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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녀문(神女門)의 성지(聖地) (1)

 

 

황의소녀 심주은도 임청우가 정신을 잃는 순간에 함께 정신을 잃었었다.

하지만 떨어지는 충격을 전적으로 임청우가 몸으로 받았기에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은 차렸으나 몸이 차가우면서도 끈적거리는 것에 잠겨 있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당연히 숨도 쉴 수가 없다.

(우리가 추락한 절벽 아래에 늪이 있었구나.)

심주은은 자신들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깨달았다.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쪽에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늪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 떨어진 덕분에 분신쇄골을 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살아난 것도 아니다.

늪 속으로 얼마나 깊이 잠겨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주 높은 곳에서 떨어진 충격으로 우린 늪의 뻘 속에 깊이 잠겼을 것이다.)

심주은은 정신을 잃은 임청우를 한 팔로 껴안고 남은 팔과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빨리 늪의 표면까지 올라가지 못하면 질식해서 죽고 만다.)

죽음이란 말이 눈앞에 떠오르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다.

팔과 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위로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임청우의 늘어진 몸 이외에는 그 무엇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심주은을 공포에 휩싸이게 했다.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다.

(안돼! 여기서 죽을 수는 없어!)

두려움과 공포로 심주은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리 영특하고 당돌하다 하더라도 그녀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의 어린 소녀일 뿐이다.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있어서 남과 다를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릴 정도의 공포 속에서 심주은은 오직 팔다리만을 허둥거렸다.

한데 어느 순간 임청우를 잡고 있는 팔 위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그 무엇이 느껴졌다.

심주은의 팔을 타고 올라온 가늘고 긴 그 물체는 목을 지나 머리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심주은의 긴 머리카락을 가는 몸으로 휘감으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지도 않은 그 물체는 믿기지 않는 힘으로 심주은과 임청우의 몸을 끌고 위쪽으로 올라갔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놀라던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카락이 무엇엔가 단단히 걸리는 것을 느꼈다.

손으로 머리채를 움켜잡고 힘껏 당겼다.

슈우우욱!

심주은은 자신의 몸이 빠르게 위로 올라가는 것을 느꼈다.

추악!

어느 순간 시원한 공기가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

하아! 하아!”

마침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민 심주은은 시원한 공기와 함께 진흙마저도 들이마셨다.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든 가릴 게제가 아니었다.

막혔던 숨통을 틔운 심주은은 서둘러 임청우를 늪 밖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서둘러 임청우의 얼굴에서 진흙을 벗겨 주었다.

얼굴에서 진흙이 제거되었음에도 임청우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인사불성이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임청우는 왼손에 든 청강사자검은 죽어라 움켜쥐어 놓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허리춤에 걸고 있던 혈도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겨우 한숨 돌린 심주은은 자기의 머리카락이 늪지에 자라있는 키 작은 나무의 가지에 걸려있는 것을 알았다. 키는 작지만 둥치는 상당히 굵고 가지가 사방으로 뻗어있어서 우산이나 버섯을 연상케 하는 나무다.

(대체 무엇이 내 머리카락을 끌고 올라와 나뭇가지에 걸었을까?)

심주은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자신의 머리카락이 걸려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헌데 그녀가 임청우를 끌어안고 나뭇가지에 올라갔을 때였다.

쉬쉭!

그 나뭇가지 위에 붉은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가 그녀를 향해 새빨간 혀를 내밀었다.

!”

!

심주은은 기겁하며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의 강력한 장력이 정통으로 때렸음에도 불구하고 뱀은 끄떡도 않은 채 그 자리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머리에 있는 두개의 황금빛 뿔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 붉은 뱀의 정체를 알아본 심주은은 눈앞이 아득해졌다.

(질식사를 면했다 했더니 독물들의 제왕이라는 금관혈린사를 만나고... 난 참 운이 지독하게도 없구나.)

심주은은 소매 속에 있는 천잠사를 꺼낼까 말까 망설이며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천잠사는 어떤 보검에도 잘리지 않는 보물이다.

하지만 천잠사가 금관혈린사의 독에도 견딜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심주은 앞쪽에서 오만하게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짐승은 바로 임청우의 친구라 할 수 있는 척포였다.

원래 척포는 겹쳐 말린 두 장의 몽선도를 집으로 삼아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상관하지 않고 있었다. 새로 생긴 집에 아주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데 임청우가 갑자기 절벽에서 떨어져 늪 속에 처박혔으니 척포도 밖으로 나오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심 화가 났지만 몽선도에서 빠져나온 후 심주은의 머리카락을 꼬리로 말아서 늪 밖으로 끌고 나왔던 것이다.

한 때 몸길이가 삼장에 이르렀던 영물인 척포인지라 심주은과 임청우를 끌고 올라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늪에 빠진 후 심주은이 필사적으로 손짓 발짓을 한 덕분에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위로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 올라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했다. 늪의 표면에 작용하는 장력(張力)은 묽디묽은 아래쪽과 비할 바가 아닌 때문이다.

만일 척포가 끌어올려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심주은은 척포를 노려보았고 느닷없이 얻어맞아서 화가 난 척포도 심주은을 마주 노려보는 묘한 대치 상황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주은도 여자인지라 뱀이란 생물은 세상 무엇보다 끔찍하고 싫었다.

하지만 물러서면 바로 죽음이라는 생각에 심주은은 조금도 눈빛을 양보하지 않고 척포를 쏘아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늪에서 멀지 않은 절벽 근처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검주 유소기가 칠절에게 각기 흩어져서 임청우를 찾으라 명령하는 소리였다.

(위험해!)

풀쩍!

심주은은 임청우를 껴안은 채 다시 늪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심주은의 몸은 이내 늪으로 잠겨 안보이게 되었다.

하지만 심주은의 머리카락은 여전히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심주은은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금붙이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쉬쉬!

척포는 긴 혀를 차며 고개를 설래 저었다.

쏴아!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더니 흰 안개를 내뿜었다.

츠츠츠!

척포가 뿜어낸 하얀 안개에 닿자 심주은의 머리카락에 달려있던 금붙이 장식은 얼음처럼 녹아서 늪에 잠겨들었다.

심주은은 척포가 자신을 위해 어떤 수고를 했는지 알 리가 없다. 그저 늪에 완전히 몸을 숨긴 채 모든 신경을 돋우어 주변의 동정을 살치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녀는 곧 다급하게 들려오는 퉁소소리를 들었고 자신들 위쪽으로 유소기가 천리전음으로 말하며 날아가는 것도 알아차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턱까지 찬 심주은이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한숨 돌리려는데 유소기가 다시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유소기는 지존수 사마명을 베려다가 도군의 중재로 검을 거두고 몽선도를 찾기 위해 돌아오는 길이었다.

뽀록!

심주은이 황급히 머리를 늪 속에 밀어 넣은 자리에 거품이 일어났다.

(제발... 제발 그냥 지나가라.)

심주은은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바램은 한갓 바램으로 끝나고 말았다.

요망한 것!”

유소기의 대노한 음성이 늪 속에까지 들려왔다.

심주은은 낙담했다.

(틀렸다. 이미 저자는 내가 숨는 것을 본 모양이다.)

늪 속에서 검을 맞고 죽기는 싫었다.

맑은 공기라도 한 번 더 숨 쉬고 죽고 싶었다.

촤아!

자포자기한 심주은은 늪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번쩍!

순간 한줄기 백광이 그녀의 눈앞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래야 결코 피할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죽었구나!)

심주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 직후였다.

끼익!”

괴상한 소리가 그녀의 뒤쪽에서 울렸다.

심주은은 자신이 베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다가 앗차! 싶었다.

유소기가 노린 것은 자신이 아닌 나무위에 똬리를 틀고 있던 금관혈린사라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황급히 늪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만 앞에서 날아오던 유소기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화악!

유소기가 허공에서 방향을 바꾸며 벼락같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었다.

심주은은 임청우를 잡지 않은 왼손을 얼굴 앞에 세우며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스스슷!

순간 그녀의 모습이 작은 바위처럼 변해버렸다.

환술(幻術)을 쓰다니... 신녀문의 제자인가?”

!

유소기는 나뭇가지 위에 내려서면서 발길질로 척포를 멀리 차날려 버림과 동시에 심주은의 머리채를 잡아서 끌어올리며 말했다.

심주은의 뇌리로 번개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얼굴에 묻은 진흙 때문에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그럼 구태여 나라는 사실을 알릴 필요는 없겠다.)

그녀는 즉시 임청우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며 두 발로 임청우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했다.

그래요. 나는 신녀문의 삼십이대 제자예요. 즉시 내 머리를 놓도록 하세요.”

유소기는 그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삼십이대 제자... 그럼 정정(貞貞)보다 한 배분 아래인가? 한데 어째서 여기에 있느냐?”

유소기의 독백같은 말을 들은 심주은은 약간 당황했다. 정정은 그녀가 사부로 모신 여인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소기가 사부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심주은은 즉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초면인 분이 사문의 일을 물으면 내가 대답할 것 같아요?”

심주은은 당돌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조마조마했다. 유소기가 화를 내고 손을 쓰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 입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유소기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성미까지 정정을 빼닮았구나. 그래, 혹시 이 근처로 떨어진 사내아이와 계집아이 하나를 보지 못했느냐?”

내심 안도한 심주은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절벽 위에서 떨어졌다면 아무도 살지 못해요. 이곳이 비록 늪이기는 하지만 저 절벽은 워낙 높아서 돌바닥에 떨어진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에요. 시체가 요행히 나무위에 걸쳐지지 않았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 없을 거예요. 이 늪은 바닥이 없어서 뭐든지 삼켜버리니까요.”

한데 넌 이곳에서 뭘 하고 있었느냐?”

유소기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심주은을 약간 의심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심주은은 잘못 대답하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난 아직도 사흘 동안은 이렇게 있어야 해요. 사부님의 명령을 어긴 죄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니까요.”

유소기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잠시 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라.”

유소기가 잡아 올렸던 머리채를 내려놓자 심주은은 모든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늪 속으로 다시 잠겨들었다.

늪 속에 잠겨있는 이유로 벌을 받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댄 게 정말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어떤 말을 했어도 유소기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유소기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몽선도는 나와 인연이 닿지 않는 물건인가? 그토록 얻으려 애를 썼지만 결국 깊은 늪 속에 잠기고 말다니... 금포염왕을 대적하려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겠구나.”

 

잠시 후 유소기의 천리전음에 따라 모여든 칠절은 계곡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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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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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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