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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회생

 

 

종유동굴의 다른 곳과 달리 우윳빛 반석과 그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에는 얼음이 덮여 있지 않다.

극한의 냉기는 얼음조차 증발시켜버린다.

반석도 그렇지만 흑의여인의 몸은 너무 차가워 얼음이 쌓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으으으...!”

이검한은 헐떡이며 흑의여인에게 다가갔다. 흑의여인이 석실을 가득 채우고 있는 지독한 한기의 근원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흑의여인이 누워있는 우윳빛 반석에서도 살을 에는 냉기가 느껴지긴 한다. 아마도 한옥(寒玉)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우윳빛 반석에서 뿜어지는 강력한 냉기도 흑의여인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한기에 비하면 봄바람 정도로 느껴진다.

! !

이검한이 반석으로 다가감에 따라 공기 중에서 쇠가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일어난다. 극한의 냉기가 흑의여인의 몸 주변에 첩첩이 쌓여 있다가 요동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꺼운 얼음으로 덮어버린 막대한 양의 냉기는 바로 이 흑의여인의 그리 크지 않은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허억!”

마침내 반석 옆에 이른 이검한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반석 위에 누워있는 흑의여인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끄으윽!”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는 순간 이검한은 마치 얼음물에 뛰어든 듯 오싹한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었다.

흑의여인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극음한 한음기공(寒陰氣功)을 연마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흑의여인의 몸을 만지는 것은 고사하고 그녀의 몸 근처 일 장 안으로 접근만 해도 지독한 냉기에 침습당해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버린다.

하지만 화룡단정을 복용한 이검한만은 예외였다. 그의 몸속에는 활화산의 용암같은 열기가 끓어 넘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치치치!

이검한이 흑의여인을 끌어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수증기가 확 일어난다.

시뻘겋게 달궈진 쇳덩이처럼 변한 이검한의 몸과 얼음보다 몇 배 더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이 닿으면서 주변의 공기가 응결하는 것이다.

쿠오오오!

이검한의 몸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열기는 반석 주변의 얼음들도 녹였고 그에 따라 수증기는 폭발적으로 짙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 아래 깔린 흑의여인의 몸도 수증기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검은색의 옷이 흠씬 젖어 피부에 달라붙자 흑의여인의 뇌쇄적인 육체의 형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으면서도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몸매다.

크으... ...!”

흑의여인을 끌어안은 이검한은 그녀의 육감적인 몸에 필사적으로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얼음보다 더 차가운 여체를 끌어안자 조금은 열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이검한의 몸 속은 여전히 펄펄 끓는 기름을 마신 듯한 초고열의 상태가 지속되었다.

화룡단정의 가공할 열독은 차가운 흑의여인의 몸을 잠깐 끌어안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열독을 어떻게든 밖으로 배출해내야만 한다.

이검한은 살기 위해, 내장이 익어가는 듯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흑의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몸부림 쳤다.

푸시시시!

두 사람의 맨살이 부벼지면서 달군 쇳덩이를 물속에 집어넣은 것같은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일어난다.

츠츠츠!

그와 함께 일어난 수증기는 급격히 짙어져 이제는 밖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오랜 세월 차가운 냉기만 흐르던 종유동굴은 삽시에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이검한의 몸에 고여 있던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고열은 맞닿고 문질러지는 살갗을 통해 흑의여인의 몸속으로 노도같이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에 따라 두 사람의 몸 주변에서 일어나는 수증기는 점점 더 짙어져서 마침내 드넓은 종유동굴을 가득 메우기에 이르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체같이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끌어안은 이검한의 몸이 요동칠 때마다 축 늘어져 있던 흑의여인의 몸도 움찔 움찔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하아...”

심지어 흑의여인의 입이 벌어지며 미약하지만 숨결이 토해지기까지 했다.

부활(復活)!

그렇다! 흑의여인은 오랜 가사상태(假死狀態)에서 깨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흑의여인은 한 가지 술법(術法)을 스스로에게 걸어서 오랜 세월 잠들어 있었다. 엄청난 냉기를 일으켜서 육신 뿐 아니라 혼백까지 얼려 시간의 해()를 극복해온 것이다.

다만 이 술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흑의여인 스스로는 술법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게 그것이다.

누군가 용암처럼 뜨거운 양기를 그녀의 몸에 주입해주어야만 술법이 소멸된다.

그리고 흑의여인이 필요로 하는 막강한 양기는 이검한의 몸에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이검한이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문질러대는 살갗을 통해 주입되고 있는 그 순양지기가 흑의여인의 얼어붙어 있던 피를 덥히고 순환하게 만드는 중이었다.

두근 두근

마침내 오랫동안 활동을 멈췄던 흑의여인의 심장이 다시 깨어나 온몸으로 피를 내보내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끄윽! !”

그걸 알 리 없는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얼음보다 차가운 몸뚱이를 끌어안고 펄펄 끓는 피를 식히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휴우!”

어느 순간 흑의여인은 긴 숨을 토하며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리고 눈을 뜬 직후 흑의여인의 아미가 약간 모아졌다.

허억! ! 끄윽!”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는 소년의 얼굴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형...?)

소년의 얼굴이 자신의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어떤 사내를 닮아서 흑의여인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이내 흑의여인은 상대가 자신이 아는 그 사내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가 스스로 가사상태에 든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을 텐데... 사형이 아직까지 살아있을 리 없다. 살아있다 해도 어린 소년의 모습일 리도 없고...)

흑의여인은 긴 한숨을 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천기(天機)를 믿고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을 펼친 보람이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건너 뛴 후 다시 한 번 삶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으니...)

눈을 감은 흑의여인의 얼굴로 안도의 표정이 떠오른다.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이었던 그녀의 무공은 천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에 이르렀었다.

그리고 천기를 읽고 미래를 내다본 결과 자신이 술법을 펼쳐 스스로를 재우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무사히 깨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과 망설임은 있었지만 흑의여인은 자신이 읽은 천기를 믿고 가사상태에 들어갔었다. 회한과 부끄러움만 남은 당시의 삶을 단 하루도 이어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과 엮인 모든 인연이 소멸된 후에 다시 삶을 이어갈 생각으로 긴긴 잠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부활에 성공한 것인데...

깨어나 보니 아직 어린 소년이 자신의 몸을 끌어안은 채 몸부림치고 있는 중이었다.

(사형을 닮은 이 아이에 의해 부활한 것도 운명이겠지. 하지만 차마 부끄러워 다시 깨어난 사실을 내색할 수는 없구나.)

흑의여인은 애잔한 미소를 지으며 소년, 이검한에게 몸을 맡겼다.

끄윽! 누나... ... 미안해!”

이검한은 흑의여인의 육체에 열독을 토해내며 죄책감에 헐떡였다. 비몽사몽간에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몸뚱이의 주인이 전모 냉약빙인 것처럼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에게 가장 가까운 여인은 냉약빙이다.

화룡단정의 열독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끌어안고 있는 상대가 냉약빙인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온갖 정성을 기울여서 자신을 키워온 냉약빙에게 이런 짓을 하면 안된다.

이검한은 화룡단정의 열독을 해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흑의여인의 몸을 안고 있으면서도 냉약빙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이 녀석이 날 누구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

흑의여인은 조금 서운한 감정을 느꼈다. 몸을 허락하고 있는 것은 자신인데 정작 이 어린 놈은 자신을 다른 여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소년에게 그 여자가 누군지 물어보기는커녕 차마 눈을 뜰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래 전 시대의 인간인 자신이 어린 소년에게 몸을 허락하고 있는 이 상황이 너무도 부끄러운 때문이다. 과연 이검한에 의해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난 이 흑의여인은 어떤 내력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

 

(꿈이었을까?)

이검한은 우윳빛 반석 위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다.

깜빡 정신을 놓았다가 다시 깨어나 보니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수백 평 넓이의 종유동굴을 두껍게 뒤덮고 있던 얼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진 것은 얼음뿐만이 아니었다.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 위에 누워있던 흑의여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검한 자신의 몸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내장을 익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뜨거웠던 열기가 완전히 갈아 앉아있다.

그렇다고 화룡단정의 약효가 소멸된 것은 아니다.

단전을 살펴보니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잠력이 도사리고 있다. 양강의 성질을 지닌 그 잠력은 물론 화룡단정을 몸이 흡수하며 생긴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화룡단정의 기운은 몸 밖으로 발산되는 열기와 함께 소멸되었어야 했다. 이검한이 도중에 정신을 잃어 화룡단정의 약효를 흡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헌데 어찌 된 일인지 화룡단정의 기운은 거의 손실됨이 없이 단전 속에 얌전히 수납되어 있다. 마치 누군가 화룡단정의 효능을 모아서 단전에 넣어준 것 같은 상황이다.

(만년한옥(萬年寒玉)인 것같은 이 반석 위에 검은 옷을 입은 절세미녀가 누워있었는데...)

이검한은 당혹스러운 심정이 되어 자신이 누워있는 반석을 돌아보았다.

물론 반석 위에는 이검한 혼자 누워있다.

맨살에 닿는 반석은 매끈하면서도 얼음처럼 차갑다.

이검한이 짐작하는 대로 이 반석은 만년한옥이다.

천지가 처음 생길 때 냉기가 모여 이루어진 게 한옥이다.

그 한옥들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아서 천년, 만년이 지나도 훼손되거나 변형되지 않는 만년한옥이다.

주먹만한 크기의 만년한옥에는 동정호도 얼어붙게 만들 수 있는 냉기가 농축되어 있다.

당연히 만년한옥은 옥중의 옥으로 불리며 엄청난 고가에 거래된다.

이검한이 누워있는 크기 정도의 만년한옥이라면 그야말로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수 있다.

이검한은 하마터면 자신을 태워죽일 뻔한 화룡단정의 열기를 다스려준 게 만년한옥의 묘용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 누군가 이 종유동굴 안에 있었다.

하지만 그게 누군지 알아낼 단서가...

 

있었다!

 

주변을 살피느라 반듯하게 누워있던 몸을 조금 움직이자 등쪽에 무언가 걸리는 게 느껴졌다.

급히 일어나 보니 그리 두껍지 않은 상자 하나가 반석 중앙에 놓여있다.

두께는 한 치, 폭은 한 자, 길이는 한자 반 쯤 되는 납작한 상자인데 재질은 순수한 황금이다.

그 황금상자는 그리 두껍지 않아서 등에 깔고 누워있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이 반석 위에 누워있었던 여인이 남긴 것이다.)

딸칵!

무릎을 꿇은 이검한은 흥분을 억누르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이검한 자신이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흑의여인의 정체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들어있을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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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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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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