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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숨을 거래하다. (1)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은 금릉(金陵)에 사는 무림인들 사이에서는 꽤 알려진 곳이다.

크기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일 뿐만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꼬마라 할지라도 모두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어느 누구도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말만 무성했지 실제로 본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신화병기점은 낡은 중고 철검부터 시작해서 옛날 검이나 도를 모방한 물건들, 그리고 특이한 주문품에 이르기까지 무기라면 없는 것이 없다.

만약에 없다면 신화병기점 내에 있는 대장간에서 만들어서라도 준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화병기점의 병기들 품질은 그저 그렇다.

그저 그렇다는 말은 살 때는 최소한 마음에 들기 때문에 하는 말이고,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쓸 때는 실망하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병기를 구하기 위해서 금릉에 들린다면 몇 군데 병기점을 들려본 후에 한 숨을 푹 내쉬면서 다시 신화병기점을 찾는 경우가 많다.

그곳의 병기들은 최소한 살 때는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현천록(玄天祿)은 이런 천화병기점에서 밖으로 잘 알려진 유일한 사람이다.

병기점의 주인인 민노야(玟老爺)의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볼 수 있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해당한다.

현천록이 잘 알려진 사람이라고 해서 그가 한 사람의 몫을 충분하게 잘 해낼 수 있는 어른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제 겨우 열 두 살이며 신화병기점의 점원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현천록의 키는 같은 또래의 아이들보다 주먹 하나 정도 더 크다. 그 점만 제외하고 나면 그가 다른아이들 보다 특별히 달라보이는 것은 없다.

하지만 그는 무림인들 사이에 아주 잘 알려져있다. 그것은 그가 물건을 볼 줄 아는 특별한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 감별안은 다른 아이는 고사하고 어른들에게 조차 없다.

현천록의 그런 특이한 재능이 발견된 것은 그가 아홉 살 때인 삼년 전이다.

그때만 해도 병기점 안에서 잡심부름을 하면서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던 현천록은 어느날 담당점원이 자리를 비운 한 시간 만에 진열되어 있는 병기들 중에서 삼분지 일을 팔아버렸다.

담당점원이 돌아와 처음에는 강도를 당한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자를 보고는 깜짝에 깜짝을 몇 번 곱한 만큼 놀라고 말았다.

그래서 현천록은 세 살 때 신화병기점에 들어오면서 본 이후 실로 육년 만에 주인인 민노야를 만나게 되었다.

민노야는 그를 묵묵히 보다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으로 일하라고 했고, 그 이후에 신화병기점(神火兵器店)의 새로운 신화(神話)가 만들어지며 현천록은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다.

어느 누구라도 현천록이 추천하는 물건을 직접 보고 만져본다면 결코 사지 않을 도리가 없다.

누군가는 현천록은 병기와 사람의 인연을 잘 볼 줄 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현천록은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능력이 있고, 그 위에다 어떤 물건들의 특징이든간에 단 번에 기억할 수 있는 재주가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항상 즐거워하며 손님들에게도 그 즐거움을 나누어주는 재주 아닌 재주가 있기도 하다.

신화병기점의 사람들이 무공을 익혔다는 말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고, 심지어는 여러 가지 비밀기관이 점포 내에 설치되어 있다는 말도 있다.

아직 신화병기점에 뛰어들어 행패를 부린 자는 없지만 그 이유를 신화병기점에 다 돌릴 수는 없다.

신화병기점의 병기는 완벽하게 손님을 만족시키지 못할 지 몰라도 그 병기를 팔고 있는 열두살짜리 꼬마는 항상 손님을 만족시켜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나이도 어린 그가 이마에 띠를 두르고 작은 주판을 허리춤에 차고 혼자 점포를 지키지만 주인인 민노야는 걱정도 않는다.

 

어쨌든 현천록은 신화병기점의 정식 점원이었고, 그 때문에 간단한 글과 회계를 배우기도 했다.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현천록에게 장사를 잘 한다는 것보다 더 뿌듯한 기쁨이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을 많이 상대하다 보면, 자기가 글을 가슴 속에 담고 있다는 것이 돈을 가득 가진 것보다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종종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남이 모르는 두근거리는 비밀을 가슴에 간직한 것과 비슷한 기분이다.

현천록은 간단한 글을 배웠지만 점점 더 많이 알아갔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는 것도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기가 배운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한가지를 배우고 한가지를 알게 되면, 그것으로 그의 하루는 아주 보람되고 알찬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무엇을 배울 때 마다 자기가 전혀 새로운 존재로 변신한다고 믿고 있다.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있는 것의 차이는 존재와 무의 차이만큼이나 큰 것이고, 모르던 현천록에서 무엇인가를 더 알게 된 현천록은 분명히 서로 다르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항상 변신(變身)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손님의 발길 만큼의 매상은 항상 오르는 것이기에 장사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할뿐 그다지 염려하지는 않는다.

민노야는 현천록의 수완을 높이 사서 그에게 상당한 돈을 준적도 있다. 그러나 현천록은 단 한 푼도 축내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입는 것, 그 모든 것을 신화병기점에서 해결할 뿐만 아니라, 현천록에게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나이지만 그가 배우고 익히는 것들은 결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 것이며, 또한 그것들이 언젠가는 그를 다른 세상으로 인도해주리라는 믿음, 바로 변신에 대한 그의 믿음이 있다.

그런 생각은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항상 즐겁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죽립(竹笠)을 써서 얼굴을 반쯤 가린 흰 수염의 노인이 점포 안으로 들어왔을 때도 그의 마음 속은 항상 즐거운 음악을 듣는 것처럼 즐거웠다.

현천록은 명랑한 목소리로 죽립노인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노대협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시는지요?]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진열되어있는 이천 종에 가까운 병기들을 쭈욱 훑어보았다.

현천록은 그 사이에 죽립노인을 찬찬이 살펴보았다.

그러다가 병기를 살피던 죽립노인의 눈과 노인을 살피던 현천록의 눈이 마주쳤다.

노인의 눈은 일 순간에 칼날처럼 번득이며 현천록의 눈을 파고 드는 듯했다.

현천록은 병기점을 하면서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았지만 죽립노인같은 인물은 처음이었다.

죽립노인에겐 보이지 않지만 사람을 짓누르는 공포같은 것이 있었다.

현천록은 본능적으로 이 순간이 자기 평생에 가장 중요한 순간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느낌은 대체로 그에게 있어선 틀림없었다.

삼년 전에 정식 점원이 되는 날도 바로 이런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느낌은 세월 때문인지 오늘보다는 조금 약했었다.

현천록은 숨을 천천히 들여쉬면서 말했다.

[노대협께선 병기를 고르시는 것은 아닌 듯 하군요.]

죽립노인이 아주 탁한 음성을 내뱉었다.

[네가 병기를 볼 줄 안다는 아이 현천록이냐?]

현천록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죽립노인이 말했다.

[내게 맞는 병기를 골라라. 네가 권하는 병기면 어떤 것이든지 다 사도록 하겠다.]

노인의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다른 손님들과 진배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아래로 노인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애쓰며 말했다.

[저희 가게엔 노대협께 권해드릴 만한 물건이 없습니다.]

[....!]

죽립노인의 눈이 다시 번개불처럼 번득였다.

현천록은 간담이 서늘했지만 얼굴색을 바꾸지 않았다.

[어째서냐?]

노인의 음성이 은은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현천록은 죽립노인이 흑도의 유명한 고수일거라고 생각하며 말했다.

[노대협께선 제가 권해드리고 싶은 물건을 이미 가지고 계십니다.]

죽립노인은 아무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길이는 넉자세치, 너비는 두치반, 두께는 삼푼이고 무게는 두근반인 장검이 있다면 제가 권해드릴 테지만 안타깝게도 저희에겐 그런 물건이 없고 노대협께선 벌써 가지고 계시는군요.]

죽립노인은 한손으로 죽립을 슬쩍 만지면서 말했다.

[그럼 노부가 내 검을 네게 팔고 난 후에 다시 산다면 어떻겠는가?]

현천록이 말했다.

[파셨다가 다시 사신다면 보통은 두 배로 값을 치뤄야 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 즉 노대협의 경우에는 송구스럽지만 칠백배의 돈을 내야 됩니다. 그래도 하시겠는지요?]

스르르릉!

맑은 소리와 함께 새하얀 검날이 검갑에서 뽑혀 나왔다. 보통의 검보다 한자 가량이나 길고 한치는 더 넓은 아주 특이한 장검이다.

[합당한 이유를 대지 못한다면 네 목을 베겠다.]

노인은 손목을 살짝 움직였다.

서릿발같은 한기가 현천록의 목을 파고들었다.

현천록이 담담히 말했다.

[검은 만년한철로 만들었으니 보기드문 보검입니다. 하지만 길이와 너비가 범상한 검들과는 달라서 누구나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검을 쓰는 방법도 함께 얻지 못한다면 이 검은 오히려 가진 사람을 해치는 화근이 되기 쉽습니다.]

노인은 냉소하며 말했다.

[충분한 이유가 못된다.]

현천록이 계속 말했다.

[만약에 노대협께서 이 검을 제게 파신 후에 그냥 가버리신다면 저희 병기점에서는 하는 수 없이 이 검을 녹여서 다른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때는 검으로서가 아니라 만년한철 한 덩어리에 해당하게 되겠지요.]

노인은 수긍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노대협께서 이런 명검을 다시 구하시려고 한다면 만년한철 한 덩어리의 값보다 최소한 일천배는 더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해서 제가 칠백배를 받고 다시 팔겠다는 것은 아주 싼 값에 제공하겠다는 저희 주인님의 의지가 이미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철컥!

노인은 흰무지개가 서린 명검을 다시 검집에 꽂아 현천록에게 불쑥 내밀었다.

[약속을 지켜라. 칠백배다.]

현천록은 두손으로 받으며 말했다.

[사백육십냥을 드릴 수 있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노부는 한푼도 받지 않고 팔겠다. 나중에 다시 사러오마.]

[!]

순간 현천록은 말문이 콱 막혔다.

노인이 말했다.

[보름 후에 오겠다. 그때 되사도록 하지.]

무림의 기인들이 하는 일은 예측할 수가 없다.

(당했다!)

현천록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황당하기까지 하다.

검을 팔면서 땡전한푼 요구하지 않았으니까 그 노인이 되사러 올 때 역시 땡전한푼 받을 수가 없다.

칠백배를 버는 것은 이런 계산 앞에선 한심한 노릇이다.

현천록은 자기가 보름동안 꼼짝없이 그 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신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에 잃어버리거나 도둑맞는다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에구! 검을 그냥 보관하려는 생각이었는데 그걸 읽지 못했다니.)

입맛이 쓰다.

빨리 읽었으면 보관료라도 비싸게 요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여간 현천록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노인의 모습은 벌써 십여장 밖에 있었다.

그리고 현천록의 귀로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소리가 파고 들었다.

[노부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다. 어기는 사람은 시체가 되도록 해주기도 하는 사람이지.]

깨끗하게 한 방 먹었다고 인정한 현천록은 마음에서 툴툴 털어버리고 웃었다.

[내 속에는 내가 되길 원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 아직 시체는 없는데. 하하하.]

하지만 점원은 크게 웃어서는 안된다.

 

현천록은 저녁이 되어 결산을 하고 난 후에 내원에 들어가 민노야에게 보고하며 그 사실을 알렸다.

민노야는 탁자 앞에 앉은 채 자기 손으로 그 검을 뽑아서 검날을 만져보며 말했다.

[보검이군. 금석을 무처럼 자를 수 있는 검이야. 네 목이 베어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다.]

새파란 검날에 민노야의 옆얼굴과 촛불이 함께 일렁이며 비친다.

현천록은 눈을 반짝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노야! 이런 보검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습니다. 전설상의 오대명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보검인지....]

민노야가 말했다.

[오래된 검은 아니다. 기껏해야 일백오십년, 단 한 사람만이 사용했고 아주 많은 피를 흘렸다.]

현천록이 놀라며 물었다.

[그럼 그 노인은 일백오십살이 넘었단 말씀입니까?]

민노야가 말했다.

[그렇겠지.]

현천록은 아주 신기해하면서 물었다.

[일백오십살이면 강태공이 살았다는 나인데도 아직 정정했군요. 신선이 되지 않고도 그 만큼 살 수 있어요?]

민노야가 곱게 가꾼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천지는 광활하고 인간은 헤아릴 수가 없지. 무슨 일이든 다 있는게 세상이니라.]

현천록이 불쑥 물었다.

[한데 그 노인은 대체 무슨 이유로 검을 맡기고 이런 기행을 하는 걸까요?]

검의 날은 너무도 깨끗하여 아무런 흔적도 없다. 마치 쇠가 아닌 유리같다.

뱀가죽을 감아놓은 손잡이에 상아를 깎아붙여 놓은 고독(孤獨)이란 글자가 특이할 뿐이다.

민노야는 검을 내려 놓았다.

그의 얼굴 색이 밝지 못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져 현천록도 덩달아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주제넘게 너무 많이 물은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현천록은 자기가 아직 어리니까 그 정도 잘못 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호기심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에겐 왕왕 성가신 법이니까.

[그만 물러가거라!]

한마디 가볍게 던진 후, 현천록의 대답을 찾는지 민노야는 깊은 사숙에 빠져들어 움직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 ! !

태앵~ !

아직도 병기창에서는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현천록은 그 소리가 자기의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한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진 채 벗겨지지 않는 기분이었다. 아무 죄도 지은게 없는데 왠지 가슴이 조금씩 조여드는 괴상한 기분이다.

! 한 번, 아주 오래전에 갑자기 덮친 개에 물리기 직전에도 이런 기분이 들었었다.

현천록은 혹시 또 개가 어디 숨어있다가 덮쳐들지나 않을까 싶어서 발꿈치를 들고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살금살금 걸었다.

헌데 현천록이 자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민노야가 정성들여 가꾼 동백나무 숲을 지날 때였다.

반짝!

갑자기 어둠 속에서 하얀 손바닥 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는 천지가 캄캄해오면서 깊은 물 속으로 끝없이 가라 앉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비명도 질러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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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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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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