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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의 눈동자 (1)

 

 

동굴은 허리를 숙여야만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낮았다. 너구리같은 작은 짐승의 굴인 것 같았다.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을 뽑아 앞쪽으로 세운 채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심주은은 임청우의 뒤를 따라 들어가면서 야생 짐승의 몸에서 나는 노린내를 맡고 얼굴을 찌푸렸다.

(짐승의 똥이 많이 있으면 어쩌지? )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머리를 푹신한 곳에 부딪혔다. 앞서 들어가던 임청우가 멈추는 바람에 그의 엉덩이에 코를 박고 만 것이다.

왜 갑자기 멈추고 그래?”

임청우의 엉덩이에 박았던 얼굴을 급히 떼며 심주은은 눈을 부라렸다.

온몸을 팽팽히 긴장시킨 임청우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안에 짐승이 있다. 맹수인지도 모르겠어.”

동굴 안쪽에서 파란 빛을 내뿜는 한 쌍의 눈동자가 임청우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상대로 이 동굴 안에는 무언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필 이런 때에...)

임청우의 어깨 너머로 눈동자들을 본 심주은은 초조와 긴장에 휩싸여 주먹을 불끈 쥐었다.

동굴 밖에서 들려오던 귀를 찢을 듯하던 휘파람 소리도 어느덧 뚝 그쳤다. 노파와 중이 동굴 근처까지 온 모양이다.

그런데도 앞쪽에 무언가 있어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뒷덜미에 칼이 날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급해진 심주은은 전음으로 빠르게 말했다.

찔러버려! 찔려서 죽여 버려!”

심주은의 재촉을 받은 임청우는 청강사자검으로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호랑이의 몸에서는 노린내가 난다고 한다.

임청우는 노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안쪽에 있는 것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설혹 호랑이라 하더라도 무섭지는 않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속에 쌓여있는 공력이 누구도 경시하지 못할 가공한 수준임을 알고 있었다.

(기걸승은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안쪽에 있는 짐승을 죽이더라도 소리는 내지 말아야 한다.)

들키지 않으려면 눈앞에 있는 시퍼런 눈동자를 지닌 괴물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야한다.

결심을 한 임청우는 온 정신을 청강사자검에 모아서 앞으로 내질렀다.

번쩍!

푸른빛이 뇌전처럼 두 개의 눈동자 사이로 쏘아져 나갔다.

한데 검봉(劍鋒;검의 끝)이 찌르는 순간 눈동자들은 깜빡하더니 사라져버렸다.

좁은 동굴 안이라 무언가 움직였다면 공기의 요동이 느껴져야 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았다.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청강사자검을 아래위로 내저어 보았으나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눈동자들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 귀신?)

섬뜩한 전율이 임청우의 머리끝에서 일어나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그때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셋째 그놈을 찾았는가?”

늙은 노파의 음성이었다.

아직은 눈에 띄는 게 없소.”

사내의 음성이 이어졌다. 기걸승중 중의 목소리다.

그 놈의 새끼가 둘째의 몸뚱이를 완전히 부셔 놨어. 잡아서 모가지를 끊어버려야 속이 풀리겠어.”

으으으..."

노파의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렸다.

아마도 노파가 상처 입은 거지를 안고 있는 모양이었다.

임청우는 발소리를 죽이고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귀신처럼 사라진 눈동자 따위는 밖에 있는 잔혹한 노파와 중에 비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심주은도 소리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중이 다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소저께서 이 근처에 있는 것은 분명하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가 없구려.”

만리향이란 게 원래 그런 것 아니냐? 멀리 있으면 쉽게 맡을 수 있지만 정작 가까이 있으면 잘 파악하기 어려운 게지.”

노파의 음성이 이어졌다.

의심스러운 데가 있으면 무조건 때려 부수고 봐, 아가씨를 잡아간 그놈의 무공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니 조심하고...”

대답대신 꽝! 하는 벼락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중이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장력으로 쓰러뜨렸던 것이다.

중은 만리향의 향기가 남아있는 일대의 나무들과 바위들을 모조리 부셔버릴 심산인 것같았다.

! 콰드드!

중의 양손을 갈쿠리같이 오그리고 한 번씩 내저을 때마다 시뻘건 강기가 회오리치면서 뻗어나가 나무와 바위들을 산산조각 내어버렸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 사람이 손발의 힘으로 만들어 내는 소리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갑자기 꽝 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은 등쪽에서 찬바람이 확 이는 것을 느꼈다.

빨리 들어가!”

심주은은 임청우를 떠밀면서 급히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기다!”

노파가 소리치며 동굴을 향해 날아왔다.

그녀는 땅에 닿을 듯 낮게 날아서 그대로 동굴 속으로 들어왔다.

심주은은 임청우에게 다급히 전음으로 말했다.

움직이지마! 숨도 쉬지마.”

그러나 임청우는 검을 들고 앞으로 한 바퀴 구른 다음에 입구쪽으로 드러누웠다. 그 바람에 그의 머리는 심주은의 두 발 사이에 들어갔다.

날아 들어오는 노파를 베기 위해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데 바로 그 직후였다.

스스스!

갑자기 심주은의 몸이 뿌연 안개에 휩싸이는가 싶더니 이내 거무스름한 바위벽으로 변해버렸다.

임청우는 심주은이 기이한 술법을 쓰는 것을 몇 번 목격하기는 했지만 올려다보고 있는 사이에 사람의 몸이 석벽으로 변해버리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임청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데 앗! 하는 비명소리가 들리며 심주은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

노파는 수평으로 날아 들어오다가 심주은의 등에 머리를 부딪히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만리향의 향기가 동굴 안에 가득하건만 석벽이 가로막고 있을 뿐 심주은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직선으로 뚫린 굴이라 어디 숨을 만한 데도 없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기어야 할 정도로 낮은 곳이니 천장에 붙을 수도 없다.

심주은이 동굴 속에 있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지만 찾을 수가 없어진 노파는 밖을 향해 소리쳤다.

셋째, 네가 들어와 봐라! 이 안에 숨어있는 것 같은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하지요.”

중은 몸을 기괴하게 구부리더니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꾸물거리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노파가 옆으로 비켜서자 중이 자연스럽게 지나치며 막다른 석벽에 다다랐다.

바로 이곳이군요.”

중은 심주은의 등에 손바닥을 붙이면서 말했다.

안이 비어있습니다.”

부우웅!

말하는 중의 손바닥이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공력으로 석벽을 부셔버릴 심산이었다.

헌데 중의 손바닥이 막 심주은의 등을 때리려고 할 때였다.

안돼!”

!

임청우가 대갈일성을 발하며 청강사자검으로 중의 배를 찔렀다.

!”

중은 황급히 자신의 아랫배를 움켜쥐고 물러섰다. 그의 승포자락을 타고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은 내심 크게 놀랐다.

그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거릴 수 있는 것은 유가술(愉加術)을 익힌 덕분이다. 이 유가술을 펼치고 있는 동안에는 몸이 비단결보다도 더 질기고 부드러워 어떤 예리한 병기로도 상하게 할 수가 없다.

그런 그의 몸이 석벽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검에 상처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고 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검이기에...)

중이 경악할 때였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에 서있던 석벽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

중이 귀신에 홀린 듯이 어리둥절 하자 그자의 뒤에서 노파가 떠밀면서 소리쳤다.

환술이다! 놈을 잡아!”

 

***

 

임청우는 심주은을 등에 업고 무작정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심주은은 죽은 듯이 그의 등에 업혀 있었다.

바닥에 누워있던 임청우가 중의 배에 청강사자검을 찔러 넣은 직후 심주은은 피를 토하며 앞으로 쓰러졌었다.

이에 임청우는 급히 심주은을 안고 동굴 안쪽으로 피한 것이다.

(언젠가는 저 중을 반드시 죽여 버리고 말겠다. 아무 곳에서나 마음대로 살수를 휘두르다니...)

임청우는 분노하고 있었다. 심주은이 중의 일격에 중상을 입은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임청우의 오해였다.

심주은은 노파가 날아 들어오면서 등을 머리로 받았을 때 이미 심한 내상을 입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임청우와 자기의 목숨이 자신이 펼치고 있는 환술에 달려있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버티었었다.

그러다가 중이 등에 손바닥을 댄 직후 피를 토하며 쓰러졌었다.

임청우가 중에 의해 심주은이 내상을 입은 것으로 오해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동굴은 상당히 좁다.

뒤쪽에서 검이나 도, 아니면 장력이라도 날아온다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앞으로 무작정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쉬익!

중과 노파는 땅에 닿을 듯 말듯 낮게 날면서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낮은 소리로 물었다.

견딜 수 있겠어?”

...”

심주은의 대답은 견딜 수 있겠다는 건지 못 견디겠다는 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도망 가보았자 막다른 곳만 나올 뿐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그녀를 내려놓고 눕게 한 다음에 자기도 반듯하게 누웠다.

청강사자검의 검광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옷자락 아래로 검을 감추었다.

중과 노파가 자기의 위로 날아가려 할 때 아래에서 베어버릴 심산이었다.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우니 중과 노파도 쉽사리 자신들을 발견하진 못할 것이다.

휘릭!

한데 앞서서 날아오던 중이 갑자기 임청우에게서 일장 정도 떨어진 곳에서 멈추어 섰다.

무슨 일이냐?”

하마터면 중에게 부딪힐 뻔한 노파가 소리쳐 물었다.

피 냄새요. 아마 놈이 앞에 있는 모양이오.”

중은 신중하게 가슴 앞으로 손을 모으면서 말했다.

임청우는 속으로 아쉬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중을 찔렀던 검에서 피를 닦아내지 않았을 뿐인데 중은 그 피 냄새를 맡고 자기가 그곳에 있는 줄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쉽게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버린 셈이다.

노파가 소리쳤다.

통채로 날려버려!”

그랬다가는 동굴이 무너질 것이오. 너무 깊이 들어왔소.”

중은 고개를 저으며 품속에서 황금으로 된 상자를 하나 꺼냈다.

그자도 임청우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누워있는 줄은 모르고 있었다.

주인께서 우리가 떠나올 때 주신 혈승(血蠅)이 있소.”

중은 금합(金盒)을 열면서 말했다. 금합 속에는 손가락 한 마디만한 크기의 시뻘건 파리 수십 마리가 들어있었다.

혈승은 만리향을 싫어하니 소저껜 아무 해가 없을 것이오.”

혈승이란 피를 빠는 파리를 말한다. 지독하기 이를 데 없는 독충으로 떼를 지어 날면서 스치는 것은 무엇이거나 뼈를 남기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

심주은은 중의 말에 크게 놀라 자신이 심한 내상을 입었다는 사실마저 잊고 급히 전음으로 임청우에게 말했다.

나를 끌어 당겨서 몸 위에 올려! 어서!”

그러나 임청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혈승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몸을 움직일 때 나는 옷자락 소리는 중과 노파에게 그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꼴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임청우는 자기대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이 혈승이란 말을 하자 자기는 왜 품속에 있는 독중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금관혈린사 척포를 생각하지 못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중이 그로 하여금 그같은 생각을 일깨워 준 셈이었다.

임청우는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여 품에서 몽선도를 꺼냈다.

중은 금합 속에서 잠들어 있던 혈승들을 주문을 외워 깨웠다.

혈승들이 한 마리 두 마리 깨어나며 왱왱소리가 조용한 동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몽선도에서 척포가 머리를 내민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척포의 머리에 달려있는 황금빛 뿔이 금합과 같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가랏!”

중은 척포의 뿔을 보고는 큰 소리로 외치며 혈승들을 날려 보냈다.

! !

혈승들은 구름떼처럼 날아올랐으나 척포를 향해 가지는 않았다. 비록 미물이기는 하지만 천적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척포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쏴아아!

척포의 입에서 하얀 독기가 뿜어져 나왔고 혈승들은 소리없이 녹아내렸다.

심지어 중이 들고 있던 금합까지도 척포의 독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중은 괴성을 지르며 금합을 던져버리고 뒤로 몸을 날렸다.

으앗!”

노파도 뒤로 튕겨 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그 사이에 임청우는 재빨리 일어서서 심주은을 업고 동굴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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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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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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