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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이한 방문객

 

 

처음에는 가위에 눌린 것으로 생각했다.

새벽이 멀지 않은 깊은 밤중, 강유(姜諭)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떴을 때 <그것>이 있었다.

츠으...

칠흑같이 어두운 천장 귀퉁이에 한 쌍의 푸른빛이 떠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눈...)

강유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 푸른빛이 사람의 눈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슈욱!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하고 생각할 때 한 쌍의 푸른빛은 천장 귀퉁이를 떠나 강유에게 내려왔다.

영락없이 사람의 눈을 닮은 그것들 뒤로 두 가닥의 푸른 띠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 정말 사람의 눈이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한 쌍의 푸른빛을 올려다보며 강유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것은 사람의 눈이었다!

일어나야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뒤쪽으로 투명한 끈이 이어진 한 쌍의 눈은 강유의 얼굴 바로 위에 이르러 눈동자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유를 살펴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욱!

이윽고 탐색을 마친 한 쌍의 눈이 강유의 두 눈을 향해 내려왔다.

으아아악!”

푸른빛을 띤 그것들이 자신의 동공으로 파고드는 걸 느끼며 강유는 비명을 질렀다.

 

* * *

 

“...!”

강조(姜祚)의 눈이 번쩍 떠졌다.

 

<으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아들 강유의 비명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벌떡 일어나는 강조 옆에서 아내 냉상영(冷霜英)도 놀라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려 한다.

염몽(厭夢;악몽)이라도 꾼 모양이오. 내가 가서 살펴볼 테니 당신은 더 자도록 하시오.”

강조는 아내를 안심시키며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왔다.

 

* * *

 

<드디어 나 제갈륜(諸葛崙)과 영혼의 파장이 일치하는 인간을 찾아내었다.>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제갈륜...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데...)

강유는 머릿속에서 속삭이는 목소리의 이름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분명 기억에 있는 이름이다.

하지만 더 이상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한 쌍의 눈이 동공으로 스며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부젓가락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끄윽! !”

입에서는 죽어가는 짐승의 그것같은 신음이 흘러나오고 온몸의 근육은 제멋대로 펄떡거린다.

푸르면서 투명한 끈 같은 것들이 강유의 눈에서 빠져나와 천장 귀퉁이와 이어져 있었다.

 

* * *

 

강조는 옷을 대충 걸치며 문 밖으로 나섰다.

새벽이 멀지 않았지만 아직 사위는 칠흑같이 어둡다.

마당을 가운데에 두고 품()자형으로 서있는 세 채의 모옥(茅屋) 중 왼쪽 모옥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것이 강조의 시야에 들어왔다.

육척이 넘는 건장한 체격을 지녔지만 등이 곱사등이인 인물이다.

타복(駝僕)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곱사등이는 강조의 하인이다.

타복 역시 강유가 지른 비명을 듣고 잠이 깬 듯 했다.

주인님...”

타복은 허리띠를 매며 다가오는 강조에게 고개를 숙였다.

늘 하던 잠꼬대인가?”

강조는 아들의 침실 문을 보며 타복에게 물었다.

강유의 나이는 어느덧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종 요란하게 성장몽(成長夢)을 꾸곤 한다.

그렇다 생각했는데... 오늘 밤은 조금 다른 듯합니다.”

타복도 강유의 침실 문을 돌아보며 대답했다.

그래?”

강조는 눈을 조금 치뜨며 강유의 침실 문으로 다가갔다.

 

* * *

 

<드디어 우리가 만났구나. 덕분에 천의(天意)가 존재함을 믿을 수 있게 되었고...>

 

강유의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였다.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존재가 천의 운운 하는 것이 강유에게는 생뚱맞게 느껴졌다.

끄윽... ...”

하지만 강유는 벌겋게 달군 쇠꼬챙이로 눈알이 후벼 파이는 것같아서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다.

 

<이제 너를 만났으니 나의 오랜 한도 풀릴 수가...>

 

유야!”

강유의 머릿속을 울리던 속삭임은 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끊어졌다.

강유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아차렸다.

몇 달 간 출타했다가 이틀 전에 돌아온 아버지의 목소리다.

 

<방해꾼이 끼어들었군.>

 

무슨 일이냐? 괜찮은 것이냐?”

머릿속의 속삭임과 강조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 아버지! 그게...”

강유가 꽉 막혀 있는 목구멍을 억지로 열어젖히며 말하려 할 때였다.

 

<명심해라. 네가 나와 접촉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안된다.>

 

슈우...

속삭임과 함께 강유의 동공으로 스며들었던 한 쌍의 푸른 눈이 빠져나갔다.

!

단단하게 막혀있던 병마개가 뽑히는 듯한 소리가 강유의 머릿속을 흔들었다.

끄윽!”

한 쌍의 푸른 눈이 동공을 통해 빠져나가는 충격에 퍼덕이는 강유의 귀로 속삭임이 이어졌다.

 

<동북방(東北方) 오십여 리쯤에 깊은 계곡이 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아무도 모르게 찾아와라.>

 

스으!

그 속삭임을 끝으로 한 쌍의 푸른 눈은 다시 천장 귀퉁이의 어둠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동북방 오십여 리쯤의 계곡...)

강유가 푸른 눈동자의 속삭임을 되새길 때였다.

들어가겠다.”

덜컹!

문이 열리면서 강조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아버지!”

강유는 나무토막같이 뻣뻣해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일어났다.

열린 문을 통해서 마당에 타복이 서있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방으로 들어온 강조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는 아들에게 물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유는 푸른 눈동자가 한 말을 아버지에게 다 털어놓으면 안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분이라 온전히 속일 수는 없다.)

강유는 재빨리 생각을 정리한 후 입을 열었다.

가위눌림이었는지 확실치 않지만... 저곳에서 사람의 눈 같은 것이 나타났었습니다.”

강유는 천장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람의 눈 같은 것?”

강조의 시선이 아들이 가리키는 쪽으로 돌아갔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호한데... 그것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나 한동안 소자를 살펴보다가 사라졌습니다.”

특기할만한 다른 현상은 없었고?”

강조는 천장 귀퉁이를 유심히 살펴보며 아들에게 물었다.

(눈 모양의 그 빛들이 말까지 건넸다는 얘긴 할 필요 없겠지.)

강유는 아버지를 속인다는 사실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며 대답했다.

...”

공자께서도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할 바가 못 된다고 하셨다. 아마 염몽을 꾼 영향으로 헛것을 본 듯하니 잊어버리도록 해라.”

방안을 한 바퀴 둘러본 강조는 문쪽으로 돌아섰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도록 해라.”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여전히 뻣뻣한 다리를 움직여 침대에서 내려선 강유는 방을 나서는 아버지에게 허리를 숙였다.

괜찮다.”

!

강조는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아주었다.

(아버지가 눈치채실까봐 조마조마했다.)

다시 혼자가 된 강유는 가슴 쓸어내렸다.

(하지만 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괴상한 눈이 동북방 오십여 리쯤에 있는 계곡으로 찾아오라고 했다는 걸 말씀드리지 않은 것이...)

털썩!

강유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왠지 말씀드리면 안될 것같은 느낌이 든 때문인데... 나중에라도 자백하면 용서해주시겠지.)

눈을 감은 강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지금의 상황 자체가 꿈의 일부인 듯 느껴지는 강유였다.

 

* * *

 

도련님은 괜찮으신지요?”

아들 방의 문을 닫아주는 강조의 안색을 살피며 타복이 물었다.

다 큰 놈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가위에 눌린 모양이네.”

몸은 제법 자랐지만 아직 어른이라 할 수 없는 나이입니다. 험한 꿈을 꿨으면 놀랐을 수도 있지 않겠는지요?”

타복은 작은 주인의 역성을 들었다.

그렇긴 하네만... 저 녀석이 염몽을 꾼 원인이 주변에 삿된 것이 있어서일 수도 있네. 잠이 깬 김에 한 바퀴 둘러보고 올 테니 자네는 들어가서 쉬도록 하게.”

타복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들으며 강조는 계곡 입구쪽으로 걸어갔다.

다녀오십시오.”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겠네.”

휘익!

강조는 타복의 배웅을 받으며 몸을 날렸다.

경신술로도 이름을 떨쳤던 강조는 바람처럼 계곡 밖으로 날아갔다.

타복이 주인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이에요 아버지?”

덜컹!

세 채의 모옥 중 오른쪽 모옥의 문이 열리며 졸음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한밤중인데 왜 밖에 나와 계세요?”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밖으로 나온 것은 열여섯, 일곱 살쯤 된 소녀였다.

잠옷 위에 겉옷 대신 담요를 두른 유순한 인상의 이 소녀는 타복의 딸이다.

이름이 분이인 타복의 딸은 갓 태어났을 때 어머니를 잃어 주인마님인 냉상영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 사연도 있어서 비록 주종지간이지만 강유와 분이는 친남매나 다름없는 사이다.

분이 너야말로 왜 이 밤중에 깨어났느냐?”

타복은 딸이 나온 모옥으로 다가갔다.

제가 잠귀 밝은 거 아시잖아요. 밖에서 두런두런 거리는데 잘 수가 있어야죠.”

분이는 쫑알거리며 담요의 앞자락을 끌어 모았다.

도련님이 가위에 눌리셨던 모양이다. 다시 잠자리에 드신 것같으니 그만 들어가자.”

타복은 딸이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도 참, 나이가 몇인데 가위에 눌리신담.”

분이도 강유의 침실 쪽을 향해 눈을 흘기며 돌아섰다.

남 말하지 마라. 가끔 자지러지는 잠꼬대를 해서 아비를 놀라게 하는 주제에...”

저야 아직 한창 자라는 나이니까 그렇죠 뭐.”

타복의 타박에 분이는 샐쭉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어렸을 때처럼 내가 같이 자 주면 도련님이 가위에 눌릴 때마다 돌봐드릴 수 있는데 말이야.)

방문을 닫으며 곁눈질로 강유의 침실 쪽 보는 분이의 두 볼이 발그레 달아올랐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강유와 분이는 종종 같은 침대에서 잤었다.

하지만 강유의 목젖이 도드라지면서 어른들은 둘이 함께 자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어쩔 수 없이 내외를 하게 되었지만 분이의 꿈은 언제까지라도 강유와 함께 사는 것이다.

(물론 천한 종년 주제에 언감생심이지만...)

문을 닫는 분이의 입에서 아비 몰래 한숨이 새어나왔다.

 

* * *

 

새벽이 가까워졌지만 아직 어둠은 전부 걷히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한낮에도 햇빛이 닿지 못하는 깊고 깊은 계곡의 밑바닥이다.

마치 저승으로 내려가는 입구인 듯한 계곡 끝에는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다.

 

끼이! 끼이!

어둠 속에서 간헐적으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칠흑같이 어두운 동굴의 막다른 곳에 한명의 사내가 쇠사슬에 묶인 채 벽에 매달려 있다.

부러진 팔 다리는 썩어 문드러져 형체를 잃었고 눈알이 뽑혀 퀭한, 눈이 있던 자리에서는 누런 고름이 흘러나온다.

오랜 세월 끔찍한 고문에 시달려온 사내의 육신은 푸줏간의 고깃덩이만도 못하다.

하지만 목숨은 실로 질긴 것이어서 사내는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숨을 쉬고 있다.

쌔액! 쌔액!

갈비뼈가 드러나 보이는 사내의 쇠약해진 가슴이 숨을 쉬기 위해 힘겹게 기복을 일으킨다.

끼이! 끼이!

그때마다 사내의 몸을 벽에 매달고 있는 쇠사슬이 조금씩 움직이며 쇳소리를 낸다.

이런 이런...”

문득 힘없이 떨구고 있던 사내의 고개가 조금 들려지며 입이었던 곳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사내를 고문해온 자는 그에게 들을 말이 있어서 혀는 자르지 않았다.

덕분에 사내는 손가락과 발가락, 심지어 양물까지 잘려나간 몸으로도 말은 할 수 있다.

존귀하신 마교(魔敎)의 교주(敎主)께서 오랜만에 친히 발걸음을 해주셨소이다 그려.”

사내는 눈알이 뽑혀서 시커먼 구멍이 된 눈으로 앞을 보며 웃었다.

“...!”

사내의 앞쪽 어둠 속에 누군가 서있다.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마귀 형상의 가면을 얼굴에 쓴 인물이다.

제갈륜(諸葛崙)... 너 요즘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 것이냐?”

어둠과 동화되어 서있던 마귀 가면의 인물이 앞으로 나서며 눈을 번뜩였다.

꿍꿍이라...”

제갈륜이라 불린 사내는 자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생각해보시오 귀면지존(鬼面至尊) 나으리! 십수 년 째 죽은 것보다도 못한 몰골로 갇혀있는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밀 수 있단 말이오?”

무림칠절(武林七絶)중 한명이며 천고기재라 불리던 신안옥룡(神眼玉龍)께서 찍소리 한번 못 내보고 인생을 마감할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군.”

마귀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귀면지존이란 자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 무공이 아닌 술법(術法)을 쓴다든지...”

귀면지존의 눈이 마귀 가면 속에서 번득였다.

날 떠보려고 해도 소용없소이다 교주. 그래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제갈륜은 비웃음으로 귀면지존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 치고... 제법 오랜만에 만났으니 가족 소식을 전해주지.”

귀면지존은 화제를 바꿨다.

움찔!

그러자 제갈륜의 얼굴에 경련이 스치면서 웃음기도 사라졌다.

늙어가는 마누라야 관심 없겠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에 대해서는 독심장부인 너라 해도 완전히 무심할 수만은 없겠지?”

귀면지존이 쓰고 있는 가면 속에서 악의에 찬 웃음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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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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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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