잿더미로 화해 버렸으며 그 얼마 후 불어 닥친 강력한 모래폭풍에 휩쓸려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지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운의 절세미인 누란왕후 흑요설도 전란과 재앙의 와중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누란왕후 흑요설은 죽은 게 아니라 누란왕국을 멸망시킨 십삼 개 국 국왕들의 공동 전리품이 되어 버렸었다.

누란왕국의 막대한 보물을 공평하게 나눠가진 십삼 국의 국왕들은 누란왕후 흑요설의 처리 문제에 이르러서는 골치를 앓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흑요설의 나이는 겨우 이십이 세였다.

한창 완숙하여 물이 오른 그녀의 미모에 십삼 국 국왕들이 홀딱 반한 것은 필연이었다.

십삼 국 국왕들은 흑요설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으며 급기야 십삼 국 사이의 전쟁으로 비화될 판국이었다.

이에 십삼 국 국왕들은 한 가지 절충안을 짜내기에 이르렀다. 흑요설을 어느 곳에 감금해두고 한명이 한 달씩 돌아가며 소유하기로 한 것이었다.

결국 흑요설은 은밀한 이궁(離宮)에 갇힌 채 십삼 국 국왕의 노리개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국의 왕후였던 고귀한 신분에서 욕정에 미친 사내들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 흑요설은 처음에는 반쯤 미쳐버렸다.

그러나 본래 총명하고 의지견정 했던 흑요설인지라 오래지 않아 이성을 되찾았다.

그녀는 짐승같은 세상의 사내들에게 복수를 다짐했고 탈출의 기회를 엿보았다.

 

그후 삼년의 세월동안 흑요설은 십삼 국 국왕들의 노리개 노릇을 충실히 해냈다.

과연 흑요설이 굴욕과 수치를 참으며 인내한 보람이 있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오래 먹다보면 질리게 되는 법이다.

흑요설의 육체를 돌아가며 탐닉하던 십삼 국 국왕들도 삼년의 세월이 지나자 차츰 발길이 소원해졌다.

그때를 노려 흑요설은 이궁을 탈출할 수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자유의 몸이 된 흑요설은 대과벽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오래 전 누란왕국의 보물창고에서 한 장의 장보도(藏寶圖)를 본적이 있었다. 그 장보도는 현음마모(玄陰魔母)라는 전설적인 상고기인의 은거지를 찾을 수 있는 지도였다.

현음마모는 경이적인 무공뿐 아니라 호풍환우(呼風喚雨)의 신술(神術)마저 지녔었다고 알려진,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전설적인 고수였다.

무림 역사를 통틀어 봐도 현음마모만큼 강했던 여인은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현음마모가 남긴 절기를 익히기만 하면 흑요설은 자신을 농락한 세상의 모든 사내들을 몰살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그녀는 현음마모의 은거지였던 이곳 현음동천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음동천 어디에도 현음마모의 유학(遺學)은 남아있지 않았다. 흑요설이 현음동천에 들어왔을 때는 숱한 보물들 외에 무공과 관련된 유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에 흑요설은 절망에 빠졌다.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보물이 아니라 힘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연자실해 있던 흑요설은 오래지 않아 복수를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도를 생각해냈다.

본래 그녀에게는 남들이 지니지 못한 한 가지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사내들을 기쁘게 해주는 방중비법(房中秘法)이었다.

첫 번째 남편이었던 누란왕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배웠던 그 방중비법에는 사내의 양기를 갈취하여 젊음을 유지하는 채양보음(採陰補陽)의 술법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요설은 자신의 장기인 채양보음을 바탕으로 한 가지 독계(毒計)를 구상했다. 몇 명의 고수들을 현음동천으로 유인하여 내공을 갈취하는 게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 네 명의 고수가 선택되었다.

 

<서역사천왕(西域四天王)>

 

당시 서역 일대를 주름잡던 최강의 무사들로 개개인이 한 가지 방면에서 가히 우내최강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었다.

 

-마화존자(魔火尊者)!

-천붕랑왕(天鵬狼王)!

-유사신령(流砂神靈)!

-파천도성(破天刀星)!

 

이들이 서역사천왕인 바, 중원무림의 역대 어떤 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실력을 지닌 절세고수들이었다.

개개인의 내공이 오갑자(五甲子) 이상이었던 그들을 혹자는 중원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와 비견하기도 한다.

서역무림, 아니 변황무림이 배출한 최강의 고수들인 서역사천왕은 당시 서역을 사분(四分)한 채 웅거하고 있었다.

흑요설은 그들에게 은밀히 현음마모의 장보도의 사본(寫本)을 보내 현음동천으로 유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의도한 대로 네 명의 절세고수들은 거의 동시에 현음동천에 이르렀고 흑요설도 우연을 가장하여 그들과 합류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던 서역사천왕은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도 흑요설과 함께 현음마모의 유물을 찾았다.

 

* * *

 

<현음마모의 유물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그 계집이 노린 것은 다름 아닌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이었다. 그 계집은 빼어난 미모와 육체로 우리 네 사람을 차례로 유혹했고, 어리석게도 우리는 그 계집의 간계에 넘어가 그년의 육체를 공유하게 되었다. 그만큼 그 계집의 매력은 치명적이었다!>

 

회한과 원통함으로 가득한 글이 이어졌다.

만년한철의 철문에 글을 새기고 죽은 늑대 가죽의 거한은 바로 서역사천왕중에서도 가장 패도적인 인물이었다는 천붕랑왕이었다.

천붕랑왕은 다른 무공도 뛰어나지만 늑대와 날짐승을 다루는 재주에서도 일가를 이룬 기인이다.

이검한의 추측대로 그를 이곳 현음동천으로 데려온 철익신응은 천붕랑왕이 기르던 영물이었다.

 

* * *

 

흑요설이 쳐놓은 함정은 완벽했다.

서역사천왕은 초절한 무공을 지닌 만큼 자존심도 극도로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조차도 고금제일의 미인으로 여겨지기까지 하는 흑요설의 치명적인 매력 앞에서는 그저 무기력한 수컷에 불과했다.

서역무림인들의 생사를 좌지우지하던 서역사천왕이었건만 흑요설의 육체를 독점하기는커녕 그저 넷이서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어이없게도 그들은 매일매일 흑요설의 부름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역사천왕은 자신들의 몸에서 내공의 태반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렸다.

서역사천왕은 아연실색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그들의 막강한 내공 대부분을 흑요설이 갈취해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가히 천년(千年) 수위의 내공이 모두 흑요설의 한 몸으로 흘러든 것이다.

경악과 분노를 금치 못한 서역사천왕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했던 흑요설을 죽이기 위해 협공을 하게 되었다.

다른 무공은 차치하고라도 무려 천년 수위에 육박하는 전무후무한 공력을 지닌 마녀가 세상으로 뛰쳐나간다면 그 결과가 어떠하겠는가?

서역사천왕은 세상을 위해서라도 흑요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한 여인과 네 사내 사이에 생사를 건 격전이 벌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파천도성과 유사신령이 먼저 흑요설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파천도성은 무엇이든 벨 수 있는 파천삼식을 구사할 수 있고 유사신령은 어떤 공격이라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유사잠행술을 지녔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공의 태반을 상실한 터라 흑요설에게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치명상을 입었다.

천붕랑왕과 마화존자 역시 예외가 아니라 흑요설의 독수에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그렇기는 해도 천붕랑왕과 마화존자는 어찌 어찌 흑요설을 쓰러트릴 수 있었다.

먼저 천붕랑왕이 사력을 다해 분 초붕적(招鵬笛)의 힘이 흑요설의 혼백을 뒤흔들어 기절하게 만들었다.

그후 마화존자가 정신을 잃은 흑요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것이다.

 

* * *

 

<본좌와 마화존자가 천신만고 끝에 흑요설을 쓰러뜨리기는 했으나 완전히 죽이지는 못했다. 그 계집은 우리 네 사람의 내공을 융합하여 사람의 손으로는 죽일 수 없는 불사지체(不死之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에 우리 네 사람 중 최강자인 마화존자가 한 가지 금제(禁制)로 그 계집을 영원히 잠재우겠다며 침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마화존자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본좌이지만 과연 마화존자가 흑요설을 금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서 이에 경고하거니와 그대는 발길을 돌릴지어다. 그 대가로 우리 네 사람의 절기를 그대에게 남기노니 그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란다!>

 

천붕랑왕의 회한에 찬 글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여색이 원인이 되어 죽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치스러워 하는 천붕랑왕의 참담한 감정이 그 글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천붕랑왕이 남긴 글을 다 읽은 이검한은 마치 한 편의 전설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서역제일미인으로 이름난 누란왕후가 이 안에 잠들어 있단 말이지?”

이검한은 눈을 빛내며 철문을 주시했다.

(과연 그 여자가 얼마나 아름다웠기에 서역사천왕 정도 되는 인물들조차 미혹케 했단 말인가?)

이검한은 강렬한 호기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장 철문을 열고 들어가 누란왕후 흑요설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천붕랑왕의 경고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경계심도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본래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한 법이다.

이검한은 강렬하게 치미는 호기심과 궁금증을 억제하기 힘들었다.

이미 천 년 이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 여자가 아직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한 이검한은 손을 뻗어 철문을 밀었다.

그그긍!

육중한 철문은 그리 어렵지 않게 열려졌다.

(... 저럴 수가...!)

그리고 열리는 철문 안쪽을 들여다보던 이검한은 놀라 눈을 치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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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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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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