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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의 눈동자 (2)

 

 

삼십 장 정도 더 들어갔을 때 동굴이 갑자기 높아지고 넓어졌다.

임청우와 심주은은 마치 광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이른 것이다.

등을 펴고 심주은을 추켜올려 업으면서 임청우는 그녀의 맥문을 잡았다.

맥이 미미하게 뛰고 있었다.

내상을 입었어.”

심주은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중... 내손으로 죽여 버리겠어.”

임청우가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심주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청우의 분노가 그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들어선 지하광장은 높이 오장에 너비는 십 장 정도 되는 곳인데 임청우 등이 나온 것과 비슷한 동굴이 곳곳에 뚫려 있었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이상 중과 노파가 따라 들어온다 하더라도 자신들을 찾아내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동굴이 많아서 자신들이 어느 동굴로 숨었을지 쉽게 알아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광장을 가로 질러 맞은편에 있는 동굴을 향해 걸어갔다.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은 둘째 문제고 일단은 곧 추격해올 추적자들로부터 숨는 것이 급선무였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길 봐!”

임청우의 등에 업혀있는 심주은이 갑자기 몸을 떨면서 더듬거렸다.

츠으으!

임청우가 들어가려던 동굴에서 오장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다른 동굴 안쪽에서 파란 불덩어리 두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임청우는 검을 잡으며 말했다.

아까 동굴 초입에서 만났던 그 괴물이다.”

바로 그 순간 파란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껌벅껌벅하더니 다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발길을 그 동굴을 향해 돌렸다. 한 쌍의 눈동자가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 그쪽으로 가지마.”

겁에 질린 심주은이 임청우의 어깨를 흔들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임청우는 의연하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죽음 가운데서 생을 찾을 수 있는 법이야.”

물론 심주은을 달래기 위해서 한 말에 불과했지만 심주은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두려움에 떨면서도 가만히 있었다.

(이러면서도 어떻게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임청우는 심주은이 아주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츠으!

임청우가 동굴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파란 눈동자가 다시 나타났다.

임청우는 걸음을 빨리하여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 동굴은 그들이 들어왔던 동굴과는 달리 제법 커서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되었다.

! !

동굴 안쪽에선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

이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임청우는 하마터면 발을 헛딛을 뻔했다. 동굴 바닥에 물이 고인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그 연못 주변 천장에는 종유석들이 한 겨울의 고드름처럼 가득 늘어져 있다.

파란 눈동자 네 개가 종유석들 사이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괴물이 두 마리인가?)

임청우는 긴장했다.

하지만 그는 곧 실소했다.

아래쪽에 있는 두 개의 눈동자는 연못물에 비친 그림자였던 것이다.

임청우는 동굴 벽 쪽에 붙어서 울퉁불퉁 튀어나온 바위들의 언저리를 잡고 연못을 지나갔다.

하지만 연못을 건넜을 때 그곳에 있던 눈동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후였다.

어디선가 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며 임청우는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예상을 깨고 눈동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유소기가 그 할망구를 숨긴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동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보이지 않을 리가 있나?”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설사 그렇다 해도 입 밖에 내지는 말게. 나는 자네 편이 되어줄 수 없으니까.”

묵궁 진패선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하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네.”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네. 하지만 지금 죽을 수는 없네. 불구대천의 원수를 죽이기 전에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네.”

, 그 이유 때문에 유소기가 우리를 기만하고 마음대로 다스리려 하는 것을 묵과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난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네.”

 

임청우가 발소리를 죽이고 다가가 보니 바위에 두 사람이 걸터앉아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유소기...! 검주 유소기가 여기까지 들어와 있단 말인가?)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등에 업힌 심주은도 긴장하는 게 느껴진다.

(유소기와 나는 지독한 악연으로 맺어져 있는 모양이다. 이런 동굴 속에서 그를 만난다면 정말 살아나기는 글렀겠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말을 주고받는 인물들은 칠절 중 지존수(至尊手) 사마명과 묵궁(墨弓) 진패선이었다.

물론 그들을 본 적이 없는 임청우로서는 두 사람이 그 이름도 쟁쟁한 무림칠절중의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그때 묵궁 진패선이 일어서며 말했다.

만용으로 귀중한 목숨을 잃지 않도록 하게. 자네는 부모의 복수보다는 지나치게 유소기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네.”

지존수 사마명은 아픈 곳을 찔린 사람모양 입을 열지 못했다.

진패선은 묵궁을 앞세우고 동굴의 안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혼자 남은 사마명은 무명지가 사라진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진패선, 자네는 모를 걸세. 난 유소기가 처음부터 싫었네. 기회만 있었다면 진작 죽여버렸을 걸세. 앞으로도 기회만 있다면 그를 죽여버릴 생각이고...”

독백을 마친 사마명도 곧 일어나 진패선이 사라진 쪽으로 가버렸다.

임청우가 있는 곳은 아마도 그들이 먼저 지나온 길인 듯 했다.

임청우는 생각했다.

(저 사람도 아마 유소기와 같은 칠절 중의 한 사람인 모양이다. 하지만 동료인 유소기를 죽이려 하고 있으니 칠절이란 존재가 무림에서 사라지는 것도 시간문제이겠구나.)

안의 도적은 막을 길이 없다고 했는데 유소기의 목숨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아 속이 시원한 감이 들었다.

그때 심주은이 그의 귀에 대고 소곤거렸다.

차라리 그들을 만나는 게 나아. 유소기를 만나면 살아날 방법이 없어.”

심주은이 말하는 그들이란 물론 중과 노파다.

그녀로서는 임청우가 그 파란 눈을 좇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말했지만 임청우는 전혀 그럴 마음이 아니었다.

피하려다 만나는 경우도 있어. 특히 이런 한정된 공간에서는...”

심주은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어떻게 된 게 임청우의 말에는 반박할 말도 없다.

그녀는 화가 나서 임청우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난 그 파란 눈이 무섭단 말이야!”

바로 그때였다.

츠으으!

다시 그들 앞에 파란 눈이 나타났다.

임청우는 검을 굳게 잡고 다가가며 속으로 말했다.

(도덕경에 이르기를 군자는 병()이 없다고 했다. 그 이윤즉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는 것만 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 두려움이라는 것은 모르는 데서 생기는 감정이다. 알고 나면 두려움이란 절로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임청우는 파란 눈을 따라서 걸어갔고, 심주은은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

 

임청우는 사라졌다 나타났다 하는 파란 눈을 따라 가느라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파란 눈은 갈래진 동굴을 여러 개 지나서 그를 엉뚱한 곳에 데려다놓았다.

그곳은 유황냄새와 함께 뜨거운 김이 동굴 속에 안개처럼 가득 차 있는 곳이었다.

부글부글!

작은 온천에서 물이 끓어오르고 있다.

온천이다!”

임청우는 기쁜 마음에 소리쳤다. 어떤 의서에서 온천이 사람을 치료하는데 특별한 효험이 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파란 눈동자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고맙다는 생각이 왈칵 들었다. 심주은의 내상을 치료하는 데에 이 온천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츠으!

그때 파란 눈동자가 온천위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더니 이내 사르르 빛을 잃고 온천으로 가라앉았다.

임청우는 사라지는 눈동자 뒤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순간적으로 보았다.

가슴이 섬뜩했다.

눈동자는 실로 눈동자만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스윽!

갑자기 온천에서 깡마른 손이 하나 솟아나와 임청우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

임청우는 기겁을 하면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발목을 잡고 있는 깡마른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임청우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었던 청강사자검으로 손목을 내려쳤다.

!

청강사자검이 그 손목을 베어버렸다.

순간 임청우의 발목을 잡고 있던 깡마른 손과 베어진 손목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마치 수증기 속으로 녹아든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임청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앞에서 현실에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괴한 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추춧!

온천의 물이 약간 솟구치면서 갑자기 물을 밟고 귀신같은 몰골의 노파가 나타났다.

말라붙은 젖가슴과 듬성듬성한 체모... 깡마른 몸은 해골에다 껍질을 씌워 놓은 것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노파는 파랗게 빛을 발하는 눈으로 임청우를 바라보았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침착하게 한걸음 물러섰다.

...”

등에 업힌 심주은은 그만 혼절해버린 뒤였다.

당신은 귀신이오 사람이오?”

임청우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렇게 묻기는 했지만 임청우는 노파가 귀신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간 노파가 그를 향해 불쑥 손을 내밀었다.

화악!

내민 노파의 손에서 강한 흡입력이 쏟아져 나와 임청우를 끌어당겼다.

임청우는 공력을 끌어올려 대항했다.

그의 공력은 삼괴 중 철선동시의 공력을 온전히 흡수한 후에도 더욱 증진되어 있었다.

지금의 임청우의 공력은 살아있을 때의 철선동시보다도 삼할 이상 고강해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내공에 있어서 임청우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한데...

슈욱!

임청우는 마치 마차에 끌려가는 강아지나 다름없이 벌거벗은 괴노파의 손으로 딸려갔다.

(... 정말 귀신이란 말인가?)

임청우의 이마에서 진땀이 흘렀다.

노파의 모습이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 데다가 저항할래야 저항할 수도 없으니 두려움이 왈칵 치솟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원래의 자리까지 끌려갔을 때 임청우는 전력을 다해서 청강사자검을 던졌다.

파웃!

푸른빛이 뿌연 수증기 속을 가르며 번갯불처럼 노파의 목을 꿰뚫고 지나갔다.

(성공이다!)

임청우는 속으로 환호했다.

하지만 노파를 해치웠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 뿐이다.

화악!

노파는 임청우의 좌측으로 돌아서 한 팔로 그의 목을 휘감고 있었다.

이 요물!”

추악한 얼굴에 몸서리치며 임청우는 주먹으로 노파의 옆구리를 쳤다.

그러나 주먹에 와닿는 느낌은 마치 솜뭉치를 두드린 듯한 것이었다.

(안돼!)

임청우가 대경실색하여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노파의 팔이 그의 목을 휘감았고...

임청우는 이내 천지가 아득해지면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득해지는 그의 귓전으로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심주은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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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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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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