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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쫓기는 소녀 (2)

 

 

아람드리 나무가 즐비한 숲속을 황의소녀는 순식간에 십여 리나 달렸다.

숲속으로도 오솔길은 나있고, 두 갈래의 오솔길에 마주치게 되자 그녀는 멈추어 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황의소녀는 혈도를 짚은 채 겨드랑이에 끼고 왔던 임청우를 오른쪽 길 옆 숲으로 던지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임청우는 장작처럼 뻣뻣하게 던져져 수풀 속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새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지만 이내 나무토막같이 뻣뻣한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곁에 내려앉기도 했다.

잠시 후, 길게 바람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기걸승 세 사람이 날아왔다.

그들 역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거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벌써 며칠 째 종남산에서 술래잡이라니...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한 데 막상 잡을 순 없고...”

노파가 왼쪽 길을 가리켰다.

이쪽이다.”

거지가 머리를 흔들었다.

무슨 뜻이냐?”

그쪽으로 가기는 아마 갔을 거요.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우린 역시 소저를 잡지 못할 거요. 아마도 소저에겐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소.”

노파가 코웃음을 쳤다.

소저는 어려서부터 장원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어. 깊고 깊은 심처에서 그녀가 어떤 재주를 배울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아무 재주도 없고 단지 우리에게 몇 가지 무공을 배운 것에 불과한 어린아이를 아직 우리가 잡지 못하고 있다는 건 이상하지 않소?”

거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말했다.

노파가 잠시 침묵했다.

그렇군. 그건 이상해. 더구나 소저의 몸에선 끊임없이 만리향 냄새가 풍기는데 말이야.”

문득 중이 입을 열었다.

소저는 주인을 닮았소. 도무지 그 생각을 예측할 수 없질 않소.”

거지와 노파가 흠칫했다.

중이 계속 말했다.

우린 주인을 대하듯이 소저를 대해야 할 것 같소. 주인의 생각을 알려하지 않고 우리가 받은 명령만 충실히 수행하듯 소저의 생각을 예측할 필요 없이 무작정 쫓기만 하면 언젠가는 소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오. 발견하기만 하면...”

발견하기만 하면 절대로 자기들의 손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소리다.

노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쫓는다. 우린 아무리 생각한다 해도 주인이나 소저를 따라가지 못한다.”

노파와 중은 만리향의 냄새가 흐르고 있는 왼쪽길로 주저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거지는 오른쪽 길이 못내 아쉬운지 몇 번이나 돌아보고서야 그들을 뒤쫓아 갔다.

임청우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아니 그들의 대화가 들리고 있었다.

(어머니만 아들을 죽이려 하는 게 아니라 아버지도 딸을 죽이려 하는 건가? 내가 책에서 보고 배운 건 모두 세상이 아니고 환상이었단 말인가?)

임청우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듣기로는 노파 등의 주인이란 사람은 황의소녀의 아버지가 틀림없는 것 같았던 것이다.

사락!

갑자기 작고 보드라운 손이 임청우의 얼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임청우는 자신의 눈까풀이 무거워져 내려 감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혈도가 찍힌 것도 아니지만 그는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임청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사방이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이제 땅을 뒤덮고 있는 것은 숲이 아니라 어둠이다.

그리고, 그 땅을 지고 있는 것은 자신이고, 자신의 눈앞에는 영롱한 두 개의 별이 아롱거리고 있었다.

멍청이! 이제야 깨어났네.”

속삭이는 듯한 음성이면서도 조롱하는 듯한 음성이 임청우의 귀에 들려왔다.

그의 눈앞에 있는 두 개의 영롱한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거듭했다.

임청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의소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푹 자고 난 덕분인지 몸이 아주 홀가분했다.

비록 미음 한 그릇 마신 것에 불과하지만 허기도 사라졌다.

몸이 편해진 탓인지 황의소녀에 대해 느끼고 있던 불쾌한 감정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굴려서 주위를 확인하며 임청우는 물었다.

? 나를 이리로 데려왔지?”

그건 네가 남을 잘 속이기 때문이야.”

황의소녀가 해실해실 웃으며 대답했다.

임청우는 그녀의 표정만 보고는 속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쓰륵쓰륵!

아래쪽에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려온다.

바람이 얼굴과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며 대지가 기우뚱거린다.

그들이 있는 곳은 키가 이십 여장에 달하는 거목의 가지 위였다.

임청우는 내심 중얼거렸다.

(속이 좁은 사람이나 여자와는 다툴 바가 못 된다 했다. 바람소리거니 생각하자.)

그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나뭇가지를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시커먼 공간에 가득한 바람만 느껴질 뿐 땅은 보이지도 않는다.

가려고?”

나무에 비스듬히 기대 누우며 황의소녀가 맘대로 하라는 듯이 말을 던졌다.

임청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층층으로 얹혀진 가지들 중 하나를 내려왔을 때 위쪽에 있는 소녀가 또 던지듯이 말했다.

검주 유소기를 오랫동안 속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

내가 보기에 넌 유소기를 영원히 속일 수 있을 만큼 현명하지 못해. 또 유소기의 손아귀를 벗어날 만한 능력도 없고.”

휘익!

임청우가 손과 발을 멈추고 있는 앞으로 황의소녀가 나비가 날 듯 부드럽게 날아내려 왔다. 그녀가 내려선 가지가 조금도 휘청이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황의소녀는 임청우에게서 망설임을 읽고 말했다.

나도 쫓기고 있지만 사실 기걸승 따윈 안중에도 없어. 그들은 감히 나를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

그들은 나도 어떻게 하지 못했어.”

임청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황의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소리 죽여 킥킥 웃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녀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히면서 내뱉었다.

나도 너 정도 죽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손가락을 살짝 움직였다. 팽팽하게 당겨진 뭔가가 임청우의 양쪽 귀에 걸려있었다. 그의 발을 묶은 적이 있던 천잠사였다.

임청우의 눈이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황의소녀가 돌연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임청우는 우악스럽게 황의소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던 것이다.

난 죽을 고비라면 수백 번도 더 넘겼다. 우리 어머니조차 나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셨다. 그런 나를 죽고 사는 것으로 협박하려하다니...”

임청우의 손힘은 황의소녀로 하여금 눈물을 찔끔거리게 할 만큼이나 엄청났다.

그의 몸속에 있는 용조층층공의 공력이 밖으로는 뿜어낼 수 없다하지만 고강한 공력임에는 분명한 때문이다.

우협의 제자가 여자나 괴롭히는 사람이야?”

황의소녀가 작지만 뾰족하게 소리쳤다.

순간 임청우는 뱀에 물리기라도 하듯 화들짝 놀라며 황의소녀의 손목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임청우에게 있어 마음속의 사부인 우협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은 백번 죽는 것 보다 더 두려운 일인 것이다.

황의소녀의 손목을 풀어준 임청우는 그녀의 얼굴을 외면하며 가지에 걸터앉았다.

(여자는 항상 이렇게 교활하고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것일까?)

임청우는 늘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발아래로 검은 바위처럼 보이는 나무들이 내려다보였다.

임청우는 황의소녀가 기걸승 세 사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높은 곳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만리향의 향기를 높은 나무 위에서 바람에 실어 날려버리는 것이다.

기걸승이 어느 정도 높이 까지 솟아오르지 않고는 냄새를 맡을 수가 없을 것이란 계산을 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되질 못한다.

이러한 사실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다.

왜 이 근처에서만 맴도는 거지?”

임청우가 물었다.

네가 알 필요 없어.”

황의소녀는 화난 듯이 쏘아붙이며 나비처럼 날아서 나무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협의 제자인 것 같은 이 녀석은 어떤 면에선 전혀 우협을 닮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이나 상하게 하는 짓 따윈 진짜 우협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텐데...

임청우도 묵묵히 황의소녀를 따라 나무를 내려갔다.

잘 들어! 너나 나나 여기 계속 있다간 다 죽어.”

이윽고 나무에서 내려왔을 때 황의소녀는 임청우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지금 난 뭔가를 찾고 있는 중이야. 잠자코 내 뒤만 따라와.”

임청우는 왜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황의소녀는 그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바쁘게 눈망울을 굴리며 숲속으로 유연한 물뱀처럼 미끄러져 들어가는 중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쫓아갔다.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어둠 속에서 다만 혼자 있는 것도 이상해서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일 것이다.

 

***

 

숲속을 헤맨 것도 두 시간 정도 지났다.

하지만 그들은, 아니 그녀는 여전히 그 숲 일대를 벗어나지 않고 맴돌고 있었다. 눈을 빛내며 중요한 그 무엇을 찾고 있음은 틀림없는데...

마침내 임청우가 물었다.

대체 찾고 있는 게 뭐야?”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

황의소녀가 빠르게 말했다.

어두워서 쉽진 않겠지만 아무튼 그곳을 찾아야 돼. 그곳만 찾을 수 있다면 넌 유소기에게서, 난 기걸승으로부터 쫓기지 않아도 될 거야.”

임청우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어떤 일은 아무리 이루려 해도 이루어지지 않고 어떤 일은 전혀 이루려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기도 한다. 네가 찾고 있는 것이 뭐든 간에 이 두 가지 일 중 하나에 포함된다면 우린 전혀 찾을 필요가 없지.”

임청우의 말에 황의소녀는 멈칫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임청우의 말이 이어졌다.

어쨌거나 우린 여기서 너무 오랫동안 지체했어. 남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음을 당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고 나도 좋아하진 않아. 일단은 여기서 떠나야해. 설혹 여기에 그 세 개의 나무가 하늘을 가둔 곳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대현(大賢)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 같이 보인다고 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은 또한 아주 현명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크게 어리석은 것이나 아주 현명한 것이나 모두 일반에서 유리되어 있기에 추측할 수 없어 생기는 혼돈일 것이다.

이 순간에 황의소녀의 심정이 그랬다.

임청우가 어리석은 것인지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그녀의 판단이 마비되어 버렸다.

이성적 판단이 마비된다면, 남의 견해에 무조건 따르게 되는 것이 고금에 걸친 불변의 진리 중 하나일 것이다.

 

쓰륵! 쓰륵!

어디선가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번에는 임청우가 앞장을 서고 황의소녀가 뒤따른 채 어두운 숲속을 걸어갔다. 그는 황의소녀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황의소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그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갑자기 임청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지만 그는 아직 경신술을 배우지 못했었다. 물론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지만...

(바보같이... 경신법을 펼치면 금방 갈 텐데...)

황의소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비웃었다.

(아무 곳에서나 자면 되지 꼭 하늘 가린 곳이라야 돼? 허세는 혼자 다 부리면서...)

임청우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는 이미 알았다.

그녀는 임청우가 잘 곳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임청우를 놀라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사삿!

갑자기 그녀의 몸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그것도 모른 채 그녀가 당연히 따라오겠거니 하고 발걸음을 빨리하여 불빛을 향해 갔다.

비록 경신술을 익히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그의 몸속에는 용조층층공이란 공력이 숨 쉬고 있기에 그 걸음은 놀랍도록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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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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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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