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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五 章

 

                   四海船門

 

 

일출(日出).

끝없이 펼쳐진 대해(大海)를 가르며 불끈 태양이 치솟아 올랐다.

만경창파(萬頃蒼波), 보검(寶劍)의 칼날처럼 출렁이는 물결 위에 시뻘건 불덩이가 퍼져오른다.

! 그것은 실로 형용할길 없는 벅찬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소주(小舟)___

기검룡 일행을 태운 작은배는 천천히 일출의 바다 속을 미끄러져 나가고 있었다.

기검룡은 눈부시도록 찬란한 일출의 장관에 넋을 잃고 있었다.

[...!]

신비한 태양의 광휘가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러자 문득 그는 가슴 속에 위대한 포부가 형성되는 느낌이었다.

()! 뜨거운 피가 불끈 치솟아 웅심(雄心)을 흔들었다.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멍한 표정으로 일출을 감상하고 있었다.

헌데 이때, 문득 기검룡이 무엇을 발견한 듯 소리쳤다.

[! 큰 배가 온다!]

그말에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대번에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안력을 돋구어 머리 앞을 바라보았다.

[...?]

허나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다.

엄청난 태양의 광막이 안력을 차단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검룡은 똑똑히 보였다.

그는 능소취를 바라보았다.

[저기 태양의 왼쪽에 큰 배가 오는 것이 보이지 않아?]

허나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철담흑객도 의아하다는 듯 기검룡을 응시했다.

기검룡은 그제서야 깨달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 그렇군.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에는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그는 의혹의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상, 그것은 바로 무인도의 기이한 복숭아를 먿은 덕분이라는 것을 기검룡은 까마득히 몰랐다.

그로인해 내공과 시력이 급증했다는 사실도.

이때, 철담흑객이 탄성을 발하며 입을 열었다.

[! 맞습니다. 그제서야 과연 공자님의 말씀대로 배입니다.]

능소취도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하고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나 문득 철담흑객은 불안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곳 해역에는 해룡방(海龍幇)의 배가 자주 출몰(出沒) 하는데, 혹시...?]

기검룡은 멀리 보이는 큰 배를 자세히 살폈다.

[선두에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엉켜있는 깃발이 달려있는 배다!]

기검룡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철담흑객은 안색을 활짝 펐다.

[그럼 본문(本文)의 순시선이 분명합니다. 해룡방의 표식은 흑룡(黑龍) 입니다.]

그말에 능소취도 기쁜 듯이 활짝 웃었다.

잠시 후, 거선은 점점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하후할아버지!]

능소취는 거선에 오르자마자 반가운 환성을 지르며 한 명의 백삼노인에게 안겼다.

백삼노인___ 약 칠순(七旬) 정도의 청수한 인상이었다.

허나 그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안광이 번뜩였다.

백삼노인은 달려오는 능소취를 안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취아! 얼굴이 새카맣게 탓구나.]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엄숙한 어조로 물었다.

[어찌된 일인가? 호의무사들과 오향주(五香主)는 어찌되고 자네만 남았는가?]

철담흑객은 급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 화후당주님. 오향주는 모두 전사하고 소인과 아가씨만 간신히...]

이어 그는 기검룡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분 공자님의 도움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은 허연 눈썹을 꿈틀했다.

[, 해룡왕(海龍王)! 그 작자가 점점 담이 커지는군, 빨리 제거해야겠군.]

이어 그는 기검룡을 응시하며 인자한 음성으로 말했다.

[허허... 소공자께서 우리 취아를 구해주셨다니 정말 고맙소.]

허나 기검룡은 그저 싱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러자 능소취는 백삼노인을 올려다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할아버지. 용오빠는 굉장해요. 그 단홍검(丹紅劍)이란 자를 일장(一掌)에 죽였고요. 바다위를 마음대로 걸어요.]

어느새 능소취는 기검룡을 오빠라 부르게 되었다.

그것은 기검룡의 나이가 그녀보다 한 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백삼노인은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굉장하구나.]

허나 그는 단순히 그녀의 말을 일축해 버리고 실제로 믿지는 않았다.

그러자 능소취는 정색을 하며 재차 말했다.

[어머! 정말이예요. 용오빠. 어디 한 번 보여줘요.]

그녀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재촉했다.

기검룡도 흥미가 있었다.

순간, 그는 바다 위로 휙! 몸을 날렸다.

이어, 파도를 밟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신법으로 거선의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그러자,

[...! 저럴 수가...!]

[___ ___!]

백삼노인과 사해선문의 제자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윽고 거검룡은 유유한 신법으로 다시 배위로 올라왔다.

백삼노인은 두눈을 크게 뜬채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정말 놀랍구려. 혹시 그 경공은 해연약파(海燕躍破)가 아니요?]

[맞습니다.]

순간, 백삼노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필시 이 소년의 신분은 범상치가 않다...!)

그는 예리한 직감을 놓치지 않고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들 일행은 모두 선실 안으로 들어왔다.

백삼노인___.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수석당주인 비천해응(飛天海鷹) 하후염(夏候炎)이었다.

그는 비천응신술(飛天鷹身術).

이 경공은 과거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에 올랐던 백팔무인(百八武人) 중 일인(一人)인 혈응신(血鷹神)의 경공에 맞먹는 절기로 알려졌다.

 

선실(船室)___.

기검룡과 능소취, 비천해응 하후염과 철담흑객은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기검룡은 물론 능소취와 철담흑객도 몹시 시장해 있던 참이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허기진 배를 채웠다.

식사가 거의 끝날 때 쯤 비전해응 하후염이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소공자 사부는 누구시오?]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도 모릅니다. 단지 저는 그분들을 작은 할아버지, 큰할아버지라고 불러왔어요.]

하후염은 더욱 관심이 깃든 어조로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생김새는 어떠하오?]

기검룡은 천강마존과 낙천문사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낙척문사에 대해 자세히 얘기했다.

허나 천강마존에 대해서는 간단히 말했다.

단지 매우 엄격하고 과묵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얘기했을 뿐.

그의 설명을 듣고난 하후염은 안색이 대변했다.

(... 그렇다면 틀림없이 한 분은 낙천문사(落拓文士)...! 그러면 나머지 한 분은 쌍기(雙奇)의 한 명이신 고죽취옹(枯竹醉翁)이 아니겠는가?)

내심 그렇게 추측한 그는 가슴이 크게 격당함을 느꼈다.

쌍기(雙奇)___ 이들이 어떤 인물인가?

무림군웅보의 당당한 서열 제 이위(二位)에 오른 전대고인이 아닌가?

허나 하후염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설마 낙척문사 외의 기검룡의 또 다른 사부가 바로 천강마존일 줄은.

 

사해선문(四海船門).

동해를 주름잡는 사해선문의 총단은 동해의 절유도(絶有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___사해신룡(四海神龍) 능천위(凌天威).

그가 사해선문의 문주(門主)였다.

사해선문은 중원과의 왕래가 거의 없으니 쟁쟁한 위력을 지닌 문파였다.

 

기검룡 일행이 탄 거선은 이윽고 절유도에 도착했다.

거대한 수채(水寨)로 형성된 사해선문의 총단.

그들은 마침내 거선에서 내렸다.

수십 척의 선박이 질서있게 정박해 있는 도선장(渡船場)에는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늘어 서 있었다.

앞 장 선 사람은 한 쌍의 부부(夫婦)였다.

남자는 남포장삼을 걸친 우람한 체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전신에서는 당당한 위엄이 넘쳐 흘렀다.

그는 사십 후반의 중년인으로 두눈은 정광으로 충만해 있었다.

여자는 백의궁장(白衣宮裝)을 한 삼십 전후(前後)의 미부인(美婦人)이었다. 이때,

[어머니...!]

능소취가 반가운 음성으로 소리치며 미부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녀는 기품있는 자태에 온화하고 포근한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품에 안긴 능소취의 머리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을 한없이 부드러웠다.

[취아, 무사히 돌아왔구나.]

그녀는 기쁨과 함께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이때, 남포장삼을 입은 중년인은 위엄서린 표정으로 하후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후당주. 어떻게 당주께서 취아를 데리고 왔소이까?]

하후염은 공손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문주님, 그것은 모두 이분 공자덕분이었습니다.]

그는 한옆에 우뚝 서 있는 기검룡을 가리켰다.

문주(門主)라면...?

! 그렇다면 남포장삼인 그가 바로 사해신룡 능천위란 말인가?

그렇다. 그는 바로 사해선문의 문주 사해신룡 능천위였다.

하후염의 말에 사해신룡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미부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하후염이 모든 사정을 얘기할 때 기검룡을 쌍기(雙奇)의 제자라고 밝힌 점에 대해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기검룡을 주시했다.

기검룡은 선뜻 그에게 포권하며 말했다.

[소생 기검룡 두분 숙부님과 숙모님을 뵙습니다.]

그의 깍듯한 태도에 사해신룡 부부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어 사해신룡이 안색을 부드럽게 풀며 말했다.

[쌍기 두분 노선배님의 제자라면 강호에서 높은 배분이지만 그냥 네게 용아(龍兒)라고 부르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숙보님. 용아는 오히려 그러기를 더욱 바라고 있습니다.]

그는 외로운 몸이었다.

절해고도에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 두 사람밖에 모르던 그러서는 오랜만에 가진 사람들과의 접촉이 무척 기뻐던 것이다.

이때, 능소취가 문득 기검룡의 손을 잡아끌었다.

[용오빠, 날따라 와봐. 이곳엔 구경할게 많으니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이끄는데로 따라갔다.

그들이 수채 안으로 사라지자 사해신룡은 침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해룡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 모양이군.]

하후염 역시 안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비록 천해비동(天海秘洞)의 위치를 모르나 대강 추측은 한 듯 합니다. 특히 이번에는 아가씨를 노린 것이 분명합니다. 아가씨를 인적으로 삼아 천해비동의 위치를 알아내려고 한 것입니다.]

사해신룡은 하후염을 바라보며 무거운 어조로 말했다.

[내일이 천해비동으로 입동(立洞)할 수 있는 자오절(子午節)이오. 아무쪼록 기밀이 유지되도록 당주께서 힘써주시오.]

하후염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X X X

 

어둠. 깊은 어둠이 흐르고 있었다.

기검룡은 사해선문 안의 깊은 대전에 속한 한 칸의 방에 들어 있었다.

침상___ 그는 지금 편안히 침상에 누워있었다.

허나 잠은 오지 않았다.

웬지 머리 속에 자꾸만 무인도에서 발견한 비급의 구결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허나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일어나 앉았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름모를 불완전한 장공(掌功)이었다.

기검룡은 머리 속의 기억을 따라 천천히 운공했다.

헌데,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가 익힌 천강신공(天罡神功)의 진기를 운용하여 장공의 구결을 따라 기류를 운행하는 순간,

[!]

그는 잠시에 전신을 부르르 떨며 고통의 비명을 발했다.

전신의 진기가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며 마구 요동치는 것이 아닌가?

[아악...! ___ 으윽...!]

그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몸을 데굴데굴 구르며 연신 비명을 터뜨렸다.

마침내, ___!

그는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허나 그 순간, 노도같은 경기가 갑자기 기경팔맥(奇經八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와 동시에 기검룡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 ... ...]

기검룡은 무거운 신음과 함께 깨어났다.

순간, 그는 만면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당했다. 헌데 나는 죽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내심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기이하게도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실상, 기검룡은 하마터면 주화입마(走火入魔)를 당할 뻔했다.

각기 성질이 틀린 두 가지 무공을 잘못 융합한 탓이었다.

허나 무인도에서 먹은 금빛복숭아로 인해 오히려 극적으로 진기를 융합, 그것이 사지(四脂)로 퍼지면서 내공마저 배이상 급증한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사실을 알 리 없는 기검룡은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내가 이 장공(掌功)의 연마에 성공했단 말인가?]

그는 앉은 채 자신도 모르게 바닥을 탁 쳤다.

순간, 그의 몸이 그대로 부웅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 연대좌불(蓮台坐佛)의 경공이 펼쳐지다니...!]

기검룡은 희열의 탄성을 발하며 빙글 몸을 회전하여 그대로 창밖으로 날아갔다.

___연대좌불(蓮台坐佛).

그는 낙척문사가 그에게 전수한 개세의 경공이었다.

허나 기검룡은 여태까지 내공이 약해 그것을 떨치지 못햇던 것이다.

기검룡의 기쁨은 실로 컸다.

그는 한 인공야산의 바위 앞에 우뚝 서 있었다.

[!]

그는 육성(六成)의 공력을 사용하여 장력을 내뻗었다. 허나,

[...!]

기검룡은 놀람을 금치못했다.

장력은 소리는 물론 아무런 형체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바위에는 장력이 부딪친 흔적이 조금도 없었다.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어째서 아무런 위력도 나오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가가 무심코 바위를 발로 툭 찼다.

순간, 우수수...!

놀랍게도 바위는 완전히 부서져 가루로 흩어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사실은 껍질부분만 남고 바위의 속부분이 다 부서졌다는 점이었다.

[...!]

기검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환성을 발했다.

이어 문득 그는 내심 중얼거렸다.

(정말 이 장법은 악독하기 그지없구나. 검은 멀쩡하나 속은 완전히 부서졌으니... 더구나 무형중에 날아가니 피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잠시 묵상에 잠겼다.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겠군. 헌데 이 장법의 이름을 모르니...

허나 그 순간 그의 두눈이 번쩍 빛났다.

[그래. 이것을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이라 부르자!]

그는 스스로 장법에 이름을 붙인 후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소금(少琴),

기검룡은 방으로 돌아와 무인도에서 가져온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을 만지고 있었다.

그는 소금의 외줄을 장난삼아 당겨보았다.

허나,

[?]

소금의 외줄은 조금도 당겨지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공력을 끌어올려 다시 줄을 당겼다.

허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솟았다.

[어디... 얼마나 단단한가 보자!]

그는 전 공력을 끌어모아 손가락으로 힘껏 소금의 줄을 당겼다.

그 순간, !

한 줄기 청아한 금음이 울려퍼졌다.

이어, 콰르릉...!

가공할 천둥소리와 함께 무형의 강기(罡氣)가 사방으로 폭사하는 것이 아닌가?

와르르... 우릉...!

그와 동시에 방의 사방벽이 무섭게 무너져 내렸다.

[... ...!]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때,

[용아! 무슨 일이냐? 이 소리는?]

사해신룡과 그의 부인 능부인, 또한 능소취 마저 놀란 표정으로 기검룡의 방으로 달려왔다.

그들을 보자 기검룡은 쑥스럽게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 심심풀이 무공을 연마하다가...]

그이 멋적어하는 태도에 사해신룡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무공이길래 방이 이 모양으로 변했단 말이냐?]

허나 기검룡은 무인도 얘기를 꺼내기가 웬지 망설여졌다.

문득 그는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 그것은과거 벽력문(霹靂門)의 절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이 있습니다.]

그의 말에 사해신룡은 두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벽력문이라고?]

그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___벽력문(霹靂門).

이는 삼백 년(三百年) 전 대막혈궁(大漠血宮)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멸문(滅門)한 막강한 문파였다.

그들의 무학 중 벽력진해(霹靂眞解)는 그야말로 무림일절이었다.

 

사해신룡은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 ... 벽력문의 절기를 네가 익혔다니...]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허나 곧 그는 돌아섰다.

[이제 그만 자거라.]

사해신룡은 방을 나갔다. 이때, 능소취가 얼른 그의 등뒤에서 입을 열었다.

[아버님, 취아는 용오빠하고 자겠어요!]

그말에 사해신룡은 흠치했다.

허나 문득 그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려무나.]

그가 방을 나가자 능부인이 황급히 그를 뒤따르며 말했다.

[아니 여보! 어쩌자고 한방에... 저들이 아무리 어리다지만...]

그녀는 자못 염려스러운 듯 사해신룡을 바라보았다.

허나 사해신룡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나쁠 것 뭐가 있소? 당신은 저 두 아이가 잘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소?]

[... 그건 그렇사오나...]

[하하... 내게 다 생각이 있소]

그제서야 능부인은 문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용오빠. 그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인가 하는 것을 한 번 취아에게 보여줄 수 있어?]

능소취는 기검룡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하며 간청했다.

기검룡은 향긋한 소녀의 체취에 문득 당황한 마음이 되었다.

[... 여기선 안돼. 잘못하면 옮긴 이 방도 무너진다.]

그는 조금 전에 들었던 방의 벽이 다 무너져버린 탓에 이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그의 말에 능소취는 안색을 활짝 퍼며 말했다.

[! 혹아저씨, 나 용오빠하고 바닷가에 잠깐 다녀올께요.]

그녀의 말에 철담흑객은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두 분만 보낼 수는 없습니다. 가시려면 소인과 같이 가셔야 합니다.]

능소취는 쾌히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같이 가요.]

 

바닷가.

밤의 바닷가는 깊고 짙은 어둠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거대한 암석으로 가로막힌 곳에 삼인(三人)이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물론 기검룡과 능소취, 그리고 철담흑객이었다.

능소취는 두눈을 기대의 빛으로 반짝이며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여기선 마음을 놓아도 돼, 어서 한 번 해봐 용오빠.]

그녀의 재촉에 기검룡은 문득 눈썹을 꿈틀했다.

이어 그는 약 십 장(十丈) 거리에 있는 오 장(五丈) 높이의 한 암석을 노려보았다.

순간, 그의 가슴에는 불끈 투지가 끓어올랐다.

그는 내심 풍천벽력장의 구결을 외웠다. 이어,

[벽력진천(霹靂振天!]

우렁차고 낭랑한 일성과 함께 우수를 쭉 내뻗었다.

꽈르릉...!

그의 힘찬 우장(右掌)이 펼쳐지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천둥벽력음이 터져올랐다.

[___ !]

능소취는 이 경악한 사태에 소리 높여 탄성을 발했다.

오 장 높이의 암석 중 한부분이 완전히 부서져 내린 것이었다.

허나, 쿠르릉___ 콰릉___!

기검룡은 연달아 장력을 내뻗었다.

 

풍천벽력장.

이는 모두 팔식(八式)으로 되어 있었다.

매초식마다 그 위력이 배로 증가하는 가공할 장법이었다.

꽈르릉___ ___ !

기검룡의 우장이 휘둘러질 때마다 엄청난 폭음이 잠시 숨을 돌렸다.

이윽고, 풍천벽력장의 팔식(八式)을 완전히 펼쳐낸 기검룡은 잠시 숨을 돌렸다.

헌데, 아 보라!

십 장 앞의 암석은 절반정도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 아닌가?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허나, 기검룡은 빙그레 웃으며 그들을 둘러보았다.

[이번엔 더 놀라운 것을 보여주마.]

이어 그는 입속으로 무엇인가를 중얼중얼 외웠다.

다음 순간,

[벽력패왕수(霹靂覇王手)!]

그는 섬전같이 손바닥을 쭉 뻗었다.

순간, 주황빛 경기가 노도처럼 밀어닥쳤다.

... 꽈르르릉___! ___!

천지개벽(天地開闢)의 가공할 굉음과 함께 전면의 암석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 !]

능소취는 찬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다시 탄성을 질렀다.

허나 철담흑객은 그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기검룡의 안색은 약간 창백하게 변했다.

벽력패왕수.

이는 벽력진해 중에서도 최강에 속하는 무공이었다.

따라서 진기소모가 극심했던 것이다.

능소취는 그 모습에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 용오빠.]

기검룡은 빙그레 웃었다.

[괜찮다. 잠깐 운공을 하면 되니까.]

이어 그는 곧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앉아 운공했다.

그는 빠르게 공력을 회복했다. 문득, 그는 일어서면서 입을 열었다.

[이 벽력패왕수는 실상 벽력천강(霹靂天罡)에 비하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작은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그말에 그만 아연한 표정으로 넋을 잃고 말았다.

허나 곧 철담흑객이 그제서야 생각난 듯 말했다.

[밤이 깊었습니다. 두 분도 이제 그만 돌아가 주무셔야지요.]

기검룡과 능소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돌아섰다.

헌데, 섬의 모퉁이를 도는 순간 기검룡은 문득 흠칫 했다.

그는 걸음을 멈추며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잠깐! 누군가 있어요.]

[...?]

능소취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허나 아무런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았다.

해변(海邊), 어둠 속의 한 그루 커다란 송목(松木) 아래 두 명의 인영이 서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새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허나 그는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얼굴을 볼수가 없었다.

또 다른 한 명은 회의(灰衣)를 입은 깡마른 노인이었다.

그는 백의인(白衣人)과 마주보고 서 있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턱밑에 염소수염을 기른 자로 쭉 찢어진 뱁새눈에 음험한 인상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들은 서로 마주보고 선채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백의인이 문득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문주와 수석당주가 굳게 입을 봉하고 있기 때문에 천해비동(天海秘洞)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회의의 깡마른 노인은 낮고 음침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흐흐.. 상관없다. 천해비동의 빙죽도(氷竹島)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천해비보(天海秘寶)는 우리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다.]

헌데 이때, 그들의 대화를 자세히 듣기위해 앞으로 고개를 내밀던 기검룡은 잘못하여 그만 발밑의 조약독을 건드리고 말았다.

...!

조용한 가운데 그 소리가 울리자 회의인(灰衣人)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누구냣!]

동시에 그의 소매가 번득 휘둘어지며 무수한 한망이 세 사람을 덮어씌웠다.

[... 들켰어.]

능소취는 겁먹은 음성으로 울상을 지었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도 당황함 없이 벌떡 일어서며 풍천벽력장(風天霹靂掌)을 후려쳤다.

우르릉...!

고막을 진동시키는 우뢰성이 이는 순간, 회의인이 발출한 암기는 일제히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흐흐흐... 제법이구나.]

회의인은 음험한 광망을 번득이며 휙 선형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신형은 기검룡의 머리 위에 이르러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벽락같이 장()을 후려쳤다. 허나,

[타앗!]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천왕탁탑(天王托塔)의 일식에 그의 장경이 맞섰다.

___! 하는 폭음과 함께,

[...!]

회의노인은 기혈이 뒤집히는 충격을 받고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경악의 표정을 지으며 바닥에 내려서 기검룡을 노려보았다.

이때, 그들과 약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백의인이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회의노인에게 말했다.

[그 꼬마가 쌍기(雙奇)의 손자라는 아이입니다. 어리지만 무서운 공력을 지녔으니 조심하십시오.]

회의노인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알았다. 그대는 빨리 돌아가라.]

순간, 백의인은 전면의 송림사이로 휙 신형을 날렸다.

[서랏!]

기검룡은 벼락같이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으려했다.

허나, 회의노인이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그를 가로막았다.

[흐흐... 꼬마야, 네 강대는 여기있다.]

동시에 그는 숨쉴틈 조차 주지않고 막강한 장력을 쏟아냈다.

기검령은 반사적으로 마주 일장을 쳐냈다.

콰르릉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자 요란한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회의노인은 신형을 휘청하며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섰다.

기검룡 역시 일순 몸이 흔들렸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회의노인은 내심 경악의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 역시... 어린 놈의 공력이 노부보다 뛰어나구나, 허나 어린 놈은 역시 어린 놈... 흐흐...)

그는 암중에 독계(毒計)를 품고 음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어린 놈! 죽어랏!]

그는 재차 일갈하며 장을 후려쳤다.

기검룡 역시 물러서지 않고 기쾌하게 일장을 내뱉았다.

허나,

[...!]

두 사람의 장력이 맞부딪친 순간, 그는 자신이 허공을 후려쳤음을 깨닫고 당황했다.

회의노인이 펼친 허초(虛招)에 속은 것이었다.

이때,

[흐흐... 죽어랏!]

회의노인이 득의의 웃음을 흘리며 번득 우수(右手)를 휘둘렀다.

헌데 그의 손에서 발출된 것은 한 무더기의 독침이 아닌가?

[!]

기검룡은 철판교의 수법으로 다급히 몸을 피했으나 몇 개의 독침들이 그의 다리에 적중되고 말았다.

[아주 가거랏!]

회의노인은 앞으로 쓰러지는 기검룡을 단번에 박살낼 듯 다시 장을 후려쳤다. 순간,

[... 용오빠___]

보고있던 능소취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허나 이때, 바닥에 나뒹굴던 기검룡의 몸이 돌연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어느새 그의 우수가 번득 청색고아망을 일으켰다. 찰나!

[___ !]

회의노인은 기혈을 토해내며 나뒹굴었다.

허나 그와 동시에, 그는 기검룡이 저지할 틈도없이 풍덩 바닷 속으로 뛰어들며 사라졌다.

[...]

기검룡은 일순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용오빠, 괜찮아요?]

능소취가 잔뜩 염려가 어린 표정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어디봅시다. 공자님. 방금 그자는 독수인마(毒手人魔)라는 자로 그자의 암기에 발린 독()은 극히 악랄하여 위험합니다.]

철담흑객도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기검룡은 독침이 박힌 다리의 바지를 걷어올렸다.

그의 하얀 다리에는 서너군데 미세한 검은 점이 푸른빛을 띈 채 박혀있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그 푸른 반점은 점차 조금씩 축소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철담흑객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공자님께서는 전에 무슨 영약을 복용한 적이 있으십니까? 독이 절로 소멸되고 있습니다.]

허나 기검룡 역시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별로 그런 기억은 없는데...]

이어 그는 장()을 독침이 박힌 부위에 대고 공력으로 독침을 빼내었다.

이윽고, 다리에 박힌 독침을 모두 빼낸 기검룡은 문득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외인(外人)과 내통한 그 백의인을 잡았어야 하는건데...]

능소취 역시 약간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하옇든 돌아가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어요.]

[그렇게하지.]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들 삼인(三人)은 사해선문의 총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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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뱀을 먹는 뱀

 

 

퍼억!

임청우의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동안 억겁같은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현기증을 느끼고 쓰러진, 아주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으으으...”

바닥에 널브러진 채 임청우는 한동안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모든 근육이 열기에 녹은 엿가락처럼 풀어지고 관절 마디가 전부 벌어져버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에 젖은 솜처럼 퍼져 누운 채 임청우는 멍하니 흑옥의 벽을 바라보았다.

북두칠성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깊고도 검은 흑옥의 벽속에서 흐릿한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북두칠성이 내 몸 속으로 빨려 들어왔던 것같은데...)

투명하게 변해가던 자신의 몸으로 북두칠성이 하나씩 흡수되었었다.

환각인가 생각해봤지만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염정(廉貞), 무곡(武曲), 파군(破軍)...

인간의 생사와 운명, 길흉화복을 관장한다는 북두칠성이 차례차례 임청우 자신의 몸으로 흡수되었었다.

덕분에 광활한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 존재를 잃어가던 임청우는 다시 형상을 갖추고 이 세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임청우였다.

 

시간이 얼마나 더 지났는지 모른다.

이윽고 풀어졌던 근육에 탄성이 돌아오고 벌어졌던 관절도 맞물려졌다.

임청우는 힘겹게 일어났다.

흑옥의 벽에 박혀있는 북두홀을 만져보았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임청우는 아쉬움을 남기고 흑옥의 벽 앞을 떠났다.

 

***

 

임청우는 북두무랑을 나왔다.

두 개의 월동문 중 <>자가 새겨진 오른쪽 월동문으로 나와 보니 어느덧 노을빛이 사라지면서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북두무랑 안에서 보낸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혹시나 했는데 단 한 구절의 무공비결도 얻을 수 없었다.)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북두무랑을 나섰다.

(하긴 기연이 이토록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림고수가 되지 못할 사람이 없겠지.)

밖으로 나온 임청우는 아쉬운 마음에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에 왼쪽 월동문처럼 오른쪽 월동문 옆의 벽에도 상당히 많은 글이 새겨져 있는 게 들어왔다.

다가가 살펴보니 그 글은 사람들의 이름이었다.

서명은 수십 줄인데 한 줄에 하나의 이름만 새겨진 경우도 있고 십여 개가 나란히 적혀있기도 했다.

(살아서 북두무랑을 통과한 사람들의 이름일 것이다. 한 줄이 한 세대를 의미할 테고...)

임청우는 서명을 윗쪽에서 아래쪽으로 살펴보았다.

윗부분의 십여 줄은 두꺼운 이끼에 덮여 있어서 판독이 불가능했다.

중간쯤부터는 읽을 수가 있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이름의 주인이 직접 새겨 넣은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 이름들 가운데 임청우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최근의 서명을 살펴보자. 어쩌면 북두무랑을 훼손한 범인도 이름을 남겼을지 모른다.)

임청우는 몸을 숙여서 맨 아랫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여섯 명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조천영(趙天永), 번리충(樊利忠), 풍건군(馮建軍), 왕천달(王千達), 당소광(唐小光), 양시우(梁翅祐)...

여섯 개의 서명 중 앞쪽의 다섯 개는 파인 부분의 색이 절벽과 비슷하다. 이름을 새긴 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적혀있는 양시우(梁翅祐)라는 이름에는 바위 안쪽의 밝은 색이 남아있다.

아무리 길게 잡아도 그 이름이 새겨진 후 이십 년 이상의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찾았다! 바로 이자다!”

임청우는 마지막에 새겨진 서명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풍화된 정도로 봐서 양시우란 이 이름은 북두무랑의 무학비결들이 훼손되었을 무렵에 새겨졌다. 거의 틀림없이 이자가 범인이다!”

임청우는 양시우라는 자가 북두무랑을 통과한 후 다른 사람이 북두무제의 무학비결을 읽지 못하도록 훼손해버렸음을 확신했다.

하긴 범인을 알아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중에 북두무제와 관련된 사람을 만나면 북두무랑의 상태나 알려주도록 하자.”

임청우는 월동문을 등지고 돌아서 안개의 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헌데 임청우는 몇 걸음 옮기지도 않고 기겁하며 멈춰 섰다.

월동문 앞쪽의 땅 바닥에 수많은 뱀들이 누워있었기 때문이다.

족히 백 마리가 넘어 보이는 뱀들은 크기가 제각각이었다. 한 뼘 쯤 되는 작은 새끼 뱀이 있는가 하면 대들보만한 크기의 구렁이도 보인다.

그 많은 뱀들이 어디선가 몰려와 미동도 않고 누워있다.

... 이 뱀들, 왜 갑자기 몰려든 건가?”

소스라치듯 놀란 임청우는 뒷걸음질을 쳤다.

산을 타다보면 뱀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많고 다양한 뱀이 한 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처음 본다.

저 놈 뭐하는 거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임청우는 금관혈린사를 발견했다.

금관혈린사는 죽은 듯이 누워있는 뱀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중인데 하는 짓거리가 기이했다.

그 놈은 마치 사열이라도 하듯 거만하게 고개를 세운 채 뱀들 사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다가 대충 자신과 비슷한 크기의 뱀 옆에 이르면 쭉 몸을 펴서 길이를 잰다.

금린혈관사가 자기 옆에 몸을 누이면 비교당하는 뱀은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이번에 길이를 잰 뱀은 금관혈린사보다 한 뼘쯤 더 크다

툭툭!

금관혈린사는 불만스럽게 그 뱀을 꼬리로 건드렸다.

금관혈린사의 꼬리에 닿은 뱀은 처형 직전에 사면을 받은 사형수처럼 안도하며 긴장을 푼다.

다른 뱀들의 길이를 재고 있는 건가?”

임청우가 어리둥절할 때 금관혈린사는 비슷한 크기의 또 다른 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두려움에 떠는 그 뱀 옆에 몸을 쭉 펴며 누웠다.

이번에는 길이가 딱 맞다.

쉿쉿!

그걸 확인한 금관혈린사는 만족한 듯 고개를 쳐들며 혀를 날름거렸다.

스스스! 사사삭!

그러자 다른 뱀들은 안도하며 일제히 몸을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가는 놈도 있고 조각상처럼 보이는 시체들 사이로 숨는 놈도 있다.

이제 동굴 앞쪽의 바닥에는 금관혈린사와 그놈이 길이를 잰 놈만이 남았다.

(죽은 듯 누워있던 뱀들이 마치 황제의 칙명을 받은 신하들처럼 흩어진다.)

임청우가 사라지는 뱀들을 보며 감탄할 때 금관혈린사는 홀로 남은 뱀의 머리를 붉은 혀로 핥았다.

금관혈린사의 혀가 머리에 닿은 뱀은 보기에도 딱하게 바들바들 떨고 있다.

(뭘 하려고 몸길이를 비교했을까? 설마 짝짓기 상대를 찾은 것일까?)

임청우가 의아해할 때였다.

금관혈린사가 남아있는 뱀의 머리를 덥석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뱀을 머리부터 삼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뭐야? 잡아먹기에 적당한 상대를 고르기 위해 길이를 재본 건가?”

후루룩!

임청우가 놀라는 사이에 금관혈린사는 순식간에 뱀을 다 삼켜버려서 꼬리만 입 밖으로 나와 흔들리고 있다

참 빨리도 먹는다!”

그 꼬리마저 이내 삼키는 금관혈린사를 보며 임청우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했다.

끄억!

자기 몸 길이만한 뱀을 삼킨 금관혈린사는 사람처럼 트림까지 하는데 어느덧 그놈의 몸은 전보다 배로 통통해져 있었다.

트림까지하고... 참 골고루 한다.”

꼬르륵!

쓴웃음을 짓는 임청우의 배에서 비둘기 우는 소리가 났다.

저놈이 배 채우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출출해지는구나. 먹을 건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

허기를 느낀 임청우는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

호리병의 마개가 열리면서 백초주의 그윽한 향기가 주변으로 퍼져간다.

그러자 배를 채우고 누워있던 금관혈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꼴꼴꼴!

허기를 면하기 위해 술을 마시던 임청우는 흠칫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금관혈린사가 그의 발치로 슬금슬금 기어오고 있었다.

왜 또?”

임청우는 경계하며 호리병에서 입을 떼었다.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술을 마시고 싶은 거냐?”

임청우가 혹시나 해서 묻자 금관혈린사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 참... 뱀이 술을 달래기도 하고...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나.”

임청우는 어이없어 하면서도 호리병을 금관혈린사의 머리 위로 가져가 기울였다.

조금 맛만 봐라. 넌 덩치가 작아서 술에는 약할 거다!”

쪼르르!

임청우가 아래로 기울이는 호리병에서 술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금관혈린사는 그 즉시 입을 쩍 벌려서 술을 받아마셨다.

술맛 좋지? 백가지 약초를 삭혀서 만든 백초주라는 거다. 내가 이래 뵈도 사냥과 채약뿐 아니라 술도 잘 담근다는 거 아니냐?”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에게 술을 먹이며 자랑할 때였다.

!

갑자기 금관혈린사가 호리병 입구에 머리를 처박았다.

야야! 너 지금 뭐하는 거냐?”

임청우는 기겁하며 호리병을 쳐들었다.

스르르!

하지만 금관혈린사는 단번에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금관혈린사는 머리에 뿔도 달려있고 식사를 한 직후라 몸통도 호리병 입구보다 더 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관혈린사는 마치 연기나 물처럼 변해 호리병에 들어가 버렸다.

놈은 임청우가 이해하지 못하는 신통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 빨리 나와! 잘못 하면 너 뱀술 된다!”

당황한 임청우는 호리병을 흔들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금관혈린사가 다시 불쑥 머리를 호리병 밖으로 내밀었다.

끄억!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트림을 한다.

호리병에서는 더 이상 술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너 그 새 남아있던 술을 다 마신 거냐?”

스르르!

임청우가 놀라는데 금관혈린사는 뿔을 몸통에 찰싹 붙이더니 다시 호리병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롱! 고로롱!

이어 호리병 속에서 규칙적으로 코를 고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술 병 속에서 잠들고... 뭐 이런 벽창호가 다 있는 건가?”

임청우는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보아하니 금관혈린사는 호리병 속이 아늑해서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놈을 꺼내려면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을 찢어야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호리병을 버리는 것은 아깝다.

어쩔 수 없이 금관혈린사를 넣은 채 호리병을 가져가야한다.

하긴 너같은 친구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지. 잘 자라! 술 깨면 풀어주마!”

임청우는 호리병을 허리띠에 묶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여길 빠져 나가자!”

호리병을 허리에 찬 임청우는 서둘러 안개의 벽으로 다가갔다.

왔던 길을 되짚어 안개 속으로 들어가 보니 조금 흐려졌지만 점점이 광점이 남아있다. 금관혈린사가 임청우를 안내하며 남겼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해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임청우는 짙은 안개 속으로 이어져 있는 광점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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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들보 위의 비급(秘笈)

 

 

고불선사는 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문방사우는 한쪽으로 밀어두었고 책과 종이들은 반대쪽에 쌓아서 탁자의 가운데를 비게 만들었다.

덜컹!

문득 고불암의 문이 열리면서 귀면지존이 안으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었소.”

하지만 고불선사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탁자 정리를 마무리했다.

귀면지존이 나타날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노납이 교주라 해도 흔적을 지우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오.”

고불선사는 정리한 물건들 중 몇 장의 종이를 탁자 중앙에 놓으며 말했다.

하물며 이토록 중요한 탁본(拓本)이 유출되도록 방치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오.”

고불선사가 귀면지존 쪽으로 미는 종이들 위에는 무언가에 먹물을 묻혔다가 찍은 탁본이 새겨져 있다.

주먹을 쥔 사람 팔뚝에 종이를 대어 탁본을 뜬 형태인데 생생한 핏줄과 함께 수많은 문양(紋樣)이 새겨져 있다.

그 문양은 범어, 즉 고대 천축의 문자였다.

본좌가 선사에게 맡겼던 그 탁본의 정체를 알아낸 거요?”

귀면지존은 탁자 앞에 멈춰서며 음산하게 눈을 번뜩였다.

비록 파계(破戒)하긴 했지만 노납도 소림사의 제자요. 아무렴 달마조사(達磨祖師)께서 남기신 유물의 탁본을 못 알아보겠소?”

고불선사는 회한이 서린 표정으로 웃었다.

맞소! 역시 선사는 학식과 혜안으로는 소림제일이시오.”

귀면지존은 탁자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스슥!

그러자 탁본을 뜬 종이들이 귀면지존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어 귀면지존은 그 종이들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넘기며 확인했다.

유출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되오.”

그 모습을 보며 고불선사가 말했다.

무궁무진한 화근이 될 수도 있는 달마묵장의 탁본을 세상에 내보내서 풍파를 일으킬만한 배짱이 노납에게는 없으니 말이오.”

선사께서 허언을 하지 않는 분이라는 걸 알기에 지금의 그 말씀은 믿어드리겠소. 하지만...”

화르르!

귀면지존 손이 달아오르면서 탁본을 뜬 종이들이 단번에 불타올랐다.

만에 하나 달마묵장에서 비롯된 무공을 쓰는 자가 발견된다면... 선사의 사랑스러운 따님은 여자로서 가장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 것이오.”

귀면지존은 삼매진화로 탁본을 재로 만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불선사는 합장하며 눈을 감았다.

교주의 암계(暗計)에 빠져 파계를 한 그날 이후로 노납에게 사바세계는 온전히 고해(苦海)일 뿐이었소. 어서 노납을 이 끔찍한 업장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구려.”

눈을 감은 고불선사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좌를 위해 큰 공을 세워주신 선사의 부탁이니 들어드리리다.”

귀면지존은 탁본을 태운 재를 털어낸 오른손으로 고불선사를 겨누었다.

지징!

그자의 오른손이 진동을 일으키며 달아올랐다.

(시주...)

귀면지존의 손바닥이 진동함에 따라 몸을 떨며 고불선사는 강유를 떠올렸다.

(부디 세존의 가호가 함께 하기를 빌겠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고불선사의 의식은 영원한 암흑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떨어지면서 태실봉 일대도 붉은 노을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강유는 고불암이 자리한 태실봉 동쪽의 절벽 위에 서있었다.

태실봉을 내려갔던 강유는 숲이 울창하여 남의 눈에 띠지 않을만한 곳에서 방향을 돌려 고불암으로 돌아온 것이다.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자리하고 있어서 위쪽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대충 이각(二刻;30)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강유는 다양한 색상으로 물드는 서쪽 하늘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이각이면 내 걸음으로 오십 리는 충분히 갔다가 돌아올 시간이니 고불암으로 돌아가 봐도 되겠지.)

휘익!

생각을 마친 강유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절벽은 거의 수직인 데다가 높이가 백 장은 족히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내려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험준하고 높은 절벽이다.

하지만 경신술로 일세를 풍미했던 소요신군의 아들 강유에게 이 정도 절벽을 내려가는 것은 큰 무리가 아니다.

! 타탁!

강유는 마치 산양처럼 절벽을 이리저리 차며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백여 장쯤 내려가자 절벽 중간의 돌출부에 세워진 고불암 지붕이 보였다.

휘릭!

강유는 만일을 대비하여 가급적 소리를 내지 않고 고불암 앞의 마당으로 내려섰다.

강유가 조금 가빠진 숨을 고르며 살펴보니 고불암의 문은 닫혀있다.

스님! 소생 돌아왔습니다.”

강유는 작게 말하며 고불암의 닫혀있는 문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대신 강유는 심상치 않은 냄새를 맡고 얼굴이 굳어졌다.

(피비린내!)

그렇다.

흐릿하지만 고불암의 문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흘러나오는 것이 느껴진 것이다.

(...!)

덜컹!

급히 문을 열고 고불암으로 들어서던 강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고불암 내부는 강유가 떠날 때와 딱히 변한 게 없었다.

다만 암자 중앙에 놓인 탁자 건너편에 고불선사가 누워있는 것이 다를 뿐이었다.

천장을 보는 자세로 누워있는 고불선사의 입과 코, 양쪽 귀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며 머리 주변 바닥은 피가 흥건했다.

스님!”

강유는 급히 고불선사 옆으로 다가가가 목 주변을 만져보았다.

하지만 진맥하는 강유의 손에 어떤 생명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았다.

(입적(入寂)하셨다.)

고불선사를 진맥해본 강유는 혼란에 휩싸였다.

(사인(死因)은 심장과 혈맥의 급작스런 파열... 내공을 잘못 운용하여 혈기(血氣)가 폭주한 듯한 모습이다.)

소요신군은 다 방면에 박식하여 강유에게 의술도 상당히 깊이 가르쳤다.

덕분에 강유는 어지간한 의원 못지않은 의술 지식을 갖고 있다.

(사인만 보면 전형적인 주화입마(走火入魔)의 현상인데...)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가 아는 범주 안에서 보자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고불선사는 자연사 한 모습이다.

하지만 강유는 고불선사의 죽음이 결코 자연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고불선사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신 것처럼 행동하셨다. 누군가에게 감시를 당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강유는 고불선사가 탁자에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 쓰던 장면을 떠올렸다.

(틀림없다. 스님은 어떤 자에게 살해당하셨다.)

강유는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부득 갈았다.

(주화입마로 돌아가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기괴한 마공에 당해 심장과 혈맥이 터져버린 것이다. 내게 오십 리 쯤 갔다가 돌아오라 하신 것은 당신을 해치려는 흉수가 나도 해코지 할까 우려하신 때문이었고...)

분노하던 강유는 고불선사가 말없이 대들보를 올려다보던 것을 기억해내었다.

(혹시...)

휘익!

급히 일어난 강유는 대들보 쪽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대들보 근처까지 뛰어오른 강유의 눈에 책 한 권이 놓여있는 것이 들어왔다. 그리 두껍지 않고 최근에 새로 지은 듯 깨끗한 책이다.

(!)

!

강유는 놀라면서도 재빨리 손을 뻗어 책을 집어든 후 바닥으로 다시 내려왔다.

강유가 대들보에서 발견한 그 책에는 <古佛懺悔記>라는 제목이 적혀있다.

(고불참회기(古佛懺悔記)... 고불선사께서 당신이 살면서 지은 죄를 적어놓은 수기(手記)겠구나.)

강유는 책의 내용이 궁금하여 펼쳐 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였다.

휘익! !

강유의 귀에 바람 소리같은 것이 들렸다.

(파공성(破空聲)이다!)

강유는 급히 문쪽을 돌아보았다.

갑자기 들려온 소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였다.

(누군가 고불암으로 빠르게 올라오고 있다. 문으로 나가면 마주칠 가능성도 있고...)

강유는 책을 품속에 넣으면서 암자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 강유의 눈에 암자 입구 맞은편인 뒤쪽 벽에 작은 쪽문이 나있는 게 보였다.

(자칫 고불선사님을 시해했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들키지 않고 여길 빠져나가야만 한다.)

서둘러 쪽문으로 가려고 고불선사의 시신 옆을 지나던 강유는 발길을 멈추었다.

고불선사의 허리 아래에 깔려 있는 노리개가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스님의 원수를 알아낼 수 있는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 챙겨가자.)

강유가 몸을 숙여 노리개를 집어들 때였다.

휘익! !

옷자락 날리는 소리들이 바로 지척에서 들려왔다.

(서둘러야겠다.)

강유는 급히 입구 반대쪽의 쪽문을 열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강유가 빠져나온 쪽문 밖은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휘익

하지만 강유는 바람처럼 절벽의 측면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다.

십여 장쯤 비스듬히 달린 강유의 앞쪽에 앞쪽으로 조금 돌출 된 모서리가 나타났다.

강유는 그 모서리 위로 올라가 몸을 숨기며 고불암을 내려다보았다.

휘익! !

그 직후 고불암으로 통하는 계단을 통해서 네 명의 인물이 날 듯이 달려 올라왔다.

네 명 모두 중인데 나이 든 초로의 승려 한 명과 젊은 승려 세 명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찾아왔다.)

강유는 승려들의 복장으로 그들이 고불선사와 동문임을 알아보았다.

!”

... 이런...!”

고불암 앞의 마당에 올라서던 승려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고불암의 문이 열려있어서 고불선사가 피를 흘리며 누워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사숙!”

사숙조님!”

급히 고불암 안으로 뛰어 들어간 승려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고불선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 아미타불!”

사숙조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가시다니...”

곧 고불암 안에서 승려들의 불호와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극락왕생하십시오 스님.)

승려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강유는 노리개를 손에 든 채 합장했다.

(스님을 시해한 흉수는 반드시 제 손으로 찾아내 죄값을 치르도록 만들겠습니다.)

휘익!

강유는 맹세를 하며 절벽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은 이내 고불암에서 사라졌다.

 

* * *

 

<선종(禪宗)의 초조(初祖) 달마(達磨)께서는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독살당해 웅이산(熊耳山)에 묻히셨다.>

<삼 년 후,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오던 송운(宋雲)이라는 인물이 총령(葱嶺;파미르고원)을 넘다가 달마조사를 만났다.>

<헌데 맨발인 채 서쪽으로 가고 계셨던 달마조사께서는 낡은 신발 한 짝을 주장자(拄杖子;승려들의 지팡이)에 매달고 있었다.>

<중원으로 돌아온 송운의 보고를 받은 황제가 달마조사의 무덤을 파헤쳐보니 과연 시신은 사라지고 낡은 신발 한 짝만이 관 속에 남아있었다.>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구나.)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고불선사께서는 어찌 하여 당신의 삶을 참회하기 위해 적은 수기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하신 것일까?)

태실봉을 내려온 강유는 숭산 아래 등봉현(登封縣)에 자리한 객잔에 투숙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혹시 모를 추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간단히 요기를 하고 객실로 돌아온 강유는 서둘러 고불참회기를 꺼내 읽었다.

헌데 강유의 예상과 달리 고불참회기는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되고 있었다.

남천축 향지국(香至國)의 셋째 왕자였던 보리달마가 어떻게 중원에 들어왔고 어떻게 살다가 누구에게 죽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드물다.

고불선사가 남긴 고불참회기의 앞부분에는 바로 그 달마대사의 고사가 적혀있다.

(이럴 수가...)

처음에는 의아해 하던 강유의 얼굴은 이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고불참회기에는 세상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비사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달마의 관에서 발견된 것은 가죽 신발 한 짝만이 아니었다.

검게 말라비틀어진 팔 한쪽도 가죽신과 함께 남아있었던 것이다.

주먹을 움켜쥔 형태의 그 팔뚝은 분명 인간의 것이었지만 무엇으로도 손상시킬 수가 없었다.

칼날이 들어가지 않을 뿐 아니라 용광로의 쇳물에 넣었다 꺼내도 멀쩡했다.

황제는 달마가 남긴 그 단단한 검은 팔에 신통력이 있다 여겨 숨기고 철저히 비밀에 붙였다.

그 때문에 세상에는 달마의 관에 오직 가죽신 한 짝만이 남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달마의 것으로 추측되는 검은 팔에 대한 소문은 은밀하게 세상에 퍼졌으며 마침내 달마묵장(達磨墨掌)이란 이름까지 붙게 되었다.

그와 함께 달마묵장의 비밀을 푸는 자는 절대무적(絶代無敵)이 된다는 소문도 퍼져 무림인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바가 되었다.

 

(달마묵장... 달마묵장...)

강유는 그 이름을 되뇌이며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견문이 그리 넓지 않은 탓에 강유는 달마묵장이라는 존재를 오늘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마묵장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진 것이다.

강유는 자신과 달마묵장이 운명적으로 엮여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하지만 강유가 느꼈던 기이한 감상은 이어진 고불참회기의 내용에 의해 흔적도 없이 흩어지게 되었다.

 

<노납 고불은 불제자로서 결코 지으면 안되는 죄를 범했다.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아녀자를 간음했을 뿐 아니라 그 여인으로 하여금 아이까지 낳게 하였기 때문이다.>

 

달마묵장의 고사에 이어 그같은 고백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학승으로 이름 높은 고불선사께서 금색계(禁色戒)를 범했을 뿐 아니라 자식까지 두었다니...)

강유는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와 함께 강유는 고불암에서 자신이 노리개를 건네주었을 때 보였던 고불선사의 심상치 않았던 반응을 떠올렸다.

(이 노리개...)

강유는 고불암에서 가져온 볼품없는 노리개를 꺼내 살펴보았다.

(어쩌면 이건 고불선사가 범했던 여인의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노리개를 탁자에 내려놓은 강유는 복잡한 심정으로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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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같은 말()을 탄 원수

 

 

(누가 활을 쏜 건가?)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란 백남빈은 몸을 반쯤 돌려서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얼마 전 대려장 기마대와의 거리가 십리 이상인 것을 확인 했었다.

그리고 제 아무리 팔 힘이 좋은 궁수라도 화살을 십리 넘게 날려 보내지는 못한다.

하물며 말의 목에 상처를 낸 화살은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든 게 아니라 수평으로 들이닥쳤었다.

“!”

몸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던 백남빈의 눈이 부릅떠졌다. 불과 백여 장의 거리를 두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쇄도하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백남빈으로서는 십여 리나 되는 거리를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좁힐 수 있는 말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화악!

낙타보다도 큰 흑마는 말 그대로 나는 듯이 들이닥치고 있다.

콰드드!

얼마나 빠른지 그 흑마의 네 개의 발굽이 지면을 박차는 소리가 뒤늦게 들려올 정도다.

거센 바람을 탄 먹장구름처럼 다가오는 흑마에는 날씬한 몸에 붉은 옷을 걸친 소녀가 타고 있는데 상체를 고추 세운 채 철궁의 시위를 놓고 있었다.

(아차!)

붉은 옷의 소녀가 시위를 놓은 자세인 것을 본 백남빈의 눈이 다시 치떠졌다.

!

두 번째 화살이 이미 자신의 가슴 바로 앞에까지 이른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

두 번째 화살이 말 위에서 돌아보는 자세인 백남빈의 가슴에 여지없이 꽂히면서 날카로운 금속성을 냈다.

티잉!

하지만 화살은 백남빈의 가슴을 궤뚫지 못하고 궤적을 바꾸며 옆으로 튕겨나갔다.

동시에 화살에 실린 강력한 힘에 백남빈의 몸이 뒤로 홱 넘어갔다.

(어떤 갑옷이라도 뚫을 수 있는 강철촉의 화살이 튕겨져 나갔다! 저자의 옷 속에 든 더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때문이다.)

츄학!

강미루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면서도 물이 흐르는 듯한 동작으로 다시 두 자루의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았다.

"! !"

"미루! 미루!"

십여 리 뒤에서 따라오는 대려장 기마대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거리가 먼 탓에 그들의 눈에는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는 것으로 보인 것이다.

(허억!)

왼쪽 늑골에 가해진 충격에 백남빈은 정신이 아찔해졌다. 강미루가 쏜 화살에는 그만큼 강력한 힘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백남빈은 두 다리에 힘을 주어 겨우 버티며 말 등에 엎어졌다.

(아버지가 날 지켜주셨다.)

백남빈은 말의 갈기를 움켜쥐어 옆으로 넘어지려는 몸을 지탱하면서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백남빈이 강미루가 쏜 두 번째 화살에 맞고도 죽지 않은 것은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에 든 옥패 덕분이었다.

실종 된 아버지가 남겼다는 그 옥패가 화살을 막아준 것이다.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백남빈이 지닌 특별한 능력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옥패는 정확히 화살이 닿는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강철로 만든 화살촉도 그 옥패를 깨트리지 못하고 튕겨나갔다.

! !

말 등에 엎드린 백남빈의 귀에 연달아 시위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바로 뒤에서 들리는 듯 했다.

사실이 그러했다.

강미루를 태운 거대한 흑마 흑왕은 불과 십여 장 뒤에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흑왕도 진저리치게 빨랐고 강미루 속사(速射)도 무섭게 빨랐다.

!

백남빈은 말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몸을 옆으로 굴려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다.

! 피잉!

약간의 시차를 두고 날아든 두 자루의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백남빈의 등을 스치며 지나갔다.

콰드드!

백남빈의 몸은 말의 옆구리에 달라붙었으나 두발은 땅에 끌리면서 먼지를 확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난 대량의 먼지에 의해 바로 뒤에까지 따라붙었던 강미루의 시야가 순간적으로 가려졌다.

강미루는 다시 활에 화살을 재운 상태였지만 백남빈의 모습을 놓쳐 쏠 수가 없었다.

!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백남빈은 땅에 끌리던 두 발로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가 다시 말 등을 구르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달리는 속도가 번개같은 흑왕을 떨쳐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니 반격할 수밖에 없다.

!

백남빈은 허공에 뜬 채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두두두!

그 사이에 흑왕은 백남빈의 발 아래로 달려왔다.

!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등 위로 떨어져 내리며 검으로 강미루를 찔러갔다.

하지만 강미루는 이미 왼손에 흑왕의 안장에 달아놓았던 방패를 들고 있었다. 백남빈이 두 발로 먼지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자 혹시 모를 변고에 대비해서 방패를 집어든 것인데 그것은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림없다!“

!

강미루는 앙칼지게 외치며 백남빈의 검을 방패로 막았을 뿐 아니라 강하게 옆으로 밀쳐 버렸다.

아직 어린 여자답지 않은 기민한 반응이다.

몸은 허공에 떠있는데 전력을 기울여 찔렀던 검은 강하게 옆으로 밀쳐졌다.

휘익!

그 때문에 균형을 잃은 백남빈의 몸은 강미루의 머리를 넘어 흑왕의 뒤쪽으로 날아갔다.

!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닥에 패대기쳐지려는 순간 백남빈은 왼손으로 흑왕의 길고 풍성한 꼬리를 잡아챘다.

히이잉!

느닷없이 꼬리가 잡힌 흑왕은 깜짝 놀라 껑충 껑충 뛰며 앞으로 달려갔다.

낙타보다 큰 체격의 흑왕은 겅중겅중 뛰면서도 질풍같이 달려갔고 그 바람에 그놈의 꼬리를 잡은 백남빈의 몸은 마치 깃발처럼 허공에 휘날려졌다.

!

그런 백남빈의 머리를 향해 방패가 맹렬히 돌면서 날아든다. 강미루가 몸을 돌린 자세로 왼손의 방패를 던진 것이다.

하지만 놀란 흑왕이 겅중겅중 뛰면서 달리고 있는 탓에 조준을 정확히 할 수가 없었다.

! 따다당!

백남빈의 머리 위로 스치고 지나간 방패는 뒤쪽의 땅바닥에 부딪히며 불꽃을 튀겼다.

방패로 백남빈을 때리는 게 실패하자 강미루는 활을 던져버리고 안장에 걸려 있는 창을 뽑아들었다.

떨어져랏!”

그리고는 몸을 뒤쪽으로 돌린 자세로 창을 휘둘러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부악!

던져진 방패와 달리 수직으로 내리쳐지는 창은 정확히 백남빈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흑왕의 꼬리를 잡은 채 허공에서 허우적대던 백남빈으로서는 피할 길이 없다.

별 수 없이 내공으로 머리를 보호하며 그대로 얻어맞았다.

!

굵은 창대가 백남빈의 정수리를 강타하며 요란한 소리가 난다.

거리가 가까운 탓에 날카로운 날이 아니라 창대에 맞아 치명상은 피할 수가 있었다.

그렇긴 해도 극심한 고통이 느껴져서 백남빈은 오른손에 들고 있던 장검을 놓쳐버렸다.

만일 강미루가 당황하지 않아서 창대에 내공을 주입해서 휘둘렀더라면 백남빈의 머리는 잘 익은 수박처럼 깨어졌을 것이다.

따다당!

백남빈이 놓친 검도 흑왕의 뒤로 아스라이 멀어진다.

"차앗!"

그 사이에 창을 짧게 고쳐 잡은 강미루가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백남빈을 찔러왔다.

검을 놓쳐버렸으니 찔러오는 창날을 막을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흑왕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은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 창날을 피했다.

가뜩이나 휘날리던 몸인데 이제 백남빈의 몸은 바람 속에서 세차게 펄럭이는 깃발처럼 변했다.

미꾸라지 같은...”

강미루에게는 황당한 일이었으나 백남빈에게는 목숨이 걸린 상황이다.

이렇게 빨리 달리는 말에서는 굴러 떨어지기만 해도 큰 부상을 당하고 말 것이다.

설령 다치지 않는다 해도 흑왕의 꼬리를 놓치면 뒤 따라오는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잡히게 된다. 사람의 발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네 발로 달리는 말의 추격을 떨쳐버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당황하고 놀라긴 흑왕도 마찬가지였다.

히히힝! 두두두!

백남빈이 꼬리를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 대자 놀란 흑왕은 더욱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죽엇! 죽어라!”

슈슉! 피핑!

강미루는 뒤를 돌아보는 자세인 채 기를 쓰고 백남빈을 찌르려 했고 백남빈은 매번 아슬아슬하게 날카로운 창끝을 피해냈다.

백남빈으로서는 난생 처음 겪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 상태를 타개하지 못하면 결국 창에 찔리고 말 것이다.

반격을 해야만 한다.

"크왓!"

화악!

다시 한 번 강미루의 세찬 창질을 피한 백남빈은 온 힘을 모아 말꼬리를 축으로 몸을 옆으로 휘돌렸다.

그리고는 몸이 돌아가는 기세를 빌어 양발로 강미루의 허리를 찍어갔다.

!”

강미루는 기겁하며 몸을 흑왕의 엉덩이 쪽으로 홱 젖혀서 백남빈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다.

발길질이 빗나가려 하자 백남빈은 붙이고 있던 두 다리를 확 벌렸다.

콰득!

그리고는 뒤로 몸을 젖히던 강미루의 허리를 두 다리로 휘감아버렸다. 몸은 거의 수평으로 누인 채로...

네놈이...”

허리가 휘감긴 강미루는 깜짝 놀라 창대로 백남빈의 머리를 내리쳤다.

!

백남빈은 그때까지 잡고 있던 흑왕의 꼬리를 놓고는 자신을 내리쳐오는 창대의 중간을 잡았다.

백남빈의 이같은 수법은 대담하고 재빨랐지만 강미루 또한 임기응변이 아주 빨랐다.

!

창대가 상대에게 잡히자마자 강미루는 즉시 창을 놓아버리며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았다.

!

그리고는 그 단검을 자신의 허리를 휘감은 백남빈의 왼쪽 허벅지에 힘껏 꽂았다.

(!)

백남빈은 까무라칠 듯한 통증에 눈을 흡떴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여유도 백남빈에게는 없었다.

서로의 몸이 밀착되다시피 한 상태에서 강미루가 다시 단검을 쓰게 하면 위험하다.

우둑!

잡고 있던 창을 던져버린 백남빈은 강미루를 두 팔로 와락 껴안았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초식이고 뭐고 나올 게재가 아니었다.

아흑!”

강미루의 눈이 치떠졌다.

백남빈의 허벅지에 꽂은 단검을 뽑을 새도 없이 두 팔이 백남빈의 강철 족쇄같은 팔에 묶여 버린 것이다.

!

놀라고 분노한 강미루는 생각할 틈도 없이 입을 벌려 백남빈의 턱을 덥썩 물었다.

(!)

턱이 물린 백남빈의 이마에서 비지땀이 흘러내렸다.

(정말 심보가 악독하기 짝이 없는 계집이다. 나하고 무슨 원수를 졌기에 이토록 몸도 사리지 않고 덤빈단 말인가?)

난생 처음 겪는 고통에 백남빈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몸을 밀착한 채 한 덩이가 된 두 사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엇비슷한 수준의 내공을 지녔으며 그 내공을 상대방이 혈도를 찍지 못하도록 중요한 혈도를 방어하는데 동원하고 있다.

만일 조금이라도 내공을 흐트렸다가는 상대방에게 혈도를 제압당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완력으로만 대치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백남빈은 허벅지를 찔린 고통으로 인해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지만 강미루 역시 죽을 맛이 되어 있었다.

강미루는 철령보의 종자들은 하나같이 허약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헌데 자신의 몸을 팔과 다리로 제압하고 있는 이 사내가 보여준 임기응변은 놀라운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런 무지막지한 놈을 만나서 육탄전(肉彈戰)을 벌이는 곤욕을 치룬담!)

강미루는 부끄럽고도 화가 치밀어 머리에서 연기가 날 지경이었다.

철이 든 이래 사내의 손가락 끝조차 몸에 닿아본 적이 없는 강미루다.

헌데 지금 사내의 품에 으스러지도록 안겨 있으며 사내는 또 그녀의 하체 위에 걸터앉은 자세가 되어 있다.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강미루의 입이 물고 있는 부위가 문제였다.

단단한 뼈로 이루어진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자니 오히려 그녀의 턱이 얼얼해 왔다.

사람의 턱은 정말 물어뜯을 곳이 못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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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四 章

 

                 無人島奇綠

 

 

잠시 숨을 돌린 기검룡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순간, 그의 두눈은 경이로 크게 떠졌다.

[...!]

그의 입에서는 절로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금 그의 눈앞에 보이는 섬은 파석도(波石島)와는 전혀 대조적인 풍경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수목들이 마치 그림같이 신선한 경이감을 느끼게 했다.

헌데 이때, 정신없이 섬의 풍경에 취해있던 기검룡은 문득 시장기를 느꼈다.

하루종일 음식이라고는 입에 대보지도 못한 탓이었다.

[먹을만한 것이 없을까?]

그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문득 걸음을 옮겨 섬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얼마정도 들어갔을까?

울창하던 수림이 끝나고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이 다투어 피어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헌데, 그 초원의 끝에 허술한 한 채의 석옥(石屋)이 지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사람이 살고 있는 모양인데...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는 초원을 가로질러 뛰듯이 석옥을 향해 다가갔다.

석옥 앞에 이른 기검룡은 한쪽 옆을 바라보며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석옥 옆에는 장정 두 사람이 팔을 둘러도 다 안을 수 없는 큰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높이는 대략 이 장 정도.

또한 그것은 도저히 몇 년이나 묵은 것인지를 판단할 수 없는 고목(古木)이었다.

헌데, 기이하게도 무성한 나뭇잎 사이에 어린아이 머리만큼 커다란 하나의 금빛 복숭아가 살짝 감추어진 채 열려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그 금과(金果)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굉장히 큰 봉숭아구나...)

단번에 시장기를 자극하는 금빛 복숭아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향긋한 향기가 풍겼다.

기검룡은 즉시 복숭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그순간 그는 멈칫 했다.

(석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이 있는 물건인지 모른다. 더우가 저것은 하나밖에 없는데 몰래 먹어버린다면 주인이 화를 낼 것이다.)

기검룡은 평소 낙척문사에게 엄한 예의범절을 배운 탓으로 비록 허기가 밀려왔으나 선뜻 복숭아를 따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석옥 앞에 우뚝 섰다.

지은지 매우 오래인 듯 벽이며 문() 등이 온통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안에 누구 계십니까?]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음성을 가다듬어 주인을 불렀다.

허나 몇번 거듭해 불러도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기검룡은 의아함을 느끼며 석문을 밀었다.

___ ___ !

어렵지 않게 석문은 열렸다.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허나 그 순간,

[... ... 시체...!]

기검룡은 경악성을 발하며 그 자리에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석옥의 한 곳에 놓여있는 돌침상에 한 구의 백골(白骨)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후 조심스럽게 석옥 안을 살펴보았다.

백골이 누워있는 돌침상 앞에는 높이 두 자 정도의 석탁(石卓)이 놓여있었다.

또한 석문의 맞은편 벽에는 기이하게도 한 폭의 그림이 걸려있었다.

기검룡은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키고 석옥 안으로 들어섰다.

이어 조심스럽게 석탁이 놓인 곳으로 다가갔다.

석탁 위에는 수북이 먼지가 쌓인 가운데 두 가지의 물건이 놓여있었다.

[...?]

기검룡은 두눈에 이채를 발하며 그 물건을 살폈다.

그중 하나는 극히 낡은 한 권의 책자였다.

책의 겉장에는 먼지를 뒤집어쓴 한 자의 글이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

 

기검룡은 문득 호기심을 느꼈다.

그는 서슴없이 책을 집어들었다.

허나 그 순간,

[... 이런...!]

그는 당황성을 발했다.

책자의 앞부분이 그의 손에 닿자 한 줌의 가루로 화해 부서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못내 아까운 표정을 지었다.

허나 곧 그는 부서지지 않은 나머지 부분을 내용을 조심스럽게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읽은 것은 한 가지 장공(掌功)의 진결(眞訣)이었다.

앞부분이 삭아 없어져 어떤 종류의 장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나머지 진결의 내용으로 미루어 끔찍한 음한장력(陰寒掌力)의 위력이 내포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기검룡은 다음장을 넘겼다.

허나 장력의 진결부분은 책장을 넘기는 순간 부서져 나갔다.

두 번째의 내용은 고어로 씌어진 한 가지 지공(指功)이었다.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

 

기검룡은 지공의 구결을 읽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지공은 익힌바 없는 그로서는 생소하고 난해하여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그저 내용을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 지나쳤다.

허나 그순간 구결은 이미 그의 뇌리에 암기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적혀있는 무공은 한 가지의 음공(音功)이었다.

 

<척천마음(擲天魔音).>

 

이것의 위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악기로도 탄주가 가능하다.

이 마음(魔音)이 한 번 펼쳐지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사위의 모든 것을 초토화를면 치못한다.

[...!]

기검룡은 척천마음의 위력 앞에 경악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런 가공할 음공이 하늘아래 존재하다니...]

그는 경악의 심정을 억제치 못했으나 곧 그 낡은 비급을 조심스럽게 품속에 갈무리했다.

비급의 옆에 놓여있는 것은 하나의 소금(小琴)이었다.

먼지를 털어내니 반질반질 윤이나는 일곱 치 길이의 소금이 드러났다.

허나 그것은 마땅이 일곱 줄이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정말 기이한 소금이구나.]

기검룡은 고개를 갸우뚱 했으나 경이함으로 두눈을 빛내며 그것을 갈무리했다.

이어 문득 그는 정면에 걸린 화폭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폭의 상단에는 용비봉무(龍飛鳳舞)의 웅휘한 필체로 네 글자가 적혀있었다.

 

<태극조원(太極造元).>

 

또한 글자 아래에는 한 가지 기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짙은 채색의 힘있는 화법으로 그려진 훌륭한 그림이었다.

헌데 그것은 기이하게도 작아지는 듯한 절벽이 갈라져 무너지는 형상을 마치 눈으로 보듯 선명하게 그려놓은 것이 아닌가?

[...?]

기검룡은 검미를 가볍게 찌푸리며 의혹의 표정을 지었다.

[... 깊은 현기(玄氣)가 깃든 그림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화폭에 담긴 속에는 어떤 은밀한 안배가 가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림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순간, 그는 재삼 감탄하고 말았다.

짙은 채색 밑으로 극히 세밀하게 절벽의 결까지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몇번 그 그림을 훑어보는 동안 그림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모조리 외우고야 말았다.

허나 끝내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은 알 수가 없었다.

이때 문득 그의 두눈이 반짝 빛났다.

[할아버지들께서 보시면 알아내실지도 모른다.]

기검룡은 화폭을 거두기 위해 손을 뻗었다.

허나, 우수수...!

비급과 마찬가지로 그 화폭역시 순식간에 부서져 한줌 먼지로 화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순 가볍게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온전한 것이라고는 소금(小琴)밖에 없군.]

그는 호기심이 사라지자 낮게 투덜거렸다.

이때 문득 그는 다시 극심한 시장기를 느꼈다.

그는 금빛 복숭아를 생각하고 석옥 밖으로 나갔다.

[주인이 없는 것이니...]

그는 금빛 천도(天桃)를 따 크게 한입 베어물었다.

순간 입안 가득 더할 수 없이 향기롭고 달콤한 맛이 느껴지며 복숭아는 그대로 사르르 녹아드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맛있는 복숭아가 있었다니...]

기검룡은 순식간에 어린아이 머리만한 복숭아를 게눈감추듯 먹어버렸다.

그러자 기이하게도 허기가 거짓말처럼 싹 가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배고픔이 가시자 기검룡은 문득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파석도로 돌아가야할 것을 생각하니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로서는 이곳이 어디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문득 그는 섬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산봉(山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 산봉에 올라가면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을지가 모른다.]

그는 한 가닥 기대를 갖고 획! 몸을 솟구쳤다.

헌데, 산봉을 향해 달리던 기검룡은 문득 의혹의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최대한의 속도를 내어 아무리 빨리 달렸으나 조금도 숨이 차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달리면 달릴수록 전신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막강한 진력이 용솟음치며 단전으로 모여드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다. 순식간에 공력이 배로 늘어난 것 같으니... 대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그는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산봉의 정상에 이르러 우뚝 몸을 멈추었다.

기검룡은 기대가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나 곧 그는 실망의 표정을 짓고 말았다.

주위는 끝없는 망망대해(茫茫大海)___.

어디를 둘러봐도 푸르게 출렁이는 물(), 물뿐이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 점차 서쪽 수평선이 진홍의 불덩이에 잠겨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석양(夕陽). 해가 지고 있는 것이다.

기검룡은 막연한 심정이 되어 한동안 산봉에 우뚝 서 있었다.

일신에 아무리 뛰어난 절기를 지녔다 하나 그는 이제 십오 세밖에 안된 소년이 아닌가!

허나 기검룡은 결코 나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이슬을 피할 장소를 찾았다.

[어두워지기 이전에 잠잘 곳은 찾아봐야겠다.]

석옥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나 웬지, 그곳은 다시 들어가기가 싫었다.

백골과 함께 밤을 새우기에는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다시 산봉을 내려갔다.

산봉중턱___.

그곳에 다행히 하나의 작은 암혈(暗穴)이 있었다.

기검룡은 그곳에 잠자리를 만들어 드러누웠다.

[... 할아버지들이 내 걱정을 많이 하실텐데...]

그는 문득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허나 몇 번을 뒤척이던 기검룡은 깜박 잠이 들었다.

 

[___ ___ ___!]

돌연 멀리서 허공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퍼졌다.

기검룡은 그 소리에 잠이 깨어 벌떡 일어났다.

섬칫한 전율이 전신으로 퍼졌다.

허나 그는 혹시하는 기대감으로 조심스럽게 암혈을 나섰다.

밖은 칠흑의 밤이었다.

암혈을 빠져나온 기검룡은 순간 두눈을 크게 떴다.

[... 배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소리쳤다.

섬의 동쪽 바다 위___.

두 척의 거선(巨船)이 거의 맞붙다시피 떠올랐다.

헌데, 그 중 한 척은 온통 시뻘건 화염으로 휩싸인 채 파선직전에 놓여있었다.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었다.

그의 눈에 불붙은 거선에서 한척의 소주가 내려지는 것이 보였다.

또한 이 소주(小舟)는 빠르게 무인도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두 배에 탄 사람들은 서로 죽고 죽이는 혈전(血戰)을 벌이고 있는 듯 했다.

허나 기검룡은 그들을 발견하자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절해고도, 무인도에서 사람을 만난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급히 산봉을 내려갔다.

이윽고, 그가 해안에 닿았을 때 예의 소주는 해안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었다.

허나, 북붙지 않은 거선에서 내려진 또다른 한 척의 소주가 앞의 그것을 바싹 뒤쫓고 있었다.

기검룡은 앞의 소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바로 이때, 뒤따르던 소주가 무서운 속도로 앞의 소주를 향해 쇄도하여 들어왔다.

동시에, 한 명의 흑의인이 뱃전을 박차고 앞의 소주를 덮치는 것이 아닌가?

앞의 소주에는 모두 세 명의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이때, 흑의인이 덮쳐들자 한 중년인이 벌떡 일어서며 무섭게 장()을 후려쳤다.

허나, 그순간 중년인은 한 줄기 싸늘한 검망이 자신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감을 느꼈다.

[___ !]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물속으로 급속히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냈다.

[굉장한 쾌검(快劍)!]

이때 나머지 한 명의 중년인이 노를 젓다가 벌떡 일어서며 쇠로 만들어진 노를 풍차처럼 휘둘렀다.

중년인, 그는 마치 철탑을 연상케하는 거구(巨軀)였다.

또한 얼굴 전체가 시커먼 구레나룻으로 뒤덮여 있어 몹시 위맹해 보였다.

___ ___ ___!

긴 노는 풍차처럼 돌며 흑의인을 단번에 박살낼 듯 몰아쳐갔다.

소주로 내려서려던 흑의인은 그 공세를 피하기 위해 일순 흠칫 하는 순간 수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그때,

[당주님! 갑시다.]

뒤따르던 소주에서 누군가 크게 소리치며 넓적한 판자를 흑의인의 발밑으로 던졌다.

[타핫___!]

흑의인은 재빨리 그 판자를 찍으며 허공으로 치솟았다.

중년의 대한은 버럭 노갈을 터뜨리며 재차 노를 휘둘렀다.

[내려가랏!]

허나 한 번 겪어본 흑의인은 날렵하개 그의 공세를 피해내며 기쾌한 일검을 내뻗었다.

츠츠츠츳...!

[!]

섬전같은 검기의 공세를 피하지 못하고 대한은 어깨에 일검을 맞고 비틀비틀 물러섰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보라가 솟구쳤다.

흑의인은 일검이 성공하자 점차 벼락같이 검을 휘둘렀다.

[죽어랏!]

그의 장검이 막 대한의 심장을 향해 짓쳐오는 순간,

[멈추시오!]

낭랑하고 위엄있는 소년의 음성이 흑의인의 손속을 제지시켰다.

___!

흑의인은 새파란 강기(罡氣)가 무섭게 자신의 장검을 타격해 들어오자 자칫 쥐고 있던 검()을 놓칠뻔 하였다.

그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소리쳤다.

[누구냐?]

그의 일갈이 떨어지는 순간 기검룡이 가볍게 흑의인과 대한 사이로 날아내렸다.

[이보시오! 왜 사람을 함부로 해치는거요?]

기검룡은 흑의인을 바라보며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그러자 흑의인은 그만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꼬마야 비켜라!]

그는 기검룡의 존재를 싹 무시하고 이번에는 무겁게 장()을 휘둘렀다.

___ ___ !

웅후한 음향과 함께 막강한 장력이 노도처럼 기검룡을 짓쳐들었다.

기검룡은 냉혹한 표정으로 흑의인을 내려보았다.

[당신은 나쁜사람이군!]

이어, 그는 번쩍 우수(右手)를 치켜들었다.

___ ___ !

그의 장심(掌心)에서 일순 새파란 강기가 폭사되었다.

순간,

[___ ___ ___!]

흑의인은 자신의 장력이 가볍게 무산됨을 느끼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이어, 첨벙___!

그는 피화살을 내뿜으며 바닷 속으로 나가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대한과 소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허나 정작 더욱 놀란 사람은 기검룡 자신이었다.

그는 흑의인이 너무도 어이없이 죽어 버리자 도리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___천강신공(天罡神功),

그가 펼친 이 무공에 대적할 무공이 천하에 존재하지 않음을 알 리 없는 그였다.

이때, 뒤따르던 소주에서 또 다른 흑의인이 벼락같이 기검룡을 덮쳤다.

[... 꼬마 놈이... 죽어랏!]

그들은 흉폭한 기세로 맹렬하게 검을 쪼개갔다.

허나 기검룡은 빙글 몸을 돌리며 우수를 휘둘렀다.

[! 돌아가랏!]

그의 우수가 섬전처럼 허공을 가른 순간, ___! ___!

[으헉!]

[!]

귀청을 찢는 금속성과 함께 다급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이어, ___ ___! 첨벙___!

두 명의 흑의인은 거의 동시에 바닷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

기검룡은 단번에 세 명의 흑의인을 격퇴하고 나자 일순 멍한 표정으로 지었다.

그로서는 처음으로 저지른 살생이기 때문이었다.

이때, 공손하고도 미세한 대한의 음성이 그의 등뒤에서 들렸다.

[소공자님! 위험한 지경에 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말에 기검룡은 퍼뜩 정신이 들어 돌아섰다.

그의 눈앞에 우직하고 순박해 보이는 대한과 그려 놓은 듯 아름다운 한 소녀가 놀란 눈을 한 채 서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소녀의 얼굴에 시선을 꽂았다.

십 사오 세 가량의 취의소녀, 그녀의 용모는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막 여인(女人)으로 발돋움하는 풋풋하고 청초한 아름다움, 그녀의 전신은 샘물처럼 맑은 싱그러움으로 뭉쳐져 있는 듯 했다.

기검룡은 그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그러자 취의소녀 역시 배시시 따라 웃는 것이 아닌가?

눈부시도록 맑고 고운 웃음이었다.

기검룡은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이름은 기검룡(奇劍龍)이다. 파석도(波石島)에서 왔지.]

그 말에 취의소녀는 반짝 두눈을 빛내며 생긋 웃었다.

[파석도라는 이름은 처음듣는 것 같아요. 흑아저씨는 혹시 알고 있나요?]

그녀의 의아하다는 듯 옆의 거한을 바라보았다.

허나 거한은 우직한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소인은 모르겠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누벼 동해(東海)라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히 알고 있지만 파석도는 처음듣는 섬이름입니다.]

파석도, 남해에서도 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절해고도를 그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문득 취의소녀가 당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어머! 배가 가라앉으려고 해요!]

기검룡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취의소녀 등이 처음에 타고 있던 기선은 완전히 불길에 휩싸여 점차 기울어지고 있었다.

기검룡은 문득 호승심이 치솟았다.

그의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대신 저기 큰 배를 가라앉혀 버릴까?]

허나 그말에 취의소녀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더 이상 사람들이 죽는 모습은 보기 싫어 아저씨 빨리 이곳을 떠나요!]

그녀의 재촉에 거한은 상처를 싸매고 힘차게 노를 젓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삐걱... 삐걱...!

그들 삼인(三人)을 태운 작은 배는 물살을 가르며 쉼없이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근 한 시진이 지나자 그들은 완전히 치열한 해전(海戰)이 벌어졌든 수역(水域)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둠이 물러가고 동녘이 바다가 붉게 물들기 시작할 때 문득 기검룡이 취의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취의소녀는 크고 해맑은 눈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능소취(陵素翠)라고 해. 그냥 취아(翠兒)라고 불러줘.]

이어 그는 거한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그리고 이 아저씨는 철담흑객(鐵擔黑客)이라고 불러. 취아는 그냥 흑아저씨하고 부르지만 말이야.]

취의소녀, 즉 능소취의 말에 거한은 노를 젓으며 기검룡을 기검룡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기검룡은 사람좋아 보이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아저씨는 굉장히 힘이 세어보이는데 아까는 왜 그 사람의 검을 그냥 맞았지요?]

철담흑객은 머쓱하게 웃었다.

[소인은 아가씨의 부친이신 사해신룡(四海神龍)을 모시는 일개 종복인지라 정식으로 내공을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저 외공(外功)을 약간 익혔기 때문에 내가고수(內家高手)들을 당하기는 힘들지요.]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갑자기 환한 표정으로 탄성을 발했다.

[... 그렇군.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능소취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기검룡은 철담흑객과 그녀를 동시에 바라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혹시 철벽신공(鐵壁神功)을 알고 있나요?]

허나 철담흑객과 능소취는 고개를 저었다.

기검룡은 빙긋 웃으며 그들에게 설명했다.

[철벽신공(鐵壁神功)은 외가(外家) 최고의 기공이예요. 철파상이나 금종조 같은 외공(外功)보다도 뛰어난 외공으로 만일 이것을 완전히 연성하면 내공으로 이룰 수 있는 금강기체(金剛之體)와 똑같이 될 수 있어요.]

그의 말을 듣고난 능소취는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넌 참 아는 것도 많구나. 그런 것은 다 어디서 배웠어?]

기검룡은 가볍게 씨익 웃었다.

[난 그동안 두분 할아버지와 살았는데 작은 할아버지는 별별신기한 냉용의 책을 다 갖고 계시지. 철벽신공도 할아버지의 책을 보고 외운거다.]

이어 그는 철담흑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의 어떠십니까? 어렵신 하지만 철벽신공을 익혀보지 않겠습니까?]

철담흑객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배울 수만 있다면 아무리 어려워도 배워보겠습니다.]

기검룡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좋아요. 시간이 나는대로 철벽신공을 연마하는 방법을 전수해 주겠어요.]

그들 사이의 대화가 끝나자 능소취는 두눈을 반짝이며 기검룡을 응시했다.

[그런데 넌 왜 그 무인도에 혼자 있었지?]

[백경(白鯨)과 싸우다가 그놈이 나를 꿀꺽 삼키는 바람에 그렇게 됐지.]

기검룡이 커다랗게 입을 벌리며 삼키는 시늉을 하자 능소취는 끔찍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것이 가능하단 말이야? 고래에게 잡혀먹혔는데 어떻게 살아나올 수가 있어?]

그녀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기검룡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자신이 겪는 일들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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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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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북두무랑(北斗武廊), 천하제일인을 만드는 복도

 

 

표운봉 아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안개의 벽을 빠져나온 임청우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임청우가 들어선 곳은 계곡의 막다른 곳인데 아주 높은 안개의 벽이 반원형으로 에워싸고 있다.

(내가 통과한 안개의 벽은 기문둔갑(奇門遁甲)에 의해 형성된 게 틀림없다. 안개 속에서 배회하던 기괴한 존재들도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을 테고... 만일 뿔 달린 작은 뱀이 안내해주지 않았다면 이곳에 절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안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안쪽을 살펴보았다.

삼십여 장쯤 앞쪽에는 얼마나 높은지 정상 부분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서있다.

유리처럼 매끄러운 그 절벽은 마침 서쪽 멀리에서 비치는 노을에 물들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절벽의 중간쯤에는 <北斗武廊>이라는 사람크기 만한 글씨들이 옛날 글씨체로 새겨져 있다.

"북두무랑(北斗武廊)... 북두칠성과 관련이 있는 무예의 복도라는 뜻인데...“

임청우는 절벽에 세로로 새겨진 큰 글씨들을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허리춤에 끼우고 있는 북두홀을 어루만졌다.

어쩐지 북두무랑이라는 글과 북두홀이 관련이 있는 기분이 든다.

쉬쉭!

그 사이에도 임청우를 인도한 금관혈린사는 절벽 쪽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절벽 아래에 동굴이 있다.)

다시 걸음을 옮겨 금관혈린사를 따라가던 임청우는 절벽 아래쪽에 두 개의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륙장 정도의 거리를 두고 뚫려있는 그것들은 멀리서 봐도 천연동굴은 아니다. 동굴 입구가 원형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어서 월동문을 방불케 한다.

그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앞쪽 바닥에는 수많은 조각상들이 널려있었다. 앉거나 누운 사람의 형상을 한 조각상들은 얼추 보기에도 백여 개나 된다.

(시체!)

헌데 절벽으로 다가가던 임청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각상들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시체였기 때문이다.

앉고 누운 시체들은 모습이 다양할 뿐 아니라 죽은 시기도 제각각으로 보였다.

이끼로 뒤덮여 진짜 조각상처럼 보이는 해골이 있는가 하면 아직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체들도 있다.

육탈(肉脫)이 완전히 진행되지 않아서 살이 붙어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거나 몸이 흉측하게 뒤틀려 있었다.

(무공을 익히다가 주화입마(走禍入魔)에 빠져 죽은 사람들일까?)

임청우는 곁눈질로 시체들을 훔쳐보며 절벽으로 다가갔다.

산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시체나 해골을 본 적은 여러 번 있다.

하지만 거의 백여 구의 시체가 한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임청우는 각가지 형상을 한 시체들 사이를 지나 두 개의 동굴이 뚫려있는 절벽 아래쪽에 이르렀다.

월동문 형태의 동굴들 중 왼쪽 것의 위쪽에는 <>자가 새겨져 있고 오른쪽 동굴 위에는 <>자가 새겨져 있다.

(()과 출()... 왼쪽 문으로 들어가서 오른쪽 문으로 나오라는 뜻인데... 주화입마에 걸려 죽은듯한 시체들도 그렇고... 여긴 어떤 무림 문파의 성지인 모양이다!)

두 개의 월동문을 살펴보며 임청우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이런 걸 기연(奇緣)이라고 하나? 잘하면 절세의 무공비결을 얻어 무림인이 될 수도 있겠다!)

임청우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며 입()자가 새겨진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갔다.

금관혈린사는 왼쪽 월동문 입구에 똬리를 틀고 있다. 그놈은 임청우를 여기까지 안내한 것으로 자기의 역할을 다했다 여기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편하게 늘어져 있는 금관혈린사를 지나 왼쪽 월동문으로 다가가니 문 옆의 매끈한 벽에 글이 여러 자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북두무랑이란 곳을 통과하기 전에 읽어야하는 안내문인가?”

임청우는 가까이 다가가 글들을 읽어 보았다

 

<고금 이래 존재한 거의 모든 무공을 연구한 후 최악의 난제(難題)들만을 모아 북두무랑에 남긴다. 북두무랑을 통과하며 노부가 남긴 난제들을 모두 풀어버린다면 능히 세상을 굽어볼 수 있으리라. -북두무제(北斗武帝) 섭장홍(葉長紅)>

 

그리 길지 않은 글의 내용이다.

풍화된 상태로 보아 글이 새겨진 후 수백 년의 세월은 족히 흐른 것같다.

북두무제 섭장홍... 북두무랑을 조영한 분인 것같은데 들어본 기억이 없다.”

임청우는 북두무제 섭정홍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다.

철이 든 이래 어머니와 단 둘이 외진 산중에서 살아온 탓에 무림에 대한 임청우의 견문은 일천하기 그지없다.

하물며 북두무제 섭장홍은 성당(盛唐) 시절의 인물이다.

아득한 오백여 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견문도 일천한 임청우가 알 리 없다.

무공과 관련된 최악의 난제들만을 모아놨다면 나같은 일초무학(一招無學)은 기웃거릴 곳이 못된다.”

내심 기연을 기대했던 임청우는 실망했다.

정식으로 무공을 배운 적이 없는 임청우다.

그런 그에게 무림 역사상 최고 난이도의 문제들이라면 전혀 쓸모가 없다. 이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 시체들은 북두무제께서 남긴 무학의 난제들을 풀려다가 주화입마에 빠진 희생자들이겠구나.)

임청우는 절벽 아래 널려있는 시체들의 사인이 무언지 짐작이 갔다.

북두무랑에 들어가면 자신도 그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임청우는 용기를 냈다.

(나같은 일초무학이 난해한 무학비결을 접한다고 주화입마에 빠질 리는 없다.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구경이나 하고 가자.)

임청우는 긴장하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수가...!”

헌데 북두무랑 안으로 들어선 직후 임청우의 눈이 충격과 분노로 부릅떠졌다.

 

북두무랑은 말굽자석이나 말의 편자 형태로 절벽을 파서 만든 복도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로 이어져 있으며 천장에는 일정 간격으로 빛이 나는 구슬들이 박혀있어 그리 어둡지 않다.

전체 길이가 오십여 장인 말굽 형태의 복도 벽에는 수많은 글들이 적혀있었다.

헌데 그 글들을 누군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긁어서 훼손시켜버렸다.

... 어떤 자가 이런 천인공노할 만행을... 북두무제라는 분께서 남긴 무학비결들을 전부 훼손해버렸잖아!”

임청우는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가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

복도에 새겨져 있던 글들은 철저하게 훼손되어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이 북두무제가 남긴 무학비결을 보길 원치 않은 누군가의 짓이었다.

유감스럽지만 북두무랑은 죽었다. 북두무랑이 죽어버렸으니 북두무랑을 바탕으로 세워졌을 문파도 절맥(切脈)되었다고 봐야한다.”

임청우는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며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혹시 판독이 가능한 글이 남아있을까 했던 임청우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북두무랑의 무학비결을 훼손한 자의 만행은 실로 철저해서 단 한자의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임청우는 글자 대신 그림을 한 폭 발견할 수 있었다.

북두무랑의 가장 안쪽, 입구 쪽의 복도가 일단 끝나는 곳에 그 그림이 있었다.

복도가 끝나는 부분의 벽은 전체가 칠흑같이 검은 옥(黑玉)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색은 검지만 유리처럼 투명해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이는 흑옥이다.

높이 일장 남짓에 길이는 삼장이 넘는 흑옥의 벽에는 밝은 점들이 수없이 찍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그 점들은 표면에 찍혀있는 것이 아니라 흑옥 안쪽에서 반짝이는 이물질들이었다.

새카만 흑옥 안쪽에 박힌 채 반짝이는 그 이물질들은 마치 밤하늘의 별 같다.

박혀있는 깊이와 밝기도 제각각이라 실제 밤하늘처럼 입체감이 느껴진다.

흑옥의 벽은 높고도 길어서 그 앞에 서면 시야를 가득 메운다.

그 때문에 흑옥의 벽을 마주 보고 있자니 임청우는 마치 자신이 새카만 밤하늘에 둥둥 떠있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이건 천상열차분야도(天上列次分野圖).)

흑옥의 벽을 살펴보던 임청우는 퍼뜩 느껴지는 게 있었다.

무질서하게 찍혀있는 점들 중에서 비교적 밝게 빛나는 점들이 눈에 익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점들은 천문도경(天文圖經)이란 책에서 본 별자리의 그림이다.

천상열차분야도는 하늘의 형상을 분야별로 그린 천문도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보이지 않는데... 옥석에 저절로 천상열차분야도가 나타나는 게 가능한 걸까?)

임청우는 놀라움에 휩싸인 채 흑옥에 박혀있는 별자리들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

그리고 흑옥의 벽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임청우는 다시 한 번 전율했다.

흑옥의 벽 정중앙에는 북두칠성이 빛나고 있었다. 천상열차분야도의 수많은 별들 중에서도 북두칠성은 유달리 밝아서 놓칠 수가 없다.

헌데 북두칠성이 하늘에서 회전할 때 중심축이 되는 북극성(北極星) 자리에 별 대신 길쭉한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 깊지 않은 그 홈의 아래쪽은 평평하고 위쪽은 마름모꼴이다.

(북두홀과 형태가 같다!)

그 홈을 본 임청우는 어떤 예감으로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것을 느끼며 허리춤에서 급히 북두홀을 뽑아냈다.

북극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파여 있는 홈은 영락없이 북두홀의 형상이었다.

임청우는 떨리는 손으로 북두홀을 그 홈에 맞춰보려고 했다.

!

순간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을 떠나 그 홈에 그대로 딸려 들어가 끼워졌다.

!”

당황한 임청우는 홈에서 북두홀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홈과 북두홀은 크기와 형태가 완벽하게 같아서 틈새가 거의 없다.

뿐만 아니라 흑옥의 벽 안쪽에서 어떤 강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마치 자석이 쇠붙이를 끌어들이는 것처럼...

그 때문에 북두홀은 흑옥의 벽과 완전히 합쳐진 모습이 되었다.

안돼! 북두홀은 나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란 말이야.”

임청우는 울상이 되어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물론 임청우의 능력으로는 북두홀을 흑옥의 벽에서 떼어낼 수가 없었다.

북두홀과 흑옥의 벽에 나있는 홈은 면도날조차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딱 맞는데다가 흑옥의 벽 안쪽에서 강력한 힘이 북두홀을 끌어당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되는데...”

임청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북두홀 주변의 흑옥을 손톱으로 긁어댈 때였다.

갑자기 흑옥의 벽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스으!

북두홀을 중심으로 북두칠성이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어...”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움직임에 따라 임청우의 몸도 돌기 시작했다.

 

어느덧 임청우의 몸은 어둡고 광활한 밤하늘에 떠있었다.

북두칠성이 회전하며 주변의 모든 별과 별 자리와 성운이 함께 회전하고 있었다.

임청우는 별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별의 바다에는 아래도 없고 위도 없으며 시간의 흐름조차 의미가 없다.

임청우는 자신의 몸과 마음이 끝이 없도록 넓은 별의 바다에 녹아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우주의 광활함에 비하면 임청우 자신은 티끌만도 못하다.

그것을 절감하자 몸은 점차 투명해지고 감각도 급속히 사라져간다.

임청우는 자신이 물에 풀어진 종이처럼 시시각각 소멸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사라지고 싶지는 않다!)

존재의 완전한 소멸 직전에 임청우는 간절하게 외쳤다.

그러자 응답이 있었다.

슈우!

임청우를 중심으로 회전하던 북두칠성이 하나 둘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두칠성은 임청우와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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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십 리를 간 후 돌아오라.

 

 

숭산(崇山)이 유명한 것은 소림사(少林寺)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실봉(少室峰) 역시 그 중턱에 소림사가 자리하고 있어서 모르는 사람이 드문 명승이 되었다.

하지만 숭산에 소실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실봉(太室峰)과 준극봉(峻極峰)등 칠십이 개의 봉우리가 어우러져 숭산을 중악(中岳)이라 불리게 만들었다.

 

장강 변의 위가진을 떠난 강유는 닷새 만에 숭산에 도착했다.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며 쉬지 않고 걸음을 재촉한 결과다.

해가 한 뼘쯤 남은 오후에 강유는 태실봉을 올라갔다.

바위로 이루어진 험준한 태실봉을 올라가던 강유는 중턱쯤에서 숨을 돌렸다.

산바람에 땀을 식히며 돌아보는 강유의 오른쪽에 태실봉보다 좀 낮지만 자락이 아주 넓은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 중턱에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는데 숲속에 수많은 건물과 탑들이 있는 것이 보인다.

그 봉우리가 소실봉이고 울창한 숲속에 자리한 사찰이 소림사다.

(천하공부출소림(天下功夫出少林)이라는 말대로 무림에 퍼져 있는 무공들 중 대부분은 소림사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강유는 멀리 보이는 소림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비록 오랫동안 인재가 끊긴 탓에 무림에 끼치는 영향력은 초라해졌지만 소림사가 천하무림의 종가(宗家)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강유는 다시 걸음 옮겼다.

(그 소림사를 지척에 두고도 들르지 못하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지금은 아버지의 심부름에 집중할 때다.)

강유는 아쉬움을 애써 떨치며 암벽의 중간에 나있는 산길의 모퉁이를 돌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암자 한 채가 보인다.

깎아지른 절벽 중간에 세워진 암자는 거리가 제법 멀고 또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성냥갑처럼 작게 보인다.

그 암자로 올라가는 수많은 계단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저 암자가 고불암이다.)

강유는 수많은 계단 위쪽으로 작게 보이는 암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는 동안 알아본 바에 의하면 고불암에 기거하는 분은 고불선사(古佛禪師)라는 고승이다.)

족히 천여 개는 되어 보이는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강유는 고불암에 대해 수소문 한 것을 되새겨보았다.

숭산에 자리한 암자에 기거하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고불선사는 소림사 출신이다.

중원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 출신이므로 고불선사는 당연히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고불선사는 무공보다는 학식(學識)으로 더 유명했다.

특히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천축어)에 대한 지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불선사가 고불암에 홀로 기거하는 이유도 좋아하는 범어 연구에 매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아버지는 대체 어떤 경로로 고대 범어의 권위자인 고불선사와 교류를 나누게 된 것일까?)

가도 가도 끝이 없을 것같은 계단을 올라가며 강유는 새삼 의문을 느꼈다.

 

* * *

 

고불암은 절벽 중간에 조금 튀어나온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암자가 자리한 그 돌출부의 위쪽으로나 아래쪽으로나 깎아지른 절벽이다.

그래도 고불암 앞쪽에는 제법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다.

 

(드디어 다 올라왔다.)

강유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암자 앞의 마당으로 올라섰다.

(비록 외지고 험해도 절경이긴 하다.)

강유는 주변을 둘러보며 암자로 다가갔다.

저 멀리로 소림사가 있는 소실봉이 보인다.

(세상 풍파와 온전히 단절된 곳이니 수행을 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는 최적이겠구나.)

강유는 소매로 땀을 닦으며 암자 문 앞에 이르렀다.

(암자 안에 인기척이 있다.)

암자의 닫혀진 문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잔기침 섞인 숨소리가 들려서 강유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청수(淸修)를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스님.”

강유는 의관을 정제한 후 공손하게 말했다.

하지만 암자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다.

스님께 맡겨둔 물건을 받아오라는 분부를 받고 찾아왔습니다.”

다시 그렇게 말하자 그제서야 반응이 있었다.

아미타불! 들어오게나.”

암자 안에서 세월이 느껴지는 늙은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허락을 받은 강유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암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암자 내부는 책으로 가득 차있었다.

사방 벽에는 수많은 책들이 쌓여있고 바닥에도 책들이 쌓여있거나 이리저리 널려있다.

그 때문에 비좁을 대로 비좁아진 암자 중앙에는 앉은뱅이 탁자가 하나 있고 그 탁자 너머에는 한 명의 노승이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늙었지만 여전히 건장한 체격에 상당히 우락부락한 인상을 지닌 노승이었다.

노승이 앞에 두고 앉아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 뿐 아니라 주전자, 찻잔, 여러 권의 책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저분이 고불선사...)

강유는 문을 닫으며 노승, 고불선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암자 안의 분위기는 예상한 대로지만 고불선사의 모습은 강유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왜소하고 꼬장꼬장한 늙은 선비같은 인상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풍채가 좋고 인상이 호방해서 도저히 학승(學僧)으로 보이지 않는다.)

강유는 글을 쓰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고불선사를 살펴보며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말학후진 강유가 선사께 인사 올립니다.”

강유는 탁자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포권을 했다.

강유라...”

고불선사는 중얼거리면서도 강유는 보지 않고 종이에 글만 쓰고 있었다.

원하는 걸 가져가려면 증표를 보여라.”

고불선사는 여전히 강유를 보지 않고 글을 쓰면서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딸칵!

강유는 품속에서 꺼낸 노리개를 조심스럽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그러자 그때까지 글을 쓰고 있던 고불선사의 손길이 멈춰졌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조금 들어서 탁자 위에 올려진 노리개를 바라보았다.

강유는 붓을 들고 있는 고불선사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랜 수행을 해온 노승이 격동하고 있다. 대체 저 볼품없는 노리개가 무엇이기에 불문 고승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있는 것인가?)

강유의 의아함을 느낄 때 붓을 내려놓은 고불선사가 노리개를 집어들고 있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떨리는 손으로 노리개를 집어든 고불선사의 입에서 회한이 서린 불호가 흘러나왔다.

이 어리석은 비구(比丘)가 쌓은 업보가 구천(九天)에 이를 정도로구나.”

긴 한숨을 토해내는 고불선사의 주름진 눈가에 언뜻 물기가 어린다.

강유는 궁금증이 구름같이 일었지만 말없이 그런 고불선사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물건은 확실히 받았네.”

고불선사는 처음으로 고개를 들어 강유를 보았다.

헌데 시주는 이 물건을 맡긴 인물과 어떤 사이인가?”

고불선사는 강유를 살펴보면서 노리개를 다시 탁자에 내려놓았다.

제게 중임을 맡기신 분은 가부입니다.”

가부라...”

강유의 대답을 들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보며 미간을 조금 모았다.

불가해(不可解)... 불가해로다. 그에게 시주같은 보배가 열매로 맺힐 복연(福緣)은 없어 보였거늘...”

(무슨 뜻인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분은 아버지와 교분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강유가 의아해할 때였다.

사연과 내막이야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불선사는 혼잣말을 하며 탁자 위에 쌓여있는 종이와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있었군.”

이윽고 고불선사는 책 사이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크지는 않지만 상당히 두툼한 봉투였다.

패옥을 전해주라고 한 중생에게 이걸 가져다주면 될 걸세.”

고불선사는 봉투를 강유에게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스님.”

무릎 꿇고 있었던 강유는 상체를 세우며 두 손으로 봉투를 받았다.

스님의 청수를 어지럽힌 점,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후학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봉투를 품속에 갈무리한 강유가 일어나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고불선사가 다시 탁자 위의 책들을 뒤지면서 말했다.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지. 이 늙은 중의 작은 성의이니 가져가게나.”

곧 고불선사는 쌓여있던 책들 사이에서 얇은 책을 한권 꺼내 강유에게 내밀었다

헌데 그 책을 받으려던 강유는 깜짝 놀랐다.

책의 표지에는 탄지신통(彈指神通)이라는 제목이 적혀있었기 때문이다.

스님! 혹시 그 책은 혹시...”

강유는 내밀었던 손을 급히 거두며 굳어진 표정으로 고불선사를 바라보았다.

소림칠십이절기 중 탄지신통을 수련할 수 있는 비결일세. 진본은 아니고 노납이 심심할 때 적어놓은 필사본이지.”

고불선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맙소사!)

하지만 강유는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무림인이라면 소림사의 칠십이종 절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를 수가 없다.

단 한 가지만 제대로 익혀도 강호를 독보할 수 있는 게 소림칠십이절기다.

고불선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절기에 속하는 탄지신통의 비급을 선물이라고 내놓은 것이다.

탄지신통을 익히면 십장 밖에 있는 한 치 두께의 철판도 궤뚫을 수 있다네. 무림인이라면 몽매에도 얻길 원하는 절세신공이라고 할 수 있지.”

고불선사는 강유를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스님의 성의는 마음으로 받아두겠습니다.”

강유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가부의 명을 수행한 대가로 보상을 받는 것은 옳지 않으므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양하지 말게나. 노납의 성의이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불선사가 다시 권했지만 강유는 굳은 표정으로 돌아섰다.

(자기 사문의 무공을 임의로 유출할 생각도 하고... 여러모로 생각했던 것과 다른 분이로구나.)

강유는 쓴웃음 지으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좋네 좋아. 더 이상 강권하진 않겠네.”

강유가 탄지신통의 비급을 사양하자 고불선사는 차가 반쯤 들어있는 찻잔에 오른손 검지를 집어넣으며 말했다.

대신 노납의 인사는 받고 가시게나.”

결례를 했다면 용서를...”

문간에서 돌아서던 강유의 눈이 치떠졌다.

용서는 노납이 빌어야 하지 않겠는가?”

스윽!

고불선사가 찻잔에 담갔다가 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글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찻물로 탁자에 글을 쓴다.)

강유는 고불선사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다시 탁자 앞으로 갔다.

다가가서 보니 탁자 위에는 찻물로 <五十里去後 回歸>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십리거후(五十里去後) 회귀(回歸)... 오십 리를 갔다가 다시 돌아오라?)

강유가 탁자에 찻물로 적힌 글을 읽고 놀랄 때였다.

산길이 험하니 조심해서 살펴 가시게나.”

!

강유가 글을 읽은 것을 확인한 고불선사는 찻물로 쓴 글을 소매로 쓸어 지워버렸다.

(이건 무슨 뜻인가? 이분은 설마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어서 감시하는 자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찻물로 뜻을 전한 것인가?)

강유가 놀라고 당황할 때였다.

고불선사는 고개를 들어서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대들보를 왜...)

강유는 반사적으로 고불선사와 함께 대들보를 올려다보았다.

아미타불! 인연이 있다면 우리는 곧 다시 보게 될 걸세.”

고불선사가 합장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저 역시 스님을 다시 뵐 수 있는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강유도 마주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불선사와 인사를 나눈 강유는 암자를 나갔다.

!

문이 닫히고 고불암에는 다시 고불선사 혼자만 남게 되었다.

선재(善哉)로다! 세존의 가호로다.”

고불선사는 닫힌 문을 보며 합장을 했다.

크나큰 죄를 안고 소리없이 지옥으로 들어가려 했거늘... 세존께서는 못난 제자가 세상에 뿌려놓을 업보를 거둘 인연을 마련해두셨구나.”

주르르!

합장한 고불선사의 주름 진 손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분명 뭔가 있다.)

강유는 마당 끝의 계단 입구로 가며 곁눈질로 고불암을 보았다.

(탄지신통의 비급을 주겠다고 한 것은 아마 나에 대한 시험이었을 것이다.)

고불선사가 왜 뜬금없이 소림칠십이절기 중 한 가지를 선물이라며 내놨는지 짐작이 가는 강유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옳다구나 하고 받았을 테지만... 그걸 거절한 덕분에 나는 고불선사님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겠지.)

강유는 온몸의 신경이 끊어질 듯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흔적이 남지 않도록 탁자에 찻물로 글을 썼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일단 고불선사님의 지시대로 오십 리쯤 갔다가 다시 돌아와 보자.)

강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유의 모습이 고불암 앞의 마당에서 사라진 직후였다.

스스스!

마당 가운데에 안개 같은 것이 서리더니 이윽고 사람의 형상을 갖추었다.

얼굴에 이빨을 드러낸 공포스러운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쓴 인물!

바로 안탕산 깊은 곳에 처참한 모습으로 갇혀있는 제갈륜을 협박했던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그자가 안탕산에서 이천여 리나 떨어진 숭산에 나타난 것이다.

“...”

마당 끝으로 간 귀면지존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유가 날렵한 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 귀면지존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확인한 귀면지존은 고불암쪽으로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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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괄량이의 가출

 

 

단숨에 주워 삼키는 에센의 분석은 정확했다.

(확실히 평범한 인재는 아니다. 말만 좀 가려서 할 줄 알고 겸손하기만 하다면 미루와 짝을 지어주어도 손색이 없었을 텐데...)

강진남이 에센을 아쉬운 표정으로 볼 때였다.

... 장주님! 큰일...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문루로 통하는 계단을 뛰어올라오는 여자가 있었다. 후덕한 인상의 그 중년여인은 강미루의 유모 최씨였다.

미루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가?”

허둥대며 문루로 올라오는 유모 최씨를 본 강진남은 미간을 찡그렸다.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는 조신한 성품인 첫째 딸 강미조(姜美藻)와 딴판으로 지나치게 활달하여 쉴 새 없이 문제를 일으켜 왔다.

... 작은 아가씨가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요.”

헐떡이며 문루로 올라선 유모가 울상을 짓는다.

미루가 사라지다니? 어디로?”

강진남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뿔난 망아지같은 둘째 딸이 말썽을 부리는 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꽤 오래 안 보이시기 계실만한 곳을 다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사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에 출진한 애들 속에 묻어서 본장을 빠져나가신 것 같사옵니다.”

그 녀석 참...”

울먹이는 유모와 달리 강진남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혀를 찰 뿐이었다.

... 당장 파발을 보내 돌아오라고 분부하셔요. 바깥세상이 얼마나 험한 줄도 모르는 철부지 아니옵니까?”

그럴 거 없네. 제 녀석도 오죽 답답했으면 가출을 했겠는가?”

유모의 애원에도 강진남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혼자도 아니고 대려장의 정예들과 함께 집을 나간 것이니 딱히 걱정할 일도 아니다.

물론 강미루가 핏덩이일 때부터 키워온 유모의 심정은 달랐다.

... 장주님! 작은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시려고 그런 매정한 말씀을...”

서운해 하는 유모의 말에 강진남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바람 좀 쐬고 돌아오겠지. 정 걱정되면 그 녀석 형부에게 가서 부탁해보게나.”

... 그리 합지요.”

강진남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유모는 서둘러 문루를 달려 내려갔다. 강미루의 형부, 즉 강진남의 사위를 찾아가 부탁하는 쪽이 빠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미루사매도 이제 제법 여자 태가 나겠습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던 에센이 히죽 히죽 웃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소성주는 내 딸을 전에 본 적이 있겠군.”

강진남은 자신의 둘째 딸과 이 오이라트의 떠버리 후계자가 구면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삼 년 전이었지요. 사모님이 사부님을 뵈러 왔을 때 데리고 왔었으니까요.”

안하무인이던 방금 전과 달리 에센은 강진남의 눈치를 슬슬 보며 말했다.

에센의 사부와 강미루가 사부로 모신 여기인은 부부지간이다.

그 때문에 에센은 강미루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물론 에센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 강미루는 아직 철없는 어린 소녀였었다.

이실직고 하자면 제가 이번에 밀사를 자처한 이유 중 하나도 미루사매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지요.”

에센이 다시 강진남의 눈치를 보며 말한다.

강진남의 둘째 딸이 절세미녀라는 소문이 호사가들 입에 오르내린지는 이미 오래다.

대려장이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있고 해서 무림의 수많은 청년들이 강미루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누구보다 혈기방장한 에센 역시 예외가 아니다.

다만 강미루가 사모의 제자이기도 해서 무례하게 수작을 붙여볼 엄두는 내지 못해왔었다.

모든 일에 거리낌이 없는 에센이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존재가 바로 사모다.

그러던 중 아버지 토곤이 대려장으로 밀사를 보낸다고 하자 냉큼 자원을 했었다.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하지만 에센의 기대는 강진남의 한 마디 말에 와르르 무너졌다.

소성주의 사부... 검왕(劍王)과 관련된 염문은 요즘도 심심치 않게 내 귀에 들리더군.”

바람둥이를 사부로 둔 너도 똑같은 인간 아니냐는 뜻이다.

 

***

 

강진남과 에센의 추측은 정확했다.

이탁은 백남빈에게 무황성을 향해 직진하지 말고 남쪽으로 내려가 요서 일대에서 가장 큰 항구인 진황도에서 배를 타고 천진으로 가라고 지시했었다.

거리로 따지자면 배 이상 멀리 돌아가는 길이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추격을 따돌릴 가능성이 높은 행로다.

다만 같은 생각을 강진남도 했다는 게 문제다.

대려장주가 동북의 제갈량이라는 평판이 과장된 건 아니로군.”

백남빈은 남쪽으로 말을 달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리쯤 뒤쪽에서 흙먼지가 구름같이 일어나고 있는 게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일백이 넘는 숫자의 기마대가 백남빈 자신을 추격해오고 있는 중이다.

대려장에서 쏟아져 나온 기마대는 수백기였지만 도중에 철령보의 기마대와 격돌하는 바람에 대 부분 발이 묶여 버렸다.

그래도 특히 발이 빠른 일단의 기마대는 철령보의 저지를 뚫고 남진하여 백남빈을 추격하는 중이다.

물론 백남빈이 대려장의 기마대에 따라잡힐 위험은 거의 없다. 사해검객이 준비해준 말이 철령보에서 으뜸가는 준마이기 때문이다.

십여 리나 간격이 있으니 진황도까지는 따라잡히지 않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꼬리를 달고 진황도에 도착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천진으로 가는 배를 수배하는 동안 대려장의 고수들이 손가락만 빨고 있을 리 없다.

(진황도에 도착하기 전에 대려장의 인간들을 따돌려야한다.)

백남빈은 진행방향의 우측, 즉 서쪽을 돌아보았다.

철령평야에서 발해만을 향해 비스듬히 뻗은 험준한 산맥이 오른쪽에 보인다. 요서주랑(遼西走廊)이라 불리는 장대한 협곡의 서쪽 면을 이루는 당산산맥(唐山山脈)이다.

일망무제한 평원에서 갑자기 솟구쳐 오른 탓에 당산산맥의 봉우리들은 실제 높이보다 훨씬 더 높고 험준하게 보인다.

(길은 좀 험하겠지만 요서주랑을 타는 대신 당산산맥을 횡단해서 진황도로 가자. 그 과정에서 귀찮은 파리들을 떨쳐버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으니...)

두두두!

결심 한 즉시 백남빈은 말머리를 서쪽, 당산산맥을 향해 돌렸다.

대략 삼십여 리쯤을 달리면 당산산맥에 접어들 수 있을 것이다.

 

... 저 놈이 진로를 바꿨다.”

당산산맥으로 들어가서 우릴 따돌릴 생각이다.”

백남빈을 추격하던 대려장의 기마대에서는 일대 소동이 일어났다. 갑자기 백남빈이 서쪽으로 방향을 튼 것을 본 때문이다.

백남빈이 달려가는 서쪽에는 지는 해를 머리에 인 당산산맥이 그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곧 해가 떨어지고 밤이 될 것이다.

만일 백남빈이 이대로 당산산맥으로 들어가 버리면 따라잡을 희망이 거의 없다.

박차를 가해라!”

저놈이 당산산맥의 산그늘에 들어가기 전에 따라붙어야한다!”

두두두! 히히힝!

대려장의 무사들은 아우성을 치며 말의 속도를 높였다.

하지만 전력을 기울여 말을 몰아붙여도 십여 리쯤 되는 백남빈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오히려 점점 더 거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백남빈이 타고 있는 말의 달리는 속도가 빠른 것이다.

... 이러다가 놓치고 말겠다!”

젠장! 저놈이 타고 가는 말이 우리들의 말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낭패한 심정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백남빈이 당산산맥으로 들어가는 것은 정해진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때였다.

에잇! 답답해서 더는 못 봐주겠다!”

대려장 기마대의 후미에서 갑자기 높고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해되니까 비켜!”

어이쿠!” “!”

히히힝! 두두두!

앙칼진 외침에 이어 무사들의 비명과 당황한 말들의 울부짖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기겁하며 돌아보는 선두의 무사들 눈에 칠흑같이 시커먼 그림자가 와락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놈은 먹물을 뒤집어쓴 듯 시커먼 흑마(黑馬)였다.

단순히 털만 검은 게 아니다.

흑마는 덩치가 보통의 말보다 배는 됨직하다.

낙타보다도 더 커 보이는 그 거대한 흑마의 등에는 날씬한 몸에 타는 듯 붉은 옷을 걸치고 죽립을 깊이 눌러쓴 기사(騎士)가 타고 있다.

흑마의 엄청난 체구에 비해 타고 있는 기사는 대려장의 다른 무사들보다 몸이 작고 가냘프다.

그 때문에 마치 고목에 달라붙은 매미처럼 보이는 그 기사의 등에는 수십 자루의 화살을 공작의 꼬리처럼 펼쳐서 꽂은 화살통이 짊어져 있다.

또 기사는 허리에 단검에 가까운 짧은 검을 차고 있으며 말 안장 좌우에는 강철로 만든 철궁(鐵弓)과 긴 창이 한 자루씩 걸려 있다.

방해하지 말고 길이나 터!”

!

작고 날씬한 체구의 기사는 그때까지 깊이 눌러 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 던지며 고함을 질렀다.

죽립을 벗자 드러나는 것은 두 뺨이 복숭아같이 발그레한 어여쁜 소녀의 얼굴이다.

... 작은 아가씨!”

... 이제 보니 저놈은 작은 아가씨의 애마 흑왕(黑王)이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놀라면서도 환호성을 터트렸다.

 

갑자기 대열의 뒤쪽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흑마 위의 소녀는 바로 강진남의 둘째 딸 강미루였다.

유모 최씨의 추측대로 강미루는 새벽에 대려장을 빠져나온 기마대에 섞여 가출을 한 것이다.

강미루의 별호는 홍의창(紅衣槍)이다.

붉은 옷을 즐겨 입고 창술이 뛰어난 덕분이기도 하지만 성격이 타오르는 불같이 활달해서 붙여진 별호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인 강미루는 제법 오래 외출을 못해 답답하던 차에 원수같은 철령보에 대한 공격이 시도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기도 철령보의 공격에 참가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해봤자 들어주실 리 없다.

그래서 강미루는 죽립을 눌러쓴 채 몰래 기마대에 끼어든 것이다.

 

저 새끼는 내가 잡아버리겠어! 걸리적거리니까 전부 비켜!”

정체를 드러낸 강미루는 흑마에게 박차를 가하며 외쳤다.

히히힝! 화악!

거대한 흑마도 사납게 울부짖으며 질풍같이 앞으로 빠져나갔다.

대려장의 기마대는 물살처럼 갈라져 흑마에게 길을 내주었다.

낙타보다도 큰 이 거대한 흑마의 이름은 흑왕(黑王)이다.

흑왕은 요동평야의 모든 야생마들을 지배하던 말들의 왕이었는데 강진남의 사위가 사흘 밤낮을 추격한 끝에 사로잡아 길을 들였었다.

그 어떤 말보다도 천리마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흑왕의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한다.

물살처럼 갈라지는 대려장의 다른 말들 사이에서 튀어나온 흑왕은 한 줄기 검은 선으로 변해 당산산맥의 산그늘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덧 해가 당산산맥 너머로 지고 있다.

그와 함께 백남빈도 산그늘에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 십여 리만 더 달리면 당산산맥의 험준한 산중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그럭저럭 대려장의 추격은 떨쳐버릴 수 있겠구나.)

백남빈은 가까워지는 당산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보며 조금은 마음을 놓았다.

숨을 곳이 없는 평야와 달리 산이 높고 골이 깊은 당산산맥에서는 은신처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오싹!

백남빈은 냉수를 머리 위에서부터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확 돋는 것을 느꼈다.

(위험...)

!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 동시에 화살 하나가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히히힝!

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 것도 거의 동시였다. 몸을 앞으로 확 숙인 백남빈의 머리 위로 지나간 화살이 말의 목 옆을 스치며 가볍지 않은 상처를 냈다.

만일 반응이 조금만 늦었어도 백남빈은 그 화살에 치명상을 입었을 것이다.

백남빈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안이라는 남다른 능력이 미리 살기를 감지해준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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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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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三 章

 

                   萬年白鯨

 

 

철썩... 철썩...!

쿠르릉___ ___!

천지개벽을 일으키듯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천지를 삼킬 듯한 기세로 밀고 밀린다.

 

파석도(波石島)___.

오직 돌()과 파도만이 있는 섬, 아무도 찾지않는 절해고도(絶海孤島)였다.

돌연,

[하하하...!]

호탕하고도 낭랑한 웃음이 파석도의 적막을 깨뜨렸다.

파석도의 정상!

짧은 초지가 깔려있는 분지가 있었다.

그곳에 하나의 남삼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십 사오 세 정도 되었을까?

헌데, !

천상(天上)의 선동(仙童)이랄까?

혜지가 가득 담긴 두눈은 한 번보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마력(魔力)을 발산했다.

피부는 거의 투명할 정도로 희었다.

우뚝 솟은 콧날은 산()같은 기개를 풍겼고 입술은 붉으면서 굳센 의지가 서린 듯 붉었다.

전신에 짙은 남색의 무복(武腹)을 가뿐하게 걸친 그 모습은 실로 찬탄을 금치못할 정도였다.

헌데, 그는 나이에 비해서 월등이 큰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근 육 척(六尺)이 넘는 거구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언뜻보면 장성한 청년을 방불케하는 모습이었다.

허나 영준한 얼굴에는 아직 장난스런 치기가 어려있었다.

이때, 소년은 갑자기 몸을 빙글 돌리며 소리쳤다.

[큰 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오늘도 저놈이 이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어요!]

그의 눈은 바다 한복판을 응시하고 있었다.

! 그곳에는 마치 하나의 작은 섬과 같은 거대한 백경(白鯨)이 유유자적 물기둥을 뿜어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몸의 길이만 해도 무려 오십 장(五十丈).

실로 엄청난 크기의 고래였다.

이 백경은 근 일만 년(一萬年) 이상을 산 영물이었다.

이때, 풀밭사이로 난 계단으로 두 명의 인영이 올라왔다.

천강마존과 낙척문사___

바로 그들이었다.

문득, 낙척문사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하... 백경이 또 나타난 모양이구나?]

소년은 반짝이는 눈으로 백경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쥐어보였다.

[두고봐요! 오늘은 꼭 저놈의 등에 타고 말거예요!]

낙척문사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기검룡을 응시했다.

[하하... ()아야, 어제도 그러더니 도리어 백경에게 혼나지 않았느냐!]

[! 어제는 방심을 했기 때문이예요. 오늘은 저놈의 등에 타보고 말거예요.]

용아라 불리운 소년은 고집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혜지 가득한 두눈은 계속 백경을 쫓고 있었다.

백경은 유유히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순간,

[기다려라! 용아가 간다!]

소년은 휙! 지면을 박차고 바다를 향해 몸을 날렸다.

!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파석도 정상에서 바다까지는 수백 장의 거리에 달했다.

헌데 소년은 일직선으로 신형을 쏘아가며 단번에 삼십 장을 나는 것이 아닌가?

이어 가볍게 신형을 멈추며 다시 이십 장을 날고 또 바위를 찍으며 다시 떠올랐다.

실로 찬탄할 절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낙척문사는 그러한 소년의 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조심하거라! 용아!]

[하하... 걱정없어요. 용아의 해연약파(海燕掌波)는 완벽하다고요!]

소년은 바다 위를 스치듯이 날았다.

천강마존은 문득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허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은 묵묵히 파석도의 정상에 선채 소년을 지켜볼 뿐이었다.

소년은 가볍게 파도를 밟고 백겨에게 접근했다.

[!]

그는 거대한 파도의 파봉을 밟고 앞으로 나갔다.

우르르... 철썩... !

미친 듯 광난하는 파도를 교묘히 타고 소년은 점점 앞으로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마침내 백경의 등으로 접근했다.

이때, 지켜보던 낙척문사가 문득 감탄의 표정을 입을 열었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저 아이의 자질은 사람을 놀라게 합니다. 저 해연약파의 경공은 꼬박 십 년(十年)이 넘어도 익히기 힘드는데 검룡(劍龍) 저 아이는 불과 일년 사이에 터득하고 말았으니...]

검룡(劍龍)___.

이것이 소년의 이름인가?

천강마존은 말없이 눈빛을 번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우형이 천강신공(天罡神功)을 육성(六成) 이루는데 꼬박 팔년(八年)이 걸렸네. 헌데 용아는 천강심결(天罡心訣)을 전수받은지 오년만에 육성의 조예를 이루었지 않은가! 정말 뛰어난 자질을 가진 녀석이야.]

소년 검룡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문득 자애롭게 변했다.

검룡.

그는 바로 낙척문사가 데려온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적자 즉, 기검룡이었다.

이때, 소년 기검룡은 마치 거대한 빙산(氷山)을 연상케하는 만년백경(萬年白鯨)에게 달려들어가고 있었다.

만년백경은 기검룡이 가가오는 것을 커다란 두눈을 껌뻑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이 수면을 박차고 자신의 등위로 올라타려고 하자 거대한 동굴같은 입을 쩍 벌리며 세찬 물기둥을 쏘아올렸다.

쏴아___!

기검룡은 전에도 한 번 그 물기둥에 맞아 곤욕을 치룬적이 있었으므로 벼락같이 옆으로 몸을 피했다.

[하하하... 어림없다!]

그와 동시에 그는 힘껏 장()을 내밀어 물기둥의 힘을 받으며 그대로 삼사 장을 더 치솟아 올랐다.

___!

[어엇!]

기검룡은 허공에서 쏜살처럼 만녀백경의 등위로 떨어져 내렸다.

허나,

[에잇!]

그가 막 백경의 등을 밟으려는 순간 만년백경의 동체가 갑자기 물속으로 숙 잠겨지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일시지간 발디딜 곳을 잃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허나 한 모금의 진원진기를 모아 발끝으로 수면을 찍으며 그는 다시 허공으로 이 장 정도 떠올랐다.

그 순간, 백경의 거대한 꼬리가 사방을 휘저으며 산더미같은 파도를 일으켰다.

[!]

기검룡은 미처 피할 여유가 없었다.

곧 그는 입술을 물며 전력을 다해 장()을 뻗어 파도와 맞닥드렸다.

콰르르릉___!

[...!]

기검룡은 천강기공이 파도의 전면을 후려쳤다고 느낀 순간 뒤이어 쏟아지는 파도에 거세게 전신을 얻어맞았다.

이때,

[용아! 위험하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낙척문사가 대경하여 소리쳤다.

낙척문사의 외침을 들은 기검룡은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진기를 모아 허공에 떠올라 몸을 고정시키려 했다.

허나 그보다 빨리 만년백경의 꼬리가 재차 산악같은 파도를 일으키며 그의 몸을 쳤다.

[아앗!]

기검룡은 재차 파도에 가격당하며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용아!]

낙척문사와 천강마존은 대경하여 부르짖었다.

허나 그 순간, 만년백경의 거구가 기검룡과 함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심해(深海)로 가라앉았다.

 

X X X

 

기검룡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순간, 그는 온몸이 후덥지근하고 답답한 것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암흑(暗黑)으로 뒤덮여 있었다.

[여기가 어딜까?]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문득 몸을 일으켰다.

순간, 미끈하는 감촉과 함께 그는 바닥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아악___!]

그 바람에 전신관절이 부서져 나갈 듯한 통증을 느낀 기검룡은 가만히 자리에 누웠다.

헌데 그는 실로 기이함을 느꼈다.

누워있는 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며 미끈미끈한 액체의 감촉마저 느껴졌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뜨겁기까지 한 것이 아닌가?

(이곳이 대체 어디란 말인가?)

기검룡은 의혹을 금치 못하며 다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허나 다시 주르르 발이 미끄러지며 그는 그만 풍덩 웅덩이게 빠지고 말았다.

웅덩이 속에는 끈끈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헌데 이때, 웅덩이의 맞은편에서 문득 한 줄기의 빛이 비쳐드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안력을 돋구어 눈을 감았다 크게 떴다.

그것은 어린아이 주먹만한 크기의 하얀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구슬은 맞은편의 벽에 매달려 있었고 그 주위로 그물과도 같은 이상한 줄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신비한 흰색기류에 둘러싸여 빛을 발하고 있는 구슬을 바라보며 기검룡은 당장 호기심을 느꼈다.

[! 신기하게 생긴 구슬이구나!]

본래, 이 백색구슬은 백경이 만년(萬年) 동안 정기(精氣)를 모아 형성한 내단(內丹)이었다.

! 그렇다면 기검룡 그는 지금 만년백경의 몸속에 들어와 있단 말인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는 기검룡은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구슬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따보자!)

결심한 순간 그는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나,

[!]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그는 손목이 찌르르함을 느끼며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백경의 내단은 백경의 진원(眞元)이나 다름없이 스스로 보호하는 진기가 있는 것이었다.

처음 시도에 실패하자 기검룡은 은근히 오기가 생겼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

이어 그는 천강신공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양팔이 청색으로 물들었다.

순간 그는 벼락같이 쌍수를 떨쳐냈다.

파파팟___ 꽈릉___!

파열음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허나 천하에서 가장 강맹한 천강신공이건만 백색구슬 주위의 하얀기류를 흩어버릴 수는 없었다.

[!]

기검룡은 재차 막강한 반탄력에 의해 튕기듯이 물러났다.

일순 전신의 기혈이 뒤집어지는 듯한 충격에 그는 눈앞이 아찔했다.

허나 잠시 후 기혈이 가라앉자 기검룡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천강신공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양강(陽强)한 신공이라 하셨다. 헌데 저 흰색기류를 제거치 못하다니...?]

고개를 갸우뚱 하던 그는 문득 낙척문사가 들려준 말이 생각났다.

 

___무릇 장수하며 오래사는 영물들은 자연으로부터 정기(精氣)를 얻어 단기(丹氣)를 이룬다. 그 단기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며 서로 뭉쳐 고형화(固形化)되어 구슬과 같은 모양을 하게 되는데 이를 단주(丹珠) 또는 내단(內丹)이라 한다. 도가(道家)에서는 이를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여기며 무인(武人)이 이것을 용해하여 단기(丹氣)를 흡수하면 공력을 연마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___

 

이러한 낙척문사의 말을 기억해낸 기검룡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저것은 내단(內丹)임에 틀림없다. 그럼 여기가 짐승의 뱃속...!]

그는 그제서야 자신이 만년백경에게 삼켜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그는 괘씸한 마음이 들어 소리쳤다.

[백경! 나를 삼키다니 도저히 용서치 못하겠다!]

이어, 꽈릉___! 꽈르릉___!

기검룡은 백경의 내단을 향해 마구 천강신공을 쳐냈다.

허나 그것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기검룡은 그만 제풀에 지쳐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하면 백경을 시원하게 골탕먹일 수 있을까?)

잠시 생각에 골몰하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는 문득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내단의 주위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신경선을 향해 천강신공을 벼락같이 쳐냈다.

파팍___!

허나 의외로 신경선은 매우 질겨 간신히 한 가닥만이 끊어졌을 뿐이었다.

(굉장히 질긴걸?)

기검룡은 한 차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천강신공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았다.

파파팍___ !

그의 손이 힘차게 내려쳐지자 단번에 십여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졌다.

허나 그것은 수천 줄기의 신경선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기검룡은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했다.

(신공(神功)만 쓰면 이렇게 질긴 것을 자르는데 별효과가 없다. 무엇인가 날카로운 수법이 있다면 좋을텐데...)

다음 순간 그는 문득 손뼉을 탁 쳤다.

(그렇다!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가 있다!)

 

___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

 

본래 도가(道家)의 중수법(重手法)이었던 참마인(斬魔刃)이라는 수법을 사백 년 전 점창의 절정고수였던 제룡신협(制龍神俠)이 개조한 무공이었다.

강기(罡氣)를 파해하는 전문수법으로 날카롭기 그지없는 신랄한 무공이다.

검창에서는 오래 전에 실전하였으나 낙척문사가 이를 얻었던 것이다.

기검룡은 참마제룡수의 구결을 마음 속으로 외우고 난 다음 신경선이 뻗친 곳으로 다가갔다.

(어디 한 번 시험해 볼까?)

순간 그는 우수(右手)를 번쩍 치켜들어 사정없이 신경선을 내려쳤다.

파파파팍___!

그러자 놀랍게도 단번에 수십 줄기의 신경선이 끊어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성공이다!]

기검룡은 환성을 지르며 쉬지않고 수도(手刀)를 내리쳤다.

그의 손에서 새파란 광망이 번뜩일 때마다 수많은 신경선들이 속속 끊어져 나갔다.

파파___ ! ! !

그렇게 거듭할수록 청망은 더욱 짙어지고 한 번에 끊어지는 신경선의 숫자도 많아졌다.

[다 됐다!]

기검룡은 탄성을 발하며 기뻐했다.

어느새 내단의 뒤에 달린 굵직한 주신경선(主身俓線)만 남곤 미세한 신경선은 모두 끊어져 나가버린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마지막으로 힘을 모아 주신경선을 후려쳤다.

순간,

[크아악___!]

만년백경은 극심한 내부의 충격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미친 듯이 몸을 뒤틀었다.

그로인해 기검룡이 서 있는 부분의 사방벽이 짓눌리며 그를 압박했다.

[!]

기검룡은 재빨리 만녀백경의 내단을 집어들고 입구로 날아올랐다.

쏴아아___!

그가 처음에 누워있던 장소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전면에서 밝은 햇살이 비쳐들었다.

또한 만년백경이 물을 들이키는 듯 해일같은 기세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기회는 지금이다!)

내심 생각한 그는 빛을 향해 황급히 신형을 날렸다.

[이얍!]

힘찬 일갈과 함께 천강신공을 펼치자 바닷물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___ !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전속력으로 뛰쳐나갔다.

콰르릉___!

그가 마침내 만년백경의 입에서 뛰쳐나오자 대노한 만년백경은 미친 듯이 불기둥을 쏘아올렸다.

허나,

[하하... 고맙다!]

기검룡은 오히려 그 물기둥을 타고 삼십여 장 상공으로 까마득히 치솟았다.

허공에서 순간적으로 우측 수평 위에 아스라이 섬그림자가 보였다.

기검룡은 지체없이 방향을 틀어 섬방향으로 신형을 날렸다.

내단을 빼앗긴 만년백경은 대노하여 기검룡의 뒤를 쫓았다.

(이크...! 저놈이 정말 화가 난 모양이구나...!)

쏜살같이 해연약파(海燕掌波)의 경공을 펼쳐 섬으로 달아나던 기검룡은 등뒤에서 세찬 물살을 가르며 쫓아오는 만년백경 보고 기겁했다.

그는 더욱 속력을 가했다.

허나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만년백경과 기검룡의 거리는 좁혀들었다.

이윽고 전면에 뚜렷이 하나의 섬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그들의 사이는 불과 이십여 장으로 좁혀졌다.

쏴아아___!

재차 산악같은 물기둥이 쏘아졌다.

[어엇...!]

기검룡은 십여 장 넓이의 물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바닷 속으로 잠겨들었다.

(으흡...!)

기검룡은 바닷 속에 잠겨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뻔 했다.

만년백경은 일시에 기검룡의 행적을 놓치자 잠시 멈칫 했다.

허나 곧 만년백경은 섬쪽으로 물살을 가르며 쏘아가기 시작했다.

기검룡으로서는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는 만년백경의 배밑에 숨죽여 숨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거의 섬의 전역에 들어온 듯 바닷속이 얕아져 백경은 더 이상 전진을 못하고 몸을 돌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기검룡은 빠르게 앞으로 나가다가 수면으로 떠올랐다.

만년백경은 막 방향을 틀다가 기검룡이 떠오른 것을 보고 쏜살같이 물살을 가르며 덮쳐들었다.

___ ___!

허나 섬이 이미 코앞에 있었다.

소년은 번개같이 몸을 띄워 섬쪽으로 날아갔다.

그러다가 문득 힐끗 뒤를 돌아보니 만년백경은 섬에서 약 백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을 못하고 그 부근을 빙빙 돌고 있었다.

[하하...! 요놈아 꼴좋구나...!]

기검룡은 돌아서서 크게 외치며 섬주변의 백사장으로 달려갔다.

___ ___ 처얼썩...!

[... 힘들다...]

기검룡은 백사장에 닿자마자 털썩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까지도 만년백경은 미련이 남았는지 섬주위를 배회하고 있었다.

그를 보는 기검룡의 천진한 얼굴에 씨익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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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불길한 화살

 

 

작은 분지 형태인 선녀곡에는 주황색 노을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녀곡 끝에는 띠로 지붕을 얹은 모옥이 한 채 서있다. 지난 십칠 년 간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살아온 집이다.

모옥은 잘 가꿔진 채마밭과 화단이 감싸고 있다.

“...!”

선녀곡으로 들어서던 고검추의 눈이 치떠졌다. 모옥의 방문이 반쯤 열려있는 게 보인 때문이다.

(어머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타탁!

고검추는 반가운 마음에 모옥을 향해 달려갔다.

고검추는 경신술을 쓸 줄 몰라서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고검추에게는 무공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저 몸속의 기운이 잘 소통하게 만들어주는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만 수련하게 했을 뿐이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진기토납술을 수련해온 덕분에 고검추는 무공을 쓸 줄 몰라도 온몸의 경맥은 막힘없이 뚫려있다.

왜 무공을 가르쳐주지 않느냐는 고검추의 질문에 당혜선은 즉답은 피했었다.

다만 지나가는 말로 당혜선 자신이 익힌 무공을 가르치면 후환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했었다.

어머니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음을 짐작한 고검추는 그날 이후로 무공을 가르쳐달라 조르지 않았다.

비록 무공은 쓸 줄 몰라도 고검추의 뜀박질은 아주 빠르다. 경맥이 완전하게 뚫려있어 몸을 무리하게 써도 그다지 힘들지 않기 때문이다.

“...!”

삼십여 장 거리를 단번에 주파하여 모옥 근처에 이른 고검추의 몸이 갑자기 멈춰졌다. 반쯤 열린 문을 통해 난장판이 된 모옥 내부가 보였기 때문이다.

방안의 집기들은 다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다. 어떤 자가 방안을 샅샅이 뒤져 무언가를 찾은 듯한 정황이다.

(그자 짓이었을까?)

고검추는 고갯마루를 넘어오다가 화들 짝 놀라 달아났던 사내를 떠올렸다.

(대체 무얼 노리고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인가?)

고검추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누르며 반쯤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때 고검추의 눈에 특이한 물건이 들어왔다.

화살!

마치 피를 칠한 듯 검붉은 화살 하나가 반쯤 열린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이게 무어지?)

핏빛 화살을 본 고검추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자세히 보니 화살의 깃에는 검은색으로 글이 한자씩 적혀 있었다.

<()>자와 <()>자였다.

"초혼(招魂)? 혼백을 부른다?"

화살 깃에 적힌 글을 확인한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화살을 뽑으려 했다.

그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돌연 뒤쪽에서 날카로운 여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머니...!"

고검추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휘익!

놀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뒤로 한 명의 여인이 훌훌 날아 내렸다. 촌부(村婦)처럼 피부는 가무잡잡하지만 이목구비가 조각한 듯 아름다운 여인이다.

비록 나이는 삼십대 중반을 넘겼지만 이 여인을 본 사내라면 누구라도 넋이 나가고 말 것이다. 여인은 그만큼 대단한 미모를 지니고 있다.

풍만하면서도 탄력 넘치는 여인의 몸에는 검소한 마의가 걸쳐져 있다.

물론 수수한 그 차림새도 여인의 타고난 미모를 훼손하진 못한다.

 

-당혜선

 

여인은 바로 고검추의 어머니인 당혜선이었다. 한 자루 검을 등에 짊어진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강호의 여걸이다.

돌아오셨군요 어머니!”

고검추는 갑자기 나타난 어머니를 보고 반색했다. 흑모철웅을 추살하러 떠났던 어머니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기뻐하는 고검추와 달리 당혜선은 굳어진 얼굴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방문에 박혀있는 핏빛 화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멀리서 보고 혹시나 했는데... 틀림없구나!"

핏빛 화살을 살펴본 당혜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마의에 감싸인 탄력 넘치는 교구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저 화살이 무엇인데 어머니가 저토록 놀라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했다. 어머니가 이렇게 놀라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이 화살은 언제부터 여기에 박혀있었느냐?"

당혜선이 굳어진 표정으로 고검추를 돌아보았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지금 막 돌아온 참이라..."

고검추는 당혜선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 악랄한 무리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단 말인가?"

당혜선은 이를 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악랄한 무리들이라니... 누구 말씀인지요?"

의아해진 고검추가 물었다.

"이 화살의 이름은 초혼전(招魂箭)으로 사신각이라는 청부살수조직의 표기다."

당혜선은 화살을 노려보며 설명했다.

사신각...”

고검추는 사신각이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섬뜩해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혼전에는 백일취(白日臭)라는 것이 묻어있다. 이름 그대로 냄새가 백일 동안 지워지지 않는 약물이다. 일단 백일취가 몸에 묻으면 최소 백일간은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게 된다.”

당혜선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후 서둘러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 나무상자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나왔다. 가로 세로 일곱 치 정도에 두께는 한 치가 채 안되는 납작한 상자다.

고검추는 그 나무상자를 오늘 처음 본다. 나무상자는 벽 틈에 설치 된 교묘한 공간에 숨겨져 있어서 침입자가 찾아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이것을 어떤 일이 있더라도 잃어버리면 안된다."

당혜선은 들고 나온 나무상자를 고검추의 품속에 넣어 주었다.

"...!"

어머니의 굳은 표정을 본 고검추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사신각의 초혼전이 발동된 이상 길()보다는 흉()이 많을 것이다. 속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

당혜선은 말하면서 고검추를 두 팔로 번쩍 안아들었다.

고검추의 키는 어느덧 당혜선보다 커졌다.

하지만 당혜선은 고검추를 깃털처럼 가볍게 안아들었다.

".. 어머니...!"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에게 안긴 고검추가 당황할 때였다.

휘익!

다 큰 아들을 두 팔로 안아든 당혜선의 몸이 맹렬한 기세로 날아올랐다.

(어머니의 무공은 역시 대단하구나.)

당혜선의 품에 안겨 날아가며 고검추는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고검추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던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검에 간단히 치명상을 입었다고 한다.

그런 당혜선이 이전에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긴장을 드러내고 있다.

사신각이 그만큼 무서운 조직이라는 것을 고검추는 깨닫고 있었다.

 

***

 

틀림없느냐?”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부릅떠졌다.

... 분명 그 늙은이였습니다.”

사신각주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대답하는 사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나타났던 바로 그자다.

산적이 아닐까 했던 고검추의 추측과 달리 그자는 사신각 소속의 자객이었던 것이다.

... 팔이 하나 없어졌고 얼굴에 큰 상처가 나있긴 했지만... 본각의 인명부에서 본 적이 있는 대()늙은이의 용모파기와 일치했습니다.”

사내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하는 살수 주제에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말했다.

대늙은이가 십구 년 전에 죽지 않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혼잣말을 하는 사신각주의 목소리에도 긴장이 역력히 묻어있다. 그만큼 그자가 떠올린 인물은 공포스러운 존재다.

기련산에 들어온 후 열 명 가까운 형제들이 점호에 응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신각주 뒤에 서있던 복면인들 중 한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자를 포함한 네 명이 쓰고 있는 복면 이마 부분에는 <()>자가 적혀있다.

평범한 신분으로 위장한 채 살아가던 사신각의 자객들은 지령이 떨어지면 그 복면을 쓰고 임무를 수행한다.

대늙은이를 만나서 불귀의 객이 되었겠군.”

사신각주는 복면 속에서 이를 부득 갈았다.

대늙은이는 본각이 십칠 년 전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게 분명합니다. 우릴 따라서 기련산까지 온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게 밖에는 대늙은이의 느닷없는 출현을 설명할 수 없겠지.”

복면인의 말에 사신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대늙은이는 정확한 상황을 아직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실종된 형제들은 대늙은이에게 사로잡히는 즉시 입 속에 숨겨놓은 독을 깨물어서 비밀을 지켰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복면인이 말을 이었다.

사신각의 살수들은 입속에 독을 숨기고 있다가 임무에 실패하면 터트려서 자결을 한다. 살인청부를 한 고객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다.

정팔(鄭八) 저놈을 잡지도 않고 살려 보낸 건 잡아봤자 자결할 걸 알아서였겠군.”

사신각주는 자신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힐끔 보았다.

대늙은이가 근처에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니 당가년에 대한 추격은 중지하는 게 어떨지...”

복면인이 사신각주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혜선의 거처에 초혼전을 남겨뒀다고 했지?”

사신각주는 복면인에게 대꾸하는 대신 무릎 꿇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 그렇습니다 각주님.”

긴장한 사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사신각주의 눈치를 살폈다.

본각에게 추적당하고 있다는 걸 알면 당가년은 즉시 기련산을 벗어나 종적을 감춰버릴 게 분명하다.”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희번덕였다.

이번에도 당가년을 놓치면 지난 몇 년간의 수고가 헛되게 된다. 기필코 잡아야만 한다.”

존명!”

분부 받들겠습니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며 대답했다. 일단 각주가 결정을 내리면 따라야만 한다.

기련산에 들어온 본각의 전력 절반을 대늙은이의 행방을 찾는데 투입하라. 그 늙은이를 발견하는 즉시 십리적(十里笛)을 써서 보고하고!”

사신각주가 지시를 내렸다.

존명!”

휘휙! !

일제히 대답한 복면인들이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호사다마라더니...”

흩어지는 수하들을 보며 사신각주는 이를 부득 갈았다.

마천루의 떨거지들이 기련산 일대에 출몰하고 있어서 신경이 쓰였거늘... 저 세상에 가있을 줄 알았던 무서운 노괴까지 우리 사신각의 뒤를 캐고 있다.”

복면에 난 구멍으로 드러나 보이는 사신각주의 눈이 초조한 기색으로 물들었다.

대늙은이의 눈에 띠면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하지만... 이제 와서 당가년의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년을 잡아야만 복마신검의 행방을 알 수 있으니...”

사신각주는 길게 심호흡을 하여 마음속에서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두려움을 억눌렀다.

최대한 빨리 당가년을 찾아내 사로잡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휘익!

결의를 굳힌 사신각주도 몸을 날려 사라졌다.

 

***

 

쐐액!

고검추의 귓가로 바람 소리가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고검추를 두 팔로 안은 당혜선은 기련산의 험한 산속으로 바람처럼 달려가고 있었다.

당혜선이 달리는 속도는 어떤 산짐승보다도 빠르다.

그 엄청난 속도감에 고검추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이 핑핑 돌고 숨이 콱 막히며 정신이 가물가물해졌다.

처음에는 눈을 뜨고 있던 고검추는 눈을 감아버렸다. 홱홱 변하는 주변 경치 때문에 속이 울렁거려 토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십자단맥검을 쓴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고검추를 안고 달리며 당혜선은 입술을 깨물었다.

 

보름 전, 당혜선은 납치당한 등삼낭을 구하기 위해 철웅채로 쳐들어갔었다.

철웅채의 채주이며 기련산 일대에서 최강자로 꼽히던 흑모철웅은 당혜선에게 패해 달아났었다.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다준 후 당혜선은 흑모철웅을 추격했다. 살려둘 경우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닷새 전, 당혜선은 은밀한 곳에 숨어 상처를 치료하고 있던 흑모철웅을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궁지에 몰린 흑모철웅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철피공을 익힌 그자의 몸뚱이는 단단하기 이를 데 없어 치명상을 입히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은 비장의 절기를 써야만 했다.

그 절기가 바로 십자단맥검이었다.

십자단맥검은 금강불괴라도 베어버리는 위력을 지녔다. 흑모철웅의 몸뚱이가 제 아무리 단단해도 십자단맥검을 견디지는 못했다.

결국 십자단맥검에 치명상을 입은 흑모철웅은 높은 절벽에서 추락했으며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에 빠져 실종되었다.

당혜선은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흑모철웅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절벽 아래를 흐르는 격류는 워낙 거칠어서 수색에 한계가 있었다.

오일 동안 격류를 따라 내려가며 샅샅이 뒤졌지면 흑모철웅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포기하고 팽가촌으로 돌아와 보니 사신각의 초혼전이 집의 문에 박혀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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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상한 계곡과 신기한 뱀

 

 

허억!”

털썩!

임청우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침내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아래의 계곡에 도착한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벌렁 드러눕고 싶지만 등에 난 상처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

산을 타는 데는 이골이 난 임청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가파르고 험한 절벽이라 몇 번인가 죽을 고비를 넘겼었다.

어느덧 주변은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게 해가 진 때문인지 바위산 아래 계곡이 너무 깊어서인지는 확실하지가 않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절벽은 높고도 높아서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을 정도다.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인 북두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내려올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잘도 살아서 저길 내려왔구나.)

거칠어진 숨을 고르는 임청우의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등쪽의 상처에 땀이 스며들어 쓰리다.

땀에 젖어 번들거리는 임청우의 왼쪽 가슴에는 손바닥 반쯤 크기의 반점(斑點)이 있다.

옅은 푸른색의 그 반점은 얼추 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청우(靑牛)라는 이름은 그 반점에서 딴 것이다.

 

임단심은 아들에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이름 대신 온갖 욕설과 악의가 섞인 말로 아들을 불렀었다.

어쩔 수 없이 임청우는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아버지의 성을 모르니 어머니의 성인 임()씨를 썼고 가슴에 있는 푸른 소 형상의 반점에 착안하여 청우를 이름으로 쓰게 되었다.

자신이 지은 이름이지만 제법 마음에 드는 임청우였다.

 

한숨 돌린 임청우는 허리춤에서 호리병을 끌렀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은 임청우와 함께 바닥에 패대기쳐졌었지만 다행히 망가지진 않았다. 한쪽이 조금 이지러졌을 뿐이다.

!

호리병의 주둥이에 박혀있던 나무 마개를 뽑자 그윽한 술 냄새가 코를 찌른다.

호리병에 든 것은 임청우가 여러 가지 약초와 과일을 발효시켜서 만든 술이다. 백초주(百草酒)로 이름붙인 그 술은 술이라기보다는 약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꿀꺽! 꿀꺽!

목도 마르고 해서 독한 백초주를 거푸 몇 모금 마셨다.

독한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자 온 몸이 부르르 떨리며 팔 다리에 힘이 돌아온다.

영차!”

다시 마개를 막은 호리병을 허리춤에 찬 임청우는 힘을 내서 일어났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북두홀을 찾아야한다.

 

***

 

다행히 북두홀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커다란 너럭바위 위에 떨어져 있어서 눈에 잘 뜨인 것이다.

북두홀을 찾았으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이 계곡을 빠져나가야만 한다.

(이게 무슨 냄새지?)

헌데 북두홀을 허리띠에 끼우던 임청우의 코가 벌름거렸다. 어디선가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가 타는 듯한 그 냄새를 따라갔다.

 

절벽 사이의 좁은 계곡을 따라 동쪽으로 삼, 사십 장쯤 갔을 때 임청우는 연기에 휩싸인 독수리의 시체를 발견했다.

푸스스스!

날개를 활짝 펼친 길이가 일장이 넘는 독수리들의 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다.

살은 이미 다 타서 굵은 뼈와 깃털들만이 남아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는 타는 게 아니라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무서운 독이 살을 녹였구나.)

임청우는 놀라며 손으로 코와 입을 막았다.

푸스스! 퍼석!

임청우가 보고 있는 사이에 굵은 뼈들도 불속에 던져진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이제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에서 남아있는 것은 크고 작은 깃털들과 강철같이 번들거리는 발톱뿐이었다.

(이놈에게 잡혀가던 뿔 달린 작은 뱀의 짓일까?)

임청우는 손으로 입과 코를 막은 채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는 것을 살펴보았다.

독수리들의 왕의 시체가 저절로 녹아내렸을 리는 없다.

그놈은 죽기 전에 강력한 독에 중독되었던 게 분명하다.

바로 그때였다.

툭툭!

무언가가 임청우의 오른쪽 발목 근처를 건드렸다.

!”

무심코 내려다보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쉭쉭!

머리에 황금색 뿔이 돋아나있는 작은 뱀이 고개를 쳐든 채 올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통이 피 칠을 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등줄기를 따라 갈기까지 나있다.

영락없는 용의 모습인 작은 뱀은 독수리들의 왕에게 잡혀가던 바로 그놈이었다.

(... 이놈이 독수리들의 왕을 물어죽였구나!)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돋아서 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를 녹여버릴 정도의 독을 지녔다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독사다.

!

헌데 뒤로 물러서던 임청우의 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렸다.

!”

임청우는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쪘다.

쉭쉭!

뿔 달린 작은 뱀이 그런 임청우를 빤히 바라보며 다가왔다.

(... 죽었다!)

임청우는 공포에 휩싸였다. 주저앉은 상태라서 그놈이 달려들어 물려고 하면 피할 수가 없다.

임청우의 몸이 공포로 굳어질 때였다.

임청우를 잠시 살펴보던 뿔 달린 작은 뱀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너 지금 나한테 고맙다고 인사하는 거냐

임청우는 어리둥절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작은 뱀은 고개를 끄덕이는 게 아닌가?

(요놈 봐라! 뱀 주제에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 같잖아!)

임청우는 놀라면서도 안도했다.

(전설 속의 용처럼 뿔까지 달려있고... 외양만 특이한 게 아니라 진짜 영물이란 건가?)

두려움 대신 호기심이 생긴 임청우는 바로 앞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는 작은 뱀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이름이 금관혈린사(金冠血鱗蛇)인 뿔 달린 작은 뱀은 세상 모든 뱀들의 왕이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안되지만 금관혈린사는 사실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다.

복사(蝮蛇)의 일종인 이놈은 한 때 몸길이가 삼장(三丈;9미터)이 넘는 대물이었다.

그러다가 기연을 만나 무한한 수명을 얻게 되었는데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오히려 작아졌다. 오랜 세월 수행을 하여 정기(精氣)가 농축되자 몸도 함께 줄어든 것이다.

몸은 줄어들었지만 독은 오히려 더 강해졌다. 정기뿐 아니라 독기도 농축이 된 때문이다.

그리하여 금관혈린사의 독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금관혈린사는 표적을 직접 물지 않고 독기(毒氣)를 뿜어서 죽일 수도 있다.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는 독수리들의 왕의 입장에서는 모든 뱀들의 제왕인 금관혈린사가 눈엣가시였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마침내 오늘 금관혈린사를 낚아채는 데 성공했었다.

금관혈린사가 비록 모든 뱀들의 제왕이라고 해도 힘으로는 독수리들의 왕을 이길 수가 없었다.

물려고 시도해봤지만 독수리들의 왕의 발목은 강철같은 비늘로 덮여있어서 상처를 내는 게 불가능했다.

독기를 뿜어도 봤지만 허공을 날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독기가 바람에 흩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금관혈린사는 꼼짝없이 독수리들의 왕의 먹이가 될 판이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임청우가 충동적으로 활을 쏴서 독수리들의 왕을 떨어트렸었다.

다만 임청우가 쏜 강철 촉의 화살도 독수리들의 왕의 숨통을 즉시 끊어놓지는 못했었다. 그놈의 깃털과 가죽이 단단해서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한 것이다.

그래도 독수리들의 왕은 충격을 받아서 허우적대며 떨어졌었다.

그 바람에 금관혈린사는 강철같은 발톱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독수리들의 왕의 몸통을 물어서 치명적인 독을 주입했던 것이다.

 

(작고 다리가 없을 뿐 용을 빼닮은 놈이다.)

임청우가 금관혈린사를 보며 전설 속의 용을 떠올릴 때였다.

! !

금관혈린사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동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인사치례도 했으니 그만 제 갈길 가나보다 생각했다.

헌데 금관혈린사는 조금 가다가 돌아보고 다시 기어가다가 돌아보기를 반복한다

따라오라는 거냐?”

임청우는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물었다.

! !

그러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임청우는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영물인 게 분명한 놈이 따라오라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금관혈린사를 따라 오십여 장쯤 갔을까?

임청우 앞쪽에 안개의 벽이 나타났다.

계곡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던 짙은 안개가 마치 장막처럼 시야를 가리고 있다.

금관혈린사는 망설이지 않고 안개의 벽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어째 좀 으스스한데...!”

임청우는 침을 꼴깍 삼키며 금관혈린사를 따라 안개의 벽 속으로 들어섰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이토록 짙은 안개를 겪어본 적이 없다. 얼마나 짙은지 손을 들어 눈앞에 가까이 가져와 봐도 윤곽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다.

그래도 길을 잃지 않은 것은 금관혈린사 덕분이었다.

안개가 너무 짙어 금관혈린사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불똥이 떨어진 듯, 반딧불이 내려앉은 듯 빛이 나는 점들이 명멸하고 있었다.

독을 흘린 것인지 다른 조화를 부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광점(光點)들은 짙은 안개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앞서 가며 남긴 기이한 흔적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정말 기분 나쁜 안개다. 마치 수초가 몸에 휘감기는 듯한 느낌... !)

헌데 광점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임청우는 기겁했다.

스으 스으

짙은 안개 속에 시커먼 것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때문이다.

작은 것은 개만하고 큰 것은 사람 키의 몇 길이나 되는 정체불명의 존재들이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짐승같고 어떤 것은 사람 같으며 사람도 짐승도 아닌 형상도 있다.

처음에는 한 두 개가 보이던 그것들은 점점 숫자가 늘어나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진다.

괴상한 형상들은 안개 속을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러는 그것들의 몸에는 빛이 나는 부분들이 있었다.

아마도 눈인 모양인데 머리 뿐 아니라 몸통에도 달려있으며 하나를 단 놈이 있는가 하면 두 개, 세 개, 심지어 십여 개를 달고 있는 놈도 있다.

(... 뭐지?)

소름이 오싹 끼친 임청우는 허리춤에 끼운 북두홀을 움켜잡았다.

(안개 속에 인간이 아닌 뭔가가 있다!)

겁에 질린 임청우가 걸음도 제대로 옮기지 못할 때였다.

쉭 쉭!

앞쪽에서 금관혈린사가 내는 소리가 들렸다.

임청우가 정신을 가다듬고 바라보니 짙은 안개 속에서 금관혈린사의 뿔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뿔 아래에서 숯불처럼 이글거리는 한 쌍의 눈이 임청우를 보고 있다.

(... 길을 아니까 따라오라는 거겠지? 일단 저놈만 믿고 가보자!)

임청우는 놀란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안개 속을 배회하는 기괴한 형상들도 임청우가 가는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이 당장이라도 덮칠 것만 같아서 임청우는 간이 콩알만해졌다.

금관혈린사가 지나가며 남긴 광점들과 안개 속에서 등불처럼 빛나는 그놈의 뿔이 아니었으면 공포에 사로잡혀 미쳐버렸을 것이다.

화악!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안개의 벽이 사라지며 임청우는 밝은 곳으로 나왔다.

마침내 안개의 벽을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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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인들의 제안

 

 

 

갈 길이 바빠서 그러니 가장 빨리 되는 음식으로 준비해주시오. 건량(乾糧;마른 음식)도 사흘치 정도 포장해주고...”

강유는 점소이에게 동전을 넉넉히 건네주며 말했다.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손으로 동전을 받으며 굽신거렸다.

재빠른 셈으로 최소한 한 두 냥은 남는다는 걸 확인한 점소이의 입이 귀에 걸렸다.

점소이는 동전을 세면서 희희낙락 하며 주방쪽으로 갔다.

(장강을 건넜으니 여정의 절반쯤은 지난 셈이다.)

강유는 등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벗어 옆의 의자에 내려놓았다.

안탕산을 떠난 게 사흘 전이다.

전에도 아버지를 따라 안탕산을 내려온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강유 혼자 세상으로 나온 것은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앞으로 사나흘만 부지런히 가면 숭산(崇山)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유는 품속에 오른손을 넣으며 생각했다.

 

<숭산 태실봉(太室峰) 뒤쪽에 고불암(古佛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아버지 강조의 말을 떠올리며 다시 품속에서 꺼낸 강유의 손에는 여자들이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가 하나 들려있었다.

네모 난 녹옥(綠玉)에 호박(琥珀)으로 만든 구슬이 몇 개 달려있는 노리개다.

 

<고불암에 기거하는 노승에게 이 노리개를 건네주면 대신 내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걸 가져오는 게 아비의 심부름이다.>

 

노리개를 들여다보면서 강유는 강조의 말을 떠올렸다.

강유가 심부름으로 다녀와야 하는 곳은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사가 자리한 숭산이었다.

(오는 동안 몇 번이고 살펴봤지만 딱히 특별할 것도 패옥(佩玉)이다.)

강유는 노리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노리개의 재료인 녹옥과 호박은 그리 질이 높은 게 아니었다.

녹옥의 색은 탁하고 호박에는 이물질이 많이 섞여있다.

그렇다고 세공 솜씨가 정교한 것도 아니다.

네모 난 녹옥에는 봉황이 투각(透刻)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솜씨가 어설프고 조악하다.

아무리 살펴봐도 시장통에서 흔히 파는 싸구려 장신구일 뿐이다.

(단지 손을 탄 흔적이 뚜렷한 걸 보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인 것같긴 하다.)

강유는 반질반질한 녹옥의 모서리를 만져 보았다.

(제법 오래전에 만들어진 골동품이라는 것 외에는 값어치가 별로 안 나가 보이는 이 패옥에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생각할수록 노리개에 얽힌 사연이 궁금한 강유였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난 그저 아버지의 분부만 이행하면 되니까.)

강유는 생각을 그치며 노리개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쩌면 이번 여행은 아버지가 나에게 경험을 쌓게 하려고 혼자 강호에 보내신 것일지도...)

노리개를 챙기던 강유의 눈이 조금 치떠졌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의자에 피부가 검고 흰 두 명의 노인이 나란히 앉아서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다.

물론 두 노인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였다.

(이 노인들... 멀쩡히 눈을 뜨고 있었으면서도 앞자리에 와 앉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유는 내심 크게 놀랐지만 이마만 조금 찡긋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수들이다.)

강유는 한 눈에 흑백신귀가 자신은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경지에 이른 고수들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할 이유는 없는지라 묵묵히 흑백신귀를 바라보기만 했다.

흑백신귀도 그런 강유를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손님! 주문하신 음식이 나왔...”

국수 한 그릇을 얹은 쟁반을 들고 다가오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유와 흑백신귀가 마주 앉아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이들이 언제 이 자리로 옮겨왔지?)

점소이는 당황하여 강유의 눈치를 살폈다.

... 어떻게 할까요 손님?”

놓고 가시오.”

강유는 자기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시선은 여전히 두 노인을 향한 채...

점소이는 흑백신귀의 눈치를 보면서 강유 앞에 국수 그릇을 내려놓았다.

두 분 노야, 식사는 하셨는지요?”

강유는 젓가락을 집어들며 두 노인에게 물었다.

주방 쪽으로 돌아가려던 점소이는 혹시나 해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가 묻자 백귀는 끄덕이고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두 노인의 시선은 여전히 강유를 살펴보고 있었다.

드시고 싶으신 게 있으시면 말씀하십시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후배가 대접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간단히...”

강유의 권유에 흑신이 헤벌쭉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백괴가 점소이에게 가라고 손짓을 해서 막았다.

... 건량은 포장해놓았으니 나가실 때 가져가시면 됩니다. 또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점소이는 두 노인의 눈치를 보며 강유에게 굽신거렸다.

(이상한 늙은이들이잖아.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자리에 합석이나 하고 말이야.)

점소이는 서둘러 주방 쪽으로 돌아갔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먹는 모습을 보이자니 좀 부담스럽군.)

강유는 쓴웃음 지으면서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세외기인들이고 내게 뭔가 용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하겠지.)

후룩! 후루룩!

가능한 빨리 식사를 마칠 생각에 강유는 쉬지 않고 국수를 입으로 가져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구먼.>

<용골호체(龍骨虎體)!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상의 골격이고 체질이야>

 

부지런히 국수를 먹는 강유를 보면서 흑백신귀는 전음입밀(傳音入密)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성주님 못지않은 자질을 지녔어.>

<어떤 면에서는 성주님보다도 빼어날 정도야>

<이놈을 후계자로 삼으면 우리 신귀각(神鬼閣)이 제이(第二)의 제왕성이 될 수도 있겠어.>

<성주님께는 불충한 생각이지만 자네 생각에 동의함세.>

<어떻게 할까?>

<뭘 어떻게 해? 무조건 우리 신귀각의 후계자로 삼아야지.>

 

흑백신귀가 흥분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사이에 이윽고 강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상당히 많은 양이었던 국수 한 그릇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운 것이다.

후배는 가부(家父)의 명을 서둘러 수행해야만 하는 탓에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분부하실 일이 없으시면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강유는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뭐냐?”

몇 살이야?”

흑백신귀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강유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름은 강유, 한 달 후면 열아홉 살이 됩니다.”

일어나려던 강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강씨였군.”

기초가 튼튼한 걸 보니 아비가 누군지 모르지만 제대로 가르쳤어.”

흑백신귀는 또 거의 동시에 말을 했다.

(두 사람이 시차 없이 말을 해대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구나.)

강유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당금 무림에 강씨 성을 지녔으면서 아들을 너 정도로 기를 수 있는 인물은 그리 많지 않다.”

구파일방과 삼문육가(三門六家)에도 강씨성을 쓰는 인간들이 제법 있지만 후손을 잘 둔 놈은 없고...”

흑백신귀는 동시에 말하고 동시에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무명지배가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건 상상하기 힘들지.”

결국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일 수밖에 없다는 건데...”

(볼수록 놀라운 인물들이다. 당금 무림의 최고 고수들인 신주이십팔숙중 한명이 내 아버지라는 것까지 단번에 추론 해내다니...)

흑백신귀의 분석을 들은 강유가 놀랄 때였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이신 일제(一帝) 철면제왕님은 당연히 강씨가 아니고...”

또 쌍비(雙秘)는 여자인 데다가 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

삼기(三奇)와 사신(四神) 중에도 강씨가 둘 있지만 너무 늙었으니 제외...”

결국 오왕(五王), 육패(六覇), 칠절(七絶)중 한명이겠군.”

흑백신귀의 분석은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이어졌다.

그러다가 흑백신귀는 동시에 강유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을 주시했다.

오왕, 육패, 칠절에 속하면서도 성이 강씨고 검법이 특기인 놈이라면...”

이제야 알겠도다!”

! !

흑백신귀는 이번에도 거의 동시에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네 아비는 칠절의 으뜸인 소요신군 강조겠구나.”

그렇지? 맞지?”

흑백신귀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흥분하여 말했다.

두 분 노야의 해박한 견문에는 후배, 그저 경탄을 금치 못할 뿐입니다.”

강유는 다시 흑백신귀에게 포권을 했다.

말씀하신 대로 소요신군이라 불리는 분이 후배의 가부입니다.”

역시 그랬어!”

십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후기지수들 중 백미(白眉)라 불리던 소요신군의 자식이라면 납득이 가는군.”

흑백신귀는 동시에 무릎을 치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가부를 높이 쳐주시니 자식 된 입장으로는 황송할 따름입니다. 헌데 두 분 노야께서는 후배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으신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제자가 되어라.”

그럼 십년 안에 널 천하제일인으로 만들어주마.”

흑백신귀는 다시 동시에 말하면서 몸을 강유 쪽으로 숙였다.

후배를 제자로 삼고 싶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반면 강유는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조금 젖혔다.

자랑은 아니지만 우리 두 늙은이는 신주이십팔숙중 일제 철면제왕님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상좌를 양보하지 않는다.”

한창 때는 마교와 혈교의 교주들도 우리를 두려워했을 정도야.”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당금 무림에 철면제왕을 제외한 신주이십팔숙을 능가하는 고수가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인데...)

강유가 당혹스러워할 때였다.

노부들의 별호는 흑백신귀이며 노부가 그중 흑신이다.”

노부가 백귀다.”

우린 마교와 혈교에 못지않은 역사를 지닌 신귀각의 공동 문주들이다.”

사연이 있어서 남의 밑에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종의 신분은 아니다.”

흑백신귀의 말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흑백신귀는 물론이고 신귀각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강유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일을 모르는 게 없는 아버지 강조로부터도 흑백신귀라는 인물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기억이 없다.

(신주이십팔숙에 속하지 않으면서도 쌍비, 삼기에 필적하는 고수가 존재하고... 역시 세상은 넓구나.)

강유는 강호에 기인과 고수가 모래알같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며 흑백신귀에게 다시 포권을 했다.

모자란 후배를 어여삐 보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스승을 모시는 일은 실로 엄중한 대사인지라 후배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으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리가 있군.”

만일 네 아비 소요신군이 허락하면 노부들의 제자가 되겠느냐?”

가부가 허락하면 두 분 노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그럼 결정되었다.”

네 아비의 허락이 떨어지면 넌 우리 신귀각의 차기문주다.”

흑백신귀는 신이 나서 말했다. 강조가 당연히 아들을 자신들의 제자로 줄 것이라 믿는 눈치였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노친네들을 상대로 실랑이를 벌일 수도 없고...)

강유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의 가부가 있는 곳은...”

말하지 않아도 된다.”

인간이 모여 사는 곳 치고 우리 두 늙은이의 이목이 뻗어있지 않은 곳은 없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고개 저어 강유의 말을 막았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강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시다니 후배는 안심하고 이만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오냐! 일 봐라.”

우린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 게다.”

흑백신귀는 동시에 한쪽 손을 들어 답례했다.

강유는 벗어놓았던 봇짐을 집어들고 자리를 떠났다.

객잔 입구로 간 강유는 점소이가 내미는 꾸러미를 받았다. 며칠간 먹을 건량이다.

건량 꾸러미를 건네받은 강유는 서둘러 객잔을 나갔다.

흑백신귀의 시선은 그런 강유에게서 촌각도 떨어지지 않았다.

몸을 쓰는 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볼수록 기막힌 자질이야.”

흑신은 강유가 주점에서 나가는 걸 보며 새삼 감탄했다.

반면 백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이 심각해져 있었다.

본문의 오랜 숙원인 신귀합벽(神鬼合壁)을 저놈이라면 완성해낼 지도 모르겠어.”

흑신은 흥분해서 말하다가 흠칫 하며 입을 다물었다. 비로소 백귀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가?”

자네, 강유 저놈에게서 뭐 느낀 거 없는가?”

흑신의 물음에 백귀가 미간을 모으며 되물었다.

몸을 망칠 수도 있는 잘못된 무공을 익히고 있긴 하지만... 뭐 그 정도의 교정이야 우리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는가?”

무공 얘기가 아닐세. 저 놈이 누구를 연상시키는지 떠올려 보게.”

흑신의 대답에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누구를 연상시킨다? 뜬금없이 저놈이 누구를 닮았다고...”

백귀의 말에 대꾸하던 흑신의 눈이 돌연 부릅떠졌다.

... 맙소사!”

얼마나 놀랐는지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그렇네.”

백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엿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뭔가 위화감이 들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놈이 성주와 흡사한 분위기를 지녀서 마음이 불편했던 걸세.”

그럼... 그럼 저놈이 혹시 십팔 년 전에 귀면지존이 납치해간...”

흑신은 극도의 흥분으로 숨이 턱에 차서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건 아닐 걸세.”

백귀는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인간도 아니고 정인군자로 소문났으며 출신도 확실한 소요신군이 저놈 아비일세. 소요신군의 아들이 생사가 불명한 소성주일 리는 없어.”

그렇긴 하네만... 핏줄로 이어지지 않고는 저렇게 분위기가 흡사할 수는 없지 않는가?”

아니면 절대자(絶代者)의 운명을 타고 나서 성주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네.”

그럴 가능성도 있군.”

백귀의 말에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급한 일을 처리하고 소요신군을 직접 만나보도록 하세.”

그놈을 만나보면 강유에게서 성주가 연상된 내막을 알 수 있겠지.”

우리 두 늙은이의 죄책감이 강유 저 아이를 소성주와 억지로 연결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네.”

그럴 수도 있겠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고기재를 후계자로 삼게 될 기대로 들떴던 두 노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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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뻔뻔한 노인

 

 

오빠! 검추오빠!”

자매중 동생인 팽옥령이 달음박질한 탓에 발개진 얼굴로 와락 고검추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쿠! 나 죽네!”

고검추는 팽옥령을 품에 안은 채 뒷걸음질 치며 엄살을 부렸다.

하루 종일 심심했지? 이제부터 옥령이가 오빠하고 놀아줄게.”

고검추의 허리를 가는 두 팔로 끌어안고 올려다보는 팽옥령의 두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발그레하다.

하하하 놀아준다니 영광이옵니다 옥령아가씨!”

고검추는 명치쯤에 닿은 팽옥령의 가슴에 약간 붕긋한 융기가 돋아나 있는 걸 느끼며 웃었다.

검추오빠 피곤할 텐데 귀찮게 하면 안된다.”

뒤이어 도착한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쌀쌀 맞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팽옥경의 두 볼에도 살짝 홍조가 어려 있는 것을 고검추는 놓치지 않았다.

오빠는 옥령이 안 귀찮아해. 그렇지 오빠?”

팽옥령은 가는 두 팔로 고검추의 허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언니에게 눈을 흘겼다.

(저 년이...)

그 꼴을 본 팽옥경의 눈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피를 나눈 동생인 데도 고검추에게 아양을 떠는 팽옥령이 눈에 거슬리는 그녀다.

팽옥경은 고검추와 동갑이다.

당혜선이 어린 고검추를 안고 팽가촌에 나타난 며칠 후 팽옥경이 태어났었다.

당시 당혜선은 몸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어서 고검추에게 수유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당혜선을 대신해서 마침 출산한 등삼낭이 고검추에게 젖을 먹이며 키워주었다.

고검추에게 등삼낭은 사실상의 유모인 것이다.

고검추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고검추는 팽옥경과 함께 등삼낭의 젖을 한쪽씩 나눠 물고 빨며 자랐었다.

그런 인연도 있고 해서 고검추는 팽옥경과 친 남매처럼 지내왔다.

물론 팽옥경이 가슴이 부풀고 엉덩이가 토실토실해지면서 서먹해지긴 했지만...

가져왔어요 엄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동생에게 한 번 더 눈을 흘긴 팽옥령이 보자기로 싼 찬합을 등삼낭에게 내밀었다.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구나. 옥경이가 몇 가지 음식을 마련했으니 집에 가져가서 먹도록 해라.”

등삼낭은 큰 딸이 내민 찬합을 받지 않고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오빠가 우리 집에 가서 함께 저녁을 먹으면 좋은데...”

여전히 고검추에게 달라붙어 있는 팽옥령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떼 쓰지마. 검추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할 거야. 이모가 오늘이라도 돌아올지 모르니...”

팽옥경이 동생에게 눈을 흘기며 찬합을 내밀었다.

누가 그걸 모른데?”

팽옥령은 언니에게 마주 눈을 흘기면서 고검추에게서 떨어졌다. 고검추의 허리를 풀어주는 팽옥령의 손에서 아쉬움이 가득 느껴진다.

잘 먹을게.”

팽옥령에게서 벗어난 고검추는 어색하게 웃으며 팽옥경이 내민 찬합을 받아들었다.

그럼 내일 해뜨기 전에 다시 오겠습니다.”

한손에 찬합을 든 고검추는 세 모녀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가라.”

잘 자 오빠!”

“...”

세 모녀는 각자의 방식으로 고검추를 배웅했다.

고검추는 곧 마을을 벗어나 자기 집이 자리한 동쪽으로 멀어졌다.

(올해가 가기 전에 옥경이를 검추와 짝지어줄 생각이었는데... 당언니에게 너무도 참담하고 부끄러운 꼴을 보여서 차마 사돈 맺자는 말을 할 수가 없겠구나.)

멀어지는 고검추의 뒷모습을 보며 등삼낭은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무사했던 게 아니었다.

당혜선이 철웅채에 들이닥쳤을 때 이미 비극은 벌어졌었다.

등삼낭은 흑모철웅의 무지막지한 몸 아래 깔려 강간을 당하다가 기절한 후였던 것이다.

당혜선은 분노하기도 했지만 등삼낭의 정조를 지켜주기 위해 그 장면을 목격한 자들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죽여 버렸었다.

당혜선이 기필코 흑모철웅을 죽여 버리려는 이유도 등삼낭을 위해서였다.

“...”

소리 죽여 한숨을 쉬는 엄마를 훔쳐보는 팽옥경의 표정도 복잡했다.

등삼낭을 구해 돌아온 당혜선은 마을 사람들을 일체 배제하고 팽옥경에게 엄마를 돌보라고 신신당부했었다.

그리고 혼절한 엄마의 몸을 닦아주면서 팽옥경은 엄마가 철웅채로 끌려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버렸다.

같은 여자로서 엄마가 너무도 가엾다.

그러면서도 엄마가 당한 일 때문에 자신이 고검추와 맺어지는 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닌가 걱정이 앞서는 팽옥경이었다.

 

***

 

당혜선과 고검추 모자가 사는 골짜기에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이름이 붙을 만큼 경치가 좋은 것도 아니며 아주 깊거나 험한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팽가촌 주민들은 두 모자가 사는 계곡을 선녀곡(仙女谷)이라 부르고 있다. 그들에게 당혜선은 영락없는 선녀였기 때문이다.

팽가촌에서 선녀곡으로 들어가려면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야한다.

 

(심마니인가?)

팽옥경으로부터 받은 찬합을 손에 든 채 고개를 올라오던 고검추는 미간을 조금 모았다.

고갯마루 못미처에 서있는 단풍나무 아래 노인 한명이 앉아있다.

작은 바위에 걸터앉은 노인은 젊었을 때는 체격이 상당히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허리가 구부정하게 굽어서 볼품없어 보인다.

볼품없는 것은 체형만이 아니다.

백발인 머리는 봉두난발이고 역시 허연 수염은 가꾸지 않아 제멋대로 자랐다.

얼굴은 온통 주름으로 덮여있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왼쪽 뺨에는 길게 갈라졌다가 아문 상처가 나있다.

왼쪽 눈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뺨이 갈라질 때 눈도 상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노인은 팔 하나가 없다. 오른쪽 소매는 팔이 들어있지 않아서 힘없이 늘어져 있다.

독비(獨臂) 독안(獨眼)의 노인은 망태기를 하나 짊어지고 있는데 약초 캐는 괭이의 손잡이가 망태기 밖으로 삐져나와 있다.

불구의 몸이긴 해도 전형적인 심마니의 행색인 노인이다.

노인이 걸터앉은 바위에는 옹이 진 나무로 만든 지팡이가 기대어져 있다.

(온전하지도 않은 몸으로 용케 기련산을 올라왔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성치 않은 모습을 살펴보며 단풍나무로 다가갔다.

“...”

노인도 고개를 올라오는 고검추를 말없이 보고 있었다.

(노인인데도 눈이 참 맑구나.)

고검추는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수정처럼 맑다는 생각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다가 고검추는 무엇 때문인지 노인의 미간이 움찔 움직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내게서 뭘 보았기에 잠깐이지만 놀라신 걸까?)

고검추는 노인에게 목례를 하며 지나치려 했다.

꼬르륵!

그때 귀에 익은 소리가 고검추의 귀에 들렸다.

돌아보니 노인이 하나뿐인 눈으로 고검추가 들고 있는 찬합을 유심히 보고 있다.

꼬르륵!

그와 함께 다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노인의 배에서 나는 것이었다.

(배가 고프신 모양이다.)

고검추는 잠깐 갈등하다가 막 지나친 노인쪽으로 돌아섰다.

노야! 출출하시면 이걸 드십시오.”

고검추는 노인에게 찬합을 내밀었다.

찬합에 팽옥경이 정성과 공을 들여 만든 음식이 들어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배를 곯고 있는 게 분명한, 그것도 불구의 노인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허허허 이런 고마울 데가 있나.”

노인은 사양하지 않고 헤벌쭉 웃었다.

그저 웃은 정도가 아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보다시피 이 늙은이는 손이 하나 없어서 보자기를 풀 수가 없구먼.”

노인은 흐느적거리는 오른쪽 소매를 고검추에게 보이며 말했다.

(찬합을 직접 열어달라는...)

노인의 뻔뻔한 요구에 고검추는 내심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두말 않고 보자기를 풀었다.

드시지요.”

고검추는 찬합의 뚜껑까지 열어서 노인에게 내밀었다. 찬합에는 닭과 소, 양의 고기를 써서 만든 요리들이 정갈하게 담겨있다.

젓가락도 쥐어다오.”

노인은 이제 당연한 권리라는 듯 고검추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노인이 내민 왼손에는 소지(小指)와 무명지(無名指), 즉 새끼손가락과 네 번째 손가락이 없다. 오른팔이 없을 뿐 아니라 왼손도 손가락이 세 개뿐인 것이다.

(어쩌다 이토록 심한 불구가 되신 것일까?)

고검추는 저절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나 팽옥경이 찬합과 함께 싸준 젓가락을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맛나구먼. 어떤 계집인지 모르지만 자넬 좋아하는 마음이 가득 담겨있는 요리야.”

고검추에게서 젓가락을 건네받은 노인은 게걸스럽게 찬합의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세 개 뿐이지만 사용하는 데 익숙한 듯 젓가락질이 자연스럽다.

노인은 연신 젓가락질을 하면서도 걸터앉은 바위에서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고검추는 노인이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찬합을 두 손으로 들고 서있어야 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두 사람을 종과 하인이거나 할아버지와 손자로 볼만한 장면이다.

꺼억! 잘 먹었다. 뱃가죽이 등가죽과 입을 맞춰서 일어날 힘도 없었던 참이었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찬합의 음식을 입에 쓸어 넣은 노인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엉겁결에 일면식도 없는 노인에게 공양을 한 고검추는 어이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노인의 행동거지에서 딱히 불쾌한 감정은 들지 않았다.

고검추의 성격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때문이기도 했지만 어쩐지 이 불구의 노인을 오래전부터 알아온 듯한 기분이 든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맛있게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고검추는 웃으며 찬합을 다시 보자기로 싸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

그런 고검추에게 노인이 불쑥 물었다.

고검추라고 합니다.”

고검추... 고씨란 말이지?”

고검추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가늘어졌다.

(이분도 내 이름을 듣자 옥여상이란 아주머니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구나.)

고검추는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푸 두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듣자 비슷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아비는 누구냐?”

노인이 다시 물었다.

민망합니다. 어머니가 가친(家親)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셔서...”

고검추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일체 거론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남에게 말하는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그럴 수도 있지.”

노인은 노을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독백인지 고검추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노인은 다시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이 늙은이의 성은 대()씨다.”

대노야셨군요. 헌데 기련산에는 어인 일로 올라오셨습니까?”

고검추의 물음에 노인의 하나뿐인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기련산에 영생불사(永生不死)의 묘약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다.”

영생불사의 묘약... 기련산 토박이인 저도 처음 듣는 얘기입니다만...”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영생불사의 묘약이 기련산에 있다는 노인의 말은 얼토당토않게 느껴진다.

너는 아직 살날이 구만리 같아서 뜬 구름같은 희망에라도 매달려야만 하는 늙은이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말하던 노인의 시선이 고갯마루쪽으로 이동했다.

노인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는 고검추의 눈에 한 사내가 고갯마루를 넘어오는 것이 들어왔다.

한 눈에 봐도 그자는 기련산의 주민이 아니다.

몸에는 날렵한 경장을 걸쳤으며 허리춤에는 칼을 차고 있다. 눈빛도 예사롭지 않아서 그자가 무공을 익혔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근처 산채의 산적인가?)

고검추가 긴장하며 볼 때였다.

“...!”

고개를 넘어오려던 사내의 몸이 와락 경직되는 게 고검추의 눈에 들어왔다.

눈을 부릅뜬 그자는 뒷걸음질을 하다가 홱 돌아섰다.

!

그리고는 놀란 노루처럼 튀어 올라 좌측의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무공을 익힌 자인데 뭘 보았기에 저리 놀라 황급히 달아난 것일까?)

고검추가 어리둥절할 때였다.

대접 잘 받았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자꾸나.”

노인이 앉아있던 바위에서 엉덩이를 들었다.

그리고는 한쪽 다리를 끌며 고갯마루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노인은 다리까지도 불편한 듯 했다.

살펴가십시오.”

고검추는 팽가촌 쪽으로 멀어지는 노인에게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지팡이를 조금 들어보이고는 팽가촌 쪽으로 불편해 보이는 걸음을 옮겼다.

(뭔가 사연이 있는 분이다.)

고검추는 멀어지는 노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다리를 끌며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이 어쩐 이유에서인지 신경이 쓰인다.

(저분 말씀대로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있겠지.)

고검추는 돌아서서 고갯마루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언제쯤 돌아오실지 모르겠다.)

고검추의 생각은 다시 흑모철웅을 추격해간 어머니 당혜선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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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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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버리 기재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은 동북(東北)의 제갈량이라 불린다.

병법과 진법으로 강진남과 겨룰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령보의 보주 독안룡 이탁뿐이다.

강진남은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을 바탕으로 요동의 군소문파중 하나였던 대려장을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로 키워냈다.

당금의 무림에서 강진남의 이름을 모르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하지만 당대에 쌓아올린 눈부신 업적과 달리 강진남은 자식 복이 별로 없는 편이다. 본처와 여러 첩들에게서 겨우 두 명의 딸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독안룡 이탁이란 벽에 막혀 요서로 세력을 확장하지 못하는 것과 대를 이어줄 아들을 얻지 못한 것이 강진남을 번민하게 만드는 두 가지 큰 근심이다.

 

***

 

아이 참, 왜 이렇게 시끄러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강미루(姜美樓)는 잠옷 차림인 채로 하품을 하며 침실에서 거실로 나왔다.

히히힝! 푸르르!

몇 개의 담장 너머에 있는 마당에서 수많은 말들이 흥분하여 투레질을 하고 발을 구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아가씨도 깨셨군요.”

창가에 서서 밖을 살피던 유모 최씨가 돌아보며 말했다.

유모가 조금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마당 쪽이 대낮같이 환한 게 보인다.

한밤중에 마구간에서 끌려나온 말들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는 소리와 그 말들에게 마구(馬具)를 채우는 마부들의 호통소리가 요란하다.

날이 새려면 아직 멀었잖아. 한밤중에 왜 저 난리래?”

무군자 강진남의 둘째딸인 강미루는 유모와 함께 창가에 서서 마당 쪽으로 목을 빼들었다.

쇤네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철령보쪽으로 급히 출동할 일이 생겼다네요.”

유모는 이리저리 일렁이는 횃불의 불빛들을 불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철령보의 잡것들이 또 시비를 걸어온 거야?”

강미루는 도끼눈으로 마당 쪽을 흘겨보았다.

강미루는 대려장의 그 누구보다도 철령보를 미워한다. 아버지 강진남이 철령보에 막혀서 중원으로 진출하려는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당직 서는 아이들 말로는 이각(二刻;30) 전쯤에 본장을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해요. 그 손님이 가져온 급보를 접한 장주님이 철령보쪽으로 출동을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유모는 자신이 아는 대로 대려장의 둘째 아가씨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철령보 쪽으로 출동한단 말이지?”

유모의 설명을 들은 강미루의 눈에서 잠기운이 사라지며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

 

백남빈은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을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며 대청을 나섰다. 반지는 워낙 커서 가운데 손가락 마디 하나를 거의 감싼다.

완안진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데 오채금환은 귀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무황성에 가져가는 도중 분실할 수도 있어서 손가락에 낀 것이다.

오채금환 외에도 백남빈은 기름종이로 만든 두툼한 봉투를 상의 속에 품고 있다. 밀봉된 그 봉투에는 신랑성주 토곤이 대려장주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이탁의 보고서가 들어있다.

또 백남빈의 허리춤에는 길이가 한자 반쯤 되는 단검이 끼워져 있다. 손잡이에 푸른 늑대가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는 그 단검 역시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같다.

청랑검(靑狼劍)으로 이름 붙인 그 단검은 강철도 어렵지 않게 자를 정도로 날카롭다.

대청을 나서니 총관인 사해검객 종리완이 행장이 준비 된 말의 고삐를 잡고 서있다.

이틀 전부터 한숨도 못 잤는데 괜잖겠는가?”

다가오는 백남빈을 보며 사해검객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며칠 더 밤을 새도 끄덕없을 나이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남빈은 사해검객 앞에 멈춰서며 포권을 했다.

제가 자리를 비우는 동안 아버지를 잘 부탁드립니다.”

나 종리완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주님을 보필할 테니 이곳 걱정은 말고 다녀오시게.”

사해검객도 마주 포권을 하며 웃었다.

헌데 그런 사해검객의 모습이 낯설고 모호하게 느껴져 백남빈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어쩐지 이분을 다시 보지 못할 것같은 예감이 든다.)

백남빈은 사해검객에게서 말의 고삐를 넘겨받으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속내를 들킬지도 몰라서...

사해검객만이 아니었다.

말고삐를 잡고 둘러보니 주변에 서있는 철령보의 무사들, 심지어 철령보의 건물들까지도 꿈속인 듯 흐릿하게 느껴진다.

(머지않은 장래에 철령보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불안한 감정이 백남빈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생각 같아서는 철령보에 남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신랑성과 대려장이 손을 잡은 사실은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만 한다.

(아무쪼록 소자가 무황성에 다녀올 때까지 존체보중하십시오.)

백남빈은 양부 이탁이 있는 대청을 향해 깊이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불안을 떨쳐버리기 위해 힘차게 말에 올라탔다.

두두두!

곧 백남빈은 사해검객과 철령보 무사들의 배웅을 받으며 철령보를 달려 나갔다.

 

홀로 대청 안에 앉아있는 이탁의 귀에도 백남빈을 태운 말의 발굽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린다.

백남빈과 달리 이탁은 지금의 상황에 대해 그리 근심하지 않고 있었다.

(드디어 남빈이가 우리 부부의 품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이탁은 근심 대신 아쉬운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간단치 않은 어려움을 겪기도 하겠지만 형님의 핏줄이니 결국 극복해낼 테지.)

이탁은 백남빈의 아버지이며 자신에게는 손위 동서가 되는 백무염을 떠올렸다. 백무염은 이탁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며 또 두려워하는 존재다.

백남빈은 여러모로 생부인 백무염의 젊은 시절을 연상케 한다.

백무염을 아는 사람이라면 한눈에 백남빈이 누구의 핏줄인지 알아볼 것이다.

인간들 중에서 이탁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가 백남빈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남빈에게 백무염처럼 근본(根本)을 알아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신명안(神明眼)이라 불리는 그 힘을 지닌 덕분에 어떤 위장이나 눈속임도 백남빈을 미혹시키지 못한다.

백남빈이 불과 열네 살 어린 나이에 등천제에서 우승 할 수 있었던 것도 상대가 구사하는 무공의 실체와 노리는 바를 정확히 간파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탁은 가끔 양아들이 자신의 하나뿐인 눈 속에 감춰진 깊은 어둠을 이미 다 들여다 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남빈이가 무황성까지 가는 길에 치명적인 위험은 없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취해야한다.)

이탁은 백무염과 백남빈 부자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끊고 사해검객을 불렀다.

"가용 가능한 전력을 모두 대려장과의 접경으로 이동시켜라. 요하를 건너는 대려장의 인마는 무조건 주살한다."

이탁의 명령을 받은 사해검객은 곧 수하들을 이끌고 철령보를 빠져나갔다.

바야흐로 철령보와 대려장 사이에 전에 없던 대규모 접전이 벌어지려는 것이다.

 

***

 

요하 건너 대려장에도 어느덧 어둠이 밀려나고 있었다.

철령보에서 나가는 것은 새 한 마리도 놓치지 마라!”

신랑성의 밀사가 본장에 도착한 것을 무황성이 알게 해선 안된다!”

두두두! 히히힝!

흥분에 찬 호통과 긴장어린 고함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를 뚫고 우레처럼 터져 나온다.

활짝 열린 대려장의 정문을 통해 수백기의 기마대가 노도처럼 쏟아져 나가고 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 않은 시간이지만 대려장의 기마대는 거침없이 요하쪽으로 몰려갔다. 요하에는 이미 수백 척의 배를 이어 만든 배다리, 즉 주교(舟橋)가 가설되어 있었다.

 

대려장의 정문에 설치 된 높은 문루(門樓) 위에 서서 검은 물결인 듯 서쪽으로 몰려가는 기마대를 바라보는 두 사람이 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초로의 인물이고 다른 한명은 키가 훤칠하며 차림새가 격식을 갖추지 않아 분방하게 보이는 청년이다.

소성주(少城主)가 직접 밀사로 올 줄은 몰랐네.”

초로의 인물은 대려장을 빠져나가는 기마대를 내려다보며 청년에게 말했다. 그가 바로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이다.

구처기(丘處機), 즉 장춘진인(長春眞人)이 징기스칸께 진언하기를 천하를 말 위에서 얻을 수는 있어도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고 했소이다.”

강진남의 말에 청년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냈다. 훤칠한 체격과 위엄이 느껴지는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말이 많은 청년이다.

하지만 나 에센은 아직 천하를 얻지 못했으니 말에서 내릴 수 없는 처지! 가야만 한다면 세상 끝까지라도 직접 달려갈 각오가 되어 있소이다.”

청년은 제 흥에 겨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청년이 바로 신랑성의 소성주 에센이다.

오이라트의 족장이기도 한 신랑성주 토곤의 장남인 그가 직접 아비의 밀서를 들고 대려장을 찾아온 것이다.

에센은 토곤이 보낸 밀사인 동시에 볼모인 셈이다.

(영걸 소리를 듣는 제 아비보다도 몇 배 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놈이다.)

강진남은 쓴웃음을 지었다.

에센이 대려장에 들어온 것은 불과 한 시진 남짓 전이었지만 강진남이 지난 한 달 동안 들은 것보다 더 많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많은 것은 에센의 성격이 수다스러워서라기보다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이다.

혈기가 넘치는데다가 몽고초원을 지배하는 오이라트의 후계자라는 넘치는 자신감이 에센의 혀를 자제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일단 시작하면 듣는 사람은 아랑곳 하지 않고 직성이 풀릴 때까지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최소한 뭔가를 숨기고 음모를 꾸미는 성격이 아니라는 점은 높이 사줄만 하다.)

강진남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에센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잇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다얀을 대동한 부성주는 어제 오후에 귀장에 도착해야만 했소. 부성주 정도 되는 인물이 연락조차 보내오지 못한다는 것은 철령보에 의해 죽거나 잡혔다는 뜻이오. 사실 부성주는 여진족 출신이라 본성 내에 적이 많소. 그 중 어떤 버러지가 부성주의 종적을 극품당과 철령보에 누설했을 것이오.”

다 알고 있고 짐작하는 내용이지만 강진남은 끈기를 갖고 에센의 수다를 들어주었다.

강진남의 인내심이 남달라서이기도 하지만 에센이 쏟아내는 말 중에는 유용한 정보도 다수 섞여 있기 때문이다.

부성주에게는 완안준(完顔俊), 완안극(完顔極)이라는 두 명의 동생이 있소. 본성의 문상(文相)과 무상(武相)을 맡고 있는 그 둘과 부성주를 합쳐서 완안삼절(完顔三絶)이라 부르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철풍사(鐵風社)라는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소. 철풍사는 극품당에 패해 망명한 여진족 무사들로 이루어진 문파이며... !”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에센이 몸을 조금 문루 밖으로 내밀며 멀리를 내다보았다.

밝아오는 여명 속에 대려장을 빠져나간 기마의 선발대는 이미 십여 리 밖에 있는 요하를 건너고 있다.

거리가 거리다 보니 기마대는 마치 개미떼처럼 작고 까맣게 보인다.

헌데 배다리를 건넌 개미떼같은 기마대는 철령보가 자리한 서쪽으로 가지 않고 요하를 따라 남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장주의 수하들이 남쪽으로 직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에센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남쪽으로 길게 이어지는 기마대의 행렬을 보며 말했다.

어째서일 것 같은가?”

강진남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 에센을 시험하시는구려.”

에센은 히죽 웃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는 강진남에게 다시 말의 홍수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가는 최단거리는 서남진(西南進)하는 것이오. 하지만 우리 신랑성에서도 만일 대비하여 그쪽으로 요격할 준비를 하고 있소. 이를 모를 리 없는 독안룡 이탁은 전령(傳令)을 남쪽으로 보내 진황도(秦皇島)에서 배편으로 천진(天津)까지 가게 했을 것이오. 천진에서 북경 근처 무황성까지는 지척지간이니... 이에 장주께서도 철령보쪽이 아니라 진황도 방면으로 추격하라 명령하셨을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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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二 章

 

                落拓文士

 

 

천강마존을 향해 다가서던 삼제(三帝)는 문득 부르르 신형을 떨며 멈추어 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천강마존이 돌연 번쩍 고개를 든 것이었다.

[...]

가공할 한망이 치뻗치는 그의 두눈을 대하자 상제는 섬칫한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증스러운 놈들...!]

천강마존은 부드득 이를 갈아부치며 번쩍 천강검(天罡劍)을 치켜들었다.

삼제 역시 긴장된 안색으로 각기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구유명제는 새하얀 도신(刀身)의 보도(寶刀)를 불끈 움켜쥐고 있었다.

___빙혼마도(氷魂魔刀), 슬쩍 살갗을 스치기만 해도 심맥을 얼어붙게 만드는 가공할 한빙살기(寒氷殺氣)를 지닌 보도(寶刀),

유성검제___ 그의 무기는 유성검문(流星劍門)의 지보인 은하유성검(銀河流星劍)이었다.

만천독제는 백독(白毒)의 정화를 흡수한 독혈낭아봉(毒血狼牙奉)을 움켜쥐었다.

___ ___ ___ ___ !

일진 설풍(雪風)이 팽팽히 고조된 장내의 기운,

순간,

[유명천세(幽冥千世)___!]

[유성비류(流星飛流)___!]

[화독만천(火毒滿天)___!]

삼제는 동시에 대갈을 터뜨리며 신형을 움직였다.

... 츠츠츠츠츳___!

파파파팟___! ___ ___!

낙혼애를 단번에 허물어 뜨릴 듯한 엄청난 파공음과 도기(刀氣)가 팔방(八方)을 난무했다.

천강마존은 불근 이를 악물었다.

[천강참마(天罡斬魔)___!]

아아___!

천하(天下)에서 가장 강맹한 무적(無敵)의 검법 천강검식(天罡劍式)!

가공할 검기(劍氣)의 소용돌이와 함께 일순 섬뜻한 청광(靑光)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차차차___ ___!

___ ___ ___!

들썩 장내를 뒤흔드는 굉음이 터지며,

 

동시에,

[흐윽...!]

[...!]

잇따라 다급한 신음성이 터졌다.

잠시 후, 사방을 몰아쳤던 난석이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확연히 드러났다.

구유명제, 유성검제, 만천독제, 즉 삼제(三帝)는 모두 가슴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약간만 더 깊었더라면 치명적인 중상을 면치못했을 것이다.

하나 천강마존, 그 역시 온전치는 못했다.

조금 전에 비해 안색은 더욱 시커멓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한 사발이나 되는 흑혈(黑血)을 울컥 토해냈다.

이때, 구유명제가 재빨리 지혈을 하고 이제(二帝)를 둘러보았다.

[힘을 냅시다!]

그는 다시 불끈 빙혼마도를 치켜들며 벼락같이 신형을 움직였다.

쐐애애___ ___!

유성검제와 만천독제도 그와 합세하여 무섭게 재차 공격을 가했다.

촤르르...!

츠츠츠츠___!

경천동지(經天動地)!

그들 삼인의 합공(合攻)은 실로 천지를 뒤엎고도 남을 위력이 있었다.

허나 천강마존, 그는 감히 대항할 수 없는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오너라! 천강뢰격(天罡雷擊)___!]

그는 전신의 심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듯한 통증을 억누르며 천강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___ ___ !

고막을 산산이 파열시키는 엄청난 폭음이 터져올랐다.

[허억...!]

[으음...!]

[... ...!]

그 폭음 속에서 급박한 신음성이 연이어 터졌다.

그와 동시에, 하나의 인영이 튕겨지듯 장내에서 빠져나왔다.

인영, 그는 바로 만천독제였다.

헌데, 놀랍게도 그의 오른쪽 다리가 싹둑 끊어져 나가고 없는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와 유성검제 또한 적지않은 타격을 입고 신형을 비틀거렸다.

허나 그들보다 심한 치명적 상처를 입은 인물은 역시 천강마존이었다.

그의 상세는 엄중하기 그지없이 안색은 거의 사색(死色)에 가가왔다.

번갯불 같은 신광마저 흐릿하게 꺼져갔다.

허나 그는 휘청거리는 신형을 쓸어안고 삼제를 노려보고 있었다.

구유명제와 유성검제는 섬뜩한 공포와 함께 전율마져 느꼈다.

(... 지독한 늙은이.. 저 지경이 되어도 버티다니..!)

그들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곧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유성은한(流星銀寒)!]

유성검제의 은하유성검이 전광처럼 번뜩 허공을 갈랐다.

[유명구궁(幽冥求宮)!]

거의 동시에 구유명제의 빙혼마도가 천강마존의 복부를 노리며 한망을 발출했다.

허나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左手)로부터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음을 발견한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천강마존은 골수까지 저미는 죽음의 통증을 느꼈다.

허나 그는 그 고통을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전력(全力)을 쏟아 검()을 휘둘렀다.

천강파극식(天罡破極式)___.

츠츠츠츠...!

헌데,

[으윽...!]

그는 검세를 펼치다 말고 다급한 신음성을 토하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공력이 끊어짐을 느끼고 그는 당황하고 만 것이었다.

그 순간, 파팟___!

구유명제의 빙혼마도는 간신히 피해냈으나 유성검제의 일검이 그의 허리를 그었다.

[!]

천강마존은 한차례 신형을 비틀했다.

바로 이때, 구유명제의 좌수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어 그 불꽃은 화전(火箭)처럼 천강마존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천강마존은 힘겹게 몸을 비틀어 불길을 피했다.

허나 그는 완전히 몸을 피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크윽...!]

그는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다시 아래로 떨어졌다.

___!

그가 떨어진 곳은 바로 낙혼애의 끝부분, 실로 위험천만의 위기였다.

천강마존은 그러나 피에 젖은 신형을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그의 충혈된 두눈은 구유명제를 향해 부릅떠져 있었다.

[... 네놈이 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를 연성하다니...!]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___마화융천강기(魔火融天罡氣).

이는 희대의 마인(魔人) 마화자(魔火子)가 창안한 가공할 마공(魔功)이었다.

마화융천강기를 펼치면 전율스럽게도 푸른 인화가 피어오른다.

사람이고 물건이고 할 것 없이 이 인화에 적중되면 그 부분은 완전히 삭아버리는 전율의 위력이 있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정면으로 마화융천강기를 적중당하고도 건재한 것이 아닌가?

구유명제는 경악의 눈길로 천강마존을 응시했다.

허나, 곧 그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빙혼마도를 치켜들었다.

[흐흐흐흣... 이제 죽어랏!]

___ 츠츠츠츳...!

삼엄한 도기가 그물처럼 천강마존을 뒤덮을 듯 몰아쳤다.

천강마존은 허나 속수무책.

그의 신형은 일순간 굳어졌다.

허나, 빙혼마도가 막 천강마존의 몸을 양단하려는 순간, 축 늘어졌던 천강검이 돌연 영사같이 튕겨져 올랐다.

[...!]

구유명제는 예상밖으로 급변한 천강마존의 태도에서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허나 그는 이를 악물었다.

빙혼마도로 천강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그의 좌수가 푸른 인화에 휩싸여 천강마존의 가슴을 꿰뚫었다.

차차창___! ___!

[크아악___!]

천강마존은 정통으로 가슴에 마화융천강기를 맞고 허공으로 붕 떠오르며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 그의 몸아래는 바로 천야만야한 죽음의 절곡 낙혼애가 아닌가?

순식간에 그의 신형은 낙혼애 아래로 낙엽처럼 떨어져 내렸다.

[!]

구유명제는 이 예기치못한 사태에 당황성을 터뜨렸다.

허나 천강마존의 모습은 이미 까마득한 만길 단애 아래로 사라져 버린 되었으니...

[으음...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가 분명 그의 몸에 있었을 텐데...]

그는 원통함에 발을 굴렀다.

이때,

[__ __ __ ___!]

돌연 폐부를 뒤흔드는 긴 장소성이 구련한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건데 공력이 극상에 이른 내가 최절정고수임이 분명했다.

구유명제와 이제는 안색이 홱 변했다.

[... 누구란 말인가?]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며 의아함을 금치 못했다.

이때, 낙혼애 아래에 한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인영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절세의 경공으로 낙혼애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한 번에 근 백여 장 씩의 엄청난 도약이었다.

___ !

순식간에 인영은 단에 위로 날아내렸다.

순간, 삼제는 일제히 두눈을 크게 떴다.

[낙척문사(落拓文士)!]

구유명제가 경악의 음성으로 짧게 부르짖었다.

삼제의 앞에 나타난 인영___.

그는 서생차림을 한 청수한 중년인이었다.

헌데 그는 일신에 헤질대로 헤져 누덕누덕 기운 장삼을 걸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___고죽취옹(枯竹醉翁).

___낙척문사(落拓文士).

중년인, 그가 바로 쌍기(雙奇) 중 일인(一人)인 낙척문사였던 것이다.

그는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삼, 사십대의 중년인이었으나 실상은 백 삼십(百三十)이 넘은 노인이었다.

이때, 낙척문사는 장내를 둘러보며 부르르 신형을 경련했다.

[으으... 이럴 수가...!]

그는 곧 사태를 짐작하고 분노가 끓는 눈빛으로 삼제를 노려보았다.

그 강렬한 안광에 삼제는 흠칫 했다.

(저 늙은이는 무공을 익혔다고 알려지지 않았다. 헌데... 이제보니 천강마존에 못지않은 무공을 지닌 고수다...!)

구유명제는 일순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낙척문사.

그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무섭게 삼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허나 잠시 후 그는 사납던 안광을 거두며 문득 탄식했다.

[인간의 욕심이란 한이 없는 법. 그대들의 과욕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절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삼제를 향해 조용하나마 깊은 위엄이 깃든 음성으로 말하며 빙글 몸을 돌렸다.

[구양형님의 시신이라도 찾아야겠군.]

몸을 돌리며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이어, ___ !

그는 주저없이 까마득한 낙혼애 아래로 몸을 던지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급격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그의 신형이 점차 허공을 빙빙 돌며 여유있게 날아내려갔다.

낙혼애 우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삼제는 입을 딱 벌렸다.

그들은 문득 자신의 실력이 너무 초라하다고 느꼈다.

낙척문사의 무공은 경악의 한도를 넘어 초쾌한 신()의 경지를 이루고 있었으니...

문득 구유명제가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끝난일. , 돌아갑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휙 신형을 날렸다.

이어, 유성검제가 그를 뒤따랐고 만천독제와 백독랑아봉에 몸을 의지한 채 낙혼애를 내려갔다.

 

X X X

 

철썩... 우르릉___!

절해고도(絶海孤島)!

노호(怒號)같은 파도가 섬을 통째로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고 있었다.

().

그것은 전체가 하나의 암석으로 형성된 기이한 섬이었다.

콰르릉... 우르르... ___ ___!

섬둘레는 겨우 십 리 남짓___

허나 그 주위로는 수십 길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천험의 위세를 이루고 있었다.

이때, 돌연 까마득히 먼 수평선 위에 하나의 흑점이 번득 나타났다.

그것은 놀랍게도 한 명의 사람이었다.

인영은 바다 위를 마치 육지에서 걷는 것과 같이 미끄러지듯 유유히 돌섬으로 다가왔다.

그에 따라 점차 뚜렷이 드러나는 인영, 그는 허름한 장삼을 걸친 중년문사였다.

낙척문사, 바로 그가 아닌가?

헌데, 그는 기이하게도 왼손에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감싸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낙척문사는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는 파도를 유유하게 타며 미끄러지듯 전진했다.

이윽고 그는 파도를 넘고 수면을 가로질러 높다란 암초 뒤로 돌아갔다.

동굴, 그곳에는 놀랍게도 약 이 장 정도의 높이로 우뚝 서 있는 하나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은 반정도가 바닷물에 잠긴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낙척문사는 망설임없이 동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동굴의 통로를 따라 얼마쯤 나아가자 수면이 끝나며 바닥이 드러났다.

그곳으로부터 다시 약 십여 장 전진했을까?

낙척문사는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섰다.

하나의 석문이 앞을 가로막은 것이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들어 석문을 밀었다.

끼이익___!

문이 열림과 동시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하나의 석실이었다.

수만 권의 장서가 빽빽이 들어차 흡사 서실(書室)을 연상케하는 석실___.

석실의 한쪽에는 석상(石床)이 놓여 있었다.

헌데, 지금 그 석상 위에는 한 명의 청삼노인이 묵묵히 벽을 보고 앉아 있었다.

낙척문사는 석실을 들어서며 청삼노인을 향해 말했다.

[형님, 소제 돌아왔습니다.]

그말에 돌아앉아 있던 청삼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헌데, ! 이럴수가...!

청삼노인, 그는 바로 낙혼애 아래로 떨어진 천강마존이 아닌가?

그가 어찌 살아 이곳 석실에 앉아있단 말인가?

 

천강마존___.

그는 낙척문사와 오래 전부터 호형호제(呼兄呼弟)하던 사이였다.

낙척문사는 천강마존이 무형기독에 중독되자 해약을 구하기 위해 그와 헤어졌다.

허나 그가 해약을 구해 낙혼애로 달려갔을 때에는 이미 천강마존은 낙혼애로 떨어진 후였다.

그는 낙담 끝에 낙혼애로 뛰어내렸다.

천강마존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헌데, 실로 천행이라 아니할 수 없었다.

천강마존은 수백 년 묵은 나무등걸에 걸려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허나 그는 엄청난 내상을 입은데다가 독기(毒氣)가 골수까지 스며들어 결국 공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천강마존은 들어서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네갈노제, 어서오게.]

허나 문득 그는 낙척문사의 안색을 살피며 나직이 탄식했다.

[, 자네 안색이 좋지 않군, 중원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았다.

[형님. 이것을 보십시오.]

그는 강보에 싸인 어린아이를 천강마존의 앞으로 내밀었다.

[웬 어린아이인가?]

그제서야 그것을 발견한 듯 천강마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나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이 홱 급변했다.

일순 그의 흐릿하던 두눈에는 번갯불같은 신광이 번쩍였다.

[.. 이럴 수가...! 천년(千年) 내에 나타난 적이 없는 천양신맥(天養神脈)을 지니고 있다니...?]

그의 두눈은 엄청난 경악으로 흡떠졌다.

그는 벅찬 감정을 다스리며 강보 속 아이의 골격을 살폈다.

헌데,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어린아니는 앙징스럽게도 한 손에 옥패를 꼭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 마리 황룡(黃龍)이 승천하고 있는 조각이 정교하게 새겨진 옥패였다.

[... 이것은...?]

천강마존의 표정이 다시 한 차례 크게 변했다.

낙척문사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기용천(奇龍天)의 신물(信物)입니다.]

천강마존은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급히 물었다.

[황룡보에 무슨 변괴라도 있었는가?]

낙척문사는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황룡보가 의문의 괴멸을 당했습니다.]

천강마존의 안색이 일시지간 창백하게 굳었다.

[자세히 얘기해보게.]

그는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닫았다.

 

[... 으음...]

끊일 듯 미약한 여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 웬 여인이...?]

낙척문사는 검미를 찌푸리며 우뚝 걸음을 멈추어섰다.

이곳은 돈탕 근처의 험지.

싯누런 황토의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다.

낙척문사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명의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채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다가갔다.

여인은 삼십 정도의 소부(小婦)로서 눈이 번쩍 뜨일만한 미인이었다.

허나 지금 전신에 수많은 상처를 입어 백의(白衣)가 혈의(血衣)로 변한 처참한 모습이었다.

낙척문사는 이미 그녀의 회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흔들며 말했다.

[부인, 정신이 드십니까?]

여인은 문득 힘겹게 눈을 뜨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제 아이를... 부탁... 황룡보는 무너지고... 대제께선... 함정에... 적들은... ... ()...]

여인은 여기까지 말을 잇고는 그만 축 늘어졌다.

! 그녀의 가슴에는 강보에 싸인 한 명의 사내아이가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황룡보가...!]

낙척문사는 급히 여인과 아이를 안고 몸을 날렸다.

그곳에서 황룡보까지의 거리는 불과 삼십여 리___

그는 순식간에 황룡보에 이르렀다.

허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완전히 초토화된 황룡보의 잔해 뿐이었다.

낙척문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황룡보 식솔들을 모두 안장해 주고 소부의 시신도 따로 안장시켰다.

허나 기이하게도 황룡대제의 시신은 어느곳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낙척문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은 침중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 황룡대제! 그는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기재였건만...]

문득 그는 낙척문사에게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받아들었다.

[그렇습니다. 황룡대제는 세 명의 처가 있었습니다만 오년 전에 혼인한 청해설랑(靑海雪郞)에게서만 얼마전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 여인이 청해설랑이었단 말이군.]

[.]

한동안 두 사람은 침묵을 지켰다.

허나 문득 천강마존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낮게 웃었다.

[허허... 이 모든 것이 하늘의 안배인지 모르겠군! 비록 복수할 마음은 없으나 하늘이 이 아이를 내게 보냈셨음은 이 아이로 하여금 중원에 불어닥친 혈겁을 막게 하시려함인가?]

그말에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혈겁은 형님의 무학이 아니면 막을 수 없습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이내 어두운 신색을 지었다.

[허나 오절(五絶)이 이 아이가 장성할 동안 가만히 있겠는가? 이 아이가 장성했을시는 이미 전 무림이 오절(五絶)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지 않은가!]

오절(五絶)___!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대체 어떤 인물들이기에 천강마존이 염려한단 말인가?

허나 낙척문사는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마십시오. 그점에 대해선 소제가 이미 손을 써놓았습니다.]

[손을 써 놓다니...?]

[강호에서는 형님이 건재한 것으로 알려지도록 일을 꾸몄습니다. 오절이 비록 암중모색은 할수 있어도 표면으로 나서 활동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자네가 한 일이라면 틀림없겠지.]

천강마존은 침중히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그는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 보며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허허... 보면 볼수록 훌륭한 골격이군. 이 녀석은 아마 노부를 능가하는 불세제일인(不世第一人)이 될 수 있을 것이네.]

낙척문사도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과 천하제일기재(天下第一奇才)!

이들의 만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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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 죽은 강시(畺屍) ! 이제야 따라왔구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눈이 둥그레졌던 마면혈도는 이내 기뻐하며 소리쳤다.

휘익!

껄껄 웃는 마면혈도 앞으로 사각 모자를 쓴 초로의 인물이 임청우의 멱살을 오른손으로 틀어쥔 채 훌쩍 내려섰다.

결코 가볍지 않을 임청우의 몸을 헝겊 쪼가리인 듯 흔들면서 내려선 인물은 왼손에 쥔 쇠로 만든 접는 부채, 철선(鐵扇)을 성마르게 부치고 있었다.

새로 나타난 자의 몰골도 마면혈도 못지않게 기괴하다.

안색은 시체처럼 하얗고 창백한 반면 입술은 피를 마신 듯 새빨갛다.

또 열흘은 굶은 듯 퀭한 두 눈은 시퍼런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낄낄낄... 얼어 죽은 송장 놈아! 이 형님보다 한발 늦었구나.”

마면혈도는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말이 울부짖는 듯한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그가 얼어 죽은 송장이라고 부르는 괴인의 별호는 철선동시(鐵扇凍屍).

철선동시는 성격이 음흉하고 잔인하기로 무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자였다.

우리를 본 놈을 살려서 보내려 하다니... 간이 부었구나 마면혈도!”

!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한쪽에 던져버리며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을 내뱉었다.

그자가 무슨 수법을 사용했는지 바닥에 던져진 임청우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낄낄낄... 그놈은 무림인이 아니야. 절벽에서 떨어지도록 내버려뒀으면 살아남지 못했어.”

마면혈도가 다친 말이 우는 것같은 걸걸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 악명 높은 마면혈도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소인배일 줄은 미처 몰랐군.”

철선동시는 등을 보이는 자세로 엎어져 있는 임청우를 힐끗 보며 코웃음을 쳤다.

?”

마면혈도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무슨 맹세를 어겼단 말이냐? 나 마면혈도가 살인, 방화, 강간을 가리지 않지만 한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모르느냐?”

그래 그래, 이제 생각해보니 자네는 맹세를 어긴 게 아니라 머리가 나빴을 뿐이로군.”

철선동시는 냉랭한 얼굴로 이죽거렸다.

이 얼어 죽은 송장 놈이...”

!

대노한 마면혈도가 등에 짊어지고 있던 칼을 뽑았다. 그 칼은 손잡이만 핏빛이 아니라 칼날도 피를 칠한 듯이 붉었다.

토막 쳐 버리고 말겠다아아아!”

마면혈도는 날이 넓은 핏빛 칼을 미친 듯이 휘두르며 철선동시에게 달려들었다.

번쩍! 번쩍!

그자의 칼이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血光)이 줄기줄기 하늘로 뻗어 올랐다.

! 서걱!

핏빛의 칼이 내뻗는 그 혈광에 스친 바위들이 마치 두부처럼 소리없이 베어졌다.

스슥!

그러나 철선동시는 허깨비처럼 이리저리 움직여서 마면혈도의 사나운 칼질을 피해버렸다.

날 죽이려 드는 것만 봐도 자네 머리가 얼마나 나쁜지 익히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머리로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가 농산 표운봉이라는 사실을 기억한 것만도 다행이지.”

빗발치듯 날아드는 핏빛 칼을 흘려보내면서 철선동시는 까마귀가 우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마면혈도는 흠칫하며 칼질을 멈추었다.

네놈을 죽이려는 게 뭐 어떻단 말이냐? 나는 네놈만 죽어 없어지면 속이 후련하겠다.”

,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유()가 놈을 완전히 따돌렸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철선동시의 그 한마디에 마면혈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제서야 자신들을 뒤쫓고 있는 인물에 대해 생각이 미친 것이다.

마면혈도의 핏빛 칼, 즉 혈도(血刀)는 천하에서 보기 드문 보도(寶刀).

휘둘러질 때마다 혈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그 혈도를 아무 생각없이 마구 휘둘렀으니, 강적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알려준 셈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혀서 붉으락푸르락 하는 마면혈도의 얼굴을 보면서 철선동시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안전한 곳에 숨을 때까지는 만나는 모든 놈을 죽여 버리자고 자네가 먼저 말했었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죽여서 화골산(化骨酸)으로 녹여 없앤 놈들만 하더라도 무려 이백 칠십 아홉일세. 한데 자네는 저 이백 팔십 번째 놈을 죽이지 않았어.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한 거지.”

철선동시가 죽은 듯이 쓰러져 있는 임청우를 가리켰다.

그만해! 지금이라도 저놈을 죽여 버리면 될 것 아닌가?”

마면혈도가 버럭 소리쳤다.

그래야지.”

철선동시가 이빨을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내가 저놈을 구한 것도 다 자네를 위해서일세. 자네 손으로 저놈을 죽여야만 자네가 이부지자(二父之子) 개새끼가 아니게 될 테니...”

마면혈도는 성미가 급하고 단순한 인물이다.

철선동시의 말을 듣자 자기 손으로 임청우를 죽이지 않으면 정말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개새끼가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마면혈도는 혈도를 어깨위로 반쯤 비스듬히 돌려서 임청우를 향해 휘두르려 했다.

번쩍!

핏빛 칼에서 혈광이 다시 한 번 길게 일어났다.

기절한 임청우는 영문도 모르고 몸뚱이가 무 토막처럼 잘라질 판국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우워어어어어!”

하늘을 뒤흔드는 용의 울음소리인 듯, 초목산천을 떨게 만드는 대호(大虎)의 포효인 듯한 웅혼한 고함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검주(劒主)!”

유소기(劉蘇起)!”

그 고함소리를 듣는 순간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합창하듯 외쳤다.

그런 그자들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휘익! !

다음순간 철선동시가 먼저 몸을 날렸고 뒤이어 마면혈도도 혈도를 회수하며 몸을 날렸다.

제기랄! 대가리를 깨서 골수를 파먹어도 시원찮을 유가놈 같으니...”

마면혈도는 표운봉 아래로 달려가는 철선동시의 뒤를 따라가며 욕을 퍼부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곧 표운봉에서 사라졌다.

우워어어어어!”

그와 함께 두 마두를 쫓아버린 고함소리는 바위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방향을 바꿔 멀어져갔다.

고함소리의 주인은 두 마두의 종적을 발견하고 추격해갔을 것이다.

이제 표운봉 정상에는 죽은 듯 미동도 않는 임청우만이 뜨거운 태양아래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해가 서쪽 산봉우리 위로 기울어지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타는 듯한 그 노을 속에서 독수리 몇 마리가 표운봉 정상에 내려앉았다.

독수리들의 왕에는 못 미치지만 날개를 활짝 편 길이가 사람 키 정도는 되는 커다란 독수리들이다.

오래전부터 허공을 맴돌고 있던 그놈들은 주린 배를 채워줄 희생물이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는 게 확인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렸던 것이다.

퍼덕거리는 날개 짓이 돌먼지를 날리고, 날카로운 부리들은 임청우의 등을 쪼았다.

! 퍼퍽!

세차게 찍어대는 독수리들의 부리에 임청우의 등에서 살이 뜯기며 피가 번져 나왔다.

짊어지고 있던 망태와 입고 있던 삼베옷도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누더기가 되어갔다.

!

또 한 번 등을 깊이 쪼이는 순간 임청우의 몸이 약간 꿈틀거렸다.

!

뒤이어 다른 독수리의 부리가 임청우의 어깨 부위도 찍었다.

!”

순간 임청우가 벌떡 일어서면서 두 팔을 휘둘렀다.

끼약! 카아악!

만찬을 즐기려던 독수리들이 혼비백산하여 높이 날아올라갔다.

철선동시는 임청우를 바닥에 던지면서 내공으로 혈도를 막아버렸었다.

그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던 임청우의 혈도가 독수리들의 부리에 쪼이면서 풀어진 것이다.

망할 놈의 날짐승들 같으니...!”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 거리는 임청우의 등과 어깨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털썩!

임청우는 누더기가 된 망태를 벗어 던졌다.

쫘악!

이어 피로 물든 웃옷도 찢듯이 벗었다.

등에 생긴 상처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엉덩이를 지나 뒤쪽 허벅지까지 적시고 있었다.

임청우는 벗은 옷을 수건처럼 둘둘 말아서 때를 벗기듯 등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거친 삼베 옷감이 상처를 쓸고 지날 때마다 이가 딱딱 부딪히는 끔찍한 통증이 엄습한다.

빌어먹을!”

등에서 대충 피를 닦아낸 임청우는 피에 젖은 옷을 확 집어던졌다. 옷은 피에 절고 누더기가 되어서 입을 수도 없게 되었다.

옷을 집어던진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가 사라진 쪽을 향해 큰 절을 두 번했다.

절을 한 후 다시 일어난 임청우는 허공에 대고 삿대질을 하며 큰소리로 외쳤다.

말대가리야! 얼어 죽은 송장같은 놈아! 네놈들이 살아있어도 내게는 죽은 놈들로 보인다. 이제 내가 두 번을 절했으니 네놈들이 죽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오. 네놈들이 죽었다면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임청우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있었다.

하마터면 산 채로 독수리들의 먹이가 될 뻔했기 때문이다.

한바탕 분풀이를 한 임청우는 땅바닥에 패대기친 망태에서 약초를 한 움큼 꺼냈다.

약초들을 입안에 쑤셔 넣은 임청우는 우걱우걱 씹어 다진 후 근처 바위에 턱 붙였다.

그리고는 등의 상처를 바위에 붙인 약초에 대고 비벼대었다.

그러자 상처에서 흘러내리던 피가 신통하게 멎었다.

어머니를 위해 어렸을 때부터 산을 타며 채약을 해온 임청우인지라 어떤 약초가 어떤 증상에 잘 듣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대낮에 귀신같은 것들을 만나서 십년감수하질 않나... 농산을 떠나긴 떠나야 할 모양이다. 어머니의 병만 아니라면 진작 떠났을 농산이지만...”

상처에서 피가 멎으며 임청우의 화도 조금은 풀렸다.

옷은 포기해야겠구나.‘

집어던졌던 웃옷을 살펴본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웃옷은 원래 낡았었는데 독수리들의 부리와 발톱에 헤집어져서 누더기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피에 절고 살점까지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도저히 입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웃옷을 다시 던져버린 임청우는 망태를 챙겼다.

아직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망태에 활과 화살을 우겨넣은 임청우는 절벽 끝으로 갔다.

절벽 끝에 서서 내려다보니 절벽 중간에 구름이 걸려있어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북두홀을 찾는 건 포기해야하나?)

임청우는 갈등했다.

그는 멱살을 틀어쥔 마면혈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북두홀로 그자의 팔을 찍었었다.

하지만 북두홀은 강철같은 마면혈도의 팔뚝에 전혀 상처를 못 내고 임청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졌었다.

표운봉의 남쪽 절벽은 가파를 뿐 아니라 얼마나 깊은지도 알 수가 없다.

산을 타는데 능숙한 임청우라도 쉽사리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다.

(다른 물건이라면 모르지만 북두홀을 포기할 수는 없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북두칠성이 새겨진 북두홀은 임청우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낼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북두홀은 임청우가 철이 들었을 때부터 보아온 물건이다.

임단심은 가끔씩 북두홀을 꺼내보며 누군지 모를 사내에게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저주를 퍼붓는 대상이 자신의 아버지이며 북두홀이 아버지 것이거나 최소한 아버지와 관련이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임단심이 임청우를 데리고 농산으로 들어온 것은 육 년 전이다.

그 얼마 후 임단심은 북두홀을 깊은 골짜기에 던져버렸다.

임단심에게 북두홀은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물건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북두홀은 너무도 단단하여 훼손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사람 손이 닿지 않을 깊은 계곡에 던져버린 것이다.

비록 어린 나이였으나 임청우는 북두홀을 잃어버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알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였기 때문이다.

이에 임청우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곡으로 내려가 북두홀을 회수했었다.

임단심은 임청우가 북두홀을 찾아온 걸 알고도 별 말이 없었다.

그후로 임청우는 북두홀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었다.

 

(열두 살 때도 천길 벼랑을 타고 내려가 북두홀을 찾아왔었다.)

임청우는 망태를 등에 짊어지며 심호흡을 했다.

망태의 거친 표면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쓸어 오만상을 쓰게 만든다.

(어렸을 때 했던 일을 지금 못한다는 건 말이 안되지.)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절벽의 틈새를 찾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 대가리 때문에 생고생을 하게 되었구나.)

깎아지른 절벽을 신중하게 타고 내려가며 새삼 마면혈도가 미워지는 임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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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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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필살일초(必殺一招)

 

 

따라오느라 고생했다. 여기서 북쪽으로 직진하면 장강(長江)과 만나게 된다.”

강조가 손을 들어 멀리 북쪽을 가리켰다.

(이제 보니 안탕산을 종단해서 북쪽으로 왔구나.)

강유는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겹겹이 늘어선 북쪽의 산봉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험한 길로 온 이유는 혹시나 끼어들지 모를 마()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

강조는 근처에 서있는 나무의 가지를 하나 꺾었다. 길이 네 자 정도로 곁가지와 나뭇잎이 조금 붙어있지만 반듯한 나뭇가지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서 네게 한 가지 구명절초(求命絶招)를 가르쳐주기 위해서다.”

강조는 나뭇가지에서 곁가지들과 잎사귀를 떼어내며 말했다.

붕정검법에 소자가 익히지 않은 초식이 있는지요?”

강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부터 가르쳐주려는 것은 붕정검법이 아니다.”

강조는 곁가지와 잎사귀를 떼어내어 나뭇가지를 고르게 만들며 고개를 저었다.

아비가 젊었을 때 어떤 노인을 구해준 대가로 전수받은 일초의 검법인데 그 위력이 지나치게 잔인하고 치명적인 탓에 사용한 적은 없다.”

강조는 낭창거리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보며 말했다.

대체 얼마나 잔인하고 치명적인 검법이기에...”

어느 정도인지는 네 눈으로 직접 봐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강조는 한쪽에 서있는 사람 키만한 바위 앞으로 걸어갔다.

이 검법의 이름은 아비도 모른다. 그래서 임의로 필살일초(必殺一招)라고 명명했다.”

강조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겨누며 말했다.

필살일초... 이름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집니다.”

강유는 긴장하며 강조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초식이 아니라 내공의 운용법이다.”

지잉!

강조가 바위를 겨눈 나뭇가지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강유는 나뭇가지에 측량하기 어려운 강력한 힘이 운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반적인 내공의 운용에 변화를 주는 비결인데...”

투투툭! 드드드!

진동이 점점 강해지면서 나뭇가지는 나사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 발산되는 내공의 위력이 치명적으로 변한다.”

강조는 뒤틀리며 진동하는 나뭇가지로 바위를 찔렀다.

퍼억!

그러자 나뭇가지 끝이 두부를 찌른 것처럼 바위 속으로 푹 들어갔다.

! 퍼퍽!

뒤이어 바위에서 폭발이 일어나며 나뭇가지도 터져버렸다.

!”

강유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치뜨며 탄성을 토해냈다.

나뭇가지에 찔린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이 앞뒤로 뻥 뚫려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나뭇가지가 뒤틀림을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리긴 했지만 단단한 바위에 사발만한 구멍을 냈다.)

강유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였다.

이것이 필살일초의 위력이다.”

!

강조는 손에 남아있던 한 자 가량의 나뭇가지를 바닥에 던지며 말했다.

일단 펼쳐지면 반드시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는 무공이니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사용해선 안된다.”

명심하겠습니다.”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고개를 숙였다.

필살일초의 연공비결을 알려줄 테니 집중해서 듣도록 해라.”

이어 강조는 한 가지 내공심법의 비결을 읊어주기 시작했다.

(... 가공하다!)

그 비결을 들으면서 강유는 등줄기로 오싹한 한기가 훑고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말 그대로 상궤를 뛰어넘는 무공이다.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릴 때부터 뒤틀고 꼬아버리는 운공비결인데... 위력은 뛰어날지 모르지만 심맥에 심각한 무리를 주게 된다.)

강유는 강조가 가르쳐주는 필살일초의 무시무시한 위력과 함께 치명적인 결함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상대를 죽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무공이다. 정말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니면 절대로 써선 안되겠구나.)

적을 죽이기 위해 내 몸을 망치는 무공!

그것이 바로 필살일초였다.

필살일초의 결함을 알아차린 강유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도 집중해서 강조가 읊어주는 운공비결을 머릿속에 새겼다.

 

* * *

 

위가진(衛家津)은 그리 크지 않은 강가의 마을이다.

비록 마을은 작지만 장강을 건너는 나루터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제법 많다.

끼니때가 되어서인지 위가진의 유일한 객잔 위가반점(衛家飯店)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객잔의 가장 안쪽 구석진 자리 근처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두 노인의 분위기가 범상치 않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두 노인은 쌍둥이다.

체격과 이목구비가 같은 틀로 찍어낸 듯이 똑같다.

그러나 닮은 것은 체격과 얼굴뿐이다.

두 노인의 모발과 피부의 색은 극단적이다.

한 명은 먹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몸의 모든 부위가 새카맣다. 흰 것은 오직 눈의 흰자위뿐이다.

다른 한명은 정 반대로 모든 부위가 밀가루를 뒤집어쓴 것같이 하얗다. 심지어 눈동자조차 흰색에 가깝다.

두 노인은 몸의 색과는 정 반대 색상의 옷을 입고 있다.

검은 노인은 눈같이 흰 백의를 거치고 있다.

반면 흰 노인은 새카만 흑의를 걸치고 있다.

백귀(白鬼), 자네는 여전하구먼. 저승사자나 염라대왕같은 분위기를 팍팍 풍기니 사람들이 접근을 못하지.”

검은 얼굴의 노인이 술잔을 입에서 떼며 말했다.

남 말 하지 말게 흑신(黑神).”

백귀라 불린 하얀 얼굴의 노인이 술병을 집어들며 코웃음을 쳤다.

자네는 어디 살아있는 인간처럼 보이는 줄 아는가? 억지로 웃고 있는 얼굴이 인상 쓰고 있는 내 얼굴 보다 더 섬뜩한 거 알기나 해?”

쪼르르!

백귀는 궁시렁거리면서도 검은 얼굴의 노인, 흑신의 빈 술잔에 술을 채워주었다.

십팔 년 전까지만 해도 억지로 웃는 얼굴이 아니었지. 그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참 세상은 살만 했었으니까.”

흑신은 한숨을 쉬며 술잔을 들었다.

지난 일 얘기해서 뭐하겠는가? 우리 두 늙은이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거늘...”

백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술잔에도 술을 채웠다.

두 노인은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흑신과 백귀, 합쳐서 흑백신귀(黑白神鬼)라 불리는 그들은 제왕성의 태상호법들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지난 십팔 년 동안 태산(泰山)에 자리한 제왕성에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자신들의 과오로 벌어진 어떤 일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제왕성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때문이다.

얘기해보게!”

얘기해봐!”

! !

흑신과 백귀는 동시에 술잔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한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라 그런지 두 사람의 행동거지는 판박이다.

말이 서로 부딪히자 흑신과 백귀는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럼 내가...”

내가 먼저...”

잠시 입을 다물었던 두 노인은 또 동시에 말을 꺼냈다.

이번에도 말이 부딪히자 노인들은 한숨을 쉬었다.

작년에는 자네가 먼저 말했으니 올해는 내가 얘기를 시작함세.”

흑신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하세나.”

백귀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하여간 우리끼리는 얘기 시작하는 것도 쉽지가 않아.”

백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인 탓이니 어쩌겠는가?”

흑신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일 년 간 자네는 성과가 좀 있었나?”

전혀 없었네.”

백신의 물음에 흑신은 고개를 저었다.

무려 일 년 동안이나 공쳤다는 건가?”

백귀는 새하얀 눈썹 사이의 미간을 모았다.

십팔 년 전, 무후(武后)님을 시해하고 소성주(少城主)를 납치해간 그놈... 귀면지존은 정말 교활하기 이를 데가 없네.”

흑신은 고개를 절래 저었다.

약간의 단서를 남겼다가도 추적을 시작하면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잠적해버리니 말일세.”

지난 십팔 년간 끝없이 반복해온 숨바꼭질이지.”

백귀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흑백신귀가 태상호법으로 봉사하고 있는 제왕성이 세워진 것은 백여 년 전이다.

제왕성을 세운 것은 섭초천(葉超天)이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섭초천의 출신내력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느닷없이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섭초천은 기이한 무공으로 기존 세력들을 가차없이 쓰러트렸었다.

당시의 강호를 호령하고 있던 어떤 세력이나 고수도 섭초천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전통의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 사파 무림의 본산인 혈교(血敎)도 섭초천에게 무참한 패배를 당했다.

훗날 제왕노조(帝王老祖)라 불리게 된 섭초천은 자신의 무공 내력을 철저히 숨겼다.

그가 구사하는 무공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섭초천이 구사하는 경이적인 무공의 출처에 대해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달마묵장!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겼다는 비결만이 섭초천이 이룬 놀라운 성취를 설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섭초천과 그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무공이 달마묵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인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림인들은 제왕성이 달마묵장을 보유하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왕성의 당대 성주는 철면제왕(鐵面帝王) 섭장천(葉長天)이란 인물이다.

신주이십팔숙의 으뜸인 일제(一帝)가 바로 철면제왕 섭장천이다.

제왕노조 섭초천의 손자인 철면제왕 섭장천은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인이다.

마교와 혈교의 잔당들을 비롯하여 숱한 고수들이 섭장천에게 도전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섭장천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다쳤다.

삼대에 걸쳐 거푸 천하제일인을 배출한 제왕성의 성세는 영원할 것만 같았다.

헌데 십팔 년 전, 제왕성에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이 벌어졌었다.

섭장천의 아내인 무후 주영청(朱永淸)이 살해당하고 한 살짜리 외아들 섭무궁(葉無窮)이 납치된 것이다.

범인은 제왕성 섭씨일족의 가전 보물을 훔치러 잠입한 도둑이었다.

도둑이 노린 가전 보물은 물론 달마묵장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달마묵장은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게다가 태상호법들인 흑백신귀가 근처에 늘 상주하며 지켰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은 용케 달마묵장을 훔쳐냈다.

도둑은 얼굴에 귀신 형상의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훗날 밝혀진 정체는 마교의 신임 교주 귀면지존이었다.

귀면지존은 달마묵장을 훔친 직후 흑백신귀에게 포착되었었다.

흑백신귀는 함께 손을 쓰면 섭장천과도 호각을 이룰 수 있다는 절세고수들이다.

귀면지존이 범상치 않은 실력의 소유자이긴 했지만 흑백신귀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궁지에 몰린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후원으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소성주인 섭무궁을 인질로 잡아버렸다.

그 과정에서 섭장천의 아내 무후 주영청은 어린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다가 귀면지존의 독수에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삼 년 전부터 강북(江北) 육성(六省)에서는 놈의 종적이 뚝 끊겼네.”

흑신이 말을 이었다.

아마 강남(江南)으로 근거지를 옮겼거나 어딘가에 깊이 숨어서 못된 짓을 꾸미고 있는 때문일 걸세.”

내가 담당한 강남 칠성(七省) 쪽에서는 그래도 지난 일 년 간 서너 번 놈의 흔적이 포착되었었네.”

백귀가 흑귀의 말을 받았다.

흑백신귀는 주모인 주영청이 살해당하고 소성주 섭무궁이 납치된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라 자책했다.

그래서 귀면지존을 잡아 죽이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 맹세하고 제왕성을 떠났었다.

그 후 십팔 년의 세월 동안 흑백신귀는 강북과 강남을 나누어 귀면지존의 행방을 추적해왔다.

강북에서의 수색은 흑신이 맡았고 강남은 백귀가 뒤져온 것이다.

놈은 서너 달마다 한 번씩 대처(大處)에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볼일만 보고는 재빨리 모습을 감추길 반복해왔네.”

어디 어디서 놈의 흔적이 발견되었는가?”

흑신이 몸을 앞으로 숙이면서 백귀에게 대답을 채근했다.

무창(武昌), 소주(蘇州), 상해(上海), 마지막으로 두 달 전쯤 광릉(廣陵)에 모습을 드러냈었네.”

광릉이라...”

백귀의 말에 흑신은 고개를 갸웃했다.

광릉이라면 죽림칠현(竹林七賢)의 고사가 서린 유서 깊은 고장인데... 근처에 숨을 만한 곳이 있는가?”

산이 깊기로는 안탕산(雁蕩山), 물길이 험하기로는 대택향(大澤鄕)이 있네만...”

백귀가 대답했다.

귀면지존은 제왕성의 이목이 사람 사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물처럼 깔려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흑신이 새카만 눈을 빛내며 말했다.

만일 은신처를 마련한다면 가급적 인적이 드문 곳을 택하겠군.”

백귀도 무슨 말인지 깨닫고 눈을 치떴다.

앞으로는 외진 곳을 중점적으로 뒤져 봐야하는 이유일세.”

흑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놈의 종적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광릉 근처의 안탕산과 대택향을...”

말을 이어가려던 흑신은 미간을 찡그렸다.

백귀의 치떠진 눈이 자기 뒤쪽의 객잔 입구에 고정되어있음을 발견한 때문이다.

사람이 말을 하면 집중해야지 딴전을 피우면...”

백귀를 타박하며 뒤를 돌아보던 흑신 역시 눈을 치뜨며 입을 다물었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객잔으로 들어오는 청년을 본 때문이다.

청년은 먼 길을 가는 듯 등에 봇짐을 비스듬히 짊어지고 있으며 허리에는 검을 한 자루 차고 있다.

(... 저놈...)

흑신은 숨이 턱 막히는 표정이 되었다.

(천부(天賦)의 무골(武骨)이다!)

점소이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빈자리에 앉는 청년의 모습을 살펴보며 흑백신귀는 실로 오랜만에 온몸을 뒤흔드는 전율을 느꼈다.

청년의 빼어난 자질은 백 년 가까이 살아온 흑백신귀도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청년은 안탕산을 떠나온 강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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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산촌의 세 모녀

 

 

-설삼신단!

 

그것은 만년설삼(萬年雪蔘)으로 만든 무림오대영약(武林五大靈藥) 중 하나다.

일갑자 전, 대설산의 어느 계곡에서 엄청난 설붕(雪崩:눈사태)이 일어났었다.

헌데 설붕이 지나간 자리에서 만년 동안 눈 속에서 자란 한 포기의 설삼이 발견되었었다.

만년설삼을 발견한 인물은 마도 무림에 속한 어떤 기인이었다.

그 기인은 만년설삼으로 다섯 알의 설삼신단을 만들었다.

설삼신단은 한 알을 복용하면 백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젊음을 유지하게 된다는 희세의 영약이다.

특히 여인들이 설삼신단을 복용하면 극음기공을 수월히 연성할 수 있게 된다.

고검추가 여인 옥여상의 몸속에서 찾아낸 세 알의 환약은 바로 그 설삼신단이었다.

그 중 하나를 옥여상이 복용했으므로 설삼신단은 이제 단 두 알만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

헌데 옥여상은 그 대단한 설삼신단을 복용하고도 자신의 내상이 낫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녀가 당한 마공이 그만큼 치명적인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쇄심마장!

 

옥여상에게 중상을 입힌 무공의 이름이다.

쇄심마장은 구마(九魔)라 불리는 전설적인 마인들 중 한명이 남긴 마공이다.

일단 쇄심마장에 격중되면 온몸의 혈맥이 말라붙어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만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쇄심마장에 당한 상세를 치료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시전자가 쇄심마장의 마공진력을 회수하는 것이고... 또 다른 방법은 만년화리(萬年火鯉)의 생혈(生血)을 마셔 손상된 혈기를 보충하는 것이다."

고검추는 옥여상을 말을 듣고 있던 침중한 안색으로 물었다.

"아까... 그 사람의 짓인지요?"

잘 봤다.”

옥여상은 고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은 누군데 아주머니를 시해하려 한 것인지요?"

고검추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옥여상은 나직한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놈의 이름은 담세황... 옥면마성(玉面魔星)이라는 별호를 지닌 나의 사제다."

"예엣? ... 사제라고요?"

고검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옥여상에게 부상을 입히고 그녀를 추격하던 자가 다름 아닌 그녀의 동문사제(同門師弟)였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할 여유가 없구나. 다만 그 자가 내게서 두 가지의 보물을 빼앗으려고 암습했다는 것만 말해 주마."

옥여상은 불신의 표정을 짓는 고검추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은신처를 알려주지 않으련? 설삼신단의 약효로 일각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그 사이에 운공요상을 마쳐야만 한다. 과연 내가 익힌 태을강기(太乙罡氣)가 쇄심마장에 당한 내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옥여상의 말을 들은 고검추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남서쪽으로 삼십여 리 쯤 가면 크고 작은 돌무지로 덮인 계곡에 이르실 것입니다. 그 계곡 끝의 절벽을 덮고 있는 덩굴 안쪽에 제법 아늑하고 은밀한 동굴이 하나 있습니다."

"고맙구나."

옥여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고검추의 손에 쥐어 주었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그녀는 그윽한 눈으로 고검추의 용모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말했다.

(조만간이라니... 무슨 말씀이실까?)

옥여상의 말에 고검추는 의아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고검추의 얼굴을 뜯어보던 옥여상의 눈가로 가는 경련이 스쳤다. 그녀는 사람의 관상(觀相)을 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 가기 전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옥여상은 복잡한 심사가 실린 표정으로 말하며 일어났다.

!

그리고는 몸을 날려 남쪽으로 사라졌다.

"이상한 분이시다."

멀어지는 옥여상을 보며 고검추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만간 설삼신단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라는 옥여상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다시 만나게 된다고도 했으니 일단 갖고 있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들어있는 옥병을 품속에 넣었다.

그러면서 하늘을 보니 어느 덧 해가 기련산의 서쪽 능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구나. 어머니가 오늘은 돌아오셨는지 모르겠다."

죽서기년도 품속에 찔러 넣은 고검추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양떼들을 향해 달려갔다.

 

***

 

-팽가촌(彭家村)

 

기련산 남쪽 산록에 자리한 산촌이다.

백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의 주민 대부분은 팽씨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팽가촌이다.

팽가촌 동쪽 오리쯤에는 모옥(茅屋;초가집) 한 채가 외따로 자리하고 있다.

아늑한 골짜기에 지어진 그 모옥에는 팽씨가 아닌 모자(母子)가 살고 있다.

서른여섯 살인 어머니의 이름은 당혜선(唐惠善)이고 열일곱 살인 아들의 이름은 고검추다.

성씨로도 알 수 있듯이 두 모자는 팽가촌 토박이가 아니다.

십칠 년 전, 당혜선은 핏덩이인 아들을 안고 팽가촌에 나타났었다.

스무 살이 채 안된 젊은 엄마 당혜선은 당시 아주 쇠약해진 상태였다. 무슨 사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당혜선은 어린 아들과 함께 오랜 도피 생활을 한 듯 했다.

마음씨 좋은 팽가촌 주민들은 당혜선을 극진히 간병해주었다.

덕분에 건강을 회복한 당혜선은 팽가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당혜선은 놀라운 무공으로 팽가촌 주민들의 은혜에 보답했다.

본래 기련산은 산이 깊고 숲이 울창하여 여러 종류의 맹수들이 서식하고 있다. 호랑이, 표범, 늑대, 곰등이 수시로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해치곤 했었다.

당혜선은 그런 맹수들을 보는 족족 잡아 죽여서 팽가촌의 오랜 우환을 제거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기련산에는 맹수들 보다 더 사납고 포악한 존재들이 여럿 있다.

바로 산적들이다.

관부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험준한 기련산에 산채를 마련한 산적 떼가 한 둘이 아니다.

산적들은 불시에 팽가촌을 찾아와 행패를 부리곤 했었다. 식량이나 가축을 주로 강탈해가지만 때로는 부녀자들을 납치해서 노리개로 삼기도 했다.

팽가촌은 외진 산촌이라 관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었다.

마을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이나 가축을 바쳐서 산적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그래야만 부녀자들이 희생당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이 팽가촌에 거주하면서 산적들은 더 이상 팽가촌 주민들을 괴롭히지 못했다.

당혜선은 날을 잡아 산적들의 산채 중 한 곳을 찾아가 궤멸시켜버렸다. 산적들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모두 다리 한쪽을 못 쓰는 불구자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게 본보기가 되어서 다른 산채의 산적들도 감히 팽가촌을 건드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마을이 생긴 후 처음으로 산적들의 행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 모두가 당혜선이란 여걸이 팽가촌에 정착한 덕분이었다.

팽가촌의 주민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당혜선을 선녀처럼 떠받들고 공경했다.

당혜선의 아들 고검추는 아주 영특했다.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며 하나를 가르치면 열 개를 추론해서 알 정도였다.

팽가촌은 외진 산골 마을이라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드물다.

어쩔 수 없이 당혜선이 직접 영특한 아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당혜선은 무공 뿐 아니라 학식도 상당했다.

하지만 고검추는 열 살 이전에 어머니가 아는 모든 것을 배워버렸다.

더 이상 아들을 가르칠 수 없게 된 당혜선은 대처에 나가 책을 구해다주는 것 외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당혜선은 아들이 생계는 신경 쓰지 말고 학문 연마에만 집중하길 바랬다.

게다가 고검추와 함께 자란 또래 친구들은 나이가 들면서 생업인 목축, 농사, 사냥, 약초 채집등을 배우느라 바빠졌다.

그 때문에 고검추는 팽가촌 근처에 살면서도 친구가 거의 없었다.

함께 놀 친구도 없어서 고검추는 어머니가 구해다주는 책을 읽으며 지내야했다.

그래도 열세 살 때부터는 마을 주민들이 기르는 양을 보살펴주는 일로 소일해오고 있다.

당혜선도 양치는 일은 공부에 그리 방해되지 않는 때문인지 굳이 반대하진 않았다.

오 년 가까이 양들을 보살펴온 덕분에 고검추는 이제 팽가촌의 그 누구보다 능숙한 양치기가 되었다.

오늘도 양떼를 몰고 마을 뒤편 초원으로 올라갔던 고검추는 옥여상이란 신비한 여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이 자신의 운명에 휘몰아칠 거센 폭풍의 전조라는 사실을 고검추로서는 알리가 없었다.

 

***

 

해가 막 서산으로 떨어지고 있다.

매애애...”

마지막 한 마리의 양이 마을 중앙의 공터에 자리한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백 쉰 세 마리... 오늘도 한 마리 빠트리지 않고 잘 데리고 돌아왔구나.”

마지막으로 우리에 들어간 양까지 센 등삼낭(鄧三娘)이 초췌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 나이 서른다섯인 등삼낭은 산촌 마을의 여자답지 않게 단아한 용모를 지녔다. 이목구비가 아주 섬세하여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것 같은데 입술 가에 찍혀있는 점 때문에 관능적인 분위기도 충긴다.

비록 허름한 베옷을 입었어도 등삼낭의 타고난 미모는 가려지지 않는다.

등삼낭은 팽씨가 아니지만 팽가촌의 주민이다.

그녀는 팽가촌 촌장 팽유(彭維)의 며느리인 것이다.

등삼낭은 팽유가 젊었을 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등씨 성의 어떤 명문가 출신이라고 한다. 등삼낭이라는 이름은 등씨 집안의 셋째 딸임을 의미한다.

하지만 등삼낭의 집안은 강호의 혈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한다.

팽유가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 등씨일족은 이미 몰살당한 후였다.

그래도 천우신조로 당시 다섯 살이던 등삼낭은 목숨을 건졌다. 등씨 집안 하녀 한 명이 그녀를 자신의 딸로 위장시켜준 덕분이었다.

팽유는 고아가 된 등삼낭을 팽가촌으로 데려와 키웠으며 나이가 차자 자신의 외아들 팽진(彭進)과 짝을 지어주었다.

팽가촌 차기 촌장인 팽진과 부부가 된 등삼낭은 슬하에 일남이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한 달 전 그녀의 행복하던 삶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기련산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산적 두목이 팽가촌에 쳐들어와 그녀를 납치해간 것이다.

 

-흑모철웅(黑毛鐵熊)!

 

기련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철웅채(鐵熊寨)란 산채의 채주다.

흑모철웅은 타고난 신력에 더해 도검이 불침하는 철피공(鐵皮功)이란 외공까지 익혀 기련산 일대에서는 적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동안 흑모철웅은 팽가촌을 침범한 적이 없었다. 철웅채와 팽가촌이 수백 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당혜선의 위명을 들어서 꺼리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보름 전에 사달이 났다. 볼일이 있어 중원에 다녀오다가 팽가촌 근처를 지나던 흑모철웅의 눈에 등삼낭이 띤 것이다.

산골 출신답지 않은 단아한 등삼낭의 자태는 흑모철웅의 눈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그자는 막아서는 등삼낭의 남편 팽진을 때려죽이고 등삼낭을 철웅채로 납치해갔다.

대처로 나갔다가 돌아온 당혜선은 그 사실을 알고 즉시 철웅채로 달려갔다. 다행히 당혜선은 등삼낭이 흑모철웅에게 겁탈당하기 전에 철웅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당혜선은 평소 한 살 아래인 등삼낭을 친 동생인 것처럼 예뻐했다.

그런 등삼낭을 납치한 흑모철웅의 만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 처음으로 당혜선은 산적들에게 살수를 썼다. 수십 명의 산적들이 당혜선의 검에 죽임을 당했고 다친 자는 그 몇 배였다.

철피공을 익혀서 도검이 불침한다는 흑모철웅도 당혜선의 무시무시한 검법에 치명상을 입고 달아났다.

흑모철웅을 쫓아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당혜선은 그럴 수가 없었다. 겁탈당할 뻔한 충격으로 실신한 등삼낭을 보살피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일단 등삼낭을 데리고 팽가촌으로 돌아왔다.

그런 후 다시 철웅채로 돌아가서 흑모철웅의 종적을 추격하는 중이다. 흑모철웅을 살려두면 팽가촌에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 후환을 없애버릴 작정인 것이다.

 

당언니... 네 엄마는 오늘도 돌아오지 않으실 모양이구나.”

등삼낭은 양들이 들어간 우리의 문을 단단히 잠그고 있는 고검추를 보며 말했다.

상복을 겸해서 수수한 베옷을 입은 등삼낭의 얼굴은 초췌하다.

남편은 산적 손에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하마터면 남편을 죽인 원수에게 겁탈당할 뻔 했다.

지난 보름은 등삼낭에게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닌 시간이었다.

만일 아직 어린 자녀들을 보살펴야한다는 모정이 없었다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에게는 열다섯 살인 아들과 열일곱, 열세 살인 딸들이 있다.

아직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등삼낭은 힘을 내야만 했다. 애써 의연한 척 하며 남편의 장례를 치렀고 마을의 큰 재산인 양들을 돌보아온 것이다.

때가 되면 돌아오시겠지요.”

고검추는 짐짓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속내는 바싹 바싹 타들어가는 중이었다.

당혜선은 수시로 팽가촌을 나가곤 했지만 아무리 길어도 닷새를 넘기지 않고 돌아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보름 넘게 소식이 없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다.

엄마! 우리 왔어요.”

마을 안 쪽에서 해맑은 계집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검추가 돌아보니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을 등지고 두 명의 소녀가 다가오고 있다.

등삼낭을 닮은 소녀들인데 열세 살 쯤인 계집아이는 다람쥐처럼 쪼르고 달려오고 있고 그 뒤에서 열일곱 살쯤인 새침한 인상의 소녀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신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언니 쪽은 보자기에 싼 찬합을 들고 있다.

소녀들은 등삼낭의 딸들인 팽옥경(彭玉鏡), 팽옥령(彭玉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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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안룡(獨眼龍)

 

 

칠십년 넘게 강호 무림을 지배해온 무황성에서 최고의 요직은 감찰전(監察殿)의 전주다. 무황성에 속한 모든 인간들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한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독안룡 이탁은 사년 전까지만 해도 바로 그 감찰전의 전주였다.

그러나 그는 무황성주 주진충의 두 번째 부인인 국조미랑(菊造美浪) 왕소군(王昭君)에게 밉보여 일개 분타인 철령보의 보주로 좌천되었다.

이탁의 지인들은 왕소군의 부당한 처사에 분노를 금치 못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탁은 추호의 불만도 드러내지 않고 철령보로 부임했다.

이탁은 가족들 중 양자인 백남빈만 데리고 철령보로 왔다. 아내는 병약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아직 어려서 무황성에 남겨둔 것이다.

그후 사 년 동안 이탁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철령보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변모시켰다.

이탁의 지도하에 철령보 무사들의 무공은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거기에 더해 이탁은 기문진법을 바탕으로 각가지 병진(兵陣)을 창안하여 철령보 무사들을 단련시켰다.

그 결과 무황성의 일개 분타에 불과했던 철령보는 단독으로 대려장이나 극품당과도 맞설 수 있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사 년 간 중원의 동북방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독안룡 이탁의 능력에 기인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신랑성의 이인자를 생포했는데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다?”

이탁은 하나 뿐인 눈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는 젊은 시절 불행한 사고로 왼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독안룡이라는 별호는 그 때문에 붙은 것이다.

... 그자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저항을 포기해서 속하도 놀랐습니다.”

백남빈 옆에 부동자세로 서있던 철담도호가 대신 대답했다.

이탁은 주변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높여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탁 앞에 서면 누구나 긴장하게 된다. 하나뿐인 이탁의 눈이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같이 느껴져서 마주 보지도 못하는 것이다.

거의 유일하게 이탁의 눈길을 피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양자인 백남빈이다.

그런 백남빈조차 양부의 검고 깊은 시선을 오래 접하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섬뜩한 느낌을 받곤 한다.

너희들이 완안진을 요격하러 갔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최소한 절반은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이탁은 별다른 감정이 실리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백남빈은 양부의 그 말에 자신의 무모한 행동에 대한 질책이 깃들어 있음을 느꼈다. 철령보에서 무공으로 완안진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보주인 이탁뿐이기 때문이다.

소자가 경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결과가 좋게 나왔으니 되었다.”

사죄하는 양자에게 이탁은 고개를 조금 저어 보였다.

 

이탁은 순찰을 위해 대려장과의 접경 북쪽 끝까지 갔다가 사해검객 종리완이 보낸 연락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철령보로 다시 돌아오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대려장이 느닷없이 도발을 하여 긴장을 조성했던 게 자신들을 찾아오는 완안진을 돕기 위해서였던 것같다.

백남빈보다 먼저 철령보로 돌아온 이탁이 얼마나 초조해했는지는 총관인 사해검객이 잘 알고 있다. 평소의 성격대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탁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던 것이다.

백남빈 일행은 새벽이 되어서야 철령보로 돌아왔다. 완안진의 시종 다얀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해서 행군을 서두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심하게 다친 다얀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왼안진은 혈도가 짚여 무공이 금제된 채 다얀과 함께 철령보의 뇌옥에 수감되어 있다.

 

무황성을 통틀어도 완안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열 명 남짓이다. 그런 그가 저항을 포기하고 생포 당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대려장으로 파견된 목적까지 순순히 자백했다.”

이탁은 탁자 위에 놓인 몇 가지 물건을 훑어보며 말했다.

탁자 위에는 밀봉된 편지 한통, 손잡이에 푸른 늑대의 형상이 정교하게 장식 된 단검 한 자루, 그리고 상당히 큰 반지 하나가 놓여있다.

그 물건들은 백남빈이 완안진의 몸에서 압수한 것들이다.

이 상황에 대해 너희들의 의견들을 말해봐라.”

이탁은 탁자 위의 물건들 중 반지를 집어들어 살피며 말했다.

폭이 반치 정도나 되는 상당히 큰 금 반지인데 표면에는 물감이 흐르는 듯이 보이는 여러 가지 색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중상을 입은 시종을 구하기 위해 투항한 게 아닐지요?“

철담도호가 곰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완안진은 대려장과 결맹을 맺기 위해 파견된 신랑성의 밀사다. 그토록 막중한 임무를 띤 자가 겨우 종놈 하나 구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냐?”

... 죄송합니다.”

이탁의 말에 철담도호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일개 시종의 안위를 위해 막중한 임무를 포기한 것은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

완안진은 시종을 다얀이라 불렀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백남빈이 입을 열었다.

순간 반지를 들고 있던 이탁의 손가락이 경직되는 것을 철담도호는 놓치지 않았다.

다얀... 다얀...”

이탁은 입으로 그 이름을 되뇌이며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혹시... 다얀이란 이름의 그 시종이 의외로 중요한 존재였는지요?”

철담도호도 느껴지는 바가 있어서 이탁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야 생각난 것이지만... 신랑성주 토곤의 둘째 아들 이름이 다얀이었습니다.”

백남빈이 양부를 대신해서 철담도호에게 말했다.

그런...”

철담도호는 자기도 모르게 부리부리한 눈을 치떴다. 비로소 완안진이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 이유를 알아차린 것이다.

네가 추측하는 대로 완안진이 대동한 자는 진짜 시종이 아니라 토곤의 둘째 아들일 것이다.”

이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남빈에게 말했다.

 

누구보다 야심이 큰 토곤의 꿈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토곤은 결코 칸이 되지 못한다. 몽고족 지배자인 칸은 오직 징기스칸의 후손들인 황금씨족(黃金氏族)만이 될 수 있다는 징기스칸의 법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토곤은 몽고족의 군사령관인 타이시, 즉 태사(太師)로 만족해야만 했다.

대신 그는 딸을 징기스칸의 후손 중 한명인 터터부카(脫脫不花)란 인물에게 시집보낸 후 터터부카를 칸으로 추대했다.

딸이 낳을 외손자가 몽고족의 칸이 되는 것이 토곤의 새로운 꿈이 된 것이다.

토곤에게는 터터부카에게 시집보낸 딸 외에도 두 명의 아들이 더 있다.

토곤의 두 아들 중 장남의 이름이 에센(也先)이고 차남이 다얀이라는 것을 백남빈은 뒤늦게 떠올렸었다.

 

토곤은 둘째 아들을 대려장에 볼모로 보내던 중이었을 것이다.”

이탁은 반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들을 볼모로 제공할 정도라면 토곤이 대려장과 맺으려던 게 단순히 우호를 증진하기 위한 결맹은 아니겠습니다.”

백남빈의 안색도 심각해졌다.

그는 완안진으로부터 대려장을 찾아가는 목적이 결맹을 맺기 위해서라는 진술만을 들었을 뿐이다. 비록 포로로 잡긴 했지만 완안진이 시종이라 소개한 다얀의 상태가 심각해서 집요하게 추궁은 못한 것이다.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武君子) 강진남(姜震南)에게 보낸 밀서는 읽어보았느냐?”

이탁은 탁자에 놓여있는 밀봉된 편지를 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먼저 보셔야할 것같아서 개봉하지 않았습니다.”

양아들의 대답을 들으며 이탁은 봉서 입구를 뜯어 몇 장의 편지를 꺼냈다.

속하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담도호가 두 부자의 눈치를 보며 대청을 나갔다.

(볼수록 특이한 반지다.)

홀로 남아서 양부가 편지를 읽는 것을 보던 백남빈의 시선이 자꾸만 탁자에 놓인 반지로 끌렸다.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그 반지는 백남빈이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재질로 만들어졌다.

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데 다섯 가지 색이 섞여있을 뿐 아니라 약간의 열기와 은은한 향기까지 느껴진다.

완안진은 그 오색의 금반지, 오채금환(五彩金環)을 토곤이 대려장의 장주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밀서와 함께 소중히 보관하고 있었다.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짐작할 수 없지만 토곤이 결맹의 대가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일 것이다.)

백남빈의 생각이 오채금환에 끌리고 있을 때였다.

이번 승부에서 진 것은 완안진이 아니라 우리 부자로구나.”

!

이탁이 읽고 있던 편지를 내밀면서 말했다.

백남빈은 말없이 양부가 내민 편지를 두 손으로 받아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들 부자가 완안진에게 졌다는 양부의 의견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랑성주 토곤이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의 내용은 백남빈의 예상을 한 참 뛰어넘는 것이었다.

토곤은 현재 십만 이상의 기마대를 만리장성 밖에 결집 시켜 명나라에 대한 전면적인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토곤에게 가장 큰 우환은 동족인 달단의 존재다.

원래 몽고초원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행사해온 부족은 달단이었다,

몽고족의 대부분이 중원으로 이주한 후에도 달단은 몽고초원에 남아있었고 덕분에 다른 부족들이 주원장에 의해 중원에서 쫓겨났을 때에도 달단은 원래의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에 징기스칸의 후손들은 자연스럽게 달단에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달단이 곧 징기스칸의 가문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 달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이라트는 뒤늦게 몽고족으로의 편입을 허락받은 천한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토곤이 칸으로 옹립한 터터부카도 원래는 달단 출신이었다.

달단의 족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암투에서 패해 오이라트로 망명했던 터터부카는 토곤의 딸과 결혼한 덕분에 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토곤은 몽고족의 칸으로 추대한 사위의 입지를 공고하게 해주기 위해 달단을 맹렬히 몰아붙여왔다.

그 결과 달단은 본거지인 몽고초원에서 쫓겨나 만주 지역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달단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다. 언제 힘을 되찾아 역습을 가해올지 모른다.

토곤으로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배후의 달단을 움직이지 못하게 견제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동이족 세력들의 맹주인 대려장에 결맹을 제안하게 된 것이다.

토곤이 직접 쓴 밀서에는 달단을 견제해주면 그 대가로 대려장이 요동과 만주 일대를 정복하는데 조력하겠다는 제안이 적혀 있었다.

또 밀서의 말미에는 신뢰의 표시로 자신의 아들을 볼모로 보낸다는 내용과 서로 다른 길로 보낸 두 명의 밀사중 먼저 도착한 쪽의 친서를 접수해달라는 내용도 적혀있다.

 

완안진이 순순히 포로가 된 것은 주군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밀사가 대려장까지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이목을 끌기 위해서였겠습니다.”

양부를 닮아서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인 백남빈의 검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다른 길로 간 토곤의 두 번째 밀사는 이미 대려장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탁도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즉시 경계 수준을 높여서 대려장의 동향을 세밀하게 감시하도록 하겠습니다.”

백남빈은 서둘러 양부에게 인사를 하고 대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대려장을 감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있다.”

이탁이 백남빈을 불러 세웠다.

지금의 상황을 촌각을 다퉈 무황성에 보고해야하는데... 아비는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

자신을 지그시 보며 말하는 이탁의 뜻을 백남빈은 즉시 알아차렸다.

전서구로도 무황성에 대략적인 상황을 알리겠지만 신랑성과 대려장의 합작은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확실한 증거를 제출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토곤이 강진남에게 보낸 밀서를 무황성에 갖고 가야하는 것이다.

소자가 무황성에 보고하고 오겠습니다."

백남빈은 양부 독안룡 이탁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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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一 章

 

             血洗落魂

 

 

 

󰡔___ ___ ___!󰡕

심혼(心魂)을 쥐어뜯는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___

()! 피의 광풍(狂風)이 하늘을, 땅을 몰아쳤다.

시뻘건 혈수(血手)가 허공을 움켜쥐며 허무하게 꺾어지고 있었다.

___ ___ ___ ___!

살갗을 후벼파는 혹독한 한풍(寒風)이 백설(白雪)을 동반한 채 장내를 휩쓸었다.

허나, 꾸역꾸역 쏟아지는 선혈은 뜨겁고 강렬한 색채로 한 자가 넘게 쌓인 백설을 빨아들일 듯 물들이고 있었다.

그 속에 널브러진 시체, 시체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참상이 이곳에 펼쳐져 있었다.

사지가 끊어지고 살갗이 짓찢어진 채 나뒹구는 시체, 허연 뇌수와 함께 무참히 박살난인두(人頭)와 갈라진 복부 사이로 흘러내린 시뻘건 창자

아아...!

아비규환(阿鼻叫喚)! 인간지옥(人間地獄)!

인세(人世)에 어찌 이토록 처참한 광경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흑의(黑衣)를 걸친 수백 구의 시신들은 어느것 하나 성한 것이 없었다.

벌판___.

시산혈해(屍山血海)의참경에 몸서리쳐지는 공포가 깃든 벌판이었다.

, 그런데 보라!

수백 명의 시신들 사이에 한 명의 거인(巨人)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六尺) 장신(長身)에 본시는 푸른색이었으나 인육(人肉)이 달라붙고 선혈로 얼룩져 검붉게 변한 장삼을 걸친 인물, 반백(半白)의 머리, 한 자 철판도 단번에 꿰뚫어 버릴 듯 형형히 번쩍이는 안광, 그의 전신에서는 태산같은 위엄과 가공할 살기가 물씬 풍겨나왔다.

굳게 다문 입술사이로 흘러내리는 선명한 액체, 그것은 바로 피였다.

그의 오른 손에 들린 반투명한 보검(寶劍)에서도 뚝뚝 선혈이 떨어지고 있었다.

󰡔으음...󰡕

문득, 청삼인의 입에서 나직한 침음성이 흘렀다.

허나 곧 그는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흑룡신군(黑龍神君)...!󰡕

___! 흑룡신군(黑龍神君)이라면...?

그렇다.

흑룡신군, 그는 무림영웅보에 오른 백팔무인(百八武人) 중의 일인(一人)으로 협서(夾西)일대에서 흑룡방(黑龍幫)을 세운 인물이었다.

이백 년 전에 실전된 흑룡묵혈강(黑龍墨血罡)을 대성(大成)하여 백팔무인 중 서열 제 사십이위(四十二位)에 오른 절정의 고수(高手),

헌데, 그런 그가 지금 천삼인의 발밑에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진 채 누워있지 않은가?

!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천하(天下)를 떨어 울리던 백팔무인, 그 중 당당한 한 사람으로 군림한 그가 수백 명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이 황량한 벌판에 잠든 것이었다.

과연, 청삼인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가공할 살겁(殺刦)을 저질러 놓았단 말인가?

이때, 태산처럼 버티고 선 청삼인의 신형이 일순 휘청했다.

󰡔으윽... 으음...󰡕

그는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구양천(九陽天)! 네 종말이 이렇게 허무할 줄이야... 하하핫...!󰡕

돌연 그는 한()이 깃든 허탈한 광소를 터뜨리며 하늘을 우러렀다.

일순, 그의눈빛이 절망과 체념으로 흐릿하게 꺼졌다.

󰡔으음, 무형기독(無形奇毒)... 점점 심맥을 갉아먹는구나...󰡕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무참하게 나뒹굴고 있는 시신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___ ___ ___!

눈보라가 몰아쳤다.

물씬 피냄새가 한풍을 타고 흩어졌다.

청삼인,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혼자 뇌까리듯 말을 흘렸다.

󰡔흐흐... 결국 나는 마존(魔尊)이외에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살인마(殺人魔)라는 이름까지 얻겠군.󰡕

헌데 이때, 흐릿하게 잠겨들던 그의 두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___ ___ ___ ___!

한풍이 몰아치는 백여 장 밖, 그곳에 어느새 육인(六人)의 인영이 유령처럼 나타난 것이 아닌가?

___!

찰나지간, 그들 중 한 명의 청삼인을 향해 화살처럼 쏘아왔다.

노인(老人), 그는 마치 얼음으로 깎아놓은 듯 냉막한 인상을 지닌 백발노인이었다.

노인의 두눈에서는 심방을 동결시켜버릴 듯 가공할 안광이 폭사되고 있었다.

일견하기에도 무공이 극()에 이른 고수임이 분명했다.

헌데, 실로 기이한 일이었다.

청삼인 앞에 내려선 노인은 전신을 가늘게 경련하며 침중한 신음성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으음...󰡕

혹독한 추위 때문인가?

아니다. 절정고수인 그가 추위를 느낄 리 없었다.

! 그는 바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 ! !

노인에 이어 장내에 도착한 다섯 명의 인물, 그들 역시 이미 육순(六旬)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헌데, 그들의 얼굴에도 억지로 숨기려고 하지만 짙은 두려움의 빛이 여실히 깔려있지 않은가!

대체, 한결같이 절정고수인 이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청삼인의 정체는 무엇이란 인가?

___ !

한 차례 매서운 설풍(雪風)이 장내에 대치한 칠인(七人)의 살갗을 때렸다.

그와 함께, 고목처럼 서 있던 청삼인의 입술이 열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 덤벼라!󰡕

그의 일갈이 떨어지자 앞서 나타났던 백발노인의 신형이 부르르 떨렸다.

북명일신(北冥一神)___

! 이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그는 백팔무인 중에서도 최절정에 속하는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일인(一人)이 아닌가?

 

천하십웅(天下十雄)___

 

소림(少林)의 천불노승(天佛老僧),

무당(武當)의 삼양노조(三陽老祖),

북해(北海)의 패자(覇者) 북명일신(北冥一神),

중주(中州)명가 만화검선(萬花劍仙),

곤륜(崑崙)의 전대고수 비룡신협(飛龍神俠),

담긍베일의 거도(巨盜) 신풍무영비(神風無影飛),

봉황곡주(鳳凰谷主) 봉황검(鳳凰劍),

천지쌍괴(天地雙怪),

개방(丐幫)의 방주(幫主) 천결타개(千結陀丐),

 

이들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으로서 사제(四帝)에는 못미치지만 백팔무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고수들이었다.

백발노인, 그가 바로 천하십웅(天下十雄) 중의 한 명인 북명일신이었다.

이때, 북명일신은 두겨움을 떨치기라도 하듯 입술을 악물며 대갈했다.

󰡔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그의 일갈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명일신의 뒤에 나열해 있던 다섯 명의 노인들이 순식간에 청삼인을 포위했다.

___현빙천살진(玄氷天煞陣), 이는 북해일문(北海一門)의 비전전술(秘傳戰術)이었다.

또한 다섯 명의 노인들은 북해일문의 최고고수, 즉 북명오로(北冥五老)였다.

이때, 다시 북명일신의 입에서 벼락같은 일갈이 터졌다.

󰡔현음추살(玄陰刺殺)!󰡕

순간, 휘르르___ ___ ___!

북해오로의 전신에서 맹렬한 빙풍(氷風)이 불어닥쳤다.

동시에 그들의 신형은 하얀 백무(白霧)로 휩싸였다.

헌데, 그 백무가 점차 확산되는가 싶더니 서로 이어져 하나의 환()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이엽___!󰡕

북명오로의 벼락같은 기합성이 터지는 순간 백환(白環)은 청삼인을 향해 섬전처럼 폭사되었다.

파파팟___!

허나 바로 그 순간,

󰡔으하하하하핫...!󰡕

청삼인의 입에서 돌연 찌렁찌렁한 광소가 터져나왔다.

찰나, 꽈르르릉___!

󰡔___ __ !󰡕

󰡔___ ___ !󰡕

장내를 득썩 뒤흔드는 굉음과 처절한 단말마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북명오로___.

놀랍게도 그들의 몸은 어느새 형체도 없이 짓이겨져 끔찍하게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으으... 이럴 수가...!󰡕

북명일신의 두눈은 경악과 불신으로 부릅떠졌다.

청삼인.

그는 온몸에 하얀 서리를 뒤집어쓴 채 냉오한 표정으로 우뚝 서 있었다.

이때, 사색(死色)이 되어 신형을 비틀거리던 북명일신이 다시 불끈 이를 악물었다.

순간, 그의 전신에서는 시커먼 경기가 극맹한 한기를 동반한 채 뻗어나왔다.

그 모습에 청삼인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나직한 비웃음과 함께 번쩍 왼손을 치켜들었다.

󰡔후후... 현음빙살강기(玄陰氷煞罡氣)로군. 후후...󰡕

치켜든 그의 좌수(左手)가 순식간에 섬뜩한 청색(靑色)으로 물들었다.

청수(靑手)___ 그것은 마치 하나의 가공할 청강도(靑罡刀)를 연상케 했다.

우우___ ___!

두 사람 사이에는 무형의 경기가 팽팽하게 고조되었다.

이때,

󰡔현음빙살(玄陰氷煞)!󰡕

북명일신이 먼저 신형을 움직이며 발악하듯 대갈을 터뜨렸다.

츠츠츠츳...!

극렬한 빙음지기(氷陰之氣)를 동반한 묵기(墨氣)가 청삼인을 짓쳐들었다.

허나 그보다 먼저 청삼인의 좌수가 번득 청광(靑光)을 뻗었다.

󰡔___ ___ !󰡕

비명!

북명일신은 피보라에 휘말려 허공으로 날아올라갔다.

이어, ___!

그것이 끝이었다.

허나 이때 청삼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 졌다.

󰡔으음... 이놈의 무형기독(無形奇毒)만 아니었다면...󰡕

그는 침중하게 중얼거리며 안면을 일그러 뜨렸다.

그의 넒은 이마에는 점차 검은 기운이 비치기 시작했다.

독기가 이미 골수까지 침범한 것이었다.

허나 청삼인은 돌연 두눈을 부릅뜨며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 그러나.. 사제(四帝) 네놈들을 베기 전에는 결코 스러지지 않는다. 크하하... 기다려라. 본존(本尊)이 간다...!󰡕

다음 순간, 그는 벼락같이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의 신형은 순식간에 한 줄기 빛이 되어 번뜩 황야를 가로질렀다.

구련산(九蓮山) 낙혼애(落魂崖)___.

평평하던 지면이 갑자기 끝나며 마치 지옥의 입구(入口)처럼 쩍 갈라진 단애의 정상(頂上).

이곳에도 한 자가 넘는 백설이 숨막히도록 쌓여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펑펑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헌데,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는 이 절지에 언제부터인가 몇 개의 인영이 동상처럼 서 있었다.

__ __ ! __ !

눈보라를 동반한 혹독한 강풍이 목석처럼 굳어있는 인영들의 옷자락을 거세게 휘날렸다.

이때, __ __ !

돌연 잿빛 허공에서 폐부를 쥐어짜는 날카로운 새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순간, 중인들은 흠칫하여 고개르 들어올렸다.

그때 까마득한 허공에서 하나의 검은 점이 쏜살같이 낙혼애로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그것은 두 자 정도 크기의 검은 독수리였다.

헌데 그것은 내리꽂히듯이 하강하여 중인들 중 가운데 흑의노인의 어깨 위에 내려앉는 것이 아닌가?

가운데의 흑의노인___.

그는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 섬뜩한 인상을 풍겼다.

움푹 들어간 두둔에서는 귀화처럼 푸르스름한 안광이 번쩍이고 있었다.

흑의노인은 독수리의 발에 묶여있던 천을 끌러 읽어보았다.

󰡔...󰡕

문득 그의 입에서는 둔중한 신음성이 흘렀다.

그러자 그의 우측에 서 있던 학발동안의 황의노인(黃衣老人)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명제(冥帝)! 무슨 소식이오?󰡕

황의노인은 붉으레한 안색에 신선같은 인상을 풍겼으며 품속에 한 자루의 고색 창연한 고검(古劍)을 비단으로 싸서 안고 있었다.

󰡔그가 모든 관문을 돌파했소!󰡕

흑의노인은 움푹 들어간 두눈에 살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중인들은 일제히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흑의노인은 이를 갈며 다시 말했다.

󰡔백팔무인 중 우리를 제외하고 이번 일에 참석치 않은 십여 명의 인물들을 빼고 모두 그의 손에 죽었소.󰡕

그말에 좌측에 서 있던 현의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자는 분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을 텐데도 그 정도의 신위를 발하다니 실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소.󰡕

그는 안색이 푸르뎅뎅하고 가늘게 찢어진 두눈에는 기괴하게도 벽광(壁光)이 번뜩여 섬한 전율을 풍겼다.

흑의노인은 그의 말에 음침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러나 그는 이미 기독이 전신에 퍼져 평소의 오할 정도밖에 공력을 쓰지 못한다고 하오.󰡕

이어 그는 힐끗 한쪽 옆을 응시했다.

그들 삼인(三人)과 조금 떨어진 곳에 한 명의 황의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이 넘는 거구의 장한으로 시커먼 구레나룻이 턱을 뒤덮고 있었다.

무섭게 부릅뜬 호목(虎目)에 먹으로 꾹 찍어놓은 듯 짙은 검미(劍眉).

두눈에서 뻗치는 가공할 신광은 가히 만인을 압도하고는 남을 정도였다.

또한 그의 뒤에는 각각 홍포와 청포를 입은 두 명의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흑의노인이 황의중년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대에게 할말이 있다.󰡕

황의중년인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___!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렇다. 이 황의중년인이야말로 바로 중원북부를 위무하고 있고 황룡대제 기용천(奇龍天)이었다.

그리고 삼제(三帝)!

세 명의 노인들이야말로 황룡대제와 함께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삼제가 아닌가?

___구유명제(九幽冥帝).

___유성검제(流星劍帝).

___만천독제(滿天毒帝).

 

흑의의 음산한 노인, 그가 바로 구유명제였다.

동안학발에 고검을 지닌 노인은 유성검세.

현의에 귀면(鬼面)인 노인이 만천독제였다.

황룡대제 기용천은 구유명제를 바라보며 당당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흐흐... 그렇다. 그는 지금 낙혼애 아래서 본제와 다른 두 분의 수하를 상대하고 있다.󰡕

그 유명제는 문득 만천독제와 유성검제를 바라보았다.

󰡔헌데 보고에 의하면 그대의 황룡보(黃龍譜) 수하들은 구경만 하고 있다고 들었다.󰡕

순간,

󰡔닥치시오!󰡕

황룡대제의 뒤에 서 있던 두 괴인 중 홍포를 걸친 뚱뚱한 체구의 노인이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보주님의 명호를 함부로 도용하여 천하군웅들을 모아놓고 무슨 헛소리요!󰡕

그는 성질이 매우 급한 듯 구유명제를 내려보며 두눈을 부릅떴다.

구유명제는 음악한 표정으로 홍포괴인을 노려보았다.

󰡔흐흐... 열양신괴(熱陽神怪), 네놈이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본제에게 대들다니...󰡕

이때 전신이 대나무처럼 비쩍마른 청포괴인이 문득 홍포괴인을 저지시키며 나섰다.

󰡔구유명제! 우리 천지쌍괴(天地雙怪)가 당신을 두려워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오. 다만 보주님의 허락이 없어 당신과의 일전을 참고있는 것 뿐이오.󰡕

청포괴인, 그는 심기가 깊어 보이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에 구유명제는 안면을 부르르 경련했다.

___천지쌍괴(天地雙怪),

빙심마괴(氷心魔怪),

열양신괴(熱陽神怪),

이들은 쌍둥이 형제로서 빙심마괴가 첫째였다.

이때, 구유명제가 분노를 참지못해 전신을 경련하자 문득 기용천이 나섰다.

󰡔사실 후배는 이번 사건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수하들에게 방관하도록 지시한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구유명제는 잡아먹을 듯이 황룡대제를 노려보았다.

(이 어린 놈은 날이 갈수록 무섭게 공력이 늘고 있다. 설사 모든 일이 성공한다 해도 이놈을 제거하지 못하면 강호독패(江湖獨覇)는 힘든 일이다.)

그는 내심 이를 갈았다.

헌데 이때,

󰡔___ 우우___ ___!󰡕

낙혼애 아래로부터 폐부를 뒤흔드는 장소성이 들려왔다.

순간 구유명제는 번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오고 있소.󰡕

그의 말이 끈나는 순간, 낙혼애를 따라 한 줄기 인영이 빛살처럼 쏘아올랐다.

󰡔크하하하하핫...!󰡕

인영은 낙혼애가 무너질 듯 쩌렁쩌렁한 광소를 터뜨리며 눈 깜짝할 순간 중인들의 앞에 내려섰다.

󰡔...!󰡕

󰡔으음...!󰡕

중인들은 그 인영을 대하자 절로 침음성을 발하며 한 걸음씩 물러섰다.

인영___

그는 바로 북명일신 등을 단번에 쓰러뜨린 청삼노인이 아닌가?

청삼노인은 낙혼애 위의 중인들을 쓸어보며 재차 광소를 터뜨렸다.

󰡔크흐흐... 사제(四帝)! 네놈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구나. 이 천강마존(天罡魔尊)이 쓰러질 줄 알겠지만 어림없다. 크하하핫...!󰡕

 

! 천강마존(天罡魔尊)___!

이처럼 가공스러운 이름이 하늘아래 또 어디에 있겠는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 그는 단연코 천하를 떨어울리는 공포의 마존(魔尊)이었다.

헌데 그런 그가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으로 이 자리에 나타나다니...!

천강마존! 그는 이미 십일 전에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절독 무형기독에 중독되었다.

범인이라면 중독되는 순간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맹독에 십일 이상을 버텨온 것이 아닌가?

이때, 문득 천강마존의 광소를 막으며 황룡대제가 앞으로 나섰다.

󰡔선배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순간 기이하게도 천강마존의 강렬한 눈빛이 부드럽게 변했다.

󰡔무엇인가?󰡕

황룡대제 기용천은 당단한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께서 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를 얻으셨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기용천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두눈에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

(기재(奇才)로다. 노부의 뒤를 이어 천하제일인이 되기에 충분한 재목이다.)

내심 중얼거리던 그는 침중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이네. 노부는 혈음패황도를 얻었네.󰡕

󰡔으음...󰡕

그 말에 기용천은 문득 침음성을 발했다.

 

___혈음패황도(血吟覇荒刀), 이는 마도(魔道) 제일의 마기(魔器)로 불려지는 마물이었다.

처음 이것을 얻는 자는 칠백 년 전 절대마종(絶代魔宗)으로 군림했던 혈음마황(血吟魔皇)이었다.

헌데, 천강마존은 우연히 이 마도(魔刀)를 얻게 되었다.

그 사유는 이러했다.

 

백팔무인 중 일인인 흑장마군(黑掌魔君)은 천협산(天峽山) 부근에서 혈음패황도와 혈음마황(血吟魔皇)의 혈황경(血皇經)을 얻었다.

허나 그는 그것을 얻은 후 악행을 일삼다가 천강마존에 의해 마도(魔刀)와 혈황경을 빼앗기고 죽음의 위기를 면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흑장마군은 무림에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천강마존이 혈음패황도를 익혀 무림을 피로 씻으려 한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항상 천강마존을 제거키위해 기회를 엿보던 구유명제와 만천독제는 사제(四帝)의 이름으로 무림첩을 돌려 군웅들을 모은 것이었다.

 

황룡대제는 침중한 표정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혈음패황도는 마물입니다.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허나 천강마존은 문득 나직한 어투로물었다.

󰡔그대는 노부가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임을 인정하는가?󰡕

황룡대제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선배님이야말로 천하제일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기인이십니다.󰡕

황룡대제는 처음부터 이 사건의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천강마존의 진의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허나 그는 이제 확실한 판단을 얻었다.

천하제일인!

이 당당한 이름을 두고 천강마존은 무슨 또 다른 야욕을 꿈꿀 수 있겠는가?

황룡대제는 문득 존경어린 눈빛으로 천강마존을 바라보며 급급히 말했다.

󰡔후배는 선배님께 가르침을 받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때가 적당치 않음은 알고 있으나 한수 가르침을 바랍니다.󰡕

천강마존은 이 순간 자신이 처한 상황도 잊은 채 쾌히 스낙했다.

󰡔좋네. 단 일검이니 전력을 다해야 할 것이네.󰡕

황룡대제는 정중히 검례를 취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황룡대제의 고검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그의 전신에서 감히 무시할 수 없는 휘황한 광채가 쏟아졌다.

󰡔... 태양검강(太陽劍罡)!󰡕

관전하던 중인들은 침중히 부르짖었다.

대치한 천강마존의 안면 또한 일시 굳어졌다.

___태양검강(太陽劍罡).

이는 무려 천여 년 전에 실전되었던 검도 최고의 비학이 아닌가?

허나 이때, 스스스스...!

천강마존의 반투명한 천강검에서 실같은 백선이 가늘게 사위로 뻗었다.

순간 황룡대제의 전신은 완전히 태양같은 광휘에 휩싸여 단지 검봉(劍奉)의 모양을 한광망이 일 장 길이로 뻗어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천강마존의 눈에 문득 애석한 빛이 스쳤다.

(아깝군, 팔성(八成)의 화후에서 멈추었군.)

허나 생각을 끝낸 바로 그 순간,

󰡔검강만천(劍罡萬天)!󰡕

낙혼애를 허물어뜨릴 듯한 엄청난 일갈과 함께 황룡대제의 고검이 낙뢰를 일으키듯 천강마존을 쪼개갔다.

허나 그와 동시에 천강마존의 천강검도 번뜩 허공을 갈랐다.

󰡔천강파극(天罡破極)!󰡕

츠츠츳___ 파파파팟___

미친 듯한 검기의 충돌이 대기를 갈가리 짓찢었다.

󰡔으음...󰡕

일순 침중한 신음성이 일며 황룡대제는 어깨를 부여잡고 물러섰다.

허나 천강마존은 여전히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황룡대제는 급히 정중히 에를 취했다.

󰡔가르침 감사합니다.󰡕

󰡔노부의 천강검식 중 제 삼식(三式)을 받아낸 인물은 자네가 처음이네.󰡕

그말에 황룡대제는 부끄러운 기색을 지었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강이 부딪친 순간 천강검세가 여지없이 태야검강을 뚫고 들어와 자신의 목을 노렸다는 것을...

허나 결정적인 순간 천강검이 슬쩍 옆으로 비껴지며 가볍게 어깨를 베는 것에 그쳤다는 사실도, 황룡대제는 빙글 몸을 돌리며 천지쌍괴를 향해 말했다.

󰡔들어갑시다.󰡕

이어, ___!

그는 먼저 신형을 날려 낙혼애 아래로 사라졌다.

천지쌍괴도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갑자기 천강마존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이어 그는 울컥 한 모금의 선혈을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무거운 일검을 펼쳐 무형기독이 급속히 전신으로 퍼진 것이었다.

이때, 그를 바라보고 있던 구유명제가 음침한 표정으로 만천독제와 유성검제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는 거의 폐인이나 다름이 없소. 해치웁시다.󰡕

그 말에 이제(二帝)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천강마존에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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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2020. 3. 12. 17:31 공지

업데이트 주기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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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카테고리에 올리는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매일 1회 이상 올릴 계획입니다.

가능한 1일 2회 연재를 하겠지만...

부득이 한 경우에도 매일 1회씩은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댓글도 환영 ㅎㅎㅎ

 

 

필부 와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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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 기정무협소설

 

                     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

 

1

 

 

 

 

 

序 章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수천년 무림의 역사(歷史)는 그야말로 피()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___겁륜천하(刦輪天下).

피의무림사는 수없이 돌고 도는 수레바퀴의 기록을 남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세인들의 뇌리에 깊이 뿌리박힌 무림사가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무림군웅보(武林群雄譜).

무림군웅보가 작성(作成)된 것은 불과 백년래(百年來)의 일이다.

무림군웅보, 과연 그것은 무엇인가?

 

근세 백년무림계는 실전되었던 수많은 신공지학(神功之學)들이 속속 발굴되어 뛰어난 영웅들이 무림사상 최고의 정화로 피어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백년래 가장 강()했던 고수(高手)들이 확연히 드러났다.

 

___백팔무인(百八武人).

 

모두 도합 백팔 명의 절세고수가 가장 두각을 나타내어 무림을 빛냈다.

그들의 명단을 기록할 것이 바로 무림영웅보(武林英雄譜)였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무림영웅보란 한 권의 책자(冊子)도 아니었다.

단지 무림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口傳)이었다.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팔무인은 가히 시대만 잘 타고 났으면 족히 무림의 패자(覇者)가 되고도 남을 개세고수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공교롭게도 동시대에 나타났기에 각기 한 지방의 패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특별히 걸출한 개세인물들이 있었다.

 

___일존(一尊) 천강마존(天罡魔尊).

 

백팔무인 중 최강의 인물이었다.

그는 백년무림은 물론 무림사를 통해 서로 최강의 천하제일고수(天下第一高手)로 칭송 받았다.

가히 개세무적의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었다.

일존 천강마존, 그는 무림에 활동한지 일갑자(一甲子)하고도 반갑자(半甲子)가 지났다.

그러나 지금껏 그의 일초반식(一招半式)조차 제대로 받아낸 자가 없었다.

그것은 그와 어깨를 나란히하여 무림군웅보에 오른 백칠 명의 절정고수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예로, 백칠무인 중 최절정에 속하던 무위대제(武威大帝)조차도 그의 삼겁(三刦)을 못 받아내고 불귀의 객이 된 것이었다.

허나, 비록 그의 별호에 마()자가 붙었다고 하나 결코 그는 마두(魔頭)는 아니었다.

다만 성격이 강직하고 패도적이어서 자신의 기분 내키는대로 행동하여 마음에 거슬리는 자를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가혹하게 제거했기에 무림인들이 그에게 마존(魔尊)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었다.

무림군웅보의 두 번째 서열에는 이인(二人)이 올라 있었다.

 

쌍기(雙奇),

고죽취옹(枯竹醉翁).

낙척문사(落拓文士).

 

그들 두 기인(奇人)은 천강마존과 함게 당금무림에서 가장 배분이 높았다.

특히 고죽취옹(枯竹醉翁)은 천강마존이나 낙척문사보다도 오히려 한 배분이 높았다.

그는 각종 기문진학(奇門陣學)과 역리(易理)에 능통한 기인이었다.

낙척문사(落拓文士)는 무불통지(無不通知)의 대학자(大學者)로서 성품이 고결했다.

그들 쌍기(雙奇)는 성격이 매우 고고하여 타인과 좀체로 다툰적이 없어 진정한 실력조차 알려진 바가 없었다.

무림군웅보는 세 번째 서열에 사인(四人)을 놓고 있었다.

 

사제(四帝).

 

당금 천하무림(天下武林)을 사분(四分)하고 있는 무적의 패자(覇者).

그들은 명성이나 위용은 구주사해(九州四海)를 진동시켰다.

 

구유명제(九幽冥帝).

유성검제(流星劍帝).

만천독제(滿天毒帝).

황룡대제(黃龍大帝).

 

이들 사인은 오히려 일존(一尊)이나 쌍기(雙奇)보다도 더욱 무림에 큰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본래, 일존 천강마존에게 죽음을 당한 무위대제(武威大帝)가 사제(四帝)의 일인(一人)이었다.

허나 그가 죽은 후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젊은 기협(奇俠) 황룡대제(黃龍大帝)가 사제의 일원이 되었다.

사제는 한결같이 경세적인 무학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잣 사순(四旬)인 황룡대제를 제외하고는 모구 백 세가 넘는 자들이었다.

시제는 모두 웅심호담을 지닌 대야심가들이었다.

허나 그들은 불행히도 한 시대에 나타났을 뿐만 아니라 고금제일인으로 불리는 일존 천강마존으로 인해 크게 빛을 보지 못하고 칼을 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무림을 위해서는 그것이 다행일지도 몰랐다.

만일 일존이 없었다면 그들 사제의 패권다툼으로 인해 무림은 평지(平地)가 될지도 모를 것이므로,

구유명제(九幽冥帝).

그는 사십 년 전 무위대제가 죽어 해체된 무위궁(武威宮)을 휘하에 끌어 들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구유문(九幽門)과 병합하여 유명궁(幽冥宮)을 세워 천하독패의 꿈을 꾸고 있었다.

 

유성검제(流星劍帝), 그는 무려 삼백 년(三百年)의 전통을 이어 내려온 유성검문(流星劍門)을 당대에 이르러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대검사(大劍士)였다.

그 결과 유성검문은 산동(山東), 산서(山西), 그리고 장강(長江) 일대의 패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만천독제(滿天毒帝), 그는 사천(四川)에 독존궁(毒尊宮)을 세웠다.

그의 독존궁은 천하의 수많은 고수들을 끌어들여 나날이 세력을 확장할 뿐 아니라 강남(江南)과 멀리 천남(天南)에 까지 점차 마역(魔域)을 넓히고 있었다.

 

황룡대제(黃龍大帝), 그는 성품이 지극히 담백한 군자(君子)였다.

비록 사십의 중년에 불과하나 그의그런 인풍 때문에 그의 곁에는 절로 수많은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모였다.

때문에 비록 스스로 원하지는 않았으나 휘하의 도움으로 그는 돈황(敦皇)에 황룡보(黃龍堡)를 건립했다.

 

황룡보, 비록 건립된지 십여 년에 불과하나 황룡보는 정사(正邪) 양도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기인들이 모여 점차 무림의 태두(泰斗)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로 방대한 세력을 북()으로부터 뻗치고 있었다.

 

사제(四帝), 그들의 세력은 가히 천년 전통의 구파일방을 짓누르고 서서히 부상하고 있었다.

허나 그들은 아무도 감히 천하제패의 발걸음을 옮길 엄두를 내지 못했으니,

 

___천강마존(天罡魔尊),

 

모두가 무림군옹보의 첫머리를 장식한 그의 존재 때문이었다.

사제로서는 한시라도 천강마존이 사라지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무림(武林)___!

풍운일변의 혈세무림천하여___.

무림군웅보의 백팔무인들이 장악하고 있는 무림은 흡사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같이 무림사상 유래없이 평화롭기만 하다.

허나...,

허나....!

무림군웅보의 영광스런 자리에 올랐던 백팔인의 개세고수들이 어느날 태반이 쓰러지면서 중원무림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대혈풍(大血風)이 일기 시작했으니...

새로운 무림의 혈사(血史)가 창조되려는가?

... 바람()이 분다.

()와 살()과 마()와 죽음()의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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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로잡힌 거물(巨物)

 

 

삐이이이! 퍼억!

기마대의 선두가 날려 보낸 명적은 요란한 소리를 냈을 뿐 완안진과 다얀에게 한 참 미치지 못하는 뒤쪽에 떨어졌다.

살상의 위험은 없지만 명적은 다른 의미에서 위협적이다. 귀를 후벼 파는 날카로운 소리는 쫓기는 표적으로 하여금 초조하고 다급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청각이 예민한 말들도 명적이 울릴 때마다 발작적으로 속도를 높인다.

진정해라.”

완안진은 그런 애마를 다독여서 안심시키려 애썼다.

소리뿐인 명적에 이어 실질적인 위협이 쇄도한다.

피잉! 시잉!

먼 거리를 날아가게 만든 유엽전(柳葉箭)과 세전(細箭)들이 날아드는 것이다.

당황하지 말고 말을 잘 달래라. 달리는 중이라 화살에 맞아도 치명상은 입지 않는다.”

완안진은 실전 경험이 없고 소심한 성격인 다얀에게 외치며 몸을 좀 숙였다.

두 사람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등에는 방패를 짊어지고 있다.

또 말이 달려가는 속도가 날아든 화살의 위력을 반감시키기도 한다. 이리가 넘는 먼 거리에서 쏜 화살은 맞아봤자 그저 바늘에 찔리는 정도의 고통만을 줄 뿐이다.

! 티팅!

날아든 화살 몇 개가 투구와 방패에 맞아 퉁겨진다.

히히힝! 푸르르!

엉덩이에 한 두 개씩의 화살이 꽂힌 말들이 고통에 찬 울음을 토해낸다.

하지만 완안진의 말 대로 달리는 속도가 화살의 힘을 약화시켜 깊이 박히진 않는다.

요하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완안진은 고개를 들어 앞쪽을 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십여 리쯤 저편에 약간 높은 언덕이 길게 가로 누워있다.

그 언덕 너머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덕만 넘으면 대려장과 철령보의 경계인 요하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요하만 건너가면 철령보도 무리하게 우릴 추적하진 못할 것이다.”

완안진은 겁에 질린 다얀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몰았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이내 굳어졌다.

두두두!

갑자기 요하 변의 언덕 너머에서 수십 기의 기마가 나타나 달려오는 것을 본 때문이다.

... 철령보가 우릴 함정으로 몰아왔습니다.”

뒤 따라 오던 다얀이 겁에 질려서 계집애처럼 높은 소리를 낸다. 요하 쪽에서 구름처럼 몰려오는 기마대 역시 철령보 소속임을 알아보고 공포에 휩싸인 것이다.

(철령보에 제법 머리를 쓸 줄 아는 자가 있구나.)

완안진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는 비로소 자신들을 추적하는 철령보의 기마대가 악착같이 따라붙지 않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은 멀리 우회한 동료들이 포위망을 구축할 시간을 벌기 위해 시종일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추격해온 것이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완안진 자신도 전력으로 말을 몰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북쪽으로 간다.”

두두두! 히히힝!

완안진은 말의 방향을 급격하게 북쪽으로 틀어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얀도 허둥대며 완안진을 따라 말을 몰았다.

요하의 북쪽은 극품당, 정확히는 달단의 영영이다.

같은 몽고의 부족이지만 달단은 신랑성을 세운 오이라트와 철천지원수 사이다. 신랑성의 부성주인 자신을 보면 기필코 잡아 죽이려 들 게 분명하다.

하지만 철령보의 추적을 뿌리치려면 일단 달단의 영역으로라도 피신해야만 한다.

두두두!

완안진과 다얀을 태운 두 필의 준마는 서쪽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철령보의 기마대 사이에 끼어 북쪽으로 내달렸다.

(아슬아슬하지만 그물에서 빠져나갈 수는 있을 것같다.)

완안진은 곁눈질로 오른쪽을 보며 말을 북쪽으로 몰아갔다.

요하 변에 매복하고 있던 철령보의 기마대도 급격히 방향을 틀어 북진하면서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오리(五里) 정도의 간격이 있어서 따라잡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얼굴이 다시 한 번 굳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두두! 히히히힝!

완안진과 다얀이 달려가는 북쪽의 관목더미 뒤에서 두 필의 준마가 뛰쳐나온 때문이다.

(아차!)

완안진은 자신이 다시 한 번 함정에 걸려든 것을 알아차렸다.

적은 앞뒤로 협공을 당한 자신과 다얀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 것까지 미리 계산하고 매복을 숨겨두었던 것이다.

(강행돌파 할 수 밖에...)

차앙!

완안진은 이를 갈며 칼을 뽑았다.

다얀도 겁에 질린 표정으로 역시 칼을 뽑으며 따라온다.

대략 이리 정도 앞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두 필의 준마 위에는 한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중년인이 타고 있다.

짙은 남색 옷을 걸친 청년은 약관 전후로 보이는데 멀리서도 느껴질 정도로 눈빛이 깊고 형형하다.

중년인은 한눈에 보기에도 숱하게 사경을 넘고 살아남은 역전의 용사다. 부릅뜬 두 눈은 먹이를 노리는 맹호 같고 건장한 몸에서는 사나운 살기가 뿜어진다.

(철령보의 오대고수(五大高手)중 한명인 철담도호(鐵膽刀虎) 고불귀(高不歸)겠구나.)

완안진은 중년인의 정체를 짐작하고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독안룡 이탁이 직접 나섰다면 이길 가능성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수하들이라면 해볼만하다.

철담도호 고불귀가 사해검객 종리완과 함께 철령보 오대고수에 속하는 인물이긴 해도 전력을 기울이면 십초 내에 쓰러트릴 수 있다.

하물며 자신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구명절초(救命絶招)가 있다.

그걸 쓰면 십초가 아니라 일격에라도 철담도호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다.

나이 든 놈은 내가 맡겠다. 다얀 너는 젊은 놈을 상대하되 접전은 피하고 추격을 벗어나는 데에만 집중해라.”

완안진은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는 철담도호와 청년을 노려보며 다얀에게 외쳤다.

...”

다얀은 용기를 쥐어짜내어 대답했다.

비록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오이라트 족장 토곤의 핏줄인지라 무공은 꾸준히 수련해왔다.

자신의 현재 무공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안가는 다얀이다.

그래도 상대 역시 자기 또래이니 잘하면 잡히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같다.

두두두!

그 사이에 양측의 거리가 삼십여 장 쯤으로 좁혀졌다.

(장심뢰(掌心雷)를 날려서 일격에 고불귀를 격살하자.)

완안진은 고삐를 쥔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오른손으로 빼든 칼은 미끼에 불과하다.

그의 왼손에는 벼락같이 빠르면서도 천근 무게의 철퇴가 휘둘러지는 위력을 지닌 힘이 모아지고 있었다.

철담도호는 완안진의 오른손에 들린 칼만 주의하다가 느닷없이 날아든 장심뢰의 일격에 몸뚱이가 으스러져 죽을 것이다.

하지만 완안진의 계산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콰드드! 두두두!

거리가 십장쯤으로 좁혀졌을 무렵 그때까지 나란히 달려오던 청년과 철담도호가 갑자기 말의 방향을 바깥으로 틀어서 거리를 확 넓힌 것이다.

마치 완안진과 다얀으로 하여금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라고 길을 터주듯이...

(위험하다!)

완안진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다얀이 위험에 빠졌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적중했다.

! 촤라라!

철담도호와의 거리를 확 벌린 청년이 그때까지 숨기고 있던 쇠사슬을 옆쪽으로 던졌다.

건너편의 철담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청년이 던진 쇠사슬 끝을 틀어쥔다.

완안진과 다얀의 앞쪽에 쇠사슬이라는 장애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거리는 그 사이에 오장 남짓으로 줄어들었고,...

(피하긴 늦었다!)

완안진은 눈을 부릅떴다.

말을 버려라!”

파앗!

완안진은 다급히 외치며 말에서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히익!”

다얀도 상황을 깨닫고 급히 말 등에서 몸을 일으켰다.

콰창! 히히히힝!

둔탁한 쇠사슬 소리와 함께 말들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청년과 철담도호가 양쪽에서 잡아끌고 온 쇠사슬에 목이 걸린 것이다.

! 촤라랑!

완안진과 다얀이 타고 있던 말들이 쇠사슬에 걸리자 청년과 철담도호는 즉시 쇠사슬을 놓았다.

콰당탕! 퍼억! 히히힝!

쇠사슬에 목이 휘감긴 말들이 한 덩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나뒹군 것은 말들만이 아니었다.

!”

완안진보다 한 박자 늦게 말 등으로 올라섰던 다얀이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휘청거렸다.

촤락!

청년이 놓은 쪽의 쇠사슬이 다얀의 하체를 휩쓸어 버린 것이다.

퍼억!

쇠사슬에 다리가 걸려서 균형을 잃은 다얀이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바닥에 패대기쳐졌다.

헌데 뒤로 넘어진 그의 머리가 하필이면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퍼석!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나며 다얀의 몸은 세차게 퍼덕인 후 축 늘어졌다.

... 안돼!”

허공으로 날아오른 후 철담도호를 공격하려던 완안진이 그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얀!”

휘익!

완안진은 다급하게 외치며 다얀의 옆으로 날아 내렸다.

끄윽...”

다얀은 눈을 까뒤집으며 벌벌 떨고 있다. 죽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깨져 기식이 엄엄한 상태다.

이런...”

완안진은 다얀의 뒷통수 쪽의 혈도를 찍어 출혈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막아주며 절망적인 심정이 되었다.

(다얀이 이대로 죽기라도 하면 나 완안진은 성주에게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게 된다.)

벌벌 떠는 다얀을 내려다보며 완안진은 대려장을 향하던 자신의 여정이 끝났음을 알아차렸다.

두두두! 히히힝! 푸르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말들이 토해내는 거친 숨소리가 완안진을 에워싼다.

몰려든 백여 기의 기마대가 거대한 원진을 그리며 완안진과 다얀을 포위하고 있다. 말을 탄 철령보의 무사들은 강전을 재운 활로 완안진을 겨누고 있고...

고대협, 투항할 테니 용납하여 주기 바라오.”

완안진은 말에서 내려 자신에게 다가오는 철담도호 고불귀를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항서(降書)를 쓸 생각이라면 대상이 틀렸소 부성주.”

하지만 철담도호는 옆으로 물러서서 완안진의 예를 피하며 말했다.

하하하! 나 완안진이 오늘 거푸 세 번이나 실태를 범하는구먼.”

옆으로 물러서는 철담도호를 보며 완안진은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철담도호가 비켜서는 뒤쪽에서 쇠사슬을 던졌던 냄색 옷의 청년이 다가오고 있다.

방금 전 큰일을 치뤘음에도 청년의 눈빛은 깊게 갈아 앉아 있는데 걸음걸이는 무거우면서도 거리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철담도호를 비롯하여 철령보의 모든 무사들의 시선은 그 청년을 향하고 있다.

비로소 완안진은 약관도 안되어 보이는 이 청년이 자신을 추격해온 철령보 무사들의 수령임을 알아차렸다.

함정에 거푸 두 번 빠진 것도 모자라 그 함정의 설계자가 누군지도 알아보지 못했다.

이십 년 가까이 신랑성을 이끌어온 완안진답지 않은 실책이다.

부성주, 투항하시겠다면 항장(降將)으로 예우해드리겠소.”

완안진의 일장 앞에 멈춰선 청년이 그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말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운명을 타고난 인생이다.)

완안진은 아들뻘인 청년이 내려다보는 것임에도 그리 위화감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졌다.

철령보의 소보주 검사자(劍獅子) 백남빈! 중원무림에서 신진제일고수라 불린다는 그대에게 투항하면 수치심이 조금이나마 감해지겠군.”

완안진은 바닥에 내려놓았던 칼을 다시 집어들며 말했다.

청년은 바로 철령보의 소보주 백남빈이었다.

 

백남빈의 별호는 검사자다.

그에게 검사자라는 별호를 지어준 것은 무황성의 당대 성주인 주진충(朱盡忠)이다.

무황성에서는 매년 젊은 무사들중 일인자를 가리는 비무대회, 등천제(登天祭)가 열린다.

헌데 오 년 전, 불과 열네 살 나이에 등천제에 출전한 백남빈이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트리고 최종 승자가 되었었다.

처음에는 고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백남빈이 이기는 일이 반복되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백수의 왕인 사자 같다고 해서 주진충은 백남빈에게 검사자라는, 나이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별호를 내려주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무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백남빈의 존재를 알고 있다.

 

투항의 조건을 말씀해보시오.”

백남빈이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수하의 치료와 무사귀환을 원하네. 대신 본인이 대려장으로 가던 목적은 숨김없이 자백하겠네.”

완안진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칼의 손잡이를 백남빈에게 내밀며 대답했다.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 대협의 투항을 받아들이겠소.”

백남빈은 완안진이 내민 칼을 받으며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몽고 최강의 부족 오이라트가 세운 신랑성의 이인자 완안진은 무황성 동북 분타 철령보의 포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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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발의 미녀

 

 

사신각은 호천무맹이 봉문한 후 활동을 시작한 악명 높은 청부살인조직이다.

청부를 받으면 누구라도 죽여준다고 장담하며 설령 청부 대상이 황제라 해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적정한 대가를 치러야하겠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은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하게 살아간다.

그러다가 지령이 떨어지면 <()>자가 적힌 복면을 쓰고 표적을 척살을 시도한다.

무공의 고하를 떠나 일단 사신각의 표적이 된 자는 결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게 무림의 정설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목적은 알 수 없지만 사신각의 살수들이 기련산의 골골을 뒤지고 다니는 중이라고 하외다.”

독안랑이란 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딱히 누군가를 두려워해본 적이 없는 독안랑이다.

하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언제 어디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인물에게 공격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찾고 있는 옥가년을 노리는 건 아닐 테고...”

금포장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그 역시 사신각의 살인귀들에는 꺼리는 바가 있었다.

루주께서 결심만 하지만 우리 마천루(魔天樓)의 형제들이 사신각의 인간백정들을 기련산에서 몰아낼 수 있을 것이오.”

독안랑이 하나 뿐인 눈을 투지로 물들이며 말했다. 외눈의 늑대라는 별호에 어울리게 그자는 밥 먹는 것보다 싸움을 좋아한다.

사신각과는 장차 거래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굳이 척을 질 필요는 없소.”

루주라 불린 금포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면 사신각과는 충돌하지 말고 옥가 년의 종적을 찾도록 하시오.”

그리하겠소이다!”

대답하는 독안랑의 얼굴에 안도하는 표정이 지나갔다. 어떤 싸움이라도 마다하지 않지만 상대가 사신각이라면 꺼림칙한 면이 있는 것이다.

휘익!

독안랑은 다시 날아올라 멀어져갔다.

삐익! !

그와 함께 여기저기서 호각소리가 들리며 적지 않은 사람 그림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운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놈!”

휘익!

금포장한도 힐끔 소년을 훑어본 후 몸을 날렸다. 그자는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 탓에 소년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다.

곧 금포장한의 모습도 소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휴우!"

그제서야 비로소 소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이마로 식은땀이 번져 나왔다. 금포장한이 자신을 해치려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소년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쉴 때였다.

!

돌연 소년의 무릎 위에 펼쳐져 있는 죽서기년 위로 새빨간 선혈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주머니!"

소년은 놀라 나무 위를 올려다보았다.

"으음!"

쿠웅!

그 직후 나직한 신음소리와 함께 나무 위에서 은발여인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는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괜찮으십니까?"

깜짝 놀란 소년은 급히 은발여인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은발여인의 안색은 밀랍같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으며 숨결은 희미하게 잦아들고 있었다.

(왜 이러실까?)

소년은 갑작스러운 은발여인의 변화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은발여인의 파리한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말을 하신다.)

소년은 급히 여인의 입 근처로 귀를 기울였다.

"가슴... 약병..."

은발여인은 미약한 음성으로 그같이 말하고는 실신해버렸다.

(그러니까 자신의 가슴에 있는 약병을 찾아달란 말씀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으나 어쨌든 상대는 여자다. 생면부지인 여자의 가슴을 뒤지는 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에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의술에 문외한인 소년이 보기에도 은발여인의 상세는 아주 위중해 보였다.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은발여인이 걸치고 있는 검은색 저고리의 고름을 풀었다.

!

은발여인의 가슴을 옥죄고 있던 옷고름이 풀려졌다.

출렁!

그러자 한 쌍의 살덩이가 눌려있던 용수철처럼 튀어나왔다.

"...!"

소년은 숨이 탁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성숙한 여인의 젖가슴이다.

출렁! 출렁!

작은 수박을 반으로 쪼개서 엎어놓은 것같은 한 쌍의 살덩이들이 물 풍선처럼 흔들거린다. 엄청난 크기에 비해 젖가슴 위에 돋아있는 젖꼭지는 팥알 정도 크기에 불과하다.

그 매혹적인 살덩이들을 본 순간 소년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어놀고 귀는 멍멍해진다.

본래 은발여인은 유난히 큰 젖가슴을 감추기 위해 비단 천으로 꽁꽁 싸매고 있었다.

헌데 그 젖 가리개가 어떤 강력한 힘에 의해 으스러져 있었다.

은발여인이 걸친 흑의의 재질은 천잠사라 외력에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젖 가리개는 평범한 비단이라 으스러진 것이다.

(... 이럴 수가...!)

헌데 당황하던 소년의 눈에 경악의 빛이 더해졌다.

한 쌍의 육중한 살덩이 사이에 시뻘건 손바닥 자욱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희디흰 속살에 찍힌 핏빛 손자국은 너무나 선명하다.

그 때문에 소년은 핏빛 장인을 누가 일부러 그려 놓은 것이 아닌가 착각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결코 그린 것이 아니었다.

(이 손바닥 자국이 이 분을 실신하게 만든 원인인 듯한데...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잠시 놀라던 소년은 서둘러 은발여인의 저고리 섶 안쪽을 뒤졌다.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소년의 손에 은발여인의 젖가슴이 느껴졌다.

따스하고 뭉실뭉실한 감촉은 한참 피가 뜨거울 나이인 소년에게는 아찔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이게... 이게 여자의 젖가슴 감촉이로구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가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소년은 곧 은발여인의 가슴 섶에서 하나의 옥병을 찾아냈다.

반 뼘도 안되는 자그마한 옥병 안에는 밀랍에 싸인 세 알의 호두알만한 환약이 들어있었다. 비록 밀랍에 싸여있지만 환약에서는 그윽한 향기가 풍겨 나와 주위를 진동했다.

(이것인 모양이다.)

소년은 눈을 빛내며 급히 한 알의 환약을 꺼내 밀랍을 벗겼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입 안에 넣어주려 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입을 꼭 다문 채 실신하고 있는 상태라 환약을 넣어줄 수가 없었다.

(어찌한다?)

소년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은발여인은 인사불성이라 스스로 환약을 삼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환약을 먹이려면 물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소년은 준비해온 물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렇다고 근처의 샘이나 개울로 물을 뜨러 갔다 올 여유는 없다.

물을 뜨러 갔다 오는 사이에 사경을 헤매고 있는 은발여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어쩔 수 없다!)

잠시 갈등하던 소년은 결심을 했다. 비록 물은 없지만 은발여인에게 환약을 먹일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소년은 환약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상큼하면서도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향기가 입안을 가득 메운다.

그와 함께 환약은 소년의 침에 녹아 걸죽해졌다.

(용서하십시오.)

환약을 자신의 침으로 녹인 소년은 입술을 은발여인의 창백한 입술 위에 포개었다.

(허억!)

입술에 느껴지는 너무도 보드라운 감촉에 소년은 당황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여인의 입술... 그 황홀한 감촉에 금방이라도 심장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소년은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으며 은발여인의 꼭 다물려진 입술을 혀를 써서 벌렸다.

여인의 매끈한 치아가 혀끝에 느껴져 소년을 아찔하게 만든다.

소년은 비몽사몽간을 헤매면서 자신의 침으로 녹인 환약을 여인의 입속에 흘러 넣어 주었다.

잠시 후 소년은 마지못해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영원히 떨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이미 침으로 녹인 환약은 모두 은발여인의 입속으로 흘러들어간 상태였다.

은발여인의 입술에서 입술을 뗀 소년의 가슴은 여전히 터질 듯 두근거리고 있고 귀는 멍멍하다.

입가에 남아있는 꽃잎의 그것같은 부드럽고 매끄러운 감촉..

이성과의 처음으로 입맞춤을 한 경험은 실로 충격적이면서도 황홀한 것이었다.

(아름다운 분이시다. 어머니 못지않게...)

소년은 망연한 표정으로 은발여인의 조각처럼 단아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소년은 넋이나가서 은발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사이에 은발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발그레한 혈색이 돌아왔다. 소년이 먹여준 약기운이 온몸으로 퍼진 것이다.

"휴우..."

이윽고 긴 한숨과 함께 은발여인은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 은발여인은 흠칫했다. 가슴 부위가 서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젖 가리개가 훼손되었겠구나.)

자신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 알아차린 은발여인의 얼굴에 홍조가 살짝 어렸다.

그러면서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물기 젖은 봉목이 나타났다.

"... 괜찮으십니까 아주머니?"

은발여인이 눈을 뜬 것을 본 소년은 당황하여 시선을 돌리며 얼버무렸다.

소년의 순진한 모습에 은발여인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여자의 젖가슴을 처음 보느냐?"

은발여인은 드러난 젖가슴을 가릴 생각도 않고 짓궂게 물었다.

"... 당연하지 않습니까?"

소년이 화난 음성으로 내뱉으며 일어서려 할 때였다.

!

은발여인의 섬섬옥수가 소년의 손목을 잡았다.

지극히 연약하고 보드라운 섬섬옥수다.

하지만 일단 가녀린 그 손에 잡히자 소년은 움쭉달쭉도 할 수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은발여인은 소년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젖가슴으로 가져갔다.

"...!"

부르르!

소년은 당혹과 충격으로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손바닥 가득히 느껴지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육질의 감각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의 손이 그대로 여인의 젖가슴으로 녹아들어가는 것같은 기분이 되었다.

은발여인은 그윽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처녀의 몸이란다."

"... 무슨 뜻이십니까?"

소년은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은발여인은 그런 소년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나 옥여상의 젖가슴을 보고 만진 것은 네가 처음이란 말이다."

"... 죄송합니다."

소년은 얼굴을 붉히며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은발여인은 고개를 살래 저었다.

"그런 말 할 것 없다. 너는 나의 목숨을 구해 주었으니... 원한다면 나의 모든 것을 줄 수도 있단다."

그렇게 말하는 은발여인, 옥여상의 얼굴에 발그레 홍조가 어렸다.

(... 모든 것을 줄 수 있다?)

소년은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미 옥여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나이인 것이다.

"...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소년은 얼굴이 발개진 채 은발여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은발여인의 젖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돌아앉았다.

"호호호 매정한 도련님이시군요."

옥여상은 유쾌하게 웃으며 일어나 앉았다.

(비록 어리지만 세상에는 아직도 충후한 군자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내도 있구나.)

옥여상은 돌아앉은 소년을 살펴보며 벌어져 있는 상의를 여몄다.

"장난으로 해본 소리이니 마음에 둘 것 없다. 헌데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의 이름을 아직도 모르고 있구나."

옷고름까지 단단히 동여맨 옥여상은 토라진 소년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녀의 말에 소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검추(劒秋)! 고검추(高劒秋)라고 합니다."

"고검추! 좋은 이름...!"

미소 지으며 말하던 옥여상은 일순 흠칫했다.

그녀는 놀란 눈길로 소년, 고검추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단아한 가운데 강직한 인상을 풍기는 고검추의 얼굴은 옥여상으로 하여금 어떤 인물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 그러고 보니 그를 닮지 않았는가? 성까지도 그와 같은 고씨이고...)

옥여상은 어떤 예감에 전율했다.

소년 고검추가 대체 누구를 닮았단 말인가?

(하지만 그에게 후사(後嗣)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아미를 모으며 잠시 생각하던 옥여상은 고검추에게 물었다.

"혹시 고창룡이란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느냐?"

고창룡이라면 욕정에 눈이 멀어 자신을 길러준 사모를 유린했다는 희세의 패륜아가 아닌가?

그렇다면 소년 고검추가 정파의 수치인 철사자 고창룡을 닮았단 말인가?

"고창룡? 저와 종씨인 듯하지만... 그런 분은 알지 못합니다."

고검추는 검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고창룡을 모른다?"

옥여상은 실망과 안도가 교차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그보다 이 주위에 조용히 쉴만한 곳이 있겠느냐?"

"있기는 합니다만... 왜 그러시는지요."

고검추는 의아한 기색으로 옥여상을 바라보았다.

옥여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설삼신단(雪蔘神丹)이 비록 희세의 영약이기는 하지만 쇄심마장(碎心魔掌)에 당한 나의 내상을 완전히 치료해 주지는 못한단다."

그녀의 말에 고검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삼신단이니 쇄심마장이나 하는 이름들은 그에게 생소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옥여상의 말을 들었다면 아연실색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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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두(魔頭)를 만나다!

 

 

층층산상(層層山上)-!

손가락으로 집어 올렸던 두꺼운 천이 다시 내려앉으며 겹쳐진 듯한 형상의 바위산이 있다.

모두 일곱 층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산의 뿌리 쪽은 사시사철 안개에 덮여있어서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깊은 계곡이다.

바위산은 높고도 험준한 농산산맥(隴山山脈) 중간쯤에 우뚝 솟아있다.

그 때문에 바위산 정상에 서면 사방 수백리가 한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임청우의 눈에는 그 절경이 들어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어째서 하나뿐인 아들인 나를 그토록 증오하시는 걸까?)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 정상에 선 채 임청우는 벌써 이각(二刻; 30) 넘게 번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어머니 임단심이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건 아침 무렵의 일이다.

그 직후 집을 나섰지만 어머니 곁을 아주 떠난 것은 아니다.

임청우는 어머니의 경고대로 오늘 안에 농산(隴山)을 떠날 결심을 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해둘 일이 있었다.

어머니의 고질을 다스리는 데 쓸 약초를 채집할 수 있는 대로 채집해야하고 또 산짐승도 보이는 대로 잡아서 갖다 드려야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 했지만 임청우에게 어머니는 유일한 핏줄이다.

떠날 때 떠나더라도 자식의 도리는 다 해야만 한다.

임청우가 서있는 바위산의 남쪽은 깎아지른 절벽이라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남쪽 외의 세 방향은 험하긴 해도 비스듬히 경사가 져 있어서 올라올 수 있다.

임청우는 전에도 여러 번 이 바위산에 올라왔었다.

사방이 확 트인 바위산 정상에 서면 어머니의 악담과 학대로 인해 생긴 마음의 상처가 어느 정도 낫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임청우는 약초를 담는 망태와 사냥을 위해 준비한 활을 등에 짊어지고 있다.

망태에는 제법 많은 약초가 들어있다. 이 바위산까지 오는 동안 채집한 약초들이다.

임청우의 오른쪽 허리춤에는 큼직한 호리병이 매달려 있었다. 구리로 만들어진 호리병에는 산행 중에 지치고 힘들 때 마시기 위해서 준비한 술이 들어있다.

임청우가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것은 호리병뿐만이 아니다.

왼쪽 허리춤에는 특이한 쇠붙이가 하나 끼워져 있다.

길이 한 자 정도인 쇠붙이는 끝이 뾰족하긴 하지만 칼이나 검은 아니다. 날이 서있지 않고 투박하기 때문이다.

전체 모양이 천자가 제후를 봉할 때 드는 홀()을 닮은 쇠붙이다.

먹물에 담았다가 꺼낸 듯 검은 색인 쇠붙이 양면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임청우는 이 쇠붙이에 북두홀(北斗笏)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비록 날은 서있지 않지만 북두홀은 아주 단단해서 어떤 것에도 손상을 입지 않는다.

임청우는 호미나 칼 대신 북두홀을 써서 약초를 캐왔다.

 

(아버지를 거론한 게 어머니의 심기를 건드렸겠지.)

임청우는 한숨을 쉬었다.

아침 무렵, 임단심은 편치 않은 몸으로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임단심은 임청우가 어제 사냥해온 꿩과 비둘기로 제대로 된 요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을 들여다보던 임청우는 별 생각없이 말을 꺼냈었다.

 

<아버지도 날짐승 요리를 좋아하셨나요?>

 

그 한마디가 임단심을 폭발하게 만들었다.

어머니 앞에서는 절대 아버지를 거론하면 안된다는 금기(禁忌)를 임청우는 깜빡했던 것이다.

임청우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어머니가 아버지를 철천지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면 임청우가 나이가 들수록 어머니의 학대는 점점 더 강도가 심해졌었다.

아마도 임청우가 자라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때문일 것이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어머니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리자.”

임청우는 머리를 흔들어서 번민을 떨쳐버리려 했다.

떠나라 하셨으니 떠나면 된다. 하긴 농산 따위는 나 임청우가 뛰어놀기엔 너무 작기도 하지. 하하하!”

!

임청우는 짐짓 호탕하게 웃으며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걷어찼다.

! !

절벽 아래로 떨어진 돌멩이는 켜켜이 쌓인 바위에 부딪혀서 경쾌한 소리를 낸다.

모두 칠층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은 각층의 높이가 수십 장 이상이다.

그 때문에 돌이 부딪히는 소리에 상당한 간격이 있다.

임청우가 점점 멀리 들리는 돌 부딪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끼이이!

절벽 아래쪽에서 무언가의 다급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뭐지?)

임청우는 고개를 내밀어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화악!

그런 임청우의 눈에 새 한 마리가 절벽 중간을 휘감고 있는 구름을 뚫고 치솟아 오르는 게 보였다. 활짝 편 날개 길이가 일장(一丈;3미터)이 넘는 거대한 독수리였다.

(독수리들의 왕!)

임청우의 눈이 커졌다.

바위산 중턱에 걸린 구름을 뚫고 날아오르는 거대한 독수리는 임청우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놈이었다.

그 놈은 농산 일대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이었다.

덩치가 크고 힘이 좋은 그 놈이 산양이나 늑대, 심지어 다 자라지는 않았어도 곰까지 채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저 하늘의 폭군이 무슨 일로 깊디깊은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던 것일까?)

임청우는 경계하며 뒤로 물러섰다. 독수리들의 왕이 자신을 먹잇감으로 노리기라도 하면 위험해질 수 있다.

화악! 화악!

임청우가 물러서는 사이에 독수리는 힘차게 날개 짓을 하며 절벽 위쪽으로 떠올랐다.

(!)

바위산 위로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올려다보던 임청우는 한 번 더 놀랐다.

강철같이 번쩍이는 독수리의 두 발이 뱀을 한 마리 움켜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 뱀은 독수리의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았다. 몸길이가 채 두자도 되지 않아서 독수리의 끼니거리로는 턱없이 모자라 보였다.

다만 독수리에게 잡혀가고 있는 그 뱀은 크기는 작아도 생김새는 매우 특이했다.

몸 전체가 피를 칠한 듯 붉은 비늘로 덮여있으며 머리에는 황금색 뿔이 두 개 돋아나 있다.

크기는 비록 세치 남짓에 불과하지만 황금색 뿔의 형상은 영락없이 용()의 그것이었다.

카아!

뿔이 달린 작은 뱀은 독수리의 발톱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지만 독수리의 발톱은 강철 족쇄같아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 !

뿔 달린 작은 뱀은 몸부림치면서 독수리의 발목을 연신 물고 있었다.

그러나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하고 있는 독수리들의 왕도 평범한 놈은 아니었다.

그놈의 다리는 아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어서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은 흠집조차 못 내고 있었다.

발목 위쪽의 깃털로 덮인 부분이라면 뿔 달린 작은 뱀의 이빨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뿔 달린 작은 뱀의 몸이 워낙 작아서 주둥이가 그곳까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뿔 달린 작은 뱀은 어떻게든 독수리 다리에 상처를 내보려고 반복해서 물고 있었다.

카아!

헌데 뿔 달린 작은 뱀이 연신 자신의 발목을 무는 걸 무시하고 날아오르던 독수리는 갑자기 다급한 비명을 질렀다.

바위산 정상에 서있던 인간이 자신에게 활을 겨누고 있는 걸 본 때문이다.

임청우는 짊어지고 있던 활을 벗어서 시위를 끝까지 당기고 있었다.

반달처럼 부푼 활에는 강철 촉이 달린 화살이 매겨져 있다.

화악!

깜짝 놀란 독수리는 급히 방향을 틀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퍼억!

십여 장쯤인 거리를 단번에 가르며 날아온 화살이 독수리의 가슴팍에 깊이 박혀버렸다.

끼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독수리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뒤집어졌다.

임청우가 쏜 화살이 제대로 상처를 입힌 것이다.

화악!

농산산맥의 하늘을 지배해온 독수리들의 왕의 거구는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이내 독수리들의 왕과 그놈이 쥐고 있던 뿔 달린 작은 뱀은 바위산 중턱을 휘감고 있는 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쓸데없는 짓을 했다.”

임청우는 한숨을 쉬며 활을 내렸다.

잡혀가는 작은 뱀이 마치 운명에 희롱당하는 내 신세 같아서 충동적으로 쏘고 말았다.”

딱히 독수리들의 왕이 미웠던 것은 아니다.

다만 살려고 몸부림치던 뿔 달린 작은 뱀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아서 손을 쓰게 된 것이다.

이래저래 여기서 너무 지체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자.”

임청우는 하늘을 보며 돌아섰다.

해는 어느덧 중천을 지나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헌데 임청우가 막 절벽을 등지며 돌아설 때였다.

여기가 농산 표운봉(飄雲峰)이냐?”

벼락 치는 듯한 목소리와 함께 임청우의 몸이 번쩍 들려졌다. 누군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가 멱살을 틀어잡아서 쳐든 것이다.

!

놀라서 활을 떨어트리는 임청우의 눈앞에는 삼태기만큼이나 크고 길쭉한 말()같은 얼굴이 두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다.

손잡이와 칼집이 온통 핏빛인 칼을 등에 메고 있는 이 괴인의 키는 무려 팔척(八尺;2미터 40센티)이 넘어 보인다.

그 때문에 그리 작지 않은 키의 임청우였지만 말같은 얼굴을 한 괴인의 손에 멱살이 잡혀 쳐들려지자 발이 허공에서 대롱거린다.

여기가 표운봉이냐고 묻질 않았느냐?”

성미 급한 괴인이 다시 버럭 소리쳤다.

끄윽...”

멱살이 틀어 잡히면서 옷깃에 목이 조여진 임청우의 얼굴이 벌겋게 변했다. 대답은커녕 숨조차 쉬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질식해버릴 것 같은 위기감을 느낀 임청우는 왼쪽 허리춤에 끼우고 있던 북두홀을 급히 뽑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멱살을 쥐고 있는 괴인의 팔뚝을 북두홀로 힘껏 내리찍었다.

!

북두홀이 괴인의 팔뚝을 찍자 마치 철벽을 때리기라도 한 듯 요란한 쇳소리가 냈다.

!

이어 괴인의 팔뚝에서 일어난 강한 반탄력에 북두홀은 임청우의 손아귀를 벗어났다.

! 따당! 휘익!

바닥에 떨어졌던 북두홀은 쇳소리를 내며 몇 번 튕겨졌다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이놈이 감히 마면혈도(馬面血刀) 어르신의 말씀에 대답을 거부해?”

말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당돌한 반격에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표정이 되었다.

! !

그자는 임청우를 패대기칠 생각인지 번쩍 쳐들어 빙빙 돌리기 시작했다.

임청우의 몸이 말대가리 괴인의 머리위에서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아갔다.

뒈져라!”

스스로를 마면혈도라고 밝힌 말 대가리 괴인은 임청우의 몸뚱이를 서너 바퀴 돌린 후 절벽을 향해 던져버렸다.

휘익!

던져진 임청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절벽으로 날아갔다.

맞소. 여기가 표운봉이오!”

멱살이 풀려서 숨을 쉴 수 있게 된 임청우가 날아가면서 소리쳤다.

?”

마면혈도가 의외라는 듯이 소리치더니 몸을 움찔했다.

화악!

움찔하는가 싶은 순간 그자는 어느새 임청우 앞에 이르러 다시 멱살을 잡으려했다.

그러나 임청우의 몸은 이미 절벽 밖에 이르러 있었다.

임청우를 잡으려면 마면혈도 역시 발을 땅에 둘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막 임청우의 멱살을 잡으려던 마면혈도의 손이 움츠러들었다.

우라질!”

뻗었던 손을 급히 거두어들인 마면혈도가 욕설을 내뱉었다.

말하려면 조금 빨리 할 것이지... 아가리를 찢어죽일 놈같으니...!”

바로 그때였다.

화라락!

절벽 아래로 추락하려던 임청우의 몸이 돌연 돌개바람에 휘말린 낙엽처럼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임청우를 휘감아서 끌어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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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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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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