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 2장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얼굴 검은 미녀가 살고 있고 (2)

 

 

 

현천록은 숲의 나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름답고 태고의 신비마저 간직한 듯한 숲이지만 새들이 보이지 않는다.

벌도 없고 나비도 없고 벌레도 없다.

보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되었어요?]

[?]

현천록은 자기가 잘못 들었는가 싶어서 반문하며 보초를 보았다.

보초의 눈은 측은한 빛을 담고 있었다.

[어쩌다가 그 무공을 익히게 됐느냐고 물었어요. 덕분에 이곳에 태어나게 되었지만.]

현천록이 얼떨떨하며 말했다.

[전 무공을 익힌 적이 없는걸요. 아무 것도.]

보초가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인다.

[‘그 무공은 아주 특이하죠. 어쩌다가 운명적으로 마주치고 나면 특별히 익히려 하지 않아도 몸과 마음에 깊숙히 파고들어 버려요.]

현천록이 웃으며 말했다.

[정말 전 아무 무공도 모릅니다.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아직은 배우지 못한걸요.]

보초가 풋! 하고 웃었다.

꼭 바보라고 놀리는 웃음같다.

현천록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화는 나지 않았다.

보초가 물었다.

[미장! 아마도 사람과 물건을 보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겠지요?]

[조금. 하지만 별 것 아니었어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현천록은 사과를 손바닥에서 슬슬 돌리며 말했다.

[정확하게는 말할 수 없어요. 저도 잘 모르니까. 한데 어느 봄 날이었어요. 검을 만드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렇게 생긴 검은 요렇게 요렇게 쓰면 좋겠구나!’하고요. 그 후에는 뭘보든지 즉시 그에 알맞는 용도가 저절로 제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게 그뿐만 아니었어요. ‘저 사람은 저렇게 생겼으니까 저런 걸 가지면 잘 어울리겠구나. 또 저 사람은 뭘 어떻게 하면 어떻겠구나하는 생각까지 하게되었죠.]

보초가 말했다.

[그게 다 그 무공을 익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뜻밖에도 지금있는 우리들 중에서 가장 많이 익힌 것 같군요. 누구도 미장 만큼 신지가 트이진 않았거든요.]

[대체 제가 어떤 무공을 익혔다는 거죠?]

보초가 손짓을 해서 현천록을 자기 앞에 앉도록 했다.

[구장심조(九贓心照)라 불리는 무공이지요. 바로 이분께서 처음에 만드셨어요.]

보초의 손이 사과나무의 가지를 툭 건드린다.

[하하.....]

현천록은 웃기는 소리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그냥 듣고 있는 자기도 이상해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건 그냥 자기의 감정을 얼버무리는 웃음이다.

얼핏 보니 보초의 얼굴이 살짝 찌푸러져 있다.

현천록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구장심조는 이분이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이분은 만들었다고 말하지도 못하셨죠. 당신의 자질로는 결코 구장심조같은 절대적인 현공(玄功)을 창안할 수 없다는 걸 잘 아셨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구장심조는 스스로 생명을 갖고 있다가 이분을 통해서 나타난거나 다름없죠. 아주 특이한 무공이니까요.]

현천록은 곰곰히 생각하고 말했다.

[정말 그렇다면 창안이 아니라 발견했다고 해야겠군요. 어떻게 특이하다는거죠?]

보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는 사실 온전하지 못한 무공이죠. 구장심조가 온전했다면 이곳 생사탄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텐데..... 이분께서는 구장심조를 알게된 후에 직접 익히셨고, 그 때문에 생사탄이 만들어졌어요.]

현천록은 이해할 수 없어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보초의 흩어지는 듯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히며 들려온다.

[구장심조가 완전해지면 지금과는 또 다르겠죠. 하여간 구장심조는 온전하지 못했고, 어떤 이유에서든 익히게 된 사람은 이곳 생사탄에 들게 되죠.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된다고 할까요? 생사탄은 말 그대로 삶과 죽음 사이에 만들어진 또하나의 세계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실제로는 삶과 더 많이 겹쳐져 있어요.]

[생사탄의 힘이 이끌려 오게 된다구요? 그럼 저도 제발로 여기까지 온건가요?]

현천록은 처음으로 진지한 관심을 가지고 물었다.

보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장심조를 익히고 나서 칠년이 지나게 되면 대체로 첫장에 막히게 되죠. 그때 보통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게되죠. 기도 끊어지고 심장도 멎어버립니다. 그리고 나서 세시간 정도 지나면 다시 기가 돌게되고 심장도 뛰기 시작하지요. 하지만 몸에 한꺼풀의 껍질이 생기게 되요. 그 껍질이 단단해지기 전에 생사탄으로 와야해요. 그렇지 않으면 생사탄 밖에서 구장심조의 두 번째 장을 만나게 될테니까. 하여간 이건 신경쓰지 않아도 저절로 생사탄의 힘에 이끌려 오게 되니 걱정할 건 없어요. 미장이 여기 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리고 나서 삼년동안 껍질 속에서 영글어갔던 거죠.]

현천록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삼년이라구요? 제가 정말 삼년이나 잠을 잤단 말이예요?]

보초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놀라웠어요. 아직 어느 누구도 삼년 만에 껍질을 깨진 못했거든요. 구장심조를 아주 깊이, 우리 중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익혔다는 증거죠.]

현천록이 말했다.

[내 몸은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걸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자라겠지요.]

보초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는 이제 생사탄 밖을 벗어나지 못해요. 미장이 아직 어려 보이지만 바깥바람을 쐬면 금방 자라는 것처럼, 나는 바깥바람을 쐬게 되면 금방 늙고 말겠죠.]

보초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호호호. 여자는 아무도 봐주지 않을지라도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어하잖아요.]

현천록이 물었다.

[밖에 나가면 난 그전과 똑같을까요?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볼 수는 있습니까?]

보초가 말했다.

[보통 사람들이 생사탄을 볼 수는 없지만 우리들을 볼 수는 있어요. 다만 그들이 우리를 보지 않으려 한다면 볼 수가 없겠지요.]

현천록은 그녀의 대답을 들으면서 속으로 자기를 질책했다.

(말도 안돼. 내가 정말 이 말들을 믿고 있는걸까? 머리도 아프지 않은데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

보초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분이 익히셨던 구장심조공은 미장 당신과 비슷한 정도였을 거예요. 하지만 다른 뭔가가 더 있었죠. 이분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구장심조를 익히고 또 자기도 알지 못하는 힘으로 이분의 손에 닿은 모든 것들이 세상과 동떨어지게 만들었어요. 이곳 생사탄도 원래는 그냥 바다로 통하는 거친 여울이었을 뿐이었는데 이분이 여기에 사셨다는 것 때문에 이곳 전체가 세상에서는 사라져 버린 것이죠.]

현천록은 의미없이 중얼거렸다.

[재미있군요.]

보초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분께서는 그렇지 않았어요. 너무 슬픈 일이었죠. 결국 이분은 이곳을 떠나지도 못하고 외롭게 계시다가 함께 있을 친구들을 부르기 시작했죠.]

현천록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게 바로 구장심조공이 밖으로 나오게 된 이유겠군요.]

보초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 맞아요. 이분은 전부터 아끼던 물건들을 세상으로 보냈어요. 구장심조공을 새겨서요. 그 물건들은 어떤 계기로든 보려고 하는 사람들에겐 보였고 구장심조공을 자기도 모르게 익히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죠. 그리고 그들은 이곳 생사탄으로 왔고, 물건들은 다른 세속의 물건들과 뒤섞여 지금도 흘러다니고 있죠.]

보초가 고운 이를 드러내며 살짝 웃었다.

얼굴이 검어서 이빨이 모두 하얀 보석같이 보인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 물건들이 생명을 다하고 사라져 버렸는지 아니면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었는지 여기에 오는 사람은 정말 드물어졌으니까요.]

현천록이 물었다.

[그 물건들은 어떤 종류죠?]

[모두 아홉가지예요. 오죽편(烏竹片)이 있고 백설부(白雪符)가 있으며 또 현현도(玄玄刀)와 무극검(無極劒), 자룡배(紫龍杯)와 비취호(翡翠壺), 녹절장(綠節杖)과 청송포(靑松袍), 그리고 마지막으로 묵심환(墨心環)이 있군요.]

[그것들에는 다 구장심조공이 기록되어 있습니까?]

현천록이 물었다.

보초가 말했다.

[아니, 꼭 그렇지는 않아요. 대부분 구장심조공이 조금씩 기록되어 있지만 묵심환에는 이분이 자기의 공력을 나누어 담아 놓았지요. 그 때문에 그걸 얻는 사람은 저절로 구장심조공을 얻게 되죠. 내가 말한 순서대로 물건들이 밖으로 나갔는데 이 백년이 지나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묵심환을 내보냈다고 해요. 발견하고 손가락에 끼기만 하면 머지않아 이곳 생사탄으로 오게 될거라 생각했다죠. 하지만 우습게도 지금까지 묵심환 때문에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다들 다른 여덟가지 물건 때문에 오게 됐죠. 한데 미장! 갑자기 얼굴색이 왜 그래요?]

현천록은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보초가 근심어린 눈으로 계속 바라보자 마지못한 듯 머뭇거리며 자기의 왼손을 내밀었다.

[이건 내 비밀이죠. 아무도 몰라요.]

현천록이 푸념하며 말했다.

보초가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린 입도 눈만큼이나 동그랗다.

[세상에..... ]

현천록의 왼손 중지에서 거무튀튀한 가락지가 생겨나고 있었다. 마치 나무가 자라나듯이....!

[묵심환! 묵심환이군요.]

[병기점에서 심부름하다가 암기들 속에 섞여 있는 걸 발견했었어요.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지만 거짓말 한다고 핀잔만 들었죠. 정말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손가락에 끼고 있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내눈에도 안 보일 때가 많더라구요.]

현천록은 시무룩하게 말했다.

보초가 묵심환을 만져보며 말했다.

[미장의 구장심조공이 특별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군요. 놀라워요.]

 

x x x

 

[다른 사람들은 다들 어디서 뭘하죠?]

[모두가 일을 하고 있어요. 길을 찾고 있는 거죠.]

[어떤 길?]

[우리 모두가 처해있는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죠. 그럴려면 미완성인 구장심조공을 완성해야 하고, 지금의 동료들은 그 나머지 비결이 세상 속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여기서 나무가 되어 버린 사람들은 땅과 바람과 비와 햇살 사이에 그 비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고요.]

[완성한다는 게 어떤거죠?]

[아홉번을 넘어서야해요. 아홉겹 속에 숨어있는 마음과 자연의 습리를 밖으로 끌어 내야하니까요. 미장 당신은 겨우 한겹을 벗은 것 뿐이죠. 지겹도록 살게 되겠죠. 여덟 겹을 더 벗게 될 때까진.]

[여덟 겹을 벗고 나면.....?]

[그땐 사람이 될 수도 있어요. 나무가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아무도 사람이 되진 않았어요. 구장심조 속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의 큰 힘과 진리가 숨겨져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다가가는 것을 포기하지 못해요. 사람이 되면 너무 유한해서 그것을 깨닫기도 전에 죽고 말테니까요.]

[아홉겹을 벗은 사람도 있어요?]

[아무도 없어요. 한 사람만 아홉겹을 벗어도 생사탄은 사라지겠죠. 또 다른 생사탄이 만들어질지는 몰라도 이분의 생사탄은 사라져요.]

[한겹 한겹 벗을 때 마다 어떻게 다른가요?]

[처음에는 육신의 무게를 잃어버리게 되요. 깃털보다 가벼워져서 바람에 몸을 실을 수가 있을 정도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런 건 저절로 알게 되요. 미리 안다고 해서 어떤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나는 뭘해야 할까요?]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해요. 무엇이든지. 미장은 아직 젊잖아요. 무한에 가까울 정도의 시간이 있어요.]

[꼭 불노불사의 신선이 된 것 같은 기분이군요.]

[호호호! 신선 비슷하긴 하지만 실패작이죠. 그러나 이것 하나는 명심해요. 어쩌면 이 생사탄은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와도 연결되어 있는 몽환의 공간일 수도 있다는 걸요. 여기서의 시간은 긴듯해도 실제로는 찰라에 불과할 수도 있고 갑자기 사라지고 나면 그냥 백일몽을 꾼 것 정도로 느껴질 수도 있으니까요.]

[구장심조공을 익힌 사람의 마음이 지어낸 곳이니 어련할까요? 저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미장! 떠나기 전에 한 번 물어볼게요. 그냥 궁금해서 그러는데 무슨 일을 하고 싶어요?]

[아직은 더 알고 싶어요. 그리고 뭐든지 다 해보고 싶어요.]

[그 다음은?]

[변신(變身)을 하겠어요.]

[엉뚱하군요.]

 

X X X

 

뺨이 수축되어 팽팽해질 정도로 날씨가 차갑다.

눈발이 섞여있는 바람이 성긴 베옷 속으로 스며들어 가까스로 짜낸 체온을 휩쓸어가버린다.

하얀 눈들은 산과 들과 숲을 덮고 있고, 이제 금방 생긴 발자국도 조금씩 소리없이 덮어간다.

현천록이 다시 세상에 나와서 본 첫 모습이었다.

손이 시리고 발이 시리고 이빨이 시리다.

눈은 세상을 덮은 것만으로 모자라서 이제 사람까지 덮어버릴 요양으로 진눈개비 재주를 부린다.

마음 속의 생사탄에서 자기가 빠져 나왔는지, 생사탄 속에 있던 마음이 밖으로 나왔는지 알 수가 없다.

보이진 않지만 생사탄은 문만 열만 볼 수 있는 방안의 침상처럼 가까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 거리는 영원히 멀어지지 않을 것 같다.

생사탄에서 나올 때 보초가 준 고급스런 토끼가죽 옷이 그의 손에 들려있다.

열두살이던 몸이 세상을 대하면서 갑자기 커져서 몸에 걸쳤던 옷이 찢어지진 않았지만 꽉 끼인다.

하얀 눈밭에서 발가벗고 토끼가죽 옷으로 갈아입었다.

흰눈과 흰 토끼가죽 옷을 입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분간하기 힘들게 되었다.

현천록은 가슴을 활짝 펴고 차가운 바람을 깊이 들이켰다.

들여 마신 바람은 전신의 모공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

가슴이 확 트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