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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임청우는 발에 날개가 달리기라도 한 듯이 질풍같이 대안탑을 달려 내려갔다.

계단을 올라오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일 때는 발끝에 힘을 불끈 주자 순식간에 뛰어 넘어 버렸다.

마치 바람처럼 대안탑을 내려온 후에도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 저 저...”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고 말을 내뱉지 못하고 손가락질만 해댔다.

 

임청우는 담장을 뛰어넘고 메말라 버린 화원을 뛰어 넘으며 자은사를 벗어나 숲으로 뛰어들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지.”

대안탑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숲속까지 들어온 임청우는 나무 뒤에 몸을 붙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이십 리는 쉬지 않고 달려온 것 같은 데도 조금도 피곤하지 않다.

숨도 가쁘지 않다.

그러나 목은 타는 듯이 마르고, 뱃가죽은 등에 붙어 혹시 위장을 삭혀버리지나 않을 까 싶을 정도다.

허기로 인해서 눈알이 팽팽 돈다.

(잘못 왔구나 잘못 왔어. 인가(人家)가 있는 쪽으로 도망쳤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임청우는 속으로 후회하며 나무열매라도 어디 없는가 싶어 살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스읏!

그의 눈앞에 뭔가 어른거리는 듯 하더니 무언가 싸늘한 감촉이 목에 느껴졌다.

!”

임청우는 기겁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우연히 익힌 용조층층공으로 인해 그의 몸은 아주 재빨랐다.

그러나 임청우가 한 걸음을 채 옮기기 전에 다시 뭔가가 번쩍 하더니 그의 목에 싸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스슷!

임청우의 눈앞에 한 사람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임청우의 목에 닿아있는 것은 그 중년인의 검이었다.

푸른색 장삼을 차려입은 중년인은 삼척쯤 앞에서 몸을 비스듬히 돌린 채 손가락질 하듯이 검으로 임청우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임청우는 중년인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우협 장백승의 절대적인 위엄과는 또 다른 것이 중년인에게는 있었다.

임풍옥수(臨風玉樹)의 용모와 입가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 맑은 빛을 발하는 눈은 서글서글한 봉목(鳳目)이었다.

백금(白金)으로 만들어진 눈부신 보검은 입고 있는 청삼(靑衫)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번 보기만 한다면 어떤 여인이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모습이었다.

내놔라!”

청삼인(靑衫人)이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음성이 마치 연인(戀人)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다감(多情多感)하다.

임청우는 멍하니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있는 혈도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청삼인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미녀 서시(西施)가 눈썹을 찡그릴 때마저도 아름다웠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임청우는 남자가 찌푸리는 눈살도 그처럼 황홀할 줄은 미처 몰랐다.

하지만 그 속에도 은연중에 위엄이 있고 가볍지 않은 무게가 있었다.

온실 속에서 곱게 자란 화초같은 느낌을 주면서도 빼어난 기상이 있는 난초(蘭草) 같은 사람이었다.

!

백금으로 만들어진 장검이 살짝 흔들리며 혈도를 튕겨냈다.

혈도는 칼집에서 빠져나와 삼장 밖에 있는 바위 속에 깊이 박혔다.

내놔라!”

청삼인이 다시 말했다.

백금검은 어느새 다시 그의 목에 붙어있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청삼인이 노리는 것이 바로 몽선도라는 것을 알았다.

혈도를 지니고 있으니 거짓말을 할 수도 변명을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달라고 부탁을 하면 몰라도 막무가내로 뺏으려 드는 사람에게 몽선도를 내놓기는 싫었다.

해서 그는 괜히 딴청을 부리며 물러섰다.

무슨 말입니까? 제게 뭘 내놓으라는 말인지...?”

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내놔라. 대안탑에서부터 너를 쫓아왔다.”

청삼인은 여전히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가 능히 웃으면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서 물었다.

혹시 검주(劍主) 유소기(劉蘇起) 대협 아니십니까?”

청삼인이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내가 바로 유소기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으면 어떤 수작도 부리지 말라는 엄포로 들렸다.

청삼인은 일왕일협삼괴칠절 중 칠절의 우두머리이며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기를 쓰고 피하려던 바로 그 검주 유소기였다.

임청우는 유소기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찾으시는 물건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군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그 두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더 빠르지 않겠습니까?”

검주 유소기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눈앞에 있는 소년이 비록 남다른 데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그에게 몽선도를 넘겨주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몽선도를 넘겨주었다면 혈도를 주어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아무래도 강시놈에게 속은 모양이구나.)

휘익!

유소기는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즉시 몸을 날렸다.

조호이산지계(鳥虎移山之計)!

소년으로 하여금 혈도를 가지고 도망치게 하여 자신을 유인한 후 그 사이에 두 놈은 도망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나를 죽이고 물건을 찾아보지 않은 걸 보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남의 것을 억지로 뺏으려는 것으로 보아 올바른 사람이라고 볼 수도 없다.”

임청우는 유소기의 몸이 다시 번쩍하더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고 중얼거렸다.

물이 맑으면 얼굴을 씻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고 했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대하고 좋은 사람은 좋게 대하면 되는 일이다.”

검주 유소기는 임풍옥수 같은 용모와는 달리 임청우의 가슴에 그다지 좋지 않은 인상으로 새겨졌다.

다짜고짜 상대방을 협박하여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행동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강도(强盜)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임청우는 바위에 박힌 혈도를 뽑아서 다시 허리춤에 끼웠다. 혈도의 무게가 근 이십 근에 달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무거운 줄을 몰랐다.

() 안으로 들어가서 뭐든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산 아래로 발길을 돌렸다.

정말 배가 고프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이제 그만 가려고? 남을 속이는 기술이 보통이 아니던데...”

갑자기 임청우의 뒤에서 맑고 영롱한 음성이 들려왔다.

“...”

임청우는 우뚝 멈춰 섰다.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천천히 돌아섰다.

혈도가 꽂혔던 바위의 위에서 머리에 화려한 금장식을 달고 있는 예쁜 소녀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의(黃衣)를 입은, 얼굴이 손바닥만한 소녀였다.

그러나 뽀얀 얼굴에 보석처럼 빛을 반짝이는 눈을 가졌으며, 짓궂게 웃음 짓는 두 볼에는 볼우물이 패여 있다.

나이는 임청우와 비슷하게 보였다.

가슴이 걷잡을 수 없게 울렁거리는 것을 느낀 임청우는 소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말했다.

소저야 말로 대단하군. 검주 유소기를 감쪽같이 속였어. 그도 소저가 그곳에 있는 줄은 몰랐을 테니...”

소녀가 처음부터 반말을 했기에 임청우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소녀는 뜻밖이라는 듯이 눈이 동그래졌다.

그러다가 이내 깔깔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나도 그를 속였어. 이번 한 번만이 아니고 마음만 먹으면 백 번도 더 속일 수 있겠지. 하지만 넌 벌을 받아야 해.”

임청우는 자신의 눈앞에 누런 그림자가 번쩍이는 것을 느끼고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짝! 하는 경쾌한 음향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느 틈에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뺨을 때리고 다시 바위위로 돌아가 있었다.

정말 귀신처럼 재빠른 솜씨였다.

임청우의 어머니도 그를 때릴 때 빨랐지만 소녀의 솜씨는 기척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빨랐다.

황의소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게 반말한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이었어. 그 사람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을 뿐이지.”

임청우는 입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켰다.

자기 또래의 계집애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짐짓 대범한 척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버릇없는 것을 자랑하는 계집애는 또 처음 보겠군.”

황의소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바보같은 자식이 제 신분 천한 것은 생각지도 않고 말을 함부로 하네. 하는 짓이 귀여워 약간은 마음에 들었는데... 따끔한 맛을 보여 줄 수밖에...)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눈을 빛냈다.

임청우의 발끝이 움찔거렸다.

여기에 더 있다간 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성질 나쁜 계집애를 또 건드려 놨으니 어떻게 나올지는 뒤를 짐작할 수 없다.

(모른 척하고 빨리 이 자리를 떠는 것이 상책이다.)

험험!”

임청우는 헛기침을 두 번 하고 소녀의 뒤를 가만히 보았다.

“...?”

황의소녀는 어리둥절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내 뒤에 누가...?)

(이때다!)

임청우는 있는 힘을 다해서 산아래를 향해 달렸다.

! !

(아이쿠!)

그러나 임청우는 까무라칠 정도로 놀라며 앞으로 넘어져 땅에 세차게 머리를 찧었다.

채 두 걸음도 떼지 못했다.

무언가가 발목을 세게 조이고 있다.

호호호! 네가 아무리 잔머리를 굴러도 소용없어.”

황의소녀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하얀 실이 잡혀있었다. 임청우의 빰을 때릴 때 이미 그녀는 천잠사(天蠶絲)를 그의 발에 살짝 걸어 놓았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 생각은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다. 잔머리를 굴리는 상대는 잔머리를 굴려서 상대할 수가 없다. 원래의 내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높이가 오장인 나무라면 그 뿌리는 오십 장에 달한다. 이런 나무라면 바람이 불어도 가지만 흔들릴 뿐 뿌리를 뽑아 올리지는 못한다. 흔들면 흔들리는 데로 가만히 두지만 결코 그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임청우는 손을 털면서 일어났다.

갑자기 그의 몸에서 의연한 기세가 일어났다. 마치 천년 거목인양 무게가 있는 태도였다.

황의소녀가 변해버린 그의 기세에 어리둥절한 시선을 보냈다.

임청우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황의소녀를 묵묵히 응시하던 임청우는 왼쪽 발에 묶여있는 천잠사를 풀어버렸다.

너 너...”

황의소녀가 화가 나서 입을 열었지만 말을 내뱉지 못했다.

착 가라앉아 있는 임청우의 시선을 받자 자신도 모르게 입이 쑥 들어가 버렸다.

임청우에게서는 마치 우협 장백승을 닮은 듯한 기세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귀신에게 홀린 것 같았다. 돌아서서 당당한 걸음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삐익! !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한소리가 높은가 하면 다른 한 소리는 낮아서 마치 서로 화답하는 것같은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들은 황의소녀는 깜짝 놀라더니 다람쥐처럼 재빠른 몸놀림으로 나무들 사이로 달려가 버렸다.

 

(따라서 변할 필요는 없다.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것이 올바른 것이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와의 일을 통해서 한 가지를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나는 하나이고 외물(外物)은 수천, 수만 가지로 그 수를 다 헤아리지 못하는데, 외물에 따라 나를 이리저리 흔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자신을 굳게 지키는 것만도 못한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풀어버린 심정이었다.

마음이 홀가분해지며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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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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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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