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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대과벽의 밤

 

 

내가 하루 사이에 겪은 모든 일이 원시천존의 안배에 의한 것이란 말인가?”

현음마모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이검한은 믿기지 않는 심정이 되었다.

자신이 철익신응을 만나 곤륜산에서 대과벽까지 날아온 것도,

누란왕후 흑요설에 의해 화룡단정은 먹은 것도,

화룡단정의 열기 덕분에 흑요설과 서역사천왕이 끝내 찾아내지 못한 현음마모의 거처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원시천존이 의도한 대로라는 것이다.

원시천존은 정말로 현음마모를 통해서 초연심결이 이천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이검한 자신에게 전해지길 바란 것일까?

(원시천존은 물론이고 현음마모 역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났던 분이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을 무시할 수 없는 이유다.)

이검한은 원시천존과 현음마모에게 경외감을 느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현음마모가 초연심결을 깨우치기 위해 보낸 이십여 년의 세월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초연심결에는 원시천존이 엿본 하늘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

현음마모는 그 초연심결을 이십여 년 동안 단 하루도 쉬는 법이 없이 연구했다.

그 결과 그녀는 원시천존이 남긴 고금최강의 무공 대신 천기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십여 년 동안 쓰지 않고 축적만 한 덕분에 그녀의 내공은 정심해질 대로 정심해졌다.

초절의 경지에 이른 그 내공 덕분에 현음마모의 수명은 보통 사람의 몇 배로 늘어났다.

하지만 현음마모는 오래 사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초연심결의 이치는 깨우치지 못했지만 자신이 읽은 천기를 직접 확인하고픈 욕망이 생긴 것이다.

물론 신선이 아닌 이상 수백 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이에 현음마모는 자신의 능력 한도 내에서 장생불로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원시천존에게서 전수받은 현음진기(玄陰眞氣)를 응용하여 빙백불훼대법(氷魄不毁大法)이라는 술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빙백불훼대법은 이름 그대로 강력한 냉기를 이용하여 혼백과 육신이 훼손되지 않게 보전해주는 술법이다.

현음마모는 빙백불훼대법은 써서 길고 긴 잠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현음진기를 수련할 때 사용했던 만년한옥도 그녀가 육신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닌 상태로 장구한 세월을 거스른 현음마모가 다시 깨어나려면 태양같은 열기를 품고 있는 사내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현음마모가 원한 대로, 또한 원시천존의 안배대로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이검한이 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승님이 본녀를 통해 네게 초연심결을 전하려 하신 이유를 알려주겠다.

너의 시대에는 악마의 화신이 등장할 것이며 그자를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초연심결을 반드시 깨우쳐야만 한다.

이것이 스승님이 네게 지우는 짐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바란다. 내 사랑하던 이의 후손이여.>

 

현음마모가 남긴 글은 그렇게 끝나 있었다.

내가 당신이 사랑하던 분의 후손이라고?”

마지막 구절을 읽은 이검한은 또 한 번 당혹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그러다가 퍼뜩 뇌리를 스치는 사실을 깨닫고 이검한은 아연실색했다.

설마... 설마 내가 태양천자라는 분의 후손이란 말인가?”

이검한의 머리 속은 혼란에 휩싸였다.

(과연 현음마모가 남긴 이글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란 말인가?)

비록 스스로를 어리석다 자조(自嘲)했지만 현음마모는 여자들 중에서는 고금최강이었던 여인이다.

심지어 천기까지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던 그녀가 허튼 내용을 남겼을 리 없다.

(내가 당신에게 죄를 지을 것까지 알고 계셨던 분이니 내가 태양천자의 먼 후손이라는 암시도 아마 사실일 것이다!)

이검한은 새삼 현음마모의 모습을 떠올리며 상념에 잠겼다.

(난 누구일까? 어떤 경로로 태양천자와 인연이 닿아있는 것일까?)

철이 든 이래로 처음 자신의 출생 내력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검한이었다.

(장춘곡으로 돌아가는 대로 누나에게 날 낳아주신 부모님에 대해 물어봐야겠다.)

이검한은 생각에 잠기며 현음마모가 남긴 비급을 다시 한 번 읽기 시작했다.

월동문 밖에서 한 쌍의 눈이 벽을 투과하여 자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물론 그 눈의 주인은 현음마모였다.

 

현음마모는 이검한의 몸속에서 들끓는 화룡단정의 힘을 빌어 부활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현음마모는 화룡단정의 기운을 갈무리 하여 이검한의 단전에 넣어주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은 셈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현음마모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이검한에게 허락해야만 했다.

비록 빙백불훼대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지만 어린 소년과 살을 섞은 것은 너무도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하물며 그 소년은 자신이 사랑했던 정인의 먼 후손인 것이 분명한데...

정신을 차린 이검한과 얼굴을 맞댈 용기가 차마 나지 않았다.

그래서 현음마모는 이검한이 깨어나기 전에 종유동굴을 빠져나왔었다.

(볼수록 사형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다.)

두자가 넘은 두꺼운 석벽을 간단히 투과하여 이검한의 얼굴을 살펴보며 현음마모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할 수 없었다.

(저 아이의 앞날에 숱한 파란과 우여곡절이 가로 놓여있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와줘서도 안되고 간섭해서도 안된다.)

현음마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축복은 종종 고난의 탈을 쓰고 찾아온다.

정인의 후손인 소년이 걱정되어 자신의 손으로 고난을 해소시켜주다가는 소년에게 주어질 더 큰 축복을 무산시킬 수도 있다.

현음마모가 읽은 천기는 이검한을 지켜보기만 할 뿐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누구보다 복이 많은 아이이니 역경을 잘 헤쳐 나가며 성장할 것이다.)

현음마모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돌아섰다.

(빙백불훼대법으로 잠들어 있었던 동안 세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확인해보자.)

걸음을 옮기는 그녀 앞에는 문이 아닌 석벽이 가로 막고 있다.

스윽!

하지만 현음마모의 몸은 그림자가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듯 석벽을 통과하여 난장판이 된 지하광장에 나타났다.

(세월이 세월이니 만큼 내가 맺고 있었던 인연은 모두 끊어졌을 것이다.)

유사신령의 시신이 잠겨있었던 공청석유의 연못을 지나며 현음마모는 쓸쓸한 표정이 되었다.

비록 천기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 장생불로의 길을 선택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그녀 자신과 관련되어 있던 모든 사연과 인간들은 세상에서 사라진지 오래일 것이기 때문이다.

현음마모 자신은 철저하게 고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오직 혼자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무섭고도 슬픈 일인가?

(세상을 둘러보다 지치면 저 아이를 찾아와 의지하면 되겠지. 비록 수십 세대가 지났겠지만 저 아이가 사형의 후손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

스윽!

벽으로 스며들어가며 이검한을 떠올리는 현음마모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 * *

 

밤이다.

서역의 광활한 사막 위로 밤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대과벽-!

동서로 삼천여리나 이어진 그 거대한 단애가 적막 속에 마치 한 마리 용처럼 누워 있다.

서쪽 지평선으로 갈아 앉고 있는 가녀린 초승달이 창백한 빛을 대과벽 일대에 흩뿌리고 있을 때였다.

쐐애애액!

문득 서북쪽으로부터 한 줄기 인영이 밤하늘을 가르며 대과벽을 향해 날아왔다.

화라라락!

밤바람에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과벽 끝으로 내려서는 그 인물은 삼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장한이었다.

무쇠로 빚은 듯 강인해 보이는 체격을 지닌 그 인물은 칠흑같이 검은 경장을 걸치고 있으며 허리춤에는 검붉은 색의 철부(鐵斧)를 한 자루 차고 있었다.

흑의장한은 두 팔에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두터운 모직 천에 감싸인 그것은 한명의 소녀였다.

나이는 십오륙 세가량 되었을까?

눈같이 새하얀 피부에 탐스러운 금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였다.

금발뿐만 아니라 마치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의 윤곽으로도 소녀가 색목(色目) 계통의 피를 이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금발소녀는 수혈(睡穴)이 찍힌 듯 장한의 품속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 !”

장한은 먼 길을 달려온 듯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여기로군!”

대과벽 끝에 이르러 걸음을 멈춘 흑의장한은 빠르게 한 차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그의 두 눈은 초조함과 죄책감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소신은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흑의장한은 잠든 금발소녀를 내려다보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천애고아인 소신 포대붕(包大鵬)에게는 안사람의 생명이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저 음흉한 철목풍(鐵木風)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포대붕!

 

신력(神力)을 타고 난 그는 서역 일대에 용맹함이 자자하게 알려진 역사(力士).

서역의 여러 부족들이 철부신장(鐵斧神將)이라 부르며 경원하는 포대붕에게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교숙하(喬淑賀)라는 이름을 지닌 정숙한 여인인데 그녀가 얼마 전 철목풍이라는 자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교숙하를 납치한 그자는 포대붕에게 아내를 구하고 싶으면 한 명의 소녀를 납치해 오라고 협박했다.

납치의 대상이 된 소녀는 다름 아닌 포대붕이 섬기는 여주인의 딸이었다.

포대붕은 당혹스러운 상황에 빠졌다. 사랑하는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주인을 배신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포대붕은 몇날 며칠을 갈등으로 지새웠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에 대한 애정과 근심이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이겼다.

만일 자신이 철목풍이란 자의 협박을 모른 척 한다면 아내가 어떤 꼴을 당할지는 명약관화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숱한 사내들의 노리개가 되었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결국 포대붕은 눈물을 머금고 소주인(少主人)을 납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금발소녀가 바로 포대붕이 섬기는 주인의 딸이었다.

 

-철산산(鐵珊珊)!

 

그녀는 저 위대한 정복자 징기스칸의 피를 이은 고귀한 신분이었다.

비록 원()제국은 붕괴되었지만 황금씨족(黃金氏族)이라 불리는 징기스칸의 핏줄들은 여전히 새외변경의 민족들로부터 최고의 공경과 대우를 받고 있다.

(철목풍이 제 아무리 사갈같은 인간이라 해도 징기스칸님의 핏줄인 산산 공주님을 해치지는 못할 것이다!)

포대붕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을 내려다보며 죄책감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용서하십시오 공주님. 아내만 구해내면 소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철목풍을 쳐죽일 것입니다!)

포대붕이 입술을 질끈 깨물며 다짐할 때였다.

흐흐! 역시 예상했던 대로의 선택을 했구나 포대붕!”

돌연 포대붕의 뒤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포대붕은 깜짝 놀라며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였을까? 포대붕의 뒤쪽 삼 장 정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짙푸른 장포를 두른 사십 대 중반쯤의 장한인데 언듯 보기에는 상당히 수려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청포장한의 눈동자는 쉴 새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얄팍한 입술에는 비웃는 듯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조금만 유심히 살펴봐도 교활하고 잔혹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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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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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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