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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목숨을 거래하다 (2)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하늘에 총총한 별이 보였다.

옆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었으면 일어나거라.]

붉은 장포를 걸친 건장한 체구의 중년인이 등을 보인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었다.

현천록은 자기의 몸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전혀 낯선 곳이었다.

물어보자고 해도 갑자기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가 잘 생각나지 않았다.

마구 떠오르는 대로 이번엔 당신이 개대신이냐고 물을 수도 없으니까.

그때 중년인이 불쑥 말했다.

[내 제자가 되어 검법을 배워볼 생각이 없느냐?]

현천록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갑작스런 말씀이군요.]

[하하하하하!]

중년인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장부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거지 그런 애매한 대답이 어디있느냐?]

보통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그의 얼굴이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다.

하지만 네모난 눈에서는 광채가 어려있고 얼굴빛도 어둠속이지만 붉은 기운이 흐른다.

큼직한 얼굴에 낙천적인 웃음이 크고 부리부리한 눈과 어울려 정말 대장부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현천록이 말했다.

[소생은 대협을 처음봅니다. 한데 어찌 함부로....]

중년인이 돌아서서 빙그레 웃었다.

[어린 녀석이 억지문자는..... 집어치워라. 애들은 애들 말을 해야지.]

현천록은 조금 머슥해졌다.

장사를 하면서 상대를 추켜줘야 한다는 생각이 골수에 너무 깊이 박혀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를 납치해온 장본인에게 조차 그렇게 말하는 건 확실히 너무하다.

[억지문자가 아니라 장사꾼이 의례하는 말입니다.]

현천록은 마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으하하하하하!]

마주 앉은 중년인이 파안대소를 했다.

[나는 풍허객(風虛客)이라고 한다. 낮에 네가 어떤 영감을 상대하는 걸 보고 훔쳐야겠다고 생각했지.]

현천록의 눈이 동그라졌다.

[풍허객? 풍허객이었어요?]

하마터면 도둑이 아니고 풍허객이냐고 말할 뻔했다.

현천록이 풍허객을 직접 본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그러나 무림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며서 풍허객의 이름은 지겹도록 들어왔다.

풍허객은 원래 화산파(華山派)의 차대 장문인으로까지 지목되었던 기재였으나 무슨 이유에선지 화산파에서 파문을 당했다.

화산파를 나온 후, 소문에 의하면 화산에서 배운 검을 버리고 독자적인 장법을 하나 창안했다고도 하며, 전설적인 고수로 알려진 삼절오악(三絶五嶽)과도 겨루었다는 말이 있다.

그때는 또 장법이 아닌 검법을 사용했다는 말도 있다.

하여간 무림의 골치덩어리로 알려져 있는 풍허객에 대한 크고 작은 소문은 항상 끊이지 않고 전설처럼 흘러다닌다.

그리고 진짠지 아닌지 모르고 전설을 더욱 전설같이 만들어 버리는게 풍허객의 또 다른 별명이 허풍객(虛風客)이란 사실이다.

현천록은 호기심에 반들거리는 눈으로 풍허객을 보았다.

[호오! 이놈봐라! 마치 내게 대해서 알 건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 하하하하! 이놈아! 장사꾼이라 쉽게 믿지 못하고 나를 감정하는 거냐 아니면 내가 허풍객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눈을 하는거냐?]

풍허객이 껄껄웃었다.

현천록은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애석하군요. 대협께서는 정말 좋은 분이시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내게 엉뚱한 소릴 하면 볼기짝을 때려놓을 테다.]

현천록의 말이 뭔가 이야기를 만들어낼듯하자 풍허객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현천록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전 대협께서 탐낼 정도의 위인이 못됩니다.]

풍허객은 이상하다는 눈으로 현천록의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나서 고개를 갸웃 거리며 말했다.

[민정후(玟情候)영감이 벌써 손을 썼나? 그 영감은 벌써 삼십년 동안 제자를 받은 적이 없는데..... 아닌 것 같은데..... ]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희 노야께서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풍허객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민영감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겠군.]

현천록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민노야에게 허락을 받으려한다면 당연히 신화병기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한데 갑자기 풍허객이 소리를 꽥 질렀다.

[민영감! 아직도 보고만 있을 거요?]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아이구 깜짝이야!]

간이 떨어지는 것처럼 손이 아래로 툭 쳐졌다.

풍허객이 쳐다보고 있는 나무 사이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비추어 보였다.

현천록은 그가 민노야라는 걸 단번에 알아보았다.

[노야!]

현천록이 달려가며 소리쳤다.

민노야가 가볍게 소매를 저었다.

현천록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기우뚱거리며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그는 너를 해칠 사람이 아니다. 염려하지 말아라.]

풍허객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민영감은 확실히 나를 알고 있는구려!]

민노야의 키는 다리가 길어서 앉아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훨씬 커보인다.

노인답지 않게 몸도 꼿꼿하고 키도 클 뿐만 아니라 하얀 수염이 아주 위엄있다.

현천록은 자기도 나이를 먹는다면 언젠가는 민노야처럼 수염을 기르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민노야가 풍허객의 앞으로 다가오며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무림의 말썽꾸러기인 풍허객을 어찌 모르겠나?]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조금 호탕하게 살 뿐이오. 그동안 잘 있었소? 어째 좋아보이지는 않소.]

[악겁이 가득한 세상에 발을 딛었는데 어찌 좋아보일 수 있겠나?]

[하하하하! 쓸데 없이 머리 굳어지는 소릴랑 맙시다. 골치아파서 뚜껑열리면 당신과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으니까.]

풍허객은 다가오는 민노야를 보면서도 아주 친한 벗을 맞이하듯이 자연스럽게 대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 민노야는 더 다가와서 풍허객과 세자 정도의 거리에 마주 섰다.

그제서야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 어떤 미묘한 긴장이 현천록에게도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현천록의 팔다리가 뻣뻣해지는 느낌이었다.

민노야가 하얀 눈썹 밑은 새까만 눈을 빛내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 아이를 탐내는 건 풍허객으로선가 아니면 자네의 다른 신분으로선가?]

풍허객은 재미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이거야 원~ 쩝쩝! 무림은 영감을 잘 모르는데 영감은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단 말이야.]

[노부의 말에 답해주게.]

민노야는 풍허객을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응시한다.

풍허객은 수박밭을 털다가 걸린 개구쟁이같이 시큼털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말하면 어떻게 할꺼요?]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는 신룡(神龍)같은 인물이네. 구름 속에 숨은 신룡같은 숲 속에 숨은 바람같아서 흔적은 있어도 찾으려면 찾을 수가 없지. 삼절오악이 자네의 분탕질에 한숨만 쉬고 가만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하하하하하!]

풍허객이 숲이 떠나가도록 웃었다.

현천록은 손으로 귀를 막았다. 다리가 떨려오고 속이 미슥거리며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다.

내공이 깃든 웃음소리다.

신화병기점의 손님들도 웃을때는 억지로 공력을 끌어올려 과시하곤 했지만 풍허객의 웃음소리와는 비교조차 할수 없이 미미한 정도였었다.

현천록은 들은 말이 있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야단났다. 웃음소리로 내장을 뒤집어 죽이기도 한다는데 .....)

하지만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풍허객은 갑자기 웃었던 것처럼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알면 됐소. 하지만 영감도 저 아이에게 좋은 뜻만 품고 있는 것 같지는 않군.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영감이 무림에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는걸?]

풍허객은 자기 말이 옳다는 듯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후! 하긴 영감이라면 능히 그렇게 할 만도 하지.]

민노야의 눈썹 아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무슨 근거로 쓸데없는 소릴 하는가?]

풍허객은 느긋하게 바위에 기대면서 말했다.

[첫째로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도 무공은 조금도 가르치지 않았소. 후후후. 영감이라면 저 아이가 보기드문 인재라는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또 천하 고수들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힐 영감이 가르친다면 최소한 십오년 후에는 무림을 주름잡을 인재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소? 한 번 대답해 보시오.]

민노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 그럴 수도 있겠어. 하지만 자넨 노부를 과하게 평가했네.]

풍허객이 냉소하며 또 말했다.

[둘째, 삼십년 전에 무림을 떠난 영감이 내게 대해 너무 자세히 알고 있단 말이오. 나를 주목하고 있는 놈들은 대체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놈들이거든. 후후. 영감이 저 아이를 데리고 있으면서 제자로도 삼지 않는다면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결론 말고 또 뭐가 있을까?]

민노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옳은 말로도 들릴 수 있겠군.]

풍허객은 팔짱을 끼며 오만하게 말했다.

[그럼 아니란 말이오?]

민노야는 현천록을 힐끗 보며 말했다.

[노부가 자네에 대해 많이 아는게 불만이라면 내게 대해 말해줄 수 있네. 그리고 노부는 저 아이에게 양심에 부끄러울 짓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지. 애석하게도 자네의 고심한 분석은 아무 소용없네.]

풍허객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껄껄! 영감! 서로 더 이상 잡담은 그만두고 내게 넘기시오. 영감한테 신세 한 번 진 걸로 달아놓겠소.]

현천록은 조금 우습기도 어이없기도 했다.

신화병기점에서 일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종의 신분도 아니다.

의식주를 모두 그곳에서 해결하고 아무것도 모를 때부터 민노야가 길러준 은혜는 있지만 지금까지 밥값을 못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는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물건처럼 이리저리 건네질 그런 사람은 절대로 아니다.

한데도 오늘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영감은 물건을 팔면서 죽이니 살리니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자기를 훔쳐와서 민노야한테 넘기라니 말라니 하고 있다.

현천록은 지금까지 물건을 넘기고 말고 하는 주체였지 그 대상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열 두 살이면 밤마다 열 두가지 꿈을 꾸지만 한 번도 그런 꿈은 없었다.

그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상황을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영 거래가 자기 통제를 벗어나고 말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즉시 풍허객의 말에 끼어들었다.

[두분께선 더 이상 언쟁하지 마십시오. 주인어른, 그리고 풍대협님! 두 분은 지금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장사를 궂이 하시려고 하는 중입니다.]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일전을 각오하고 있지. 그런데 왜 남는게 없단 말이냐? 이기면 너를 얻게 되는데.]

민노야가 빙그레 웃었다.

[자신감이 대단하군. 삼십년 전의 노부를 보는 것 같네.]

풍허객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나보다 강한 사람은 있어도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당금 강호에는 존재하지 않소.]

이야기가 또 현천록을 젖혀두고 이어진다.

현천록이 다급하게 말했다.

[잠깐만! 잠깐만! 풍대협님!]

풍허객이 현천록의 이마를 툭치면서 말했다.

[아이들은 어른들 일에 낄 것 없다.]

현천록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저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지 주고 받거나 팔리는 물건이 아닙니다.]

민노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 말이 옳네.]

풍허객이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그말을 처음에 들었다면 조금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소. 하지만 요런 영악한 녀석이니 내 목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팔 하나쯤은 주더라도 될 성하지 않소?]

목소리가 아주 기백에 넘친다.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지금 너를 강탈하려는 도적을 만났구나. 어떻게 대처할 생각이냐?]

현천록은 우물쭈물했다.

[....저는.....]

노야께서 지켜주셔야 합니다하고 말하려하니까 물건을 지키는 건 주인이나 주인의 하수인이 하는 일이니까 노야를 주인으로 인정해버리는 결과가 될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어떻게 하려고 하니 무림의 말썽꾸러기라는 풍허객을 상대로 만만하지가 않다.

현천록이 불쑥 고개를 돌리며 풍허객에게 물었다.

[저를 제자로 삼아서 대협께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풍허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너를 제자 삼아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느냐?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 피곤하기만 할 따름이지.]

현천록이 말했다.

[그럼 왜 저를 제자로 삼으려하십니까?]

[왜냐고? 하하하하! 그건 저 영감이나 아까 그 삿갓 쓴 늙은이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지.]

풍허객은 아주 통쾌하다는 듯이 웃었다.

현천록은 가만히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대협의 제가가 되지 않겠다면 죽이시겠군요.]

풍허객이 말했다.

[하하! 내가 죽이기 전에 그 늙은이가 죽일 걸?]

현천록은 민노야에게 물었다.

[노야! 그 노인도 풍대협과 똑같은 이유에서입니까?]

민노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말했다.

[그 늙은이가 누군지 알고 있소?]

민노야가 조용하게 말했다.

[고독마검(孤獨魔劒) 불이태(不二台)!]

풍허객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소. 바로 고독마검 불이태요. 저 아이는 이미 불이태의 표적이 되었으니 내가 아니면 민영감 당신도 쉽게 지킬 수 없을거요.]

현천록은 이야기가 이정도까지 나와서야 오늘의 일들이 대충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아까 그 노인이 고독마검 불이태구나. 그 사람은 세외로 나간지 팔십년이나 되었다고 들었는데 아직까지 살아있었네. 어쨌든 고독마검이나 풍허객, 두사람 다 나를 제자로 삼으려고 이런 소동을 벌였으니 최소한 날 죽이진 않겠다.)

현천록은 처음부터 죽음에 대한 걱정 따위가 없는 낙천적인 소년이었지만 상황을 더 자세히 알게 되자 그 만큼 더 느긋하게 되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노야께서 천하에 열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기인이라는 건 정말 금시초문이다. 고독마검이나 풍허객보다 내게는 그 사실이 더 충격적이구나.)

그때 민노야가 말했다.

[자네 능력에 대해서는 알고 있네.]

풍허객이 민노야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물러서시오.]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없네. 나는 이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걸세.]

민노야가 현천록에게 말했다.

[얘야. 도적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냈느냐?]

현천록은 문득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달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입으로 거품을 물며 뒤로 쓰러졌다.

쓰러지는 그의 등이 활처럼 휘어져 머리가 땅에 세차게 부딪혔다.

민노야와 풍허객이 가까이 있었지만 너무도 갑작스런 상황이라 잡아줄 수가 없었다.

!

둔탁한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풍허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민노야와 풍허객은 동시에 현천록을 잡았다.

그러나 머리가 이미 깨진상태였다.

민노야의 손가락이 현천록의 머리 속으로 쑥 들어갔다.

피가 샘처럼 쏟아진다.

두 사람은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현천록의 몸이 식어가고 있었다.

[자살을 하다니! 이런 심약한 놈이었소?]

풍허객이 민노야에게 물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네. 다만 자네도 이 아이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사실뿐.]

풍허객이 냉소하며 말했다.

[내게 책임을 따지겠다면 언제든지 좋소. 영감과 한 번 싸워주겠소.]

민노야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멀쩡하던 현천록이 갑자기 거품을 물고 뒤로 쓰러져 죽다니.

암습을 받았거나 독에 당한 것도 아니고, 또 평소에 간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민노야는 탄식을 하면서 한 손을 휘둘러 땅을 팠다.

우우웅!

푸악!

민노야의 특이한 산수(散手)의 수법에 따라 땅에는 길죽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풍허객은 수직으로 솟아올라서 밤하늘 속으로 숨어 버렸고,

민노야는 현천록을 묻은 후에 그곳을 떠났다.

자라면 언젠가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무수한 씨앗들이 그러하듯이, 큰 나무는커녕 싹도 튀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인간의 씨앗들도 많은 법이다.

현천록도 그런 씨앗에 속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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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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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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