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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닭 쫓는 노인

 

 

백남빈은 배가 고플 때 외에는 조사동을 나가지 않았다.

나가 보았자 강미루도 없고 흑왕도 없는데 새소리만 듣기는 싫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는 이백 조사의 사자검결과 진룡 사부의 검결만을 외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욕심을 내어 나머지 십일 인의 사조들의 검결도 모두 외우기로 하였다.

 

한번 몰두하여 깊이 빠지자 세상의 일이란 게 다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날마다 사조들의 검결을 외우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혹시 틀린 곳은 없는지 확인해 보았다.

사자검결은 본래 그 뜻이 애매하고 어지럽기 짝이 없다.

그 때문에 읽어도 읽어도 쉽게 외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만 신경 쓰지 않으면 이것저것 뒤죽박죽되어 버리곤 했다.

다른 사조들의 검결 역시 이백조사의 사자검결에서 파생한 탓에 비슷한 말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전혀 같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 이백과 진룡의 검결만을 욀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힘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백남빈은 먼저 지금까지 외우고 있는 검결들을 잊어버리지 않았는지 암송을 통하여 확인하였다.

거듭거듭 확인한 후에 간단하게 아침거리를 찾아먹고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다시 새로운 검결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암기가 확실히 되어갈 수록 각각의 검결들 사이에 무언가 서로를 구분 짓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열세 개의 검결이 모두 그의 머릿속에 들어오자 그것은 더욱 뚜렷해졌다.

처음에는 서로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와서는 독립성이 뚜렷하여 전혀 섞일 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왜 그런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지 느낌이 그럴 뿐이었다.

 

백남빈이 조사동에서 검결을 외느라고 쳐박혀 있을 때 밖에서는 큰비가 몇 번이나 왔다.

겨울이지만 창평곡은 눈이 오지 않는 곳이었다. 땅에 닿기도 전에 모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큰비가 여러 번 왔다는 것은 큰 눈이 자주 왔다는 말이 된다.

며칠 전 그는 열세 개의 검결을 전혀 헷갈리지 않고 외는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며칠 동안의 점검을 통하여 그 사실을 확인했다.

 

***

 

이날도 백남빈은 덥수룩한 수염과 다듬지 않은 머리카락을 나부끼며 요기를 하기 위해 조사동을 나왔다.

밖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창평곡에 들어 온 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미루가 함께 있을 때는 정확한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확실한 것은 미루가 떠나고도 수십일은 족히 흘렀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녹지를 지나치는데 그날따라 겨울 장마에 무너진 오두막이 그의 마음을 처량하게 했다.

한데 풀색과는 전혀 다른 남색 천이 사각으로 접혀져 빗물을 튕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전에 입었다가 미루에게 준 남색상의였다.

백남빈은 그것을 힐끗 보았다.

전에도 몇 번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지나쳤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남색상의 속에 어떤 각진 물건이 들어있었다. 마른 날에는 옷자락이 부풀어서 알 수 없었던 것이 옷감이 비에 젖어 달라붙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불현듯 그의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미루가 떠날 때 마지막으로 나에게 무언가 말했었는데... . 남색상의... 뭐였더라?)

백남빈은 그 사이 강미루의 말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다가가서 접혀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옷자락 속에 다른 것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어 확 펼쳤다.

펄럭!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으로 갑자기 기름종이에 싸여진 한권의 책이 옷자락 속에서 빠져나와 앞쪽으로 날아갔다.

백남빈의 몸이 일렁이는 순간 땅으로 떨어지던 책은 그의 손에 빨리듯이 들어갔다. 녹지의 물이 그 정도로 깊은 내공을 쌓게 해준 것이다.

 

<八陣圖解>

 

표지에 적힌 그같은 제목이 백남빈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 미루가 한 말은 이 책을 찾으라는 거였구나. 그녀는 창평곡을 들고 날 수 있는 팔진도해(八陣圖解)를 나 몰래 감추고 있었고...)

백남빈은 비로소 강미루가 남긴 마지막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을 속여서 정말 미안해요. 제 마음 아시겠죠?>

 

자신들의 집안은 원수나 다름없다.

그 때문의 두 사람의 사랑은 오직 이곳 창평곡에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강미루는 창평곡을 나가기 싫었고 팔진도해를 감춰두었던 것이다.

강미루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한 백남빈은 팔진도해를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울었다.

강미루가 너무도 보고 싶었다.

 

***

 

바닷가의 정월 바람은 차갑기도 하다.

곳곳에 쌓여 있는 하얀 눈이 푸른 바다색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도처에서는 패권다툼이 일어나고 무황성과 신랑성의 격돌은 날로 치열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산산맥의 끝자락이 닿아있는 바닷가는 세상의 혼란과 상관없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사별의 슬픔은 목이 메고

생이별은 항상 가슴 쓰리네.

강남은 풍토병이 많은 곳인데

귀양 간 그대는 소식조차 없구나.

친구(;이백)가 내 꿈에 찾아오니

나를 오래도록 생각함일세.

평소의 혼이 아닌 듯하여 두려우나

길이 멀어 알 수가 없네.

그대의 혼이 올 때 풍림(楓林) 푸르더니

돌아갈 때 관문(關門) 요새(要塞) 어둡구려.

그대는 지금 유배되었건만

어찌 날개 얻어 여기 왔는고.

지는 달이 내 집 들보 비추는데

그대 얼굴 아닌가 의심하였노라.

물은 깊고 파도 거치니

부디 교룡(鮫龍)에게 잡히지 말게.

 

바닷가를 따라 난 산길에 울려 퍼지는 낭송 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우수가 깃들어 있었다.

녹색의 장검을 어깨에 둘러맨 청년이 산길에 쌓인 눈을 밟고 걸어오면서 책을 펴든 채 읽고 있었다.

청년은 창평곡을 나선 백남빈이었다.

무황성으로 가는 일은 급했었지만 자신이 알려야 할 소식은 이미 과거사가 되어 버렸다.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야심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증빙물(證憑物) 따위는 필요 없을 것이다.

양부의 명령이므로 무황성으로 가서 군명(軍命)을 완수해야겠지만 거들떠보기나 할지 몰랐다.

자연히 급한 마음은 사라지고 오히려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겨서 늦장을 부리고 있는 중이었다.

 

간밤 꿈에 강미루가 보여 울적했었다.

그래서 창평곡을 나설 때 갖고 나온 여러 권의 시집 중 하나를 뒤적이자 두보가 이백을 꿈에 보고 지은 시가 있었다.

그 정이 흡사 자신이 강미루를 그리워하는 심정 같은지라 길을 걸으면서도 읽고 또 읽으며 스스로의 심금(心琴)을 건드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수수...

길 옆 눈에 덮힌 나뭇가지가 흔들리더니 상투를 튼 노인하나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눈 떨어지는 소리에 백남빈이 고개를 돌릴 때 노인도 그를 보고 있었다.

!”

두 사람의 눈이 딱 마주쳤는데 노인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렸다.

!

이어 노인은 다시 고개를 낮추어 나뭇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행동에 백남빈은 어리둥절했다.

백남빈이 갸웃하며 다시 길을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그 노인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알고 보니 대단한 고수였구나!)

백남빈은 노인의 유령같은 신법에 놀라고도 감탄했다.

노인은 백남빈이 무슨 소리라도 낼까 싶어 주의를 주면서 그의 소매를 끌어 당겼다.

백남빈도 덩달아 무슨 일인가 싶어서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이고 노인이 끄는데로 따라갔다.

길 옆 숲속의 커다란 나무들을 몇 개 지나 노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순간 백남빈의 귀에 모기소리처럼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를 지키고 서있다가 저 나무사이에서 작은 짐승이 뛰쳐나올 때 크게 소리 한번만 질러주게. 그러면 내 평생 자네의 은혜를 잊지 않겠네."

백남빈의 소매를 잡고 있는 노인의 입술이 옴찔거리며 전음술(傳音術)을 펼친 것이다.

딱히 어렵지도 않은 부탁인지라 백남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고개를 까닥였다가 드니 상투노인은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검술과 내공 외에 다른 무공은 평범한 백남빈에게는 부럽게만 느껴지는 절묘한 신법이었다.

부러움이 일어 노인이 서있었던 곳을 한 번 더 쳐다볼 때였다.

!

갑자기 앞쪽에 서있는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노란 그림자가 휙 뛰쳐나왔다.

백남빈은 소리를 질려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어버렸다.

사사삭!

노란 그림자는 쏜살처럼 백남빈의 옆을 스쳐 다른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앞이 어른거리며 그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바보같으니... !"

욕을 하면서 땅에 침을 탁 뱉은 노인은 백남빈을 한번 노려본 후 노란 그림자가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노인의 작은 부탁 하나 들어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를 부끄럽게 했다.

백남빈은 손에 들고 있던 시집을 품속에 집어넣고 노인이 간 방향으로 달려갔다.

백남빈은 따로 신법을 익힌 적이 없다.

하지만 창평곡에서 내공과 외공을 깊이 쌓게 된 후로 몸이 강해지고 가벼워져서 바람같이 달릴 수 있었다.

 

숲속의 나무들 사이를 오리쯤 달려가니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노인은 말라버린 가시덤불 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노인은 백남빈이 자기를 쫓아 온 것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녀석도 고수였을 줄은 몰랐구만."

"아닙니다. 저는 무황성의 일개 무사에 불과 합니다."

백남빈이 고개를 저으며 하는 말을 듣고 노인이 빈정거렸다.

". 언제부터 무황성에서 그대같은 절세고수를 일개 무사로 두기 시작했을꼬?"

백남빈은 오리쯤 되는 길을 순식간에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숨결이 전혀 흩트려 지지 않았다.

노인은 그걸 보고 백남빈이 실력을 숨긴 채 자신을 농락했다고 오해한 것이다.

"네놈이 감히 육정풍(陸靖風) 앞에서 수작을 부리려 하다니... 아무튼 그딴 것은 조금 있다가 따지자. 지금은 바쁘니까."

노인은 두서없이 횡설수설하며 다시 가시덤불 쪽을 돌아보았다.

백남빈은 육정풍이란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들렸다.

하지만 금방 생각이 나지는 않아서 육정풍이란 노인과 함께 가시덤불 쪽을 살펴보았다.

무성한 가시덤불 맞은편에는 노란색의 작은 그림자 하나가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산()닭인 듯 한데 노란 깃털이 선명하며 부리가 강철같이 야무지고 새빨간 벼슬이 멋있어 보였다.

그 노란 산닭의 뒤는 절벽이었다.

(왜 이 노인이 오도 가도 못하고 우물쭈물거리는지 알겠다. 만약 덤불을 건드리기만 하면 닭은 절벽으로 뛰어 내리고 말겠지.)

백남빈은 노란 산닭이 맘에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닭도 백남빈과 육정풍을 쳐다보며 꼿꼿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무척 오만해 보이는 자태였다.

"! 네놈도 저 황계(黃鷄)를 탐내고 있구나. 어림도 없지. 어림도 없어."

육정풍이 백남빈에게 코웃음 치면서 말했다.

"저놈은 내가 장백산(長白山)에서 발견하여 여기까지 몰아온 거야. 비록 아직 내손에 잡히진 않았지만 내 것이나 다름 없다구."

"어째서 별 것 아닌 산닭 한 마리를 이천 리 넘게 쫓으면서까지 잡으려고 합니까?"

백남빈의 물음에 육정풍이 눈을 부라리며 얼굴표정을 무섭게 했다.

"별것 아니라고? 저 황계가? 배우지 못한 무식한 놈!"

백남빈은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자신은 겨우 열네 살에 무황성 등천제에서 우승했을 뿐 아니라 양부의 영향으로 학문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를 무식한 놈으로 취급하자 백남빈은 영 기분이 뒤틀렸다.

그렇다고 황계라는 이름의 산닭을 잘 모르면서 아는 척 할 수도 없었다.

(저놈의 황계를 내가 잡아버려야지. 이 영감이 얼마나 애걸하는지 한번 봐야겠다.)

백남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계만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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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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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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