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13

 

               색마와 비구니

 

 

() 늙은이는 물론이고 고검추의 행방도 묘연해졌습니다.”

삼십살객(三十殺客) 정팔(鄭八)은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선녀곡에 초혼전을 남겼었던 그자는 사신각의 삼십살객중 한명이다.

사신각에서의 직급은 청부살인을 성공한 회수로 정해진다.

열 번 성공한 자는 십살객(十殺客), 백 번 성공한 자는 백살객(百殺客)으로 불리는 식이다.

백살객은 사신각 전체를 통틀어 몇 안된다.

정팔이란 자가 삼십살객으로 불리는 것은 삼십 번 이상의 청부 살인을 완수했다는 의미다.

서른 살 남짓인 정팔은 근래 들어 사신각 내에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객 중 한명이다.

대 늙은이는 몰라도 고가놈은 이미 기련산을 빠져나갔다고 봐야겠군.”

사신각주의 수려한 미간이 찡그려졌다.

사신각주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기련산 동쪽 산록에 자리한 작은 객잔이다.

그자는 기련산에 나타난 대씨 성의 무시무시한 고수를 피해 기련산을 빠져나온 것이다.

사신각주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정팔을 비롯하여 몇몇 자객들로 하여금 팽가촌 일대를 감시하게 했었다.

하지만 고검추의 행방은 묘연해져 기련산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정팔 너는 기련산에 남아서 팽가촌을 감시해라. 고가놈이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본각이 철수했다 여기고 나타날지도 모르니...”

존명!”

사신각주의 지시에 정팔은 고개를 조아린 후에 자리를 떴다.

고검추! 네놈은 절대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게는 네놈이 상상하지도 못하는 신분이 있으니...”

사신각주는 잘 생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

 

쏴아아!

장대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폭우 속에 한 채의 토지묘(土地廟)가 서 있었다.

토지묘는 농사를 관장하는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이다.

"휴우... 지독하게 퍼붓는구나."

문득 토지묘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토지묘 내부는 오랫동안 사람이 손길이 닿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단에는 먼지가 자욱하게 쌓여 있으며 칠이 벗겨진 토지신의 신상은 비스듬히 쓰러져 있다.

그 토지묘 문간에 한 명의 소년이 앉아서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옷차림은 남루하지만 영준한 용모에 초롱초롱한 눈을 지닌 소년이다.

고검추... 바로 그였다.

이곳은 섬서성과 하남성의 경계인 신개령(新開嶺)이다.

기련산을 떠난 고검추는 한 달여 만에 이곳 신개령에 이르렀다.

이제 열흘 정도만 더 가면 호천무맹이 자리한 복우산(伏牛山)에 이를 수 있다.

고검추는 양모 당혜선의 유언대로 호천무맹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늦여름의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토지묘에 갇혀버린 것이다.

신개령까지 오는 동안 고검추는 태을강기를 꾸준히 수련했다.

하지만 아직 십성에는 이르지 못해서 사용할 수는 없다.

고검추는 태을강기와 함께 은발마희 옥여상이 남긴 혈전삼식도 틈틈이 연마했다.

덕분에 제일식 분뢰개벽은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철봉황은 어떤 여인일까? 어머니는 왜 그녀를 찾아가라 하셨을까?)

토지묘 문간에 기대앉은 고검추는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고검추의 눈에 이채가 번뜩였다.

휘익!

멀리에서 빗줄기를 뚫고 누군가 토지묘로 질주해 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굴까? 이런 산중에...)

고검추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여 벌떡 일어섰다.

양모 당혜선이 자신의 눈앞에서 무참하게 유린당하는 것을 본 이래 그는 본능적으로 인간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혹시 사신각의 자객들이 초혼전에 묻어있던 백일취를 맡고 추격해온 게 아닐까?)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긴 고검추는 토지묘로 접근하고 있는 자를 살펴보았다.

기련산을 내려온 후 고검추는 초혼전을 불에 태워 백일취를 제거했었다.

하지만 백일취를 완전히 제거했다는 확신은 없었다.

백일취가 실수로 몸에 묻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휘익!

그 사이에 나타난 자는 토지묘에서 십여 장 쯤 떨어진 곳까지 다가왔다.

고검추가 시력을 돋구어 살펴보았지만 그자가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빗줄기가 워낙 거센 때문이다.

(사람을 믿지 못한다는 건 서글프지만 조심하는 게 좋다.)

쓴 웃음을 지으며 문가에서 물러난 고검추는 낡은 신단 뒤쪽의 공간으로 들어가 숨었다.

쐐액! 후두둑!

그 직후 선풍과 빗물을 흩뿌리며 한 명의 인물이 토지묘 안으로 뛰어들었다.

신단 뒤쪽의 빈 공간에 몸을 숨긴 고검추는 신단에 나있는 틈으로 그 인물을 살펴보았다.

나타난 자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용모의 중년 사내였다.

헌데 사내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진 채 끼어 있었다.

그것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비구니가...

이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비구니는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명공이 빚은 듯 섬세한 이목구비를 지녔는데 파르라니 깎은 머리 때문에 애잔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비구니가 걸치고 있는 회색 승복은 빗물에 흠씬 젖어있다.

그 때문에 비구니답지 않게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흐흐흐... 이쯤이면 그 드센 계집도 못 쫓아오겠지?"

사내는 토지묘 밖을 돌아보며 음험하게 웃었다.

그자는 어떤 여자에게 쫓기는 중인 듯 했다.

털썩!

사내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비구니를 토지묘 바닥에 던졌다.

빗물에 젖은 승복에 감싸인 비구니의 탄력 넘치는 육체가 요란하게 출렁거린다.

"흐흐흐... 암중이라니... 오늘은 즐거움이 배가 되겠군."

!

욕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비구니의 몸매를 훑어보던 사내는 굽혔던 손가락을 튕겼다.

"으음!"

사내가 날린 지력이 가슴에 파고들자 비구니는 한 차례 몸을 퍼덕인 후 눈을 떴다.

"흐윽!"

눈을 뜬 직후 비구니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사내의 징그러운 시선이 자신의 몸을 훑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 얼굴에 떠오른 음흉한 표정을 본 비구니는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깨달고 전율했다.

하지만 그녀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조차 없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渾穴)만 풀렸을 뿐 몸을 마비시키는 마혈(痲穴)은 여전히 제압당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 시주는 감히 호천무맹에 죄를 지을 작정인가요?"

비구니는 짐짓 싸늘한 음성으로 사내를 질책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출 수 없는 두려움이 실려 있었다.

(호천무맹! 저 스님이 호천무맹의 문하란 말인가?)

신단 뒤에 숨어 있던 고검추는 크게 놀랐다.

호천무맹은 자신의 생부인 철사자 고창룡의 사문 아닌가?

헌데 그 호천무맹 소속의 여인을 뜻밖의 장소에서 보게 된 것이다.

고검추가 놀라움을 금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흐... 호천무맹의 이름 따위로 본좌를 겁주려 해도 소용없다 자운(紫雲)!"

사내는 비구니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네년은 호천무맹이 심혈을 기울여 기르고 있는 호천십영(護天十英)의 일인이니 도룡곡(屠龍谷)이라는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 도룡곡!"

자운이라 불린 비구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내가 말한 대로 비구니는 호천무맹이 장래를 위해 육성중인 열명의 신진고수들중 한명이다.

당연히 호천무맹의 역사에 해박하여 도룡곡이란 문파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도룡곡은 청해(靑海)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떨치던 문파였다.

도룡곡의 무공은 극단적으로 실전적이고 악랄하여 정파보다도 사파 취급을 받았다.

비록 변방 중의 변방인 청해에 자리한 문파였으나 도룡곡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삼십여 년 전, 도룡곡은 호천무맹이 주축을 이룬 중원 무림인들에게 공격당해 멸망했다.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는 변황 무림의 앞잡이 노릇을 한 때문이었다.

당시의 중원 무림은 서역 무림을 일통한 강대한 세력의 침공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었다.

호천무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중원 무림은 천신만고 끝에 서역 무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직후 도룡곡이 중원 무림인들의 공격을 받고 멸문한 것이다.

도룡곡은 청해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역 무림의 세력에 가장 먼저 제압당했었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앞잡이 노릇을 해왔었다.

그것이 도룡곡이 공격당한 이유였다.

무려 천여 명에 이르는 도룡곡 식솔들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뿐만 아니라 도룡곡은 배신자로 낙인 찍혀 중원 무림의 역사에서 완전히 제명당했다.

그 후 도룡곡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 되었다.

헌데 도룡곡이란 이름이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 설마 시주는..."

비구니 자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든 채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흐흐흐... 그렇다. 본좌가 바로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鄧天河)."

사내는 비구니의 뺨을 슬슬 쓰다듬으며 말했다.

흐윽!”

자신을 도룡곡의 소곡주 등천하라 소개한 그자의 손이 뺨에 닿자 비구니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당시 열 한 살이었던 나는 마루 밑에 숨어서 부모형제들이 너희들 호천무맹의 인간들에게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등천하는 두 눈을 살기로 물들인 채 이를 부득 갈았다.

"그때 나는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다. 혈채를 반드시 천배 만배로 갚고 말겠다고...!"

"... 아미타불!"

안색이 밀납처럼 변한 자운 비구니는 떨리는 음성으로 불호를 외웠다.

"크크크... 이제 본좌가 왜 너를 납치해 왔는지 짐작이 가겠지?"

등천하는 음소를 흘리며 젖은 승복에 감싸인 자운 비구니의 몸을 훑어보았다.

"우선 네년에게 극락구경을 시켜준 후 발가벗겨서 낙양 성문에 매달아 두겠다. 호천무맹이 자랑하는 후기지수인 네년의 알몸을 가능한 많은 인간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 그러고 보니 근래 일어났던 본맹 산하 문파들의 겁탈 사건이 모두 시주의 짓이었군요."

자운 비구니는 수치심과 함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치를 떨었다.

 

몇 년 전부터 호천무맹 소속 문파의 아녀자들이 겁탈 당하는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각 문파 장문인들의 처첩이나 여자 제자, 딸들이 무참하게 강간당하고 있는 것이다.

알려진 것만 해도 서른 개가 넘는 문파와 가문의 여자들이 몸을 더럽혔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지만 범인이 누군지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린 용모파기가 전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인의 소행일 것이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범인이 여자들을 유린한 수법이 대동소이한 게 그 이유다.

그리하여 정체불명인 범인에게는 천면음마(千面淫魔)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