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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끈질긴 추적자(追跡者)(1)

 

 

쏴아아아아!

쏴아아아아!

타는 듯한 여름이 거의 끝이 날 무렵에서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인들의 치맛자락에서 이는 바람에도 부풀부풀 일어나던 땅거죽의 먼지는 쏟아지는 비에 흙탕물이 되어 씻겨 내려갔다.

갈라졌던 연못의 바닥은 물을 머금으며 조갯살처럼 불어올라 틈을 매웠다.

강렬한 햇빛에 시들다 못해 검게 타들어가던 나무들도 춤추듯이 가지를 너울대며 일어서고 있었다.

바야흐로 세상은 폭우 속에서 조용한 환희의 함성을 지르고 있는 중이었다.

 

하남성(河南省)과 호북성(湖北省)의 접경에 자리한 남양(南陽)을 거센 빗줄기가 난타하기 시작한 후로 벌써 사흘이 지났다.

성안의 백성들의 환호도 이제는 잠잠해졌으며, 관민이 모두 지붕아래에서 비가 멎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주루와 기루, 객점들이 열 지어 서있는 남양의 번화가에도 손님의 발길이 끊어졌다.

그러나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투덜대는 주인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의 마음씨가 좋아서가 아니라 손님은 그들의 집안에 충분하리만큼 있었기 때문이다.

()과 성() 사이를 넘나들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비롯한 행인들이 모두 객점에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가뭄 끝에 홍수 진다더니... 이러다가 수재(水災)를 겪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남양의 번화가에 자리한 객점 이층 객실 창가에 서성이던 임청우가 걱정스런 듯이 입을 열었다.

거리를 내다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새까맣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심심하면 내 일이나 도와줘.”

탁자에 앉아서 하얀 종이에 정신없이 글을 적어가던 심주은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임청우는 탁자로 다가가서 탁본을 뜬 화선지를 펼쳐 들었다.

심주은이 탁본을 편히 볼 수 있게 해준 임청우는 눈을 다시 창문쪽으로 돌렸다.

비가 쏟아져도 너무 많이 쏟아진다.

이정도가 되면 이제 우()가 아니라 염려스러울 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일, 언제쯤 끝나지?”

임청우는 창밖을 보며 물었다.

심주은은 말 시키는 것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이제 이틀만 더 하면 끝날 거야.”

임청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종남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골짜기를 나온 후 임청우와 심주은은 이곳 남양으로 왔다.

두 사람은 임청우가 대안탑에서 횡재(?)한 금과 은으로 객점의 가장 좋은 방에 투숙했다.

그후 한 달 동안 심주은은 음식까지 방으로 시켜 먹으면서 탁본해온 신녀문의 무공을 책으로 엮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탁본의 글씨들은 깨알보다는 크다고 할지라도 개미보다는 작았다.

그대로 본다는 것은 상당히 피곤한 일일 뿐 아니라 물이라도 묻는 날에는 글씨가 흐려져서 알아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땀에도 글씨가 손상될 수 있었다.

심주은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얻은 무공들이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귀한 것들이라는 것을...

그러니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여 단단한 책으로 엮을 수밖에 없었다.

한 달여를 덩달아서 두문불출하게 된 임청우는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꾹 참고 오늘까지 견디어 왔다.

물론 그동안 임청우에게도 성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심주은이 모르는 사이에 그는 용조층층공을 능숙하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불심연화지의 수련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무공은 아직까지는 무공으로서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불심연화지는 이마 위에 있는 신정혈(神廷穴)에 공력을 쌓는 것인 만큼 다른 무공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다.

비록 임청우의 공력이 상당히 늘었다고 하지만 불심연화지를 밖으로 발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삼성(三成) 이상의 성취를 필요로 한다.

또 용조층층공의 운용을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순수한 내공일 뿐이다.

권법이나 장법 등의 무공과 연계되지 못한다면 용조층층공은 알 속에 있는 닭이나 마찬가지로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신세인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태가 그저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청우의 공력이 급격하게 높아지는데 일조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임청우의 지금 공력은 철선동시의 죽기 전 공력보다 오히려 삼할 정도 더 높아져 있었다.

그렇게 된 것은 역설적으로 임청우가 내공을 발출할 수 있는 무공을 단 한 가지도 익히지 못한 때문이었다.

진기가 실오라기만큼도 흩어지거나 빠져나가지 않고 끊임없이 몸속을 돌아다니기만 한 결과 임청우는 공력이 비약적으로 증진되는 망외(望外)의 소득을 얻은 것이다.

 

생각하기와 탁본을 들여다보기, 그리고 옮겨 쓰기를 번갈아가면서 하고 있는 심주은을 바라보던 임청우는 침상으로 가서 걸터앉았다.

그동안 보고들은 견문으로만도 무공의 이치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짐작하게 된 그다.

임청우는 자기가 익힌 두 가지의 무공 모두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해소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도 적당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주은에게 물어볼까? 아니야.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급한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해서 알 수도 있을 것을 물어보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없지.)

임청우는 나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렸다.

그가 지닌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는 순수한 내공일 뿐이고 다른 하나는 특이한 공력으로 특이하게 운용하는 수법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참을 생각하던 임청우는 다시 심주은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탁본을 뜨던 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순간 그는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침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실마리가 잡힐 듯 말 듯 그의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임청우는 눈을 부릅뜨고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떠오르던 생각이 날아가버릴 것만 같다.

잡힐 듯 말 듯한 영감...

하지만 그것은 좀체 잡히지 않았다.

간절한 마음으로 그것이 확실하게 떠올라주기를 기다렸다.

심주은은 임청우가 넋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얼굴빛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것을 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들었나? )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런 것 같지도 않다. 계속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하고 있는 것이 주화입마에 든 증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

(내가 같이 놀아주지 않아서 화가 났나? 그럴 사람이 아닌데...)

심주은은 생각을 바꾸고 고개를 갸웃했다.

바로 그때였다.

음식 가져 왔습니다.”

문 밖에서 점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늘 식사를 가져다주는 점원이었다.

문 열렸어.”

심주은은 습관적으로 대답하면서 임청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문이 덜컹 열리는 순간 임청우는 잡힐듯하던 빛이 일제히 사라져 버리는 것을 느끼며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안에 넣었던 보물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해졌다.

향긋한 음식냄새와 함께 점원이 재주 좋게 몇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들고 들어와 탁자에 놓았다.

그제서야 심주은은 임청우의 표정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크게 당황했다. 일생에 있어서 그같은 순간은 한번 있을까 말까한 것인데 그것이 허사로 돌아가 버렸으니...

... 그만두자 그만둬.”

임청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탁자로 걸어갔다.

누구에게도 하는 말이 아니었다.

굳이 누구에게 한 말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것이다.

쏟아지는 폭우에 씻기듯이 영감은 사라져 버렸고 식탁위의 음식들도 임청우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심주은은 그런 임청우의 눈치를 살피며 젓가락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같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는지라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임청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묵묵히 음식을 먹을 뿐이었다.

 

***

 

밤이 깊어갔다.

탁본을 옮겨 적던 심주은은 탁본과 책을 함께 싸서 둥글게 만 후에 침상의 베개 밑에 넣었다.

임청우는 마치 불가의 고승처럼 좌관(坐觀)을 하고 창가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고 있었다.

자지 않을 거야?”

심주은이 침상가에서 물었다.

임청우는 대답대신 일어나서 불을 껐다.

그의 잠 자리는 침상아래의 바닥이었다.

비록 억지 혼례를 올린 것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으면서도 아직 한 이불을 덮어보지 못한 처지였다.

그리고 두 사람 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

임청우는 여태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처럼 침상위의 베개를 하나 끌어내리며 바닥에 누웠다.

그때 부드러워서 비단결같은 손길이 그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

여기서 자.”

심주은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한 후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임청우는 그녀의 저의를 알지 못해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심주은은 등을 보인 채 속삭이는 듯 작은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내게 아주 잘 대해 주지만... 아주 무서운 사람이야. 아무도 아버지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말하지 못해. 심지어 황제(皇帝)조차도...”

황제조차 그 앞에서는 언성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

과연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침상에 걸터앉으면서 심주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심주은의 손이 그의 손을 살며시 마주 잡았다.

한데... 아버진 나를 황제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어. 황제는 이미 마누라가 둘씩이나 있는데...”

심주은의 음성이 약간 떨리고 있다.

어쩌면 울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버진 기(), (), (), 그 세 사람 외에도 부하들을 많이 풀었을 거야. 하지만 난 절대로 돌아가지 않아.”

“...”

만약... 그들이 나를 계속 괴롭힌다면... 내가 먼저 그들을 죽여버리겠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심주은의 말이었지만 섬뜩한 살기가 배어있었다.

(사연이 복잡하구나.)

임청우는 자신이 몰랐던 심주은의 면모를 엿본 기분이 되었다.

(지난번에는 한 사람을 찾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했고, 천하를 제패할 마음도 있다고 하더니... 이젠 아버지가 황제에게 자기를 시집보내려 하기 때문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

심주은의 본심을 엿본 임청우는 마음이 심란해졌다.

(나와 혼인을 한 것은 자기를 지켜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주은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것 같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아서 자기가 해야 할 바를 제대로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태로 정신을 모아야할 무공을 익히게 된다면 틀림없이 마가 침입하게 될 텐데...)

걱정이 된 임청우는 심주은의 어깨를 다독거려 주었다.

가만히 있어도 풍겨나는 위엄과 고귀한 자태로 보아 그녀의 신분이 아주 높다는 것은 익히 짐작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심주은의 신분 따위는 임청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만물제동이라는 이치에 따라서 그는 만물의 같은 점을 중시하는 터이기 때문이다.

임주은은 임청우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춥고 떨리는 거지? 몹시 추워.”

임청우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손바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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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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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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