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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금제일인의 제자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한 장의 두루마리와 비단으로 엮은 책 한 권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사라진 흑의여인이 남긴 물건이겠구나!)

이검한은 두 가지 물건 중 두루마리부터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두루마리는 천잠사같은 것으로 짜여 진 듯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색이 바래지 않은 상태였다.

촤락!

두루마리를 펼치자 한 장의 그림이 나타났다.

이게 뭐지? 폭포를 그린건가?”

이검한은 그 그림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두루마리에 그려진 그림은 아주 기괴했다. 그저 시커먼 먹물 자욱이 아래위로 죽 그어져 있을 뿐이었다.

어찌 보면 폭포를 그린 그림 같기도 하지만 그냥 성의 없이 아래위로 여러 번 먹칠을 해놓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현기(玄氣)가 숨겨져 있다!)

이검한은 그 기괴한 그림을 본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폭포를 그린 듯한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섬광처럼 뇌리에 스치는 영감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은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렸다.

이검한이 다시 자세히 그림을 들여다보았지만 그저 평범한 폭포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나마 소득이 있다면 이 그림이 한 번의 칠로 그려진 게 아니라 수많은 선이 합쳐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낸 점이었다.

수백 수천 번의 붓 칠 끝에 완성되었을 이 그림에는 오묘한 현기와 신묘함이 내포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당장 비밀을 알아낼 수 있는 그림이 아니다.)

잠시 끙끙거리며 그림을 살펴보던 이검한은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그리고는 흑의여인이 남긴 두 번째 물건인 비단으로 엮은 책을 집어 들었다.

... 이런...!”

하지만 책자를 집어 들려던 이검한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푸스스스!

이검한의 손길이 닿자 그 책이 위쪽부터 재로 변해 부서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책은 거의 이천여 년 전에 쓰여진 것이었다. 비록 좋은 재질의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이긴 하지만 이천 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견디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이검한이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제법 두툼하던 책이 마지막 서너 장만 남은 상태였다.

 

<현음마경(玄陰魔經)>

 

비급의 표지가 부서지기 직전 그 같은 제목이 전자체(篆字體)로 적혀 있었던 것이 이검한의 뇌리에 떠올랐다.

(현음마경! 그렇다면 설마 그 흑의여인이 여자로서는 고금최강자였던 상고시대의 여기인 현음마모(玄陰魔母)란 말인가?)

이검한은 경악하며 흑의여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현음마모!

 

그렇다. 이검한이 폭주하는 화룡단정의 열기를 식히는데 도움을 받은 흑의여인은 바로 현음마모였다.

이검한은 그 사실을 몇 장 남지 않은 비급의 잔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몇장 남지 않은 비급에는 한 가지 씩의 장법(掌法)과 심법(心法), 그리고 현음마모가 남긴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현음마모라 불리던 불운한 계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자는 아마도 입에 올리기에 민망한 죄를 내게 지었을 것이다.>

 

전자체로 적힌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놀랍게도 현음마모는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자신의 육체가 이검한에게 희롱당할 것까지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는 천기를 헤아릴 수 있는 경지까지 이르렀던 듯했다.

 

<모두가 운명의 장난이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한 가지, 내가 이루지 못한 심원을 이루어 준다면 내게 진 빚을 갚는 것이 되리라. 그것은 이 글과 함께 있는 그림의 비밀을 푸는 것이다.

그 그림 속에는 가히 고금최강이라 할만한 절기 한 가지가 감추어져 있다. 나는 그 그림을 스승으로부터 하사 받은 후 오랜 세월 비밀을 풀기 위해 고심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

 

때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기, 혼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의 강호에는 마치 용 같고 신선같은 절세기인이 한 명 있었다.

그 기인은 난세로 인해 사라질 뻔한 상고시대의 무공들을 수습하고 정리하여 무림이 다시 부흥할 수 있는 바탕을 닦았다고 알려진 일대종사였다.

 

-원시천존(元始天尊)!

 

고금오대고수의 첫째이며 사실상 고금제일인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안배와 노력 덕분에 중원무림의 역사는 아득한 상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하지만 원시천존은 너무나도 오래 전의 인물이다.

무려 이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탓에 당금의 무림인들 대부분은 원시천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혹시 별호는 들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었는지, 어떤 무공과 제자들을 남겼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검한은 원시천존을 존경하고 그의 경지에 이르고자 부단히 노력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의 후계자다.

덕분에 일반 무림인들과 달리 이검한은 원시천존에 대해 비교적 소상하게 알고 있다.

고독마야의 말에 의하면 원시천존은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마지막 경지에까지 이르렀던 인물이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말 그대로 박대정심(博大精深)하여 역시 고금오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히는 고독마야조차 감히 헤아릴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무리 무공이 심오해도 윈시천존 역시 유한한 수명을 타고 난 인간일 수밖에 없었다.

백 살도 오래 전에 넘겨 이승에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원시천존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의 절기를 이어받을만한 인재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패했다!

원시천존의 무공은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원시천존 자신에 필적하는 기재가 아니면 온전히 깨우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천고에 보기 드문 기재였던 원시천존 정도의 재능이 같은 시대에 또 있을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원시천존은 차선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비록 자신만은 못해도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 불리기에는 충분한 두 명의 남녀를 제자로 받아들인 후 무공을 분할하여 전수한 것이다.

, 남자 제자에게는 양강(陽强)한 절기를, 여자 제자에게는 음유(陰柔)한 절기를 전수한 것이다.

 

-태양천자(太陽天子)!

-현음마모(玄陰魔母)!

 

그들이 바로 원시천존이 거둔 남녀 제자였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에게 절기를 전수받은 후 천하를 주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세상 어디에서도 삼초지적(三招之敵)을 만나지 못했다.

그만큼 원시천존의 무공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스승의 슬하를 떠나 무림으로 나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각기 하나씩 문파를 세웠다. 태양천자는 숭양무벌(崇陽武閥), 현음마모는 현음마궐(玄陰魔闕)을 창건했던 것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무림에 정사(正邪)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 의해 비로소 정사(正邪), 흑백(黑白)으로 나뉘는 무림판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동문이면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는 바람직하지 않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호승심(好勝心)이었다.

남에게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 성격 탓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의 관계는 결국 파경(破鏡)을 맞게 되었다.

호승심의 대상은 연인이라 해도 예외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단순히 연인관계가 깨진 정도가 아니었다.

연마한 무공과 성격이 상극이었던 탓에 두 사람은 서로를 철천지원수처럼 대하게 되었다.

그렇게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원시천존으로부터 호출을 받게 되었다. 드디어 천수를 다하고 우화등선하게 된 원시천존이 세상을 벗어나기 전에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기려 한 것이다.

원시천존은 부름을 받고 달려온 태양천자와 현음마모에게 두 가지의 물건을 내놓았다.

 

-태극보정(太極寶鼎)!

-초연심결(超然心訣)!

 

바로 이것들이었다.

태극보정은 원시천존에 의해 세워진 원시무맥(元始武脈)의 종사를 상징하는 보물이다.

본래 태극보정은 상고시대의 성군 순()이 구주(九州)를 순행한 뒤 만들었다는 구정(九鼎) 중 하나였다.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구정은 그러나 주()왕조가 유목민족인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동천(東遷)하는 과정에서 모두 유실되고 말았다.

그 구정중 하나를 우연히 얻은 원시천존은 그것에 태극보정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징표로 삼았었다.

, 원시천존의 진정한 후계자로 인정받으려면 태극보정을 물려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태극보정은 원시무맥의 종사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런 묘용도 없었다.

그에 반해 초연심결은 엄청난 유혹을 품고 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의 마지막 절기가 숨겨져 있는 바, 그것을 연마해내는 자는 제이(第二)의 원시천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원시천존은 제자들에게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중 한 가지씩 선택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게 되었다. 상징적인 보물인 태극보정과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초연심결중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는 실로 난제였기 때문이다.

오랜 고심 끝에 태양천자와 현음마모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태양천자는 태극보정을,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선택한 것이다.

태양천자는 고금최강의 무공을 얻는 것 보다는 존경하는 스승의 후계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스승의 상징인 태극보정을 선택했다.

반면 현음마모는 태양천자를 이겨보겠다는 호승심에 초연심결을 선택했다.

과연 두 사람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일까?

 

***

 

<어리석구나 종선(宗仙)! 자신의 그릇도 모르고 감히 스승님의 경지를 넘보다니...>

 

이어지는 현음마모의 글에서는 깊은 회한이 느껴졌다.

태극보정과 초연심결을 놓고 벌인 암투에서 패배한 것은 본명이 종선인 현음마모였던 것이다.

현음마모는 초연심결을 익히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산하고 이곳 현음동천으로 은거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원시천존이 창안한 최후의 절기 초연심결을 익히는 것 이상의 가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음마모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연심결의 이치가 너무나도 난해했기 때문이다.

현음마모는 여자중에서는 고금최강으로 불렸던 천고기재다.

그런 현음마모건만 이십여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초연심결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이검한이 본 두루마리의 그림이 바로 원시천존이 남긴 최후의 절기인 초연심결의 도해(圖解)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해야만 했던 시절에 무려 이십여 년을 허비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스승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었다. 그 분은 어리석은 제자를 통해서 당신의 비전을 먼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것이다.

스승님은 내가 초연심결을 연마하기 위해 현음마궐을 해체하고 이곳에 은거할 것과 종국에는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초연심결을 보전하는 역할이나 감당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셨던 것이다.

감히 말하거니와 이 글을 읽고 있는 그대의 운명 역시 저 위대한 원시천존님의 안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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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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