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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초의 살인

 

 

(허억!)

막 철산산의 애처로운 육체를 유린하려던 철목풍은 질겁하며 일어났다.

... 네놈은...?”

이어 황급히 바지를 추스리며 돌아보던 철목풍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언제였을까?

한 명의 소년이 대과벽의 깎아지른 절벽 끝을 밟고 표연히 서있었다.

마치 유령같이 나타난 그 소년은 영준하면서도 호방한 인상을 지녔다.

특이하게도 이 소년의 머리카락은 아주 짧다. 빡빡 밀었다가 다시 나는 듯한 소년의 짧은 머리카락은 은은히 붉은 빛을 띄고 있어 이채롭다.

붉은 머리의 소년은 타는 듯 붉은 색의 바람막이, 즉 피풍의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파라라락!

그 피풍의가 밤바람에 세차게 펄럭인다.

그러자 드러나는 소년의 양쪽 허리춤에는 각기 칼과 검 한 자루씩이 꽂혀있다. 폭이 얇은 칼과 반대로 폭이 넓은 검이 그것이다.

칼의 이름은 파천마도(破天魔刀)고 검의 이름은 낭아신검(狼牙神劍)이다.

이검한-!

그렇다. 소년은 바로 이검한이었다.

 

이검한은 대과벽 중간쯤에 숨겨져 있는 현음동천에서 한 달 가까이 머물고 있는 중이었다. 그를 이곳까지 태워다준 철익신응이 어디론가 가버렸기 때문이다.

철익신응이 태워다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걸어서 곤륜산으로 돌아가야 한다.

대과벽에서 곤륜산 남쪽에 자리한 장춘곡까지는 무려 삼천여 리나 된다.

가려면 못갈 것도 없지만 열사의 사막을 가로질러 삼천여 리나 걸어갈 생각을 하자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이검한은 생각 끝에 현음동천에 머물면서 서역사천왕의 무공을 연마하며 철익신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지난 오늘 밤 현음동천 위쪽에서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 올라와 본 것이다.

 

(저 애송이가 언제 나타났지?)

이검한을 발견한 철목풍은 가슴이 섬뜩해짐을 느꼈다.

철목풍 역시 상당한 경지에 이른 고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검한이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일 이검한이 암습을 할 작정이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철목풍은 절로 가슴이 오싹해졌다.

그러면서도 철목풍은 아직 치기가 가시지 않은 이검한의 모습에 방심하게 되었다.

흐흐! 운이 나쁜 놈이로군! 하필이면 보면 안되는 장면을 보다니...!”

철목풍은 이검한에게 다가가며 음산하게 웃었다.

죽어랏!”

그리고는 일장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오른손으로 벼락같이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빠카카캉!

철목풍의 장심에서 주홍빛 노을이 확 일어나 이검한의 가슴으로 날아갔다.

잔양강살(殘陽罡煞)!”

마침 정신을 되찾은 포대붕이 그것을 보고 기겁하며 부르짖었다.

철목풍이 시전한 일장은 잔양강살이라 불리는 양강한 마공인데 스치기만 해도 심맥이 타들어가 죽고 만다.

콰아아앙!

철목풍이 날린 잔양강살이 피풍의를 두르고 있는 이검한의 가슴을 후려쳤다.

(죽였다!)

철목풍은 자신의 일장이 이검한의 가슴을 강타하자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 저럴 수가...!”

하지만 그 자의 득의의 웃음은 떠오를 때보다 더 빨리 사라져야만 했다. 잔양강살에 격중된 이검한의 몸이 그저 움찔했을 뿐 한 걸음도 밀려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철목풍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이검한이 두르고 있는 피풍의가 바로 화룡잠(火龍蠶)이란 천고의 보물로 짠 희세의 호신지보인 적룡풍(赤龍風)임을...

마화삼보의 하나인 적룡풍은 용암의 열기에도 견디어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룡단정을 복용한 덕분에 지금 이검한의 내공은 철목풍보다 두 배 이상 심후한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철목풍이 구사한 어줍잖은 잔양강살 따위는 이검한에게 전혀 타격을 입힐 수 없다.

... 죽여랏!”

철목풍은 부하들에게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은 뒤로 물러섰다. 이검한에게서 왠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그자는 부하들을 방패삼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철목풍이 대동한 자들은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이다. 그자들이라면 최소한 몇 십 초는 이검한을 막아줄 것이다.

철목풍은 부하들이 이검한을 상대하는 동안 그의 무공을 저울질 해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 판단되면 달아날 작정을 했다.

하지만 그같은 생각은 철목풍의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와아!”

죽여라!”

십여 명의 장한들이 기세 좋게 함성을 지르며 이검한을 덮쳐간 것과,

퍼퍼퍽!

케에엑!” “크에엑!”

그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퉁겨진 것은 거의 동시의 일이었다.

사방으로 퉁겨져 나뒹군 장한들의 몸뚱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으깨져있었다.

죽은 자들은 물론이고 철목풍과 포대붕도 이검한이 어떤 수법을 썼는지 알아보지 못했다.

부하들이 일거에 몰살당하자 철목풍은 경악과 불신으로 두 눈을 부릅떴다.

(... 달아나야 한다!)

철목풍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마치 발가벗은 채 사나운 맹수 앞에 선 기분이 이러할 것이다.

헌데 그자가 달아나야한다고 느낀 바로 그때였다.

스읏!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더니 철목풍과 포대붕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크에에엑!”

우두두둑!

그 직후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무엇인가 으깨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 두고 보자!”

피이이잉!

이어 공포에 질린 외침과 함께 철목풍의 몸은 질풍같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철목풍은 유령같이 다가선 이검한에게 속수무책으로 일장을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채 달아난 것이다.

이검한은 그자를 추격하여 격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실 이검한은 난생 처음 살인을 한 탓에 가슴이 덜컹해진 상태였다.

철목풍의 수하들이 달려들자 이검한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헌데 별 생각 없이 가볍게 주먹을 흔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자들은 단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해버렸다.

이검한이 보기에 그자들은 너무 약했다.

게다가 마치 죽기를 원하는 것처럼 자신의 간단한 주먹질도 피하지를 않았다.

그자들이 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피하지 못한 것임을 이검한이 안 것은 우두머리인 철목풍을 상대해본 후였다.

철목풍조차 이검한 자신의 주먹을 피하지 못하고 간단히 얻어맞아 늑골이 부러진 것이다.

(내가 살인을 하다니...!)

이검한은 주위에 널부러진 시신들을 둘러보며 치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그였다.

주위를 둘러보던 이검한의 시야로 발가벗겨진 채 누워있는 금발소녀 철산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철목풍에게 겁탈 당할 뻔한 그녀의 민망한 모습을 보는 순간 살인을 했다는 죄책감은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이런 몹쓸 짓을 하다니...!”

이검한은 새삼 철목풍에 대해서 살기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본의 아니게 철산산의 알몸을 본 때문이다.

(누란왕후나 현음마모님과는 또 다르구나!)

중심부에 소담스러운 황금색 춘초(春草)가 덮여있는 철산산의 아랫도리를 훔쳐보며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인들의 몸은 얼굴만큼이나 다양하여 똑같을 수 없다.

하물며 이검한이 본 누란왕후 흑요설이나 현음마모의 알몸은 난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반면 철산산은 아직 덜 성숙한 어린 소녀다.

황금색 솜털로 덮여있는 철산산의 중심부를 본 이검한은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물론 이검한이 여자의 알몸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이미 여자의 비밀을 속속들이 보았을 뿐 아니라 현음마모의 몸을 오랫동안 품어보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소녀가 알몸으로 누워있는 모습은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가게 만든다.

(다행히 수혈이 짚혀 있어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도 모를 것이다.)

이검한은 터질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필사적으로 진정시키면서 조심스럽게 철산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기 시작했다.

자신이 능욕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을 철산산이 모르게 해주려면 가능한 원래와 비슷하게 입혀주어야만 한다.

철목풍을 한주먹에 날려 보낸 이검한이건만 가녀린 소녀의 몸에 옷을 입혀주면서 식은땀을 비오듯 쏟아내야 했다.

포대붕은 이검한이 철산산의 알몸에 손을 대자 아연긴장했었다.

하지만 이검한이 자신의 어린 여주인의 알몸에 옷을 입혀주는 것을 보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포대붕이었다.

 

잠시 후, 대과벽 위에 하나의 작은 무덤이 생겨났다.

물론 포대붕의 아내인 교숙하의 무덤이었다. 철목풍에게 납치당하여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수모를 당한 후 끝내 혀를 물어 자결한 비운의 여인인...

포대붕은 사랑하는 아내의 시신을 묻으며 닭 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부디 못난 속하를 벌하여 주십시오. 공주님!”

아내의 시신을 안장한 포대붕은 철산산 앞에 오체복지하며 회한과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내게 미안해 할 것 없어!”

수혈이 풀려 정신을 차린 철산산은 벽안을 반짝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머니를 구하려고 한 짓이잖아? 포역사가 그만큼 부인을 사랑한 증거로 알고 나를 납치한 일은 불문에 부치겠어!”

철산산은 아버지뻘인 포대붕을 위로하며 의젓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힐끗 옆에 서 있는 이검한을 훔쳐보았다.

“...!”

이검한은 붉은 피풍으로 몸을 감싼 채 대과벽 끝에 서서 멀리 남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라라락!

붉은 피풍을 밤바람에 펄럭이며 서 있는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늠름해보였다.

철산산은 그런 이검한의 모습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뺨을 살짝 붉혔다.

(나보다 몇 살 더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저 무섭고 교활한 철목풍을 쫓아버렸다니...!)

그녀의 숨결이 자신도 모르게 가빠졌다.

몽고족의 거친 사내들만 보아온 그녀에게 영준하면서도 시원시원한 인상을 지닌 이검한의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철산산은 이검한의 주위를 끌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하여간 오늘밤 일은 마음에 두지 말아. 감사하려면 이공자님께나 하면 돼!”

그녀의 말에 이검한은 쓴웃음을 지으며 두 주종을 돌아보았다.

감사는 무슨...!”

그러자 포대붕이 이검한을 향해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공자님!”

고개를 숙인 포대붕은 굳은 결의가 담긴 음성으로 말했다.

공자님은 소인과 달단왕부(韃靼王府)의 큰 은인이십니다. 앞으로 소인 포대붕, 분골쇄신으로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이검한은 포대붕의 단호한 태도에 내심 쓴 웃음을 지었다.

(부담스럽군!)

하지만 거절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포대붕의 태도로 보아 하늘이 무너져도 결심이 변할 것같지가 않다.

이검한은 포대붕과 철산산의 이목을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달단여왕께서도 지척에 이르셨겠군!”

그의 말을 들은 포대붕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습니다!”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는 포대붕의 모습에 철산산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포역사?”

포대붕은 초조한 표정으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여왕님께서는 공주님을 구하시려고 호위도 대동하지 못하신 채 속하를 추적해 오시는 중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주위는 이미 철목풍의 수하들에게 장악당한 상태니...!”

포대붕의 말에 철산산의 안색도 홱 변했다.

정말 큰일이야! 철목풍이 엄마에게 어떤 나쁜 짓을 할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듣고 있던 이검한이 포대붕에게 물었다.

여왕께서 오시는 방향은 어디요?”

저쪽입니다!”

포대붕은 서북쪽을 가리켰다.

내가 먼저 그쪽으로 가보겠으니 포역사는 공주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이검한은 침중한 표정으로 포대붕에게 말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포대붕은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파앗!

이검한은 지면을 박 차고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느낀 순간 그의 모습은 이미 서북쪽의 지평선 쪽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

이검한의 그 신쾌한 경신술에 포대붕과 철산산은 절로 입을 벌렸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포대붕은 이검한이 사라지는 곳을 보며 근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정말 멋있는 분이야!)

근심에 젖은 포대붕과는 달리 철산산의 벽안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좋아! 결정했어.)

천산산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어 미소를 지었다.

(산산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 사람의 신부가 될 거야!)

소녀의 은밀한 설레임 속에 서역의 밤은 깊을 대로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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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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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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