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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장

 

              시체와 말의 혈투(血鬪) (1)

 

 

(사부...)

척포에게 당하는 간지러움을 참느라 기진맥진해있던 임청우는 우협 장백승이란 소리에 귀가 번쩍 띄었다.

임청우는 이미 장백승을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포스럽고 잔혹하기 짝이 없는 철선동시의 입에서 우협 장백승이란 이름이 흘러나오자 온 신경을 모으고 귀를 기울였다.

 

“우협... 그가 왜 나를...”

마면혈도가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 중얼거렸다.

철선동시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냉소를 했다.

“자네는 물론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

마면혈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가 또 말했다.

“하지만 우협이 검주 유소기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것도 인정하겠지?”

마면혈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철선동시는 바닥에 구르고 있는 아미타여래의 머리에 한 발을 턱 걸치며 말했다.

“자네는 우협을 이길 수 있겠지만, 우협은 마음만 먹으면 자네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 더우기 우협은 지금 자네를 죽이기 위해 뒤쫓고 있는 중이지.”

“우... 우협이 날 죽이려 뒤쫓고 있었다니...”

극도의 두려움으로 다리가 풀린 마면혈도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부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했고 마면혈도도 자신이 사부를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사부가 마음만 먹으면 마면혈도를 간단히 죽일 수 있다니...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임청우는 혼란스러워졌다.

(더구나 저 두 사람은 검주 유소기라는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고 있는 중인데... 사부는 그 유소기라는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라고도 하고...)

임청우가 의혹에 휩싸여있을 때 마면혈도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철선동시, 자넨 어떻게 우협이 나를 뒤쫓는 것을 알았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 번이나 우협을 만났었네.”

철선동시가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면서 말했다.

“세 번이나?”

마면혈도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래 세 번! 마지막 세 번째 만남 이후로는 채 두 시진도 지나지 않았네.”

철선동시는 발을 올려놓았던 아미타여래의 머리를 의자삼아 앉으면서 말했다.

“언제... 우협이 언제부터 날 쫓고 있었는가?”

마면혈도는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물었다. 식은땀이 난 모양이었다.

“그전부터 쫓아오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우협을 처음 발견한 것은 한수(漢水)에서였네. 그는 어부에게 자네를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고, 여느 누구와 마찬가지로 어부는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에게 굽신거리며 모른다고 말하는 중이었지. 우협은 곧 가버렸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던 나는 몰래 다가가 그 어부를 죽여 버렸네.”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런 일이 벌어질 동안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마면혈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자넨 그 어부의 계집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지.”

철선동시의 말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면혈도는 말같이 생긴 추악한 용모 때문에 여자의 환심을 사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만 보면 여염집 규수와 과부, 여승과 처녀를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겁탈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까지 마면혈도에게 겁탈당하고 죽거나 미쳐버린 여자는 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을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두 번째로 우협을 만난 건 우리가 함양(咸陽)의 기루에 숨었을 때일세.”

진시황의 궁전이 있었던 함양은 서안의 북서쪽 육십여리 쯤에 자리하고 있다.

“그때도 자네는 계집을 끌어안고 뒤엉켜있었는데, 기루 안으로 들어서는 우협을 창가에 앉아있었던 내가 운 좋게 먼저 보았지. 기세로 보아 우협은 우리가 그 기루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온 것 같았네.”

“그날 기루에 불을 지른 게 바로 자네였군.”

마면혈도가 생각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철선동시는 대답대신 빙그레 웃었다.

두 마두는 검주 유소기를 피하기 위해 농산에서 태백산(太白山)을 거쳐 민산산맥(岷山山脈)을 넘어 한수까지 갔었다.

헌데 한수에 이르렀을 때 철선동시는 유소기뿐 아니라 우협 장백승도 자신들을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급히 방향을 바꾸어 민산산맥을 다시 넘어서 함양으로 갔었으며 그후에 황하 줄기를 따라 내려와 서안에 이른 것이다.

“세 번째로 우협을 본 건 어디서였는가?”

마면혈도가 초조한 표정으로 물었다.

“바로 이곳 자은사!”

철선동시의 짧은 대답에 마면혈도는 침묵했다.

 

서안에 도착한 두 사람은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자은사를 찾아왔었다.

물론 불공을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소기를 피해 숨을 곳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헌데 철선동시가 또 변덕을 부리는 바람에 두 사람은 자은사를 도로 나와 근처 객점에서 한잠 늘어지게 잤었다.

그런 후에 다시 자은사를 찾아온 것인데 철선동시가 그렇게 하자고 주장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자은사에 들렀을 때 우협 장백승도 자은사에 있었던 것이다.

철선동시는 장백승이 한번 돌아보고 간 곳이 제일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에 자은사의 대안탑을 은신처로 선택했었다.

철선동시의 그같은 생각도 몰랐다니...

마면혈도는 내심 자신의 우둔함을 한탄했다.

 

(사부가 자은사에 왔었구나!)

임청우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가슴이 벅차오는 기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우협 장백승이야말로 임청우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지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욕정에 눈이 멀어 마황을 건드렸었는데... 결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우협까지 모르는 사이에 자극한 모양이다. 아마 계집들을 마구잡이로 건드리고 다닌 게 우협을 화나게 했겠지.)

바닥에 주저앉은 마면혈도는 자신의 발끝을 내려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힐끔 철선동시를 쳐다보았다.

철선동시는 누런 이빨을 드러낸 채 속을 감춘 웃음을 짓고 있다.

(저 얼어 죽은 놈은 근 한 달 째 내게 선심을 쓰고 있다. 물론 선심을 쓰는 목적은 내 손에 있는 몽선도의 반쪽을 넘겨받는 것이겠지.)

마면혈도는 이를 부득 갈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안되지 안돼. 죽었다 깨어나도 몽선도는 넘겨줄 수 없다.)

마면혈도는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지만 나름대로의 법도를 가지고 있었다.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과, 진 빚은 꼭 갚고야 만다는 게 그것이다.

헌데 벌써 수차에 걸쳐 철선동시의 신세를 지고 말았다.

그 빚을 갚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마면혈도를 괴롭혔다.

철선동시는 아닌 척하면서 마면혈도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살폈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이내 실망했다.

진 빚은 반드시 갚고야마는 성격의 마면혈도이건만 자신에게 몽선도를 바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몽선도는 쉽게 내놓을 수 없겠지. 하지만 그것이 결국 네 목숨을 재촉할 뿐이다.)

철선동시는 흉악한 마음을 먹으며 입을 열었다.

“우협만 아니라면 검주 유소기는 내가 어떻게 해볼 수도 있으련만...”

마면혈도가 우협을 자극했기 때문에 쫓겨 다닌다는 듯한 말투다.

마면혈도는 고개를 치켜들고 두 눈 가득 혈광을 뿜어냈다.

“내가 적지 않은 잘못을 범한 것은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철선동시! 설마 너 혼자서 검주 유소기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겠지?”

철선동시가 백납처럼 하얀 얼굴에 강시처럼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유소기는 우리 삼괴 다음 서열인 칠절에 속한다. 비록 그놈이 칠절의 우두머리라고는 하지만 내가 이기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크하하핫!”

순간 마면혈도가 큰소리로 웃었다. 커다란 입과 턱이 아래위로 흔들렸다.

“얼어 죽은 놈! 유소기가 근처에 없다고 그런 허풍을 치다니...”

마면혈도는 웃음을 뚝 그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럼 지금까지 왜 도망만 쳤느냐? 나 마면혈도도 유소기의 삼검(三劒)을 당하지 못하고 겨우 도망쳤는데... 설마하니 네놈의 무공이 나보다 강하단 말이냐?”

“키키키... 자네는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내 빙혼철선(氷魂鐵扇)은 유소기의 검보단 반 푼 정도 무섭고 자네의 혈도보단 두 배 정도 강하지.”

철선동시가 누런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 웃는 그 얼굴에 섬뜩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스팟!

“이제 보니 네놈은...”

마면혈도는 무엇을 느꼈는지 바람처럼 신속하게 물러서며 소리쳤다.

“키카캇! 말대가리가 제법이군. 그걸 알아차리다니... 카카캇! 네놈이 직접 바치지 않으니 죽이고 빼앗는 수밖에...”

화악!

철선동시가 그림자처럼 마면혈도를 쫓아가며 손톱으로 할퀴는데 그 수법이 흉흉하기 그지없다.

스악! 서걱!

철선동시는 손가락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풍만으로도 마면혈도의 가슴부위 옷자락을 찢어버렸다.

그럴진대 손톱에 직접 할퀴어지면 치명상을 입을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헛! 용조수(龍爪手)!”

마면혈도가 놀라 소리치며 피했다.

용조수는 응조수(鷹爪手)와 함께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 중 하나다.

가공할 위력을 지닌 이 무공은 그러나 당금에 이르러서는 소림사에서도 절전되어 익힌 사람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데 뜻밖에도 얼어 죽은 귀신같은 몰골인 철선동시의 손에서 펼쳐졌으니 그와 오랫동안 사귀어왔던 마면혈도조차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쩍! 번쩍!

마면혈도는 혈도를 휘둘러 세 가닥의 붉은 고리를 만들며 뒤로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눈을 어지럽히는 혈도의 혈광 속으로 주저없이 뛰어들었다.

그리고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의 하나인 용조수의 위력은 과연 놀랄 만했다.

파카캉!

혈도의 측면을 후려친 철선동시의 손톱은 다음 순간 마면혈도의 얼굴을 할퀴려 들고 있었다.

“크카카캇! 용조수를 알아보았으면 순순히 반부의 몽선도를 내놓으시지.”

철선동시의 살벌한 공격을 그러나 마면혈도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붉은 눈을 이글거리며 혈도를 횡으로 휘둘렀다.

“수평혈도참(水平血刀斬)!”

번-쩍!

아침 해가 바다에서 떠오를 때 붉은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듯, 무시무시한 붉은 광채가 노도같이 철선동시에게 밀려갔다.

쩌어억!

칠층 중앙에 서있던 불심연화로의 상반부가 혈도의 도기에 베어져 옆으로 떨어졌다.

퍼억!

석가여래의 허리도 무참히 베어져 상체가 앞으로 쓰러진다.

팟!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급히 몸을 솟구쳤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왼쪽 발목이 뎅강 날아가고 말았다.

수평혈도참은 마면혈도의 삼십이초(三十二招) 혈왕도법(血王刀法) 중 최후의 이(二) 초식 가운데 첫번째 초식이다.

지금까지 어떤 강적을 만났을 때도 마면혈도는 수평혈도참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철선동시는 수평혈도참의 존재를 몰랐고 그 댓가를 혹독하게 치르고 말았다.

하지만 당하기만 할 철선동시가 아니었다.

화악!

잘려진 발목 때문에 허공에서 불안한 몸짓을 보이면서도 철선동시는 용조수 중의 절초를 펼쳐냈다.

쫘악!

마면혈도의 어깨에서 옷과 함께 피 묻은 살점이 뭉텅 떨어져 나왔다.

휙! 휘릭!

피차 피를 본 두 사람은 훌쩍 물러나 이장을 격하고 마주 섰다.

철선동시도 마면혈도도 무시못할 중상을 입었지만 작은 신음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저 불꽃이 튀기는 듯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할 뿐이었다.

촤라락!

철선동시가 접은 채 들고 있던 빙혼철선을 펼쳤다.

스윽!

마면혈도는 혈도를 비스듬히 내려서 철선동시의 하체를 겨누었다.

철선동시의 잘려진 발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먼지 쌓인 바닥을 흥건히 적신다.

순간적인 방심이 만들어낸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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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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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장

 

               마검칠식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깊은 밤중이지만 강변에 자리한 한 채의 장원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다.

장원 안팍에는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이 장원은 제왕성의 분타중 한 곳이다.

불야성을 방불케 하는 장원 중에서도 대청 일대가 가장 환하다.

여러 개의 등이 밝혀진 대청 안에는 관이 하나 놓여있다.

뚜껑이 열려있는 관 속에는 수의를 걸친 냉혈철심 사우의 시체가 누워있다.

사우의 시체가 걸치고 있는 수의의 가슴 부분은 피로 물들어 있다.

관의 뒤쪽에는 사우가 죽임을 당할 때 현장에 있었던 십여 명의 철위사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철위사들은 고개를 떨 군 채 비분강개한 표정으로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자신들의 대주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휘익!

갑자기 세찬 바람이 대청 안으로 들이쳤다.

철위사들이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틈엔지 대청 안에는 세 명의 인물이 나타나 있었다.

뚜껑이 열려 있는 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세 사람 중 한명은 제왕성의 외(外)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이었다.

그가 급보를 받고 수백 리 길을 반나절 만에 달려온 것이다.

궁무독과 동행한 인물들은 대조적인 모습의 노인들이었다.

한 명은 깡마르고 훤칠한 체격의 백발노인인데 옷자락에는 <銀>자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줄이 은실(銀絲)로 새겨져 있다.

이 백발노인이 제왕성 사대무력집단 중 은위사대(銀衛士隊)의 대주인 백월사신(白月死神)이다.

다른 노인은 백월사신과 여러모로 대조적인 모습의 소유자다.

체격이 장대하고 대머리인데 옷자락에는 <銅>자가 수놓아져 있으며 양쪽 소매에는 세 개의 푸른 줄이 새겨져 있다.

청동으로 빚어진 듯한 인상의 이 대머리 노인이 동위사대(銅衛士隊) 대주인 독두태보(禿頭太保)다.

“총... 총관님!”

“분합니다 총관님!”

궁무독 일행을 본 십여 명의 철위사들은 분루를 흘리며 엎드렸다.

“속하들도 대주님을 따라 죽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원수가 누구인지 보고하기 위해 치욕스럽게 살아 돌아왔습니다.”

“대주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속하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

철위사들은 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오열했다.

그들의 이마가 삽시에 피로 물들었다.

“닥쳐라!”

쾅!

하지만 궁무독은 발을 구르며 사납게 고함을 질렀다.

드드드!

궁무독의 내공이 실린 진각(振脚)과 고함으로 인해 대청 전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내공의 심후함만으로도 궁무독이 사우를 간단히 능가하는 고수임을 알 수 있다.

대청 밖에서 경비를 서던 철위사들이 돌아보며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죄..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대청 안의 철위사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울음을 삼켰다.

“계집처럼 질질 짜지 마라. 너희들의 대주를 위한다면 복수를 위해 가슴 속에 칼을 갈아야하지 않느냐?”

궁무독은 살기 어린 눈으로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철위사들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 떨군 채 울음을 삼킬 뿐이었다.

“못난 인간 같으니... 이름도 없는 놈에게 죽임을 당해서 제왕성의 이름에 먹칠을 해?”

궁무독은 관속에 누워있는 사우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사우가 남의 손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그로 인해 제왕성의 위명이 실추되었다는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노부가 사(査)대주의 사인을 살펴보겠소이다.”

그때 은위사대 대주인 백월사신이 관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고해주시오 백(白)대주.”

궁무독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옆으로 물러섰다.

“다른 외상은 없고...”

백월사신은 관 속에 누워있는 사우의 시체를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그의 눈에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는 게 들어왔다

“가슴에 당한 일격이 치명상이었군.”

슥!

백월사신은 사우가 걸친 수의의 가슴 부분을 젖혀 보았다.

그러자 드러나는 사우의 가슴에는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등까지 뚫려있었다.

“이건!”

“헉!”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구멍을 보는 순간 백월사신뿐 아니라 독두태보와 궁무동의 입에서도 비명같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사... 사대주의 등까지 뚫려있는 상처의 측면이 나선형으로 파여 있군. 그렇다는 건...”

백월사신은 덜덜 떨며 손으로 상처의 측면을 만져보았다.

특이하게도 사우의 가슴에 나있는 상처의 측면은 나선형의 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검칠식! 천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천마구절기(天魔九絶技)중 마검칠식이오.”

궁무독이 전율하며 말했다.

“마... 마검칠식이라면 십팔 년 전에...”

독두태보는 너무 놀라 헉헉 대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맞네. 무후님... 영창공주님을 시해한 흉수가 쓴 무공도 마검칠식이었지.”

백월사신이 이를 부득 갈며 내뱉었다.

(맙소사! 역시 대주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검법은 마검칠식이었구나.)

(십팔 년 전 주모님이 시해 당하신 것과 같은...)

무릎을 꿇고 있던 철위사들도 전율했다.

 

십팔 년 전, 마교 교주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치기 위해 제왕성에 잠입했었다.

그리고 달마묵장을 손에 넣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직후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지키던 흑백신귀에게 종적이 발견되어 쫓기게 되었다.

무사히 제왕성을 빠져나갈 가능성이 없게 되자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안주인인 무후 주영창, 즉 영창공주의 거처로 들이닥쳤었다.

그곳에서 귀면지존은 갓 돌을 맞은 제왕성의 소성주 섭무궁을 인질로 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저항하는 영창공주를 살해했었다.

영창공주는 귀면지존의 검에 찔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는 끔찍한 상처를 입고 절명했었다.

그리고 십팔 년 만에 영창공주를 죽게 만든 마공, 마검칠식의 흔적이 냉혈철심 사우의 시신에서 발견된 것이다.

 

“마... 마검칠식은 마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失傳)되었다고 알려진 악랄하고 치명적인 검법인데...”

“총관! 드디어 십팔 년 전 무후님을 시해한 원수에 대한 단서를 잡은 것 같소.”

독두태보와 백월사신이 극도의 흥분으로 떨며 궁무독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의 대주를 살해한 자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라.”

궁무독은 두 노인에게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꿇고 있는 철위사들을 노려보았다.

“그놈은 약관도 안된 애송이었는데...”

강유와 대결했다가 어깨에 관통상을 입은 철위사 장흔이 일행을 대표하여 보고했다.

“살아계실 때 대주님이 하신 말씀에 의하면 놈이 사용한 다른 무공은 칠절 중 소요신군 강조의 것이었습니다.”

“소요신군 강조!”

궁무독과 백월사신, 독두태보는 전율하며 눈을 부릅떴다.

 

* * *

 

산중의 밤은 더욱 어둡다.

휘익!

섬전초는 칠흑같은 어둠 속을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급히 속도를 줄이는 그놈 앞쪽에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섬전초는 절벽 끝으로 소리 없이 다가갔다.

절벽 끝에 이르러 내려다보는 섬전초의 눈에 불빛이 들어왔다.

아래쪽은 삼면이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는 계곡인데 그 끝에서 흐릿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는 것이다.

끼이...

섬전초의 등이 긴장으로 활처럼 굽어졌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떨면서도 섬전초는 소리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계곡 막다른 곳의 절벽 아래쪽에는 동굴이 하나 입을 벌리고 있다.

그 동굴 입구에 마른 나뭇가지들을 모아 피운 모닥불이 타고 있다.

모닥불에는 물기가 있는 쑥대가 얹혀져 있어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다. 극성스러운 모기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피운 모깃불인 것이다.

강유는 동굴을 등지고 모닥불을 앞에 둔 위치에 앉아있다.

상의를 벗은 상태인 강유는 사우와 싸우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중이다.

납작한 도자기 용기에 들어 있는 고약을 손가락으로 떠낸 강유는 상당히 깊게 갈라진 상처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 고약은 어머니 냉상영이 비상약으로 챙겨준 금창약(金瘡藥)이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강유 옆에는 검 외에도 여러 가지 물건이 놓여있다.

단도 한 자루와 몇 개의 약병, 갈아입을 속옷과 먹다 남은 건량, 명주실을 꼬아 만든 한 다발의 가느다란 밧줄등이 그것이다.

모두 강유가 짊어지고 다니던 봇짐에 들어있던 물건들이다.

정작 봇짐을 싼 보자기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지니고 있던 그 물건들 외에 고불선사에게서 받은 봉투도 함께 놓여있다.

 

강유와 진상파가 머물고 있는 곳은 개봉(開封)의 동북방 삼백여리 쯤에 자리한 양산(梁山)이라는 곳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을 기준으로 삼으면 황금성이 있는 금릉과는 오히려 백여 리쯤 멀어진 상태다.

제왕성의 인간들은 당연히 진상파가 금릉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그쪽으로 추격대의 주력을 보냈을 것이다.

이를 예상한 진상파는 목적지를 금릉과 반대쪽인 개봉으로 바꿨다.

천년고도인 개봉에도 황금성의 분점(分店)이 있다.

그것도 보통 분점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규모의 거대한 분점이다.

금릉의 황금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개봉의 분점에 들어가기만 하면 제왕성의 추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진상파는 금릉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서 개봉을 목적지로 삼은 것이다.

다만 강유의 상처가 가볍지 않고 진상파 자신도 밤눈이 어두운 것을 감안하여 오늘 밤은 양산의 깊은 곳에서 보내게 되었다.

 

강유가 등지고 앉아있는 동굴은 그리 깊지 않다. 입구에서 오장쯤 들어가면 막다른 곳이 나온다.

동굴 끝의 바닥에는 마른 풀잎과 나뭇잎이 푹신하게 깔려있고 그 위에 진상파가 반듯하게 누워있다.

고개를 돌리면 동굴 입구를 볼 수 있도록 가로로 누워있는 그녀의 몸에는 강유의 봇짐을 쌌던 천이 덮여 있다.

밤이 깊었지만 진상파는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고는 있으나 두 사내의 모습이 번갈아 뇌리에 떠올라 마음을 어지럽히는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두 사내는 물론 강유와 모용준이다.

(같은 인간이고 사내인데 어찌 그렇게 다를까?)

진상파의 입에서 소리 없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누구는 오직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했던 데 반면 또 다른 사내는 생면부지인 나를 구해주려고 목숨을 도외시했었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유모인 구숙정과 짐승처럼 뒤엉키던 장면을 떠올리고 새삼 혐오감에 치를 떨었다.

(똑같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그것에 담긴 영혼에는 천양지차가 날 수 있구나.)

감았던 눈을 뜬 진상파는 고개를 조금 돌려 동굴 입구를 보았다.

그곳에는 강유가 진상파에게 등을 보이는 자세로 앉아서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다.

강유의 몸에 가려서 모닥불의 불빛은 직접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아들 강유...)

상의를 벗고 있는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처녀인 나를 배려해서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을 뿐 아니라 만일을 대비하여 입구를 지키고 있다.)

진상파는 시선이 자꾸만 강유에게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협객이며 대장부... 어쩌면 나는 운명의 상대를 만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맨살을 드러낸 강유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다.

 

(살인을 했다.)

상처에 금창약을 바르고 있는 강유의 얼굴에서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의 필살일초에 당해 죽어가며 눈을 부릅뜨던 냉혈철심 사우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비록 나를 죽이려고 했던 적이었지만 한 인간의 목숨을 내손으로 끊어버린 것이다. 그에게도 치열하게 살아온 인생과 비탄에 잠길 가족이 있을 텐데...)

상처에 고약을 바르는 강유의 손가락이 바르르 떨렸다.

(몸에 묻었던 그자의 피는 씻어버렸으나 내 영혼에는 살인의 기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으로 남게 될 테지.)

깊은 한숨이 강유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무림인으로 살아가려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살인을 경험하자 후회와 자책의 늪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나란 놈은 너무 심약해서 무림인으로서의 거친 삶을 견디지 못할 것만 같구나.)

강유가 우울하게 한숨을 쉴 때였다.

사박!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진상파가 덮고 있던 보자기를 어깨에 두른 채 입구로 다가오고 있었다.

“소저... 밤이 이미 깊었는데 주무시지 않고 계셨습니까?”

강유는 멋쩍어져서 벗어놓았던 상의를 집어 앞을 가렸다.

“다사다난한 하루였던 탓인지 쉽게 잠 들 수가 없군요.”

진상파가 강유 뒤에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내일 또 강행군을 해야 하니 억지로라도 주무셔야...”

말하던 강유는 움찔했다. 진상파의 손이 강유가 왼손에 들고 있는 고약 통을 잡았기 때문이다.

“등 쪽 상처에는 손이 닿지 않으실 테니 제가 약을 발라드릴게요.”

강유의 뒤쪽에 무릎을 꿇은 진상파가 고약 통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신세를 지겠습니다.”

강유는 어색하게 웃으며 등을 진상파에게 맡겼다.

진상파는 매끄러운 손가락으로 떠낸 금창약을 강유의 등 쪽에 난 상처에 발라주었다.

그녀가 아버지 이외의 사내 몸에 손을 대는 것은 난생 처음이다.

진상파의 손가락이 살에 닿자 강유의 몸에 움찔 경련이 치달렸다.

(이런 느낌이로구나.)

강유의 상처에 금창약을 발라주는 진상파의 손도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 그것도 남자의 몸을 만지는 느낌은 이토록 흥분되면서도 경이로운 것이었어.)

진상파는 가빠지는 숨결을 강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강유 역시 심장이 거칠게 뛰노는 것을 행여나 진상파가 눈치챌까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분이 외의 여자가 내 몸을 만지는 건 이토록 긴장되고 떨리는 경험이로구나.)

입 안이 바짝 바짝 말라 들어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강유였다.

(만일 분이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난리가 나겠지?)

그 와중에도 분이의 화난 표정이 떠올라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헌데 그 직후의 일이었다.

반짝!

모닥불 건너편의 어둠 속에서 한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는 것이 강유의 눈에 들어왔다.

(뭐지?)

강유는 몸을 약간 앞으로 숙이며 그 빛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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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두 가지 선물

 

 

"담세황이란 놈이 내게서 노리고 있는 두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 아느냐?"

옥여상은 꼭 끌어안고 있던 고검추의 머리를 조금 풀어주며 물었다.

"세... 세이경청하겠습니다."

고개를 조금 든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거렸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부끄러운 변화를 옥여상에게 들켰음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두 가지 보물 중 하나는 장보도(藏寶圖)란다."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하는 고검추의 모습을 본 옥여상의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보도라면 어떤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그린 지도겠군요."

고검추는 흠칫 놀라며 옥여상을 내려다 보았다.

"십칠 년 전, 그다지 친분도 없던 어떤 인물이 인편으로 손수건 한 장을 보내왔었다. 그 손수건 위에는 복잡한 암호가 기재되어 있었는데... 십여 년이 흐른 후에야 그것이 한 자루의 신검을 감춘 장보도인 줄 알게 되었단다."

(신검을 감춘 장보도!)

고검추는 어떤 예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복마신검을 어디에 숨겨 놓았느냐?>

 

사신각주가 자신의 양모 당혜선을 다그치던 장면을 떠올린 것이다.

"아... 아주머니께서 장보도를 보낸 분이 누구입니까?"

고검추는 떨리는 음성으로 옥여상에게 물었다.

옥여상은 야릇한 눈빛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대답했다.

"그 사내는 내가 장보도를 받은 직후 불미스러운 일로 자결했다고 한다. 정파백도의 차기 맹주로 손꼽히던 철사자 고창룡이 그 장본인이다."

"...!"

고검추의 몸이 다시 한 번 세찬 경련을 일으켰다.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옥여상이 고검추에게 주겠다고 한 장보도는 사신검 중 복마신검을 감춘 장소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장보도를 옥여상에게 보낸 사람은 다름 아닌 고검추 자신의 부친인 철사자 고창룡이었다.

 

십칠 년 전, 고창룡은 친분도 별로 없는 옥여상에게 복마신검의 장보도를 보냈었다.

고창룡과 옥여상은 한두 번 얼굴 마주친 정도의 교분밖엔 없었다. 각자 걷는 길이 다른지라 흑백양도를 대표하는 기재들은 서로를 의식하면서도 사귈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헌데 고창룡이 늙은 하인을 시켜 암호가 적힌 손수건을 옥여상에게 보냈다. 비록 가는 길은 다르나 옥여상이라면 믿을만 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옥여상이 손수건을 전해 받은 얼마 후 고창룡이 패륜아로 몰려 자결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고창룡의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여상의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고창룡이 죽음을 예견하고 암호가 적혀잇는 손수건을 보낸 듯이 느껴졌던 것이다.

하지만 옥여상은 고창룡이 자신에게 손수건을 보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손수건에 적혀있는 암호는 난해해서 해독하기 어려웠으며 마천루의 제이대 루주가 된 직후라 다른 일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십 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옥여상은 마천루를 훌륭히 영도하여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지위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호천무맹이 봉문한 무림에서 마천루에 맞설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덕분에 옥여상도 마도제일인을 넘어 중원제일인이라는 찬사까지 받게 되었다.

이룰 만큼 이루었고 큰 우환도 없어서 여유가 생긴 옥여상은 고창룡이 보낸 손수건을 떠올렸다.

그리고 몇 달에 걸친 연구 끝에 암호가 적혀있는 손수건이 사신검 중 하나를 감춘 장보도임을 알아내었다.

 

(아버지는 어째서 장보도를 전혀 남인 이 분께 보내셨을까? 어머니나 양모님은 물론이고 호천무맹의 원로들 중에서도 믿을만한 분이 계셨을 텐데...)

고검추는 옥여상의 풍만한 몸 위에 엎드린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세상이 발칵 뒤집힐 일이로구나. 철사자 고창룡에게 아들이 있었다니...)

옥여상도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고검추의 경악하는 모습에서 그와 고창룡의 관계를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내색치 않고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담세황이 노리던 두 가지 보물을 네게 모두 줄 작정이다. 거절하지 않겠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대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아니... 고모님!"

"고모..."

고모라는 고검추의 호칭에 옥여상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천애고아인 그녀로서는 누군가에게 친근한 호칭으로 불려진 건 오늘이 처음이다.

“무... 무례했다면 용서하십시오.”

고검추는 옥여상의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옥여상이 아버지의 지인인 것을 알고 별 생각없이 고모라 부른 것이다.

“무례는 무슨... 너같이 귀여운 조카가 생겨 얼마나 기쁜지 모른단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감... 감사합니다.”

고검추는 꽃잎같이 부드러운 옥여상의 입술을 이마에 느끼며 안도했다.

"헌데 너는 사신검의 장보도 말고 다른 한 가지 보물이 무엇인지나 알고 감사하는 것이냐?"

옥여상은 야릇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다.

"그... 그게 무엇입니까?"

자신이 옥여상의 품에 아기처럼 안겨 있는 것을 의식하며 고검추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옥여상이 옥용을 발그레 물들이며 대답했다.

"그건 바로... 고모의... 처녀(處女)다."

"예엣?"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아연실색했다.

옥여상이 고검추 자신에게 주겠다는 두 번째 보물이라는 게 처녀라니... 고검추로서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두 번째 것은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찌 감히 고모님과..."

고검추는 너무 놀라 말도 채 맺지 못하고 옥여상의 시선을 피했다.

비록 젊어 보이지만 옥여상은 고검추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중년여인이다.

그런 그녀와 어떻게 교접을 한단 말인가?

"네가 왜 나의 두 번째 선물을 못받겠다고 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래도 반드시 받아 주어야만 한다. 그게 고모를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옥여상은 옥용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처... 처녀를 제게 주시는 것이 고모님을 구하는 방법이라니... 무슨 뜻이신지요?"

고검추는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물었다.

"휴우... 이 모두가 담세황이라는 그 음흉한 놈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옥여상의 옥용이 분노와 부끄러움으로 빨개졌다.

 

은발마희 옥여상에게는 한 명의 사제(師弟)가 있었다.

옥면마성 담세황-!

바로 그 자였다.

동문의 사형제이지만 옥여상과 담세황은 모자지간이라 해야 좋을 정도로 나이 차이가 난다. 옥여상은 마흔 세 살이고 담세황은 스물일곱 살인 것이다.

옥여상이 일찍 시집을 갔으면 담세황 또래의 아들이 있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이 사형제면서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데에는 사연이 있다.

담세황은 마천루를 세운 구천마야(九天魔爺) 담백양(潭白楊)의 다소 먼 친척이다.

비록 친척이라 해도 구천마야는 담세황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인 마천루를 이끌어가려면 탁월한 무공과 영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담세황의 집안이 역모에 연루되어 멸족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구천마야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갔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담세황의 일가의 식솔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이다.

그때 구천마야가 유일하게 구해낸 것이 담세황이었으며 당시 여덟 살이었다.

원래 구천마야는 후계자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을 우려하여 옥여상 외에는 제자로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천애고아가 된 담세황이 가엾어서 제자로 받아들였다.

대신 구천마야는 마천루의 차기 루주는 대제자인 옥여상이라는 것을 수시로 천명했다. 옥여상의 위상과 정통성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다.

스승의 그같은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 옥여상은 담세황을 친동생인 듯 성심껏 돌보아 주었다.

다만 담세황이 지나치게 영악하고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재주가 남다른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모든 언행이 계산 끝에 나온 게 느껴져서 아무래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집안이 멸족당한 후유증이거니 생각하며 담세황의 행태를 이해하려 애썼다.

옥여상은 담세황을 돌봐주었을 뿐 아니라 실질적 스승 역할까지 해야만 했다.

담세황을 제자로 맞아들일 당시 구천마야는 이미 팔순을 넘겨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옥여상이 늙은 사부를 대신하여 담세황을 가르쳐야만 했다.

옥여상과 담세황은 사형제가 아니라 사실상 사제지간이었던 것이다.

최소한 옥여상은 그렇게 생각했다.

헌데 삼 년 전 어느 날 사단이 벌어졌다.

오랫동안 외출했다가 돌아온 담세황이 한 권의 오래 된 책을 옥여상에게 주었다. 그 고서는 상고시대의 절기가 실려있는 비급이었다.

 

-헌원태을경(軒轅太乙經)!

 

담세황은 그같은 이름의 비급을 천산(天山)의 어느 빙동(氷洞)에서 얻었다고 했다.

옥여상은 흥분을 금치 못했다. 헌원태을경이 전설 속의 황제(黃帝) 헌원씨(軒轅氏)가 남겼다고 알려진 비급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원태을경은 황제 헌원씨가 총애하던 소녀(素女)를 위해 지은 비급이다.

황제는 소녀가 헌원태을경을 익혀서 몸을 지키길 원했다. 그런 사연이 있어서 헌원태을경의 무공들은 수비와 보신에 특화되어 있다.

헌원태을경에 수록된 무공들의 정수는 태을강기(太乙罡氣)다.

태을(太乙)은 북극성(北極星)을 의미하며 북극성은 인간의 생사를 주관한다.

그 태을이 이름에 들어간 태을강기를 완전히 수련하면 생사에 초연해질 수 있다. 온몸의 모공에서 늘 강기가 흘러나와 외부의 충격에 즉각 반응하기 때문이다.

태을강기를 깨트릴 수 있는 무공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졌을 정도다.

다만 태을강기에는 두 가지 심각한 약점이 있다.

먼저 수련하기가 극히 어렵다.

온몸의 모공으로 강기를 뿜어내려면 온몸의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야만 가능하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무림을 통틀어도 열 명이 채 안될 것이다.

즉, 태을강기의 수련 비결을 안다고 해서 누구나 태을강기를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두 번째 약점은 더욱 치명적이다.

태을강기는 팔만사천 개로 알려진 전신의 모공으로 발산과 수렴을 하는 까닭에 통제하기가 메우 어렵다. 십성에 이르기 전까지는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속을 제 멋대로 떠도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으니 남에게 빼앗기는 것도 막을 수 없다.

태을강기를 수련중인 인물을 제압하여 채음보양이나 채양보음의 사술을 쓰면 그때까지 축적해놓은 태을강기를 고스란히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담세황, 그 배은망덕한 놈은 내가 사신검의 장보도를 지니고 있는 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놈은 내게서 장보도를 빼앗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게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히 헌원태을경을 얻게 되었으며...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리고 그걸 내게 준 것이다."

듣고 있던 고검추는 분노로 치를 떨었다.

"스스로 태을강기를 익힐 자신이 없었던 그 자는 고모님으로 하여금 태을강기를 수련하게 한 후 갈취할 생각이었겠군요."

옥여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삼 년 가량 수련한 결과 나의 태을강기는 구성(九成)을 넘겼다. 그걸 확인한 담세황은 방심하고 있던 나를 쇄심마장으로 암습했다. 지금으로부터 열하루 전의 일이다."

"도저히 용서 못할 말종이로군요."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분노를 금치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옥여상은 그런 그를 그윽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나의 처녀가 왜 보물인지 알겠지?"

“예...”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옥여상이 중년을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처녀라는 사실과 태을강기를 이전받으려면 그녀와 관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때문이다.

구성 수준의 태을강기를 얻은 후 조금만 더 수련하면 십성에 이를 수 있다. 그럼 어떤 무공에도 다치지 않는 사실상의 불사지체가 된다.

"아...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고모님."

잠시 고민하던 고검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옥여상의 호의를 쉽사리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 고모가 쉰 살을 바라보는 늙은 계집이라 싫은 것이냐?"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저는... 다만..."

난처한 듯 더듬거리던 고검추는 이윽고 용기를 내어 말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자꾸만 고모님이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어머니 같아서 도저히 무례할 수가 없습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두 눈에 한 줄기 파문이 일었다.

그와 함께 그녀의 봉목 가득 뽀얗게 물기가 차올랐다.

"내게도 너같이 착한 아들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옥여상은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며 고검추를 꼬옥 끌어안았다.

"마녀라 불리는 나같은 계집을 그렇게 소중하게 대해주니 고맙구나."

"고모님..."

옥여상의 품에 안긴 고검추의 가슴도 뜨거워졌다.

"하지만 너는 반드시 고모의 처녀를 취해야만 한다. 그것이 고모와 천하무림을 위하는 길이란다."

옥여상은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만년화리를 구하러 북해로 갈 작정이다. 하지만 만년화리를 잡아서 쇄심마장의 마기를 제거할 수 있을지, 그보다 담세황의 추적을 벗어날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옥여상은 그늘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현재 나의 내공은 절반 이상이 쇄심마장의 마기를 억누르는데 소모되고 있다. 이런 상태로는 담세황과 백초도 겨루지 못한다."

본래 옥여상은 담세황 정도는 삼십 초 안에 제압할 수 있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설마 담세황이 사실상의 사부인 자신을 기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그녀는 방심하다 암습당해서 담세황과 백초도 겨룰 수 없는 참담한 신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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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절벽에 숨겨진 문

 

 

"어? 당신 손에 있던 단검은 어쨌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에 단검이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했다.

"녹지에 던져 버렸어요."

강미루가 애써 태연한 척 하며 대답했다.

"아니 왜?"

"당신을 찔렀던 물건을 계속 갖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 못해서요. 혹시 당신을 찌르는 경우가 또 생기면 어떡하라구요?"

말하는 강미루의 커다란 눈에 물기가 서린다.

백남빈은 그런 강미루의 마음씨에 감격했다. 그녀가 자신을 깊이 생각해 주는 줄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토록 애정이 깊을 줄은 생각지 못했었다.

강미루의 깊은 애정에 다 보답하지 못하는 듯해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날 생각하는 당신의 마음이 그토록 깊을 줄은 몰랐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떠나지만 않는다면 내 결코 당신을 저버리지 않겠소”

완곡한 표현이지만 틀림없는 구혼(求婚)이다.

그것을 깨달은 강미루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빼려고 했다.

하지만 백남빈이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자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아무 말도 못했다.

대려장의 홍의창이라 불리던 여걸의 흔적은 이미 그녀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백남빈도 강미루가 아무 말이 없자 민망해져서 고개를 슬그머니 돌려 녹지의 푸른 물을 보았다.

두 사람은 어깨를 기대고 나란히 앉아 녹지를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있었다.

 

이윽고 보름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렀다.

그러자 창평곡의 야경(夜景)이 어딘지 모르게 전과 달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평곡은 사방이 수백 길 절벽으로 에워싸인 항아리같은 구조다. 그 때문에 햇빛에 의하든 달빛에 의하든 한쪽에는 늘 그늘이 진다.

그러다가 해나 달이 하늘 한가운데에 이르면 잠깐 동안이지만 그늘이 완전히 사라진다.

보기에도 탐스러운 보름달이 중천에 이르자 창평곡 어느 곳에도 절벽의 그늘은 생기지 않게 되었다.

노란 보름달은 새파란 녹지 중앙에도 떠올랐다.

녹지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이 마치 눈동자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콕 찍어 누르는 송곳자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서로 어깨를 기대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는 보름달이 녹지 중앙에 떠오르며 만들어내는 몽환적인 광경을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눈을 치떴다.

녹지의 수면이 천천히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이 줄어들고 있다!>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백남빈과 강미루는 서로 기대고 있던 어깨를 떼며 몸을 앞으로 세웠다.

마치 보름달의 달빛에 실린 무게에 짓눌리기라도 하듯 녹지의 수면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백남빈과 강미루가 알아차렸을 때 녹지의 수면은 이미 한길 이상이나 갈아 앉아있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크럭! 크르럭!

어디선가 쇠사슬 감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린 곳을 찾아보았다.

크럭! 크드드!

연달아 쇳소리가 들린 곳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맞은편, 즉 서쪽 절벽인데 그 절벽의 일부가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蒼平谷>이라 적혀있는 부분이 절벽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것이다.

폭과 두께는 각 일장쯤이고 길이는 오장 가까이나 되는 거대한 석괴가 위쪽부터 절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다.

크릭! 끼끼익!

석괴의 안쪽 윗부분에는 두 가닥의 굵은 쇠사슬이 달려있어 석괴가 절벽에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지탱하고 있다.

마치 해자(垓字) 위에 놓여지는 다리처럼 내려오는 석괴 뒤로 검은 공간이 보인다.

"글... 글씨가 적혀 있던 부분이 감춰진 문이었어요!"

“가봅시다!”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잡고 함께 신법(身法)을 펼쳐서 나는 듯이 달려갔다.

 

***

 

크럭 크럭 끼릭 끼릭!

거대한 석괴를 안쪽에서 지탱하고 있는 어른 팔뚝 굵기의 쇠사슬들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쇠가 타는 냄새를 공기 중에 뿌린다.

크드드!

이윽고 석괴의 윗부분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면서 그 뒤에 감춰져 있던 석문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석문 안쪽은 은은한 빛이 흐르고 있어 그리 어두워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내공이 크게 증진되어 어둠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력(眼力)이 생긴 터였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르는 비밀장치를 주의하면서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석문 안으로 들어갔다.

 

석문의 내부는 천연의 동굴에 약간의 인공(人工)을 가미한 통로였다.

천장에는 종유석(鐘乳石)들을 제거한 흔적이 보였다.

하지만 그 외의 곳의 종유석들은 원형을 보전하고 있다. 그 때문에 기기묘묘한 형태의 종유석들이 열주랑(列柱廊)처럼 안쪽까지 도열해 있다.

종유석들의 열주랑을 지나 왼쪽으로 꺾이는 부분은 일반적인 암동(巖洞)으로 종유석은 보이지 않는다.

그 암동 끝은 천장에 구멍이 나있는지 달빛이 흘러들어와 밝았다.

 

십여 장 길이의 암동을 지나자 백 평 정도의 제법 넓직한 뜰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사방의 석벽이 비스듬하게 올라가 있고 그 끝에 하늘이 조그맣게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두 개의 절벽이 겹치면서 만들어진 천연의 동부(洞府)였다.

달빛이 흘러드는 위쪽 입구는 까마득하게 높은데, 그 입구마저 바깥쪽 절벽이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외부에서는 이 동부의 존재를 결코 눈치 챌 수 없다.

뜰에는 키가 작으면서도 옆으로 떡 벌어진 몇 그루의 나무들과 풀이 자라고 있고 그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납작한 돌판으로 덮인 오솔길을 따라가자 세 개의 석문(石門)이 나란히 붙어있는 벽이 나왔고 벽 한쪽에는 돌로 만든 바가지가 놓여있는 작은 옹달샘이 보였다.

"바깥도 아름다운데 여기는 오밀조밀해서 더 아름답군요. 정말 신선이 살았던 곳이 아닐까요?"

신비한 정경에 도취되어 묻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않소?"

그의 말에 강미루가"칫!" 하는 소리를 냈다.

"여길 보세요. 이 바가지는 사람손이 닿지 않아 먼지가 반치는 쌓였는데 누가 살고 있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어요?"

"당신이 그토록 총명하니 장차 남편을 마음대로 흔들겠군."

백남빈이 웃으면서 농(弄)을 했다.

"어쩜, 지금 같은 때에도 장난이 나와요? 저를 놀려서 당신은 무엇이 좋은가요? 아까 밖에서 저한테 했던 말도 장난이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강미루가 눈을 흘기며 힐난하자 뜨끔해진 백남빈은 얼른 굽신거리며 둘러대었다.

"천만에, 천만에! 내말은 장난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진정인 것 같으면서도 진정이고..."

강미루는 보면 볼수록 교묘한 동부인지라 백남빈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말했다.

"엉뚱한 말씀은 그만 하시고 우리 이 문들이나 열어 봐요."

백남빈이 내키지 않는다는 투로 어깨에 걸린 검을 툭 치면서 말했다.

"이 검의 원래 주인이 살고 있을지도 몰라. 그럼 검을 돌려 달라고나 하지 않을지 걱정이로군."

"차라리 검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면 좋잖아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쓸데없이 주고받는 말들이었다.

 

세 개의 문 중 좌측 문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그긍!

백남빈이 슬쩍 밀자 석문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석문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의 눈에 가장 먼저 뛴 것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몇 권의 책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든지 보다가 던져져서 엎어진 책장(冊張)들이 바닥에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백남빈은 그중 하나를 집어서 먼지를 툭툭 털고 제목을 읽었다.

 

<이백시선(李白詩選)>

 

바로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당(唐)나라 시인 이백(李白)의 시를 모은 시집이었다.

"이태백(李太白;이백)의 시를 좋아한 걸 보면 이곳의 주인은 매우 아취(雅趣)가 있는 사람이었던 모양이군요"

함께 보고 있던 강미루가 말하자 백남빈이 대뜸 받았다.

"설마 그런 사람이 책도 어질러 놓으려고?"

"남의 거처에 와서까지 주인을 욕하는 거예요?"

백남빈은 강미루의 그 말에 말문이 막혀서 아무 말도 못했다.

입심이 센 그녀를 말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백남빈이었다.

강미루가 백남빈의 손에서 책을 받아 옆에 있는 서가의 빈곳에 가지런히 놓았다.

천정에 박힌 야광주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은은히 비치는 이 석실에는 수백 권에 달하는 책들이 서가와 바닥에 흩어져 있다.

책 뿐 아니라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도 석실의 여기저기에 놓여 있었다. 대충 보기에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나가요. 밀폐되어 있어서인지 공기가 탁해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석문 밖으로 밀며 말했다.

백남빈이"어__?" 하며 밖으로 밀려 나가자 강미루는 재빨리 안에서 석문을 닫아버렸다.

"미루, 미루, 왜 그러는 거요?"

강미루의 갑작스러운 행위에 백남빈은 겁이 털컥 나서 석문을 두드렸다.

"잠시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석문 안쪽에서 강미루의 대답이 들린다.

 

사실 강미루는 창평곡에 들어온 이후로 옷 같은 옷을 입어 보지 못했다.

비록 기후가 따뜻해서 지내는데는 지장이 없다 할지라도 여자로서의 불편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금도 상체는 백남빈이 벗어 준 남색 상의를 입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풀로 엮어 만든 치마로 대충 가리고 있었다.

버석거리고 까칠한 감촉은 둘째 치고 자칫 방심이라도 하면 속살이 드러나곤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석실에 들어오자마자 모퉁이에 놓여있는 옷가지들을 발견한 강미루는 대단히 기뻤었다. 어떤 종류의 옷이든 가릴 게재가 아니었다.

"전부 남자들의 옷뿐이네."

그래도 옷가지들을 들쳐본 강미루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석실 안에 구비되어 있는 옷은 모두 남자들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자 옷이라도 풀치마보다는 났다.

강미루는 헐렁한 남색 상의를 벗어버리고 옷가지들 중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흰색 옷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탁탁 턴 후 입어 보니 옷 전체가 몸에 착 붙고 가느다란 소매는 팔목을 살짝 조였다. 상당히 작은 체형의 사내가 입었던 옷 같았다.

한 벌인 듯한 꼭 끼는 바지를 마저 입고 허리에 띠를 둘렀다.

하지만 속옷도 없이 맨살에 겉옷만 두른 상태라 뭔가 허전하다.

"뭘 하는 거요?"

밖에서 초조해진 백남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됐어요."

강미루는 마주 소리치며 재빨리 헐렁한 장삼을 하나 집어 들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장삼의 허리 부분을 허리띠에 끼워서 대충 크기를 맞추었다.

몸을 슬쩍 돌려 살펴보니 그런 대로 마음에 들었다.

 

강미루는 몇 벌의 옷을 품에 안고 밖으로 나왔다.

“어!”

확 달라진 강미루의 모습에 백남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내아이같이 변한 강미루의 모습은 어여쁠 뿐 아니라 깜찍하기까지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뜨거운 시선을 애써 모른 채 하며 안고 나온 옷가지들 중 하나를 골라서 입혀 주었다.

품이 넉넉한 장삼을 걸치고 사자검을 허리에 찬 백남빈의 모습이 옛날이야기 속의 검선(劍仙)을 떠올리게 해서 강미루의 가슴도 두근거렸다.

제대로 된 옷을 갖춰 입은 두 사람은 엿새만에 사람의 형용(形容)을 되찾게 되었다.

석실 안팍에 벗어놓은 남색상의와 풀잎 옷 한 벌은 장차 높이 날아오를 그들의 껍질인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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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신비한 동굴

 

 

-대과벽(大戈壁)!

 

갑자기 이검한 앞에 나타난 장대한 단층지대는 서역 제일의 절경이라는 대과벽이었다.

무려 삼천여 리에 걸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절벽인 대과벽은 마치 거대한 용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꿈틀거리며 기어가는 듯하다.

그 거대한 대과벽이 지금은 저녁노을에 물들어 피를 칠한 듯 시뻘겋게 보였다.

“책에서 읽었던 대과벽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대과벽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검한의 가슴은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쏴아아아!

그 사이에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은 대과벽을 향해 비스듬히 날아 내려갔다.

이검한은 고개를 빼든 채 철익신응이 날아내려가는 아래 쪽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로 대과벽 중간쯤에 쩍 갈라진 틈바구니가 보였다.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삼각형 형태의 틈바구니다.

(신응이 나를 데려온 목적지가 저기인 모양이다.)

쏴아아아!

이검한이 생각하는 사이에 철익신응은 대과벽 중간쯤에 나있는 삼각형의 틈바구니를 향해 빠르게 접근해갔다.

삼각형의 틈바구니는 어떤 동굴의 입구였는데 그 절묘한 위치 때문에 허공에서 보지 않으면 있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즉, 새를 타고 살펴보기 전에는 그 동굴의 존재를 결코 알아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 화악!

이검한을 태운 철익신응이 동굴 안쪽으로 날아 내렸다.

철익신응이 내려선 동굴 입구는 상당히 넓었다. 천장까지의 높이는 십여 장이나 되고 아래쪽의 폭은 그 이상이다.

“이곳에 내게 보여주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라도 하다는 거냐?”

휘릭!

이검한은 철익신응에게 물으며 그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나직하게 울며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놈의 눈가로 물기가 번지는 것이 이검한의 눈에 들어왔다.

(저 안쪽에 철익신응과 관련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는 건가?)

눈시울을 붉히는 철익신응의 모습을 본 이검한은 흠칫했다.

그리고는 검미를 모으며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동굴은 아주 깊고 어둑해서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구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부리로 이검한의 등을 밀었다.

“알았어. 들어가 볼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뜻을 알고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은 동굴 안쪽으로 사라져가는 이검한의 뒷모습을 보며 만감이 서린 울음소리를 토해내었다.

 

***

 

얼마나 걸어들어 갔을까?

“이런 곳에 사람이 만든 석문(石門)이 있다니...!”

이검한은 흠칫하며 멈춰 섰다.

동굴 입구로부터 백여 장 정도 들어온 이검한의 앞을 육중한 석문이 가로막아 섰다.

강철 못지않게 단단하다는 청강석(靑剛石)을 깎아 만든 그 석문 위에는 난해한 문양(紋樣)이 사람 머리통 정도의 크기로 새겨져 있다. 마치 올챙이들이 이리저리 꼬물거리는 듯이 보이는 복잡한 문양이었다.

(과두문(蝌蚪文)이다!)

그 기괴한 문양을 살펴본 이검한은 두 눈을 반짝 빛냈다. 석문 위에 적혀있는 사람 머리 크기만한 문양은 한자(漢字) 이전 시대에 쓰였던 상형문자인 과두문이었다.

전모 냉약빙은 엄청난 거구 때문에 미련할 것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박학다식했다. 총명한데다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을 지닌 것이다.

그런 냉약빙에게 가르침을 받은 덕분에 이검한은 한자뿐만이 아니라 서역과 천축의 문자도 대충 읽을 수가 있었다.

물론 냉약빙이 가르쳐준 다양한 문자들 중에는 한자의 원형인 전자(篆字)뿐 아니라 과두문도 포함되어 있었다.

 

<현음동천(玄陰洞天)>

 

이검한이 기억을 더듬어 해독한 과두문은 그런 뜻이었다.

그리고 현음동천이라는 글자들 아래로는 전자체의 글들이 몇 자 더 적혀 있었다. 크기가 주먹만한 그 글들은 현음동천이란 뜻의 과두문이 새겨진 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추가된 듯했다.

 

<이곳은 사천왕(四天王)의 영지다. 난입(亂入)하는 자에게는 구족지멸(九族之滅)의 신벌(神罰)이 있으리라!>

 

전자체로 새겨진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사천왕? 무림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린 인물들은 없었던 것같은데...”

글을 읽은 이검한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검한이 아는 한 무림의 역사를 통해 사천왕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사천왕이라는 게 혹시 수미산의 사방에서 불법을 수호한다는 사대천왕(四大天王)을 가리키는 것일까? 여기는 무림과는 상관이 없는 불가(佛家)의 유적이고?”

이검한은 석문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누군가 험한 표현을 써가며 경고를 해놓은 걸 보면 들어가면 안되는 곳 같은데...)

허락 없이 석문 안으로 들어가면 구족이 멸해지는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글귀가 마음에 걸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르는 소년다운 호기심이 꺼림칙함을 눌러 버렸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나갈 수는 없지.)

이검한은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석문을 밀어보았다.

그그긍!

육중해 보이는 것과 달리 석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시, 시체!”

헌데 석문을 밀어 젖히며 안쪽으로 들어서던 이검한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주춤 물러섰다. 이검한이 열고 들어간 석문 앞에 시체 한 구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석문 안쪽은 일정한 간격으로 야명주가 박혀 있어 그리 어둡지 않은 복도였다.

그 복도에 석문을 향해 기어오는 듯한 자세로 죽어 있는 시체가 한구 있다.

깡마른 몸에 검은 색의 옷을 걸친 그 시체의 왼손에는 칼날의 폭이 좁은 장도(長刀)가 한 자루 쥐어져 있다.

길이가 네 자 정도인 그 칼은 만들어진 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섬뜩한 빛을 흘리고 있다. 아마도 금석(金石)을 흙 베듯 하는 신병이기일 것이다.

“이... 이 사람은 누군데 이런 곳에 죽어 있는 걸까?”

이검한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조심스럽게 시체로 다가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의 시체는 아직 어린 소년인 이검한의 심장을 떨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시체는 목내이(木乃伊;미이라)처럼 바짝 말라있다.

비록 목내이가 되긴 했어도 시체의 얼굴은 살아있었을 때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냉혹하고 성말라 보이는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고 머리카락과 수염은 반백이다. 시체의 주인은 죽을 당시에 이미 노년이었을 것이다.

(혹시 이 사람이 석문에 쓰여 있던 사천왕중 한 명이 아닐까?)

평범해 보이지 않는 시체의 얼굴을 살펴본 이검한은 몸을 숙였다. 시체의 왼손이 쥐고 있는 칼을 빼내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우두둑! 퍼석!

헌데 이검한이 칼을 빼내려고 손을 대는 순간 시체는 바싹 마른 흙덩이처럼 그대로 부서져 내렸다.

“헉!”

깜짝 놀란 이검한이 급히 허리를 펴면서 물러났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푸스스!

방금 전까지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시체는 고운 모래처럼 무너져 내려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시체의 주인은 아주 오래 전에 죽었으며 서역의 건조한 기후는 시체를 완전하게 건조시켜버렸었다.

그러다가 이검한의 손이 닿자 그대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고인의 유해를 훼손하다니...!”

이검한은 깊은 죄책감을 느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부디 극락왕생하시길...)

시체 주인의 명복을 빌어준 이검한은 자신의 손에 들려진 칼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마도(魔刀) 파천(破天)

 

설화석고(雪花石膏)로 장식된 희고 매끄러운 칼의 손잡이에는 그같은 글이 음각(陰刻) 되어있다.

“하늘을 깨트리는 마귀의 칼? 섬뜩한 이름을 지닌 놈이다.”

손잡이에 새겨진 칼의 이름을 확인한 이검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도 파천이라는 이 칼은 이름만 섬뜩한 것이 아니었다.

칼을 쥐고 있자니 절로 불끈불끈 살기가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당장 무엇이든 베어보고 싶은 욕구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기를 부추기다니... 마물(魔物)이다!)

이검한은 오싹한 한기를 느끼면서도 마도 파천을 버리진 못했다. 무언가 인연같은 것이 그 칼에서 느껴진 때문이다.

이검한은 무너져 내린 시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집을 끌러내어 마도 파천을 집어넣었다. 시퍼런 한기를 뿜어내던 칼날이 칼집 안으로 사라지자 비로소 들끓던 살기가 갈아 앉는다.

이검한은 칼집에 넣은 마도 파천을 허리에 찼다.

이어 그놈의 주인의 신원을 밝힐만한 단서가 없을까 해서 무너져 내린 시체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뒤져보았다. 그리고 곧 두 가지를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검한이 먼저 찾아낸 것은 얇은 책자 한 권이었다.

 

<파천도보(破天刀譜)>

 

비단을 엮어 만든 책의 표지에는 그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책의 표지 안쪽에는 내공심법 한 가지와 삼초로 이루어진 도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폭혼낙백심결(爆魂落魄心訣)!

-파천삼식(破天三式)!

 

폭혼낙백심결-!

일신의 내공을 응축시켰다가 한순간에 토해내는 파격적인 내공심법이다. 폭혼과 낙백이라는 이름 그대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일거에 폭발시켜 상대방의 혼백을 끊어버리는 위력을 지닌 것이다.

편협하고도 신랄한 이 폭혼낙백심결을 운용하면 자기보다 몇 배 더 심후한 내공을 지닌 고수와도 맞서 싸울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내공을 일거에 토해내는 탓에 그 뒤에는 완전히 탈진해버려 운신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 단점이다. 폭혼낙백심결을 써서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그 자신이 적의 손에 죽게 되는 것이다.

 

파천삼식-!

단 삼초로 이루어진 이 도법에는 수비란 개념이 아예 없다. 오로지 적을 베어버리기 위한 공격적인 초식만으로 이루어진 도법이 파천삼심이었다.

 

“대... 대단하다! 폭혼낙백심결과 파천삼식이 실제로 구사된 무공이라면 이 시체의 주인은 고금을 통틀어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고수일 것이다!”

파천도보를 한차례 읽어본 이검한은 절로 혀를 내둘렀다.

이검한은 냉약빙으로부터 전궁만리비의 경신술 외에도 여러 가지 무공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냉약빙이 가르쳐준 무공들 중 폭혼낙백심결이나 파천삼식만큼 신랄하고 패도적인 것은 없었다.

(폭혼낙백심결은 몰라도 파천삼식은 익혀볼 가치가 있다.)

파천도보를 품속에 넣은 이검한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파천도보에 이어 이검한이 발견한 두 번째 단서는 바닥에 새겨진 수십 자의 글이었다. 모래처럼 곱게 부서진 시체의 잔해 아래쪽에 판독하기 어려운 난잡한 글들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마도 파천의 주인이 죽어가며 남긴 유언인 듯했다.

 

<마... 마녀(魔女)! 모든 것이 그 계집... 누란(樓蘭)...의 짓... 어리석게도 우리 사천왕은 그 계집에게 모든 양정(陽精)을 갈취당하고...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 머지 않아 천년공력(千年功力)을 지닌 마녀가... 세상의 종말이...!>

 

이검한이 어렵게 판독한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양정을 갈취 당하다니... 무슨 뜻일까? 또 어떻게 인간이 천년 수위의 내공을 지닐 수 있단 말인가?)

이검한은 앞뒤의 연결이 불분명한 바닥의 글을 읽으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아직 남녀 관계를 알지 못하는 순진한 소년인 이검한으로서는 여자가 남자의 양정을 갈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리 없었다.

(이 동굴 안쪽에서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게 분명하다.)

바닥에 새겨진 글까지 읽어본 이검한은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지 마라! 천년마녀(千年魔女)가 깨어난다!>

 

마도 파천 주인의 혼령이 이검한의 발길을 저지하기 위해 울부짖는 듯했다.

하지만 이검한의 왕성한 호기심은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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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3)

 

 

(바로 이것이었구나! 현장법사는 명산에 수장하는 심정으로 이 향로 안에 글을 새겨 두었던 것이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절묘한 방법이다. 책이라면 손상될 수도 있겠지만 구리로 만든 향로라면 천년이 아니라 수천 년을 간다 하더라도 여전할 것이다. 더구나 이 향로는 향불을 피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재를 비우기 위해 들어올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임청우는 끔찍한 고통과 신열에 시달리면서도 오른손으로 향로의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손톱보다 조금 큰, 즉 발톱만한 글자들이 향로 안쪽에 촘촘히 박혀있었다.

임청우는 윗쪽에서 시작하여 아래로 더듬어 내리며 읽었다.

 

<노납 현장은 황상(皇上)의 윤허도 받지 않고 홀로 장안을 출발하여 간다라를 거쳐 마침내 천축에 이르렀다.

-중략(中略)-

십팔 년이 지나 노납은 일백오십 개의 불사리(佛舍利)와 여덟 체의 불상(佛像), 육백오십칠 부의 경전을 가지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중략-

자은사에 대안탑을 세우고 불경을 번역하기 이십칠 년, 노납의 나이 고희에 달했으며 번역하지 못한 책은 오직 한 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

헌데 노납의 실책인가? 아니면 삼세를 굽어 살피시는 불타의 뜻이신가? 노납이 천축에서 가져온 경전 중 마지막 한부가 불법을 설파한 것이 아닌 줄을 그 누가 알았으리오?

노납은 삼 년의 망설임 끝에 그 마지막 한 부를 번역했다.

하지만 그 내용의 가공함으로 인하여 감히 세상에 흘리지 못하고 노납이 머물던 대안탑 칠층에 불심연화로(佛心蓮花爐)를 만들어 깊이 숨기는 바이다.

뜻이 있는 자는 구할 것이오, 인연이 있는 자는 얻을 것이다.

행하는 자는 불타의 자비를 잊지 말 것이며, 전하는 자는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글을 읽은 임청우는 고소했다.

“불심연화로! 역성(譯聖)께서는 자신이 애써 만든 불심연화로가 한낱 떠돌이 임청우의 무덤이 될 줄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지만 현장이 그토록 고심한 내용이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임청우 자신은 이 향로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생을 마쳐야할 운명에 처해있었다.

그렇다고 읽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천명(天命)이라면, 은밀하게 숨겨져 온 비전(秘傳)을 접하게 된 것 또한 천명이 아니겠는가?

줄이 바뀌면서 갑자기 문장이 바뀌었다.

“불심연화지(佛心蓮花指)?”

임청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른 글자들 보다 약간 크게 쓰여진 굵은 글자는 <불심연화지>였다.

(이럴 수가...!)

제목에 이어진 내용을 읽어가던 임청우는 심장이 쿵쿵 뛰었다.

지금 읽고 있는 것처럼 생소하고 기이한 문장을 그는 한 번도 대해본 적이 없었다.

천지(天地)의 도(道)를 이야기할 때는 모든 성인(聖人)들과 비슷했으나 신체의 굴신(屈身)에 대한 구절에서는 도가의 양생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내용들은 마치 한 줄에 꿰인 수백 개의 곶감들처럼 어떤 오묘한 원리에 의해 이어져 있었다.

인체에 관해 상세히 설명한 부분에서는 의서를 읽는 듯했고, 전혀 이해하지 못할 기(氣)라는 것에 대한 부분에서는 마치 무서(巫書)를 읽는 듯이 황당무계하면서도 신비한 감이 있었다.

임청우는 그 오묘하면서도 신비한 불심연화지의 구결에 빠져들어 몸이 아픈 것조차 잊어버렸다.

입으로는 연신 구결을 중얼거리며 눈은 망연히 마음 속을 들여다보고 손가락으로는 구결을 더듬었다.

구결을 외워감에 따라서 몸속에서 이해하지 못할 뜨거운 열기가 생겨났다.

그 열기는 배꼽 아래 세치 쯤 되는 곳이 간질간질해지더니 생겨났다.

아지랑이같고 연기같던 열기는 이내 뭉쳐져 불덩이처럼 변하더니 상승하기 시작했다.

아랫배와 명치를 지나 가슴 앞쪽을 통과한 불덩이같은 기운은 얼굴로 올라왔다.

턱 중앙을 지나 코 위로 흘러간 그 기운은 미간을 약간 더 올라간 위치에서 더욱 단단하게 뭉쳐지고 있었다.

마치 불이 붙은 솜이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지만 전혀 뜨겁지 않았다.

다만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임청우는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거듭 반복하여 읽었다.

읽을수록 머릿속은 선명해지고 온몸을 뜨겁게 달구던 신열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더니... 이렇게 죽으란 법은 없구나. 이 글속에 이처럼 신비한 힘이 있을 줄이야.)

임청우는 뛸 듯이 기뻤다. 몸의 상태가 구결을 외움에 따라 표가 날 정도로 좋아지고 있는 것을 안 것이다.

네 번을 거듭 읽고 나자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임청우는 눈을 감은 후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그에 따라 그의 몸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났다.

배꼽 아래쪽에서 꾸준히 생겨난 기운은 이마의 튀어나온 부분까지 상승하여 하나로 뭉쳐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불꽃같이 뜨겁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꽃같진 않았다.

오히려 시원한 얼음 덩어리 같기도 했다.

그 속성을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사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었다.

임청우는 농산에 살면서 수없이 많은 진기한 약초를 채집하고 또 복용해왔었다.

덕분에 임청우의 몸속에는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양의 영약 기운이 잠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임청우가 내공심법의 구결을 외자 단전에 잠복하고 있던 그 영약 기운은 구결을 따라 앞머리의 신정혈(神庭穴)로 올라가서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일반적인 내공심법은 공력을 단전(丹田)에 모은다.

그에 반해 임청우가 암송하고 있는 불심연화지는 단전이 아닌, 이마 위에 자리한 신정혈에 공력을 모으는 특이한 내공심법이었다.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외움에 따라서 임청우의 몸에서 신열은 사라지고 부어올랐던 팔의 부기도 점점 빠지기 시작했다.

한데 임청우가 도취된 듯이 불심연화지의 구결을 암송하고 있을 때였다.

 

“지독한 유가놈! 하지만 제 놈도 설마 우리가 이 대안탑에 숨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거야. 큿큿!”

임청우의 귓가로 갑자기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마...마면혈도란 자다!)

임청우는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들린 음성은 바로 비련곡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달아났던 마면혈도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임청우가 너무 놀라 숨조차 멈춘 직후 아래층에서 또 하나의 귀에 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말대가리! 또 검주 유소기를 과소평가하는군. 이곳을 찾지 못하길 바랄 수 있을 뿐, 찾지 못한다고 단정하고 있다간 그의 검에 목이 달아나게 될 걸?”

철선동시의 빈정거리는 듯한 목소리, 까마귀가 우는 듯한 역겨운 음성이었다.

(저 괴물들이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재수가 없구나. 마치 내가 가는 곳마다 일부러 쫓아오는 것같다.)

임청우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동료인 척포를 깨웠다.

임청우가 호리병을 살랑살랑 흔들자 척포가 금빛 뿔이 달린 머리를 내밀고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올려다보았다.

(쉿!)

임청우는 자기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때 다시 마면혈도의 음성이 들려왔다.

“흐흐흐... 하지만 우리가 몽선도의 비밀을 풀기만 하면 유소기 놈쯤이야 간단히 찢어죽일 수 있지!”

츠으!

마면혈도의 음성을 들은 척포의 눈이 붉은 빛을 쏘아냈다.

척포는 농산의 비련곡에서 마면혈도와 싸울 때 그자의 혈도에 맞아 상당수의 비늘이 상하는 타격을 입었었다.

그 원한이 뼛속에 사무쳐 있었던 모양이다.

쉬쉭!

척포는 혀를 날름거리며 호리병에서 빠져나오려고 했다.

(지금 나가면 안돼!)

임청우는 다급히 척포의 머리를 눌렀다.

끽!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척포의 머리가 호리병 속에 밀려들어가 버렸다.

(휴! 큰일 날 뻔했다. 만약 이 녀석이 뛰쳐나간다면 저는 몰라도 나는 말 그대로 죽은 목숨이지.)

임청우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척포는 임청우가 손바닥으로 막아버린 호리병 속에서 나오려고 기를 쓰기 시작했다.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주둥이로 쿡쿡 찍어대는 데 간지러워서 미칠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지만 웃을 수가 없다.

(이 바보 같은 놈이 나를 죽이려고 드는구나.)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된 채로 속으로 욕을 했다.

(만약에 들통이 나게 되면 네 녀석을 호리병 채 불속에 넣어서 구워버리겠다.)

막상 척포를 욕하고 나니 우습지만 그놈의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말귀신과 얼어 죽은 강시는 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건가?)

임청우는 대상을 바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욕하기 시작했다.

(전생에 나와 무슨 원수가 졌다고 농산에서 두 번이나 보고 수백 리나 떨어진 이 대안탑에서까지 만난단 말인가? 귀신은 저놈들 안 잡아가고 뭣하며 벼락은 눈이 멀기라도 했나?)

간지러움을 참기 위해 평소에는 결코 입 밖에 내지 않던 욕도 마음속으로 실컷 해댔다.

그러는 사이에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대안탑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했는지 마음 놓고 이야기하며 칠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임청우는 조바심이 나서 미칠 지경인데도 척포는 여전히 그의 손바닥을 간질이고 있었다.

(제발 그만해라 뱀 새끼야!)

임청우의 얼굴이 숫제 울상이 되었다.

 

“제길. 유소기 그 개같은 놈만 아니라면 우리가 이렇게 도망쳐 다닐 필요도 없는데...”

마면혈도는 칠층의 바닥을 밟으면서 소리쳤다.

철선동시가 속이 뒤집어질 것같은 역겨운 음성으로 말을 받았다.

“유소기보다도 더 무서운 자가 자네를 뒤쫓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그자에 비하면 유소기는 아무것도 아니지.”

마면혈도는 안색이 홱 변하며 급히 물었다.

“이봐, 철선동시! 마황이 나를 뒤쫓기 시작한 기미라도 있나?”

마면혈도의 어조는 전에 비해 훨씬 부드러웠다. 그동안 철선동시에게 한 수 죽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황은 멀리 있고 그는 가까이 있다고 할 수 있지.”

철선동시가 냉소하며 대답한다.

“그? 그라니 대체 누굴 말하는가?”

마면혈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철선동시는 입가로 묘한 비웃음을 지으며 말을 빙빙 돌렸다.

“하지만 자네가 이길 수 없는 상대는 아니니 패할 걱정은 할 필요 없네.”

“그럼 들을 필요도 없군. 그만하지.”

마면혈도는 석가여래의 무르팍에 걸터앉으면서 손을 저었다.

철선동시는 그런 그자를 경멸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갑자기 마면혈도가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휘익!

그자는 벼락같이 달려들어 철선동시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마면혈도에 비해 키가 작은 철선동시가 발까지 땅에서 떨어져 대롱대롱 흔들렸다.

“바른대로 말하지 않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유소기보다 더 무섭다는 자가 나를 이길 수 없다니... 그런 개같은 소리가 어디 있느냐?”

마면혈도는 고함을 치면서 철선동시의 멱살을 흔들었다.

휘익!

순간 철선동시의 발이 빙글 돌아가며 마면혈도의 턱과 겨드랑이 아래를 동시에 노렸다.

쩌엉!

경쾌한 바람소리와 함께 마면혈도는 철선동시를 집어던지고 혈도를 뽑아들었다.

철선동시의 멱살을 그대로 잡고 있었으면 턱이 부서졌거나 팔이 떨어졌을 것이다.

휘릭!

철선동시는 몇 바퀴 맴을 돈 후에 아미타여래의 어깨 위에 내려서면서 소리쳤다.

“말대가리!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네놈은 돌대가리야. 기껏해야 그 정도까지만 생각할 줄 아는 걸 보면...”

“개 수작마라! 당장 말하지 않으면 얼어 죽은 놈이 칼 맞아 죽은 놈으로 변할 것이다.”

마면혈도가 혈도를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번쩍!

혈광이 번득이는 순간 철선동시는 아미타여래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비로자나불의 머리위로 피했다.

쿵!

혈도에 베어진 아미타여래불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쩍!

마면혈도는 첫 번째 공격이 실패하자 허공에서 방향을 틀어 그대로 철선동시를 베어갔다.

실로 놀랍도록 빠른 수법이었다.

철선동시의 가슴 앞자락이 길게 베어졌다.

휘릭!

철선동시는 급히 비로자나불 뒤로 뛰어내려 숨었다.

“끼압!”

화가 꼭지 끝까지 치밀어 오른 마면혈도는 공력을 돋우어 괴성과 함께 비로자나불을 양단해버렸다.

쿠르르르!

비로자나불이 두 조각이 되어 좌우로 나누어졌다.

순간 철선동시가 좌측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이 미친 말대가리 놈아! 말은 끝까지 들어야 아는 것 아니냐? 네놈을 쫓는 사람이 우협 장백승이라 해도 내말이 틀렸다고 할 테냐?”

순간 마치 시간이 멎어 버리기라도 한 듯이 마면혈도가 우뚝 서버렸다.

그자의 몸이 석고처럼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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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해보니 만화 시나리오도 참 많이 썼군요.

현대물과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도 몇편 썼지만 무협극화 시나리오만 정리해봤습니다.

극화와 비교해서 보시면 제법 흥미로우실 것입니다.

 

<이재학>

 

철사자 (1993년)

천마성 (1994년)

전신 (1995년 01월)

무림악인전 (1995년 07월)

요마환술록 (1995년 10월)

 

<야설록>

 

남성북궁 (1995년 12월)

율궁협성 (1996년 04월)

제왕기행 (2001년 10월)

불사기행 (2001년 11월)

천마2세 (2002년 04월)

사대세가 (2002년 07월)

천하무적 (2002년 08월)

오수맹 (2003년 01월)

무림왕 (2004년 08월)

귀면왕 (2004년 10월)

구룡왕 (2004년 11월)

옥면염라 (2005년 04월)

호색군자 (2005년 07월)

사자왕 (2005년 12월)

도룡계 (2006년 04월)

다정사신 (2006년 08월)

전신강림 (2007년 01월)

협골독심 (2007년 05월)

실명대협 (2008년 04월)

천애독행 (2013년 10월)

제왕본색 (2014년 09월)

대도독행 (2015년 04월)

악군자전 (2015년 09월)

마협독행 (2016년 06월)

살수대협 (2016년 11월)

 

<황성>

 

마검천자 (1995년 04월)

십왕지존 (1996년 04월)

혼돈마조 (1996년 07월)

백치룡 (1997년 04월)

장한검 (1997년 07월)

마인 (1998년 05월)

역천행 (2002년 04월)

구마경 (2002년 10월)

아수라 (2003년 01월)

낭왕일대기 (2003년 04월)

백면무적 (2003년 09월)

도부 (2003년 11월)

지옥도 (2004년 03월)

냉혈대협 (2004년 07월)

달마2세 (2004년 11월)

백인천 (2005년 02월)

파죽지세 (2005년 03월)

태산북두 (2005년 11월)

생사탄 (2006년 05월)

남사여호 (2006년 08월)

무적의생 (2006년 10월)

천방지축 (2007년 03월)

일기당천 (2007년 07월)

사자불루 (2007년 11월)

질풍노도 (2008년 04월)

황금전장 (2008년 08월)

금포염왕 (2008년 10월)

요리지존 (2009년 01월)

혈로독행 (2009년 07월)

무림창세기 (2010년 02월)

오대무벌 (2010년 04월)

백마사원 (2010년 06월)

독행일지 (2010년 08월)

구중천 (2010년 11월)

고금제일인 (2011년 03월)

칠보하천하 (2011년 06월)

무명초인 (2011년 11월)

승풍파랑 (2012년 01월)

용맥백정 (2012년 06월)

마귀대협 (2012년 10월)

협기천추 (2013년 03월)

무제천추 (2013년 06월)

기인천추 (2013년 10월)

마면기정 (2014년 03월)

마왕유희 (2014년 07월)

건곤일척 (2015년 02월)

아랑힐월 (2015년 10월)

투천환일 (2016년 06월)

마고천장 (2017년 02월)

보보경천 (2017년 04월)

불멸무성 (2017년 05월)

퇴마신협 (2017년 07월)

마인총 (2017년 10월)

천지무쌍 (2017년 12월)

발검진천 (2018년 01월)

마왕강림 (2018년 03월)

신마유희 (2018년 05월)

자객일지 (2018년 07월)

무쌍일지 (2018년 10월)

신선부 (2018년 12월)

폭풍신마 (2019년 04월)

몽유강호 (2019년 07월)

견자전설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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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첫 번째 살인

 

 

 

“그럼 그렇지!”

“역시 대주님이시다.”

잠시 마음을 졸였던 철위사들은 안도하며 환호했다.

그자들이 보기에도 강유의 공격은 실로 맹렬했던 것이다.

반면 진상파의 얼굴은 점점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녀가 제왕성으로 끌려가지 않을 유일한 가능성은 강유가 사우와의 대결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전력으로 공격하는 것같은 데도 사우를 직경 다섯 자쯤의 원 안에서 밀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인생은 비참해질 운명인 것같구나.)

진상파가 체념하며 소리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크왓!”

강유가 벼락같이 기합을 토해내었다.

가가강! 슈학!

그와 함께 강유의 검이 파도치듯 너울거리는 수많은 그림자를 만들며 사우를 쓸어갔다. 붕정검법의 초식중에서도 가장 위력적이고 현란한 대붕전시(大鵬展翅)가 펼쳐진 것이다.

사우도 이번에는 표정을 굳히며 검을 휘둘러 순간적으로 열 번을 베고 다섯 번을 찔렀다.

카카캉! 빠카캉!

서로의 검이 섞이면서 요란한 금속성이 터지고 시퍼런 불꽃이 작렬했다.

강유가 일으킨 수많은 검의 그림자는 베어지거나 튕겨졌다.

콰드득!

하지만 사우 역시 상당한 압박을 받은 듯 두 발이 뒤로 밀려서 하마터면 원 밖으로 나갈 뻔했다.

“방금 것이 제십 초! 이제 네놈이 살 수 있는 기회는 사라졌다.”

부악!

밀려나던 몸을 멈춘 사우가 폭발적인 기세로 강유에게 쇄도하며 비스듬히 검을 내리쳤다.

강유가 방금 전에 펼쳤던 대붕전시가 사우가 양보한 십초의 공격중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쩍!

강유를 향해 비스듬히 내려치는 사우의 검 끝에서 시퍼런 검기가 내뻗힌다,

헌데 그 검기의 형태가 특이했다. 직선으로 내리쳐지던 검기의 끝 부분이 돌연 홱 꺾이며 강유를 베어온 것이다.

(위험...)

흡사 낫을 연상케 하는 사우의 검기가 날아들자 강유는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스팟!

강유는 사력을 다해 뒤로 몸을 날리며 검을 휘둘러 방어하려고 했다.

캉! 쩌억!

하지만 사우의 검기는 강유의 검에 막히는 순간 다시 홱 방향을 틀며 목으로 파고들었다.

낫의 형태를 한 검기가 거듭 궤적을 바꾸니 도저히 피할 방법이 없다.

“!”

패액!

거의 동시에 강유는 어떤 영감을 느끼고 몸을 홱 틀었다.

서걱!

강유의 목을 노리고 날아든 사우의 검기 끝이 강유의 목 대신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푸학!

강유는 불에 덴 듯 화끈한 감각과 함께 가슴에서 피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목이 잘리는 것은 면했지만 가슴에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악!”

보고 있던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달마독명안 덕분에 살았다!)

휘릭!

강유는 단번에 삼장 밖으로 물러나며 몸서리를 쳤다.

사우의 이번 공격에 목이 날아가지 않은 것은 수박 겉핥기로 깨우친 달마독명안 덕분이었다.

위기의 순간 달마독명안의 예지력(豫知力)이 발동하여 가장 가벼운 피해를 입는 쪽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꼴좋다 강가야!”

“제왕성에 맞선 것을 후회하며 죽어라.”

철위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

반면 비명을 질렀던 진상파는 두 손을 뼈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 있었다.

끼이...

사람들과 함께 관전하고 있던 섬전초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다시 자기 꼬리 다듬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영물인 그놈이 보기에도 강유와 사우의 대결은 결말이 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놈! 운이 좋았구나! 하지만 그 운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두고보자.”

사우는 강유에게 흐르듯 다가서며 검을 휘두르고 그었다.

쩌억! 부악!

그때마다 사우의 검에서 끝이 낫처럼 휘어진 검기가 내뻗혀 강유를 베어왔다.

캉! 카캉!

강유는 소요보법을 극한까지 펼치면서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았다.

푸학! 서걱!

치명상은 어찌어찌 피하지만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긴다. 어설픈 달마독명안으로는 사우의 변화막측한 검법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삽시에 강유의 몸은 피로 물들었다.

사우의 검기에 베어져 생기는 상처에서 피를 뿜어대는 강유의 모습은 끔찍한 것이었다.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포기하고 목을 늘어트려라.”

스악! 쩍!

사우는 냉혹하게 웃으면서 검을 휘둘러 강유를 몰아붙였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다.)

겨우 겨우 사우의 공격을 막고 피하면서 강유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아직 치명상은 입지 않았지만 출혈이 과다하다는 게 문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인지 급격히 정신이 혼미해지고 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사우의 검에 인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이른 바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인 건가?)

공포와 절망이 강유의 온몸을 휘감았다.

헌데 절체절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강유의 뇌리에 섬전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고 마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써선 안된다.>

 

바로 안탕산을 떠날 때 아버지 강조가 자신에게 필살일초라는 검법을 전수하며 하던 장면이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버지가 구명(救命)의 절초(絶招)로 가르쳐주신 그 검법을 사용할 때가...!)

부악! 휘익!

강유는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러 사우의 공격을 막은 후 훌쩍 물러섰다.

이번에도 사우의 검기를 완전히 막지 못해서 왼쪽 뺨에 반 뼘 가량의 상처가 생겼다.

하마터면 얼굴에 치명상을 입을 뻔 했지만 그 대가로 강유는 사우의 추격을 뿌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슬슬 네 운명이 어찌 될지 실감이 가겠지?”

사우는 얼굴까지 피로 물들인 채 비틀거리는 강유를 보면서 음산하게 웃었다.

“저는 상관하지 말고 떠나세요.”

보다 못한 진상파가 외쳤다. 무공 방면에는 그리 정통하지 않은 그녀가 보기에도 이 승부의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퇴로를 차단하자!”

“네놈은 살아서 여길 떠나진 못한다!”

스슥! 슥!

진상파의 안타까운 마음을 비웃듯 철위사들은 강유의 뒤쪽으로 이동하며 퇴로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어진 강유의 행동은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달아나거나 피하려는 시도 대신 오히려 사우에게 검을 겨누며 다가간 것이다.

“...”

그걸 본 사우의 이마가 찡그려졌다.

“저 애송이놈이...”

“달아나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투지 하나는 감탄스러운 놈이로군.”

철위사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생각인 걸까?)

이해할 수 없는 강유의 행동에 진상파의 미간도 모아졌다.

징!

그때 사우를 향해 내밀어진 강유의 검이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최후의 발악인 것이냐?”

사우는 자신에게 다가서는 강유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럼 네놈이 어떤 한 수를 숨기고 있는지 견식해 보도록 하자.”

비록 웃고 있긴 하지만 사우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착 갈아 앉은 강유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불길함이 느껴진 때문이다.

사우는 본능적으로 방어자세를 취했다.

“크아!”

그 직후 사나운 기합과 함께 강유가 벼락같이 검을 내뻗었다.

쩌엉!

사우를 향해 내뻗치는 강유의 검 검신(劍身)이 나선형으로 홱 꼬인다.

(이 검법은 설마...)

소스라치게 놀란 사우는 전력을 기울여 검을 휘둘렀다.

쩌억! 가앙!

사우의 검에서 몇 가닥의 검기가 확 내뻗혀 강유를 찍어갔다.

한 가닥도 아니고 여러 가닥의 검기가 날아드니 강유가 피할 가능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흑!”

그걸 알아차린 진상파는 심장이 멎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직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현상이 벌어졌다.

투쾅! 텅!

나선형으로 꼬이면서 내질러지는 강유의 검 주변으로 보이지 않는 잠경(潛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 사우의 검기들을 간단히 튕겨버린 것이다.

사우 자신의 공격은 허무하게 무산되고 강유의 검은 벼락같이 가슴으로 날아든다.

사우는 반사적으로 검을 가슴 앞에 세워서 강유의 검을 막으려 했다.

쩍!

검신이 나선형으로 뒤틀린 강유의 검극(劍極), 즉 검의 끝 부분이 사우의 검날과 접촉했다.

빠캉!

다음 순간 사우의 검은 그대로 유리처럼 깨져 흩어졌다.

“헉!”

명검이라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자신의 검이 허무하게 깨지자 사우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늦었다.

사우의 검을 간단히 깨트리고 다가선 강유의 검 검극은 이미 사우의 가슴에 닿아있었다.

화악!

뒤틀리는 강유의 검에서 폭발적으로 뿜어지는 파괴력이 사우의 가슴으로 흘러들어갔다.

그 결과는 실로 끔찍한 것이었다.

펑!

폭발과 함께 사우의 가슴과 등으로 이어지는 구멍이 났다.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구멍이 몸통의 앞뒤로 매끈하게 나버린 것이다.

푸학!

사우의 등쪽으로 난 구멍을 통해서 잘게 다져진 살과 뼈와 장기들이 확 터져 나갔다.

“...!”

“...!”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놀라 숨이 멎었고 꼬리를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온몸을 덮고 있는 황금색 털을 고추 세우며 굳어졌다.

너무도 충격적인 결말이 그들의 눈앞에서 펼쳐진 것이다.

“컥!”

털썩!

강유는 피를 왈칵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가슴에 구멍이 난 사우는 비틀거리며 서있는데 정작 사우에게 치명상을 입힌 강유가 먼저 주저앉은 것이다.

(경... 경맥이 뒤틀려서 끊어지려 한다.)

강유는 상상도 못했던 끔찍한 통증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거인의 손이 몸 전체를 움켜잡고 젖은 수건에서 물을 짜듯 비틀어대는 기분이다.

필살일초는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끌어올리는 운기법을 포함하고 있다.

내공의 근원으로부터 비틀리며 발휘되는 힘이기에 부딪히는 건 무엇이든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신 구사하는 쪽도 경맥이 뒤틀려서 심각한 후유증을 겪게 된다.

자칫 일신의 경맥이 모두 터지거나 끊어져서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는 게 필살일초였다.

“끄륵! 네놈... 네놈이 어떻게 마교의 마검칠식(魔劍七式)을...”

주저앉은 강유를 노려보는 사우의 입과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마교의 마검칠식?)

강유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끄윽... 무후님을 시해한 게 네놈 아비...”

비틀거리던 사우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퍼억!

하늘을 보는 자세로 나뒹군 사우의 몸은 두 번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절명한 것이다.

“대... 대주님!”

“안돼!”

너무도 충격적인 결과에 넋이 나가 있던 철위사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죽일 놈!”

“감히 대주님을 시해하다니...”

“다 함께 공격해서 죽이자!”

철위사들은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강유를 공격하려 했다.

“잘 생각하시오.”

슥!

강유는 입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왼쪽 소매로 닦으며 일어났다.

사우에게 당한 상처도 상처지만 온몸의 경맥이 뒤틀려있는 상태에서 움직이자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하지만 강유는 내색하지 않고 검으로 앞쪽의 철위사들을 겨누었다.

“당신네 대주도 간단히 죽인 내 공격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면 덤벼도 좋소.”

쿠오오오

강유의 온몸에서 흘러넘치는 음산한 살기는 철위사들의 피를 싸늘하게 식혀버렸다.

자신들이 하늘같이 여기던 대주조차 간단히 죽인 상대다.

철위사들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사우를 향해 돌아갔다.

가슴에 사발만한 구멍이 난 채 죽어있는 사우의 시신은 철위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다.

“으으...”

“으으...”

철위사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더 이상 강유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됐다!)

자신의 협박이 통한 것을 확인한 강유는 내심 안도했다.

지금의 강유는 내, 외상이 심각해서 몸도 제대로 가누기 어려운 상태였다. 만일 철위사들이 일제히 덤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진소저! 그만 갑시다.”

강유는 검으로 무사들을 겨누며 진상파에게 말했다.

“그러지요.”

퍼뜩 정신을 차린 진상파는 도도한 자태로 걸음을 옮겨 공터 밖으로 향했다.

강유는 철위사들을 감시하며 진상파를 따라갔다.

다행히 철위사들은 제 자리에 얼어붙은 채 공격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끼이...

다만 섬전초는 눈을 번뜩이며 진상파와 강유를 따라오려고 했다.

“네놈도 잘 생각해라.”

강유는 걸음을 멈추며 섬전초를 노려보았다.

“다음에 또 만나게 된다면 산 채로 가죽을 홀라당 벗겨버릴 것이다.”

끼이!

강유의 서늘한 눈빛을 접한 섬전초는 등을 활처럼 구부리며 온몸의 털을 곤두세웠다. 수백 년을 산 영물답게 강유의 말이 결코 헛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때문이다.

(영특한 놈이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는 기색이다.)

겁에 질린 섬전초를 돌아보며 강유는 진상파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공터를 떠나는 강유의 발걸음은 그러나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사우와의 악전고투로 가볍지 않은 내상과 외상을 입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강유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짜 원인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이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한 인간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강유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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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그릇 깎는 미녀

 

 

사자검은 보면 볼수록 백남빈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백남빈은 사자검을 어깨에 메고 이리저리 어린아이처럼 왔다갔다하며 좋아했다.

조금 가다가 휙 뽑아서 흔들어 본 후 집어넣고, 그러다가 다시 한 번 뽑아서 재주를 넘으며 찌르고 하여 강미루로 하여금 입을 가리고 웃게 만들었다.

나이답지 않게 진지하여 어른들도 어려워하던 철령보의 소보주는 이미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에는 애들 장난같던 백남빈의 검무(劍舞)는 점점 격식을 갖추면서 정교해져 갔다.

양부 이탁에게서 배운 삼재검법이 누에가 실을 뽑듯이 펼쳐졌다.

지금까지 수천 번, 수만 번 펼쳐봤던 삼재검법이라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웅! 웅!

녹지의 물을 마신 후 배 이상 증진된 내공으로 인해 백남빈이 휘두르는 사자검은 웅혼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돌아가고 있었다.

쿠오오! 파파팟!

사자검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자 그 궤적을 따라 강한 바람이 일어나 주변의 작은 돌들과 흙을 휘감아 튕겨 내었다.

자신의 내공이 이 정도로 증진되어있을 줄은 백남빈도 미처 예상치 못했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늘어나 펄펄 날 것만 같아서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이내 자신이 아는 유일한 검법인 삼재검법만으로는 몸속에서 들끓고 있는 힘을 도저히 다 뿜어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갑함을 느낀 백남빈은 격식에서 벗어나서 마음 내키는 대로 사자검을 움직였다.

쿠쿠쿠! 쩌저적!

강맹한 바람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연달아 번쩍이는 검광(劍光)에 가려 백남빈의 모습은 강미루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뭔...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어!)

강미루는 돌풍과 검광에 가려진 백남빈 쪽을 보며 숨도 제대로 크게 쉬지 못했다.

강미루의 놀란 심정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은 자신의 몸속에서 폭발을 기다리는 용암처럼 들끓는 힘을 분출할 수 있는 검로(劍路)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위... 위험해!)

백남빈의 몸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오는 검광과 검풍(劍風)을 보며 위기감을 느낀 강미루는 뒤로 멀찍이 물러섰다.

십장 이상 물러섰음에도 강맹한 바람은 그녀의 몸을 단숨에 하늘 밖으로 날려 버릴 듯 했고 작렬하는 검광은 그녀를 당장이라도 갈가리 난도질해버릴 것만 같았다.

"으야압!"

그러던 어느 순간 백남빈은 천둥치는 듯한 폭갈을 터뜨리며 온 힘을 다해 사자검을 휘둘렀다.

크와앙!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사자검에서 한 무더기의 기운이 쏘아져 나가 녹지의 표면을 강타했다.

퍼엉!

수십 장 넓이의 녹지가 둘로 쩍 갈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백남빈은 바닥에 팍 엎어졌다. 몸속에서 들끓던 강대한 기운이 일거에 밖으로 쏟아져 나가 기진맥진해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경악하면서"검기(劍氣)"하고 외치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몸에 기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답답하게 꽉 막혀있던 가슴이 확 트인 듯하여 시원하고도 통쾌해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한 가닥 뜨거운 기운이 단전에서 불쑥 치솟아 전중혈(田中穴)을 지나 검으로 빠져나갔었다.

그 기운이 어떻게 움직였고 어떻게 해서 수십 장 넓이의 녹지를 순간적으로 갈라버렸는지 백남빈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탈진해서 몸은 나른하지만 반대로 마음은 아주 후련해져서 눈도 뜨기 싫었다.

“공자님!”

강미루가 뛰어와 그의 머리를 안아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놓으며 놀란 가슴을 달랬다.

"무서워 혼났어요. 하지만 정말 축하해요."

백남빈은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가 일으켰던 거센 돌개바람은 아직도 작은 회오리들을 만들며 완전히 사그라 들지 않고 있었다.

잠시 아늑한 기분을 만끽하던 백남빈이 눈을 감은 채 잠결처럼 물었다.

"미루, 내가 대체 뭘 한 거요?"

"미친 듯이 검무를 추었잖아요. 가까이 있었더라면 나도 살아있지 못했을 거예요."

강미루는 자신이 본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춤을 추기 시작하자 힘이 마구 들끓었었소. 주체할 수가 없어서 미칠 것같았는데 갑자기 속이 후련해지더군."

백남빈도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강미루에게 말해주었다.

"당신은 이제 검으로 검기를 발출하게 된 거예요. 우리 형부도 검기를 발출할 수 있는데 멀리서 검을 휘둘러 바위를 깨뜨리고 나무를 베어 버리더라구요."

강미루가 자랑스러운 듯이 말했다.

"전에 형부와 언니가 뭘 하는지 보기 위해 형부 집에 숨어들어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형부가 검을 들고 있다가 저를 보지도 않고 갑자기 휘둘렀어요. 그런데 그 바람에 오장이나 떨어져 있던 내 머리에 쓴 모자가 잘려버리지 않았겠어요? 나도 깜짝 놀랐지만 형부도 어쩔 줄을 몰라 쩔쩔 맸다고요"

백남빈이 흥미를 느끼고 물었다.

"무림에 고수는 많지만 검기를 마음대로 발출해 낼 수 있는 고수는 드물다고 들었는데 그대의 자랑스러운 형부는 검신(劍神)의 경지에 다다른 사람인 모양이오."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가 핏 소리를 내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도 검기를 발출하게 됐으면서... 자화자찬(自畵自讚)하지 마셔요."

백남빈이 빙그레 웃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그후로 형부에게 그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매번 졸랐지만 나는 내공이 부족해서 배울 수 없다면서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그 대신 궁술과 창법을 가르쳐 주더군요."

"그렇다면 당신도 활과 창으로는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겠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당신이 어떻게 내손에서 살아날 수 있었겠어요? 단지 내 궁술과 창법이 치밀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상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인데 그나마도 이젠 더 이상 늘지 않아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볼을 집게손가락으로 살짝 누르며 하는 말이었다.

백남빈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나는 아직 내공수련과 검기(劍技)가 부족한데 어째서 검기를 발출할 수 있었을까? 혹시 사자검이 부린 조화가 아닐까?"

강미루가 그럴 리 없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지 당신이 쓰러질 때를 맞추어서 그렇게 될 리가 있겠어요? 당신이 어떤 기연을 얻은 모양이에요."

그녀는 말과 함께 손가락을 놀려 백남빈의 여기저기에 글로 적으며 의사표시를 해왔다.

다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그럼 다시 한 번 더 해봐야겠어!"

백남빈은 옆에 떨구었던 사자검을 집어 들며 일어나려 했다.

강미루가 그런 그의 이마를 눌러 다시 눕히며 말했다.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하셔요."

그녀는 물그릇(물론 백남빈의 가죽신이지만)을 가져와 백남빈에게 주었다.

미지근한 우유빛 물이 마치 유액(乳液) 같았다.

백남빈은 그 물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키고는 소매도 없는 팔로 쓱 닦았다.

폐부를 상쾌하게 해주는 신비의 물. 그것은 하늘 아래에서는 오직 이곳에만 있는 신령스러운 영약이지마나 두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고 마시고 또 마셨다.

만일 다른 식수가 있었다면 마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몸속이 다시 힘으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백남빈은 강미루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스악!

정신을 검 끝에 모으고 기합과 함께 강하게 떨쳐내었다.

과연 기합소리와 동시에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그의 검 끝을 지나서 칙! 하는 소리를 내며 뻗어나갔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힘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연이어 몇 번을 휘두르자 검기는 실날같이 가늘게 뽑혀 나오며 그의 몸주위에 그물처럼 막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강미루가 돌멩이를 주워 백남빈에게 던지자 돌은 검기에 부딪혀 소리도 없이 바스라져 버렸다.

진정 놀라운 경지였다.

그것은 백남빈에게 검술을 가르친 독안룡 이탁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였다.

 

***

 

백남빈은 새로운 검식을 만들기에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가 익힌 삼재검법은 검기를 펼치기에는 부적당한 것이기에 검과 검력에 알맞은 검식(劍式)을 고안해야만 했다.

가전의 무공을 익히기 위해 다른 무공을 수련하는 것은 삼가야한다는 양부 이탁의 말은 이미 까맣게 잊은 후였다.

녹지에 다시 들어가 혹시 검식을 적은 검보(劍譜)가 있지 않나 찾아 봤다.

하지만 녹지의 바닥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

 

백남빈은 보름달이 떠올라 창평곡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검식을 연구하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미루가 쪼그리고 앉아 달빛에 단검을 반짝이며 나루를 깎아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저녁 때 깎을 생각이었으나 백남빈이 검무를 추는 걸 보느라 정신이 팔려서 미루었다가 이제야 깎는 것이다.

백남빈은 생각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단검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일에 열중하여 전혀 백남빈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강미루가 그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순간 강미루는 백남빈의 눈길이 닿은 곳이 자신의 단검임을 깨닫고 죄라도 진 듯이 황급히 손바닥 안에 단검을 감추었다.

그 단검으로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러 하마터면 죽게 만들 뻔한 기억 때문이다.

힐끗 보니 백남빈은 여전히 단검을 보고 있다.

핑!

강미루는 입술을 꼭 깨물며 녹지쪽으로 단검을 던져 버렸다.

퐁당! 하는 소리가 나며 단검은 녹지에 잠겨버렸다.

"아!"

그제야 백남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강미루가 깎는 둥근 나무그릇을 보면서 영감이 떠올라 깊은 생각에 잠겼던 것이다.

강미루가 깎는 나무 그릇은 원래 나무토막에 불과 했으나 그녀가 빙글빙글 돌리며 깎아나가자 점차 모양을 갖춰 동그란 나무그릇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검식도 저러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백남빈의 머리에 스치고 지나갔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잡히지 않아서 곰곰이 생각하고 있다가 단검이 물속에 빠지는 퐁당 소리에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쉬릭! 쉭!

백남빈은 사자검을 들어 찌르는 것도 아니고 베는 것도 아닌,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선(螺旋)형으로 원을 그리면서 찌르는 것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그다지 특별해 보이지 않았으나 수십 차례 반복하자 뱀처럼 영활하게 검이 살아있는 듯이 뻗어 나갔다.

검이 뻗어나갈 때마다 검기로 형성되는 여러 개의 작은 원과 원이 서로 엉기면서 파도처럼 밀려가는데 정작 검에서는 바람소리 하나 일지 않았다.

오로지 한 초식뿐인 검법이지만 백남빈은 스스로 검법을 만든 것이다.

백남빈은 내심 기뻐하면서 강미루를 향해 씩 웃었다. 성취한 자의 여유가 엿보이는 웃음이었다.

"당신, 내 단검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군요?"

강미루가 백남빈의 성취에 기쁨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을 쓰다듬어 내리고 있었다. 그만큼 가슴 졸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단검을 보고 있자 불현듯 그의 허벅지를 찌른 것이 생각이 났었다.

비록 백남빈이 탓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애정을 품고 있는 지금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강미루였다.

그래서 백남빈의 돌연한 태도에 비록 정이 든 단검이지만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백남빈이 검초를 깨닫게 되었으니 하늘의 조화는 오묘하기 짝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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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장

 

                마녀(魔女)의 연심

 

 

당혜선의 한 맺힌 얘기가 드디어 끝을 맺었다.

"...!"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난 고검추의 얼굴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진 두 주먹은 너무 세게 움켜쥐어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였다.

(나의... 나의 아버지가 용서받지 못할 패륜아였다니...)

고검추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사모를 겁탈한 패륜아가 아버지인 것이다.

무슨 낯으로 세상 사람들을 본단 말인가?

주르르...

질끈 감은 고검추의 두 눈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추야...)

당혜선은 그런 고검추의 모습을 연민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검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낳은 정보다는 기른 정이라고 했다.

누가 뭐라 해도 고검추는 당혜선 자신의 아들인 것이다.

자신의 아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에 태연할 수 있는 어머니가 어찌 있을 수 있겠는가?

“괴로워 할 것 없다 추아야. 사형은 결코 그런 짓을 할 분이 아니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온화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 네 아버지는 어떤 사악한 자의 음모에 희생되신 것이란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흠칫하며 두 눈을 번쩍 빛냈다.

"그... 그 사악한 자가 누구입니까?"

"그 자는..."

당혜선의 눈 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또 다시 심각한 갈등을 겪는 듯했다.

그같은 태도로 미루어 보아 당혜선은 음모자가 누구인지 아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말하지 못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형도...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인간이 음모자임을 아셨기 때문에 구차한 변명도 하지 않고 자결하셨을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음모자가 누군지 말해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 제발... 소자에게 가르쳐 주십시오. 아버지를 음해한 자가 누구인지를..."

고검추는 간절하게 애원했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미를 용서하거라. 차마... 내 입으로 말할 수가 없구나."

그녀는 처연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녀곡을 떠날 때 네게 준 나무상자는 네 생모 대려군 언니가 남긴 것이니 소중하게 간직하도록 해라."

말을 마친 당혜선은 천천히 일어났다.

고검추는 당혜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

몸을 일으킨 당혜선은 물기 가득한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았다.

(사형을 위해 고이 지켜온 정조를 유린당한 마당에... 더 살아 있을 이유가 없다.)

그녀의 창백한 뺨으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몸에 남아있는 사신각주의 흔적이 얼마 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실감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당혜선을 비참하게 만든 것은 사신각주에게 고문당하며 보인 자신의 반응이었다.

그 장면을 양아들인 고검추에게 보였다는 사실이 당혜선을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사형... 이제 소매가 사형을 만나러 갈 테니 기다려주세요.)

당혜선의 입가로 한 줄기 처연한 미소가 떠올랐다.

"추아야. 절대... 무슨 일을 겪어도 좌절해서는 안된다."

화락!

그 말을 남기고 당혜선은 돌연 청룡탄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고검추는 순간적으로 현실감각을 상실했다.

(어머니가 왜 절벽에서 뛰어내리신 것일까?)

고검추는 멍한 표정으로 당혜선이 뛰어내린 절벽만 바라보았다.

"어... 어머니...!"

그러다가 뒤늦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은 고검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청룡탄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어디에서도 당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콰아아!

그저 오십 장이 넘는 까마득히 높은 절벽 아래로 청룡탄의 격랑이 허연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으아아아!"

고검추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단애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머니! 안됩니다 어머니!”

고검추는 절벽을 내려다보며 목 놓아 울부짖었다.

생각 같아서는 자신도 당혜선을 따라 투신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자신에게 살아있을 자격은 없다.

하지만 고검추는 끝내 청룡탄으로 뛰어내리지는 못했다.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복수... 복수해야만 한다!)

이를 바득바득 가는 고검추의 눈에 핏발이 서렸다.

(아버지를 위해한 자...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신각주... 네놈들을 내 손으로 쳐죽이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니다.)

고검추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하며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쥐었다.

어머니를 따라 죽을 수 없는 것은 복수 때문이다.

자신마저 죽어버린다면 누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해 복수를 해주겠는가?

결의를 다지는 고검추의 뇌리로 문득 스쳐가는 여인의 음성이 있었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음성의 주인은 그윽한 눈매에 새하얀 은발을 지닌 여인이었다.

(은발마희!)

고검추의 눈이 새파랗게 번득였다.

(어머니 말씀대로 그분이 그렇게 무서운 분이라면... 나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이다.)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고검추의 눈에 바닥에 뒹굴고 있는 핏빛 화살이 들어왔다.

초혼전!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하복부에 꽂았던 바로 그것이었다.

고검추는 초혼전을 천 조각으로 감싸서 집어들었다. 초혼전에 묻어있다는 백일취가 피부에 닿으면 안된다.

(언제고... 이것으로 네놈의 심장을 쑤셔 주겠다.)

초혼전을 노려보며 맹세한 고검추는 몸을 돌려 어두워지는 남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자신을 지켜보는 외눈의 어떤 인물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

 

밤이 되었다.

하지만 하늘에는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어 그리 어둡지는 않다.

팽가촌 남서쪽 삼십여 리 쯤에는 은밀한 협곡이 하나 있다.

무성한 잡초로 뒤덮인 협곡의 끝은 십여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 있다. 거의 수직으로 깎아지른 그 석벽의 대부분은 수많은 등나무 넝쿨로 뒤덮여 있다.

"허억! 헉!"

탁! 타탁!

숨이 턱에 찬 채 그 협곡으로 달려 들어오는 소년이 있었다.

달빛을 받으며 나타난 소년은 고검추였다.

“허억 헉!”

고검추는 협곡 막다른 곳에 서있는 석벽 앞에 멈춰서며 가쁜 숨을 추스렸다.

서걱...

얼추 숨을 고른 고검추는 떨리는 손으로 석벽을 뒤덮고 있는 등나무 줄기들을 젖혔다.

무성한 등나무 줄기들이 헤쳐지자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허리를 숙이고야 들어갈 수 있는 좁은 동굴이다.

하지만 동굴은 안으로 들어 갈수록 점점 넓어져 이윽고 어른 남자가 서서 들어갈 정도의 넓이가 된다.

그러다 문득 동굴이 끝이 났다.

동굴의 막다른 곳에는 한 칸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석실 바닥에는 보드라운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석실 구석에는 몇 가지의 가재도구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고검추는 이 동굴을 우연히 발견하여 자신만의 비밀 장소로 꾸면 놓은 것이다.

(헉!)

헌데 막 석실로 들어서던 고검추는 깜짝 놀랐다.

석실 한쪽에 놓인 탁자 위에서는 황촉불이 흐릿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 촛불도 고검추가 준비해 놓은 것이었다.

"...!"

헌데 마른 풀이 깔린 석실 바닥에는 한 명의 여인이 자는 듯 반듯이 누워 있었다.

마천루의 루주라는 은발마희 옥여상이었다.

그녀는 길고 하얀 머리카락을 석실 바닥 가득히 흩어놓은 채 자는 듯 누워 있었다.

고검추가 놀란 것은 자신이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이 미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아주머니!"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 옥여상이 죽은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고검추는 급히 옥여상 옆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옥여상에게서는 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설... 설마 내상이 도저서 타계하신 것일까.)

고검추는 떨리는 눈으로 옥여상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와는 단 한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런 그녀가 타인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고검추는 놀란 가슴을 누르며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가져갔다. 그녀의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동굴로 들어오기 전에 목욕을 했는지 옥여상의 검은 옷과 새하얀 살결을 물들이고 있던 피는 깨끗이 씻겨있다.

덕분에 역겨운 피 냄새 대신 향긋한 살 내음이 느껴진다.

그와 함께 고검추의 귓가로 뭉클한 육봉의 감촉이 느껴졌다.

헌데 고검추가 옥여상의 가슴에 귀를 댄 직후였다.

"호호호!"

옥여상은 까르르 웃으며 와락 고검추를 끌어안았다.

"읍!"

그 바람에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의 육중한 젖가슴 사이에 파묻혀 버렸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옥여상의 다리도 영사처럼 고검추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몸 아래 느껴지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하고 보드라운 감촉이 소년의 피를 단번에 비등시켰다.

"노... 놓아 주십시오!"

당황한 고검추는 몸부림치며 옥여상의 젖가슴에서 억지로 고개를 들었다.

"호호호! 내가 죽은 줄 알고 겁이 난 모양이구나 겁쟁이 도련님!"

옥여상은 교소를 터뜨리며 고검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팔 다리는 여전히 고검추를 휘감고 있었다. 비록 부드럽지만 엄청난 힘이 깃들어있는 옥여상의 팔 다리를 고검추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장난이 지나치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놀란 줄 아십니까?"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옥여상의 몸에 올라탄 자세인 채로 퉁명하게 말했다.

"...!"

고검추의 말을 들은 옥여상의 봉목에 은은한 떨림이 일었다.

 

옥여상은 지금까지 냉혹하고 비정한 환경 속에서 살아왔다.

철이 든 이래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일찍이 부모를 여윈 옥여상을 거둬준 스승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식이 없었던 스승은 후계자를 만들기 위해 옥여상 외에도 여러 명의 소년과 소녀들을 제자로 받아들였었다. 옥여상같은 고아는 물론이고 자질이 뛰어난 아이는 납치해서라도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제자들끼리 경쟁을 시켰다. 수십 명의 제자들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것이라 공언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스승이 평생을 걸쳐 세운 거대한 세력의 주인이 되기 위해 소년과 소녀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다.

소년과 소녀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악귀 나찰이 되어 서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그들 중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옥여상이었다. 발군의 자질 뿐 아니라 냉철한 이성까지 갖춘 덕분이었다.

약속한 대로 스승은 옥여상을 후계자로 삼아 자신이 이룬 기업, 마천루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마천루의 루주가 되었다고 옥여상의 고단했던 삶이 편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시련과 고난은 마천루의 루주가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마도 무림의 맹주라는 이름답게 마천루에 속한 인간들은 하나같이 거칠고 포악했다.

어린 여자의 몸으로 그런 자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는 것은 실로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여상은 해내었다.

일 처리에 있어서 냉혹하고 가차 없으면서도 신상필벌을 확실히 하여 마천루 소속 마인들의 마음을 장악한 것이다. 비록 그 과정에서 극심한 심력의 소모로 머리가 백발이 되었지만...

여자의 몸으로 전 마도 무림을 호령하는 여종사가 된 것은 옥여상이 처음이었다.

마도 무림뿐 아니라 강호에 몸을 담고 있는 모든 인간들이 옥여상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그녀는 치명적인 중상을 입고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검추라는 이 어린 소년을 만나 처음으로 따뜻한 인간의 정을 느낀 것이다.

 

"정말... 나 때문에 놀랐느냐?"

옥여상은 확인하려는 듯 물으며 물기 어린 시선으로 고검추를 올려다보았다.

"물론입니다. 다시는 저를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고검추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옥여상의 눈 꼬리가 다시 미미하게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그녀의 망막이 뜨거운 물기로 덮였다.

"아아... 착한 것!"

옥여상은 치미는 감격을 참지 못하고 고검추의 머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헉!)

고검추는 다시 옥여상의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이 파묻히며 아찔한 현기증을 느꼈다.

얼굴에 짓눌려지는 부드러운 육질과 콧속으로 밀려드는 관능적인 살 냄새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 안돼!)

고검추는 추태를 들키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옥여상에게서 떨어지려고 했다.

하지만 옥여상의 두 다리가 연체동물처럼 휘감고 있어서 옴쭉도 할 수 없었다.

(어려 보여도 충분히 사내 노릇을 할 수 있겠구나.)

아랫배에 느껴지는 어떤 용틀임에 옥여상의 옥용에는 노을 같은 홍조가 일었다.

(그렇다면 내가 주려는 선물을 무리없이 받을 수 있겠지.)

고검추의 상태를 확인한 옥여상은 어떤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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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독수리를 타고

 

 

이검한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그것은 오리 알만한 구슬이었다. 전체가 타는 듯 붉은 그 구슬에서는 은은한 주황빛 화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내단(內丹)이다!”

이검한은 자기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그 붉은 구슬은 다름 아닌 적린화룡의 내단이었던 것이다.

적린화룡은 수천 년의 세월 동안 깊은 땅 속을 흐르는 용암의 기운을 흡수해 왔다.

그 용암의 화기가 응결된 것이 바로 내단이었다.

 

-화룡단정(火龍丹精)!

 

내단의 이름인데 만일 사내가 복용하면 십처백첩(十妻百妾)을 어렵지 않게 거느릴 수 있는 절륜무쌍의 양정(陽精)을 지니게 된다.

만일 무공을 연마한 자가 복용하면 몇 갑자의 내공과 함께 강력한 화염강살(火焰罡煞)을 얻을 수 있다.

“내단이라는 것이 정말 있었구나.”

이검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적린화룡의 시체에서 화룡단정을 집어 들었다.

구우우! 화아악!

그 사이에 철익신응이 허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퍼덕이며 이검한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그놈은 앉은키만 해도 무려 이장(二丈;6미터) 이상이나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 내리자 이검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이것은 네 것이었지...!”

이검한은 들고 있던 화룡단정을 철익신응에게 내밀었다. 어쨌든 적린화룡을 죽인 것은 철익신응이니 화룡단정도 철익신응의 소유인 것이다.

꾸루룩!

하지만 철익신응은 낮게 울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걸 내게 양보하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반응에 이검한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구우우!

철익신응은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울음소리를 토했다.

“고맙다 신응!”

철익신응의 그같은 모습에 이검한은 표정이 활짝 펴졌다.

(잘 되었다. 근래 할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듯하신데 이 화룡단정을 드시면 다시 정정해지실 것이다!)

그는 화룡단정을 고독마야에게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사실 고독마야는 중환을 앓고 있는 상태였다.

십사 년 전, 그는 자칫 방심하다가 독천존 서래음이 살포한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무형지독에 중독당한 이상 반나절 내에 온몸이 녹아 죽고 만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달랐다. 그는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덕분에 무형지독에 중독되고도 무사할 수 있었다.

고독마야는 무형지독의 독기를 내공의 힘으로 한곳의 혈도로 몰아넣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형지독이 워낙 독성이 지독한 극독인지라 그 독기가 조금씩 내장을 썩혀 들어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고독마야는 매일매일 내장이 녹는 듯한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한 번도 그 고통을 내색한 적이 없었다. 본래 고독한 성격의 고독마야인지라 어떤 경우든 남에게 속내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검한은 그런 고독마야에게 화룡단정을 갖다 줄 작정을 한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였다.

구우우우!

철익신응이 낮게 울며 몸을 숙여서 이검한에게 등을 보였다.

“나를 태워주겠단 말이냐?”

철익신응의 예사롭지 않은 태도에 이검한은 흠칫하며 물었다.

그러자 철익신응은 낮게 울부짖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검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이...

“하하! 좋다! 나도 한 번쯤 곤륜산을 허공에서 관람했으면 했으니까!”

휘익!

이검한은 훌쩍 몸을 날려 철익신응의 등 위로 올라탔다. 워낙 거구인지라 철익신응의 등판은 어른 열 명이 족히 앉을 수 있을 만큼 넓직했다.

(목에 사슬을 걸고 있다!)

철익신응의 목덜미 쪽에 걸터앉던 이검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깃털에 묻혀 잘 안보였지만 철익신응의 목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사슬이 둘러져 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엄지손가락 굵기인 그 사슬은 길이가 넉넉해서 이검한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두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슬을 두르고 있다는 건 이 영물이 전에도 누군가를 태우고 다녔었다는 건데...)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려있는 황금 사슬을 자신의 몸에 한 바퀴 둘러 고정시키며 내심 놀랐다. 하늘의 지배자인 이 거대한 독수리에게 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때문이다.

구우우! 스윽!

이검한이 자기 목덜미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철익신응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왕이면 해가 뜨는 쪽으로 가다오. 그쪽에 내 집이 있으니...!”

이검한은 고독애가 있는 쪽을 돌아보며 철익신응의 등을 다독였다.

구워어억! 화아악!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거대한 날개를 퍼득였다.

쏴아아아!

직후 철익신응의 거대한 몸은 이검한을 등에 태운 채 선풍같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우와앗!"

이검한의 입에서 절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곤륜산의 웅장한 산봉들이 발 아래로 멀어졌기 때문이다.

몇 번 날개 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철익신응은 이미 지상에서 수백 장 높이로 날아올라 있었다.

“이야아! 정말 장관이로구나!”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날개 아래쪽으로 휙휙 지나가는 곤륜산의 무수한 산봉우리들을 내려다보며 흥분하여 외쳤다.

그러다가 그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이봐! 방향이 틀리잖아!”

그렇다. 지금 철익신응은 고독애가 있는 동쪽이 아니라 반대방향인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쏴아아아!

이검한이 다급히 소리쳤으나 철익신응은 들은 척도 않고 북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날아갔다.

“야 임마! 안돼! 저녁때까지 돌아가지 않으면 이모한테 혼난단 말이야!”

당황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등을 두드리며 외쳤다.

그러나 철익신응은 방향을 틀기는커녕 점점 더 빨리 북쪽으로 날아갔다.

“뭐야? 너 지금 나 유괴하는 거냐?”

철컹!

이검한은 철익신응의 목에 걸린 황금사슬을 잡아당기며 항의했다.

휘익! 휙!

그러거나 말거나 철익신응은 거대한 날개를 펄럭이며 북서쪽으로 꾸준히 날아갔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결국 이검한은 자포자기하여 벌렁 드러 누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와서 수백 장 높이의 허공을 날고 있는 철익신응의 등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일이다.

부드러운 깃털로 덮인 철익신응의 등판은 아주 넓어 푹신한 침대같다. 게다가 몸을 쇠사슬로 한 바퀴 두른 상태라 안정감도 있었다.

“이모가 꽤나 걱정하겠는걸...!”

깍지 낀 두 손을 뒷덜미에 바친 채 철익신응의 넓은 등 위에서 드러누운 이검한은 흐르듯 뒤로 지나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검한은 더할 수 없이 안락한 기분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어 버렸다.

 

* * *

 

얼마나 잤을까?

쏴아아!

“어엇!”

이검한은 자신의 몸이 급격히 하강함을 느끼며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정신을 차리며 급히 몸을 일으키던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황혼녘이 되었다. 철익신응이 날아가고 있는 주변 하늘은 온통 핏빛 노을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피를 물에 풀어놓은 듯 온통 홍(紅) 일색으로 물든 하늘!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톡 터질 듯 가깝게 보이는 일몰 직전의 태양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붉은 비단휘장으로 뒤덮여 있는 듯한 저녁 하늘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검한은 그 화려한 장관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라고는 바다같이 막막한 일망무제의 사막(砂漠)뿐이었기 때문이다.

“서... 서역(西域)까지 왔구나!”

이검한의 입이 절로 쩍 벌어졌다. 그는 비로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알아차렸던 것이다

 

-서역!

 

그렇다. 이곳은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자리한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 즉 서역인 것이다.

하토(鰕土)라고도 불리는 서역은 동서 일만 이천 여 리, 남북으로 육천여 리에 이르는 지상 최대의 분지다.

놀랍게도 철익신응은 곤륜산으로부터 서역까지 이검한을 태우고 날아온 것이다.

중원 사람들에게 옥문관 밖의 서역은 대부분의 땅이 모래로 뒤덮인 불모지대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서역, 즉 탑리목분지의 곳곳에는 낙원같은 녹원(綠園;오아시스)과 사막의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가 지표로 용출하여 형성된 호수를 낀 비옥한 곡창지대가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그 때문에 고대이래로 서역 일대에는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해왔다.

특히 전한(前漢)시대 이래 서역은 머나먼 서쪽에 자리한 대진국(大秦國;고대 로마), 대식국(大食國;사라센제국)등과의 교역통로인 비단길로서 번영을 구가한 적도 있었다.

물론 서역의 곳곳에는 태고 이래로 인간의 발길을 거부해온 끔찍한 험지도 존재했다. 바닥을 알 수 없는 유사지대(流砂地帶)와 맹독을 지닌 독충들이 우글거리는 습지(濕地), 그리고 원시 아래로 인간의 손길을 거부해온 원시림 등등이 그곳이다.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 인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환경이 집약된 곳이 바로 서역 탑리목분지인 것이다.

 

“반... 반나절도 안되어 서역까지 오다니...!”

이검한은 발밑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내려다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독애가 자리한 곤륜산 남단에서 서역까지 오려면 적어도 이천여 리 이상을 주파해야만 한다.

헌데 철익신응이란 놈은 불과 반나절 만에 그 먼 거리를 날아온 것이다.

그와 함께 이검한의 가슴은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고동치기 시작했다. 냉약빙의 훈육 덕분에 고대사(古代史)에도 정통한 이검한의 뇌리로 비단길을 의지하여 흥망해간 전설적인 왕국들의 고사(古事)가 그림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래폭풍에 휩쓸려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 놉-노르, 즉 누란왕국(樓蘭王國)과 서역 역사상 최고의 미녀였다는 누란왕후(樓蘭王后)의 전설이다.

누란왕후-!

그녀는 그 뛰어난 미모 때문에 사랑하는 남편과 왕국을 잃었고 끝내는 여러 사내들의 품을 전전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그 외에도 서역 역사상 최강의 제국을 이루었던 서하(西夏)의 수도 흑수부(黑水府)의 애가(哀歌)와 북원(北元)의 후손으로써 여전히 중원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달단왕부(韃靼王府)의 전설이 주마등처럼 이검한의 뇌리로 스쳐갔다.

이국적인 전설과 몽환적인 신비를 품고 있는 서역 땅이 바로 지금 이검한의 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헌데 이검한이 흥분에 몸을 떨 때였다.

구워어어억!

철익신응은 웅혼한 울음을 토하며 급격히 아래쪽으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저것은...!”

이검한은 눈앞으로 확 다가오는 장대한 단층지대(斷層地帶)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치떴다.

갑자기 그의 앞쪽에 나타난 절벽은 동서로 길게 이어져 있는데 얼마나 긴지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지반의 남쪽이 어떤 이유로 침몰하여 이루어진 그 장대한 절벽의 모습은 마치 수많은 창(戈)을 꽃아 놓은 것같다.

“대, 대과벽(大戈壁)이다!”

이검한의 입에서 저절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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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2)

 

 

대안탑은 총 칠층이다.

각층의 높이는 삼장(三丈;9미터)이나 되어 천장이 까마득히 높게 느껴진다.

임청우는 난간을 잡고 먼지가 가득 쌓여있는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수십 번의 힘든 걸음이 위쪽으로 이어졌다.

이윽고 더 이상 계단이 없는 것을 느끼고서야 임청우는 자신이 이층으로 올라왔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다시 계단을 찾아 올라갔다.

눈이 어둠에 조금은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빛이 흘러들어오는 것인지 삼층에 이르자 희미하게나마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층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삼층에는 수많은 서가(書架)들이 열을 지어 서있었다.

임청우는 불경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지라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서가로 다가갔다.

그러나 어느 서가를 살펴보고 더듬어 보아도 단 한권의 책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던 불경들은 모두 어딘가로 옮겨지고 먼지 쌓인 서가들만 남아있는 것이었다.

더 구경할 것도 없었다.

임청우는 다시 사층으로 올라갔다.

사층이라고 해서 삼층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다. 역시 텅 빈 서가들만이 근 백 여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휘유! 저 많은 서가에 불경이 가득 꽂혀 있었다면... 대체 몇 권이나 됐을까?”

임청우는 서가에 꽂혀있었을 불경들의 숫자를 생각하며 감탄했다.

하지만 대안탑에 자기가 볼 것이라고는 빈 서가들뿐인가 싶어 약간은 실망스러웠다.

 

승려들이 불경 번역에만 집중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사방 벽에 하나씩 나있는 창문은 모두 벽돌로 막혀있다.

아늑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짜증이 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마치 되돌아 나올 수 없는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오층을 지나고 육층으로 올라올수록 점점 더 밝아졌고, 마지막 칠층에 올라섰을 때는 밖이나 다름없을 정도의 밝기가 되었다.

천장을 올려다 본 임청우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대안탑의 천장은 삼각형의 판자를 여러 장 엇갈리게 기대놓은 형태였다. 뾰족한 윗부분은 단단히 맞물려 있지만 아래쪽은 상당히 넓게 벌어져 있어서 사람 한명이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천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비와 눈은 들어올 수 없지만 바람과 빛은 그대로 통과한다.

위로 올라올수록 밝아진 이유는 바로 그같은 천장의 구조 때문이었다.

임청우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은 기진한 몸을 이끌고 칠층까지 올라오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많이 걸렸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대신 달이 떠올라 창백한 달빛이 지붕에 나있는 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한데 달빛 덕분에 자세히 볼 수 있는 칠층의 구조는 다른 층들과 달랐다.

서가는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대신 네 좌의 불상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놓여있으며 가운데에는 임청우의 키만큼 큰 청동으로 만들어진 향로(香爐)가 세 발로 버티고 서있었다.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불상은 석가여래불(釋迦如來佛)이었으며,

서쪽에 있는 것은 왼손을 든 아미타여래(阿彌陀如來)고,

남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가슴에 붙인 비로자나여래(毘盧蔗那如來)이며,

북쪽에 있는 것은 두 손을 나누어 들고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였다.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청동향로의 아랫부분에는 황동을 입혀서 만든 연화(蓮花)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연꽃무늬는 알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다.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 대안탑에서 그나마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 정도였다.

임청우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선선한 밤바람을 맞으며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현장법사께서 쓰셨던 의자라도 구경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겨우 불상 넷과 향로 하나가 전부라니...”

실망하자 허기가 더욱 심하게 밀려왔다.

서있을 힘조차 없어진 임청우는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바로 그때 천장에 난 틈으로 스며들어온 달빛이 비로자나여래의 이마를 비추었다.

그러자 비로자나여래의 백호(白毫:불상의 미간에 박혀있는 보석)가 빛을 발하며 향로의 한 부분을 비추었다.

헌데 백호를 통해 달빛이 반사된 향로 표면에는 물결이 일렁이듯 희미하게 글씨가 나타났다.

“어!”

임청우는 그 신비한 광경에 벌떡 일어섰다.

 

<관표(觀表)>

 

향로로 다가가 살펴보니 단 두자인 글씨는 이러했다.

“관표? 겉을 보다? 이게 무슨 뜻이지?”

임청우는 나직하게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마치 화두를 받은 것처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다른 뜻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글씨는 사라져 버렸다.

(비로자나불의 백호에서 비친 빛이 글씨를 만들었다면 다른 불상도 마찬가지 아닐까?)

임청우는 흥미가 일었다.

(다음번에는 달빛이 아미타여래를 비출 것이다. 그때 무슨 글씨가 나타나는지 봐야겠다. 아마 관표에 이어지는 글일 것이다.)

그는 기대에 차서 달이 움직여 아미타여래를 비추기만을 기다렸다.

한 시간 정도 지나자 달빛이 마침내 아미타여래를 비추었다.

임청우는 침을 삼키며 청동향로를 응시했다.

달빛은 아미타여래의 백호에 반사되어 청동향로에 비춰졌다.

그리고 임청우의 짐작대로 두자의 글씨가 물결이 일렁이듯이 나타났다.

 

<망피(望皮)>

 

나타난 글자는 이러했다.

임청우는 먼저 나타났던 <관표>와 함께 읽어 보았다.

“관표망피(觀表望皮)?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지금까지 내가 저지른 어리석은 행동을 지켜보고 적어놓은 듯한 글이로군.”

임청우는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 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순서상 달빛이 다음으로 비출 대상은 약사여래였다.

임청우는 끈기를 갖고 달빛이 약사여래를 비추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삼경이 넘어가도 달빛은 약사여래를 비추지 않았다.

심지어 달빛은 약사여래뿐 아니라 석가여래도 비껴갔다.

“계절에 따라서 달이 움직이는 길도 조금씩 달라진다는데 지금은 약사여래와 석가여래에게 달빛이 닿지 않는 때인 모양이다.”

뒤늦게 그 사실을 확인한 임청우는 실망했다.

지치고 낙담한 임청우는 청동향로의 세 다리 중 하나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더 이상 신경을 쓸 대상이 없어지자 허기가 극심하게 느껴졌다.

(관표망피... 관표망피...)

임청우는 허기를 잊을 목적으로 향로에 나타났던 글씨들에 정신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청우의 머릿속으로 번쩍 스치는 것이 있었다.

(<겉을 보는 것은 껍질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 대구(對句)는 <속을 보는 것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가 아니겠는가?)

임청우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알맹이를 보려면 속을 보라는 뜻이다!)

임청우는 흥분하며 청동향로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설마하니 보라는 속이 불상의 속은 아닐 테고... 이 향로의 속을 말하는 게 틀림없다. 노자(老子)도 좋은 책은 명산(名山)에 수장(收藏)한다고 했듯이 옛사람들은 책을 숨기기 좋아했다. 어쩌면 현장법사께서는 이 향로 속에 가장 귀중한 책을 숨겨놓았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자기의 짐작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없는 힘을 쥐어짜 자기 키만한 향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향로의 둥그런 배 부분의 직경은 여섯 자가 넘지만 입구는 상당히 좁아서 직경이 채 두자가 안된다.

향로 입구에 올라앉은 임청우는 속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둥근 항아리 형태인 향로 안쪽은 너무 어두워서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큰 향로에 향불을 피우는 것은 거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임청우는 향로의 바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며 생각했다.

이 향로는 너무 커서 향을 태우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어떤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어둡고 깊은 향로 속은 마치 어머니 뱃속 같다.

위에서 들여다보아서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아낼 수가 없다.

(들어가서 살펴보자.)

향로 입구에 웅크리고 있던 임청우는 몸을 일으켰다.

향로가 깊긴 하지만 자기키보다는 깊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휙!

임청우는 주저 없이 향로 속으로 뛰어 내렸다.

헌데 그는 향로의 입구가 상당히 좁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캉!

왼손에 들고 있던 우협 장백승의 청강검이 향로 주둥이에 가로로 걸려버렸다.

“억!”

뛰어내린 기세와 체중에 의해 홱 채여지면서 왼팔이 어깨로부터 쑥 빠져버렸다.

어깨와 팔꿈치가 시큰둥해지면서 힘이 하나도 없어졌다.

얼마나 아픈지 눈물이 찔끔 나왔다.

“바보같이...!”

향로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오른손으로 왼팔을 주무를 때였다.

빡!

향로 주둥이에 걸려있던 청강검이 떨어지면서 임청우의 머리 꼭대기 백회혈(百會穴)을 강타했다.

백회혈은 인체의 급소중의 급소다.

또한 정강(精鋼)으로 만들어진 청강검의 무게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악!”

백회혈에 불똥이 튀는 듯한 충격을 받은 임청우는 향로 바닥에 널부러졌다.

정신을 잃고 웅크린 그의 모습은 마치 어머니 배속에 든 태아와도 같아 보였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다.

“으으으! 정수리리가 뚫리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임청우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니 엇갈린 구조의 지붕 틈 사이로 검은 하늘에 박혀있는 금싸라기 같은 별들이 보인다.

(아직 밤이로구나.)

임청우는 뜨뜨 미지근한 머리로 손을 가져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신을 잃었던 그 밤인지 아니면 하루나, 또는 그 이상을 정신을 잃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들어 올리려던 왼팔이 시큰해지면서 하마터면 다시 졸도할 뻔 했다.

다쳤던 팔이 부어올라 소매가 팽팽해질 정도가 되어 있었다.

(큰일이다. 치료하지 않으면 팔을 잘라야 할지도 모르겠다.)

놀란 몸이 뜨거워지면서 열이 오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때는 한 여름이다.

여름의 융성한 화기(火氣)는 열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치명적이다.

이것은 겨울이 한기(寒氣)가 융성한 것과 마찬가지다.

혹자는 겨울이 추울수록 불이 자주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한기가 지나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려는 자연의 오묘한 법리라고 할 수 있다.

고열은 종종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열을 내리지 않으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거나 죽게 될 것이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농산의 깊은 산중에서 살아왔지만 어머니의 병 때문에 의서(醫書)도 여러 권 구해 읽었었다. 덕분에 의원보다 낫다고는 할 수 없어도 어지간한 병증에 대해서는 이해하고 있다.

(침이라도 있으면 꽂아보련만...)

임청우는 절망적인 기분에 빠져 들어갔다.

지금의 그에겐 흔한 쇠침 하나도 없었다.

열을 내릴 수단이나 방법이 전무한 것이다.

이 계절에 얼음을 구하는 것은 얼음 창고를 가지고 있는 황궁이나 고관대작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찬물로 몸을 식히기엔 가뭄이 너무 심하다. 마실 물도 구하기 어렵거늘 몸을 식힐 물이야 말해 무엇 하랴?

(큰일을 해보려고 했는데 겨우 향로 속에서 죽어 땅에 묻히지도 못하는 몸이 되는구나.)

임청우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씁쓸하게 웃었다.

(누가 있어서 나 임청우가 세상에 존재했던 것을 알기나 할까?)

임청우는 한탄하면서 향로의 벽에 기댔다.

신열(身熱)이 머리까지 치밀어 올라 정신이 어질어질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정신을 잃으면 안되는데...)

임청우는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다가 불현 듯 머릿속으로 비련곡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쇠 부채로 뿜어낸 한기를 뒤집어쓰고 하마터면 까무라칠 뻔 했었다.

하지만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리자 정신이 돌아왔었다.

(이번에도 그때 같은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임청우는 멀어지려는 정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천상열차분야도를 떠올렸다.

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고열 때문에 집중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임청우는 점차 바닥도 없고 천장도 없으며 방향과 시간조차 없는 별의 바다로 흘러들어갔다.

멀리서 북두칠성이 그 국자같은 오묘한 형상을 뽐내고 있었다.

북극성 쪽으로 국자의 손잡이 끝을 향한 채 천천히 돌아가는 북두칠성을 보고 있자니 흐려졌던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흐릿하던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비련곡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별의 바다를 한 차례 유영하자 정신이 맑아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정신은 회복되었지만 육신의 고통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몸은 더 뜨거워져 불덩이 같고 어깨에서 빠진 왼쪽 팔에서는 감각이 완전히 사라졌다.

몸을 조금 움직일 때마다 머릿속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엄습한다.

통증 때문이 아니라도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향로를 빠져나가려는 시도를 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태였다.

(내 인생도 여기까지로구나.)

임청우는 허탈해졌다.

어머니의 모진 학대와 살해위협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이 깊은 향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게 된 것이다.

임청우는 두 팔을 늘어뜨리고 가능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았다. 죽음에 맞서 발버둥치기 보다는 조용하게 순응하고 싶었다.

“...?”

헌데 늘어뜨린 손바닥에 우둘투둘한 무언가가 만져졌다.

그 감각은 마치 주물로 부어 놓은 활자(活字)를 만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하면서 조금 더 더듬어 보았다.

만져지는 것은 정말 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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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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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장

 

                   첫 번째 실전

 

 

 

이곳은 주점에서 오리 쯤 떨어진 숲속의 공터다.

“...”

진상파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숙인 채 공터 중앙에 서있었다.

진상파에게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는 섬전초가 앉아서 몸통 길이만한 탐스러운 꼬리를 앞발과 혀로 다듬고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여전히 도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진상파를 십여 명의 사내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론 그자들은 철위사대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와 그의 수하 철위사들이었다.

진상파는 주점을 떠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우 일행에게 따라잡힌 것이다.

그녀에게 사우 일행을 안내한 놈은 한쪽에 앉아서 얄밉게 털을 고르고 있는 섬전초다.

무공 방면에서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인지라 행적이 노출된 이상 섬전초와 사우 일행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진소저! 아무쪼록 우리가 무례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셔오라는 명을 받은 터라 끝내 동행을 거부하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소이다.”

사우가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심기는 불편하지만 자신들의 안주인이 될 여자에게 무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돌아가세요.”

진상파가 옆으로 조금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가서 당신들의 소성주에게 전하세요. 내가 왜 제왕성을 떠나게 되었는지 그날 밤 일신재에서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혐오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된 거였군.)

(소성주님이 내총관과 내연관계인 걸 알아버렸구나.)

사우와 그의 수하들은 진상파가 혼례식 전날에 갑자기 달아난 이유를 깨닫고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죄송하지만 그 분부는 따를 수가 없소이다. 우리가 받은 명은 단 하나! 소저를 제왕성으로 모셔오라는 것뿐이었소이다.”

사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

진상파는 미간을 조금 찡그리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사냥개에 불과한 사우와 말을 섞어봐야 바뀌는 것은 없음을 아는 때문이다.

“더 시간 끌 거 없다. 진소저를 성으로 모시고 간다.”

사우가 부하들에게 명령을 했다.

“예 대주님!”

“결례하겠소이다 진소저.”

그 즉시 두 명의 철위사가 좌우에서 진상파에게 다가섰다.

(여기까지인가?)

철위사들이 자신의 팔을 잡으려는 것을 보며 진상파는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제왕성으로 끌려가면 모용준과 결혼할 수밖에 없다.

천박하고 음탕한 모용준과 부부가 될 경우 어떤 삶을 살아야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치욕을 당하는 것은 둘째 치고 황금성의 재산을 노린 탕부탕녀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진상파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것같은 절망감에 휩싸였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들 하시오.”

갑자기 들려온 누군가의 음성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이 치떠졌다.

끼이...

탐스런 꼬리를 앞발로 다듬고 있던 섬전초도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그분 소저께서 귀하들과 함께 가는 걸 원하지 않고 있지 않소?”

공터로 들어서며 말하는 인물은 강유였다. 사우 일행의 뒤를 밟은 그가 마침내 도착한 것이다.

“저놈은...”

“주점에서 대주님에게 죽을 뻔했던 애송이 아닌가?”

강유를 알아본 철위사들은 실소를 터트렸다.

다만 사우의 얼굴은 불쾌하게 찡그려 지고 있었다.

(저 사람이 또...)

숲에서 나와 공터로 들어서는 강유를 본 진상파는 반갑다기보다는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무공을 모르는 주점 주인을 혼내는 것과 사우 일행을 상대하는 것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진상파도 제왕성의 위사들이 얼마나 흉포하고 강한지 잘 알고 있다.

강유라는 이름의 청년은 의협심 때문에 자신을 도우려고 나섰겠지만 그 결과는 비극적일 것이다.

“사내대장부가 되어서, 그것도 여럿이 아녀자 하나를 핍박하는 것은 무림인의 도리가 아니라 생각하오.”

공터 외곽에 멈춰선 강유는 사우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이거 참...”

사우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 없는 네놈의 피를 본 부담도 있고 해서 좋은 말로 하마. 내일 해를 다시 보고 싶다면 모른 척 하고 갈 길 가라.”

사우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라고 손짓을 했다.

진상파의 마음은 복잡했다.

강유가 자신을 도와주길 바라면서도 그가 변을 당하기 전에 알아서 물러갔으면 하는 마음이 동시에 든 것이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스릉!

진상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강유는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았다. 아버지 강조가 마련해준 그 검은 비록 보검은 아니지만 상당히 예리하다.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한다면 지금까지 애써 무공을 수련한 의미가 없소. 끝내 그 소저를 보내드리지 않겠다면 나부터 상대해야할 거요.”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강유의 진지한 말을 들은 사우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평소의 사우라면 당장 살수를 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왕성의 안주인이 될 진상파가 보고 있는 자리라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속하에게 맡겨주십시오 대주님! 능력도 안되면서 객기를 부리면 어찌 되는지 교훈을 내려주겠습니다.”

사우가 난감해할 때 철위사중 한명이 칼을 뽑으며 나섰다. 장흔(張欣)이라는 이름의 그자는 사우가 대동한 철위사들 중 가장 연장자다.

“교훈만 내려주고 죽이지는 마라. 진소저가 보는 앞이니...”

사우는 장흔에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대주님 말씀 들었지? 네놈은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다. 팔 다리 하나쯤 날아가겠지만 죽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사우의 허락을 받은 장흔은 칼끝을 이리저리 돌려서 강유를 희롱하며 다가섰다.

“같은 말을 귀하에게 해드리겠소.”

강유는 냉소하며 마주 다가갔다.

“나 역시 저분 소저가 보는 앞이라 귀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물론 피를 보긴 하겠지만...”

“이 새끼가...”

강유의 비아냥을 들은 장흔의 얼굴이 분노로 이지러졌다.

“알아서 매를 버는구나.”

부악! 쩍!

다음 순간 장흔은 강유를 향해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칼을 쓰는 속도는 전광석화같고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치명적이다.

장흔이 구사하는 이 도법은 허초(虛招)와 실초(實招)가 뒤섞여있기도 해서 상대하기가 실로 까다롭다.

비록 제왕성 사대무력집단의 최하위 집단에 속해있긴 하지만 철위사 개개인이 일류고수라는 무림의 평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스슥!

하지만 강유는 산보하듯 걸어서 장흔의 칼질을 피해내었다. 소요신군을 칠절의 첫째로 만들어준 소요보법이 펼쳐진 것이다.

(저 보법!)

한가로운 듯이 보이지만 장흔의 공격을 바람처럼 물처럼 흘려보내고 있는 강유의 보법을 보며 사우의 눈이 번뜩였다.

철위사대의 대주답게 사우는 무림에서 사대보법중 하나로 불리는 소요보법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크아!”

치칫! 쉬학!

자신의 공격이 통하지 않자 악에 바친 장흔의 공격이 더 빠르고 신랄해졌다.

(명불허전... 제왕성 위사들중 최하등급인 철위사임에도 타복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

장흔의 격렬해진 공격을 피하면서 강유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찌익! 서걱!

빨라진 그자의 칼끝이 스치면서 강유의 옷이 여기저기 베어지고 있었다.

“미꾸라지 같은 놈! 언제까지 피할 수 있을지 보자!”

칼끝이 강유의 몸에 닿기 시작하자 장흔은 기세가 올라 더욱 사납게 칼질을 했다.

(소요보법으로도 피하는 게 한계가 있다.)

캉!

어쩔 수 없이 강유는 검을 휘둘러 장흔의 칼질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왔어야지!”

장흔이 살벌하게 웃으면서 빗발치듯 칼질을 했다.

쩍!

강유는 장흔의 칼질 안쪽으로 성큼 들어서며 빠르게 검을 찔렀다. 그런 강유의 뒤로 독수리가 날개 짓을 하는 듯한 형상이 떠올랐다.

(붕정검법까지...!)

강유가 구사하는 검법을 알아본 사우가 눈을 부릅뜰 때였다.

카캉! 빠카앙!

찌르는 강유의 검과 그어대는 장흔의 칼질이 엇갈리며 요란한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똥이 튀었다.

“큭!”

장흔은 왼쪽 어깨에서 피를 뿜어내며 휘청거렸다. 강유가 찌른 검이 그자의 어깨를 관통한 것이다.

스팟!

일격을 성공한 강유는 뒤로 훌쩍 뛰어 거리를 벌리며 가슴 부위를 내려다보았다. 옷이 한 뼘 쯤 갈라져 있으며 피부에도 깊진 않지만 상처가 나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양패구상(兩敗俱傷)!”

“아니다. 장형쪽의 상처가 비교할 수 없이 깊다.”

관전하고 있던 철위사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봐도 승패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강유는 옅은 자상을 입은 반면 장흔은 어깨가 앞뒤로 관통당하는 상처를 입어 삽시에 상체가 피로 물들고 있었다.

(철위사를 상대해서 이겼네.)

강유도 상처를 입긴 했지만 대단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진상파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이 새끼...”

장흔은 관통상을 입은 왼쪽 팔을 축 늘어뜨리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자는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면서도 왼쪽 어깨의 상처가 가볍지 않아서 경거망동하지는 못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이번에는 내가 상대해주겠다.”

창!

또 한명의 철위사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그만 둬라.”

그자가 강유를 공격하려는데 사우가 저지했다.

“대주님! 하지만...”

“최윤, 네가 나서봤자 결과는 대동소이할 것이다. 몇 명이 협공 하지 않는 한 쓸데없이 피만 볼 뿐이니 물러서도록 하라.”

“예...”

사우가 나서자 최윤이라는 이름의 두 번째 철위사는 불만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물러섰다.

“네놈, 소요신군 강조와 무슨 관계냐?”

사우는 수하들 대신 강유와 마주 서며 물었다.

“무슨 소리요?”

강유는 내심 움찔하며 부인하려고 했다. 자신의 정체가 밝혀져 봐야 좋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발뺌해봤자 소용없다. 방금 전 네놈이 사용한 무공이 소요신군의 절기인 소요보법과 붕정검법이라는 걸 알아봤으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강유는 노려보았다.

“소요보법과 붕정검법!”

“그건 칠절의 첫째인 소요신군 강조의 독문절기 아닌가?”

다른 철위사들도 비로소 장흔이 패한 이유를 깨닫고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일이 커져버렸다. 자칫하다가는 우리 집안이 제왕성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

강유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지만 기왕에 정체가 들통 난 마당에 발뺌을 할 수도 없다.

“과연 제왕성 철위사대 대주의 안목은 비범하구려. 짐작하시는 대로 소요신군이란 분은 본인의 가친이시오.”

“소요신군의 아들!”

“어쩐지 평범하지 않다 했더니...”

강유의 시인에 철위사들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상대가 칠절중 한명의 아들이라면 경솔하게 상대할 수는 없다.

“...”

강유의 정체를 안 진상파의 눈에도 이채가 반짝였다.

“소요신군 강조가 제법 빼어난 아들을 두었군.”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아비의 얼굴을 봐서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마. 지금이라도 사과하고 물러난다면 네놈이 오늘 우리 제왕성에 죄를 지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

“유감스럽게도 대주의 호의는 받아들일 수 없소이다.”

사우의 말에 강유는 고개를 저었다.

“저놈이...”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를 지니신 대주님께서 파격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계시거늘...”

철위사들은 분노하여 강유를 노려보았다.

사우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마를 찡그렸다.

“만일 저분 소저와 함께라면 떠날 수도 있겠소이다만...”

강유는 진상파를 돌아보며 말했다.

“흐흐흐! 좋다 좋아. 네놈이 본좌로 하여금 소요신군과 원수지간이 되게 만드는구나.”

스릉!

사우가 음산하게 웃으며 검을 뽑았다.

“하지만 철위사대 대주가 되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을 핍박했다는 뒷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먼저 십초를 공격할 기회를 주겠다. 물론 본좌는 오직 방어만 할 것이고...”

치직!

사우가 검을 한 바퀴 휘두르자 그자를 중심으로 직경 다섯 자 쯤의 원이 그려졌다.

(검기(劍氣)...)

강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사우의 검에서 보이지 않는 기운이 뻗어 나와 바닥에 원을 그린 것을 알아본 때문이다.

검기라 불리는 그 기운은 직접 닿지 않아도 표적을 살상하는 힘을 지녔다.

당연히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검법이 검기를 구사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그리 많다고는 할 수 없다.

냉혈철심 사우가 그중 한명인 것이다.

강유로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십초 안에 본좌로 하여금 이 원 밖으로 밀려나게 만들거나 네놈의 검이 옷자락에라도 닿으면 진소저를 데리고 떠나도 좋다.”

검기로 바닥에 원을 그린 사우가 비웃는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강유는 사우가 자신은 얕보고 있다는 사실이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자존심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우는 자신의 아버지 소요신군에 필적하는 고수다.

“지금 그 말 잊지 마시오.”

슈학!

강유는 일갈과 함께 벼락같이 검을 찔러갔다. 그의 이 일초는 아주 빠르고 강력해서 철위사들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제일초!”

캉!

철위사들의 걱정과 달리 사우는 강유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캉! 카캉!

강유가 붕정검법으로 맹렬히 공격을 이어갔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사우는 강유의 일방적인 공격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냉혈철심이라는 자신의 별호가 그저 모질고 독한 성격 때문에 붙은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목숨이 오가는 대결에서도 그의 평정심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반응은 전광석화 같았다.

강유가 어떤 식으로 공격해도 사우는 즉각적이고 효과적으로 반응했다.

사우가 철위사대의 대주가 된 것은 결코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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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연못에서 건진 검(劍)

 

 

"그만 갑시다. 내일 또 찾아보기로 하고..."

어느 정도 땀이 식자 백남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며 말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자신들의 보금자리인 녹지 옆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계곡이 넓지 않아서 동쪽 끝에서 천천히 걸어도 서쪽 끝까지 오는데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물그릇으로 사용하는 백남빈의 신발이 석탁 위에 놓여져 세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미루가 손가락을 검으로 살짝 베어서 피를 몇 방울 신발 속으로 떨어 뜨렸다.

그러자 신발속의 녹색물이 순식간에 유백색(乳白色)으로 변하며 짙은 향기를 내기 시작했다.

"드세요."

살짝 교태가 배어 있는 강미루의 음성은 듣기가 좋았다.

백남빈이 신발을 받으며 농을 걸었다.

"말솜씨가 많이 늘었군. 이대로 잘 배우고 연습하면 틀림없이 사랑받는 아내가 되겠어."

"부끄럽게 하지 마셔요. 누가 절... 음... 절 아내로..."

칭찬은 들었지만 그 다음 말은 너무 부끄러워 이을 수가 없었다.

“미워요.”

민망해진 강미루는 눈을 흘기며 백남빈의 손등을 꼬집었다.

백남빈이 큰소리로 글을 읽듯이 말했다.

"내가 멍청하다고 마음대로 꼬집는 거요?"

강미루가 그제야 자기가 하고 싶었던 말을 생각해 내고는 백남빈에게 말했다.

"오늘은 나무그릇이라도 하나 깎아야겠어요."

"신발로 물을 마시자니 내 발 냄새가 나서?"

"아니라구요!"

백남빈이 들었던 신발을 놓으며 강미루에게 묻자 그녀는 백남빈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강미루와 백남빈이 나누는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적당한 애정행위를 동반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창평곡에 갇히고 사흘째 되던 날 녹지의 신비를 일부나마 풀어 식수문제를 해결했다.

녹지의 물은 침에 닿으면 독이 되고 피에 닿으면 아주 향기로운 물이 되었다.

어떤 작용인지는 몰라도 우유빛으로 변한 물을 마신 후 두 사람은 자신들의 내외공이 함께 증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사흘 정도 마셨을 뿐인데 두 사람의 내공은 이미 전보다 배 이상 증진되어 있었다.

 

"잘 봐요. 내가 마술을 보여줄 테니..."

백남빈이 강미루를 보면서 말했다.

푸스스!

계란만한 돌을 손에 쥔 백남빈이 가볍게 힘을 주자 돌은 소리없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돌을 부수는 것은 웬만한 공력을 소유한 자라면 다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백남빈처럼 새알을 쥐듯이 부드럽게 잡아서 소리도 없이 가루로 만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강미루도 배시시 웃으면서 역시 계란만한 돌 두 개를 손바닥에 올리더니 양손 손바닥으로 슬슬 비비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가루가 팥고물처럼 떨어지고 강미루의 손바닥에는 이내 콩알같이 작고 매끄럽게 변한 돌멩이 두개만 남게 되었다.

강미루가"훅" 하고 입김을 불자 그 작은 돌들은 휙 하니 날아가서 녹지에 퐁당 빠져 버렸다.

그걸 본 백남빈이 손뼉을 쳐서 찬사를 보낸 후 말했다.

"이 녹지에는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틀림없으니 바닥까지 한번 내려가 봐야겠소."

 

풍덩!

백남빈은 짧은 속바지만 입고 뜨거운 녹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녹지의 물은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웠다.

게다가 아주 짙어서 한치 앞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백남빈은 조금씩 헤엄쳐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을 향해 내려갈수록 물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데 밖에서 강미루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물속으로 들어가서 금방 나오지 않자 불안해졌다.

"조심하셔요!"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녀의 조바심은 더욱 심해졌다.

"저도 들어가겠어요"

결국 그녀도 풍덩 물속으로 뛰어 들었다.

잠수하던 백남빈은 강미루가 물속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소리가 난 쪽으로 헤엄쳐 올라가 자신을 따라 들어온 강미루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푸우!”

“하아!”

백남빈과 강미루는 손을 마주잡고 수면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쉬었다.

녹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서로의 머리에서 물을 털어 주었다.

"녹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것같소. 그 외에 딱히 위험은 없는 것 같으니 당신은 걱정말고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시오. 내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

숨을 고른 후 강미루를 안심시킨 백남빈은 다시 녹지로 들어가려고 일어섰다.

"부디 조심하셔야 해요!"

강미루는 그런 백남빈의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아내같이 백남빈을 염려해 주고 있는 것이다.

 

백남빈은 백근 정도 되는 바위를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바위의 무게로 인해서 그의 몸은 처음보다 비교도 안되게 빨리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정말 깊고 뜨거운 곳이구나. 내 피부가 영약으로 변한 녹지의 물을 마시고 강인해지지 않았더라면 이미 종이처럼 녹아버렸을 것이다.)

백남빈은 엄청난 수압에 귀가 멍멍해졌다.

두 눈은 뜨거운 온천수에 의해 눈알이 익어버릴 것 같아서 질끈 감고 있었다.

(제법 큰 바위를 안았는데도 부력이 이토록 세니 바위만 놓으면 그대로 물위로 솟구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에 발에 무언가가 닿았다.

녹지의 바닥이었다.

(어떻게 연못의 바닥이 이렇게 매끄럽고 평평할 수 있을까? 누군가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어쩌면 서쪽 절벽에 창평곡이라고 새겨놓은 사람이 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절세적인 능력을 지닌 기인이 이 창평곡에 살았었다는 사실이다.)

천근추(千斤鎚)의 신법으로 몸을 무겁게 만든 백남빈은 바위를 안은 채 발로 더듬더듬 바닥을 밟으며 돌았다.

매끈한 바닥은 결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서쪽 절벽에 새겨진 창평곡이란 글 이외에 처음 만나는 인간의 흔적이다.

그 사이에 숨이 턱까지 찼다.

하지만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긴 싫어서 꾹 참고 한 걸음이라도 더 걸어보려고 했다.

깊은 물속에서는 바위도 아주 가벼워서 마치 솜덩이 같이 느껴졌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몸도 한걸음 한걸음에 수초처럼 일렁거리며 나아갔다.

잠시 조사해 본 백남빈은 녹지가 마치 우물같은 형태임을 확인했다. 연못가에서 중심부를 향해 몇 장 들어간 쪽부터 거의 직각의 벽을 이루며 바닥은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람의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구조다.

하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노릇이었다.

직경이 수십 장에 이르는 거대한 우물 형태를 어떤 인간이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엄청난 수압과 뜨거운 열기를 견디면서...

그런데 그때까지 반반하던 바닥에 뭔가 뭉툭한 것이 백남빈의 발에 밟혔다.

몸을 숙여 손으로 쓰다듬어본 백남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즉시 알아차렸다.

(검(劍)! 장검이로구나.)

백남빈의 발에 밟힌 것은 검집에 들어있는 한 자루의 길쭉한 장검이었다.

백남빈은 그때까지 안고 있던 바위를 놓고 대신 장검을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화악!

뜨거운 물이 귓가로 스쳐지나가며 화끈거렸다.

 

“푸학!”

삽시에 수면으로 올라온 백남빈은 탁한 숨을 내뱉으며 연못가로 헤엄쳐갔다.

"괜찮아요?"

녹지 밖에서 가슴 조리고 있던 강미루가 뛰어와 백남빈이 내미는 장검을 받았다.

후딱 물 밖으로 뛰쳐나온 백남빈의 피부는 발갛게 익어 있었다.

"이 연못은 확실히 이상하오! 바닥에 편편한 돌을 깔아 놓은 게 사람이 일부러 그래놓은 것 같소."

백남빈이 머리를 흔들어 귓속의 물을 빼며 말했다.

"이제부터 여기 살았던 전대기인의 흔적을 찾아 봐야 할 것 같소."

"그럼 심심하지 않아서 좋겠네요"

강미루가 즐거운 듯이 맞장구 쳤다.

"물속에 이 검만 있던가요? 혹시 창은 없었어요?"

강미루는 백남빈에게서 받아든 검을 살펴보며 말했다. 별호가 홍의창인 만큼 그녀의 무기는 창이었다.

"욕심 많은 아가씨로구만. 창 같은 건 없었어."

“욕심쟁이라 미안하네요.”

백남빈의 우스개소리에 강미루가 샐쭉 토라져버렸다.

"내가 다음에 좋은 창을 하나 구해주겠소."

미안해진 백남빈은 강미루를 달랬다.

"그런데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새침한 표정으로 말하면서 강미루는 검을 백남빈의 손에 들려주었다.

토라진 척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기쁨이 어려 있었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작은 말에도 감동을 받는 법이다.

 

백남빈의 손에 들린 검의 청동색 검집에는 <사자(獅子)>라는 검명(劍名)이 양각되어 있었다.

그 검명은 지금은 쓰지 않는 상고시대의 고전체(古篆體)여서 처음에는 장식을 위한 문양인 줄 알았다.

“당신 별호에 잘 어울리는 검이네요.”

백남빈과 함께 살펴보다가 사자라는 검명을 판독해낸 강미루의 눈이 반짝거렸다.

별호가 검사자(劍獅子)인 백남빈이 연못 바닥에서 건져 올린 검의 이름이 사자검(獅子劍)이라 어떤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진 것이다.

"재질이 청동은 아닌 것같은 데... 무슨 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묵직할까?"

백남빈도 사자검을 두 손으로 든 채 살펴보며 가슴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사자검은 보통의 검보다 폭과 두께가 한 배 반쯤 된다.

하지만 무게는 같은 크기의 검보다 서너 배 이상 나가서 아주 묵직하다.

스르르릉!

검병(劍柄;검의 손잡이)을 잡아서 비틀어 당기자 역시 짙은 녹색인 검신(劍身)이 부드럽게 미끄러져 나왔다.

비록 번쩍이지는 않지만 녹옥(綠玉)같은 은은한 빛이 감도는 게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사자검의 녹색 검신을 본 백남빈과 강미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실로 보검이구나. 직접 보지 않았다면 이런 검이 있다는 것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사자검의 검신은 날이 서있지도 않고 예기를 흘리지도 않으며 맑고 담백하다.

검이라는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는 것이지만 사자검은 누가 봐도 보물이라 할 만했다.

검신과 검병은 하나로 돼 있었고 검집은 청동으로 만든 것 같았다.

무겁긴 하지만 손에 꼭 들어오는 것이 마치 원래부터 백남빈 자신의 소유였던 것처럼 느껴졌다.

마음에 드는 보검을 얻게 된 백남빈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보검이 손에 드니 절로 춤이 나오는구나. 백만 오랑캐도 두렵지 않고 십만 악마도 두렵지 않도다. 검이 이르는 곳에 악도의 피가 튀고 웃음이 이르는 곳에 만마가 도망치는도다."

백남빈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사자검을 내키는 대로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찌르고 하였다.

강미루도 덩달아 기뻐하며 손뼉을 치면서 그의 가락에 장단을 맞추어 주었다.

“천도(天道)를 이 사자의 검으로 밝히리라!”

백남빈은 사자검을 쭉 뻗어 하늘을 가르치며 호기롭게 외쳤다.

순간 사자검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뻗혀나갔지만 흐릿하고 또 순간적인 일이라 백남빈은 물론이고 강미루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하하...!"

자신이 사자검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하늘 높이 뻗어가게 한 것을 알 리 없는 백남빈의 낭낭한 웃음소리가 오랫동안 창평곡을 맴돌았다.

 

***

 

(검기(劍氣)...)

신가람은 눈을 빛내며 멀리를 바라보았다.

신가람은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을 뚫고 들어가며 진땀을 빼던 중 잠시 숨을 돌리려 하늘을 보았었다.

그런 신가람의 눈에 멀리 앞쪽 몇 개인가의 산봉우리 너머에서 긴 무지개같은 기운이 허공으로 치솟는 것이 들어왔다.

찰라지간 나타났다가 사라지긴 했지만 신가람은 그 기운이 검기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신가람 자신이 평생 검법을 수련해왔기에 그 검기를 발견하는 게 가능했다.

(저곳에서 방금 전 신검(神劍)이 세상에 나왔다.)

신가람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검법을 수련하는 자가 오매불망하는 것은 훌륭한 검을 얻는 것이다.

상서로운 검기로 하늘을 찌른 신검이 출현했다는 것은 신가람을 흥분시키면서 동시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신검을 얻은 자와 말괄량이 처제가 연관되어 있는 것같은 예감이 든 때문이다.

(장인 어른께 면목이 서려면 한시라도 서둘러야겠구나.)

신가람은 다시 사방에서 달려드는 이매망량의 환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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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장

 

              괴수대전

 

 

한 차례 기세 좋게 쏟아지던 폭우는 언제였냐는 듯 거짓말처럼 멎었고 구름 사이로 눈부신 태양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이야호!”

쐐애액!

비가 온 후라 더욱 강렬해진 햇살 속에서 한 줄기 인영이 낭랑한 외침과 함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천야만야한 절벽을 평지처럼 차고 올라온 그 인영은 곤륜의 험봉들 위로 바람같이 날아갔다.

사자의 갈기같이 휘날리는 탐스러운 머릿결과 건강하고 탄력 있는 구리빛 피부를 지닌 소년!

물론 그는 이검한이었다.

보는 이의 시선을 절로 잡아끄는 그의 잘 생기고 호쾌한 인상의 얼굴에는 구슬같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이검한은 장춘곡에서 삼백 리 이상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는 중이었다.

높고 험한 곤륜산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년이 가도 인적을 찾아볼 수 없는 이곳에 이검한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록 사저인 냉약빙과 사부인 고독마야가 극진히 사랑해 주기는 하지만 이검한의 외로움을 완전히 없애주지는 못했다.

겉보기에는 쾌활하고 활달했으나 정작 이검한의 마음은 늘 외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고독마야를 아주 많이 닮았다고 할 수 있었다.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인 이검한의 유일한 취미는 달리는 것이었다. 곤륜산의 장대한 산줄기를 따라 질풍처럼 달리다보면 어느덧 가슴 저미던 외로움도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달렸을까?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군!”

이검한은 스쳐지나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천산과 함께 세상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곤륜산은 광활하기 이를 데 없다. 곤륜산의 곳곳을 달려본 이검한이지만 지금 달리고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이검한은 자신이 너무 멀리 왔음을 깨달고 다시 고독애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구워어어억!

어디선가 한소리 괴성이 들려왔다.

(새의 울음소리인데...!)

갑자기 들려온 그 소리에 이검한은 흠칫했다. 방금 들린 날카로운 괴성은 어떤 거조(巨鳥)가 지른 것임이 분명했다.

(가 보자!)

스파앗!

다음 순간 이검한은 거의 직각으로 방향을 틀어 새의 울음소리가 들린 곳으로 날아갔다.

 

***

 

크아아! 키아아악!

나무 한 그루 나있지 않은 황량한 계곡 끝에서 두 마리의 짐승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무대로 무시무시한 격전을 벌이고 있는 놈들은 거대한 독수리와 기괴한 모습의 구렁이였다.

두 괴물 중 독수리는 온몸이 칠흑같이 검은 깃털로 덮여 있는데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무려 육장(五丈;18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했다.

 

-철익신응(鐵翼神鷹)!

 

곤륜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날개 달린 짐승들의 제왕이다.

철익신응은 천 년 이전부터 곤륜산 일대에서 꾸준히 목격되어왔다.

즉, 적어도 천 년 이상을 살아왔을 게 분명한 이 하늘의 제왕에게 대적할만한 적은 딱히 없다.

강철같은 발톱은 바위를 두부처럼 으깰 수 있으며 강력한 날개의 힘은 코끼리를 낚아 채 날아오를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곤륜산맥의 제왕으로 인정받아온 철익신응이건만 오늘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없는 강적과 조우한 상태였다.

철익신응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이무기나 용이라고 해야 어울릴 거대한 구렁이였다.

몸통의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이르는 대망(大蟒;큰 구렁이. 이무기)인데 배 부분에는 체구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여섯 개의 발까지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수련만 더 쌓으면 실제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도 있는 이 괴물의 몸뚱이는 강철인 듯 번들거리는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었다.

 

-적린화룡(赤鱗火龍)!

 

용이 아님에도 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물이다.

전설에 의하면 적린화룡은 땅 속 깊은 곳을 흐르는 화맥(火脈)의 열기를 흡수하며 승천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화맥의 화기를 흡수해온 덕분에 적린화룡의 몸 속에는 화산 하나에 필적하는 엄청난 열이 고여 있다.

그 때문에 적린화룡이 내뿜는 숨결에 섞여있는 열독(熱毒)은 무쇠를 얼음처럼 녹여버릴 정도로 뜨겁다.

무시무시한 열독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적린화룡의 몸을 덮고 있는 비늘은 강철보다 더 단단해서 도검이 불침한다. 화맥을 찾아 땅 속을 누비고 다니기 위해 무엇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 강인한 비늘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단단한 비늘 때문에 적린화룡은 불사화망(不死火蟒)이라 불리기도 한다.

카아앙!

적린화룡은 섬뜩한 괴성을 내지르며 허공에 떠있는 철익신응을 향해 커다란 입을 쩍 벌렸다.

쩌어엉! 촤아아아!

그놈이 커다란 입을 벌려 숨을 토해내자 불그스름한 기운이 수십 장까지 확 내뻗쳤다. 적린화룡이 몸속에 품고 있는 열독이 숨결을 따라 분사되는 것이다.

무쇠를 녹일 정도로 뜨거운 그 열독에 정통으로 휩쓸린다면 제 아무리 곤륜산맥의 제왕이라는 철익신응이라 해도 숯덩이가 되고 말 것이다.

카아악! 화악!

도리 없이 철익신응은 다급히 날개 짓을 해서 적린화룡이 뿜어내는 열독을 피해냈다.

하지만 철익신응의 깃털은 이미 상당 분량이 열독에 스쳐 시커멓게 그슬려져 있었다.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곤륜산의 하늘을 지배해온 제왕답지 않게 낭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지경이 되었으면서도 철익신응은 호시탐탐 적린화룡을 노리며 현장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저 괴물들을 실제로 보게 되다니...!)

계곡 한쪽의 절벽 위에 멈춰 선 이검한은 두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검한은 냉약빙이 구해다 준 고서들을 통해 적린화룡에 대해 알고 있었다.

또 곤륜산맥의 뭇 짐승들을 지배하고 있는 철익신응이 날아가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본 적도 있었다.

지금 그 두 영물이 이검한 자신의 눈앞에서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장내를 일별한 이검한은 철익신응이 불리한 싸움을 하면서도 이 계곡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검한이 서있는 곳과 맞은 편인 절벽 가운데에는 거대한 새둥지가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어지간한 초가집만한 그 둥지 안에는 보송보송한 솜털에 싸인 새끼 독수리 한 마리가 앉아서 두 눈을 동그랗게 치뜬 채 장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록 어리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송아지만한 그 새끼 독수리는 바로 철익신응의 새끼였다.

철익신응이 수백 년 만에 겨우 얻은 그 새끼를 적린화룡이 노리고 있는 것이다.

땅속 화맥의 화기를 흡수하며 살아온 적린화룡이지만 가끔은 배를 채운 먹이를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적린화룡은 철익신응의 새끼를 노리고 둥지로 접근해 온 것이고 철익신응은 필사적으로 그놈을 저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적린화룡 쪽이 유리했다.

카아아! 화아악!

적린화룡은 연신 지독한 열독을 방사하여 철익신응을 위협하며 슬금슬금 둥지가 있는 절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래지 않아 적린화룡은 둥지에 이르러 철익신응의 새끼를 집어삼키고 말 것이다.

(나쁜 놈이로군! 아무리 배가 고프기로서니 남의 귀한 자식을 잡아먹으려 들다니...!)

상황을 파악한 이검한은 분노가 치밀었다.

비록 약육강식이 자연의 철칙이라고는 하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남의 새끼를 노리는 적린화룡의 만행은 두고 볼 수가 없다.

(철익신응을 도와주자!)

이검한은 그렇게 결심했다.

그러나 상대는 도검불침의 괴물인 적린화룡이다. 어떻게 해야 놈에게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지금의 내 실력으로 적린화룡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이검한은 장내를 돌아보며 염두를 굴렸다.

(일단 적린화룡의 주의를 분산시켜보자. 그럼 철익신응이 그 틈에 공격을 해서 적린화룡은 물리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검한은 바닥에서 몇 개의 돌을 집어 들었다.

쐐액!

직후 이검한의 모습이 흐릿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장내로 날아들고 있었다.

“이거나 먹어라!”

이검한은 질풍같이 적린화룡의 옆을 스치며 그놈의 머리통을 노리고 돌을 던졌다.

터어엉!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이검한이 던진 돌이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때렸다.

비록 그 일격이 큰 타격을 주지 못했으나 적린화룡의 주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카아아아! 화악!

돌 조각에 머리를 맞자 분노한 적린화룡은 자신의 옆을 질풍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검한을 향해 열독을 토해냈다.

물론 그것에 휩쓸릴 이검한이 아니었다.

“하하! 여기다 이 바보야!”

쐐액! 텅!

이검한은 유령같이 휘돌며 재차 돌을 던져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맞추었다.

크아아앙!

두 번이나 연달아 이검한에게 우롱당한 적린화룡은 사나운 괴성을 토하며 발광했다.

마침내 그놈은 공격 대상을 철익신응에서 이검한으로 바꾸었다.

촤촤촤! 쏴아아아!

적린화룡은 거구를 끌고 이검한을 뒤쫓으며 시뻘건 열독을 연신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다.

잠시 영문을 몰라 하던 철익신응은 이내 이검한이 자신을 도와주려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쐐애애액!

다음 순간 철익신응은 이검한을 쫓아가느라 주의가 분산된 적린화룡은 향해 벼락같이 내리 꽃혔다.

적린화룡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콰드드득!

철익신응의 강철같은 발톱이 그대로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카오오오!

바위도 간단히 으깨버리는 철익신응의 무시무시한 발톱에 찍혀 두 눈이 으깨져버린 적린화룡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바둥거렸다.

그러나 저항해보기에는 이미 늦었다.

키아아악! 쏴아아아!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쥔 철익신응은 사납게 울부짖으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머리통을 잡힌 이상 적린화룡의 열독도 더 이상 철익신응을 위협하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거대한 몸뚱이를 움켜쥐고 수백 장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까마득한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철익신응은 적린화룡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있던 발톱을 풀어 버렸다.

쾅!

잠시 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적린화룡의 거구는 계곡의 바닥에 팽개쳐졌다.

길이가 십여 장이나 되는 적린화룡의 몸뚱이가 처박힌 충격은 엄청났다.

우두두두!

지축이 뒤흔들리고 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의 바닥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수백 장 높이에서 떨어진 적린화룡은 벌린 입으로 내장과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제 아무리 그놈의 몸뚱이가 도검불침이라 해도 까마득한 허공에서 떨어진 충격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워낙 껍질이 질기고 단단하여 겉보기엔 멀쩡했으나 적린화룡의 내장과 척추는 박살이 나 버린 상태였다.

“휴우, 정말 끔찍한 놈이로군!”

스스스!

이검한은 숨이 끊어진 적린화룡의 시체 옆으로 내려서며 혀를 내둘렀다.

죽어 널부러진 적린화룡의 몸뚱이는 굵기가 한 아름이 넘고 길이는 무려 십여 장에 달했다. 그 때문에 계곡 바닥에 작은 둔덕이 하나 새로 생겨난 듯이 보였다.

(저것은...!)

헌데 적린화룡의 시체를 살피던 이검한은 두 눈을 번득 빛냈다.

츠츠츠!

내장과 피를 토하고 죽은 적린화룡의 아가리 부분에서 무엇인가가 불그스름한 화광(火光)을 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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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장

 

             향로(香爐) 속의 무공비결(武功秘訣) (1)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임청우는 검댕을 얼굴에 잔뜩 바르고 비련곡을 빠져나왔다.

검댕을 묻혀 시꺼멓게 변한 임청우의 얼굴에서는 볼만한 구석이 없었다. 그저 별빛같이 초롱초롱한 눈동자만 눈에 띨 뿐이었다.

사실 얼굴에 검댕을 바르는 건 임청우에게 낯선 일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임청우의 얼굴만 보면 화를 내고 죽이려 들었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얼굴이 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철이 든 이래 임청우는 수시로 얼굴에 검댕을 바르고 잘 씻지 않았다. 검댕을 묻히면 어머니가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지 않을까 기대해서였다.

목욕은 자주 했지만 얼굴을 정성껏 씻은 기억은 거의 없는 임청우였다.

물론 얼굴에 검댕을 바른다고 해서 어머니의 학대가 줄어들지는 않았었다.

 

농산의 구석구석 모르는 곳이 없는 임청우인지라 가장 은밀한 길만 골라서 빠져 나왔다.

그 덕분인지 마면혈도와 철선동시를 만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농산을 벗어난 임청우는 서안(西安)을 목적지로 삼았다.

농산 근처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도시가 서안이다.

그 서안에 가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농산 밖의 세상은 벌써 몇 달 째 비 한 방울 떨어지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임청우는 관도(官途)로 서안까지 갈 수가 없었다. 가뭄이 계속되면서 민심이 흉흉해져 음식은 물론이고 마실 물조차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황하의 물줄기를 따라 내려갔다.

기갈이 심할 때에는 황하의 탁한 물을 들이키고 배가 고플 때는 강물이 줄어들면서 생긴 웅덩이 속에서 파닥거리는 물고기를 잡아 구워먹었다.

무작정 황하가 흘러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서 보름이 지났을 때 중원 제일의 고도(古都)인 서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삼천 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서안은 한(漢)대에는 장안(長安)으로 불렸고 당(唐)대에는 양귀비와 현종의 전설이 살아 숨 쉬었던 곳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최초로 중국을 일통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불로장생(不老長生)을 향한 집념이 피어올랐던 곳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뭄의 고통은 서안 곳곳에도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수천 년을 버텨온 고도 서안은 그 역사의 힘으로 자연의 시련마저 견디는 듯했다.

여전히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사방에서 모여드는 물자는 끊이지 않는다.

임청우는 옛 건물들로 가득 찬 서안의 풍광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인적 드문 산속 깊은 곳에 살다가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처에 나오니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하기만 한 구경거리들이다.

물론 서안은 임청우에 대해서 결코 감탄하지 않았다. 그의 몰골은 거지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낫지 않았기 때문이다.

몰골뿐 아니라 형편도 거지보다 못했다.

거지는 구걸이라도 해서 배를 채울 수 있었지만 임청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구걸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거지 역시 직업인만큼 강한 직업의식이 있어야 한다.

배가 고프다고 아무나 바가지 들고 나서서 될 수 있는 게 거지가 아니라는 것을 임청우는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도둑질을 할 수도 없었다.

민심이 흉흉한 때인 만큼 도둑질하다가 잡히는 날에는 몰매 맞아 죽기 십상이다.

실제로 임청우는 그같은 경우를 몇 번이나 목격했었다.

이처럼 임청우의 배는 하루에 한번 채워지기가 어려웠던 반면에 척포는 언제나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

게다가 놈의 식성은 까다롭기까지 하다.

그놈은 어디서든지 아침이 되면 호리병 속에서 기어 나와 머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꼬리를 흔들어 댄다.

그러면 불과 일각도 되기 전에 임청우 주변에는 수백 수천 마리의 뱀들이 몰려와 구더기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하고 척포란 놈은 오만하게 황금빛 뿔이 달린 대가리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뱀들 사이로 들어간다.

몰려온 뱀들은 가지각색의 기기묘묘한 모양과 색깔을 갖춘 독사들이었지만 척포가 가까이 가면 모두 <날 잡아 잡슈!> 하고 대가리를 바닥에 납작 붙이고 꼼짝도 않는다.

척포는 그 뱀들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와 길이가 같은 놈을 물색한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는 수백 마리의 뱀을 걸러 보낸 후 자기와 길이가 꼭 같고 굵기도 꼭 같은 독사를 발견하면 한 바퀴 빙 돌면서 원을 그린 후에 아가리를 쫙 벌려 독사의 머리부터 삼켜버린다.

임청우는 몰려왔던 뱀들이 모두 음식으로 보였지만 그 음식에 손댈 수가 없었다.

한두 마리라면 잡아서 배를 채우련만, 수백 수천 마리가 되고 보니 한 마리 먹겠다고 덤비다간 되려 먹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래저래 물과 물고기로만 배를 채웠다.

그래도 굶어죽지 않았으니 다행이랄 수 있었다.

배가 고프면 정신에서 양식을 찾을 수밖에 없다.

임청우는 농산을 떠나면서 두 권의 책을 가져오길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배가 고플 때엔 눈을 빨갛게 하고 있지도 않는 음식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속에 몰입하여 배고픔을 잊어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

 

***

 

일옹청풍일지를 펼쳐들고 중얼중얼 읽으면서 임청우는 역사의 현장인 자은사(慈恩寺)로 갔다.

그저께 저녁부터 아무 것도 구경하지 못한 배는 아예 등가죽에 붙어서 꼬르륵 소리조차 내지 못한다.

“그래도 서안에 왔으니 자은사와 대안탑(大雁塔)을 보지 않을 수 없지.”

우협 장백승으로부터 받은 후 한 번도 손에서 떼어 놓은 적이 없는 청강검이 무겁기만 했다.

하지만 자은사를 향하는 그의 발걸음에는 씩씩한 힘이 실려 있었다.

 

삼장법사(三藏法師)로 알려진 당대(唐代)의 고승 현장(玄獎)은 직접 천축으로 가서 경전을 가져와 번역했었다.

그리하여 현장은 범어로 씌여진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역경사업(譯經事業)에 있어서 구마라습(鳩摩羅什)과 함께 이대(二大) 역성(譯聖)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구마라습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백마사(白馬寺)인 반면 현장이 불경을 번역하던 곳은 바로 자은사 경내에 있는 대안탑이었다.

높이가 무려 이십일장(二十一丈;63미터)에 달하는 대안탑은 밑변이 정방형이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각뿔 형태의 독특한 외관을 하고 있다.

옛날에는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분주했을 대안탑이지만 이제는 폐쇄되고 인적이 끊어졌다.

오직 대안탑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과 자은사 승려들만이 근처를 배회할 뿐이었다.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무렵, 대안탑이 멀리 보이는 자은사 정문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서로 밀고 당기고 있었다.

“글쎄, 너 같은 거지는 절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까.”

지객승(知客僧)으로 보이는 젊은 중이 소년을 밀어내면서 소리쳤다.

소년은 왼손에 고색창연한 보검을 들고 있다.

하지만 얼굴은 검댕이 잔뜩 묻어서 눈만 반들거리고 있으며 입은 옷도 원래는 흰색이었지만 검은 색에 가깝게 변해있었다.

훤칠한 키와 손에 든 보검 외에는 거지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꾀죄죄한 몰골의 소년은 물론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밀어내려는 지객승의 손을 뿌리치며 무게 있게 말했다.

“나는 거지가 아니오. 단지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오.”

“하하하!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일 뿐이라고? 그럼 형편이 좋은 거지도 있던가?”

지객승이 큰소리로 비웃으며 다시 임청우를 밀어내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지객승의 손목을 잡고 앞으로 끔과 동시에 옆으로 슬쩍 비키며 발을 걸었다.

“어이쿠!”

지객승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엎어졌다.

“나는 스님께 구걸하지 않았소. 그런 나를 거지라고 할 수 있소? 나를 모욕한 댓가라 생각하시오.”

임청우는 빠르게 말하고 절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지객승이 씩씩거리며 일어섰을 때 임청우의 모습은 이미 절 안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거기 서라 거지새끼야!”

지객승은 발바닥에 부리나케 뒤쫓아 들어갔다.

 

일단 절 안으로 들어오고 나니 아무도 누구냐고, 왜 들어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지객승도 방향을 잘못 잡았는지, 아니면 포기해 버렸는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임청우는 느긋한 걸음으로 천년 고찰 자은사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무설전(無說殿)과 비로전(毘盧殿)을 돌아본 후에 대안탑으로 향했다.

때마침 이십장이 넘는 웅장한 대안탑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진 대안탑의 형상은 대지에 깊이 뿌리를 박은 바위산을 연상케 했다.

올려다보면 그늘이 져서 검게 보이는 대안탑이 하늘 끝까지 솟구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임청우는 그 장엄한 광경에 넋을 잃었다.

속에서 어떤 뜨거운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집을 짓는다면 저같이 천년을 갈 집을 지어야 할 것이고, 사람으로 났으면 역사에 남을 일을 해야 하리라!”

지는 석양을 보면서 야망을 일깨운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임청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흥분에 몸을 떨며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에 사로잡혔다.

다만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는 딱히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막연히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같은 기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삼장법사 현장은 대안탑에서 불경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의 뼈대를 세웠다.

삼론종(三論宗), 성실종(誠實宗), 열반종(涅槃宗), 찰론종(擦論宗), 지론종(持論宗)은 물론이고 화엄종(華嚴宗)과 법상종(法相宗)마저도 현장이 번역한 경전의 해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청우의 독백처럼 현장이 세웠던 대안탑은 천년을 가는 집이었고, 현장이 행한 바는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일이었던 것이다.

(큰일을 하리라.)

임청우는 마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자객(刺客) 형가(荊苛)가 되기라도 한 듯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사숙! 혹시 어린 거지새끼 한 놈이 이리로 오지 않았습니까?”

누군가 묻는 소리가 대안탑 근처에 있는 극락전(極樂殿) 쪽에서 들려왔다.

임청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성미 고약한 지객승이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것이다.

임청우는 황급히 숨을 곳을 찾았다.

하지만 대안탑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나무나 건물이 없었다.

타타탁!

지객승이 다른 중으로부터 임청우가 있는 곳을 알아냈는지 발걸음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임청우는 이내 지객승을 발견했지만 지객승은 아직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석양이 만든 대안탑의 그림자가 임청우를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라 모르겠다.)

상황이 급하게 되자 임청우는 출입을 금하는 붉은 줄이 쳐져있는 대안탑 안으로 재빨리 뛰어 들어갔다.

대안탑으로 들어온 즉시 문 옆의 벽에 바싹 등을 붙이고 밖의 동정을 살폈다.

“제기랄! 대체 어디로 꺼져버린 거야!”

대안탑 주변에서도 임청우를 찾지 못한 지객승은 한바탕 욕설을 퍼붓고는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임청우는 지객승을 속였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다.

밖은 아직 훤한데도 대안탑 안은 칠흑같이 어둡다. 대안탑에는 사방에 하나씩 창문이 나있지만 벽돌을 쌓아 완전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려던 임청우는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밖으로 나가봤자 잘 곳이 정해진 것도 아닌데 차라리 이 대안탑에서 자고 가면 어떨까? 여기는 아무도 오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자고 간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임청우는 밖으로부터 빛이 흘러들어오지 않아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대안탑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도 그 옛날 언젠가는 등불로 대낮처럼 밝혀졌으며 수많은 고승들이 불경을 번역하느라고 밤을 하얗게 지새웠으리라.

과거로 흘러가버린 밝음이 사라진 곳을 향해 임청우는 발걸음을 옮겼다.

조심스럽게 발끝으로 더듬어 가노라니 난간이 만져졌다.

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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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4장

 

            앙큼한 추격자

 

 

 

(심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여자임에 분명하다. 어쩐지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고...)

멀어지는 진상파를 보며 강유는 점원이 안내하는 자리로 갔다.

(확실히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다.)

안내받은 창가의 자리로 가서 앉은 강유는 진상파가 주고 간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반지의 재질은 은이고 두 마리 용의 눈 부위에 박혀있는 보석들은 질 낮은 홍옥이다.

시장에 내다팔면 아마 은자 몇 냥 받는 게 고작일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어쩐지 정감이 가는 반지다. 마치 언젠가 전에 이 반지를 보거나 만진 적이 있었던 것처럼...)

강유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홀린 듯이 쌍룡환을 살펴보았다.

(이런 게 기시감(旣視感)이라는 것일 텐데... 비록 싸구려로 보이지만 뭔가 사연이 있는 반지임에 틀림없다.)

강유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꺄악!”

“엄마야!”

“으헉!”

갑자기 주점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서 강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길을 가던 사람들과 말들이 화들짝 놀라 피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사람과 말들이 물살처럼 갈라지는 사이로 한 마리의 짐승이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몸길이가 세 자쯤인 담비인데 온몸이 황금색 털로 덮여있고 한 쌍의 눈은 타는 듯이 붉다.

그놈은 바로 구미호리 구숙정이 진상파를 추적하라고 풀어놓은 영물 담비 섬전초였다.

(별일이 다 있구나. 어떤 짐승보다 조심성이 많고 사람을 싫어하는 담비가 백주 대낮에 관도를 활보하다니...)

강유가 놀라며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는 주점 입구에 이르러 급정거했다.

킁킁!

그리고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입구로 방향을 틀었다.

“저 짐승 새끼가...”

“들어오지 마!”

“엄마야!”

주인과 점원들은 기겁하여 외치고 여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동행한 사내들에게 달라붙었다.

담비는 비록 체구는 작아도 아주 날래고 사나워서 늑대에 못지않은 맹수로 통한다.

대부분의 경우 담비가 알아서 사람을 피한다.

하지만 담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수무책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너무 날래서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담비를 두려워하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끼이...

그러거나 말거나 섬전초는 코를 벌름거리며 주점 안으로 들어왔다.

“저리가 이놈아! 나가!”

“꺼져라 이 못된 짐승!”

휙휙!

주인과 점원들은 빗자루를 휘둘러 섬전초를 주점 밖으로 쫓아내려고 했다.

휘익!

하지만 섬전초는 바람처럼 움직여 빗자루질을 피하며 주점 안쪽으로 달려 들어왔다.

“꺄악! 엄마야!”

“오... 오지마라!”

주점 안은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에게 안기며 비명을 지르고 남자들 중에서도 겁이 많은 자는 의자나 탁자 위로 뛰어올라가 피했다.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은 강유를 비롯한 몇 몇 무림인들뿐이었다.

(볼수록 맹랑한 놈이다.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다니...)

강유는 자신 쪽으로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며 저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담비가 날래고 사납다는 건 산속에서 살아온 강유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금모적안의 희귀한 담비인 섬전초의 모습에는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 면이 있었다.

강유가 신기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섬전초를 보고 있을 때였다.

섬전초의 새빨간 눈이 무언가 발견한 듯 번뜩였다.

카아!

이어 그놈은 강유의 탁자 옆에 이르러 강유를 올려다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야 임마! 언제 봤다고 나한테 시비냐?”

강유는 어이가 없어 피식 웃었다.

카아!

하지만 등을 활처럼 굽힌 섬전초는 한층 더 흉포한 표정을 지으며 강유를 노려보았다.

“조... 조심하시오 젊은이. 담비는 작다고 깔보면 안되는 위험한 짐승이오.”

“옛말에도 범 잡는 담비라는 말이 있지 않소? 몇 마리만 모이면 호랑이도 사냥한다는 무서운 놈이오.”

주변 사람들이 강유를 향해 외치며 걱정을 해주었다.

“이거 참...”

강유는 한숨을 쉬었다.

“초면인데 그렇게 까칠하게 구는 거 아니다. 좋은 말로 할 때 이빨 감춰라.”

강유가 섬전초에게 눈을 부라릴 때였다.

“이쪽이다.”

“섬전초가 주점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살기 어린 외침이 들려 강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휘익! 휙!

섬전초가 온 쪽에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바람같이 달려오는 게 보였다.

옷자락에 <鐵>자가 새겨진 무림인들이었다.

“저... 저자들은...!”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중 철위사대의 철위사들이다.”

“저 흉악한 것들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

달려오는 무사들을 본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겁에 질리고 긴장하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들에게 제왕성의 위사들은 공포의 대상이다. 시비가 붙을 경우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칫 객기를 부리거나 분을 참지 못해서 제왕성 위사들과 싸우게 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제왕성의 무시무시한 보복에 당사자는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도 살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저들이 제왕성의 철위사...)

강유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어서 적잖게 놀랐다.

소요신군 강조는 안탕산을 떠나는 강유에게 제왕성의 위사들과는 절대 충돌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었다.

섬전초를 따라온 자들은 물론 철위사대 대주 냉혈철심 사우와 철위사들이었다.

강유가 보고 있을 때 사우 일행이 주점으로 들어섰다.

주점으로 들어온 그자들은 곧 섬전초를 발견하고 강유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섬전초는 그때까지 강유 옆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다가온 사우가 음산한 눈초리로 강유의 아래위를 살피며 물었다.

강유는 한눈에 사우가 일행의 우두머리임을 알아보았다.

“진상파? 금시초문인 이름이오만...”

강유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저 새끼가 건방지게 대주님 말씀에 대꾸를...”

사우 뒤에 서있던 철위사 한 놈이 눈을 부라리며 칼을 뽑으려 하였다.

“진상파를 모른단 말이냐?”

사우는 손을 들어 그자를 자제시키며 다시 강유에게 물었다.

“그렇소. 나는 진상파라는 이름을 귀하를 통해 오늘 처음 들었소.”

강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그 직후였다.

쩍!

강유의 목에는 날카로운 검의 날이 닿아있었다.

사우가 발검하여 검을 강유의 목에 댄 것이다.

“헉!”

“저... 저런...”

주변 사람들. 특히 무림인들은 기겁하는 표정이 되었다. 사우의 발검이 너무나 빨라 눈에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주르르!

사우의 검이 강유의 목으로 조금 파고들면서 피가 배어나왔다.

(대단한 쾌검! 검을 뽑는 게 보이지도 않았다.)

강유의 표정도 조금 굳어졌다.

사우는 강유가 강호에 나와 처음 상대해보는 일류고수였다.

실제로 철위사대의 대주인 사우의 실력은 강유의 아버지이며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와 비교해도 그리 아래가 아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놈 진상파와 무슨 관계냐?”

검을 강유의 목에 댄 채 사우가 음산한 어조로 물었다.

“나도 물읍시다.”

강유는 목에 검이 닿아있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우를 올려다보았다.

“뭐라?”

“저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군.”

보고 있던 철위사들이 눈을 부라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유는 무뚝뚝한 어조로 사우에게 말했다.

“귀하는 내가 왜 진상파라는 여인과 관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거요?”

“속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영물중의 영물인 섬전초는 희미하게 남아있는 진상파의 냄새만 맡고도 삼백여리를 달려왔으니...”

사우는 스산한 냉기가 느껴지는 눈초리로 강유를 노려보았다.

(그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였군.)

강유는 비로소 자신에게 쌍룡환을 주고 간 여자의 이름이 진상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녀가 대륙의 상계를 지배하고 있는 황금성의 성주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내게서 진상파란 여자의 냄새가 난다는 거요?”

강유는 동요하지 않고 물었다.

“그렇다. 네놈은 어떤 식으로든 진상파와 관련이 있...”

거기까지 말하던 사우는 멈칫 하며 강유의 뒤를 보았다.

끼기! 끼!

섬전초가 다른 좌석으로 가서 기웃거리며 냄새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그 좌석에서 국수를 먹었었다.

“히익!”

“저... 저리 가!”

섬전초가 살피고 있는 자리 근처의 사람들이 기겁하며 비명을 지른다.

“저놈이 왜 저러지?”

“저 자리에서도 진소저의 냄새가 나는 건가?”

다른 좌석에 코를 대고 킁킁 거리는 섬전초를 보며 사우와 철위사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소... 소인은 이 가게의 주인 장씨입니다요.”

그때 주인이 용기를 내서 나섰다.

“어떤 소저가 얼마 전 저희 가게에 들렸다 갔는데 저 담비 놈이 그 냄새를 맡고 들어온 듯합니다요.”

주인은 비지땀을 흘리며 섬전초를 가리켰다.

“그럼 섬전초가 멍청한 짓을 했다는 건가?”

“주점 안에 남아있는 진소저의 냄새를 오인해서 들어왔구나.”

상황을 파악한 사우와 철위사들이 난감해할 때였다.

끼이!

진상파가 앉아있던 자리 여기저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던 섬전초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휘익!

코를 허공에 대고 벌름거리던 그놈은 바람같이 주점 입구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급히 피해주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젠장! 헛걸음 했다.”

“저놈이 엉뚱한 짓을 했군.”

“가자!”

철위사들은 섬전초를 따라 급히 주점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사우도 강유의 목에서 검을 떼었다.

“바짝 따라붙어라. 또 놓치면 안된다.”

철컹!

사우는 검을 칼집에 꽂으며 먼저 주점을 빠져나가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귀하의 이름이나 압시다.”

강유는 목의 상처에서 나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수하들을 따라 주점에서 나가려던 사우는 멈칫 하며 돌아보았다.

“이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은 해야 하지 않겠소이까?”

강유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좌에게 앙심이라도 품었다는 거냐?”

사우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강유는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고 말없이 그자를 바라보았다.

(안... 안돼!)

(상대는 제왕성의 철위사야!)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사우와 강유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제왕성과 척을 지고도 무사할 수 없는 게 당금 무림의 현실이다.

(저 벽창호가... 가게 안에서 칼부림이 나면 장사에 지장이 있을까봐 힘들게 무마시켰건만...)

주점의 주인 역시 원망스런 표정으로 강유를 흘겨볼 때였다.

“어린놈의 용기가 가상해서 본좌가 누군지 알려주마. 본좌는 제왕성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다!”

사우가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 냉혈철심 사우!)

(맙소사! 평범한 철위사가 아니라 철위사대의 수령이었구나.)

(구대문파 장문인들도 저자와 싸우면 이긴다고 자신하지 못한다는데...)

사우의 정체를 안 무림인들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었다.

냉혈철심이라는 별호답게 사우는 적을 대함에 있어서 피도 눈물도 없는 인물이다.

일단 시비가 붙으면 기어코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그 때문에 설령 사우보다 무공이 높은 고수라도 사우와 싸우는 것은 꺼려한다.

“피를 본 게 억울하면 언제든지 본좌를 찾아와라. 상대해 줄 테니...”

사우는 음산하게 웃으며 주점에서 나갔다.

휘익!

그리고는 앞서 주점을 나간 수하들의 뒤를 따라 날아갔다.

“에휴! 십년 감수했구만.”

“하여간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주점 안의 사람들은 비로소 안도하며 참았던 숨을 토해내었다.

“하여간 요즘 제왕성의 인간들은 호환마마보다 무서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상대와 이유를 불문하고 도륙한다잖아.”

“마교와 혈교를 절멸시켜 세상을 구한 제왕성이 저렇게 패도적인 세력으로 변질될 줄 누가 알았겠나?”

“십팔 년 전부터는 제왕성에 밉보이고 무사한 인간이나 문파가 없잖아.”

“진짜 문제는 제왕성의 폭압을 견제할 세력이 없다는 점이야.”

“하긴 황실도 제왕성의 눈치를 본다더만...”

제왕성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을 쏟아내던 사람들은 흠칫했다.

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 때문이다

“이보게 젊은이, 화가 나더라도 참게나.”

“냉혈철심 사우를 만나고도 그 정도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사우가 인간백정이라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라고...”

손님들, 그중에서도 특히 무림인들이 입구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강유에게 충고를 했다.

(진상파라고 했지?)

하지만 강유는 그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서둘러 주점을 나섰다.

(그 여자,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제왕성의 표적이 되었다. 잠깐이나마 인연이 있었던 여자인데 위험에 빠진 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휘익!

주점을 나온 강유는 사우 일행이 간 쪽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저 어린 친구가 혈기를 못 참고 일을 저지르려는 모양이구만.”

“안됐어. 제왕성에 죄를 짓고도 살아난 사람이 없는데...”

삽시에 멀어지는 강유를 보며 주점 안의 무림인들은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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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3장

 

             요동치는 정세

 

 

강미루의 부축을 받으며 오두막으로 돌아온 백남빈은 그녀의 볼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강미루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버렸다.

강미루는 다시 입을 맞추려고 내미는 백남빈의 입에 불쑥 과일을 갖다 대었다.

백남빈이 말없이 웃으며 과일을 받아먹었다.

상큼한 즙과 함께 과육이 녹듯이 넘어가 버렸다.

(잘 익은 감과 비슷한 맛이로구나.)

백남빈은 과일을 하나 더 집어 입에 가져갔다. 왕성한 식욕이 그의 몸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말해준다.

게걸스럽게 과일을 먹던 백남빈은 과일 하나를 집어 그때까지 미소를 띤 채 보고만 있는 강미루에게 건네주었다.

강미루도 그제야 과일을 먹으며 허기를 채웠다.

 

두 사람의 상처는 놀라울 만치 회복이 빨랐다.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는 온천에서 나왔을 무렵에 벌써 아물고 있었고, 강미루의 상처도 새살이 돋아나 있었다.

 

***

 

백남빈과 강미루가 창평곡에서 청춘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무렵 신랑성의 도발은 시작되고 있었다.

토곤이 신랑성으로 하여금 오이라트 기마군단의 남침을 위한 통로의 개척을 명령한 것이다.

대규모의 기마군단이 만리장성을 넘으려면 장애물의 제거가 선결되어야만 한다.

신랑성의 고수들은 하북(河北)과 산서(山西)의 몇 군데 요충지를 목표로 쇄도해왔다.

만리장성 일대를 지키고 있던 명나라 군대가 저지에 나섰지만 하나같이 일류고수들인 신랑성의 정예들을 막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명나라 군부는 무황성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황성이 북경 북쪽에 자리를 잡은 것은 이런 사태를 대비해서였으며 지금까지는 매번 몽고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성공해왔었다.

하지만 지금의 무황성은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황성의 당대 성주 주진충은 오래전부터 무황성 깊은 곳에 은거한 채 무림의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있다.

대신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 왕소군이 무황성을 관장해오고 있다.

하지만 왕소군은 무황성 상하(上下)로부터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여자인지라 대국적인 안목이 없는데다가 측근들만 중용하고 방탕하여 무황성의 화합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왕소군의 실정으로 인해 무황성의 강대한 힘은 결집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신랑성으로서는 더 할 나위없는 좋은 기회였다.

토곤이 전면적인 중원 침공을 시도하게 된 데에는 무황성의 쇠락도 중요한 원인이었다.

무황성으로서는 명나라 군부의 지원요청을 받았으니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상관없이 자존심만은 하늘을 찌를 듯한 왕소군은 신랑성과의 일전불사를 외치며 각처의 분타에 명령을 내렸다.

이에 하북과 산서성의 각지에서 신랑성과 무황성의 고수들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격화되면서 왕소군은 은거 중인 남편 주진충을 찾아가 대책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오직 한마디만을 들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그대가 알아서 하라."

 

***

 

-유우겸(劉盂兼)!

 

육순에 접어든 그는 진정한 의인(義人)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국조미랑 왕소군의 지도력 부재와 방탕으로 인해 무너지려는 무황성을 애써 지탱하고 있는 것이 의열전(義烈殿)의 전주인 유우겸이었다.

의열전은 중원 밖의 세력들을 상대하기 위해 설치된 무황성의 가장 강력한 조직이다. 철령보도 공식적으로는 의열전에 속해 있을 정도다.

왕소군은 그 철령보로부터 날아든 전서구의 내용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의열전을 맡고 있는 유우겸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침공이 임박했다는 독안룡 이탁의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자신의 권한 내에서 하북과 산서 일대의 분타에 경계령을 발동했다.

그 덕분에 만리장성을 뚫고 내려온 신랑성의 세력을 하북과 산서의 분타들이 제 때 요격할 수 있었다.

비록 의열전주 유우겸의 힘이 강력하기는 하지만 무황성의 대세를 주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무황성에서 중원 내부를 관장하는 조직인 군림전(君臨殿)의 전주 예운림(睿雲林)이란 자가 야욕을 품고 왕소군을 방조하고 있는 때문이다.

 

근래 들어 흰머리가 부쩍 늘어난 유우겸은 의열전의 태사의에 깊이 몸을 묻고 있었다.

몸이 묻힌 만큼이나 그의 고심의 깊이도 깊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신랑성과 정면으로 맞선다면 우리 무황성은 기필코 패배하고 만다."

유우겸이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스으!

그의 뒤로 백의의 문사 차림인 중년인이 유령처럼 나타났다.

"유전주, 꼭 그렇지 만도 않소이다."

갑작스런 백의문사의 등장이지만 유우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사의에 더욱 깊이 몸을 묻었다.

"남궁대협(南宮大俠)! 군림전주 예운림의 숨겨진 힘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오?"

유우겸의 말에 남궁대협이라 불린 백의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무황성의 쟁쟁한 인물들치고 자기 세력을 암암리에 키워 오지 않은 자가 없지 않소이까?"

백의문사의 말을 들은 유우겸은 탄식했다.

"세상에 알려진 무황성의 힘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노부가 어찌 모르겠소? 하지만 외세의 침공에 맞서기 위해 그 누가 앞장서서 자신의 힘을 소비하려 들겠소?"

"사실이 그렇긴 하오. 그래도 무황이 검을 높이 들기만 하면 무황성의 모든 힘이 다시 결집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역시 무황과 그의 후처인 국조미랑 왕소군이오."

백의문사의 말을 받아 유우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남궁대협. 노부의 집안은 대대로 무황성에 충성을 바쳐왔소. 노부는 감히 성주와 주모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소이다."

"무황성의 충신인 유전주의 입장은 이해하오."

백의문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우겸은 자세를 바로 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는 없소. 남궁대협께서 노부를 도와주기만 하신다면 토곤의 야심을 꺾을 가능성은 충분하오."

 

무황성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유우겸과 백의문사의 밀담은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어졌다.

헌데 남궁대협이라고 불린 백의문사는 대체 누구이기에 무황성의 기둥인 의열전 전주가 이토록 의지하고 있는 것인가?

모를 일이다.

 

***

 

창평곡의 아침은 푸른색 온천수로 채워져 있는 연못 녹지(綠池)에 반사된 햇살에 서쪽 절벽이 아롱지며 시작된다.

흑왕은 언제 일어났는지 남쪽의 풀밭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백남빈은 나른한 몸을 일으키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맞은편 구석에는 강미루가 고개를 백남빈쪽으로 돌린 채 곤히 자고 있었다.

누추한 차림도 선녀같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감하지는 못한다.

가슴이 뜨거워진 백남빈이 상아같은 뺨에 살짝 입술을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 봄 햇살 같은 미소가 번진다.

그러면서도 피곤했는지 쉽사리 깨어나지는 못하는 강미루다.

 

"정말 세상 밖에 서야만 세상을 잊게 되는구나."

혼자 오두막 밖으로 나선 백남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창평곡의 아침은 세외선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화창한 날씨에 아름다운 계곡은 사람으로 하여금 세속의 모든 욕심을 잊게 한다.

“아아아!”

기분이 고조된 백남빈은 크게 한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북쪽 숲에서는 새들이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고성에 놀라 푸드득거리며 날아올랐다.

 

***

 

백남빈의 고함을 들은 것은 비단 새들만이 아니었다.

(내공의 바탕이 반석(盤石)같은 자다.)

신가람은 멀리서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 같은 고함을 듣고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거리가 먼 때문인지, 아니면 진법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지만 방금 전의 장소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내공이 심후한 신가람을 제외하면 계곡 밖에 대기하고 있는 대려장 무사들 중 누구도 그 고함소리를 듣지 못했다.

비록 소리는 작게 들렸지만 지축이 순간적으로 흔들 하는 것을 신가람은 감지했다.

마치 항아리같은 지형인 창평곡의 특성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신가람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고함 소리 한 번에 지축을 뒤흔드는 힘을 지닌 인간이 존재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대사형(大師兄)이라면 가능하겠지만...)

신가람은 오래 전부터 연락이 끊긴 한 인물을 떠올렸다.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그 인물이라면 방금 전에 느꼈던 것보다 몇 배 더 강력한 진동을 일으키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아직 치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젊은 놈의 장소성이었으니 대사형은 아니다.)

신가람은 고함이 들려온 쪽을 가늠하며 미간을 모았다.

철부지 처제가 실종된 근처에 젊은 사내놈이 함께 있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 점이 신가람의 불안을 가중시켰다.

 

신가람이 파진을 시도한 후로 이미 닷새가 지났다.

그동안 신가람은 미혼진을 칠할 넘게 파진하는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진법에 빠져 실종되었던 네 명의 대려장 무사들을 발견했다.

네 명중 둘은 탈진한 상태로 발견되었지만 두 명은 이미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공포에 질려 들고 뛰다가 바위에 부딪히고 절벽에서 떨어져 버린 것이다.

(방금 전의 고함 덕분에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있어서 미혼진의 파진이 좀 더 쉽게 되었다.)

닷새 넘게 깎지 않은 수염으로 덥수룩해진 턱을 만지며 신가람은 걸음을 옮겼다.

백남빈이 지른 고함이 신가람에게는 지남철(指南鐵)의 역할을 해준 것이다.

 

그리하여 신가람은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지났을 때 지난 닷새 동안 자신을 곤혹하게 만들었던 미혼진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미혼진을 벗어나자 전혀 다른 진법이 또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듣도 보도 못한 이매망량(魑鬽魍魎)들이 사방에서 신가람을 위협하며 덮쳐들었다.

미혼진에 이어 산백진(散魄陣)이 신가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

 

"삐익!"

한 차례 고함을 지른 후 백남빈은 휘파람을 불어 흑왕을 불렀다.

그리고는 껑충거리며 다가온 흑왕을 타고 그리 넓지 않은 분지를 신바람 나게 몇 바퀴 돌았다.

흑왕과의 아침 산책은 상처가 완쾌된 이후로 매일같이 행하는 일과였다.

 

곤히 잠들었던 강미루도 백남빈의 고함소리에 깨어났다.

서둘러 녹지로 가서 세수를 한 그녀는 가지가지의 과일을 꺼내어 돌탁자 위에 놓았다.

때맞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오두막으로 들어온 백남빈이 탁자 앞에 앉았다.

이곳 창평곡은 아무래도 너무 따뜻해서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땀이 나곤했다.

"잘 잤어요 아름다운 아가씨?"

백남빈이 친근감을 표시하며 아침인사를 했다. 창평곡에 들어오기 전의 백남빈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능글맞은 수작이다.

"네! 공자님!"

하지만 강미루는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엿새간 두 사람은 부부처럼 지내왔다.

서로를 전적으로 의지했고 서로가 없으면 단 한시도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이다.

그렇긴 해도 두 사람은 마지막 일선만은 지켰다.

비록 한 지붕 아래 몸을 눕히는 사이가 되었지만 가벼운 애정표현 이상은 하지 않아온 것이다.

 

과일로 아침을 대신하고 두 사람은 동쪽절벽으로 갔다.

동쪽절벽은 백남빈이 내려왔던 곳이다.

당연히 나가는 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그동안 집중적으로 살펴보았었다.

하지만 끝내 길같은 것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틀림없이 그곳에 출로가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백남빈이었다.

한참 동안 바위들 사이로 이리저리 돌아보고 두드려 보고 하다가 지친 두 사람은 적당한 바위에 앉아 땀을 식혔다.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묶은 강미루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이 불때마다 일렁거려서 그림자가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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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장

 

            내 아들이 아니다!

 

 

"으음!"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당혜선이 힘겹게 눈을 떴다.

"어머니...!"

고검추는 안도하며 당혜선의 무참한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내가... 죽지 않았다니...)

당혜선은 고검추의 품에 안긴 채 망연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게 믿기지 않는 그녀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방금 전 자신에게 벌어졌던 끔찍한 만행을 떠올리며 바르르 떨었다.

주르르!

당혜선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배어 눈 꼬리를 타고 좌우로 흘러내렸다.

"흐윽... 추아야."

당혜선은 오열하며 고검추의 품에 안겼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고검추도 분노와 회한에 오열을 느끼며 당혜선을 끌어안았다.

아들이 되어서 어머니가 무참한 만행을 당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고검추의 가슴을 후벼파고 있었다.

두 모자의 뜨거운 오열은 어두워지는 청룡탄 위를 서럽게 물들였다.

 

***

 

“역시 생각한 대로다!”

사신각주의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그자는 만행이 벌어졌던 단애가 내려다보이는 산봉우리에 서있었다. 거리는 대략 삼리 정도다.

“아랫놈들이 수집해온 첩보에 의하면 당가년에게는 아들이 있었다. 그놈의 성이 고씨인 걸 보면 철사자 고창룡의 아들인 게 분명하다. 당가년이 사람들 눈을 피해 고창룡과 붙어먹었다가 생긴 놈일 테고...”

사신각주는 삼리 쯤 떨어진 단애 위를 노려보며 흥분에 휩싸였다.

밤이고 제법 거리가 멀지만 사신각주의 눈에는 고검추와 당혜선이 서로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창룡의 아들까지 낳았다면 당가년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흐흐흐!”

사신각주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당가년이 아무리 독해도 복마신검을 아들의 목숨과 바꾸진 못할 것이다!”

사신각주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그자는 당혜선이 아들을 데리고 선녀곡을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당혜선의 아들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혜선을 고문한 후 초혼전으로 죽인 척 하고 현장을 떠났었다.

당혜선이 죽어가는 걸 보면 숨어있던 당혜선의 아들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계산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신각주의 예상대로 마침내 고검추가 숨어있던 은밀한 동굴을 나와 모습을 드러냈다.

고검추를 잡아서 협박하면 독하기 이를 데 없던 당혜선도 어쩔 수 없이 복마신검의 행방을 실토하게 될 것이다.

“드디어 사신검 중 하나가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구나.”

사신각주는 득의하며 단애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멀리서 새 울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 사신각주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삐익! 삑!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는 이곳저곳에서 연이어 들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영락없이 새 울음소리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사신각주의 귀에는 새가 우는 것같은 그 소리들에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 들렸다.

“대늙은이가 서남쪽에서 급속 접근중... 일백을 셀 정도의 시간 안에 내가 있는 이곳까지 도착할 예정...”

새가 우는 것같은 소리들을 해석하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가장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진 때문이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린 가공할 인물이 급속 접근중이다.

어물쩍거리다가는 그 인물의 눈에 포착되어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당연히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를 생포할 시간 따위는 없다.

“똥물에 빠져 죽을 늙은이...”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부득 갈며 서남쪽을 돌아보았다.

삐익! 삑!

새 우는 것같은 피리소리들이 점점 더 급박해지고 멀리고 허떤 인물이 한 가닥 유성처럼 날아오는 게 보인다.

“대늙은이! 오늘 진 빚은 반드시 갚고 말겠다!”

팟!

사신각주는 저주를 내뱉으며 날아올랐다.

사신검 중 하나를 손에 넣기 직전이었지만 목숨이 더 중요하니 포기해야만 한다.

속이 너무도 쓰리고 쓰린 사신각주였다.

곧 사신각주의 모습은 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

 

단애 위에서는 한 차례 격정의 물결이 지나갔다.

"지금부터 어미가 하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알몸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당혜선은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예...!"

고검추는 무릎을 꿇고 당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나는 사실...”

당혜선은 내적인 갈등이 심한 듯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윽고 당혜선은 본론을 꺼냈는데 그것을 듣는 순간 고검추는 하마터면 기함(氣陷)할 뻔했다.

"나는... 사실 너를 낳은 생모(生母)가 아니다."

당혜선의 말은 이러했기 때문이다.

"무슨... 지금 무슨 말씀을..."

고검추는 숨이 막혀 꺽꺽거렸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에 귀가 멍멍해지고 주변 사물이 제멋대로 이지러지는 듯했다.

이제껏 유일한 피붙이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혜선이 자신의 생모가 아니라는 것이 아닌가?

당혜선은 혼란이 극에 달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고검추를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내게는 인중지룡인 사형이 한 분 계셨다. 너는 바로 그 분의 아들이다."

"어... 어머니의 사형 되시는 분이 제 아버지란 말씀입니까?"

고검추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헉헉 대며 물었다.

당혜선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 분의 성함은 고창룡... 무림인들은 그 분에게 철사자라는 별호를 지어 주셨다. 그만큼 의지견정하고 용맹한 분이셨지."

"고... 고창룡이라고 하셨습니까?"

고검추는 온몸을 떨며 되물었다.

그런 그의 반응에 당혜선은 흠칫했다.

"어... 어디서 그 분의 성함을 들은 적이 있느냐?"

"저녁 무렵에 옥여상이란 분을 만났었습니다."

고검추는 정신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옥여상!"

당혜선의 안색이 일변하고 두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만큼 옥여상이란 이름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분을 아십니까?"

당혜선이 놀라는 모습을 본 고검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이다. 무림인 된 자 치고 희세의 마녀 은발마희(銀髮魔姬) 옥여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혜선은 정신을 가다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옥부인이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습니까?"

놀라는 고검추에게 당혜선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설명해주었다.

"옥여상은 당금 무림의 최강자들인 우내팔강(宇內八强)의 일인이며 마도 무림의 맹주격인 마천루(魔天樓)라는 문파의 지존이기도 하다."

"아!"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한 탄성을 발했다.

옥여상이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무림에서 가장 강한 여덟 사람에 들며 또 거칠고 사나운 마도 무림을 다스리는 마천루라는 문파의 주인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실제로 은발마희 옥여상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무림인들은 사색이 된다.

그녀는 냉혹 비정한 성정을 지녀서 눈에 거스르는 자는 가차 없이 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나이는 비록 삼십대이지만 그녀와 겨룰 수 있는 고수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다섯 명이 채 안된다.

(내게는 더할 수 없이 다정하게 대하신 분인데... 사실은 마녀같은 존재였구나.)

고검추는 인간 세상의 존재같지 않았던 옥여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등줄기로 찌릿한 전율이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옥여상에게 은발의 마희라는 별호가 붙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혜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옥여상이 왜 고검추 자신에게는 그토록 다정하게 대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고검추였다.

"그 마녀가 네 아버지에 대해 무어라 말하더냐?"

당혜선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검추에게 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소자에게 고창룡이란 분을 아느냐고 묻기만 하셨습니다."

"으음..."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당혜선은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잠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마음 속에서 격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렸다.

이윽고 당혜선은 결심한 듯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어미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낙망해서는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고검추는 고개를 숙였다.

생모로 믿어온 당혜선이 졸지에 아버지의 사매, 즉 사고(師姑)로 변한 마당에 더 놀랄 것도 없었다.

"네게는 아버지시고 어미에게는 사형되시는 그 분은 아주 악독한 음모에 희생당해 돌아가셨다."

당혜선은 처연한 표정으로 고검추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철사자 고창룡에 연루된 그 치욕스런 비사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고창룡이 어느 날 갑자기 미쳐서 사모인 다정관음 능벽운을 능욕한 일, 그 직후에 죄책감을 느껴 자결한 일등을...

 

-날수비연(辣手霜娥)

 

이것이 당혜선의 별호다.

사천당문(四川唐門) 출신인 그녀도 호천무맹의 맹주 십자검존의 제자였다.

호천무맹에서 사천당문이 맡은 역할은 매우 크다. 독과 암기와 관련된 모든 사안은 사천당문이 처리하기 때문이다.

십자검존은 사천당문이 호천무맹에 헌신한 보답으로 당씨일족의 여식인 당혜선을 제자로 삼아준 것이다.

당혜선과 고창룡 외에도 십자검존에게는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다.

그 중 막내가 당혜선이 고검추로 하여금 찾아가라고 했던 철봉황 고현경이란 여인이다.

당혜선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대사형인 고창룡과 함께 생활했다.

자연스럽게 당혜선은 고창룡에게 연심(戀心)을 품게 되었다.

잘 생겼고 다정다감하며 수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라는 평가를 받는 고창룡이었다.

그런 그를 지척에서 보고 자랐으면서 반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당혜선에게는 불운하게도 고창룡은 그녀를 그저 귀여운 누이동생 정도로 여겼다.

그 때문에 당혜선은 혼자 가슴을 태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애정은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대사형 고창룡에게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려군(代麗君)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 여인은 신분과 출신내력 모두가 비밀에 싸여 있었다.

분명한 것은 대려군이 대단한 미모와 무공을 지녔다는 사실이었다.

고창룡과 대려군은 우연히 마주쳤으며 만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 사실을 안 당혜선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찢어지는 듯한 속내를 감추고 사형 부부의 결합을 축하해 주었다. 그녀가 보기에도 고창룡과 대려군은 인간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비록 연인을 빼앗아간 연적이긴 해도 대려군의 고고한 기품과 다정한 마음씨에 반한 당혜선은 그녀를 친언니같이 여겼다.

호천무맹의 사람들 몰래 고창룡과 대려군의 보금자리를 마련해 준 것도 당혜선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당혜선 자신도 그들의 보금자리에서 함께 기거했다. 언젠가는 사형이 자신에게도 사랑의 손길을 벋어 줄 것을 기대하고...

세 남녀는 꿈같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윽고 대려군은 고창룡과의 사랑의 결실을 잉태하였다.

비극이 벌어진 것은 대려군이 임신한 지 팔 개월 째 되던 때였다.

고창룡이 갑자기 미쳐서 언어도단의 패륜을 자행한 후 자결한 것이다.

그 일은 당혜선에게는 물론 대려군에게도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남편이 저지른 짐승만도 못한 난륜을 전해들은 대려군은 극도의 상심에 빠졌으며 그 충격으로 두 달 빨리 사내아이를 분만했다.

그 사내아이는 물론 고검추였다.

 

<세상 모든 사내를 저주하겠다!>

 

대려군은 출산한 직후 그같은 저주를 남기고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핏덩이인 아들까지 내팽개친 채...

당혜선은 어쩔 수 없이 고아가 된 고검추를 기르게 되었다.

그리고 고검추가 대사형 고창룡의 아들임이 알려지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몰래 호천무맹을 떠나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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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장

 

             장춘곡의 남녀

 

 

초가집 내부는 단촐하고 검박(儉朴)했다. 장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나무로 깎아 만든 소박한 가구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다.

방 중앙에는 나무로 만든 큼직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앞에는 특이한 외모를 지닌 여인이 앉아 있다.

먼저 여인의 체격이 확 눈에 뛴다.

그녀는 무려 칠척이나 되는 거구를 지녀서 의자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앉은키가 보통 사람의 선 키 만하다.

팔 하나가 어지간한 장정의 허벅지같이 우람하고 청동으로 빚은 듯 강인한 인상을 풍겨 마치 전쟁의 여신이 강림한 듯하다.

그러면서도 여인은 결코 우락부락하거나 추하지가 않다. 비록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긴 하지만 단정한 선과 적절한 조화를 이룬 얼굴은 경국지색이란 말이 지나치지 않을 정도다.

어마어마하게 큰 체구 역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넉넉한 저고리에 감싸인 젖가슴은 숨이 막힐 정도로 크지만 허리는 확실히 들어갔고 비록 엄청나게 굵기는 해도 두 다리 역시 늘씬하여 절로 시선을 잡아끈다.

이런 특이한 분위기를 지닌 여인은 하늘 아래 단 한 명뿐일 것이다.

 

-전모 냉약빙!

 

바로 그녀였다.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 연남천을 오라비로 두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여인인...

십사 년의 세월이 흘러 냉약빙의 나이도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십사 년 전 그대로였다.

얼굴뿐 아니라 몸매도 거의 변화가 없다. 아이를 낳은 적도 없고 또 내공이 정심한 덕분에 그녀는 여전히 이십대 초반의 젊은 처자로 보인다.

잔혹한 세월의 흐름도 전쟁의 여신같은 그녀의 모습에는 거의 흔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있어. 석련(石蓮)의 잎사귀!”

질풍같이 초가집 안으로 들어선 단삼의 소년은 약간 숨이 거칠어진 채 연꽃 잎사귀 하나를 냉약빙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미는 것은 석련이라는 바위에 피는 희귀한 연꽃의 잎사귀였다.

석련은 곤륜산의 특산으로 이곳 장춘곡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석룡벽(石龍壁)이라는 곳에서만 자생한다.

헌데 단삼소년은 일다경도 채 안되는 시간 동안 왕복 육십여 리나 되는 그 석룡벽까지 달려가서 연꽃잎을 따온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빠르기의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겨우 육십 리를 왕복한 정도로 호흡이 거칠어지다니... 제대로 전궁만리비의 경공을 시전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냉약빙은 단삼소년을 바라보며 준엄한 표정을 지었다.

“헤헤, 좀 봐줘 누나. 다음에는 잘 할게!”

단삼소년은 혀를 낼름 내밀며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소년의 그런 모습은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해 보인다. 그것은 소년에게 냉약빙은 이 세상에서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상대이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봐라! 빗물이 묻었는지 보자.”

냉약빙은 소년을 손가락을 까닥거려 불렀다.

“만일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묻었다면 앞으로 삼 일 간 면벽폐관 해야만 한다.”

냉약빙의 엄한 음성에 소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오...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돼?”

소년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비실비실 뒷걸음질 쳤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을 달려왔는데 빗방울이 몸에 묻었는지를 조사하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닌가?

사실 경신술이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빠른 속도 때문에 몸 주위에 진공의 막이 생겨 빗물이 침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같은 경지에 이른 경신술의 대가는 전 무림을 통틀어도 냉약빙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냉약빙은 아직 어린 소년에게 자신과 같은 수준의 경신술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꾀를 부려도 소용없다.”

스윽!

냉약빙은 준엄하게 말하며 천천히 거구를 일으켰다. 비록 단삼 소년이 육척에 가까운 키를 지녔지만 냉약빙이 몸을 일으키자 어린 아이처럼 작게 느껴진다.

“아이쿠!”

피잉!

단삼소년은 냉약빙이 자신을 잡으려고 하자 비명을 지르며 맹렬하게 초가집 밖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어딜!”

콱!

하지만 냉약빙의 차가운 교갈이 일며 소년의 오른쪽 손목이 마치 솥뚜껑같이 큼직한 손에 움켜쥐어졌다. 비록 소년의 몸놀림이 경이적으로 빠르긴 했지만 아직은 천하에서 가장 빠르다는 냉약빙을 능가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에이! 잡히고 말았네!”

소년은 냉약빙의 커다란 손에 손목을 잡힌 채 입을 삐죽거렸다.

“네 녀석이 뛰어봤자 벼룩이지!”

스슥!

눈을 흘기는 냉약빙의 큼직한 손이 빛살같이 빠르게 소년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행여 소년의 몸에 빗물이 한 방울이라도 튀었을까 조사하는 것이었다.

헌데 냉약빙의 손이 막 소년의 사타구니 부분을 쓰다듬고 지나갈 때였다.

(아이쿠!)

소년은 얼굴이 화끈 붉어지며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사내아이가 십대 후반의 나이라면 한창 양기가 충천할 때다. 솥뚜껑같이 큼직하지만 어쨌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사타구니를 더듬자 자신도 모르게 하체 일부가 불끈 곤두선 것이었다.

“...!”

한 겹의 얇은 옷 사이로 느껴지는 큼직하고 단단한 불기둥의 느낌에 냉약빙도 순간적으로 당황하여 움찔했다.

“헤헷! 기회당!”

스팟!

소년은 장난스런 웃음소리와 함께 제압당한 손목을 미꾸라지처럼 냉약빙의 손에서 빼내며 문밖으로 날아갔다.

“검한(劒恨)아!”

냉약빙은 급히 달아나는 소년을 불렀다.

그러나 소년의 모습은 순식간에 퍼붓는 빗줄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헤헤! 할아버지에게 다녀올 게!”

멀리서 소년의 장난기 서린 음성만이 여운을 끌며 들려올 뿐이었다.

“휴!”

냉약빙은 고개를 저으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 살짝 홍조가 감돌았다.

(검한이도 어느덧 어른이 되어가는구나.)

냉약빙은 소년의 늠름한 실체를 만졌던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그 튼튼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손바닥에 생생이 남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삼 년 전부터는 혼자 목욕을 하겠다고 했었지!)

삼 년 전까지만 해도 냉약빙은 직접 소년을 목욕시켜주곤 했었다.

소년도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돌봐준 냉약빙이 몸을 닦아주는 걸 당연하게 여겼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쪼그려 앉아서 근육이 아직 붙지 않은 소년의 여린 몸을 닦아주는 게 냉약빙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비록 처녀의 몸이지만 소년을 통해서 육아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삼 년 전부터 소년은 냉약빙과 함께 목욕하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면 그 무렵 귀엽기만 하던 소년의 몸에 변화가 생겼었다. 목소리도 좀 굵어지고 맨숭맨숭하던 불두덩에 가뭇가뭇 어른의 흔적이 나타났던 것이다.

아장아장 걷던 아이의 키가 어느덧 오척을 넘겼고 뼈대도 제법 굵어졌지만 냉약빙은 별 생각없이 씻겨주었었다.

그전까지는 냉약빙이 고추를 만지고 사타구니 구석구석을 닦아줘도 신경 쓰지 않던 녀석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소년은 냉약빙의 손길이 아랫도리 쪽으로 접근하면 두 손으로 사타구니를 가리며 몸을 배배 꼬곤 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삼 년 전부터 소년은 혼자 목욕하겠다고 선언했다.

냉약빙으로서도 소년의 성장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어쩔 수 없이 소년을 직접 목욕시켜주는 걸 그만 두었었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난 지금 소년의 몸에서는 성인의 모습이 문득 문득 느껴졌다.

방금 전 사타구니를 더듬다가 만져본 소년의 몸 가락은 이미 더 이상 어린 아이의 귀여운 고추가 아니었다. 얼추 느끼기에도 한 뼘은 충분히 됨직한 튼실한 양물이었다.

(세월 한 번 빠르구나. 기련산에서 어린 검한이를 거둔 것이 벌써 십사 년 전의 일이라니...!)

소년의 양물의 감촉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냉약빙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초가집 밖으로 달아난 소년은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고독마야는 자신의 후계자로 삼은 소년에게 검한(劒恨)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도검(刀劍)에 운명을 건 자신의 지난 생애를 한스럽게 생각해온 고독마야로서는 소년이 무림인으로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사방무신 중 한명이었던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들인 이상 어쩔 수 없이 무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

그래서 고독마야는 소년에게 검(劒)을 한(恨)스러워한다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소년 이검한은 자신의 출신내력을 모른다. 기련산에서 변을 당할 때 나이가 서너 살에 불과했기도 했지만 당시 머리에 입은 부상 때문에 어렸을 때의 기억이 없는 것이다.

낳아준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때로 이검한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속이 깊은 이검한은 굳이 고독마야와 냉약빙에게 부모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때가 되면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이검한은 구김살 없이 자랐다. 냉약빙과 고독마야가 피붙이에 못지않은 따뜻한 관심과 애정으로 보살피고 양육을 해준 덕분이다.

이검한은 철이 들자마자 냉약빙과 고독마야에게서 무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냉약빙과 고독마야! 그들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최고의 스승이었다.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 고독마야!

경신술로 천하무적인 냉약빙!

그들의 지도하에 이검한은 이미 일류고수가 되어 있었다. 지금의 실력으로도 이검한은 능히 천하백대고수(天下百大高手) 안에 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검한 자신은 단 한 번도 남과 싸워보지 않았으므로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이검한은 고독마야의 제자다.

하지만 이검한이 알고 있는 무공의 대부분은 사저(師姐)뻘인 냉약빙이 전수해준 것이었다.

고독마야는 이검한에게 단 한 가지의 내공심법만을 전수해 주었을 뿐이다.

내공 외에 경신술 등 잡다한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모두 냉약빙의 몫이었다.

냉약빙은 이검한을 친 아들처럼 사랑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검한을 보살펴온지라 냉약빙은 종종 자신이 이검한을 낳은 생모인 것으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검한이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결코 기뻐할 일만도 아니다.)

냉약빙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그녀의 두 눈에는 애틋한 정감이 가득했다.

(검한이도 머지않아 자기를 낳아준 생모와 가문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저 아이가 그때 받을 충격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구나!)

냉약빙의 새하얀 뺨으로 자신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음적들에게 유린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칼로 저미는 듯한 슬픔이 느껴지는 냉약빙이었다.

그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냉약빙이 이검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부디 언제까지나 지금의 그 밝은 성품을 잃지 말거라. 검한아!)

냉약빙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이검한이 사라진 초가집 밖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장대같이 쏟아지던 폭우도 어느덧 가늘어져 가랑비로 변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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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겁난(劫難) 중의 인연 (2)

 

 

한동안 미친 듯이 사방을 뒤지던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다시 모옥 앞으로 왔다.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처리하도록 하게.”

철선동시가 말하고 옆으로 비켜섰다.

입이 백개라도 할 말이 없는 마면혈도가 주섬주섬 바지를 끼워 입고 모옥에 불을 질렀다.

곧 불꽃이 일렁이며 사방을 환하게 밝혔다.

투타탁! 투탁!

불속에서 뭔가가 불에 타면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뒤통수에 대고 음산한 어조로 내뱉었다.

이곳도 결국 안전한 곳이 못되는군.”

그래, 모두 내 탓이다. 내 탓...”

마면혈도는 화난 목소리로 버럭 소리치며 계곡의 입구로 달려갔다.

달려가는 마면혈도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철선동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섬뜩하게 웃었다.

말대가리... 아직 멀었다. 네놈의 심력(心力)은 좀 더 소모되어야 한다. 흐흐흐... 몽선도(夢仙圖)의 주인은 나 혼자로 족하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황이 뭐 무서울 것이 있겠는가?”

몽선도...!

몽선도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이기에 그것을 얻기만 하면 그토록 무서워하던 마황도 두렵지 않다는 것인가?

지금 철선동시의 마음을 꽉 채우고 있는 욕심과 음모의 근원은 몽선도란 것에서 비롯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불측한 의도를 품고 있는 철선동시도 걸음을 옮겨 비련곡을 빠져 나갔다.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자가 혹시 불빛을 보고 찾아올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만사휴의다.

철선동시는 불타는 모옥이 만든 자신의 긴 그림자를 밟고 곡구에 다다랐다.

화를 내며 먼저 갔던 마면혈도가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징검다리처럼 줄지어 있는 바위섬들을 밟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결국... 아무 것도 남지 않는구나.”

임청우는 불꽃을 보면서 꿈결인 듯 중얼거렸다.

악귀에게 유린당한 어머니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고, 집은 불타고 있으며, 이제 자신은 농산을 떠나야한다.

임청우 모자가 이곳에서 살았던 흔적은 모옥 앞 초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과 약초들뿐이다.

애잔한 아쉬움이 임청우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었지만 그리 슬프지는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슬프지 않은 것은 이미 그녀와의 정이 오래전에 끊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니 어쩌면 세속에서 말하는 정 같은 것은 원래부터 임청우에게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임청우는 고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바로 그 순간 그의 귓속으로 마치 천둥이 울리는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불은 네가 질렀느냐?”

임청우는 이같은 음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크지도 않고 높지도 않다.

그러나 위엄으로 가득 차있으며 은연중에 사람을 압도해 버리는 음성이었다.

한 번 듣는 순간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멍하니 서있게 만드는 음성이었다.

불은 네가 놓았느냐?”

다시금 목소리가 들려와서야 임청우는 엇! 하며 정신을 차렸다.

그의 눈앞에 육척이 넘는 장대한 체구를 지닌 노인이 서있었다. 머리는 반백이고 네모 난 얼굴에는 짧게 깎은 수염이 은빛을 발한다.

으악!”

노인의 눈을 보는 순간 임청우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감고 말았다. 노인의 눈은 마치 한낮의 태양처럼 강렬한 광채를 뿜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노인의 전신에서 풍기는 위엄은 절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기에 족했다. 노인의 어깨에 걸려있는 장검조차도 주인의 위풍에 의해 있는 둥 마는 둥하다.

노인은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으로 비틀거리는 임청우의 손목을 슬며시 잡았다. 따뜻한 기운이 노인의 커다란 손에서 흘러나와 임청우의 손목을 통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임청우는 떨리던 몸과 마음이 함께 편안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떴다.

그러나 감히 노인의 눈을 다시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만 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한데 임청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노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굳어졌다.

(이놈...!)

노인은 마음속의 커다란 놀라움을 다스리지 못하고 급히 다른 손으로 임청우의 어깨를 만져보았다.

(천골(天骨)이로다!)

임청우의 골격을 만져보는 노인의 눈에 놀라움과 흥분의 빛이 떠올랐다.

임청우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은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보아온 노인조차 임청우만한 골격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게다가 임청우의 몸에는 무공을 익힌 흔적이 없다.

말 그대로 갈지 않은 원석인 셈이다.

(평생을 고독하게 살아왔지만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구나.)

임청우의 골격을 어루만지고 몸을 살펴보면서 노인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꽃이 피었다. 생각지도 않게 기막힌 보배를 찾아냈기 때문이다.

그때 임청우가 용기를 내어 노인을 올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노야(老爺)께서는 낮에 길게 소리쳤던 그분이십니까?”

길게 소리를 쳐? !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말이로군.”

검주 유소기요?”

허허허. 무림칠절(武林七絶)의 우두머리인 뛰어난 인물이지!”

노인은 진심으로 찬탄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고 노부는 노부다. 노부는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진 않아. 실상 지르지도 못하지만...!”

노인은 웃으면서 임청우의 손을 놓고 절벽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임청우는 마치 자석에 끌리기라도 한 듯이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여기는 네 집이냐?”

노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노인의 음성은 마치 사방의 하늘에서 들려오는 듯, 아니면 듣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듯하다고 생각하며 임청우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노인은 멀리 어둠 속에 보이는 산봉과 그 위의 하늘을 보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곳이군. 이곳에 이름이 있느냐?”

어머니께서 비련곡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비련곡? 이토록 아름다운 곳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야. 자당(慈堂)은 아마도 한이 많으셨던 분인 모양이군.”

“...”

자당은 어디 계시는가?”

노인이 임청우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임청우는 말없이 절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노인은 흠칫하더니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임청우도 아무 말 없이 그의 곁에 서있기만 했다.

노인 옆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임청우는 말로 형용하지 못할 기묘한 기쁨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폭염 중에 쏟아지는 소나기의 청량감 같기도 했다.

그렇게 반 시진 가량이 지나갔다.

시간은 어느덧 자시(子時)를 훨씬 넘어 인시(寅時)가 되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오연히 고개를 들고 앉아있던 노인이 일어서면서 말했다

노부는 우협(愚俠) 장백승(莊百勝)이라고 한다.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별호가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리석은 협객이라니...

우협 장백승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이 다시 물었다.

그럼 무림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느냐?”

이번에도 임청우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인지라 이 노인이 저 일왕(一王) 금포염왕과 비견되는 일세고수 일협(一俠)임을 알 리 없었다.

무림의 은원 때문에 환난을 겪은 것 같거늘 무림을 모른다?”

장백승은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함께 살 가족이 있느냐?”

없습니다.”

임청우가 대답했다.

노인은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노부를 따라가지 않겠느냐?”

저는 노야가 좋습니다. 하지만, 저는 한사람의 대장부로서 남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 그럼 노부의 제자가 되어볼 생각은 없느냐?”

대화가 여러 차례 오가게 되자 임청우는 느긋한 마음을 회복하고 웃으며 물었다.

노야께선 제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검술(劒術)이다.”

장백승이 짊어지고 있던 검을 풀어서 내리며 말했다.

무사들이 사용하는 그런 검술입니까?”

비슷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한번 보겠느냐?”

노야께 제가 검술을 배운다면 말대가리같이 생긴 자를 이길 수 있습니까?”

임청우는 혈도를 휘두르던 마면혈도의 공포스런 모습을 생각하며 물었다.

장백승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마면혈도를 만났구나!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얼마 전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노야께선 제 물음에 대답해 주십시오.”

장백승은 곡구를 힐끗 보다가 탄식하고 말했다.

마면혈도... 그놈의 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구나. 이번엔 반드시 숨통을 끊어놓으려 했건만...”

그는 임청우가 여전히 자기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보고 말을 이었다.

당금의 무림에는 최절정으로 꼽히는 열 두 명의 고수가 있지. 그들을 사람들은 일왕(一王) 일협(一俠) 삼괴(三怪) 칠절(七絶)이라 부른다.”

임청우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장백승의 말에 빨려 들어갔다.

네가 만난 마면혈도는 삼괴의 둘째로 무공이 극히 고강하다. 당금의 무림에서 그놈을 이길 수 있는 자는 열손가락에 꼽히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너는 노부의 검술을 배워서는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 노부라 하더라도 그놈을 이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장백승을 보았다.

무공에 관해서는 문외한인 그가 보기에도 장백승의 기도는 마면혈도 따위가 비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장백승이 태양이라면 마면혈도는 반딧불 정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장백승이 마면혈도를 이길 수 없다니...

장백승은 이어서 말했다.

아니, 노부는 마면혈도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이긴 적이 없고 앞으로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점점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노야께선 함자를 <백승(百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이런 경우를 들어서 허명(虛名)이라고 하는 것이지. 백승은 이름뿐이야. 젊었을 때 노부를 가르치신 은사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

임청우가 다시 물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유림(儒林)이라고 하는 것처럼 무림이라는 것은 무()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까?”

장백승이 그렇다고 끄덕이자 임청우는 또 물었다.

노야께서는 그 무림에서의 위치가 어떻습니까?”

장백승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허명은 여기에도 있지. 일왕 일협 중의 일협이 바로 우협, 이 바보 늙은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임청우는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일왕 다음에 일컬어지는 일협이라면 당연히 그 무공의 강함도 측량하기가 어려울 것이 아닌가?

헌데 아무도 이긴 적이 없고 이길 수도 없다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로 보아 마면혈도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것 같지 않은가?

지금은 시간이 많지 않구나. 만약에 노부의 제자가 될 마음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이걸 증표로 종적을 물으면 노부에게 안내해주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장백승은 풀어서 손에 쥐고 있던 자신의 검을 임청우의 손에 쥐어주었다.

별 장식이 없는 평범한 청강검(靑鋼劒)인데 단지 손잡이 부분에 한 마리 포효하는 사자(獅子)가 투박하게 음각되어있는 것이 눈에 띌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노야!”

임청우가 장백승의 따스한 말에 감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우협 장백승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는 마치 신선처럼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깃털처럼 허공으로 떠오른 장백승은 임청우가 빤히 지켜보고 있는 중에 홀홀히 밤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임청우는 마치 백일몽(白日夢)을 꾼 것만 같았다. 손에 남겨져 있는 한 자루의 검이 아니라면 꿈을 꾼 것으로 착각했을 것이리라.

그러나 장백승의 마치 천신(天神)같던 기도는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이제 어디 가서 노야를 찾는단 말입니까.”

임청우는 장백승이 사라진 하늘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물었다.

장백승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별빛만이 더욱 초롱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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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만나다!

 

 

(누군가의 시선이 줄곧 날 따라오고 있는 것같다.)

금릉으로 향하는 관도를 가고 있는 강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숭산에서 안탕산으로 가려면 남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하지만 강유는 혹시 있을지도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동쪽으로 멀리 우회하고 있는 중이었다

헌데 언제부터인가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누군가의 끈적한 시선이 등봉현의 객잔을 떠난 직후부터 집요하게 따라붙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은 후로 내가 너무 예민해진 것일까?)

강유는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살펴보며 이마를 찡그렸다.

그가 가고 있는 관도에는 제법 행인이 많다. 강유처럼 걷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마차나 말을 타고 오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랬듯 딱히 의심 가는 사람은 발견할 수 없었다.

(단순히 신경이 날카로워진 탓으로 돌리기에는 느껴지는 시선이 너무도 집요하고 확실하다.)

이마를 찡그리는 강유의 백보 쯤 앞쪽에 주점이 하나 보였다.

경치 좋은 강가에 위치해서인지 제법 많은 손님들이 주점을 드나들고 있었다.

(분명 날 감시하는 자가 있다. 다만 내 능력으로는 탐지할 수 없는 먼 거리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하는 것뿐이고...)

강유는 생각에 잠겨 주점 쪽으로 다가갔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쌍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게 느껴진다.

(어쩌면 달마독명안을 외운 덕분에 감각이 예민해져서 지금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저 시선을 감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암기한 후 태워버리라고 고불참회기에 적어놓았었다.

고불선사의 당부에 따르기 위해 강유는 밤새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을 외웠었다.

그 과정에서 강유는 달마독명안의 이치를 일부 깨닫게 되었다.

달마독명안은 육신통에 필적하는 경이적인 능력이다.

그것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자 강유의 감각은 전과 확연히 달라졌다.

눈과 귀가 몇 배나 밝아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던 것까지 감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강유가 자신을 감시하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게 된 것도 그 덕분이었다.

 

(맛보기도 이 정도인데 달마독명안을 온전히 구사하게 되면 정말 신통력을 발휘하는 셈이 되겠구나.)

강유가 달마독명안의 힘에 새삼 감탄하며 주점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냐?”

갑자기 주점에서 터져 나온 고함 소리에 관도를 오가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지나치려던 강유도 걸음을 멈추며 문이 열려 있는 주점 안쪽을 돌아보았다.

누굴 눈 뜬 장님으로 아는 거냐? 이 따위 유리조각으로 사기를 치려하고?”

주점 입구의 계산대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누군가에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얼굴에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그자의 왼손에는 자두 씨만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들려 있고 오른손에는 식칼이 쥐어져 있다.

탐욕스러운 인상의 주점 주인과 계산대를 사이에 두고 서있는 인물은 늘씬한 체형의 여자였다.

질 좋은 비단으로 만들었지만 별 장식이 없는 수수한 옷을 입은 그 여자는 바로 황금성의 성주인 진상파였다.

 

지난 밤 진상파는 들키지 않고 황금성을 빠져나오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었던 것이다.

태어난 이래 돈을 주고 뭔가를 사본 적이 없는 진상파다.

당연히 돈을 갖고 다닐 이유와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날이 밝고 허기가 지면서 진상파는 비로소 자신이 어떤 어려움에 처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서 황금성이 있는 금릉까지 가려면 열흘 가까이 걸린다.

그동안 먹고 자려면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다.

현실적인 해결 방법은 가까운 황금성의 지점을 찾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제왕성의 인간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황금성 지점에 들렸다가는 간단히 사로잡혀 제왕성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결국 진상파는 황금성 지점을 찾아가는 건 포기하고 무작정 남쪽으로 걸음을 옮겼었다.

그러다가 허기를 참지 못하고 이 주점에 들어와 국수를 한 그릇 사먹게 되었다.

지닌 돈은 없지만 끼고 있는 반지로 값을 치르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끼고 있던 반지가 도저히 진품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뭐 이게 금강석(金剛石)이라고? 개 풀 뜯는 소리 하지 마라.”

주인은 왼손으로 쥔 반지를 진상파 얼굴에 들이밀며 눈을 부라렸다.

진상파는 그자의 무례함에 극도로 불쾌해졌지만 즉각 반박을 하지는 못했다.

점원들 뿐 아니라 주점 안 모든 손님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느껴져 숨이 턱 막힌 탓이다.

이런 수모와 난감한 상황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진상파였다.

이만한 크기의 금강석이면 비옥한 땅 수만 평을 살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길바닥 장사치인 나도 안다. 헌데 겨우 국수 한 그릇 먹은 값을 이걸로 치르겠다고?”

탕탕!

주인은 식칼로 계산대를 연신 내리쳐서 흠집을 내며 진상파를 윽박질렀다.

(귀티 나 보이는 여자인데 돈 없이 국수 한 그릇 먹었다가 곤욕을 치르고 있는 모양이로구나.)

흥미가 생긴 강유는 걸음을 멈춘 채 일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의 성격상 타인의 곤경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한다.

하물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여자는 한눈에 보기에도 귀하게 자란 태가 난다.

강유는 그 여자에게 뭔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사이에 주점 주인의 패악질은 점점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돈이 없다고 말했으면 그깟 국수 한 그릇 그냥 말아줄 수도 있었어. 그런데 뻔뻔하게 사기를 치려고 해서 날 열 받게 해?”

주인은 눈을 부라리며 식칼을 진상파의 면전에 대고 흔들었다.

... 저런...”

주인이 흥분해서 이성을 잃었군.”

저러다 사고치지.”

보고 있던 손님들이 웅성거렸다.

눈치 빠른 손님들은 주인이 진상파를 지나칠 정도로 거칠게 대하는 이유를 짐작하고 혀를 찼다.

진상파를 협박하면서도 주인의 툭 튀어나온 눈알이 수시로 진상파의 몸을 더듬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인은 난생 처음 보는 절세미녀인 진상파에게 엉큼한 속셈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게 금강석이 아니라고 쳐요.”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살기를 억지로 누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반지의 고리를 이루는 금의 무게만도 두 돈이 넘으니 국수 한 그릇 값으로는 충분하고도 넘칠 거예요.”

진상파는 주인이 쳐든 반지를 턱으로 가리키며 도도하게 말했다.

주인도 장사치인지라 반지의 고리가 금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진상파에게 엉큼한 마음을 먹고 있는 터라 기세를 누그러트리지 않았다.

! 보자보자 하니까 이젠 구리를 금이라고 속이려 들어?”

그자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식칼을 쳐들어 진상파를 내려칠 듯이 위협했다.

진상파를 겁에 질리게 만들어서 자신의 뜻에 고분고분 따르게 할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그자의 의도와 달리 진상파는 미간은 찡그리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

!”

대신 보고 있던 주점 안의 손님들 일부가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오냐! 네년이 언제까지 뻣뻣하게 굴 수 있는지 보자!)

주인이 독이 올라 식칼을 진상파의 목에 대려고 할 때였다.

!

그자의 칼 든 손목을 움켜잡는 강철 족쇄같은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뭐야?”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에 오만상을 쓰며 돌아보았다.

진상파도 흠칫 하며 주인의 손목을 틀어쥔 인물을 돌아보았다.

그만하시오 주인장. 분풀이치고는 도가 지나치지 않소?”

칼 든 주인의 손목을 움켜잡은 채 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람은 강유였다.

그가 보다 못해 개입한 것이다.

당신 누군데... 어흑!”

강유에게 눈을 부라리며 잡힌 손목을 뽑아내려던 주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우둑!

강유가 주인의 손목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을 가한 것이다.

(... 무림인!)

주인은 손목이 으스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와락 겁에 질렸다.

눈치 빠른 장사치답게 그자는 강유가 범상치 않은 무공을 지닌 무림인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이분 소저께서 드신 음식 값은 내가 대신 내겠소. 그러니 그냥 보내드리시오.”

강유는 주인의 손을 놔주며 말했다.

이봐요! 귀하가 끼어들 일이 아니에요.”

보고 있던 진상파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남에게 신세를 져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진상파인지라 강유의 개입이 고맙기보다는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도 마침 식사를 하려던 참이니 이걸로 이분 소저의 식대를 함께 계산하시오.”

찰랑!

강유는 진상파의 말은 무시하고 몇 개의 동전을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 그렇게 합죠. 식사는 뭘로 준비해드릴깝쇼?”

촤락!

주인은 급히 동전 쓸어서 챙기며 강유의 눈치를 보았다.

길을 서둘러야하니 가장 빨리 되는 것으로 준비해주시오.”

강유는 고개를 돌려 주점 안의 빈자리를 찾으며 말했다.

일이 원만히 해결될 기미를 보이자 마음 졸이고 있던 손님들은 다시 먹고 마시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요.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요.”

찰랑!

주인은 강유가 준 동전을 불룩한 아랫배에 찬 전대에 넣으며 돌아서려 했다.

!

그런 주인의 어깨를 강유의 손이 움켜잡았다.

...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신지...?”

주인은 겁에 질려 강유의 눈치를 보며 돌아보았다.

이분 소저에게 돌려드릴 게 있지 않소?”

강유는 웃으면서 주인이 그때까지 왼손으로 들고 있던 반지를 보았다.

아이쿠 이런!”

주인은 짐짓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이 오른손으로 자신의 마빡을 쳤다.

국수 값은 받았으니 이 반지는 돌려드리겠소.”

그리고는 아쉬운 표정으로 반지를 진상파에게 내밀었다.

강유 옆에 서있던 진상파는 불쾌한 표정으로 반지를 낚아챘다.

(아깝구만. 유리조각인지는 몰라도 예쁘장해서 마누라에게 주었으면 좋아했을 텐데...)

주인은 입맛을 다시며 주방 쪽으로 돌아섰다.

받아요.”

진상파는 점원의 안내를 따라 빈자리로 가려는 강유에게 반지를 내밀었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셨어도 반드시 대가를 치르라는 것이 돌아가신 아버지의 가르침이었어요.”

소저! 나는...”

인정이니 선의니 하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기필코 당신에게 대가를 지불할 생각이니까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저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국수 한 그릇 대접한 대가로 수만 냥짜리 반지를 받을 수는 없군요.”

강유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반지를 보았다.

귀하는 이 반지의 보석이...”

진상파는 눈썹 끝을 조금 올리며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강유를 보았다.

진품의 금강석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강유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들어볼까요?”

강유에게 흥미가 생긴 진상파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졌다.

신분이 신분인지라 진상파는 지금껏 숱한 미남자와 귀공자들을 보아왔다.

그 때문에 느닷없이 끼어든 이 청년의 인상은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었다.

키가 좀 크고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해서 사내답게 느껴진다는 정도였었다.

그랬는데 강유의 말을 듣다 보니 점점 더 호기심이 생긴다.

소저 자체가 귀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진 강유의 그 말이 진상파의 고요하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이 사내...)

진상파는 자신의 심장이 움찔하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보옥(寶玉)같은 귀인께서 한갓 유리조각 따위로 자신의 존엄을 흠집 내실 리가 있겠습니까?”

강유는 진상파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물이다. 탁월한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닌...)

강유의 말을 들으며 진상파의 심장은 주체할 수 없는 요동을 치고 있었다.

영친께서 엄히 가르치셨다는 것은 알지만 소생의 사정도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 반지를 받게 되면 자칫 협기(俠氣)를 부리는 척 해서 이익을 챙겼다는 오해를 사지 않겠습니까?”

말씀하시는 뜻은 알지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숙이던 진상파의 눈에 자신의 오른손 중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두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반지인 쌍룡환(雙龍環)이다.

그 쌍룡환은 황실에서 나온 것이라며 구숙정이 가져다주었던 패물함을 뒤적이던 중 저절로 진상파의 손가락에 끼워졌었다.

(이거라면...)

진상파는 별 생각없이 오른손 중지에서 쌍룡환을 뽑았다.

원래 그녀는 쌍룡환으로 국수 값을 치르려 했었다.

하지만 제왕성에서와 마찬가지로 쌍룡환은 좀처럼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았었다.

어쩔 수없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던 금강석 반지를 뽑아서 국수 한 그릇 값을 치르려다가 봉변을 당했었다.

!

헌데 이번에는 혹시 하며 뽑자 쌍룡환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손가락에서 빠져나왔다.

(이게 무슨 조화람! 지금까지는 그렇게 안 빠지더니만...)

진상파는 의아해하면서 쌍룡환을 강유에게 내밀었다.

대신 이걸 드리겠어요.”

소저!”

우연히 갖고 있게 된 반지인데 보다시피 조악하여 그다지 값이 나가는 물건은 아니에요. 이것마저 거절하면 화내겠어요.”

진상파는 난감해하는 강유의 손에 쌍룡환을 억지로 쥐어주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이 반지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절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강유는 어쩔 수 없이 쌍룡환을 받았다. 한 눈에 봐도 그리 값이 나가지 않는 물건이라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다.

고명(高名)...?”

쌍룡환을 건네 준 진상파는 강유의 얼굴을 기억해두려는 듯 찬찬히 살피며 물었다.

강유라고 합니다. 안탕산에 살고 있지요.”

진상파의 시선이 심상치 않게 느껴져서 강유는 얼굴이 좀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라는 생각이 강유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머니 냉상영이나 분이도 보기 드문 미모의 소유자들이지만 눈앞의 이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 비하면 처지는 면이 있다.

안탕산의 강유소협... 언제고 한번 안탕산으로 찾아뵙도록 하겠어요.”

강유의 이름을 되뇌이며 진상파는 주점을 나갔다.

살펴가십시오.”

강유의 배웅 아닌 배웅을 받으며 진상파는 관도를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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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지극한 정성

 

 

비록 마음을 주고받은 사이지만 함께 잠자리를 만들자고 말하기 쑥스럽다.

그래서 백남빈은 혼자서라도 이슬을 피할만한 무언가를 마련해볼 생각으로 숲으로 갔다.

강미루는 영문도 모른 채 백남빈을 부축하고 따라갔다.

그러다가 숲으로 들어서자 그녀도 드디어 백남빈의 뜻을 알아차렸다.

몸도 편치 않으니 제게 맡기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을 바위에 앉아있게 한 후 백남빈의 허벅지를 찔렀던 단검을 뽑았다.

그리고 작은 나무들은 자르고 큰 나무들은 껍질을 벗겨 그것으로 줄로 만들기 시작했다.

작은 나무들을 뗏목을 엮듯이 엮어 세우자 한쪽 벽이 될 수 있어 보였다.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강미루는 그다지 힘들어 보이지 않게 척척 잘해냈다.

"소저는 최고의 목수요."

구경하던 백남빈이 미안해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다.

백남빈이 칭찬하는 말을 들은 강미루는 쌩긋 웃으며 나무줄기를 훑어 잎들을 백남빈을 향해 뿌렸다.

백남빈도 역시 나뭇잎들을 훑어 뿌렸다.

 

몇 차례의 장난질이 오가고 강미루는 다시 나무를 자르고 묶었다.

머잖아 날이 어두워질 것 같아서 백남빈도 아픈 다리를 끌면서 도왔다.

이날 그들은 자그마한 오두막 하나 짓는데도 그렇게 많은 나무가 든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백남빈은 따뜻한 온천 연못가에서 흑왕이 날라온 나무들로 집을 짜 맞추었다.

지붕에는 나뭇가지들을 얹고 진흙을 개어 발랐다.

따뜻한 창평곡의 기온 덕분에 지붕은 잘 말랐고 해가 질 무렵 오두막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때쯤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무리하게 몸을 쓴 탓에 아물어가던 강미루의 가슴과 백남빈의 허벅지 상처가 다시 터져 피가 배어 나왔다.

그 때문에 한 사람은 상체가 벌겋게 물들었고, 한 사람은 하체가 벌겋게 물들어 서로가 보기에 몹시도 처참하고 가련했다.

몇 개의 열매를 나눠먹은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껴안은 채 지혈하는 것도 잊고 곯아 떨어졌다.

 

***

 

백남빈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새벽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다리의 통증이 그로 하여금 눈뜨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그의 품에는 강미루가 피곤에 지쳐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백남빈은 참기 힘든 통증에도 불구하고 행여 강미루를 깨울까봐 신음을 토하지 않았다.

퉁퉁 부은 왼쪽 다리는 그의 것이 아닌 양 고통 외엔 아무 감각이 없었다.

피도 많이 흘렸었다.

비록 급한 대로 상처를 싸매긴 했지만 그전에 말을 달리면서 흘린 피가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자꾸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상처를 다시 치료해야겠구나)

백남빈은 청랑검을 꺼내 허벅지의 퉁퉁 부은 상처에 대고 그었다.

싸악! !

쇠도 자를 정도로 날카로운 청랑검의 날이 스치자 고름이 와락 쏟아지며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누렇고 뻘건 고름은 보기에도 끔찍할 뿐 아니라 지독한 냄새까지 풍긴다.

계곡 밖이었다면 이토록 상처가 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평곡의 따뜻한 기온이 그의 상처를 더욱 곪게 만든 것이다.

이를 악물고 고름을 짜내자니 식은땀이 팍팍 솟았다.

고름이 남지 않도록 빨아냈으면 좋겠는데 입이 상처에까지 닿지 않았다.

고름을 짜내면서 강미루의 가슴에 난 상처도 곪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약도 없는데 이러다가 우리 두 사람 모두 죽는 건 아닐까?)

백남빈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설마 숱한 사경을 경험한 내가 이런 정도의 상처에 죽기야 할려고...)

애써 위안해보았지만 크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지 못하여 죽는 일도 허다하므로 불안감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강미루가 깨어났다.

왜 그래요? !”

눈을 부비며 일어나던 강미루는 쩍 벌어진 백남빈의 상처를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는 퉁퉁 부어있는데다가 고름과 피로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강미루는 자기가 낸 상처로 인해서 백남빈이 이토록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다고 사실에 눈물을 쏟아냈다.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를 악다물고 있던 백남빈이 숨을 몰아쉬며 그런 그녀를 위로했다.

"울지 마시오 미루. 당신이 내 다리를 찌른 것은 그때 상황으론 잘한 일인데 왜 운단 말이오? 나도 당신의 가슴에 구멍을 내지 않았소?"

백남빈은 강미루의 머리칼을 가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저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아플 뿐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강미루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는 백남빈의 손을 잡고 오열했다.

"제가 나빴어요. 앞으로 절대로 당신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 주셔요."

백남빈은 한숨을 내쉬며 강미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설령 이 상처로 인해 죽는다 해도 당신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오. 이 상처 덕분에 당신의 마음을 얻었는데 내가 어찌 당신을 탓할 수 있겠소?"

공자!”

다정한 말을 들은 강미루는 백남빈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 내어 울었다

강미루가 진정되기를 기다려 백남빈이 다시 말했다.

"진심이오 미루, 이대로 죽는다 해도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가니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소."

백남빈은 강미루가 엉엉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고열로 인해 기절해 버렸다.

그의 몸은 불덩어리를 방불케 할만큼 뜨거웠다.

 

백남빈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강미루는 그의 허벅지 상처에서 고름을 다 빨아낸 후였다.

또 체열을 조금이라도 식혀주기 위해 백남빈의 옷을 몽땅 벗겨놓고 커다란 나뭇잎을 모아 부채마냥 부치고 있었다.

눈물로 얼룩진 강미루의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데 그래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는 것을 보고 기뻐서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이 청초한 백합같아서 백남빈은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꼈다.

날은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지극정성에도 불구하고 백남빈의 다리는 다시 부어오르고 있었다.

열도 금방 올라가서 목이 타는 듯 화끈거린다.

백남빈은 가물거리는 정신을 잡으려고 애쓰며 강미루의 손바닥에 몇 마디를 적었다.

 

<온천물 속에 나를 넣어 주시오. 중독은 반지로 치료할 수 있으니 입에다 반지를 물리고...>

 

그녀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백남빈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

 

(쉽지 않구나! 쉽지 않아.)

밝아오는 여명 속에서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예상하긴 했지만 계곡 일대에 구축되어 있는 진법은 만만하지가 않다.

수시로 변화를 일으켜서 그때까지 구사한 파진법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간단하지만 원론적인 이치에 의지하여 진법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었다.

반면 신가람은 진법에 대해 아는 게 너무 많은 탓에 오히려 파진(破陣)이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진법이 일으키는 변화를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일일이 대조하다 보니 한도 끝도 없는 것이다.

(결국은 뚫고 들어갈 수는 있겠지만... 처제의 안위가 걱정이다.)

신가람은 조금씩 가슴이 타들어갔다.

정황상 말썽쟁이 처제가 이 진법에 빠진 건 거의 확실하다.

그리고 이미 시간은 이틀이나 지났다.

말괄량이라 소문났지만 아직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겁도 많은 강미루다.

어린 처제가 위험에 처해 두려워할 것을 생각하자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신가람이었다.

(진법의 중심부가 어딘지만 알아도 파진이 좀 더 수월할 텐데...)

신가람은 한숨도 자지 못해 시린 눈을 문지르며 다시 진법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

 

강미루는 눈물이 그치질 않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금처럼 울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어느덧 대려장의 강인한 홍의창 강미루가 아닌 연약한 소녀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번에 백남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임을 그녀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타액이 닿기만 하면 무시무시한 독으로 변하는 온천 속에 백남빈을 집어넣는다는 것은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지금 방치하는 것 보다는 낫을 것 같았다.

하물며 백남빈이 정신을 잃어가면서 마지막으로 한 부탁인 따라주어야 한다.

간병하느라 기진맥진한 강미루는 백남빈의 몸을 들지도 못하고 질질 끌며 연못으로 갔다.

연못가에 이르자 백남빈의 왼손에서 오채금환을 빼어 입에 물렸다.

하얀 이빨 사이에 물려진 오채금환이 햇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인다.

그렇게 아름다운 반지를 입에 문 채 백남빈이 죽어가는 중임을 떠올리니 숨이 막힐 것만 같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하는 마음이 끝없이 일었다.

오채금환을 물고 있는 백남빈의 벌거벗은 몸은 연못 속에 천천히 잠겨들어 머리만이 물위에 떠 있었다.

무릎까지 온천수에 다리를 담근 강미루는 물가 바위에 걸터앉은 채 백남빈의 머리가 물속으로 갈아 앉지 않도록 받쳐 주었다.

얼굴을 제외한 몸의 모든 부분이 펄펄 끓는 온천수에 잠기자 백남빈의 머리는 뜨거운 찜통처럼 김을 내뿜고 있었다.

강미루도 연못의 열기와 백남빈의 열기로 인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세상에 듣도 보도 못한 새파란 온천 속에 한 사람은 몸을 담그고 한 사람은 다리를 담근 채 열기를 이기지 못하여 까무라치기를 수십 번 하였다.

백남빈의 머리와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고, 강미루의 몸도 몇 번을 땀으로 뒤집어썼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어느덧 해는 다시 뉘엿뉘엿 서쪽에 걸쳐져 있고, 천리마 흑왕만이 두 사람이 염려스러운지 다가와서 힐끔힐끔 보다가 가곤 했다.

 

***

 

지면 아래 깊은 분지인 창평곡에도 저녁이 되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창평곡 밖에서 밀려든 그 서늘한 바람이 스치자 강미루가 먼저 정신이 들었다.

몸이 가뿐해져 있는 것이 상쾌하기 그지없다.

그녀는 정신을 잃고 있던 중에도 백남빈의 머리만은 꽉 잡고 놓지 않았다.

백남빈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에서도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의 열이 많이 내린 것이다.

숨도 고르게 쉬고 있었다.

단지 너무 심한 고통을 겪고 나서 깊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입에 물고 있는 반지는 이빨에 걸려 있었지만 긍방이라도 떨어질듯 말듯 위태로웠다.

강미루는 재빨리 손을 뻗쳐 반지를 잡은 후 백남빈의 손가락에 끼워주었다.

평온해진 백남빈의 숨결은 폭풍이 지나간 것을 알리는 듯 했다.

비로소 강미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이 사람이 죽었더라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지만 틀림없이 나도 따라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도 내가 죽었다면 따라 죽을까?)

강미루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은 자신의 생각 범주를 완전히 벗어나 사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한 때문이다.

(내 가슴의 상처는 작은 흉터만 남고 다 아물어 버렸구나. 이 연못의 물이 정말 신통한데... 이 사람의 상처도 이제 거의 다 나았겠지?)

백남빈을 연못에서 좀 더 끌어내 허리 아래만 온천수에 잠기게 했다.

그리고 난 후 백남빈이 정신을 차릴 동안 과일이나 몇 개 따올 생각으로 근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흑왕을 불렀다.

몸이 나른하여 힘은 없었지만 그런대로 흑왕의 등에 오를 수는 있었다.

흑왕이 달리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게 되자 몸에 생기가 차오른다.

강미루가 숲으로 가서 이름을 알 수 없는 향긋한 열매들을 따서 돌아 왔을 때 백남빈도 정신을 차리고 나른한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땀을 푹 뺀 두 사람의 얼굴은 완전히 하얀색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알몸의 백남빈을 연못에서 끌어내어 풀잎 웃도리를 감아 주었다.

다시 태어난 것같은 기쁨에 두 사람은 부끄러움도 다 잊어버리고 마주보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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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장

 

        뜻밖의 제안

 

 

“당신들에게 할 말이 있어요!”

냉약빙은 고독헌 밖으로 나서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그녀의 말에 유령마제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흐흐! 무슨 수작을 하려는 것이오 냉여협?”

하지만 그자는 섣불리 앞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냉약빙이 지니고 있는 굉천벽력탄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며 냉약빙은 싸늘한 비웃음을 흘렸다.

(비겁한 자들, 너희들은 평생 가도 오라버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녀는 차갑고 오연한 음성으로 알을 이었다.

“오라버니께서는 당신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어요.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는 전적으로 당신들 마음에 달렸어요!”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군웅들을 쓸어보며 한손을 쳐들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세 권의 낡은 비급이 들려 있었다.

“오오! 저...저것은 혈마대장경이다!”

군웅들 사이에서 경악과 환호성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그렇다. 냉약빙이 쳐든 것은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혈마대장경을 본 군웅들의 눈이 탐욕과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유령마제 등 삼인은 온전히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저 계집, 무슨 꿍꿍이지?)

그자들은 갑자기 냉약빙이 혈마대장경을 쳐들자 환호하는 대신 이마를 찌푸렸다.

냉약빙의 싸늘한 음성이 이어졌다.

“당신들이 고독애로 몰려와 오라버니를 귀찮게 한 이유는 이 혈마대장경 때문이지요? 안 그런가요?”

그녀의 말에 독천존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 맞는 말이오. 냉여협!”

그자는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냉약빙의 손에 들린 혈마대장경을 주시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라버니께서는 더 이상의 소란을 원치 않으세요.”

냉약빙은 차가운 표정으로 군웅들을 대표하는 삼인의 고수를 둘러보았다.

“그래서 이 세 권의 비급의 처분을 당신들 세 사람에게 맡기기로 하셨어요. 이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끝내 오라버니께 대항하다가 몰살당할지는 전적으로 당신들의 자유예요!”

“그, 그럴 수가...!”

“혈, 혈마대장경을 내놓다니...!”

갑자기 사방이 소란스러워졌다. 냉약빙의 제안은 실로 천만뜻밖이었기 때문이다.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선뜻 포기할 줄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소란이 일어났다.

유성신검황 등의 안색도 당혹으로 물들었다. 고독마야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가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비록 무형지독에 중독되었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자신들과 동귀어진 할 수도 있었다.

유성신검황이 군웅들의 소란을 저지하며 냉약빙을 향해 포권을 해 보였다.

“잠시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냉여협!

이어 그는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자신의 옆으로 불렀다.

장내는 일순 조용해지며 군웅들은 숨을 죽인 채 세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 자리에 모인 세 거두는 머리를 맞대고 전음입밀(傳音入密), 즉 내공으로 뜻을 전하는 수법을 써서 숙의하기 시작했다.

팽팽한 긴장감이 장내를 짓누르고 있는 가운데 일각(一刻;15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이윽고 세 거두는 숙의를 마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유성신검황이 삼인을 대표하여 냉약빙을 향해 정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 삼인이 연노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해 주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숨죽이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는 흉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빌어먹을, 혈마대장경을 자기들끼리 나눠먹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우리는 헛물만 들이킨 꼴이 아닌가?)

군웅들은 저마다 불만에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이지러트렸다.

그러나 누구도 감히 드러내놓고 불만을 토로하지는 못했다. 독천존과 유령마제 등이 그만큼 무섭기도 하거니와 현재 고독애 일대에는 세 거두의 수하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흥! 잘 생각했어요!”

유성신검황의 말에 냉약빙은 싸늘한 표정으로 말하며 혈마대장경을 양손으로 나눠들었다.

“받아요.”

피핑!

냉약빙은 세 권의 혈마대장경을 각기 한 권씩 삼인에게 날려 보냈다.

파팟! 팟!

유성심검황등은 행여 남에게 빼앗길 새라 급히 몸을 날려 자신들에게로 날아드는 비급을 받아들었다.

(진품이다!)

혈마대장경을 받아든 즉시 뒤적여본 삼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그들이 받아든 비급은 틀림없이 혈마대장경임을 확인한 것이다.

“경고해 두겠어요! 이 시간 이후 고독애 주위를 얼쩡거리는 자는 나 냉약빙과 오라버니의 적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참살할 테니 그리 아세요!”

냉약빙은 장내를 둘러보며 싸늘한 음성으로 외쳤다.

독천존이 혈마대장경을 품 속에 갈무리한 후 냉약빙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흘흘, 알겠소이다. 냉여협! 노부는 그럼 이만 실례하오!”

쐐애액!

독천존은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날려 고독애 아래로 사라졌다. 그러자 군웅들 중에 섞여있던 독천존의 수하들도 그자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뒤이어 유령마제도 수하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과연 이것이 잘하는 짓인가?)

마지막으로 유성신검황은 회의와 갈등의 눈빛으로 무겁게 발길을 돌렸다.

유성신검황마저 떠나자 나머지 군웅들도 앞을 다투어 고독애 아래로 날아 내려갔다.

삽시에 장내는 적막에 휩싸이게 되었다. 여기저기 죽어 넘어진 시체들만이 역겨운 피비린내를 풍길 뿐...

“어리석은 인간들...!”

냉약빙은 군웅들이 사라진 곳을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넉넉잡아 십오 년, 십오 년만 기다려라! 네놈들에게 오늘의 빛을 받으러 갈 아이가 있을 테니...!)

그녀는 싸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고독헌으로 들어갔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감회에 찬 눈길로 자신의 무릎에 누인 사내아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이 아이라면 고금제일인인 원시천존(元始天尊)의 경지를 초월해 보려던 나 연남천의 숙원을 이루어 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가슴이 실로 오랜 만에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사내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장차 무림이 운명을 바꾸어놓을 천고기재와 천하제일인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곳은 고독애!

운명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역사의 현장이었다.

 

* * *

 

세월여류(歲月如流)라 했던가?

곤륜산 고독애에서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이 절반 가까이 몰살당한 혈겁이 벌어진 것도 어느덧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 십사 년의 세월 동안 무림인들은 공포와 근심으로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십사 년 전에 벌어진 두 가지 참사로 인해 무림에 머지않아 시체의 산과 피의 강이 흐르는 대혈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때문이었다.

두 가지 겁난(劫亂) 중 첫째는 물론 고독애의 혈겁이었다.

그 사건으로 인해 한 지방을 제패하고 있던 수백 명의 고수들이 한꺼번에 몰살을 당했다.

결국 혈마대장경이 사방무신 중 세 사람의 손에 넘겨지는 것으로 고독애의 겁난은 해소되었다.

그 후 고독애 사방 백 리는 금역(禁域)으로 화해서 그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다.

두 번째 겁난은 신주사패천에 들던 태양곡이 의문의 궤멸을 당한 사건이었다.

태양곡이라면 불과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에 올랐던 일대기협 태양신협 이청천의 거처가 아닌가?

바로 그 태양곡이 고독애의 겁난이 있기 며칠 전에 초토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이 경악하며 달려갔지만 태양곡은 이미 온전한 기왓장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괴멸된 후였다.

생존자는 없었다. 흉수들은 인간은 물론이고 개 한 마리도 살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한 혈겁이 누구의 짓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혈겁이었건만 흉수에 대한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어 태양곡의 멸망은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게 되었다.

무림인들은 태양곡의 참사를 장차 무림을 피로 씻을 대겁풍의 전조로 여기고 전전긍긍했다.

혹자는 미리 겁난을 피하기 위해 세외로 은신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무림인들이 예상했던 겁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극도의 긴장 속에서 중원무림에는 유래 없는 평화가 도래했다.

그같은 평화가 십사 년 간 이어지자 무림인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의 씨앗은 좀처럼 제거되지 않았다.

현자(賢者)나 노강호(老江湖)들은 지금의 평화가 폭풍전야의 고요라고도 했다.

작금의 평화가 정말 폭풍전야의 고요인지 진정한 평화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시간이 모든 것을 밝혀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고독한 천하제일인의 거처가 있는 곤륜산 고독애에서 바야흐로 향후 무림 천년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잠룡(潛龍)이 자라고 있음을...!

 

***

 

우르르릉!

구름 속에서 뇌성이 운다.

마치 굶주린 거대한 짐승의 뱃속이 공복으로 울어대는 듯한 뇌성이다.

곤륜산 고독애 일대는 짙은 먹장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낮게 깔린 먹장구름은 당장이라도 곤륜산으로 쏟아져 내려올 것만 같다.

아니나 다를까?

쏴아아아!

어느 순간 시커먼 먹장구름은 장대같은 폭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세찬 빗줄기의 소리가 마치 천군만마가 일제히 질주하는 듯 요란하다.

하늘을 향해 깎아지른 고독애의 북쪽에는 깊은 계곡이 자리하고 있다.

이 계곡은 지하에 대량의 열천(熱川)이 흐르고 있어 사시사철 봄처럼 따스하다.

그래서 장춘곡(長春谷)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장춘곡 끝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한 채 서있다.

십사 년 전부터 금지가 된 고독애 근처에 누가 집을 짓고 살고 있는 것일까?

“차핫!”

문득 초가집 안으로부터 낭랑한 소년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펑! 쐐애액!

이어 초가집의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한 명의 소년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는 초가집 밖으로 질풍같이 뛰쳐나왔다.

짐승 가죽으로 만든 짧은 단삼(單衫)을 걸친 소년인데 육척에 가까운 훤칠한 키에 균형 잡힌 체격을 지녔다.

하지만 건장한 체격과 달리 소년의 나이는 잘해야 십칠팔 세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어린애다운 치기가 남아있는 소년의 얼굴은 마치 조각을 한 듯 단아하다.

단순히 잘 생긴 것이 아니라 숯같이 짙은 눈썹에다가 고집스럽게 다물어진 붉은 입술이 조화를 이루어 인상적이다.

쐐애액!

초가집을 박차고 뛰쳐나온 소년은 엄청난 속도로 계곡 밖을 향해 달려갔다.

소년이 내달리는 속도는 얼마나 빠른지 거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저 한줄기 검은 선이 장춘곡 밖으로 쭈욱 뻗쳐나간 듯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의 모습은 삽시에 폭우 속으로 사라졌다.

헌데 채 일다경(一茶頃;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우우!”

장춘곡 밖에서 다시 낭랑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예의 그 단삼 소년의 음성이었다.

쏴아아아!

장소성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소년의 건장한 모습이 계곡의 어귀에 다시 나타났다.

스파앗!

장춘곡 입구에 나타났다 싶은 순간 소년은 이미 한 걸음에 계곡을 날아 건너 초가집 안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누나! 다녀왔어!”

초가집 안으로 뛰어든 소년은 큰 소리로 외쳤다.

의기양양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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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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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十 章

 

               天罡摩罅維深經

 

 

천강마존은 담담한 눈길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펼쳐보아라.]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순간, 그의 두눈은 갑자기 크게 떠졌다.

 

<무적팔해(無敵八解).>

 

두루마리에는 실로 가공할 위력의 무공이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___제 일해(一解) 개천뢰명(開天雷鳴),

___제 이해(二解) 폭화소천(瀑火燒天),

___제 삼해(三解) 붕천압지(崩天壓地),

___제 사해(四解) 벽뢰파산(霹雷破山),

___제 오해(五解) 노룡자천(怒龍刺天),

___제 육해(六解) 단천복지(斷天覆地),

___제 칠해(七解) 유성파천(流星破天),

___제 팔해(八解) 멸혼극참(滅魂極斬),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사백 년(四百年) 전의 기인 무적도군(無敵刀君)이 남긴 무공이다. 도법(刀法)이나 검법(劍法) 어느쪽으로도 사용이 가능하다. 극강함과 패도적인 위력은 천하에서 또한 으뜸이다. 내일부터 무적팔해의 수련에 들어갈테니 미리 기억해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기검룡의 얼굴에는 힘찬 투지가 불끈 치솟았다.

 

X X X

 

철썩___ 쿠르릉...!

쏴___ 아___!

교교한 월광(月光)이 파도를 타고 일렁이고 있었다.

파석도(波石島).

그 바위의 정상에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칠 척(七尺)에 달하는 거구에 위풍당당한 풍모.

기검룡! 바로 그였다.

그는 바위 위에 우뚝 선채 두 손에 한 자루의 검(劍)도 아니고 도(刀)도 아닌 기형(奇形)의 병기를 들고 있었다.

문득, 우우우... 웅...!

갑자기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울부짖음을 발하며 한 차례 떨렸다.

푹은 한 치에 미치지 못했지만 검신의 길이만 근 네 자.

전체모양은 검(劍)의 형태였지만 날이 한쪽으로 서 있는 끝이 위로 약간 구부러져 검(劍)이라고도 할 수 없는 기이한 병기.

헌데 지금 그 기형의 병기가 은은한 음향을 발하며 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 우... 웅!

차츰 병기의 울림이 높아졌다.

순간, 기검룡의 몸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병기를 중심으로 점차 원반형의 거대한 백색환(白色環)이 형성되는 것이 아닌가?

급격히 백색환은 확산되면서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간, 파파팍...!

주위의 암석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멸혼극참(滅魂極斬)!]

파석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기검룡의 대갈일성이 터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파팟...! 콰르릉___ 쾅!

아! 천지개벽이 일어나려는가?

거대한 백색환이 전광처럼 폭사된 곳은 바닷 속.

헌데 보라! 거대한 포말과 함께 미친 듯이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는 바다의 용트림을.

그 순간 월광마저 포말 위에 부서져 찬란히 흩어졌다.

아아! 실로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어지지 않는 가공할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하하... 성공이다! 멸혼극참을 연성하고야 말았다. 하하하하...]

기검룡은 찌렁찌렁한 대소를 터뜨리며 감회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때,

[허허... 용아! 드디어 성공했구나. 아주 훌륭했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낙척문사가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기검룡의 등뒤에 우뚝 서 있었다.

[할아버지!]

기검룡은 그를 바라보며 희열의 음성으로 소리쳤다.

낙척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 할아버지께 어서 무적팔해를 연성했다고 말씀드려야지.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네, 어서가요.]

그들은 곧 몸을 날렸다.

 

석실___.

[할아버지, 용아가 드디어 무적팔해를 모두 연성했어요.]

기검룡은 석실끝의 석상에 앉아있는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일순 천강마존의 안면에는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나 그것은 떠올랐던 것보다 더 빨리 사라지고 그는 곧 엄숙한 표정이 되었다.

[수고했다. 허나 무적팔해를 익히는데 무려 일년(一年)이라는 기간을 소요했다. 앞으로 더욱 증진해야만 천강무공을 전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라.]

[...]

그말에 기검룡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자, 내일부터는 이것을 연마하도록 해라.]

천강마존은 그런 기검룡에게 하나의 낡은 비급을 건네주었다.

 

<절존검보(絶尊劍譜).>

 

비급의 겉장에는 위와같은 네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천강마존은 엄숙한 어조로 기검룡에게 설명했다.

[절존검보는 절존검후(絶尊劍后)라는 여걸께서 남긴 비급이다. 무적팔해가 천하에서 가장 극강하고 패도적인 무공인데 반해 절존검보 내의 만절극변검식(萬絶極變劍式)은 가장 현묘하고 유(柔)하면서도 난해한 검법이라 모두 삼백육십식(三百六十式)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식마다 스물 네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다. 따라서 모두 팔천 육백 사십(八千六百四十) 가지의 변화를 일으킨다.]

기검룡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를 내포한 무학.

범인이라면 평생을 걸려서도 기억조차 못할 엄청난 불량이 아닌가?

허나 천강마존은 준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강무공을 익히려면 이 정도의 난해한 무공을 일년(一年)안에 모두 익힐 수 있어야 한다. 너는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기검룡은 마음이 무거웠다.

허나 그는 곧 의지가 서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심하겠습니다. 오늘 밤부터 당장 연마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기형병기를 들고 다시 석실을 빠져나갔다.

___무적패도(無敵覇刀).

과거 무적도군(無敵刀君)이 사용하던 천하의 도다.

그것을 불끈 움켜쥔 그의 두눈은 불타는 투지와 원대한 포부로 빛나고 있었다.

기검룡이 석실을 나가고 나자 문득 천강마존이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형도 무적팔해를 연성하는데는 꼬박 이 년(二年)이 걸렸었지. 과연 저 아니는 모든 면에서 노부를 능가하는 기재로군.]

그는 기검룡이 무척 대견스러운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저 아이가 서운해 할지 모르나 어쩔 수 없네. 천강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강(强)한 자질이 필요하니...]

낙척문사는 충분히 그의 뜻을 알고 있었다.

[용아는 영리합니다. 형님께서 겉으로는 엄하게 대하지만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있음을 잘 알고있습니다.]

그의 말에 천강마존은 엷은 미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뼈를 깎는 고련(苦鍊)의 세월.

기검룡은 숱한 고통과 역경을 견디며 오로지 무공연마에만 몰두했다.

천강마존은 처음부터 그러했듯이 일언반구의 조언조차 해주지 않았다.

기검룡 스스로 검도를 깨우치게 하려함이었다.

이윽고 반년(半年)___

기검룡은 마침내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만절극변검식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반년이 흐르자 그는 드디어 만절극변검식을 마음대로 펼칠 수가 있게 되었다.

아! 이는 실로 놀라운 진보가 아닐 수 없었다.

절존검법을 모두 연성한 후 기검룡은 다시 천강마존과 마주앉았다.

천강마존은 또 다른 한 권의 비급을 건네주며 여전히 준엄한 어투로 말했다.

[이것은 칠백 년(七百年) 전의 절정 마두였던 혈음마황(血陰魔況)의 혈황경(血荒經)이다. 다른 부분은 지극히 잔악한 마공들이라 모두 없애버렸다.

다만 혈음패황도(血陰覇皇刀)를 펼칠 수 있는 혈황도식(血荒刀式)과 천천마음의 연마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만을 남겨 놓았다. 이것을 반년(半年) 안에 연성해야 한다.]

기검룡은 묵묵히 그러나 굳은 의지의 표정으로 비급을 들고 석실을 나왔다.

그날부터 또 다른 수련은 시작되었다.

 

<혈황오식(血皇五式).>

 

___제 일식(一式) 소혼혈(素魂血).

___제 이식(二式) 척혈살(剔血殺).

___제 삼식(三式) 비혈참(飛血斬).

___제 사식(四式) 환혈류(幻血流).

___제 오식(五式) 혈황극(血荒極).

 

이는 혈음패왕도를 위해 만들어진 도법(刀法)이었다.

그 도세가 독랄, 쾌속하기 이를데 없어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잔혹한 필살(必殺)의 도법이었다.

기검룡의 이 도식을 모두 연마하는데에는 삼개월을 소요했다.

이 또한 눈부신 성취라 나이할 수 없었다.

___혈음탈혼소(血陰奪魂笑), 이는 웃음소리로 사람을 살상할 수가 있으며 필요에 따라 사이한 섭혼술(攝魂術)과도 같은 마력(魔力)을 발한다.

기검룡은 이 무공의 수련에는 불과 한달을 소요했을 뿐이었다.

이미 척천마음을 통해 음률에 대한 조예를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남자 기검룡은 천해비보(天海秘譜) 중에서 본 천뢰삼도(天雷三刀)의 수련에 들어갔다.

 

<천뢰삼도(天雷三刀).>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광뢰극! 빛줄기가 번뜩 스치는 순간 이미 적의 몸은 동체에서 날아가 버린다.

심극뢰! 광극뢰보다 두배 빠른 도식(刀式), 살의(殺義)가 이는 순간 도(刀)는 이미 상대의 심장을 뚫고 돌아와 도집에 들어가 있다.

천극뢰! 이것의 위력은 실로 통천가공할 정도, 상상을 불허하는 쾌도(快刀)의 최고 경지다.

비단 빠르기가 심극뢰의 배가 될뿐 아니라 일시에 방원 십 장을 질타하는 위력 앞에서는 그 어떤 공격도 풍지박살을 면치못한다.

기검룡은 천뢰삼도의 도식을 익히며 실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꼬박 두달이 걸려서야 그는 광극뢰와 신극뢰를 익힐 수가 있었다.

허나 마지막 도식인 천극뢰만은 그의 천고적인 자질이라해도 터득이 불가능한 것이라 다음으로 미루었다.

 

기검룡! 그는 이제 당당한 십팔 세의 청년으로 변모했다.

그가 다시 반년간의 수련을 마치고 천강마존을 찾아갔을 때 천강마존은 단 한마디를 했을 뿐이었다.

[앞으로 일 년간은 작은 할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아라.]

그리하여 기검룡은 그날부터 무적패도를 내려놓고 낙척문사와 생활하게 되었다.

낙척문사가 그에게 가르친 것은 대부분 학문(學文)이었다.

허나 강호출도(江湖出道)를 대비한 다방면의 잡학들도 아낌없이 전수했다.

독술(毒術), 의술(醫術), 암기수법, 기관지학, 성복지술(星卜之術), 대화술 등은 물론 심지어는 도박수법까지 가르쳤다.

마지막으로 낙척문사는 두 가지의 절세무공을 전수했다.

___의형수강(意形手罡).

천하에서 가장 뛰어난 강기(罡氣)로 최고 백여 장까지 떨쳐 낼 수 있는 가공할 무공이었다.

___허기머리보(虛氣迷鯉步).

고금(古今)이래 최고의 신법(身法).

낙척문사가 수많은 경공들을 종합 연구하여 창안한 그의 독문경공술이다.

하루에 능히 삼천 리(三千里)를 달릴 수 있다.

이것의 특징은 경공을 펼칠시에 전혀 지면을 밟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지면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발바닥에서 유출시키는 공력의 힘으로 펼치는 경공술이었다.

 

다시 일년(一年)의 세월이 흘렀다.

기검룡에게 있어서는 어느 한순간도 휴식이 없었던 고련의 나날이었다.

천강마존은 다시 기검룡을 불러 앉혔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이제부터 천강무공의 수련에 들어간다.]

천강마존의 그 한마디에 기검룡의 가슴은 벅찬 격동으로 끓어올랐다.

천강무학(天罡武學)!

이 얼마나 익히기를 원하던 무공인가?

천강마존은 겸양하여 택그성황의 배끝에도 못미치는 보잘 것 없는 무공이라 하지만 기검룡은 잘알고 있었다.

천강무공, 그것이야말로 택그성황의 성취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광세절학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격동과 희열에 벅차게 밀려드는 것을 느끼며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이 할아버지와 네 신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두는 것이 좋겠다.]

[...!]

순간 기검룡의 안면이 굳어졌다.

자신의 신세내력, 그동안 그는 많은 고통과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내력을 알고자 했다.

허나 그것을 물을 때마다 천강마존은 굳게 입을 다물었을 뿐이었다.

다만 시기가 임박하면 알려주겠다는 그 한마디를 할뿐,

이때, 천강마존은 기검룡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허나 한 가지 할아버지 앞에서 약속해야한다.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 할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은 악인(惡人)보다도 나약한 인간이다. 약속할 수 있겠느냐?]

[약속합니다. 할아버지, 여하한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는 못난 짓은 하지 않겠습니다. 소자야말로 진정한 천강마존의 손자가 아닙니까?]

기검룡은 내심의 긴장과 불안을 숨기며 자신있게 다짐했다.

(불쌍한 녀석...)

문득 천강마존의 노안(老眼)에는 측은해 하는 비치 떠올랐다.

허나 그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백 오십여 년 전, 북건성 일대에 검궁(劍宮)이라는 문파가 있었다.

___팔황신검(八荒神劍) 구양신운(九陽神雲).

그가 바로 검궁의 궁주(宮主)였다.

그는 당시 무림의 최절정고수였던 무림팔걸(武林八傑)의 일인이기도 했다.

검궁은 당시의 어느 방파보다 방대한 세력을 갖춘 명실공히 맹주(盟主)역을 맡고 있었다.

헌데, 어느 해였던가?

서역으로 볼일이 있어 서역에 간 구양신운(九陽神雲)은 이름모를 폐사(廢寺)에서 하룻밤을 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그 폐사의 허물어진 장경각에서 한 권의 고서를 얻게 되었다.

고서는 서역에서도 오래 전에 사용하지 않게 된 고어(苦語)로 기술되어 있어서 구양신운은 전혀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그후,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그때 비로소 자신이 광세기연을 만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당시, 구양신운(九陽神雲)에게는 열살 정도된 어린아들이 하나 있었다.

구양천(九陽天), 어릴 때부터 신동(神童)이라고 소문이날 정도로 총명이 과인한 아이였다.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도 구양천을 반년 이상 가르치지 못했다.

반년만 지나면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널리 학식있는 스승을 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한 명의 박고통금한 지식을 지닌 노문사 한 분이 구양천을 가르치기를 자원하여 구양천의 스승이 되었다.

서역에서 돌아온 구양신운은 즉시 그 뜻모를 고서를 노문사에게 보였다.

헌데 고서를 받아든 노문사의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노문사는 그 고서의 내용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천강마하유심경(天罡摩罅維深經).>

 

노문사가 읽어낸 고서의 제목이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이미 천여 년 전 천축에서 실전한 초고의 내공심경(內功心經)이 아닌가?

구양신운은 기연을 얻었다고 뛸 듯이 기뻐하며 노문사에게 그 내용을 자기 아들 구양천(九陽天)에게 가르쳐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기쁨도 일순.

구양신운이 광세절기가 담긴 비급을 얻어 암중에 연마하고 있다는 소문이 강호에 퍼졌다.

그러자 이제까지만해도 다정한 친우들이던 팔걸(八傑)이 주측이 되어 전체 강호인들이 호시탐탐 검궁(劍宮)을 노리게 되었다.

결국, 어느 비오는 날 밤___.

수천의 무림고수들이 검궁으로 난입, 강호제일의 대파를 군림하던 검궁은 하룻밤 사이에 초토화 되고 말았다.

그 구양신운을 비롯하여 천여 명 검궁의 신하들은 완저히 몰살당했다.

허나 천운이었던가?

구양신운의 아들 구양천은 노문사가 피신시켜 다행히 살아남을 수가 있었다.

노문사는 사실 전대의 기인으로서 신분을 감춘 채로 검궁에서 살고 있다가 구양처능ㄹ 구해낸 것이다.

 

<죽이리라! 무림을 피로 씻으리라!>

 

노문사에 의해 설산(雪山)으로 피신한 구양천은 절규했다.

눈앞에서 부모형제가 도륙당하는 것을 본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다시피 무공을 익혔다.

노기인은 암연히 탄식을 하면서도 구양천에게 천강마하유심경을 가르쳐 주고 또한 전대 기인의 무적도군(無敵刀君)의 진전을 물려주었다.

그 뒤 십년 후, 중원무림에는 한 명의 대살성이 출현했다.

미친 듯이 쏟아내는 도세 속에 천하를 울리던 팔걸(八傑)들이 처참하게 쓰러지고 근 이천의 고수가 화를 당했다.

전체 무림은 구양천 한 명에게 피로 씻기게 된 것이었다.

전 강호인들이 전전긍긍 공포에 쌓여 있을 무렵 구양천을 찾은 한 명의 노진인이 있었다.

 

<만검진인(萬劍眞人).>

 

이십여 년 전에 은퇴했던 무당파 최고의 고수.

잠상봉 조사 이후에 처음으로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를 완전히 연성하고 무당최고의 비기 무상혜검(無常慧劍)을 연마해낸 절대고수였다.

만검진인은 좋은 말로 구양천에게 혈겁을 멈추라고 타일렀다.

허나 구양천은 만검진인의 충고를 일소에 붙이고 오히려 그에게 도전했다.

마침내 두 절정고수는 서로 충돌했다. 그러나 구양천은 참담하게 폐했다.

불완전한 천강신공(天罡神功)은 대라태청강기(大羅太靑罡氣)의 강맹한 쇄도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무상혜검의 현기 앞에 무적팔해는 너무도 무기력했다.

결국, 만검진인의 백여초를 견디지 못한 구양천은 분루를 흘리며 그 앞에 무릎꿇었다.

 

<빈도를 제압할 자신이 섰을 때 다시 중원으로 들어오시오.>

 

만검진인은 그렇게 구양천을 중원에서 추방했다.

이것이 구양천 즉 천강마존에 있어서의 최초이자 최후의 패배였다.

천외유천(天外有天)!

하늘밖에 하늘이 있음을 안 구양천은 낙심하여 설산(雪山)으로 들어갔다.

십년(十年)의 세월___

고심참담의 뼈를 깎는 듯한 수련 속에서 구양천은 점차 최초의 분노가 가라앉고 만 것

인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다.

바로 그 무렵 그의 머리 속에는 삼식(三式)의 검법이 구상되고 있었다.

허나 늘 무엇인가 부족한 듯 그 실체가 잡히지 않아 그는 고심했다.

헌데 어느날이었다.

당시 설산의 패자(覇者)로 군림하던 설산인마(雪山人魔)가 그에게 도전을 청했다.

많은 수련 끝에 마음의 수양을 쌓은 구양천이었지만 도전을 피하지는 않았다.

곧 치열한 혈전은 벌어졌다.

그 결과 설산인마는 구양천의 무적패도를 감당치 못하고 참담하게 죽고 말았다.

허나 구양천 또한 혈전 끝에 천인단애로 떨어져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전화위복이 될 줄이야...!

그는 단애 아래에서 천고의 영약 만년설매실(萬年雪梅實)을 발견한 것이 아닌가?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의 빙벽 속에서 무림사상 최고의 여마 절존검후(絶尊劍后)의 진전을 이어받게 된 것이었다.

절존검후의 먼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 변화를 대하는 순간 천강마존은 확연히 깨달았다.

자신이 구상하던 검법에 있어 부족한 점이 바로 변화(變化)와 부드러움(柔)이라는 것을.

다시 십년(十年)의 세월이 유수처럼 흘렀다.

구양천은 그동안 오직 삼식(三式)의 검법을 완성하기 위한 노력으로 피어린 수련을 거듭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사상유래 없었던 엄청난 검식을 창안하고야 말았으니...!

그것이 바로 천강삼식(天罡三式)이 아닌가?

패도적인 극강함은 무적팔해를 능가하며 종잡을 수 없는 변화는 만절극변검식의 팔천 육백 사십 가지의 변화에 필적했다.

그후, 무림에는 신비한 한 명의 검수(劍手)가 나타났다.

늘 청삼을 걸치고 한 자루 반투명한 보검을 지니고 다니는 중년인(中年人), 그가 가는 길에는 적수를 찾을길 없었다.

아니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을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강(强)했다.

헌데 그는 항상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 했다.

남이 자신을 건들이지 않으면 자신도 남을 해치지 않는다는 그의 철칙, 허나 막상 그의 눈을 벗어나는 자는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었다.

개세무적의 고수 더 나아가 대방파라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암중에 무림제패를 꿈꾸던 무위대제(武威大帝)와 무위궁(武威宮)의 제물이었다.

단 일검에 무위대제의 몸이 양단되었고 무위궁의 최정예 무위삼십육천(武威三十六天)의 태반이 몰살당한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天罡魔尊).>

 

이것이 무림인들이 그글 경원하여 붙인 별호였다.

천강마존은 그후 사제와의 대회전에 이르기까지 소상히 이야기를 하고 말을 멈추었다.

[...]

[...]

두 노소는 말없이 앉아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의 눈에는 앞에 앉아있는 병색완연한 천강마존이 태산과 같이 느껴졌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도 미동도 않을 것만 같은 거산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할아버니는 지나간 할아버니의 생애를 결코 후회의 눈으로 되돌아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신념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천강마존은 문득 말을 멈추고 앞에 앉아 있는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이 아이도 노부와 비슷한 운명을 지니고 있다... 자칫하면 제 이의 천강마존이 될 수도 있다.)

천강마존은 착잡한 눈빛으로 기검룡을 주시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노부는 네가 노무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는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네,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기검룡이 힘있게 대답하자 천강마존의 눈속에 안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노부 평생에 후회가 되는 일은 가문을 이어 부모님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이다. 너는 노부의 전철으 밟지 않도록 명심해라.]

[명심하겠습니다.]

기검룡은 가문의 이야기가 나오자 바짝 긴장하였다.

[이제는 네 신상에 얽힌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천강마존이 입을 떼자 기검룡은 모든 신경을 천강마존의 말에 기울였다.

[할아버지가 언급한 바가 있었지. 노부이후에 중원패주(中原覇主)가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 있었다고 말이다.]

[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이라는 분이 그분이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말하는 순간 기검룡은 이상하게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다.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는 본시는 서역 황교(黃敎) 출신이었으나 태양성자(太陽聖子)의 진전까지 얻은 듯 했다.]

천강마존의 말을 들으며 기검룡은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린 황룡옥패를 만졌다.

문득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그분이 소손과 무슨 관계라도...?]

천강마존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렇다. 너는 황룡대제 기용천과 청해설랑(靑海雪랑) 모연옥과의 사이에서 난 그의 일점혈육이다.]

순간,

[아아...!]

기검룡은 마치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괜찮겠느냐?]

어느새 다가온 낙척문사가 걱정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전신을 경련하며 두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허나 차츰 그는 안정을 되찾았다.

[괜... 괜찮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를 악문 채 힘겹게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찢어질 듯 흡떠진 그의 두눈은 무섭게 충혈되었고 악다문 입술에서는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천강마존은 가슴이 쓰라렸다. 허나 그는 지금이 기검룡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임을 잘 알고 있엇다.

자칫 기검룡이 감정을 억제치 못한다면 강호에는 또다시 제 이의 천강마존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강마존은 침착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다. 이후의 판단은 네 스스로에게 달린 문제, 할아버지가 간섭할 일이 못된다. 다만 할아버지는 네가 강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기검룡은 멍한 눈빛으로 허고을 쏘아보고 있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그의 두 손은 너무도 힘주어 움켜쥐어 붉은 선혈이 터져 흘렀다.

허나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천강마존은 그의 모습을 대하기가 고통스러운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으아아... 아아___!]

파석도 정상에서는 바다를 뒤엎을 듯한 처절한 외침이 울려퍼졌다.

쿠르르... 콰___ 릉___!

미친 듯한 파도의 소용돌이는 여전히 섬의 전부를 함락시킬 듯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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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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