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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억지 혼례식(婚禮式) (1)

 

 

일각 정도 걸었을 때 임청우는 멀리 보이던 불빛을 십장 밖에 두고 있었다.

불빛은 화전을 일구어 살아가는 화전민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초가집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임청우는 황의소녀의 뒤를 따라 숲을 헤맬 때 이 집을 보았었다.

초가집으로 다가가니 안쪽에서 도란도란 말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분명 사람의 말소리인데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상한 일이었다.

임청우는 초가집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들려오는 말소리는 여전히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자의 음성인지 여자의 음성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말소리는 임청우가 가까이 가는 만큼 작아지고 있었다.

(이상하다. 마치 내가 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 같다.)

임청우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당연히 황의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성미 나쁜 계집애가 삐쳐서 어디론가 샜나 보다 생각하면서 임청우는 뒷걸음질로 초가집에서 물러섰다.

그에 따라 들려오던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오장 정도 물러나도 여전히 크게 들려왔다.

다만 웅웅 거려서 무슨 말인지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는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인가? 가까이 가면 작아지고 물러서면 커지는 말소리라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쭈뼛해졌다.

하지만 용기를 낸 임청우는 발을 힘차게 내딛으며 다시 초가집을 향해 다가갔다.

주인장 계십니까? 지나던 사람입니다.”

초가집 문 앞에 이른 임청우는 무게 있는 음성으로 외쳤다.

“...”

갑자기 문안에서 들려오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실례하겠습니다.”

임청우는 다시 한 번 말하고는 문을 밀었다.

덜컹!

문이 열리는 순간 초가집 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졌다. 불이 꺼져버린 것이다.

긴장한 임청우는 쓸 줄도 모르는 청강사자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집 안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멀리서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이 순간에는 그쳐버렸다.

어둠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있다.

그러나 임청우는 그것의 존재를 느낄 수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선 임청우는 중심을 흩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발을 끌듯이 미끄러뜨리며 천천히 나아갔다.

발에 느껴지는 거친 바닥이 자기가 살았던 농산의 모옥과 비슷했다.

임청우는 발끝으로 앞을 더듬으며 살쾡이처럼 소리없이 나아갔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때 마다 긴장은 실이 당겨지듯이 팽팽하게 당겨지고, 몸은 자신의 무게를 잊어버렸다.

정신이 하나로 모아져 있는 것이다.

!

임청우의 발이 각목을 더듬어 냈다.

방 가운데에 놓인 탁자의 다리라 생각하며 옆으로 돌았다.

그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임청우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푸른 그림자들이 솟아올랐다.

어둠속에서 나타난 그 푸른 그림자들은 흐느적거리며 날아올라 임청우를 향해 빠른 속도로 덮쳐들었다.

카아아아아!”

그와 동시에 비단 폭을 찢는 듯한, 유부의 악귀가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번쩍!

임청우는 검을 뽑아 앞에 있는 푸른 그림자를 향해 휘둘렀다.

파앗!

청광이 일면서 푸른 그림자가 두 조각이 되었다.

위위위윙!

동시에 그것들은 임청우의 주위를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

악귀의 울부짖음은 같은 괴성은 여전히 들려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푸른 그림자들은 다시 배로 늘어났다.

눈앞이 팽팽 돌며 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푸른 그림자들에 갑자기 눈과 입이 생겼다.

크아아!”

임청우가 놀라는 순간에 그것들은 임청우를 향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으합!”

임청우는 검을 내동댕이치며 양손으로 푸른 그림자들을 움켜잡았다.

찌이익!

비단폭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푸른 그림자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때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냄새가 났다.

불이 켜진 것이다.

환하게 밝아진 실내는 검소한 거실인데 임청우는 그 가운데에 조각조각 찢어진 푸른 천 조각을 움켜쥐고 서있었다.

장난 그만 치고 나오시오.”

임청우는 내동댕이쳤던 검을 주워 칼집에 집어넣고 웃으며 말했다.

! 사람도 아니군. 하긴 이 정도는 돼야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임청우가 들어온 문의 반대쪽에 있는 방문이 열리면서 황의소녀가 거실로 나왔다.

이 집에 있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소?”

임청우는 그녀를 응시하고 물었다.

갑자기 황의소녀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런 말투 제발 좀 쓰지 않을 수 없어? 속이 니글거리지도 않아? 이제 초면도 아니니까 그만 서로 편한 대로 말하는 게 좋지 않겠어?”

“...”

내게 감히 존대말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는 못해. 대신...”

“...”

억울하면 너도 나처럼 편하게 말해.”

황의소녀는 빠르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양보를 해도 크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었다.

오만하고 까칠한 계집애가 이 정도만 해도 많이 수그러졌다고 생각했다.

황의소녀가 자신과 무슨 일을 도모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아름다운 그녀가 싫지는 않다.

임청우도 딱딱한 말보다는 부드러운 말을 주고받고 싶다.

미인에게는 딱딱하게 대하기도 어려운 법이 아니던가?

임청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황의소녀가 열어놓은 방문에서 농사꾼 차림의 늙은 부부가 나왔다.

비록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신체가 건장하고 온화해보였으며 할머니는 작은 키에 정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주 착한 아이구나. 훗날 큰일을 할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아이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야.”

임청우는 우물쭈물 어쩔 줄을 몰랐다.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황의소녀가 얼굴을 붉힌 채 외면하고 있었다.

과묵해 보이는 할아버지는 흩어져 있는 천을 주워 모으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잡고 탁자로 끌어다 앉히며 말했다.

저건 우리 부부의 이불이지. 마련한지 이십 년이 넘었으니 이제 바꿀 때도 되었어. 그러니 미안해 할 건 하나도 없단다.”

임청우는 문득 그 할머니가 자기가 만난 적이 있는 누군가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닮은 사람이 누군지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미 저 아이에게 다 들었단다. 네 얼굴이 검기는 하지만 마음씨가 올바르고 기상이 훌륭하니 용모에 그렇게 구애될 것은 없단다. 대장부는 그 행동으로 말하지 얼굴을 파는 것은 기생오라비나 하는 짓이란다.”

임청우는 어리둥절했다.

자기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검다고는 할 수 없다. 씻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얼굴에 묻어있던 검댕이 이미 우협 장백승에 의해 깨끗이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얼굴에 황의소녀가 검게 변하는 약을 다시 발랐다는 사실도 모른다.

어쨌든 간에 할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며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의소녀는 고개를 돌린 채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할머니는 임청우의 손을 다독거리며 또 말했다.

효자는 부모의 그릇된 말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란다. 비록 한때는 불효소리를 듣더라도 훗날 협으로 명성을 떨치고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된다면 그게 바로 효란다.”

임청우는 이야기가 잘못됐다는 것을 확연히 알았다.

할머니, 대체 무슨...”

흠흠...”

임청우가 말을 하려는 순간 황의소녀가 헛기침을 하면서 막았다.

부끄러워할 것 없단다 얘야. 우리도 너와 같은 나이에 혼인을 했단다. 아무 말 말고 오늘 밤 여기서 혼례를 올리도록 해라.”

(혼례를 올려?)

임청우는 어리벙벙한 심정이 되어 황의소녀를 바라보았다.

황의소녀는 할아버지가 주워 모은 푸른 천들을 받아서 한쪽에 있는 아궁이로 가져가고 있었다.

영감! 오늘이 길일이 맞죠?”

그렇소.”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할머니가 임청우에게 속삭이듯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혼례준비를 할 테니 너희들은 잠시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황의소녀가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임청우는 그녀에게 따져 봐야겠다는 생각에 급히 따라 들어갔다.

할머니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노부부의 침실은 자그만 했다. 하나의 침상과 밖의 것보다 약간 작은 탁자가 하나 있으며, 벽쪽으로는 낡은 옷장이 붙어있다.

황의소녀는 침상에 걸터앉으며 오만하게 팔짱을 꼈다.

임청우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며 음성을 낮추고 말했다.

왜 이같은 일을 꾸민 것이지.”

내가 함께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었지.”

“...”

지금 하도록 하겠어.”

황의소녀는 입술을 달짝거리며 전음으로 말했다.

임청우는 다만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우롱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황의소녀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전음으로 말했다.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지 않아?”

큰일!

임청우는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빛나자 황의소녀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우협의 제자, 그리고 난... 음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며 어떤 일이든지 해낼 수 있어. 네가 얼마만한 능력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몰라도 내가 볼 때는 아직 서투르기 짝이 없어. 우협의 제자가 아니라면 넌 이미 죽어도 몇 번은 죽은 목숨일 거야.”

임청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러했다.

더구나 소녀가 큰일을 해보자는 대는 긴장감마저 느껴졌다.

바로 어제 저녁에 그가 결심한 것이 역사에 길이 남을 큰일을 해보겠다는 것이었지 않은가?

황의소녀가 말을 이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쫓기고 있어. 그들은 아버지의 부하들인데 나를 잡아서 아버지에게로 데려가고 말거야. 한데, 난 무림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

무슨 일이야?”

임청우가 물었다.

황의소녀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뱉었다.

한 여자를 찾아서 죽이는 거야. 그 여자를 죽이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게 네가 말하는 큰일인가?”

임청우가 눈을 찌푸리며 말했다.

원래는 그 여자만 죽일 생각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몇 달 동안 무림을 돌아본 바로는 능력 있는 몇 사람만 모을 수 있다면 능히 무림을 제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첫번째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너야.”

임청우는 어이가 없었다.

스무 살도 되지 않은 계집아이가 누구의 말을 들은 것도 아닌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고 있다.

무림이란 것의 실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임청우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기인이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무림을 제패할 뜻을 품다니...

그것도 어린 계집아이가...

황의소녀가 눈을 번득이며 말했다.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아?”

임청우는 야심으로 타오르는 그녀의 눈을 보았다.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만 같은 눈이다.

한데 그 일과 혼례가 무슨 상관이 있나? 왜 그런 일로 사람을 우롱하려는 거야?”

임청우가 말머리를 돌렸다.

황의소녀가 피식 웃었다.

그건 거짓말은 약간 했지만 장난은 아니야. 어차피 여자는 시집을 가야해. 그렇다면 적당한 상대를 발견했을 때 혼인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야.”

대체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나?”

임청우가 기가 막혀서 물었다.

황의소녀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하녀들에게.”

임청우가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넌 아직 어린애야.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고 하는데 그렇게 쉽게 결정하고 쉽게 할 것이 아니라는 것도 모르다니. 난 너의 장난에 놀아날 생각은 조금도 없다. 혼인을 하든 뭘 하든 네 맘대로 해라.”

황의소녀는 화가 치밀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 ...!”

그때 할머니가 들어오면서 말했다.

벌써 부부싸움을 하느냐? 하지만 그건 침실에서 소리를 낮추고 해야지 방밖으로 가지고 나오면 안되는 것이란다.”

임청우가 그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할머니, 우리가 혼인을 한다는 것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저 소저에게 호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혼인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갑자기 할머니가 대노하여 소리쳤다.

말다툼 한번 했다고 여자를 버리고 떠날 셈이냐? 이 할머니가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할머니는 손을 갈쿠리처럼 오무리고 임청우의 손목을 잡으려 들었다.

콰득!

너무도 신속하고 재빠른 솜씨에 임청우는 꼼짝 못하고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손목을 뿌리치려고 하는 순간 벌써 할머니가 몇 군데의 혈도를 찍었다.

임청우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오며 말도 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얼굴을 풀고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직 어리니까 잘 몰라서 그랬겠지만, 결코 그런 게 아니란다. 다시는 여자를 버리겠다는 말을 하지 말아라.”

그녀는 임청우의 혈도를 다시 풀어줄 기세였다.

그때 황의소녀가 소리쳤다.

할머니, 풀어주지 말아요. 도망가고 말거예요.”

걱정 말거라. 우리 부부의 손에서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단다.”

하지만 그는 우협의 제자란 말예요.”

!”

황의소녀의 외침에 할머니는 놀란 듯이 임청우를 다시 보았다.

임청우의 왼손에 들려있는 고색창연한 보검, 얼핏 보기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는 그 검을 보는 순간 할머니의 안색이 변했다.

정말 우협의 제자였구나. 우협께선 안녕하시냐? 만나거든 개방의 종가(宗家)부부가 안부하더라고 전해라.”

혈도를 풀어주면 절 버리고 도망 가버릴 거예요.”

황의소녀가 얼굴을 가리고 울먹거리며 말했다.

할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애야, 네 사부께선 우리 개방의 은인이니 내가 너를 함부로 대해선 안되겠지만... 어쩔 수 없구나. 일단 혼례를 치르고 나면 풀어주고 사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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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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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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