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24

 

                단지맹정(斷指盟情), 손가락을 잘라 정을 맹세하다!

 

 

강미루는 요즘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는 녹지 옆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깔아놓은 나뭇잎을 헤치고 흙을 조금 파내자 접혀진 남색 옷자락이 보였다.

강미루는 잘 접은 남색 옷을 두 손으로 들고 밖으로 나와 백남빈의 머리 옆에 놓았다.

세상 모든 일이 바람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남빈의 가슴과 코에 손을 대보니 형부의 말대로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신가람이 보고 있음에 불구하고 백남빈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작별인사를 하는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가람은 스스로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의 광평검법은 검이 움직이기 전에 먼저 무형의 기운인 광평기(廣平氣)를 뿜어내어 상대방을 팔방(八方)에서 압박한다.

그런 후에야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상대방을 검으로 쓸어 베는 것이다.

일검을 교환할 때 신가람의 광평기는 팔방에서 백남빈을 압박하여 들어갔었다.

그러나 백남빈이 펼쳐낸 미녀각기검에는 순간적으로 깨달은 사자검결이 내포되어 있었다.

신가람의 광평기는 사자검으로 펼친 백남빈의 미녀각기검법에 휘말려 방향을 바뀌었고 검의 진로도 틀어져버렸었다.

그와 동시에 백남빈의 검에서 예리한 검기가 긴 나선형을 이루며 폭출되어 나왔다.

미녀각기검의 나선형 검기는 날아드는 동안 수없이 궤적이 바뀌었다.

그 때문에 어디로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같아서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래도 백전노장답게 신가람은 순간적으로 둔형보(遁形步)를 펼쳐 땅에 스치듯이 하여 백남빈의 뒤로 돌아 갔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소매자락은 백남빈의 나선형 검기에 베어져 허공으로 날렸다.

동시에 신가람이 둔형보를 펼치며 다시 내뿜은 광평기에 백남빈은 심맥을 다쳤던 것이다.

신가람이 수 십 종의 검법을 생각해 보았지만 백남빈의 미녀각기검을 깨뜨릴 만한 것은 없었다.

물론 자신이 백남빈에게 패할 리야 없겠지만 일초에 그를 제압한 것은 다분히 행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 젊은 무사의 검술은 얼마나 더 발전할 지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경지를 뛰어 넘고 말 것이다.

 

생각에 빠져있던 신가람의 눈에 강미루가 백남빈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는 것이 들어왔다.

마음에서 살기가 꿈틀거렸으나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안타까운 인물!"

강미루는 형부가 안타까워하며 백남빈을 높이 평가하는 소리를 듣고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라도 더 백남빈의 옆에 있고 싶었다.

그녀는 일어서며 형부에게 말했다.

"형부, 형부는 영웅이지요?"

무슨 뜻으로 하는 소리인지는 몰랐지만 스스로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는 신가람이었다.

대답 대신 슬쩍 미소만 지어 보였다.

"저를 이곳에 그냥 두고 갈 수 없어요?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가람은 이번에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임을 오랜 경험을 통하여 강미루는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 부탁만은 꼭 들어 주셔요. 그렇지 않으면 전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말겠어요."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는 강미루의 고집은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치 강하다.

죽겠다고 결심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

그걸 알기에 신가람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들어는 보자구나."

"이곳에는 설청묘라는 야생 고양이가 살고 있어요. 늘 갖고 싶었지만 우리 실력으로는 잡을 수 없었답니다. 형부가 그 고양이를 잡아 주기만 하면 두말 않고 따라 가겠어요."

신가람은 창평곡을 쭉 훑어보았다.

잘해야 만평 남짓인 곳에 숨어 있을 곳은 또 어디 있겠는가 싶었다.

이 귀여운 말괄량이 처제는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게 분명했다.

"어디 있는지는 아느냐?"

"우리가 전에 있었다는 보금자리를 찾아가 보았으나 옮겨 버렸는지 눈에 뛰지 않았어요. 형부는 능력이 신선과 같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어느새인가 강미루는 약간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고 있었다.

(설청묘는 찾기가 어렵다. 잡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체면이 있는 형부가 잡지 못하고 중간에서 돌아올 리 없다. 그러면 저 사람은 그 사이에 정신을 다시 찾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든 모습만이라도 보고 가야 저 사람의 모습이 영영 내 가슴에 남아 있지 않겠는가?)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다시 눈물이 어리는 강미루였다.

신가람이 못 본 척하며 물었다.

"전에 있었다던 야생 고양이의 보금자리는 어디냐?"

미루는 북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숲 뒤에 있는 절벽 틈이었어요."

신가람은 잠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는 발도 움직이지 않고 앞으로 미끄러져 나가더니 바람처럼 허공으로 솟구치며 숲으로 날아들어 갔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시위(示威)인 듯 했다.

 

신가람이 숲으로 떠나자 강미루는 즉시 백남빈을 품에 안았다.

사랑하는 임은 심하게 다쳐서 기절해 있는데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건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생각하자 스스로의 무능이 한탄스러웠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녹지의 물을 생각해 냈다.

녹지로 달려가서 신발로 가득 물을 떠왔다.

새끼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떨어뜨리자 물은 금방 우유빛으로 변했다.

향긋한 냄새가 피어오르는 그 물을 백남빈의 입을 벌리고 부어 주었다.

그리고는 정성을 다해 팔다리를 주물러 주자 백남빈이 마침내 눈을 떴다.

"당신, 아직 가지 않았군!"

강미루를 본 백남빈은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

강미루가 속삭이듯 말했다.

"저는 영원히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열흘 전 백남빈이 한 청혼에 대한 답이 이제야 나왔다.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 듯 했다.

"그 사람은?"

백남빈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자 강미루는 힘없이 북쪽 숲을 가리켰다.

"설청묘를 잡아달라고 했어요. 아마도 금방 잡아 오겠죠."

"미루, 우리 영원토록 잊지 맙시다."

백남빈은 격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다.

"제 가슴에 당신이 준 흔적이 남았는데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가 있겠어요."

강미루는 가슴을 누르며 쓸쓸히 웃으며 대답했다.

백남빈은 그녀의 그 말에 죽음보다도 더 깊은 맹세가 깃들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오늘은 그대의 형부를 따라 가시오. 언제고 반드시 대려장으로 찾아가서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소. 하늘과 땅을 두고 피로서 맹세하오."

백남빈은 오른손에 쥐고 있었던 사자검을 들어 강미루가 말릴 사이도 없이 왼쪽 새끼손가락 첫마디를 잘라버렸다.

!”

순간 피가 튀고 강미루가 비명을 지르며 그의 손가락을 감아쥐었다.

손을 마주 쥔 두 사람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 맞잡은 손을 통해 서로의 진심과 맹세가 절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 !"

조금 떨어진 곳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신가람이었다.

그는 벌써 양손에 한 마리씩의 눈같이 흰 설청묘를 잡아 쥐고 기척도 없이 돌아와 그들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피로 물든 손을 놓고 일어섰다.

"소녀 강미루는 영원토록 당신만의 사람이에요."

그녀의 말에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서 아무도 없었다.

신가람은 내심 걱정이 되었다.

보름 남짓 함께 지내면서 처제와 저 철령보의 청년무사 사이에서는 깊은 정이 생기고 말았다.

처제의 신세가 벌써부터 평탄하지는 않아보였다.

저 청년무사를 잊게 하는 방도는 가능한 빨리 멋진 사내를 찾아서 처제와 맺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떠나자. 진 밖에는 본장의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너를 찾아서 보름이 넘도록 돌아다니는 바람에 차질이 적지 않았다."

돌아서는 강미루의 손을 잡으며 백남빈이 품에서 하얀 옥패를 하나 꺼내어 주었다.

강미루의 손에 싸늘한 느낌이 전해졌다.

정표(情表)였다.

하지만 강미루는 살래 고개를 저었다.

"차가운 옥돌보다는 당신의 잘려진 손가락을 갖고 싶답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백남빈의 피 묻은 손가락 한마디를 손수건에 곱게 싸서 품에 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남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너는 우리가 떠난 후 잠시 기다렸다가 떠나도록 해라."

신가람이 백남빈을 보면서 느릿하게 말했다.

백남빈은 그에게 악의를 품을 수 없었다. 신가람은 적인 자기에게도 나름대로의 법도를 갖고 대한 것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표시를 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신가람은 그를 쳐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다시 중얼거렸다.

"정말 그를 많이 닮았어."

백남빈은 그가 누구를 지칭하는 지 알 수 없어 설핏 미소만 지었다.

강미루와 헤어지는 것이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지만 언제까지 이 골짜기에서 생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이제 털어 버릴 것은 털어버리고 지금부터는 자신이 해야할 일을 헤아리고 있던 백남빈이었다.

"삐이익!"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히히힝! 두두두!

흑왕이 옛 주인의 부름을 받고 바람처럼 달려왔다.

신가람은 강미루의 손을 잡은 채 나비처럼 너울너울 날아서 흑왕의 등에 앉았다.

신가람 앞쪽에 앉혀진 강미루가 비명처럼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남색상의(藍色上衣)! 남색상의를 펴보는 것을 잊지 말아요.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강미루의 말이 끝날 쯤 흑왕은 이미 동쪽 절벽까지 달려가있었다.

몇 번 흑왕의 모습이 바위들 틈에서 보였는데 다시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미루는 신가람에게 이끌려 창평곡을 빠져 나가버린 것이다.

 

강미루가 떠나버린 창평곡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백남빈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가 떠나며 부르짖던 목소리가 귀에서 꿈결인양 아스라히 맴돌고 있었다.

백남빈은 일어서서 동부를 향해 비칠비칠 걸어갔다.

잘려진 손가락에서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사자검의 전인이 된 후로 난 벌써 사랑하는 여인을 멀리 보내고 말았구나. 이것이 정말 사자검을 익힌 때문일까?)

정사초 사조의 한탄어린 말이 정말이란 말인가?

사자검의 전인의 과연 행복을 누릴 수 없는 운명인가?

그녀도 나와 같이 사자검결을 보았는데 그렇다면 과연 그녀도 같은 신세가 되어야한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고 말 것이다!

 

백남빈은 조사동에 들어가서 여러 사조 앞에서 한바탕 큰소리로 울었다.

한동안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해 졌다.

감정이 풀어져 버린 듯, 어느새 낙천적이기도 한 그의 성격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진정한 고수가 되자면 마음을 다스리는데 백남빈해져야 한다.

 

슬픔도 분노도 사랑도 툴툴 털어버리고 오직 호쾌한 마음으로 사자검을 휘둘렀다.

신가람과 대적하면서 백남빈의 검술은 새로운 경지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외고 있는 사자검결이야말로 절학 중의 절학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 아무리 힘껏 뻗어도 그의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검기만이 폭출되어 미녀각기검의 방향을 따라 그물처럼 뻗어나갈 뿐이었다.

신가람과 대적할 때 미녀각기검이 광평기를 되돌려 놓지 못했더라면 백남빈 자신은 신가람의 검이 이르기도 전에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칠 때까지 미녀각기검법을 펼쳤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