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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기연 아닌 기연

 

 

네 말대로 은원의 분간은 확실히 해야겠지?”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며 배시시 웃었다.

그래서 난 널 죽이는 대신 몸에 좋은 이걸 먹여줄 생각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오른손에 든 화룡단정을 이검한의 얼굴 위에 대고 흔들었다.

(... 안돼!)

흑요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검한은 기겁했다.

의술에도 상당한 지식이 있는 이검한인지라 화룡단정을 아무 준비 없이 먹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말아요! 난 그걸 먹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

다급히 외치던 이검한의 눈이 치떠졌다. 흑요설이 말을 하느라 벌린 그의 입에 화룡단정을 밀어 넣은 때문이다.

주르르

화룡단정은 이검한의 타액과 닿는 즉시 녹아서 액체가 되었다.

그리고는 코가 막힌 탓에 입으로 밖에 숨을 쉴 수 없게 된 이검한의 목구멍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갔다.

크헉!”

다음 순간 이검한은 두 눈을 부릅뜨며 온 몸을 퍼덕거렸다. 액체가 된 화룡단정을 삼키자마자 뱃속에서 엄청난 열기가 느껴진 때문이다.

마치 펄펄 끓는 쇳물을 삼킨 기분이다.

끄윽!”

이검한은 내장이 단번에 숯이 되어버리는 것같은 고통에 눈을 까뒤집었다.

화악!

그와 함께 그의 몸은 불에 달군 쇳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난 네놈에게 살수를 쓴 게 아니다. 그러니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말 따위는 하지 마라.”

화룡단정의 열독이 이검한의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확인한 흑요설은 이검한의 코에서 손을 떼었다.

파팟!

그리고는 그때까지 막혀있던 이검한의 마혈(痲穴)을 풀어주었다.

끄윽! !”

마혈이 풀린 이검한은 달궈진 가마 솥 안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몸부림쳤다. 내장이 익어 버리는 듯한 그 고통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

... 제발... 살려줘요 왕후님!”

이검한은 엉금엉금 기어가 흑요설의 다리에 매달렸다. 오직 그녀만이 초열지옥에 빠진 것같은 자신을 살려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더러운 손을 어디에 대느냐?”

!

흑요설은 매몰차게 발길질을 해서 이검한을 떨쳐버렸다.

끄윽!”

콰당탕!

흑요설의 가벼운 발길질에도 이검한의 몸은 바닥에서 몇 바퀴 굴렀다.

제발... 제발 왕후님... 너무... 너무 고통스러워요!”

모질게 나뒹굴었던 이검한은 다시 흑요설을 향해 기어왔다.

정 참기 힘들면 바닥에 머리를 찧어라. 지금 네놈이 겪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죽는 것뿐이니...”

흑요설은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홱 돌아섰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애원하는 이검한을 더 보고 있다가는 마음이 약해질 지도 몰라 서둘러 떠나려는 것이다.

호호호! 이제 시작이다. 세상에서 사내라는 족속은 나 흑요설에 의해 절멸될 것이다!”

흑요설은 독기서린 웃음을 터트리며 밀실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 가지 말아요 왕후님! 살려 주세요 제발...!”

이검한은 멀어지는 흑요설에게 손을 뻗으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밀실을 나가려던 흑요설이 멈칫 멈춰 섰다.

(... 혹시...)

이검한은 엄청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가운데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이 헛된 것임은 이내 밝혀졌다.

흑요설이 밀실 입구에 멈춰선 것은 마화존자가 남긴 유물, 마화삼보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었다.

이 따위 구리조각에는 볼일이 없다!”

흑요설은 마화삼보중 마화경은 발로 가볍게 걷어찼다.

빠캉!

흑요설의 발에 차여서 삼장 쯤 날아간 마화경은 석벽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마화경에는 마화사원의 경천동지할 무공비결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마화사원의 무공들은 모두 양강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서 여자에게는 맞지 않는다.

그래서 흑요설은 마화경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이놈은 제법 쓸모가 있겠구나!”

반면 마화신척을 본 흑요설은 눈을 반짝 빛냈다.

장차 사내놈들을 멸종시킬 때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마화신척을 집어 드는 흑요설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떠오른다. 마화신척에 서려있는 강력한 화기로 사내들을 태워죽일 생각에 미리 흥분되는 흑요설이었다.

호호호! 그래도 네놈은 행복한줄 알아라. 사내놈들이 세상에서 멸절당하는 것을 보지 않고 죽을 테니까!”

흑요설은 창자가 타들어가는 듯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이검한을 돌아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스슥!

직후 그녀의 모습은 꺼지듯이 밀실에서 사라졌다.

... 안돼요! 그냥 가면 안돼요 왕후님!”

이검한이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호호호 나 흑요설이 간다! 기다리고 있거라 더러운 세상아!”

흑요설의 광기서린 웃음소리도 삽시에 까마득히 멀어졌다.

끄윽! ... 너무 해요! ... 날 죽게 만들고 매정하게 가버리다니...!”

용광로에 빠진 듯 지독한 열기에 휩싸인 채 이검한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어느덧 이검한의 몸은 화로에서 오랫동안 달궈진 쇳조각처럼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푸스스! 화르르!

그와 함께 이검한이 입고 있는 옷가지에 불이 붙어 연기와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검한의 전신 모공에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져 나온 결과다.

그리고 타들어 가는 것은 옷가지뿐만이 아니었다.

이검한의 머리카락과 온몸의 털들도 연기를 내며 타들어갔다.

오래지 않아서 이검한의 머리는 몽땅 타고 재가 되어 버렸다. 마치 중같은 모습이 된 것이다.

콰득! 까드드득!

터럭과 옷가지를 태우는 연기에 덮인 채 이검한은 석실의 돌바닥을 양손으로 벅벅 긁으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삽시에 돌바닥을 긁어대는 손가락 끝이 터져 피로 범벅되고 있었다.

(... 이대로 죽고 마는 건가?)

이검한은 몸속에서 들끓는 엄청난 열기에 아득히 정신을 잃어가며 절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화기가 강력한 영약인 화룡단정을 준비없이 복용한 이상 죽을 수밖에 없다.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닌 흑요설이라면 자신의 몸속에서 들끓는 끔찍한 열기도 제어해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흑요설은 이미 밀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흑요설이 가버린 이상 이검한 자신을 구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생각해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헌데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스으으!

어디선가 한 가닥 서늘한 한기(寒氣)가 느껴졌다.

이 한기는 아주 미미하여 설령 흑요설이라 해도 쉽사리 감지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검한의 몸은 불덩이 그 자체가 되어있었다. 그 때문에 그는 극히 미세한 그 한기도 느낄 수가 있었다.

으으으!”

이검한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지금 쇳물을 들이킨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던 중이다.

그래서 비록 미약한 한기지만 마치 가뭄 끝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느껴진다.

... !”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한기가 느껴지는 곳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열사의 사막을 헤매던 나그네가 물 냄새를 맡고 샘물을 찾아가듯이...

 

***

 

이검한이 감지한 미세한 한기는 밀실 후면의 석벽에 세로로 길게 나있는 틈새에서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 가는 균열은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의해 방금 전 생긴 것이었다.

(... 저 벽 안쪽에 내 몸의 열독(熱毒)을 치료해줄 무언가가 있다!)

이검한은 끔찍한 고열 때문에 시뻘개진 눈으로 석벽에 나있는 틈새를 노려보았다. 비몽사몽간에도 그 석벽 뒤쪽에 자신을 구해줄 무언가가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 부서져라!”

이검한은 그 석벽을 향해 사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이검한은 몸 속에서 들끓는 지독한 열기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내공을 운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석벽은 내공이 실리지 않은 이검한의 주먹질 정도에 부서질 리가 없다.

퍼석!

하지만 단단해 보이던 석벽은 이검한의 주먹이 후려치는 대로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사실 석벽처럼 보였던 벽은 돌로 이루어진 게 아니었다. 흙벽 위에 회를 두텁게 발라서 석벽처럼 보였을 뿐이다.

흑요설이 천년 수위의 공력을 운용하면서 일어난 진동에 그 벽이 갈라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회가 칠해진 흙벽은 두께가 두자가 넘었다.

그 정도 두께의 흙벽을 한 주먹에 무너트릴 힘이 지금의 이검한에게는 없다.

푸시시싯!

헌데 무너져 내리는 흙더미에서 자욱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와 함께 흙이 타들어가는 매캐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검한은 알지 못했지만 그가 후려친 주먹에는 무쇠라도 녹일 듯한 강력한 열기가 실려 있었다.내공과 상관없이 저절로 일어난 그 극양잠경(極陽潛勁)이 흙벽을 일거에 무너트린 것이다.

물론 내공을 운용하지 않았음에도 이검한의 주먹질에서 강력한 극양잠경이 뿜어진 것은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이었다.

퍼석! 푸스스!

한 번 더 후려친 이검한의 주먹질에 흙벽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월동문 형태의 통로였다.

흑요설이 천여 년 동안 갇혀있던 밀실 후면에는 또 다른 밀실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두 개의 밀실을 연결하는 월동문은 회를 바른 두꺼운 흙벽으로 밀봉되어 있었던 것이다.

쏴아아아!

부서져 내리는 흙벽 안쪽으로부터 강력한 냉기(冷氣)가 쏟아져 나왔다.

쩌저정! 쩌적!

월동문 안쪽에서 몰려나오는 냉기는 얼마나 강력한지 흑요설이 갇혀있던 밀실 전체를 일거에 허연 서리로 뒤덮어버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냉기에 쏘이는 순간 한독(寒毒)의 침습을 받아 얼어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몸속에서 활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열기가 들끓고 있는 이검한에게는 그토록 강력한 냉기조차 그저 한 여름의 소나기같이 시원하게 느껴질 뿐이다.

으으으...”

끓는 물이라도 단번에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로 지독한 냉기를 뒤집어쓰자 혼미하던 정신이 어느 정도 돌아온다.

이검한은 정신을 차리려 애쓰면서 무너진 흙벽 안쪽을 살펴보았다.

 

흙벽이 무너지며 드러난 월동문 안쪽도 한 칸의 밀실이다.

다만 그 밀실은 흑요설이 갇혀있던 앞쪽과 달리 천연의 종유동굴(鐘乳洞窟)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하여 만들어진 형태를 하고 있다.

상당히 넓은 종유동굴인데 높은 천장에는 종유석이 매달려 있고 바닥에서는 기기묘묘한 형상의 석순(石筍)들이 자라고 있다.

한데 이 종유동굴의 벽과 천장은 두꺼운 얼음에 뒤덮여 있었다. 무언가 강력한 냉기를 품은 물체가 종유동굴 전체를 얼려버린 것이다.

크으! ... 저 여자로구나! 냉기의 근원이...”

엉금엉금 기다시피 월동문 안쪽으로 들어선 이검한은 헐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종유동굴 중앙에는 우윳빛을 띤 장방형의 반석(盤石)이 놓여 있는데 높이가 석자 쯤 되는 그 반석 위에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이 누워 있다.

여인이 걸치고 있는 칠흑같이 검은 옷은 춘추전국시대에나 유행했음직한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나이가 서른 살 전후로 보이는 그 여인은 실로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서역에서 고금제일미인으로 불려온 누란왕후 흑요설이라 해도 이 흑의여인보다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흑의여인에게는 그 빼어난 미모를 압도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바로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상이었다.

일견하기에도 흑의여인이 세상 사내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던 여걸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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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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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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