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2

 

            삶과 죽음의 여울에는 검은 얼굴의 미녀가 살고 있고

 

 

 

새로 생긴 무덤은 굶주린 짐승들에 의해 금방 파헤쳐진다.

그래서 상주(喪主)들은 무덤 곁을 떠나지 못하고 흙이 굳어지고 띠가 자랄 때까지 무덤을 지키기도 한다.

시체 썩는 냄새는 땅속에서 땅속으로 퍼져 나가고, 영민한 여우나 들개들이 그 냄새에 이끌려 찾아온다.

눈은 모든 추악함을 덮고 땅은 온갖 더러움을 덮어 자신과 동화시켜 버리지만, 밤은 종종 그 속에서 신비를 잉태하기도 한다.

 

--- 여기 피지도 못한 소년 죽어가니 들을 이가 없어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노라.

 

급하게 나무를 깎아 만든 묘비에 쓰여진 이상한 글은 아주 보기드문 명필의 솜씨다.

밤은 신비를 잉태했으나 신음은 묘비가 하도록 했다.

묘비는 꺾이고 무덤은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밤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그 무엇과 함께 사라져 갔다.

 

X X X

 

아주 어두웠다.

시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그의 눈으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주위에서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이 입안에서 맴도는 반벙어리의 소리인양 귀바퀴를 맴돌고 있다.

몸은 물에 젖은 솜뭉치 마냥 나른하게 늘어져 꼼짝도 할 수가 없다.

둥둥 떠서 허공을 헤매는 것 같기도 하고, 물속에서 물결을 따라 흐르는 것 같기도 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바람없는 무저갱 속을 끝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움직일 수 없다는 것,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살아온 날들의 기억이 미치는 가장 먼 곳에서 시작해서, 다시금 자신을 자각하게 된 이 순간 직전까지의 모든 일들을 머리 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 정말 처음으로 자기와 타인을 구별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처럼 혼자있는 자신을 발견했었다.

처음부터 무한히 그곳에 있었던 성도 싶고 무심코 걷다가 낯선 곳에서 갑자기 정신이 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생활들과 더불어 기억들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그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머리가 띵해오며 천지가 지금 보이는 암흑과 똑같은 색으로 변했을 때까지.

[막 부화하려고 해요. 조심해서 지켜 보세요. 이런 장면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무엇인가 빠져버린 것 처럼 흩어지는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도 저런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어요. 물론 그때는 아주 오래 전이겠죠. 사실 그동안 이런 일은 너무 드물었어요.]

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웅얼거리던 소리들 마저 없어지고 쥐죽은 듯 고요하다.

오직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나른하게 정적 속을 퍼져 나가고 그의 귀에 까지 스며든다.

아니, 그 소리는 그의 몸으로 스며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백 칠십 년 전에 한 번, 그리고 그때부터 제일 가까웠던 건 이백 사십년 전이었어요. 나도 다시금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어요. 이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은 모두 단절되어 버리는가 했거든요.]

그는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의문이 생기지 않았다.

그 음성이 갖는 부드러운 마력때문인지 아니면 의문자체가 그의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부드럽고, 달콤한 듯 하면서도 흩어지는 묘한 음성이 계속되었다.

[보세요. 빛이 나죠? 저 빛이 점점 더 강해지다가 사라지고 나면 그때부터가 진짜예요. ! 벌써 강해지는군요. 언제보아도 감탄스런 빛이죠. 너무 아름다워요. 북쪽의 극지에 갔을 때 본 극광보다 더 아름다워요. 모두 잘봐 두세요. 다시 이 빛을 구경하려면 이제 몇 백년, 아니 몇 천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음성이 갑자기 격해졌다.

[정점! 이럴 수가! 벌써 빛의 정점에 달했어요. 우린 생각보다 운이 더 좋아요. 좀더 일찍 보게 되겠군요. 이제 곧 저 빛이 사라지고 암흑처럼 깜깜해질 거예요. 하지만 어둠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걱정할 것 없어요. 모두가 이 극적인 장면을 볼 수 있어요....... 암흑.... 암흑이군요.]

그는 몸이 두 개로 나뉘는 것 같은 이상감각을 느꼈다.

무거운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내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그의 몸은 무게를 잃어버리고 깃털보다 더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너무도 가벼워 바람을 타고 흐를 것만 같았고 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귓전으로 떨리는 음성이 흩어지며 지나갔지만 더 이상 머리 속으로 스며들지는 않았다.

의식이 공중을 부유하는 꿈같은 상태가 얼마간 지속되었다.

그는 갑자기 자기 속에서 치민 갑갑함에 발을 쭈욱 뻗으며 몸을 뒤척였다.

순간 강렬한 빛이 눈의 조리개를 콱 수축시켰다.

[탄생했습니다. ! 여러분. 새로운 동료입니다. 아직 이 세상과 일에 익숙치 않을 테니 어디 있으나 항상 여러분이 돌봐주기 바랍니다. 이 새로운 친구의 이름은..... ....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모습이니까 우린 미장(未長)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이 친구도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 제각기 바쁠테니까 인사는 다음에 하도록 하세요. 그림자가 사라지지만 않는다면 이내 만나게 될 테니까요.]

그가 빛에 적응하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상한 빛들이 천장을 스며들어온 빛에 의해 점점 작아지며 소멸하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은 제자리에서 타서 없어지는 유성처럼 밝게 빛나며 사라져갔다.

! 그리고 그곳에는 공간이었다.

[미장! 활짝 웃어요. 여기서는 당연히 그래야 돼요.]

그의 앞에 불쑥 뭔가가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은 곤륜노(崑崙奴: 흑인)처럼 새까만데 눈은 커다란 보석처럼 반짝이고 가냘픈 입술이 짙은 자주빛을 띄고 있는 여자였다.

젊은지 어린건지 구별하기 애매모호한 나이같고 얼굴의 윤곽은 마치 새기다 만 다듬어지지 않은 목각인형처럼 이목구비가 날카롭고 선명했다.

긴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서 궁장을 했는데, 귀밑머리를 살짝 겉어 올리는 새까만 손에 하얀 손톱이 값비싼 장식품인양 귀여워보였다.

그리고 흰옷과 아주 잘 어울린다.

오똑한 콧날이 그의 코에 맞 닿을 만큼 가까이 있다.

그는 얼굴을 조금 뒤로 물리며 말했다.

[저는 현천록이라고 합니다. 실례지만 여기가 어딘가요?]

가냘픈 입술이 약간 샐쭉였다.

[먼저 웃어야 하는데...... 하는 수 없지요. 처음일 테니 자세히 설명하지 않을 수 없겠죠.]

현천록은 여자의 입에서 달콤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다.

꽃향기같기도 하고 사탕을 금방 먹었을 때 사라지지 않은 냄새같기도 했다.

여자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말소리가 깨어져 들려온다.

[당신 이름은 미장이예요. 그리고 나는 보초(步哨)라고 하죠. 여기는 생사탄(生死灘)이라 불리는데 나나 미장같은 사람들이 잉태되어 태어나는 곳이죠. 하지만 지금은 그 이름이 별로 의미가 없어요. 내가 태어났던 옛날만 해도 정말 거친 바닷가의 여울이었지만 지금은 이름만 남고 바다는 멀리 물러나 가버렸으니까요.]

현천록은 입술을 달짝여 말했다.

[전 죽은 것입니까 아니면 죽은 후에 다시 태어난 것입니까?]

보초가 흰 소매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가 말했잖아요. 여긴 생사탄이라고... 따라서 미장은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았어요. 미장이 해야할 일을 가르쳐 주죠. 이제 그만 일어나요. 미장!]

현천록은 보초의 손길을 따라 일어나 앉았다.

천장이 눈에 확 들어오지만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빛이 천장의 한가운데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사람 몸에 물에 젖은 종이를 붙였다가 마른 후에 떼어낸 것 같은 물체가 있었다.

약간 섬뜩하게 보인다.

현천록은 그것이 자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제 이름은 현천록입니다. 천록이라고 불러주십시오.]

보초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미장이죠. 그리고 우리들 중의 막내이기도 하고.]

[이건 당신네 문파의 전통입니까?]

현천록의 말을 들은 보초가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호호호호! 호호호! 아휴~ 우스워!]

현천록은 자기가 다시 어떤 문파에 잡혀 왔다고 생각했다.

고독마검이란 노인도, 그리고 풍허객도 그를 제자로 삼기 위해서 엉뚱한 짓들을 벌였었다.

보초라는 이상한 여자가 있는 이곳도 잠시 본 대로라면 풍허객과 그 의도에 있어서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신 문파의 이상한 의식들이 더 우습게 느껴집니다.]

보초는 가까스로 웃음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말했다.

[따라와요. 보여주지 않을 수 없군요. 하긴 그럴만도 하죠. 누구나 처음에는 그런 오해들을 하곤 하니까.]

 

현천록은 빛이 나는 천장을 가진 둥글고 큰 방을 빠져나와 보초를 따라 걸었다.

복사뼈 만한 크기의 희고 검은 자갈들이 가지런히 깔려있는 길을 걸어 푸른 하늘이 바다처럼 맑게 보이는 숲에 이르렀다.

참나무와 떡갈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가문비나무가 서있는 그런 숲이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가지들이 구불구불했다.

단 한 번도 손보지 않은 자연목들이 분명했다.

[여기는 우리들의 무덤, 말하자면 공동묘지라고 할 수 있어요.]

보초는 참나무 한그루에 손을 대고 고개를 들며 말했다.

현천록은 여전히 웃으며 말했다. 모든 게 장난 같았다.

[무덤은 어디 있죠?]

[전체가 무덤이지요. 이분도 전에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었답니다.]

옹이진 늙은 참나무를 만지는 보초의 얼굴이 무척 진지하다.

현천록은 감회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어쩌면 지금 그녀의 말이 모두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보초가 말했다.

[나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언젠가는 땅에 뿌리를 내리고 굴참나무가 되는 날이 오겠죠.]

현천록은 보초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무 슬퍼 마세요. 전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당신 이야기만큼 이상한 분은 아닌 것 같군요. 한데 왜 하필이면 모두 나무가 되는 거죠?]

보초는 현천록이 잡은 손을 끌면서 우거진 숲속 굵은 가지들 밑으로 점점 깊이 걸어갔다.

[하필이면이 아닙니다. 원하는 무엇이든 다 될 수 있어요. 심지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현천록은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힐끗 보초의 옆모습을 살폈다.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상한 매력이 그 얼굴에서 흐른다.

피부는 까맣지만 너무도 맑은 것 같다.

[하지만 다들 나무가 되길 원하더군요. 나도 이제는 그게 조금씩 이해가 되고....]

보초가 밝게 웃으며 현천록을 보았다.

현천록은 마주 씨익 웃었다.

적당히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잘 듣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웃음이다.

보초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말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태어나지 말아야 했어요. 천지의 이치에도 맞지 않고...... 또 우리 뜻에도 맞지 않았으니까요. 남들은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하죠.]

현천록은 손가락으로 십장 밖에 서있는 한그루의 자그마한 과일나무를 발견하고 말했다.

[저 나무는 아주 작군요. 제 키만한데요.]

보초가 현천록의 귀에 대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린 저분께 인사하러 왔어요. 불평을 하려거든 저분께 실컷 해요. 나도 옛날에는 그랬으니까.]

현천록은 긴가민가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초가 귀엽다는 듯이 현천록의 뺨을 톡! 건드리고 앞서 걸었다.

어린아이 주먹만한 황금빛 사과가 주렁주렁 달려있는 작은 나무의 밑둥만은 이 숲속의 여느 나무 못지않게 굵었다.

하지만 이내 붓끝처럼 뾰족하게 올라와 잎을 달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사과나무 앞에서 보초가 말했다.

[생사탄을 만든 분이고 우리들을 이곳으로 이끈 분이기도 하며 가장 먼저 나무가 되신 분이기도 하지요.]

현천록은 나무의 신비함에 감탄했지만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잎을 하나 가져도 될까요?]

보초가 사과를 하나 따서 현천록에게 내밀었다.

사과냄새가 폐부까지 스며든다.

[고마워요.]

현천록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는 걸요.]

보초가 옆의 풀밭에 앉으며 말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