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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독한 소녀

 

 

호호호! 드디어 내 손에 걸렸구나 어머니의 원수!”

나유라를 쓰러뜨린 가짜 철산산은 발딱 일어서며 독기서린 교소를 터뜨렸다.

흐윽! 이런 치졸한 함정에 걸려들다니...!”

나유라는 바닥에 쓰러진 채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사태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마혈이 찍히는 바람에 지금의 나유라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마침내... 마침내 어머니의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유라를 암습하여 쓰러트린 소녀는 원한과 증오로 물든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콰득!

말과 함께 소녀는 악독한 표정으로 힘껏 나유라의 풍만한 젖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크윽... 너는 누구냐?”

딸 뻘인 어린 소녀에게 젖가슴이 짓밟힌 나유라는 고통과 굴욕에 찬 신음을 토하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호호호! 벌써 나를 잊었단 말이냐? 네년의 손에 무참하게 고문당하고 죽은 하후란(夏候蘭)이란 분의 딸인 나를?”

찌직!

소녀는 발작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자신의 저고리를 거칠게 좌우로 벌렸다. 고름이 뜯기며 벌어진 그녀의 저고리 사이로 금방 내린 눈같이 새하얀 속살이 드러난다.

흐윽!”

헌데 나유라는 저고리가 벌어지는 사이로 드러나는 소녀의 가슴을 보는 순간 숨넘어갈 듯한 신음을 토하며 봉목을 치떴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소녀의 소담스러운 젖가슴 사이에 열십자로 길게 갈라진 끔찍한 흉터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너는 진진(眞眞)... 진진이로구나!”

소녀의 젖가슴 사이에 나있는 열십자의 흉터를 본 나유라는 전율하며 경악성을 토했다. 비로소 눈앞의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호호! 그렇다. 내가 바로 하후진진(夏候眞眞)이다!”

소녀는 그런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원독에 찬 교소를 터뜨렸다.

(이럴 수가! 이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니...!)

나유라는 경악과 불신의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뇌리로 오년 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오 년 전, 나유라의 남편 달단왕 철고륜을 독살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당한 것은 하후란이라는 여인이었다.

하후란은 대단한 미인으로 철고륜이 나유라와 결혼하기 전부터 총애하던 후궁이었다.

철고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아온 하후란이지만 달단부의 안주인이 되지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한 가지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달단부와는 철천지 원수지간인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이 그것이었다.

게다가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되기 전에 이미 결혼한 몸이었으며 뱃속에는 전 남편의 아이까지 갖고 있었다.

철고륜은 천산(天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하후란을 발견하고는 그녀의 미태에 반해 강제로 납치하여 후궁으로 삼았던 것이었다.

본래 색탐이 심했던 철고륜은 하후란이 남의 아내이며 임신까지 하고 있었던 사실 따위는 아랑곳 않고 욕심을 채웠다.

하후란이 워낙 빼어난 미녀였기에 철고륜은 얼마 후 대식국의 공주 나유라와 결혼하고도 변함없이 하후란을 총애했다.

하후란은 철고륜의 후궁이 된 후 반 년 만에 여자 아이를 낳았었다. 당연히 그 여아는 하후란 전남편의 딸이었다.

하지만 하후란의 미태에 푹 빠진 철고륜은 그 여자아이를 자신의 딸로 삼고 자신의 성씨인 철()씨까지 물려주었다.

 

-철진진(鐵眞眞)!

 

이것이 그 여아의 이름이었다.

비록 하후란의 전 남편 딸이기는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예쁘고 영특했던 철진진은 철고륜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났다.

철고륜은 도도한 본처 나유라의 몸에서 난 친 딸 철산산보다 오히려 양녀인 철진진을 더 귀여워할 정도였다.

헌데 오 년 전, 하후란과 철진진 모녀에게 엄청난 시련이 닥쳐왔다. 철고륜이 하후란과 방사를 하던 도중 복상사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평소 하후란을 질시하던 다른 후궁들은 하후란이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점을 악용하여 그녀가 철고륜을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소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나유라는 하후란을 형리(刑吏)들에게 넘겨 심문하게 했다.

그리고 형리들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하후란을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저 단순히 고문을 한 것만이 아니었다. 형리들은 그래도 한때 자신들의 왕의 후궁이었던 하후란을 돌아가며 능욕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녀가 오이라트부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같은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결국 하후란은 남편의 부하들에게 몸을 더럽힌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혀를 깨물어 자살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유라는 하후란을 욕보인 형리들을 모조리 참수형에 처했다.

그리고 비참하게 죽은 하후란은 실종된 것으로 처리하고 그녀와 관련된 일은 일체 비밀에 부쳐버렸다.

하지만 완전한 비밀은 없는 법! 하후란의 딸인 철진진이 오 년 만에 나유라 앞에 나타나 복수를 하려는 것이다.

나유라는 철진진이 형리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비극이 일어날 당시 철진진의 나이는 불과 열두살이었다.

하지만 형리들은 하후란의 자백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 어린 철진진을 발가벗겨 놓고 그녀의 여린 가슴을 비수로 갈랐다. 자백하지 않으면 하후란이 보는 앞에서 철진진의 심장을 꺼내겠다고 협박하면서,

그래도 하후란은 끝내 범행을 시인하지 않았다. 자백을 해봐야 자신들 모녀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끔찍한 죽음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하후란은 형리들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했으며 결국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해버렸었다.

하후란이 자살한 후 형리들이 철진진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형리들은 하후란에게 저지른 만행이 밝혀져 처형당하면서도 철진진의 처리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유라는 어린 철진진 역시 형리들에게 고문과 유린을 당하다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렸었다.

 

흐흐흐! 오 년 만에 모녀가 상봉한 소감이 어떻소? 비록 피가 섞인 사이는 아니긴 하지만...!”

철목풍은 마혈이 찍힌 채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내려다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런 그 자의 손에는 그녀가 던져준 장보도가 들려 있었다.

나유라는 창백한 안색으로 신음을 토했다.

... 오 년 전 그때 진진이를 구해간 게 철목풍 네놈이었느냐?”

그녀의 물음에 철목풍 대신 철진진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지난 오년 간 양부(養父)의 슬하에 숨어서 네년에게 복수할 기회만 기다려왔다!”

철진진, 아니 하후진진은 철목풍의 양녀가 된 상태였다.

 

오 년 전, 철목풍은 철고륜이 급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단부의 내정을 염탐하기 위해 은밀히 달단부에 잠입했었다.

그러다가 하후진진 모녀가 갇힌 뇌옥을 발견했으며 그 뇌옥의 어느 빈 감옥에서 죽어가던 하후진진을 구출한 것이다.

나유라가 예상했던 대로 형리들은 하후란을 유린한 것으로도 모자라 아직 어린 소녀에 불과한 하후진진까지 짓밟는 만행을 자행했었다.

가슴에 깊은 상처를 입은 데다가 어린 몸으로 여러 명의 사내들에게 난행을 당한 후유증으로 하후진진은 기식이 엄엄했었다.

사실 하후란이 혀를 물고 자살한 것도 딸이 형리들에게 농락당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내들의 육중한 몸 아래 깔려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바둥거리는 어린 딸의 무참한 모습에 하후란은 하늘을 저주하며 혀를 물어버린 것이다.

하후란이 자살해버리자 형리들은 당황하여 하후진진을 뇌옥의 후미진 감옥에 숨겨버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후진진은 사경을 헤매던 중 철목풍에게 발견되었던 것이다.

 

호호호! 구천에 계신 어머니께서 보우하사 내게 복수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하후진진은 광기에 찬 눈으로 나유라를 노려보았다.

나유라는 그런 하후진진을 처연한 표정으로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 진진아! 모두가 내 불찰이었다! 나는 달단과 오이라트 양 부족의 갈등이 그토록 깊은 줄은 미처 몰랐다!”

나유라의 말 대로였다.

달단부의 형리들이 자신들의 왕의 여자였던 하후란과 그녀의 딸 하후진진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녀들이 오이라트 출신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달단부와 오이라트부 사이에 벌어졌던 수다한 격전은 두 부족간에 결코 메워지지 않은 골을 파놓았다.

오이라트부와의 싸움에서 피붙이를 잃지 않은 달단부의 가정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형리들은 하후란과 하후진진 모녀를 욕보이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너와 네 엄마에게 그런 짓을 한 자들은 전부 내손으로 처단했단다. 아무쪼록 그때 벌어진 일이 내 본의가 아님을 알아다오!”

나유라는 애절한 음성으로 하후진진에게 애원했다.

헛소리 하지마라! 그런다고 네년을 동정해줄 줄 아느냐?”

하후진진은 앙칼진 음성으로 소리치며 나유라의 말을 막았다.

!”

뿐만 아니라 그녀는 양모인 나유라의 얼굴에 침을 뱉기까지 했다.

양녀인 하후진진의 침이 얼굴에 튀기자 나유라의 옥용은 굴욕과 회한의 빛으로 이지러졌다.

하후진진은 그런 나유라를 노려보며 독살스러운 음성으로 외쳤다.

바득! 네년 때문에 우리 모녀가 당했던 일을 네년도 경험하게 해주마!”

... 너 설마!”

순간 나유라는 아연실색하며 하후진진을 바라보았다. 하후진진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철목풍이 히죽 웃으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흐흐흐! 너희 모녀가 당한 일을 여왕도 경험하게 만들 작정이라면 이 애비가 도와주마!”

그렇게 말하면서 철목풍은 나유라의 육감적인 몸을 끈적한 시선으로 쓸어보았다.

나유라는 철목풍이 하후진진의 복수를 해준다는 핑계로 자신을 겁탈하려는 것을 깨닫고 파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다행이랄까? 하후진진은 고개를 저으며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그러실 필요 없어요 아버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눈빛은 이 순간 더할 수 없이 사악하게 번득이고 있었다.

단순히 겁탈을 당하게 하는 것은 이 악독한 계집을 너무 봐주는 것이지요!”

하후진진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태연하게 내뱉었다.

더 이상 처참할 수 없는 만행을 당한 하후진진의 성격이 잔혹하고 악랄하게 변한 것은 어찌 보면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의 수청을 들게 하면 이 암캐가 오히려 좋아할 지도 몰라요. 오랫동안 사내와의 그 짓을 굶주려왔으니까요!”

하후진진은 작은 발로 나유라의 몸을 툭툭 걷어차며 사악하게 웃었다.

철목풍은 하후진진의 말에 야릇한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노리개로 주지 않겠다면 여왕마마를 어찌 대접하려는 것이냐? 설마 여왕이 네 의모라고 봐주려는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후진진은 광기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지금부터 소녀가 쓰려는 방법은 아버지께서 대원제국을 부흥시키는 데에도 일조하게 될 거예요!”

허어! 그러냐?”

아쉬워하던 철목풍의 눈이 흥분과 기대로 번득였다.

그놈들을 데려와라!”

하후진진은 뒤쪽의 사구를 돌아보며 외쳤다.

예 공주님!”

사구 너머에서 누군가의 대답이 들렸다.

철그럭! 철그럭!

이어 쇠사슬 끌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래 언덕 너머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벌거벗은 알몸으로 쇠사슬에 묶인 건장한 청년 다섯 명이 오이라트부 무사들에게 끌려오고 있는 것이다.

...여왕님!”

알몸으로 끌려오던 청년들은 쓰러져 있는 나유라를 발견하고는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은...!”

청년들을 본 나유라의 안색도 하얗게 변했다.

청년들은 나유라와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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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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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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