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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세찬 바람 그치지 아니하니! 자 이제 첫 번째 변신을 시작하자!

 

 

현천록은 금릉으로 돌아왔다.

바람에 떠밀리다시피하여 성문을 들어서서 발이 이끄는대로 걸어서 신화병기점에 다다랐다.

사람들이 오가면서 하는 말들을 들으니 정말 세월이 변한 것 같다. 겨우 삼년이 흘렀을 뿐인데.

병기점에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점포를 보고 있다.

신화병기점에서 새로 사람을 고용한 적은 현천록이 있을 때는 한 번도 없었다.

[공자께선 어떤 물건을 찾으십니까?]

서른이 막 넘었을 듯한 점원이 인사를 하며 말했다.

현천록은 그 점원의 손에 들려 있는 주판을 보았다. 항상 그의 손때가 묻었던 주판인데 이제 주인이 바뀌어져 있었다.

현천록은 함께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전 손님이 아닙니다.]

점원이 눈치챘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 오늘 오신다던 그분이신 모양이군요. 제가 주인어른께 즉시 통보해드리겠습니다.]

점원은 현천록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인어른? 언제부터 노야를 주인어른이라고 부르게 됐지?]

현천록은 팔짱을 끼고 병기점 안을 휘휘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에 있던 물건들도 보이지만 전혀 보지 못한 새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전에 있던 것과는 아주 달라 보였다.

적어도 현천록의 눈에는.

현천록은 짧고 뭉퉁하게 생긴 칼을 하나 집어들었다. 손잡이가 말모양으로 생긴 꽤나 멋을 부린 칼이었다.

[이건 누구 솜씨일까? 노야께서 용케도 이런 물건을 내놓으셨네. 그래도 쇠는 아주 좋아. 극상품인걸. 차라리 녹여서 장아저씨가 새로 만들게 했으면 보기드문 신기가 나올 수도 있었을텐데.]

그때 안쪽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대 여섯명이 동시에 달려오는 모양이다.

아주 뚱뚱한 중년인이 겉옷을 걸치며 달려오고 있는 좌우에 몇 명의 젊은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그 뒤에서 소식을 전하러 갔던 점원이 달려오고 있었다.

[주인어른! 바로 그분입니다.]

중년인은 점포로 들어서자 마자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순찰사자(巡察使者)님을 뵙습니다.]

따라온 네 명의 젊은이들도 즉시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현천록은 얼떨떨해져서 말했다.

[당신들은 누구죠?]

중년인이 흠칫하자 젊은이들 중에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름을 묻고 계십니다.]

중년인이 황급히 대답했다.

[소인은 신화병기점의 점주인 동추겸(董追謙)입니다. 강호의 친구들은 칠지한(七指漢)이라 불러줍니다. 그리고 이들은 제 수하들입니다.]

현천록은 놀라며 소리쳤다.

[뭐라구요? 당신이 신화병기점의 주인이라구요? 그럼 노야께서는 어디 계시죠?]

중년인이 아주 당황하며 말했다.

[.... 사자님! 그 그전의 주인에 대해서는 소인 잘 모릅니다. ...소인은 다만 삼년 전에 이곳 신화병기점에서 일하라는 명을 받고 왔을 뿐입니다.]

현천록이 젊은이들에게도 물었다.

[당신들도 마찬가지입니까?]

젊은이들은 무엇이 두려운지 납작하게 엎드리며 감히 대꾸도 하지 못했다.

칠지한 동추겸이 현천록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소인이 혹시 잘못한 게 있다면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사자님께서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십시오.]

현천록은 머리가 아파왔다.

잘 아는 곳으로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곳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니 마찬가지 정도가 아니라 더 혼란스럽다.

[일어나세요. 전 여러분이 말하는 사자가 아닙니다.]

!

칠지한 동추겸이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말했다.

[차라리 소인에게 자결을 명해주십시오.]

동추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현천록은 기가막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늘 자기가 앉곤 했던 자리에 앉았다.

가만 있자니 장부를 살펴보면 뭔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노야나 이곳 신화병기점의 식구들에 대한 소식이라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다.

현천록은 발 옆에 있는 서궤를 열었다.

한달에 한 번씩 책으로 엮이는 장부는 모두 그곳에 차곡차곡 들어있다. 아니 그전에는 그랬었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서궤를 열자 더욱 긴장하며 가늘게 떨었다.

서궤가 텅비어 있었다.

[여기 있던 장부들은 다 어디갔지요?]

현천록이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동추겸이 식은 땀을 흘리며 말했다.

[...소인이 사자께서 내전으로 방문하실 줄 알고 안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생각했다.

(신화병기점도 나만큼이나 신고(辛苦)를 겪었구나. 하여간 이 사람들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 좀 더 알아보고 빨리 여기를 떠나자. 차라리 밖에서 알던 사람들을 만나 소문을 들어보는 것이 더 좋겠다.)

마음이 정해지자 현천록은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내전으로 모두 다 모아주세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동추겸이 쩔쩔 매면서 대답하고, 네 장점과 점원이 서둘러 달려갔다.

현천록은 동추겸과 함께 민노야가 정성껏 가꾸었던 동백나무 정원을 가로 질러 안으로 갔다.

동백나무들은 근년에 잘 다듬어지지 않았는지 거친 모습이지만 붉은 꽃봉우리를 눈 속에 드러내는 것도 있었다.

세월이 흐른 것을 제외하고 나면 변한 것은 없다.

현천록은 매일 같이 오가던 길을 걸으며 가슴이 뭉클해졌다.

감회가 새롭건만 사람들이 옛 사람이 아니라는 건 쓸쓸한 비애를 자아내게 한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너무도 익숙한 걸음으로 내전을 향하자 더욱 두려워하며 오히려 그의 뒤를 따랐다.

민노야가 주무시던 전각 앞의 마당에는 낯 선 사람들이 칠십여명 가량 석상처럼 서있다.

현천록은 민노야가 새벽마다 식솔들을 점검하던 모습을 그대로 흉내내며 전각 앞의 돌계단 위로 올라갔다.

쇠를 다루는 장인들, 가죽을 다루는 장인들, 그리고 금과 은을 다루고 정교한 세공을 하는 장인들이 구별을 지어 서있다.

현천록은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지만 모두가 낯선 사람들이었다.

동추겸에게 물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먼저 온 사람이 있었습니까?]

동추겸이 대답했다.

[소인이 제일 먼저 왔고 뒤이어 장인들과 일꾼들이 왔습니다.]

[그때 뭐 특이한 점은 찾지 못했습니까?]

[여기 살던 사람들은 아주 급하게 떠났던 것 같았습니다. 두 달만 지나면 꼭 그때가 되는데 불씨도 남아있었고 의복도 남아있었지요. 하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천록은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자기가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뿐 그들이 어떤 변을 당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저절로 조금 위안이 되었다.

억지로 웃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했다.

[하하하하! 이제 됐습니다. ! 그럼 제가 해야 할 일을 할까요? 준비해주세요.]

동추겸이 그제서야 얼굴 가득 웃음을 띄면서 말했다.

[그럼 이들은 일단 돌려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동추겸은 사람들을 흩고 난 다음에 현천록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민노야가 앉던 자리 앞에 장부가 수북하게 쌓여 있고, 그 옆에는 붉은 비단으로 싼 네모난 물건이 보였다.

크기는 가로세로너비가 모두 한자쯤 되는 것 같았다.

장부의 형식이 달랐다. 모두 새 장부고 이전에 그가 작성했던 것들은 하나도 없었다.

현천록은 더 읽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충 훑어보는 척하며 슬쩍 앞으로 밀었다.

동추겸이 재빨리 눈치를 채고 장부를 더 밀쳐 놓았다.

그리고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당겨 놓았다.

현천록은 이게 뭐냐는 듯이 동추겸을 보았다.

동추겸이 겸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자님의 노고에 조금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소인이 준비한 것입니다. 약소한 것이니 개의치 말고 받아주십시오.]

현천록은 계속 동추겸의 얼굴을 주시했다.

동추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회주님께 바칠 물건을 소홀히 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따로 준비해 두었으니 사자님께서 출발하실 때.....]

그제서야 현천록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걸렸다.

동추겸도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현천록이 말했다.

[가져 오세요. 지금 가야겠습니다.]

동추겸이 예상했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현천록은 웃음이 터져나오려 하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어떤 상황도 비극으로만 가득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게 소위 말하는 뇌물이겠지. 회주라는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세력이 대단한 모양이구나.]

현천록은 혼자 중얼거렸다.

[내가 가짜라는 걸 알게 되면 아마 죽이려고 들겠지?]

그때 동추겸이 손바닥만한 곽()을 두손으로 받쳐 들고 들어왔다.

자단으로 감싼 곽인데 열려 있고 그 속에는 손가락 모습을 본따 만든 작은 병들이 앙증맞게 들어있었다.

동추겸은 아주 조심스럽게 현천록의 앞에 곽을 놓았다.

한데 크기에 비해서 아주 둔중한 소리가 났다.

쿠웅!

무거운 물건을 올려놓은 것처럼 탁자가 약간 삐꺽거렸다.

[지난 삼년 동안 모은 금은동철석의 정화(精華)입니다.]

현천록은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낼뻔했다. 다행히 손이 빨라 재빨리 입을 막을 수 있었다.

동추겸은 그런 눈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말했다.

[회주님께서 각지의 금속을 보내주셔서 돌봐주신 덕분에 사명을 이만큼이나마 행할 수 있었습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추겸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동추겸은 현천록이 자기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이해했지만 현천록에겐 다른 의미였다.

점포에서 보았던 말모양의 손잡이를 한 짧은 칼의 비밀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극상품의 철이 너무 쓸데없이 낭비되었던 이유를.

현천록은 오보(五寶:금은동철석의 정화)가 든 곽을 보면서 속으로 침을 삼켰다.

신화병기점에서 자란 현천록이기에 장인들로부터 오보에 대한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오보를 직접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쇠를 다루고 금을 다루는 사람들은 만대의 영광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욕심이 왈칵 일었다.

자기만 입을 꾹 다물고 꿀꺽해버리면 그냥 자기 것이 되어버릴 물건이다.

심장이 약간 빨리 뛰기 시작한다.

[좋은 물건입니다.]

동추겸이 기뻐하며 말했다.

[사자께선 역시 보물을 보실 줄 아는 눈을 가지셨군요. 회주님께서 천하의 보물을 두루 구하시지만 사실 이만한 보물은 또 구하기 힘드실 것입니다. 이걸 얻기 위해서 사용된 금과 은, 구리와 철, 그리고 돌은 아마도 산을 몇 개 쌓고 남았을 것입니다.]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동점주께선 어떤 대가를 원하십니까?]

동추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얼굴이지만 감히 현천록의 앞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동추겸이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소 소인을 벌하지 않는 것만해도 무상의 영광입니다. 하 하온데 대가라 하오시면....]

현천록은 속으로 웃었다.

(난 당신이 생각하는 사자는 아니지만 장사꾼이오. 장사꾼은 속이는 게 능사지만 난 물건을 속이진 않으니까 당신은 임자를 잘 만난 셈이오. 내가 당신한테 속이는 건 정황만 속이고 물건은 속이지 않으니까 용서해주오.)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나는 당신을 벌할 자격이 없습니다.]

동추겸은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현천록은 사실을 말했지만 동추겸의 귀에는 공이 너무 커서 사자가 자신을 낮추어 겸양하는 것으로 들렸다.

현천록이 또 말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따로 없군요. 하지만 이 토끼털 옷은 꽤 따뜻합니다.]

동추겸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회주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이 동추겸 목숨을 바쳐서라도 충성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때 문밖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께서 순찰사자가 되셨음을 속하들이 앙축합니다.]

현천록은 속으로 아차했다.

일이 잘못되려니까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현천록은 회주가 순찰사자를 임명할 때는 토끼털옷을 준다는 사실을 그 순간에 깨닫기는 했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떨떨한 가운데 토끼털옷을 벗어서 동추겸에게 줘버렸다.

혹시 몸에 걸칠 만 한게 없는가 하고 두리번거리는데 동추겸이 토끼털 옷을 꼭 움켜쥔 손으로 붉은 비단으로 싸인 물건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자님!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습니까? 마침 속하가 준비한 선물도 바로 옷입니다.]

현천록은 붉은 비단을 풀어서 상자 속에 든 옷을 꺼냈다.

상자 속에는 아주 화려한 흰비단옷과 물소가죽으로 만든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도 천잠사(天蠶絲)로 짠 홍색 머리띠가 들어있었다.

그 홍색 머리띠는 만져보고 나서야 겨우 천잠사임을 알 수 있었다.

너무 화려해서 감히 몸에 걸칠 엄두가 잘 나지 않을 정도였다.

현천록은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옷을 입으며 말했다.

[이러면 당신이 너무 손해보는 것 아닙니까?]

동추겸이 황급히 손을 저어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말라는 시늉을 한다.

옷은 현천록에게 꼭 맞았다.

홍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르고 나자 어느 모로 보아도 현천록은 귀티나는 미소년으로 보였다.

동추겸은 입었던 옷 위에 토끼가죽옷을 걸치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소리치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점주님! 적입니다! 적이 침입을...]

[!]

동추겸이 고함쳤다.

[모두 물러나라. 내가 직접 나가보겠다.]

동추겸은 현천록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밖으로 날아갔다.

[으악!]

[! 아이구!]

여러 가지 비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현천록은 방안에 혼자 남게 되자 다시 의자에 앉았다.

민노야가 앉아있던 그 자리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나도 참 소인배구나. 버릇도 고치지 못하고 재물을 보고 욕심내서 속였으니 참나.....]

동추겸이 빠져나간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나도 도망쳐야 할텐데..... ]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동추겸! 이 찢어죽일 놈아! 감히 사자가 왕림했는데도 거들먹거리기만 해? 어디 내손에 한 번 죽어봐라!]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다.

동추겸의 호통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네 이년! 무슨 개뼈다귀같은 소리냐! 너야 말로 이옷을 알아보지 못하느냐! 나도 똑같은 사자의 신분이거늘. 감히 이곳에서 횡패를 부리려하다니!]

[호호호호! 네놈이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사자가 입는 옷을 함부로 걸치다니! 너같은 놈은 백번 죽어도 할 말이 없을 거야.]

현천록은 쳐들어 왔다는 적이 실은 적이 아니라 진짜 사자라는 걸 알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속은 줄 알면 사자보다도 동추겸이 더 길길이 뛸게 틀림없다.

현천록은 계면쩍게 웃었다.

[역시 나쁜 일에는 금방 번잡함이 생기는군.]

바로 그때 현천록의 바로 옆에서 깔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호!]

아주 맑고 고운 음성이었다.

현천록은 깜짝 놀랐다.

그의 옆에는 열일곱여덟 살 쯤 된 소녀가 그림자처럼 바짝 붙어서있었다.

분냄새와 소녀 특유의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찌른다.

현천록은 속으로 뜨끔했지만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푸른 비단옷을 입었는데 아주 고운 얼굴이었다.

생기가 넘쳐흐르고 입은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처럼 생글거리고 있었다.

[솜씨가 아주 좋던데. 자연스럽게 속이고 자연스럽게 빼앗고, 자연스럽게 따돌리고.....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러웠어.]

소녀의 음성은 정말 유리잔이 서로 부딪히는 것처럼 맑고 듣기 좋았다.

현천록은 웃으며 말했다.

[다 봤어요?]

[그럼 숨긴 게 있기나 하니? 발가벗기 까지 한 주제에.]

소녀가 킥킥거리며 웃는다.

현천록은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헛기침을 하면서 얼버무렸다.

[바른 행동은 아니었죠. 하지만 전 상인이었으니.... ]

소녀가 현천록의 어깨를 탁 치면서 호쾌하게 말했다.

[상인이면 어떻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면 어때?]

[?]

현천록이 뜻밖이라는 듯이 소녀를 쳐다보았다.

키는 현천록과 비슷하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도 현천록이 몇 살은 더 어려 보인다.

소녀가 말했다.

[세상엔 네가 태어나기 전에도 벌써 장사꾼도 많이 있었고 도둑놈이나 사기꾼, 강도도 많았단 말이야. 네가 그 무리들 중에 잠시 끼어봤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한테 당할 놈이면 어차피 다른 놈에게 당하게 돼있어. 이런 걸로 자기 변명하느라면 세상이 너무 피곤해져.]

현천록은 자기 이마를 철석 치면서 말했다.

[절묘한 말이군요.]

비명소리가 가까워진다.

소녀가 배를 잡고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동추겸 그 멍청이도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 어쩌면 매일 죽는 놈 중에 너 한녀석 더 보태져도 별로 다를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현천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수도 있겠군요. 그럼 전 도망가야겠습니다.]

[글쎄.....]

소녀가 생글생글 웃는다.

순간 현천록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두 팔을 활짝 펴고 새처럼 활개짓을 했다.

휘이익!

그의 몸이 정말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라 어느 새 창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현천록은 정말 자기의 몸이 우화등선하는 신선의 몸처럼 아무런 무게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하늘을 흐르는 바람을 타고 몸을 내맡게 순식간에 십 여 채의 지붕을 넘어갔다.

소녀가 입으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무공을 아는 녀석이었네.]

소녀가 큰 소리로 물었다.

[! 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

[현천록!]

멀리서 대답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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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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