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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림칠절(武林七絶) (2)

 

 

!”

휘릭!

유소기는 다급성을 지르며 뒤로 몸을 뒤집으며 아슬아슬하게 벼랑 끝으로 돌아왔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발밑이 절벽이라는 것은 임청우가 던진 물건을 잡는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보니 도군 지청천도 폭넓은 칼에 무언가를 받아들고 벼랑 끝에 내려서고 있었다. 도군은 무공이 유소기보다는 조금 쳐져서 손이 아닌 칼로 물건을 받아낸 것이었다.

유소기는 손에 넣은 얇은 책을 펼쳐보았다. <일옹청풍일지>라는 글이 눈에 들어왔다.

! 찌직!

혹시나 싶어서 몇 장 넘기던 유소기는 책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영악한 놈!”

유소기는 이를 갈며 절벽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천길 까마득한 절벽이다. 떨어진다면 제 아무리 고수라도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도군도 손에 든 장자(壯子)를 들고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삘릴리...

그때 그들의 뒤에서 잔잔하게 흐르는 퉁소소리가 들려오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입에 퉁소를 물었으며 머리에는 죽립을 쓰고 있는 중년인, 바로 칠절 중 세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신소(神簫)였다.

놓쳤다.”

유소기가 돌아서면서 동료들에게 내뱉았다.

그가 서있는 곳으로 나머지 칠절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진 벼랑 가에 둘러서서 묵묵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비객 소도성이 침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젠 어떻게 할 텐가?”

유소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절벽을 내려간다. 시체라도 뒤져서 찾아내도록 하자.”

유소기가 앞장서자 모두 그 뒤를 따라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을 그것도 어두운 밤중에 내려간다는 것은 몹시 위험한 일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몽선도를 찾는다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서 중대한 의미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

 

절벽으로 스스로 몸을 던진 임청우는 죽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강적을 피하기 위해 절벽을 택했을 뿐 죽으려면 그 자리에서 죽었지 비겁하게 도망치다가 죽는 길을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까마득히 떨어져 내리는 절벽에서 살아날 방법이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황의소녀의 몸에서 나는 은근한 체향과 체온이 몸으로 전해온다.

죽고 싶지는 않지만 살아날 방도가 없으니 죽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내심 체념하며 소리쳐 물었다.

이름이 뭐야?”

황의소녀가 눈을 꼭 감고 있다가 반짝 뜨며 대답하고 물었다.

심주은(沈珠隱)! 네 이름은?”

슈앙!

임청우는 아래가 더욱 검어지는 것을 보면서 소리쳤다.

제기랄... 다 내려온 것 같다. 저승에서 가르쳐주마.”

그는 심주은이라는 이름의 황의소녀를 더욱 세게 껴안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였다.

!

끈적끈적한 풀 속으로 몸이 묻히는 것같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임청우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고약한 냄새...)

정신의 자락을 놓치면서도 임청우는 자신이 무언가 지독한 악취의 구덩이로 잠기는 것을 깨달았다.

 

***

 

계곡은 온통 검은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

나무들은 모두 땅에 기듯이 깔려있어 어깨높이에 달하는 것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풀벌레 우는 소리도 이곳에서 만큼은 들리지 않았다.

넓지도 않은 계곡이고 크지도 않은 숲이다.

바위들에는 이끼와 버섯, 이름 모를 기이한 풀들이 자라있어 마치 거대한 동굴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검주(劒主) 유소기를 비롯하여 도군(刀君), 신소(神簫), 뇌문신권(雷紊神拳), 지존수(至尊手), 비객(飛客), 묵궁(墨弓) 등의 칠절은 반시간을 허비하고서야 내려온 절벽 아래의 기이한 풍경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작은 나무들이 융단처럼 땅을 덮고 있는 이런 곳에서 천길 절벽위에서 떨어진 두 사람의 시체를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이 계곡에서는 절벽 위에서는 보이던 반달마저도 보이지 않아 칠흑같이 어둡다.

칠절은 유소기의 신호에 따라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유소기는 임청우와 황의소녀가 떨어졌을 만한 곳을 찾아서 계곡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휘이익!

유소기는 바람을 몰고 나지막한 나무들을 밟고 달리면서 떨어진 흔적을 찾느라고 눈을 빛냈다.

그러나 위에서 떨어진 방향으로 봐서 그 근처가 분명할 것 같은 데 아무런 흔적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추락하는 도중 바람에 휘말려서 다른 쪽으로 떨어졌는가 보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기 위해 몸을 날릴 때였다.

부웅! 부웅!

갑자기 퉁소소리가 계곡에 크게 울렸다. 음을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다급함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소리였다.

신소, 찾았는가?”

유소기는 몸을 날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퉁소소리 보다 더 넓고 잔잔하게 계곡을 메아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삭이는 듯이 낮은 음성이다.

바로 천리전음(千里傳音)이란 수법을 펼친 것이다.

부우우웅!

퉁소소리는 계곡의 남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신소를 제외한 칠절들은 긴 그림자를 끌면서 일제히 그쪽으로 날아갔다.

 

신소 강상곡(姜想曲)은 굳은 얼굴로 퉁소를 입에서 뗐다.

무슨 일인가?”

가장 먼저 달려온 비객 소도성이 물었다.

신소 강상곡이 퉁소로 자신의 뒤쪽 암벽을 가리켰다.

어둠 속의 암벽은 마치 거대한 성벽처럼 높이 솟아 그들을 덮칠 듯이 보였다.

환상신녀(幻想神女)...!”

뒤이어 도착한 유소기가 암벽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자르듯이 내뱉었다.

암벽에는 관음보살을 연상시키며 어깨를 드러낸 절세미녀의 모습이 음각되어 있었다. 한 손에는 버드나무가지를 들었으며 다른 손에는 복숭아를 들고 있다.

지존수 사마명(司馬明)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럼 신녀문(神女門)이 근처에 있단 말인가? 이 계곡에는 건물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데...”

환상신녀의 모습이 이곳에 있는 한 신녀문은 이곳에 있다. 모두 의견을 말해보게. 신녀문과 충돌을 불사할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물러날 것인지.”

유소기가 나머지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직은... 신녀문과 부딪혀서는 안돼. 신녀문을 없애는 건 별 것 아니겠지만, 그 계집들 중 단 한명이라도 살아나간다면 무산(巫山)의 할망구를 무림으로 끌어들이는 결과가 되고 만다.”

뇌문신권 방일휘(方一揮)가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산의 할망구를 제거한 후라면 모를까 그전에는 신녀문을 건드려서는 골치만 아플 뿐이야.”

묵궁 진패선(陳覇善)이 뇌문신권 방일휘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때 지존수 사마명이 불쑥 말했다.

혹시 무산의 할망구가 늙어 죽었을 지도 모르지 않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

유소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육지신녀(六指神女)는 신녀문이 배출한 최고의 고수다. 신녀문의 이술(異術)을 십중팔구는 익힌 그녀를 범상한 사람처럼 생각할 수 없다.”

유소기의 말에도 지존수 사마명이 여전히 고집을 부렸다.

근년에 신녀문의 제자가 무림에 나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지 않은가? 어쩌면 신녀문은 제자를 택 해지 못해서 문을 닫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소 강상곡이 그런 지존수 사마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신녀문을 없애버릴 심산이로군.”

사실대로 말하면 그렇다. 난 성결한 척하면서 온갖 잡술을 부리는 계집들을 생각만 해도 닭살이 돋는다.”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대답했다.

그런 개인적인 감정에 우리 모두를 끌어들일 셈인가? 큰일을 망칠 수도 있다는 걸 왜 모르나?”

유소기가 지존수 사마명을 노려보며 말했다.

하하핫! 유소기, 너야말로 이곳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것이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닌가?”

지존수 사마명이 냉소하며 말했다.

모두들 생각 해보라구. 여기 어딘가에는 몽선도가 떨어져 있어. 몽선도라면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신녀문인가 하는 계집들이 겁이 나서 물러난다는 게 어디 말이라도 되는가?”

신소 강상곡과 비객 소도성, 뇌문신권 방일휘등이 일제히 불안한 시선을 유소기에게 보냈다.

유소기의 관옥같은 얼굴에 싸늘한 광채가 흐르고 있었다.

살기(殺氣)였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비릿하게 웃었다.

나를 죽일 셈인가? 하지만 유소기, 나를 죽일 수는 있겠지만 우리들 중의 어느 하나라도 죽게 되면 네가 바라는 일을 이루기는 힘들어질 걸?”

유소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이 어깨의 백금검을 잡아갔다.

화악!

유소기의 전신에서 살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지존수 사마명은 긴장된 표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물러섰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언제라도 발출할 준비를 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하지만 유소기가 백금검의 검병(劒柄;검의 손잡이)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비객 소도성도 신소 강상곡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죽었구나!)

지존수 사마명은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기 이외의 다른 사람들도 유소기에게 적지 않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먼저 나서면 그들도 동조하여 유소기의 독주를 견제해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지존수 사마명은 미처 계산하지 못했었다. 유소기는 자신들과 같은 칠절이기는 하지만 그 무공에 있어서는 도군을 제외한 나머지 전부가 합공을 하더라도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유소기가 동료가 없음으로 인해 겪는 불편은 견딜 수 있지만 수모를 받는 것은 참지 못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스르르릉!

백금검이 차디찬 검광을 뿌리며 뽑혀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유소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지존수 사마명의 이마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떨어졌다.

극도의 긴장감이 장내에 팽배했다.

신소 강상곡등은 손에 땀을 쥐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이장 이내로 좁혀졌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도군 지청천이 두 사람 사이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

이어 폭넓은 칼이 지존수 사마명의 어깨에 턱! 걸쳐졌다.

지존수 사마명은 굳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도군 지청천의 칼이 마치 만근의 무게로 그를 내리 눌렀다.

(으으으음...)

지존수 사마명은 내심 신음을 삼켰지만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을 불러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군이 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어쩌면 살려주기 위해서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과해라!”

문득 도군이 입을 열었다.

지존수 사마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사마명 뿐 아니라 도군을 제외한 칠절 전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순간 그들은 머리가 약간 어찔 하는 것을 느꼈다.

도군이 입을 여는 것은 적과 상대할 때뿐이다.

그런 그가 입을 열어 말을 한 것이었다.

도군의 목소리는 특이한 음공(音功)이 실려 있어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환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말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상대방에 대해서 공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지존수 사마명은 지체없이 손을 쫙 펼쳤다.

열 개의 손가락이 오리발처럼 쫑긋해졌다.

파팟!

지존수 사마명이 이를 악무는 순간 그의 양쪽 손 무명지(無名指)가 각기 폭발하면서 떨어져 나왔다.

손가락이 터져나간 상처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다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유소기가 검을 거두었다.

그제서야 모두들 얼굴에 안도의 빛이 흘렀다.

몽선도를 찾는다. 만일 신녀문의 제자들과 부딪힌다면 가차없이 죽여라. 몽선도를 찾아내든 못 찾든 여기서 나가는 대로 무산의 육지신녀를 제거한다.”

유소기가 뒤돌아 걸어가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지존수 사마명의 사과를 받은 대가로 그의 제안도 받아들인 것이다.

칠절의 우두머리로서 손가락 두 개를 날려버린 지존수 사마명의 무거운 사과를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소기도 가슴이 아프겠군. 처가(妻家)나 다름없는 신녀문을 제거하라고 했으니...)

앞서가는 유소기의 완강한 등을 보며 신소 강상곡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쨌거나 사마명은 유소기의 살수를 피할 순 없겠어. 어리석은 친구같으니...)

고개를 떨군 채 지혈을 하는 지존수 사마명의 옆을 지나며 신소 강상곡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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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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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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