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4

 

           금강옥액의 기연

 

 

(확실히 이해가 안가는 일이 많았어!)

옛날 일을 떠올린 막비강은 얼굴이 벌개진 채 이를 악물었다.

돌이켜보니 막고천이 보인 행태들 중에는 도저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일 수 없는 것이 많았다.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아들인 막비강이 보는 앞에서 서슴없이 어머니 한경파를 겁탈하곤 했다.

아니 일부러 막비강이 있는 곳에서만 한경파를 농락하는 것같기도 했다.

처음으로 끔찍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인 이래 한경파는 막비강을 데리고 자지 않았다.

언제 또 막고천이 들이닥쳐 아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욕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막고천의 만행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모자지간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가 많았고 그럴 때 들이닥친 막고천이 완력을 써서 겁탈하는 것을 피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가! 빨리 나가!]

막고천이 자신을 강간하기 시작하면 한경파는 아들에게 그렇게 악을 써서 쫓아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막비강도 막고천이 어머니를 올라타면 급히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렇기는 해도 어머니를 농락하는 막고천의 음험한 웃음소리와 어머니의 숨죽인 오열을 듣지 않을 수는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어머니를 괴롭히는 막고천을 밀쳐내고 싶지만 그럴 힘이 유달리 허약한 막비강에게 있을 리가 없다.

 

(이글에 적힌 대로 혈검산장에는 돌아가지 말아야겠다!)

막비강은 염라철장이 남긴 쪽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가 비록 아직 나이 어리고 세상 물정에는 어둡긴 하지만 어리석지는 않다.

무공을 대성하기 전에는 혈검산장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염라철장의 글은 막비강의 마음 깊이 사무쳤다.

본래 금사혈검 막고천에게는 한 명의 본처 외에도 다섯 명의 첩이 있었다.

막비강을 낳아준 생모 한경파는 그 일처오첩(一妻五妾)중 셋째였다.

막고천의 본처는 당숙경(唐淑瓊)이라는 거만하고 기승스러운 여자로 막고천과의 사이에 일남이녀를 두었다.

본처 당숙경 외에 다섯 명의 첩은 각기 한 명씩의 자식만을 두었을 뿐인데 특이하게도 한경파를 제외하고는 모두 딸이었다.

막비강은 막고천의 자식들 중 나이순으로 따지면 넷째지만 아들로서는 둘째다.

첩에게서 난 자식들이라도 딸이면 그래도 예쁜지 막고천도 다른 첩의 자식들은 제법 귀여워한다. 안고 다니기도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쪽쪽 입도 맞추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아들인 막비강만은 늘 흰눈으로 보며 못 살게 굴었다.

아비가 그러니 집안의 다른 인간들이 막비강을 좋게 대해줄 리 없다.

막비강은 어릴 때부터 막고천의 본처가 낳은 자식들에게 온갖 경멸과 수모를 받으며 자랐다. 또한 혈검산장의 식솔들에게서도 첩의 자식이라고 업수히 여김을 받았으며, 심지어 낳아준 모친 한경파까지도 그에게 매우 냉담했다.

한경파는 원래 차가운 성격이기도 했으나 어느날 밤 자신이 막고천에게 강간당하는 장면을 막비강에게 보인 이후로는 찬바람마저 쌩쌩 돌았다.

원망과 회한에 찬 표정으로 막비강을 노려볼 때가 많았고 그때마다 막비강은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했다.

생모마저 냉대하는데 누가 막비강을 귀히 여겨주겠는가?

이런 냉랭하고 불안정한 환경 때문에 막비강은 항상 외롭게 지냈으며 심지어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신의 출생을 원망까지도 했다.

어릴 때부터 혈검산장에서 냉대를 받고 자란 것이 원인이 되어 막비강은 어둡고 말이 없는 소년으로 자란 것이다.

 

막비강은 서로 팔이 엉킨 채 마주 서있는 두 노인이 깨어나면 전후 사정을 물어 보기로 생각하고 기다렸다.

하지만 두 노인은 깨어날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가을의 새벽 공기는 매우 차갑다.

해서 막비강은 햇볕을 쬐기 위해 양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츠츠츠!

그는 금강옥액이 들었던 호로의 표면에서 무지갯빛 같은 보광이 발산하는 것을 발견하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무슨 그림 같은데...!]

그는 호로의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호로에서 뻗치는 황금빛 서광은 흡사 아름다운 산수화(山水畵)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햇살에 비추자 산수화 같은 경물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착각이었을까?)

그는 호로를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다시 닫아 두었던 호로의 뚜껑을 뽑고 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우직!

헌데 그 순간 쇠로 만들어진 호로의 뚜껑이 그대로 우그러드는 것이 아닌가?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막비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금강옥액을 복용한 덕분에 손 힘이 전보다 수십 배 강해져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훌륭한 세공품을 망쳤네!]

막비강은 아쉬워하며 뚜껑을 바로 펴려 했다.

본래 그 뚜껑은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그런데 막비강은 그것을 편다는 것이 이번에도 너무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빠직!

뚜껑은 펴지기는커녕 그대로 두 조각으로 뽀개지고 말았다.

[... 이런!]

당황하던 막비강은 다음 순간 흠칫 놀랐다.

펄럭!

뽀개진 뚜껑 속에서 작은 종이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이 종이는 또 뭐지?)

그는 의아해하며 그 종이를 주워 펼쳐보았다.

종이에 적힌 글씨는 너무 작아 보통 사람이라면 읽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금강옥액으로 시력이 수십 배로 증폭된 막비강도 온 정신을 집중해서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이런 내용이었다.

 

<청구단서(靑丘丹書)는 무학지보(武學之寶)로써 거대한 비석(碑石) 밑에 숨겨져 있다. 오직 인연이 닿는 자만이 얻으리라!>

 

[... 청구단서! 이것은 청구단서의 장보도(藏寶圖)로구나!]

글을 읽은 막비강은 뛸 듯이 기뻐했다.

어쨌든 그도 무가인 혈검산장에서 자란 탓에 청구단서와 금강옥액의 전설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혹시 내가 마신 이 호로 속의 즙액이 바로 금강옥액이 아닐까?)

막비강은 어렴풋이 짐작되는 바가 있어 새삼 호로를 들여다보았다.

(청구단서를 얻어 그 안의 신공절학을 익히면 내 일신에 얽힌 비밀을 푸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막비강은 매우 기뻐하며 염라철장의 유서인 종이쪽지와 호로에서 나온 종이를 같이 접어 품속에 간직하였다.

무공을 익힌다는 것은 그가 철이 들 때부터 열망하면서도 이루지 못한 희망이었다. 헌데 이제 무림 최고의 비전인 청구단서를 찾을 단서를 쥐게 되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염라철장과 무협제원이 아직까지 미동인 것에 생각이 미쳤다.

(혹시 이 두 분 어른은 선 채로 죽은 것이 아닐까?)

그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가까이 다가가 두 노인을 살펴보았다.

막비강이 다가가 노인들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 두 노인의 얼굴빛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의 얼굴빛과 똑같았다. 그리고 콧김을 살펴보아도 역시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 이미 오래 전에 숨이 끊겼구나!]

막비강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대범하다 해도 그는 아직 열 여섯살의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이었다.

(... 달아나자!)

그는 소름이 오싹 끼쳐 그대로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거기 섰거라!]

갑자기 등뒤에서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 오는 게 아닌가?

[히익!]

고함소리를 들은 막비강은 죽은 사람이 강시로 변해 쫓아오는 줄 알고 더욱 사력을 다해 질주했다.

화라락!

하지만 소리를 지른 그 사람의 신법은 쾌첩하기 짝이 없어 단숨에 막비강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앞을 막아 섰다.

[소장주! 진정하시오! 속하외다!]

막비강을 가로막아선 자가 급히 막비강을 안심시켰다. 그자는 얼굴의 절반이 시커먼 구레나룻에 덮인 건장한 장한이었다.

[! 이 아저씨였군요!]

상대방을 알아본 막비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자는 바로 혈검산장의 무사들 중 한 명인 규염장(糾髥掌) 이위(李衛)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위도 처음에는 막비강을 못 알아봤었다. 가냘프던 그의 체격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건장한 청년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장해진 몸과 달리 막비강의 아직 순진하고 치기가 어린 얼굴은 전혀 변하지 않아서 추격하는 동안에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소장주임을 알아본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막비강의 몸이 건장해진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이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장주께선 소장주의 안위를 걱정하시어 사방으로 사람들을 풀어 찾고 계십니다. 무사하시니 다행...!]

그렇게 말하던 이위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두 눈에서 기이한 광망을 발산했다. 그는 비로소 막비강이 들고 있는 이상한 호로를 발견한 것이다.

[소장주는 그것을 어디서 얻었습니까?]

이위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금강옥액은 황금빛 서기가 서린 호로에 담겨 있다!

 

그런 강호의 전설을 떠올린 때문이다.

하지만 막비강은 이위의 내심도 모르고 순진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이것이 왜 내 수중에 있는지 모릅니다.]

그가 이렇게 대답하자 이위의 태도가 갑자기 백팔십도로 변했다.

[흐흐! 어린 잡종아, 어서 그것을 내놓아라! 오늘이 바로 네가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이다. 만약 그 금강옥액을 내게 준다면 통쾌하게 죽여 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막비강은 이위가 흉흉한 기세로 다가서며 말하자 겁이 와락 났다.

[... 그만둬요!]

그는 비명을 지르며 홱 돌아서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으하하! 어딜 가느냐?]

하지만 막비강이 미처 다섯 걸음도 도망치지 못했을 때 이위의 흉측한 웃음소리가 들리며 한 줄기 산악 같은 경기가 등뒤로 엄습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막비강이 그것을 피해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퍼펑!

[아악!]

막비강은 등판에 강력한 장력을 얻어맞고 선혈을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위는 일장으로 막비강을 기절시킨 후 득의의 웃음을 지었다.

[보물을 지닌 것이 죄니 나를 탓하지 마라! 금강옥액은 마땅히 나 같은 영웅이 마셔서 공력을 증강시켜야지 옳다.]

그는 서둘러 막비강의 손에서 금색 호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호로 안에 금강옥액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속이 텅 비어 있는 호로를 들어 보며 이위는 가슴이 철렁함을 느꼈다.

(우라질! 그냥 빈 호로가 아닌가? 이제 산장으로 돌아가서 장주에게 뭐라고 말하지?)

화가 난 그자는 막비강의 옆구리를 힘껏 걷어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염병할 놈! 빈 호로는 네놈에게 돌려줄 테니 함께 땅속에 묻혀라!]

이위는 자신이 소장주를 살해한 것이 발각될까 염려되었고, 또 호로 속이 텅 비어 자기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지라 호로를 막비강 곁에 팽개쳐 버렸다.

그리고는 질풍처럼 몸을 날려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헌데 이위가 사라진 직후였다.

[으음!]

죽은 듯이 널브러져 있던 막비강의 몸이 꿈틀하며 움직였다.

사실 막비강은 죽은 게 아니었다. 비록 금강불괴지신은 못되었으나 금강옥액은 그의 온몸을 무쇠처럼 강인하게 만들어 준 상태가 아닌가?

이위의 장력이 바위를 부수고도 남음이 있었으나 막비강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단지 일시간의 충격으로 기혈이 막혔던 것인데 이위가 떠나면서 허리를 걷어차 준 덕분에 막혔던 기혈이 확 뚫려 버리기까지 했다.

외부의 타격에 반응하여 임독이맥 주위에 몰려 있던 금강옥액의 약력은 한순간 봇물처럼 터져 막혀 있던 생사현관(生死玄關)을 타통시켜 버린 것이다.

이를 일컬어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 해야 옳으리라.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