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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달단족의 여왕

 

 

여명 무렵이다.

길고 길었던 사막의 밤이 지나가고 동쪽 지평선이 불그스름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쐐애애액!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이 뿌려대는 눈부신 햇빛을 헤치며 한 명의 여인이 사막을 가로질러 질풍같이 달리고 있었다.

바득! 산산이의 머리털 한 올이라도 건드렸다면 오이라트(衛拉), 네놈들의 씨를 말려버릴 것이다!”

여인은 분노와 초조로 가득 찬 표정인 채 몸을 날리고 있었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화사한 비단옷 위에 두터운 피풍을 두른 이 여인의 머릿결은 찬연한 금발(金髮)이다.

그리고 깊고 그윽한 눈동자는 바다처럼 푸른 벽안(碧眼)이다.

여인의 금발과 벽안은 옥같이 흰 살결과 대비되어 신비롭고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실로 대단한 미모를 지닌 여인인데 한 가지 흠이라면 인상이 지나치게 도도하고 차가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본래 일국(一國)의 공주(公主)라는 고귀한 몸으로 태어나 최상의 공경을 받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모두가 떠받드는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다보니 여인은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을 눈 아래로 보는 도도함이 몸에 배게 되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 금발벽안의 여인이 대단한 미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여전히 쇠락하지 않은 눈부신 아름다움이 있었다. 젊고 싱싱한 분위기 대신 그녀에게는 난숙하고 농염한 육감적인 풍미가 물씬 풍기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비단 옷에 감싸인 터질 듯 농염한 육체에는 젊은 여인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완숙한 관능이 숨 쉬고 있다. 땅을 박차고 도약할 때마다 세차게 출렁이는 가슴의 융기는 절로 숨을 막히게 만든다.

금발미부는 한 자루 활을 들고 있으며 등에는 강철로 만들어진 수십 개의 화살이 든 전통을 짊어지고 있다.

허리에는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반월도도 한 자루 차고 있다.

쐐애애액!

그같이 중무장한 몸이건만 금발미부가 질주하는 속도는 섬전 같았다.

그로 미루어 보건데 그녀의 일신 무공은 결코 범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제발 무사하거라 산산아!)

도도하고 차가운 여인의 봉목은 근심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자식을 지닌 여자라면 누구나 지니게 되는 모성애였다.

산산!

그렇다. 여인은 바로 철산산의 생모였다.

 

-달단여왕(韃靼女王) 나유라(羅維羅)!

 

몽고의 양대 부족 중 하나인 달단(韃靼)부의 젊은 여왕이 바로 그녀다.

금발벽안으로 알 수 있듯이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이 아니다. 그녀는 머나먼 서역 대식국(大食國)의 공주였다.

대식국의 황제는 비단길을 장악하고 있는 달단부와의 우호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의 공주들 중 한 명을 달단왕과 정략결혼 시켰다.

그때 불운하게도 선택된 것이 나유라였다.

당시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나유라는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머나먼 몽고로 달단왕 철고륜(鐵古倫)에게 시집왔었다.

그녀는 철고륜과의 사이에 일남일녀(一男一女)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순전히 정략적인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 사이에 애정이 깊어질 수는 없었다.

비록 두 명의 자녀를 두기는 했으나 부부 사이는 늘 냉랭하고 의례적인 것에 불과했다.

달단왕 철고륜은 나유라의 몸에 밴 도도함과 당찬 기도에 이내 싫증내어 따로 이궁(離宮)을 짓고 그곳에 각지의 미녀들을 모아 쾌락을 즐겼다.

나유라는 스무 살도 채 안된 젊은 나이에 남편에게 버림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질 상 떠나간 남편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다른 여자들처럼 애교를 부린다든지 애원을 하는 짓 따위는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나유라는 아들과 딸을 정성들여 양육하는 한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무공연마에 몰두했다.

그 결과 그녀는 달단부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가 될 수 있었다.

헌데 오 년 전, 그나마 남편이라고 있던 달단왕 철고륜이 급사하고 말았다.

나유라는 여자로서는 한창인 이십대 후반에 미망인이 되고 만 것이다.

철고륜은 수치스럽게도 여자와 방사를 즐기던 도중에 죽음을 당했다.

그의 복상사를 두고 한때 독살이라는 소문도 분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철고륜을 복상사시킨 여자는 달단부의 숙적인 오이라트부 출신이었고 철고륜이 죽은 직후 실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갑자기 왕이 급사해 버리자 달단부는 일대혼란에 휩싸였다. 대원제국 후계자의 자리를 놓고 오이라트부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달단부로서는 영도자의 부재는 심각한 위기일 수밖에 없는 때문이다.

하지만 그 혼란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때까지 칩거하고 있던 나유라가 전면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영도력과 기도로 사태를 수습한 것이었다.

그녀는 당시 열두 살에 불과했던 어린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달단부를 자신이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적지 않은 반발도 있었다. 몽고족에 지금껏 여왕은 없었고 또 나유라는 몽고족 출신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나유라는 교묘한 협박과 회유로 내부의 저항을 일소시키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오 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오 년의 세월 동안 나유라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달단부를 지배해왔으며 급기야 달단여왕이라 불리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철혈(鐵血)의 간담(肝膽)을 지녔다는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어머니였다.

딸인 철산산이 피납 되자 평소의 냉정함을 잃고 단신으로 포대붕을 추적해 온 것이었다.

 

헌데 달단여왕 나유라가 막 하나의 모래 언덕을 날아 넘을 때였다.

파앗!

돌연 측면에서 한 자루 창이 날아와 나유라 앞에 꽂혔다.

누구냐?”

나유라는 교갈을 내지르며 급히 멈춰섰다.

흐흐흐! 오랜만이오 여왕!”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한 가닥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이어 모래 언덕 뒤에서 한 명의 청포인이 날아올랐다가 나유라 앞에 내려섰다. 음침하고 교활한 이상을 지닌 사십대 중반의 장한이었다.

철목풍!”

청포장한을 본 나유라의 푸른 벽안에 격렬한 분노와 노기가 번득였다.

그렇다. 청포장한은 바로 대과벽에서 이검한에게 혼이 나서 쫓겨 갔던 철목풍이었다.

철목풍은 장포 속의 가슴부분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데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붕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간덩이가 부었구나, 철목풍!”

나유라는 손에 든 강궁을 불끈 움켜쥐며 노성을 내질렀다.

철목풍은 다름 아닌 오이라트부의 신왕(新王)이다. 그자는 숙부인 전대 오이라트부의 왕 철납아(鐵拉兒)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간웅이다.

철목풍은 나유라의 남편이었던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했다고 의심 받기도 했었다. 철목풍이 달단부와 오이라트부를 통합하여 대원(大元)제국의 부활을 노리고 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흥분하지 마시오 여왕! 화내시는 모습도 한층 매력적이기는 하오만...!”

철목풍은 노기로 파르르 아미를 떠는 나유라를 바라보며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육시를 할 놈! 산산은 어찌했느냐?”

나유라는 그런 철목풍을 향해 노성을 질렀다.

스악!

그러면서 한 자루 철시(鐵矢)를 빠르게 활시위에 걸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나유라는 신궁(神弓)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활 솜씨를 지녔다.

진정하시오. 그렇잖아도 따님 문제로 여왕폐하 앞에 나타난 것이니...!”

짝짝!

철목풍은 능글맞게 웃으며 뒤를 향해 손뻑을 쳤다.

스읏!

그러자 철목풍의 뒤쪽 사구(砂丘) 너머에서 한 명의 거한이 나타났다. 흉악한 인상을 지닌 그 거한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금발소녀가 축 늘어진 채 끼어져 있었다.

산산아!”

금발소녀를 본 나유라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록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기는 하지만 소녀의 의복과 체형으로 보아 영락없는 철산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산산이를 내놓아랏!”

쐐애애액!

활과 화살을 팽개친 나유라는 득달같이 거한을 향해 덮쳐갔다.

어딜!”

꽈릉!

철목풍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소를 터뜨리며 나유라를 향해 장력을 후려쳤다. 그자가 손을 휘두르자 은은한 노을빛이 확 주위를 물들였다.

잔양강살!

바로 그것이 시전된 것이다.

네놈이...”

거한을 덮쳐가던 나유라는 어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일장을 마주 쳐냈다.

퍼엉!

으음!”

요란한 폭음과 함께 나유라는 강렬한 잠경에 밀려 신음과 함께 제자리로 돌아갔다.

철목풍도 순간적으로 상체를 휘청했다. 나유라의 무공은 철목풍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저 계집이 철고륜의 무공과 서천 신월동맹(新月同盟)의 절기를 연마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

철목풍은 내심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대신 음흉한 눈빛으로 나유라의 아래 위를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흐흐흐! 여왕께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물건을 내놓으면 따님을 돌려드리겠소! 최근에 얻으신 장보도(藏寶圖) 말이오!”

철목풍의 말에 나유라는 움찔했다.

그자의 말대로 나유라는 얼마 전 한 장의 장보도를 얻었었다. 그 사실은 달단부 내에서도 최고비밀로 되어 있었는데 철목풍이 어떻게 알아낸 것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장보도라니?”

나유라는 내심의 동요를 감추며 냉랭하게 일갈했다.

하지만 철목풍은 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치미 떼어도 소용없소! 여왕께서 최근 세조(世祖) 홀필열(忽必烈=쿠빌라이)님이 세우신 보고(寶庫)의 장보도를 얻었음을 알고 있으니까!”

그 자의 구체적인 말에 나유라는 이를 갈았다.

(대체 어떤 작자가 그 사실을 저놈에게 알렸단 말인가?)

비로소 자신의 측근 중에 철목풍과 내통자가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분통을 터뜨려봐야 소용없는 상황이었다. 비록 장보도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딸의 안전과 바꿀만한 것은 못된다.

좋다. 장보도를 주겠다. 그러니 먼저 산산이를 이리 던져라!”

나유라는 차갑게 말하며 품 속에서 한 장의 낡은 양피지를 꺼냈다.

흐흐흐! 그럴 수야 있나? 따님을 돌려받고 싶으면 장보도부터 내놓으셔야지!”

나유라가 꺼낸 양피지를 본 철목풍은 두 눈을 탐욕으로 물들이며 말했다.

나유라는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며 철목풍을 노려보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 장보도를 던질 테니 동시에 산산이도 이쪽으로 보내라!”

그 말에는 철목풍도 동의했다.

좋소. 그럼 공평하겠지!”

이어 철목풍은 뒤에 서있는 거한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라!”

피잉!

나유라는 교갈과 함께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양피지를 철목풍을 향해 던졌다.

화라락!

동시에 거한도 안고 있던 금발소녀를 나유라 쪽으로 던져 보냈다.

산산아!”

!

나유라는 즉시 몸을 날려 금발소녀를 받아갔다.

스읏!

두 팔로 금발소녀를 받아 안은 나유라는 급히 지면으로 내려섰다.

산산아! 이제 안심... !”

헌데 두 팔로 금발소녀를 안아들고 내려서던 나유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금발소녀의 머리카락이 갈라지며 나타나는 것은 철산산의 얼굴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철산산보다 한 두 살 많아 보이는 그 소녀는 철산산 못지 않게 아름답다.

하지만 천진난만한 철산산과 달리 소녀는 아주 표독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소녀의 금발도 가짜였다. 흩어지는 가발 속에서 나타나는 것은 칠흑같이 검은 흑발(黑髮)이었다.

너는 산산이 아니구나. !”

경악하던 나유라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당탕!

이어 나유라의 풍만한 교구가 뒤로 나뒹굴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던 가짜 철산산이 마혈을 찍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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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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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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