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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는 소녀 (1)

 

 

산을 내려오니 넓은 길이 보이는 곳에 주점(酒店)이 있었다.

근처에 가기도 전에 벌써 음식 냄새가 진동한다.

어느덧 정오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점 앞에 내 놓은 의자와 식탁에는 다섯 명의 손님이 앉아서 술과 음식을 먹고 있었다.

임청우는 길가에 있는 자리에 앉으며 주인을 찾았다.

음식을 들고 가게에서 나오던 주인이 그를 발견하고 손님에게 음식을 건네 준 후에 다가왔다. 육십이 넘은 노인으로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사람이다.

임청우는 삶은 돼지고기와 만두, 그리고 술을 주문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눈이 십리는 들어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책없이 눈이 옆 자리로 계속 돌아가며 입안에 침이 고였다.

일행과 함께 앉아있던 옆 자리 사람이 그런 임청우가 못마땅한지 음식을 돌려서 보이지 않게 놓고 먹기 시작했다.

!

다행히 주인이 음식을 빨리 가져왔다.

?”

헌데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들고 주인을 보았다. 식탁에 놓인 것은 그가 주문한 음식이 아닌 한 그릇의 미음이었던 것이다.

급체에 걸려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네. 먼저 그것을 먹고 나면 주문한 것을 가져다주겠네.”

늙은 주인은 조금도 친절하지 않은 음성으로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며칠을 굶은 후이니 기름진 음식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다.

노인은 저간의 사정을 알기라도 하듯이 미음부터 가져다 준 것이었다.

임청우는 주인의 성심에 감동하며 미음 그릇을 들고 한입에 마셔버렸다. 미음은 이미 식어있어서 먹기도 쉬었다.

한데 미음 그릇을 내려놓는 순간 임청우는 주변 공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먼저 와서 음식을 먹고 있던 다섯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차! 했다.

에워싼 사람들은 검을 멘 세 명의 중년인과 상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청년이었다.

임청우는 그들의 시선이 하나 같이 자신의 허리에 걸려있는 혈도에 모여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임청우는 혈도가 금석을 두부 베듯 하는 보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아서 알고 있었다.

(강호인들이란 참으로 경우가 없구나. 낯과 밤을 가리지 않고 보물을 보기만 하면 뺏으려 드니...)

임청우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 실감났다.

연이어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검을 멘 중년인들 중 얼굴이 검고 키가 큰 사람이 입을 열었다.

본인는 화산파(華山派)의 상승칠검(常勝七劒)중 오검(五劒) 척광태(擲光太)라고 한다. 이 두 사람은 내 사제로 육검(六劒) 마진산(馬晉山)과 칠검(七劒) 동호복(董毫福)이다.”

임청우는 농산을 내려와 소림사니 무당파니 구파일방이니 하는 말들을 듣기는 했다.

그러나 구파일방에 속한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속으로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고 미음 그릇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상승삼검의 맞은편에 서있던 두 청년 중 약간 나이가 들어 보이는 사람이 말했다.

우리는 만상보(萬商堡)의 진가형제(眞價兄弟). 소형제는 그 칼을 우리에게 팔 생각이 없는가?”

만상보는 무림인들 중에서 재화에 대한 욕심이 많은 자와, 상인들 중에서 야심이 큰 자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이들의 세력은 중원 천하에 발을 뻗히고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사고팔지 않는 물건이 없었다.

생명을 팔고 사는가 하면 무림의 온갖 기보(奇寶)와 신병이기(神兵異器), 무공비급(武功秘級)을 거래하기도 했다.

진가형제는 만상보의 수천 명 상인들 중에서도 제법 이름을 날리는 자들로 실제에 있어서는 무림인들이 그들을 진가형제(眞假兄弟)라고 불렀다.

그만큼 수완이 뛰어나고 속임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

상승오검 척광태가 검을 뽑으며 냉랭하게 말했다.

진가형제! 즉시 이곳에서 사라져라. 이자는 마면혈도의 칼을 지니고 있다. 너희들이 감히 개입할 문제가 아니다.”

하하하! 그래서? 우리 형제가 가고 나면 혈도를 혼자서 차지하겠다는 것이오? 어림도 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이렇게 소리친 자는 음식을 임청우가 보지 못하도록 돌려놓고 먹던 청년이었다.

진가형제중 형쪽인 그자는 임청우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소형제! 자네가 그 칼을 우리에게 팔기만 하면 자네의 목숨은 우리가 지켜주겠네.”

한데 그자는 손바닥이 뜨끔함을 느끼며 황급히 임청우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 물러섰다. 그자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했다.

임청우의 몸속에 있던 무쌍층층공과 용조수가 합쳐진 공력, 즉 용조층층공이 은연중에 발동하여 그자의 손을 튕겨낸 것이었다.

그 공력의 대단함은 감히 자기들 진가형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자는 즉시 아우의 소매를 끌면서 은밀히 말했다.

가자, 이번 장사는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본전은 하는 것 같다.”

“...?”

진가형제의 아우쪽은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형의 표정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두말 않고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주점의 뒤로 돌아서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척광태 등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진가형제는 얕잡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무엇에 놀란 듯이 꽁무니를 빼버리자 눈앞의 소년에게 남다른 그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다.

척광태는 아무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어쩌면 혈도의 주인인 마면혈도가 주위에 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척광태의 시력과 청력으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임청우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미음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 놈이 어떻게 마면혈도의 성명병기인 혈도를 가지고 있을까?)

척광태가 은근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가지고 임청우를 보고 있을 때였다.

스스슷!

마치 안개가 이는 듯 하더니 임청우 곁에 서있는 동호복의 뒤에 황색 가사(袈裟)를 걸친 중이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

척광태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며 소리쳤다.

사제! 피해라!”

 

한 인간의 생명은 전우주보다도 더 고귀하다고 어느 누군가가 판결의 취지문에 써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전우주보다 더 고귀한 인간의 생명은 전혀 고귀할 것도 없는 다른 어떤 사실들 앞에 맥없이 죽어가기도 한다.

그 말은 너무 고매해서 사람에게서조차 멀리 떠올라가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상승칠검의 다섯 째 척광태는 인간이 얼마나 허망하게 죽을 수 있는가를 보고 있었다.

그의 사제인 동호복은 외침을 듣는 순간에 움찔했지만 죽음의 손길로부터 피하지는 못했다.

미친 마귀의 눈빛을 한 그 황색 가사의 중()은 합장하듯이 손바닥을 모았고, 두 개의 동발(銅鉢)이 합쳐지듯 그 손바닥이 합쳐지는 순간에 그 안에 있던 동호복의 머리는 압착기에 눌린 계란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척광태는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떤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부릅떠진 두 눈엔 불신과 공포를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직후 척광태의 머리는 몸에서 분리되어 툭 떨어졌다.

버러지 같은 놈들! !”

묘한 콧소리와 함께 척광태의 시체 뒤에 한 명의 노파(老婆)가 나타났다.

손에는 금방 사용되었을 법한 가는 천잠사를 감고 있는데 젊은 시절에는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을 것 같은 노파다.

그렇지만 결코 곱게 늙지는 못했다.

세파가 스쳐가며 만든 주름살일랑은 차치하고라도 얼굴 곳곳에 부자연스럽게 팽팽한 근육들이 남아있는 것은 노파의 마음에 풀리지 않는 긴장이 숨 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임청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화산파의 상승칠검중 육검 마진산이 죽는 모습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엔 숨 쉬고 있는 사람이 자기뿐일 것이라는 사실을....

차르르륵!

문득 임청우의 눈앞에 한 폭의 족자(簇子)가 펼쳐졌다.

비단폭이 스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펼쳐진 족자 뒤에는 험상궂은 표정의 거지가 서있다.

거지가 임청우의 눈을 노려보며 말했다.

보았느냐?”

보았습니다.”

거지의 눈빛은 종이를 태울 만큼 강렬하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임청우는 단지 보았다고 했을 뿐인데...

으하하하!”

그 즉시 거지의 살벌한 눈빛이 가시면서 파안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호호호!”

킬킬킬!”

거의 동시라 할만큼 노파와 중도 덩달아서 웃었다.

삼인의 웃는 소리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임청우의 심장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었다.

공력이 뛰어난 고수들의 웃음소리는 쉽게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도 뒤흔들곤 하는 것이다.

그 감정에 휘말리지 않으면 신체의 조화가 깨어지면서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문득 노파가 웃음을 뚝 그치고 싸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 있느냐?”

임청우도 즉시 되물었다.

여기 주인은 어디 있습니까?”

거지가 큰 입을 벌리고 히죽 웃었다.

늙은이가 이걸 본적이 없다고 하더군. 분명히 여기서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으면 그분을 내 앞에 데려오시오!”

임청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급체에 걸릴까봐 미음부터 내주었던 주점 주인을 생각하자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불끈 치솟는 무엇이 있었다.

네놈이 감히 흥정하려는 건가?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

날카롭고도 높은 소리의 음성으로 노파가 말했다.

임청우는 이 순간 격렬한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다.

비단 족자에 그려진 소녀는 그가 숲속에서 불과 얼마 전에 본 황의소녀였다.

그리고, 높고 낮은 휘파람 소리의 주인들이 바로 이들 세 명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 것이다.

한데 이들이 왜 엉뚱하게 자기를 닦달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가볍게 끊어놓기까지 하는가?

황의소녀를 쫓기만 한다면 누구를 죽이고 누구를 닦달하든 상관없다는 것인가?

당연히 그러해야할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건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어머니에게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을 받아왔기에 죽는다는 사실에 별다른 두려움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선 미워하는 감정도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임청우의 속에서는 빙산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을 만큼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고 있던 자들이 이젠 한갓 고깃덩어리가 되어있는 것이다.

그때 중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도 본 적이 없다는 소저를 이놈은 봤다고 하니 어쩌면 이놈과 소저는 아는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겠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소린가 하면서 중을 쳐다보았다.

중이 근처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소저! 이 근처에 계신 줄 알고 있소이다. 당장 나오시지 않으면 이놈을 죽여 버리겠소.”

중이 임청우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반반하군.”

하지만 그 반반한 임청우의 목에는 어느 새 노파의 천잠사가 감겨져 있다. 살짝 힘주어 당기기만 하면 무처럼 성둥 베어지고 말 터이다.

임청우의 입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음성이 새어나왔다.

힘이 있으면...”

나지막하고 탁한 음성이지만 폭발할 듯한 감정을 담고 있는 그의 음성은 세 사람의 이목을 그에게 끌었다.

임청우의 분노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노파를 비롯한 세 사람은 가슴이 뜨끔한 충격을 받았다.

임청우의 몸에서는 감히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위엄이 있었다.

분노를 담고 있는 그 눈빛에는 그릇됨을 용납하지 않는 정기가 서려있었다.

천지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가 있었다.

그것은 우협 장백승을 은연중에 닮아가는 그의 모습이었다.

기걸승(妓乞僧), 즉 기녀 차림의 노파와 거지 중은 그제서야 임청우의 면목을 바로 대하고 있었다.

거지같은 몰골이지만 한 자루의 보검과 보도를 가지고 있다.

청강사자검(靑鋼獅子劒)!”

거지가 먼저 임청우의 검을 알아보고 경악하며 주춤 물러섰다.

! 휘익!

노파와 중도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장 밖으로 피했다.

... 넌 우협 장백승과 어떤 관계냐?”

임청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무엇이건 벨 것 같은 검기가 청강사자검에서 뻗어 나와 주위를 압도하는 듯하다.

그만 가자! 만리향(萬里香)으로 봐서 소저는 아직 종남산(終南山)을 벗어나진 않았다.”

노파가 먼저 몸을 날려 사라지며 거지와 중에게 말했다. 그 음성에서만도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을 건드린 것 같은 불안감이 역력하게 배어있었다.

거지와 중도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임청우는 검을 늘어뜨린 채 묵묵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엔 너무 많다.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는 모두 책속에 매장 당해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석연치 않은 기분에 그는 눈썹을 찌푸리며 검을 거두었다.

그때였다.

덜컹!

길가 주점의 좌측 숲에 있던 굵은 나무 한 그루의 껍질이 열리더니 황의소녀가 튀어나왔다.

슈우우웅!

소녀는 임청우의 곁을 스치면서 그를 나꿔채 숲으로 달려갔다.

임청우는 순간 몸이 뻣뻣해짐을 느끼며 꼼짝없이 소녀에게 끌려 허공을 날아갔다.

황의소녀가 날아가는 곳은 노파 일행이 간곳과는 정 반대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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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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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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