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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삼녀삼심(三女三心)

 

 

퍼억!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공중에서 두 동강이 된 채 바닥에 떨어진 예이연의 모습은 괴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 어려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피가 흐르기 시작해서 삽시에 주변 바닥이 붉게 변해 버렸다.

진룡은 검으로 땅을 가리킨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하늘엔 별을 가린 구름이 은하수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수많은 위사들이 무기를 들고 포위하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감히 짓쳐 들어오지 못했다.

스스스스스...

고요한 중에도 진룡의 몸 주위에는 서릿발 같은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좌중은 진룡이 뿜어내는 그 살기에 압도당해 바늘 떨어지는 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으하하하!”

그러던 어느 순간 내공을 실은 엄청난 웃음소리와 함께 사자검이 대리석 바닥을 쳤다,

!

대리석 바닥에 검이 닫았다 싶은 순간 진룡의 몸은 포위망을 뚫고 바람처럼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사자검이 닿았던 대리석바닥은 푸석해져서 그의 검에 실린 공력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위사들은 그를 추격할 생각조차도 못했다.

 

***

 

궁궐을 빠져 나온 진룡은 미리 알아 두었던 예지운의 집으로 달려갔다.

달리는 그의 얼굴은 바람에 밀리는 눈물로 얼룩졌다.

 

달리면서 어느 정도 진정된 감정으로 예지운의 집으로 넘어 들어갔다.

지붕에서 지붕으로 달리면서 가장 큰 본채를 찾았다.

이윽고 그 건물에 도착해서 창문 밑에 몸을 낮추고 방안의 동정을 살펴보니 예지운의 거처가 틀림없었다.

진룡은 거리낌 없이 방문으로 걸어가 덜컹 열었다.

피가 묻은 사자검은 아직도 손에 들려 있었고 살짝 베어진 그의 가슴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안에서는 예지운이 책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런 자객에 벌떡 일어나며 벽에 걸린 검을 잡았다.

진룡은 저지하지 않았다.

"네 여동생을 베고 오는 길이다."

자르듯이 내뱉자 예지운은 그제야 상대가 진룡임을 알고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는 진룡도 파양호대전 때 죽은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떠는 것도 잠깐, 예지운은 진룡쯤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코웃음을 쳤다.

"내 동생이 그렇게 약한 줄 아느냐? 아비에게 쫓겨난 어리석은 놈아! 자 오너라! 단칼에 죽여주마."

"산산은 어디에 있느냐?"

감정이 사라진 목소리로 진룡이 물었다.

"그년은 내가 가지고 놀다가 죽여 버렸다. 잡소리 말고 어서 덤벼라."

예지운의 거친 말에도 한번 크게 좌절을 겪은 진룡은 동요하지 않았다.

바닥을 가리키고 있던 진룡의 검이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크악!"

순간 예지운의 왼쪽 손이 바닥에 뚝 떨어졌다.

사자검은 언제 휘둘러졌는지 그자의 손목을 자르고 다시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진룡의 검공(劍功)에 예지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룡의 무위(武威)는 일 개 장군에 불과했던 그자로서는 평생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것이었다.

다시 천천히 올라가는 사자검을 보면서 예지운은 극도의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

예지운이 들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맑은 소리를 낸다.

하지만 진룡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런 진룡이 거인처럼 느껴진 예지운은 숨이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죽음보다도 더한 공포였다.

천천히 올라가 허공을 가리키던 검은 다시 보이지 않았다.

순간 예지운의 오른쪽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팍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지운의 짝 벌린 입으로는 비명조차 새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극도의 공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공포와 불행을 맛보게 해주겠다!"

진룡은 단호하게 내뱉으며 땅을 가리키고 있던 검을 다시 천천히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바로 그때 여인의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그들만의 공간을 부수며 들려왔다.

"... 오라버니?"

산산이었다.

 

털썩!

산산의 목소리를 들으며 예지운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진룡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예지운이 죽였다고 한 누이동생 산산이 문간에 서있었다.

"너는 살아 있었구나."

진룡은 산산에게 다가가 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산산은 물러서면서 물었다.

"오라버니, 그 사람은 죽었나요?"

"아직 죽지 않았다. 쉽게 죽이고 싶지가 않았다."

진룡은 인간 마음의 추악함을 경험한지라 어느 정도 냉정하게 변해 있었다.

검을 들어 올리며 다시 예지운에게 돌아섰다.

"그를... 그를 죽이지 마셔요."

산산이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진룡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산산은 진룡의 옆을 지나 예지운에게로 달려가더니 잘려져 피가 흐르는 그의 손목을 치마자락으로 감싸고 묶었다.

그 모습을 본 진룡의 눈에서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산산은 감히 그를 쳐다보지 못하고 떨면서 말했다.

"저는... 오라버니... 저는 이 사람의 아기를 가졌어요."

진룡이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을 풍비박산 낸 그 원수를 살려 주어야 한단 말이냐?"

가슴 속에서는 격렬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차갑게 흘러나왔다.

"그자가 작은 이득을 위해 무거운 신의(信義)를 배반한 걸 아느냐?"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자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음을 아느냐?"

마찬가지였다.

"그자가 너를 능욕했음을 잊었단 말이냐?"

"잊지 않았답니다."

"그런데도 그를 살려주어야 한단 말이냐?"

역시 당연하다는 듯 산산은 고개를 끄떡였다.

진룡은 기가 막히고 맥이 탁 풀렸다.

예지운의 앞을 산산이 가로막고 있기에 들어 올리던 검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화가 치밀어 옆에 있는 탁자를 아무렇게나 내리쳤다.

파파파팍!

책과 찻주전자는 허공으로 튕겨 올랐고 탁자는 산산조각이 나며 주저앉았다.

주체하지 못하는 분노로 인해 호흡마저 고르지 못하고 눈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순간 눈앞에서 무언가 번쩍하며 그의 가슴을 찔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이동생 산산이 예지운이 떨어뜨린 검을 두 손으로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진룡의 가슴을 찌른 그 검은 예이연이 낸 상처를 다시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산산이 찌른 검인지라 진룡의 내공에 막혀 깊은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비록 그럴지라도 진룡의 가슴을 완전히 무너뜨리기에는 충분했다.

"네가... 네가...!"

진룡의 말이 떨려나왔다.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정말 찌르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겁에 질린 산산의 음성은 이미 진룡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우우우우...!"

진룡은 용의 울음같은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뛰쳐나와서 방향을 분간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얼마를 달렸는지도 몰랐다.

마침내 탈진하여 이름 모를 산속에서 쓰러져 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풀냄새가 진룡의 코를 자극했다.

가만히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 십 년을 산 것 만 같았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들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산화... 산화... 우리 산화를 데려 와야지."

진룡은 천근같은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

 

산에서 내려오다가 작은 마을이 있어 물어 보았더니 마을 이름은 백가촌(白家村)이지만 백()씨와 이()씨가 같이 살고 있다 한다.

금릉에서 이백 리나 떨어진 곳이었다.

훗날 이곳에서 백남빈 부자와 이탁이 태어났다.

 

***

 

밥도 넘어가지 않고 술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물로 목을 축이며 진룡은 터벅터벅 걸어 이틀 만에야 금릉에 다시 돌아왔다.

위사들이 분주히 돌아다니며 예귀비(藝貴妃)를 죽인 범인을 찾는다 하였다.

그러나 금릉으로 들어오는 그를 범인으로 보는 사람은 없었다.

더욱이 그의 모습은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며칠 사이에 머리가 반백이 되어버린 것이다.

 

산화가 묵고 있는 객점으로 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냉기가 확 감돌았다.

들보에 산화가 목을 매어 죽은 채 늘어져 있었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산화는 진룡이 궁궐로 떠날 때 잠든 척 했으나, 사실은 떠나는 오라버니를 뒤에서 훔쳐보며 안녕을 고했었다.

오라버니가 떠나자 산화는 허리띠를 들보에 걸고 목을 맸다. 오빠를 만나고 나서 더 이상 살아가는 것이 부끄러워졌던 것이다.

비록 어리지만 공주로서 예교(禮敎)를 배우고 자란 산화였다.

두려움에 짓눌려 있다가 되살아난 이성(理性)은 더 이상 그녀가 살지 않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막내 누이는 죽었고 사랑했던 여인은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

또 다른 누이 산산은 죽지 않았지만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진룡은 조카들을 찾는 것은 포기하고 창평곡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창평곡에는 또 하나의 죽음이 또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진정으로 이해해준 유일한 사람인 스승 정사초의 죽음이었다.

팔십이 세의 나이이니 살 만큼 산 그는 진룡이 돌아 온 직후 죽었다.

정사초는 죽기 전에 진룡에게서 그간의 사연을 들은 후 이렇게 위로해주었다.

 

"우리들 사자검의 전인은 세상에서 환영받는 이가 없구나. 너의 신세도 처량하다마는 네 사조들도 절세의 총명을 지니고도 세상에서 그 뜻을 펴보지 못했었다. 사자검의 전인은 마음이 세상을 앞서 가니 세상이 알아주기 어려운 때문이니라. 다 시대를 앞서 태어난 탓이니 너무 슬퍼하지는 말거라. 슬픔이 너의 정신을 흐트릴까 두렵구나."

 

그 후 진룡은 창평곡에서 사자검을 익히고 시를 읊조리는 것을 낙으로 살며 두 번 다시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조들과 달리 사자검을 익혀도 세상을 구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느껴서 전인을 구하여 사자검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전인도 두지 않고 혼자서 창평곡에 쓸쓸하게 살다가 사자검을 녹지에 던진 후 죽었다.

그의 검결은 고독과 허무가 깊이 베여있고 염세(厭世)의 분위기를 절로 풍기게 된 것이다.

 

***

 

진룡의 애절한 사연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백남빈과 강미루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룡의 원수인 예지운은 그후로도 벼슬을 계속하여 몇 대에 걸쳐 부귀를 누렸던 것을 백남빈은 알고 있었다.

"어찌하여 사자검의 전인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그 뜻이 꺾인단 말인가? 정말 정사초 사조의 말마따나 세상을 앞서 살아가는 때문에 그렇단 말인가?"

백남빈은 탄식했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우측, 녹지의 동쪽 절벽 앞에 흰 그림자가 하나 나타났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난공불락의 절진으로 둘러쳐진 창평곡에 누군가가 들어 온 것이다.

히히히힝!

흑왕이 나타난 사람을 향해 길게 부르짖으며 달려갔다.

"형부!"

강미루도 벌떡 일어나 뛰어가며 소리쳤다.

단번에 동쪽 절벽 아래까지 달려간 강미루는 그 인물의 품에 거리낌없이 안겼다.

흰 옷을 입은 그 인물은 바로 출신내력이 신비에 싸인 대려장의 제일고수이자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인 광평객 신가람이었다.

그가 마침내 보름 만에 미혼, 산백, 박령의 삼대절진을 뚫고 창평곡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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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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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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