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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祿如意

 

 

객실의 창으로는 별빛이 쏟아지고,

침대 곁에 가져다 놓은 화로(火爐)에서 파란 연기가 실날처럼 피어올라간다.

(이 녀석이 엉뚱한 짓을 하면 즉시 죽여 버려야지.)

이매봉은 손가락 끝에 은밀히 공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은근히 불안하기도 했다.

(정말 죽기는 죽을까?)

장검에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멀쩡했던 걸 생각하면 죽일 수 있다는 확신도 잘 들지가 않는다.

그리고 일곱째라는 장군묵도 마음에 걸린다.

살며시 눈을 떠보았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며 자기의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중이다.

(변신을 한다더니 겨우 거울이나 보는 거였나? 이 밤중에 설마 사내 녀석이 단장하고 나가는 건 아닐 테고... 아니, 혹시 모르지. 기녀를 찾아갈 수도 있으니까.)

이매봉은 취해서 잠든 척하며 현천록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현천록은 거울을 보고, 정확하게는 거울 속에 비치는 자기의 눈을 보면서 나직하지만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현천록이다. 나는 열다섯이고 아주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시를 사랑하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이매봉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속으로 잘도 변신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현천록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계속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루어질 것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매봉은 가소로워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서 비밀을 탐지해내고 하는 것도 바로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깔깔 웃고 말했다.

[! 이 녀석아! 제발 그만 웃겨! 네가 뭔데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그래? 황제한테도 그런 힘은 없어.]

현천록이 슬며시 웃었다.

[다 들었어요?]

이매봉이 침대에 가부좌를 하고 팔짱을 끼면서 콧방귀를 뀐다.

[들으라고 중얼거리는 소릴 누가 못들어.]

현천록이 말했다.

[내 말은 진짠 걸요.]

이매봉이 고개를 약간 돌려 흘겨보며 물었다.

[정말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현천록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변신만 하면 뭐든 안될까요?]

이매봉이 소리쳤다.

[그놈의 변신! 변신! 변신! 병신같은 녀석! 네가 뭐 손오공이라도 되는 줄 알아!]

현천록이 잠시 생각한 후에 말했다.

[으음! 변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변신은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것에 불과해요.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겠지만.]

이매봉은 기가막힌다는 듯이 혀를 찼다.

[하아! 이녀석 아예 날 상대로 사기칠려고 작정을 했군. 그럼 증거를 한 번 보여 봐!]

현천록이 흔쾌히 승낙했다.

[좋아요. 나와 함께 있으면 곧 알게 되겠죠.]

[뭐야! 벌써 허풍이었다고 고백하는 거야?]

이매봉이 이죽거렸다.

[급해할 것 없어요. 사람이 굳이 기다리지 않아도 시간이 되면 해가 뜨는 법이니까요.]

현천록은 천연덕스럽고 말하고는 방을 나가버렸다.

이매봉이 소리쳤다.

[어딜 가?]

현천록이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함께 자요?]

이매봉이 멍하니 있다가 깔깔 웃었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함부로 말하면 내 손에 죽게 될 거다.]

현천록은 잘 자라 하곤 문을 닫았다.

 

X X X

 

현무호(玄武湖)는 금릉성의 열세 개 성문 중 현무문 밖에 있는 큰 호수다.

호수에는 다섯 개의 섬이 있으며, 그 섬들은 모두 교각과 토담으로 호수 밖 땅과 이어져 있고, 섬마다 정자와 누각이 서있어 현무호에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달빛은 교교하고 달빛을 받은 눈은 은세계를 호숫가에 펼쳐놓는다.

하늘은 달과 별과 무수한 영웅들의 운명을 담고, 호수는 하늘을 담고 땅 위에 펼쳐져 있다.

성벽 위를 오가는 한 쌍의 파수꾼들 머리 위로 잠들지 못한 밤새들이 나는데,

삘릴리...!

엷은 선으로 하늘을 가둔 호수 위로는 끊일 듯 이어지며 애절한 퉁소 소리가 흐른다.

사람은 고적하여 머리를 떨구고 고향을 생각하며, 소리에 취한 노루 한 마리가 모가지를 길게 뽑아 달을 본다.

별똥별 하나는 하늘에서 떨어져 호수가로 사라지고, 나직한 사람의 한숨소리는 애꿎은 이의 가슴에 떨어진다.

퉁소소리 끊인 곳에 고루의 북소리가 이경(二更)을 알리고, 밤바람이 언 눈을 쓸어 은가루를 뿌린다.

계명사(鷄鳴寺) 활몽루(豁蒙樓)는 현무호를 보기에 제일 좋은 곳, 사람 있어 좋고 현무호가 있어 아름답다.

현천록은 호반을 거닐며 퉁소소리를 듣다가 취한 듯 끌려 계명사로 왔다.

활몽루는 잘 보이건만 들려오던 퉁소소리는 사라지고 찬바람이 귀청을 얼릴 듯하다.

계명사의 문은 닫힌 지 오래지만 현천록은 활몽루까지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음률은 모르지만 이 퉁소소리는 너무도 그의 심금(心琴)을 울려 놓았다.

현천록은 흰색 담장을 날아 넘었다.

계명사의 승려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아니면 추위 때문인지, 나 다니는 사람하나 보이지 않는다.

현천록은 발자국이 남지 않도록 눈 위를 걸으며 활몽루로 향했다.

활몽루에서 언뜻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청하는 손님은 오지 않고 청하지 않은 손님만 왔구만.]

창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현천록은 좀 더 다가가 불당의 그늘에서 누각 위를 보았다.

어깨에는 붉은 수실이 날리는 보검을 메고 머리에 통천관(通天冠)을 쓰고 푸른 도포를 입은 늙은 도사가 퉁소로 막 올라온 듯한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도사가 가리키는 인물은 현천록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오늘 낮부터 알게 된 사람이긴 하지만,

커다란 낭아봉에 삐죽삐죽 돋아있는 강철이빨이 달빛을 받아 번쩍거린다.

바로 생사탄의 일곱 번째라는 칠척거인 장군묵이다.

장군묵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소코도사! 당신은 불과 사흘을 기다렸지만 나는 삼년을 기다렸소.]

[무슨 돼먹지 못한 소리냐?]

늙은 도사가 호통을 쳤다.

장군묵이 웃으며 말했다.

[도사! 도사와 나는 인연이 없지 않소. 하나 그 인연을 말하기 전에 도사는 좀 너그러움을 지녀야겠소.]

늙은 도사가 흉폭한 살광을 발하며 말했다.

[건방진 놈! 감히 노도에게 망발을 하다니! 네놈 사조라도 노도앞에선 고개를 숙일 텐데...]

장군묵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이런! 도사! 잘 들으시오. 도사에게는 내가 불청객이겠지만 내게는 도사가 삼년을 기다린 손님이오. 손님이 너무 무례한 건 아니오?]

현천록은 장군묵을 발견한 후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낮에 만나본 장군묵의 성격을 생각해볼 때 저런 모습은 조금 이상한 데가 있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아주 멸시하는데 저 도사에 대해서는 꽤 참을성을 발휘하는구나. 저 도사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서 일까?)

늙은 도사가 휙 돌아서며 말했다.

[노도는 여기서 옛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그냥 간다면 몰라도 더 이상 귀찮게 한다면 네놈은 목을 두고 가야 할 것이다.]

장군묵이 도사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무당에서 삼백년 내 최고수라 불렸던 진양진인(眞陽眞人)이 이토록 답답한 놈일 줄이야.]

진양진인이라 불린 늙은 도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육십년 만에 노도를 알아보는 자를 만났군.]

장군묵이 말했다.

[나는 소코도사 당신에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삼년을 기다렸지. 쓸데없는 생각말고 순순히 대답해주시오.]

늙은 도사 진양진인이 코웃음을 치면 가운데 손가락을 둥글게 말았다가 튕겼다.

쌔앵!

날카로운 파공성이 일어나며 푸른 빛줄기가 장군묵의 왼쪽 심장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살짝 치켜들어 막으며 냉소했다.

[오행지(五行指) 중에서 청목지(靑木指). 백금지(白金指)와 적화지(赤火指)도 함께 펼쳐야지.]

진양진인이 흠칫 놀라 손을 멈추고 말했다.

[넌 누구냐? 어떻게 오행지를 알고 있느냐?]

장군묵이 껄껄 웃었다.

[오행지가 뭐 대단하다고 놀라? 태극혜검(太極慧劒)이나 자하천강신공(紫霞天罡神功) 쯤 된다면 몰라도.]

진양진인이 장군묵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장군묵이 빙그레 웃었다.

진양진인의 턱이 가늘게 떨고 있었다.

[설마... 설마... 당신이 본파에서 전설로 전해오는 창허진인(蒼虛眞人)은 아... 아니겠지?]

장군묵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도사한텐 안된 일이지만 옛날엔 그렇게도 불린 적이 있지.]

진양진인이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사대 제자 진양이 존장을 뵙습니다.]

장군묵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절이나 받자고 찾은 게 아니다. 나는 이미 무당을 떠났으니 내게 예를 차릴 필요는 없지.]

진양진인이 떨면서 말했다.

[본파의 제자들은 진인께서 아직 세상에 계신 줄 알면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장군묵은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도사가 살아있는 줄 알아도 마찬가지일 텐데.]

진양진인이 아무말도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장군묵이 말했다.

[아직 도사가 만나기로 한 친구는 오지 않는 모양이군.]

진양진인이 진땀을 흘리며 말했다.

[... 오늘이 정한 날의 마지막 날입니다. 반드시 날이 새기 전에 올 것입니다.]

장군묵은 난간에 걸터앉았다.

[삼년 전에 나는 도사를 처음 보았소. 그리고 그 중놈과 약속하는 것을 들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땐 도사를 붙잡고 물어볼 수가 없었지. 빌어먹을! 나도 쫓기는 중이었으니까.]

진양진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하문하십시오.]

장군묵이 불쑥 물었다.

[도사는 지난 한 갑자 동안 어디에 있었소?]

진양진인의 잔등이 가늘게 떨렸다.

떨면서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것만은... 제자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장군묵이 낭아봉을 흔들면서 말했다.

[도사가 무당 출신만 아니라면 벌써 머리가 터져 뇌수를 뿌렸을 걸?]

진양진인이 더욱 웅크리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제자는 맹세에 묶인 몸인지라...]

장군묵의 눈이 불길을 토할 것 처럼 이글거렸다.

그의 전신에서 뿌연 안개가 피어올랐다. 살기가 지나쳐서 유형화된 것이었다.

진양진인의 몸이 공포로 인해 덜덜 떨기 시작했다.

장군묵이 입을 열고 느린 어조로 말했다.

[삼년전에 나는 도사가 펼친 수법을 보았다. 그건 결코 내가 알고 있는 무당의 수법이 아니었지. 무당의 수법이라면 모두 알고 있으니 내가 모르는 무당의 수법일 수도 없고. 더구나 내가 알기로는 현 무림에서 그런 수법을 쓰는 문파나 방회가 없다는 게 문제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장군묵이 말했다.

[그때 도사는 오늘 만나기로 한 중과 대결하면서 무공도 아니고 진법(陳法)도 아닌 요상한 수법을 펼쳤었지. 난 그 수법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도사가 어디서 그 수법을 배웠고 어디에 있었는지도.]

바로 그 순간, 진양진인이 갑자기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허공으로 솟구쳤다.

퍼엉!

가죽 북이 터지는 듯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현천록의 눈에는 활몽루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것으로 보였다.

장군묵이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바로 이 수법이었지!]

현천록은 자기도 모르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앞에서 활몽루가 아지랑이로 변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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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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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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