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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납치극

 

 

 

종남산(終南山)!

 

중원의 오대도가성지(五大道家聖地) 중 하나인 종남산은 가을빛에 물들어 있다.

한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는 두둥실 구름이 몇 점 떠가고 있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은 색색의 단풍으로 물들어 있고 종남산의 넉넉한 산록(山麓) 아래 펼쳐진 들녘에는 누렇게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인 채 이따금 불어오는 가을 바람에 아름답게 율동하고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의 선인봉(仙人峯)을 병풍처럼 등지고 한 채의 웅장한 장원이 서 있다.

 

<혈검산장(血劍山張)>

 

성문을 연상케 하는 웅장한 정문에는 금박이 화려한 편액이 걸려 있다. 붉게 칠해진 둥근 고리[]를 배경으로 쓰여진 글은 웅혼하고도 패도적인 기상이 느껴진다.

이 장 높이의 위압적인 돌담 너머로는 수백 채의 전각 지붕이 거친 바다의 파도처럼 끝이 보이지 않게 추녀를 잇대고 있다.

이곳이 바로 강호에서 서패천(西覇天)으로 불리는 혈검산장이다.

본래 당금 무림에는 사패천(四覇天)이라 불리는 네 개의 강대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혈검산장은 바로 그중 서패천으로 불리는 가문이다.

 

금사혈검(金蛇血劍) 막고천(莫高天)!

 

그가 서패천 혈검산장의 당대 주인이다. 막고천이 한 자루 사형혈검(蛇形血劍)으로 펼치는 사형검법(蛇形劍法)은 지난 삼십여 년 동안 적수를 만나지 못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무림의 최절정고수들에는 부족함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막고천이 이끄는 혈검산장의 위세는 섬서(陝西), 감숙(甘肅) 등 중원의 서방 일대를 뒤덮고 있었다. 그것은 막고천의 탁월한 용인술(用人術)과 교묘한 심모원려(深謨遠慮)의 결과였다.

 

막고천은 석 자[三尺]의 검보다 세 치[三寸]의 혀가 더 무섭다!

 

그 같은 비아냥이 공공연히 무림에 떠돌 정도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대놓고 막고천에게 시비를 걸지는 못한다. 그의 막하에는 구름 같은 고수, 달인들이 도사리고 있으며, 일단 막고천의 눈 밖에 난 자는 늘 비참한 최후를 당해 왔기 때문이다.

 

때는 저녁 무렵이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혈검산장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하하하!]

[까르르!]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 펼쳐진 공터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재잘대며 놀고 있었다.

질 좋은 비단옷을 입은 아이, 허름한 베옷을 입은 아이, 일견해도 신분이 다른 아이들이 함께 뒤섞여 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사이에서야 신분의 고하는 큰 문제도 아닐 것이다.

커다란 돌사자 두 마리가 버티고 선 혈검산장의 정문 앞에는 우락부락한 장한 네 명이 무료하게 서 있었다. 그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연신 하품을 해대고 있었다.

그리고 혈검산장의 무사들말고도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또 한 쌍 있었다.

[...!]

혈검산장으로 통하는 길목에 서 있는 커다란 고목나무 아래에는 언제부터인가 초라한 몰골을 지닌 초로의 노인이 나무 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오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 노인은 뛰어 노는 아이들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하고 등은 구부정하게 굽어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길을 가다 지친 늙은 여행객으로 보인다. 혈검산장이 무사들도 노인의 그 같은 행색에 그를 별로 유의하지 않고 보아 넘겼다.

(틀림없다! 바로 저 아이다!)

하지만 고개를 움츠린 노인의 눈빛은 뜻밖에도 형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의 그 눈빛은 한 소년에게서 떠날 줄 모르고 있었다.

노인이 보고 있는 소년은 열 서너 살 쯤 되어 보인다. 일신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얼굴에 귀티가 흐르는 것이 한눈에도 귀한 신분의 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아깝게도 소년은 병색(病色)이 완연했다. 키도 작은 데다가 얼굴이 창백하고 팔다리가 빈약한 것이 바람이 조금 세게 불면 그대로 쓰러질 듯이 보였다.

그 때문에 소년은 원래 나이보다도 한 참 어려 보인다. 사실 소년의 나이 올해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체질 때문에 두 세살 가량 어려 보이는 것이다.

[...!]

병약한 소년은 아이들이 뛰노는 마당 한구석에 놓인 돌 위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신이 나서 겅중거리는 다른 아이들을 보는 소년의 눈에는 부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소년은 태어날 때부터 아주 허약한 몸을 지녀서 조금만 걸어도 숨이 턱에 찬다. 당연히 다른 아이들처럼 뛰어노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상영(祥英)을 막고천, 그 짐승에게 빼앗긴 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지. 그때 상영은 뱃속에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바로 저 나이일 것이다!)

소년을 바라보는 노인의 눈이 점점 형형해졌다. 사실은 열 여섯 살이지만 병약한 때문에 잘 해야 열 네 살가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노인으로 하여금 그가 바로 자신이 찾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멀리서 소년의 병약한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며 노인의 나무껍질 같이 메마른 안면에는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막고천! 그놈은 만삭인 상영을 납치해다가 짐승 같은 야욕을 채웠다. 저 아이가 저렇게 병약한 것도 제 에미 뱃속에 들었을 때 에미가 난행을 당한 결과일 것이다!)

노인의 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려졌다.

(복수를 하고 싶었으나... 놈의 주위에는 지켜 주는 개들이 너무 많아 번번이 실패했었지! 이제 나도 복수는 포기했다! 하지만 우리 부부의 피맺힌 한은 우리의 아들이 대신 갚아줄 것이다!)

노인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옆구리에 찬 물건을 꽉 움켜쥐었다.

 

호로(壺瀘)!

 

그것은 은은히 황금빛 서기가 나는 한 개의 호로병이었다. 사기로 구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호로병인데 가운데가 잘룩하여 끈으로 묶어 허리춤에 찰 수가 있다.

그 호로병을 움켜쥔 노인의 깡마른 손에 핏줄이 불끈 돋았다.

(놈을 이길 만한 무공을 찾아 헤매던 노부는 천우신조로 금강옥액(金剛玉液)을 얻게 되었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마셔 무적 공력을 얻은 뒤 막고천 그 악적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이것은 저 아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보는 노인의 눈이 뜨거운 부성애로 물들었다.

헌데 금강옥액이라니! 정녕 노인이 차고 있는 호로에 청구이보(靑丘二寶) 중 하나인 금강옥액이 들어 있단 말인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인은 천하에 다시없을 행운의 주인공이 아니겠는가?

(내 아들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는 금강신체(金剛神體)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래서 그 아이로 하여금 네놈 막고천을 쳐죽이게 하리라!)

노인은 격동을 감추려는 듯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노인의 깡마른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쐐액!

허공으로 튀어오른 노인은 질풍처럼 허공을 가로질러 아이들이 놀고 있는 혈검산장의 앞마당으로 날아들었다.

[어엇! 저 늙은이가...!]

[... 무림인이었다!]

무료하게 하품을 하고 있던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질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파팟!

[! 왜 이래요!]

단번에 마당을 가로지른 노인은 바위에 힘없이 걸터앉아 있던 병색 완연한 소년을 병아리처럼 낚아챘다.

쐐액!

소년의 비명이 터지는 순간 그와 노인의 몸은 다시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비강(比强) 도련님!]

[둘째 도련님을 내려놔라!]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악을 쓰며 달려왔다.

 

막비강(莫比强)!

 

이것이 그 병색 짙은 소년의 이름이었다. 그는 바로 금사혈검 막고천의 둘째 아들이었다.

[막고천이란 짐승에게 전해라! 나 곡강(曲姜)이 아들을 찾아간다고!]

화라락!

노인은 한 마리 천마처럼 단숨에 혈검산장 우측의 송림을 뛰어넘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의 경신술은 너무나 신쾌하여 혈검산장의 무사들이 마당 중간으로 달려왔을 때는 이미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 쫓아가자!]

[총관께도 알려라! 삼공자가 납치되었다고!]

한 명의 무사는 도로 장원 안으로 달려들어가고 나머지 셋은 이를 악물고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몸을 날렸다.

오래지 않아 혈검산장 안에서는 수많은 무사들이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아올라 노인이 사라진 곳으로 달려갔다.

마당에서는 갑자기 벌어진 일에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만이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쐐애액!

병약한 소년 막비강을 겨드랑이에 낀 노인은 질풍처럼 동쪽으로 날아갔다. 몇 개의 산과 개울이 순식간에 노인의 발 아래로 스쳐 지나갔다.

소년은 그새 정신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너무 놀란 데다가 병약한 몸이 자신을 안고 날아가는 노인의 엄청난 속도를 견디지 못한 때문이다.

(가엾은 녀석!)

노인은 달리면서도 소년을 측은한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다.

(이 모두가 아비가 못나 네 에미를 막고천, 그 악적에게 빼앗긴 결과다! 하지만 걱정 마라! 금강옥액을 먹고 아비가 추궁과혈로 경락을 뚫어 주면 넌 하늘 아래에서 가장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가 될 것이다!)

노인은 염두를 굴리면서도 쉬지 않고 발길을 옮겼다. 이미 백여 리를 달렸으나 노인의 발걸음은 조금도 늦춰지지 않았다.

혈검산장의 세력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종남산이 자리한 섬서성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에는 안심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느덧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지만 노인의 발길은 늦춰질 줄 몰랐다. 노인은 밤이슬을 맞으며 다시 수십 개의 산과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다시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을 때 노인은 혈검산장이 자리하고 있는 섬서성을 벗어나 하남(河南)성 경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휴우! 이쯤이면 되겠군!]

그제야 비로소 노인은 땀을 닦으며 걸음을 늦췄다. 그가 멈춰선 곳은 하남성의 서쪽 끝에 자리한 험준한 산맥 웅이산(熊耳山) 근처였다.

(몇 번이나 방향을 틀었으니 혈검산장의 무리들도 쉽사리 쫓아오지는 못할 것이다!)

노인은 자신이 지나온 곳을 흘깃 돌아보며 숲을 나섰다. 웅이산은 너무 험하여 지금까지처럼 길 아닌 길로 달릴 수만도 없다. 무림인인 자신이야 괜잖지만 병약한 막비강에게 험한 산길은 무리인 것이다.

다행히 숲에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 동서로 뻗쳐 있는 관도(官道)가 거대한 뱀처럼 길게 가로누워 있었다.

(이제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 아이에게 금강옥액을 먹여 주면 된다!)

노인은 소년 막비강을 소중히 안고 관도로 들어섰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

돌연 뒤쪽에서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노인은 귀찮은 일을 피할 요량으로 길가로 물러서 걸음을 옮겼다.

두두두!

이내 네 필의 말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노인을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날 알아보는 자가 없는 것 같군!)

노인은 내심 안도하며 땅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헌데 그 직후였다.

히히히힝!

[워워!]

돌연 그를 지나쳤던 네 필의 말이 급격히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저놈들은...!)

슬쩍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보던 노인의 안색이 일순 어두워졌다.

두두두!

그를 스쳐 지났던 말들이 천천히 그쪽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 말들 위에는 일견하기에도 무림인들로 보이는 네 명이 올라탄 채 형형한 눈빛으로 노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필의 말들 중 맨 앞쪽의 갈색 말 위에는 우람한 체격의 백의노인이 앉아 있다. 이 노인은 온몸이 백색 일색이었다. 머리도 희고 수염도 백설같이 희며 입고 있는 의복과 얼굴색도 분을 바른 듯이 하얬다.

츠으!

백면노인의 움푹 들어간 눈동자에선 연신 남색(藍色) 광망(光茫)이 번뜩이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했다.

백면노인 뒤쪽의 말에는 그와 정반대로 얼굴이 숯처럼 검은 흑면노인이 타고 있다. 그자는 뼈를 발라 놓은 듯 깡마른 체격의 소유자인데 입고 있는 의복도 먹물을 칠한 듯이 새까만 흑포였다. 만약 그의 눈동자에 약간의 흰빛 마저 없었다면 그저 한 덩이의 숯을 말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였으리라.

[으핫핫! 이게 누구요? 이제 보니 고명하신 염라철장(閻羅鐵掌) 곡 노사(曲老師)시로군!]

흑백의 두 노인 중 우람한 체격의 백면노인이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막비강을 납치한 노인, 염라철장 곡강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 이런 때에 흑백쌍살을 만나게 되다니...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구나!)

 

흑백쌍살(黑白雙煞)!

 

흑백의 두 노인은 하락(河洛) 일대에서 악명이 높은 마두들로서 얼굴 색깔에 따라 각기 백면살(白面煞), 흑면살(黑面煞)이라 불린다.

사실 흑백쌍살이 제법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들이긴 해도 염라철장 곡강이 보기에는 별 볼 일 없는 부류에 불과하다. 그것은 염라철장 곡강 자신이 무림에서도 이름이 쟁쟁한 강호칠절(江湖七絶)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정파백도의 가장 뛰어난 일곱 기인을 일컬어 강호칠절이라 하는 바, 곡강은 불의와 사마외도를 보면 가차없이 살수를 써서 염라철장이라는 무시무시한 별호를 얻게 된 인물이다.

평소의 염라철장 곡강이었다면 흑백쌍살을 만났어도 코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틀렸다. 실로 십오 년 만에 되찾은 아들과 함께인 것이다. 도저히 남과 어울려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돌아가지만은 않았다.

[흐흐! 속담에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십 년이란 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가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려. 정말 기쁘기 그지없소.]

백면살이 노골적인 살기를 드러내며 음산하게 웃었다.

염라철장도 도리 없이 아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흑백쌍살 형제분들이셨군. 보아하니 두 분은 지난날의 일장을 아직 잊지 못하고 다시금 고하(高下)를 가늠하고 싶으신 모양인데... 오늘은 노부가 급한 일이 있으니 열흘 후 황산(黃山) 시신봉(始信峯)에서 만나 결판을 내는 것이 어떻겠소?]

염라철장은 평소의 불같은 성질을 누르며 억지로 좋은 얼굴을 꾸며 보였다.

[그럴 필요 없소, 곡 노사!]

그러나 얼굴이 검은 노인, 흑면살이 얼른 그의 말을 받았다.

[나 흑면살은 따로 날짜를 정하는 것을 제일 싫어하오. 오늘은 날씨도 시원하여 손속을 교환하기에 더없이 좋은데 열흘 후에 고생해 가며 험준한 황산을 올라갈 필요가 뭐 있겠소? 혹시 곡 대협은 황산에 명당 자리라도 잡아 두기라도 한 거요?]

흑면살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굴뚝에 빠진 쥐새끼 같은 놈이...!)

염라철장의 눈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당년에 강호를 주름잡았던 이 살성은 평소 흑백쌍살 같은 자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목전의 형세는 그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지 않은가? 그는 할 수 없이 입가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나는 오늘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 당신들을 상대할 시간이 없소. 이해하시오!]

그의 말에 백면살은 염라철장의 옆구리에 끼여 있는 막비강을 힐끗 바라보았다.

[곡 대협은 천하에 대명이 자자한 인물인데 어찌하여 어린아이의 요혈을 찍어 데려가는 것이오? 설마 유괴한 아이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흑면살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형님은 참 눈치도 없소. 저 어린놈은 아마도 곡 대협과 지금은 막고천의 첩이 되어있는 냉상영(冷祥英)이란 계집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일 게요!]

[닥쳐라!]

순간 염라철장이 눈을 부릅뜨며 노성을 질렀다.

[또 한 번 쓸데없는 주둥아리를 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염라철장의 일갈에 흑면살이 흉흉한 표정으로 대꾸하려 할 때였다.

[흐하하! 가만두지 않으면 어쩌겠다는 거요?]

흑백쌍살 뒤에 있던 한 명의 중년 장한이 큰소리로 웃어젖히며 말을 받았다.

휘릭!

그자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동시 어깨에서 길이가 세 자 가량 되는 강추(鋼錐)를 뽑아 휘저어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곡 대협은 우리 형제를 안목에 두지도 않소?]

염라철장은 그자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귀하의 얼굴은 생소한데 나 곡강이 언제 어디서 귀하에게 죄를 범했소?]

[시침떼지 마시오. 우리는 태호쌍걸(太湖雙傑) 황웅(黃雄), 황렬(黃烈) 형제요. 당신이 우리 형제의 사형인 무영서생(無影書生)을 죽이고도 무사할 줄 알았소?]

[! 당신들이 바로...!]

염라철장도 비로소 그들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의 강퍅한 얼굴에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흐흐! 무영서생이란 작자는 한밤중에 비구니들만 사는 절간 담을 넘어 들어가 못된 짓을 하던 중에 내 손에 걸려 죽었지! 설마 그 패륜음적(悖倫淫賊)의 복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은 아니겠지?]

그가 비웃음을 흘릴 때였다.

[바로 그렇다!]

투학!

사나운 함성과 함께 두 줄기 한광이 염라철장을 향해 엄습해 왔다. 황웅이 자신의 무기인 한 쌍의 강추를 느닷없이 무찔러낸 것이다.

염라철장도 황급히 오른손을 뻗어냈다. 창졸간에 취한 임기응변이었다.

카카캉!

맑은 음향이 일어나며 황웅의 강추 두 개가 서로 맞부딪쳐 버렸다. 염라철장이 내뿜은 암경에 휘말려 버린 결과였다.

[!]

황웅은 염라철장이 말하는 사이에 기습을 했지만 오히려 자신이 손목이 울리는 격통을 느끼고 비틀거리며 밀려나갔다. 염라철장의 공력이 이미 최상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결과였다.

(무서운 늙은이!)

(과연 강호칠절의 일인답다!)

흑백쌍살과 황렬은 이 상황을 보고 내심 놀랐다.

[모두 함께 공격하자!]

콰릉!

백면살이 일갈하며 먼저 장력을 뽑아내 염라철장을 후려쳤다.

[우우우!]

화라락!

하지만 염라철장은 사나운 장소성을 터뜨리며 맹렬히 허공으로 치솟았다.

[! 저 늙은이가!]

[달아나다니...!]

염라철장의 뜻밖의 행동에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염라철장은 어느 누구와 싸우든 절대 등을 보이지 않는 인물로 유명했다. 헌데 뜻밖에도 그가 먼저 등을 보이고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네 사람이 깜짝 놀라는 사이 염라철장은 이미 숲 속으로 몸을 날려 사라진 후였다.

[싸움을 피하는 것을 보니 부상이라도 당한 모양이다!]

[쫓아가자! 이 기회에 원한을 갚자!]

화라락! 쐐애애액!

백면살의 호통 소리와 함께 네 사람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다섯 사람은 쫓고 쫓기며 단번에 수십 리를 달렸다.

(빌어먹을...!)

웅이산의 험한 산중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던 염라철장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래도 추격하는 네 사람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네 사람과의 거리는 점차 단축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것은 염라철장이 밤새 달린 탓이었다.

철인이 아닌 이상 밤새 천여 리를 달리고도 정상일 수는 없는 일이다. 사실 염라철장은 지금 온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떨쳐 버릴 수 없다면 더 늦기 전에 결판을 낼 수밖에...!)

내심 결심한 그는 급히 자신이 달리고 있는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멀지 않은 곳의 절벽 아래에 큼직한 동굴이 하나 뚫려 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곳이라면...!)

화라라락!

염라철장은 눈을 번뜩이며 즉시 그 산동(山洞)으로 뛰어들었다.

[으하하! 스스로 독 안에 뛰어드는구나!]

뒤쪽에서 네 흉사(凶邪)의 흉악한 웃음소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시간이 별로 없다! 혹시 모르니...!)

염라철장은 흘깃 밖을 돌아보며 급히 품에서 지필묵을 꺼냈다. 그리고는 작은 종이에 총총히 몇 자 글을 적어 내려갔다.

글을 다 쓴 그는 그 종이를 허리에 차고 있던 황금색 호로와 함께 막비강의 품속에 쑤셔 넣어 주었다.

(부디 네가 그 글을 읽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저 네 놈의 생쥐가 내 적수는 못되지만 그래도 사람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염라철장은 뜨거운 부성애가 담긴 눈으로 소년 막비강을 내려다보았다.

화라라락! 스스스스!

그때 옷깃이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네 명의 추적자가 동굴 밖에 날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은 염라철장의 기습이 두려워 아무도 감히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곡가야! 자라 새끼처럼 석동 안에 숨어서 기어 나오지 않겠다면 독연기를 불어넣어 어린놈과 함께 죽여 버리겠다.]

백면살이 동굴 안을 향해 흉갈을 터뜨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헛소리 마라!]

푸학! 꽈르릉!

하나의 인영이 전광석화같이 석동 밖으로 튀어나오며 사나운 장력을 쏟아냈다. 물론 그는 염라철장이었다. 그의 쌍장이 휘둘러지자 세찬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래 먼지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

[크악!]

퍼퍽! 콰드득!

이 흉맹무비한 장풍에 황씨 형제의 상체가 피모래로 흩어져 일 장 밖으로 날려 나갔다. 흑백쌍살은 그래도 고수답게 반응이 빨라 횡액을 면했으나 황씨 형제는 여지없이 참살을 모면하지 못한 것이다.

[죽어랏! 비겁한 놈들!]

염라철장은 여세를 몰아 급히 물러서는 흑백쌍살을 덮쳐 갔다.

꽈르릉!

염라철장의 쌍장이 검게 물들며 무시무시한 경풍의 소용돌이가 뻗쳐 나왔다. 그는 장기전으로 나가면 지친 자신이 불리함을 알고 있기에 처음부터 최강의 살수를 구사한 것이다.

[! 날뛰지 마라!]

[받아랏!]

흑백쌍살도 악을 쓰며 마주 장력을 내치며 염라철장의 장풍에 맞섰다. 하지만 염라철장이란 이름은 헛것이 아니었다.

파카카캉!

서로의 장력이 충돌하는 순간 염라철장의 장풍은 마치 무쇠의 창날처럼 흑백쌍살의 장풍을 여지없이 꿰뚫고 들어갔다.

[... 안 돼!]

[케에엑!]

[으하하!]

퍼퍼펑! 콰쾅!

비명 소리와 살기 가득한 웃음소리, 그리고 무언가 으깨지는 듯한 둔중한 소성이 한꺼번에 일었다. 염라철장의 창날 같은 장력은 흑백쌍살의 가슴과 머리통을 그대로 박살내 버린 것이다.

콰당탕! 퍼퍽!

머리가 박살난 백면살의 거구가 뇌수를 흩뿌리며 나뒹굴고, 뒤이어 가슴이 뭉개진 흑면살이 주르르 십여 걸음 밀려났다가 고꾸라졌다.

[으으음!]

과도하게 공력을 사용한 염라철장도 안색이 창백해져서 비틀거렸다.

[흐흐흐! 네놈들 스스로 자초한 횡액이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염라철장은 사방에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를 돌아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하여간 내 아들이 애비의 유서를 읽지 않아도 되었으니 다행이로군!]

염라철장은 득의해하며 지친 몸을 석동 쪽으로 돌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카하하하항!]

돌연 멀지 않은 숲속에서 누군가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마치 살기에 찬 원숭이가 우짖는 듯 귀에 거슬리고 섬뜩한 것이었다.

(원숭이 울음소리 같은 광소성! 혹시 그자란 말인가?)

막 동굴로 들어가려던 염라철장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갑자기 들려온 웃음소리는 그의 숙적인 한 명 흉한의 것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염라철장이 숨을 죽이며 긴장할 때였다.

[카카카! 어떤 망종이 새벽부터 지랄을 해서 본좌의 단잠을 깨우느냐?]

화라라락!

불쾌한 악취가 풍기며 허공에서 한 줄기 인영이 공 튕겨지듯 뚝 떨어져 내렸다.

나타난 자는 온몸에 털이 숭숭 돋은 반인반수(半人半獸)의 괴인이었다. 검붉은 털이 온몸을 뒤덮은 데다 두 팔이 무릎 아래까지 뻗쳐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인물이었다.

[!]

[! 네놈은!]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동시에 한걸음씩 물러섰다.

[염라철장 곡강!]

[무협제원(巫峽啼猿)!]

염라철장의 안색이 더할 수 없이 침중해졌다. 나타난 자는 바로 그가 떠올렸던 그 장본인이었던 것이다.

 

무협제원!

 

이것이 그자의 이름이었다. 염라철장이 당금 정파백도의 절정고수들인 칠절(七絶)에 속한다면 무협제원은 흑도무림의 최고수들인 육요(六妖)에 드는 절정고수였다.

사실 그자는 인간의 어머니와 성성이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변종이었다. 무협 근처의 산골 마을에 홀로 살던 여자를 수백 년 묵은 원숭이가 무산(巫山)에서 내려와 겁탈한 결과 무협제원이 태어난 것이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여자와 원숭이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비정상적으로 팔이 긴 무협제원의 몰골을 보면 그가 원숭이의 자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원숭이들 중에서도 가장 크고 사나운 성성이의 피를 이어받은 때문인지 무협제원은 맨손으로 황소를 찢어 죽일 수 있는 신력과 포악한 성격을 타고 났다. 거기에 더해 기연으로 어떤 상고기인의 비급을 얻어 일신에 고절한 무공까지 지니게 되었다.

무협제원은 이같은 자신의 힘과 무공을 믿고 무협 일대에서 갖은 횡포를 부렸었다. 그러다가 십년 전 염라철장과 시비가 붙어 그의 일장을 맞고 무협의 격랑에 떨어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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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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