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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강™님의 서재

 

library.munpia.com

***티스토리에서의 연재는 유감스럽지만 여기까지입니다. 유료연재가 곧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뒷편이 궁금하신 회원님들께서는 상단의 링크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5

 

     변해버린 친구들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한 삶을 달래주는데 술만한 것이 없다.

해하촌에도 술집이 여럿 있다.

술집들 중 장사가 가장 잘 되는 건 방주가(方酒家).

방씨(方氏) 성의 주모가 운영해서 방주가로 불리는데 구비한 술이 다양하고 안주가 맛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해하촌 밖에까지 소문이 나서 찾아오는 외지 손님들도 적지 않다.

오늘도 방주가는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제법 넓은 실내 뿐 아니라 거리에 내놓은 자리까지 만석이다.

분이엄마! 술 떨어졌어!”

가게 밖에서 친구 두 명과 술을 마시던 사내가 가게 안에 대고 외쳤다. 막노동일 하는 왕()씨다.

같은 걸로 내가면 되지요?”

가게 안에서 쾌활한 여자의 대답이 들렸다.

곧 한 여인이 술병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정도인데 후덕한 몸매와 얼굴을 지닌 여자다. 꾸민 게 아니라 타고난 웃는 얼굴이 보는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그녀가 방주가의 주인인 방사낭(方四娘)이다.

아직 벌건 대낮인데 무슨 술들을 이렇게 푼데?”

방사낭은 술꾼들의 자리로 오며 지청구를 해대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에 성내에 가서 일거리라도 알아봐요. 애들 엄마한테만 돈 벌어오게 하는 거 미안하지도 않아요?”

핀잔을 들은 왕씨가 한숨을 푹 쉬었다.

누군 일 안하고 싶겠어? 요즘은 금릉 성내에 들어가 봐도 막일거리 하나 구하기 어려워.”

왕씨와 동석한 친구들이 거들었다.

흉년 때문에 농사 때려 친 농투성이들이 꿀단지에 개미 꼬이듯 금릉으로 몰려들고 있거든.”

품삯이 반 토막 난데다가 일 주는 인간들도 젊은 놈들만 쓰려 하고 우리같이 나이 좀 먹은 것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이러다가 입에 풀칠도 못하는 깝깝한 시절이 또 오는 거 아닌가 몰라.”

왕씨는 한숨 쉬는 척 하며 방사낭의 엉덩이를 훔쳐보았다.

낡은 삼베 치마 안에서 푸짐한 둔부가 물풍선처럼 출렁거리고 있다.

세상 탓, 시절 탓만 하고 있으면 뭘 해요? 어려운 때일수록 더 정신 바짝 차리고 먹고 살길 찾아봐야지.”

왕씨의 엉큼한 시선을 눈치 채지 못한 방사낭은 술병을 탁자에 놓으며 눈을 흘겼다.

맨날 외상으로 술이나 푸고... 오늘은 술 더 못 주니까 일찍 끝내고 집에 돌아들 가 봐요.”

방사낭이 다시 가게로 돌아가려고 돌아설 때였다.

(따귀 한 대 맞더라도 안 만져볼 수가 없지!)

유혹을 참지 못한 왕씨는 눈앞에서 출렁이는 방사낭의 엉덩이를 만지려 손을 뻗었다.

콰득!

바로 그때 누군가의 손아귀가 왕씨의 손목을 으스러트릴 듯 움켜쥐었다.

아이쿠!”

왕씨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언제였는지 거구의 청년이 탁자 옆에 서서 왕씨의 손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눈을 고리처럼 부릅뜨고 있는 그 청년은 철두다.

철두 뒤에는 화려한 비단 옷을 입은 정칠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정칠의 두 세 걸음 뒤에는 말린 연잎에 싼 고기를 들고 있는 육항과 육철이 서있다.

에그머니!”

뒤늦게 알아차린 방사낭이 두 손으로 엉덩이 감싸며 돌아보았다.

... 철두, 너 이 새끼 무슨 행패냐?”

손목이 잡힌 왕씨가 엉거주춤 일어서며 오만상을 썼다.

갑작스러운 소동에 방주가의 손님들은 물론이고 오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추며 보고 있었다.

발뺌해도 소용없어. 아저씨가 엉큼한 짓 하려던 걸 우리가 제대로 봤으니까.”

정칠이 웃으며 다가왔다.

... 엉큼한 짓이라니... 무슨 헛소리를...”

왕씨는 당황하며 정칠을 돌아보았다. 왕씨도 해하촌 토박이지만 삼년만에 너무 변한 정칠을 알아보지 못했다.

(정칠?)

반면 방사낭은 어렵지 않게 정칠을 알아보고 눈이 동그래졌다.

죄를 지었으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겠지?”

스릉!

정칠은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손잡이와 칼집이 지나치게 화려해서 장식용처럼 보였지만 날이 새파랗게 선 실제 칼이었다.

... 무슨 짓을 하려고...”

... 그 날붙이 집어넣지 못해?”

왕씨의 술친구들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철두야. 그 인간 팔 잘 잡고 있어라. 두 번 다시 죄 짓지 못하도록 못 된 손을 몸에서 분리시켜줘야겠다.”

정칠은 칼로 왕씨의 손목을 겨누며 히죽거렸다.

... 안돼!”

왕씨는 비명을 지르지만 몸부림쳤다.

하지만 철두의 손아귀 힘이 워낙 강해서 손목을 빼내지는 못했다.

다시는... 다시는 죄 짓지 않을 테니 이러지 마라.”

왕씨가 겁에 질려 애원했다.

이미 늦었어. 몸부림치면 손목 말고 다른 곳까지 잘릴 수 있으니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야.”

정칠은 칼을 쳐들며 냉혹하게 웃었다.

히익!”

왕씨는 공포에 휩싸였고 주변 사람들도 겁에 질려 누구 하나 왕씨를 도우려 하지 못했다.

철썩!

그때 갑자기 방사낭이 왕씨의 뺨을 모질게 후려쳤다.

!”

뺨을 얻어맞은 왕씨의 얼굴이 홱 돌아갔다.

왕씨의 손목 잡고 있던 철두는 움찔했다.

반면 정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히죽거리며 칼을 거뒀다.

못된 인간 같으니... 밖에서 이럴 정신 있으면 집에 가서 고생하는 마누라 엉덩이나 한 번 더 두드려줘.”

방사낭은 왕씨에게 눈을 부라렸다.

... 미안하네.”

뺨이 벌개진 왕씨가 방사낭의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면 되었다. 왕씨도 정신 들었을 테니 그만 놔줘라.”

...”

방사낭의 말에 철두는 순순히 왕씨의 손목을 놔주었다.

(역시 분이처럼 분이 엄마도 눈치가 빠르고 융통성이 있어. 내가 겁만 주려고 했다는 걸 알아차리고 적절하게 마무리를 짓고 말이야.)

정칠은 칼을 칼집에 넣으며 웃었다.

방사낭은 바로 분이의 엄마다.

... 미안하이! 나중에 다시 와서 사과함세.”

왕씨가 허둥대며 술친구들과 함께 방주가를 떠났다.

구경꺼리가 사라지자 오가던 사람들도 다시 제 갈길을 간다.

너 정말 정칠이었구나.”

방사낭이 정칠의 아래 위를 살피며 반색했다.

안녕하셨습니까 아주머니?”

멀끔해졌네. 못 본 사이에 어른이 다 되었어.”

방사낭은 정칠의 팔을 토닥이며 반가워했다..

시간이 좀 많이 지나긴 했지요?”

정칠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 긁적거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개구쟁이 정칠이다.

오랜만에 보게 되어서 반갑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방사낭이 정칠의 팔을 잡아끌었다.

너희들도 들어와라.”

정칠은 방사낭에게 끌려 가게로 들어가며 육항과 육철에게 말했다.

예 사두!”

감사합니다.”

육항과 육철은 습관적으로 고개를 팍 숙이며 대답했다.

 

가게 안은 낮술 푸는 손님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방금 전과 달리 가게 안이 조용하다.

방사낭에게 이끌려 들어오는 정칠과 그 뒤를 쭈뼛거리며 따라오는 철두, 육항, 육철 때문이다.

손님들도 가게 밖에서 일어난 소동을 알고 있었다.

철두하고 조용히 얘기를 하고 싶은데 내실로 들어가도 되죠?”

그럼 되고 말고...”

방사낭은 정칠의 팔을 놔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있어라. 곧 술상 차려주마.”

고기를 좀 가져왔습니다.”

철두가 소매를 걷으며 음식을 만들려는 방사낭 앞에 말린 연잎으로 싼 고기를 내려놓았다.

잘 했다. 오랜만에 정칠이가 고향 찾아왔는데 잘 먹여서 보내야지.”

방사낭은 반색을 하며 말린 연잎을 풀기 시작했다.

제가 데려온 애들에게도 술 좀 내주십쇼.”

정칠은 자기 집에 오기라도 한 듯 가게 안쪽으로 통하는 문을 자연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걱정 말거라. 장정들은 편한 자리에 앉아.”

!”

신세 지겠슴다 고낭(姑娘;고모, 아줌마)!”

방사낭의 말에 육항과 육철은 정칠에게 하듯 고개를 팍 꺾으며 대답했다.

육씨 형제가 부담스러웠는지 슬금슬금 가게에 나가는 손님들도 있었다.

 

***

 

가게 안쪽에는 작은 마당이 있다.

마당 좌우에는 작은 방들이 마주 보고 있으며 중앙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가게는 좀 커졌지만 내실은 변한 게 없구만.”

정칠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철두와 마주 앉으며 두리번거렸다.

어렸을 때는 수시로 여길 드나들었는데... 저 방이 분이의 방이었지?”

정칠은 좌측의 방을 보며 말했다.

철두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분이는 지금 여기 안 산다.”

여기 안 살면?”

정칠이 돌아보았지만 철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거로군.)

표정이 좋지 않은 철두를 보며 정칠은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정칠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분이가 부운이와 살림이라도 차린 거냐?”

살림을 차린 건 아니고... 네가 마을을 떠난 후 분이는 본격적으로 온고당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일 오가는 것도 번거롭다면서 아예 온고당에서 숙식을 하고 있다.”

철두가 뚱해서 말할 때였다.

그 못된 년 얘기는 하덜 마라.”

방사낭이 술병과 안주가 놓인 쟁반을 들고 마당으로 들어왔다.

어미가 혼자 가게 꾸려가느라 진 빠지는 걸 뻔히 알면서도 온고당으로 내빼버렸지 뭐냐?”

방사낭은 궁시렁 대면서 탁자에 술병과 안주를 내려놓았다.

무정한 년 같으니... 이래서 딸년은 키워봤자 말짱 헛 거라는 옛말도 생긴 거야.”

입으로는 궁시렁 거리지만 정작 방사낭의 표정은 밝다.

해하촌에서 부운이만한 신랑감은 없다. 딸이 부운이와 잘 되어가고 있는 분위기이니 방사낭으로서는 기꺼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칠이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다.

속상하게 할진 몰라도 예쁘게는 자랐잖아요. 지난 삼년간 금릉에서 여자들 많이 봤지만 분이만한 미녀는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내가 낳은 딸년이라 하는 말은 아니지만 분이가 어미 닮아서 인물은 좀 되지.”

방사낭이 흐뭇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렇구 말구요.”

정칠도 웃으며 맞장구 쳤지만 철두는 어색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철두가 가져온 고기 곧 구워다 줄 테니 술부터 마시고 있어라.”

방사낭은 빈 쟁반을 들고 가게로 통하는 문으로 갔다.

천천히 갖다 주세요.”

안주 나오기 전에 너무 많이 마시지는 마라.”

방사낭은 문을 닫고 나갔다

분이엄마 인심 좋은 건 여전하네. 우리 어렸을 때도 배 곯는 아이들 챙겨 먹이느라 늘 빚에 허덕거렸었지.”

딴전 부리지 말고...”

철두가 정칠의 너스레를 끊으며 노려보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이유를 털어놔라.”

철두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그 자식 참 급하긴...”

정칠은 한숨을 쉬며 술병을 집어들었다.

우선 한잔 하고 얘기하자. 이 잔 받고 나도 따라줘라.”

정칠은 술잔에 술을 따라서 철두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철두는 술잔을 받지 않고 정칠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래 그래 알았다 임마.”

정칠을 한숨을 쉬며 술병과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솔직하게 말하마. 난 부운이의 근황이 궁금해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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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와룡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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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망나니의 금의환향(錦衣還鄕)

 

 

 

가진 것의 크기가 반드시 행복의 크기와 일치하진 않는다.

해하촌 주민들은 갖은 게 거의 없다.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인생들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해하촌에는 즐거움이 끊이지 않는다.

헐벗었고 맨발이지만 아이들은 골목골목 뛰어다니며 자지러지고 어른들은 삼삼오오 모여앉아 수다를 떨거나 거친 술로 기분을 낸다.

하지만 평화롭고 즐거운 일상이 늘 이어지는 건 아니다.

갑자기 거리를 오가던 주민들이 놀라 주춤 거리며 물러선다.

활개 치며 해하촌으로 들어서는 세명의 사내들 때문이다.

 

앞장 선 사내는 아직 풋내가 느껴지는 청년인데 차림새가 지나칠 정도로 화려하다.

채색 비단으로 지은 옷을 입었으며 무거워 보이는 금 사슬 여러 개를 목에 걸고 있다.

양쪽 손목에도 몇 개의 금팔찌를 겹쳐 끼었고 손가락마다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있다.

청년이 걸친 옷과 장신구만으로도 천냥 이상은 나갈 것이다.

거만한 표정으로 부채를 부치며 걸어오는 청년의 왼쪽 뺨에는 긴 흉터가 나있다.

부채를 부칠 때마다 드러나는 팔뚝은 문신으로 덮여있으며 허리춤에는 두 자 쯤 되는 칼이 꽂혀있다..

비단옷을 입은 청년 뒤로 두 명의 건달이 따라오며 주위 사람들에게 눈을 부라린다.

한 놈은 육척 넘는 키에 바위덩이 같은 몸을 지녔으며 다른 한 놈은 키는 비슷하지만 몸매가 날렵하다.

체형은 달라도 두 놈의 얼굴은 어딘가 닮아서 피붙이 사이로 보인다.

 

이 동네는 참 하나도 변한 게 없구만. 해하촌이라는 이름답게 게딱지같은 집들은 다 쓰러져가고 인간들은 하나같이 비루먹어 꾀죄죄하니 말이야.”

비단 옷의 청년은 부채로 코를 가리는 시늉을 하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그자의 말 대로 오가는 사람들이 걸친 옷은 누더기고 아이들 얼굴은 땟국물로 지저분하다.

이런 뒷골목 시궁창에서 어떻게 십육 년 넘게 뒹굴며 살았었는지 모르겠다.”

청년이 오만상을 쓰며 걸어갈 때였다.

이게 누구야. 너 도화정(桃花亭)의 일곱째 아들 정칠 아니냐?”

지나가던 서너 명의 노인들 중 한명이 청년을 아는 척했다.

정칠!

그렇다. 비단 옷의 청년은 부운의 졸개 노릇을 하던 정칠이었다.

삼 년 전 금릉 성내로 이사 간 후로는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고향에 찾아온 거냐?”

노인은 반가운 마음에 정칠의 소매를 잡았다.

어허!”

!

정칠은 부채를 접어 노인의 손목을 모질게 때렸다.

아이쿠!”

옥으로 살이 만들어진 부채에 손목을 맞은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이 옷 비단이야. 세탁 한번 하려면 닷냥이나 든다구.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지고 지랄이야?”

! !

정칠은 노인이 잡았던 소매를 부채로 털면서 눈을 흘겼다.

정칠이 너 이 새끼, 어른들에게 무슨 싸가지 없는 짓거리냐?”

우리가 그렇게 더러워?”

여자 장사하는 포주의 자식 티를 내는 거냐?”

함께 지나가던 다른 노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

으헉!”

그러다가 노인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포주의 자식 티를 내?”

늙은 것들이 찢어진 입이라고 막 내지르는군.”

우둑! 우둑!

정칠을 따라온 건달들이 주먹을 마주 쥐어 소리를 내며 노인들을 노려본 것이다.

... 이놈들아! 너희들은 아비 어미도 없어?”

... 어디서 늙은이들에게 행패냐?”

노인들은 겁에 질리면서도 용기를 내어 삿대질을 했다.

그래 우린 아비도 어미도 없다. 어쩔래?”

아가리를 좀 더 찢어놔야 조용해지겠냐 늙탱이들아?”

건달들은 눈을 부라리며 노인들에게 다가갔다.

히익!”

... 이놈들이...”

노인들은 뒷걸음질 쳤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아이들도 겁에 질려 정칠 일행의 눈치를 보았다.

육항(陸抗), 육철(陸鐵),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너희들이 참아라.”

정칠은 부채로 건달들의 등을 툭툭 쳤다.

예 사두(蛇頭)!”

죄송합니다.”

건달들이 정칠을 돌아보며 굽신거렸다.

사촌 형제 사이인 두 놈의 이름은 육항과 육철이다. 몸집이 좋은 놈이 육철이고 날렵한 놈이 육항이다.

(사두라면 흑사회의 부() 두목급 호칭이잖아.)

(정칠이 저놈이 금릉의 흑사회에 투신하여 출세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육철과 육항 형제의 말을 들은 노인들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흑사회에서는 두목을 용두(龍頭)라 부르고 용두 아래의 새끼 두목들은 사두라 부른다.

놀랍게도 정칠은 스무살도 안된 나이에 사두라 불리고 있다.

잘 들어 영감탱이들아! 나 옛날의 정칠 아니야.”

정칠이 노인들을 거만하게 쓸어보았다.

정칠의 시선을 접한 노인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테니까 아는 척도 마.”

콧방귀를 뀌던 정칠의 시선이 한쪽을 향했다.

길가 한쪽에 꾀죄죄한 행색의 아이들이 호기심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서 정칠을 보고 있었다.

이거 어째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나는걸. !”

정칠은 웃으며 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기...”

그 즉시 육항이 묵직한 돈주머니를 정칠의 손에 얹어주었다.

너 이놈들 나 알지? 삼 년만에 만났다고 생 까면 이 형아가 많이 섭섭하다.”

정칠은 돈 주머니를 들고 아이들 앞으로 다가갔다.

아이들이 겁에 질려 주춤거리며 물러서려 할 때였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용돈을 주마. 이걸로 맛 나는 까까나 사먹어라.”

정칠은 끈을 푼 돈주머니를 허공에 홱 뿌렸다.

따당! 티팅!

그러자 돈주머니에서 수많은 동전들이 튀어나와 놀라는 아이들 주변에 뿌려졌다.

돈이다! !”

와아! 열문짜리 동전이야!”

건드리지마. 이건 내 거야!”

네 거 내 거가 어디 있어?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지!”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동전들을 줍기 시작했다.

그 놈들, 좋아 죽으려 하는구만.”

정칠은 아이들이 동전을 줍느라 엉덩이를 쳐들고 주저앉거나 무릎을 꿇은 채 아귀다툼 벌이는 걸 보며 웃었다.

어른들은 오만상을 쓰지만 겁이 나서 끼어들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이래서 돈이 좋은 거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고 살 수 있으니까.”

정칠을 껄껄 웃으면서 육항과 육철을 데리고 아이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거 내거야! 내놔!”

챙기지 못한 놈이 병신이지. 네거 내거가 어디 있어?”

아이들은 돈을 줍거나 다른 아이가 주운 돈을 빼앗으려고 뒤엉켜 난리가 났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같이 자란 아이들을 거지 취급하다니...”

이래서 씨는 못 속이는 거야. 계집 장사하는 놈의 새끼가 어련하겠어?”

졸개들을 거느리고 멀어지는 정칠을 보며 노인들은 궁시렁거렸다.

그렇긴 해도 정칠이 저 놈, 불과 삼 년만에 엄청나게 출세했구만.”

금릉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조직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칠이 놈은 어렸을 때부터 넉살 좋고 독하기도 했잖아. 계집장사 크게 하는 제 아비의 도움을 받기도 했겠지만 저 나이에 흑사회의 사두가 된 걸 보면 난 놈은 난 놈이지.”

정칠의 싸가지 없는 태도에 빈정이 상하긴 했지만 노인들의 말에는 어쩔 수 없는 부러움이 배어 있었다.

 

***

 

해하촌의 시장통 한쪽에는 간판도 달려있지 않은 푸줏간이 있다.

간판은 없어도 제법 규모가 있는 푸줏간이다.

! !

나무 도마에 얹어놓은 커다란 고깃덩어리를 칼로 내리쳐서 토막 내는 청년이 있었다.

덩치가 산만하고 팔뚝이 다른 사내들의 허벅지만큼 굵은 그 푸주한은 철두다.

올해 스무 살이 된 철두는 덩치도 엄청 커졌다. 키는 육척하고도 오푼이 넘고 떡 벌어진 근육질 가슴은 무성한 털로 덮여있다.

이마는 끈으로 질끈 묶고 있는데 구렛나루와 수염도 덥수룩하다.

영락없는 수호전(水滸傳)의 흑선풍(黑旋風) 이규(李逵) 모습인 철두는 튀는 피를 막기 위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 !

오만상을 쓴 철두가 커다란 칼을 내리칠 때마다 고기 덩어리가 잘게 잘린다.

설마 그거 인육(人肉) 아니지?”

신경질적으로 칼질을 하던 철두의 손이 누군가의 말에 멈칫했다.

내가 고기에 환장하긴 하지만 사람 고기는 사양이다.”

비단옷을 입은 정칠이 푸줏간 입구에 서서 실실 웃고 있었다.

육항과 육철 형제는 좀 떨어진 뒷쪽에 두손을 앞으로 모은 채 서있다.

너 이 새끼...”

철두는 찡그리며 정칠을 노려보았다.

얌마! 인상 펴라. 오랜만에 만나서 농담 좀 한 거니까.”

정칠이 넉살 좋게 웃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바람이 분 거냐? 삼 년 전에 떠나면서 해하촌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고 한 놈이...”

!

철두가 칼을 도마에 내리쳐 꽂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진저리쳐지긴 해도 나고 자란 고향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냐?”

정칠은 부채를 접어 허리춤에 끼우며 말했다.

그보다 오랜 만에 만났으니 우리 철두 한번 안아보자!”

그리고는 우쭈쭈 하는 표정으로 팔 벌리며 철두를 끌어안으려 했다.

개수작 말고 날 찾아온 꿍꿍이나 털어놔라.”

철두는 정칠을 피해 뒤로 물러서며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그 새끼 참 사람 무안하게 만드네.”

머쓱해진 정칠은 피식 웃었다.

새끼?”

펄두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정칠이 너 많이 컸다! 어렸을 때는 내 눈도 똑바로 보지 못하던 피라미 새끼가...”

철두는 앞치마에 손 닦는 걸 멈추며 정칠을 노려보았다.

거 말 좀 가려 합시다 형씨!”

아무리 소꿉친구라지만 첩혈당의 팔대사두(八大蛇頭)중 한분께 무슨 말 버릇이오?”

가게 밖에 있던 육항과 육철이 눈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었다.

충성스러운 졸개들까지 뒀군.”

!

철두가 도마에 박혀있던 칼을 다시 뽑아들었다.

눈꼴시면 들어와라. 도리를 쳐줄 테니까.”

이 거 참...”

우리가 다른 놈팽이들처럼 백정이라면 쫄 줄 아는가 보네.”

육항과 육철이 눈을 희번덕이며 가게로 들어오려 할 때였다.

이 새끼들이...”

정칠이 육항과 육철을 돌아보며 눈을 부라렸다.

육항과 육철은 움찔하며 멈춰 섰다.

정칠이 두 놈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과 안해? 내 친구면 나와 동급이란 거 몰라?”

... 죄송합니다 사두님.”

용서해주시오 형장. 우리가 주제넘게 나댔소.”

육항과 육철은 겁에 질려 급히 철두에게 허리를 꺾었다.

!”

!

철두는 뽑았던 칼을 다시 도마에 박았다.

정칠이 짐짓 한숨을 쉬었다.

철두 너도 성질 좀 죽여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 붉힐 거 없잖냐?”

개소리 말고... 찾아온 용건이나 털어라.”

철두는 허리에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거칠게 풀며 내뱉었다.

정칠은 철두의 팔을 툭툭 치며 넉살좋게 말했다.

얘기가 좀 길어질 테니 술집 가서 한잔 하며 하자. 안주로 쓸 고기나 좀 넉넉히 챙겨라.”

(건방진 새끼...)

철두는 오만상을 쓰면서도 고기를 싸기 위해 말린 연잎을 집어들었다.

정칠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분이 엄마는 여전히 선술집 하고 있지?”

분이네 가게로 가려고?”

말린 연잎에 고기를 싸던 철두의 손이 움찔하며 멈춰졌다.

철두의 반응을 본 정칠이 히죽 웃었다.

? 분이네 가게 가서 술 마시는 건 좀 껄끄럽냐?”

철두는 퉁명스럽게 말하며 고기를 쌌다.

껄끄럽긴 뭘... 다른 가게들 보다 조용하니 분이네 집으로 가자.”

너처럼 나도 어렸을 때는 분이 엄마한테 공짜 밥 많이 얻어먹었었잖아. 오랜만에 고향에 들렀는데 인사는 해야 하지 않겠냐?”

정칠은 넉살좋게 웃으며 가게에서 나갔다.

철두도 못 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게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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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라, 그쪽 속곳이 왜 내 손에...

 

 

 

(이게 무슨... 경신술 덕분에 날수비연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내가 떨쳐버릴 수 없는 상대라니...)

신소심은 경악하면서도 양쪽 허리에 차고 있는 칼들을 뽑았다.

그녀는 빼어난 경신술 뿐만 아니라 신랄하고 치명적인 도법으로도 이름을 날려왔다.

스악! !

신소심의 몸이 팽이처럼 돌면서 수많은 칼바람이 주변을 휩쓸었다. 경신술과 도법이 동시에 펼쳐진 것이다.

이크!”

부운은 짐짓 비명을 지르면서 신소심의 뒤쪽에 자석처럼 달라붙어 움직였다.

그가 익힌 삼보면천은 은밀한 것과 함께 타인의 시야에 잡히지 않는 게 장점이다.

그 바람에 신소심이 아무리 빨리 몸을 돌려도 부운을 볼 수가 없었다.

직접 볼 수 없으니 신랄한 도법으로도 부운을 어쩌지 못한다.

크아!”

! !

악에 바친 신소심이 양손의 칼들을 교차해서 좌우로 던졌다. 그녀가 쓸 수 있는 최강의 절초 비도회륜참(飛刀廻輪斬)이 펼쳐진 것이다.

가가강! 스악!

두 자루 칼은 맹렬히 휘돌며 신소심 뒤쪽을 따라 돌던 부운을 베어갔다.

비도회륜참은 일종의 어검술이라 칼이 손에서 떠난 후에도 내공으로 조종할 수 있다.

어이쿠! 나 죽네!”

부운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스악! 사악!

좌우에서 날아들던 칼들은 간발의 차이로 부운의 머리와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잡을 수 있다!)

신소심은 부운의 비명이 들린 방향으로 홱 몸을 틀며 양손을 휘저었다.

가가강! 기잉!

부운을 스쳐 지나갔던 칼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다시 신소심에게 날아들었다.

그때였다.

소저의 칼춤 추는 솜씨는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만 작별을 고해야겠소.”

신소심의 귀에 부운의 속삭임이 들렸다. 두 자루 칼이 신소심의 손에서 떠나길 기다린 부운이 등 뒤로 바짝 달라붙었던 것이다.

크아!”

신소심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자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부운을 뒤통수로 들이받으려 했다.

볼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공격해야했다.

하하하! 이 정도로 해둡시다!”

부운은 껄껄 웃으며 뒤로 확 멀어졌다.

신소심은 그제야 부운을 볼 수 있었다.

휘익!

뒤로 날아간 부운은 십여장 떨어진 건물 지붕 위에 내려서고 있었다.

죽인다!”

신소심은 되 날아든 칼들을 받아들며 이를 갈았다.

아무리 기분이 상했더라도 초면에 죽이니 마니 하는 건 좀 지나치지 않소?”

부운은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네놈이 자초한 화이니 날 원망하지 마라! 오늘 여기서 너 아니면 내가 세상 하직...”

이를 갈며 부운을 노려보던 신소심의 눈이 부릅떠진 것은 그 직후였다.

자자 진정하시오 소저! 내가 이렇게 사과하겠소!“

너스레를 떨며 포권하는 척 하는 부운의 양손에는 각기 한가지씩의 물건이 들려있었다.

오른손에는 반으로 접은 작은 봉투가 들려있다.

왼손에는 붉은색의 상당히 큰 사각형 천이 들려있는데 네 귀퉁이에는 긴 끈이 달려있다.

(... 저건...!)

부운이 들고 있는 붉은 천을 본 신소심은 숨이 콱 막혔다.

동시에 그녀는 가슴 부분이 왠지 서늘한 것을 느꼈다.

내려다보니 잘 여미고 있던 저고리가 벌어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가슴골이 상당히 깊어 보인다.

!“

신소심은 기겁하며 양팔로 가슴을 가렸다.

소저가 지닌 물건들 중 이 봉서(封書)가 가장 귀중한 것같아서 실례를... !”

봉투를 흔들면서 너스레를 떨던 부운의 눈이 왼손을 돌아보며 휘둥그래졌다.

어라! 봉투만 꺼내려 했는데 이 천까지 딸려 나왔군.”

부운은 붉은 천을 들어 자세히 살펴보며 능글맞게 웃었다.

(맹주님의 지령서(指令書) 뿐 아니라 내 속곳까지 순식간에 빼내갔어!)

양팔로 가슴을 가린 채 신소심은 분노와 수치심으로 치를 떨었다. 부운이 오른손에 들고 있는 붉은 천은 신소심이 젖가슴을 가리고 있던 속곳이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걸. 대체 무엇에 쓰는 천일까?”

! !

부운은 한술 더 떠 붉은 속곳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내놔!”

투학!

악에 바친 신소심이 부운에게 쇄도하며 칼질을 했다.

으악!”

부운은 신소심의 칼질에 몸이 세 토막 나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부운을 벤 직후 신소심은 섬뜩해져서 급히 건물 용마루 위에 멈춰 섰다.

(분명 베었는데 칼 끝에 걸리는 게 없다!)

신소심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뒷걸음질 칠 때였다.

스스스!

세 토막이 쳐진 부운의 모습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펄럭!

그와 함께 허공에서 신소심의 붉은 속곳이 흩날리며 떨어졌다.

(역시!)

신소심은 이를 갈며 칼들을 칼집에 넣었다.

(내가 벤 것처럼 보였던 건 엄청난 속도로 몸을 흔들어 일으킨 놈의 잔상(殘像)이었다.)

신소심을 허공에서 떨어지는 붉은 속곳을 낚아채며 이를 갈았다.

죽일 놈의 색귀야! 네놈이 주변에 숨어있는 거 안다.”

속곳을 회수한 신소심을 주위를 둘러보며 악을 썼다.

날 우롱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으아아아!”

휘익!

악에 바친 신소심은 고함을 지르며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뭐야?”

무슨 소리야?”

어떤 미친년이 한 밤중에 악을 쓰고 지랄이야?”

근처의 건물들에서 불이 켜지며 주민들의 고함 소리가 들린다.

 

장난이 조금 심했나?”

멀어지는 신소심을 보며 부운은 머쓱해졌다.

그가 있는 곳은 손부 근처 어느 저택의 정원이다.

정성들여 가꾼 정원에는 밤이 깊은 탓에 인적은 없다.

(성격이 드세고 무공도 범상치가 않다. 그럼에도 도척총림에서 매년 발행하는 강호인명록에는 등재되어있지 않았다.)

어느덧 시야에서 사라진 신소심을 떠올리며 부운은 복면을 벗었다.

(저 정도 실력이면 백대고수(百大高手) 안에도 낄 수가 있을 텐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도척총림의 요주의 대상에 들지 않은 것일까?)

부운은 복면을 품속에 넣으며 근처의 정자로 올라갔다.

(무려 속곳 안쪽에 넣어 보관하고 있는 편지라면 중요한 내용이 적혀있을 것이다.)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은 부운은 봉투에서 편지를 한 장 꺼냈다.

 

<지령(指令) (); 팔비나타 당천성의 여식 당아연의 행방을 찾는데 전력을 경주할 것.

지령(指令) (); 천마련의 사신마재(四神魔才)의 넷째 사사천(史使天)이 황태자의 측근과 지속적으로 접촉해온 정황이 포착 됨. 사실 여부를 탐문하되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

-검후(劍后)>

 

편지에 적혀있는 내용은 이러했다.

(그 여자... 어쩌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거물일지도 모르겠구나. 무림맹의 현 맹주인 검후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은 걸 보면...)

부운은 읽은 편지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부운도 세상 모든 도둑들의 결사인 도척총림에 속해있다.

덕분에 현 무림의 상황도 잘 알고 있다.

무림맹과 격돌했다가 패망 직전까지 몰렸던 천마련은 극적으로 재기하여 무림의 패권을 차지했다.

십팔 년 전 있었던 무림맹 맹주 사자천존 초천강의 이해 못할 은퇴의 결과였다.

천마련이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련주인 철면마존 섭장천(葉長天)은 명실상부 무림의 패자가 되었다.

(도척총림에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무림맹은 완전히 와해된 것이 아니다. 사자천존을 보위하던 사대장로를 중심으로 재건이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운은 편지를 다시 넣은 봉투를 눈앞으로 들었다.

(재결성되고 있는 무림맹의 신임 맹주는 검후라는 여자인데... 이름이 대려화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봉투를 들고 집중하니 그것을 만졌던 인간들이 떠오른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중에 검후 대려화로 보이는 여자는 없었다.

편지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은 개방에서 작성하여 발송한 것이었다.

(천마련에서도 장차 자신들의 강호 지배를 위협할 수 있는 검후 대려화의 정체를 알아내려 무진 애를 써오고 있지만 성과가 없다던가?)

부운은 봉투에서 시선을 떼며 생각에 잠겼다.

(직접 지령을 받은 걸 보면 아까 그 여자는 검후 대려화를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속곳을 돌려주지 말 것을....)

부운은 입맛을 다셨다. 신소심의 속곳을 갖고 있었다면 그걸 통해서 검후 대려화가 어떤 여자인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편지에는 범상치 않은 이름들이 언급되어 있다. 사신마재, 황태자등의 이름이 그것인데...)

봉투를 가볍게 흔들며 부운은 생각에 잠겼다.

철면마존은 네 명의 제자를 두고 있다.

삼남일녀(三男一女)인 그들은 사신마재라 불리는데 이론의 여지도 없이 마도무림의 최고 인재들이다.

철면마존은 칠순을 넘겼지만 슬하에 후손이 한 명도 없다.

이에 후사가 걱정이 된 철면마존이 고르고 골라 거둔 제자들이 사신마재다.

자연스럽게 사신마재들 사이에서는 치열한 후계자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철면마존의 제자들 중 막내인 사사천이 황태자의 측근과 지속적인 접촉을 하고 있다라...)

부운은 편지의 내용을 떠올리며 걸터앉아있던 정자 난간에서 일어났다.

(천마련이 마침내 황실의 후계자 다툼에까지 개입한 것일까?)

일어난 부운은 한쪽의 월동문을 돌아보았다.

월동문 밖에서 불빛이 어른거린다. 순찰을 도는 호원무사들일 것이다.

(밤도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할아버지의 의견을 들어봐야겠다.)

스스스

걸음을 옮기는 부운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직후 월동문을 통해서 두 명의 호원무사가 들어왔다.

!”

등을 들고 앞장서서 들어오던 자가 헛바람을 들이키며 뒷걸음질을 쳤다. 정자 안에서 뿌옇게 흐려지며 사라지는 부운의 형상을 본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뒤따라오던 자가 앞쪽을 기웃거렸다.

저기... 저기 유령이...”

등을 든 자가 달달 떨며 정자를 가리켰다.

... 유령?”

뒤따라오던 자 역시 겁에 질리면서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물론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구만.”

... 분명 정자에 사람 그림자가 있었단 말일세.”

계집 좀 그만 밝혀! 허구 헌날 기루나 드나드니 기가 허해져서 헛 게 보이는 게 아닌가?”

헛 걸 본 게 아닌데...”

호원무사들의 쓰잘데 없는 대화를 들으며 부운은 지붕 위를 걷고 있었다.

(오늘밤에도 색마살귀의 종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비참해질 뻔 했던 한 여자의 인생을 구원해주었으니 헛고생을 한 건 아니다.)

발걸음이 용마루 끝을 벗어난 부운의 몸은 허공으로 깃털처럼 날아올랐다.

(그 여자, 환장하게 예쁘긴 했지.)

손자경의 인형같은 얼굴을 떠올리며 부운은 침을 꼴깍 삼켰다.

손자경이 한번 본 부운을 영영 잊지 못하듯 부운도 손자경의 이 세상 존재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어여쁜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다.

차이점이라면 손자경은 오직 부운 생각뿐이지만 부운에게 손자경은 그 정도의 존재는 아니라는 점이다.

부운에게는 평생 지켜줘야 하고 또 지켜주고 싶은 여자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여자는 분이다.

그렇다고 부운에게 중요한 여자는 분이뿐만이 아니다.

(새벽이 멀지 않았다. 어머니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루고 계실 테니 서둘러 돌아가야만 한다.)

휘이익!

뿌옇게 변해 해하촌을 향해 날아가는 부운의 모습은 호원무사가 말한 대로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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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비익조(比翼鳥)의 꿈

 

 

 

손부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어둑한 주변 다른 저택들과 달리 대낮같이 환한데 여기저기 몰려다니는 불빛들도 있었다.

손자경의 거처 앞에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녀들은 울고 있고 하인들은 사색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자신들이 모시던 아가씨가 잘못된 게 확인되면 뒷감당이 안된다.

천금같은 아가씨를 지키지 못했으니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그게 주인을 섬기는 인생들의 숙명이다.

어쩜... 어쩜 좋아? 아가씨가 정말 색마살귀에게 납치된 거라면 어떻게 해?”

재수 없는 소리 하지마! 선녀처럼 착한 아가씨에게 그런 일이 생길 리 없잖아.”

하녀들은 울기도 하고 서로를 타박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고 긴장하며 한쪽을 보았다.

바깥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월동문으로 한 노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대쪽같은 인상에 관복차림인 그 노인이 태자태부 손충이다.

손충 뒤로는 늙은 집사와 손부를 지키는 호원무사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따라오고 있다.

조정의 일로 바빠서 퇴청을 못하고 있던 손충이 집사가 보낸 하인으로부터 급보를 받고 서둘러 귀가한 것이다.

... 주인님!”

주인님을 뵈옵니다!”

하녀와 하인들은 겁에 질려 허리를 꺾었다.

설명해봐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손충이 딸의 거처 앞에 멈춰서며 말했다.

... 이각(二刻) 전쯤이었사옵니다. 주무시기 전에 드시는 탕제를 갖고 왔는데... 그때 이미 아가씨는 보이지 않으셨사옵니다.”

하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자가 손충의 눈치를 보며 보고했다.

손충이 따라온 늙은 집사를 돌아보았다.

외적이 침입했던 흔적이 있었는가?”

집사가 비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죄송합니다. 흉수가 이런 짓에 경험이 많은 자였는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습니다.”

관부에는?”

아직... 부주님께서 퇴청하시면 지시를 받는 게 옳을 듯하여...”

잘 했네. 집안 일로 나라에 폐를 끼치는 것은 불충(不忠)! 우리 집안 힘만으로 자경이를 찾아야하네.”

듣고 있던 나이 든 하녀가 울먹거렸다.

... 하지만 아가씨를 촌각이라도 빨리 구해드리려면 관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데...”

늙은 집사도 주인의 눈치를 보며 거들었다.

아가씨의 안위가 우선이니 관부의 도움을 받는 게 어떠할런지요?”

하지만 손충은 단호했다.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집안 일로 나라에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

집사와 하녀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몹쓸 일을 당했다면 그것도 자경이의 운명이겠지.”

손충은 보름달에 가까워진 달이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침통하게 말했다.

하녀와 하인등이 참담하여 모두 고개 떨굴 때였다.

무슨 일인가요?”

덜컹!

갑자기 손자경 거처의 창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안에 변고라도 생겼는가요? 이 늦은 시간에 모두 깨어있다니...”

머리가 헝크러졌고 몸에는 잠옷을 걸친 소녀가 창문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 아가씨!”

아가씨!”

하녀와 하인들이 비명처럼 자지러졌다. 잠옷 차림의 소녀가 자신들의 아가씨 손자경이었기 때문이다.

손충은 허연 눈썹을 찡그렸지만 딱히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되신 건가요?”

납치당하셨던 게 아니셨는가요 아가씨?”

하녀들이 창문 쪽으로 달려가며 울음을 터트렸다.

납치당하다니 무슨 소리야?”

손자경이 하녀들을 내려다보며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목욕한 후 옷을 갈아입으려다가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옷장 가장 안쪽에 누워있었어.”

손자경은 헝크러진 머릿카락을 만지며 말했다.

... 그런...”

옷장 속에 쓰러져 계신 것도 모르고...”

다행이에요! 정말 잘 되었어요 아가씨!”

하녀들은 창문 앞에 모여 펑펑 울었다. 개중에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버지, 소동을 일으켜서 죄송해요.”

손자경은 부친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별일 없었으면 되었다. 밤도 늦었으니 그만 자도록 해라.”

손충은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돌아섰다.

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세요.”

딸의 인사를 들으며 손충은 뒷짐을 짚고 월동문으로 걸어갔다.

늙은 집사도 호원무사들과 하인들을 손짓으로 불러 손충의 뒤를 따라갔다.

하녀들도 대부분 흩어지고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하녀 몇 명만이 서둘러 손자경의 거처로 들어갔다.

(아닌 척하셨지만 따님 때문에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셨었구나.)

늙은 집사는 손충의 뒤를 따라가며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뒷짐 쥔 손충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자경이 거처의 경비를 배로 늘려라. 두 번 다시 오늘 같은 소동이 벌어져서는 아니 될 것이다.”

월동문을 나서며 손충이 말했다.

(두번 다시라...)

(태부께서는 자경아가씨께 무슨 일이 일어났었다고 생각하시는구나.)

손충의 지시를 들은 늙은 집사와 호원무사들은 깨달았다. 어떤 경로로 무사히 귀환했는지 모르지만 딸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었다는 걸 자신들의 주인이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

 

난 그만 자야겠어. 놀라셨을 어머니에게는 너희들이 가서 말씀드려라.”

창가의 의자에 앉아있던 손자경이 침실을 정리하는 하녀들에게 말했다.

예 아가씨.”

안녕히 주무세요.”

하녀들이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침실을 나갔다.

(고마워요 은공.)

혼자가 된 손자경의 두 뺨이 발그레해졌다.

 

오늘 밤 그녀는 너무도 끔찍한 일을 당했다.

납치당해 발가벗겨졌으며 외간 사내들의 징그러운 손에 온몸을 유린당했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규중처자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수모였고 공포였다.

충격이 너무 커서 미쳐버렸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럼에도 손자경은 정신을 놓지도, 공황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수렁에서 건져준 신비한 사내에게 완전히 매료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마치 동화나 옛날이야기의 영웅처럼 위기의 순간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에게 안겨 하늘을 나는 경험을 하면서 이보옥 일행에게 당했던 만행은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황홀해서 잠시 전에 겪었던 일들 따위는 아스라이 잊혀졌다.

그 사람은 자신을 품에 안고 하늘 끝까지라도 날아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손자경에게 오직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 사람과 비익조(比翼鳥;암수의 날개가 한쪽뿐인 전설 속의 새)가 되는 것이었다.

 

(그분은 누구였을까? 정말 인간이긴 하신 걸까?)

부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뛴다.

온몸에 열이 오르고 유실(乳實;젖꼭지)들은 너무 단단해져 아플 지경이다. 다리 사이 깊은 곳은 화상을 입은 듯 화끈거리고...

부운에게 알몸을, 심지어 가랑이를 벌려 은밀한 부분을 보인 것조차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걸 그에게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여겨질 지경이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안돼! 무슨 망측한 생각을...)

손자경은 세차게 머리를 저어 부끄러운 망상을 떨쳐버렸다.

(은공께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나를 데려다 주신 덕분에 쓸데없는 뒷말이 생기지 않게 되었어.)

손자경은 억지로 이후에 벌어질 일에 대해 집중했다.

자신을 범하려던 이보옥은 고자가 되는 변을 당했다.

하지만 그자의 애비 이세창도 이보옥이 고자가 된 경과를 감히 자신과 연관지어 폭로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가는 황실의 노여움을 입어 첩혈당 자체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우리 손부야 첩혈당과의 시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은공은 그자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어.)

그저 예쁘기만 한 게 아닌 손자경은 부운을 걱정하고 있었다.

 

흑사회의 인간들은 무림인들과는 또 다르다.

무림인들은 정파건 마도건 나름대로의 명분을 중시하고 규율도 존재한다.

하지만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밑바닥 인생들에게는 인의도덕도 대의명분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이해득실과 은원관계만 따질 뿐이며 한번 맺은 원한은 반드시 되갚음을 하고야 만다.

관부, 심지어 황실조차 흑사회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그 독하고 악랄한 속성 때문이다.

관부고 황실이고 구성원은 개개인일 뿐이다.

자신과 가족들이 흑사회의 표적이 되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걸 무시하고 흑사회와 대놓고 척을 질 수 있는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첩혈당 당주 소면첩혈 이세창은 외아들을 고자로 만든 부운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점이 손자경을 걱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분이 첩혈당 따위에게 해를 입는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손자경은 화끈거리는 두 볼을 가녀린 두 손으로 가렸다.

어느덧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운은 신선(神仙)이나 신장(神將)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신선이나 신장이 하찮은 인간들 따위에게 해를 입을 리는 없다.

(과연 은공의 정체는 무엇일까? 신선같은 무공을 지닌 것에 비해 나이는 젊어서 내 또래인 것같았는데...)

손자경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두손을 모은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을 지난 둥근 달이 서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부디 은공을 다시 만나게 해주세요 달님!)

손자경은 두 손을 모아 간절하게 빌었다.

 

***

 

(저 계집이 자길 구해준 인간에게 제대로 반했네.)

두 볼이 발개진 채 무언가 기원하고 있는 손자경을 보며 실소를 흘리는 여자가 있었다.

날수비연 신소심이었다.

그녀는 손자경의 거처가 멀리 보이는 건물 지붕 위에 서있었다.

(혹시나 해서 뒤를 밟아봤는데 그자는 허튼 짓 하지 않고 저 계집을 집에 데려다 주었다.)

신소심은 한 시름 덜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손자경을 안고 날아가는 부운을 추적했었다.

부운의 정체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혹시 부운이 손자경에게 못된 짓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였다.

다행히 부운은 진회하에서 곧장 손부로 날아와 손자경을 아무도 모르게 그녀의 거처에 들여보내 주었다.

천마련의 세상이 되어 도의가 바닥에 떨어진 작금의 세태에서는 보기 드문 인간인데... 과연 그자의 정체가 무언지 궁금하구나.”

신소심이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였다.

나도 소저의 정체가 궁금한 걸?”

갑자기 귓전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신소심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밤손님이라는 직업상 뒤를 밟히는 건 영 기분이 찜찜하거든.”

스윽!

신소심의 어깨 너머로 검은색 복면을 쓴 얼굴이 나타났다.

물론 그 복면인은 부운이었다.

(어느 틈에...)

스팟!

신소심은 앞쪽으로 벼락같이 날아가면서 몸을 돌렸다.

자기 뒤쪽에 서있을 부운을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없었다!

번개처럼 앞으로 날아가며 돌아보았지만 뒤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경신술이 수준급이로군.”

스으!

등을 뒤로 하는 자세로 날아가는 신소심의 어깨 너머로 다시 부운의 얼굴이 나타나며 속삭였다.

(... 당한다!)

!

소름이 돋아 숨을 멈추면서도 신소심은 다시 전력을 다해 몸을 돌렸다.

대단해! 경신술로만 따지자면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들겠어.”

부운은 팽이처럼 돌아가는 신소심을 따라서 함께 돌아가며 웃었다.

그 바람에 신소심은 여전히 부운의 얼굴을 정면에서 볼 수가 없었다.

물론 보아봤자 복면 때문에 진면목을 볼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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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잘라버리다.

 

 

 

누구...!”

기겁한 마삼은 허리에 차고 있는 칼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마삼은 칼을 뽑지도 고함을 토해내지도 못했다.

콰득!

강철같은 손아귀에 목이 잡힌 때문이다.

끄윽...”

단번에 경동맥이 막힌 마삼은 그대로 기절했다.

거기까지!”

복면인은 축 늘어진 마삼의 몸뚱이를 옆으로 던져버리며 건물로 들어갔다.

!”

뭐냐?”

손자경을 겁탈하던 세 망나니가 기겁하며 돌아보았다.

알몸인 이보옥은 역시 알몸이 된 손자경의 가랑이를 벌려놓고 올라타려던 참이었다.

천계주와 엄숭환은 좌우에서 손자경의 팔과 어깨를 누르고 있었다.

너무 늦게 도착하지는 않은 것 같군.”

일별(一瞥)로 상황을 파악한 복면인은 안도하며 침대로 다가갔다.

손자경은 발가벗겨지긴 했지만 겁탈까지 당하지는 않은 상태였다. 대독금봉의 안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한 소녀의 인생이 비참해질 뻔 했다.

검은색의 복면을 쓴 사내는 물론 부운이다.

, 웬 놈이냐?”

이보옥은 당황해서 아랫도리를 손으로 가렸다.

네놈이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뒈질 곳을 찾아온 것이냐?”

천계주와 엄승환은 당황한 와중에도 눈을 부라리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흑사회 출신들이다보니 배포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물론 배포 따위가 안전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콰직! !

천계주는 철퇴같은 주먹에 맞아 턱뼈가 박살나고 이빨 대부분을 토해냈다.

엄승환은 명치에 쇠말뚝이 박히는 것 같은 충격에 정신을 놓았다.

털썩! 퍼억!

정신을 잃은 두 망나니는 침대 좌우로 나뒹굴었다.

부운이 침대 좌우로 오가며 그놈들을 줘 팬 속도는 너무도 빨라서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삼보면천 보법은 삼년 전과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헛걸음 했군.”

사라졌다가 다시 침대 발치에 나타난 부운은 혀를 찼다.

대독금봉이 색마살귀를 발견한 줄 알고 따라와 봤더니 흑사회의 망나니들이 못된 짓을 하는 현장이었다.

... 꺼져라!”

혀를 차는 부운의 귀에 겁에 질려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다.

... 당장 이 방에서 나가지 않으면 이 계집의 목을 부러트리고 말겠다.”

알몸의 이보옥이 역시 알몸인 손자경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자는 천계주와 엄승환이 부운에게 쥐어 터지는 사이에 손자경을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이보옥의 팔에 목이 감겨진 손자경은 수치심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또 한명의 사내에게 알몸을 보이게 된 때문이다.

손자경은 필사적으로 가랑이를 오므리고 두 손으로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려 애썼다.

이거 참...”

본의 아니게 손자경의 알몸을 정면에서 보게 된 부운은 복면 위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가급적 좋게 끝내려고 했는데 자청해서 피를 보길 원하는군.”

껍질을 벗겨 죽여도 시원찮은 새끼야! 지금 네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냐?”

손자경의 알몸 뒤에 숨은 이보옥이 독이 올라서 악을 썼다.

네놈이 해코지한 친구들은 만복도장과 탐화루의 후계자들이다. 게다가 본 공자는 금릉 흑사회 최대 조직인 첩혈당의 소당주다.”

이보옥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면 부운이 기가 죽을 것으로 기대했다.

물론 오산이었다.

소면첩혈 이세창의 아들이었단 말이지? 그렇잖아도 어디선가 본 것같은 얼굴이라 했더니 흡혈귀 이세창의 망나니 아들놈이었군.”

상대가 누군지 알고도 부운은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날 건드릴 경우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도 잘 알 것이다. 오죽했으면 황실이나 관부조차 후환이 두려워 우리 첩혈당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겠느냐?”

이보옥은 사력을 다해 악을 썼다.

상대를 겁주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소란을 피워야만 탐화루의 어깨들이 변고를 알아차릴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용서를 빌면 본공자도 너그럽게...

악을 쓰던 이보옥의 눈이 부릅떠졌다.

!

부운이 오른손의 검지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겨누고 있는데 손가락 마디가 밝게 백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이보옥은 손자경의 가냘픈 알몸으로 자기 몸을 가리려 애썼다. 나름대로 무공도 익힌 터라 부운의 손가락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는 순간 오싹한 한기가 느껴진 것이다.

실례지만 조금 일어나 주지 않으시겠소 소저?”

지이잉!

부운은 백열 되며 진동하는 손가락으로 손자경의 아랫도리를 겨누며 말했다.

손자경은 예쁠 뿐 아니라 영특하기도 한 소녀다.

즉시 부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다만 부운이 하려는 일에 협조를 하려면 너무도 부끄러운 짓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죽고 싶어!)

손자경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가랑이를 벌리며 엉덩이를 쳐들었다.

그 바람에 가랑이 사이의 부끄러운 부분이 적나라하게 부운의 시야에 노출되었다.

네년 무슨 짓을...!”

손자경이 갑자기 가랑이를 벌리며 엉덩이를 들자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이보옥이 기겁할 때였다.

따앙!

백열되어 진동하던 부운의 손가락 끝에서 마치 강철 줄이 끊어지는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가 터져나왔다.

동시에 이보옥은 아랫도리에서 화끈한 작렬감을 느꼈다.

끄아아악!”

너무도 끔찍한 고통에 이보옥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

힘이 빠진 이보옥의 팔에서 풀려나 앞으로 나뒹굴던 손자경은 몸서리를 쳤다. 돌아본 시야에 너무도 끔찍한 광경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보옥의 하초(下焦)는 칼질당한 오이처럼 댕강 잘려나간 상태였다. 잘려진 부분은 침대에 떨어져 펄떡이고 있고 상처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흘러나오고 있다.

부운은 지력을 날려 이보옥의 양물을 잘라버린 것이다.

그가 사용한 지력은 독천존이 전수해준 비파천강지였다.

빠르기는 전광석화 같고 강철도 간단히 뚫는 위력을 지닌 비파천강지다.

무공이라고 해봐야 보잘 것 없는 수준인 이보옥이 피하거나 막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다만 그자의 몸 대부분이 손자경의 알몸에 가려져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부운은 손자경에게 이보옥의 아랫도리가 드러나게 협조해달라고 한 것이다.

영특한 손자경은 가랑이를 벌리고 엉덩이를 들어 이보옥의 양물이 부운의 눈에 들어가게 만들었고...

끄아아악! 안돼! 안돼! 끄아아악!”

이보옥은 피투성이가 된 아랫도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손자경은 몸서리를 치며 엉금엉금 기어서 이보옥으로부터 멀어졌다.

!

그런 그녀의 알몸에 화려한 비단옷이 걸쳐졌다.

이가놈의 옷인 것 같지만 급한 대로 걸치시오.”

부운은 손자경의 알몸을 이보옥의 겉옷으로 가려주며 말했다.

... 고마워요.”

손자경은 얼굴이 모닥불처럼 달아오른 채 급히 비단옷을 여몄다.

끄아아악!”

그 사이에도 이보옥은 멱이 따인 돼지처럼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를 뒹굴고 있었다. 널찍한 침대는 이미 피 칠갑이 되어 있었다.

도련님의 거처에서 비명이 들린다.”

도련님! 무사하십니까?”

건물 밖에서 다급한 외침들이 들려왔다. 변고를 알아차린 탐화루의 건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다..

 

***

 

신소심은 근처 건물 위에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많은 불빛들이 일렁이면서 손에 손에 무기를 든 사내들이 몰려오고 있다.

(일 처리가 깔끔한 자는 아니네. 나였다면 버러지들이 비명을 지를 기회도 주지 않고 해치웠을 텐데...)

신소심이 코웃음을 칠 때였다.

일이 벌어진 건물에서 부운이 나오는 게 신소심의 눈에 들어왔다.

부운은 이보옥의 헐렁한 비단옷에 파묻혀 있는 손자경을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저 계집이 태자태부 손충의 외동딸 손자경...)

신소심은 몸을 숙이며 손자경을 내려다보았다. 손부 근처에서부터 독안효 마삼을 추격해왔지만 손자경의 얼굴을 이제야 자세히 보게 되었다.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든 손자경은 작은 고양이처럼 부운의 품에 안겨있다.

(소문대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만한 미모네. 황태손 주첨기가 저년을 보려고 기회 날 때마다 북경에서 금릉까지 달려온다는 게 이해가 갈 정도로...)

마치 도자기로 빚은 인형같은 손자경의 얼굴은 신소심으로 하여금 난생 처음 열등감이란 감정을 느끼게 했다.

손자경은 여자인 신소심이 보기에도 너무나 예뻤다.

그 사이에 손자경을 품에 안은 부운은 건물 앞의 마당으로 나섰다.

무사하십니까 도련님?”

무슨 일입니까?”

불빛들이 사방에서 몰려들며 다급한 외침과 발자국 소리들이 들려왔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빠져나가야하니 잠시 눈을 감아주시오.”

부운은 가볍게 제자리걸음을 하며 말했다.

...”

손자경이 수줍어하며 눈을 감은 직후였다.

!

제자리걸음을 하던 부운의 한 발이 지면을 강하게 밟았다.

(저럴 수가...)

신소심의 눈이 치떠진 것은 그 직후였다.

화악!

발을 한번 굴렀을 뿐인데 부운의 몸은 이미 수십 장 허공으로 치솟고 있었다.

(... 가공!)

신소심은 벌떡 일어났다.

나름대로 무공에 자부심이 있으며 경신술의 대가도 여럿 보아온 신소심이다.

하지만 발 한 번 굴러서 수십장을 치솟는 경신술은 듣도 보도 못했다.

신소심이 전율할 때 손자경을 품에 안은 부운은 이미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정체를 알아야한다!)

휘익!

신소심도 급급히 몸을 날려 부운을 추격해갔다.

! ... 도련님!”

... 누가 이런 짓을...”

멀어지는 신소심 뒤로 일이 벌어진 건물로 몰려든 건달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

손자경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세찬 바람소리가 눈을 감고 있는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궁금해진 손자경은 부운의 경고를 잊고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밤하늘을 날고 있는 자신과 부운의 모습이었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보니 휘황찬란한 불빛에 휘감긴 진회하의 기루들이 까마득한 아래쪽에 보였다.

화려하고 웅장하던 기루들의 건물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인다.

흐윽!”

겁에 질린 손자경은 그때까지 가슴에 모으고 있던 두 팔로 부운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뭉클!

이보옥의 비단옷에 감싸인 손자경의 자그마한 젖가슴이 부운의 가슴에 짓눌려졌다.

(이거 참...)

두 겹의 천을 사이에 두고 느껴지는 소녀의 젖가슴 감촉에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낯이 설지는 않은 감촉이다. 앙큼한 분이가 수시로 매달리며 가슴을 문질러댔기 때문이다.

(... 하늘을 날고 있어!)

난감해하는 부운의 목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손자경은 곁눈질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철이 든 이래 규방에서만 지내던 손자경이다.

밤하늘을 새처럼 나는 경험은 불과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상상을 못했건 것이다.

너무도 비현실적이어서 꿈을 꾸고 있는 듯 황홀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있으라고 한 거요.”

부운은 새처럼 날아가며 웃었다.

...!”

손자경은 달달 떨면서도 연신 아래를 곁눈질했다.

다양한 인생들이 아웅다웅 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도 작고 멀게만 느껴진다.

(거대한 새를 탄 것처럼 하늘을 날고 있어! 달님도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고...)

손자경은 밤하늘도 올려다보았다.

만월(滿月)에 가까워진 달이 잘 닦은 은쟁반처럼 보인다.

(이 사람이라면 나를 어디든지 데려다줄 것만 같아.)

부운의 목에 매달린 채 부운의 얼굴을 훔쳐보는 손자경의 얼굴은 독한 술에 취한 듯 발개져 있었다.

그녀는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이 평생 잊지 못할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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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가련한 제물(祭物)

 

 

 

(죽일 놈들... 양가집 규수를 납치해서 욕보이려 들어?)

문이 닫힌 건물을 내려다보는 여인의 표정이 한층 더 차가워졌다.

별호와 이름이 날수비연(辣手飛燕) 신소심(申素心)인 여인은 무림맹 사대장로 중 금정사태의 제자다.

그녀는 금정사태와 함께 사천일교 당아연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늘 밤 어떤 여자가 납치되는 걸 목격하고 따라왔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납치된 여자가 당아연은 아니었다.

(비록 찾고 있던 당아연은 아니지만 한 여자의 삶이 걸린 일이니 못 본 척 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

신소심은 손자경이 끌려들어간 건물을 향해 몸을 날리려 했다.

부웅!

바로 그때 신소심 옆으로 참새 만한 말벌이 섬뜩한 날개짓을 하며 지나갔다.

(!)

신소심은 오싹 소름이 돋아 몸이 굳어졌다.

비록 무공을 익힌 몸이라 해도 말벌은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물며 그녀의 옆을 스쳐간 말벌은 거의 참새만할 정도로 큰 괴물이었다.

(무슨 말벌이 저렇게 크지?)

신소심은 몸서리를 치며 몸을 숙였다.

(크기도 크기지만 밤눈이 어두운 벌이 한 밤중에 날아다닌다는 게 심상치가 않다. 누군가 특별하게 길러서 부리는 놈이기 쉽다.)

신소심이 몸을 숙인 것은 지나간 말벌이 평범한 놈이 아니라는 걸 직감 한 때문이다.

그리고 은신한 직후 신소심은 급히 숨까지 멈추었다.

“...!”

언제였는지 문이 닫힌 건물 앞에 한 인물이 서있었다.

헌칠한 체격의 사내인데 얼굴에는 검은색 복면을 쓰고 있다.

대독금봉을 따라온 부운이다.

(... 나타나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림맹이 천마련에 대항하기 위해 길러낸 복수사영(復讐四英)중 한명인 나 신소심이...)

신소심은 몸을 더 낮게 숙이며 부운을 살펴보았다.

! !

부운의 머리 위로 대독금봉이 원형을 그리며 날아다니고 있다.

(저자가 괴물 같은 말벌의 주인이겠구나.)

신소심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였다.

부운은 신소심이 숨어있는 건물 쪽을 힐끔 보며 건물로 다가갔다..

(내가 여기 숨어있는 걸 알아차렸다.)

신소심은 오싹한 전율이 등줄기를 훑어 내리는 것을 느꼈다.

 

***

 

건물 안에서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벌어지려는 중이었다.

눈이 벌개진 세명의 사내가 침대에 잠옷 차림으로 누워있는 손자경을 에워싸고 있었다.

독안효 마삼이라는 애꾸는 손자경의 입과 코에 축축한 천을 대고 있었다.

운이 좋구만. 황태손의 스승인 손태부의 딸년을 직접 보게 되었으니...”

철이 든 이래 손부 밖으로의 거의 출입을 하지 않아서 저년 얼굴을 본 사람이 드물다지?”

소당주라는 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던 두 놈은 연신 침을 삼키며 손자경의 가냘픈 몸매를 훑었다.

(아편과 술, 계집질로 날을 지새우는 말종들의 표적이 되었으니 소저의 신세도 참 안타깝게 되었소이다.)

손자경의 코와 입에 천을 댄 채 마삼은 혀를 찼다.

손자경은 몽혼약(曚昏藥)에 중독당해 정신을 잃은 상태다.

마삼이 손자경의 코와 입에 대고 있는 젖은 천에는 그 몽혼약의 해독제가 묻어있다.

(이것도 다 소저의 운수소관이니 날 원망하진 마시오.)

마삼은 어쩔 수 없이 손자경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녀의 정조를 유린하려는 세 놈은 금릉 흑사회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악우(惡友)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당주란 자의 이름은 이보옥(李寶玉)으로 금릉 흑사회 삼대조직 중 하나인 첩혈당의 후계자다.

삐쩍 마른 놈은 금릉에서 가장 큰 도박장 만복도장(萬福賭莊)의 둘째 아들 엄승환(嚴承煥)이다.

피둥피둥 살이 찐 놈의 이름은 천계주(天季主)로 이곳 탐화루의 후계자다.

북경으로 영락제를 따라 간 황태손이 저년에게 반해서 틈만 나면 남경으로 달려온다던가?”

장차 황후(皇后)가 될지도 모를 계집의 꿀단지를 맛보게 되다니... 생각만 해도 회가 도는구만.”

엄승환과 천계주는 불룩해진 아랫도리를 만지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흐흐흐 우리가 미리 길을 내주면 주첨기도 좋아라 하겠지.”

이보옥도 히죽거릴 때였다.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마삼이 손자경의 입과 코에 대었던 천을 떼며 물러섰다.

해독제 냄새를 맡았으니 곧 마취에서 깨어날 것입니다.”

으으음...”

마삼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자경은 애처로운 신음과 함께 눈을 떴다.

정신이 드시오 손소저?”

이보옥은 음험하게 웃으며 손자경에게 말을 걸었다.

흐윽!”

잠시 어리둥절하던 손자경은 두 팔로 가슴 끌어안으면서 웅크렸다. 비로소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아차린 것이다.

내가 누군지는 소개하지 않아도 아시겠지?”

이보옥은 침대로 올라가 손자경 옆에 앉으며 음험하게 웃었다.

당신... 첩혈당의 소당주로군요.”

손자경은 사색이 되어 침대 구석으로 피하려 했다. 그녀는 전에 이보옥을 본 적이 있다.

그렇소. 영친의 회갑연에 참석했다가 소저를 보고 한 눈에 반한 첩혈당의 소당주 이보옥이오.”

이보옥은 손을 뻗어 손자경의 얼굴 만지려 했다.

... 안돼요!”

손자경은 진저리를 치며 피하려 했지만 곧 등이 벽에 닿았다.

나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소. 한눈에 반해 구혼했지만... 소저와 소저의 아비는 날 천한 뒷골목 인생이라며 상대해주지도 않았소.”

이보옥은 궁지에 몰린 손자경을 훑어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이보옥은 단 한번 손자경을 보았음에도 완전히 매혹되어버렸었다.

손자경은 이보옥 주변의 천박한 계집들과는 인종 자체가 다른 것처럼 보였다.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 같은 손자경을 본 후 이보옥은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할 지경이 되었다.

첩혈당의 당주 소면첩혈(笑面喋血) 이세창(李世昌)은 아들이 드러누운 이유를 알고 기가 막혔다.

자신이 비록 금릉의 뒷골목에서 기침 꽤나 한다고 하지만 태자태부 정도의 고관과 사돈이 된다는 건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었다.

손충의 회갑연에 참석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든 인맥을 동원하고 막대한 돈을 뿌려서 가능했었다.

그랬는데 하나뿐인 아들놈이 손충의 외동딸에게 한눈에 반해 싸고 누웠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아들놈이 죽겠다는 데 두고 볼 수 있는 부모는 없다.

염치 불구하고 손부에 매파를 보내 손자경을 며느리로 삼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다.

물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시도였다.

태자태부쯤 되는 인물이 하나뿐인 딸을 뒷골목 잡배에게 시집보낼 생각 따위를 할 리가 없다.

심지어 손자경은 황실로부터 청혼 얘기가 오가던 귀한 몸이었다.

손충은 같잖고 귀찮아서 첩혈당으로부터의 청혼을 철저히 무시해버렸다.

이세창으로서도 관부와 척을 질 경우 뒷감당이 안되었다. 몇 번 매파를 보냈다가 무시당한 후 더 이상 손충을 귀찮게 하지 않았다.

다만 이세창도 손충도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이보옥이 얼마나 무모하고 막 나가는 말종인가 하는 점이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인간이라면 황태자의 최측근인 태자태부의 외동딸을 납치할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랬는데 이보옥은 아무 생각없이 그런 짓을 저질렀다.

 

거듭 해서 매파를 보냈어도 거절당한 모욕을 내가 어떻게 갚아줄 것같소?”

이보옥은 핏발이 선 눈으로 손자경을 내려다보았다.

... 이러지 말아요 소당주. 다시... 다시 한 번 매파를 보내면 아버지께 잘 말씀드려볼게요.”

손자경은 사색이 되어 애원했다.

그러니 제발 저를 돌려 보내주...!”

애원하던 손자경은 비명을 질렀다.

개수작!”

이보옥이 머리채를 거칠게 잡아챘던 것이다.

네년의 지금 말이 그저 이 자리를 모면해보려는 수작이란 걸 모를 줄 아느냐?”

이보옥은 손자경의 머리채를 틀어쥐며 이를 갈았다.

아니... 아니에요! 제발... 제 말을 믿어주세요.”

손자경은 두 손을 모아 빌며 애원했다.

명문가의 외동딸로 자란 손자경이 이런 취급을 당해본 적이 있을 리 없다.

수치스럽고 두려웠으나 어떻게든 이 위기를 벗어나야만 한다.

이미 늦었다.”

!

이보옥은 머리채를 쥐로 있던 손을 뿌리쳐서 손자경을 나뒹굴게 만들었다.

!”

손자경은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 나뒹굴었다.

네년을 마누라로 삼는 건 포기했다. 대신 절친들과 네년을 함께 즐기며 우의를 돈독하게 하기로 결심했다

침대에 나뒹군 손자경을 보며 이보옥은 거칠게 허리띠를 풀었다.

그자 뒤에서 눈이 벌개진 천계주와 엄숭환도 허리띠를 풀기 시작했다.

흐윽!”

손자경은 공포에 휩싸였다.

한명도 아니고 세 명의 사내에게 유린당하게 된 이 상황이 도저히 현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네년이 오늘밤 수청을 들어줘야할 저 친구들을 소개하지.”

이보옥은 상의를 벗어 침대 옆으로 던지며 천계주와 엄숭환을 소개했다.

만복도장의 소장주 천계주형과 이곳 탐화루의 후계자 엄승환 형이다. 금릉 흑사회의 유력한 후계자들에게 몸을 바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라.”

그자는 하의도 까내리며 천계주와 엄승환에게 말했다.

천형! 엄형! 시작합시다.”

그러자구!”

계집 하나를 함께 즐기는 것도 오랜만이로군!”

이보옥의 말이 떨어지자 천계주와 엄숭환도 침대로 올라와 손자경을 덮쳤다.

!”

손자경은 두 놈의 거친 손길에 잠옷과 속곳이 뜯겨나가며 비명을 질렀다.

싫어! 안돼요!”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지만 가냘픈 소녀가 건장한 사내들을 당해낼 리 없다. 삽시에 손자경은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었다.

마삼! 날이 밝을 때까지 아무도 접근시키지 마라.”

하의까지 벗은 이보옥이 독안효 마삼에게 지시했다.

예 소당주님!”

마삼은 고개를 숙인 후 돌아섰다.

아악! 제발... 하지 말아요. 아흑!”

문으로 가는 마삼의 귀에 손자경이 유린당하면서 지르는 애처로운 비명이 들렸다.

(좀 안됐긴 하군. 꿈 많던 명문가의 여식이 하룻밤 사이에 신세를 망치게 되었으니...)

마삼은 쓴웃음을 지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소당주같은 인간 말종 눈에 띈 게 불운한 것이니 남 탓 할 수도 없... !)

덜컹!

한데 문을 열던 마삼의 외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문 밖에 시커먼 복면을 쓴 인물이 서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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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소란스러운 밤

 

 

 

금릉은 밤이 되면 더욱 화려해진다.

형형색색의 불빛이 금릉을 몽환적인 꽃밭으로 만든다.

불야성을 이루는 금릉에서 가장 어두운 곳은 의외로 고급스러운 저택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자금산 서쪽 자락에는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강남 일대의 부호들과 고관대작들의 저택들이다.

밖에서 보면 저택들에는 불빛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부지가 워낙 넓어서 정원과 숲과 담장들이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을 차단하는 때문이다.

한데 어느 저택에서는 불빛이 요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굳게 닫혀있는 저택 정문의 처마에는 <孫府(손부)>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손부는 태자태부(太子太傅) 손충(孫忠)이란 인물의 저택이다.

태부(太傅)는 황제의 스승을 일컫는다.

태자의 태부라는 관직으로 짐작할 수 있듯이 손충은 황태자 주고치의 스승이다.

원래대로라면 태자태부는 명나라의 수도가 된 북경에서 봉직(奉職)해야 한다.

하지만 황태자 주고치가 금릉에 차려진 또 하나의 조정, 분조(分朝)를 관장하고 있어서 태자태부 손충도 금릉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 손충의 저택 손부가 다른 저택들과 달리 이리저리 움직이는 불빛들로 소란스럽다.

 

아가씨... 자경(紫鏡)아가씨 어디 계셔요?”

누군가 자경 아가씨 규방에 침입한 흔적이 있다!”

.... 색마살귀가 아가씨를 납치해갔는지도 모른다.”

손에 손에 등을 든 하인과 하녀들이 손부의 안채를 황황히 치달리며 외치고 있었다.

태자태부 손충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딸이 있었다.

이름이 손자경(孫紫鏡)인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예쁘고 영특하기로 이름이 났었다.

아비가 황태자의 스승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황태자의 가족들과도 왕래가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손자경은 황태자 주고치의 장남 황태손(皇太孫) 주첨기(朱瞻基)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항간에는 황태손 주첨기가 손자경을 후궁으로 삼길 원한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그 손자경이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

태자태부의 저택에 침입하여 외동딸을 납치해갈 정도로 대범한 자라면 색마살귀일 가능성도 있다.

서둘러 자금성으로 가서 부주님께 귀가 해주십사 청하라. 아가씨의 정절과 관련된 일이니 구체적인 이유는 발설하지 말고!”

예 집사님!”

늙은 집사의 지시를 받은 하인이 허둥대며 정문쪽으로 달려갔다.

부웅 부웅!

그 소동을 한 마리 말벌이 지켜보고 있었다.

크기가 무려 참새만한 거대한 말벌이었다.

 

***

 

 

계명사(雞鳴寺)는 금릉에서 가장 오래 된 절이다.

동진(東晉) 시대에 지어진 계명사에는 칠층으로 이루어진 약사불탑(藥師佛塔)이 있다.

“...!”

금릉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기도 한 약사불탑 꼭대기에 누군가 서있다.

마치 탑의 일부가 된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그 인물은 검은색 복면을 쓴 훤칠한 체격의 사내다.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는 복면인의 눈빛이 깊고도 강렬하다.

하늘에는 거의 완전해진 달이 떠있다.

내일이 보름이다.

(하루 남았군!)

복면인은 중천(中天)으로 올라가고 있는 달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모았다.

(사 년 전부터였다. 보름달이 뜰 무렵 금릉 일대에서는 간살(姦殺) 당한 젊은 여자의 시체가 발견되곤 했다. 색마살귀라 불리는 작자의 짓인데..)

생각에 잠긴 복면인의 눈이 푸르스름한 살기로 물들었다.

(포청(捕廳)에서 작성한 검안서(檢案書)를 훔쳐본 바에 의하면 희생자들은 마치 수십 년의 나이를 단번에 먹은 것처럼 변해있었다고 한다.)

팔짱을 낀 복면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색마살귀에게 희생당한 젊은 여자들의 사인은 음기(陰氣)와 생기(生氣)의 소실이었다.

, 단순히 즐기기 위해 여자들을 간살해온 게 아니라는 뜻이다.

사악한 무공을 익히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목적인지는 모르지만 여자들을 채음보양(採陰補陽)의 제물로 쓴 것이다.

(난 독천존의 감시 때문에 금릉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무료함도 달랠 겸 지난 삼년간 꾸준히 색마살귀의 종적을 추격해왔다.)

독천존의 감시!

그렇다. 복면인은 부운이었다.

 

부운은 우내칠절 중 한명인 독천존에게서 금천구룡로를 훔치는데 성공했었다.

하지만 분이가 실수로 금천구룡로를 여는 바람에 세상을 종말로 이끌 수도 있는 구룡짐독이 튀어나왔다.

부운은 급히 익힌 조룡여의대법으로 구룡짐독을 삼켜서 자신의 몸속에 봉인했었다.

그것이 벌써 삼년전의 일이다.

재기발랄한 소년이었던 부운은 어느덧 건장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독천존의 경고가 있어서 부운은 금릉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무료함을 달랠 겸 색마살귀를 추적해왔다.

하지만 삼년여의 추적에도 별반 성과가 없었다. 그만큼 색마살귀의 행적은 신출귀몰했던 것이다.

 

(무슨 목적으로 어린 여자들을 해쳐왔는지 모르지만 희생자가 더 늘기 전에 범인을 잡아야 한다.)

부운이 새삼 색마살귀에게 분노하고 있을 때였다.

부웅!

뭔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커다란 말벌 한 마리가 서북쪽으로부터 날아오고 있었다. 만독동천의 영물 말벌 대독금봉이다.

수고했다.”

부운은 손등이 하늘을 향하게 내밀었다.

부웅!

대독금봉은 부운이 내민 손등에 앉았다.

야행성이 아닌 너희를 밤에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만 알아낸 거라도 있는 것이냐?”

부운은 자기 손등에 앉은 말벌에게 물었다.

! !

그러자 대독금봉은 몇 번 날개 짓을 한 후 다시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날아왔던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독금봉이 뭔가를 발견했구나.)

휘익!

부운도 약사불탑의 지붕을 박차고 날아올라 대독금봉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지난 삼년 사이 부운의 내공은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다.

덕분에 삼보면천을 쓸 경우 한 번에 십여장 이상을 날아갈 수 있다. 날아가다가 내공이 딸리면 하강해서 도움 밟기를 한 후 다시 십여장을 날아갈 수 있다.

 

삼년 전, 독천존은 온고당을 떠나면서 십여 마리의 대독금봉을 남기고 갔다. 그놈들로 하여금 분이를 지키게 하라면서....

독천존의 명령 때문인지 모르지만 대독금봉들은 분이를 주인처럼 따랐다.

분이뿐만 아니라 분이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마치 애완동물처럼 굴었다.

처음에는 무서워하던 분이와 분이 엄마도 곧 대독금봉을 집에서 기르는 앵무새나 문조 정도로 여기게 되었다.

대독금봉은 한방만 쏴도 황소를 즉사시킬 수 있는 무서운 독을 지녔다.

게다가 아주 영리해서 사람의 말까지 알아듣는다.

다만 대독금봉을 원하는 대로 부리려면 봉령소(蜂靈嘯)라는 휘파람을 불 줄 알아야 한다.

독천존은 부운에게 봉령소를 알려주고 떠났다. 분이가 깨어나면 가르쳐주라는 당부와 함께....

 

(독천존이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걸 보면 분이에게 만독동천과 관련된 비밀이 있는 게 분명하다.)

부운은 대독금봉을 따라 날아가며 새삼 분이의 신분에 의혹을 느꼈다.

손이 닿기만 해도 대상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덕분에 부운은 분이의 출신내력을 엿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선술집을 하는 분이의 엄마는 생모가 아니었다.

분이에게는 부운으로서는 낯이 선 부모가 있었다.

다만 분이는 친 부모를 너무 어린 시절에 보았었다.

그 때문에 분이의 부모 이름은 물론이고 모습도 모호했다. 그저 분이의 생부가 생모보다 나이가 매우 많았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다.

(분이 엄마의 기억을 읽으면 분이의 신세 내력을 알 수 있겠지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니 해선 안된다.)

날아가며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분이의 출신내력을 알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분이 엄마의 기억을 읽는 것이다.

하지만 남의 기억을 무단히 읽는 건 죄일 뿐 아니라 자칫 분이 엄마의 민망한 과거를 엿볼 수도 있다.

그래서 부운은 분이 엄마의 기억을 읽어볼 엄두는 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어머니나 외조부의 기억을 함부로 읽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언제고 알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부운은 분이의 신세내력에 대한 궁금증을 삭이며 대독금봉을 따라갔다.

 

***

 

금릉 서쪽을 흐르는 진회하 주변에는 유명한 환락가가 형성되어 있다.

십리 이상 이어진 기루와 술집들은 밤새 흥청거린다.

강물 위에도 화려하게 불을 밝힌 놀잇배, 화방(花房)들이 반딧불처럼 떠다니고 있다.

 

탐화루(探花樓)는 진화하의 기루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안에 꼽힌다.

크기도 하고 예쁜 기녀들도 많지만 무엇보다도 손님들의 취향이면 뭐든지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적절한 대가만 치룬다면 탐화루에서는 죄상에서 죄악시 되는 쾌락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탐화루의 가장 안쪽에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한 채 있다.

불이 켜진 건물 안쪽에서는 두런두런 말소리가 간간이 터지는 웃음과 함께 흘러나왔다.

휘익!

담장을 뛰어넘어 그 건물 앞으로 뛰어내리는 자가 있었다.

한눈이 없는 음침한 인상의 중년사내인데 품에는 잠옷 차림의 소녀를 안고 있다.

애꾸사내가 안고 있는 소녀는 몸매는 가냘프지만 얼굴은 말 그대로 경국지색이라 할만 했다.

무언가에 취한 듯 소녀는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소당주(少堂主)! 속하 마삼(馬三)입니다.”

애꾸 사내는 건물로 다가가며 말했다.

후다닥!

건물 안에서 대화 소리가 뚝 끊기며 누군가 문간으로 달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성공했나 마()향주?”

덜컹!

누군가 급히 문을 열며 밖을 내다보았다. 허여멀건 얼굴에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스무 살 가량의 청년이었다.

정말 손태부(孫太傅)의 딸년을 데려온 거냐?”

흥분해서 문 밖으로 나서는 청년 뒤쪽에서는 두 명의 청년이 술을 마시다가 돌아본다.

그자들의 차림새도 화려한데 한 명은 삐쩍 말랐고 다른 한 명은 좀 살이 쪘다.

흐흐흐 제가 누굽니까? 노린 건 무슨 짓을 해서든 손에 넣고 마는 것으로 악명 높은 외눈박이 올빼미(獨眼梟) 마삼 아닙니까?”

마삼이란 이름의 애꾸는 히죽거리며 청년에게 다가갔다.

손태부의 딸년을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고 모셔왔으니 소당주님께서 직접 확인해보시지요.”

마삼은 안고 있던 소녀를 소당주라는 청년에게 내밀었다.

손자경! 정말 손자경이로구나.”

소당주는 흥분해서 소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소녀는 바로 누군가에게 납치당해 손부를 발칵 뒤집어놓은 태자태부 손충의 외돌딸 손자경이었다.

손태부의 딸년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직접 보니 명불허전이더군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것처럼 예쁜 계집은 속하도 난생 처음입니다.”

손자경을 소당주란 자에게 보여주며 마삼은 입맛을 다셨다.

혹시 회가 동해서 나보다 먼저 침을 묻힌 건 아니겠지?”

소당주는 그런 마삼을 의심의 눈초리로 흘겨보았다.

속하가 어찌 감히 딴 마음을 품겠습니까? 금릉의 흑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첩혈당(喋血堂)의 소당주님께서 맛보실 귀한 계집인데...”

마삼은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침을 묻혔는지 안 묻혔는지는 벗겨보면 알겠지. 데리고 들어가서 침대에 뉘어라.”

소당주가 옆으로 물러서며 말했다.

...”

마삼은 굽신거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마삼을 따라 들어간 소당주는 한차례 주변을 두리번거린 후 문을 닫았다.

 

“...!”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는 한 쌍의 시선이 있었다.

근처의 건물 지붕 위에 한 여인이 서있었다. 날렵한 경장을 걸친 스무살 가량의 여인으로 양쪽 허리에 초승달처럼 휘어진 칼을 차고 있다.

여인의 얼굴은 박속같이 새하얗다.

반면 눈썹은 아주 짙고 검으며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다.

이목구비가 단정하고 균형이 잘 맞아 절세미녀라는 말을 들을만한 미모다.

하지만 눈꼬리가 올라가있고 표정이 차가워서 쉽사리 다가가기 어려운 인상을 지닌 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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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후(劍后) 출세(出世)

 

 

 

천목산(天目山)절강성(浙江省) 서북쪽에 자리한 명산이다.

가장 높은 두 봉우리에 동천목(東天目)과 서천목(西天目)이라는 호수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의 눈(天目)이라는 지명은 그 특이한 지형에서 유래했다.

천하절경인 천목산은 도교(道敎)의 중요 성지 중 한 곳이기도 하다.

()나라 시절에 살았던 도교의 창시자 장도릉(張道陵)이 천목산에서 수도를 하여 도를 깨우쳤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무림인들에게도 천목산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다.

무림맹 맹주였던 사자천존이 처음으로 무위(武威)를 드러낸 곳이 천목산인 까닭이다.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시절 천목산은 라마교(喇嘛敎)의 소굴이었다. 기존에 존재했던 수많은 사찰과 암자들을 원나라를 등에 업은 라마교가 접수했었다.

라마교 자체는 딱히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

다만 교리를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사욕(邪慾)을 채우는 데 악용한 일부 라마승들이 문제였다.

잘못된 길로 들어선 라마승들이 저지른 음행과 만행은 헤아릴 수도 없다.

원나라가 쓰러지고 명나라가 들어선 후에도 라마교는 쉽사리 근절되지 않았다.

홍무제 주원장은 자신이 한 때 몸담았던 명교(明敎), 즉 백련교(白蓮敎)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민중의 불만과 시대의 혼란을 먹고 자라는 백련교는 언제 어떻게 발흥할지 모른다.

역대 왕조들 중 백련교의 반란으로 애먹지 않은 왕조가 드물다.

이에 주원장의 우선적인 척결 대상은 백련교가 되었다.

덕분에 다른 종교들은 명나라의 탄압으로부터 비껴날 수 있었다.

원나라의 비호를 받던 라마교도 그 덕을 보았었다.

명나라가 들어선 후 잠시 숨을 죽이고 있던 라마교는 본색을 드러내 온갖 패악을 저질렀다.

라마교의 본거지 중 한곳이었던 천목산 일대에서 그들의 횡포는 유독 심했다.

아녀자들을 유린하거나 혹세무민하여 신도들의 재산을 강탈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때 한 소년이 천목산에 들어와 죄악의 온상이었던 라마교의 암자와 사찰들을 일소해버렸다.

불과 열일곱 살이던 소년은 백 곳이 넘는 사찰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암자에서 라마승들을 몰아냈다.

라마승들 중 죽은 자는 없었다. 그저 반신불수가 되거나 무공을 지녔던 자들은 폐인이 되었을 뿐이다.

수백 년 간 이어져 온 라마교의 폐해를 불과 며칠만에 끝장낸 소년의 이름은 초천강이었다.

그렇게 두곽을 드러낸 소년 초천강은 십년이 안되어 정파백도의 맹주로 추대되었었다.

사자천존이란 전설이 시작된 곳이 바로 천목산인 것이다.

 

***

 

천목산 남쪽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험한 계곡이 있다.

계곡의 막다른 곳은 수십 장 높이의 절벽이 가로 막고 있다.

절벽 아래쪽에는 상당히 큰 동굴이 있는데 입구가 집채만한 바위로 막혀있다.

동굴에서 십여 장 떨어진 곳에 일남일녀가 서있다. 구척 거구에 눈이 부리부리한 늙은 중과 곱게 늙은 백발의 노파다.

그들은 무림맹 사대장로 중 두명이다.

거구의 노승은 소림사 출신인 혈나한(血羅漢)이다.

혈나한은 성격이 불같아서 죄를 짓는 중생을 보면 불문곡직 때려죽이는 것으로 악명을 떨쳐왔다.

그 바람에 원래 법호인 원명(圓命) 대신 혈나한이라는 섬뜩한 별호로 불리고 있다.

곱게 늙은 노파의 별호는 백발신녀(白髮神女).

머리는 백발이지만 얼굴에는 주름살 하나 없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위화감을 느끼게 한다. 머리만 검으면 절세미녀로 보일 것이다.

이미 오래 전에 백살을 넘겼다고 하지만 백발신녀의 정확한 나이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녀가 모든 술법의 종가인 신녀문(神女門)의 후예라고는 하지만 역시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사대장로의 나머지 두 사람은 개방의 태상장로 상취개선(常醉丐仙)과 아미파 장로 금정사태(金頂師太).

오늘로 검후(劍后)의 천일(千日) 폐관수련이 끝나는구려.”

혈나한이 절벽 아래의 동굴을 보며 말했다.

그 동굴은 사자천존과 관련이 있다.

라마교를 일소하기 위해 천목산에 머물 때 사자천존은 그 동굴을 거처로 삼았었다.

덕분에 이름 없는 동굴이지만 무림맹의 인물들에게는 성역 취급을 받아왔다.

백발신녀가 한숨을 쉬었다.

공교롭게도 맹주의 폐관이 끝나는 날에 맞춰서 사달이 났군요.”

혈나한도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납은 어쩐지 소주에서 벌어진 그 일이 장차 거대한 폭풍을 야기할 씨앗처럼 느껴지외다.”

인과(因果)가 어떤 경로로 연결되어 중생들의 삶을 뒤흔들지는 부처님만이 아시겠지요.”

신녀께서는 어느덧 이 중보다 불법에 더 정통하시게 되었소이다.”

혈나한의 찬사에 백발신녀는 살짝 웃었다.

과찬의 말씀을... 그저 백년 넘게 산 덕분에 옭아매고 있는 세상의 그물에서 조금 자유스러워진 것뿐이지요.”

모든 술법의 시원(始原)인 신녀문의 전승(傳承)답지 않으신 겸양이시오.”

혈나한이 웃을 때였다.

드드드!

갑자기 절벽에서 강한 진동이 일어났다.

검후가 드디어 출관(出關)하려는 모양이오.”

혈나한은 흥분한 표정으로 동굴을 보았다.

(불과 천일만에 대공(大功)을 이룬 것 같구나.)

백발신녀도 감탄하며 동굴을 볼 때였다.

!

아주 밝은 빛이 동굴 입구를 막고 있는 집채만한 바위를 절벽을 뚫고 나왔다.

검기(劍氣)!”

혈나한이 흥분해서 외쳤다.

! !

뒤이어 여러 가닥의 밝은 빛들이 바위를 뚫고 나왔다.

서걱! 쩌억!

그 빛들은 종횡으로 움직여서 바위를 격자 형태로 잘라버렸다.

검벽신공(劍壁神功)이오! 검후가 천일폐관 끝에 백자검결(百字劍訣)의 오의를 깨우친 것 같소. 과연 사자천존께서 의발(衣鉢)을 전할만한 인재였소!”

혈나한의 부리부리한 눈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기뻐하는 혈나한과 달리 백발신녀의 새하얀 아미는 살짝 찌푸려졌다.

(검기가 지나치게 패도적으로 느껴진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처럼...)

산전수전 다 겪은 백발신녀의 눈에는 바위를 격자로 가르고 있는 검기들이 그저 강하기만 한 것으로 보인 것이다.

! 쩌적!

그 사이에도 검기들이 종횡으로 움직여서 격자 형태는 더 작아졌다.

처음에는 격자의 폭과 넓이가 한자 가량이었다.

검기들이 그 격자들을 다시 가르기를 반복하며 주먹 정도로 조밀해졌다.

부욱!

조밀한 격자무늬로 갈라진 바위의 중앙이 불룩해졌다. 안쪽에서 강한 힘이 밀고 나오며 생기는 현상이다.

!

한 순간 불룩해졌던 격자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며 동굴 입구가 형상을 드러냈다.

후두둑! 퍼퍽!

깍두기처럼 썰린 바위의 잔해들이 동굴 입구에 반원형으로 퍼졌다.

허어! 검기를 수평뿐만 아니라 수직으로도 발휘했구먼!”

동굴 앞에 흩어지는 정육면체의 바위 조각들을 보며 혈나한은 감탄했다.

검기가 단순히 밖으로 뿜어지기만 했다면 정육면체가 아니라 긴 막대형이 되어야했다.

동굴 안의 인물은 검기의 방향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혈나한이 감탄할 때 막고 있던 바위가 사라진 동굴 입구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는 이십대 중반 정도이며 키가 커서 어지간한 사내들만하다.

키는 커도 몸매는 호리호리해서 가냘프게 보인다.

하지만 전신에서 흘러넘치는 형언할 수 없는 기운은 보는 이를 압도당하게 만든다.

유달리 긴 눈매와 칼날 같은 콧대, 얇지만 붉은 입술은 초겨울의 서늘한 아침 공기를 떠올리게 한다.

양손에 칼집과 검을 나눠 든 여인은 검은 색의 낡은 저고리와 치마를 걸치고 있다.

그 수수한 차림도 여인의 독특한 분위기와 미모를 깎아내리지는 못한다.

삼단 같은 머리는 대충 묶었는데 오랫동안 자르지 않은 탓에 허리 아래까지 드리워져 있다.

 

여인의 이름은 대려화(代麗華), 재건되고 있는 무림맹의 신임 맹주다.

아직 젊은 나이, 심지어 여자이면서 무림맹의 맹주로 추대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본래 사자천존은 제자를 두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은퇴를 했는데 은퇴하기 직전 한 소녀에게 자신의 무공 일부를 전수해주었다.

비록 사자천존이 정식으로 제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무공을 전수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었다.

무림맹 인물들은 그 소녀가 자라면 맹주로 섬기자는 암묵적인 합의를 해왔다.

소녀의 이름이 대려화, 무림맹에서 미리 붙여준 별호가 검후였다.

 

검후!”

입이 귀에 걸린 혈나한이 동굴 쪽으로 황소처럼 달려갔다.

백발신녀도 물 흐르듯이 그 뒤를 따라갔다.

장로님!”

흑의여인, 검후 대려화는 보검을 칼집에 꽂으며 노인들에게 목례를 했다.

대공을 이룬 것을 경하하네. 무림맹이 십팔년만에 다시 맹주다운 맹주를 갖게 되었어.”

대려화 앞에 이른 혈나한은 합장하며 감격에 겨워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대려화의 성취는 자신들 사대장로에 필적하거나 심지어 넘어서는 경지에 이르러 있다.

오매불망 무림맹의 재건을 꿈꾸던 혈나한으로서는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찬의 말씀이세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은 계집이니 장로님들께서 잘 이끌어주시길 바라겠어요.”

혈나한에게 인사를 한 대려화는 백발신녀를 돌아보았다.

오랫만에 뵈옵니다. 한데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지요?”

백발신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막 출관한 맹주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게 되는구먼. 삼문육가를 본맹에 재 가입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팔비나타 당천성의 막내딸이 누군가에게 납치되었다고 하네.”

팔비나타의 막내딸이라면 사천일교(四川一嬌) 당아연이란 아이지요?”

대려화의 서늘한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올해 겨우 열 일곱 살 밖에 안된 어린 아이라 걱정이 많다네.”

어떤 조치를 취하셨는가요?”

상취개선이 직접 수색을 지휘하고 있는 중이라네.”

혈나한이 백발신녀의 말을 이어 받았다.

개방에서 알아낸 바에 의하면 흉수의 행적이 금릉으로 이어진 것같다고 하는데... 마침 금정사태가 제자인 소심(素心)이와 함께 금릉 근처에 머물고 있어서 도움을 청하는 전서구를 보냈네.”

잘 하셨어요. 본맹을 위한 당문주의 역할을 떠나 한 아이의 인생이 걸린 일이니 저도 금릉으로 가서 돕도록 하겠어요.”

스릉!

대려화는 다시 검을 뽑았다.

혈나한이 말했다.

이 늙은이들도 함께 가서 돕도록 하겠네.”

아니에요. 두 분 장로님은 워낙 저명하셔서 움직이실 경우 천마련의 이목에 포착 될 수밖에 없어요.”

대려화는 검을 발치로 떨구며 말했다.

떨어지던 검은 지면으로부터 한자쯤 되는 높이에서 멈췄다.

일리가 있네. 늙은이들이 동행하면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맹주의 신분이 노출될 수도 있겠지.”

백발신녀는 허공에 뜬 대려화의 검을 보며 말했다.

지잉! 화악!

직후 검을 중심으로 강대한 기운이 확 일어났다. 일종의 검기인데 매우 밀도가 높아서 마치 검이 거대해진 것처럼 보였다.

허어 검강(劍罡)까지...!”

단번에 길이 삼장(三丈)에 폭이 다섯 자쯤으로 늘어나는 검을 보며 혈나한은 감탄했다.

검강은 검기가 극한까지 압축되면 형성되는 것으로 강철을 새순처럼 자를 수 있다.

당금 무림에서 검강을 구사할 수 있는 검객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당아연 건은 제게 맡겨주시고 장로님들께서는 무림맹의 현안에 집중해주세요.”

대려화는 거대해진 검에 올라서며 말했다.

그리하겠네.”

조심하게.”

두 노인은 증손녀뻘인 대려화에게 고개를 숙여 복명했다.

거대해진 검의 날 위에 굴진자세로 올라선 대려화는 뒷발에 살짝 힘을 주었다.

그러자 검이 기울어지며 검극(劍極;검의 끝부분)이 허공으로 향했다.

연락은 개방을 통해서 하도록 하겠어요.”

대려화는 두 노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 투학!

직후 거대한 검은 번개가 치달리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대려화를 태운 거대한 검은 몇 리 밖을 날고 있었다.

허어!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겠구먼. 서른 살도 안된, 그것도 여자아이가 어검비행(御劍飛行)을 구사할 수 있다니...”

손을 이마에 붙인 혈나한은 어느덧 작은 점이 된 대려화를 보며 감탄했다.

백발신녀는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사자천존께서 직접 지목한 후계자예요. 십팔 년 만에 저 정도의 성취를 보이는 게 노신으로서는 그리 놀랍지도 않군요.”

신녀의 말이 맞소. 비록 십팔 년 전에는 우릴 실망시켰지만... 결국 우리에게 희망을 남겨주신 것도 전대 맹주이신 그분인 것이오.”

혈나한은 투박한 손을 모아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자질로만 보면 의심의 여지도 없이 제이(第二)의 사자천존인데...)

기꺼워하는 혈나한과 달리 백발신녀의 고운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었다.

(다만 저 천고기재가 여자라는 점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걱정이 되는구나.)

백발신녀는 혈나한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었다.

같은 여자인지라 대려화가 여자로서 감당하고 극복해야만 하는 고난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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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납치당한 소녀

 

 

 

봄날의 소주(蘇州)는 천국이나 다름없다.

백화(百花)가 만발하고 거미줄처럼 이어지는 수로(水路)에는 꽃놀이 나온 유람선들이 가득하다.

물산이 풍부한데다가 기후까지 좋은 소주가 항주(杭州)와 함께 지상의 낙원이라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선유객잔(仙遊客棧)은 천여 개가 넘는 소주의 객잔들 중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하다. 오랜 역사를 지녔으면서도 잘 관리를 해온 덕분이다.

전체가 수로에 휘감겨 있는 선유객잔은 안쪽으로도 물길이 나있어 손님을 태운 배들이 들고 나기도 한다.

선유객잔 깊은 곳에는 물길과 담장으로 에워싸인 독채 객실이 있다. 하룻밤 투숙하기 위해서는 삼백냥 넘는 거금을 지불해야하는 최고급 객실이다.

몇 칸의 방과 거실 등으로 이루어진 독채 주변에는 십여 명의 무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무사들은 칼이나 창 등의 무기도 지녔지만 여러 개의 주머니를 허리띠에 주렁주렁 달고 있다.

주머니가 여럿 달려있는 허리띠는 어느 한 가문을 상징한다.

무림인이라면 주머니 달린 허리띠를 찬 무사들과는 절대 시비를 트지 않는다. 그들이 속한 가문이 일단 진 빚은 반드시 갚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당가보(唐家堡), 보통은 사천당문(四川唐門)이라 불리는 당씨일족이 그들이다.

사천당문이 용독술(用毒術)과 치명적인 암기(暗器)로 유명하다는 걸 모르는 무림인은 없다.

독을 쓰는 그들의 재주는 만독동천에 필적하며 각종 암기는 상상을 초월하는 위력을 지녔다.

덕분에 사천당문은 정파백도의 대표적인 명문세가들인 삼문육가의 일원이라는 지위를 수백년 간 유지해오고 있다.

 

***

 

천마련의 횡포가 나날이 자심(滋甚)해지고 있소.”

!

팔비나타(八臂那陀) 당천성(唐天星)은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사천당문의 가주인 그는 성격이 불같은 것으로 유명하다.

성격이 격렬할 뿐 아니라 손속도 독해서 자신과 가문에 죄를 지은 자는 천리고 만리고 쫓아가 기필코 응징한다.

덕분에 당천성은 우내칠절 다음 서열인 십팔패왕(十八霸王)의 일원으로 꼽힌다.

십팔패왕은 정사(正邪)를 막론하고 한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유력자들을 일컫는다.

십팔 년 전, 궤멸직전까지 몰렸던 천마련은 사자천존 초대협의 갑작스러운 은퇴로 기사회생, 요원의 불길처럼 세력을 확장해오고 있소.”

당천성은 분노서린 눈으로 동석한 인물들을 둘러보았다.

실내에는 두 명의 노인과 한명의 소녀가 있다.

노인들 중 한명은 날카로운 인상에 칼을 차고 있으며 다른 한 노인은 대머리에 바위덩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몸을 지녔다.

칼을 지닌 노인은 삼문육가 중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장로 팽산(彭山)이다.

근육질의 대머리 노인은 역시 삼문육가에 속하는 산동악가(山東岳家)의 장로 악균(岳鈞)이다.

두 노인은 당천성의 은밀한 연락을 받고 가문을 대표해서 소주로 왔다.

실내에 있는 마지막 한명은 십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다.

막 피어난 꽃처럼 생기발랄한 미모의 소녀는 당천성의 막내딸이다.

이름이 당아연(堂雅姸)인 그녀는 일찍이 사천제일미인(四川第一美人)으로 불리며 당천성의 자랑거리가 되어왔다.

물론 구대문파나 우리 삼문육가는 아직 공격당하고 있지 않지만... 정파백도에 속한 군소문파와 가문들 중 상당수가 천마련에 항복하거나 멸문지화를 당해버렸소.”

당천성의 분노에 찬 토로가 이어졌다.

군소문파와 가문들을 일소한 천마련의 다음 표적이 구대문파와 삼문육가일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소.”

당천성의 우려가 괜한 노파심이 아니라는 걸 팽산과 악균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사태의 발단은 십팔 년 전에 있었던 사자천존의 이해 못할 은퇴였다.

당시 무림맹과 천마련의 대결은 막바지를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사자천존은 모두가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이었다. 그의 영도 아래 무림맹은 마도무림의 결맹인 천마련을 압도하고 있었다.

천마련은 모든 전선에서 패퇴했다.

어쩔 수 없이 천마련은 총단이 자리한 거야택(巨野澤)으로 후퇴하여 최후의 저항을 하려 했다.

하지만 천마련에게 승산은 거의 절망적일 정도였다.

철면마존은 사자천존을 이길 수 없고 무림맹의 객관적인 전력도 천마련의 몇 배였다.

천마련의 인간들은 멸절을 각오했다.

그랬는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생겼다.

사자천존이 돌연 은퇴를 선언하고 무림에서 사라진 것이다.

사자천존의 갑작스러운 퇴장으로 무림맹은 공황에 빠져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야택을 뛰쳐나온 천마련에 의해 무림맹은 허무하게 와해되고 말았다.

 

우리 산동악가도 천마련에 복속한 문파들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중이오.”

산동악가의 장로 악균이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동악가는 거야택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터를 잡고 있다.

그 때문에 천마련의 위협을 어떤 문파나 가문보다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당천성이 천마련의 횡포에 맞설 대책을 논의하자는 전갈을 보내자 산동악가는 장로들 중 수석인 악균을 파견했다.

정파백도는 다시 무림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야만 하오.”

하북팽가의 장로 팽산이 비분강개하여 말했다.

하북팽가 역시 산동악가 정도는 아니지만 거야택에서 그리 멀지 않다. 당천성의 제안에 즉시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사자천존을 보필했던 사대장로(四大長老)께서 검후(劍后) 대려화(代麗華)소저를 옹립하여 무림맹의 재건을 시도하고 계시오.”

당천성이 말했다.

우리 삼문육가도 이번 기회에 다시 무림맹에의 가입을 서둘러야만 할 것이오.”

물론 무림맹을 중심으로 정파백도가 일치단결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전에 우리들 삼문육가가 먼저 결맹을 하는 것이...”

의견을 개진하던 팽산은 흘깃 옆을 보았다.

탁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에 앉은 당아연이 하품을 하고 있다.

영애가 많이 지루한 것같소.”

팽산이 웃으며 말했다.

... 죄송해요.”

하품하던 당아연은 급히 소매로 입을 가리며 부친의 눈치를 보았다.

천마련의 감시로부터 두 분 장로님을 만나러 온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딸아이와 유람하는 것처럼 꾸민 것인데...”

당천성은 막내딸에게 눈치를 주며 혀를 찼다.

다행히 팽산과 악균은 너그럽게 웃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니 어른들의 딱딱한 얘기가 지루하기만 할 거요.”

당소저는 방으로 가서 쉬는 게 좋겠구먼. 먼 길 와서 피곤하기도 할 테니...”

그래도 돼요?”

당아연은 반색하며 부친을 보았다.

자리를 지키고 있어봐야 방해만 되니 네 방으로 가서 쉬어라.”

당천성은 한숨을 쉬며 가보라 손짓을 했다.

그렇게 할게요. 혹시 시키실 일 있으시면 불러주세요.”

발딱 일어난 당아연은 거실 입구로 갔다

문주께서는 막내 따님이 눈에 들어가도 아프지 않으시겠소.”

팽산이 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가에서 태어난 게 가엾어서 정을 좀 지나치다 싶게 주고 있는 편이외다.”

당천성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천당문에는 가외불출(家外不出)이라는 엄격한 가규가 있다.

문중의 비전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며느리에게는 전수하지만 딸에게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다.

사천당문의 딸들도 물론 무공은 익힐 수 있다.

다만 그녀들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은 일반적인 것들뿐이다.

사천당문에 대대로 전해지는 용독술과 암기술은 배우는 게 허락되지 않는다.

비록 본인이 명목상으로는 가주지만 실권은 어머니와 마누라가 쥐고 있는 불쌍한 신세요.”

당천성이 자조하며 말했다.

악균이 동조했다.

무림세가에 며느리로 들어오는 여자들이 어디 보통 재원들이겠소? 저희 산동악가도 실질적인 가주는 주모이신 악대부인(岳大夫人)이라고 할 수 있소.”

팽산도 쓴웃음을 지었다.

어느 가문이나 사정을 대동소이하구료.”

이래저래 우리들 수컷들만 불쌍한 세상이오.”

그러게나 말이오.”

당천성의 말에 팽산과 악균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

 

아유 이제야 살 것 같네.”

당아연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들어왔다.

이 좋은 계절에 천하명승 소주까지 와서 이 무슨 궁상이람. 꼰대들의 얘기는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질 것같으니 목욕이라도 해야겠어.”

당아연이 겉옷을 벗으며 욕실로 갈 때였다.

파팟!

누군가의 손가락이 당아연의 등쪽 혈도를 빠르게 찍었다. 정신을 잃게 만드는 혼혈(混穴)들이었다.

하악...!”

당아연은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무너졌다.

어떤 자가 문 뒤에 숨어 있다가 암습을 가한 것이다.

스륵!

끈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지는 당아연의 몸을 사내의 억센 팔이 끌어안았다.

(먼발치에서 본 대로군. 공포귀면(恐怖鬼面)이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오라고 했던 무결점의 순음지체(純陰之體)인 계집이다.)

당아연을 끌어안은 사내의 눈에 열기가 떠올랐다.

(... 정신을 잃으면 안돼!)

당아연은 흐려지는 의식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혼혈이 찍힌 탓에 주변 사물은 급속도로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순음지체는 계집 중의 계집... 단순히 만지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진다.)

뼈가 없는 듯 부드러운 당아연의 몸을 어루만지며 사내는 숨결도 거칠어져 갔다.

(이렇게 기막힌 계집을 맛도 보지 못하고 넘겨야하다니 아깝긴 하군.)

사내가 당아연의 아랫도리를 더듬어갈 때였다..

흐려지는 당아연의 시야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도자기가 들어왔다. 장식용인 그 도자기는 작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제발 소녀를 구해주세요 아버지!)

내공을 쥐어짜낸 당아연은 도자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당아연의 손바닥에서 암경(暗勁)이 터져나갔다. 그리 강하지 않은 잠경이었지만 도자기를 넘어트리기에는 충분했다.

(아차!)

사내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도자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와장창!

하지만 한발 늦어서 도자기는 탁자 아래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

 

“!”

“!”

문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사천당문의 무사들은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당아연이 들어간 방문 안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

 

삼문육가가 먼저 결맹을 한 후 무림맹에 재가입하자는 팽장로님의 의견에는 기본적으로 동의...”

와장창!

당천성의 말이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끊겼다.

(도자기 깨지는 소리!)

(당가주 막내딸의 방 쪽이다!)

팽산과 악균이 용수철 튕겨지듯 일어났다.

아연아!”

!

당천성은 이미 한쪽 벽을 박살내며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벽 너머가 당아연의 방이었다.

무슨 일이오 문주?”

영애가 다치기라도 했소?”

팽산과 악균도 부서진 벽을 통해 당천성을 따라갔다.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사천당문의 무사들도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져 깨진 도자기만 보일 뿐 당아연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연아! 여기 있느냐?”

당천성이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게 두 노인과 무사들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욕실에서도 당아연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았다.

문주! 어찌 된 거요?”

영애는 욕실에도 없소?”

팽산과 악균이 욕실로 다가오며 물었다.

아무래도... 딸년이 납치당한 것같소.”

당천성이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납치!”

그런...”

노인들이 경악할 때였다..

네놈들! 허수아비냐? 대체 무얼 하고 있었어?”

당천성이 방으로 뛰어든 무사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죄송합니다 가주님!”

아가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찾아내겠습니다.”

사천당문 무사들 사색이 되어 고개를 조아렸다.

당천성의 분노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연이의 신상에 불미한 일이 생기면 네놈들 모두 살 생각은 하지 마라. 당장 개방(丐幇)을 통해 무림맹에 연락해라. 이번 일도 결국 무림맹 때문에 벌어진 셈이니 아연이의 신상에 변고가 생기면 우리 사천당문과는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라고!”

존명!”

즉시 개방의 소주분타(蘇州分舵)를 찾아가 분부 전하겠습니다.”

사천당문 무사들은 사색이 되어 방을 뛰쳐나갔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떤 대담한 놈이 노부들이 지척에 있음에도 당소저를 납치하는 만행을 저질렀단 말인가?”

팽산과 악균은 놀라고 당황하여 당천성의 눈치를 보았다.

(천지신명이시여. 못난 당천성의 목숨이라도 내놓을 테니 제발 딸년을 지켜주시옵소서.)

수하들을 따라 건물 밖으로 나서는 당천성의 얼굴은 분노와 초조로 물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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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 와중(渦中)에 흥정

 

 

 

온유향은 시력을 잃은 대신 청력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덕분에 독천존이 아들에게 무언가 하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내 아들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예요?>

온유향은 다급히 방안으로 뛰어 들려 했다.

기다리거라.”

그런 그녀의 팔을 천불투가 잡아 저지했다.

강철처럼 변한 손으로 부운의 가슴을 겨누던 독천존이 힐끔 돌아보았다.

<아버님! 놓아주세요!>

진정해라. 서노사를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느냐?”

천불투는 몸부림치는 온유향을 달랬다.

앞이 안 보이는가?”

부녀의 실랑이를 지켜보던 독천존이 물었다.

딸년은 사연이 있어서 농맹(聾盲;벙어리와 소경)의 장애를 얻었소이다.”

안 보이는 눈으로 용하군. 노부가 뭘 하려는지도 알아차리고...”

!

독천존은 코웃음을 치며 강철같이 변한 손가락으로 부운의 가슴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은 부운의 가슴으로 두 마디씩 깊이 박혔다.

!”

아들 몸에 무언가 박히는 소리가 온유향을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말은 못해도 가슴 속에서 터지는 비명은 입 밖으로 나온다.

퍼득!

독천존의 다섯 손가락이 가슴에 박힌 부운의 몸이 벼락에 맞은 듯 경련을 일으켰다.

지지지!

실제로 독천존의 다섯 손가락은 벼락에 휩싸여 있었다.

<... 부운아!>

아들의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린 온유향이 애절하게 울부짖었다.

왼손으로 수양딸의 팔을 잡고 있는 천불투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다.

빠직!

천불투의 오른손에 쥐여진 두 개의 구슬 껍질이 조금 갈라졌다. 한 푼만 더 힘을 가하면 구슬은 압축열에 의해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벽력탄(霹靂彈)은 사양일세.”

독천존은 부운의 가슴에 다섯 손가락을 박아 넣은 채 웃었다. 화기에 민감한 터라 화탄이 언제라도 터질 수 있는 상황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노부는 노형의 손자 놈 머리에까지 미치고 있는 구룡짐독의 독성을 아래로 끌어내고 있는 중일세.”

빠지직!

독천존의 손가락을 휘감은 벼락이 강해졌다.

끄윽...”

그에 따라 벌벌 떠는 부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

온유향은 그제야 독천존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안도했다.

천불투 역시 수양딸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온몸에 퍼져 있는 구룡짐독의 독성을 단전에 몰아넣어주면 생활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걸세.”

독천존은 부운의 몸에 주입하는 내공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며 말했다. 내공을 운용하면서도 말하는 데 부자연스러움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독천존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일각 정도가 흘렀다.

으으으...”

이윽고 부운은 정신이 돌아와 눈을 떴다.

구룡짐독이 마침내 단전으로 모두 수납된 것이다.

“!”

눈을 뜨던 부운은 움찔했다.

괘씸한 놈! 살고 싶으면 숨김없이 말해라!”

독천존이 두 눈에서 시퍼런 벼락을 토해내며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걸 소멸시키는 검은 용들을 삼키고도 죽지 않았구나. 정신을 잃고 있던 사이에 독천존 서래음이 온고당으로 찾아왔고...)

부운은 단박에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네놈... 어떻게 구룡짐독을 들여 마시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느냐?”

독천존이 노려보며 물었다.

저도 그건...”

경고하는 데 허튼 수작은 부리지 마라. 네놈 목숨뿐 아니라 세 개의 목숨이 더 걸려있으니...”

시간을 벌기 위해 하려던 부운의 말을 독천존이 막았다.

(세 개의 목숨!)

곁눈질로 방 밖을 본 부운은 즉시 이해했다. 방문 밖에 외조부가 어머니의 팔을 잡고 있고 안채 문 밖에는 분이가 쓰러져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다. 자기 사문의 비밀이 유출된 걸 알면 독천존이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으니....)

부운은 찰나지간에 어찌 해야 가족을 지킬 수 있을지 판단을 내렸다.

믿을지 말지는 노야의 자유겠지만... 아홉 마리의 검은 용이 알아서 내 몸속에 들어왔어요.”

부운은 열여섯 살 소년에게 어울리는 겁먹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것이냐? 어떤 생명체든 죽이는 구룡짐독을 그냥 마셨는데 멀쩡하다는 말을...?”

그래서 믿을지 말지는 노야의 자유라고 하지 않았나요?”

부운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독천존은 날카롭게 변한 손가락을 여전히 부운의 가슴에 꽂아넣은 상태로 노려보았다.

“...!”

“...!”

두 노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순진하면서도 겁에 질린 연기를 하는 소년과 노회할 대로 노회한 늙은 생강 사이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부운은 삽시에 독천존의 기억 대부분을 읽을 수 있었다. 친절하게도 손가락들을 자신의 몸에 깊이 박은 상태를 유지해준 덕분이다..

물론 기억을 읽은 내색은 하지 않았다.

문 밖에 있는 천불투와 온유향의 긴장은 극한에 이르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독천존이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가족 모두가 오늘 죽을 수밖에 없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 네놈의 말은 믿도록 하겠다!”

!

독천존이 부운의 가슴에서 다섯 손가락을 뽑아냈다.

손가락들이 뽑힌 곳에는 다섯 개의 구멍이 나있었다. 가슴에 자리한 오대중혈(五大重穴)의 위치였다.

츠츠츠!

놀랍게도 그 구멍들은 순식간에 메워졌다.

독천존에게는 독을 이용하여 상처를 급속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상당히 깊었던 상처가 단번에 아물었다.)

놀라며 일어나는 부운의 가슴에는 오행(五行) 형태의 흉터만 남아있었다.

네가 일각 전쯤에 마신 검은 용들이 무언지는 네 조부가 알려줄 것이고...”

독천존은 탁자에 진열되어 있는 크고 작은 병들 중 하나를 집어들었다. 세치 정도 크기에 붉은 빛은 띤 옥병(玉甁)이었다.

받아라.”

무엇인지요?”

부운은 독천존이 내미는 옥병을 두 손으로 받았다.

붉은 빛을 띤 옥병에서는 은은한 열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열기를 품고 있는 옥, 온옥(溫玉)으로 만들어진 듯 했다.

독천존이 금천구룡로를 비롯한 물건들을 살천독낭에 넣으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빙결화옥고(氷結化玉膏)라는 것이다.”

얼어붙어 옥이 된다? 이름은 어여쁘군요.”

부운은 능력을 써서 온옥으로 만들어진 옥병의 내력을 살펴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구덩이와 끔찍한 냉기가 느껴졌다. 한 모금 정도 되는 빙결화옥고를 구하기 위해 백명 가까운 목숨이 희생되었고...

(저 병에 든 것은 혹시...)

천불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대신투답게 빙결화옥고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독천존이 천불투를 힐끔 보며 말했다.

약효는 이름 그대로다. 그걸 복용하면 네 몸뚱이는 꽁꽁 얼어붙어 옥같이 단단해질 것이다.”

... 독약이었군요. 아름다운 이름과 달리...”

부운은 겁에 질린 척 했다.

<흐윽!>

(역시...)

문 밖의 온유향이 몸서리를 치고 천불투는 한숨을 쉬었다.

구룡짐독은 절대 세상에 퍼지면 안되는 존재다. 만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면 빙결옥화고를 마셔라. 그럼 네 몸뚱이는 꽁꽁 얼어붙어서 몇 달 정도는 구룡짐독이 몸 밖으로 퍼지는 걸 막아줄 것이다.”

독천존은 탁자 위의 물건들을 남김없이 살천독낭에 챙기며 말했다.

그 사이에 노부가 네 시신을 수습해서 구룡짐독을 어떻게든 봉인할 것이다.”

(무섭고 잔인한 얘기를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군.)

부운이 기막혀 할 때였다..

경고하는데... 오늘 이후로 금릉을 떠나지 마라. 정기적으로 노부가 와서 확인할 것이며 당연히 감시하는 눈도 있을 것이다.”

감시하는 눈길이란 만독의종을 말한다.

도척총림 정도는 아니어도 만독의종의 이목은 세상 도처에 널려있다.

부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만일 제가 금릉을 벗어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럼 네놈 대신 다른 사람들이 대가를 치루겠지.”

독천존은 서늘하게 웃으며 방 밖의 세 사람을 훑어보았다.

(대놓고 협박을 하는군.)

독천존의 말뜻을 모를 리 없는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부는 본래 망산쌍독을 쫓아 금릉에 왔었네만...”

살천독낭을 챙긴 독천존은 문 쪽으로 가면서 천불투에게 말했다.

망산의 그 망나니들이 서노사에게 죄를 지었소?”

천불투는 수양딸과 함께 문에서 비켜섰다.

놈들은 노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에 실혼고라는 걸 훔쳤는데... 놈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 이곳 금릉 일원이라더군.”

독천존은 방을 나섰다.

하지만 구룡짐독에 비하면 실혼고를 도난당한 건 일도 아니고... 해서 노부는 이 후로 조룡여의대법이나 극독성심결을 찾는데 매진할 작정일세. 그러니 노부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손주놈이 다른 곳으로 튀지 못하게 단속하시게.”

명심하겠소이다.”

천불투가 대답할 때였다.

잠깐 기다려주세요.”

부운이 서둘러 상의를 걸치며 문쪽으로 오며 외쳤다.

제가 남의 손에 죽을 걸 걱정하셨는데... 그럼 제게 몸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을 가르쳐주시는 게 이치에 맞지 않을런지요?”

무공을 가르쳐달라?”

독천존은 어이가 없었다.

천불투는 슬쩍 웃었고 온유향은 당황하여 소매로 입을 가렸다.

그렇습니다.”

부운은 방을 나서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 뻔뻔한 놈이... 소매치기를 한 것도 모자라 무공까지 가르쳐달...”

눈을 부라리면서 호통을 치려던 독천존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 말 그대로 천고기재(千古奇才). 무공을 익히기에는 최적의 몸을 지닌...)

독천존은 비로소 부운이 이제껏 본적이 없는 빼어난 자질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생각 같아서는 제자로 삼고 싶지만 문중의 규율을 어길 수는 없는 게 유감...)

독천존은 애써 아쉬움을 달랬다.

만독동천은 위험한 독들을 다루다 보니 제자를 받아들이는 데 매우 까다롭다. 출신성분을 따질 뿐 아니라 오랜 시간 지켜보며 제자를 받아들일지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부운은 만독동천의 제자가 되기에는 여러 모로 결격사유가 있다.

독천존 자신이 만독동천의 문주이니 결단을 내릴 수는 있다.

다만 그 전에 부운의 성품이나 자격을 꼼꼼하게 검증해야한다.

(구룡짐독을 품고 있는 것도 그렇고... 시간을 두고 지켜본 후에 만독동천의 제자로 받아들일지 결정해야겠지.)

독천존은 마음을 정리하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네놈에게 호신수단을 가르쳐줄 필요와 이유는 충분한 것같구나.”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부운은 감격한 표정을 지으며 포권했다.

하지만 제자가 아닌 네게 우리 만독동천의 독공을 가르쳐줄 수는 없는 일... 대신 노부가 얼마 전에 얻은 치명적인 위력의 지법(指法)을 전수해주마.”

우내칠절 중 한분이신 노야께서 치명적이라고 하시는 것을 보니 위력이 어떨지 짐작이 갑니다.”

부운은 과장되게 감탄하는 척 했다.

늙은 구렁이인 독천존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더할 수 없이 강력한 지법인데 특히 아주 빨라서 일단 펼쳐지면 피할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지법을 가르쳐주기 전에 한 가지 다짐을 받아둘 것이 있다.”

제가 무엇을 약속해드리면 되는지요?”

저 계집아이에 관한 것이다.”

독천존은 가게로 통하는 문 밖에 쓰러져 있는 분이를 돌아보았다.

천불투와 온유향의 시선도 반사적으로 분이에게 향했다.

부운은 외조부와 어머니의 반응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분이에 관한 것이라면 어떤...?”

노부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저 계집을 네 목숨인 듯 지키겠다고 약속해야한다.”

독천존이 엄숙하게 말했다.

부운은 분이와 독천존 사이에 간단하지 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약속드리겠습니다.”

지금의 그 장담, 잊지 말아라.”

독천존은 천불투를 힐끔 보며 말했다.

잠깐 가게에 나가 있도록 하자.”

천불투는 온유향의 팔을 잡고 가게쪽으로 갔다.

온유향은 아들을 독천존과 단 둘이 있게 하는 게 불안했지만 어쩔 수 없이 천불투를 따라갔다.

독천존이 말했다.

기억력은 좋겠지?”

남보다 그리 쳐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번거롭지 않을 테니...”

고개를 끄덕인 독천존은 전음입밀로 바꿔 말을 이었다.

<이 지법의 이름은 비파천강지(琵琶天罡指)>

특이한 이름이로군요.”

시전할 때 비파를 치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나서 붙은 이름이다. 하지만 워낙 빨라서 상대가 비파 소리를 들었을 때는 이미 몸에 구멍이 나있을 것이다.”

독천존은 전음입밀을 써서 한 가지 내공 운용비결을 말해주었다.

그 비결대로 운용하면 내공을 일점에 집중시켰다가 말 그대로 전광석화같이 발출할 수 있다.

가게로 나가며 천불투는 뒤를 돌아보았다.

독천존이 손짓발짓을 섞어서 무언가 설명하고 있고 두 손을 앞으로 모은 부운이 진지하게 듣고 있다.

(전화위복이라더니... 독천존의 주머니를 턴 덕분에 부운이가 그토록 꿈에도 그리던 상승무공을 배울 숴 있게 되었구나. 물론 몸속에 구룡짐독이라는 재앙을 담고 살아야하는 몸이 되었지만...)

천불투의 주름진 얼굴에 근심이 한 겹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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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짐독(鴆毒), ()이라도 죽일 수 있는...

 

 

 

! !

말벌들의 날개 짓이 더 빨라졌다.

그 오싹한 소리만으로도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온유향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말벌들 때문은 아니었다.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난 수많은 넝쿨들이 몸을 조이고 찔러대는 것만 같다.

독천존이 뿜어내는 끔찍한 살기와 위압감이다.

(... 부운이를 찾아온 저 노인이 칠대고수 중 한명인 독천존 서래음...)

독천존의 존재감은 오래 전에 두려움이란 감정을 잃어버렸다 생각한 온유향조차 혼절 직전까지 몰아넣을 정도로 강렬했다.

말해봐라!”

독천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상 하직하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기회를 주겠다.”

부탁드리겠소이다.”

천불투가 두 손을 바닥에 대며 고개를 조아렸다.

부디 이 늙은이의 손자를 살려주시오 서노사!”

손자를 살려 달라?”

독천존은 스산하게 웃었다.

부탁하기 전에 용서부터 빌어야하는 것 아닌가?”

물론 손자 놈의 무례에 대해서는 용서를 빌어야하겠지만...”

천불투는 조아렸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노사는 노부의 손자를 반드시 살려야만 할 것이오.”

이거 참...”

독천존은 어이가 없었다.

부탁을 넘어서 협박을 하는 것인가? 나 서래음에게?”

독천존의 새파란 눈에 번갯불이 치달렸다.

그 푸른 눈빛은 앞이 보이지 않는 온유향조차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천불투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서노사가 왜 노부의 손자를 살려야하는지는 직접 확인해보시오.”

천불투는 온유향이 막고 있는 방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체 무슨 굿판을 벌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만 노부의 물건에 손 댄 이상 용서받을 수 없...!”

천불투의 시선을 따라가던 독천존의 눈이 부릅떠졌다.

쿠오오!

침대에 누워있는 부운의 몸 위로 아지랑이 같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는데 그 형상이 영락없이 용이었다.

... 구룡짐독(九龍鴆毒)!”

독천존은 너무 놀라 숨이 콱 막힐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구룡짐독에 중독되고도 어떻게 살아있단 말인가?”

충격에 휩싸인 독천존은 뛰듯이 부운의 방으로 다가갔다.

구룡짐독이라니... 노부의 손자가 중독된 게 전설 속의 짐독(鴆毒)이었소이까?”

천불투도 놀라 몸서리를 치며 일어났다.

상황을 알아차린 온유향이 지미고 있던 방문 앞에서 물러섰다.

그렇다. 저 놈 몸속에 들어있는 것이 세상 모든 독들의 제왕 짐독이다.”

독천존은 납덩이처럼 굳어진 얼굴로 방에 들어갔다.

(짐독... 짐독이었구먼!)

천불투는 경악과 흥분에 휩싸인 채 부운의 방으로 다가갔다.

 

짐독은 전설 속의 독물 짐조(鴆鳥)의 독이다.

산해경(山海經)에 의하면 여궤지산(女几之山)에 사는 짐조는 수천년을 살면서 오직 독을 지닌 독물들만 먹이로 삼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짐조의 몸에는 천지간에서 가장 지독한 독기가 쌓이게 된다.

짐조의 피 한 방울로 만 명을 죽일 수 있으며 그놈이 날아간 아래쪽에서는 모든 생명이 말살된다고 한다.

피뿐 아니라 짐조의 깃털과 뼈와 살에 섞여있는 독 역시 고대로부터 가장 지독한 독으로 알려져 있다.

일단 중독되면 반드시 죽음에 이르기에 짐조의 독은 독()의 제왕(帝王), 또는 제왕(帝王)을 죽이는 독()으로 불린다.

다만 짐조는 멸종되어 몇 백 년 내에는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짐독을 술법으로 정제하여 영성(靈性)을 갖게 만든 것이 구룡짐독이다.”

독천존은 침대 옆에 서서 부운을 내려다보았다.

부운의 몸에서 일어나는 용을 닮은 기운들은 틀림없이 구룡짐독의 영기(靈氣)였다.

일단 금천구룡로(禁天九龍爐)에서 풀려나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이는 것이 구룡짐독인 데...”

독천존의 시선이 침대 옆에 놓인 작은 탁자로 향했다.

탁자에는 살천독낭과 그것에 들어있던 물건들이 빠짐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물건 들 중에는 뚜껑이 열린 향로도 놓여있는데 안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어떻게 구룡짐독이 몸 안에 들어갔는데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단 말인가?”

독천존은 당혹해하며 비어있는 향로를 집어들었다.

금은 세상 어떤 것에도 부식되지 않는다. 가공할 독성을 지닌 짐독도 금을 녹이지는 못한다.

금천구룡로라는 이름의 향로가 금으로 만들어진 이유다.

그 향로가 오제(五帝) 중 만독조종께서 남기신 금천구룡로였구려.”

방문 밖에서 지켜보던 천불투가 말했다.

금천구룡로가 만독조종님의 유물인 것도 알고... 확실히 노형(老兄)도 평범한 인생은 아니로군.”

천불투를 돌아보는 독천존의 눈에서 시퍼런 벼락이 흘러넘쳤다.

그 눈빛은 앞이 보이지 않는 온유향을 떨게 만들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천불투는 독천존의 눈빛을 대소롭지 않게 흘려보냈다.

어느덧 구순(九旬)을 바라보는 나이외다. 오래 산 덕분에 들은 것이 좀 있을 뿐이지요.”

겸손한 척 하긴... 만일 노부가 노형의 손주놈을 죽이려 했다면 사용할 독수까지 준비해뒀으면서...”

독천존은 스산하게 웃으며 천불투의 허리춤을 보았다.

뒷짐을 지고 있는 천불투의 손에는 오리알만한 검은 구슬 두 개가 쥐어져 있었다.

크기는 작아도 그 구슬들은 작은 동산을 어렵지 않게 날려버릴 수 있는 폭발력을 지녔다.

삼문육가 중 화기(火器)의 명가 벽력당(霹靂堂)에서 만들어진 화탄(火彈)들 중 가장 강력한 게 그것이다.

본래 독()의 상극은 불()이다.

그래서 독천존은 불의 기운에 매우 예민하다.

온고당에 들어서는 순간 독천존은 강력한 화기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 손자가 자라는 걸 보는 게 유일한 낙인데 무슨 짓인들 못하겠소이까?”

화탄을 숨기고 있는 걸 들켰음에도 천불투는 태연했다.

어련하시겠나?”

독천존은 냉소하며 다시 향로를 보았다.

어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 거푸 벌어졌군. 구룡짐독을 삼키고도 살아있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어서 사람 힘으로는 열 수 없는 금천구룡로가 열리기도 하고...”

금천구룡로라는 이름의 향로를 살펴보는 독천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천불투가 물었다.

금천구룡로는 어떻게 해야 열리게 되어 있었소이까?”

두 가지 경우인데... 만독조종님께서 남기신 술법과 만독조종님의 핏줄만이 금천구룡로를 열 수 있네.”

독천존은 거리낌 없이 금천구룡로에 얽힌 비밀을 얘기해주었다.

그중 술법을 아는 건 하늘 아래 노부뿐이니 제하고, 만독조종님의 핏줄은 이미 오래전에 세상에서 사라졌...!.”

천불투의 질문에 대답해주던 독천존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걸... 이걸 연 게 누구인가?”

독천존은 몸서리를 치며 급히 천불투를 돌아보았다. 금천구룡로가 열리는 두 번째 경우를 떠올린 것이다.

그걸 연 아이는 서노사께서도 이미 만나셨소이다.”

천불투는 가게로 통하는 문을 고개 짓으로 가리켰다.

부서진 문 밖에는 분이가 기절한 채 누워있다.

... 저 계집! 저 계집은 누구인가?”

독천존은 흥분을 억누르려 애쓰며 분이를 살펴보았다.

분이라고... 이 동네에서 선술집을 하는 전직 작부(酌婦)의 딸이외다.”

허어! 작부의 딸이라고?”

천불투의 대답을 들은 독천존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천한 작부의 딸년이 금천구룡로를 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천불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독조종께서 세상에 남긴 후손들 중 한명의 피가 분이의 몸에 흐를 수도 있지 않겠소?”

일리가 있군.”

독천존은 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독조종의 혈통은 공식적으로는 단절된 상태였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후손이 남아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고 보니....)

독천존은 자신이 부리는 거대한 말벌, 대독금봉들이 분이를 공격하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대독금봉은 만독조종이 특히 정성을 기울여 개량한 독물들이다.

덕분에 몸집이 커지고 독성이 강력해졌을 뿐 아니라 영성까지 지녀서 대대로 기억을 후손들에게 남기기도 한다.

그 대독금봉들이 분이를 쏘려다가 돌연 물러났었다.

(대독금봉들이 저 계집의 몸에서 만독조종님의 핏줄을 느낀 것일까?)

분이가 만족조종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독천존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독천존은 만독조종의 수제자였던 천독일품(千毒一品)이란 인물의 후손이다.

천독일품에 의해 세워진 만독동천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만독조종의 핏줄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송원(宋元), 원명(元明) 교체기의 대혼란 속에서 만독조종의 후손들은 차례로 절멸당하고 말았었다.

한데 만독조종의 핏줄일 가능성이 있는 계집아이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이다.

 

(금천구룡로를 소매치기 당한 게 어쩐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닌 것 같구나.)

독천존은 오늘 일어난 소동이 운명의 안배인 것처럼 느껴졌다.

천불투가 독천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분이 말에 의하면 자기가 실수로 연 금천구룡로에서 튀어나온 검은 용들을 노부의 손자가 들여 마셨다고 하외다.”

그게 정말 이해가 안된단 말이지. 노부라 해도 구룡짐독을 들이마시고는 목숨을 부지한다고 장담할 수가 없거늘...”

독천존은 흐릿한 용의 형상이 들고 나는 부운을 보며 당혹스러워했다.

천불투가 애써 긴장을 감추며 물었다.

손주놈의 몸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한 가능성은 어떤 것이 있겠소이까?”

구룡짐독이 그걸 마신 인간을 죽이지 않을 가능성이라...”

독천존은 금천구룡로에 새겨진 용의 향상들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독조종께서 남기신 조룡여의대법(調龍如意大法)을 익혔다면 숨을 쉬듯이 구룡짐독을 자연스럽게 몸속에 가뒀다가 토해낼 수가 있긴 한데...”

조룡여의대법이란 글자를 풀면 용을 부려서 뜻대로 하는 큰 재주라는 뜻이 된다.

서노사께서도 조룡여의대법을 알고 계시외까?”

이어진 천불투의 질문에 독천존은 코웃음을 쳤다.

알고 있었다면 거야택(巨野澤)에 숨어서 세상의 주인인 척 하고 있는 어떤 늙은이도 이미 한줌의 독수가 되었겠지.”

 

거야택은 황하(黃河)와 회수(淮水) 사이의 광대한 습지다.

황하와 회수가 수시로 범람하는 탓에 거야택에는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자연스럽게 거약택 일대는 무법지대가 되었다. 유사 이래 죄를 지은 무수한 죄인들이 공권력을 피해 거야택으로 숨어들었었다.

거야택을 근거지로 삼아 악명을 떨쳤던 도적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유방이 항우를 이기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운 팽월(彭越)과 송나라 시절 악명 높은 도적 송강(宋江)이 있다.

원말 명초의 작가 시내암(施耐庵)이 송강을 주인공으로 쓴 소설이 그 유명한 수호전(水滸傳)이다.

십오 년 전, 사자천존의 돌연한 은퇴로 무림의 패권을 차지한 천마련의 총단이 바로 그곳 거야택에 자리하고 있다.

거야택의 다른 이름이 양산박(梁山泊)이다.

 

천불투가 넌지시 물었다.

구룡짐독을 부릴 수만 있다면 천마련의 련주 철면마존이라도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으시다는 것인데...”

독천존은 금천구룡로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만독동천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만독조종님의 절기 중 절반 이상을 유실하고 말았네. 실전된 그 절기들 중에 조룡여의대법도 포함되어 있고... 그 때문에 노부도 구룡짐독을 보관하고는 있지만 사용할 엄두는 내지 못해왔지.”

노부의 손자놈이 조룡여의대법을 익혔을 가능성은 전무하오만...”

노부도 그게 이해가 안되는 중인데...”

독천존은 미간을 찡그리며 부운을 보았다.

다른 가능성은 없소이까?”

없네! 구룡짐독을 몸속에 가둘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이 조룡여의대법이야.”

만일 노부의 손자가 구룡짐독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소이까?”

세상에 종말이 오겠지. 구룡짐독은 불로 태울 수도 없고 땅에 묻거나 바다에 버려도 없어지지 않기 때문일세.”

독천존의 얼굴은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오직 만독조종님께서 말년에 창안하셨다고 알려진 극독성결심법(克毒聖潔心法)으로만 없앨 수 있으나 극독성결심법 역시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게 문제...”

서노사께서는 어떻게든 노부의 손자를 살려야겠소이다. 그 아이의 몸이 금천구룡로 대신 구룡짐독을 가두고 있는 상태이니...”

어쩔 수 없이 그래야겠군.”

독천존은 오른손을 웅크리며 부운의 가슴을 겨누었다.

! !

원래 깡말랐던 독천존의 다섯 손가락이 강철처럼 변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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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찾아온 독()의 제왕(帝王)

 

 

 

... 다 챙겼어요.”

분이가 철두에게서 건네받은 살천독낭에 향로를 넣으며 말했다.

수고했다.”

천불투는 분이가 내민 살천독낭을 받았다.

너희들...”

그리고는 고개 돌려 철두와 정칠을 노려보았다.

... !”

“...!”

정칠과 철두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독천존이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는 알 것이다. 만일 너희들이 오늘 일과 관련이 있다는 걸 독천존이 알게 되면...”

천불투는 살천독낭과 함께 부운을 안아들며 정칠과 철두를 지긋이 보았다.

공포에 질린 정칠과 철두는 대답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몸뚱이가 촛농처럼 녹아내려 죽고 싶지 않다면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마라.”

천불투는 부운을 안고 입구로 갔다.

... 명심하겠습니다.”

정칠이 식은땀 흘리며 대답했고. 겁에 질린 철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집으로 돌아가라.”

휘익!

그 한마디를 끝으로 천불투는 폐가에서 날아나갔다.

분이도 소매로 눈물 닦으며 천불투를 따라 달려갔다.

... 조영감 말이 맞다. 부운이가 자기 주머니 터는데 우리가 관여했다는 걸 알면 독천존이 가만 둘리 없다.”

정칠은 철두에게 손을 내밀며 오만상을 썼다.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 혼자서는 움직일 수가 없다.

철두는 말없이 정칠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오늘 일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하자.”

그래야겠지.”

부축 받고 부축한 정칠과 철두도 폐가를 나섰다.

천불투는 이미 사라졌고 분이가 해하촌을 향해 달음박질치는 게 보인다.

(젠장... 부운이 새끼하고 엮여서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가 없다.)

정칠을 부축해서 언덕길을 내려가며 철두는 이를 악물었다.

(이번 기회에 얄미운 그 새끼가 칵 뒈져버렸으면...)

그러면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부운이가 잘못되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철두였다.

물론 나쁜 마음이 생기는 건 분이 때문이었다.

(내 마음 나도 모르겠다. 부운이 새끼가 밉지만 그 새끼 덕분에 목숨 부지한 걸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철두는 한숨을 쉬며 정칠을 끌고 언덕길을 내려갔다.

! !

한데 폐가를 떠나는 아이들을 몇 마리의 말벌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어른의 가운데 손가락만한 거대한 말벌들이었다.

 

***

 

온유향은 온고당 안채의 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마음은 마른 검불처럼 타들어가지만 눈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이번 소란이 자기 아들과 관련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의부님이 사람들 이목도 아랑곳 않고 폐가쪽으로 날아가신 건 부운이 때문일 텐데...)

온유향이 속절없이 마주 잡은 손만 비비고 있을 때였다.

휘익!

허공으로부터 누군가 날아내렸다.

<... 아버님!>

온유향은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그 인물이 누군지 즉시 알아차렸다.

유령같이 온고당 안채의 마당으로 내려선 건 물론 천불투였다.

<부운이... 부운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온유향은 두 팔을 내밀며 천불투에게 다가갔다. 보지 않고도 천불투가 아들을 데려온 것을 안 것이다.

걱정마라. 위급한 상태는 아니니...”

천불투는 온유향을 안심시키며 한쪽 건물로 갔다.

온유향의 거처 맞은편 건물에는 천불투와 부운의 방이 있다.

<어쩌다가... 부운이가 왜 정신을 잃을 건가요?>

온유향은 울먹이며 천불투를 따라갔다. 시력을 잃은 대신 극도로 예민해진 청력 덕분에 그녀는 아들이 어떤 상태인지 알아차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주마. 우선 물을 좀 데우도록 해라.”

천불투는 부운을 안고 부운의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

온유향은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며 허둥지둥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운의 방은 단출하다. 옷장과 침대가 있을 뿐이고 그 흔한 책장도 없다.

한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는 능력을 지닌 덕분에 부운은 책을 소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몇 권의 책이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을 뿐이다.

천불투는 부운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혔다.

으으으!”

금방이라도 꺼질 듯 위태로운 신음을 흘릴 뿐 부운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는 부운의 몸속을 이질적인 존재들이 누비고 있는게 느껴진다.

(버티거라 부운아. 네가 죽기라도 하면 또 한 목숨도 세상을 떠나게 될 테니...)

천불투는 땀으로 물든 부운의 이마를 닦아주며 한숨을 쉬었다.

부엌에서 황망히 물을 끓이고 있는 온유향의 모습이 보인다.

(추궁과혈(推宮過穴)이라도 해서 도와주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곧 이번 사달의 원인을 제공한 인간이 쳐들어올 테니...)

부운의 땀을 대충 닦아준 천불투는 방을 나왔다.

곧 들이닥칠 강적을 상대할 방책을 준비해야만 한다.

 

***

 

탁탁!

분이는 숨이 턱에 차서 온고당쪽으로 달려왔다.

해하촌에서 올려다보면 바로 보이지만 폐가까지는 거리가 제법 된다. 게다가 상당히 급한 경사길이라 오르내리는 데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하악 학!”

비오듯 땀을 흘리며 달리는 분이의 몸은 먼지투성이가 되어 있다.

게다가 여기저기 상처가 나서 피가 나거나 말라붙어 있다.

상처의 대부분은 검은 용들이 무너트린 폐가 지붕의 잔해들에 맞아서 생긴 것이다.

또 경사진 길을 달려 내려오다가 몇 번 나뒹굴어 여기저기 까지기도 했다.

하지만 분이는 상처의 쓰라림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제발... 제발 죽지 마 부운오빠!)

분이는 눈물을 흩날리며 온고당을 향해 달려갔다. 부운이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아홉 마리 검은 용을 들이마시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오빠가 죽으면 분이도 따라서 죽어버릴 거야.)

죽을힘을 다해 달려가는 분이를 오가던 사람들이 놀라 돌아본다.

온고당이 곧 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온고당 앞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히익!”

... 위험해!”

온고당 앞을 오가거나 온고당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왜 그래요?”

분이는 온고당 근처에서 멀어지려는 사람들에게 외치며 달려갔다.

들어가지 마라 분이야!”

안돼!”

마을 사람들이 분이를 발견하고 다급히 외쳤다.

할아버지! 부운 오빠 어때요?”

분이는 마을 사람들의 외침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온고당으로 뛰어 들어갔다.

!”

하지만 온고당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이는 비명을 지르며 급히 멈춰서야만 했다.

부웅! !

온고당 안에 수많은 말벌들이 날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벌도 보통의 말벌이 아니라 어른 가운데 손가락만한 괴물들이었다, 세차게 날개짓을 하는 그놈들은 거의 참새만하게 보인다.

온고당 안에 말벌들이 가득해!”

세상에는 저렇게 큰 말벌도 있는 거야?”

마을 사람들이 온고당을 들여다보며 겁에 질려 웅성거렸다.

부웅 붕!

말벌들은 주로 응접실 끝에 몰려있다.

빨리... 빨리 나와라 분이야.”

그놈들한테 쏘이면 죽을 수도 있어.”

분이를 아는 마을 사람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저 말벌들... 마치 안채로 사람들이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있는 것같애!)

! !

분이는 안채로 통하는 문 주변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말벌들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겁에 질렸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부운에 대한 걱정이 압도적으로 컸다.

(쏠 테면 쏴! 죽더라도 난 부운오빠를 봐야겠어!)

분이는 입을 앙다물며 안채로 통하는 문으로 다가갔다.

! !

다가오는 분이 앞쪽에서 말벌들이 위협적으로 날아다녔다.

그놈들의 날개짓 소리만으로도 오금이 저린다.

그래도 분이는 굴하지 않고 안채로 다가갔다.

부웅! !

안채로 통하는 문이 가까워지자 위협만 하던 말벌들이 일제히 분이를 쏘려고 날아들었다.

(쏘인다!)

분이는 어쩔 수 없이 공포에 질려 몸을 응크렸다.

그랬는데 그 직후 이변이 일어났다.

막 분이를 쏘려던 말벌들이 일제히 멈춘 것이다.

쏘는 걸 멈춘 정도가 아니었다.

! !

말벌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터주기까지 했다.

(저 말벌들이 왜....)

돌변한 말벌들을 보며 분이가 안도하며 어리둥절할 때였다.

제법 결기(結氣)가 있는 계집아이로군.”

뒤에서 늙으스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년은 흥륭객잔 근처에서 노부를 엿보던 망나니들 중 한명이겠지?”

녹발벽안의 노인이 뒷짐을 짚은 채 온고당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 독천존!)

분이는 겁에 질려 숨이 콱 막혔다.

온고당으로 들어선 노인은 물론 독천존이었다.

너희 년놈들이 오늘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을 했는지는 곧 알게 될 것이다.”

독천존이 새파란 눈에서 번갯불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안돼요!”

분이는 가느다란 팔을 벌리며 안채의 문을 막아섰다.

어쭈...”

독천존은 어이가 없었다.

... 못 들어가요! 당장 여기서 나가요! 나가란 말이에요!”

팔을 벌린 분이가 악에 바쳐 외쳤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짓만 하는 계집아이로구나.”

독천존은 자기가 누군지 알면서도 감연히 막아서는 분이가 어이없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 방해하면 용서하지 않겠다.”

독천존은 눈을 부라리며 고개를 까딱했다.

!”

콰당탕!

분이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보이지 않는 벼락에 맞아 감전된 것이다.

... 안돼! 들어가지... 말아요!”

분이는 정신을 잃으면서도 독천존을 막으려 했다.

궁금하긴 하군. 대체 어떤 놈을 지키려고 저 계집아이가 두려움에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는지...”

독천존은 새파란 눈을 번뜩이며 분이를 지나갔다.

!

독천존이 다가가자 안채로 통하는 문이 그대로 박살났다.

“...!”

보이지 않는 힘으로 박살낸 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던 독천존의 눈이 번뜩였다.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서(西)노사!”

안채 마당에 천불투가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운의 방문 앞에는 비수를 손에 든 온유향이 문을 가로 막고 서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죽기 전에는 비키지 않으려는 결기가 느껴졌다.

열려진 문을 통해 부운이 침대에 누워있는 게 보인다. 상체를 벗고 있는 부운의 몸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부웅! !

안채 마당 위쪽의 허공에는 수많은 말벌들이 구름처럼 떠있다.

독천존을 온고당으로 안내한 것은 대독금봉이라는 이름을 지닌 그놈들이었다.

허어! 이거야 원...”

안채 마당으로 들어선 독천존은 헛웃음을 흘렸다.

놀랍군! 놀라워! 이런 뒷골목 빈민가에 용 같고 이무기같은 인생들이 숨어있었다니...”

쿠오오!

천불투를 지긋이 내려다보는 독천존의 몸에서 아지랑이같은 기운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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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홉 마리 용()을 삼키다.

 

 

 

온고당에 손님이 끊겼다.

귀엽고 발랄한 분이가 호객을 안하는 탓이다.

해하촌에 놀러온 외지인들은 어둑하고 침침한 가게 안을 기웃거리다가 지나간다.

가게 안쪽 응접실에서는 천불투가 탁자 앞에 앉아서 원숭이 조각들을 닦고 있다.

천불투의 손에 들려진 천은 원숭이 조각의 같은 곳만 닦고 있다.

집중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구나. 뭔가 사달이 날 것같은 예감을 떨칠 수 없고...)

천불투는 소리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없이 불안감이 밀려온다.

이런 기분은 십오 년 전의 어떤 일을 겪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다.

(철두 녀석이 부운이를 데려간 것과 관련 있겠구나.)

천불투가 심란해진 원인을 생각할 때였다.

... 용이 나타났어!”

모두 아홉 마리야!”

가게 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났다?)

천불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어났다.

가게 밖에서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한쪽으로 우르르 몰려가고 있다.

(설마!)

천불투는 급히 온고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

안채에서 저녁을 준비하던 온유향도 놀라 밖을 내다보았다.

... 진짜 용이야!”

검은 용이 나타났어! 그것도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천불투가 온고당을 뛰쳐나와 보니 오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쪽을 가리키며 외치고 있었다.

물론 폐가가 있는 언덕 쪽이었다.

! 퍼펑!

시커먼 용들이 폐가의 지붕을 뚫고 나와 꿈틀거리고 있다.

어느덧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은 몇 아름 굵기에 지붕 밖으로 빠져나온 부분만 삼, 사장이 될 정도로 거대해져 있다.

(저건 세상에 나타나면 안되는 존재다!)

천불투는 단박에 검은 용들의 위험성을 알아보았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세상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존재임은 오랜 경험으로 느낄 수 있다.

또 검은 용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는 현장에 외손자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도 직감했다.

(제발 할애비가 도착할 때까지 버티거라!)

화악!

천불투는 쏘아진 폭죽처럼 치솟아 언덕 위를 향해 날아갔다.

... 온고당의 조영감이...”

... 하늘을 날았어! 조영감은 무림인이었던 거야!”

사람들이 기겁하는 소리를 들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신이 무림인이라는 사실이 들통 나는 것보다 외손자의 안위가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크와아앙! 카아!

검은 용들은 폐가의 천장과 지붕을 뚫고 드나들며 난동을 부렸다.

그 바람에 부서진 크고 작은 나무 조각들이 폐가 안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퍼퍽! !

나무 조각들이 웅크리고 있는 분이와 철두, 정칠의 몸을 때렸다.

아이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무릎을 꿇은 채 웅크리고 있는 부운의 몸도 천장과 지붕에서 쏟아지는 파편들에 강타당하고 있었다.

부운은 고통을 참으며 아홉 마리 용들이 자신의 몸으로 파고 들어와 난동을 부리던 경로를 확인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용들이 몸속을 누비고 다니던 경로가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

그때 정칠이 지르는 비명이 들렸다.

돌아보니 상당히 큰 석가래 파편이 정칠의 한쪽 다리에 걸쳐져 있다.

수백 근은 나갈 그 파편에 맞아 정칠은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았다.

극심한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던 정칠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늦었다.

번쩍! 번쩍!

검은 용들이 일제히 정칠을 돌아보았다.

크와앙! 카아!

그리고는 해일처럼 정칠과 아이들을 향해 쏟아져 내려왔다.

더는 시간이 없다.

위치가 들킨 이상 아이들은 검은 용에 의해 소멸당하고 말 것이다.

여기다!”

부운은 벌떡 일어나며 고함을 질렀다.

정칠과 아이들을 노리고 내리꽂히던 검은 용들이 홱 방향을 틀었다.

(안돼 오빠!)

(부운이 저 새끼가 설마 자신을 희생하려고...)

분이와 아이들이 기겁하며 돌아볼 때였다.

오라! 내가 여기 있다!”

빠지지직!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부운의 몸이 벼락에 휘감겼다. 몸속으로 파고 든 용들이 난동을 부리던 경로대로 내공을 운용하자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카아! 카앙!

아홉 마리의 검은 용들이 부운에게 돌진해왔다.

크아!”

부운도 입을 딱 벌리며 고함을 질렀다.

쿠오오오!

한껏 벌린 부운의 입 안에서 맹렬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 투쾅!

직후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이 부운의 얼굴을 강타했다.

 

***

 

빠각!

멀쩡하던 접시가 둘로 쪼개졌다.

...”

온유향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했다. 혀가 잘려서 말은 못해도 비명이나 신음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저절로 나온다.

저녁 준비를 하던 중에 갑자기 접시가 쪼개졌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부운이에게...?)

쪼개진 접시를 든 온유향의 손이 저절로 떨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용들이 사라지고 있어!”

전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고 있어.”

저게 무슨 조화지?”

온고당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이 주전자 속의 물이 끓듯 한다.

(언덕 위 폐가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났고... 의부(義父)님이 그것 때문에 나가신 것 같은데...)

온유향은 보이지 않는 눈으로 온고당 입구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보이지 않으면서 예민해진 귀로 천불투가 폐가를 향해 날아간 걸 알고 있었다.

오대신투 중 한명인 천불투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부운이를 지켜줄 것이다.

그걸 믿으면서도 온유향의 마음은 불 속에 던져진 마른 검불 같았다.

속은 타들어가지만 앞이 보이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뿐이다.

(천지신명이시여. 이 박복한 계집의 아들을 보우하여주시옵소서!)

쪼개진 접시를 내려놓은 온유향은 두 손을 모아 간절히 기원했다.

 

****

 

분이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른 부운을 향해 검은 용들이 쇄도했다.

검은 용들에 부딪히면 부운의 몸뚱이는 쥐들이나 폐가 안의 기물들처럼 연기가 되어 흩어질 것이다.

그랬는데 딱 벌린 부운의 입 앞쪽에서 맹렬한 소용돌이 같은 것이 형성되었다.

콰콰콰! 고고고!

검은 용들은 그 소용돌이 같은 것에 닿는 순간 확 줄어들고 뒤틀리며 부운의 입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한 아름이 넘는 굵기의 용들이 손가락 보다 가늘게 압축되고 꼬이며 부운의 입속으로 사라진다.

... ...”

정칠과 철두도 찢어져라 눈을 치뜬 채 입을 뻥끗거리기만 했다.

콰드드! 고오오!

삽시에 아홉 마리 검은 용들은 압축되어 부운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부운이 어떻게 거대하고 치명적인 용을 아홉 마리나 삼킬 수 있었는지 아이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츠츠츠! 스스스!

여전히 하나로 뭉쳐져 있던 검은 용들의 꼬리 부분까지 부운에게 삼켜졌다.

!

검은 용들이 완전히 빠져 냐간 빈 향로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와 함께 소용돌이에 가려져 있던 부운의 얼굴이 드러났다.

입을 딱 벌린 채 눈을 까뒤집은 모습인데. 입 안쪽에서는 소용돌이가 일어나며 연기도 뿜어진다.

... 부운오빠!”

분이가 안도하며 환호하며 발딱 일어났다.

(닿는 건 무엇이든 소멸시키는 검은 용들을 어떻게 삼켜버린 건가?)

다리가 부러진 정칠도 끔찍한 통증조차 잊은 채 부운을 보았다.

그때였다.

스륵!

눈을 까뒤집고 있던 부운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

분이가 비명을 지르며 부운에게 달려갔다.

!

부운은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채로 나뒹굴었다.

(부운 저 새끼, 죽은 건가?)

(그 무서운 검은 용들을 삼키고도 무사할 리 없지.)

정칠과 철두도 놀라서 부운에게 기어가려 했다..

오빠! 정신 차려!”

부운에게 달려간 분이가 울부짖으며 부운을 끌어안으려 할 때였다.

건드리지 마라!”

!

옆에서 나타난 누군가의 손이 분이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쿠오오!

돌풍을 일으키며 나타난 그 인물은 천불투였다. 변고를 알아차리고 날아온 그가 도착한 것이다.

할아버지!”

천불투를 알아본 분이가 안도하며 울음을 터트렸다.

(부운의 외조부 조영감!)

(저 영감탱이도 무공을 감춘 고수였구나.)

부러진 다리 때문에 주저앉아있는 정칠과 비틀거리며 일어나던 철두도 놀랐다.

해하촌 사람들은 천불투가 무림인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부운이 무공을 지닌 걸 알고 있던 정칠과 철두도 그저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내막인지 말해봐라.”

천불투는 분이의 손을 놓으며 부운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게... 그게...”

분이는 우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정칠! 분이 대신 네가 상황 설명을 해봐라.”

천불투는 깡마른 손을 펼쳐서 부운의 얼굴을 겨누며 정칠에게 말했다.

... 오늘 아침에 성내에서 정영감을 도와 과일 좌판을 하고 있었는데...”

요점만 간단하게!”

지잉!

부운의 얼굴을 겨눈 손바닥을 진동시키며 천불투가 짧게 말했다. 그는 정신을 잃은 외손자의 상태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부운이가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었습니다.”

정칠이 급히 말했다.

독천존? 무림칠절 중의 독절인 그 독천존을 털었다?”

천불투가 놀라서 정칠을 돌아보았다.

...”

정칠이 천불투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쯧쯧! 그렇게 무모한 짓을...”

천불투는 기가 막혀 혀를 찼다.

독천존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르는 무림인은 없다.

무림맹 맹주 사자천존이나 천마련 련주 철면마존에게는 죄를 지어도 독천존에게는 절대 거스르지 말라는 것이 무림들 사이에 통하는 묵계(默契)였다.

한데 부운은 그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었다는 것이다.

천불투로서는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외손자가 왜 독천존을 노렸는지 이해가 갔다. 도척제전에서 우승하기 위해 독천존의 신물을 손에 넣으려 했을 것이다.

... 제 잘못이에요. 부운오빠는 만지지 말라고 했는데... 제가 그만 향로를 열어 버렸어요.”

부운 옆에 주저앉은 분이가 울며 말했다.

향로?”

천불투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빈 향로를 돌아보았다.

저 향로의 뚜껑을 열자 안에서 시커먼 용들이 튀어나와서 우릴 죽이려고 했어요. 그러자 부운오빠가 우릴 살리려고 그 검은 용들을 들이마신 거예요.”

분이가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천불투는 부운이 정신을 잃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부운은 삼키지 말아야할 것을 삼켜버린 상태였다.

독천존의 물건은 일절 남기지 말고 챙겨라. 부운이를 구할 수 있는 단서가 그중에 있을지 모르니...”

천불투는 부운의 상태를 살피는 데 집중하며 말했다.

...”

분이는 엉금 엉금 기어가 빈 향로와 뚜껑을 챙겼다.

철두도 서둘러 탁자로 다가가 그 위에 늘어놓았던 물건들을 살천독낭에 쓸어담았다.

(부운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죽지는 않았는데 몸속에서 이질적이며 무시무시한 힘이 요동치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공을 써서 부운의 상태를 점검하던 천불투의 늙은 얼굴이 당혹과 의혹으로 물들었다.

향로에 봉인되어 있었다는 아홉 마리 용을 삼킨 게 부운이 정신을 잃은 원인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검은 용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천불투로서도 짐작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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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풀려난 공포(恐怖)

 

 

 

꽈당!

부운은 나무토막이 쓰러지듯 뒤로 넘어졌다. 두 손으로 향로를 움켜잡은 채...

오빠! 왜 그래 오빠!”

분이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끄윽... !”

온몸이 마비 된 부운은 학질에라도 걸린 듯 벌벌 떨고 있었다.

눈은 뒤집어져 흰자위만 드러내고 있고 숨을 제대로 못 쉬어 꺽꺽거리기만 한다.

부운아!”

무슨 일이냐?”

탁자 건너편에 있던 정칠과 철두도 달려왔다.

몰라! 부운 오빠가 갑자기 경기를 일으키고 있어!”

분이가 울음을 터트리며 부운의 팔을 주물렀다.

젠장! 대체 뭔 지랄을 하는 거냐?”

다리는 내가 주무르겠다.”

정칠과 철두도 달려들어 부운의 팔 다리를 주물러 대었다.

!

분이와 정칠에게 팔이 주물리키며 그때까지 부운이 움켜잡고 있던 향로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향로가 손에서 떨어진 때문일까?

흰자위를 드러냈던 부운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꺼억...”

그와 함께 꽉 막혀있던 숨통도 트였다.

오빠! 정신이 들어?”

분이가 뺨이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부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 걱정마라. ... 난 괜잖다.”

부운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분이를 안심시켰다.

숨통은 트였지만 경련은 여전히 멈추지 않고 있다. 온몸의 근육이 제 멋대로 펄떡거려서 움직일 수가 없다.

짜식! 사람 식겁하게 만들기나 하고... 대체 왜 그런 거냐?”

정칠이 안도하며 지청구를 늘어놓았다.

향로... 향로 어디 있냐?”

정신이 돌아온 부운은 억지로 고개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다.”

철두가 자기 무릎 근처에 뒹굴고 있는 향로를 집어들었다.

그 향로... 위험한 물건이다. 조심해서... 탁자에 올려놔라.”

부운이 긴장하여 말했지만 철두는 믿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 작은 향로가 위험하면 얼마나 위험하려고...”

분이와의 일도 있고 해서 이래저래 반발심이 생긴 철두는 향로의 뚜껑을 열어보려 했다.

... 열지마라!”

부운은 기겁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철두를 저지하지는 못했다.

!”

한데 향로 뚜껑을 열려던 철두가 당황하여 헛바람을 내쉬었다. 용머리 형상인 손잡이를 잡고 열려고 했지만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데... 뚜껑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인다.”

철두는 향로 뚜껑을 열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쓰느라 얼굴이 벌개졌다.

그럼에도 뚜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강력한 자석이 뚜껑을 잡아당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저 향로에는 내용물을 지키기 위한 술법(術法)이 걸려있었지.)

부운은 더 이상 철두를 말리지 않았다.

향로를 통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온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무엇 하나 확실하게 파악한 게 없다.

그래도 향로에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떠올랐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언지는 몰라도 향로에는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끔찍한 재앙이 들어있다.

그것이 유출되는 걸 막기 위해 만독조종(萬毒祖宗)은 밀교(密敎)에서 유래한 술법으로 금제를...

(만독조종...!)

향로를 깃들어 있던 내력을 더듬던 부운은 어떤 인물의 별호를 떠올렸다.

처음에 자신을 움켜잡고 있던, 머리가 하늘 끝에 닿앗던 거인의 이름이 만독조종이었다.

참 덩치 값도 못한다. 이리 줘봐.”

철두가 끙끙대는 걸 보고 있다가 답답해진 정칠이 향로를 빼앗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정칠이 용을 썼으나 향로 뚜껑은 옴쭉달쭉도 하지 않았다.

거 참 뚜껑이 향로와 일체가 아닌 건 분명한데...”

머쓱해진 정칠이 향로를 요리조리 살펴보며 궁시렁거릴 때였다.

부운 오빠가 위험한 물건이라고 했잖아.”

이번에는 분이가 정칠 손에서 향로를 낚아챘다.

원래는 부운의 말 대로 향로를 탁자에 올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향로가 손에 들어오자 생각이 바뀌었다.

(정말 예뻐!)

분이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향로에 매료되어버렸다.

(온고당에서 수많은 골동품을 봤지만 이 향로만큼 정교하고 예쁜 물건은 본 기억이 없어!)

분이는 홀린 듯이 향로를 살펴보았다.

향로 표면에 새겨진 아홉 마리 용은 너무도 생생해서 금방이라도 살아서 꿈틀거릴 것만 같았다.

(뚜껑이 안 열린다고 했는데...)

분이는 용머리 형상의 손잡이를 잡고 뚜껑을 살짝 들었다.

달칵!

그러자 뚜껑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향로와 분리되어 버렸다..

어라!”

분이는 당황했다.

철두와 정칠이 용을 써도 꿈쩍하지 않던 향로 뚜껑이 너무도 간단히 열려버렸다.

뚜껑이 열린 향로 안에는 칠흑처럼 시커먼 액체가 가득 들어있었다.

츠으! 번쩍!

점성이 느껴지는 검은 액체 속에는 아홉 쌍의 붉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향로가 열렸잖아!”

정칠이 놀라고 철두와 부운이 분이를 돌아보았다.

내가... 내가 향로를 열어버렸어!”

분이가 억지로 웃을 때였다.

닫아라! 빨리!”

부운이 비명처럼 외쳤다.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외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미안해 오빠!”

깜짝 놀란 분이가 급히 향로의 뚜껑을 닫으려 할 때였다.

!

향로 안에 고여 있던 점성을 지닌 검은 액체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엄마야!”

콰당탕!

분이는 향로는 떨구며 뒤로 발랑 넘어졌다.

! 푸하아악!

향로는 바닥에 떨어지고 그것에서 치솟은 검은 액체는 폭발적으로 증식되었다.

단번에 한 아름이 넘는 굵기가 된 그것은 폐가의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

뭐야 저거...”

철두와 정칠도 기겁하며 물러앉을 때였다.

화악! 쩌저적!

분수처럼 치솟은 검은 액체는 허공에서 이리저리 갈라지며 퍼졌다.

모두 아홉 갈래로 갈라진 검은 액체들은 영락없는 용의 형상이 되었다. 머리에는 사슴의 그것을 닮은 뿔이 돋아났으며 몸통에서는 세 개의 손톱이 달린 다리 두 쌍이 생겨났다.

다만 아랫부분은 여전히 서로 합쳐진 채 향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 숨을 멈춰라!”

부운은 일어나려 애쓰며 외쳤다.

향로에서 읽은 검은 용의 정체가 떠올랐다.

그놈은 살아있는 존재의 숨결에 반응한다.

!”

!”

발라당 나뒹군 분이와 뒤로 주저앉았던 철두, 정칠은 다급히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번쩍! 번쩍!

아홉 마리의 검은 용들이 눈을 번뜩이며 부운을 돌아보았다.

(위험...)

부운도 급히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하지만 늦어버렸다.

검은 용들은 부운의 숨결을 감지한 후였다.

화악! 크왕!

검은 용들이 부운에게 날아들었다.

부운은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자연스럽게 뒤로 넘어갔다. 삼보면천의 응용이었다.

삼보면천을 쓰면 기척도 소리도 완전히 죽인 채 움직일 수 있다.

화악! 부악!

검은 용들은 간발의 차이로 부운의 몸통 위로 스치고 지나갔다. 부운의 기척이 사라지면서 탐지에 실패한 것이다.

푸스스!

그래도 검은 용들과 닿을 뻔했던 부운의 가슴 부분 옷들이 순간적으로 증발되었다.

퍼억! 화악!

부운을 스치고 지나간 검은 용들이 닿은 탁자와 의자들도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맙소사!)

(저 검은 용이 닿은 건 뭐든지 재가 되고 있어!)

그걸 본 분이와 정칠등은 공포에 휩싸였다.

(독이다! 향로에는 지독한 독기가 갇혀 있다가 뚜껑이 열리자 뛰쳐나왔다.)

부운은 바닥에 누운 채 눈을 부릅떴다.

용의 형상을 한 칠흑같이 검은 독기는 단순한 독이 아니었다.

영성(靈性)을 지녀서 스스로 판단하여 생명을 지닌 모든 것을 소멸시킬 수 있다.

화악! 쿠오오!

아홉 마리 검은 용은 폐가 내부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닿는 것은 무엇이든 소멸시켰다.

탁자와 벽체등이 검은 용들과 접촉하는 즉시 사라졌다.

검은 용들이 품고 있는 독기는 너무도 강력해서 태우는 걸 건너뛰고 연기로 만들어버린다.

! 찌직!

소란에 놀라 여기저기서 쥐들이 기어 나왔다.

검은 용들은 쥐들이 토해내는 숨결을 감지하고 벼락 치듯 달려들었다.

퍼억! 푸스스!

검은 용들에게 덮쳐진 쥐들은 영문도 모르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검은 용들은 시시각각으로 커져서 어느덧 한 아름이 넘는 굵기에 길이는 몇 길이나 되었다.

퍼억! 푸스스!

폐가의 벽체뿐만 아니라 지붕과 석가래들도 거대해진 검은 용에 닿아 흩어지기 시작했다.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라! 절대 숨을 쉬면 안된다!>

부운은 억지로 일어나 앉으며 분이와 두 아이에게 전음입밀을 보냈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서둘러 입구쪽으로 기어갔다.

번쩍! 번쩍!

그때 천장 근처를 휘돌던 검은 용들의 눈이 강렬한 빛을 뿜어내었다.

그놈들은 입구쪽으로 기어가는 분이등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저 놈들, 호흡뿐 아니라 움직임에도 반응한다.)

부운은 아차 했다. 검은 용들이 움직이는 건 무엇이든 공격하는 속성을 지녔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분이 등은 검은 용들에게 공격당한 쥐들처럼 단번에 소멸되고 만다.

움직이지 마라!”

부운은 사력을 다해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엄마야!)

(!)

분이등은 기겁하면서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화악! 크와앙!

세 아이를 덮쳐가려던 검은 용들이 방향을 홱 틀어서 부운에게 날아들었다.

(삼보면천!)

부운은 이를 악물며 다시 한 번 삼보면천을 구사했다.

부운의 몸은 기척도 소리도 없이 한 바퀴 돈 후 바닥에 깃털처럼 쓰러졌다.

슈악! 화악!

이번에도 간발의 차이로 검은 용들은 부운의 몸 위로 지나쳤다.

크와앙! 카아!

또 다시 부운을 죽이는데 실패한 검은 용들은 분노하여 몸부림쳤다.

(생각 했던 대로다. 저놈들은 맹목(盲目)이다!)

급격하게 커져서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검은 용들을 올려다보며 부운은 조심스럽게 숨을 흘려내었다.

독으로 이루어진 아홉 마리의 용은 영성을 지니긴 했어도 직접 대상을 보지는 못한다.

대신 생명 반응에 반응을 하는데 호흡에 가장 민감하고 움직임도 감지한다.

콰드득! 퍼석!

검은 용들은 더 거대해져서 이제 지붕을 뚫고 나가기도 했다.

퍼퍽! 터텅!

부서진 천장과 대들보의 파편들이 분이 등 세 아이 주위로 떨어졌다.

크고 작은 파편에 얻어맞았지만 아이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나 혼자라면 삼보면천을 써서 여길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지만...)

부운은 바닥에 누운 채 탁자의 다리 사이로 세 아이를 보았다.

입을 틀어막은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고 있다.

(저 아이들이 검은 용들에게 잡히지 않고 빠져나가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설령 이 건물을 빠져나간다 해도 검은 용들에게 따라잡힐 테고...)

부운은 다급해졌다.

끄윽! !”

입을 틀어먹은 아이들의 얼굴이 시뻘개 지고 있다. 숨을 참는 게 한계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없다! 빨리 타개책을 찾아내야하는데...)

달군 가마솥에 빠진 개미처럼 초조해하던 부운의 머릿솟으로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향로 표면에 정교하게 새겨진 아홉 마리의 용... 그놈들은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 들어와 난동을 부렸었다.

(이제 보니... 그건 단순한 난동이 아니라 일종의 내공심법이었다!)

부운은 검은 용들이 자신의 몸속을 누비고 다니던 경로를 떠올렸다.

(검은 용들이 치달렸던 경로대로 내공을 운용하면 그놈들을 제어하는 게 가능할 지도 모른다.)

부운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위험천만한 시도일 수도 있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면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부운에게는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크왕! 콰득! 퍼펑!

그새 더 거대해진 검은 용들은 폐가의 지붕을 여기 저기 뚫고 올라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퍼퍽! !

그 바람에 폐가 지붕의 파편들이 더 많이 떨어져 아이들을 때리고 있다.

아이들은 파편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 부운에게는 한 가지 선택 밖에는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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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비한 향로(香爐)

 

 

 

해하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폐가 앞에 세 명의 아이들이 서있었다.

분이와 정칠과 철두다.

세 아이는 초조한 표정으로 해하촌에서 폐가로 올라오는 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특히 분이는 달궈진 번철(燔鐵;솥뚜껑 모양의 조리도구) 위의 콩처럼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부운오빠가 돌아오는 게 너무 늦어! 우리 보고 먼저 여기 와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설마 잘못 되어서 독천존에게 붙잡힌 건 아니겠지?)

분이는 마주 잡은 두 손을 연신 조물락거리며 울상을 짓고 있었다.

조것이 아주 애가 타들어가는구만.”

대여섯 걸음 뒤쪽에서 보고 있던 정칠이 혀를 찼다.

하긴 짝사랑하는 낭군께서 무림 칠대고수 중 한명을 털겠다고 나섰는데 태연할 수는 없겠지.”

정칠의 이죽거림을 들은 철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부운이 놈은 좋겠다. 자길 하늘처럼 떠받들어 주는 예쁜이도 있고...”

분이를 놀리던 정칠은 싸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철두가 험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부운이가 분이에게 낭군까진 아니지. 그래도 걸음마 할 때부터 함께 자란 동네 오빠인데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냐?”

정칠은 억지로 웃으며 뒷걸음질을 쳤다.

...!”

철두는 코웃음 치며 분이쪽을 돌아보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꽁하긴...)

정칠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말재주가 그닥 없는 철두는 수틀리면 주먹부터 나온다.

정칠도 철두의 뜬금없는 주먹질에 당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철두야 꿈 깨는 게 좋을 거다. 발버둥 쳐봤자 넌 부운이의 상대가 못되니까. 용모, 배경, 능력, 그 모든 걸 따져 봐도 네놈이 부운이를 이길 가능성은 없어.)

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철두를 보며 정칠은 코웃음을 쳤다.

분이는 해하촌의 아이답지 않게 귀티 나고 예쁘다.

그런 분이를 철두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고 있다는 건 알만한 아이들은 다 안다.

다만 성격이 무뚝뚝한 탓에 철두는 분이에게 직접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정칠은 계집 장사하는 아비를 둔 덕분에 여자들이 남자의 어떤 면에 끌리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일찌감치 분이에 대한 헛된 생각을 포기할 수 있었다.

(부운이 놈은 애초부터 철두 네놈이나 내가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정칠이 친구를 위해 근심해줄 때였다.

오빠!”

갑자기 분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팔짝 뛰었다.

정칠과 철두의 시선이 동시에 해하촌에서 올라오는 길로 향했다.

부운오빠! 무사한 거야?”

분이가 다람쥐처럼 달려 내려가며 외쳤다.

부운이 저 놈, 독천존의 주머니를 터는데 성공한 것 같다. 진짜라면 도둑들의 세계가 발칵 뒤집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거야.”

정칠도 흥분해서 길 아래쪽을 보았다.

해하촌 쪽에서 부운이 올라오고 있다.

한 달음에 달려간 분이가 부운의 팔을 와락 끌어안는 게 보인다.

분이와 함께 올라오는 부운을 보며 철두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죽마고우인 부운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분이가 부운에게 달라붙어있는 걸 보면 부아가 치민다.

! 성공한 거냐?”

정칠이 마중 나가며 외쳤다.

부운은 씨익 웃으며 오른 손에 들고 있는 가죽 주머니를 쳐들었다.

괴물같은 새끼, 정말로 무림 칠대고수 중 한명의 주머니를 털었구나.”

정칠은 자기의 위업인 양 흥분했다.

주변에 기웃거리는 것들 없었냐?”

언덕을 올라온 부운이 물었다.

정칠이 대답했다.

꼬맹이들 몇이 놀고 있길래 엉덩이 걷어차서 쫓아 보냈다.”

잘 했다.”

부운은 앞장서서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분이와 정칠이 따라 들어갔고 맨 나중에 들어간 철두가 문을 닫았다.

 

***

 

문이 닫혀 어둑한 폐가 가운데에는 길쭉한 탁자가 놓여있다. 흑건회 아이들이 훔치거나 얻어온 음식을 나눠먹는 데 주로 쓰이는 탁자다.

정말... 부운이 너 정말 독천존의 주머니를 터는 데 성공한 거냐?”

부운을 따라 탁자로 가며 정칠이 흥분해서 물었다.

이건 네가 살펴봐라.”

부운은 대답대신 두 개의 주머니 중 작은 걸 정칠에게 건네주었다.

전낭이로구나.”

작아도 제법 묵직한 주머니를 건네받은 정칠의 입이 귀에 걸렸다.

이게 바로 우내칠절 중 한 명인 독천존의 돈주머니란 말이지?”

정칠은 신이 나서 전낭의 내용물을 탁자 위에 쏟았다.

쨍그렁. 투둑!

전낭에서 동전과 은자, 전표등이 쏟아져 나왔다.

뭐야? 기대했던 것보다는 많지 않네.”

전낭의 내용물을 헤아려본 정칠은 적잖이 실망한 표정이 되었다.

전낭에 들어있었던 건 백냥짜리 전표 세 장과 은자 이백냥 정도였다. 무게를 가장 많이 차지하는 동전은 세어볼 가치도 없다.

물론 오백냥도 결코 작은 돈은 아니다. 평범한 가정이라면 이, 삼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 거금이다.

단지 독문제일인이라는 주인의 명성에 비해 적을 뿐이다.

이 정도도 많이 갖고 다닌다고 봐야한다. 무림 칠대고수에 드는 인물인데 어디 간들 대접 못 받겠냐?”

철두가 전표의 액면가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하긴 독천존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간이든 쓸개든 빼서 바칠 인간들이 줄을 서겠지.”

정칠도 은자와 동전을 정리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칠과 철두 건너편에서는 부운이 가죽 주머니에서 내용물들을 꺼내고 있었다.

그 주머니에 <하늘도 죽이는 독주머니(殺天毒囊)>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이 붙어있다는 건 부운으로서도 알 리가 없다.

다만 독천존의 물건이라 위험한 게 들어있을 가능성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 주머니에는 뭐가 들었냐?”

돈을 세던 정칠이 건너다보며 물었다.

부운은 대답하지 않고 살천독낭에서 꺼낸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탁자에 늘어놓았다. 밀봉된 작은 주머니들과 도자기, 유리로 만들어진 병들이 대부분이었다.

(저 새끼가 또 내 말을 씹네.)

빈정 상한 정칠이 눈을 흘길 때였다.

독천존이 독을 쓰는 데 있어서 천하제일이라는 건 알 거다. 내가 꺼내놓은 병들과 주머니에는 위험한 게 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건드리지 마라.”

부운이 물건들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

모두에게 한 말이지만 부운 옆에 붙어있던 분이가 냉큼 대답했다.

(내가 독천존을 털었다는 증거가 될만한 물건이 있어야할 텐데...)

부운은 살천독낭에 들어있던 물건이 줄어들어감에 따라 초조해졌다.

도척제전에서 우승하려면 독천존의 소유였다는 걸 모두가 인정할만한 물건이 필요하다.

부운이 살천독낭에서 마지막으로 꺼낸 것은 부드러운 사슴 가죽으로 만든 제법 큰 주머니였다. 주머니에는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둥근 물건이 들어있다.

(들어있는 게 상당히 무겁다. 거의 열근(6kg) 가까이 된다.)

부운은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했다.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에 무게가 열근 가까이 된다면 쇳덩이만큼이나 무거운 게 들어있다는 뜻이다.

(이 안에 결정적인 증거가 들어있을 것 같다.)

부운은 사슴 가죽 주머니의 입구를 묶고 있는 끈을 풀기 시작했다.

... 이상하네. 그 주머니를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려.”

보고 있던 분이의 얼굴에 열기가 발갛게 피어올랐다.

(분이가 왜 저러지?)

생각지도 않은 분이의 반응에 의아해하면서도 부운은 사슴 가죽 주머니 입구를 묶은 끈을 풀었다.

분이는 얼굴이 발개진 채 침을 꼴깍 삼켰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주머니를 보는 순간부터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부운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향로(香爐)였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향로 표면에는 여러마리의 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으며 뚜껑이 덮여있다.

일반적인 향로와 달리 연기가 빠져나오는 구멍이 나있지 않은 뚜껑의 중앙에는 용머리 형상인 손잡이가 달려있다.

향로네!”

분이는 눈을 반짝이며 향로를 들여다보았다.

이야! 그건 한 재산 되겠다! 딱 봐도 황금으로 만들어진 게 분명하니...”

건너편의 정칠과 철두의 눈도 휘둥그래졌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주먹 두 개 크기 정도의 향로라면 수천 냥은 족히 나갈 것이다. 빈민가 출신인 아이들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고가의 물건이다.

온고당에서 골동품 향로들을 여러 개 봤지만 이렇게 예쁜 향로는 처음이야.”

부운이 사슴 가죽 주머니에서 꺼낸 향로를 살피는 걸 보며 분이의 눈이 반짝반짝 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향로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분이는 처음으로 무언가를 정말로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향로를 갖을 수만 있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분이는 문득 이상을 느꼈다.

부들! 부들!

두 손으로 향로를 들고 살펴보던 부운의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몸만 떨리는 게 아니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져 있으며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다.

얼굴이 달아오른 것은 숨을 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빠! 왜 그래?”

더럭 겁이 난 분이가 부운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부운은 완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향로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 부운 저 새끼 왜 저래?”

무슨 일이냐?”

탁자 건너편의 정칠과 철두도 변고를 알아차리고 건너다보았다.

정신 차려 오빠! 나 무서워!”

분이의 울먹이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인 듯이 들린다.

부운은 끔찍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향로를 보자마자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만지기만 하면 물건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능력을 써보았다.

천불투가 만천신안일 것이라 추측했던 부운의 능력은 향로에 얽혀있는 모든 내력을 일거에 보여주었다.

처음에는 먹물을 칠한 듯이 시커먼 곳으로 떨어졌다.

그 암흑에는 온몸을 녹이고 분해시키는 끔찍한 힘이 실려 있었다.

어떻게든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암흑의 정체가 밝혀졌다.

그것은 한 인간의 손아귀였다.

머리가 하늘 끝에 닿아있는 그 인물의 영력(靈力), 즉 영적인 힘은 부운이 상상도 못해본 것이었다.

부운은 거인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육신과 혼백이 쥐어 짜이고 터지는 충격과 고통을 경험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거인이 지닌 영력의 압력(靈壓)에 압도당해 죽거나 백치가 되었을 것이다.

부운이 그리 되지 않은 것은 그의 혼백 속에 들어있는 금강석 같이 단단한 핵심(核心) 덕분이었다.

그 핵심은 거인의 가공할 영압으로도 부술 수 없는 것이었다.

거인 외에도 수많은 인생이 부운의 머릿속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만독(萬毒)이라는 두 글자로 얽힌 인생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세상을 뒤흔들었던 위인들도 많았지만 처음의 거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수백 수천의 인생이 읽혔고 그 중에 어딘지 분이를 닮은 남녀도 본 것 같았다.

향로를 만졌거나 그것과 관련 있는 인생들이 폭풍처럼 지나간 후 돌연 용()이 나타났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아홉 마리였다.

(향로에 새겨져 있던 용들이다!)

부운은 향로에 새겨져 있던 용들이 향로에서 빠져나와 자신을 덮치는 것을 느꼈다.

아홉 마리 용은 부운의 몸을 뚫고 들어왔다.

몸속으로 파고 든 용들은 오장 육부를 찢고 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거인의 가공할 영압에도 견디었지만 실제로 내장이 찢어지고 모든 뼈가 부러지는 것같은 고통은 견디기 힘들다.

<끄아아악!>

끔찍한 고통을 견디지 못한 부운은 비명을 지르며 정신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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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도둑맞은 재앙(災殃)

 

 

 

감사합니다 손님! 또 들러주십쇼!”

독천존 서래음은 점소이의 곰살맞은 배웅을 받으며 흥륭객잔을 나섰다.

(만독의종(萬毒義從)의 보고에 의하면 망산쌍독, 그 죽일 놈들은 금릉으로 숨어들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거리를 걸어가며 독천존은 생각에 잠겼다.

독천존은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사람 많이 모이는 곳도 좋아하지 않아서 대처(大處)에는 거의 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독천존이 강남, 아니 중원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금릉에 온 것은 망산쌍독을 잡기 위해서였다.

 

도척총림 정도의 결속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독을 쓰는 문파, 독문(毒門)들 사이에도 결사가 존재한다.

만독의종이라는 느슨한 조직이 그것이다.

의종(義從)은 섬기며 따른다는 뜻이다.

독문의 대부분은 만독조종(萬毒祖宗)이란 인물을 시조로 섬긴다.

만독조종의 위업을 기리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결성된 것이 만독의종이다.

만독의종의 맹주는 대대로 만독동천(萬毒洞天)이란 문파의 문주가 맡아왔다. 만독동천을 세운 인물이 만독조종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만독동천의 당대 문주가 독천존이다.

망산쌍독이 공동문주인 독묘파 역시 만독의종에 속해있다.

한데 망산쌍독은 자신들의 맹주이기도 한 독천존에게 죄를 짓고 도주 중이다.

 

(노부가 자리를 비운 틈을 노려 실혼고(失魂膏)를 훔쳐갔으렸다!)

망산쌍독을 떠올린 독천존의 눈에서 새파란 빛이 넘실거렸다.

얼굴이 녹색인 노인이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는 건 괴기스럽기만 하다.

앞쪽에서 오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물살처럼 갈라진다.

독천존으로서는 늘 겪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감히 노부에게 죄를 지은 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깨닫게 해주마.)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와중에서도 독천존은 의혹을 느끼고 있었다.

망산쌍독이 천둥벌거숭이같은 놈들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무림 칠대고수의 일인이며 만독의종의 맹주인 자신에게 죄를 지을 줄은 몰랐다.

(정황상 그놈들은 한왕 주고후와 선이 닿아있다. 어쩌면 실혼고를 훔친 게 한왕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오싹!

생각에 잠겨 걸어가던 독천존은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지는 감각에 휩싸였다.

“...!”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

그 시선을 느끼자 마치 알몸으로 맹수에게 노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와 똑같다!)

독천존은 전에도 한번 이런 느낌을 경험했었다.

 

사자천존 초천강(楚天綱)-!

지금은 은퇴한 무림맹의 전 맹주를 처음 대면했을 때였다.

독천존은 사자천존이 흘려내는 위압감에 난생 처음 무릎이 꺾일 뻔 했다.

그 정도로 사자천존의 무위(武威)는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선 것이었다.

사자천존을 만나기 전에 천마련의 련주 철면마존도 보았었다.

철면마존 역시 대단한 위압감의 소유자였지만 독천존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림인들은 사자천존과 철면마존을 호적수라 생각한다.

하지만 독천존이 보기에 철면마존은 사자천존과 대결할 경우 필패(必敗)할 게 분명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사자천존은 당대의 천하제일인이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금분세수(金盆洗手;은퇴)를 해버렸다.

사자천존의 돌연한 은퇴로 인해 무림맹은 일거에 와해되고 말았다.

그 결과 철면마존의 천마련이 어부지리로 무림의 패권을 장악했다.

십오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그놈, 사자천존이 노부를 내려다보던 때 느꼈던 위압감과 유사하다!)

독천존은 숨이 콱 막혀서 걸음을 멈추었다.

팔십 평생 단 한번 경험했었던 전율이 다시 한 번 온몸으로 치달렸다.

누군가 우내칠절의 일인이며 독문제일인인 자신을 먹잇감으로 여기고 있다!

살펴보는 시선에는 일격에 반드시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결의가 서려있다.

어이쿠!”

아이 참, 갑자기 멈춰서면 어떻게 해요?”

뒤에서 오던 사람들이 독천존에게 부딪히며 궁시렁 거린다. 인파에 섞여 걸어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생긴 소란이다.

독천존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히익!”

... 죄송합니다!”

독천존의 푸른 색 눈에 번개가 흐르는 걸 본 뒤쪽 사람들이 기겁하며 좌우로 갈라진다.

(사라졌다!)

왔던 길을 둘러보던 독천존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던 시선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노부도 늙어서 망령이 든 걸까?)

독천존이 허탈해 할 때였다.

<해냈다!>

누군가의 사념(思念;생각)이 독천존의 머릿속을 울렸다.

내공이 신화경(神化境)에 이르면 간혹 다른 사람의 생각이 읽히기도 한다.

방금 전 누군가의 사념이 읽힌 것도 독천존의 내공이 워낙 심후한 결과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독천존은 눈을 부릅뜨며 가던 방향을 홱 돌아보았다. 자신을 노리던 누군가가 있었다는 생각은 착각도 망령도 아니었다.

독천존의 푸른 눈이 앞쪽의 모든 인간을 순간적으로 훑었다.

사념이 읽힌 방향은 앞쪽이었다.

모든 인간은 제각각 다른 기운을 흘린다. 목소리나 지문이 모두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내공이나 정신력이 강하면 흘리는 기운도 짙어진다.

물론 다양한 인간의 서로 다른 기운을 구분하려면 내공과 안목이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하다.

무림 칠대고수의 일인인 독천존은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기운을 읽으려 시도하는 독천존의 눈에는 거리를 오가는 거의 모든 인간들이 무채색으로 보였다.

(저 놈이다!)

독천존의 푸른 눈이 부릅떠졌다.

무채색의 군상들 중 너무도 뚜렷하고 강렬한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체격의 소년이다.

화악!

독천존의 모습이 유령처럼 흐릿하게 변했다. 경이적인 속도로 소년을 덮쳐간 것이다.

“!”

사람들에 섞여 걸어가던 소년이 고개를 조금 돌려 뒤를 돌아본다.

슈욱!

독천존의 팔이 확 길어지며 소년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잡았다!)

늘어났던 팔이 빨려들 듯 줄어들며 독천존은 소년에게 들이닥쳤다.

!

헌데 소년의 목을 움켜쥐었다 여긴 손아귀에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이럴 수가!)

독천존은 불신에 휩싸여 급정거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노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팔십 평생 헛손질을 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화악!

전광석화처럼 이동한 독천존이 급정거하면서 강렬한 돌풍이 일어났다.

!”

꺄악!”

멈춰서는 독천존 주변의 사람들이 돌풍에 휘말려 비틀거리거나 나자빠지며 비명을 질렀다.

... 저 늙은이가 언제 여기에...”

히익!”

... 귀신이다!”

공간 이동하듯 나타난 독천존을 본 주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친다.

(분명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빠져나갔다. 이런 수준의 경신술과 보법은 도둑들의 왕인 야유신 정도만이 구사할 수 있을 텐데...)

독천존은 겁에 질려 물러서거나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녹색 눈썹을 찡그렸다.

(도둑들의 왕 야유신!)

그 직후 독천존의 등줄기로 오싹한 냉기가 치달렸다.

(설마...!)

그는 급히 품속에 손을 넣어 뒤졌다.

(전낭(錢囊) 뿐만 아니라 온갖 극독이 들어있는 살천독낭(殺天毒囊)도 사라졌다!)

폼 속을 뒤지는 손아귀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한 독천존은 몸서리를 쳤다.

자신은 소매치기를 당한 것이다!

(전낭이야 그렇다 쳐도 살천독낭을 잃어버리면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

독천존의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졌다.

(특히 살천독낭 안에 들어있는 구룡짐독(九龍鴆毒)은 통제에서 벗어날 경우 사방 천리 내의 모든 생명을 죽일 수도 있다.)

삐익!

독천존은 입술을 모아 높고 긴 휘파람을 불었다.

 

***

 

부운은 대로 변 뒤쪽의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있었다.

골목길은 한산해서 오가는 사람이 없다.

발자국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달리는 부운의 양손에는 크고 작은 주머니가 들려있다. 천으로 만들어진 돈주머니와 상당히 큰 가죽 주머니다.

주머니들은 방금 전까지 독천존 서래음의 품속에 들어 있었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듯한 가죽 주머니가 살천독낭이라 불린다는 사실을 부운이 알 리 없다.

 

천불투는 한번 본 것을 그대로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는 부운의 능력을 만천신안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부운의 능력은 도척이 지녔었다는 만천신안 이상이다.

눈빛에 의지를 담아서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손이 닿아있는 상황에서는 물건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

부운이 천불투와의 주사위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능력 덕분이었다. 사발 안에 들어있던 주사위를 움직여서 자신이 원하는 숫자로 만들었던 것이다.

부운은 독천존을 따라가며 눈빛으로 위협을 했었다.

절세 고수답게 독천존은 즉각 알아차리고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뒤따라가던 사람들이 독천존과 부딪히는 일이 벌어졌다.

독천존과 몸을 접촉했던 사람들 중에는 물론 부운도 있었다.

몸이 닿는 순간 부운은 경이적인 속도로 손을 써서 독천존의 물건을 턴 것이다.

 

(아슬아슬했다.)

부운은 달리면서 오른쪽 어깨를 곁눈질 했다.

(할아버지에게 배운 투도술을 전력으로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들켜버렸다. 과연 독천존이 칠대고수 중 한명으로 꼽힌 게 우연이 아니었다.)

푸스스!

부운이 곁눈질하는 오른쪽 어깨의 옷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노독물의 손이 몸에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옷이 독기에 부식되어 부서지고 있다. 삼보면천으로 피하지 못했다면 죽은 목숨이었다.)

부운이 식은땀 흘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삼보면천은 천불투를 오대신투 중 한명으로 만들어준 경이적인 보법이다.

세 걸음만 움직이면 천벌이라도 피할 수 있다는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삼보면천 덕분에 부운은 독천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삐익!

부운이 달려온 방향에서 높고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 독천존이 날 찾기 위한 수단을 발동한 모양이다.)

부운은 젖 먹던 힘까지 동원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

 

삐이익!

독천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높고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있었다.

... 뭐야 저 늙은이? 맛이 좀 간 건가?”

어린 애도 아니고 백주대로에서 휘파람이나 불고 있다니... 뭘 하는 거지?”

길가로 물러선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독천존을 보고 있었다.

삐익! !

그 사이에도 독천존이 부는 휘파람 소리는 점점 더 높고 급박해졌다.

!”

... 저거...”

어리둥절하던 사람들은 놀라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쿠오오!

갑자기 하늘에서 구름 같은 것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지자 드러난 구름 같은 것은 엄청난 숫자의 말벌들이었다. 무려 어른 손가락만한 크기의 말벌 수천마리가 구름처럼 내려오는 것이다.

... 말벌이다!”

... 도망쳐!”

히익!”

거리는 삽시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고 주변 가게들은 급히 문을 닫았다.

말벌이 얼마나 사납고 치명적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독천존의 머리 위로 내려오고 놈들은 일반적인 말벌들보다 몇 배 더 크다. 말벌의 다른 이름인 작봉(雀蜂;참새만한 벌)에 잘 어울리는 크기다.

부웅! !

거대한 말벌들은 독천존의 머리 위 삼장쯤에서 고리 형태로 소용돌이치며 대기하고 있었다.

대독금봉(大毒金蜂)! 노부의 물건을 훔쳐간 도둑놈을 찾아라! 지체하면 안된다.”

휘파람 불기를 멈춘 독천존이 손을 저으며 외쳤다.

붕붕!

그러자 말벌들은 마치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듯 고개 짓을 했다.

화악! 부우웅!

대독금봉이라 불린 말벌들은 폭죽 터지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구룡짐독에 비하면 망산쌍독이 훔쳐간 실혼고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쏴아아!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는 말벌들을 보며 독천존은 이를 부득 갈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구룡짐독을 회수해야만 한다. 자칫하다가는 금릉의 모든 인간이 죽을 수도 있으니...)

독천존은 납덩이를 삼킨 심정이었다.

소매치기 당한 물건의 위험성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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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려진 거물(巨物)

 

 

 

흥륭객잔(興隆客棧)은 흥륭(힘차게 번성함)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최근 가장 성업 중인 객잔이다.

화려하게 꾸며진 입구로 손님들이 끊임없이 드나들고 있으며 식음료를 파는 식당도 북적거린다.

금릉에서 좀 논다하는 남녀들이 반드시 들려야하는 곳이 흥륭객잔이다.

 

흥륭객잔 맞은편에는 폐업 중인 상가가 있다.

포목상을 하던 가게로 장사는 잘 되었지만 영업을 안 한지 꽤 오래 되었다.

원인은 유산 다툼이다.

포목상 주인이 죽자 한 푼이라도 더 차지하려는 자식들의 욕심 때문에 성업 중이던 가게는 문을 닫아야만 했다.

이래저래 돈이 피보다 진하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폐업한 포목상 가게의 이층 창문 중 하나가 조금 열려있다.

한 뼘 쯤 열린 창문 틈으로 흥륭객잔을 염탐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부운 일행이다.

정칠과 철두 뿐만이 아니라 굳이 따라온 분이도 있다.

마주 선 철두와 정칠이 창문 틈에 아래위로 얼굴을 댄 채 밖을 살피고 있다.

두 놈 사이에는 분이가 쪼그려 앉아서 창밖을 보고 있다.

부운은 창문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손바닥만한 크기에 제법 두꺼운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저 늙은이가 정말 그 노독물(老毒物) 맞는 것 같냐?”

열린 창문 틈의 가장 높은 위치에서 밖을 살피던 철두가 정칠에게 물었다.

흥륭객잔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삼층은 모두 식당이다. 실내장식이 화려한 식당 안에는 손님들로 가득 차 있다.

틀림없대도 그런다. 금릉 일대에서 나 정칠만큼 눈썰미 좋은 인간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철두의 맞은편에서 정칠이 코웃음을 쳤다.

부운 오빠가 있잖아.”

창틀에 턱을 괸 채 앉아있던 분이가 눈을 흘겼다.

?”

정칠이 분이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는 눈썰미 좋기론 부운 오빠에게 못 당한다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 하는 거야?”

... 그게...”

정칠은 당황하여 부운의 눈치를 보았다.

역시 뺀질이 정칠을 잡는 건 분이 밖에 없구나.”

철두가 고소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 노독물, 아직 객잔에 있냐?”

작지만 두툼한 책을 보고 있던 부운이 창문으로 다가왔다.

! 반주까지 곁들여서 밥 먹느라 아직 흥륭객잔에 머물고 있다.”

머쓱해하던 정칠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정말 그 노독물인지 확인해보자.”

분이 뒤에 선 부운은 창문이 열린 틈으로 건너편을 살펴보았다.

날이 더워서 흥륭객잔의 모든 창문은 열려있다. 덕분에 북적이는 식당 내부도 훤히 들여다보인다.

먹고 마시는 손님들 사이에 눈에 확 띠는 노인이 있다. 특이하게 머리와 피부색이 녹색이고 눈동자는 새파란 노인이다.

정칠이 뒤를 밟았던 그 노인이다.

녹발벽안의 노인은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서 술을 곁들인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어떠냐? 저 늙은이가 당금 무림의 최고고수들인 우내칠절(宇內七絶)중 독천존(毒天尊) 서래음(西來音) 맞지?”

정칠이 흥분해서 부운에게 물었다.

독천존 서래음... 못 다루는 독이 없고 누구든 독살 시킬 수 있다는 독문제일인(毒門第一人)...”

부운은 들고 있는 작은 책을 다시 보았다.

책의 펼쳐진 곳에는 녹발벽안인 노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흥륭객잔에서 먹고 마시는 중인 노인의 모습이었다.

 

세상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도척총림(盜跖叢林)이라는 조직이 있다.

양상군자, 즉 도둑들의 모임으로 총수는 당대의 도수가 맡는다.

도척총림에서는 작업할 때 주의해야할 고수들의 용모파기(容貌把記)와 내력을 책자로 만들어 배포한다.

삼년마다 한번씩 개정되는 이 책자의 제목은 강호인명록(江湖人名錄)이다.

오대신투 중 한명을 외조부로 둔 부운은 어려서부터 강호인명록을 접해왔다.

망산쌍독을 단박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도 강호인명록 덕분이다.

강호인명록의 맨 앞부분에는 현 무림의 최고 고수 칠인의 용모파기와 내력이 수록되어 있다.

우내칠절이라 불리는 일곱명의 절세고수들이다.

우내칠절은 각기 한 방면에서 천하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아무리 간이 큰 도둑이라도 우내칠절을 대상으로 작업할 엄두는 내지 못한다.

 

강호인명록의 내용과 일치한다. 저 늙은이는 틀림없는 독천존 서래음이다!”

강호인명록에 그려진 초상화를 확인한 부운이 말했다.

부운은 강호인명록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고수들의 용모파기를 흑건회 아이들에게 보여주었었다.

혹시라도 그들 중 한명이 금릉에 나타나면 작업을 해볼 생각에서였다.

강호인명록 상의 서열 백위 안에만 들어도 한 지역의 패자가 될만한 거물이다.

그랬는데 오늘 무려 무림칠절 중 한명이 금릉에 모습을 드러냈다.

아싸!”

부운이 확인해주자 정칠은 주먹 불끈 쥐며 좋아했다.

“!”

그 직후 부운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칠대고수 중 한명인 독천존이 금릉에 나타난 걸 나 정칠이가 제일 먼저 알아낸 셈... !”

콰당!

신나하던 정칠은 부운의 발길질에 배가 차여 발라당 넘어졌다.

정칠을 걷어찬 부운은 철두도 옆으로 밀치며 창문에서 물러섰다.

눈치 빠른 분이는 다람쥐처럼 바닥에 몸을 굴렸다.

너 이 새끼...”

갑자기 발길질을 당한 정칠은 버럭 화를 내며 일어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부운이 손가락 하나를 세워 입을 가리며 창문에서 물러서는 것을 본 때문이다.

!

분이 못지않게 눈치가 빠른 정칠은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부운은 뒷걸음질 치면서 조금 열려있는 창문 틈으로 건너편 흥륭객잔을 보았다.

술을 마시던 독천존이 고개를 돌려서 부운 일행이 숨어있는 상가를 보고 있었다.

부운을 오싹하게 만든 건 독천존의 시선이었다.

(... 들켰어!)

(우리가 숨어서 자길 염탐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상황을 알아차린 분이와 철두, 정칠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상대는 당대 최고의 고수 중 한명이다.

밉보였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다.

(이 건물에서 흥륭객잔까지의 거리는 대략 칠장(七丈;21미터) 정도... 비록 시장통이라 소란스럽긴 해도 독천존 정도의 고수라면 우리들의 대화를 걸러서 듣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부운은 창문 앞을 떠나 일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갔다.

분이등도 엉금엉금 기어 부운을 따라갔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조심해야만 한다.)

겁에 질린 분이등과 달리 부운은 흥분을 애써 누르며 계단을 내려갔다.

 

독천존 서래음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건너편 건물을 보았다

영업을 하지 않고 있는 듯한 그 건물의 창문들 중 하나가 조금 열려있다.

별일도 다 있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까지 관심을 보이다니... 노부의 인기가 이렇게 대단했던가?”

독천존은 피식 웃으며 다시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면서도 나이 든 인간들도 아니고 어린놈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딱히 신경 쓸 일이 아니긴 하지. 어쩌면 두 번 다시 금릉에는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니...)

독천존은 술잔에 남아있던 술을 마셨다.

 

***

 

부운은 포목상 뒷문으로 나왔다.

뒷골목이라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분이 등도 겁에 질린 채 부운의 뒤를 따라 건물을 나왔다.

(위험하고 실패할 가능성도 있지만 시도해 봐야한다. 독천존의 주머니를 털기만 하면 도척제전에서의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니...!)

걸음을 옮기며 부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독천존 서래음은 무림인들에게는 사신(死神)과도 같은 존재다.

가공할 독공을 지니고 있지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는 쓰지 않는다.

그러나 상대가 무림인이라면 가차가 없다.

독천존에게 죄를 지었다가 한줌 독수가 되어버린 무림인의 숫자는 천명이 넘으며 멸문당한 문파도 수십 곳에 이른다.

다만 무공으로만 따질 경우 독천존이 천하제일인은 아니다.

무림칠절 서열 일, 이위인 사자천존(獅子天尊)이나 철면마존(鐵面魔尊)에 비하면 손색이 있기 때문이다.

사자천존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는 무림맹(武林盟)의 맹주였지만 지금은 은퇴한 상태다.

철면마존은 사자천존이 은퇴하면서 쇠락한 무림맹 대신 패권을 차지한 천마련(千魔聯)의 맹주다.

일천명의 절세적인 마두들로 이루어진 천마련은 사상최상의 마세(魔勢)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림칠절 중 사자천존과 철면마존 다음 서열이 독천존임은 암묵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변호에 존()이 들어가기도 해서 그들 삼인을 달리 절세삼존(絶世三尊)이라고도 부른다.

 

(독천존의 신물이라면 편복귀가 손에 넣었다는 왕희지의 서첩은 물론이고 야유귀가 내놓을 어떤 장물에도 지지 않을 것이다.)

부운은 철이 든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이 뛰노는 것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가 독천존을 노리는 것은 물론 도척제전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다.

도수가 되어야만 도척이 남겼다는 흑령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흑령장의 신통력을 빌면 어머니의 시력을 회복시켜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덧 부운의 마음은 결의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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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척제전(盜跖祭典), 도둑들의 축제

 

 

 

() 초기의 인물화 대가 고문진(高文進)이 그린 명비별리도(明妃別離圖)의 모사(模寫)가 끝났어요.”

부운은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명비(明妃)는 한() 나라 때의 미녀 왕소군(王昭君)를 말한다.

왕소군은 중국 사대미녀 중 한명으로 꼽히는 절세미녀다.

하지만 궁중의 화공(畫工;화가) 모연수(毛延壽)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초상화는 추녀로 그려졌다.

당시의 황제 원제(元帝)는 왕소군을 추녀로 여겨 흉노의 추장 호한야선우(呼韓耶單于)에게 주었다.

이윽고 호한야선우가 떠나는 날 처음으로 왕소군을 본 원제는 그녀의 미모에 넋이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호한야선우에게 왕소군을 주기로 했으니 물릴 수도 없었다.

대신 왕소군을 추녀로 그린 모연수를 처형하여 화풀이를 했다고 한다.

명비별리도는 왕소군이 중원을 떠나 흉노로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수고했다.”

천불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원본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자.”

천불투는 탁자에 놓여있던 두루마리를 펼쳐서 부운이 그린 그림 옆에 나란히 놓았다.

펼쳐진 두루마리의 그림은 부운이 그린 그림과 완전히 똑같았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두루마리의 그림은 낡은 느낌이지만 부운의 그림은 밝게 보인다는 정도였다. 새 종이에 그려진 탓에 생긴 차이였다.

감쪽같구나. 인물들은 물론이고 왕소군이 타고 있는 말과 주변 풍경까지도 완벽하게 일치해. 바탕 재질이 다른 것만 빼면 어느 쪽이 진본인지 분간할 수 없었을 게다.”

두 장의 그림을 비교하며 천불투는 감탄했다.

오래 본 것도 아니고 일별(一瞥), 말 그대로 한번 흘깃 본 그림을 어떻게 똑같이 모사를 한 것이냐?”

천불투는 그림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부운에게 물었다.

이치는 잘 모르겠지만... 한번 본 건 그게 무엇이든 제 머리 속에 완벽한 형태로 각인(刻印)이 되곤 해요. 전 그걸 그냥 다시 종이 위에 풀어내면 되구요.”

부운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부운은 물건이든 사람이든 손을 대면 그 내력을 완전히 알 수 있다.

그 능력 덕분에 슬쩍 만진 것만으로도 두루마리 안의 그림을 머릿속에 완전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다.

부운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건 외조부에게도 말하지 않았었다.

천불투가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며 말했다.

아마도 넌 전설 속의 만천신안(瞞天神眼)을 타고 난 것같다.”

하늘을 속이는 신의 눈... 거창한 이름의 능력이로군요.”

만천신안은 도둑들의 영원한 왕 도척께서 지녔었다고 알려진 능력이다. 만천신안 덕분에 도척께서는 누구든 속일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속지 않았다고 한다.”

도척이 도둑들의 왕이 된 배경에는 만천신안이라는 능력이 있었군요.”

무엇이든 본 즉시 복제해낼 수 있는 만천신안의 능력은 투도 뿐 아니라 싸움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적이 사용하는 무공의 허실을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겠네요. 적의 허점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테니...”

하지만 너의 만천신안은 좀 더 보안을 해야만 한다.”

천불투가 그림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제가 명비별리도를 모사하면서 실수를 한 부분이 있나요?”

원본에서 잘못 된 부분을 찾아봐라.”

원본의 잘못 된 부분이라면...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는데...”

부운은 원본 그림을 살펴보며 갸웃 했다.

원본에 어떤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모사는 완벽했다.

천불투가 물었다.

명비별리도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느냐?”

왕소군이 흉노의 선우(單于;, 추장)를 따라 중원을 떠나는... !”

부운은 외조부의 질문에 대답하다가 비로소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알아차렸느냐?”

천불투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

부운은 원본을 살펴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왕소군을 수종하는 시녀와 하인들뿐만 아니라 흉노의 군사들까지 모두 우는 표정이로군요.”

그림 속의 모든 사람들이 울상을 짓고 있다.

하녀와 하인들뿐 아니라 말고삐를 잡은 유목민과 뒤따라오는 기병들도 모두 울고 있는 듯한 표정이다.

절세미녀를 얻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흉노의 군사들이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라 울상을 하고 있다는 건 이 원본 그림도...”

물론 위작(僞作;흉내 내어 그린 그림)이란 뜻이다.”

천불투는 원본을 집어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당대의 도수(盜首)인 야유신(夜遊神)이 젊은 시절에 모사한 위작이다. 물론 군사들의 표정을 원본과 다르게 그린 것도 야유신이었고...”

야유신은 오대신투 중 한명이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의 도둑이기도 하다.

부운이 진품으로 알고 있었던 명비별리도는 야유신이 그린 위작이었던 것이다.

제가 베끼는데 급급해서 그림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놓쳤군요. 그 때문에 원본이 위작이라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부운은 한숨을 쉬며 자기가 그린 그림을 집어들었다.

진정한 만천신안은 겉이 아니라 실체와 알맹이까지 알아보는 경지다. 타고난 능력에 안주하지 말고 사물의 이치까지 꿰뚫어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천불투는 두루마리를 둘둘 말면서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부운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말면서 말했다.

말해봐라.”

천불투는 두루마리를 완전히 말면서 의자에 앉았다.

부운은 외조부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올해 열리는 도척제전에는 참가하지 않으실 생각이신지요?”

 

-도척제전(盜蹠祭典)!

 

도둑들의 시조이며 영원한 우상인 도척(盜跖)을 기리는 제사다.

동시에 그 시대 도둑들의 수령, 즉 도수를 뽑는 대회이기도 하다.

도둑들은 매 삼년마다 열리는 도척제전에 자신이 훔친 가장 귀한 물건을 갖고 온다.

도척제전에 참석한 도둑들이 가장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는 물건의 주인이 다음 삼년 간 도수로 인정된다.

도수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그렇긴 하지만 그 권위를 인정받아서 도둑들 간에 분쟁이 발생하면 중재하거나 심판을 내릴 수 있다.

근본 없는 좀도둑이 아닌 이상 도둑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도척제전에서 도수로 선발되는 것이다.

 

할애비가 왜 도척제전에 참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냐?”

천불투가 무심한 표정으로 물었다.

삼년전과 달리 준비를 하지 않으시는 것같아서...”

부운은 외조부의 눈치를 보며 마주 앉았다.

할애비도 이제는 늙었다. 젊은 것들과 경쟁한 건 힘에 부치는구나.”

천불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편복귀(蝙蝠鬼)가 대륙전장의 금고에서 왕희지(王羲之)의 서첩(書帖)을 빼내는데 성공했다는 소문도 들리는구나.”

부운의 눈이 반짝 빛났다.

편복귀라면 할아버지와 함께 오대신투(五大神偸)에 드는 정체불명의 도둑 아닌지요?”

지난 십년 사이에 야유신의 아성에 가장 강력하게 도전해오고 있는 젊은 도둑놈... 그놈이 왕희지가 남긴 몇 권 안되는 서첩 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면 맞설 수단이 사실상 없다.”

(한 달 남짓 밖에 남지 않은 기한 내에 왕희지의 서책보다 귀중한 물건을 손에 넣기는 쉽지 않겠지.)

부운은 비로소 외조부가 도척제전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이유를 알았다.

 

동진(東晉) 시대의 서예가이며 시인인 왕희지는 서성(書聖), 즉 서예의 성인으로 불린다.

예서(隸書)를 특히 잘 썼던 그에 의해서 이전 시대까지는 그저 의사소통의 수단이었던 서예가 예술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다.

역대 제왕들은 왕희지를 존경하여 그의 글씨 한자라도 얻으려 혈안이 되었었다.

특히 당태종 이세민은 누구보다 열렬히 왕희지를 추종하였다.

이세민의 영향으로 인해 왕희지의 서체는 이후 모든 서예의 근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세민은 왕희지가 남긴 최고의 작품 난정서(蘭亭序)를 너무도 아껴서 자신의 무덤에 함께 묻으라는 유언을 했다.

이에 구양순(歐陽詢)등 당대의 서예가들이 급히 난정서를 모서(模書)하여 후대에 남겼다.

 

편복귀가 정말로 왕희지의 친필 서첩을 손에 넣었다면 승부는 끝났다고 봐야한다.

왕희지의 글씨를 이길 수 있는 보물은 역사를 통틀어도 몇 가지 안된다.

소림사의 뿌리인 달마역근경도 그 중 하나다.

천불투가 세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했었던 것은 그저 부운이 익힐만한 내공심법을 찾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달마역근경을 훔칠 수만 있다면 도수로 인정받은 데에 무리는 없다.

천불투가 말했다.

이번은 건너뛰고... 삼년 후에 열리는 차기 도척제전에 부운이 네가 할애비 대신 참가하도록 해라.”

도척제전에서 우승하면 도수의 상징으로 흑령장(黑靈掌)이란 장갑(掌匣)을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운이 심각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도척께서 남기신 유물이라는 흑령장은 지난 이십여년간 야유신이 독점해왔지.”

천불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운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 흑령장에 어떤 소원이라도 들어주는 신통력(神通力)이 깃들어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신통력이라...”

천불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도척께서는 늘 흑령장을 늘 손에 끼고 계셨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흑령장의 정확한 쓰임새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아내지 못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흑령장은 어떤 힘에도 훼손되지 않아서 손을 보호해주는 도구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천불투가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흑령장이 도둑들의 왕인 도척께서 남기신 유물이다 보니 여러 가지 소문이 생겨났다. 그 소문들 중 하나가 흑령장에 도척의 혼백이 서려 있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것이다.”

부운이 긴장하며 다시 물었다.

그 소문에 대한 할아버지의 의견은 어떠신지 듣고 싶습니다.”

할애비가 알기로는...”

천불투는 잠시 뜸을 들였다.

부운은 긴장해서 숨도 크게 못 쉬며 외조부의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잠시 끊어졌던 천불투의 말이 이어졌다.

신통력인지 저주인지는 모르겠지만 흑령장에는 그것을 소유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는 힘이 깃들어 있다.”

(역시!)

부운의 꽉 쥔 주먹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곁눈질로 그것을 힐끔 보며 천불투가 말했다.

역대 도수들 중에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이적(異蹟;기이한 행적)을 보인 분들이 계신다. 아마 그 이적들은 흑령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일 게다.”

부운이 흥분을 숨기려 애쓰며 물었다.

만일... 만일 흑령장의 힘을 빌면 어머니의 시력도 회복시킬 수 있을지요?”

천불투는 비로소 부운이 도척제전과 흑령장을 언급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세상에는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흑령장을 지녔던 역대 도수들의 신변에서 기이한 일들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고...”

(흑령장의 힘을 빌면 어머니가 다시 앞을 보실 수도 있겠구나.)

부운에게는 도척제전에 참가하여 우승해야하는 이유가 생겼다.

(부운이가 도수가 될 결심을 했으니 도둑들의 세계에 한바탕 파란이 일겠구나.)

외손자의 속내를 짐작한 천불투가 소리 없이 한숨을 쉴 때였다.

무슨 일이야 철두오빠?”

분이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지금쯤 정칠오빠와 함께 금릉 성내에 있어야하는 거 아니야?”

부운과 천불투가 돌아보니 분이가 옆쪽을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부운이 안에 있냐?”

곧 철두가 헐떡이며 가게 앞에 나타났다.

있기는 한데... 또 무슨 일 저지른 거야?”

분이가 철두에게 눈을 흘길 때였다.

첫날인데 벌써 싫증이 난 거냐?”

부운이 가게에서 나오며 말했다.

아니면 또 무슨 말썽이라도 일으킨 거냐?”

그게 아니고...”

부운의 추궁에 철두는 불쾌한 표정이 되었다.

정칠이 놈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사색이 되어서 널 불러오라고 하더라.”

그래?”

내뱉는 철두의 말에 부운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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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막힌 재주들

 

 

 

사과가 맛있어요. 처녀 맛 나는 사괍니다.”

양손에 사과를 든 정칠이 신이 나서 외쳤다.

철두는 과일 좌판 옆에 뻘쭘한 표정으로 서있다.

좌판의 주인인 정씨 노인은 고개를 설레 저으며 사과를 닦고 있다.

처녀 맛 나는 사과?”

망측해라!”

지나가던 여자들은 눈을 흘기거나 얼굴이 발개진다.

반면 사내들은 히죽거리며 오고간다.

싱싱할 때 사세요. 여자든 사과든 때를 놓치면 맛이 갑니다.”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것처럼 정칠은 익살스럽게 호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정칠 저 새끼... 갈보집하는 작자의 아들 아니랄까봐 호객에는 도가 텄어.)

철두는 부러움 섞인 눈으로 정칠을 힐끔거렸다.

(뭐 갈보들을 파는 것과 사과 파는 게 다를 것도 없지. 물 좋을 때 팔아야 제값을 받는 건 똑같으니...)

하릴없이 좌판의 사과를 뒤적이며 철두는 쓴웃음을 지었다.

누나! 형님! 이거 한 번 잡숴바! 누나는 때깔 좋아지고 형님은 물건 실해져!”

흥이 오른 정칠이 지나가던 남녀 한 쌍에게 사과를 들이밀며 수작을 건다.

(정칠이 놈이야 어딜 내놔도 제 밥벌이는 할 놈인데... 문제는 나다. 이 뻘쭘한 짓을 한 달이나 계속해야한다니 죽을 맛이다.)

정칠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철두 자신도 오가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 특히 젊은 여자들의 흘겨보는 시선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무뚝뚝한 성격에 숫기도 없는 철두에게는 고역도 이런 고역이 없다.

(생각 같아서는 때려 치고 싶다만... 그랬다가는 부운이 새끼가 지랄지랄 할 게 뻔하니 그럴 수도 없고...)

철두 입에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창피하면 그만 가봐.”

사과를 닦던 정씨 노인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백정 같이 생긴 놈이 옆에 서있으니 될 장사도 안돼! 성의를 보인 걸로 됐으니 돌아가.”

됐수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할배는 신경 끄슈.”

철두도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괜스레 좌판의 사과들만 뒤적거렸다.

정씨 노인이 콧방귀를 꿨다.

퍽이나 좋아서 하는 일이겠다 이놈아. 마지못해 자리 지키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데...”

아 사람이 말 하면 좀 믿어주던가...”

성질을 내려던 철두는 입을 다물었다. 정칠의 호객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돌아보니 양손에 사과를 든 정칠이 굳어져서 누군가를 보고 있다.

한 눈에 봐도 남다른 외모의 노인이 정칠의 앞쪽에서 다가오고 있다.

칠순은 넘어 보이는 노인인데 머리카락이 녹색이고 눈빛은 쪽빛같이 푸른 벽안(碧眼)이다.

색목인(色目人)인가 싶지만 얼굴 생김은 전형적인 한족이다.

노인답지 않게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인데 해골에 가죽을 씌운 듯한 얼굴은 녹색을 띠고 있다.

눈에 띠지 않을 수 없는 외모라 오가던 사람들이 대부분 노인을 돌아본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에 익숙한 듯 녹발벽안(綠髮碧眼)의 노인은 무심한 표정으로 정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정칠은 노인이 지나가는 동안 석상처럼 굳어져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정칠이 놈이 쫄만한 행색의 늙은이구만.)

좌판 근처를 지나가는 녹발벽안의 노인을 곁눈질하며 철두도 침을 꿀꺽 삼켰다.

노인에게서는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가 흘러넘쳐서 보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이윽고 노인은 좌판을 지나 멀어져 갔다.

뭐냐?”

철두는 노인을 곁눈질하며 정칠에게 다가갔다.

으으으!”

가까이 가보니 정칠은 학질에라도 걸린 듯이 덜덜 떨고 있다.

철두는 피식 웃었다.

저 괴상한 늙은이가 원인이냐? 왜 개장수 만난 똥개 시늉인 거냐?”

... 야 빨리 온고당에 가서 부운이 불러와라.”

정칠은 철두에게 사과를 안기며 흥분해서 말했다.

부운이 새끼를 불러오라고?”

철두는 정칠이 건네는 사과를 받으면서 어리둥절했다.

잘 하면 한 달 동안 장씨 영감 장사 돕는 쪽팔리는 짓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정칠은 두려움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녹발벽안의 노인을 따라갔다.

저 새끼가 뭔 소리를 씨부리는 건지 감이 안 오는군.”

녹발벽안의 노인을 몰래 따라가는 정칠을 보며 철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도 정칠이 아주 없는 소리 지어내는 놈은 아니니 믿어보자는 마음이 생겼다.

영감, 나 잠깐 집에 좀 다녀오겠수다.”

철두는 사과를 좌판에 내려놓았다.

잠깐 다녀오지 말고 가서 아주 오지 말어. 네놈들이 바람 잡는다고 안될 장사 잘 되는 거 아니니까.”

정씨 노인이 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도 그러고 싶소. 어쨌든 다녀오겠수다.”

철두는 뛰듯이 성문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하여간 온고당 조영감의 손자가 난 놈은 난놈이야.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저 왈짜 놈까지 꼼짝 못하게 만드는 걸 보면...”

정씨노인은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철두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

 

금릉의 번화가에는 비할 바 못 되지만 해하촌의 시장통도 제법 북적 대고 있다.

날씨가 좋아서인지 구경이나 소일거리 삼아 해하촌을 찾는 외부 손님들이 적지 않다.

온고당 앞에서는 분이가 한 쌍의 남녀를 상대로 흥정하고 있었다.

손님들은 부유해 보이는 뚱뚱보 중년인과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은 기생 분위기의 여자다.

가게 안쪽 응접실에서는 부운이 탁자 앞에 서서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

탁자 건너편에는 조노인, 천불투가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다.

부운은 족자로 만들만한 긴 종이에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털옷을 걸치고 비파를 품에 앉은 미녀가 말에 탄 채 산을 넘어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유목민 행색의 우락부락한 사내가 미녀가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있으며 짐을 이고 진 궁녀와 하인들이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모두 울상인 궁녀와 하인들 뒤로 유목민 기마병들이 따라간다..

(불가사의로다. 단 한번 본 그림을 똑같이 그려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려지는 그림을 보며 천불투는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부운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탁자 위에는 둘둘 말려진 두루마리가 하나 놓여있다.

부운은 그 두루마리의 그림을 한 번 본 후 똑같이 모사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건 보는 눈이 탁월하세요 손님.”

부운의 그림 솜씨에 감탄하던 천불투의 귀에 분이의 낭랑(朗朗)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옥두꺼비는 송()나라 휘종(徽宗)이 아끼던 물건이라고 해요.”

돌아보니 분이가 뚱뚱보 중년인을 상대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중년인은 주먹만한 크기의 옥두꺼비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요리조리 살피고 있었다.

양산을 쓴 기생은 지루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서 있다.

오오! 이게 풍류황제(風流皇帝)로 이름난 휘종 조길(趙佶)의 애장품이란 말이지?”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머나. 휘종이 풍류황제라 불린다는 것과 휘()가 길()이란 것까지 아시고... 손님, 정말 박학다식하시네요.”

분이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어흠! 내가 역사와 예술에 조예가 깊긴 하지.”

분이의 찬사를 들은 중년인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림을 그리던 부운은 피식 웃었다.

천불투도 쓴웃음을 지었다.

분이가 사람 비위 맞추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 두꺼비들은 한 쌍이었는데 어제 최상서(崔尙書) 댁의 둘째 공자님께서 한 마리를 업어갔지 뭐에요?”

분이의 안타까워하는 말이 이어졌다.

최상서댁의 이()공자께서 한 마리를 가져갔다고?”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원래는 둘 다 가져가고 싶어 하셨지만 마침 갖고 계신 돈이 얼마 없으시다면서 한 마리만 데려갔어요. 조만간 다시 들르셔서 가져간다고 하셨는데 오늘은 아직 안 보이시네요.”

분이는 길거리를 살피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물론 다 지어낸 말이다

... 그래서 이걸 얼마에 팔려고 내놓은 것이냐?”

중년인이 조바심을 내며 흥정을 걸어왔다.

할아버지! 이 옥섬(玉蟾;옥두꺼비) 얼마에 팔까요?”

분이는 기다렸다는 듯 가게 안쪽에 대고 외쳤다.

천불투는 손가락 네 개를 펴 보였다.

사백 냥? 알았어요.”

분이가 즉시 큰 소리로 대답했다.

(사백 냥?)

(가짜 옥돌로 만든 조잡한 두꺼비 가격이 금릉 성내의 기와집 한 채 값...?)

부운과 천불투는 어이가 없었다.

기세를 탄 분이가 흥정을 이어갔다.

주인 할아버지가 사백 냥 말씀하시는데... 에이 기분이다. 백 냥 깎아드릴게요.”

이 귀한 걸 삼백 냥에 주겠다고?”

감격한 중년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사백 냥 중 백 냥쯤은 제게 떨어지는 판매수당이에요.”

분이는 그런 중년인에게 몸을 기울이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손님 인상이 너~무 좋으시고 또 오늘 마수걸이라 남기는 거 없이 드리는 거예요.”

분이는 눈웃음을 치며 팔꿈치로 뚱보를 슬쩍 치기까지 했다.

허어! 꼬마 아가씨가 배포도 크고 호탕하구만.”

중년인은 입이 귀에 걸려서 전낭(錢囊)을 꺼냈다.

! 신용도 으뜸인 대륙전장(大陸錢莊)에서 발행한 전표(錢表;지폐).”

중년인은 전낭에서 빳빳한 종이 세장을 꺼내 내밀었다. 중원의 삼대전장(三大錢莊) 중 하나인 대륙전장에서 발행한 전표들이었다.

고마워요 손님. 귀한 옥섬을 손에 넣으셨으니 머잖아 떡두꺼비같은 아드님을 얻으실 거예요.”

분이는 두 손으로 전표를 받으며 기생에게 눈웃음을 쳤다.

... 그렇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

중년인은 헤벌레 하며 기생을 끌어안았다.

어린 동생이 혀에 꿀을 발랐네.”

기생도 눈을 흘기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또 들려주세요.”

분이는 끌어안고 가게 앞을 떠나는 중년인과 기생 뒤에 대고 간드러지게 인사를 했다.

할아버지! 분이가 오늘도 한 건 했어요.”

그리고는 신이 나서 가게로 들어왔다. 전표를 흔들면서...

장사 수완이 좋은 건지 사기를 잘 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겠구나.”

천불투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네 냥에 팔아도 남는 조잡한 옥섬을 삼백 냥에 파는 건 지나치지 않느냐?”

뭐 어때요? 골동품이란 게 원래 정해진 가격이 없는 거잖아요. 아까 그 손님에게는 옥섬이 삼백 냥 이상의 값어치를 할 걸요?”

분이는 천불투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표들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네가 번 돈이니 네가 가져라.”

그럴 수는 없어요. 제가 그냥 좋아서 한 일이니까요.”

분이는 전표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사양하지 말고...”

어서 오세요 손님!”

천불투가 다시 권하려는데 분이는 밖으로 쪼르르 달려 나가며 외쳤다. 또 몇 명의 손님들이 가게 밖에 진열된 골동품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찬찬히 둘러보세요. 저희 온고당이 비록 이런 뒷골목에 자리하고 있긴 해도 물건 구색으로는 금릉 성내의 어떤 골동품 가게보다도 다양하답니다.”

분이가 손님들에게 가게 자랑을 시작했다.

분이 저년 요즘은 온고당에서 아예 사는구만.”

자기 가게처럼 장사를 하고 있어.”

지나가던 마을 여자들이 손님들에게 물건을 권하고 설명하는 분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온고당 주인 조영감의 외손자 부운이 때문이야.”

부운이가 왜?”

왜긴 왜야? 조영감에게 잘 보여서 손주며느리 자리 차지할 꿍꿍이지.”

옳거니! 부운이하고 잘 되어 보려고 제 어미가 하는 선술집 일은 나 몰라라 하고 온고당에서 사는구만.”

여자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눈으로 분이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요즘은 분이가 부운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는구나.)

가게 밖에서 손님들 상대하는 분이를 보며 천불투는 생각에 잠겼다.

(하긴 이곳 해하촌에서 부운이만큼 계집아이들의 마음을 잡아끌 사내 녀석은 없긴 하지.)

천불투는 쓴웃음을 지었다.

(문제는 부운이가 언제까지 해하촌에 머물 아이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분도 다르고 사는 세계도 다르니 필연적으로 분이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부운이에 대한 분이의 마음이 더 영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구나.)

천불투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다 그렸어요.”

부운이 붓을 그림에서 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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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림사를 털어라!

 

 

 

영약이라 해서 많이 먹는 게 좋은 건 아니다. 과다복용은 부작용을 야기할 뿐 아니라 몸이 흡수할 수 있는 약효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조노인의 설명이 이어졌다.

일반인들은 어느 정도 영약을 먹으면 더 이상 내공이 증진 되지 않는다. 약 기운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고 그냥 배출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헌데 특이하게도 너는 영약의 기운이 배출되지 않는 체질을 타고 났다. 흡수되지 않은 약기운도 몸속에 누적되었다가 서서히 내공으로 전환된다. 이론상으로는 영약을 무제한으로 먹어도 되는 게다.”

조노인 말대로 부운의 몸속에는 소화되지 않은 영약의 약효가 상당량 고여 있다.

부운이 물었다.

저같은 체질이 흔치는 않은 모양이지요?”

조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다. 할애비가 팔십살 넘게 살아오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체질이다.”

제가 그렇게 특별한 체질을 지닌 줄은 몰랐습니다.”

부운은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의 체질이 남다르다는 사실 역시 오늘 처음 알았다.

덕분에 할애비가 영약을 구해다 먹인 보람이 있긴 하다만...”

조노인이 이마를 모으며 말끝을 흐렸다.

마음에 걸리시는 게 있으신지요?”

네게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상승(上乘)의 내공심법을 익혔다면 이갑자 이상인 내공을 무리 없이 쓸 수 있을 테고... 그럼 세상 누구도 널 쉽게 어쩌지 못할 텐데...”

조노인은 못내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상승의 내공심법이란 게 손에 넣기 힘이 드는 것인지요?”

힘들다마다!”

부운의 질문에 조노인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의 문파나 가문에서 기밀 유지에 가장 신경 쓰는 게 내공심법이다. 내공심법이 모든 무공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유력한 세력이나 이름 높은 고수치고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지니지 않은 경우는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겠습니다.”

부운도 납득이 갔다.

아무리 기발한 무공을 지녔어도 내공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물며 이 넓은 강호에서 상승이라 불릴만한 내공심법은 몇 안된다. 전통 있는 문파와 가문들만이 보유하고 있을 뿐이다.”

조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대문파(九大門派)와 삼문육가(三門六家)등이 강한 것은 뛰어난 내공심법을 지닌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십오 년 동안 꾸준히 시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할애비가 익힌 풍전심법(風電心法)을 능가하는 내공심법은 손에 넣지 못했다.”

저는 풍전심법만으로도 만족합니다만...”

도가(道家)에서 흘러나온 풍전심법에도 나름대로의 장점은 있다. 즉각적으로 내공을 쓸 수 있게 해주며 빠른 속도를 내는 데 적합하다.”

 

풍전심법은 보법 삼보면천과 함께 부운이 익힌 두 가지 무공 중 하나다.

발동이 빠른 게 장점이지만 내공의 소모도 빨라서 금방 지치게 만든다.

또 빠른 대신 발산되는 힘이 가벼워서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이같은 장단점을 지녀서 풍전심법은 도둑질에 최적화된 내공심법이라고 할 수 있다.

 

네가 좀 더 큰일을 하려면 중후하고 위력적인 내공심법이 필요한 이유다.”

무림에서 이름난 내공심법이 어떤 게 있는지요?”

부운이 묻자 조노인은 주저없이 대답했다.

내공심법하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달마역근경(達磨易筋經)이다.”

 

달마대사가 지었다는, 혹은 천축(天竺)에서 가져왔다는 달마역근경의 가치에 관해선 이론이 없다. 역근세수경(易筋洗髓經)이라고도 불리는 달마역근경이 소림사 모든 절기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달마역근경에는 달마대사를 무공의 조종(祖宗)으로 만들어준 신비한 힘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근육을 바꾸고(易筋) 골수를 씻어낸다(洗髓)는 이명(異名)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달마역근경의 힘을 얻으면 환골탈태(換骨奪胎)하여 인간의 경지를 벗어날 수도 있다고 전해진다.

다만 달마역근경이 과대평가되었다는 말은 있다.

달마역근경이 세상에 나타난 후로 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며 그동안 다른 무공들도 끊임없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달마역근경이 무림인들이라면 꿈에라도 그리는 보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달마역근경을 입에 올릴 때마다 조노인의 진무른 눈에 열기가 어렸다.

할아버지께서도 달마역근경을 훔칠 시도를 하셨겠군요.”

외조부의 표정을 살피며 부운이 물었다.

도둑들 세계에서 소림사 장경각은 자금성의 황실보고(皇室寶庫)와 함께 반드시 들어가 보고 싶은 이상향(理想鄕) 같은 곳이다.”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조노인의 얼굴에 떠올랐다.

세상에서 잠입하기 가장 어렵다는 두 곳의 금지 중 한곳인 소림사 장경각을 조노인은 털어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는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을 드나드셨겠어요.”

부운은 외조부가 소림사 칠십이절기 중 두 가지를 거론했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했다가 빠져나온 도둑들에게는 성공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그래서 무공비급이나 소림사만 보유하고 있는 진귀한 불경 중 한 가지를 필사(筆寫)해서 갖고 나오는 게 전통이 되었다.

필사를 하는 이유는 진본을 반출했다가는 소림사의 대대적인 추격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도둑들은 한 번의 침투에서 한권의 책만 베껴서 갖고 나온다. 무려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한 이상 지체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할애비는 장경각에 세 번 들어갔었다.”

오오!”

조노인의 말에 부운은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

오대신투에 드는 천불투답게 조노인은 무려 세 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을 드나든 것이다.

어쩌면 소림사 장경각을 세 번이나 턴 위업 덕분에 오대신투 중 한명으로 꼽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첫번째는 도둑으로서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는 네게 익힐만한 상승의 내공심법을 얻기 위해서였다.”

조노인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달마역근경 외에도 소림사에는 여러 종의 내공심법이 존재한다.

그 내공심법들 중 몇 가지의 위력은 풍전심법을 능가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필사하지 않은 건 소림사 내공심법들이 지닌 한계 때문이다.

불문의 절기답게 소림사의 내공심법들은 거의 다 동자공(童子功)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익힐 수야 있지만 대성하려면 평생 동정을 유지해야만 한다.

장차 처첩을 들여 대를 이어야하는 부운이 익힐만한 내공심법들은 아니다.

 

세번째로 잠입한 건 십년전이었다. 네게 무공 전수하는 걸 더는 미를 수 없어서 장경각을 뒤졌지만 끝내 달마역근경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밤새 달마역근경만 찾다 보니 비급이나 불경을 필사할 시간이 없더구나.”

아쉬워하는 조노인에게 부운이 웃으며 말했다.

달마역근경은 제가 반드시 훔쳐내겠습니다.”

손자 하나 잘 둔 덕분에 좀도둑에 불과한 할애비의 이름이 무림을 뒤흔들겠구나.”

조노인 역시 웃었다.

도둑으로서 달마역근경을 훔쳐내는 것만큼 위대한 업적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좀도둑이라니요? 할아버지가 천하를 통틀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대도(大盜)라는 건 이 바닥 인생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오대신투 중 한명이니 뭐니 해봐야 허망한 명성일 뿐이다. 도척제전(盜蹠祭典)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해본 적이 없으니...”

조노인은 주름진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회한과 아쉬움이 떠올랐다.

 

세상에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도둑들의 세계에는 도척제전(盜蹠祭典)이라는 축제가 존재한다.

도둑들의 영원한 우상인 전설 속의 대도 도척(盜蹠)을 기리기 위해 열리는 축제다.

도척이 같은 시대에 살았던 공자(孔子)를 말빨로 물 먹였다는 전설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도척을 기리기 위한 도척제전의 우승자에게는 도수(盜首)라는 명예로운 칭호가 부여된다.

일단 도수가 되면 세상 모든 도둑들의 존경을 받게 되며 일정 범위 안에서는 도둑들을 지휘, 통제할 수 있는 권위도 생긴다.

도둑의 길로 들어선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부귀영화도 권력도 아니다.

도척제전에서 우승하여 제이(第二)의 도척, 도수로 불리는 것이 모든 도둑들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도수가 못 되신 걸 정말 아쉬워하시는구나.)

부운 자신도 도둑인지라 외조부의 아쉬워하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칠십 년 넘게 도둑질을 업으로 삼아왔지만 천불투는 끝내 도척제전에서 우승은 못했다.

달마역근경에 비교될만한 내공심법은 또 뭐가 있는지요?”

부운은 침울해진 분위기를 전환시킬 겸 질문을 했다.

전설 속의 고수들인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의 무공이라면 달마역근경의 내용을 오히려 능가하겠지.”

외손자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조노인이 즉시 대답했다.

하지만 몇백년 내에 삼황과 오제의 무공은 세상에 나타난 적이 없다. 오래전에 절전(絶傳)되었다고 봐야만 한다.”

아까운 일이로군요.”

삼황과 오제의 무공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주마. 밤이 깊었으니 그만 들어가서 자거라.”

조노인은 다시 원숭이 조각상을 집어들었다.

... 할아버지도 편히 주무세요.”

부운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냐. 너도 잘 자거라.”

원숭이 조각을 천으로 닦는 조노인을 남겨두고 부운은 응접실 안쪽의 안채로 들어갔다.

(가엾은 녀석...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자랐어야하는 신분인데 뒷골목에서 도둑질이나 배우고 있으니...)

조노인은 소리없이 한숨을 쉬며 원숭이 인형을 닦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가엾은 유향이에게서 떼어놓을 수도 없고...)

주름진 조노인의 얼굴에 그늘이 짙어졌다.

부운에게는 어머니인 온유향조차 모르는 어떤 비밀이 있다.

그 비밀은 오직 조노인만이 알고 있다.

(십오 년 전에 그랬듯 앞으로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 저 녀석의 복연(福緣)이 남다르다는 것만 믿을 수밖에 없다.)

어둑한 가게 안에 홀로 남은 조노인의 모습이 오늘 따라 왜소하게 보였다.

 

***

 

부운은 가게 뒤쪽에 붙어있는 안채로 들어섰다.

안채에는 작은 마당이 있고 마당 중앙에 우물이 있다.

우물이 있는 좁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세 채의 건물이 품()자 형태로 세워져 있다.

부운이 들어온 문의 정면에는 서재가 있다.

서재는 그리 넓지 않지만 삼면에 책들이 빼곡이 채워진 책꽂이가 채워져 있다.

서재 좌우의 건물 중 왼쪽 건물에는 방과 부엌이 있다.

부운은 부엌 옆에 있는 방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불이 꺼져있어 어둑한 실내에는 화장대와 옷장, 침대가 있다.

전형적인 규방, 여자들의 방이다.

침대에는 온유향이 곤히 잠들어 있다.

(어머니...)

침대로 다가간 부운은 온유향을 내려다보았다.

지나치게 흰 탓에 온유향의 단아한 얼굴은 어둠 속에 떠있는 것처럼 보인다.

감겨진 온유향의 눈꼬리에 눈물이 맺혀있다. 악다문 입에서는 신음인지 흐느낌인지 알 수 없는 숨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또 무슨 슬픈 꿈을 꾸고 계시는 것일까?)

부운은 한숨을 쉬며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할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내 출신 내력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계신다. 그 때문에 난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라왔다. 성이 장()씨라는 것 외에는...)

자신의 아버지와 관련하여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시력을 잃은 것도, 늘 비탄에 잠긴 채 지내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대체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부운은 온유향의 눈꼬리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끄윽! !”

부운의 손길에 자극을 받아서진이 혀 짧은 소리로 하는 온유향의 잠꼬대가 좀 더 커졌다.

손가락을 떼려던 부운은 움찔 했다. 닿은 손가락을 통해서 어머니의 잠꼬대가 느껴진 때문이다.

<안돼요 상공! 제발 그러시면 안돼요! 어쩌자고... 어쩌자고 이렇게 크나큰 죄를 지으시는 건가요?>

가슴이 사무치는 슬픔과 회한이 느껴지는 잠꼬대다.

(가엾은 어머니... 또 아버지와 관련된 악몽을 꾸고 계시는구나.)

부운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어머니의 눈꼬리에서 떼었다.

더 살펴볼 수도 있지만 자식의 도리가 아니기도 하고 아버지와 관련된 비밀을 아는 게 두렵기도 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강해져서 어머니를 기약없는 비탄에서 구해드려야만 한다.)

초췌한 어머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새삼 결의를 다지는 부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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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알 수 없는 신세(身世)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엾은 노친네의 생계 수단을 박살 내놓고도 느껴지는 게 없냐?”

철두와 정칠을 노려보는 부운의 눈에 번갯불이 흐르는 것 같았다.

... 미안하다.”

정칠이 부운의 시선을 피하면서 팔꿈치로 철두의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가 잘못했다. 용서해라.”

철두도 마지못해 사과했다.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들끼리 서로 돕고 보살펴주며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폐를 끼치면 어쩌자는 거냐?”

부운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낮아졌다.

화가 풀려서가 아니라 화를 안으로 삭히느라 목소리가 잦아든 것임을 소년 소녀들은 잘 알고 있었다.

부운의 목소리가 가라앉으면 정말 조심해야만 한다.

여기 오기 전에 장씨 할아범네 집에 들렀는데 네놈들이 패대기친 사과들은 골병이 들어서 다 헐값에 넘겼다더라. 당장 내일 물건 떼올 돈도 모자란다고 한숨이 방바닥을 꺼트릴 것같았다.”

... 그런 줄은 몰랐다.”

내일 찾아가서 변상을 할 테니 용서해줘라.”

철두와 정칠은 부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당연히 변상은 해야겠지.”

부운은 코웃음을 쳤다.

내일부터 한 달 동안 너희 둘이 장씨 할아범 장사를 도와라. 물론 물건도 너희들 돈으로 떼어다 드리고...”

... 한 달씩이나 거리에서 과일을 팔라는 거냐?”

정칠이 울상을 지었다.

? 죄책감이 뼛속까지 사무쳐서 한 달로는 부족하게 느껴지냐?”

부운이 냉소하며 노려보았다.

... 아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정성을 기울여서 장씨 할아범 장사를 돕도록 하겠다.”

정칠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너희들이 제대로 죄 값을 치루는 지는 지켜보겠다. 오늘 집회는 여기까지! 해산한다.”

부운은 돌아서서 입구로 갔다.

바짝 얼어있던 소년과 소녀들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같이 가 오빠!”

복면을 쓴 소녀 한명이 밖으로 나가는 부운을 서둘러 따라갔다.

그만 일어나라.”

부운이의 지랄 맞은 성격에 한 대만 때린 걸 다행으로 여겨라.”

맞어. 운이 좋았다 생각해라.”

소년과 소년들이 철두와 정칠 주변으로 모이면서 위로했다.

운이야 확실히 좋았지. 하마터면 뱀 새끼들의 밥이 될 뻔했으니까.”

정칠이 속없이 히죽거리며 일어났다.

흡혈신사인가 뭔가 하는 투명한 뱀 새끼들이 덤벼들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오금이 저린다는 거 아니냐?”

그렇다고 여기서 오줌 지리진 마라.”

그래 임마! 가뜩이나 냄새 지독한데 지린내까지 나면 상종 안해준다.”

소년들은 정칠을 툭툭 치며 웃고 떠들었다.

(개새끼! 나이도 많은 날 공개적으로 개망신 시켜? 그것도 네놈이 흑건회를 조직하기 전에는 다 내 똘마니였던 것들 앞에서?)

하지만 철두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두고 보자! 오늘 당한 수모는 가슴에 새겨둘 테니...)

정칠을 에워싸고 희희덕거리는 소년과 소녀들을 곁눈질하는 철두의 얼굴이 굴욕감으로 물들었다.

 

수고했다. 너무 늦지 않게 집에 돌아가라.”

부운이 건물에서 나오며 경계를 하던 소년들에게 말했다.

그 뒤를 복면 쓴 소녀가 종종 걸음으로 따라 나온다.

알았어 형.”

내일 보자 회주!”

소년들의 대답에 손을 들어 대꾸하며 부운은 해하촌을 향해 내려갔다..

건물에서 나온 소녀도 쓰고 있던 복면을 벗으며 부운을 따라갔다. 소녀는 분이였는데 두 볼이 발그레 상기되어 있다.

다친 데는 없는 거지 오빠?”

분이는 벗은 복면을 품속에 넣으며 부운에게 물었다.

정칠오빠에게 들어보니 그 자들 망산쌍독이라고 아주 무서운 인간들이었다는데...”

네가 보낸 관병들이 제 때 도착해서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 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야.”

분이는 얼굴이 발개져서 부운의 팔짱을 끼었다.

팔짱을 끼자 분이의 봉긋한 가슴이 팔에 닿아 부운을 움찔하게 만들었다.

하여간 철두오빠하고 정칠오빠 때문에 조용할 날이 없어. 어떻게 소매치기를 해도 망산쌍독같이 무시무시한 자들을 건드린데?”

분이는 부운의 팔짱을 낀 채 마을로 내려가면서 쫑알거렸다.

(분이에게서도 어느덧 여자 티가 나는구나. 코흘리개 꼬맹이였는데....)

분이가 의식적으로 가슴을 자기 팔에 누르는 걸 느끼며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부운에게 분이는 누이동생같은 존재였다.

집이 서로 가까워 철이 들기 전부터 어울려 지냈다. 그래서 분이가 얼마나 자그마했는지, 또 얼마나 귀여운 아기였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부운은 분이를 친남매처럼 여기고 있지만 분이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아마 가슴이 봉긋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였던 것 같은데 어울리지 않게 교태를 부리거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여우 짓도 종종했다.

또 부운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면 발칵 화를 내기도 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부운이다. 분이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를 리 없다.

분이가 자신을 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쉽사리 그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누이동생같은 분이를 여자로 여기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고 분이의 마음을 마냥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분이는 나날이 예뻐지고 있는 중이다.

자연스럽게 사내들이 꼬일 것이다.

자신이 매몰차게 대하면 분이가 홧김에 아무 사내와 사귈 수도 있다.

그러다가 자칫 삶이 망가질 수도 있으니 분이를 적당한 거리에 머물게 하며 지켜줘야만 한다. 분이를 믿고 맡길만한 사내가 나타날 때까지...

그것이 오라비의 마음일 것이다.

(게다가 분이에게는 비밀이 있기도 하고...)

분이의 말랑한 가슴을 팔에 느끼며 부운은 어떤 부부를 떠올렸다.

부운은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도 접촉하면 지나온 삶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접촉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엿볼 수 있는 건 아니고 집중해야만 보인다는 제약은 있다.

분이와 자주 몸이 닿다보니 어쩔 수 없이 분이의 길지 않은 인생을 쭉 엿보게 되었다.

놀라운 건 분이의 부모 모습이 아주 생경하다는 점이었다.

분이에게는 선술집을 하는 과부 신세의 어머니가 있다.

한데 부운이 이능(異能)으로 엿본 바에 의하면 그녀는 분이의 생모가 아니었다.

분이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본 기억 밖에 없다.

그래서 부운이 엿볼 수 있는 분이 부모의 모습도 상당히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분이에게 남다른 사연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연으로 해하촌에서 자라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지켜줄 수 있을 때까지는 지켜줘야만 한다.)

부운은 붙임성 좋은 고양이처럼 앵겨드는 분이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추며 다짐했다.

해하촌이 가까워졌다.

 

***

 

이경(二更;9-11)무렵이다.

여전히 불야성인 금릉과 달리 성벽 밖 해하촌은 어둑하다.

대부분의 집에 불이 꺼져 있다. 불을 밝히는 데 쓰는 기름 값이 비싸서 오래 등을 켜 놓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골동품 가게 온고당의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닫혀있는 문틈으로 흐릿하게 불빛이 흘러나온다.

삐꺽!

부운은 주변을 둘러보며 온고당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늦었구나.”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부운의 귀에 늙으스레한 음성이 들렸다.

온고당의 주인 조노인이 흐릿한 등이 밝혀진 탁자 앞에 앉아있다가 돌아본다.

탁자에는 십여 개의 원숭이 조각상들이 놓여있다. 한 뼘이 채 안되는 원숭이들은 표정과 자세가 똑같은 게 하나도 없다.

날이 어두워져서 분이를 집에 데려다 주었는데... 분이 어머니가 저녁 먹고 가라고 붙잡는 바람에 늦었어요.”

부운은 멋쩍은 표정으로 문을 닫았다.

분이모녀가 애를 쓰는구먼.”

조노인은 원숭이 조각상 하나를 천으로 닦으면서 웃었다.

애를 쓰다니요?”

부운은 어리둥절하여 외조부에게 다가갔다.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라.”

조노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머니는...”

부운은 안채로 통하는 문을 돌아보았다.

네 저녁상 차려놓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먼저 잠이 들었다.”

쓸데없는 일로 바빠서 어머니가 걱정하시게 했군요.”

부운은 멋쩍어 하며 조노인 맞은편에 앉았다.

별 탈 없이 돌아왔으니 되었다. 그보다 오늘 위험한 자들과 시비가 붙었었다고 하던데...?”

조노인이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저녁 무렵에 철두와 정칠이 건드린 자들이 망산쌍독이었더군요.”

부운은 소문 참 빠르다 생각하며 대답했다.

망산쌍독... 위험한 놈들이지. 일단 척을 지면 두고두고 우환이 될 수도 있는...”

조노인은 닦고 있던 원숭이 조각상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조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걱정하실 줄 알았으면 그자들을 죽여 버릴 걸 그랬네요.”

부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죽일 작정을 했다면 놈들을 죽일 수 있었느냐?”

조노인은 외손자를 지긋이 건너다보았다..

독이 통하지 않는 자들이라 좀 까다롭긴 하겠지만... 위험을 무릅쓴다면 죽일 수 있었을 거예요.”

부운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부운아.”

조노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예 할아버지.”

외조부의 표정이 심각해진 걸 본 부운은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긴장했다.

조노인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할애비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도둑이지 살수(殺手)가 아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부운은 자세를 바로 하며 외조부의 말을 경청했다.

알고 있다면서 위험을 무릅쓴다면 망산쌍독을 죽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이냐?”

조노인의 표정이 엄해졌다.

죄송합니다. 소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운은 아차 싶어 고개를 숙였다.

조노인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도둑은 싸우는 자가 아니라 숨고 피하고 달아나는 자다. 그 사실을 망각했다가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천불투라는 별호답게 할애비의 무공은 잠입하고 훔치고 도망치는 데 특화되어 있다. 자연히 파괴력도 지구력도 부족하고... 그 때문에 살상이 목적인 무공을 익힌 자들과 정면으로 부딪힐 경우 대책이 없게 된다.”

조노인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그러므로 적과 마주칠 경우 삼십육계(三十六計) 주위상책(走爲上策), 즉 삼십육계중 달아나는 것이 최고의 계책이라고 한 자치통감(資治通統鑑)의 금언(金言)을 떠올려야만 한다.”

...”

부운은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네 무공이 약하거나 볼품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경신술과 보법, 은신술 등의 재주는 누구보다 뛰어나 적수가 드물 것이다

위축된 외손자가 안되었는지 조노인이 안색을 풀며 위로했다.

특히 지금의 네 공력은 할애비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거의 이갑자(二甲子)에 육박할 정도이니...”

할아버지께서 제가 어렸을 때부터 각가지 영약을 구해다 먹여주신 덕분이지요.”

부운도 한 시름 놓은 심정이 되어 말했다.

할애비가 여러 문파와 가문의 영약을 훔쳐다 네게 먹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네 공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후한 것은 네 특이한 체질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외조부의 말에 부운은 놀랐다.

자신의 공력이 심후한 게 영약보다는 체질 덕분이라는 이야기는 오늘 처음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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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어린 괴물(怪物)

 

 

 

부운은 사당을 등지고 걸어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철두와 정칠이 사당 뒷문으로 빠져나와서 도망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교활한 새끼! 입구에 미리 철질려를 뿌려두었구나!”

구괴는 깨금발로 펄쩍이며 발에 박힌 철질려를 뽑아냈다.

금강불괴이거나 철판을 댄 신발을 신지 않은 이상 철질려에 찔릴 수밖에 없다.

(겨자 가루와 산초 태운 연기로 눈을 자극했던 건 뿌려놓은 철질려를 발견하지 못하게 할 목적이었구나.)

구적 역시 발바닥에 박힌 철질려를 뽑으며 부운을 노려보았다.

부운은 조금 빨라진 걸음으로 걸어가며 돌아보고 있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버러지새끼!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휘익!

발바닥에서 철질려는 뽑아낸 구괴가 악을 쓰며 부운을 덮쳐갔다.

구적도 뽑아낸 철질려를 던져버리며 구괴의 뒤를 따랐다.

(날 따라와라. 그래야 철두와 정칠이 안전해질 테니...)

부운은 뒤를 힐끔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철두와 정칠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서 사당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저 애송이 놈... 나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침착하다!)

앞서 달려가는 구괴를 따라가며 구적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이 따라오는 걸 알면서도 부운은 산책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걸어가고 있다.

으아아아!”

단번에 부운에게 육박한 구괴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우오오오!

지팡이 윗부분을 가리고 있던 천이 날아가며 귀신이 우는 듯한 괴음이 터졌다.

구괴의 지팡이 끝에는 주먹 두 개만한 해골이 달려있다. 그 해골의 뻥 뚫린 눈과 쩍 벌린 입으로 바람이 지나가며 오싹한 소리를 낸다.

촉루괴장(髑髏拐杖)이라는 지팡이는 해골이 내는 괴음만으로도 사람의 기절시킬 수 있다.

그 촉루괴장의 해골이 부운의 머리통을 후려치려 할 때였다.

휘릭!

부운은 아이들이 놀이를 하듯 앞구르기를 해서 촉루괴장을 피해버렸다.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있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회피였다.

조심해라!”

구괴를 따라오던 구적이 다급히 외쳤다.

“!”

구괴도 무언가 느끼고 눈을 부릅뜰 때였다.

피핑!

굴린 몸을 일으키며 휘두르는 부운의 손에서 별 모양의 표창 두 개가 구괴에게 날아들었다.

!”

! !

표창 하나는 구괴의 지팡이에 맞아 튕겨졌지만 다른 하나는 그자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상처를 냈다

(어디서 저런 괴물이...)

구적은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쇠 피리를 뽑으며 달려갔다.

그자의 앞쪽에서는 뺨이 피로 물든 구괴가 비틀거리고 있다.

독공의 고수들이라 독 묻은 표창도 소용이 없는 건가?”

부운은 고개를 갸웃하며 일어섰다.

구괴에게 상처를 입힌 표창에는 즉각적으로 마비를 일으키는 독이 묻어있었다.

표창 뿐 아니라 망산쌍독이 밟은 철질려에도 같은 독을 묻어있다.

하지만 망산쌍독은 상처는 입었어도 중독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그자들이 독공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다.

개새끼가...”

부악!

악에 바친 구괴가 다시 부운을 덮쳐가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부운 앞쪽에 나있는 풀들을 밟는 순간 아찔한 통증이 등줄기를 뚫고 정수리까지 치달렸다.

다시 철질려가 발바닥에 깊이 박힌 것이다.

아이쿠!”

콰당탕!

철질려를 밟을 발이 반사적으로 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은 구괴는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뭐냐?”

쇠 피리를 뽑아든 채 달려오던 구적이 놀라 급히 멈춰 섰다.

... 발밑을 조심해라! 저 찢어죽일 놈이 이 근처에도 철질려를 뿌려놨다.”

구괴가 철질려가 박힌 발을 쳐들며 구적에게 외쳤다

눈치 챘어도 소용없어. 이 주변은 풀로 덮혀 있어서 어디에 철질려가 뿌려져 있는지 보이지 않을 테니까.”

부운은 웃으며 돌아섰다.

멀찍이 우회해서 잡으러 가자!”

구적이 옆으로 달리며 외쳤다..

기필코 잡아서 껍질을 벗겨버리고 말겠다!”

쩔뚝거리며 일어난 구괴가 구적의 반대쪽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나하고 노닥거릴 여유는 없을 텐데...?”

부운이 진회하 하류, 금릉쪽을 가리키며 웃었다.

“!”

“!”

부운을 포위하기 위해 좌우로 달리려던 구적과 구괴의 눈이 부릅떠졌다.

색마살귀인 듯한 자들이 저기 있다!”

놓치지 마라!”

강변을 따라 수십 명의 무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분이가 금릉부로 달려가서 불러온 관병들이다.

(관병들!)

달려오는 무사들의 복색으로 관병임을 알아본 망산쌍독의 얼굴이 이지러졌다.

명색이 일문의 문주들인 망산쌍독에게 수십 명의 관병쯤은 딱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관부와 문제가 생기면 피곤해진다.

수배령이라도 내려지면 한시도 편히 지낼 수가 없게 된다.

무림인들이 관부와 엮이는 걸 극도로 꺼려하는 이유다.

저자들이에요!”

그때 부운이 복면을 벗으며 관병들에게 외쳤다.

저 인간들이 사당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어요.”

부운은 관병들을 향해 마주 달려가며 망산쌍독을 손가락질 했다.

잡아라! 절대 놓치면 안된다.”

거기 서라 이 마귀들아!”

관병들은 부운의 손짓에 따라 방향을 틀어서 망산쌍독 쪽으로 달려왔다.

... 저 교활한 여우새끼...”

관병들까지 달고 오고... 정말 치밀한 놈이다.”

관병들을 지나치면서 돌아보는 부운을 보며 망산쌍독은 이를 갈았다.

젠장! 관부와 시비 붙어서 좋을 거 없다. 빨리 여길 뜨자!”

구괴는 쩔뚝거리며 사당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세.”

구적도 멀어지는 부운을 보며 구괴를 따라 사당으로 갔다.

삐익! !

구괴는 사당으로 달려가며 휘파람을 불었다.

쉬쉭! !

그러자 여섯 마리의 투명한 뱀들이 하백의 사당에서 날 듯이 기어 나왔다.

망산쌍독은 뱀들에게 달려가며 호리병을 내밀었다.

뱀들은 구괴와 구적이 내미는 호리병으로 주저하지 않고 기어들어갔다.

뱀까지 부리고...”

수상한 놈들이 분명하다.”

이놈들!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관병들이 외치며 사당으로 몰려갔다.

부운이 지나쳤지만 관심을 두는 관병은 없었다

뱀들을 수습한 망산쌍독은 몸을 날려 사당에서 멀어졌다.

잡아라!”

멈추지 못할까?”

관병들이 망산쌍독을 따라가며 외치는 소리가 강변을 울렸다.

(망산쌍독... 할아버지가 작성하신 강호인명록(江湖人名錄)에 의하면 북망산에 자리한 독묘파라는 문파의 공동문주...)

부운은 달려가던 걸음을 늦추며 망산쌍독과 그들을 추격하는 관병들을 돌아보았다.

(독을 쓰는 재주로는 무림을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저자들이 무슨 일로 금릉에 나타난 것일까? )

망산쌍독에 대한 정보를 떠올리며 부운은 의혹을 느꼈다.

그자들은 북망산에 칩거한 채 강호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애들을 풀어서 뒤를 좀 캐봐야겠다. 물론 그전에 조져놓을 놈들이 있긴 하지만...)

금릉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부운의 표정은 나이답지 않게 음산해졌다.

 

***

 

해가 졌다.

강남 물산의 중심지답게 금릉은 불야성이 되었다.

금릉을 에워싼 높은 성벽 밖의 빈민가 해하촌에도 반딧불같은 불빛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해하촌 동쪽에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제법 높은 언덕이 있다.

그 언덕 위에는 낡은 건물이 한 채 있다.

오래 전부터 버려진 흉가인데 밤만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어른들도 다가가길 꺼려하는 흉가임에도 서너명의 소년들이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다. 껄렁껄렁한 인상에 행색이 추레한 아이들이다.

건물 안에서는 불빛이 흐릿하게 흘러나온다.

흉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소년들이 갑자기 긴장하며 해하촌 쪽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 어서 와라 부운아.”

소년들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언덕으로 올라온 건 부운이었다.

부운은 소년들의 인사에도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며 건물로 다가갔다.

한 소년이 서둘러 건물의 문을 열어주었다.

 

상당히 넓은 건물 안은 어둑하다. 흐릿한 등 몇 개가 드문드문 벽에 걸려있을 뿐이다.

좌우의 벽쪽에는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녀 이십여명이 죽 늘어서 있다.

소년과 소녀들 사이에 복면을 쓰지 않은 철두와 정칠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다.

회주!”

어서 와라 부운아.”

수고했어 오빠!”

부운이 들어서자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녀들이 아는 척을 한다.

하지만 부운은 일절 대꾸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겼다.

(회주의 분위기가 장난 아닌데?)

(아무래도 오늘 한바탕 폭풍이 몰아칠 것 같다.)

복면을 쓴 소년 소녀들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했다.

부운은 철두와 정칠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부운보다 한 살 많은 철두의 키는 부운보다 한 뼘 가량이나 더 크다.

부운과 동갑인 정칠은 키도 고만고만하다.

부운은 말없이 두 놈을 노려보았다.

... 고맙다 부운아.”

네 덕분에 살았어.”

철두와 정칠은 부운의 눈치를 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 철썩!

직후 철두의 명치에 주먹이 박히고 정칠의 뺨이 홱 돌아갔다.

!”

!”

철두는 명치를 감싸며 주저앉았고 정칠은 팽이처럼 한 바퀴 돈 후 나뒹굴었다.

(... 손 쓰는 게 보이질 않았어!)

(흑사회의 거친 어른들도 부운이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있어!)

복면을 쓴 소년과 소년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며 얼어붙었다.

철두를 주저앉히고 정칠을 나뒹굴게 만든 건 물론 부운이다.

부운은 내공을 지닌 데다가 손속의 빠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본격적인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일단 부운이 손을 쓰면 피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왜 화를 내는 것 같냐?”

부운은 주저앉아 꺽꺽 대는 철두와 얼굴이 벌겋게 부은 채 일어나려 애쓰는 정칠을 노려보았다.

... 작업 상대를 잘못 고르는 바람에 너까지 나서게 해서...”

골이 울려서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정칠이 재빨리 대답했다.

하지만 부운은 지긋이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반응을 하지 않았다..

... 미안하다.”

자기 대답이 틀렸다는 걸 알아차린 정칠이 시선을 피하며 무릎을 꿇었다.

철두는 고개를 숙인 채 이를 악물고 있다. 한 살 아래 동생인 부운에게 맞았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수치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흑건회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든 이유를 말해봐라.”

부운이 철두와 정칠을 쓸어보며 말했다.

... 흑사회 파락호들로부터 마을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부운 네가 주도해서 만들었잖아.”

정칠이 재빨리 대답했다.

그렇다. 가진 것 없고 배경도 없는 가엾은 인생들끼리 서로 돕고 지켜주자고 만든 게 흑건회다.”

부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흑건회의 규칙은 간단하다. 배신하지 말 것! 서로 돕고 보살 필 것! 자신과 가족과 회원을 지킬 목적이 아닌 이상 사람을 해치지 말 것!”

부운은 손가락 세 개를 쳐들며 말을 이어갔다.

이상의 세 가지 규칙만 지키면 무슨 짓이든 용납이 된다. 도둑질을 하든 사기를 치든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는 장사를 해도 개의치 않는다는 말이다.”

다른 아이들을 둘러보는 부운의 목소리는 더 가라앉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안된다. 그런 짓을 하면 흑사회의 쓰레기들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부운은 낮으막히 말했지만 소년과 소녀들의 한층 더 긴장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도둑질을 하고 등을 쳐도 되는 대상은 부자, 탐관오리, 권력을 지닌 자들로 한정해왔는데... 네놈들은 소매치기를 수월하게 할 목적으로 노점상 하는 장씨 할아범의 좌판을 엎어버렸다.”

부운은 무릎을 꿇고 있는 철두와 정칠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래서 부운이가 평소답지 않게 살벌했구나.)

(역시...)

아이들의 고개가 일제히 끄덕여졌다.

부운이 화가 난 이유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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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잡혀간 아이들

 

 

 

<선술집 과부의 딸 분이가 들렸었던 같던데... 또 부운이를 데리고 나갔는지요?>

안채에서 삼십대 중반쯤인 여인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얼굴이 흰 여인인데 어째서인지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여인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탁자로 다가왔다.

부운이는 철두와 정칠이 놈이 부린 말썽을 해결하러 갔다.”

조노인은 주사위를 주머니에 챙기며 말했다.

<푸줏간 집 아들 철두, 여자 장사하는 작자의 사생아 정칠... 친구를 사귀어도 어떻게 그런 놈들만 사귀는 건지...>

여인은 한숨을 쉬며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이 아비가 터 잡고 살아온 동네가 빈민가이다 보니 부운이 또래는 가난하고 못 배운 놈들뿐이로구나.”

조노인은 여인의 눈치를 보았다.

<죄송해요. 아버님을 언짢게 해드리려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여인은 조노인과 마주 앉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비도 마음 상해서 한 소리는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조노인은 여인이 내려놓은 쟁반에서 찻잔을 집어 들었다.

<...>

여인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온유향(溫裕香)인 그녀가 부운의 어머니다.

오늘은 눈 상태가 어떠냐?”

조노인은 차를 마시면서 온유향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요.>

온유향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님이 수시로 눈에 좋은 약을 구해오시는 데도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는군요. 애만 쓰시게 해서 면목이 없어요.>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거라. 눈 자체에 손상이 생긴 건 아니니 언제고 시력이 돌아올 수도 있을 게다.”

<그랬으면 좋겠지만...>

(가엾은 것...)

낙심하는 온유향을 보며 조노인은 소리 죽여 한숨을 쉬었다.

십오 년 전, 온유향은 너무도 참담한 일을 당했었다.

충격이 너무 커서 온유향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혀를 물었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눈에 이상이 생겨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시력을 잃은 것이 혀가 잘리며 일어난 출혈 때문인지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혀가 잘렸어도 대화는 전음입밀로 할 수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 건 대체할 방법이 없거늘...)

양녀(養女)의 수척한 얼굴을 살펴보는 조노인의 진무른 눈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

 

금릉의 공식적인 이름은 몇 년 전 남경(南京)으로 바뀌었다.

명나라 제삼대 황제 영락제(永樂帝)가 자신의 근거지였던 연경(燕京)으로 천도하면서 생긴 변화다.

연경은 북경(北京)이 되었고 금릉은 남경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황도(皇都)의 지위를 빼앗기긴 했지만 금릉의 중요성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제국을 지탱해주는 경제력은 여전히 금릉이 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영락제는 황태자 주고치(朱高熾)로 하여금 금릉에 또 하나의 조정(朝廷)을 꾸려 다스리게 했다.

황태자가 거주하고 있는 옛 황성 자금성(紫金城)이 금릉의 중심이다.

하지만 실무행정을 총괄하는 금릉부(金陵府)의 중요성도 자금성에 못지않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다.

금릉부 정문에는 십여명의 관병들이 경비를 서고 있다.

아저씨! 아저씨!”

경비서는 관병들에게 달려오며 다급히 외치는 소녀가 있었다.

도와주세요! 큰일 났어요!”

숨이 턱에 차서 달려오는 소녀는 해하촌을 떠나온 분이였다.

저 아이 왜 저러지?”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구만.”

관병들이 의아해할 때였다.

우리 언니 좀 살려주세요! 제발요 네?”

달려온 분이는 관병들의 우두머리인 군관(軍官)의 팔에 매달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울지 말고 말해야 알아들을 거 아니냐?”

딸 뻘인 소녀가 울음을 터트리자 당황한 군관이 분이를 달랬다.

나쁜 사람들이 언니를 끌고 갔어요! 젊은 여자들만 납치해서 죽인다는 색마살귀(色魔殺鬼)들인지도 몰라요!”

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군관의 팔을 잡아끌었다.

(색마살귀!)

군관과 관병들의 눈이 부릅떠졌다.

 

일년전쯤부터 금릉 일대에서는 여자들이 실종되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부분이 십대인 희생자들의 몸에는 유린당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사사건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단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흉수를 색마살귀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디... 네 언니가 어디로 끌려갔느냐?”

군관이 다그치듯 물었다. 색마살귀를 검거하는 건 모든 일에 우선한다.

언니가 진회하(秦淮河) 상류쪽으로 끌려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해요! 빨리 가서 우리 언니 좀 살려주세요!”

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닭 똥같은 눈물을 쏟아냈다.

알았다! 아저씨들이 네 언니 구하러 갈 테니 진정해라.”

군관은 분이를 달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분이가 온 방향으로 달려가며 외쳤다.

한명은 안쪽에 기별하고 나머지는 나와 같이 진회하 상류로 간다!”

존명!”

예 포장(捕將)!”

관병들 중 한명만 금릉부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나머지는 군관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 언니, 꼭 살려주셔야만 해요!”

분이는 달려가는 군관과 관병들에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잠시 후 금릉부 안에서도 수십명의 관병들이 몰려나와 군관 일행이 간 쪽으로 달려갔다.

(부운오빠 지시대로 관병들을 용왕묘로 보냈으니까 내 역할은 다 했어.)

관병들이 몰려가는 걸 보며 분이는 가짜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렇긴 해도 부운오빠가 도착할 때까지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무사할 수 있을지 몰라.)

가짜 눈물은 닦였지만 분이의 얼굴에 서려있는 초조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설령 부운오빠가 늦지 않게 도착한다 해도 구해줄 수 있을까? 철두오빠와 정칠오빠를 끌고 간 자들은 정말 무서워 보였는데...)

울상을 짓던 분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부운오빠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철두오빠와 정칠오빠를 구해낼 수 있어!)

자그마한 주먹을 꼬옥 쥐는 분이의 두 뺨이 발개졌다.

(금릉 흑사회(黑社會)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흑건회(黑巾會)의 회주 흑건룡(黑巾龍)이 바로 부운오빠니까!)

 

***

 

진회하는 금릉의 서쪽을 흘러 장강과 합류한다.

진회하 상류의 강변에는 강의 신 하백(河伯)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하백 사당은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주변에 인적이 없다.

 

히익!”

... 안돼!”

제단을 등진 채 주저앉은 철두와 정칠은 비명을 질렀다.

쉭 쉬익!

두 놈 앞으로 뱀 세 마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기는 세 뼘 남짓 밖에 안되지만 몸이 유리처럼 투명해서 뼈와 내장이 들여다보이는 특이한 뱀들이다

운이 없다고 생각해라 이놈들아.”

구괴가 웃으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던 큼직한 호리병의 뚜껑을 열었다.

구괴 옆에 서있는 구적의 손에도 같은 크기의 호리병이 뚜껑이 열린 채 들려있다.

우리 독묘파의 영물인 흡혈신사(吸血神蛇)들은 최소한 열흘에 한번 씩은 사람 피를 듬뿍 마셔야 하는 습성이 있다.”

구괴는 뚜껑을 연 호리병을 아래로 기울였다.

스르르

그러자 호로병에서도 세 마리의 투명한 뱀들이 기어 나왔다.

으으으...!”

... 엄마야!”

철두와 정칠은 사색이 되어 엉덩이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등이 제단에 닿아 있어서 더는 물러날 수도 없다.

쉭 쉬익!

여섯 마리로 늘어난 투명한 뱀들이 갈라진 혀를 날름거리며 철두와 정칠에게 다가왔다.

그 귀염둥이들은 오늘 안으로 사람 피를 마셔야했는데 네놈들이 재수 없게 걸려들었지. 운이 좋으면 피를 빨리고도 살 수 있다. 귀염둥이들에게 순순히 피를 나눠주는 게 좋을 게다

구괴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잘못... 잘못 했어요 아저씨!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주세요!”

정칠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망싼쌍독에게 싹싹 빌었다.

필사적으로 제단에 등을 밀착시키고 있는 철두의 사타구니는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덩치는 산만해도 아직 열일곱 살 애송이일 뿐이다.

그 새끼 참 분위기 파악 못하네. 네놈 눈에는 지금 우리가 네놈들 버릇 고치려고 겁주는 걸로 보이냐?”

구괴는 싹싹 빌며 애원하는 정칠을 흘겨보았다.

그래도 정칠은 포기하지 않고 망산쌍독에게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지 할 테니까 제발 이 뱀들을 물려주세요 네?”

여러 소리 할 거 없고, 그만 흡혈신사들의 먹잇감이 되거라.”

! !

보고 있던 구적이 호로병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쉬쉭! !

그러자 투명한 뱀들은 미끄러지듯 움직여서 철두와 정칠을 덮쳐갔다

안돼!”

엄마야!”

철두와 정칠은 팔로 얼굴과 목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눈 감고 입과 코도 막아라!>

그때 누군가의 속삭임이 두 소년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전음입밀로 전해진 그 목소리는 두 아이 귀에 매우 익다.

(부운?)

놀라면서도 철두와 정칠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입과 코를 가렸다.

! 퍼억!

그 직후 뱀들 주변으로 작은 주머니 두 개가 떨어졌다.

! 퍼석!

얇은 종이로 만들어진 주머니들이 바닥에 부딪혀 터지면서 희고 고운 가루가 확 퍼졌다.

카악! 키엑!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뱀들이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웬놈이냐?”

구괴가 바닥에 꽂아놓았던 지팡이를 잡아 뽑으며 사당 입구를 돌아보았다.

(명반 가루인가? 뱀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매로 입을 가리며 물러서던 구적도 사당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사당 문간에는 검은색 복면을 쓴 소년이 서있었다,

그리 크지 않은 체구인 복면소년의 양손에는 여러 개의 종이 주머니를 들려있다.

복면소년은 물론 분이에게서 전갈을 듣고 달려온 부운이었다.

너 이 새끼 뭐냐?”

간덩이가 부었구나! 감히 망산쌍독에게 시비를 걸다니...”

망산쌍독은 문간으로 가며 눈을 부라렸다.

<뒷문으로 도망쳐라.>

부운은 철두와 정칠에게 전음입밀을 보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콜록! 콜록!

급히 코와 입을 막긴 했어도 가루를 적잖이 마신 철두와 정칠은 기침을 하며 옆으로 기어갔다.

뱀들은 석회 가루 속에서 허우적대느라 두 놈을 막지 못했다.

독이 특기인 우리 형제에게 독이라도 쓰겠다는 거냐?”

부운이 종이 주머니들을 쳐드는 걸 본 구괴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

! !

부운은 망설이지 않고 종이 주머니들을 사당의 바닥과 천장에 던졌다.

! !

바닥에 던져진 주머니들은 연기를 확 일으켰다.

퍼억! 푸스스!

천장에 부딪혔던 종이 주머니들은 터지면서 고운 가루를 확 뿌렸다.

가루와 연기들은 망산쌍독을 덮어쒸웠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 피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독을 쓰는 데에는 일가견이 있는 망산쌍독인지라 딱히 피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 이건.,..”

엣취!”

망산쌍독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비비고 입을 가렸다.

... 겨자 가루와 산초를 태운 재로구나!”

콜록! 콜록! 니니럴... 콜록!”

그자들은 허리가 끊어지게 기침을 하며 눈물을 질질 흘렸다.

부운이 터트린 주머니 속의 가루들은 지독하게 맵고 자극적이었다.

독공을 익혔다 해도 인간인 이상 매운 게 코나 눈에 들어가면 괴롭지 않겠어?”

부운은 망산쌍독을 비웃으며 사당에서 나갔다.

, 죽일 놈!”

산채로 껍질을 벗겨버리겠다!”

망산쌍독은 악을 쓰며 사당 밖으로 돌진했다.

산초 가루가 너무 매워서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였지만 분노하여 앞뒤 가릴 여유가 없었다.

! !

한데 사당 밖으로 뛰쳐나오던 두 놈의 발바닥에 날카로운 침들이 돋아난 쇳조각들이 박혔다.

전장에서 적의 보병이나 말들의 추격을 막기 위해 뿌리는 철질려(鐵蒺藜)라는 암기들이었다.

사당 입구에는 여러 개의 철질려가 뿌려져 있었다.

하지만 망산쌍독은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어서 미처 그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으악!”

아이쿠!”

발바닥에 철질려가 박힌 망산쌍독은 돼지 멱 따는 것 같은 비명을 지르며 펄쩍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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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공(武功)을 건 내기

 

 

 

금릉을 에워싼 성벽 남쪽에 해하촌(蟹蝦村)이란 마을이 있다.

금릉 성내에서 살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른 바 빈민가다.

해하촌이라는 마을 이름은 게()나 새우() 같이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붙여졌다고 한다.

비록 삶이 곤궁한 인생들이 모여 사는 곳이긴 해도 제법 활기가 넘친다.

좁은 골목에서는 헐벗고 꾀죄죄한 아이들이 해맑게 뛰어놀고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조금 넓은 길에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다. 술집, 옷가게, 잡화점, 푸줏간, 대장간등 없는 업종을 찾아보기 힘든 나름대로의 시장이다.

여러 가게들 중에는 골동품점도 있다.

입구에 걸린 낡은 간판에는 <溫故堂(온고당)>이라는 글이 고풍스러운 서체로 적혀있다.

가게 앞 좌대에는 각가지 골동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외지에서 온 듯한 손님들이 골동품들을 구경하고 만지기도 하지만 응대하는 점원은 없다.

점원은 없어도 주변의 다른 가게 주인들이 보고 있어서 손님들이 허튼 생각은 못한다.

 

온갖 골동품과 잡동사니가 가득한 가게 안쪽에는 응접실 같은 공간이 있다.

응접실 끝에는 방 두 칸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안채가 있다. 안채의 뒤쪽은 금릉을 지키는 높고 견고한 성벽으로 막혀있다.

응접실 가운데 놓인 탁자에 노인과 소년이 마주 앉아있다.

얼굴이 주름으로 덮여있는 노인이 온고당의 주인 조()노인이다.

소년은 균형 잡힌 몸매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녔다. 항상 웃는 얼굴이라 누가 보면 근심 걱정 하나 없이 자란 귀한 집안 자제라 여길 것이다.

부운(浮雲)이라는 이름의 소년은 조노인의 외손자다.

삼대삼(三對三)... 드디어 할아버지를 따라잡았네요.”

달각 달각

부운은 주사위 두 개가 들어있는 사발을 흔들며 웃었다.

조손(祖孫)은 주사위로 내기를 하는 중이다. 주사위 두 개의 점수를 고하(高下)로 가리는 간단한 내기다.

처음에는 조노인이 일방적으로 이겼다.

하지만 부운은 네 번째 판부터 연승을 해서 마침내 동점을 만들었다.

한두번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겠지만... 세 번이나 거푸 이긴 걸 보면 할애비가 모르는 술수를 부렸겠구나.”

조노인은 진무른 눈을 가늘게 뜨며 외손자의 표정을 살폈다.

술수라니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인 걸요.”

!

부운은 능청맞게 웃으며 주사위가 든 사발을 탁자 위에 엎어놓았다.

떼구르르... 달칵

사발 안의 주사위들이 구르다가 멈추는 소리가 조노인의 귀에 들렸다.

(()과 오()구먼.)

조노인은 보지 않고도 주사위들의 점수를 알아차렸다.

조노인의 청력(聽力)은 매우 뛰어나다. 수천, 수만 번 금고를 열어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은 능력이다.

조노인은 주사위 아랫면이 바닥에 닿으며 내는 소리의 미묘한 차이만으로도 숫자를 구분할 수 있다.

한데 어찌 된 영문인지 네 번째부터는 연이어 외손자놈에게 지고 있는 중이다.

(분명 뭔가 수작을 부렸는데 짐작이 가지 않는구만.)

조노인은 사발을 누르고 있는 외손자의 손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이 마지막 승부이니 내기의 조건을 다시 한 번 확인하죠.”

부운이 사발에서 손을 떼며 싱글거렸다.

할아버지는 제게 투도(偸盜;도둑질)의 재주 외에는 제대로 된 무공을 한 가지도 안 가르쳐주셨죠.”

부운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조노인은 수많은 종류의 무공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외손자에게 가장 기초적인 내공심법인 진기토납술(眞氣吐納術)과 삼보면천(三步免天)이라는 보법만을 가르쳐주었다.

외손자가 다른 무공도 가르쳐달라 조를 때마다 조노인은 아직 때가 안되었다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부운은 주사위 노름으로 내기를 건 것이다. 자신이 이기면 무공을 가르쳐달라고....

 

할애비가 네게 내공심법과 보법 외의 무공을 가르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게다.”

조노인은 탁자 가운데에 엎어져 있는 사발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손자 놈이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를 일이다.

싸움에 쓸 수 있는 무공을 배우면 도망쳐야할 때 도망치지 않고 객기를 부릴 수도 있기 때문이겠지요.”

부운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면 되었다.”

조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에 무공을 배우려면 한 분야에서 최강인 것을 배워야만 한다. 어설픈 무공은 목숨도 어설프게 만들 뿐이다.”

오대신투(五大神偸)에 드는 할아버지시니 최강의 무공도 몇 가지쯤은 알고 계실 텐데요?”

부운이 외조부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왜소하고 노쇠해 보이지만 조노인은 사실 세상을 통틀어도 가장 뛰어난 다섯 도둑 중 한명이다.

훔치기로 작정한 물건은 반드시 훔쳐서 천불투(天不偸), <못 훔치는 건 오직 하늘뿐이다.>라는 대단한 별호로 불려왔다.

부운은 철들기 전부터 외조부로부터 온갖 투도술(偸盜術)을 배웠다.

재능이 있었고 또 재미도 느껴서 부운은 도둑질하는 방법의 수련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덕분에 열여섯 살 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외조부 못지않은 투도의 달인이 되어 있었다.

 

몇 년 전부터 금릉 일대 부호들은 황당한 도둑질에 시달려왔다. 어떤 도둑이 잠입하여 가장 아끼는 보물에 흔적을 남기고 가는 일이 빈발한 것이다.

도둑은 보물은 훔쳐가지 않는다.

대신 보물의 진가(眞假)를 평가하고 사라진다.

가짜이면 가()라는 글자를 보물에 새겨놓고 진짜라면 보물에 얽힌 사연과 이력을 적어서 남긴다.

보물의 주인들은 놀라고 낙심하지만 도둑에게 화를 내지는 않는다.

보물에 손을 대긴 해도 훔쳐가진 않으니 화를 낼 수도 없다. 그저 체면이 조금 손상되는 피해를 입은 것 뿐이다.

오히려 그 도둑이 방문해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부호들도 있었다. 애지중지하는 보물이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을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쉽사리 이해 못할 도둑질을 해오고 있는 그 도둑에게는 진가대도(眞假大盜)라는 별호가 붙여졌다.

부운이 바로 그 진가대도다.

 

어떤 무공을 배우고 싶으냐?”

조노인이 한숨을 쉬며 물었다.

부운은 눈을 반짝이며 즉시 대답했다.

무공을 익혀도 사람을 해치고 싶진 않아요. 무기 대신 손이나 발을 쓰는 무공이면 좋겠어요.”

금룡신나수(擒龍神拿手)나 백보신권(百步神拳) 정도인가?”

조노인이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금룡신나수와 백보신권은 소림사(少林寺)의 칠십이절기(七十二絶技)잖아요.”

부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할아버지, 소림사의 장경각(藏經閣)을 터신 적도 있으셨어요?”

부운이 흥분하여 물었지만 조노인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도둑들에게 소림사 장경각은 반드시 들려야하는 맛집 같은 곳이다. 수많은 고수들이 지키고 온갖 보안장치들로 덮여있는 장경각에 잠입했다가 들키지 않고 빠져나와야만 도둑다운 도둑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조노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지만 결코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소림사는 천하무림의 본산이고 장경각은 소림사의 심장부다. 장경각의 경비가 얼마나 삼엄할지는 따로 설명을 할 필요도 없다.

무림에서 활약하는 도둑들에게 소림사 장경각을 털어보는 건 궁극의 목표이기도 하다.

내로라하는 도둑들이 소림사 장경각에 도전했으며 그들 중 대부분은 참회동(懺悔洞)에 갇혀있다.

소림사 장경각에 잠입했었다는 증거로 무공비결 한 가지를 필사(筆寫)해서 갖고 나와야 한다.”

조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는 한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소림사 장경각을 터셨군요.”

부운이 흥분해서 눈을 반짝거렸다.

결판을 내자. 할애비는 고()에 걸겠다.”

조노인은 사발을 손으로 덮으며 화제를 돌렸다. 영악한 손자놈이 수작을 부리지 못하게 하려면 직접 사발을 열어야한다.

그럼 저는 어쩔 수 없이 하()에 걸어야겠네요.”

부운은 양손으로 탁자를 잡으며 태연하게 웃었다.

(저 녀석이 어째 너무 태연한 걸? 제 놈도 주사위의 합이 팔()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조노인은 찜찜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며 사발을 뒤집었다.

부운의 청력도 조노인 자신에게 못지않다.

당연히 주사위의 점들이 삼()과 오()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태연자약 하는 외손자의 태도가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게 한다.

달칵!

사발이 작은 소리를 내며 젖혀졌다.

그러자 드러난 주사위들의 윗면에는 세 개와 두 개의 점이 있었다.

허어...”

조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흘렸다.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섯 개의 점이 찍혀 있어야할 주사위에 두 개의 점만이 찍혀있다.

아싸! 이제야 제대로 된 무공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부운이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했다.

무얼 익힐까? 누구라도 잡아 족칠 수 있다는 금룡신나수? 백 걸음 밖에서도 바위를 박살낼 수 있다는 백보신권?”

부운은 드디어 제대로 된 무공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입이 귀에 걸렸다.

두 가지 다 배우고 싶지 않으냐?”

조노인은 좋아 죽으려는 손자를 지긋이 보며 말했다.

둘 다 가르쳐주시게요?”

부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대신 어떻게 오()를 이()로 바꿨는지 실토해라.”

, 그건 나만의 영업비밀인데...“

외조부의 제안을 들은 부운은 짐짓 난감한 척 했다.

조노인이 시큰둥하게 말했다.

싫으면 관두고... 대신 네 녀석과는 두 번 다시 내기 하지 않을 게다.”

금룡신나수와 백보신권을 모두 배울 수 있는 기회는 한번 뿐이라는 얘기다.

어쩔 수 없네요.”

부운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이 비밀만은 숨기고 싶었는데....”

말하던 부운은 입을 다물었다. 외조부의 시선이 자신이 아니라 가게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운오빠!”

외조부의 시선을 따라 돌아보던 부운의 귀에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큰일... 큰일 났어 오빠!”

물건이 가득 쌓인 가게를 지나 놀란 토끼처럼 응접실로 뛰어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철두와 정칠이란 악동들이 망산쌍독에게 잡혀가는 걸 보고 있던 그 소녀였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이냐 분()이야?”

부운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분이라는 소녀는 근처에서 주점을 하는 과부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한 살 많은 부운을 오빠처럼 따랐다.

가면서... 가면서 얘기할게! 빨리 나하고 같이 가!”

와락 달려든 분이가 부운의 팔을 잡으며 할딱거렸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그러다가 뒤늦게 조노인을 돌아보며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참 빨리도 아는 척 하는구먼. 네 녀석 눈에는 그저 부운이만 보이겠지?”

조노인이 혀를 찼다.

죄송해요. 정신이 없어서...”

얼굴이 발그레해진 분이는 부운을 가게쪽으로 끌고 갔다..

급한 일이 생겼어요. 부운오빠 좀 빌려갈게요.”

오냐! 잘 쓰고 돌려주려무나.”

조노인은 가보라고 손짓하며 웃었다.

내가 물건이냐? 빌려가게?”

분이에게 끌려가며 부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큰일 났다는 게 무슨 소리냐?”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험상궂은 사람들에게 끌려갔어.”

분이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

부운의 고요하던 눈에 번뜩 빛이 스쳐지나갔다.

탁자 위의 주사위를 챙기던 조노인도 힐끔 돌아보았다.

구하러 가는 게 늦으면 철두오빠와 정칠 오빠가 죽을 지도 몰라.”

분이가 울먹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다녀오겠습니다.”

부운은 골동품들 사이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하나 집어들며 외조부에게 말했다.

오냐! 무슨 소동인지는 모르겠다만 조심하거라.”

조노인은 당부를 흘려들으며 부운은 서둘러 가게 밖으로 달려나갔다.

분이도 울먹이며 다람쥐처럼 부운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골목대장 노릇도 쉽지가 않구먼. 똘마니들의 말썽이 끊이질 않으니...”

조노인이 고개를 설레 저을 때였다.

<아버님!>

덜컹!

누군가 안채에서 문을 열고 나오며 조노인에게 말을 건넸다.

육성(肉聲)이 아니라 내공을 이용하여 뜻을 전하는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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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산쌍독(邙山雙毒)

 

 

 

금릉(金陵)은 강남(江南), 아니 중원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다.

모든 게 풍족한 만큼 금릉 거리는 늘 사람으로 북적인다.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은 잘 차려입었는데 특히 여자들의 차림새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형형색색의 비단 옷을 한껏 차려입은 채 살랑거리는 여자들의 자태는 만발한 꽃밭의 나비 같다.

여기가 극락인가?”

캬아! 살 냄새, 지분 냄새에 취하겠구만.”

인파 속에서 정신을 못 차리는 사내 둘이 있었다.

차림새는 허름하고 봉두난발에 수염이 덥수룩한 자들로 각기 지팡이와 쇠 퉁소를 들고 있다.

산적이나 땅꾼 분위기인 두 사내는 얼굴이 판박이다. 형제 아니면 쌍둥이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명()나라의 도읍이었던 금릉에는 발에 차이는 게 경국지색이라는 소문이 사실이었어. 세 걸음에 한번 이상씩 눈 돌아가게 만드는 년이 보이니 말이야.”

둥그스름한 윗부분을 천으로 감싼 지팡이를 든 자는 오가는 여자들을 벌개진 눈으로 훑어대었다.

정신 차려 임마!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촌구석에서 처음 대처(大處)에 나온 티가 너무 나잖아

다른 놈이 시커먼 쇠 퉁소로 동료의 어깨를 치며 눈을 흘겼다.

주변의 여자들은 두 사람을 피해가며 키득거리고 있다.

쪽 좀 팔리면 어떠냐? 대신 눈이 호강하는데... 아흐 저 여시 같은 것... 보는 눈만 없었으면 방탱이를 그냥 콱...”

지팡이를 든 자는 삼복의 개처럼 헐떡거리며 여자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하여간 밝히기는...”

쇠 퉁소를 든 자 역시 짐짓 혀를 차면서도 여자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사내들의 별호는 망산쌍독(邙山雙毒)이다,

구괴(具拐)와 구적(具笛)이 이름인 그들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이며 한 문파의 공동문주다.

북망산(北邙山)에 자리한 독묘파(毒墓派)는 용독술과 독공 방면에서는 열 손가락 안에 든다.

독을 쓰는 재주뿐 아니라 뱀이나 지네등의 독충(毒蟲)들도 잘 다뤄서 구대문파라 해도 독묘파를 꺼려할 정도다.

아비로부터 독묘파를 물려받은 구괴와 구적은 북망산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러다가 건드려서는 안되는 어떤 인물에게 죄를 짓고 본거지인 북망산을 도망쳐 나왔다.

마침 그 얼마 전 금릉의 어떤 유력자로부터 초빙을 받은 적이 있었다.

망산쌍독이 북망산에서 수천리나 떨어진 금릉에 나타난 사연이다.

 

오늘 밤이 기대가 되는구만. 듣자하니 한왕(漢王) 주고후(朱高煦)가 손님 대접 하나는 화끈하다고 하니...”

구괴는 입맛을 다시며 여자들의 아래 위를 훑어대었다.

그렇긴 하다만... 한왕의 초청에 응한 게 과연 잘한 짓인지는 아직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생각 없는 구괴와 달리 구적은 오만상을 썼다.

? 찜찜한 기분이라도 드는 거냐?”

여자 구경하기 바쁜 구괴가 건성으로 물었다.

황실과 엮였던 무림인 치고 끝이 좋았던 사례는 없잖냐. 대우와 제안이 파격적이어서 한왕의 초청에 응하긴 했다만... 반드시 뒤탈이 생길 것같은 예감이 든다.”

걱정도 팔자다. 적당히 챙길 거 챙기고 아니다 싶으면 튀면 되지.”

나도 지팡이 너처럼 근심 없고 생각 없으면 좋겠다. 하물며 우린 지금 악독하기로는 천하제일인 서(西) 늙은이에게 쫓기고 있는 중인데...”

구적이 쇠 퉁소로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쉴 때였다.

거기 서지 못해?”

누군가의 성난 외침이 들렸다.

내 사과 내놔라 이놈들아!”

구괴와 구적이 돌아보니 작달막한 노인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 지팡이를 마구 휘두르는 노인 앞쪽에는 두 명의 소년이 여러 개의 사과를 품에 안은 채 뜀박질을 하고 있다.

히히덕거리며 달려오는 두 놈 중 한명은 덩치가 어른만하다.

다른 한 놈은 날렵한 체구에 족제비처럼 눈이 반짝인다.

비켜요!”

지나갑시다!”

두 놈이 뻔뻔하게 외치며 달려오자 사람들은 눈을 흘기면서도 급히 피했다.

뒷골목의 악동들인 모양이로군.”

한창 좋을 때지. 먹고 노는 것 외에는 근심 걱정도 없을 테니...”

자기들 쪽으로 달려오는 소년들을 보며 구적과 구괴는 히죽거렸다. 온갖 못된 짓을 하며 자란 자신들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거기 아저씨들, 비켜주세요!”

족제비처럼 생긴 소년이 구적과 구괴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하지만 구적과 구괴는 히죽거리기만 할뿐 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이쿠!”

... 뭐야 씨*!”

구적과 구괴에게 부딪힌 소년들은 욕설을 내뱉으며 나뒹굴었다.

그 바람에 소년들이 품에 안고 있던 사과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못된 놈들 좀 잡아주쇼! 오늘 제대로 매타작을 해야겠소!”

사람들 틈에서 노인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 튀자!”

히익!”

소년들은 급히 일어나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소년들은 구적과 구괴 형제의 손아귀에 멱살이 틀어잡혀 번쩍 쳐들렸다.

구적에게 멱살이 잡힌 덩치 큰 놈은 키가 구적보다도 크다.

구괴에게 쳐들린 족제비같은 놈의 두 발은 허공에서 바둥거렸다.

... 젠장! 이거 놓지 못해?”

끄윽! ... . 이래요?”

소년들은 숨이 콱 막혀 비명을 질렀다. 멱살을 틀어쥔 구적과 구괴의 손아귀가 강철 같아서 빠져나가는 건 꿈도 꿀 수가 없다.

갈 때 가더라도 어르신들 물건은 돌려줘야하지 않겠냐?”

쇠 퉁소를 허리춤에 꽂은 구적이 덩치 큰 놈의 품속을 뒤졌다.

다시 빼낸 구적의 손에는 묵직한 돈주머니가 들려있었다.

구괴도 지팡이를 겨드랑이에 낀 채 족제비같은 놈의 품을 뒤지고 있다.

어라! 내 전낭(錢囊)이 어째서 네놈 품에서 나오는 걸까?”

구적이 돈주머니를 덩치 큰 놈의 얼굴에 들이밀며 웃었다.

신기하네. 내 전낭도 이놈 품으로 옮겨갔구만.”

구괴 역시 족제비같은 놈의 품에서 돈 주머니를 꺼내며 웃었다.

뭐야 저놈들? 소매치기들이었잖아.”

허튼 짓 하다가 딱 걸렸구만.”

주변 사람들이 그제야 상황 알아차리고 혀를 찼다.

두 소년은 피할 수 있었는데도 구적과 구괴 형제와 부딪혔다. 그리고는 귀신같은 솜씨로 두 형제의 돈 주머니를 빼낸 것이다.

... 잘 하셨소 어르신들! 그놈들은 근방에서 아주 악명 높은 말썽장이들이오.”

노인이 헐떡이며 도착했다.

도둑질에 소매치기에...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놈들이니 눈물을 쏙 빼주시구려. 어이구 내 사과... 다 곯아 터졌어.”

노인은 울상이 되어 사과들을 옷자락에 주어 담았다.

걱정 마시오 노인장. 이놈들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도둑질을 못하게 만들어놓을 테니...”

덩치 큰 놈의 멱살을 틀어잡은 구적이 길가의 골목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흐흐흐! 오랜만에 좋은 일을 하게 되었군.”

구괴도 족제비처럼 생긴 놈을 질질 끌고 구적을 따라갔다.

철두(鐵頭)하고 정칠(鄭七)이 놈, 시장통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말썽을 부리더니 임자 제대로 만났군.”

저놈들은 좀 혼이 나야 돼!”

망산쌍독에게 멱살을 잡힌 채 골목으로 끌려들어가는 소년들을 보며 사람들을 고소해했다.

덩치 큰 놈의 이름이 철두고 족제비같이 생긴 놈이 정칠이었다.

두 놈은 워낙 악명 높은 말썽쟁이들이라 망산쌍독에게 끌려가는 걸 보면서도 도우려는 사람은 없었다.

도울 생각을 커녕 고소해하는 사람들 틈에서 울상을 짓는 소녀가 있었다.

차림새는 초라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긴 열다섯 살쯤 된 소녀였다.

(... 큰일이야. 한눈에 봐도 저자들은 살인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다는 무림인들이야.)

철두와 정칠을 골목으로 끌고 들어가는 망산쌍독을 보며 소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서둘러야해! 자칫하다가는 철두오빠와 정칠오빠가 죽거나 다치는 수가 있어.)

울상이 된 소녀는 사람들을 헤집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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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 무협소설을 써온 와룡강입니다. 다음 카페(http://cafe.daum.net/waryonggang)에 홈페이지 겸 팬 카페가 있습니다. 와룡강의 집필 내역을 더 알기 원하시면 방문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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