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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패배

 

 

백남빈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녹지 옆에 서 있었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빼앗긴 기분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 넓은 얼굴, 크지 않은 것이 없는 오관(五管)...

대려장의 신비고수 신가람의 풍모는 보는 것만으로도 범인(凡人)과 달랐다.

가만히 있으면 태산이 있는 것 같은데 움직이면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백남빈으로서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경지의 인물이었다.

최소한 아직까지는...

(지금의 나는 비교될 수 없는 큰 인물이다.)

강미루와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신가람을 보면서 백남빈은 자신이 너무도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느껴졌다.

마치 산이 움직여서 다가오는 듯하다.

강미루가 틈만 나면 자기 형부를 자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윽고 신가람과 함께 돌아온 강미루가 백남빈의 팔을 잡으며 뭐라 말하지만 백남빈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너는 내가 아는 어떤 분과 닮았구나."

신가람이 온화한 음성으로 백남빈에게 말했다.

어투와 달리 백남빈을 천천히 살펴보는 신가람의 눈에는 깊은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백남빈의 모습은 신가람이 하늘 아래에서 유일하게 두려워하며 또 존경하는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은 신가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가람은 백남빈이 그저 철령보의 일개 무사인 줄로만 알고 있다.

신가람의 우호적인 말과 태도에도 백남빈은 미소만 슬쩍 지었다. 겉으로 드러내는 태도와 상관없이 그를 적이라 생각하는 백남빈이었다.

"내 처제 미루에게 불손했던 점은 당사자인 미루가 원치 않으니 탓하지 않겠다. 그러나 대려장의 무사들을 상하게 한 책임은 져야 한다. 검을 들어라."

신가람은 느릿느릿 말을 하면서도 전혀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허리에 걸린 검을 백남빈은 그때서야 보았다.

분명 명장의 손으로 만들어진 보검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검은 그것을 차고 있는 사람에 가려져 빛을 잃고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형부, 먼저 공격한 건 우리예요. 그러니 그를 탓할 수 없어요."

강미루가 팔을 벌려 백남빈의 앞을 가로 막으면서 말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백남빈에게도 외쳤다.

"빨리 도망쳐요. 형부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했잖아요."

"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백남빈은 강미루를 보지 않고 그녀 너머의 신가람에게 말했다.

신랑성의 침공은 시작되었습니까?”

신가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산(陰山)과 백석산(白石山) 쪽의 장성이 돌파 당해서 무황성 분타들 중 묘아장(猫牙莊)과 양화보(兩華堡)가 신랑성에 떨어졌다."

신가람은 시종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으나 몇 마디 말 속에는 격변하는 정세가 함축되어 있었다.

묘아장과 양화보는 철령보만큼이나 중요한 북방의 거점이다.

만리장성 바로 안쪽에 자리한 그 두 곳이 신랑성에 떨어졌다면 사태는 실로 엄중하다.

그 일대의 명나라 수비군도 와해되었을 게 분명하니 토곤이 결심만 하면 오이라트의 십만 기마대가 무인지경으로 중원에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나마 철령보는 신랑성의 요인들을 잡고 있어서 공격을 면한 상태다.”

신가람이 호의를 베풀 듯이 철령보의 사정도 이야기 해주었다.

자신들의 부성주와 토곤의 둘째 아들이 잡혀있으니 신랑성으로서도 철령보에는 쉽사리 도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빨리 도망쳐요!"

안도하는 백남빈의 귀에 강미루의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백남빈은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미루, 내가 이 상황에서 도망칠 수 있을 것같소? 나도 명색이 무사요. 욕되게 하지 마시오."

하지만 강미루의 말은 아예 애걸조가 되어 있었다.

"당신은 형부의 상대가 되지 못해요. 제발..."

백남빈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사자검을 힘껏 잡으며 신가람에게 말했다.

"검을 뽑으시오. 비록 당신의 상대가 될 수 없을지라도 도망치지는 않겠소."

과연 인물이라 할 만하군. 그래야 네가 닮은 그분을 욕되게 하지 않을 수 있지.”

신가람이 백남빈의 사나이다움에 감탄을 표시했다. 처음으로 드러내 보인 감정이었다.

"앞으로 때를 잘 만난다면 능히 영웅(英雄)이 될 수 있겠어."

신가람은 허리에서 자신의 기도에 비하면 볼품없게 보이는 보검을 천천히 뽑았다.

굳이 검을 뽑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만 신가람으로서는 미래의 영웅이 될 수도 있을 후배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이었다.

더 이상 말리는 게 불가능함을 깨달은 강미루는 한쪽 옆으로 물러서서 제발 불상사가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가슴 졸일 뿐이었다.

백남빈은 천천히 검을 뽑는 신가람을 보면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자검결 중

 

<태도는 자연스러워 어디에도 두드러짐이 없었으니... 움직이지 아니하면 능히 제압할 수 있으리라.>

 

라는 구절이었다.

놀랍게도 신가람의 발검(拔劍)하는 태도가 바로 그 검결에 부합했다.

백남빈은 신가람의 몸 어디에도 검을 갖다 댈 만한 곳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막막해졌다.

그러면서도 백남빈의 몸은 자신이 만든 검초, 미녀각기검을 펼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공수를 겸비한 단 일초의 검식 미녀각기검만이 지금의 백남빈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허어...”.

신가람의 짙은 눈썹 끝이 약간 올라갔다. 천하의 무학종사(武學宗師)라고 자부할 수 있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기식(起式)이었기 때문이다.

베려는 것도 아니고 찌르려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주 선 신가람에게는 백남빈의 몸이 검극(劍極;검의 끝 부분)에 다 가려져 버리는 듯이 느껴졌다.

게다가 백남빈의 윤기 있는 음성과 맑게 빛나는 눈빛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승의 내공을 지녔음을 말해 주고 있다.

(철령보의 일개 무사가 뜻밖에도 검술을 깊이 체득한 고수일 줄은 생각도 못했구나. 당금 강호의 인물 중에 이만한 경지에 이른 자는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백남빈은 여러 가지로 신가람을 놀라게 했다.

처음에는 마치 자신의 대사형(大師兄)을 보는 듯해서 놀랐었다.

이어 백남빈의 의연한 태도에 놀랐고, 기이한 검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신가람은 검을 수평으로 뉘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이 그의 독문절기 광평검법(廣平劍法)의 기식(起式)이었다.

(이게 무슨...)

백남빈은 당혹감과 섬뜩함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세하게 보면 볼수록 시선이 신가람의 몸에서 벗어나 자꾸만 옆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이 일부러 신가람를 보지 않으려고 피하는 것 같았다.

미녀각기검으로 찌른다 하더라도 분명 신가람의 옆 쪽 허공을 찌르게 될 것이다.

실제로 보통의 인간이라면 신가람이 검을 뽑는 순간 그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이게 신가람이 지닌 무공의 무서움이다.

검을 든 적을 앞에 두고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죽여 달라고 목을 느리고 기다리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그나마 백남빈이 자꾸만 시선을 고쳐서 신가람을 향할 수 있는 것은 근본(根本)을 볼 수 있는 힘, 신명안(神明眼)을 지녔기 때문에 가능했다.

(신명안을 지닌 것조차 대사형을 닮았다.)

백남빈이 옆으로 흐르던 시선을 즉시즉시 수정해서 다시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신가람의 가슴에 의혹이 짙어졌다.

그에게는 뛰어난 사형제들이 많지만 신명안을 지닌 인물은 오직 대사형뿐이었다.

(살려 둬야하나? 이번 기회에 죽여야 하나?)

신가람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맹렬하게 자라났다.

신명안까지 지닌 무서운 자질을 방치하면 반드시 큰 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이기에는 보면 볼수록 대사형을 닮아서 꺼려진다.

마음속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신가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살기는 시시각각 짙어졌다.

백남빈도 자신의 목숨이 백척간두에 걸려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신가람의 검이 움직이는 순간 자신의 목숨도 끝을 맞게 될 것이다.

생사의 기로에 선 백남빈은 끊임없이 사자검결을 외웠다.

지금의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자검결뿐이다.

이전에 배운 삼재검법 따위는 신가람 같은 고수에게는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시간이 마치 정지한 듯 지나며 백남빈의 머리에서는 하얀 김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신가람에게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가만히 서있는 것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망부석 같았다.

반면 백남빈의 모습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신명안으로 흐르던 시선을 돌려 다시 신가람을 보면서 그를 겨눈 사자검도 함께 움직인다.

(제발...)

옆에서 지켜보는 미루가 안타까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죽고 사는 긴박한 순간에 백남빈은 사자검결속에서 아지랭이같이 아른거리며 잡힐 듯 말듯한 어떤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전혀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신가람이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의 머리에서 번개불같은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번쩍! 번쩍!

그는 그대로 미녀각기검을 펼쳐 고리같은 검기로 신가람을 공격했다.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강미루의 눈으로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을 한번 깜빡 했을 때 백남빈은 다시 사자검을 원래 위치로 되돌리고 있었고, 신가람은 그런 백남빈의 뒤쪽에서 돌아보고 있었다.

팔락!

아무런 소리도 바람도 일지 않았는데 공중에서는 신가람의 동그랗게 잘려진 소매자락이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들이 풀 위에 내려앉을 때였다.

"훌륭하군. 훌륭해. 진정 멋진 검법이고 대단한 내공이었다. 족히 일갑자(一甲子) 수위는 되겠군. 내 일검을 받았으니 살려 주도록 하지."

몸을 휙 돌린 신가람은 강미루를 보면서 서늘해진 가슴을 숨기려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가자!"

두 사람의 일검(一劍)이 교환될 때 강미루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단지 백남빈이 졌다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강미루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백남빈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 처제.”

신가람이 다시 강미루를 재촉했다.

"형부, 그는 괜찮을까요?"

신가람의 태도에서 백남빈에 대한 악의가 깃들어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 강미루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단지 그의 심맥(心脈)만을 흔들어 놓았으니 한동안 무공을 사용하지 못할 뿐 아무 이상 없을 것이다."

!‘

강미루는 비로소 온몸을 짓누르고 있던 엄청난 무게를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었다.

신가람의 말은 하나라면 하나고 둘이라면 둘이다. 그의 말은 그게 무엇이든 믿을 수 있었다.

퍼억!

그때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억지로 버티고 서있던 백남빈이 나무토막처럼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달려가서 그를 안으려던 강미루는 멈칫했다.

지나친 관심을 보인다면 형부가 혹시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으로 백남빈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신가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형부,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떠나기 전에 챙겨야 할 것이 있어요."

신가람의 태도는 변함이 없어 태산같았지만 그것이 허락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을 강미루는 습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가람의 태도가 어떻든지 간에 강미루 자신의 창평곡에서의 행복은 끝나버린 것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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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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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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