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제 9장

 

           겁난(劫難) 중의 인연 (1)

 

 

“쯧쯧! 하여간 계집만 보면 물건을 세운단 말이야!”

비틀거리며 초지에 내려선 철선동시는 혀를 찼다.

모옥 앞 꽃밭에서는 마면혈도가 임단심을 찍어 누른 채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저년이 대체 무슨 암기를 날렸기에 피할 수가 없었지?”

철선동시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허벅지에 박힌 철정(鐵釘)을 뽑아들었다. 새파란 빛을 발하는 길쭉한 쇠못 형태의 암기였다.

“사망정(死亡釘)!”

그 쇠못을 본 순간 철선동시는 독사라도 만진 듯 놀람과 두려움이 뒤범벅된 음성으로 외쳤다.

사망정은 그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누군가의 신물(信物)이다.

비록 그 인물이 무림에서 활동하지 않은지 오래 되었지만 그의 공포스러운 무공과 잔혹한 술수를 떠올리자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철선동시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허벅지의 통증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철선동시는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치 멍석을 말아간 듯이 화초들이 길게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그 흔적은 서쪽의 절벽 근처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마면혈도에게 돌을 던진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찾을 수 없었다.

불안한 의혹을 가슴에 품고 두려움을 손끝에 간직한 채 철선동시는 모옥 앞으로 갔다.

임단심을 화초 위에 던져놓고 겁탈하는 마면혈도는 어느덧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마면혈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격렬하게 둔부를 들썩이고 있고 혈도가 제압당한 임단심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채 유린당하고 있었다.

“지금이 한가하게 그 짓이나 할 때냐 말대가리야?”

팟!

철선동시는 버럭 외치며 마면혈도의 등덜미를 잡아당겼다.

마면혈도는 갑자기 임단심의 몸에서 떨어지게 되자 벌컥 화를 내며 소리쳤다.

“우라질 미친놈아! 마음이 있으면 이 형님이 먼저 즐긴 후에 즐길 것이지 도중에 방해를 해?”

마면혈도의 말의 그것처럼 거대한 남성에는 임단심을 유린한 흔적이 묻어있었다.

철선동시는 마면혈도의 악다구니에 대꾸하는 대신 왼손을 불쑥 그자의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철선동시의 손에는 사망정이라고 부르는 쇠못이 들려있었다.

“사... 사망정!”

순간 마면혈도의 성욕으로 인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찬물을 끼얹은 듯 변해버렸다.

그자는 이마로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었다.

“설...설마 저 계집이 마황(魔皇)과 관계가 있다는 말...!”

마면혈도는 다시 한 번 자기가 강간하던 임단심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탕한 눈빛이 아니라 두려움이 깃든 눈빛이었다.

철선동시가 무거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대형이 말한 삼보면천을 저 계집이 펼쳤다. 어쩌면 대형이 찾고 있는 자는 마황, 바로 그자인지도 모른다.”

마면혈도가 거듭 안색이 변해 소리쳤다.

“그건 안돼! 안돼! 대형의 무공이 강하기는 하지만 마황은 결코 당할 수 없다.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철선동시의 눈빛이 기묘하게 변했다.

“말대가리, 그럼 마황과 관계가 있는 계집을 강간한 자넨 무슨 짓을 한 건가?”

“으으으..."

마면혈도의 손발이 덜덜 떨렸다.

마면혈도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에 속한다. 제 아무리 상대가 강하더라도 이같은 공포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헌데 마황이 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마면혈도가 이름만 듣고도 공포에 떨게 되는 것인가?

정신이 아득해졌던 마면혈도가 갑자기 흉포한 눈빛을 발하며 소리쳤다.

“이 계집을 죽여서 수십, 아니 수백 수천 토막을 내고 기름에 태워서 재로 만들어 바람에 날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한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마면혈도의 음성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배어있었다.

스르릉!

하지만 그자는 혈도를 뽑아들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감히 마황에게 불경한다는 것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철선동시는 암암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황이 이번 일을 안다고 하더라도 직접 손을 쓴 것은 말대가리니 나와는 상관이 없다. 그가 모르면 더욱 좋고...)

철선동시는 마면혈도가 내릴 결론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로 하여금 손을 쓰게 하기 위해 말로써 그자를 자극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교활한 심보가 깔려 있는 행동이었다.

사지를 활짝 벌리고 쓰러져 있는 임단심 앞으로 다가간 마면혈도는 눈을 질끈 감고 혈도를 내리쳤다.

번쩍!

혈도가 붉은 빛과 함께 싸늘한 한기를 내뿜었다.

한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쉬쉿!

한 가닥의 붉은 빛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와 마면혈도의 혈도를 가로막고 튕겨나갔다.

쨍! 하는 맑은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칼도 붉은 빛이고 날아온 물건도 붉은 빛이었다.

“억!”

마면혈도는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그자의 혈도는 금옥(金玉)을 무우 베듯 할 수 있는 보도(寶刀)다.

그런데도 옆에서 날아온 붉은 빛은 튕겨져 나갔을 뿐 베어지지 않았다.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임단심을 없애려던 순간이었다.

그때에 맞춰서 자신의 행위를 방해하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에 마면혈도는 심장이 멎을 정도로 놀랐다.

쉬쉭!

그 사이에 튕겨져 나갔던 붉은 빛이 방향을 바꿔 다시 마면혈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번개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번쩍! 번쩍!

마면혈도도 이번에는 모든 공력을 끌어올려 혈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터텅! 쉬익!

붉은 빛은 혈도에 맞아 튕겨나갔다가 다시 빛살처럼 덤벼들 뿐이었다.

(대체 무슨 괴물이기에...)

마면혈도는 손아귀에서 진땀이 배어나는 것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섰다.

철선동시는 그 놀라운 광경을 지켜보기만 할 뿐 마면혈도를 위해 손을 쓰지는 않았다.

비록 삼괴의 일원으로서 함께 이름을 날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은 철저한 앙숙이었다. 자기에게 어떤 이득이 돌아오지 않는 한 상대방을 도울 관계는 결코 아닌 것이다.

오히려 상대방을 죽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원수에 가까운 관계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는 해도 붉은 물체가 언제 철선동시 자신을 향해 공격의 방향을 돌릴지 모르는 일이다.

철선동시는 붉은 물체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마면혈도를 천천히 따라갔다.

그때 뒤로 물러서던 마면혈도가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금관혈린사! 금관혈린사다!”

그자를 공격했던 붉은 물체는 바로 척포였다.

임청우도 모르게 호리병에서 빠져나온 척포가 임단심을 죽이려는 마면혈도를 막아선 것이다. 천고의 영물답게 척포는 임단심과 임청우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

마면혈도의 외침에 철선동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독사만 먹고 산다는 금관혈린사가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독을 가진 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연신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마면혈도를 공격하는 붉은 물체는 머리에 황금빛 뿔이 달려있으며 그리 크지 않은 몸은 타는 듯 붉은 비늘로 뒤덮여 있는 뱀이었다.

뱀들의 제왕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독물(毒物)들의 제왕이기도 한 금관혈린사의 모습이 틀림없다.

금관혈린사는 품고 있는 독이 지독할 뿐 아니라 도검이 불침하여 쉽사리 죽일 수도 없다.

번쩍! 텅! 텅!

그 사이에도 마면혈도는 혼신의 힘을 다해 금관혈린사, 즉 척포의 공격을 막아내며 물러서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는 자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주 어리석은 인물은 아니다.

만약 어리석은 인물이었다면 상승의 무공을 익혀 무림의 최절정 고수의 반열에 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면혈도 역시 금관혈린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금관혈린사의 독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금관혈린사가 독기를 내뿜으면 이장 밖에 있는 황소도 쓰러뜨린다.

한데 금관혈린사는 집요하게 마면혈도를 물려고 덤빌 뿐, 독기를 내뿜지는 않았다.

(저 놈이 왜 독기를 뿌리지 않는 건가?)

마면혈도는 이상한 생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는 척포가 임단심에게 해가 갈까봐 독기는 뿜어내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철선동시가 놀란 음성으로 소리쳤다.

“계집이 없어졌다!”

“뭐?”

마면혈도는 당황하여 하마터면 척포에게 물릴 뻔 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고?)

다시 절벽위로 올라오려던 임청우는 깜짝 놀랐다.

임청우는 철선동시가 철선으로 내뿜은 냉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어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었다.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머릿속으로 북두무랑에서 본 천상열차분야도가 떠올랐다.

상하 좌우로 경계가 없이 펼쳐진 별의 바다...

광막한 넓이와 깊이를 지닌 그 별의 바다에 비하면 자신의 피를 얼어붙게 만든 냉기는 실바람만도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몸에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주관하는 북두칠성이 깃들어있기까지 했다.

그것을 깨닫자 얼어붙었던 몸에 감각이 갑자기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는 순간 자신을 움켜쥐려던 철선동시가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기회는 놓칠 수 없었다.

감각은 돌아왔어도 아직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못하는 몸으로 절벽을 향해 굴러갔다.

철선동시의 시선을 피해 절벽에서 굴러 떨어진 임청우는 동굴 입구의 돌출부에 떨어졌다.

그곳에 누워 몇 번인가 긴 호흡을 들이고 내쉬자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벌벌 기어 동굴로 기어들어간 임청우는 떠나면서 남겨두었던 활과 화살을 챙겼다. 마귀같은 두 괴물에게 화살이 통할지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헌데 화살 통을 등에 짊어지고 활은 목에 건 채 다시 절벽 위로 기어 올라가려는데 철선동시가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었다.

어머니가 없어졌다니...

어머니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절벽의 삐져나온 부분을 잡고 기어 올라간 임청우는 머리만 내밀고 모옥 쪽을 살펴보았다.

“말 대가리! 넌 계곡 입구 쪽을 살펴봐라!”

철선동시가 마면혈도에게 고함을 치며 모옥 앞으로 달려가는 게 보였다.

마면혈도는 여전히 척포에게 밀리며 계곡 입구 쪽으로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어머니 임단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때 밤바람이 작은 천 조각 하나를 임청우 앞으로 날려 보냈다.

그것을 본 순간 임청우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얼굴 앞을 스치고 절벽 밑으로 사라지는 천조각에는 어머니의 체향이 묻어있었던 것이다.

임단심이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지 못한 임청우는 그녀의 옷이 마면혈도에 의해 갈가리 베어졌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어떤 이해하지 못할 느낌에 머리끝이 쭈뼜해졌을 뿐이다.

 

펑펑!

전력을 다해 장력을 쏟아내어 척포를 날려버린 마면혈도는 모옥 앞에 망연하게 서있는 철선동시 곁으로 달려갔다.

임단심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는지 척포는 더 이상 마면혈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옥 앞에 심어져 있었던 화초들은 짓이겨져 있고 그 위에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임단심이 당한 무참한 유린의 흔적이다.

철선동시는 냄새로 임단심의 종적을 찾으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도리가 없다.

한마디로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분명히 네 곳의 마혈(痲穴)을 짚어놓았는데...”

다가온 마면혈도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라진 여자가 보통 여자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공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황과 관련이 있는 여자인 것이다.

철선동시와 마면혈도는 겁에 질려 모옥을 뒤지고 비련곡의 풀뿌리 하나까지 살펴보았다.

 

허둥대는 두 괴물을 숨어서 지켜보던 임청우는 너무 깊어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사라졌다면, 다른 곳으로 갈 곳이 없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음이 틀림없다.

“저 말대가리가 어머니를...!”

임청우는 나직하게 내뱉었다.

저 멀리서 마면혈도가 바지도 입지 않은 채 허둥대며 돌아다니고 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절벽으로 몸을 던진 것이 말대가리 때문임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감히 절벽 위로 올라갈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지금 죽고 싶지는 않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2

 

                        달아난 신부

 

 

 

(천한 계집?)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철이 든 이래 남에게서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은 때문이다.

모두 물러가라. 소성주는 내가 달래서 화를 풀게 할 테니...”

진상파가 분노에 치를 떨 때 일신재 입구에 이른 구숙정은 사우 일행에게 물러가라는 손짓을 했다.

존명!”

사우는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철수한다!”

이어 그자는 앞장서서 일신재 앞을 떠났다.

사우의 뒤를 따라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전부 자리를 비워도 되나 몰라?”

그러게 말일세. 세상일이라는 건 모르는 법인데...”

관목 앞을 지나가는 철위사들의 우려 섞인 속삭임이 진상파의 귀에 들렸다.

이 친구들 참, 눈치 없긴... 내총관께서 우리 보고 물러가라고 한 이유를 정말 모르겠나?”

철위사중 한명이 수군대는 동료들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럼 혹시...”

설마 소성주님과 뜨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받지 않으려고...”

우려를 표하던 자들도 비로소 깨달았는지 안도의 표정이 되었다.

이럴 때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피해주는 게 아랫것들의 도리야.”

흐흐흐... 아무렴 그렇고 말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리며 철위사들은 모두 일신재 앞을 떠났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뜨거운 시간을 보낸다니...)

숨어서 듣고 있던 진상파는 불길하고도 끔찍한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고개 돌려 일신재 쪽 보니 구숙정이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문을 닫기 직전 구숙정의 얼굴에 떠오르는 야릇한 미소가 진상파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저 천한 년이 이 밤중에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이유가...)

생각하기도 싫은 혐오스러운 상상으로 진상파의 온몸이 벌벌 떨렸다.

(만일... 만일 내 생각이 맞다면...)

진상파는 치를 떨며 관목 뒤에서 나와 일신재 쪽으로 다가갔다.

(제왕성이고 뭐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진상파는 제멋대로 떨리고 후들 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일신재의 창문으로 접근했다.

그런 그녀가 확인한 것은 끔찍하고도 절망적인 사실이었다.

 

어쩜... 어쩜 이렇게 늠름해지셨을까? 그 귀엽던 아기가...”

... 숙정 당신이 잘 먹이고 잘 키워준 덕분이지 뭐.”

창문을 통해 들리는 난잡한 대화가 진상파의 귀에 천둥처럼 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리는 모용준과 구숙정의 대화를 통해 진상파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숙정은 원래부터 제왕성 소속은 아니었다.

모용세가 출신인 그녀는 모용준의 유모였으며 둘 사이에는 오래전부터 은밀한 관계가 이어져 오고 있었다.

모용준은 섭장천의 양자가 되어 제왕성으로 들어올 때 내연관계인 구숙정을 데리고 와서 내총관으로 앉혔던 것이다.

어떻게... 절 어떻게 하실 거예요 도련님?”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 내일부터 진가년이 도련님의 공식적인 마누라잖아요. 그럼... 나이 들고 볼품없어진 저같은 년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시겠지요?”

... 그럴 일 없어. 명목상으로는 진상파 그년이 내 본처라 해도... 제왕성의 실질적인 안주인은 숙정 당신이야. 난 절대 당신을 홀대하거나 버리지 않아.”

... 고마워요 도련님! 고마워요!”

... 진가년이 필요한 건 내 자식을 낳을 때까지야. ... 자식이 생겨서 황금성을 공식적으로 집어삼킬 수 있게 되면 그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제 아비 곁으로 보내버릴 계획이야.”

... 도련님 말씀을 들으니 진가년이 불쌍하게까지 느껴지네요.”

... 진가년 생각은 그만하고 가능한 빨리 내 아이를... 내 자식을 낳아줘. ... 그럼 그 아이로 제왕성의 후계자를 삼을 테니까.”

... 노력해볼게요 도련님.”

 

너무나도 엄청난 얘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현실감이 없어졌다.

진상파는 지금 자신이 듣고 경험하는 게 꿈속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짐승들!)

진상파는 이를 갈며 뒷걸음질로 일신재의 창문에서 떨어졌다.

(날 이용만 하고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이거지? 하지만 너희 년놈들 뜻대로 되지는 않는다. 황금성의 동전 한 푼도 제왕성의 것이 되지 않을 테고...)

진상파는 꿈속을 걷는 듯 허우적거리는 걸음으로 일신재에서 멀어졌다.

모용준과 구숙정은 자신들이 방금 전 치명적인 재앙을 야기했음을 알 리 없었다.

 

* * *

 

밤이 아주 깊어 제왕성에 불이 켜진 건물이 드물다.

하지만 제왕성의 정문 일대는 여전히 대낮같이 환했다. 손님들을 태우고 왔던 마차들이 줄줄이 정문을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내일 있을 혼례식을 위해 무려 만 명이 넘는 하객이 제왕성을 찾아왔다.

제왕성이 아무리 규모가 커도 그 많은 하객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찾아온 하객들은 돌아갔다가 아침에 다시 오도록 권유받았다.

진상파는 제왕성을 빠져나가는 마차들 중 하나에 몸을 싣고 있었다.

마차의 주인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부유한 상인이어서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었다.

(두고 보자! 두고 보자!)

혈도가 짚여 기절한 마차 주인 옆에 쪼그려 앉은 채 진상파는 가슴 속의 칼날을 벼리고 또 벼렸다.

얼마 전 일신재에서 엿들어 알게 된 추악한 비밀은 설령 죽어 재가 된다 해도 잊혀질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모용준이 황금성의 재물을 노리고 자신과 결혼을 하려했다는 사실은 도저히 용서가 안된다.

(가능한 빨리 집으로 돌아가자. 그나마 제왕성의 폭압으로부터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곳은 집뿐이니...)

금릉(金陵)에 자리한 황금성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지는 진상파였다.

(모용준! 구숙정! 나 진상파를 적으로 돌린 게 얼마나 끔찍한 실수인지 알게 해줄 것이다.)

진상파는 초조한 마음을 살의와 분노로 다스리려 애썼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차는 천천히 제왕성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 * *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제왕성은 발칵 뒤집혔다.

사대무력집단을 포함한 제왕성의 모든 무사들이 나서서 제왕성의 내외를 수색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에 일찍 깨어난 하객들에게는 거처에서 절대 나오지 말라는 살벌한 경고가 떨어졌다.

 

* * *

 

지금 그걸 말이라고 씨부리는 것이냐?”

혈가람의 화등잔만한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오늘 혼례를 올리기로 되어있는 신부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이유와 사정을 아는 놈이 한명도 없다는 게 말이 돼?”

혈가람이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이유는 진상파가 사라진 사실을 보고 받은 때문이다.

대청 안에는 외총관인 독검마유 궁무독을 비롯해서 여러 명의 나이 든 무사들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었다.

모용준은 오만상을 쓰며 상좌에 앉아있고 그의 뒤에는 구숙정이 병아리를 지키는 암탉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고정하십시오 부성주님. 살천인조께서 본성의 사대무력집단 전부를 동원하여 수색에 나서셨으니 곧 상황 파악이 될 것입니다.”

궁무독이 혈가람의 격노를 갈아 앉히려 애쓰며 말했다.

듣기 싫다.”

혈가람은 솥뚜껑만한 손을 거칠게 저으며 고함을 질렀다.

자존심이 상한 궁무독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찡그려졌다.

일이 터진 후에 수습하면 뭘 해? 이런 일이 애초에 벌어지지 않게 했어야지! 궁무독 너는 외총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누가 제왕성을 들고 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냐?”

면목이 없습니다 부성주님.”

궁무독은 치미는 화를 억지로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게 대체 무슨 개망신이냐 말이다. 제왕성이 소성주의 신부될 계집 하나 지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아니냐?”

혈가람의 질타에 할 말이 없는 궁무독과 무사들은 고개 떨군 채 듣고만 있었다.

당장 진상파, 그 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그년을 찾지 못하면 단 한 놈도 살아서 돌아올 생각 말고!”

혈가람은 이를 바득 바득 갈면서 손을 저었다.

존명!”

진소저를 반드시 찾아서 데려오겠습니다.”

궁무독과 무사들은 일제히 포권을 한 후 대청을 빠져나갔다.

이제 대청에는 혈가람과 모용준, 구숙등 세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밥 버러지같은 놈들! 제왕성의 이름에 똥칠을 해도 유분수지.”

대청 밖으로 멀어지는 궁무독 일행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혈가람은 성난 황소처럼 씨근거렸다.

상심이 되겠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진가년을 붙잡아 와서 소성주의 품에 안겨줄 테니...”

그러다가 모용준을 돌아보는 혈가람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그걸 보며 모용준은 사람의 표정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야 대사님만 믿을 따름입니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머저리들은 도무지 믿음이 안가. 노납이 직접 성을 나가서 진가년을 찾아보도록 하겠네.”

혈가람이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셨다.

살천인조께서 나서셨는데 대사까지 수고하실 것까지야...”

곧 좋은 소식 갖고 돌아오도록 하겠네.”

휘익!

모용준의 만류에도 혈가람은 바람같이 대청 밖으로 날아나갔다.

저 땡중이 도련님께 잘 보이려고 갖은 재롱을 다 부리는군요.”

그 모습을 본 구숙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준걸(俊傑)인 게야.”

모용준도 비웃음을 흘렸다.

준걸이라뇨? 중놈 주제에 살인을 밥 먹듯 하고 술과 계집에 환장하는 저 땡중이?”

옛말에 시세(時勢)를 아는 자가 준걸이라고 했잖아. 저 땡중은 다음 대 천하의 주인이 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거야.”

옳거니! 준걸이라는 게 그런 뜻이었군요

황금성의 인간들은 뭐하고 있어?”

진가년이 사라졌다는 사실에 우리보다 더 자지러지게 놀라더군요.”

그렇다는 건 진상파를 황금성의 인간들이 빼돌린 건 아니라는 건데...”

모용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고독모모를 비롯해서 진가년의 호위들인 백팔금차 전원은 이미 본성을 빠져나가 수색을 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지금은 황금성의 몇몇 늙은이들과 아랫것들만 성중에 남아있는 상태구요.”

혹시 고독모모나 백팔금차가 진가년을 먼저 찾아내는 거 아니야?”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모용준의 우려 섞인 말에 대답하면서 구숙정은 천장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반짝!

그러자 천장 구석에서 짐승의 눈 한 쌍이 반짝이며 나타났다.

휘익!

이어 천장에서 아래로 날듯이 뛰어내린 것은 한 마리의 담비였다.

특이하게도 온몸이 황금빛 털로 덮인 그 담비는 한 쌍의 눈은 붉은 핏빛이다.

그놈은...!”

담비를 본 모용준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본교(本敎)의 영물인 섬전초(閃電貂)예요.”

구숙정은 금모적안(金毛赤眼)의 담비를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끼이! !

그러자 섬전초라 불린 담비는 가볍게 튀어올라 구숙정의 품에 안겼다.

원래 담비는 체격은 작아도 날래고 사납기 이를 데 없는 짐승이다.

호랑이 잡는 담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담비들 중에서 우연히 천고영약을 먹어 수백 년을 살아온 영물이 섬전초다.

그놈은 호랑이도 어렵지 않게 잡아 죽이는 흉포함과 함께 빠르기가 번개같아서 섬전초라는 이름이 붙었다.

혹시 몰라서 이놈을 데리고 왔는데 유용하게 써먹게 되는군요.”

구숙정은 자신의 품에 안긴 섬전초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유모의 준비성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이 아이는 빠르기가 번갯불 같을 뿐 아니라 후각이 사냥개들보다 몇 배 더 민감해요. 진가년의 냄새가 밴 물건만 있으면 그년이 어디에 있든 안내해줄 거예요.”

구속정은 말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모용준이 따라서 돌아보니 철위사대의 대주인 냉혈철심 사우가 대청 옆에 달린 쪽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가져왔습니다 외총관님.”

다가와서 모용준에게 인사하는 사우의 두 손에는 몇 벌의 여자 옷이 들려있다.

그 옷가지들은?”

진가년이 입던 옷들이에요. ()대주가 손을 써서 구해왔군요.”

구숙정은 섬전초의 얼굴을 사우가 내미는 옷가지에 대어주었다.

휘익!

코를 벌름거리며 옷가지에 배린 냄새를 맡던 섬전초는 이내 눈을 빛내며 구숙정의 품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내려선 섬전초는 머리를 이리저리 돌려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휘익! 끼이!

그러다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빠르기로 대청에서 달려나갔다.

발이 특히 빠른 자들을 데리고 섬전초를 따라가라. 진가년에게 안내해줄 것이다.”

구숙정이 재빨리 사우에게 지시했다.

험하게 다뤄도 상관없으니 다른 인간들 보다 먼저 진가년을 찾아내서 끌고 와라. 소성주님께 드리기 전에 내 손으로 단단히 교육을 시켜야하니까.”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냉혈철심 사우는 대답과 함께 대청에서 날아갔다.

대청 밖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 철위사들인데 경신술이 특기인 자들이다.

따라와라!”

사우는 이미 상당히 멀리 간 섬전초를 따라서 날아가며 외쳤다.

예 대주님.”

가자!”

철위사들도 바람같이 몸을 날려 사우를 따라갔다.

곧 섬전초와 사우 일행은 제왕성을 빠져나갔다.

혼례를 앞두고 달아난 신부를 찾아내기 위한 추격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1

 

              싹 트는 연정(戀情)

 

 

푸른 색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의 서쪽은 깎아지른 절벽과 거의 맞닿아 있다.

지난 밤 흑왕이 떨어진 절벽인데 윗부분이 앞쪽으로 비스듬하게 나와 있어서 올라가는 건 불가능해 보인다.

절벽 아래쪽과 연못 사이의 넓지 않은 바닥에는 동물들의 뼈가 흩어져 있었다. 강미루와 흑왕처럼 길을 잘못 들어 절벽에서 떨어진 놈들의 것임에 틀림없다.

그 절벽의 수십 장 위쪽에는 집채만한 바위가 하늘을 향해 돌출해있다.

어젯밤 가파른 경사를 미끄러져 내리던 흑왕이 뛰어넘었던 그 바위다.

만일 흑왕이 그 바위를 뛰어넘기 위해 도약하여 멀리 뛰는 모험을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바위에 부딪혀서 즉사했거나 절벽 아래 바닥으로 떨어져서 피곤죽이 되었을 것이다.

그같은 사실을 깨달은 강미루는 아찔해졌다.

흑왕의 도약력이 조금이라도 부족했다면 연못에 빠지지 못하고 절벽 아래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럼 강미루 자신과 흑왕도 저 이름 모를 짐승들의 백골처럼 되어서, 혹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비스듬히 앞쪽으로 기울어진 절벽의 중간 부분에 낀 이끼가 마치 글자의 모양을 이루고 있는 듯해서 자세히 살펴보니 <창평곡(蒼平谷)>이라고 읽혔다.

(이 분지의 이름이 창평곡이었군.)

(전에 누군가 여기에서 살았었네.)

백남빈과 강미루는 하나하나가 사람보다도 더 큰 창평곡이라는 글자를 올려다보았다.

오래 전에 누군가 절벽에 깊이 글을 새겨놓았었는데 그늘이 져서 서늘한 그곳에만 이끼가 잘 자라 글씨를 푸르게 만들고 있다.

사람이 살았었던 흔적을 발견한 두 사람은 적이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창평곡 곳곳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만한 길은 없었다. 창평곡 전체가 수백 길의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는 항아리 같은 구조였기 때문이다.

모험을 하면 절벽을 올라가지 못할 갈 것도 아니지만 그럴 경우 목숨을 걸어야한다.

하물며 왼쪽 다리에 가볍지 않은 상처를 입은 백남빈으로서는 수백 길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창평곡 내에 과일이 많아서 굶어 죽을 염려는 없다는 점이었다.

 

창평곡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백남빈은 속이 타들어갔다.

자신은 신랑성과 오이라트의 대대적인 중원 침공이 임박했다는 증거들을 무황성에 전해야 하는 막중한 소임을 띠고 있다.

헌데 이 괴상한 골짜기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전서구라도 무황성에 잘 도착했을까?)

답답한 생각에 앞쪽에 앉아있는 강미루에게 집적거렸다.

"소저! 혹시 철령보에서 무황성으로 날린 전서구들도 모두 붙잡은 거요?"

그러나 강미루는 무슨 깊은 생각에 빠졌는지 백남빈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소저!”

백남빈은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있는 강미루의 손목을 잡아 주의를 환기시켰다.

... 왜 이래요?”

손목이 잡힌 강미루는 백남빈이 혹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당황했다. 아랫도리를 사실상 발가벗은 채 바로 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백남빈이 이성을 잃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걸 방해했다면 미안하오. 소저에게 물어볼 게 좀 있소.”

... 물어보세요.”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신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그랬다는 것을 알고 안심과 동시에 아쉬움을 느꼈다.

"혹시 우리가 무황성으로 날려 보낸 전서구들을 전부 잡았소?"

백남빈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려장은 해동청(海東靑)을 비롯한 많은 매를 길들여 부리고 있다. 그 매들을 모두 동원했다면 철령보의 전서구들은 전멸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강미루는 고개를 저었다.

"전서구를 모두 막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잖아요. 그래서 우린 철령보에서 나오는 전령들을 집중적으로 노렸어요."

강미루의 말에 백남빈은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전서구들이 전멸하지만 않았다면 무황성과 명나라 황실에서도 신랑성의 동향에 어느 정도는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이 직접 증거를 제출하는 것보다는 못하겠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났다.

 

"허벅지의 상처는 어때요?"

강미루가 백남빈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썩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붓고 열이 나오."

"당신의 그 신기한 반지로도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강미루가 근심스럽게 다시 물었고 백남빈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소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험해 봤지만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만 있는 것 같소"

강미루는 고개를 계속 뒤로 돌리고 이야기하기가 거북하고 힘이 들었다.

!

그래서 별 생각없이 백남빈 쪽으로 돌아앉았다.

그 바람에 풀로 만든 치마가 흔들리며 상아같이 희고 매끄러운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여 백남빈의 눈을 어지럽혔다.

상체에 걸친 헐렁한 남색상의 사이로도 탐스러운 젖가슴이 다 가려지지 못하고 살짝살짝 엿보였다.

백남빈은 눈앞이 아롱거려 주위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깊은 가을인데도 여기는 참 따뜻하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흑왕의 등에 마주 보고 앉은 백남빈과 강미루 사이에서 미묘한 감정이 샘솟았다.

두 사람은 어느덧 황홀경에 빠져들어 자기들이 앉아있는 곳이 말등인지 소등이지도 잊어버렸다.

서로에 대해 묻고 대답하며 시간의 흐름조차 잊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보인 상대라는 사실 때문인지 강미루는 백남빈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좋게 보였다.

그가 자기 집안과 원수지간인 철령보의 소보주라는 사실도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다.

백남빈 역시 여자와 이토록 가까이, 이토록 오랫동안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지금의 상황이 무작정 좋기만 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대려장 장주의 둘째 딸과 깊이 마음을 나누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무황성에 대한 근심이 감해지기까지 해서 백남빈은 지금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의 이 순간만이 시간의 전부를 차지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백남빈은 무심코 말했다. 깊은 정이 깊이 배인 말이다.

그러나 강미루는 자기 나름대로의 감정에 도취되어 있었기에 그 말을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다.

단지 백남빈의 중얼거림에 스며있는 애틋한 정만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천하의 여장부인 내가 그토록 경멸스러워하던 다른 여자들처럼 사내 앞에서 교태나 부리고 있다니...)

강미루는 차츰 혼란한 감정에서 벗어나며 한탄했다.

(미루야! 미루야! 제발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집에선 아버지와 형부가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텐데 넌 원수인 철령보의 소보주에게 푹 빠져서 집에 돌아갈 생각마저도 않는구나.)

그렇게 자책을 하면서도 강미루는 이미 자신이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려든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연정(戀情)이라는 피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는 치명적인 덫에...

 

***

 

이 앞쪽에서 실종된 동료들이 있단 말이지?”

신가람은 앞쪽에 펼쳐진 계곡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침 점호에 일곱 명의 형제가 빠져서 확인을 해봤더니... 흑왕의 것으로 보이는 발굽자국을 발견하고 이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대려장의 기마대를 이끌고 당산산맥까지 온 구철륵(具鐵勒)이란 중년의 무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곱 명중 세 명은 기진한 모습으로 계곡 안쪽에서 발견되었지만...”

구철륵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신가람과 구철륵에게서 멀지 않은 뒤쪽에 세 명의 사내가 동료들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그자들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십 년쯤 나이를 먹은 듯 탈진한 모습으로 누워있다.

나머지 네 명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구철륵은 다시 계곡 쪽을 보며 좀 겁먹은 표정이 되었다.

미혼진(迷魂陣)이 설치되어 있군.”

신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계곡 쪽을 보았다.

보기에는 그저 그런 계곡이다.

하지만 그 계곡으로 들어갔다가 네 명은 실종되고 세 명은 반송장이 된 채 발견 되었다.

계곡 안쪽에 사람을 가두고 탈진하게 만드는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속하들도 그리 생각하고 깊이 진입은 하지 않았습니다.”

구철륵이 신가람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잘 했다. 다시 돌아 나온 셋은 그나마 침착해서 들어갔던 길을 되짚어 빠져나왔지만 나머지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치달리다가 탈진해버렸을 것이다.”

신가람은 계곡 안쪽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는 무공이 강진남을 한참 능가할 뿐 아니라 기문진법의 재주도 장인에 못지 않다.

덕분에 계곡 안쪽에 흉험한 진법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십 년 넘게 진법을 연구하고 공부해온 신가람으로서도 처음 접해보는 미지의 진법이다.

그 어떤 강적보다도 위험한 곳이다. 동료들에게 연락하여 누구도 이 계곡 근처로는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

신가람은 계곡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며 구철륵에게 말했다.

... 조심하십시오 공자님!”

구철륵과 대려장의 무사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를 숙였다.

그들을 등지고 천천히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며 신가람은 오랜만에 잠잠하던 몸 속의 피가 들끓는 것을 느꼈다.

(과연 얼마나 대단한 진법이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해보자.)

계곡 일대에 설치 된 진법에 대한 두려움보다 호기심과 승부욕이 신가람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

 

정말 못 말리는 것이 젊은이들의 벼락같은 사랑이다.

백남빈과 강미루의 감정적 연대는 짧은 시간이건만 더할 수 없이 깊어 갔다.

서로에 대한 연모의 감정에 취해 두 사람은 흑왕이 창평곡을 몇 바퀴나 돌았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해가 하늘 한가운데에 왔을 때 백남빈과 강미루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강미루의 얼굴은 발그레하여 햇살 아래 더욱 붉었고 백남빈의 얼굴도 행복감에 도취되어 상기되어 있었다.

흑왕이 연못가에 와서 발을 멈추었을 때야 강미루가 활짝 웃으며 백남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헌데 뛰어내리는 순간 백남빈하지 않은 풀잎 치마가 위로 훌렁 올라가는 바람에 그녀의 눈부신 아랫도리가 고스란히 들어나 보였다.

잘 익은 복숭아같이 탐스러운 엉덩이가 펄럭이는 풀잎 치마 밖으로 언듯 들어났다가 숨어버린다.

강미루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백남빈은 차마 못 볼 것을 보고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먼저 뛰어내린 강미루가 말에서 내리려는 백남빈을 향해 팔을 벌렸다.

백남빈은 쑥스러운 생각이 들었으나 다리를 다친 상태에서 훌쩍 뛰어 내리는 것이 여의치 않아 강미루의 손에 몸을 맡겼다.

비록 소녀에 불과하지만 무공을 익힌 강미루의 완력은 대단하여 백남빈의 몸을 가볍게 받아 땅에 안전하게 내려놓았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대낮이다.

하지만 항아리 형태인 깊은 골짜기에서 낮은 짧을 것이 불문가지다.

백남빈은 서둘러 잠자리를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말을 꺼내기가 멋쩍었다.

<잠자리>라는 말이 잠은 자는 곳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남녀 간의 육체관계를 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고 그저 하늘을 보았다가 숲을 보았다가 했다.

(저 사람이 어젯밤처럼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닐까?)

백남빈이 갑자기 하늘을 보고 숲을 보고 하자 강미루는 덜컥 겁이 났다. 낮선 곳에서 밤에 홀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는 몸서리 처지도록 경험했었다.

또 혼자 남겨질 수는 없다.

강미루는 백남빈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그의 허리띠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어젯밤에도 나 혼자 도망치려고 했던 게 아닌데...)

백남빈은 강미루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알아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지난밤 자신이 처했던 상황과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야 한다면 언젠가 알 때가 있겠지.)

그것이 백남빈의 생각이었고 원래 성격이었다.

다른 사람과 관련된 일은 진지하게 성의를 다하지만 자신의 사정에 대해서는 무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양부 독안룡 이탁의 성격을 닮지 않았으니 아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생부 백무염으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일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4

 

            미뤄진 혈겁

 

 

(나 연남천은 팔십 평생 단 한 번도 도전을 회피해 본 적이 없다. 비록 저 어리석은 자들이 남의 꾐에 빠져 도전해 오기는 했으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서늘한 안광이 일렁이는 눈으로 창밖에 운집해 있는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 모두는 나 연남천과 함께 이곳 고독애에 뼈를 묻게 되리라! 비록 무형지독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너희들을 지옥으로 함께 데려갈 힘은 남아 있으니...!)

고독마야는 서탁 위로 손을 뻗어 혈마대장경을 집어 들었다.

(먼저 이 저주받은 마물들부터 없애야 하리라. 못된 놈들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에 크나 큰 화근이 될 테니...!)

모두 세 권으로 이루어진 혈마대장경에는 전설에 전해지는 대로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천마공(逆天魔功)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단순히 파괴력으로 따진다면 비록 고금오대고수의 일인인 흡혈마조가 남긴 혈마대장경상의 무공도 고독마야의 일신 절기보다는 못했다.

그러나 혈마대장경에 수록되어 있는 마공들의 잔혹하고 신랄한 면은 고독마야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해서 고독마야는 죽기 전에 아예 이 화근덩어리를 없애버릴 작정을 한 것이다.

흡혈마조에게는 미안하게 되었다. 비록 저주받을 마공이긴 해도 필생의 성취라고 남겼는데 없애 버려야 하니...”

고독마야는 고소를 흘리며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마대장경을 태워버리려 했다.

헌데 바로 그 때였다.

우우!”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장소성이 고독애 아래에서 들려왔다. 걸걸하기는 하지만 그 장소성은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이 목소리는...!)

막 혈마대장경을 재로 만들어 버리려던 고독마야는 흠칫하며 삼매진화의 운용을 멈추었다.

쐐애애액!

그 직후 고독애 측면의 깎아지른 절벽 아래쪽에서 한줄기 흐릿한 인영이 질풍같이 날아올랐다. 그 인영이 날아오르는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하나같이 천하를 위진 시키고 있는 고수들인 군웅들의 눈에도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 전모 냉약빙이다!”

막아랏!”

고독헌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던 군웅들 사이에 분분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빠른 경신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무림을 통틀어도 단 한 명뿐임을 안 때문이다.

멈춰라 전모!”

못 들어간다!”

파팟! 쐐애액!

근처에 있던 군웅들이 급급히 날아올라 절벽 위로 솟구쳐 오르는 인영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쏴아아아!

고독애 측면의 절벽을 날아오른 인영은 자신을 막아서려는 군웅들의 머리 위를 한 걸음에 뛰어넘어 고독헌 쪽으로 날아갔다.

훤칠하다 못해 장대한 체격을 지닌 그 인영의 이같은 가공할 경신술은 이곳에 운집한 무림의 최고 고수들을 닭 쫓던 개처럼 만들어버렸다.

잡아랏! 혈마대장경이 전모의 손에 들어가면 끝장이다!”

... 서랏!”

쐐애액! 휘익!

일차 저지에 실패한 군웅들은 저마다 고함을 터트리며 고독헌 쪽으로 날아가는 인영의 뒤를 쫓아갔다.

절벽을 날아오른 후 일거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날아 넘은 여인은 다름 아닌 전모 냉약빙이었다. 이 세상에서 오직 그녀만이 이같은 경이적인 경신술을 발휘할 수 있다.

죽고 싶은 작자들은 와라!”

단번에 군웅들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독헌 앞에 내려선 냉약빙은 빙글 돌아서며 군웅들을 향해 사나운 일갈을 터뜨렸다.

피핑!

동시에 그녀의 손이 휘둘러지며 검붉은 구슬 하나가 추적해오는 군웅들을 향해 던져졌다.

(저것은...!)

원래 자리에 서서 지켜보고 있던 유성신검황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한 눈에 냉약빙이 던져낸 검붉은 구슬이 무엇인지 알아본 것이다.

피해라! 굉천벽력탄이다!”

유성신검황의 입에서 다급한 폭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한걸음 늦고 말았다.

콰르릉! 콰콰쾅!

수십 개의 천둥이 일제히 작렬하는 듯한 굉음이 터지며 강력한 폭발이 장내를 휩쓸었다.

드드드드! 콰아아아!

그와 함께 고독애 전체가 무너질 듯 뒤흔들리면서 시뻘건 화염과 매캐한 화약 연기가 수십 장을 뒤덮었다.

크아악!”

케에엑!”

처절한 비명이 하늘을 찌르고 일거에 수십 명의 군웅들의 육신이 갈가리 찢겨 날아갔다.

굉천벽력탄이 터진 자리에는 깊이 삼장, 너비 십여 장의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그 주위로 터지고 그슬린 인간의 육신들이 널려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벽력당(霹靂堂)의 화기를 지니고 있다니...!”

히익!”

몸을 날린 게 늦은 덕분에 살아난 군웅들은 사색이 되어 고독헌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놀란 개미떼처럼 흩어지는 군웅들을 바라보며 냉약빙의 두 눈은 싸늘한 한광을 토해냈다.

목숨이 아깝지 않은 자들은 경거망동해도 좋다!”

칠척 가까운 거구로 고독헌 입구를 완전히 가린 채 우뚝 선 냉약빙은 오른손을 번쩍 쳐들어 보였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몇 알의 검붉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던 굉천벽력탄이었다.

냉약빙의 수중에 들린 굉천벽력탄을 본 독천존과 유령마제의 안색이 낭패로 물들었다.

으득! 저 계집이 산통을 다 깨는군!”

독천존과 유령마제도 일세를 풍미하는 고수들이긴 하지만 굉천벽력탄의 파괴력만큼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냉약빙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내최강의 경공술을 지니고 있다. 만일 냉약빙이 자신들을 폭사(爆死)시킬 작정을 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세상의 그 누구라도 냉약빙이 번개가 치는 듯한 빠르기로 달려들어 던지는 굉천벽력탄은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독천존과 유령마제가 낭패함을 금치 못하고 있을 때였다.

명심해라! 고독헌에 접근하는 놈에게는 반드시 굉천벽력탄을 안겨줄 것이다!”

냉약빙은 군웅들에게 경고를 남기고는 거구를 홱 돌려 고독헌 안으로 들어갔다.

이 모두가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장내의 그 누구도 냉약빙의 가슴 섶이 유난히 불록하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허허! 한 걸음 늦었다 약빙아!”

고독마야는 고독헌 안으로 달려 들어오는 냉약빙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무하기만 하던 그의 두 눈에 지금 이 순간만은 따스한 정감이 깃들었다. 그것은 냉약빙이야말로 고독마야가 이 하늘 아래에서 마음을 주고 있는 단 한 명의 친인(親姻)이기 때문이다.

먼 친척 사이인 두 사람은 비록 조손(祖孫) 사이일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긴 하지만 사이좋은 오빠고 누이동생이었다.

게다가 고독마야가 자신의 무공을 가르친 유일한 존재가 냉약빙이다. , 고독마야에게 냉약빙은 누이동생일 뿐 아니라 제자이기도 한 것이다.

오라버니...!”

칠척 거구의 냉약빙이 들어서자 그리 넓지 않은 고독헌 안이 꽉 차 보인다.

냉약빙도 본래는 평범한 계집아이였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같은 어마어마한 거구가 된 데에는 세상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냉약빙은 어린 시절 우연히 거령삼왕(巨靈蔘王)이라는 천고의 영약을 복용하게 되었다.

거령삼왕은 산삼의 일종으로 기사회생의 약효를 지니고 있다. 다만 그 약효가 지나쳐서 복용한 사람의 체격을 비정상적으로 크게 만들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 거령(巨靈)이라는 이름은 그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거령삼왕을 복용한 덕분에 냉약빙은 무려 오갑자(五甲子)에 이르는 막강한 내공을 얻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여자임에도 칠척에 가까운 무지막지한 체격을 지니게 된 것이다.

고독마야는 냉약빙의 막강한 내공과 엄청난 체격을 살리기 위해 집중적으로 경신술을 가르쳤고 그 결과 냉약빙은 천하에서 가장 빠른 인물이 되었다.

 

, 중독당하셨군요 오라버니...!”

고독헌 안으로 들어선 직후 냉약빙은 사색이 되었다. 고독마야가 지독한 극독에 중독된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바득, 잠깐만 기다리세요. 서래음에게서 해약을 빼앗아오겠어요!”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며 고독헌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오라비를... 부끄럽게 만들 작정이냐 약빙아?”

하지만 고독마야의 나직한 한 마디 말에 냉약빙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고독마야는 자존심이 극도로 강한 인물이다. 살기 위해서 남에게 구걸한다는 것은 그의 자존심이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크흐윽, 오라버니...!”

냉약빙은 분노와 비통함을 감추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돌림병으로 일가 피붙이를 모두 잃은 그녀에게 고독마야만이 유일한 친인이다.

헌데 그 고독마야마저 지금 중독당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독마야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이었다.

울지 마라 약빙아! 인간이란 언제고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다만 그 시기가 문제일 뿐...!”

고독마야는 오열하는 냉약빙을 향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냉약빙을 바라보는 그의 두 눈에는 더할 수 없이 따스한 정감이 담겨져 있었다.

하여간 잘 왔다. 저 어리석은 작자들과 함께 저 세상으로 가기 전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는데, 이제 네게 그것을 맡기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 쓰레기들과 동귀어진하실 작정인가요 오라버니?”

하지만 냉약빙은 깜짝 놀라며 고개들 들어 고독마야를 올려다보았다.

쓰레기들이라니...! 그래도 저자들은 최소한 한 지역의 패자들인 대단한 고수들 아니냐?”

고독마야는 고소를 지으며 말했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된 자들을 모조리 동반하여 저 세상에 간다면 손해 볼 것도 없다!”

냉약빙은 고독마야의 그 말에 질겁했다.

, 그래서는 안돼요 오라버니...!”

그러나 고독마야의 뜻은 이미 확고해진 상태였다.

비록 너라고 해도 나를 막지는 못 한다 약빙아!”

부드러운 가운데 단호한 결의가 깃든 음성으로 말하는 고독마야를 올려다보며 냉약빙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소매에게는 오라버니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만한 수단이 있어요!”

그녀가 자신에 차서 장담했지만 고독마야는 믿지 않았다.

그래? 그것이 무엇이냐?”

고독마야는 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자신의 결심이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내포한 미소였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아야만 했다.

바로 이 아이가 소매의 무기예요!”

냉약빙이 눈물을 닦으며 자신의 가슴 섶을 좌우로 벌려보였다.

“...!”

순간 고독마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의 몸으로 한 차례 세찬 경련이 스쳐가기까지 했다.

냉약빙의 헐렁한 겉옷 안쪽에는 머리를 흰 천 조각으로 동여맨 사내아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그 사내아이를 본 순간 고독마야는 숨을 죽였다.

(천골(天骨)이다!)

한눈에 사내아이가 세상에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음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사내아이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팔십 평생 이룩한 성취가 절전(絶傳)되기를 원하지는 않으시겠죠?”

고독마야가 말을 잃을 정도로 망연자실해 있을 때 냉약빙이 소중하게 품고 있던 사내아이를 내밀며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너는... 정말 교활한 아이구나 약빙아!”

고독마야의 창백한 안색에도 마침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그의 깡마른 두 손이 어느새 냉약빙이 내미는 사내아이를 향해 뻗치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九 章

 

            古今第一人

 

 

[! 저놈은 만년백경(萬年白鯨)!]

그렇다. 바로 위에는 마치 거대한 섬을 방불케 하는 하얀 고래가 막 사해선문의 선단을 향해 물보라를 일으키며 부딪쳐 오고 있었다.

기검룡의 외침에 중인들은 모두 대경했다.

만년백경은 바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전설과 같은 영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기검룡은 달려오는 백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놈은 내가 자기의 내단(內丹)을 갖고있는 것을 알고 쫒아오는 것 같구나.]

그 말에 사해신룡은 안색이 변했다.

[용아, 네가 내단을 갖고있단 말이냐?]

이때,

[! 피해라! 부딪치면 안된다!]

경악성이 울렸다.

허나 이미 늦었다.

___! 우지끈___!

삽시간에 십여 척의 선박이 풍지박살났다.

도저히 만년백경의 힘을 막을 수가 없었다.

기검룡은 입술을 물며 결심했다.

[숙부님, 용아는 저놈을 유인해 갈테니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세요!]

그 말에 깜짝 놀란 것은 능소취였다.

[안돼! 오빠! 가지마, 가면 안돼...!]

그녀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매달렸다.

기검룡은 그녀를 번쩍 안아 뺨을 비비며 말했다.

[염려마, 다시 만나게 될거야, 이 용아는 세상에서 네가 제일 좋으니까.]

다음 순간 기검룡은 그녀를 내려놓고 몸을 휘익 날렸다.

[조심하거라, 용아!]

사해신룡의 외침이 들렸다.

[___ ! 이놈아! 난 여기 있다!]

기검룡은 외치며 파도를 밟고 백경을 향해 날아갔다.

콰르릉___ ___ !

백경은 마침내 그를 발견하고 방향을 돌렸다.

[하하하... 날 쫓아와라! 내단은 아직도 네 품속에 있다.]

기검룡은 방향을 사해선문과 정반대로 돌려 파도를 박차고 날아갔다.

___ ___!

백경은 빛살같이 그의 뒤를 쫓았다.

[용오빠...!]

멀어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능소취는 울먹였다.

 

파석도(破石島).

기검룡은 전신이 물에 흠뻑 젖은 채 파석도에 돌아왔다.

콰르릉___ ___ ___!

만년백경은 섬 주위에서 마구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경은 내단을 잃어 점점 기력이 쇄잔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악착같이 기검룡을 쫓아왔으나 그를 자비 못했던 것이었다.

[하하하... 백경아! 내단은 미안하지만 돌려 줄 수가 없구나!]

기검룡은 품속에서 유백색의 내단을 꺼내며 대소를 터뜨렸다.

이어, 그는 내단을 꿀꺽 삼켰다.

[이렇게... 내가 먹노라... 으윽!]

문득 내단을 삼킨 순간 기검룡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전신이 엄청난 열기에 휩싸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 으으... ...!]

기검룡은 열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마구 모래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때였다.

___ !

한 인영이 그의 옆에 떨어졌다.

그는 바로 낙척문사(落拓文士)였다.

[용아! 아니... 이게 어찌된 일...]

그는 기검룡을 번쩍 안아들었다.

검룡은 얼핏 그를 알아보았다.

[... ... 작은 할아버지... ... 용아는 만년백경의 내단을 삼... 켰어......]

[뭣이!]

낙척문사는 크게 놀랐다.

[너를 차자 수일을 헤맸건만 내단을 삼켰다고? ... 이런...]

낙척문사는 다음 순간 신형을 휘익 날렸다.

그는 매우 다급한 듯 했다.

실상 만년백경의 내단은 지극한 효험이 있는 것이었지만 필히 안정할 곳을 찾아 내공이 높은 조력자의 도움으로 내단을 녹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검룡이 그것도 모르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내단을 삼켰으니...

낙척문사는 급히 천강마존이 있는 곳으로 간 것이었다.

 

[...!]

기검룡은 오랜 혼미 속에 깨어나 눈을 뜨는 순간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순간,

[큰할아버지! 작은 할아버지!]

기검룡은 너무도 기뻐 크게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나,

[!]

그는 갑자기 자신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름을 느끼며 당황성을 발했다.

겨우 몸을 멈춘 그는 두눈을 크게 뜨며 의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요?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니 용아의 공력이 이렇게 높아져 있다니 말입니다.]

낙척문사 역시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기이한 일이구나, 만년백경의 내단을 복용했다면 이갑자(二甲子) 정도의 내공을 얻는 것이 분명한데, 네 공력은 이미 삼갑자(三甲子) 이상에 이르렀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기검룡은 기억을 더듬어 그동안의 일을 차근차근 얘기하기 시작했다.

만년백경에게 먹혔던 일에서부터 무인도에서 만난 일, 사해선문을 도와 천해비보를 찾은 일까지.

허나, 자신도 모르게 무인도에서 본 일중에서 벽에 걸려 있던 기이한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빠뜨리고 말았다.

만약 그 점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라면 그는 일찍 더할 수 없는 광세기연(曠世奇緣)을 만날 수 있었겠건만...

기검룡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난 천강마존과 낙척문사는 안면 가득 놀라움의 빛을 띄었다.

낙척문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제야 네 공력이 그토록 급증한 이유를 알겠구나.]

기검룡은 문득 짐작이 가는 듯 물었다.

[흑시... 그 이상한 복숭아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 그 복숭아는 금령천도(金靈天挑)라는 영과로서 도가에서 최고의 지보로 여기는 것이다. 만일 그것을 일곱 번으로 나누어 복용하고 칠일간 운공하면 금강지체(金剛之體)를 이룰 수 있다.]

이어 문득 그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허나 너는 그것을 모르고 한꺼번에 다 먹어버려 그 효능이 반감된 것이다.]

기검룡은 약간 머쓱한 표정을 지엇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낙척문사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렇다고 낙담하지는 마라. 이제 너는 전신에 만독(萬毒)이 불침하며 노력하면 일갑자의 내공을 더 얻을 수 있다. 앞으로 무공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어요. 헌데 그 무인도의 백골은 어느 고인의 것인가요?]

그의 물음에 이번에는 천강마존이 입을 열었다.

[무림사(武林史)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명멸해 왔으나 단연코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을 꼽으라면 꼭 한 사람이 있다.]

[그분이 누군가요?]

기검룡은 호기심으로 두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분은 바로 천 이백 년(千二百年) 전의 기인(奇人) 절대무성(絶代武聖) 태극성황(太極聖皇)이시다.]

천강마존의 어조는 지극히 공경스러웠으며 엄숙하기까지 했다.

[태극성황(太極聖皇)!]

기검룡은 나직이 입안으로 뇌까렸다.

천강마존은 다시 조용한 어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 이백 년 전 당시의 무림은 무림삼일(武林三日)이라는 세 명의 개세고수들에게지배당하고 있었다.]

 

<무림삼일(武林三日).>

 

___옥황대천(玉皇大天),

___천독마선(天毒魔仙),

___잠형유신(潛形幽神),

 

옥황대천, 그는 화타나 편작을 능가하는 의술의 명인이었다.

천독마선, 그는 만독(萬毒)의 조종(祖宗), 마공(魔功)의 집대성자였다.

잠형유신, 그는 실재(實在)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는 역용(易容)과 잠형술(潛形術)의 대가였다.

이들 삼인은 당시 무림의 최강(最强)을 지칭한 절대적 존재였다.

헌데, 그런 그들이 하루 아침에 실로 어이없는 좌절을 당하고 말았다.

어느날 홀연히 그들을 찾아온 한 젊은서생에게 그들은 어처구니 없게도 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성명절학을 전력(全力)으로 펼쳤으나 젊은서생의 십초(十招)를 당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으로 그들 삼인(三人)이 합공(合攻)하여 대항했으나 그 또한 그들의 상상을 벗어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완패, 실로 완전한 패배였던 것이다.

무림삼일을 패퇴시킨 후 신비의 서생은 다음과 같은 한 마디를 남기고 표연히 사라졌다.

 

___무림에 군림하려하지 말라. 본인이 그대들에게 됴구하는 것은 이것 뿐이다.___

 

무림삼일은 통탄을 금치못할 지경이었으나 곧 무림에 세웠던 모든 세력을 해체하고 은거하여 무림에서 사라졌다.

그 이후, 무림삼일을 은퇴시킨 신비의 서생은 백년(百年) 동안 무림에서 행도(行道)하여 크게 그 이름을 떨쳤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는 성황(聖皇)이라는 영광스런 청호까지 받게된 것이었다.

헌데, 노년(老年)에 이른 그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근심거리가 생겼다.

백년 동안 천하를 주유했으나 자신의 진전을 이어받을 인재를 구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결국, 그는 후예를 찾는 것을 포기하고 두 명의 기재를 기명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비록 태극성황의 전 무학을 이어받을 만한 인재는 되지 못했지만 몇 백년에 한 번 날까말까한 절세기재들이었다.

태극성황은 자신의 무공을 두 기재에게 적합하도록 음()과 양()으로 나누어 전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무림에 두 명의 절세고수가 탄생하게 되었다.

___태양성자(太陽聖子) 황보영(皇補英).

___현음마군(玄陰魔君).

허나 이들은 정사종주(正邪宗主)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었다.

그들은 사부인 태극성황의 부름을 받았다.

태극성황은 그를 찾아온 두 제자에게 두 가지 물건을 내놓았다.

 

<이것은 나의 진본무공(眞本武功)이 실린 태극유진(太極貴珍)이다. 이것을 갖게되면 태극일문(太極一門)의 장문인(掌門人)이된다. 또한 이것은 나의 최초의 신공(神功)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을 적어놓은 책자다. 태극호연천신강의 위력은 능히 택그유진의 십배에 달한다. 너희들은 하나씩 선택하도록 해라.>

 

태극성황은 두 가지 물건을 놓고 그렇게 분부했다.

태양성자와 현음마군은 고심했다.

명예(名禮)와 실리(實利)___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허나 결국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태양선자, 그는 태극유진을 택해 명예를 취했다.

반면, 현음마군은 실리를 택해 택극호연천신강을 얻었다.

그는 평소 자신보다 강한 태양성자를 꺾어보는 유일한 소원이었던 것이다.

허나 그는 미처 한 가지 사실을 깨닫지 못했으니...

태영성자와 현음마군은 천하의 기재였다. 그러나 태극성황은 그들에게 진본비기(眞本秘技)를 전수하지 않았었다.

그것은 진전을 전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들의 자질이 부족해서였다.

헌데 택그유진보다 위력이 십 배나 강한 태극호연천신강의 난해함은 더 이상 말하여 무엇하랴!

결국, 현음마군은 현음교(玄陰敎)를 해산하고 잠적했다.

태극호연천신강을 연마하기 위해.

허나 끝내 그는 무림에 다시 나타나지 못했다.

일평생 태극호연천신강과 씨름하다 죽음을 당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후 태양성자 역시 은거하여 택그일문은 완전히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것은 애초에 태극성황이 바라던 결과였는지 몰랐다.

 

천강마존은 긴 이야기를 끝내고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기검룡은 문득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용아도 알 것 같군요. 무인도의 석옥에 있던 백골은 바로 현음마군이로군요.]

그는 낡은 비급에서 본 현음분뢰지(玄陰分雷指)라는 지공의 이름에서 그것을 추측한 것이었다.

천강마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할아버지들은 이것들을 보고 그 유골이 현음마군의 것이라는 것을 추측했다.]

그는 앞부분이 삭아 없어진 낡은 비급과 외줄의 소금을 가리켰다.

이어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현음마군이 태극성황에게 전수받은 것은 한 가지 신공(神功)과 장공(掌功), 그리고 일초(一招)의 지법(指法)과 음공(音功)이었다. 특히 음공 척천마음(擲天魔 고금제일이라 현음마군 조차도 완전히 연성하지 못했다.]

천강마존은 다시 소금(少琴)을 집어들며 말했다.

[용아도 이 소금의 위력을 체험해봤으니 잘 알 것이다. 이것은 현천마금(玄天魔琴)이라하며 태양성자가 받은 태극신검(太極神劍)과 함께 태극일문의 양대지보였다.]

이번에는 낙척문사가 입을 열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 석옥의 어딘가에 분명 태극호연천신강(太極皓然天神罡)의 비급이 있었을텐데 용아가 그것까지 얻지 못한 것이다.]

그 말에 천강마존이 담담히 웃었다.

[인연이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네. 용아가 그 태극호연천신강과는 인연이 없었던 모양이지.]

낙척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하... 그 대신 용아는 그에 못지않은 기연을 얻은 수 있게 되었으니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다.]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낙척문사를 응시했다.

낙척문사는 문득 하나의 붉은 구슬을 집어 들었다.

바로 기검룡이 사해신룡에게 받은 그 구슬이었다.

[사해신룡은 최대의 기연을 네 개 양보했다.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큰할버지께 옥황대천(玉皇大天)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느냐?]

그 말에 비로소 기검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 의술이 당대 최고였다던...]

낙척문사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 태극성황에게 패한 옥황대천은 무공초식으로는 도저히 그의 적수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다른 방도를 구했다.]

[...]

[그는 신선경지에 이를 수 있는 내공을 얻기위해 한 가지 절대신단(絶代神丹)을 만들었다.]

낙척문사는 수중의 붉은구슬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절대신단이 바로 이것이다. 옥황패천은 이 신단을 극허천룡단(極虛天龍丹)이라 이름했다.]

기검룡은 놀라움과 경이가 뒤엉킨 시선으로 붉은구슬, 즉 극허천룡단을 응시했다.

이때, 천강마존이 문득 엄숙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용아의 공력이 급상승했으니 이제 상승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됐다. 내일부터 당장 무공수련에 들어간다. 허나 그 전에 우선 볼것이 있다.]

그는 문득 낙척문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낙척문사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후, 그는 서재 한모퉁이에서 하나의 두루마리를 가지고와 두 사람 앞에 내놓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7

 

               혈루(血淚)의 일막

 

 

"...!"

고검추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어머니가 너무도 무참한 만행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검추가 느낀 충격과 분노는 시작에 불과했다.

흐흐흐 얼마나 견딜 수 있을지 보자!”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본격적으로 당혜선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 죽여라!"

사신각주의 마수에 고문당하며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멀지 않은 곳에 고검추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흐흐흐! 걱정마라. 확실하게 죽여줄 테니..."

사신각주는 히죽거리며 당혜선을 농락했다.

... 죽어 귀신이 되어서라도 복수하고 말겠다.”

당혜선은 수치심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다. 살고 싶으면 복마신검이 어디 있는지 실토해라!”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눈을 희번덕였다.

파르르!

복마신검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애원하던 당혜선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사신각주가 자신을 고문하고 협박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새삼 깨달은 때문이다.

무슨 짓을 당한다 해도 사신각주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는 없다.

!”

당혜선은 대답 대신 사신각주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물론 사신각주는 복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에 직접 당혜선의 침이 닿지는 못했다.

흐흐흐 이게 네년의 대답이라 이거지?”

당혜선의 침 세례를 받은 사신각주의 눈빛이 흉포해졌다.

그럼 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잔인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돌이킬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아악!"

다음 순간 당혜선의 입에서 단말마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몸은 마치 독침을 맞은 나비처럼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르르!

고검추의 몸에도 세찬 경련이 치달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 도무지 현실의 일로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도 엄청난 충격으로 고검추는 반쯤 실신하고 말았다.

"이상하군!"

당혜선을 본격적으로 고문하며 사신각주는 의혹을 느꼈다.

그자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당혜선에게는 아들이 있다.

헌데 당혜선의 몸은 어떻게 봐도 처녀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신각주는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흐흐흐... 네년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구나.”

그자는 광기에 사로잡혀 당혜선을 고문하는데 빠져 들어갔다.

"... 네놈을... 죽어 원귀가 되어서라도 저주하겠다."

그자는 당혜선의 악에 바친 저주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히 계속 될 것같던 끔찍한 고문도 결국 끝이 났다.

"흐흐흐! 오늘 이후로 두 번 다시 볼 일은 없을 테니 본 각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영광을 주마."

!

그 자는 쓰고 있는 복면 아랫부분을 들어서 얼굴을 당혜선에게 보여주었다.

사신각주는 고검추에게는 등을 돌린 자세인지라 고검추는 그자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흐윽!"

하지만 고문당한 자세로 누워있던 당혜선의 입에서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경악으로 물든 표정이 되어 복면 아래에서 드러난 사신각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 당신이... 사신각주라니...!"

당혜선은 온몸을 벌벌 떨며 비명같은 신음을 토했다.

사신각주는 그녀가 익히 아는 자였던 것이다.

"... 그렇다면... 고사형의... 참사도 바로 당신의 수작..."

당혜선은 분노와 절망에 찬 표정이 되어 사신각주를 노려보았다.

"크크크... 그렇다. 고가놈은 배은망덕하게도 복마신검을 얻고도 본좌에게 바치지 않았다. 그 대가를 치룬 것이지."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복면을 다시 내렸다.

"... 이 짐승만도... 못한..."

당혜선이 분노와 경악으로 치를 떨 때였다.

사신각주가 품속에서 한 자루의 초혼전을 꺼내들었다.

"본좌의 비밀을 알았으니 안됐지만 죽어 주어야겠다."

그 자는 냉혹하게 말하며 초혼전을 쳐들었다.

(... 안돼!)

고검추는 전율하며 내심 부르짖었다.

바로 지척에서 어머니가 살해당하려는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자신은 짚인 혈도가 아직 풀리지 않은지라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고검추는 활활 타는 불구덩이에 떨어진 심정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어머니를 구하는 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아악!"

단말마같은 짤막한 비명이 터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

사신각주가 내리꽂은 초혼전이 당혜선의 하복부로 깊이 박힌 것이다.

부르르!

한 차례 격렬하게 떨리던 당혜선의 몸은 이내 축 늘어졌다.

"흐흐흐... 감히 본좌의 뜻을 거스른 대가다."

사신각주는 그런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었다.

화락!

이어 그 자는 검붉은 장포자락을 휘날리며 날아올랐다.

"으하하하! 나 사신각주이 얼굴을 본 자는 모두 죽는다."

한 줄기 광소와 함께 사신각주의 모습은 장내에서 멀어져 갔다.

적막...

다시 사위는 죽음같은 적막에 휩싸였다.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진 장내에는 하복부에 초혼전이 박힌 당혜선만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초혼전이 박힌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당혜선이 누워있는 바닥을 흥건히 물들였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저녁노을도 스러지고 어둠이 스물 스물 번지고 있었다.

"크흑... 어머니...!"

문득 비통한 울부짖음과 함께 석벽 아래 동굴에서 고검추가 달려나왔다.

마침내 막혔던 혈도가 풀린 것이다.

"돌아가시면 안됩니다. 어머니... 제발."

달려온 고검추는 당혜선을 끌어안고 오열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고문당하고 죽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아무것도 못한 자신의 무능이 저주스럽다.

사신각주! 하늘에 맹세코 네놈을 반드시 찢어죽이고 말겠다!”

고검추는 어머니의 알몸을 부여안고 몸부림치며 악을 썼다.

헌데 그때였다.

두근 두근

고검추의 귓전으로 미약하지만 심장 박동소리가 들렸다.

(... 설마!)

오열하던 고검추는 눈을 부릅뜨며 급히 귀를 당혜선의 왼쪽 젖가슴에 대었었다.

두근 두근

그런 고검추의 귀에 확실히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렸다.

(... 아직 살아계시다.)

당혜선의 숨이 붙어있는 것을 확인한 고검추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 고검추의 뇌리로 신비한 은발의 여인 옥여상의 음성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조만간 이것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설삼신단!)

내심 부르짖은 고검추는 안고 있던 당혜선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옥병을 하나 꺼내들었다.

옥여상이 준 그 옥병에는 만년설삼으로 만든 두 알의 설삼신단이 들어 있었다.

설삼신단은 기사회생(起死回生)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한 알만 복용해도 백년 수위의 내공을 얻을 수 있는 효능을 지녔다.

(그 분은 이런 상황을 예견하시고 설삼신단을 내게 주었구나.)

고검추는 옥병에 들어있는 설삼신단을 보며 경이로운 기분에 휩싸였다.

새삼 옥여상이란 여인이 신비하게 느껴진다.

설삼신단을 꺼낸 고검추는 당혜선의 하복부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선 초혼전을 제거해 드리자.)

고검추는 설삼신단이 든 옥병을 내려놓고 당혜선의 아랫배에 박혀있는 초혼전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다가 고검추의 손은 멈칫 멈춰졌다.

(초혼전에는 백일취가 묻어있을 테니 직접 만지면 안된다.)

초혼전에 백일취라는 약물이 묻어있다는 당혜선의 말이 떠오른 것이다.

고검추는 당혜선의 찢어진 옷으로 추혼전을 감싸쥐었다.

스윽!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초혼전을 뽑았다.

후두둑!

선혈이 분수같이 뿜어지며 초혼전이 당혜선의 아랫배에서 뽑혀졌다.

초혼전을 집어던진 고검추는 급히 두 손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런 후 어느 정도 피가 멎자 손을 떼고 옥병에서 설삼신단을 두 알 모두 꺼냈다.

고검추는 설삼신단 두 알을 모두 당혜선의 입에 넣어주었다.

설삼신단은 당혜선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아서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제 운명은 하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설삼신단을 먹여준 고검추는 초조와 긴장으로 물든 시선으로 당혜선의 상태를 주시했다.

잠시 후 당혜선의 밀랍같이 창백하던 옥용에 서서히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초혼전이 박혔던 하복부의 상처도 급속히 아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혜선은 세상에 보기 드문 영약인 설삼신단을 한 알도 아닌 두 알씩이나 한꺼번에 복용했다.

설령 더 심각한 상태였어도 되살아났을 것이다.

당혜선은 상처가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삼갑자 이상의 내공까지 얻었다. 게다가 강력한 극음기공까지 얻게 될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8

 

              찾아온 마두들 (2)

 

 

정말 묘한 곳이야. 여기라면 유가 놈도 우릴 쉽게 찾아내지는 못하겠지.”

마면혈도가 감탄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의 눈에 절벽 가에 서있는 두 개의 대나무가 들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대나무의 위쪽, 달이 만든 절벽 그림자에 가려져있는 임청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마면혈도의 얼굴은 더욱 말같이 보여 공포스럽다.

죽이려다가 죽이지 못하고 갔으니, 발각되기만 하면 자신은 두 토막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임청우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철선동시가 허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풍(寒風)이 불어나온다는 건 안쪽에 빈 공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뒤쪽마저 막혀 있다면 금상첨화고...”

캇캇캇!”

마면혈도는 뭐가 그리 좋은지 커다란 입을 벌리고 웃었다.

(그래도 히히힝! 하고 웃지는 않는군.)

임청우는 마면혈도의 웃음이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말울음 소리가 아니라는 걸 오히려 신기해했다.

그 마면혈도가 웃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봐! 얼어 죽은 놈! 도망쳐 다니는 것도 질렸으니 그만 이곳에 자리를 잡도록 하자.”

글쎄... 그래도 좋겠지만 바람 속에 사람냄새가 묻어있어. 골짜기 안에 사람이 있는 게 틀림없는데...”

철선동시가 철선을 흔들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을 마면혈도에게 보냈다.

그자의 말에 임청우는 자신이 발각된 줄 알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죽마에서 떨어질 뻔 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럼 죽여야지.”

휘익!

마면혈도가 등에서 혈도를 꺼내들고 앞장서서 비련곡 안으로 사라졌다.

철선동시는 느긋한 웃음을 흘리면서 주변을 한번 돌아보고는 마면혈도를 따라갔다.

임청우는 두 괴물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죽마에서 내려왔다.

죽마를 절벽 그늘진 곳에 숨겨놓은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계곡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냐!”

좁고 긴 계곡 입구를 빠져나왔을 때 모옥 쪽에서 앙칼지게 외치는 어머니 임단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임청우는 즉시 바닥에 엎드렸다.

싱싱한 약초 냄새가 코를 찔렀다.

크하하핫! 늙은 암고양이가 살고있을 줄은 몰랐는걸.”

즐거운 듯 웃는 마면혈도의 웃음소리가 임단심의 음성에 이어 들려온다.

바닥에 엎드린 임청우는 마면혈도와 철선동시의 등이 보이는 곳까지 기어갔다.

!

그 직후 모옥의 문을 부수고 어머니 임단심이 날아 나오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가 빼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임청우도 전부터 알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문을 부수고 날아 나와 선녀처럼 옷깃을 나부끼며 내려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놀라 눈이 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다.

철선동시는 한쪽으로 슬쩍 비키면서 웃고 말했다.

이같은 경계에 이인(異人)이 살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지. 한데 신법을 보아하니 우리와 동류(同類)인 듯하군.”

... 당신은!”

임단심은 시뻘건 칼을 들고 서있는 괴물같은 마면혈도의 모습에 헛바람을 삼켰다.

마면혈도...!”

그녀는 주춤 물러서며 떨리는 음성으로 내뱉았다.

크캇캇캇! 본좌를 알고 있다니... 그럼 저 친구도 알아보겠는가?”

마면혈도가 광소를 터뜨리고 철선동시를 가리켰다.

(마면혈도와 철선동시...!)

임단심은 철선동시 역시 알아보고 파리한 얼굴에 미미한 경련을 일으켰다.

(흉포하기로 유명한 삼괴(三怪) 중 두 놈이 이곳에 나타나다니...,)

 

삼괴...!

일왕(一王) 일협(一俠) 다음으로 거론되는 이자들은 사파(邪派)를 대표하는 고수들로서 독선적이고 흉포하기 이를 데 없는 무리들이었다.

삼괴의 첫째는 무비옹(無比翁)이라 불리는 늙은이인데 외호를 스스로 지은 자다.

무비(無比)라는 말은 견줄 곳이 없다는 뜻이니 그런 이름을 지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오만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무비옹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오직 삼괴의 둘째인 마면혈도와 세째인 철선동시가 매우 두려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무비옹의 무공이 두 사람에 비해 월등할 뿐만 아니라 흉폭 잔인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비옹을 본 사람도 거의 없고 그의 무공을 본 사람은 더더욱 없다.

대신 이따금씩 발견되는 사지가 찢어지고 몸통은 새까맣게 타버린 시체가 발견되면 그것이 무비옹의 짓이라고 사람들은 공공연히 말하곤 한다.

그 흉악 잔인함은 이름 그대로 무비, 견줄 곳이 없는 인물이 무비옹이다.

삼괴의 둘째 마면혈도는 살인과 방화, 강간을 밥 먹듯이 하는 자다.

삼괴의 셋째이며 강시(疆屍)같은 몰골을 한 철선동시는 교활할 뿐만 아니라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 냉혈한이다. 심지어 자신의 부모나 형제마저도 서슴없이 죽일 수 있는 자가 철선동시인 것이다.

 

(오늘밤 어쩌면 나 혈관음(血觀音) 임단심의 모진 목숨이 끝날지도 모르겠구나.)

임청우의 어머니, 혈관음 임단심은 푸른빛이 감도는 파리한 입술을 깨물었다.

(그나마 삼괴의 우두머리인 무비옹이 함께 나타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삼괴는 당금 무림의 최절정 고수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비록 첫째인 무비옹이 함께 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머지 두 사람을 어떻게 상대한단 말인가?

임단심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마면혈도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흐흐흐! 약간 늙기는 했지만 아직도 팽팽할 것 같군. 이 나으리를 즐겁게 해주기엔 부족함이 없겠어.”

그자의 주먹덩이 같은 눈동자가 음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임단심은 흠칫하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마면혈도가 기분이 내키는 대로 살인과 강간을 저지른다는 말은 익히 들었었다.

그러나 임단심은 이내 차가운 눈빛을 내쏘며 분노에 저민 말을 내뱉었다.

미친놈... 네놈 따위가 감히...”

번쩍!

순간 한줄기 혈광이 그녀의 눈앞에서 일어났다.

(위험하다!)

임단심은 날카로운 도기를 느끼며 몸을 흔들었다.

그녀의 몸이 안개처럼 흔들리며 옆으로 두 걸음 이동했다.

스악!

그러나 혈광은 허공에서 빙글 방향을 돌리더니 임단심의 면전에 다시 나타났다.

싸늘한 한기가 전신을 엄습하는 순간 그녀는 마치 거미줄에 얽히기라도 한 듯이 꼼짝할 수 없었다.

흐흐흐...”

혈도 끝을 임단심의 가슴에 댄 마면혈도가 음탕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삼보면천(三步免天)! 세 걸음이면 하늘의 그물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보법이기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겨우 사성(四成) 수준의 삼보면천으로는 이 나으리의 혈도를 피할 수 없지. 자 순순히 옷을 벗어라.”

사삭!

마면혈도가 칼끝을 약간 아래로 내리자 임단심의 앞가슴 옷이 예리하게 베어지며 흰 속살이 드러났다.

임단심의 얼굴은 경악과 분노와 수치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녀린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삼보면천이라고?”

그때 한쪽에 서있던 철선동시가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임단심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마치 까마귀가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해라! 삼보면천을 누구에게 배웠느냐?”

! 그렇지. 대형께서 삼보면천을 사용하는 자를 보면 즉시 잡아두라고 하셨지!”

마면혈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이놈들이 설마 내 신분을 알아차린 것일까?)

임단심의 안색이 확 변했다.

 

(저 괴물들이 어머니를 죽이려는 모양이다.)

기화요초가 무성한 초지에 엎드려서 보고 있던 임청우는 다급해졌다.

그 바람에 척포라고 이름 지어준 금관혈린사가 호리병에서 스르르 빠져나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마면혈도가 혈도로 어머니의 가슴을 겨누고 있는 게 임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이에 그는 급한 대로 근처에 있는 주먹만한 돌을 주워 있는 힘을 다해 던졌다.

!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마면혈도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갔다.

?”

바람소리를 들은 마면혈도는 뜻밖이라는 듯 몸을 빙글 돌리며 칼을 쥐지 않은 손으로 돌을 낚아챘다.

누구냐?”

철선동시도 벼락같이 소리치며 임청우가 엎드려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화악!

날아오며 휘두르는 그자의 철선에서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같은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들켰다!)

휘리릭!

임청우는 다급히 옆으로 몸을 굴렸다. 그의 몸에 깔린 화초와 약초들이 땅에 납작하게 눌려졌다.

쩌저적!

임청우가 누워있던 곳의 기화요초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철선동시가 휘두른 철선에서 뿜어진 지독한 냉기 때문이다.

재빨리 몸을 굴렸지만 임청우도 그 냉기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털썩!

머릿속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기화요초 사이에 널부러졌다.

암고양이뿐 아니라 쥐새끼도 숨어있었구나!”

철선동시가 까마귀같은 음성으로 웃으며 임청우를 덮쳐왔다. 그자는 아직 임청우가 표운봉에서 만났던 소년임은 알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헌데 철선동시가 막 임청우를 낚아채려 할 때였다.

쉬쉬쉭!

돌연 미미한 소음과 함께 무언가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크윽!”

그와 함께 마면혈도의 쥐어짜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마면혈도의 비명소리에 임청우를 낚아채려던 철선동시는 급히 허공에서 빙글 돌아 솟구쳐 올랐다.

우욱!”

직후 철선동시 역시 허벅지에 예리한 흉기가 파고드는 것을 느끼며 몸이 기우뚱했다.

철선이 뿜어낸 냉기에 피가 얼어붙어서 널부러졌던 임청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휘리릭!

정신이 돌아오자 임청우는 다시 사력을 다해 몸을 옆으로 굴렸다.

얼어붙은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구르는 것이 최선이었다.

절벽 쪽으로 굴러가는 임청우의 눈에 얼핏 어머니가 무언가를 던진 자세로 훌쩍 물러서는 것이 들어왔다.

하지만 다음 순간 임청우의 몸은 아래로 추락해 버렸다.

몇 번 구른 사이에 절벽에 이르렀던 것이다.

 

크윽!”

마면혈도는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다. 그런 그자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있었다. 길이 한 뼘쯤 되는 쇠못이 목에 박힌 것이다.

하지만 그 쇠못은 피부를 뚫고 들어왔을 뿐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피가 심하게 뿜어지는 것은 목을 지나는 혈관중 하나가 찢어진 때문이다.

쿨럭! 쿨럭!”

임단심도 연신 기침을 하면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 가랭이를 찢어 죽일 년!”

마면혈도는 목에 박힌 쇠못을 확 잡아 뽑아 멀리 집어던지면서 짐승같이 고함쳤다.

쉬쉭!

흐윽!”

직후 혈도가 빛을 발하고 혈광이 어지럽게 번득이는가 싶더니 임단심이 걸친 옷이 조각조각 나서 허공으로 흩날렸다.

이이이... 천한 것이 감히...”

삽시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알몸이 되어버린 임단심은 급히 치부를 가리면서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해 부르르 떨었다.

입가에 가득한 선혈과 살기어린 그녀의 눈빛에 마면혈도는 순간적으로 흠칫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마면혈도는 목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가슴을 적시자 다시금 강한 분노와 함께 음욕이 들끓어 올랐다.

임단심은 마면혈도가 날아온 돌을 잡느라 뒤를 돌아보고, 철선동시가 임청우를 향해 몸을 날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매 속에 숨기고 있던 세 대의 쇠못을 발출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상이 발작하여 기혈이 막혀버렸다.

그 때문에 공력의 상당부분이 흩어지면서 쇠못의 겨냥도 약간 비틀어져 버렸다.

바로 코앞에 있던 마면혈도의 목을 겨냥했던 쇠못은 요혈을 조금 비켜서 박혀버렸다.

철선동시의 등을 노렸던 나머지 두 대의 쇠못 중 하나는 그자가 피해버리고 겨우 한 대 만이 허벅지에 격중 되었을 뿐이었다.

(... 틀렸나?)

아득한 절망감이 임단심을 휩쓸었다.

흐흐흐... 두 번 다시 뻗대지 못하게 해주마.”

마면혈도가 음욕을 참지 못하는 웃음을 흘리며 칼을 흔들었다.

흐윽!”

붉은 빛이 눈앞에서 다시 한 번 번득이는 순간 임단심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허물어지고 말았다.

어스름 달빛 아래 혈도가 봉쇄되어 쓰러진 그녀의 나신이 파랗게 빛났다.

흐흐흐...”

마면혈도는 칼을 집어넣고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임단심의 얼굴은 서른을 넘긴 나이와 오랜 투병생활에 초췌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내를 뇌쇄시킬 만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마면혈도는 우악스런 손길로 임단심의 알몸을 화초들 위로 집어던지고, 그 위로 숨을 씩씩거리며 덮쳐갔다.

내상이 도져 정신이 혼미해진 임단심은 배추 속같이 새하얀 두 팔을 양쪽으로 힘없이 떨군 채 널브러져 있었다.

헌데 그런 그녀의 왼쪽 팔뚝에는 작고 붉은 점 하나가 찍혀있는 것이 아닌가?

수궁사(守宮沙)!

그것은 바로 처녀(處女)의 상징이라는 수궁사였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처녀의 상징을 지니고 있단 말인가?

물론 그토록 고이 지켜온 처녀성이 지금 색마의 손길아래 무참히 짓밟히게 되었지만...!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1

 

             혼례식 전야

 

 

 

하늘같은 남편이 될 소성주를 중인환시리에 개망신 시키다니... 아무리 속 좁은 계집의 소행이라 해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소.”

혈가람이 솥뚜껑만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펑펑 치며 말했다.

소성주님을 위해 격분하시는 부성주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혼례를 목전에 둔 지금 진소저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자제해야하지 않을런지요?”

신중하게 입을 연 중년인은 제왕성의 외()총관 독검마유(毒劍魔儒) 궁무독(宮無獨)이다.

제왕성의 외총관은 다른 문파들과의 관계를 전담한다.

궁무독은 심기가 깊고 꾀가 많아 외총관의 역할을 능란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외총관님의 말씀이 맞아요. 일단 내일의 혼례를 원만히 치르는 데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한 것은 모여 있는 네 사람 중 유일한 여자인 내총관 구숙정이다.

황금성의 진소저가 제 아무리 당찬 성격이라도 일단 소성주의 여자가 되고나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어요?”

구숙정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겠지. 어쨌든 진소저도 여자는 여자이니...”

무엇보다 혼례를 무사히 치르는 게 중요하긴 해.”

구숙정의 말에 살천인조는 물론이고 혈가람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쯧쯧! 그나저나 보지 않아도 뻔하구먼. 소성주는 분을 참지 못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을 게야.”

살천인조가 혀를 끌끌 찼다. 전설적인 자객답게 살천인조는 모용준의 됨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소성주는 제가 가서 달래볼 테니 부성주님들께서는 귀빈들의 접대에 전념해주세요.”

구숙정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 * *

 

네가 모용준을 만나고 왔다는 얘기는 들었다.”

고독모모(孤獨母母)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새하얀 백발에 곱게 늙은 노파인 고독모모는 황금성의 태상호법이다.

출신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독모모가 절세적인 무공의 소유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황금성의 제일고수이기도 한 고독모모는 어린 성주를 경호하기 위해 제왕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래 모용준을 직접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

고독모모는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나요?”

물론이다.”

진상파의 새침한 말에 고독모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 보고받은 대로 경박하고 탐욕스러운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하더군요.”

진상파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경멸의 표정이 떠올랐다.

저런...”

고독모모는 한숨을 쉬었다.

제가 지금껏 만나본 사내들 중에서도 평균 이하라고 할 수 있어요.”

모용준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진상파의 얼굴은 저절로 찌푸려졌다.

노신을 비롯하여 황금성의 모든 식솔들은 상파 너의 행복을 바라고 있다. 모용준이 정 마음에 들지 않고 성에 차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파혼을 선언하고 돌아가자.”

고독모모가 연민의 표정으로 말했다.

어려서 어머니를 병으로 잃은 진상파를 사실상 길러온 것이 고독모모다.

고독모모에게는 진상파가 주인이라기보다는 딸같은 존재인 것이다.

아뇨! 내일 있을 혼례는 예정대로 진행시키도록 하세요.”

진상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상파야!”

여자로서의 행복도 중요하지만 제게는 황금성 성주로서의 책임이 더 무거워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독모모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물론 모용준은 모든 면에서 제 배필이 되기에 모자란 사내예요. 하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배경... 제왕성의 강력한 힘은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군요.”

진상파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었다.

황금성의 안위를 위해 네 행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냐?”

아니요. 저는 여자로서도 행복해질 거예요. 모용준을 제가 원하는 기준에 맞는 사내로 변모시키면 되니까요.”

진상파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고독모모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백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고독모모인지라 성인이 된 인간의 성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당사자인 네가 그렇게 하겠다는데 할미로서도 더는 할 말이 없구나.”

고독모모는 강철로 만든 지팡이를 쥐고 일어났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고독모모는 배웅하려고 일어나는 진상파를 만류하며 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파는 누구보다 똑똑한 아이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세상 물정이 얼마나 각박하고 인간은 또 어디까지 추잡해질 수 있는지는 모르고 있다.)

진상파의 방을 나서며 고독모모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상파가 제 아무리 노력해 봐야 모용준의 천박한 성품은 변함이 없을 테고... 결국 세월이 흐른 후에야 그걸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겠지만...)

고독모모는 문 밖을 지키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의 인사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미 쏘아진 화살이니 그저 모용준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는 괜찮은 인간이길 바랄 뿐이다.)

한숨을 쉬는 고독모모의 미간에 전에 없던 주름이 깊이 파였다.

 

* * *

 

밤이 깊었다.

(다 큰 사내의 성품을 고치려는 게 낙타가 바늘구멍 지나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진상파는 잠자리에 들 생각은 않은 채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어쩌면 평생 지속될 악전고투일 수도 있겠으나... 이제 와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진상파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모용준의 경박하고도 비열한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 속에 납덩이가 들어있는 기분이 되는 진상파였다.

(지혜를 다 동원하고 인내심을 극한까지 발휘해서라도 모용준을 번듯한 사내로 변모시켜야만 한다.)

진상파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추스르며 결의를 다졌다.

 

<다만 소인배는 한번 품은 원한이나 원망은 언제까지라도 잊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라.>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고독모모가 방을 나가면서 남긴 말이 쟁쟁하다.

그와 함께 분을 참지 못하고 악을 쓰며 집기들을 때려 부수던 모용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까 그 일로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해 있을 것이다. 내일 대사를 치러야하니 이 밤이 가기 전에 찾아가서 좀 다독여줄 필요가 있다.)

덜컹!

진상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방을 나서자 경비를 서고 있던 철관음과 백팔금차들이 놀라서 돌아본다.

밤이 깊었습니다. 어인 일로 나오셨는지요?”

철관음이 다가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 전에 바람을 좀 쐬어야겠어.”

진상파는 철관음을 지나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거 없어. 혼자 생각할 것도 좀 있으니까 아무도 따라오지 마.”

진상파는 철관음을 뿌리치고 영빈관을 떠났다.

괜찮을런지요 단장님?”

백팔금차 중 한명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제왕성의 내원(內院)은 세상 어느 곳보다 안전한 곳이니 별일 없을 것이다.”

철관음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진상파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몰래 경호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불벼락이 내릴 것이다. 제왕성의 치안상태를 믿고 기다려보자.”

...”

철관음의 말에 백팔금차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심란하시겠지. 평생 같이 살아야할 사내의 천박한 실체를 알아버렸으니...)

철관음은 진상파가 사라진 쪽을 보며 소리없이 한숨을 쉬었다.

(새석숭님만 급사하지 않으셨어도 인중(人中)의 봉황(鳳凰)인 아가씨가 모용준같이 비루한 인간을 배필로 맞은 일은 없었을 텐데...)

새삼 자신의 전 주인이 비명에 간 것이 아쉬운 철관음이었다.

 

* * *

 

제왕성에는 고수들이 구름같이 많다.

대체 얼마나 많은 고수들이 제왕성의 녹을 먹고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두 명의 부성주와 오래전에 제왕성을 나간 태상호법 흑백신귀가 신주이십팔숙중 섭장천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강하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두 명의 부성주와 두 명의 태상호법 외에도 제왕성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수들이 존재한다.

강호에 알려진 제왕성의 대표적인 전력은 사대무력집단(四大武力集團)이다.

금위사대(金衛士隊), 은위사대(銀衛士隊), 동위사대(銅衛士隊), 철위사대(鐵衛士隊)가 바로 그들이다.

제왕성은 소속 무사들에게 황실을 본 따 위사(衛士)라는 직함을 부여해온 것이다.

 

사대무력집단중 가장 낮은 등급은 철위사대다.

하지만 철위사대 소속 철위사(鐵衛士)들은 강호에 나가면 일류고수 소리를 듣고도 남는 실력자들이다.

그 철위사들의 숫자가 무려 천 명이다.

제왕성에는 위사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이 수만 명 존재한다.

그들이 치열하게 경쟁하여 선발되는 것이 철위사다.

 

동위사(銅衛士)의 숫자는 오백 명으로 각대문파 장로들에 필적하는 고수들이다.

 

은위사(銀衛士)의 숫자는 삼백 명이며 각대문파 장문인들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실력자들이다.

 

금위사(金衛士)의 숫자는 불과 백 명이다.

그러나 그들은 신주이십팔숙에 이름을 올려도 무리가 없는 절세고수들이다.

, 제왕성에는 무림의 최고 고수들이라는 신주이십팔숙이 무려 백 명이나 있는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왕성에 금위사들에게 필적하거나 능가하는 고수들의 집단이 따로 있다는 사실이다.

원로원(元老院)이 바로 그것이다.

은퇴한 전대고수들을 예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원로원이다.

숫자 미상인 원로원의 원로들은 제왕성의 대소사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왕성에 심각한 도전이나 위기가 찾아오면 발 벗고 나선다.

원로원의 전력만으로도 마도 무림의 종가인 마교나 사파 무림의 주인이었던 혈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이 무림의 평판이다.

 

이처럼 백여 년 간 축적되어온 제왕성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설령 전설 속의 천마가 부활한다 해도 제왕성에 맞서지는 못할 것이다.

 

* * *

 

일신재는 제왕성 내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대 제왕성 성주가 될 후계자의 거처이기 때문이다.

일신재의 경비가 삼엄한 것은 당연하다.

낮에는 등급을 받지 못한 무사들, 무등위(無等位) 위사들이 경비를 선다.

하지만 밤이 깊어지면 수십 명의 철위사들이 일신재를 물 샐틈 없이 에워싼 채 지킨다.

 

진상파는 일신재가 보이는 곳에 자라고 있는 울창한 관목들 사이에 숨듯이 서있었다.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옷자락에 <>자가 수놓아진 무사들이 일신재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들이 철위사대 소속의 철위사들이다.

(제왕성 후계자의 거처답게 경비가 삼엄하구나.)

진상파의 미간이 모아졌다.

그녀도 제왕성의 사대무력집단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무공 방면에는 그다지 성취가 없는 진상파다.

철위사 한명도 상대할 능력이 그녀에게는 없다.

(자존심이 상해서 토라져 있을 모용준을 다독여줄까 하고 찾아왔는데... 이래서는 몰래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삼엄한 일신재의 경비를 확인한 진상파는 난감해졌다.

물론 정체를 드러내면 무리없에 일신재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밤 깊은 시간에 자신이 모용준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

마치 진상파 자신이 먼저 모용준에게 숙이고 들어갔다는 소문이 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돌아가야 하나?)

관목 사이에 숨은 진상파가 철위사들을 훔쳐보며 갈등 할 때였다.

“...!”

“...!”

무엇을 발견했는지 돌연 철위사들이 긴장하는 것이 진상파의 눈에 들어왔다.

(들킨 것일까?)

철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것을 느끼며 진상파는 몸을 좀 더 숙였다.

!

그 직후 누군가 관목 옆을 지나 일신재로 다가갔다.

(저 계집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일신재로 다가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진상파의 눈이 치떠졌다.

여자인 진상파가 보기에도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그 여자는 바로 제왕성의 내총관인 구미호리 구숙정이었다.

철위사들은 구숙정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하고 긴장했던 것이다.

(이 야심한 중에 저 천박한 계집이 무슨 일로 모용준의 거처를 찾아온 것일까?)

진상파가 일신재로 다가가는 구숙정의 뒷모습을 노려볼 때였다.

휘익!

건물 뒤편에서 날듯이 달려오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철위사 복장을 한 중년인인데 다른 철위사들과 다른 점은 소매에 세 가닥의 검은 색 줄이 새겨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 세 가닥의 줄은 중년인이 철위사대의 수령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지닌 그자가 철위사대의 대주(隊主)인 냉혈철심(冷血鐵心) 사우(査愚).

내총관님!”

서둘러 달려온 냉혈철심 사우가 포권을 하며 구숙정을 맞이했다.

소성주님은?”

구숙정은 사우에게 물으면서도 일신재 쪽으로 향하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신지 주무시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우는 구숙정의 눈치를 보며 따라갔다.

사우가 비록 철위사대의 대주이긴 해도 총관인 구숙정보다는 한참 직급이 낮다.

게다가 구숙정에게는 부성주들이라 해도 무시하지 못하는 막강한 배경이 있는데...

그럴만도 하지. 평생 부모님에게도 싫은 소리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우리 소성주가 천한 계집에게 수모를 당했으니...”

구숙정은 코웃음을 치며 일신재의 입구로 다가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0

 

               단 둘만의 절지(絶地), 낙원(樂園)

 

 

... 죄송합니다 신()공자님!”

속하들이 무능하여 작은 아가씨를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대려장의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백남빈의 말을 끌고 돌아간 몇 명을 제외하고 백여 명의 대려장 무사들 모두는 밤새 당산산맥을 달리며 강미루의 종적을 찾았다.

어두운 산속을 말로 달리다보니 몇 명인가는 낙마하여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강미루와 흑왕이 사라진 곳을 중심으로 백여 리를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대들이 죄를 청할 일은 아니니 자책할 것도 없다.”

대려장 무사들 앞쪽에 뒷짐을 진 채 서있는 인물이 한숨을 쉬었다.

나이는 삼십대 후반쯤인데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시원시원한 인상을 풍긴다.

풍채 좋은 몸에는 도포(道袍)라는 이국적인 형태의 흰옷을 걸쳤으며 머리에는 검은색 당건(唐巾)을 썼다.

허리에 차고 있는 보검만 아니라면 무사가 아니라 유생(儒生)으로 보였을 이 인물이 무군자 강진남의 사위다.

강진남의 큰 딸 강미조의 남편인 그의 이름은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伽藍)이다.

고려(高麗), 지금은 조선(朝鮮)으로 이름이 바뀐 압록강 너머 출신이라는 것 외에 신가람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강호의 물 좀 먹은 요동 일대의 늙은 무림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신가람을 대려장의 으뜸 가는 고수로 꼽고 있다.

강진남이라 해도 이 잘 생긴 사위보다 무공으로는 아래라는 것이 늙은 생강들의 일치 된 의견이다.

유모 최씨의 눈물 어린 애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신가람은 강미루를 대려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왔었다.

하지만 한 발 늦어서 강미루는 철령보를 빠져나온 전령과 싸우다가 당산산맥에서 실종되고 말았다.

수색 범위를 백리 밖으로 넓히되 말이 달릴 만한 지형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도록...”

신가람의 지시에 대려장의 무사들은 봉명(奉命)을 외친 후 뿔뿔이 흩어졌다.

이 말썽쟁이를 찾아내면 볼기짝부터 쳐야겠구나.”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대려장 무사들을 보며 신가람은 한숨을 쉬었다.

 

***

 

강미루는 자신의 애마가 목을 핥는 것을 느끼며 깨어났다.

정신이 돌아오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강미루는 기가 막혔다. 걸치고 있던 모든 옷이 조각조각 잘려서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제 아무리 선머슴같은 말괄량이라지만 어제 처음 만난 사내에게 알몸을 홀딱 보이고 말았으니 부끄러워서 죽고만 싶다.

대려장의 둘째 공주로 살아오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강미루다.

그런 그녀이기에 자신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백남빈을 죽이고 싶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백남빈을 죽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고개를 들어 백남빈을 보면 풀이 죽어서 땅만 보고 있는 모습에 가슴이 두근거려 그럴 마음이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백남빈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강미루의 몸에 상처가 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그녀의 붉은 옷을 갈기갈기 잘라버렸었다.

원래 옷이 입을 수 없는 지경이 된 터라 강미루는 백남빈의 남색상의(藍色上衣)로 알몸을 가리고 있다.

자신을 위해 옷을 벗어주는 바람에 알몸이 된 백남빈의 상체가 당당하게 보여 강미루의 가슴이 울렁거린다.

날은 이미 밝았으나 강미루는 웅크리고 앉아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상체는 백남빈의 헐렁한 웃옷으로 가리고 있지만 아랫도리는 여전히 발가벗은 상태라 일어서는 것은 고사하고 고쳐 앉을 수도 없다.

자칫하다가는 너무도 부끄러운 곳을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을 보면서 멀뚱거리고 있는데 뱃속에서는 드디어 꾸룩 꾸룩 비둘기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날이 밝으면서 두 사람이 있는 분지의 형상이 전모를 드러냈다.

분지는 사면이 수백 길 높이의 깎아지른 절벽으로 둘러싸여있다. 마치 거대한 항아리같은 형태의 분지라 바닥에서는 하늘이 타원형으로 보인다.

분지의 바닥에는 직경이 수십 장인 타원형의 연못이 자리하고 있다.

뜨거운 온천수가 고여 있는 그 연못을 에워싸고 절벽과 원시림과 풀밭이 펼쳐져 있다.

온천수의 열기 때문인지 바깥세상은 이미 깊은 가을이지만 분지 내부는 한 여름처럼 덥다.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연못물은 특이하게도 푸른빛을 띄고 있다.

녹색의 온천수가 고여 있는 연못은 주변의 풀, 나무, 바위들과 어울려 낙원을 연상하게 한다.

늘 한 여름인 이 분지는 진정 세상 밖의 세상이요 평화와 안락이 깃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별호가 홍의창(紅衣槍)이었던 강미루는 하룻밤 사이에 나신창(裸身槍)이 되어 버린 자신의 신세가 막막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려장의 원수인 철령보 소속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나쁜 뜻으로 자신을 알몸으로 만든 것도 아니니 탓할 수도 없다.

(나는 이제 어찌 하나? 저 남자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와 형부가 알면 저 사람을 살려둘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강미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처녀로서 알몸을 보였으면 상대에게 시집을 갈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그 상대가 자신의 집안과 오랜 원수지간인 철령보 출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자신이 이 사내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하면 아버지와 형부가 허락을 하실지 미지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번민에 휩싸여 있었는지 모른다.

문득 옆에서", !" 하는 기척이 나서 강미루는 정신을 차렸다.

돌아보니 백남빈이 고개를 돌리고 먼 곳을 보는 시늉을 하면서 한손으로는 상당한 양의 풀 뭉치를 내밀고 있다.

그런 백남빈은 상체를 풀로 얼기설기 엮은 것을 도롱이처럼 걸치고 있다. 초면이나 마찬가지인 사이에 언제까지 맨살을 드러내고 있을 수는 없어서 풀로 몸을 가릴 것을 만든 것이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내미는 것도 아마 비슷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받아 들었다.

다리를 한껏 오무려 매무새를 바로하고 팔만 돌려서 받노라니 백남빈의 어깨 너머로 햇살이 눈부셨다.

나무의 속껍질과 긴 풀로 만들어진 풀옷은 백남빈을 무슨 요정전사(妖精戰士)처럼 보이게 했다.

준수한 백남빈의 옆모습이 햇살에 밝게 빛나 더 없이 보기 좋았다.

강미루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풀로 된 옷을 가슴에 안았다.

(나도 이 옷을 입으면 저 사람과 어울리는 한 쌍이 되겠지?)

야릇한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다.

강미루가 풀 뭉치를 받자 백남빈은 재빨리 그 자리를 피해버렸다.

강미루에게는 그런 백남빈의 행동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딴에는 배려를 한다고 자리를 피했겠지만 어쩐지 볼일 다 본 후 버림받은 여자 취급을 받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강미루가 상의(上衣)라고 생각하며 받았던 풀 옷은 예상과는 달리 치마였다.

부드럽고 긴 풀들을 나무의 질긴 속껍질로 엮어서 마치 초가집의 이엉처럼 만들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그래도 꽤 정성을 들여 만든 풀 옷이었다. 남자의 거친 솜씨임에도 불구하고 풀이 흩어지지 않도록 나무의 속껍질로 여러 번 엮어 놓은 것이다.

풀 옷을 허리에 감고 일어서서 온천물에 모습을 비춰보니 우스운 모습을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위에는 헐렁한 남자의 상의를 걸쳤고 아래에는 풀로 된 치마를 입었으니 그보다 더 우스운 차림은 없을 것 같았다.

물도 녹색이고 그것에 비친 사람도 녹색이다.

문득 강미루와 정반대의 차림을 한 사내가 물에 비친 그녀의 모습 곁에 나타났다.

물론 백남빈이다.

그의 품에는 여러 개의 먹음직스러운 열매가 안겨져 있었다.

강미루는 조금 심술이 났다. 물에 비친 백남빈의 모습이 더 멋있어 보인 때문이다.

백남빈의 풀 옷 상의는 아주 잘 어울리는데 자기의 풀로 짠 치마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

코웃음을 치며 돌아선 강미루는 백남빈의 품에 있는 열매를 몽땅 집어들고 돌아앉아 버렸다.

토라진 계집아이같은 강미루의 짓거리에도 백남빈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연못을 향해 앉은 강미루는 백남빈이 따온 이름 모를 과일을 하나 먹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과일이다.

하지만 신경이 온통 백남빈에게 향해있어 무슨 맛인지 음미할 수도 없다.

백남빈이 그런 강미루의 눈치를 살피며 바닥에 놓여진 과일을 하나 슬며시 집어든다.

강미루는 새침한 표정인 채 관심 없는 척 했다.

백남빈은 강미루의 눈치를 보면서 과일을 먹었다.

그러면서 다시 생각해봤지만 자신이 딱히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옷을 벗긴 것은 독을 치료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녀의 나신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본성의 발현이니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알몸을 보고 만졌던 어쨌든 자신은 강미루를 살리는데 성공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 소녀한테 꿀려서 기를 못 편단 말인가)

백남빈은 내심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이성(異性)의 경험이 없는 백남빈으로서는 결코 모를 것이다. 그것이 애정에 기반을 둔 인간감정(人間感情)의 불합리성(不合理性)인 것을...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긴 했지만 백남빈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지 않고 있었다.

빨리 이 분지를 빠져 나가야하는데... 타고 갈 말도 없고 다리마저 상처가 심상치 않다. 속은 타지만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며칠 머물러야만 한다.”

깊이 몰두하다 보니 백남빈의 생각은 중얼거림이 되어 입 밖으로 나왔다.

강미루는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바깥으로 나가려고 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거기에 생각이 미친 그녀는 즉시 한마디 했다.

"이 분지를 빠져 나가기가 쉽지 않을 걸요?"

그러나 백남빈은 그녀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묵묵히 속으로 궁리만 하고 있었다.

강미루는 왠지 이 아름다운 분지를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하늘 아래에서 오직 이곳만이 자신의 모든 것을 보아버린 저 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과일로 허기를 면한 백남빈은 아픈 다리를 끌면서 분지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강미루는 휘파람으로 흑왕을 불렀다. 흑왕도 온천 주변에서 풀을 뜯어 먹고 생생하게 기력을 회복한 후였다.

강미루는 다가온 흑왕의 등에 훌쩍 몸을 날려 올라탔다.

그러나 몸을 날릴 때의 시원한 아랫도리의 감촉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풀치마로 가려진 아랫도리가 자꾸 신경이 쓰여 눈이 아래를 보다가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 백남빈을 보다가 하면서 힐끔거리고 있었다.

백남빈 옆에 다다른 강미루가 손을 뻗자 백남빈은 사양할 수 없어 그녀의 뒤로 올라가 앉았다.

다시 두 사람이 함께 말에 타고 있자 어제 저녁의 그 치열했던 쟁투가 생각난다.

백남빈은 겸연쩍어 웃었고 강미루는 설레어 두 뺨이 발개졌다.

 

자세히 둘러보니 분지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작아서 기껏해야 만 평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분지는 그야말로 세외선경 같다.

북쪽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울창한 원시림이 있고 서쪽에는 까마득한 바위절벽이 푸른 연못과 거의 맞닿아있으며, 남쪽 절벽 밑에는 풀밭이 드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동물들은 이름 모를 새들을 제외하고는 토끼 한 마리도 눈에 뛰지 않았다.

동쪽의 절벽은 어제 밤에 백남빈이 내려온 곳인 듯한 데 한동안 맴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올라가는 길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가파른데다가 수백길이나 되는 그 절벽을 어떻게 내려왔는지 불가사의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3

 

          고독한 천하제일인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오른쪽에는 음산한 인상을 지닌 중년 장한이 서 있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젊은 이 인물은 일신에 칠흑같이 검은 장포를 걸치고 있으며 그 검은색 장포 위에는 박쥐의 날개 형상을 본뜬 검은색 피풍의(避風衣)를 두르고 있다.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자는 제법 준수한 용모를 지녔다.

그러나 안색이 지나치게 희고 창백하여 차갑고 섬뜩한 인상을 풍긴다. 너무 하얗다 못해 푸르스름하기까지 보이는 얼굴 탓에 마치 무덤에서 뛰쳐나온 시체같이 보이는 인물이다.

 

-유령마제(幽靈魔帝) 구양수(九陽秀)!

 

신마풍운록 서열 오위(五位)인 그는 얼마 전 북망산(北邙山) 유령궁(幽靈宮)의 새로운 궁주가 된 인물이다.

음유하고 악독한 마공을 연마하여 소리 없이 적을 죽이는 암수(暗手)에 능한 것으로 정평이 난 유령마제 구양수가 무림패권의 야심을 지니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

독천존 서래음-!

유령마제 구양수-!

 

신마풍운록의 서열 삼, , 오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정고수들이 고독애에 운집한 군웅들의 사실상 통솔자였다.

이들 세 사람과 신마풍운록 서열 육위인 태양신협 이청천을 합쳐 무림인들은 사방무신(四方武神)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혁련검호각, 독성부, 유령궁, 태양곡 등의 네 문파는 신주사패천(神州四覇天)이라 칭해지기도 한다.

현재 고독애에는 그 사방무신과 신주사패천 중 태양신협 이청천과 태양곡만이 빠져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상 전 무림의 정영들이 이 비좁은 고독애에 모두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까지 더 기다려야 하는 거요 서(西)부주?”

오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유령마제 구양수였다. 그자는 짜증스러운 음성으로 말하며 독천존 서래음을 돌아보았다.

()노괴는 이미 서부주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중독당한 데다가 오백여 명의 고수들을 해치운 대가로 심각한 내상까지 입은 상태요. 그렇거늘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이오?”

유령마제가 음침한 음성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물론 노부의 무형지독은 제법 쓸만 하지!”

독천존은 곰방대를 입에 문 채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거렸다.

아무리 내공이 신화경에 이른 연남천이라 해도 무형지독을 이겨내지는 못할걸?”

그 말을 들은 유령마제가 다시 재촉했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망설이는 것이오? 당장 쳐들어갑시다!”

그러자 독천존의 가늘게 뜬 두 눈에 언 듯 비웃음이 어렸다.

끌끌, 구양궁주는 혈마대장경에 눈이 멀어서 우리의 상대가 누군지 잊고 있는 듯하구만!”

독천존의 그 말에 유령마제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했다.

독천존은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상대는 다름 아닌 천하의 고독마야 연남천이야. 그래서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고...”

“...!”

독천존의 말에 모멸감을 느낀 듯 유령마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어쨌든 독천존의 말이 옳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에 반박할 수도 없었다.

눈앞의 자그마한 석옥에 도사리고 있는 인물은 유령마제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공포를 느끼는 대상인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고독마야와 맞대결해서 십초(十招) 이상을 버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 인물은 당금 강호에 아무도 없다.

클클, 우리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게야. 연노괴가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쓰러질 때까지...!”

독천존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휴우...!)

독천존의 말에 유성신검황 혁련휘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령마제나 독천존과 달리 광명정대한 성품을 지닌 그는 비록 적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독되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리는 비겁한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감히 앞장서서 석옥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상대는 그 자신이 평생 동안 극복해보려고 절치부심해온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괜한 객기를 부려 단기돌입(單騎突入)했다가는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손에 쓰러지고 말 것이다.

(내 한 몸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유성신검황은 내심 탄식하며 독천존과 유령마제를 돌아보았다.

진심으로 그는 죽음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필부지용으로 고독마야와 맞서 싸우다 죽음을 당한다면 독천존과 유령마제만 이롭게 만들 뿐이다.

독천존의 독성부와 유령마제의 유령궁이 무림을 제패하려는 야망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세력이 바로 유성신검황 자신의 혁련검호각이 아닌가?

(치욕스러운 일이나... 이 방문좌도(榜門左道)의 무리들과 행동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유성신검황은 소리없이 탄식하며 석옥쪽을 주시했다.

 

석옥을 반월형으로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모습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는 마의(麻衣)노인 한 명이 무심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술도... 이것이 마지막이로군!”

!

마의노인은 빈 술병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공허하게 웃었다.

육척 가까운 훤칠한 체격에 희끗희끗한 머리... 얼굴은 비록 주름으로 뒤덮여 있으나 두 눈만은 여전히 형형한 한망(寒茫)을 뿜어내고 있는 노인이다.

이 마의노인의 분위기는 아주 독특했다.

온통 허무함과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잘 벼린 칼로 가슴이 저며지는 듯한 서늘한 느낌에 휩싸이게 된다.

 

-고독마야 연남천!

 

마의노인이 바로 명실상부한 천하제일인이며 신마풍운록의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지난 육십여 년의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고독한 절대자인...!

고독마야가 한 자루 철검(鐵劍)을 짊어지고 무림에 나선 것은 약관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강호에 출도한 이후 그는 적수를 찾기 위해 중원뿐 아니라 새외(塞外)와 변황(邊荒)까지 구석구석 뒤지고 다녔다.

그러나 고독마야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적수를 찾지 못했다.

적수는 고사하고 그의 수하에서 십초를 버티어낸 인물조차 없었다.

비록 세상이 한없이 넓고 그 안의 인간이 모래알같이 많을지라도 진정한 인걸(人傑)은 드문 법이다.

하물며 한 세대가 아니라 수십 세대에 걸쳐도 그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부의 자질의 소유자인 고독마야 연남천이다.

그런 그를 감복시킬만한 인재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적수를 찾아 구주팔황을 헤맨 고독마야의 오십여 년에 걸친 여정은 실망으로 막을 내렸다.

긴긴 여정에서 고독마야가 확인한 것은 세상이 비상식적일 정도로 막강한 그 자신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뿐이었다.

그같은 사실에 실망하고 인간들의 천박함에 좌절한 고독마야는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곤륜산의 깊은 곳에 들어와 석옥 한 채를 짓고 은거해버렸다.

고독마야는 곤륜산에서도 가장 깊고 험해 인적이 닿은 적이 없는 이곳을 고독애라 이름 짓고 거처로 마련한 석옥에 고독헌(孤獨軒)이라는 현판을 새겼던 것이다.

 

어리석은 것들! 이 모두가 강호 무림의 파멸을 노린 음모인 줄도 모르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불나방처럼 몰려든 꼬락서니들이라니...!”

! 퍼석!

고독마야 연남천은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빈 술병을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자세히 보면 그의 안면에는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돈다. 그것은 그가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극독에 중독되었다는 증거였다.

무형지독-!

색도 냄새도 없는 무색투명한 극독으로써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기에 누구라도 이 무형지독의 암산을 피해내지 못한다.

일단 무형지독에 중독되면 반각 이내에 오장육부가 썩어 들어가 죽게 된다.

고독마야가 그 무서운 무형지독을 다량 흡입한 상태에서도 반나절 넘게 쓰러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그의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내공으로도 무형지독을 어찌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 지독한 극독은 내공의 힘으로 태워버릴 수도 없다.

고독마야는 그저 무형지독이 발작하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고독마야는 독천존 서래음의 장담대로 결국 무형지독의 독기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허... 이곳 고독애가 나 연남천의 무덤이 되겠구나.)

고독마야는 공허한 눈빛으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여한은 없다. 이 혼탁하고 추악한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으니...!)

그의 주름진 눈꼬리로 쓸쓸한 미소가 스쳤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신마풍운록이라는 못된 물건을 만들어 세상을 피로 물들게 만든 놈의 상판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이다.)

고독마야는 눈길을 한쪽 옆 서탁으로 돌렸다.

그가 돌아보는 서탁 위에는 표지가 새것인 책자 한 권과 아주 낡아 금방이라도 으스러질 듯한 세 권의 비단 책자가 놓여있었다.

 

-신마풍운록!

 

최근에 지어진 새 책자는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그것은 얼마 전 고독마야의 수중에 들어왔다.

 

-혈마대장경!

 

세 권의 낡은 비단 책자는 다름 아닌 전 무림인들로 하여금 고독마야를 합공하게 만든 원인인 혈마대장경이었다.

두 달 전, 고독마야는 약초를 구하러 천산(天山)에 갔다가 어느 빙곡(氷谷)의 빙동(氷洞)에서 우연히 혈마대장경을 발견하게 되었다.

고독마야가 전대기인의 은거지였던 그 빙동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이미 먼저 들어온 자가 있었다.

새북인마(塞北人魔)라는 그자는 신마풍운록 서열 삼십 위 안에 드는 대단한 고수였다.

물론 천하제일인인 고독마야의 입장에서 본다면 새북인마란 작자는 그저 하루살이 정도에 불과할 뿐이었지만...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먼저 전대기인의 유물을 발견한 사실을 인정하고 조용히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새북인마는 스스로 화를 자초했다.

그 자는 상대가 고독마야임을 꿈에도 알지 못하고 그저 약초나 캐러 다니는 평범한 심마니로 오인했다.

그래서 자신이 비급을 발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시끄러워질 것을 우려하고는 살인멸구 한답시고 고독마야에게 덤벼들었다.

물론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의 일격도 받아내지 못하고 한 팔이 으깨진 채 거꾸러졌다.

새북인마는 그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는 사색이 되어 고독마야 앞에 오체복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굳이 새북인마의 목숨까지 뺏을 이유가 없었던 고독마야는 그자가 발견한 비급만 뺏고 목숨을 살려 주었다.

그렇게 고독마야가 새북인마에게서 빼앗은 비급이 바로 혈마대장경이었다.

고독마야는 새북인마가 허둥지둥 달아난 후에야 자신이 흡혈마조가 남긴 비급을 얻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는 혈마대장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 자신의 무공이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이를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기에 다른 무공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북인마를 그냥 살려 보낸 것이 화근이 되고 말았다.

새북인마는 고독마야에게 복수한답시고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을 지닌 사실을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뜨리고 다닌 것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八 章

 

             天海秘譜

 

 

다급한 순간, 기검룡은 좌수로는 극영쇄심인을, 우수로는 참마제룡수를 펼쳐 상강일괴와 사공망을 동시에 방어했다.

꽈릉___ !

차차창___

폭음과 금속음이 어지럽게 짓터지는 순간,

[___ ___ !]

[___ !]

두마디의 서로 다른 비명이 잇따라 터졌다.

뒤이어,

[하하하... 용아 숙부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사해신룡이 호탕한 웃음을 트뜨리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서며 휘두른 일장에 상강일괴는 그대로 즉사했고 기검룡의 참세룡수에 의해 기식이 엄엄했다.

사해신룡은 사위를 둘러보았다.

한쪽에서는 태산일수가 홍라선희에게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쪽에서는 능부인이 북망사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다.

사해신룡은 능소취를 기검룡에게 맡기고 번쩍 북망사신에로 몸을 날렸다.

능소취는 기검룡과 함께 있게 되자 문득 뾰루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오빠, 저 여자한데 입맞춤할거야?]

그녀는 홍라선희를 가리켰다.

기검룡은 일순 당황하여 안색이 붉어졌다.

[... 그럼 어떻게 해. 일방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약속을 해버렸으니...]

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말에 능소취는 홱 토라졌다.

이때, 꽈르릉___!

장내에 다시 폭음이 터져올랐다.

사해신룡과 격돌한 북망사신이 순간 비틀 하며 물러섰다.

그 순간을 놓칠 능부인이 아니었다.

[빙음백주강(氷陰白柱罡)!]

그녀의 우장에서 얼음기둥같은 하얀기류가 쭉 뻗어나갔다.

파파팍___ ___!

엄청난 파열음에 이어,

[___ !]

북망사신은 왼팔이 산산이 부서져 날아갔다.

[두고보자.]

북망사신은 이를 갈며 황급히 몸을 날려 장내를 빠져나갔다.

거의 동시에, 홍라선희를 상대했던 태산일수가 물러가고 그것을 시작으로 군웅들은 삽시에 장내에서 사라졌다.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사해신룡은 침중한 신색으로 사방을 쓸어보았다.

칠십이도객의 절반이 죽음을 당했고 내삼당의 당주 역시 심한 상처를 입고 있었다.

이때,

[호호호...]

홍라선희가 풍만한 둔부를 살래살래 흔들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 귀여운 공자님, 어서 이 누나의 뺨에 입을 맞춰주세요.]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고 상아빛 뺨을 내밀었다.

능소취는 이 광경에 그만 눈물을 글썽였다.

기검룡이 주저하자 홍라선희는 달콤한 표정으로 재촉했다.

[공자님, 장부라면 약속을 지키셔야죠.]

기검룡은 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얼굴에 가볍게 입술을 대었다.

짧은 순간, 홍라선희의 상아빛 뺨은 도화빛으로 물들었고 그에반해 기검룡의 표정은 못할 짓을 한것처럼 떫뜨름하게 변했다.

이 모습에 능소취는 그만 얼굴을 가리고 능부인의 품속으로 뛰어 들었다.

이윽고 홍라선희는 교태로운 웃음이 어린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말했다.

[호호... 공자님, 다시 만나기를 바래요.]

이어 그녀는 기검룡의 손에 무엇인가 살짝 쥐어주고 휙! 몸을 날려 계곡을 떠났다.

이때, 능소취는 눈물젖은 눈으로 기검룡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용오빠는 거짓말장이! 취아가 제일 좋다더니 그 여자가 더 좋은거지? 흑흑...]

기검룡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취아... 울지마라. 나는 취아가 누구보다 더 좋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능수취는 고개를 흔들며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문득 의미있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용아는 여복이 터졌구나. 벌써부터 저렇게 여자들 사이에서 고민하니 훗날에는 큰일나겠구나.]

기검룡은 머쓱하게 웃으며 문득 화제를 바꾸었다.

[참 숙부님! 하후할버지와 해룡방 식구들은 어찌되었을까요?]

그말에 사해신룡도 정색을 했다.

[부인! 이 옥함을 갖고 배로 돌아가 있으시오. 나는 용아와 함께 섬 뒤쪽으로 갔다가 가리다.]

능부인은 사해신룡으로부터 옥함을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 용아 가자.]

, 기검룡과 사해신룡은 절벽을 날아올랐다.

그곳에 올라서니 해룡방과 사해선문이 치열한 호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룡방의 전선은 태반이 침몰되었고 해변가에서는 수백 명 사해선문의 수하들과 해룡방수하들이 뒤엉켜 어지러운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때,

[멈춰랏___!]

사해신룡은 그들을 향해 쩌렁쩌렁한 대갈을 터뜨렸다.

순간,

[___!]

사해선문의 진영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졌다.

사해신룡은 가볍게 그들에게 응수한 뒤 다시 소리쳤다.

[해룡왕(海龍王)! 수십 년간 걸친 양파의 분규는 그대와 본 문주와의 결투로 결말짓는 것이 어떤가?]

[좋다! 패하는 쪽이 영원히 동해에서 손을 떼고 물러나는 것이다.]

비천해응 하후염과 대치하고 있던 금포중년인이 문득 사해신룡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한손에 분수자(分水子)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해신룡과 해룡왕___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한 그들은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사해신룡은 손에 든 깃발을 힘껏 펄럭이며 쓸어갔다.

___ ___ !

해룡왕도 혼신의 힘으로 분수자를 휘둘렀다.

허나, 파파파팍___!

[으윽!]

분수자는 기폭에 부딪치는 순간 대여섯 조각으로 부서지고 해룡왕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네 걸음이나 물러섰다.

[... 졌다!]

그는 고통스럽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돌아가자.]

이어, ! ___!

그들 일행은 모두 몸을 날려 거선으로 돌아갔다.

사해신룡은 장내에 우뚝 선채 위엄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늘 여러형제들이 힘써준 덕분으로 일이 무사히 끝났소. 앞으로 십년(十年), 십년만 지나면 본 사해선문은 천하게 웅비할 수 있을 것이오. 모두 수고를 하셨소. 총단으로 돌아갑시다.]

[___!]

[문주님 만세___!]

사해선문의 수하들은 바다가 떠나갈 듯 힘찬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기검룡은 사해신룡과 함께 몸을 날리며 홍라선희가 주고간 물건을 꺼내보았다.

그것은 티하나 없는 백옥(白玉)으로 만들어진 둥근 옥패였다.

 

<봉황지존(鳳凰之尊).>

 

전면에는 고어로 위와 같은 네 자의 글이 씌어져 있었다.

또한 뒷면에는 몸이 자색이며 부리는 황금빛으로 된 한 마리의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기검룡은 홍라선희가 무슨 까닭으로 영패를 자신에게 주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윽고, 그들은 곧 처음 타고온 거선에 이르렀다.

헌데 문득, 갑판의 한구석을 바라보던 사해신룡은 아미를 찌푸렸다.

백객 조인창___.

그가 처참한 모습으로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사해신룡은 선실을 들어서자마자 능부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백객은 어찌된 일이오?]

능부인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첩이 배에 오르기 직전 갑자기 암습을 가하는 바람에...]

그말에 사해신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결국 독수인마와 내통했던 자는 백객이었군.)

이어, 그는 한쪽 탁자 위에 놓여있는 백옥함을 집어들었다.

문득, 기검룡이 궁금한 눈빛으로 백옥함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것이 천해비동에 비장되어 있던 보물들인가요?]

사해신룡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손에 들고있던 기()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그렇다. 이 기()는 천해보기(天海寶旗)라는 상고시대의 기물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지만 공력을 주입하면 그것의 몇 배나 되는 경기를 발출하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

기검룡은 감탄의 표정을 지으며 재차 물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빙죽도는 대대로 사해선문의 영지였다고 들었습니다. 어찌하여 이제서야 천해비동에 입동하셨습니까?]

[천해비종이 발견된 것은 오래 전이다. 허나 동굴 안은 너무도 한랭하여 인간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허나 최근에야 자오절이 되면 다소 한기가 사라져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던 것이지.]

사해신룡은 이어 백옥함을 열었다.

그 속에는 또 다른 두 개의 작은 옥갑과 하나의 가죽주머니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옥갑 밑으로는 여러 권의 책자들이 들어있었다.

[이것들은 칠백 년 전의 기인이신 천해상인(天海上人)께서 남기신 것이다. 그분은 비단 무공이 신의 경지에 이르렀을 뿐 아니라 평생 많은 기물과 무공비급들을 모으셨다. 이것이 모두 그분의 유물들이다.]

사해신룡은 먼저 가죽주머니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하나의 붉은 구슬이 들어있었다.

이어 그는 이번에는 두 개의 옥갑 중 작은 쪽을 집어들었다.

그러자 폐부까지 시원하게 하는 향기를 풍기며 세 알의 작은 환약이 밀랍에 쌓인 채 드러났다.

그 속에는 한 장의 양피지가 함께 들어있었다.

 

<이 환약들은 천원신단(天元神丹)이라 한다. 이것을 복용하면 영지를 맑게하고 내공이 증강한다. 허나 그 효력은 극히 지속적이나 완전히 약효가 나타나려면 십년(十年) 이상을 지나야 한다. 그 연단법은...>

 

밑으로 깨알같은 연단법이 적혀있었으나 그것은 감히 구할 수 없는 영초들 인지라 사해신룡은 혀를 내둘렀다.

[과연 절세의 기약이다. 취아와 용아가 하나씩 복용해라. 너희같은 아이들이 복용하면 효과가 큰 것이다.]

능소취는 천원신단을 받았으나 기검룡은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영약이 필요없어요. 태어날 때부터 임독양맥이 타통되어 있었던 것이 지금도 열려있으므로 내공도 보통사람보다 열 배는 빨리 연성할 수 있습니다.]

그말에 사해신룡과 능부인은 몹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곧 사해신룡은 관심어린 어조로 물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네 무공은 할아버지들의 도움을 받지않고 혼자 연성한 것이냐!]

[, 저는 세 살 때부터 내공입문에 들었어요.]

사해신룡은 대견스러운 표정으로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후일 필요할지 모르니 지니고 있거라.]

그는 천원신단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허나 기검룡은 한사코 사양했다.

그러자 사해신룡은 천원신단을 거두고 용안(龍眼)만한 홍주(紅珠)를 피낭에 넣어 건네 주었다.

[그럼 이것이라도 갖도록해라. 이 홍주도 필시 내력이 있는 것일테니.]

기검룡은 그것까지 거절할 수가 없어 예를 표하며 받아넣었다.

이때 사해신룡은 두 번째의 옥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여인이 쓰던 것인 듯 화사한 무늬가 수놓여진 채대가 들어있었다.

채대 밑의 작은 양피지를 꺼내읽은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천해상인과 동시대의 여걸이었던 칠채무후(七彩武后)께서 사용하실 칠채금대(七彩金帶)로군요.]

[어머! 정말 예쁜 것이군요.]

능소취는 채대를 바라보며 탄성을 발했다.

사해신룡은 두 개의 옥갑을 들어낸 다음 수십 권의 얇은 비급들에 눈길을 돌렸다.

제일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용비봉무한 웅휘한 필체로 제목이 씌어진 약간 두툼한 책자였다.

 

<천해무량심경(天海無量心經).>

 

겉장을 넘기자 간단한 서언(序言)이 적혀있었다.

 

<빈도는 무공익히기를 세끼 밥먹기 보다 좋아하여평생 수없이 많은 무공을 섭렵했다. 이제 말년에 이르러 무엇인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이 글을 적는다. 빈도가 익히고창안한 신공절기들 중 후세에 남기고 싶은 것을 간추려 모두 서른 여섯 권의 비급을 만들었다. 이글을 읽는 후인은 부디 이 절기를 사용하여 천하를 평정하도록 노력하라.>

 

[, 보고싶은 것이 있으면 골라보도록 해라.]

그 말에 기검룡은 수권의 비급들을 뒤적이다가 문득 한 권의 얇은 비급을 꺼내들었다.

 

<천뢰도보(天雷刀譜).>

 

기검룡은 위와 같이 씌어진 책자에 기이하게 마음이 끌림을 느끼며 책장을 열었다.

 

<천지간에 가장 빠른 것은 낙뢰(落雷). 낙뢰의 속도를 따르려고 고심한지 백년(百年) 마침내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세 초식의 도법(刀法)을 창안했다.

___천뢰도광(天雷刀狂).>

 

기검룡은 서문을 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낙뢰의 빠르기를 능가하는 도법...!)

그는 즉시 그것의 구결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도식(刀式)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세 가지의 내공심법이었다.

 

___광극뢰(光極雷).

___심극뢰(心極雷).

___천극뢰(天極雷).

 

구결을 모두 읽고난 기검룡은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그것은 실로 너무도 가공할 위력과 속도를 지닌 쾌도(快刀)의 극치였다.

그는 두세 번 읽어 구결을 암기한 다음 천뢰도보를 내려놓았다.

이때, 능소취는 문득 한 권의 책자를 집어들며 능부인을 바라보았다.

 

<무후진선경(武后振仙經).>

 

책의 끝장에는 그렇게 씌어 있었다.

능부인은 능소취를 바라보며 나직이 웃었다.

[우리 취아가 무척이나 칠채금대가 탐이나는 모양이지?]

능소취는 가볍게 얼굴을 붉히며 무후진선경을 읽기 시작했다.

헌데 이때,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기검룡과 능소취는 호기심을 느끼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8

 

               찾아온 마두들

 

 

밤공기가 서늘하다.

독수리들의 부리에 찢기고 피에 절은 옷을 벗어버린 탓에 벌거숭이가 된 상체에 소름이 돋는다.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웃은 임청우는 모옥 앞으로 가서 바닥에 흩어진 약초들을 주워 모았다.

뿌리 채 뽑아온 약초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에 심고 물을 주었다.

나머지는 그늘에 말려놓은 다른 약초들과 함께 부엌으로 가져가서 다렸다.

침상에 누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장만 보고 있는 어머니의 머리맡에 약사발을 가져다 놓았을 때는 이미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헤아려 보니 오늘은 칠월칠일, 즉 칠석(七夕)이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 만에 만난다는 날이지만, 임청우는 어머니를 떠나가야만 한다. 비록 자신을 죽이지 못해서 안달하는 어머니이긴 하지만...

 

***

 

모옥을 나온 임청우는 서쪽의 절벽으로 갔다.

천길 벼랑 바닥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두 길 정도 아래쪽에는 임청우의 피난처이자 보금자리인 작은 동굴이 있다.

임청우는 절벽에서 훌쩍 뛰어내려 동굴 앞으로 삐죽 나와 있는 돌출부에 내려섰다.

절벽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 입구는 임청우가 겨우 기어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다.

하지만 동굴 안은 좁은 입구와 달리 제법 넓다.

입구 맞은편에는 임청우가 직접 벽을 파고 다듬어서 만든 돌침대가 있다.

돌침대 위에는 이부자리와 옷가지 외에도 임청우가 힘들게 모은 책 수십 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임청우는 돌침대 머리맡에 놓인 기름등에 불을 밝혔다.

불을 밝힌 후 허리에 차고 있던 호리병을 끌렀다.

끼이!

호리병을 돌침대 위에 내려놓자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삐죽 내밀며 두리번거린다.

날 새려면 아직 멀었다. 더 자라.”

임청우는 이불과 함께 개어놓은 여벌의 옷을 집어들며 말했다.

말귀를 알아듣는 영물답게 금관혈린사는 머리를 다시 호리병 속으로 끌어들였다.

(자식을 죽이려는 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무서워 도망치는 자식이라니...!)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옷을 입었다.

자신의 팔자가 너무도 기구하게 느껴졌지만 감상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안의 물건들 중 애착이 가지 않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특히 수십 권에 이르는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어렵게 채집한 약초와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한 산짐승들을 팔아서 산 책들이다.

제각각의 사연이 깃들어 있는 그 책들은 임청우가 어머니의 모진 학대를 견뎌온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옛 성현들의 지혜가 깃든 책을 읽을 때만큼은 비참하고 쓰디쓴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수십 권의 책 중에서 귀하지 않은 건 단 한권도 없다.

하지만 먼 길을 가야하니 다 가져갈 수는 없다.

다른 책들은 굳이 가져갈 필요 없고... 장자(莊子)와 육일거사(六一居士)의 일옹청풍일지(一翁淸風日誌)만 가져가자.”

임청우는 수십 권의 책 중에서 단 두 권만 챙겼다.

장자는 도교(道敎)의 비조(鼻祖)인 노자(老子)와 함께 노장(老莊)으로 일컬어지는 장주(莊周)의 존칭이면서 그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일옹청풍일지를 쓴 육일거사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사람으로 당나라의 한유(韓愈)의 뒤를 이어 고문(古文)을 일으켰던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가 스스로 정한 호().

말하기를, 집고록(集古錄) 일천 권과 장서(臧書) 일만 권, 거문고 한 채, 바둑판 한 개가 있고 항상 술 한 단지를 두고 구양수 자신이 늙어가니 이를 육일(六一)이라 한다고 했다.

임청우는 또 다른 호를 취옹(醉翁)이라 했던 구양수를 좋아했다. 그의 글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칠 것이 없는 장자와는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이것들만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심심하진 않겠지.”

임청우는 장자와 일옹청풍일지를 품속에 넣었다.

그저 책 두 권을 품었을 뿐인데도 마음이 든든하다.

떠날 준비를 마친 임청우는 동굴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늘 어머니의 학대와 독설에 시달리며 살았지만 이 동굴로 숨어들면 안전하고 편안했었다.

정이 들었던 피신처를 떠나려니 복잡한 감회가 치밀어 오른다.

동굴을 둘러보던 임청우의 눈에 금관혈린사가 들어있는 호리병이 들어왔다.

금관혈린사가 사람 말귀도 알아듣는 영물인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어쨌든 뱀은 뱀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꺼림칙한 존재인 것이다.

저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임청우는 호리병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끼이!

그러자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호리병이 약간 흔들리더니 금관혈린사가 머리를 불쑥 내밀었다.

나는 이제 여길 떠나야한다. 나를 따라 갈 테냐 여기에 남을 테냐?”

임청우는 붉은 보석같은 금관혈린사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람에게 하듯 물었다.

스르르르!

임청우의 말을 들은 금관혈린사는 호리병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그리고는 호리병의 잘룩한 부분을 꼬리로 감아 끌면서 임청우에게 다가왔다.

같이 가고 싶어?”

임청우가 확인하듯 묻자 금관혈린사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같이 가자! 너라도 길동무가 되어주면 덜 쓸쓸하겠지!”

임청우가 금관혈린사의 매끄러운 등을 쓰다듬자 금관혈린사도 고개를 돌려 그의 손등들을 긴 혀로 핥았다.

대신 아무리 배가 고파도 나는 너 먹기 없기, 너는 나 먹기 없기, 자기 먹을 것은 자기가 해결하기다.”

임청우의 말에 금관혈린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까닥였다.

같이 지내려면 부를 이름이 있어야하는데... , 뭐가 좋을까?”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금관혈린사도 기대에 찬 표정으로 임청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먹이의 길이를 먼저 잰 후에 먹는 게 네 식성이니까 척포(尺飽)라고 하자!”

임청우는 금관혈린사가 북두무랑 앞에서 몸길이를 재어 똑같은 길이의 뱀을 먹었던 것을 떠올렸다.

척포, 어때? ?”

임청우가 묻자 금관혈린사는 고개를 주억 거려 좋다는 표시를 했다.

좋다고? 그럼 이제부터 네 이름은 척포다!”

임청우는 금관혈린사의 등을 쓰다듬었다.

스르르!

척포라는 이름을 얻은 금관혈린사는 알았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이고는 다시 호리병으로 기어들어갔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게 인생이라더니... 어머니 슬하를 떠나게 되자 친구를 대신 얻게 되었구나.”

임청우는 척포가 들어간 호리병을 집어 들었다.

무애자재(無碍自在)한 몸, 세상에 나서는데 필요한 것이 뭐 그리 많겠는가? 어차피 이 험난한 세상에 태어날 때도 실오라기 하나 없는 알몸이었는데...”

척포가 들어있는 호리병을 허리에 차며 임청우의 마음은 조금 밝아졌다. 비록 미물이긴 해도 동반이 생겼기 때문이다.

 

***

 

임청우는 늘 하던 대로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는 돌출부를 잡고 절벽 위로 올라왔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국자가 거의 수직으로 일어서 있다. 자정이 다된 시각이다.

모옥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다.

아직도 떠나지 않았느냐?”

임청우가 다가가자 모옥 안쪽에서 임단심의 싸늘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지금 떠납니다 어머니!”

임청우는 모옥을 향해 절을 했다.

, 마음에도 없는 헛치레는 집어 치워라.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없는데 넌들 나를 아끼는 마음이 있겠느냐?”

저는 그저 자식의 도리를 다할 뿐입니다.”

임청우는 무릎을 꿇은 채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어미 노릇을 못한다고 비꼬는 것이냐?”

싸늘한 외침과 함께 모옥의 문이 덜컹 열렸다.

죽일 놈! 마지막 순간까지 내 속을 뒤집어놔?”

이를 바득 갈며 집 밖으로 나서는 임단심의 눈빛이 새파랗게 번뜩여서 귀기스럽다.

평소였다면 임청우는 어머니가 살기를 드러내는 걸 보자마자 줄행랑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는 대신 착 갈아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떠나기 전에 어머니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소자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네 아비가 누구냐고?”

임청우를 노려보는 임단심에게서 수많은 바늘이 찌르는 것같은 살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살기에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지만 임청우는 말없이 어머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임단심의 표정과 눈빛이 짧은 사이에 여러 번 변했다.

임청우는 자신의 목숨이 몇 번이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는 눈 몇 번 깜박이는 정도로 짧았지만 임청우에게는 억겁처럼 길게 느껴진 시간이 지났다.

아비가 누군지 알고 싶다면...”

이윽고 임단심이 침묵을 끝냈다.

금포염왕을 찾아가서 물어봐라. 그럼 네 아비가 누군지 가르쳐줄 것이다.”

임단심은 차갑게 웃으며 내뱉었다.

(비단 옷을 입은 염라대왕!)

어머니의 말을 듣는 순간 임청우는 오싹한 전율이 온몸을 훑으며 치달리는 것을 느꼈다.

임청우는 철이 든 이래 인적 드물고 궁벽한 농산에서 살아온 탓에 금포염왕이 누군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청우의 뇌리에는 어떤 인물의 형상이 즉각적으로 떠올랐다.

북두무랑을 빠져나올 때 진법 속에서 보았던 인물!

태산처럼 웅장하게 느껴지는 몸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이 안개 속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금관혈린사가 보인 반응으로 미루어볼 때 안개 속에 누군가가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금포염왕... 금포염왕이란 인물은 아버지와 어떤 사이인지요?”

임청우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물었다.

네놈을 위해서 더 말해줄 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속에는 네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으니...”

임단심의 매정한 말이 임청우에게서 모든 기대를 앗아갔다.

그러시다니 소자 이만 떠나겠습니다. 부디 몸을 보중하십시오. 필요한 약초는 대부분 옮겨 심어놓았으니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임단심에게 절을 하고 일어난 임청우는 계곡 입구를 향해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세상으로 나가서 금포염왕이란 인물을 만나보고 싶을 뿐이다.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노려보는 임단심의 표정이 여러 번 바뀌었다. 살기와 연민이 망설임으로 반죽이 되어 그녀의 결단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 은밀하게 쥐어져 있던 머리가 뭉툭한 한 대의 철정(鐵釘)이 쩡! 소리가 나면서 떨어졌다.

큰 걸음으로 멀어지는 임청우의 뒷모습을 보면서 임단심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결국... 결국 내손으로 죽이지 못하고 떠나보내게 되는구나.”

헌데 중얼거리던 그녀의 안색이 갑자기 잿빛으로 변하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어깨를 들먹거렸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던 임단심은 마침내 왁! 하고 한 덩어리의 피를 토해냈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피를 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임청우의 모습은 이내 좁고 어두운 계곡 입구로 사라져 버렸다.

청우! 네 놈을 세상으로 내쫓는 진짜 이유는 고질이 되어 버린 내 내상(內傷) 때문이다. 바로 네 아비에게 당한...”

잇달아 두 번 더 피를 토한 임단심은 가슴을 부여잡고 뇌까렸다.

더 이상 네 놈을 괴롭힐 수도 없기에... 무공도 가르치지 않고 무림에 내보내 고생하다 죽기를 바랄 뿐이다.”

원한 맺힌 눈으로 한동안 어둠 속을 노려보던 임단심은 비틀거리며 모옥으로 들어갔다.

희미한 달빛 아래 모옥 앞 초지에 가득 심겨져 있는 화초와 진기한 약초들만이 바람결에 머리를 흔들고 있었다.

 

***

 

임청우는 세상을 벗어나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어지럽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어머니란 존재마저도 잊어버리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비련곡(悲戀谷) 입구에 다다랐다.

곡구에 이르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도 마음이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임청우는 어머니가 늘 내뱉는 말처럼 자기가 인간같지 않은 아버지를 닮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청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걸려있는 호리병을 툭 쳤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냐?”

척포란 놈이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머리를 내밀고 화난 듯이 혀를 날름거리다가 쏙 들어간다.

콰아아아아!

비련곡 밖에 있는 천류폭포는 여전히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을 내고 있다.

임청우는 한쪽 절벽에 세워둔 대나무 죽마를 집어 들었다.

곡 밖에 있는 호수 같이 넓게 퍼진 물이 비록 깊지는 않지만 그냥 건너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배를 이용할 만한 곳도 아니다.

대나무 죽마는 임청우가 비련곡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도구다.

한데 그가 막 대나무 죽마에 올라타고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휘익!

옷자락이 펄럭이는 소리가 나더니 두 개의 그림자가 새처럼 날아 들어와 비련곡 입구에 내려섰다.

임청우가 서있는 곳은 절벽 아래쪽의 달빛 그림자에 가리워진 부분이라 얼핏 보아서는 발견하기 어려웠다.

임청우는 숨을 죽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두 명의 인물이 그에게서 불과 일장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서있었다.

(저 괴물들이 어떻게 여길...)

임청우의 몸이 저절로 떨렸다.

나타난 자들은 그가 낮에 표운봉에서 만났던 마두들이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0

 

                파국(破局)의 전조(前兆)

 

 

 

일신재(日新齋)는 제왕성 소성주 모용준의 거처다.

섭장천은 양자로 삼은 종매의 손자 모용준이 제왕성 성주에 걸맞는 인재가 되길 원하는 마음에 일신재라는 당호(堂號)를 지어주었다.

섭장천도 경박하고 호색한 모용준의 인성에 대해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섭씨의 피를 이어받은 인간들 중에서만 후계자를 고르다보니 모용준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신재라는 당호에는 어쩔 수 없이 모용준을 양자로 삼아야만 했던 섭장천의 고뇌와 기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호호호 아이 공자님도...!”

어머나 엉큼하셔라.”

띠리리링! 띠링!

나날이 새로워지라는 당호가 무색하게 일신재에서는 풍악소리와 여자들의 간드러진 웃음소리가 질탕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해가 아직 남아있을 때부터 시작된 농탕질은 밤이 되면서 그 정도가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지고 있었다.

무얼 보았는지 일신재를 드나들며 술과 음식을 나르는 하녀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혐오로 물들어있었다.

소성주님 거처에서 나오는 년들마다 가자미눈이 되는군.”

일신재 주변을 지키던 제왕성 무사들 중 한명이 혀를 찼다.

그럴 만도 하지. 내일 장가 갈 새신랑이 갈보들을 끼고 질펀하게 노는 걸 봤을 테니 배알이 꼬이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니...”

다른 무사가 이죽거리며 말을 받았다.

후환이 없을지 모르겠구만. 황금성의 진소저도 한 성깔 한다는 소문이던데...”

처음 말을 꺼낸 무사가 혀를 찼다.

계집 성깔이 대단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일단 한 남자의 마누라가 되면 끈 떨어진 갓 꼴이 되는 건데...”

입조심하게.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잖아.”

듣고 있던 동료무사가 급히 두 사람에게 주의를 주며 앞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돌아보는 쪽에서 크고 작은 두 명의 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앞장 선 여자는 보통보다 조금 더 큰 키지만 뒤따르는 여자는 칠척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다.

진상파와 철관음이다.

황금성의 암호랑이께서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군.”

이거 뭔 일 나도 나겠는걸.”

내가 안에 들어가 기별함세.”

무사들 중 한 명이 급히 일신재 안쪽에 통보하려고 돌아섰다.

하지만 그자의 발걸음은 진상파가 내뱉은 말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서 꼼짝 마라.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될 테니...”

무사들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 되어 미동도 하지 못했다.

그리 크지 않고 듣기 좋은 음색이지만 진상파의 말에는 잘 벼린 칼날같은 삼엄함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 띠딩!

호호호! 하하하!

일신재로 다가온 진상파의 귀에 풍악소리와 함께 남녀가 수작을 벌이는 낮 뜨거운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짐승같은 것들...)

진상파는 치를 떨었다.

철관음의 보고를 들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찾아왔었다.

하지만 직접 귀로 들어 확인하게 되자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떻게 놀아나고 있는지 내 눈으로 봐주겠다.)

진상파는 이를 갈며 일신재 입구로 다가갔다.

(일 났구만!)

(저 암호랑이가 들이닥친 걸 알리지 못한 우리에게도 불똥이 튀겠어.)

곁눈질로 진상파를 훔쳐보는 무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 * *

 

일신재 안에서는 진상파가 생각하는 대로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가운데 열 명이 넘는 남녀가 발정난 짐승처럼 뒤엉키고 있었다.

사내는 다섯 명이고 여자는 그 배가 넘는 열 명 이상이다.

다섯 명의 사내들은 거의 벌거벗다시피 한 여자들을 끼고 낯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밤 새자! 오늘은 갈 때까지 가보는 거다.”

방문 정면의 주안상을 앞에 두고 앉은 모용준은 흥에 겨워 웃었다.

상의를 풀어헤쳐 맨살을 드러낸 모용준 좌우에는 옷을 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는 기녀 두 명이 달라붙어 교태를 부리고 있다

이 밤만 지나면 슬프게도 난 더 이상 총각이 아닌 거다. 불쌍한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도 네놈들이 더 화끈하게 놀아야한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친구들에게 말했다. 얼굴은 멀끔하게 생겼지만 행동거지나 말하는 본새는 영락없는 시정의 파락호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비로소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되는 건데...”

주안상 사이에 기녀를 눕히고 희롱하고 있던 자가 모용준을 돌아보며 눈을 흘겼다.

장가를 가야 인생의 진미를 알게 된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모용준도 마주 눈을 흘기며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먼저 장가 간 형님의 말씀이니 잘 새겨들어 임마. 마누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오입질을 할 수 있는 거다.”

사내가 다시 하던 짓에 집중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 개소리의 근거를 말해보라니까.”

!

모용준은 짐짓 거칠게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준이 넌 풍류한량을 자처하는 놈이 일도(一盜), 이비(二卑), 삼기(三妓), 사첩(四妾), 오처(五妻)라는 말도 못 들어봤냐?”

옳거니!”

모용준은 그제야 악우(惡友)의 말뜻을 깨닫고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자고로 계집은 훔쳐 먹는 게 가장 맛나고 하녀와 창녀, 첩이 그 다음 순서인 거다.”

물론 가장 재미없는 건 마누라야. 마누라와 동침하는 건 즐기기 위해서 하는 게 아니라 의무이기 때문이니까.”

맞아. 맞아. 대를 이을 새끼를 만들어야하는 게 아니라면 마누라하고는 살도 맞대기 싫지.”

다른 놈들도 낄낄 대며 친구의 말에 동조했다.

하지만 마누라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다 이거야. 눈 부라리며 감시하는 마누라가 있어야 몰래 훔쳐 먹거나 사먹는 게 맛나거든...”

여자를 눕히고 희롱하는 놈이 음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뭐냐? 제대로 된 오입질은 마누라 눈을 속이면서 하는 것이다?”

모용준은 피식 웃었다.

마누라 몰래 다른 여자 건드리는 게 얼마나 흥미진하고 살 떨리는 경험인지 준이 너도 곧 알게 될 게다.”

모용준 옆에서 두 명의 기녀를 함께 희롱하고 있던 다른 놈이 웃으며 말했다.

네놈들 말을 들으니 낙담 대신 기대가 되는구나. 나도 내일 부터는 제대로 된 바람을 피워볼 수가 있게 될 테니 말이다.”

모용준은 술잔을 쳐들면서 음험하게 웃었다.

진정한 오입의 세계에 들어온 걸 환영한다 모용준!”

장래의 제왕성 성주가 오입장이라니 볼만하겠구먼.”

못된 친구놈들이 왁자지껄 웃을 때였다.

!

일신재의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

뭐냐?”

꺄악!”

엄마야!”

갑작스러운 사태에 사내놈들과 기녀들은 기겁하며 문쪽을 돌아보았다.

그런 그들의 눈에 활짝 열린 문 밖에 진상파가 서있는 게 보였다.

의외로 진상파의 표정은 차분하다.

다만 눈빛만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아있었다.

이크!”

... 진소저!”

엉겨 붙어 있던 사내놈들과 기녀들이 불 맞은 짐승들처럼 펄쩍 뛰며 떨어졌다.

... 진소저! 여긴 어쩐 일로...”

어서 오시오 진소저.”

사내놈들은 억지로 웃으며 급히 옷을 추스렸다.

기녀들도 겁에 질려 진상파의 눈치를 보며 사내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졌다.

가요.”

진상파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

가라니... 어디를...”

무슨 말씀이신지...?”

사내들은 당황하여 진상파의 눈치를 살폈다.

모용준도 술잔 내려놓으며 미간을 찡그렸다.

당장 제왕성에서 사라지도록 해요. 만일 다시 내 눈에 띠는 인간이 있다면...”

진상파의 들끓는 감정을 삭이기 위해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그 인간과 그 인간의 집안을 완전한 알거지로 만들어버리고 말겠어요.”

진상파는 고저(高低)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내들은 진상파의 서늘한 눈가로 푸른 불꽃이 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 용서하십시오 진소저.”

당장 사라지겠소이다.”

두 번 다시 제왕성에 얼씬 거리지 않겠소.”

사내들은 겁에 질려 좌우의 쪽문으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진상파가 서있는 정문으로는 나갈 엄두를 못낸 것이다.

겁에 질린 기녀들도 벗어놓았던 옷가지를 끌어안고 사내들 뒤를 따랐다.

모용준의 친구들은 제법 사는 집안 출신들인지라 황금성에 죄를 지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알고 있다.

쌀 한 톨 기름 한 방울 구할 수 없어 마침내 돈을 쌓아놓고도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그 누구도 황금성에 밉보이면서까지 거래를 하려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곧 일신재 안에는 모용준만이 남게 되었다.

진상파는 문 밖에 서서 모용준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젠장...)

진상파의 시선을 피하면서 모용준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모멸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친구들 앞에서 당한 수모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양부 섭장천이 추진한 이 혼사가 깨질 경우 자신이 제왕성의 주인이 된다는 보장은 없다.

... 불쾌했다면 용서하시오 소저. 소꿉친구들과 기분을 내는 게 좀 지나쳤던 것같소. 내 사과하리다.”

모용준은 억지로 웃으며 포권을 했다.

진짜 대장부라면 목에 칼이 들어올지언정 자기 소행을 변명하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의 후계자께서 남에게 머리를 숙일 일을 해서야 되겠어요?”

진상파가 여전히 고저가 느껴지지 않는 음성으로 말했다.

모멸감으로 얼굴이 이지러지긴 했지만 모용준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는...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길 바라겠어요.”

그 말을 남기고 진상파는 일신재를 떠났다.

(경고는 충분히 되었을 거야.)

철관음을 거느리고 일신재에서 멀어지며 진상파는 생각했다.

(몸에 밴 못된 버릇이 쉽사리 고쳐지지는 않겠지만 더 나빠지지 않게 통제할 수는 있다. 어쩔 수 없이 부부가 되어 살아야한다면 겉모습만이라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갈 수밖에...)

진상파의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와장창!

갑자기 뒤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

뒤이어 분을 못 참고 악을 쓰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저 졸장부가...)

진상파는 미간을 모으며 일신재 쪽을 돌아보았다.

주변의 무사와 하녀들도 겁에 질려 일신재를 보고 있었다.

와장창! 쨍그랑!

그 사이에도 일신재 안에서는 부서지고 깨지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모용준이 분을 참지 못하고 집기들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가씨...”

걱정마. 나도 간단한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까.”

난감해하는 철관음에게 말하며 진상파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속 좁고 천박한 인간!)

진상파는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썼다.

하지만 모용준에 대한 혐오와 실망이 진상파의 가슴 속으로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강요하지만 않았어도 저런 졸장부와 부부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진상파는 입술을 깨물었다.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진상파가 바로 응한 것은 아니다. 뒷조사를 통해서 모용준의 인성이 개차반이라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망설이는 진상파에게 적극적으로 혼사를 권한 것은 그녀의 어머니, 정확하게는 의모(義母)였다.

이름이 조예(趙芮)인 진상파의 의모는 새석숭 진보륜이 늦으막이 거둔 후처였다.

비록 새석숭과의 사이에 자식을 두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조예는 황금성의 가장 큰 어른이다.

의모의 강력한 권유도 있고 해서 진상파는 망설이던 마음을 접고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아버지가 피땀 흘려 키워온 황금성을 탐욕스러운 떨거지들에게 넘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일단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이상 혼인을 물릴 수도 없다.)

진상파의 손이 핏줄이 드러나도록 강하게 쥐어졌다.

(결국 저 못난 인간을 길들이는 것 외에 내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이다.)

진상파는 거푸 심호흡을 하여 참담해지려는 마음을 추스렸다.

 

* * *

 

밤이 깊어졌다.

하지만 제왕성은 여전히 흥청거리고 있었다.

내일 치러질 소성주의 혼례식에 참석하기 휘해 원근각지에서 몰려든 하객들 때문이다.

무림의 주인인 제왕성이 십팔 년 만에 맞이한 경사다.

무림의 거의 모든 방파와 가문의 수장들이 축하하기 위해 제왕성을 찾았다.

제왕성의 식솔들은 수천 명에 이르는 하객들을 대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 와중에도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모여 있는 네 명의 남녀가 있었다.

 

진소저가 기선을 제압했군!”

제왕성의 부()성주 중 한명인 살천인조(殺天忍祖)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원래 제왕성에 부성주라는 직책은 없었다.

그러다가 십팔 년 전 처음으로 부성주 두 명이 세워졌다.

납치당한 아들을 찾는 데 전념하던 섭장천은 자신을 대신하여 제왕성의 대소사를 꾸려갈 인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부성주라는 직책은 그렇게 생겼으며 그중 한명이 살천인조다.

인조(忍祖)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살천인조는 왜국(倭國) 출신의 전설적인 자객이다.

지금은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을 지닌 왜소한 체구의 노인이지만 현역일 때의 살천인조가 노린 표적은 결코 죽음을 면치 못했었다.

비록 섭장천 때문에 신주이십팔숙에는 끼지 못하지만 살천인조는 섭장천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절세고수다.

웃을 일이 아니오 인조! 소성주가 느꼈을 수모와 모멸감을 생각해보시오.”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붉은 빛 털로 뒤덮인 거구의 중이 화등잔같은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불곰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체격을 자랑하는 노승의 별호는 혈가람(血伽藍)이다.

혈가람은 소림사 출신으로 소림사 당대 방장에게는 사숙 뻘이 된다.

하지만 혈가람은 성격이 급하고 살기가 넘쳐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는 일단 때려죽이고 보는 만행을 저질렀었다.

천명이 넘는 목숨이 혈가람의 손에 희생되자 결국 소림사는 혈가람을 파문시켜버렸었다.

비록 소림사에서 쫓겨난 몸이지만 혈가람의 무공은 막강했다.

섭장천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패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진적이 없는 인물이 혈가람이다.

혈가람도 제왕성의 부성주중 한명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9

 

                가슴 떨리는 치료법

 

 

연못가 풀밭에 눕혀진 강미루의 피부는 먹물을 담은 통에 빠졌다 나온 듯 새까맣게 변해있었다.

뿐만 아니라 뼈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던 몸이 돌처럼 단단해져 있다. 뜨거운 연못물에서 꺼낸 직후부터 급격히 굳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강미루의 모습은 마치 흑옥(黑玉)으로 빚어놓은 옥상(玉像)인 듯 보였다.

(뭔가에 중독되었다.)

백남빈은 검게 변한 강미루의 얼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향기로운 숨결을 토해내던 연약하고 오똑하던 콧날도 이제는 아주 딱딱해져 있다.

(이 소녀는 너무도 쉽게 죽었구나. 이렇게 죽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백남빈은 돌덩이처럼 굳어진 강미루를 보며 가슴 한구석에 구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강미루는 백남빈이 철이 든 이래 처음 살을 맞대본 여자였다.

게다가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기도 했었다.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짧은 삶을 마감한 어여쁜 소녀의 죽음은 가슴이 저미도록 안타깝다.

흑마의 등에서 자신의 턱을 물었던 악착스러움까지도 죽은 지금은 오히려 정겹게 느껴진다.

안타까움과 연민의 감정이 복받친 백남빈은 자신도 모르게 강미루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싸늘한 체온이 손가락 끝에 전해진다.

하지만 백남빈 몸속의 피는 꽃같은 소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끓어오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백남빈은 자신의 왼손이 닿은 강미루의 오른쪽 귀가 언뜻 흰빛을 띄는 것을 보았다.

손을 떼자 강미루의 오른쪽 귀는 다시 검어 졌다.

왼손을 또 갖다 대자 강미루의 피부는 흰빛을 되찾았다.

왼손을 대었다 떼었다 몇 번 해본 백남빈은 그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이 왼손 중지에 끼고 있는 다섯 가지 색의 금반지, 오채금환의 조화임을 알았다.

오채금환은 신랑성의 부성주 완안진에게서 압수한 것으로 무군자 강진남에게 보내는 예물이었을 것이다.

오채금환을 얼굴에 갖다 대자 강미루의 얼굴에서 검은 색이 잠시 없어졌다.

그걸 보며 백남빈은 생각했다.

(이 반지는 독을 제거하는 효능이 있는 모양이다. 문제는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인데...)

혹시 마땅한 실험대상이 없는가 싶어 두리번거리던 백남빈의 눈에 녹초가 되어 엎어져 있는 흑왕이 보였다.

백남빈은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에서 강미루를 꺼내면서 흑왕도 함께 끌고 나왔었다.

흑왕은 오랫동안 뜨거운 온천수 속에서 허우적댄 탓에 녹초가 된 외에는 딱히 독에 중독되거나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디에 독상을 입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구나. 저 말은 멀쩡한데 사람만 중독되는 독이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되니...)

백남빈은 강미루의 얼굴부터 시작해서 온몸을 샅샅이 훑어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는 몇 겹의 옷이 걸쳐져 있어서 상처가 났는지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다.

사아악!

잠시 망설인 후에 백남빈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강미루가 걸치고 있는 붉은 옷을 청랑검으로 잘라서 벗기기 시작했다.

몸이 이미 돌처럼 단단해져 있기 때문에 옷을 훼손하지 않고는 벗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옷과 속옷이 모두 청랑검에 잘려나간 후 강미루의 알몸이 흑옥같은 빛을 띤 채 드러났다.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데 소녀는 전라의 모습으로 새벽을 맞고 있었다.

백남빈은 자신의 호흡이 걷잡을 수 없이 흐트러짐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체같이 굳어진 모습이지만 굴곡이 뚜렷한 여체를 난생 처음 보는 때문이다.

독에 중독된 후 모든 근육이 긴장을 일으킨 탓에 가슴은 일부러 세운 듯 봉긋했고 다리며 팔은 마치 깎아놓은 조각품 같이 쭉 뻗어있다.

팽팽한 아랫배가 끝나는 곳에 자리한 두둑한 둔덕에는 피부색같이 검은 풀같은 것들이 소담스럽게 덮여 있다.

미끈하기만 한 피부에 갑자기 나타난 그 숲에 시선이 닿는 순간 백남빈은 마치 독사를 보기라도 한 듯이 질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언 듯 시야로 스쳐지나간 수림 아래의 깊이 갈라진 형적이 백남빈의 심장을 금방이라도 터트려버릴 듯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언제까지 눈을 감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백남빈은 억지로 용기를 내어 눈을 뜨고 강미루의 몸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하지만 굳은 다짐과 달리 소녀의 알몸을 본 백남빈은 그 매혹적인 모습에 당황하여 지리멸렬한 신음만을 연발하고 있었다.

약관이 목전인 적지 않은 나이지만 여자를 이처럼 가까이에서, 더욱이 적나라한 모습으로 본 적은 없었다.

주위에서 누가 보고 있기라도 하는 듯이 얼굴이 화끈 거리며 가슴이 두근거렸다.

죽은 것같은 여인을 보면서 그러는 자신이 스스로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비록 큰 맘 먹고 옷을 벗기기는 하였으나 막상 벗기고 나자 독상(毒傷)을 입은 곳을 찾기는커녕 왜 발가벗겼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여자를 모르는 숫총각에게 벌거벗은 여체는 낯설고도 충격적이다.

눈을 감아도 선하고 눈을 뜨면 정신이 몽롱해 지는것 같았다.

"대장부가... 대장부가... 겨우 여자의 알몸 때문에 평정심을 잃다니..."

백남빈은 용기를 갖기 위해서 억지로 노력했다.

그러나 마음은 더욱 떨려왔고 손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젊음의 끓는 피라는 게 이성(理性)에 의하여 진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주는 반증이다.

검은 조각상같은 강미루의 모습은 사람의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아름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록 백남빈이 아닌 다른 누구라 할지라도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웠으리라.

 

잠시 시간이 지나자 백남빈은 어느 정도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강미루의 몸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훑어보았지만 작은 상처 하나 눈에 뛰지 않았다.

"상처를 입은 게 아니라 독을 먹었던 것이로구나. 그걸 몰랐어. 그런데 어디서 독을 먹었을까?왜 먹었을까?"

백남빈은 마침내 강미루가 독상을 입은 게 아니라 음독(飮毒)한 것을 알았다.

백남빈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강미루의 뻣뻣해진 입술을 억지로 벌리고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시시!

그러자 오채금환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변하더니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독을 빨아들인 후 연기로 만들어 배출시키고 있는 것이었다.

(입 속이 독으로 가득 차있다!)

그걸 확인한 순간 백남빈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것이 있었다.

"혹시 연못의 물이 독인 것은 아닐까? 뜨겁기도 했지만 뭔가가 살고 있는 것같지 않았었다."

백남빈은 그 즉시 연못물에 젖어 있는 자신의 옷에 반지를 대어보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었나?”

내심 틀림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빗나가자 백남빈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 소녀는 독을 마신 게 분명한데...”

백남빈은 자신이 조금 벌려놓은 강미루의 입술을 돌아보며 미간을 모았다.

(혹시...)

강미루의 벌어진 입술을 보는 순간 백남빈은 생각 난 것이 있어 연못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에 침을 뱉어 보았다.

츠츠츠!

순간 침이 닿은 옷자락은 먹물에라도 닿은 듯이 검은 색으로 확 변해 버렸다.

"그럼 그렇지! 바로 이것이었다."

백남빈은 손으로 자기의 이마를 탁! 소리가 나도록 쳤다.

본래 연못물은 독이 아니었다.

그러나 타액(唾液)과 섞이면 독특한 극독(劇毒)이 되어 생명체를 석상처럼 굳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약하게 중독된 사람은 생각도 그대로 할 수 있고 보고 들을 수도 있으나 몸은 돌처럼 굳어져 꼼짝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강하게 중독된 사람은 의식마저도 잃어버리고 숨도 멈춰서 완전히 검은 조각상처럼 되어버리는 것이다.

강미루는 까마득한 절벽 위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순간 연못물을 들이켰었다.

그래도 흑왕이 헤엄치면서 떠받쳐준 덕분에 연못물을 아주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만약 조금만 더 마셨더라면 강미루는 온몸이 진짜 돌같이 굳어져서 백남빈이 입을 열어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남빈의 영감(靈感)이 독을 찾아내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다.

백남빈은 절뚝거리며 일어나 흑왕에게 다가갔다.

파김치가 되어 주저앉아있는 흑왕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허벅지의 상처를 묶었던 머리띠를 끌러서 침을 뱉었다.

연못물에 젖어 있던 머리띠가 순식간에 검은 색으로 변했다.

푸르르!

그것을 본 흑왕은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는지 움찔했다.

백남빈은 그런 흑왕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착하지. 지금 네 주인은 죽어가고 있단다. 그러니 네가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잠시 동안만 참아보렴. 네 주인을 구해야하지 않겠느냐?"

백남빈의 부드러운 말에 흑왕이 가만히 있을 때 백남빈은 왼손에 쥐고 있던 머리띠를 푸릉거리는 흑왕의 입속에 확 넣어버렸다.

흑왕이 깜짝 놀라"푸럭" 하며 머리띠를 뱉었으나 이미 늦었다.

퍼억!

입속으로 독이 들어가자마자 흑왕의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는 탑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 무서운 독이었다.

보통 말의 두 배나 되는 거구의 천리마 흑왕마저 순식간에 중독되어 쓰러진 것이다.

본래 검은 색이던 흑왕의 몸은 쇳덩어리처럼 굳어져 가기 시작했다.

목에 손을 대 보니 벌써 뻣뻣해져있다.

말이 사람보다도 더 독에 민감한 것 같았다.

스윽!

백남빈은 쓰러진 흑왕의 가슴을 청랑검으로 가볍게 그었다.

벌써 진하게 굳어진 검은 피가 상처에서 배어나왔다.

백남빈은 그 상처에 오채금환을 갖다 대었다.

푸스스스!

그러자 매캐한 냄새와 함께 검은 연기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백남빈은 코를 막으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도록 바닥으로 머리를 수그렸다.

푸시시!

시간이 지날수록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는 점점 더 짙어졌다.

그와 함께 돌처럼 굳어졌던 흑왕의 몸이 가슴의 상처부위부터 시작해서 점점 부드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됐다!”

백남빈은 뛸 듯이 기뻤다.

자신이 생각한 오채금환의 사용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말()만큼이나 드센 대려장의 말괄량이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려장의 무사들을 죽일 때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백남빈이다.

헌데 대려장의 소녀를, 그것도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원수를 구하는데 왜 이처럼 정성을 쏟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여자가 죽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이럴까?"

백남빈은 반문해 봤으나 뚜렷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오채금환은 크기는 작아도 독을 제거하는 효능은 아주 강력해서 벌써 흑왕의 중독은 거의 다 풀린 것 같았다.

오채금환에서 나는 연기가 점차로 줄어들다가 종래에는 나지 않았다.

몸에서 독이 빠지자마자 흑왕은 금방 정신을 차렸다.

푸르르!

고개를 든 그놈은 겁에 질린 눈으로 백남빈을 보고 있었다.

백남빈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겁먹은 그놈의 모습에 실소를 하며 강미루에게 돌아갔다.

푸른 풀밭 위에 누워있는 소녀의 검은 나체가 희미한 새벽에 한눈에 확 들어왔다.

백남빈의 가슴은 다시금 세차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진정하자!)

벌렁이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강미루에게 다가간 백남빈은 말에게 했듯이 그녀의 왼쪽 젖가슴을 가볍게 칼로 그었다.

그러나 강미루의 중독 상태는 흑왕보다 심해서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당황하여 조금 더 깊이 베었으나 마찬가지였다.

하는 수 없이 백남빈은 강미루의 가슴에서 동전만한 크기로 살점을 도려내었다.

도려진 살점은 돌조각 같이 딱딱했다.

불룩한 젖가슴 위에 파여진 오목한 부위는 검은 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백남빈은 오채금환을 그 상처 부분에 집어넣었다.

치이이!

그러자 달군 쇠를 물속에 집어넣은 듯한 소리가 나면서 검은 연기가 뭉클 일어났다.

강미루의 왼쪽 젖가슴 위에 뚫린 구멍은 마치 화산(火山)의 분화구(噴火口)인양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밝아오는 아침 햇살 속에서 강미루의 검은색 나신은 점차 흰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그리고 백남빈은 얼굴은 점점 홍당무로 변해가며 강미루의 나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2

 

               몰려든 군웅들

 

 

아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냉약빙이 자책하며 급히 미소부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힘없이 쓰러지는 미소부의 가슴에는 비수가 손잡이만 남긴 채 깊이 박혀있었다.

(제발...)

우르르!

냉약빙은 행여나 하는 마음에 미소부의 단전에 솥뚜껑만한 손바닥을 붙이고 내공을 주입했다.

으음!”

심후한 내공이 주입되자 숨이 끊어지려던 미소부는 부르르 떨며 힘겹게 눈을 떴다. 냉약빙이 주입해준 내공이 죽어가는 그녀를 잠시 되살린 것이다.

... 정말 전모 냉여협이신가요?”

미소부는 죽어가는 눈으로 냉약빙을 올려다보며 미약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래요. 내가 바로 냉약빙이에요!”

냉약빙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죽기 전에 냉여협을 만나다니... 하늘이 저희 이씨(李氏) 집안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군요!”

미소부는 냉약빙의 대답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가쁘게 숨을 할딱였다.

(이씨!)

냉약빙은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녀의 뇌리로 이씨 성을 지닌 젊은 기협(奇俠)이 떠오른 때문이다.

, 부탁이 있어요 냉여협!”

미소부는 꺼져드는 미약한 음성으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씀해 보세요!”

냉약빙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부는 소나무 아래 쓰러져 있는 사내아이를 돌아보며 처연한 눈빛을 지었다.

... 아이를 부탁드려요. 저 아이... 아버지의 이름은... 이청천(李靑天)...!”

이청천!”

미소부의 말을 듣는 순간 냉약빙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그만큼 이청천이란 이름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청천이란 인물은 냉약빙이 진심으로 존경하는 두 명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했다.

 

-태양신협(太陽神俠) 이청천!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六位)에 올라있는 인물이다.

비록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여섯 번째지만 무림인들의 대부분은 그가 사실상의 천하제이인(天下第二人)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신협 이청천이 신마풍운록의 서열 육위 내에 드는 기인들 중 가장 젊기 때문이다.

태양신협 이청천의 나이는 이제 겨우 이십대 후반에 불과했다. 서른 살이 채 안된 나이에 신마풍운록에 서열 육위로 등재되었다는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은 비단 무공이 막강할 뿐 아니라 젊은 나이답지 않게 성격이 인후관대하기 이를 데 없어 많은 기인이사들이 따르고 추종했다.

만일 그가 천하제패의 야심만 있었다면 단시일 내에 거대한 조직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격이 담백하고 욕심이 없는 태양신협 이청천은 애초에 천하의 패권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한창 피가 끓을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의 교외에 자리한 태양곡(太陽谷)에 장원을 짓고 칩거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는 서북제일미인(西北第一美人)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옥수상아(玉手霜娥) 우담혜(憂曇慧)!

 

태양신협 이청천이 혼탁한 강호를 떠나 태양곡에 은거할 수 있었던 것도 절세미인인 이 여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양신협 이청천에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세상의 명예와 권력보다도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 여자가 바로 이대협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

태양신협 이청천의 위명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냉약빙인지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내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후 자살을 시도한 미소부는 바로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이며 서북제일미인이라 불리던 옥수상아 우담혜였다.

(대체 태양곡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옥수상아가 이런 참변을 당했단 말인가?)

냉약빙은 의아함과 함께 근심을 감추지 못했다.

옥수상아 우담혜가 어린 아들과 함께 변을 당한 것으로 보아 태양신협 이청천의 신변에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냉약빙은 태양신협 이청천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미 기력이 쇠잔한 옥수상아 우담혜가 그녀의 품에서 숨이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절벽 아래에는 작은 무덤이 하나 생겨났다. 물론 태양신협 이청천의 아내인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이었다.

(가엾은 여인이다. 장차 천하제일인이 될 인물의 아내가 이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다니...!)

냉약빙은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 앞에 서서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태양신협 이청천과 옥수상아 우담혜의 아들이 안겨있었다. 귀엽고 총기 있는 용모를 지닌 이 아이는 출혈이 심해 정신을 잃었을 뿐 머리의 상처는 대단하지 않았다.

(훌륭한 근골(筋骨)이다. 오라버니께서 이 아이를 보시면 기뻐하시겠구나!)

냉약빙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사내아이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빨리 오라버니를 도우러 가야만 한다!)

냉약빙은 다시금 자신이 처한 급박한 사정을 깨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편히 잠드세요 우부인! 아드님은 나 냉약빙이 친아들처럼 보살펴 줄 테니...!”

그녀는 다시 한 번 옥수상아 우담혜의 무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스팟!

옥수상아의 무덤에 대고 맹세를 한 직후 냉약빙은 쏟아지는 빗속으로 거구를 날려 사라졌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는 방금 전 이곳에서 벌어진 무참한 만행의 흔적을 깨끗이 씻어내고 있었다.

 

***

 

곤륜산은 천산(天山)과 함께 탑리목분지(塔里木盆地)를 남북으로 감싸고 있는 대륙의 지붕이다.

본래 곤륜(崑崙)은 신들의 거처를 뜻한다. 옥황상제를 비롯하여 전설과 설화에 나오는 뭇 신들이 곤륜산에 금전옥루(金殿玉樓)의 궁궐을 불로장생을 누리고 있다던가?

그 장대한 곤륜산의 동쪽 끝에는 남쪽의 청해성(靑海省)을 굽어보고 있는 천길 단애가 자리하고 있다.

 

-고독애(孤獨崖)!

 

지면에서 수직으로 수백 장이나 치솟아 올라 있어 마치 거꾸로 꽂힌 칼의 허리 부분을 뚝 분질러 세워놓은 듯 웅장한 단애의 이름이다.

너무 높아 허리 부분이 늘 운무로 휘감겨 있는 고독애의 형상은 이름 그대로 고독하고 쓸쓸해 보인다.

그 고독애의 정상부분은 의외로 넓어서 만여 평에 달하는 평지가 펼쳐져 있다.

대부분이 울창한 송림으로 들어차있는 넓직한 평지 끝에는 돌로 지은 석옥(石屋)이 한 채 서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운치 있게 지어진 석옥은 마치 세외도원의 일부인 듯 평화롭고 아름답게 보인다.

하지만 별세계의 선경과도 같은 고독애 일대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고독애 정상의 넓은 평지에는 천여 명의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는데 그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었다.

고독애 끝에 자리하고 있는 석옥 주변에는 머리가 으깨졌거나 몸뚱이가 짓뭉개진 수백 구의 시신들이 처참한 형상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그 시신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와 내장들이 질펀하게 바닥을 적시고 있다. 보기만 해도 전율하게 되는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그 처참한 시신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시체가 된 자들의 신분이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한 지역의 패자들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자들은 하나같이 신마풍운록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명숙들이었다.

믿어지지 않게도 하나같이 막중한 신분을 지닌 인물들이 중원으로부터 머나먼 이곳 곤륜산의 고독애에 시신이 되어 누워있는 것이다.

“...!”

“...!”

장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비록 운집한 군웅들 중 절반 정도가 죽음을 당했으나 여전히 고독애에는 오륙백 명에 달하는 무림인들이 운집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터질 듯 팽팽한 긴장감과 침묵이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군웅들은 그 납덩이같은 침묵 속에 반월형의 포위망을 구축한 채 고독애 끝에 자리한 석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석옥을 포위하고 있는 군웅들의 면면을 보면 실로 대단했다. 당금 무림의 명숙들이 이곳에 다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군웅들은 하나같이 긴장과 두려움에 찬 눈빛으로 석옥을 주시하고 있었다.

단 한 명만 나타나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절정고수들이 수백 명이나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가에 떠올라있는 이 공포의 빛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들이 에워싸고 있는 석옥 안에는 과연 누가 있기에 뭇 군웅들을 떨게 만든단 말인가?

 

군웅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세 명의 인물이었다.

석옥 뒤쪽의 천길 단애를 제외한 삼면을 포위하고 있는 인물들 중에서도 세 사람의 기도는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 할만 했다.

반월형 포위망의 정면 맨 앞쪽에 서있는 인물은 일신에 푸른색 학창의(鶴氅衣)를 걸치고 있으며 가슴까지 드리운 검은 수염이 인상적인 노검수(老劒手)였다.

보는 이의 폐부를 찌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그 노검수의 허리춤에는 칠흑같이 검은 나무로 깍은 목검(木劒)이 한 자루 걸려 있었다.

그 목검은 유서 깊은 검술명가(劒術名家)의 상징이다.

 

<혁련검호각(赫蓮劒豪閣)>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검술명가다.

현련검호각은 연원을 따져보면 무려 천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강호무림의 명문 중의 명문이다.

현력검호각의 일족은 오랜 세월 오직 검술 한 가지에만 매진해 왔으며 그 결과 무적의 검법을 이룩해냈다.

당금 무림에서 검법으로 혁련검호각에 필적할 수 있는 세력은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의를 걸친 노검수는 바로 그 혁련검호각의 당대 가주다.

 

-유성신검황(流星神劒皇) 혁련휘(赫蓮輝)!

 

신마풍운록 서열 삼위(三位)에 올라있는 인물이 바로 그다.

비록 당금 무림의 세 번째 고수로 꼽히지만 단순히 검법만으로 따진다면 천하제일인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일대검호가 유성신검황 혁련휘인 것이다.

 

유성신검황 혁련휘의 왼쪽에는 오척(五尺) 단구(短軀)의 꼽추노인이 바위에 걸터앉아 거의 자기 키만한 길이의 긴 곰방대를 빨고 있다.

기이하게도 이 꼽추노인의 피부는 녹색 물감을 뒤집어 쓴 듯 짙푸른 녹색을 띠고 있었다.

비단 피부색만이 녹색이 아니었다. 이 인물은 눈동자마저도 섬뜩한 녹색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마치 뱀이나 악어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듯한 그자의 기괴한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끼친다.

이 괴상망측한 행색의 꼽추노인 주변 십여 장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웅들은 꼽추노인을 극히 두려워하는 듯 연신 곁눈질을 하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신마풍운록의 서열 사위(四位)의 인물로서 일반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무서워하는 인물이다.

독천존 서래음이 독공(毒功)으로는 천하제일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의 몸 전체에는 치명적인 극독이 배어 있어 단지 숨결만으로도 십 리 밖의 적을 독살시킬 수 있다고 한다.

무림인들이 역신(疫神)처럼 두려워하는 독천존 서래음은 대리(大里)에 자리한 독성부(毒聖府)의 부주이기도 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七 章

 

                모여드는 群雄

 

 

 

순간,

[적염혈마(赤髥血魔)!]

태산일수는 안색이 변해 외쳤다.

적포괴인___.

그는 얼굴이 온통 적염(赤髥)으로 뒤덮여 흉악하기 이를데 없었다.

[흐흐흐... 누군가 했더니 태산의 늙은 너구리였군.]

적포괴인, 즉 적염혈마 역시 태산일수를 발견하고 음침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허나 곧 적염혈마는 걸음을 옮겨 성큼성큼 천해비동의 입구로 다가갔다.

순간, 기검룡이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라!]

[어림없는 소리!]

적염혈마는 두눈을 부릅떴다.

[건방진 놈!]

그는 벼락같이 적색장력을 내뻗었다.

꽈르릉!

허나 기검룡도 물러서지 않고 풍천벽력장을 후려쳤다.

[물러가시오!]

콰쾅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고막을 파열시키는 폭음이 터졌다.

[___ !]

적염혈마는 다급성을 발하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가 일 장 뒤로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이 떠올랐다.

허나 그는 천해비동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하고 곧 전 공력을 끌어올렸다.

순간, 적염혈마의 수염과 모발이 빳빳하게 일어서며 그의 전신이 완전히 핏빛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흐흐흐... 어린 놈! 제법이다. 이번에는 적살마강(赤煞魔罡)을 받아봐라!]

그말에 태산일수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저놈이 최후의 비기(秘技)까지 펼치다니...!)

이때, 적염혈마의 전신에 퍼진 핏빛 강기가 급격히 서로 뭉쳐졌다.

[흐흐흐... 뒈져랏!]

적염혈마는 음침하게 소리치며 쌍장을 교차시켰다.

기검룡도 황급히 그에 대항하여 쌍장을 후려쳤다.

[벽력패왕수!]

츠츠츠... ... 콰쾅!

천번지복(天翻地復)을 방불케하는 가공할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잠시 후, 폭음이 걷히고 장내의 상황이 드러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 장 정도의 커다란 구덩이가 움푹 패여져 있었다.

그 구덩이 양쪽에 선 두 사람___

기검룡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두눈을 감고 있었다.

허나 적염혈마의 신색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입가에 선혈을 주르르 흘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운공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에 중인들은 일제히 경악의 표정을 지었다.

(저 어린 소년이 적염혈마를 이기다니...)

그들은 내심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때 문득 능부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칠십이도객! 용아를 호위해요.]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칠십이도객들은 일제히 기검룡을 둘러쌌다.

그때였다.

! ___!

장내에 다시 네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순간, 그들을 본 능소취가 두눈을 반짝이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기 앞장선 자가 바로 지난밤 용오빠와 싸웠던 그 노인이예요.]

그말에 능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득 백객을 바라보며 물었다.

[조당주, 저들은 누구죠?]

백객은 일순 흠칫 했다.

허나 그는 곧 표저응가다듬으며 말했다.

[저 앞에선 회의인은 독수인마라고 하는 자입니다. 뒤의 삼인(三人)은 북망삼괴(北亡三怪)로서 북망사신(北亡邪神)의 제자들입니다.]

능부인은 아미를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북망사신이라면 백팔무인 중 일인(一人)이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북망삼괴의 무공은 적염혈마에 못지 않습니다. 또 저들은 최초로 상강일괴(湘江逸怪)의 수하로 들어갔다고 하니 주위에 방조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말에 능부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그럼 상강일괴 그자가 직접 이곳에 와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백객은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 독수마인이 휙 신형을 날려 기검룡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탁몽과 백객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허나,

[흐흐흐... 비켜라!]

북망삼괴가 음산한 괴소를 흘리며 그들을 막아섰다.

이것을 틈타 독수인마는 다시 눈을 감고 운공중인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칠십이도객들이 이를 좌시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완벽한 방어의 자세로 기검룡을 호위했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험악하게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비켯!]

그는 벼락같이 양소매를 휘둘렀다.

순간 그의 소매 속에서 무수한 암기가 발출되어 칠십이도객들을 덮어씌웠다.

허자 도 객중 십여 명이 일제히 도()를 휘둘렀다.

! !

독수인마의 암기는 맹렬한 도기에 그대로 튕겨나고 말았다. 그러자 독수인마는 흉광을 내뻗으며 번쩍 쌍장을 치켜들었다.

순간,

[___ !]

[크윽___!]

순식간에 사오 명의 도객들이 피를 뿜으며 즉사했다.

독수인마는 그들 사이를 뚫고 다시 기검룡에게 덮쳐들었다.

허나 그 순간, 기검룡이 두눈을 번쩍 뜨며 벼락같이 양수(兩手)를 내뻗는 것이 아닌가!

[___ ___ !]

독수인마는 미처 방어할 틈도없이 앞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허망하게 날아갔다.

___천강신공, 그것을 펼친 것이었다.

기검룡은 일순 싸늘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고는 휙! 몸을 돌려 북망삼괴 앞에 사뿐히 내려섰다.

[당신들은 아직도 물러갈 생각이 없소?]

그의 싸늘한 물음에 북망삼괴 중 대괴(大怪)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흐흐흐... 그렇다. 꼬마.]

[그럼 죽어야지!]

기검룡은 싸늘히 일갈하며 다짜고짜 쌍장을 쫙 벌렸다.

뻗어냈다.

도객들의 죽음에 살기가 치뻗힌 것이었다.

순간, 꽈르릉___!

___!

[___ !]

대괴는 다급히 장력을 마주쳤으나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사오 보나 후퇴했다.

[놓치지 않는다!]

기검룡은 차갑게 외치며 재차 장을 뻗어냈다.

___!

[___ !]

폭음과 함께 대괴는 피보라를 뿌리며 날아갔다.

이때,

[! 아버님!]

능소취가 갑자기 천해비동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사해신룡, 그가 전신에 서리가 가득히 앉은 채로 걸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가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의 시선은 모두 탐욕으로 빛났다.

그의 수중에 하나의 백옥함과 기()가 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 부인, 운공을 해야겠으니 호법을 부탁하오.]

이어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능부인을 비롯한 네 명의 비녀가 빠르게 그를 에워쌌다.

어느새 그녀들의 수중에는 두 자 길이의 짧은 보검이 들려 있었다.

이때,

[타핫!]

돌연 적염혈마가 대갈일성과 함께 사해신룡에게 덮쳐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신호로 북망이괴와 사공망, 심지어는 태산일수조차도 일제히 몸을 날려 사해신룡에게 덤벼드는 것이 아닌가?

[멈추시오!]

기검룡은 황급히 소리치며 그들을 가로막았다.

허나 적영혈마가 음산하게 그를 노려보며 적살마강을 후려쳤다.

[흐흐흐.... 꼬마야 비켜랏!]

기검룡 또한 물러서지 않고 참마제룡수(斬魔制龍手)로 그의 공격을 맞받았다.

파파___ !

[___ !]

적염혈마는 앞가슴을 거세게 얻어맞고 다급히 물러섰다.

이때,

[! ... 빙백신공(氷魄神功)! 당신은 빙궁(氷宮)...]

돌연 북망이괴의 경악에 찬 부르짖음이 터졌다.

그말에 중인들은 일제히 손을 멈추었다.

능부인, 그녀의 온화한 얼굴에 싸늘한 서리가 덮이고 있었다.

[입을 함부로 놀렸으니 살아남지 못하리라.]

그녀는 얼음으로 깎아만든 듯 투명한 옥수(玉手)를 휘둘렀다.

순간,

[___ !]

[___ !]

북망이괴는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어 전신이 얼음처럼 꽁꽁 얼어붙은 그들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즉사했다.

! 실로 끔찍하고도 가공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경악할 사태에 장내는 갑자기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빙궁(氷宮).

 

이 얼마나 두려운 이름인가!

이백 년 전___

희세의 대도(大盜) 천수야제(千手夜帝)가 빙궁의 지보(至寶) 빙백신검(氷白神劍)을 훔친 일이 있었다.

빙궁에서는 천수야제를 잡기위해 사자를 파견했다.

빙궁설녀(氷宮雪女)___

그녀는 천하를 다 뒤졌으나 결국 천수야제를 찾지 못하고 중원무림에 대혈겁을 일으켰다.

그녀의 무공은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중원인 중 그녀의 일초 반식을 받아낸 인물이 없었다.

그녀가 중원을 종횡무진 휩쓸며 살겁을 일으킨지 일 년(一年).

돌연 빙궁설녀가 사라졌다.

그 이후, 빙궁은 중원무림인들에 있어 일대 공포의 존재로 알려져 왔다.

헌데, 놀랍게도 능부인의 손에서 빙궁의 절기가 펼쳐진 것이 아닌가?

 

이때였다.

[크흐흐... 정말 뜻밖이군. 이런 곳에서 빙궁의 절학을 보게 되다니...]

돌연 듣기 거북한 탁음이 조용한 장내를 울렸다.

이어, ! !

계곡후면의 석벽을 날아 두 명의 인영이 내려섰다.

각각 백의(白衣)와 금의(金衣)를 걸친 노인이었다.

백의(白衣)를 입은 노인은 마치 해골에 가죽을 씌워놓은 듯 비쩍마른 체구였다.

반대로, 금의노인은 통통한 체구를 지닌 자였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중인들 사이에서 경악의 부르짖음이 터졌다.

[북망사신(北亡邪神)!]

[... 상강일괴(湘江逸怪)까지...]

백의노인___ 그가 바로 백팔무인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십여 명의 일인(一人)인 북망사신이었다.

금의노인___ 그는 상강일대의 패주로 군림하는 상강일괴였다.

북망사신은 능부인을 바라보며 음침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 본 사신의 제자들을 해쳤으니 죽어 마땅하다!]

이어, 그는 우장(右掌)을 치켜들었다.

순간 지독한 악취가 장내를 뒤덮었다.

능부인도 감히 방심하지 못하고 백옥같은 옥수를 들어올렸다.

츠츠츳... ___!

두 사람의 장력이 격돌하는 순간 시커먼 독무(毒霧)와 새하얀 빙기(氷氣)가 서로 뒤엉켰다.

[...]

[... ...]

그들은 동시에 상체를 휘청했다.

허나 곧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능부인과 북망사신이 어지럽게 혼전을 치루고 있는 것을 틈타 상강일괴는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운공하고 있는 사해신룡에게 다가갔다.

[서랏!]

기검룡이 이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치며 표표히 상강일괴 앞에 내려섰다.

[흐흐... 꼬마야 비켜랏!]

상강일괴는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___!

강맹한 장력이 쏟아지며 폭음이 일었다.

[이놈!]

상강일괴는 한 걸음 밀려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채 재차 장을 후려쳤다.

___ ___ !

서너 차례의 폭음이 잇따라 터졌다.

[!]

기검룡은 일순 신형을 비틀했다.

허나 그는 급히 몸을 바로잡으며 좌장을 내질렀다.

[벽력패왕(霹靂覇王)!]

상강일괴 역시 성명절학을 쏟아냈다.

[옥청강수(玉靑罡手)!]

___ 꽈르릉___!

엄청난 폭음이 장내를 뒤집어 엎었다.

기검룡은 울컥 선혈을 토하며 허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반면 상강일괴는 무릎까지 푹 박혀 들어갔다.

이때, 적염혈마가 교활한 눈빛으로 번개같이 사해신룡을 호위하는 네 소녀에게 덮쳐들었다.

[!]

[어딜!]

네 소녀는 교갈을 터뜨리며 네 개의 단검을 교차시켜 찬란한 광망을 일으켰다.

차차차창___!

[으헉!]

적염혈마는 허리를 난도질 당해 선혈을 쏟으며 튕겨났다.

이때 기회만 노리던 사공망의 보검이 번득 네 소녀사이를 파고들었다.

[!]

한 명의 시녀가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이 광경을 보던 기검룡은 두눈에 불빛을 뿜었다.

이때,

[크흐흐...]

허리에 일검을 맞은 적염혈마가 다시 괴소를 흘리며 진()이 무너진 소녀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기검룡은 불끈 입술을 물며 극영쇄심인(克影碎心印)을 발출했다.

[___ ___ !]

적염혈마는 심장을 관통당한 채 피보라를 뿌리며 즉사했다.

허나 위기는 계속되었다.

사공망과 상강일괴, 태산일수가 번갈아가며 세 소녀를 공격했다.

기검룡은 휙! 신형을 날려 사해신룡의 앞을 가로막았다.

바로 이때,

[호호호홋...!]

갑자기 간들어지도록 뇌살적인 여인의 교소가 장내에 울려퍼졌다.

중인들은 흠칫하여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계곡 뒤쪽의 석벽 위___.

한 명의 타는 듯 붉은 나삼을 걸친 여인이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략 이십여 세 정도 되었을까?

붉은 나삼은 몸에 꼭 끼어 선정적인 육체의 선이 그대로 나타났다.

용모또한 천하에서 보기드문 미인이었다.

___ !

그녀는 교구를 날려 사뿐히 중인들 앞에 내려섰다.

가까이서 바라보니 그녀의 미모는 더욱더 선정적이고 뇌살적이었다.

추수같은 맑은 눈에는 은은한 색기(色氣)가 어려 단번에 사내의 마음을 끄는 마력(魔力)이 풍겼다.

오똑 솟은 콧날 아래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붉고 도톰한 입술.

그것은 너무도 육감적이었다.

상강일괴와 태산일수, 사공망들은 일순 넋나간 표정으로 나타난 여인을 응시했다. 허나 기검룡은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불쑥 물었다.

[이것보시오! 당신은 또 무엇이오?]

그 말에 고개를 돌린 홍의여인의 눈이 갑자기 크게 떠졌다.

[어머! 귀여운 공자님!]

그녀는 탄성을 발하며 기검룡에게로 다가왔다. 허나 기검룡은 싸늘하게 소리쳤다.

[다가오지 마시오! 당신도 보물을 노리고 왔소?]

홍의여인은 선정적인 교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 그래요. 하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나는 공자님을 돕고 싶어요.]

[...?]

기검룡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때,

[...! 이제보니 소저는...!]

태산일수가 그제서야 홍삼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짐작한 듯 입을 열었다.

허나 홍삼여인은 얼른 그의 말꼬리를 가로챘다.

[그래요. 본 낭자가 바로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 홍라선희(紅羅仙姬)예요.]

그말에 보고있던 능소취가 문득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로 천하제일미로 자화자찬하는 그녀의 태도가 우스웠던 것이다.

허나 홍삼여인, 즉 홍라선희는 기검룡을 바라보며 문득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공자님, 만일 제가 공자님을 도와드리면 그 대가는 어떻게 치루겠어요?]

그녀의 말에 상강일괴 등의 안색이 홱 변했다.

상강일괴는 홍라선희를 바라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낭자께서는 저 꼬마를 도와주려고 하시오?]

[못할 것도 없죠.]

홍라선희는 대뜸 고개를 끄덕였다.

___홍라선희.

그녀는 이년(二年) 전부터 강호에 나타나 자칭 천하제일미라고 떠벌리고 다니는 여인이었다.

허나 여인의 일신무공은 실로 추측할 길없이 고강하여 수많은 수많은 절정고수들이 무릎을 꿇었다.

헌데, 그런 그녀가 기검룡을 도우려 하니 상강일괴 등은 난감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홍라선희는 문득 기검룡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아보였다.

[공자님, 싸움이 끝나고나면 공자님은 재뺨에 입맞춤을 해주시겠어요.]

[...]

그말에 기검룡은 그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러자 홍라선희는 다짜고짜 기검룡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흔들며 만족한 듯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 약속... 약속 하셨어요. 공자님.]

헌데 이때,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능소취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허나 홍라선희는 몹시 기분좋은 듯 중인들을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분이 가르침을 주시겠어요?]

그러자 태산일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보검을 뽑아들었다.

[노부가 낭자의 가르침을 받아보겠소.]

[! 추상신검(秋霜神劍)이군요. 당신의 자운십이식(紫雲十二式)이 무적(無敵)이라는 소문은 들었어요. 소녀에게 견식좀 시켜주세요.]

[조심하시오!]

태산일수는 한 마디 크게 외치며 추상신검을 번쩍 치켜들었다.

순간, 뭉클! 십여 송이의 검화가 치솟아 올랐다.

[호호... 좋아요!]

홍라선희는 교수를 앞가슴에 교차시키며 쾌첩하게 일장을 내뻗었다.

헌데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옥청강수!]

상강일괴와 사공망이 동시에 기검룡을 덮쳤다.

허나 기검룡은 추호의 당황함 없이 전력으로 쌍장을 후려쳤다.

츠츠츠... ___!

[으흑!]

기검룡은 옥청강수를 받은 손이 부서져 나갈 듯이 아프아고 느낀 순간 사공망의 보검에 허리를 스쳤다.

허나,

[흐흐... 다시 받아 보아라!]

상강일괴가 음침하게 웃으며 재차 옥청강수를 쏟아냈다.

동시에 사공망의 보검이 기쾌하게 사해신룡을 베어갔다.

[!]

기검룡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정면에서는 옥청강수가 날아들고 사공망의 검세는 세 시녀를 뚫고 곧바로 사해신룡을 짓쳐드는 것이 아닌가?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8

 

                   신비한 계곡

 

 

무공과 달리 기문둔갑(奇門遁甲), 즉 진법은 짧은 시간의 공부나 타고난 재능으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공부와 다양한 경험을 걸쳐야만 진법을 설치하고 깨트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물론 백남빈은 보통 사람보다는 기문진법에 대해 아는 바가 많다. 양부 이탁이 기문진법을 설치하고 해체하는 현장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되새겨 봐도 지금 자신들이 빠진 진법과 유사한 것은 본 적이 없다.

 

<삼재검법(三才劍法)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단순하고 평범한 검법이지만 그 안에 무학의 모든 이치를 담고 있다.>

 

난감해하던 백남빈은 양부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독안룡 이탁은 백남빈에게 기초적인 무공 두 가지만 가르쳤었다. 무림인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삼재검법과 육합심법(六合心法)이 그것이다.

그 두 가지 무공은 천년 이상 무림인들 사이에서 수련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수정되고 보완이 이루어져 결점이 거의 없는 완벽한 무공이 되었다.

물론 무공으로써 완성도가 높은 것과 위력이 강한 것은 별개의 문제다.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은 워낙 단순하고 변칙이 없는 무공이라 그 위력이 위협적이거나 빼어나지는 않다.

그 때문에 무림에서 삼재검법과 육합심법을 진지하게 수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헌데 이탁은 다른 무공들은 다 제쳐두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백남빈에게 가르쳤다.

심지어 자신의 독문절기인 칠로절천검(七路絶天劍)도 전수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백남빈이 백무염을 만나 가문의 절기를 익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탁의 말을 통해 백남빈은 자신의 아버지 백무염도 무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이탁을 뛰어넘는 무공을 지닌...

하지만 이탁은 구체적으로 백무염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백남빈이 주변 사람들을 통해 수소문을 해보았지만 백무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대단한 고수일 게 분명한 자신의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백남빈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백남빈은 가전절기를 익혀야하므로 함부로 다른 무공은 익히면 안된다는 양부의 말을 충실히 따랐다.

무공을 폭 넓고 다양하게 익히는 대신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을 극한까지 수련해온 것이다.

만일 삼재검법과 육합심법만으로 겨룬다면 백남빈은 천하무적일 것이다.

백남빈이 오 년 전 등천제에서 우승할 때 사용한 유일한 무공도 삼재검법이었다.

위력이 평범한 삼재검법만을 구사하다 보니 매번 어려움에 처했었다.

그러나 결국 근본을 볼 수 있는 특별한 능력 덕분에 백남빈은 상대 무공의 결점을 파악해서 승리하길 반복했었다.

 

(하늘의 뜻, 땅의 이치, 인간의 도리...)

백남빈은 삼재검법의 검결을 되새겼다.

(), (), ()을 삼재(三才)라 부르며 도가에서는 우주가 오직 삼재만으로 이루어진다고 본다.

진법이라는 것도 결국 우주의 원리를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아무리 복잡한 진법이라도 삼재가 바탕이 될 수밖에 없다.

(삼재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하늘의 법칙, 즉 천문(天文)을 기준으로 삼으면 이 진법을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백남빈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그 사이에 구름이 다소 흩어져 반쯤 찬 달과 함께 여러 개의 별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저쪽에 있으니 북쪽은 이 방향이고...)

백남빈은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북두칠성을 찾았다.

그리고는 북두칠성이 떠있는 방향으로 몇 걸음 걸어갔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하늘이 빙글 돌았다.

앞쪽 하늘에 있던 북두칠성이 갑자기 좌측으로 성큼 돌아가 버린 것이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다시 몇 걸음 내딛자 하늘이 또 빙글 돌면서 북두칠성의 위치가 다시 바뀌었다.

(그렇게 된 거였구나.)

백남빈은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북두칠성이 바뀌는 방향과 걸음을 옮긴 거리 사이에 일정한 규칙이 존재하는 게 확인된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을 더 되풀이 하자 주위의 경물이 확 바뀌었다.

 

***

 

!”

흑왕의 등에 앉아 있던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백남빈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더니 갑자기 꺼지듯 사라져 버린 것이다.

흑왕을 황급히 돌려서 백남빈이 있던 곳으로 갔지만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마치 안개가 흩어진 것처럼...

주위는 어둡고 함께 있던 사람마저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

너무도 고요한 공간에 강미루 자신만이 홀로 남겨진 것이다.

사방에서 무언가 무서운 것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단 생겨난 두려움은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만든다.

공포에 휩싸이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고 이빨은 저절로 닥닥 부딪친다.

"...!"

극심한 공포에 질린 강마루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뱉으며 흑왕의 등에 와락 엎드렸다.

그리고는 눈을 꼭 감은 채 미친 듯이 흑왕의 배를 걷어찼다.

히이이잉! 두두두!

갑자기 박차가 가해지자 흑왕도 깜짝 놀라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앞으로 달려갔다.

사람은 두려움에 제정신이 아니었고 말은 당황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말발굽의 진동이 전해지지 않음을 느낀 강미루가 눈을 번쩍 떴을 때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경사가 심한 비탈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었다.

주르르르! 티틱!

흑왕은 뒷발을 웅크리고 앞발은 버티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콰드드드!

그러나 비탈의 경사는 거의 수직에 가까울 정도라 점점 더 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순식간에 삼십여 장을 미끄러져 내려갔을 때 강미루는 십여 장쯤 앞쪽에 집채만한 바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을 보았다.

흑왕이 미끄러져 가는 속도는 이미 쏘아진 화살 같다.

이대로 미끄러진다면 말과 사람은 그 바위에 부딪혀서 서로를 구분 못할 정도의 피떡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히히힝!

흑왕도 위기를 느끼고 웅크렸던 뒷발을 벌떡 세웠다.

파앗!

그리고는 미끄러져 내리던 속력보다 더 빨리 달려서 눈앞의 커다란 바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하지만 바위 너머는 허공이었다.

바위는 가파른 비탈의 끝 부분이었으며 그 너머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시커먼 절벽이었던 것이다.

쐐애액!

바람 소리가 강미루의 귓가에 비단이 갈라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흑왕도 허공에서 곤두박질 쳐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강미루와 함께 떨어졌다.

아아악!”

죽었구나 싶은 생각에 강미루는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을 토해내었다.

그 직후 강미루는 후끈한 열기가 절벽 아래쪽에서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북두칠성을 올려다보며 걸음을 옮기기를 십여 차례 했을 때 백남빈은 마침내 원형의 미로를 벗어나 진법의 다른 부분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그곳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좁은 협곡이었다.

주위의 경물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 뒤를 돌아보았으나 강미루와 흑왕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아차!)

깜짝 놀란 백남빈이 강미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협곡으로 들어 온 방법으로는 다시 나갈 수가 없었다.

<아아악!>

멀리서 강미루가 내지른 게 분명한 날카로운 여자의 비명이 들려서 백남빈의 속을 바짝 타들어가게 만들었다.

소저! 내 목소리가 들리시오?”

비명이 들린 방향을 어림하여 외쳐보았다.

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 반복해서 불러 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백남빈은 바위들 틈에 나있는 사람이 다닌 듯한 길을 따라갔다.

 

***

 

길은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는 형태였다.

끊겼는가 싶으면 바위 뒤로 이어져 있고 오른쪽으로 도는가 싶으면 밑으로 내려가고 수시로 꼬불꼬불해져서 묘하기 짝이 없었다.

내친김에 끝까지 가보기로 작정한 백남빈은 단검에 찔려 아픈 다리를 끌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이윽고 내려가는 길이 사라졌을 때 백남빈은 자신이 상당히 넓은 분지(盆地)의 바닥에 이른 것을 알아차렸다.

밤인 데다가 지면에서 한참 아래로 내려온 바닥이라 분지의 형태와 넓이는 짐작할 수가 없다.

(그 말괄량이가 무사한지 모르겠다.)

백남빈은 강미루가 아직도 원형의 미로를 떠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든 빠져 나갔는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당장은 좀 쉬어야한다.

하루 종일 말을 달려 지친 데다가 강미루의 단검에 찔린 허벅지의 상처에서 출혈이 가볍지 않아서 어지럽다.

털썩!

백남빈은 풀이 무성하게 난 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밤하늘을 덮고 있던 먹장구름이 흩어지면서 상큼한 반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숨을 고르며 소지품을 점검해봤다.

악전고투를 치뤘지만 다행히 잃어버린 물건은 없었다.

무황성에 제출해야하는 밀서를 만지던 백남빈의 손길에 목에 걸고 있는 주머니가 만져졌다.

정교하게 만든 그 주머니 안에는 손바닥 반쪽만한 옥패가 들어있다.

옥패는 얼음처럼 차가운 냉기를 품고 있을 뿐 아니라 아주 단단하다.

그 옥패가 막아준 덕분에 백남빈은 강미루가 날린 화살에 가슴을 맞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어디 계시는지... 살아계시기나 하시는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날 지켜주신 셈이다.)

백남빈은 냉옥패를 어루만지면서 너무 어렸을 때 헤어져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헌데 바로 그때였다.

푸르르! 꿀럭! 꿀럭!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온 괴상한 소리가 상념에 잠긴 백남빈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 뭔가?)

마치 거대한 괴물이 숨을 쉬는 듯한 소리에 백남빈은 모골이 송연해 졌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백남빈은 토곤이 강진남에게 예물로 보내려던 단검을 뽑아들었다.

꾸르륵! 푸르르!

그 사이에도 무언가를 토해내는 듯한 괴성이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청랑검이라 이름 붙인 단검의 날을 번득이지 않도록 수건으로 감싼 백남빈은 살금살금 기어서 괴성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사이에 하늘에서는 반달이 완전히 구름에서 벗어나 별들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빛이 제법 환해 주변을 분간할 수 있다.

거대한 분지의 가운데로 다가가니 바닥에서 크고 작은 불빛이 일렁이고 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살펴본 백남빈은 이내 그것이 실제 불빛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넓이가 족히 삼십 장은 되어 보이는 커다란 연못에 달빛과 별빛이 비친 것이다.

꾸르르! 푸륵!

괴성(怪聲)은 바로 그 연못 가운데에서 나고 있었다.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흙은 따뜻하고 공기는 훈훈해졌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연못은 온천(溫泉)인 게 분명하다.

온천수로 가득 찬 연못 주변에는 여러 가지 풀이 자라고 있으며 꽃이 핀 것과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다.

살금살금 기어 연못으로 다가가고 있는 백남빈의 콧속으로 풀냄새와 함께 각가지 꽃향기가 스며들었다.

심신을 상쾌하게 하는 향기다.

푸륵! 푸르르!

연못 가운데에서 다시 괴성이 들렸는데 말이 내는 투레질 소리 같다.

백남빈은 몸을 숨긴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시 살펴봤지만 딱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백남빈은 몸을 일으켜 연못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푸르르! 푸릉!

붉은 색의 무언가가 물위에 떠 있고 시커먼 말 한 마리가 발버둥을 치면서 고개를 물 밖으로 내었다 잠겼다 하기를 반복한다.

그 시커멓고 거대한 머리로 보아하니 강미루의 천리마 흑왕인 게 분명하다.

(붉은 물체는 대려장의 그 말괄량이겠구나.)

백남빈은 비로소 흑왕과 강미루가 자기보다 먼저 이 신비한 절곡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구하고 볼 일이다.

연못에 발을 담가 보니 너무 뜨거워서 살갗을 바늘로 치르는 것 같았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1

 

                 빗속의 인연

 

 

-기련산(祈蓮山)!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의 경계에 자리한 험산으로 서북쪽에는 그 유명한 옥문관(玉門關)이 자리하고 있다.

중원과 서역을 잇는 중요한 무역로인 하서주랑(河西走廊)을 남쪽에서 굽어보고 있는 기련산의 서쪽 끝은 곤륜산의 장대한 산맥과 이어져 있다.

쏴아아아!

늦여름의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장대같이 쏟아지는 거센 빗줄기는 기련산 전역을 맹렬한 기세로 두들기고 있었다.

쐐애애액!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는 거센 폭우 속을 질풍같이 질주하는 인영(人影)이 있었다.

이 인물의 경신술은 너무도 빨라서 보통 사람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 설령 상당한 수준의 내공을 지닌 무림고수라 해도 그저 흐릿한 사람 형상만 겨우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번 도약할 때마다 무려 백여 장씩이나 쭉쭉 나아가는 경이적인 경신술은 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서둘러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테니...”

질풍같이 달리는 인영으로부터 문득 초조함과 근심이 가득 서린 음성이 흘러 나왔다. 사내처럼 걸걸하기는 하지만 틀림없는 여자의 음성이었다.

그렇다면 마치 섬전처럼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는 이 인물이 여자라는 뜻인데...

도대체 이 여인은 어떤 경신술을 연마했기에 이토록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일까?

고오오오!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여인의 몸 주위로는 진공(眞空)의 막()이 생겨 세차게 쏟아지는 폭우조차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 어리석은 자들! 이 모두가 오라버니를 해치려는 간악한 음모이거늘... 그 까짓 비급에 눈이 멀어 고독애로 몰려들다니...!”

인간이라 믿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질주하며 연신 이를 가는 여인의 모습은 아주 특이하여 한번 본 사람이라면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거구(巨軀)!

여인은 무려 칠척(七尺; 2m 10cm)에 가까운 거구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가 두 개쯤 더 달린 정도로 큰 키를 지닌 이 여인은 다리 하나의 굵기도 어지간한 사내들의 몸통만하다.

투학!

그 강인한 다리로 지면을 박찰 때마다 여인의 늘씬한 몸이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간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쯤일까?

비록 엄청난 거구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여인은 빼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 구릿빛 피부에 조각을 한 듯 뚜렷한 이목구비는 경국지색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얼굴만이 아니다.

칠척 가까운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여인의 몸매는 균형이 잘 잡혀 있다. 팔 다리가 늘씬할 뿐 아니라 들어갈 곳은 확실하게 들어가 있고 나올 곳은 당당하게 나와 있다.

무지막지한 거구의 소유자라는 것만 빼면 사내들의 시선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미인인 것이다.

(만에 하나 오라버니께서 이미 변을 당했다면... 전 무림이 나 냉약빙(冷若氷)의 손에 피로 씻기리라!)

거구의 여인은 질풍같이 날아가며 입술을 잘근 잘근 깨물었다.

그녀의 큼직한 손은 허리춤에 찬 가죽주머니를 연신 만지작거리고 있었는데 그 주머니에서는 은은한 화약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내게 오라버니는 생명과 다름없다!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굉천벽력탄(轟天霹靂彈)보다 더한 것이라도 쓸 수 있다!)

냉약빙이란 이름의 여인은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그녀가 허리에 차고 있는 가죽주머니 속에는 가공할 위력을 지닌 화탄(火彈) 십여 개가 들어있다. 굉천벽력탄이라는 그 화탄은 한 알로 십장 안의 모든 것을 날려버릴 수 있다.

(하여간 서둘러야 한다! 곤륜산의 고독애까지는 아직도 천여 리나 남았으니...!)

쐐애애액!

냉약빙은 결의에 찬 눈빛으로 몸을 날렸다.

천여리라면 보통 사람에게는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먹히는 아득한 거리다.

하지만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을 지닌 이 여인에게는 천리 길도 그저 하루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헌데 냉약빙이 막 하나의 산봉을 새처럼 날아 넘을 때였다.

아악!”

퍼붓는 빗속에서 한소리 애처로운 여인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런 산 속에서 웬 여자가...!)

콰우우우!

빛살처럼 질주하던 냉약빙의 몸이 송곳을 꽂듯이 딱 멈춰졌다. 그녀는 달리는 것도 빨랐지만 멈춰서는 것 역시 빨랐다.

쏴아아아!

원래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우뚝 멈춰선 냉약빙의 몸으로 세찬 빗줄기가 퍼부어졌다. 그녀의 거구가 삽시에 빗물에 젖어들면서 얇은 여름옷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흠씬 젖은 옷자락을 통해 그 형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냉약빙의 젖가슴은 하나하나가 가장 큰 수박만하다. 그 육중한 한 쌍의 살덩이들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와 숨이 가빠진 탓에 연신 아래 위로 출렁거린다.

멈춰선 냉약빙은 먹물을 칠한 듯 짙은 눈썹을 모으며 비명이 들려온 우측의 계곡을 돌아보았다.

(가볼까?)

냉약빙은 순간적으로 갈등했다.

평상시였다면 당연히 달려가 보았을 것이다. 남의 어려움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녀의 호협(豪俠)한 성격이 용납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촌각을 다투어 곤륜산까지 가야만 했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위험에 처해있기 때문이다.

냉약빙이 잠시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아악! 안돼! 안된다 이놈들아! 아악!”

또 다시 여인의 절박하고도 애처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어떤 여인이 사내들에게 겁탈당하면서 내는 소리였다.

(빌어먹을...!)

냉약빙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안 이상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은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같이 초조했지만 같은 여인의 입장으로써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스파앗!

다음 순간 냉약빙의 모습은 흐릿하게 변해서 어떤 여인의 다급한 비명이 들려온 계곡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

 

소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있는 계곡에도 장대발같은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그 계곡의 끝은 높은 절벽으로 막혀있다.

수십 길 높이인 그 절벽 앞쪽으로는 제법 넓직한 공터가 있는데 지금 그곳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뻘건 옷을 걸친 사내 십여 명이 어떤 여인을 겁탈하고 있는 중이었다.

흘흘! 고것 육덕 한번 기막히군!”

빨리 끝내라 장가야! 너 혼자 즐길 계집이 아니지 않느냐?”

빙 둘러선 혈포인들이 저마다 음담패설을 지껄이며 보는 가운데 한 명의 여인이 다섯 명의 사내들에게 유린당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내들에게 깔려 능욕당하고 있는 그 여인은 이십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미소부(美少婦)였다.

여인은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이면서 우아한 기품까지 지녀 한눈에 보기에도 명문가의 안주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행색은 말이 아니었다.

걸치고 있던 옷은 갈가리 찢겨 있으며 머리카락은 빗물에 젖은 채 제멋대로 풀어 헤쳐져 봉두난발이 되어 있었다.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 된 미소부의 팔 다리는 흉칙한 인상의 사내 넷이 활짝 벌려서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런 미소부의 몸 위에서 한 명의 사내가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그자가 하체를 거칠게 움직일 때마다 아래에 깔린 여체는 마치 작살을 맞은 듯 물고기처럼 퍼득이며 경련을 일으킨다.

하지만 여인의 입에서는 더 이상 신음소리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었다.

“...!”

여인은 초점 잃은 눈으로 멍하니 한쪽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미소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한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인데 그곳에는 사내아이 한명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이는 귀엽고 잘 생긴 그 아이는 바로 유린당하고 있는 미소부의 아들이었다.

사내아이는 머리에 심한 상처를 입은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사내들은 미소부의 아들을 해치고 그녀의 육체를 유린하는 중이었다.

... 정말 기가 막히구만! 이런 계집을 마누라로 두었었느니 태양신협(太陽神俠)이란 놈도 여한은 없었겠다.”

미소부의 몸 위에서 날뛰는 사내가 헐떡이며 절정을 향해 치달릴 때였다.

크악!”

커억!”

돌연 단말마의 비명 십여 마디가 거의 동시에 터져 나와 장내를 뒤흔들었다.

무슨 일이냐 산통깨지게!”

미소부를 유린하던 사내는 버럭 고함을 내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

하지만 그 직후 그자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퍼퍼퍽! 콰당탕!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동료들의 몸뚱이가 피를 뿌리며 나무토막처럼 거꾸러지는 것을 본 때문이다.

육시를 할 놈들!”

화악!

뒤 이어 사나운 일갈과 함께 장내로 한 명의 여인이 질풍같이 장내로 날아 내렸다. 바로 냉약빙이라는 거구의 여인이었다.

, 당신은!”

엄청난 거구임에도 불구하고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닌 냉약빙을 본 순간 미소부의 몸에 올라타고 있던 사내는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그자의 뇌리로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라있는 여살성(女煞星)의 존재가 떠오른 때문이다.

... 전모(電母) 냉약빙!”

파앗!

공포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여체에서 떨어진 사내는 다급히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너무 놀란 나머지 그자는 벌거벗은 하체를 가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에 나타난 여인의 존재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전모 냉약빙!

 

여자의 몸으로 신마풍운록에 서열 십위(十位)로 기록되어 있는 절세고수다.

별호가 암시하듯 냉약빙의 경신술은 단연 우내최강이었다. 비록 나이는 젊지만 당금 무림의 그 누구도 그녀보다 빠르지 못하다.

냉약빙이 구사하는 전궁만리비(電弓萬里飛)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빠른 경신술로 알려져 있다.

전궁(電弓)은 번개를 뜻한다.

전모라는 별호는 냉약빙의 경신술이 번개가 치는 것만큼 빠르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일단 냉약빙의 표적이 된 자는 그녀의 손아귀에서 결코 빠져나갈 수 없다.

그 전모 냉약빙이 나타났으니 일개 음적에 불과한 사내가 사색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으헉!”

나타난 여인이 전모 냉약빙임을 알아보고는 사색이 되어 몸을 날리던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

갑자기 눈앞이 뿌옇다 싶은 순간 냉약빙의 모습이 유령같이 앞쪽에 나타난 것이다.

쩌어엉!

이어 그녀의 큼직한 손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터지고...

안돼, 케엑!”

퍼억! 후두둑!

처절한 비명과 함께 허연 뇌수가 빗속으로 확 뿌려졌다. 냉약빙의 손가락에서 일어난 강력한 파괴력이 사내의 머리통을 박살내버린 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

머리통이 으깨져 나뒹구는 음적의 시체를 노려보며 냉약빙은 이를 바득 갈았다.

헌데 그 직후였다.

흐윽!”

그녀의 뒤에서 짤막한 여인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차!)

반사적으로 돌아본 냉약빙의 안색이 홱 변했다. 사내들에게 유린을 당하던 미소부가 한 자루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찌르고 있는 것을 본 때문이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룡강 무협소설

 

             고독천년 -孤獨千年

 

 

서장

 

            신마풍운록의 음모

 

 

 

-신마풍운록(神魔風雲錄)!

 

이것은 무림인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人名簿)다.

하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이 인명부로 인해 무림역사상 최악의 살겁이 벌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수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스러진 대참사가 어이없게도 그저 이름을 나열해놓았을 뿐인 한 권의 책자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

 

-신마풍운록!

 

제목 그대로 당금의 무림에서 천신(天神)과 마귀(鬼魔)처럼 풍운(風雲)을 일으키고 있는 고수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인명부다.

물론 무림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한 지방의 패주(覇主)이거나 어떤 방면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인물들만이 신마풍운록을 장식할 수 있다.

즉,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올랐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림의 정세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유력자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마풍운록이 누구에 의해 작성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 한 권의 인명부는 어느 날 문득 천하 각지에서 발견되기 시작했을 뿐이다.

누군가에 의해 작성되어 남칠성(南七省) 북육성(北六省)에 거의 동시에 배포된 신마풍운록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인물들은 득의해 마지 않았다. 신마풍운록에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당금 무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임이 증명된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득의는 오래지 않아 공포와 의혹으로 돌변하였다. 신마풍운록에 이름을 올린 명숙들이 무참하게 살해되는 참사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무림명숙들을 살해한 범인이 누구인지는 이내 밝혀졌다.

 

신마풍운록-!

 

도처에서 일어난 참사의 원흉은 바로 신마풍운록이었다.

물론 신마풍운록이 직접 살인을 한 것은 아니다. 신마풍운록은 그저 살인의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다.

문제가 된 것은 신마풍운록에 올려진 이름들에 서열(序列)이 매겨져 있었다는 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작성자는 대단한 통찰과 분석력으로 무림인들의 능력을 분석하여 서열을 매겨 놓았는바, 그것이 재앙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제삼자가 보기에 신마풍운록 상의 서열은 수긍이 갈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열이 매겨진 당사자들의 생각까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데 혈겁의 단초가 숨겨져 있었다.

 

-내가 왜 그 작자보다 서열이 낮은가?

 

신마풍운록에 이름이 오른 대부분의 무림인들이 그같은 불만을 품었으며 급기야 자기보다 상위 서열로 기록된 인물들에게 격렬한 질시와 살의를 느끼게 되었다.

 

-만일 그자가 사라진다면 내가 그자의 서열을 차지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같은 악마의 속삭임이 불만을 느낀 무림인들의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대참극의 시발점이었다.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누군가가 자기보다 윗 서열의 인물을 암살하는 사태가 실제로 벌어진 것이다.

최초의 희생자는 신마풍운록에 서열 칠십이위(七十二位)로 기록 된 상강조수(湘江釣搜)란 인물이었다.

한 자루 낚싯대만 있으면 고래라도 낚아 올릴 수 있다는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상강조수는 세상의 욕심과 명예 따위는 하찮게 여겨왔었다.

그런 그가 자신보다 하위 서열로 기록 된 몇 명의 인간들에게 합공을 당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이 피 빛 회오리의 시작이었다.

상강조수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신마풍운록의 서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기보다 윗 서열의 고수들을 암살하는 일이 도처에서 발생했다.

질투가 원인인 이같은 추악한 암살극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갔으며 일단 일어난 피바람은 일거에 전 중원을 휩쓸었다.

피는 피를 부르고 죽음은 또 다른 죽음을 낳았다.

신마풍운록의 고수들은 서로를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다. 살아남으려면 먼저 상대를 죽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의심은 공포를 낳고 공포는 무자비한 살육으로 이어졌다.

이제 평화란 말은 사라지고 살육과 피비린내만이 강호를 휩쓸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림에 퍼진 한 가지 소문에 의해 신마풍운록이 일으킨 혈풍은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고독마야(孤獨魔爺)가 혈마대장경(血魔大藏經)을 얻었다!>

 

이같은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경악으로 전율해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문에 언급된 한 인물의 이름과 비급의 제목이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독마야 연남천(燕南天)!

 

그가 누구인가?

자타가 공인하는 당금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 아닌가?

신마풍운록의 첫 장을 차지하고 있는 서열 일위(一位)의 절대고수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인 것이다.

고독마야 연남천은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이래 육십여 년의 세월을 실로 고독하게 살아 왔다.

그에게는 친구는 물론이고 적수도 없었다.

하늘과 땅 사이의 그 누구도 고독마야의 삼초지적(三招之敵)이 되지 못했다.

적수조차 없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하고 불행한 일인지는 당사자가 아니면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너무나 강했기에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절대자!

그가 바로 고독마야 연남천이었다.

 

-혈마대장경!

 

그 이름은 고독마야 연남천보다 오히려 더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혈마대장경은 무림 역사상 최강자들인 고금오대고수(古今五大高手)중 한 명이 남긴 비급이었다.

 

-흡혈마조(吸血魔祖)!

 

사파(邪派) 무림에서 종가로 숭배받는 혈교(血敎)의 창시자이기도 한 그는 인육(人肉)을 즐겨먹고 인혈(人血)을 술 대신 마셨다는 전설 속의 마인이었다.

흡혈마조는 천인공노할 악행을 숱하게 자행하였으나 일백 수십 살의 천수를 누린 후 죽었다. 너무도 강한 그자를 세상 그 누구도 죽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염라대왕마저도 두려워서 끝까지 살려두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로 흡혈마조는 막강했으며 공포 그 자체였다.

흡혈마조가 창안한 저주받을 마공들이 수록되어 있는 비급이 혈마대장경이다.

바로 그 혈마대장경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문을 접한 무림인들은 공포와 전율을 금치 못했다.

그렇지 않아도 천하무적으로 여겨져 온 고독마야가 혈마대장경까지 연마한다면 그 결과는 삼척동자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독마야에게 혈마대장경을 연마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된다! 그가 혈마대장경마저 익힌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영원히 고독마야를 능가하지 못한다!

-혈마대장경의 마공 중 한 가지만 얻어도 독패군림(獨覇君臨)할 수 있다!

 

두려움과 함께 추악한 탐욕이 전 무림을 열병처럼 휩쓸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수많은 무림인들이 고독마야 연남천의 거처인 곤륜산(崑崙山) 고독애(孤獨崖)로 몰려갔다.

그때까지 살아남은 신마풍운록 상의 고수들 거의 전원이 곤륜산으로 운집한 것이다.

하지만 이 모두가 천하를 집어 삼키려는 음모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치밀하고도 잔혹한 음모의 그물이 전 무림을 옥죄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제 6

 

          사로잡힌 여인

 

 

휘익!

질풍같이 내달리던 당혜선이 돌연 급정거했다.

"...!"

감았던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던 고검추는 흠칫했다.

당혜선이 멈춰선 곳은 깎아지른 단애 위였다도끼로 쪼개놓은 듯 쩍 갈라진 절벽 아래로는 거친 물줄기가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청룡탄(靑龍灘)!

 

기련산을 남북으로 가르며 흘러가는 험한 물줄기다산속을 수백 리 치달린 거친 계류는 황하와 이어진다.

당혜선이 멈춰선 단애는 그 청룡탄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콰르르!

족히 오십여 장은 됨직한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거센 물줄기가 새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다.

팽가촌에서 청룡탄까지의 거리는 오십 리가 넘는다당혜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이다.

"으음... 틀렸단 말인가?"

무엇인가에 귀를 기울이던 당혜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검추는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당혜선은 선녀곡을 벗어난 직후부터 추격이 따라붙은 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련산에서도 험한 곳을 골라 치달렸건만 끝내 추격을 떨쳐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특히 나중에 추격에 가세한 자의 속도는 놀라웠다처음에는 이십여 리의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십리 안쪽으로 따라붙었다.

혼자라면 어찌 어찌 떼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볍지 않은 고검추를 안고 그자의 추격에서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자는 사신각주 본인일 텐데... 추아만이라도 그 살인귀의 마수에서 벗어나게 해야한다.)

비장한 표정이 된 당혜선은 고검추를 안고 우측의 석벽으로 다가갔다.

석벽 아래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그 바위들 사이를 지나자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 나타났다입구에 바위들이 겹쳐 있어서 밖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동굴이다.

당혜선은 팽가촌 근처에 출몰하는 맹수들을 구제하는 과정에서 이 동굴을 발견했었다.

치명상을 입고 달아난 표범이 석벽 근처에서 돌연 사라졌었는데 피 냄새를 따라 가보니 동굴 안에서 죽어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숨기면 누구도 추아를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파팟!

동굴로 들어간 당혜선은 고검추의 아혈(啞穴)과 마혈(痲穴)을 짚은 후 바닥에 눕혔다.

동굴 입구는 교묘하게 감춰져 있고 멀지 않은 곳으로는 청룡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내공이 제 아무리 심후한 자라도 이 동굴 안에 숨겨진 고검추를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설마...)

고검추는 혀가 굳어지고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놀란 눈으로 당혜선을 바라보았다.

대략 반 시진(1시간)쯤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이다.”

당혜선은 혈도가 짚여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된 고검추를 만감이 서린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혈도가 풀리더라도 팽가촌으로는 돌아가지 마라사신각의 악귀들이 팽가촌을 감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대신 복우산(伏牛山)에 자리한 호천무맹으로 가서 철봉황(鐵鳳凰고현경(高玄鏡)이란 아이를 만나라내 이름을 대면 그 아이가 널 돌봐 줄 것이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검추를 내려다보던 당혜선은 동굴을 나갔다.

휘익!

당혜선은 동굴 안에 누워있는 고검추를 한 번 더 돌아본 후 새처럼 날아올라 사라졌다.

(어머니...!)

고검추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어도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사신각의 무리들을 유인하려는 것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하지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는 속내와 달리 고검추는 말을 할 수도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저 어머니가 무사하기를막혀있는 혈도가 빨리 풀리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헌데 당혜선이 사라지고 일다경쯤 지났을 때였다.

스악!

한 줄기 검붉은 그림자가 질풍같이 동굴 앞을 스쳐지나갔다.

(... 사신각의 살인귀들 중 한명일까?)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고검추는 곁눈질로 동굴 밖을 살펴보았다.

엇갈리게 서있는 바위들 틈새로 동굴 밖이 보인다.

하지만 나타났던 자의 경신술은 아주 빨라서 순식간에 고검추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몸놀림이 어머니에 못지않은 걸 보면 사신각이란 조직의 두목일지도 모른다.)

고검추는 속이 타들어갔다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곳이 당혜선이 사라진 쪽이었기 때문이다.

(제발... 제발 어머니가 무사하셔야할 텐데...)

고검추는 달궈진 가마솥에 빠진 개미의 심정이라는 어떤 것인지 절감했다.

어머니가 과연 사신각의 추적을 뿌리칠 수 있을까?

입이 바싹 타들어갔지만 고검추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다.

어머니의 말대로라면 반시진은 지나야 혈도가 풀릴 것이다.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지금의 고검추에게 반시진은 말 그대로 여삼추(如三秋)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화라락!

당혜선과 검붉은 그림자가 날아간 쪽에서 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파공성이 들려왔다.

(어머니가 사신각의 추격을 따돌리고 돌아오시는 것일까?)

고검추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동굴 밖을 주시했다.

휘익!

이윽고 하나의 그림자가 동굴 앞으로 날아 내렸다.

(!)

그 직후 고검추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나타난 자는 검붉은 장포를 걸친 인물인데 얼굴은 같은 색의 복면으로 가리고 있다그자가 쓰고 있는 복면 이마부분에는 <()>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바로 사신각주였다.

헌데 사신각주의 옆구리에는 한 명의 여인이 축 늘어져 있었다.

(... 어머니!)

고검추는 기겁했다사신각주의 옆구리에 끼어있는 여인은 바로 당혜선이었기 때문이다.

당혜선은 결국 달아나지 못하고 사신각주에게 제압당한 것이다.

기련산 일대에서 으뜸가는 고수라 불리던 흑모철웅조차 쓰러트린 당혜선이다.

그런 그녀가 별 저항도 못하고 사로잡힌 것만으로도 사신각주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의 소유자인지 짐작할 수 있다.

(당가년이 이 근처에서 잠깐 지체했었는데...)

사신각주는 음산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자는 심후한 공력으로 당혜선의 이동 경로를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이 이쯤에서 잠시 멈췄던 것을 알아차렸었다.

사신각주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나 주변에서 딱히 눈에 띠는 것은 없었다.

천시지청술을 펼쳐서 탐색하려고 해도 멀지 않은 곳에서 청룡탄의 물줄기가 요란하게 흐르고 있어서 불가능하다.

당혜선이 의도한 대로 사신각주는 지척에 숨어있는 고검추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털썩!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사신각주는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당혜선을 바닥에 던졌다.

"...!"

모질게 바닥에 던져졌지만 당혜선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신음조차 토하지 않았다움직이려는 시도도 못하는 것으로 보아 혈도가 짚인 듯 했다.

"당혜선더 괴로움을 당하기 전에 복마신검을 내놔라."

사신각주는 힘없이 누워있는 당혜선을 내려다보며 음산한 어조로 말했다.

"무슨 헛소리냐복마신검을 내놓으라니...?"

당혜선은 감고 있던 눈을 치뜨며 앙칼지게 대꾸했다.

"흐흐흐알만한 인간은 다 알고 있는 사안인데 발뺌할 작정이냐?“

사신각주는 칙칙한 살기가 서린 눈으로 당혜선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당혜선의 태도는 단호했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복마신검을 어떻게 내놓는단 말이냐?"

"그럼 네년은 왜 십칠 년 전 호천무맹을 도망치듯 떠났느냐?"

"...!"

사신각주의 이어진 추궁에 당혜선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다정관음 능벽운을 제외하면 고창룡과 가장 가까웠던 건 바로 사매인 네년이었다당연히 고창룡은 죽기 전에 네년에게 복마신검을 숨겨둔 곳을 알려주었을 것이다."

사신각주의 두 눈이 흥분으로 희번덕거렸다.

헌데 복마신검이라니... 십칠 년 전 철사자 고창룡이 사모를 겁탈하고 죽은 참사가 사신검중 복마와 관련 있단 말인가?

고창룡이 죽은 이상 오직 네년만이 복마신검의 소재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론할 수 있다그러니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발뺌을 해볼 생각은 마라

사신각주가 쓰고 있는 복면 속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죽일 테면 죽여라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내 입에서 네놈이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할 것이다."

당혜선은 단호하게 내뱉은 후 다시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네년이...!"

사신각주의 두 눈이 살기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자는 당혜선의 태도에 격노했지만 달리 어찌 해볼 수단이 없었다.

사실 사신각주는 당혜선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당혜선의 성격이 얼마나 당찬지 잘 알고 있었다당혜선은 일단 결심하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다.

고문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섭혼술을 쓰면 입을 열게 할 가능성이 있지만 시간과 노력이 많이 소모된다.

문제는 사신각주에게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가공할 고수가 기련산에 들어와 있는 게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고수에게 포착되기 전에 어떻게든 당혜선의 입을 열어야만 한다.

그리고 사신각주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다.

"흐흐흐좋다네년의 입에서 복마신검의 행방을 듣는 것은 포기하겠다그 대신 다른 것을 갖도록 하지."

사신각주는 음산하게 웃으며 당혜선에게 다가갔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이냐?"

당혜선은 불길한 예감에 교구를 부르르 떨었다.

"크크크복마신검은 포기하고 무맹사신재(武盟四神才)중 한 명이었던 네년의 속살 맛이나 봐야겠다."

사신각주는 음험한 눈으로 당혜선의 풍만한 몸매를 쓸어보았다.

"이 짐승만도 못한... !"

당혜선의 분노에 찬 음성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날카로운 비명으로 바뀌었다.

사신각주가 당혜선의 상의를 찢어버리듯 단번에 벗겨냈기 때문이었다.

... 네놈이... 흐윽!”

사신각주는 분노와 수치로 떠는 당혜선의 치마마저 거칠게 벗겨 내렸다.

이제 당혜선은 작은 속곳으로 은밀한 곳만 가린 민망한 자태가 되었다.

"흐흐흐... 그럼 네 년의 꿀단지도 구경해볼까?"

사신각주는 음험한 웃음을 흘리며 그 속곳에도 손을 댔다.

"... 안된다제발 이러지 마라!"

사신각주의 손이 속곳에 닿자 당혜선은 사색이 되었다.

바로 지척에 고검추가 숨어있다.

아들이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운데 몸을 더럽힐 위기에 처했다.

당혜선은 견딜 수 없는 수치심과 절망감에 당장에라도 혀를 깨물고 싶었다.

물론 혈도가 찍힌 상태라 혀를 깨물 수도 없다.

본좌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면 복마신검의 소재를 대라.”

사신각주는 당혜선의 속곳으로 가려진 부분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순간 당혜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사신각주가 자신을 농락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모른다난 복마신검에 대해 아는 게 없으니 네 놈 마음대로 해라.”

당혜선은 악에 바쳐 외쳤다.

그렇게 결심했다니 어쩔 수 없군.”

사신각주의 눈이 복면 속에서 살기를 뿜어냈다겁탈하겠다는 협박도 당혜선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때문이다.

하지만 당혜선의 그같은 반응도 사신각주가 예상한 것이다.

흐흐흐네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마!”

사신각주는 음험하게 웃으며 당혜선의 몸에 마지막 남아있던 보루인 작은 속곳을 거칠게 찢어버렸다

"흐윽!"

하체가 썰렁해지는 것을 느낀 당혜선은 절망에 찬 신음을 토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9

 

           이상한 반지

 

 

 

제왕성에 경사가 생긴 것은 십팔 년 만이다.

소성주 모용준(慕容俊)이 배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제왕성 섭씨일족은 자손이 귀하다.

삼대(三代)가 거푸 외아들로 이어져 올 정도였다.

당대 성주인 철면제왕 섭장천도 자식 복이 없었다. 본처를 비롯하여 여러 명의 첩을 뒀지만 후손을 전혀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다가 본처가 병으로 죽자 섭장천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었다.

섭장천의 두 번째 아내 주영청(朱永淸)은 황제의 누이였다.

주영청은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가 다음해 남편이 죽어 청상(靑孀)이 되었었다.

황제는 젊은 나이에 홀몸이 되어 쓸쓸히 지내는 누이를 보다 못해 재가를 권유했다.

이에 주영청은 다른 좋은 혼처를 모두 마다하고 할아버지뻘인 섭장천에게 시집을 왔었다.

다행히 그녀는 시집 온 다음 해에 늙은 남편을 위해 아들을 낳아주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 섭무궁(葉無窮)의 돌 잔칫날에 비극이 벌어졌다.

마교 교주 귀면지존이 달마묵장을 노리고 제왕성에 잠입했다가 주영청을 살해하고 섭무궁을 납치해간 것이다.

그날 이후 제왕성에서는 웃음이 끊겼다.

섭장천은 두문불출하며 사람을 거의 만나지 않았다.

성격도 모질고 괴팍해져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관대하고 정의롭던 제왕성이 포악한 패도(覇道)의 집단이 된 것도 십팔 년 전의 그 비극이 벌어진 이후부터였다.

백여 년의 세월동안 무림을 지배해온 제왕성은 어느덧 존경과 흠모의 대상에서 두려움과 증오의 악역이 되어 버린 것이다.

 

십여 년에 걸친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귀면지존에게 납치당한 섭무궁의 생사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섭장천의 나이는 칠순을 넘어버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으니 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섭장천은 양자를 들여 제왕성의 대를 이을 결단을 내렸다.

섭장천의 결단으로 덕을 본 행운아가 바로 모용준이다.

모용준은 하남성에 근거를 둔 모용세가(慕容世家)의 소가주였다.

모용세가는 하남성에서는 제법 기침 꽤나 하지만 무림 전체로 놓고 보면 딱히 특출 날 것도 없는 가문이다.

그래도 모용세가가 내세울만 자랑거리가 한 가지는 있었다.

전전대의 안주인이 철면제왕 섭장천의 먼 친척 누이였다는 게 그것이다.

섭장천은 생판 남보다는 그래도 약간의 피가 섞인 모용준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기에 이르렀다.

모용준은 핏줄 덕분에 그저 그런 가문의 후계자에서 일약 무림의 패자인 제왕성의 소성주가 된 것이다.

바로 그가 내일 혼례를 올릴 예정이다.

 

* * *

 

(이런 허접 쓰레기를 예물이라고 내놓다니...)

진상파(陳祥芭)는 치밀어 오르는 경멸의 감정을 숨기려 애썼다.

제왕성의 내()총관 구숙정(具淑貞)이 가져온 패물함의 내용물이 그녀를 기막히게 만든 것이다.

 

내일 모용준과 혼례를 올릴 예정인 진상파는 황금성(黃金城)의 성주다.

무림을 지배하는 것이 제왕성이라면 대륙의 상계(商界)는 황금성이 장악하고 있다.

황금성의 부()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황실조차도 황금성의 눈치를 본다고 할 정도다.

올해 나이 스무 살인 진상파는 바로 그 황금성의 성주다.

전대 성주였던 새석숭(賽石崇) 진보륜(陳寶輪)이 돌연사하면서 외동딸인 진상파가 대를 이었던 것이다.

전대 성주의 유일한 핏줄이라 황금성을 물려받긴 했으나 아무래도 여자라는 한계가 있다.

지난 일 년 간 진상파를 몰아내고 황금성을 차지하려는 음모와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수많은 친인척들이 호시탐탐 진상파의 자리를 노려왔다.

범인이 누군지 밝혀지지 않은 암살 시도도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왕성에서 혼담이 들어왔다.

제왕성의 무력이라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진상파는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였었다.

 

이 패물들이 황금성의 주인이신 소저 눈에는 그리 대단해보이지 않을 거예요.”

제왕성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내총관 구숙정은 진상파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패물함의 패물들은 질과 양에서 민망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사연과 배경이 있는 물건들이랍니다. 영청공주(永淸公主)님께서 제왕성으로 시집오실 때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것들이거든요.”

구숙정은 붙임성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삼십대 중반의 나이지만 구숙정은 여전히 화사한 미모를 유지하고 있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주도면밀한 성격이라 그녀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구숙정에게는 구미호리(九尾狐狸)라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별호가 붙어있다.

성주님께서 다음 대 제왕성의 안주인이 되실 소저에게 친히 내리신 것이니 소중하게 다뤄주시길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패물함을 진상파쪽으로 조금 더 밀어주며 말했다.

그렇게 하지요. 성주님께는 총관이 나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주세요.”

진상파는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조금 숙였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제왕성에 왔지만 진상파는 아직 성주인 섭장천을 접견하진 못했다.

소저의 말씀은 그대로 성주님께 전해드리지요. 내일 있을 혼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잠자리가 편하시기를 바라겠어요.”

구숙정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 돌아섰다.

열려있는 문 밖에는 여자답지 않게 당당한 체격에 황금색 갑주로 무장한 여자 무사들이 방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거구의 여자들은 진상파의 전속 호위들인 백팔금차(百八金叉)들이다.

어려서부터 온갖 약물로 단련된 그녀들의 몸은 금강불괴나 다름없다.

무공이 고강할 뿐 아니라 백팔금차들의 충성심은 절대적이다.

단 한시도 신변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 백팔금차들 덕분에 진상파는 여러 차례의 암살 시도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당연히 백팔금자들은 구숙정의 일거수일투족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재수 없는 년...)

백팔금차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온몸에 받으며 영빈관(迎賓館)을 나서는 구숙정의 눈매가 차가워졌다.

진상파의 차갑고 오만한 태도가 구숙정의 배알을 뒤틀리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일이 지나면 그 상판에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될 것이다. 제왕성의 진짜 안주인이 누군지 알게 될 테고...)

독기를 품고 영빈관을 떠나는 구숙정의 뒤에서 백팔금차들이 방문을 닫고 있었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방안에는 진상파 혼자 남게 되었다

이 패물들이 내 눈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주제라도 아니 다행이네.”

진상파는 코웃음 치며 패물함의 내용물들을 흘겨보았다.

세공(細工)은 고리타분하고 보석의 질은 그다지 높지 않다. 게다가 관리 상태까지 엉망이고...”

진상파는 패물들을 건성으로 뒤적였다.

물론 패물함의 패물들이 값어치가 전혀 없는 쓰레기들은 아니다. 금과 은, 그리고 각종 진귀한 보석들로 만들어져 있어서 제법 값이 나갈 것이다.

하지만 최상의 품질을 지닌 보물들만 보며 자라온 진상파의 눈에는 한 없이 허접하게만 보였다.

황실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들이면 뭐해? 이 패물들을 다 팔아봐야 내가 끼고 있는 반지 하나 값도 안 나올 텐데...”

패물들을 뒤적이는 진상파의 왼손 가운데 손가락에는 잘 세공된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다.

자두 씨만한 금강석이 박힌 그 반지를 팔면 수만 평의 옥토(沃土)를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왕성에서 보물로 취급하는 물건들이니 팔아치울 수는 없겠지만...”

냉소하던 진상파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패물을 뒤적이던 진상파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특이한 형태의 반지가 쑥 끼워졌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오른손을 들어 중지에 저절로 끼워진 그 반지를 살펴보았다.

용 두 마리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조각이 새겨진 반지인데 재질은 은이며 용의 눈 부위에는 콩알보다도 작은 붉은 색의 보석들이 박혀있다.

하다하다...”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에 끼워진 그 반지를 보며 진상파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쌍룡패미(雙龍敗尾)! 두 마리 용이 서로의 꼬리를 삼키는 세공이라니... 황실에서 나온 물건이라면서 어쩜 이토록 조잡할 수가 있지?”

진상파는 기가 막혀서 오히려 흥미가 동했다.

재질은 은(), 용의 눈이라고 박아 넣은 건 질 낮은 홍옥(紅玉), 잘 춰줘야 은자 백냥 정도 나갈 이따위 싸구려 반지까지 패물이라고 내놓아? 황금성의 성주인 날 엿 먹여도 유분수지.”

진상파는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에 끼워진 그 반지를 뽑아내려했다.

헌데 반지는 의외로 꽉 끼어서 빠지지 않았다. 끼워질 때는 어째서 그리 쉽게 끼워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별개 다 속을 썩이네.”

오만상을 쓰며 반지를 뽑으려던 진상파의 손이 멈칫, 멈춰졌다.

말해!”

진상파는 왼손으로 반지를 만지면서 누군가에게 말했다.

 

<모용준은 저녁 무렵부터 친구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

진상파의 뒤쪽으로 사람 그림자가 나타나며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아는 친구들이라는데 그다지 질은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가 뭉치듯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여자였다.

여자는 키가 무려 칠척(七尺) 가까이 되는데 엄청난 거구면서도 완벽한 균형을 이룬 몸매를 지니고 있다.

얼굴 또한 이목구비가 뚜렷하여 미인 소리를 들을만한 이 거녀(巨女)의 이름은 철관음(鐵觀音)이다.

진상파의 수신 호위들인 백팔금차의 수령이 바로 그녀다.

백팔금차의 수령답게 철관음의 무공은 심후하여 신주이십팔숙중 오왕, 육패, 칠절에 필적할 정도다.

내일 혼례를 앞둔 인간이 악우(惡友)들과 어울리고 있다?”

철관음의 보고를 받은 진상파는 이를 바득 갈았다.

철관음은 진상파의 지시로 제왕성의 소성주 모용준의 동태를 살피고 온 것이다.

당연히 그 자리에 계집들도 있겠지?”

진상파는 철관음을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철관음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대로 말해! 언니 잘못은 아니니까.”

!

진상파는 주먹을 쥔 오른손으로 탁자를 내려쳤다.

! 타당!

패물이 들어있던 패물함이 탁자 위로 펄쩍 튀어 올랐다가 내려앉았다.

진상파는 황금성의 후계자가 되기 위한 수업에 매진해온 탓에 무공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 때문에 진상파의 무공 수준은 거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정색하고 화를 내면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타고난 기질과 위엄이 남다른 탓이다.

... 환락가로 유명한 양주(揚州)에서 창기(娼妓)들을 여럿 불러와 놀고 있습니다.”

철관음은 식은땀을 흘리며 진상파의 눈치를 보았다.

 

장강과 대운하가 만나는 요충지 양주는 환락가로 유명하다.

대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북경과 금릉을 제외하면 창기로 이름난 네 고장이 있고 그중 한 곳이 양주다.

양주의 창기들은 양주수마(揚州瘦馬)라 불린다.

양주수마에 비견되는 유명한 창기들로는 대동파이(大同婆姨), 서호선낭(西湖仙娘), 태산고자(泰山姑子)가 있다.

양주는 태산에서 그리 멀지 않다.

모용준은 그래서 양주로부터 창기들을 조달해왔을 것이다.

제왕성이 자리한 태산에도 태산고자라는 이름의 특별한 창기들이 있다.

하지만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태산고자는 매춘을 하는 도고(道姑)들이다.

아무리 대담한 모용준이라 해도 음란한 도고들을 제왕성으로 불러들일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논다니들까지 끼고 농탕(弄蕩)을 치고 있다 이거지?”

진상파는 치미는 분노와 혐오감에 이를 바득 갈았다.

진상파는 당연히 남편이 될 모용준의 뒷조사를 했다.

그녀가 보고받은 바에 의하면 모용준은 섭씨일족의 피가 조금 흐른다는 이유로 운 좋게 제왕성의 후계자가 된 행운아일 뿐이다.

성격은 독선적이고 욕심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여색을 밝혔다.

그저 출신 배경이 남다르다는 것 외에 장점이라고는 찾기 힘든 사내가 모용준인 것이다.

모용준이 지금까지 얼마나 제멋대로 살아왔는지 진상파는 자세히 알고 있다.

모용준의 악행과 엽색에 관한 보고서의 지면이 백장을 넘길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상파가 모용준과의 혼담을 받아들인 것은 황금성 성주로서의 지위가 나날이 위태로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상파는 모용준이 도덕군자이기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결혼식을 앞둔 작자가 창기들까지 끌어들여 놀아나고 있는 건 도저히 용납이 안된다.

혼례를 앞둔 몸으로 제왕성 내의 계집들을 끼고 놀면 뒷말이 생길 것같으니까 밖에서 창기들을 조달한 듯합니다.”

찰관음은 가시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앞장서! 그 인간이 있는 곳으로...”

진상파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진상파는 거친 걸음으로 문을 향해 걸어갔고 철관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랐다.

행실이 나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감히 나와 한 지붕 아래 있으면서 창녀들을 집에 끌어들여?”

!

진상파는 거칠게 문을 열며 밖으로 나갔다.

문 밖에서 지키고 있던 백팔금차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앞날을 위해서라도 초장에 기선을 제압해놔야만 해!)

진상파는 이를 부득 갈며 영빈관을 떠났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第 六 章

 

                 風雲氷竹島

 

 

빙죽도(氷竹島)!

사해선문의 총단이 있는 절유도(絶有島)와 마주보고 있는 고도(孤島).

희구한 빙죽(氷竹)으로 빽빽이 둘러싸여 있는 신비의 섬이었다.

진시초(辰時初), 수십 척의 거선이 빙죽도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선두(先頭)의 거선___

두 마리의 용()이 서로 뒤엉켜있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선수에는 십여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

맨 중앙에 선 인물은 바로 사해신룡 이었다.

청색무복을 가뿐하게 걸친 그의 전신에는 기개가 넘쳐흘렀다.

그 옆에는 가벼운 옷차림의 능부인이 서 있었고 기검룡과 능소취도 그녀의 옆에 서서 다가오는 빙죽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의 뒤로는 육 명의 장한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사해선문의 내삼당(內三堂), 외삼당(外三堂)의 당주(堂主)들이 그들이었다.

 

외삼당주(外三堂主),

___흑수창객(黑水創客),

___동해쌍교(東海雙蛟),

내삼당주(內三堂主),

___백객(白客) 조인창(曺仁滄),

___신력대도(神力大刀) 탁몽(卓蒙),

___철배수(鐵徘手) 독고인(獨孤仁),

 

이때, 빙죽도로부터 한 척의 소주(小舟)가 쾌속하게 거선을 향해 다가왔다.

소주에는 비천해응 하후염이 피풍을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___ !

하후염이 이십여 장의 거리를 단번에 날아 범섬 위로 올라섰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그는 사해신룡을 바라보며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해신룡 역시 진중한 음성으로 지시했다.

[수고하셨소. 본 문주(門主)는 내삼당의 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들과 섬으로 오를테니 당주께서 거선들을 지휘하여 주시오.]

[명을 받들겠습니다.]

하후염은 즉시 허리를 굽혔다.

곧 그들을 태운 거선은 빙죽도에 닿았다.

철썩... ___ !

파도의 소용돌이를 헤치고 하해신룡을 필두로 기검룡과 능소취, 능부인은 배에서 내려섰다.

뒤이어, 능부인의 시중을 드는 네 시녀가 내렸고 두 척의 거선에서 칠십 이 명의 체격이 우람하고 건장한 괴한들이 따라 내렸다.

칠 십 이명의 거한들은 모두 등에 커다란 감산도(坎山刀)를 메고 있었다.

___칠십이도객(七十二刀客), 이들이 바로 사해선문 최정예들이었다.

사해신룡 일행은 빙죽도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하나의 구릉을 넘어 그다지 넓지않은 계곡에 이르렀다.

계곡의 긑은 칠팔 장 높이의 석벽으로 막혀있었고 그 주위네는 빙죽도 특유의 빙죽(氷竹)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계곡의 입구에 들어서자 사해신룡은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파랑대도진(波浪大刀陣)을 펼쳐라!]

그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칠십이도객들은 신속히 몸을 움직여 하나의 진식(陣式)을 형성했다.

사해신룡은 이번에는 내삼당의 세 당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본문의 전력(全力)은 전격적으로 빙죽도에 총집결되어 있소. 이백여 척의 전선(戰船)이 빙죽도 주변의 해상을 봉쇄하고 있고 이 섬에도 오백여 명의 본문 수하들이 진을 치고있소.]

[...!]

[허나 이번 거사(巨事)가 극비에 붙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기밀이 밖으로 새어나가 오늘이 빙죽도에 적들이 내침할 것으로 추축되오.]

그말에 일순 백객 조인창의 시선이 가늘게 떨림을 아무도 발견치 못했다.

허나, 한쪽 옆에서 한쌍의 서글서글한 눈동자가 뚫어져라 자신을 주시하고 있음을 조인창 또한 알지 못했다.

능부인 바로 그녀였다.

사해신룡은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늘의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본문은 능히 사해구주를 위무할 수 있을 것이오. 허나 오늘의 일이 실패한다면 본분은 멸문의 화를 면치못할 면치못할 것이오.]

사해선문 수하들의 안색은 긴장으로 굳어졌다.

비록 강대문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엇을 두려워 해본 적이 없는 사해선문이었다.

허나 이번 일만은 실로 막중한 것인지라 그들은 초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해신룡은 나머지 고수들을 바라보며 엄숙하게 말했다.

[여러 형제들은 삼당주의 지휘를 받고 자기의 위치를 고수하여 주시오!]

그는 말을 마치고 문득 기검룡을 바라보았다.

[용아는 이곳에서 취아와 숙모를 지켜다오.]

기검룡은 염려말라는 듯 주먹을 쥐어보였다.

[걱정마십시오. 취아와 숙모님은 용아가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어요.]

[하하... 그래 용아만 믿겠다.]

사해신룡은 껄걸 웃으며 기검룡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어 그는 계곡 밑의 석벽으로 다가가 족히 천 근(千斤)은 됨직한 거석(巨石)을 두 팔로 껴안았다.

[으협___!]

힘찬 기합성과 함께 그는 거석을 번적 들어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하나의 석동이 입을 쩍 벌리며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순간,

[...! 저런 곳에 동굴이 있었다니...!]

중인들은 두눈을 크게 뜨며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석동 안으로부터 극심한 한기가 뻗어나와 그들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허나 사해신룡은 흔들림없는 표정으로 능부인을 돌아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 들어갔다 오리다.]

[...]

능부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짙은 염려의 기색이 가득했다.

사해신룡은 등을 돌려 성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

[...]

그가 동굴 안으로 사라지자 사위는 갑자기 깊은 적막에 빠졌다.

근 육백여 명의 인물들이 모여있었으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그들의 전신을 압박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___ !

일진 표향이 일었다.

중인들은 흠칫 하며 고개를 돌렸다.

섬의 서쪽에서 급격히 연기가 치솟아 올랐다.

순간 기검룡은 벌떡 일어섰다.

[여기들 계십시오!]

그는 중인들에게 외친 후 가볍게 몸을 날렸다.

___!

그는 약 십여 장 높이의 빙죽긑에 올라섰다.

그러자 섬 주위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사해선문의 크고 작은 이백여 척의 전선들이 빙죽도를 몰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급격히 서쪽방향에서 백여 척의 대선단이 나타나 빙죽도를 향해 전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두눈을 번쩍 빛내며 소리쳤다.

[서쪽에 대서단이 나타났어요! 아마 해룡방(海龍幫)에서 몰려오는 것 같습니다!]

그말에 중인들은 바짝 긴장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주역전선들이 점차 서쪽 해상으로 집결하는 것이 보였다.

기검룡은 빙죽 위에 선채 다시 상황을 알렸다.

[동북쪽에서도 몇 척의 배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남쪽에서 역시 두 척의 선박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고 있어요.]

그말에 삼당주 중 한 명인 탁몽이 나직 이침음했다.

[, 본문의 수하들에게도 극비로 붙여졌던 일인데 강호로 유출되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순간, 백객 조인창의 두눈에 당황함이 스쳤다.

허나 곧 그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이때, 해룡방의 전선들이 무서운 속도로 진젹하여 사해선문의 전선들과 충돌했다.

___ 우지끈___

[___!]

[죽여라___!]

폭음과 굉음, 바다가 떠나갈 듯한 함성이 터져 올랐다.

이어, 무수한 화전(火箭)이 날았다.

삽시에 몇 척의 전선이 불길에 휩싸였다.

기검룡은 숨을 조이고 사태를 관망했다.

허나, 사해선문의 선진(船陣)이 서서히 무너지고 해룡방의 전선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선진(船陣)이 너무 쉽게 무너지는군.]

기검룡은 검미를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허나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두눈을 크게 떴다.

사방으로 무질서하게 흩어졌던 사해선문의 전선들이 순식간에 하나의 거대한 환()을 만들어 해룡방의 전선들을 포위하는 것이 아닌가?

[! 정말 멋진 유인술이다!]

기검룡은 감탄의 탄성을 터뜨렸다.

이때, 사해선문의 전선사이로 몇십 척의 작은 갑선(甲船)들이 나타났다.

갑선들은 쏜살같이 해룡방의 전선들을 향해 부딪쳐 갔다.

순간, ___ 콰르릉___

엄청난 폭음과 함께 해룡방의 전선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상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파산했다.

허나, 그 중에서도 선단의 삼층 누각이 세워진 한 척의 거선은 십여 채 거선의 호위를 받으며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왔다.

그러자, 사해선문의 선진에 선 수십 척의 전선이 이를 추격했다.

___ ! ___

또다시 가공할 폭음이 터져 나왔다.

삼층누각의 거선을 호위하던 십여 척의 전선들이 갑선에 의해 파산한 것이다.

허나 삼층누각의 거선은 또 다른 전선들의 추격을 저지하는 사이에 빙죽도를 향해 바짝 접근했다.

이때, 사해선문의 저선 중 한 척의 전선이 굉장한 속도로 거선을 육박해 들어갔다.

그곳에는 바로 비천해응 하후염이 타고 있었다.

___ !

그는 순식간에 선수를 박차고 거선의 뱃전으로 날아 올랐다.

[해룡왕(海龍王)! 나서라!]

하후염이 맹렬한 기세로 소리치자 십여 명의 인물들이 그를 막아섰다.

허나,

[___ ___ !]

[___ !]

그들은 한꺼번에 피보라를 뿌리며 나가 떨어졌다.

이때,

[비천해응! 멈춰라!]

삼층 누각으로부터 두 명의 적포노인들이 날아와 비천해응의 공격을 막아갔다.

___ ___!

장력이 무섭게 격동하는 순간, 비천해응 하후염은 비천응신술을 펼쳐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동시에 그는 벼락같이 쌍장을 후려쳤다.

[___ ___ !]

[___ !]

두 명의 적포노인은 처절한 단말마를 내지르며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허나, 바로 그때, 다시 한 명의 금포중년인이 하후영의 말을 가로 막았다.

금포인의 공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의 장()은 마치 천근 바위가 짓눌려 오는 듯 무서운 맙력을 내포했다.

___

정면으로 금포인의 장력을 받아친 하후염은 일순 신형을 휘청하여 해면으로 떨어졌다.

[!]

하후염은 일순 다급성을 발했다.

이때,

[조심하십시오!]

한소리 외침과 함께 전선에서 달려온 흑수창객이 떨어지는 하후염의 발밑으로 판자를 날려 보냈다.

[타앗!]

하후염은 판자를 딛고 흑수창객의 전신으로 신속히 날아 올랐다.

허나 그 사이 행룡방의 거선은 이미 빙죽도에 닿았다.

[상륙하라___]

금포인의 우렁찬 외침에 이어 백여 명의 해룡방 수하들이 속속 빙죽도로 뛰어 내렸다.

이때, 문득 남쪽으로 고개를 돌린 기검룡은 흠칫 했다.

예의 두 채의 거선이 사해선문 전선들의 제지를 뚫고 거의 빙죽도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검룡은 빙죽에서 가볍게 아래로 뛰어 내리며 중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준비 하십시오. 선진(船陣)이 뚫려 적도들이 빙죽도에 상륙했어요.]

중인들은 바짝 긴장하여 병기를 움켜 쥐었다.

그 순간,

[__ __ !]

[__ __ !]

___! ___ !

남쪽과 서쪽, 그리고 동북쪽에 상륙한 적들이 사해선문과 무섭게 충돌했다.

비명! 비명! 비명!

온통 어지러운 폭음과 비명이 바다를 집어삼킬 듯 뒤 흔들었다.

급기야 남쪽의 거선은 사해선문의 포위망을 뚫고 순식간에 계곡쪽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한 식경이 채 미치지 못해 이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장내로 날아내렸다.

___ ___ !

선두에 선 인물은 삼십(三十)전후의 냉오한 인상의 중년검수였다.

그의 뒤로 안광이 형형한 흑의검수 이십여 명이 도열해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백객 조인창이 안면을 찌푸리며 앞으로 나섰다.

[귀하는 어느 방문의 고수들이오?]

중년검수는 냉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당당히 말했다.

[본인은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 휘하의 흑석도주(黑石島主) 사공망이오. 빙죽도를 접수하러 왔소!]

그의 안하무인격인 말에 중인들은 안색이 변했다.

 

남해문(南海門)___

이는 남해(南海)의 십팔 개 섬이 연합한 문파였다.

그들은 중원에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막강하여 중원을 제패하고도 남을 정도라 했다.

남해문의 문주(門主)는 남해제일도(南海第一島)라 불리는 잠룡도(潛龍島)였다.

중원인은 이들의 동태를 모르고 있었으나 사해선문이나 해룡방 등에서는 항상 이들을 경원해 왔다.

헌데, 지금 남해십팔도 중 제 십칠도인 흑석도(黑石島)의 고수들이 출현한 것이었다.

 

성격이 불같이 급한 탁몽이 중년검수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빙죽도는 본문이 오랫동안 소유해온 영지요. 허튼소리 집어 치우시오.]

허나, 중년문사는 음침하게 웃었다.

[흐흐... 그대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곱게 말할 때 물러가라!]

탁몽은 분노한 두눈을 부릅떴다.

[무엇이라고? 이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받아랏!]

그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벼락 같이 감산대도를 휘둘렀다.

___ ___ !

산악같은 도기가 무섭게 허공을 덮었다.

[!]

사공망은 허나 코웃음치며 장검을 번쩍 치켜 들었다.

[어림없다!]

탁몽은 자신있다는 듯 장검을 마주쳐 갔다.

허나,

[흐흡!]

그는 다급한 신음을 터뜨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 사공망은 쾌속한 일검을 그어냈다.

___ !

[___ !]

탁몽은 황급히 물러섰으나 어느새 왼팔이 어깨에서부터 잘려나가고 말았다.

이때 보고있던 백객 조인창과 철배수가 동시에 사공망을 향해 출수했다.

허나 사공망은 여유있는 웃음을 흘리며 기이한 검식을 펼쳤다.

[___ !]

미처 생각지못한 각도에서 밀려오는 검기에 백객과 철배수는 가볍지 않은 검상을 입었다.

헌데 이때,

[__ __ __ ___!]

동북쪽에서 돌연 웅후한 장소성이 울려퍼졌다.

그러자 사공망은 다급히 검세를 증폭시키며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요지(要地)를 점령하랏!]

순간 흑의검수들은 일제히 칠십이도객을 덮쳤다.

허나 그와 동시에 탁몽이 감산도를 높이 치켜들며 칠십이도객을 향해 명했다.

[발진(發陣)!]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칠십이도객은 일제히 신형을 움직여 덮쳐드는 흑의검수들에 맞섰다.

___ ___ !

___ 차차창___!

그들이 펼쳐낸 도막(刀幕)에 발진되어 흑의검수들은 속속 퉁겨나갔다.

___파랑대도진,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흑의검수들은 신랄한 검식으로 어지러이 움직였다.

허나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관전하던 사고망은 두눈을 부릅뜨며 거칠게 소리쳤다.

[바보같은 놈들! 그까짓 도진(刀陣) 하나 파해하지 못하다니!]

이어 그는 시녕을 번뜩 하는 순간 칠십이도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백객과 철배수가 급히 그의 공세를 차단했다.

허나,

[크윽!]

[으음...]

그들은 가슴에 치명적인 일검을 맞고 쓰러졌다.

사공망은 휙!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어 그의 신형은 칠십이도객의 머리 위로 내리 꽂히는 것이 아닌가?

[___ !]

[__ ___ !]

여덟 명의 도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진 것은 그야말로 섬전일순 이었다.

그들로 인해 도진이 멈칫 하자 흑의검수들이 급격히 도진에 충돌했다.

___ 차창___!

허나 칠십이도객들은 황급히 전열을 가다듬어 그들을 밀어냈다.

이때 사공망이 지면으로 날아내리며 외쳤다.

[흑살합벽검(黑煞合碧劍)을 펼쳐라!]

순간 흑석도의 검수들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___ ___! ___ !

그 기세는 실로 가공할 정도였다.

콰르릉___!

검세가 파랑대도진과 맞닥뜨리자 엄청난 폭음이 터졌다.

[___ !]

[__ __ __ !]

[___ !]

십여 명의 도객들이 처절한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이 광경에 탁몽은 핏발 선 눈으로 절규하듯 외쳤다.

[뚫리면 안된다. 막아랏!]

그는 외팔로 도()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도진을 이끌었다.

허나, ___! ___ !

[___ ___ !]

[___ !]

도객들은 잇달아 흑살합벽검에 부딪쳐 죽어갔다.

이때였다.

[도진(刀陣)을 푸시오! 희생만 늘 뿐이오!]

부다못한 기검룡이 소리쳤다.

순간 탁몽은 멈칫 했다.

허나 곧 그는 남은 도객들을 지휘하여 천해비동의 입구를 막아섰다.

기검룡은 어느새 여섯 자 길이의 빙죽을 깨어들고 번득 신형을 날려 사공망의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더 이상 다가오면 용서치 않겠소!]

[흐흐... 애송아 비켜랏!]

사공망은 기검룡을 얕잡아보고 육성의 공력으로 가볍게 장력을 밀어냈다.

허나 기검룡은 슬쩍 신형을 피하며 위품있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경고했소!]

이어 그는 들고있는 빙죽을 급속히 휘둘렀다.

___ ___!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빙죽은 무서운 기세로 사공망을 짓쳐들었다.

사공망은 흠칫 하며 몸을 피했다.

허나, 파파팍___!

[으윽!]

빙죽의 기세가 너무도 급격해 그는 미처 몸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가슴에서 선명한 핏줄기가 푹 솟구쳐 올랐다.

[... 이놈의 꼬마가...!]

그는 급히 지혈을 하고 다시 전력을 다해 일장을 후려쳤다.

허나 기검룡의 공격은 그보다 한수 빨랐다.

[벽력진천___!]

___!

두 사람의 장력이 맞닥뜨리자 가공할 폭음이 들썩 사위를 흔들었다.

[... 이럴 수가...!]

사공망은 크게 한 걸음을 밀려나 창백한 안색으로 경악성을 발했다.

기검룡 그는 상체를 약간 휘청했을 뿐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랍다. 애송이 놈이 백년공력을 지닌 나를 능가하다니...!]

사공망의 안면은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허나 곧 그는 입술을 불끈 깨물며 양손으로 장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실로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그의 보검에서 마치 흑무(黑霧)를 연상케하는 시커먼 검기(劍氣)가 쏟아져 나와 사위를 휘감는 것이 아닌가?

기검룡은 이 돌연한 광경에 바짝 긴장했다.

그는 빙죽을 버리고 양손에 천강신공을 끌어모았다.

헌데 이때, 휘익! ___!

장내에 한 명의 인영이 바람처럼 날아버렸다.

순간 백객 조인창의 안색이 홱 변했다.

[... 태산일수(太山一叟)!]

그는 경악의 음성으로 부르짖었다.

 

___태산일수, 그는 십년 전 낙혼애의 일전에서 천강마존에게 죽은 백팔무인의 일인(一人) 태산일괴(太山一怪)의 제자였다.

그의 사부는 죽었으나 그는 오히려 태산일괴보다 자질이 뛰어난 절정고수였다.

태산일수는 장내에 대치한 기검룡과 중년검수를 바라보았다.

기검룡에게 시선이 닿은 순간 그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 저런 기재가 있었다니... 어린나이에도 저 흑의검수의 기세를 오히려 능가하는구나.)

그는 내심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때,

[흑무절살(黑霧絶煞)!]

사공망은 대갈을 터뜨리며 치켜들었던 검을 휘둘렀다.

___ !

그의 전신을 짙게 감쌌던 흑빛검기가 해일처럼 기검룡에게 밀어닥쳤다.

허나 기검룡 또한 지지않고 번득 우수를 휘둘렀다.

[참마절(斬魔絶)!]

순간, 츠츠츠츠츳___! ___!

검은빛의 검기가 새파란 광채를 띄운 천강신공에 의해 물결갈라지듯 쫙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크흑!]

[...!]

동시에 답답한 신음이 잇따라 터졌다.

! 헌데 보라!

사공망은 칠팔 보나 뒤로 물러서 울컥 선혈을 토해내고 있었다.

허나 기검룡은 서너 군데 검상을 입었지만 그 자리에 태산처럼 우뚝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아닌가?

[...!]

관전하던 중인들은 모두 경악의 탄성을 발했다.

이때, 털썩___!

사공망은 마침내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위로 재빨리 흑의검수들이 검진을 펼쳐 호법을 섰다.

그때였다.

[용오빠___!]

능소취가 울먹이는 음성으로 기검룡을 향해 달려들었다.

기검룡은 선혈이 배인 상처에 지혈을 시키며 그녀를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검에 약간 베었을 뿐이니까.]

보고있던 능부인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문득 기검룡의 곁으로 다가서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상처를 좀 보자꾸나.]

허나 기검룡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여유가 없어요. 강적들이 주위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___ !

한 명의 적포괴인이 번득 장내로 날아내렸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8

 

                 달마와 천마의 비사

 

 

 

십칠 년 전의 일이었다.

소림사의 제자임에도 무공수련보다는 금석학(金石學)과 고전(古典)에 관심이 더 많았던 고불선사는 천하를 떠돌며 전대의 고승들이 남긴 유적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날도 고불선사는 천태산(天台山)에 남아있는 육조(六祖;선종의 육대 종사 혜능)의 유적을 연구하러 가던 길이었다.

비가 제법 거세게 쏟아지는 굳은 날씨였다.

하지만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육조의 귀한 유적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고불선사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아아악!”

헌데 빗속을 뚫고 발길을 재촉하던 고불선사의 귀에 다급한 여자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불제자로서 위급한 처지의 중생을 못 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달려가 보니 산적들이 산속의 무덤가에서 젊은 여인을 겁탈하려는 중이었다.

고불선사는 산적들을 혼내 쫓아 보내고 여인을 구했다.

전삼낭(全三娘)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사냥꾼의 아내였다고 했다.

하지만 사냥꾼이었던 남편은 사냥 도중에 변을 당해 죽었고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를 근처 산채의 산적들이 눈독을 들였던 것이다.

겁탈당할 뻔 했던 충격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차가운 가을비를 맞은 탓인지 전삼낭의 몸은 펄펄 끓고 있었다.

불제자로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댈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불선사는 전삼낭을 안고 그녀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전삼낭을 보살피던 중 고불선사는 그만 파계를 하고 말았다.

무엇에 홀린 듯 전삼낭을 범하고 만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고불참회기를 읽으며 강유의 머릿속에서는 의혹이 구름같이 일어났다.

(고불선사쯤 되는 고승이 그저 여자와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욕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혹시 그 여자가 함정을 파서 고불선사를 유혹한 것이 아닐까?)

강유는 가슴 속에서 불길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꿈같은 하루 밤낮이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고불선사는 비로소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깨닫고 절망했다.

금색계를 지켜야하는 불제자로서, 그것도 손녀뻘인 젊은 여인을 간음하는 크나큰 죄를 지은 것이다.

고불선사는 회한과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전삼낭의 필사적인 애원에 고불선사는 자결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전삼낭은 부처님이 정말 계신다면 고불선사가 자신을 범한 것에도 우매한 인간들은 알 수 없는 섭리가 있을 것이라며 설득했던 것이다.

그렇게 전삼낭으로부터는 용서받았지만 고불선사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유품이었던 노리개를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고 떠나며 언제든 소림사로 찾아와 죄의 대가를 받아가라는 말을 남겼다.

강유가 고불암에서 가져온 노리개는 예상과 달리 원래부터 고불선사의 것이었다.

 

전삼낭과 헤어져 소림사로 돌아온 고불선사는 토굴(土窟)에 스스로를 가두고 참회의 나날을 보냈다.

헌데 일 년여의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한통의 밀봉된 편지가 고불선사가 참회하고 있던 토굴에 은밀히 전해졌다.

봉투 안에는 고불선사가 전삼낭에게 증표로 주었던 노리개와 함께 편지가 한 장 들어있었다. 자기를 보러 와달라는 전삼낭의 편지였다.

고불선사는 토굴을 나와 한달음에 전삼낭을 인연을 맺은 곳으로 달려갔고... 그곳에는 전삼낭이 갓난아기를 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일 년 전에 있었던 단 하룻밤의 인연으로 전삼낭은 고불선사의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불선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삼낭과 아기뿐만이 아니었다.

흉측한 귀신 가면을 쓴 자가 아기의 목에 칼을 댄 채 웃고 있었던 것이다.

고불선사는 비로소 일의 전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고불선사가 전삼낭을 만난 것도, 그녀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 것도 모두 마교의 당대 교주인 귀면지존이 꾸민 짓이었던 것이다.

 

(마교의 당대 교주 귀면지존!)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교는 자타가 공인하는 마도 무림의 종가다.

동진(東晋) 시대에 결성 된 비밀결사 백련사(白蓮社)는 서역의 배화교(拜火敎)와 천축의 미륵(彌勒)사상을 받아들여 마침내 마교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마교는 오십 여 년 전 제왕성에 의해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버렸다.

(제왕성에 의해 뿌리가 뽑혔다고 알려진 마교가 아직까지 명맥을 유지하며 암약하고 있었단 말인가? 헌데 마교의 교주 귀면지존은 무슨 목적으로 고불선사님을 파계시키는 함정을 판 것일까?)

강유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고불참회기를 읽었다.

 

전삼낭 모녀를 인질로 잡은 귀면지존은 몇 장의 종이를 고불선사에게 건네주며 해독(解讀)할 것을 요구했다.

그 종이들은 원통형의 물체 표면에 새겨져 있는 문양의 탁본(拓本)이었다.

노납은 탁본의 문양들이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古代)의 범어(梵語)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 귀면지존은 그 고대 범어를 해독하기 위해 옛날 문자에 박학(博學)한 고불선사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비록 음모에 빠져서 관계를 맺은 결과이긴 하지만 고불선사는 전삼낭이 낳은 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귀면지존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다만 탁본에 새겨진 범어는 아주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것인 탓에 고불선사로서도 해독에 시간이 걸렸다.

그 사실을 말하자 귀면지존은 고불선사는 증표로 노리개를 요구했고 그것을 가져오는 자에게 탁본의 해독본(解讀本)을 건네주라고 했다.

 

(그러니까 이 노리개가 고불선사께서 귀면지존에게 건네준 증표라는 건데...)

강유는 탁자에 내려놓은 노리개를 만져보며 검미를 모았다.

(이게 어떻게 아버지의 수중에 들어간 것일까? 또 아버지는 어떤 경로로 고불선사께서 탁본을 해독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걸까?)

풀릴 길 없은 의혹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설마!)

어느 순간 강유의 눈이 부릅뗘졌다.

(아버지도 귀면지존에게 협박을 당하고 계신 게 아닐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를 대신 보내 탁본의 해독본을 받아오라고 하셨고?)

강유의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다. 어쩌면 아버지와 어머니도 귀면지존의 마수에 빠져있는 상태일지 모른다.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서 확인해야만 한다.)

강유는 뜨거운 가마솥에 빠진 개미가 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귀면지존이 고불선사님을 함정에 빠트려가면서까지 해독하라고 강요한 탁본의 내용은 무엇일까?)

강유는 타들어가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 고불참회기를 집어들었다.

(전삼낭으로 하여금 고불선사님을 유혹하여 아이를 낳게 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친 걸 보면 결코 평범한 내용은 아닐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강유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 맙소사!)

강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고불참회기를 넘겼다.

 

<노납은 십여 년에 걸친 연구 끝에 마침내 탁본의 내용을 해독할 수가 있었는 바, 그 내용과 실체는 실로 놀라웠다. 귀면지존이 노납에게 맡긴 탁본은 바로 달마묵장에서 뜬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불참회기의 내용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나 다 아는 달마대사의 고사를 굳이 수기에 적어놓으신 이유가 있었구나.”

강유는 고불참회기가 달마대사의 고사로 시작된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견문이 일천한 강유는 모르고 있었지만 달마묵장은 무림에 전해지는 가장 귀한 보물들인 무림칠보(武林七寶)의 으뜸이다.

달마대사가 달마묵장에 숨겨둔 비밀스러운 힘을 얻으면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고불선사에게 일어났던 일련의 음모는 바로 그 달마묵장으로 인해 벌어졌던 것이다.

(달마묵장이 마교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무림은 다시 한 번 마교의 지배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강유는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한기는 느끼며 고불참회기를 읽어 내려갔다.

 

고불선사는 십년이 넘는 시간을 소모한 끝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다.

탁본에는 두 가지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었다.

첫 번째 비결은 삼백육십오 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墨掌眞言)이라는 것이었다.

그리 많지 않은 글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에는 그러나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었다.

문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정수 중의 정수가 묵장진언인 것이다.

묵장진언을 이루고 있는 삼백육십오 개의 문자들을 어떻게 조합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무공과 술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 묵장진언에서 어떤 힘을 얻는가는 전적으로 개인의 소질과 기연에 달린 것이다.

달마가 달마묵장에 남긴 두 번째 비결은 아주 짧은 것이었다.

하지만 불과 열두 자로 이루어진 그 비결에는 묵장진언에 못지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쌍혜합벽(雙鞋合壁), 묵장전지(墨掌展指), 천마심현(天魔心現)>

 

이것이 달마묵장에 숨겨져 있던 두 번째 비결이다.

그 뜻을 풀이하면 이렇다.

 

한 쌍의 신발이 합쳐지면(雙鞋合壁)

검은 손바닥이 손가락을 펼 것이며(墨掌展指)

천마의 심장이 나타날 것이다(天魔心現)

 

한 쌍의 신발이라면 달마가 세상에 남겼다는 가죽신, 달마혜(達磨鞋)일 것이다.

달마는 가죽신 중 한 짝은 자신의 관 속에 남겼고 다른 한 짝은 지팡이에 매단 채 서쪽으로 가져갔었다.

달마가 한 쌍의 신발을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놓은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두 번째 비결에 포함되어 있는 천마의 심장, 천마심(天魔心)이란 것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무림칠보의 서열이위(序列二位)이기도 한 천마심은 마교의 중흥조(中興祖)인 천마조종(天魔祖宗)의 심장, 정확히는 그의 내단(內丹)이다.

 

보통 천마(天魔)라 불리는 천마조종은 고금제일인을 거론할 때 반드시 포함되는 고금제일마(古今第一魔).

마교의 제칠대 교주였던 천마의 무공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마교는 오십여 년전까지만 해도 제왕성과 패권을 다퉜던 막강한 세력이다.

하지만 마교에 전해지는 것은 천마의 진정한 능력의 일할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천마에게 불운했던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달마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의 나이가 달마보다 일갑자(一甲子;60)쯤 많기는 했지만 두 절대고수의 생애는 상당 기간 겹쳐져 있었다.

마도와 정파를 대표하는 그들 간의 격돌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천마의 패배였다.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천마는 달마와의 결투에서 지고 말았다.

이에 분을 참지 못한 천마는 스스로의 몸을 태워버렸으며 그의 모든 힘과 저주가 천마심으로 남았다고 한다.

무림에는 천마심을 얻는다면 제이(第二)의 천마가 된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달마묵장은 달마의 비밀스러운 힘이 숨겨져 있는 보물일 뿐 아니라 천마의 저주, 천마심을 봉인하고 있는 법기(法器)인 것이다.

달마묵장은 무엇으로도 훼손이 불가능하다.

그 달마묵장이 손가락을 펴서 천마심을 드러내는 것은 단 한 가지 경우뿐이다.

바로 달마의 가죽신, 달마혜가 다시 합쳐지는 게 그것이다.

 

고불선사는 십여 년 만에 달마묵장의 탁본을 해독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그 후 오 년 동안 삼백육십오자로 이루어진 묵장진언을 연구했다.

물론 귀면지존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였다.

유감스럽게도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에서 어떤 무공비결도 얻지 못했다.

아마도 그의 자질과 지식이 무공과는 인연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고불선사는 묵장진언을 오 년 간 연구한 결과 무공 대신 한 가지 특별한 능력을 만들어냈다.

 

-달마독명안(達磨讀命眼)

 

바로 이것이다.

달마독명안은 일종의 관법(灌法;진리를 살피는 법)이다.

이것을 온전히 수련해 내면 진짜와 가짜를 정확히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흘러간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은 미래까지 엿볼 수 있게 된다.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달마독명안에 대한 설명을 읽은 강유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달마독명안은 어떤 무공보다도 오히려 더 무서운 신통력일 것이다. 불문에서 말하는 육신통(六神通)과 흡사한...)

육신통은 인간이 수행으로 얻을 수 있는 궁극의 여섯 가지 능력을 말한다.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신족통(神足通)!

모든 것을 궤뚫어 볼 수 있는 천안통(天眼通)!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천이통(天耳通)!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

나와 남의 운명을 알 수 있는 숙명통(宿命通)!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는 누진통(漏盡通)!

 

달마독명안은 바로 이 육신통과 여러모로 통하는 능력이다.

(묵장진언을 불과 오 년 간 연구하여 육신통에 버금가는 달마독명안을 만들어내신 걸 보면 고불선사님도 결코 평범한 분은 아니셨다.)

강유는 새삼 고불선사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뒤에 적어놓은 묵장진언과 달마독명안이 악인의 손에 들어갈 경우 그 폐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런 즉 두 가지 비결을 외워 기억한 후 반드시 고불참회기를 태워 없애야할 것이다.>

 

고불참회기는 고불선사가 남긴 당부로 마무리 지어졌다.

 

<염치없지만 시주에게 소원이 한 가지 있다. 만약 인연이 닿는다면 전삼낭과 그녀의 딸을 귀면지존의 마수에서 구해주었으면 한다. 그리하면 그 은혜를 삼생(三生)에 걸쳐서라도 갚을 것이다.>

 

(스님의 근심하신 바를 기억해두겠습니다. 부디 극락왕생하십시오.)

강유는 고불참회기와 노리개를 향해 합장을 했다.

그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전삼낭 모녀를 찾아내어 보살펴주어야겠다 결심을 하고 있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7

 

             이름이 새겨지다.

 

 

안개의 벽속에는 여전히 사람도 짐승도 아닌 기괴한 형상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그것들이 진법에 의해 만들어진 환각일 거라고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들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해서 식은땀이 흐르는 임청우였다.

기괴한 형상들은 자신들 사이를 지나가는 임청우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임청우는 의식적으로 그것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바닥에 찍혀있는 광점만 보고 걸어갔다.

그렇게 안개의 벽을 절반 쯤 지났을 때였다.

“...!”

임청우는 오싹 소름이 끼쳐 걸음을 멈췄다.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든 때문이다.

기괴한 형상들의 모호한 시선이 아니다.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같이 강렬한 시선이 어디선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 뭐지?)

임청우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 시선이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수많은 기괴한 형상들 속에 어떤 인물이 뒷짐을 지고 서서 임청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얼굴은 모호해서 알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그 옷!

건장한 몸에 걸쳐진 화려한 비단옷은 무채색인 기괴한 형상들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길처럼 강렬하게 부각된다.

(비단 옷을 입은 누군가가 진법 속에 있다.)

임청우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한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그 인물을 자세히 보려고 했다.

부르르!

바로 그때 허리춤에서 경련이 느껴졌다.

호리병이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뱀 중의 왕인 이놈이 잠에서 깨어나 두려움에 떨고 있다.)

임청우는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잠에서 깨어나 떨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영물이라 보지 않고도 느꼈다는 건가? 그렇다면 진법이 만들어낸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는 건데...)

호리병에 잠깐 시선을 돌렸던 임청우는 다시 안개 속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없었다.

기괴한 형상의 존재들만이 배회하고 있을 뿐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인물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임청우는 자신이 혹시 헛것을 보고 착각한 게 아닌가 속으로 반문해보았다.

(나 혼자 잘못 본 것이라면 영통한 이놈까지 두려움에 떨 리가 없다.)

호리병 속의 금관혈린사가 아직도 떨고 있는 것을 확인한 임청우는 자신이 결코 착각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그 인물이 누군지 궁금했지만 확인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임청우는 겁에 질려 안개의 벽 밖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누군가가 뒷덜미를 홱 낚아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

 

훼손된 북두무랑으로 들어서는 인물이 있었다.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사내다.

임청우가 안개의 벽 속에서 보았던 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

북두무랑으로 들어선 인물은 입구 바로 안쪽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참하게 훼손된 북두무랑의 참상이 그 인물 앞에 펼쳐져 있었다.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임청우조차 분노했던 만행을 보면서도 그 인물의 표정에는 별 다른 변화가 없었다.

잠시 서있던 그 인물은 다시 걸음을 옮겨 북두무랑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파사사사!

그 인물이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훼손되었던 북두무랑의 양쪽 벽이 매끈하게 갈리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매끈해진 벽면에는 수많은 글들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 글들은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던 무학비결들이었다.

북두무랑은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 인물은 천상열차분야도가 새겨진 흑옥의 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칠흑같이 검고 깊은 벽 속에서 북두칠성은 흐릿하게 빛나고 있고 북극성 자리에는 북두홀이 끼워져 있다.

달칵!

그 인물이 손을 대자 북두홀은 간단하게 흑옥의 벽에서 분리되었다.

“...”

벽에서 떼어낸 북두홀을 어루만지는 그 인물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희미한 한숨이 일자로 굳게 닫혀있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이다.

 

그 인물은 오른쪽의 월동문으로 나왔다.

북두무랑을 나온 그 인물은 월동문 옆에 새겨져 있는 서명을 확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 인물은 벽면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파파팟!

그러자 불꽃과 돌가루가 튀며 새로운 이름이 서명에 추가되었다.

서명의 맨 아랫줄에 새겨진 이름은 <林靑牛>였다.

 

***

 

농산 깊은 곳에 자리한 천류폭포(天流瀑布)는 높이가 오십 장이 넘는다.

높을 뿐 아니라 수량도 엄청난 폭포다. 혹시 세상이 너무 좁아서 천류폭포가 쏟아내는 물로 인해 잠겨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자아내게 할 정도다.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솟아있는 두개의 봉우리 사이로 흘러내린 폭포수는 호수처럼 넓게 퍼졌다가 다시 급해지고 가늘어지면서 황하(黃河)로 흘러간다.

물이 퍼지면서 만들어진 호수에는 작은 바위섬들이 징검다리처럼 줄을 서서 왼쪽 봉우리로 이어진다.

그 왼쪽 봉우리 아래쪽에는 진짜 말의 귀인 것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면 말의 귓구멍 같은 부분은 아래위로 좁게 갈라진 틈새다.

폭은 좁고 높이는 높은 그 틈새 안쪽에는 한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나오는 계곡이 숨겨져 있다.

 

별들 사이로 반달이 얼굴을 내밀고 물위에는 별들이 아가들의 눈동자처럼 깜빡이며 빛을 발한다.

어둠이 농산에 무게를 주어 만물을 침묵하게 했다.

오직 특권을 허락받은 풀벌레들의 울음소리만이 이따금 밤의 적막을 깰 뿐이다.

첨벙! 첨벙!

문득 물소리가 들리며 키가 껑충하게 큰 괴물이 폭포 아래쪽의 호수에 나타났다.

반달을 등지고 나타난 괴물의 다리는 두 개뿐인데 아주 가늘면서 길이는 무려 이장(二丈;6미터)이 넘는다.

괴물의 몸뚱이는 그 긴 다리의 사분의 일 정도에 불과하다.

다리에 비해 기형적으로 작은 몸뚱이의 허리 어림에는 대가리인 듯한 것이 매달려 앞뒤로 흔들거리고 있다.

첨벙! 첨벙!

괴물은 기다란 다리로 한 번에 일장 넘게 움직여 호수를 가로질렀다.

징검다리처럼 깔려있는 바위섬들을 지난 괴물은 왼쪽 봉우리 가운데에 자리한 계곡 입구로 다가갔다.

말의 귓구멍인 듯 움푹 들어간 계곡 입구는 수면에서 일장 남짓 위쪽에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 이른 괴물의 몸뚱이가 마치 줄을 타는 거미처럼 다리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윽고 계곡 입구에 내려선 그것은 괴물도 뭐도 아닌, 망태를 짊어진 소년이었다.

바로 해질 무렵 표운봉 아래의 계곡을 떠난 임청우였다.

임청우는 길이가 이장이 넘는 대나무로 만든 죽마(竹馬)를 사용하여 호수를 건너온 것이다.

두개의 대나무 죽마를 암벽에 기대어 놓은 임청우는 계곡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다.

휘이잉!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틈새를 통해 끊임없이 찬바람이 불어나온다.

이곳은 농산의 다른 곳과 달리 한여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서늘하다.

 

바위 사이의 좁고 긴 틈새가 끝나는 곳에는 한 채의 모옥(茅屋)이 서있다.

모옥 앞에는 기화요초가 만발한 초지가 있고, 모옥 옆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절벽이다.

모옥은 절벽 위의 암반에 위태롭게 세워져 있는 것이다.

어머니! 저 돌아왔습니다.”

모옥 바로 앞에 서있는 늙은 팥배나무를 지나며 임청우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 꺼진 모옥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혹시!)

임청우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이 깊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어머니!”

덜컹!

임청우는 급히 모옥의 문을 열었다.

쉬잇!

헌데 문이 왈칵 열린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모옥 안에서 새하얀 손이 나타나 임청우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짜악!

반사적으로 물러나려 했지만 임청우의 오른쪽 뺨에서 요란한 소리가 터졌다.

!”

콰당탕!

임청우는 시리도록 새하얀 손에 얻어맞은 뺨을 감싸며 마당에 나뒹굴었다.

무고하셨군요.”

하지만 임청우는 벌겋게 부풀어 오른 볼을 문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응당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어야 할 임청우의 얼굴에는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어머니에게 별일 없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몇 시냐?”

모옥 안쪽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여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삼경(三更;11~새벽 1)에 막 접어든 것 같습니다.”

임청우는 밤하늘의 별 자리를 살피며 대답했다.

북쪽 하늘에 비스듬히 누워있던 국자가 왼쪽으로 많이 일어서 있다.

갑자기 피핏!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옥 안이 환하게 밝아졌다.

병색이 완연하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게 보이는 여인이 탁자 옆에 서서 기름등잔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임청우의 어머니 임단심이다.

반 시진(한 시간)만 지나면 오늘도 끝이다.”

기름등잔의 심지에 불을 붙인 임단심이 공기가 얼어붙을 듯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침에 경고한 대로 오늘 안에 여기를 떠나라. 일각이라도 시간을 지체한다면... 내손으로 네놈을 죽여 버릴 것이다.”

임청우를 돌아보는 임단심의 눈이 새파란 빛을 흘린다.

어머니는 온통 저를 죽일 생각뿐이시군요.”

임청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노상 당해온 냉대지만 들을 때마다 가슴이 쓰리다.

어쨌든 자정이 되기 전에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자식을 죽이려 하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네 놈 같지 않기 때문이다.”

임단심은 표정을 굳히며 문을 닫으려 했다.

임청우는 그런 그녀에게 한마디 더 던졌다.

그럼 세상의 모든 어머니가 어머니 같지는 않겠군요.”

화악!

임청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을 닫으려던 임단심이 유령처럼 임청우를 덮쳐왔다.

!

약초가 담긴 망태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집 밖으로 뛰쳐나온 임단심이 벼락같이 손을 휘둘렀지만 그럴 줄 짐작하고 있었던 임청우는 망태를 들어 뺨을 가렸던 것이다.

임단심이 임청우가 서있던 곳에 내려섰을 때 임청우는 서쪽으로 다람쥐처럼 달려가 절벽 끝에 이르러 있었다.

놀란 모습도 아니고 두려워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늘상 있는 일이 다시 시작된 듯 약간은 권태로운 표정이었다.

어머닌 저를 죽일 수 없어요. 벌써 천번도 넘게 시도했지만 실패만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은 놈!”

임단심이 살기어린 눈으로 임청우를 쏘아보며 내뱉었다.

지금까지 네 놈이 살아있는 것은 그 귀신같은 눈치도 눈치지만 내게 네 놈을 죽이고 싶은 마음과 살려두고 싶은 마음이 각기 반반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 것은 어째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까?”

“...”

임청우의 말을 들은 임단심의 눈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하다.

그러나 임청우는 절벽가로 한걸음 더 물러섰을 뿐,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병이 깊어 죽어가고 있는 어머니께서 저를 괴롭히는 낙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인들 더 살 수 있겠어요? 그것이 저를 죽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닙니까?”

, 그렇다면 왜 절벽가로 도망치느냐? 죽지 않을 자신 있다면서...”

무엇이든 참는 것이 수양(修養)에는 더할 바 없이 좋은 것이라지만...”

임청우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통을 당한다는 건 왠지 사람답지 않은 것같아서입니다.”

임단심은 무서운 눈초리로 임청우를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려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덜컥!

닫혀진 방문 안쪽에서 그녀의 말이 흘러나왔다.

네놈은 사람이 아니다. 네놈의 아비도 마찬가지고...”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이 나오자 임청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의 살수(殺手)에 수시로 노출되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도 태연히 웃으며 응대하던 임청우였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단 한마디에 고소를 지으며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버지라는 말은 그에게 생소할 뿐만 아니라 저 하늘에 있는 작은 달보다 멀게 느껴지는 존재였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728x90

7

 

                진법에 빠진 두 남녀

 

 

두두두!

마상에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격투 끝에 두 남녀가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찰떡처럼 붙어있는데 흑왕은 정신없이 당산산맥 안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늦추면 방금 전까지 자신의 꼬리에 달라붙어있던 귀신같은 놈이 따라붙을까봐 전력으로 치달리고 있는 것이다.

요동평야를 활개치고 다녔던 흑왕은 강미루의 형부인 광평객(廣平客) 신가람(申加籃)이란 인물에게 사로잡혀 길들여졌었다.

당시의 흑왕은 발정기에 접어든 암컷에게 한눈을 팔다가 기습을 당해서 올가미가 목에 걸렸었다.

만일 경계하고 있었던 상태라면 절세고수인 신가람이라 해도 흑왕을 잡지 못했을 것이다. 신가람이 사흘 내내 전력으로 경신술을 펼치고도 흑왕을 따라잡지 못한 게 그 증거다.

당연히 흑왕은 달리는 자기의 꼬리를 잡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던 터에 백남빈에게 꼬리를 잡혔었기에 그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물론 그 귀신같은 존재가 지금은 자기의 등위에 앉아있음은 꿈에도 모르고 있고...

 

***

 

대려장의 기마대는 백남빈과 흑왕이 일으킨 대량의 흙먼지로 인해서 앞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윽고 먼지가 갈아 앉았을 때는 강미루와 흑왕은 물론이고 자신들이 쫓던 철령보 전령의 모습도 사라진 후였다.

해가 지면서 급격히 짙어지는 당산산맥의 산그늘이 두 남녀와 흑왕을 삼켜버린 것이다.

단지 백남빈이 타고 있던 말이 흑왕의 뒤로 쳐져서 대려장의 무사들에게 사로잡혔다.

대려장 무사들 중 몇은 보고를 하기 위해 그 말을 끌고 북쪽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당산산맥 안쪽으로 들어가 강미루와 흑왕의 종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람같이 사라진 흑왕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해가 지고 어둠이 몰려오면서 수색은 난관에 부딪혀 버렸다.

 

***

 

그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흑왕의 넓은 등은 아기 혼자 태워놓아도 떨어지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안락하다.

백남빈은 흑왕의 엉덩이를 보는 방향으로 앉아있다.

그 때문에 주변의 풍경이 뒤쪽으로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이 보인다.

(당산산맥 안쪽으로 깊이 들어왔구나.)

백남빈은 조금 여유를 되찾아서 자신들의 현재 위치가 어디쯤인지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지금의 상황도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벌어졌던 격전은 그야말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었다. 아차 실수라도 했었다면 중상을 입었거나 심하면 죽었을 수도 있었다.

(이런 저런 부상을 당해본 적은 있지만 턱을 물리긴 또 처음이군.)

백남빈은 자신의 턱을 물고 있는 붉은 옷의 소녀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턱을 물고 물린 자세다 보니 서로의 코가 아주 가깝다.

소녀는 입으로 백남빈의 턱을 가득 베어 물고 있는 탓에 숨은 전적으로 버선코같이 오똑하고 어여쁜 코로만 쉬고 있다.

(사람의 숨결이 이렇게 달콤할 수도 있구나.)

연신 새근대며 코로 뿜어내는 소녀의 숨결이 바로 위쪽에 자리한 백남빈의 코로 흘러들어온다.

내뿜는 숨결이니 당연히 탁하고 역겨워야하는데 난초나 매화의 향기처럼 그윽하게 느껴져서 백남빈을 혼란에 빠트렸다.

백남빈은 약관을 바라보는 적지 않은 나이지만 이제껏 여자의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다.

백남빈이 알고 있는 여자라고는 어려서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 년 전에 마지막으로 뵌 이모뿐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물론 하녀들이야 적지 않았지만 나이답지 않게 진지한 성격인 백남빈을 어려워해서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다.

사내들하고만 부대끼며 살아오다 보니 사람 몸에서 나는 냄새는 당연히 시큼하고 쿰쿰하다는 편견이 백남빈에게 있었다.

헌데 자신의 품에 답삭 안겨있는 이 붉은 옷의 소녀는 다른 세상의 존재같다.

몸은 뼈가 하나도 없는 듯 부드러우면서도 용수철 같고 봄날의 버드나무 가지 같은 탄력을 지녔다.

살결은 극상품의 백옥같이 희고 깨끗해서 설부(雪膚)라는 표현이 어째서 생겼는지 알게 해준다.

특히 냄새!

소녀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땀조차 향기롭다.

(양귀비의 몸에서 난 땀이 그 어떤 꽃보다 향기로웠다는 고사가 그냥 지어낸 게 아니겠구나.)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소녀가 온몸으로 흘려내는 그윽한 내음에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를 강미루는 커다란 두 눈을 흡뜬 채 노려보고 있다.

두 사람의 몸은 서로의 움직임을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밀착되어 있었다.

봉긋한 강미루의 젖가슴의 감촉과 그 안쪽의 심장이 쿵닥거리는 것도 백남빈의 가슴에 그대로 전해진다.

반대로 백남빈의 몸에서 일어나는 망측한 변화 역시 강미루는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백남빈은 두 다리로 강미루의 허리를 휘감은 자세로 마주 앉아있기까지 하다. 그 때문에 백남빈의 아랫도리는 강미루의 하복부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죽일...)

강미루는 서로의 몸이 강하게 짓눌려 있는 부분을 통해서 감지할 수 있는 백남빈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수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나지만 강미루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금의 소강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

(내가 어쩌다 이런 꼴을 당하게 된 건가?)

분하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와서 울컥해지는 강미루였다.

게다가 오랫동안 백남빈의 턱을 물고 있다 보니 힘까지 들어서 눈물이 저절로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뽀얀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본 백남빈은 잠시 고통도 잊고 중얼거렸다.

"찔리고 물린 내가 울지 않는데 찌르고 문 여나찰(女羅刹)이 우는군."

물론 그 중얼거림은 턱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에 말같이 되어 나오지도 않았다. 그저 웅얼거리는 소리로 들릴 뿐이다.

하지만 강미루는 백남빈이 자기를 욕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철부지같은 성미의 이 말괄량이가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강미루는 턱에 힘을 가하여 더 세게 백남빈을 턱을 깨물었다.

"!"

강미루가 온힘을 다해 물은지라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아픈지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턱이 시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으하하하하!"

이 독종(毒種)이 마음이 바뀌어서 놓아주었나 싶어 어리둥절하던 백남빈은 강미루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크게 웃어버렸다.

강미루는 입을 헤 벌리고 있어서 표정이 야릇했다. 백남빈을 깨물기 위해 무리하게 힘을 주는 바람에 턱이 빠져 버린 것이다.

입을 바보처럼 벌린 채 두 눈으로는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강미루를 보면서 백남빈은 모든 것이 한편의 연극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와 함께 백남빈은 눈앞의 이 말괄량이 소녀가 너무도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소녀에게 악감정도 살기도 생기지 않았다.

백남빈은 자기도 모르게 두 팔을 풀어 한 손으로는 강미루의 머리를 부드럽게 누르고 다른 손으로 엄지손가락을 입안에 걸치며 턱을 받쳐 올려서 교정시켜 주었다.

강미루로서는 백남빈의 이같은 행동이 너무도 의외였다.

하마터면 자신을 죽일 뻔한 적의 턱을 교정해주는 것이건만 백남빈의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하다.

(이 작자 뭐야?)

강미루는 잘 끼워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턱을 만지는 백남빈을 바라보며 얼굴이 발개졌다.

어느덧 그녀의 가슴 속에서도 야릇한 감정이 샘 솟아서 두 팔이 자유스러워졌지만 백남빈을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의 살기는 봄눈 녹 듯 걷혀졌다.

마주 보며 말 등에 앉아있는 두 사람의 자세는 묘하다.

이제는 껴안고 있지 않았지만 백남빈의 다리는 여전히 강미루의 허리에 감겨 있는 것이다.

"!"

이 야릇한 상황에서 강미루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이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여겨져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 남자, 참 잘생겼구나.)

어리둥절해하는 백남빈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미루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비로소 상대가 보기 드물게 준수한 용모의 소유자임을 알아본 것이다.

열일곱 살 소녀의 가슴은 주체할 수 없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흘렀다.

그걸 알 리 없는 흑왕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계곡으로 접어들어 타박타박 걷고 있었다.

 

***

 

밤이 깊어졌다.

그믐은 아니지만 하늘에 짙은 구름이 끼어있어서 칠흑같이 어둡다.

푸악!

백남빈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뽑자 뜨거운 피가 확 튀겼다.

백남빈은 아픔을 참으며 옷자락에 쓱쓱 문질러 닦은 단검을 강미루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띠를 끌러 허벅지의 상처를 싸맸다.

강미루는 단검을 받아 허리춤의 칼집에 집어넣었다.

이어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침과 피로 얼룩진 백남빈의 얼굴 하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백남빈은 묵묵히 강미루의 하는 양을 보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백남빈은 이미 이 대려장의 말괄량이 소녀에게 걷잡을 수 없이 매료되고 있었다.

백남빈의 얼굴을 닦아준 강미루의 시선이 아직도 자신의 허리를 감고 있는 백남빈의 다리로 슬쩍 향한다.

... 미안하오.”

백남빈은 어색하게 웃으며 강미루의 허리에서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천리마 흑왕이 경쾌한 걸음으로 나아가고 그놈 위에 마주 앉은 두 남녀의 몸과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백남빈과 강미루는 거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비록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긴 하지만 내공이 정심한 두 사람인지라 주위를 완전히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느낌이 드는 것이, 마치 똑같은 길을 계속 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둠 속의 풍경은 한동안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변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두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그와 함께 같은 처지라는 은연중의 생각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강미루는 백남빈의 앞쪽으로 이동하여 말고삐를 바르게 잡았다.

백남빈도 돌아앉아 강미루의 바로 뒤에 걸터앉았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긴장과 불안한 감정이 원래 적이었던 두 사람을 한마음이 되게 만들었다.

"끼럇!"

두두두! 히히힝!

강미루가 박차를 가하자 흑왕은 나는 듯이 앞으로 달렸다.

어느 정도 달리자 그들의 앞길에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분명 말이 달린 흔적이었다.

백남빈이 두 손으로 강미루의 허리를 잡아 당겨 말을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파팟! 휘릭!

강미루가 말고삐를 잡아채자 흑왕은 언제 달렸는가 싶을 정도로 순간적으로 멈춰 섰고 백남빈은 훌쩍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흑왕 앞쪽으로 간 백남빈은 바닥에 생생하게 남은 말발자국을 뼘으로 재어보았다.

그리고 흑왕의 뒤로 돌아가 그놈이 방금 전에 딛은 발굽 자국과 비교해 보니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백남빈의 낯빛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은 지금까지 흑왕을 타고 같은 장소를 뺑뺑이 돈 것이다!

"기문진(奇門陣)이오. 느끼지도 못하는 새 어떤 진법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 버렸소."

기문진에 빠졌다는 백남빈의 말에 강미루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동북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강진남의 딸이었지만 성격이 차분하지 못하여 진법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백남빈의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인 듯한 데 진법에 문외한이다시피 한 강미루로서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그저 백남빈만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러나 기문진법의 대가인 독안룡 이탁을 양부로 둔 백남빈 역시 파진법(破陣法)에는 그리 자신이 없었다.

728x90
Posted by 와룡강입니다

블로그 이미지
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와룡강입니다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5.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